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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성씨 연원(최)

영천 최씨(永川崔氏)의 연원

by 연송 김환수 2014. 7. 25.

영천 최씨(永川崔氏)의 연원

영천 최씨(永川崔氏) 시조 최한(崔漢)은 고려 중엽 행예부판 소감으로 후에 영의정(領議政)에 증직(贈職)된 최식(崔寔)의 둘째 아들이다. 경주 최씨(慶州崔氏)에서 분적(分籍)한 전주 최씨(全州崔氏) 시조(始祖) 최균(崔均)의 9세손으로 전하는 최식(崔寔)은 큰 아들 연(衍)이 월성부원군(月城府院君ㆍ경주), 둘째 한(漢)은 연산부원군(燃山府院君ㆍ영천), 셋째 호(湖)는 곡강부원군(曲江府院君ㆍ흥해), 넷째 익(瀷)은 호산부원군(湖山府院君ㆍ순천)으로 각각 분적(分籍)하여 시조가 됐다.

영천 최씨 병사공파(兵使公派) 세보(永川崔氏世譜)

최한(崔漢)은 고려 때 예종(睿宗)과 명종(明宗) 양대(代)에 걸쳐 벼슬을 하면서 공을 세워 연산부원군(燃山府院君ㆍ연산은 지금의 영천)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그들 시조(始祖)로 하고 관향(貫鄕)을 영천(永川)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영천 최씨는 고려시대의 대문벌로서 시조 최한(崔漢)으로부터 10대(代) 안에 대를 이어 15∼16명의 정승과 판서를 배출하였으며, 역대 인물로는 시조 최한(崔漢)의 아들 완(玩)이 문과에 장원하여 상찰사(上察使)를 지내고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증직되었으며, 그의 동생 집(王集)은 좌정승(左政丞)을 지냈다. 완(玩)의 아들 상례(尙禮)는 절도사(節度使)를, 증손 윤기(允琪)는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했다.

▲ (右)우왕 6년(1380년) 8월 최무선(崔茂宣) 등이 우진포(于鎭浦)에서 왜구를 격퇴했다는 ‘고려사(高麗史)’ 134권 열전 47의 기록. (左)우왕 3년(1377년) 10월 최무선의 말에 따라 화통도감(火桶都監)을 설치했다는 ‘고려사’ 133권 열전 46의 기록.

 

무선(茂宣ㆍ1325∼1395)은 시조 최한(崔漢)의 둘째 아들인 집(王集)의 5대손이자 광흥창사(廣興倉使) 동순(東洵)의 아들로 우리 나라에서 화약과 화약을 이용한 무기를 처음 제작, 사용하였다. 무관인 그는 고려 말기에 한창 기승을 부리던 왜구의 노략질을 막기 위해 화약과 총을 만들기로 결심하고 연구에 임하였다. 그 결과, 화약을 만드는 세 가지 재료, 즉 초석(硝石·焰硝)ㆍ유황(硫黃)ㆍ분탄(粉炭ㆍ숯가루) 중에서 유황과 분탄은 쉽게 구할 수 있으나 초석을 만드는 것이 가장 어렵고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래서 화약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는 중국에서 배우기로 하고, 중국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무역항 벽란도(碧瀾渡)에 가서 중국으로부터 오는 상객들 중에서 초석의 제조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을 찾았다. 그러던 중 중국의 강남지방에서 온 이원(李元)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후하게 대접하는 등 지극한 정성과 화약을 만들어 국가를 살리겠다는 집념으로 이원(李元)을 감동시켜 초석을 흙에서 추출(抽出)하는 방법을 배우고, 드디어 화약을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

간단한 화약을 이용한 무기, 즉 화전(火箭) 등을 만들어 실험해 본 그는 마침내 자신을 얻어 화약과 각종 화약을 이용한 무기를 연구하고 만들 화통도감(火筒都監)의 설치를 몇 번에 걸쳐 건의하였다. 그리고는 끝내 허락받아 우리 나라에서 화약과 화약무기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1377년 10월부터 시작하였다. 화통도감(火筒都監)에서 제조된 각종 화기들은 모두 18가지로, 이 중에서 총포의 종류는 대장군(大將軍)ㆍ이장군(二將軍)ㆍ삼장군(三將軍)ㆍ육화석포(六火石砲·완구의 일종)ㆍ화포(火砲)ㆍ신포(信砲)ㆍ화통(火筒) 등이며, 화전(火箭)ㆍ철령전(鐵翎箭)ㆍ피령전(皮翎箭) 등은 발사물, 그 밖에 질려포(疾藜砲)ㆍ철탄자(鐵彈子)ㆍ천산오룡전(穿山五龍箭)ㆍ유화(流火)ㆍ촉천화(觸天火)와 로켓무기로 주화(走火)가 있다.

▲ 영성부원군(永城府院君) 최무선(崔茂宣)이 태어나 자란 영천시 금호읍 원기리 마단마을에 세워진 작은 표석.

 

 

우왕 6년(1380년)에 왜구가 500여 척의 선박을 이끌고 금강 하구의 진포(鎭浦)로 쳐들어왔을 때 부원수(副元帥)로서 원수(元帥) 나세(羅世)와 함께 각종 화기로 무장한 전함을 이끌고 나아가 싸워 격파시키는 큰 공을 세워 영성군(永城君)에 봉해졌다. 1383년 왜구는 120척의 선단을 이끌고 남해 관음포(觀音浦)에 다시 침입하였는데, 이 해전에서도 그가 참전하여 선봉에 선 적선 20척 중 17척을 화포로 궤멸시켰다. 2번의 해전으로 자신감을 얻은 고려는 대마도(對馬島)를 정벌하였고 이로 인해 왜구의 침공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그는 고려에서는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라는 벼슬까지 올랐으며, 창왕 1년(1389년) 화통도감(火筒都監)이 철폐되자 집에서 ‘화약수련법(火藥修鍊法)’ㆍ‘화포법(火砲法)’을 저술하였다. 1392년 조선이 개국하자 태종(太宗)은 그의 공을 인정하여 정헌대부(正憲大夫)ㆍ검교문하부참찬사 겸 군기시판사(檢校門下府參贊事兼軍器寺判事)라는 벼슬을 하사했으며, 죽은 후에도 그의 공을 생각하여 의정부 우정승(議政府右政丞)이 추증되고 영성부원군(永城府院君)에 추봉되었다.


▲ (上)최무선(崔茂宣) 장군이 각종 화기로 왜구 병선 500여 척을 격파한 진포대첩의 장소인 전북 군산시 미룡동에 세워진 진포대첩비. (下)경북 영천시 공설운동장에 세워진 최무선 장군 추모비

 

 

무선(茂宣)의 아들 해산(海山ㆍ1380∼1443)과 손자 공손(功孫)도 화약과 화기 연구에 참여하였는데, 해산(海山)은 15세 때에야 글자를 해독하게 되었으나 아버지의 유고(遺稿)인 ‘화약수련법(火藥修鍊法)’ㆍ‘화포법(火砲法)’을 통해 그 비법을 전수받았다. 태종 1년(1401년) 군기사(軍器寺)에 등용되어 주부(注簿)를 거쳐 경기우도 병선군기점고별감(京畿右道兵船軍器點考別監)이 되었다. 태종 9년(1409년) 군기감승(軍器監丞) 및 군기소감(軍器少監)에 오르고, 그 해 10월에는 육상화차를 만들어 왕이 임석한 가운데 경복궁 후원인 해온정(解溫亭)에서 발사시험을 하였다. 태종 15년(1415년) 좌군절제사(左軍節制使)로 파저강(婆猪江ㆍ압록강 중류지대) 야인정벌 때 군기를 누설했다 하여 파직되었다가 복직되어 세종(世宗) 초에 대호군(大護軍)에 올라 세종 7년(1425년) 군기감사(軍器監事), 세종 13년(1431년) 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ㆍ우참찬(右參贊)을 거쳐 세종 18년(1436년)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를 지냈다. 그는 여러 관직에 재임 중 화차(火車)ㆍ완구(碗口)ㆍ발화(發火)ㆍ신포(信砲) 등 신화기(新火器)를 창제하여 화약과 화기의 발전에 공헌했으며, 수레에 화기를 장착한 병기인 화차를 개발하였다.

▲ 천곡(泉谷) 최원도(崔元道)와 둔촌(遁村) 이집(李集)의 일화가 전해오는 광주 이씨(廣州李氏) 시조 이당(李唐)의 묘(中)와 최원도의 어머니 영천 이씨의 묘(右).

 

 

8세 원도(元道)는 자는 백상(伯常), 호는 천곡(泉谷), 정헌대부 판전의사사(正憲大夫判典醫寺事) 유진(有珍)의 아들로 고려 때 목은(牧隱)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사간원 간의대부(司諫院諫議大夫)로 언로(言路)의 중책을 맡고 있었으나 공민왕이 정사(政事)를 신돈(辛旽)에게 맡겨 온갖 악정(惡政)이 자행됨을 보고 여러 번 직간하였으나 불청함으로 신변의 위험을 느껴 낙향하여 고향인 영천 땅 나현(蘿峴)으로 내려와 은거하며 지냈다. 은거 3년 후인 1368년에 과거(科擧) 동년생(同年生)으로 절친한 둔촌(遁村) 이집(李集)이 신돈(辛旽)의 전횡과 행패를 비판하여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됨으로써 아버지 이당(李唐)을 업고 고향인 개성에서 영천 땅에 우거(寓居)하는 그를 찾아 피신해 왔다.

▲ 월곡(月谷) 최흥효(崔興孝) 유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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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도(元道)는 멸문(滅門)의 화(禍)를 무릅쓰고 3년의 피신생활을 도왔으며, 비밀탄로를 막고자 부인은 벙어리가 되고 여종은 자진(自盡)하였다. 그 이듬해에는 둔촌(遁村)이 친상(親喪)을 당하자 그는 자신의 수의(壽衣)를 내어다가 예(禮)에 어긋남이 없이 빈염(殯斂)을 하고 한밤중 비밀리에 선영 아래 자기 묘자리에다 장사를 지냈는데, 영천의 나현(蘿峴)에 있는 광주 이씨(廣州李氏) 시조의 묘가 바로 그 묘이다. 둔촌(遁村)은 그 후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독서로 세월을 보냈으며, 원도(元道)도 조선조에서 대사간(大司諫)으로 세 번이나 불렀으나 고려 유신임을 핑계로 끝내 나아가지 않았고 시서(詩書)로 여생을 보내다가 끝내 종적을 감추었다고 한다.

원도(元道)의 둘째 아들 일(壹)은 재종숙(再從叔)인 흡(洽)에게 출계(出系)되었으며, 영덕군사(盈德郡事ㆍ영덕군수)ㆍ군기시사(軍器寺事) 등을 역임하였다. 양부(養父) 흡(洽)은 성주 이씨(星州李氏) 시조인 농서군공 이장경(李長庚)의 외손(外孫)이라 처음으로 성주(星州)에 천거(遷居)하였다.

일(壹)의 아들 흥효(興孝)는 자는 백원(百源), 호는 월곡(月谷)으로 태종 11년(1411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였고, 1414년 승문원 교리(承文院敎理)로 있을 때 진산부원군(晋山府院君) 하륜(河崙)의 비위에 거슬려 파직당하였다. 이후 재등용되었으나 세종 2년(1420년) 인녕부판관(仁寧府判官)에서 또다시 삭직되었다. 이듬해 우헌납(右獻納)으로 복직되고 이어 예문관 직제학(藝文館 直提學)을 지냈다. 조선 초기 서예가 중에서 뛰어난 인물로 예서(隸書)와 조맹부체(趙孟?體)의 초서를 잘 썼다고 한다.
조신(曺伸)의 ‘소문쇄록(?
聞鎖錄)’에 “최흥효의 초서와 안평대군의 행서가 일세에 성행되었다.” 하였고, ‘중종실록(中宗實錄)’ 권83에서도 우리나라의 조맹부체로 안평대군(安平大君)과 함께 최흥효(崔興孝)ㆍ박경(朴耕)을 대표로 든 것을 보면 그의 명성을 알 수 있다. 또한 ‘세종실록(世宗實錄)’ 권33에도 태종(太宗)이 죽자 선왕의 명복을 위하여 유계문(柳季聞)ㆍ안지(安止)ㆍ최흥효(崔興孝)에게 ‘금자법화경(金字法華經)’을 쓰게 하였다 한다. 금석으로 강릉의 ‘최참판치운비(崔參判致雲碑)’가 있으며, ‘근묵(槿墨)’ 등에 그의 전적이 약간 전한다.

▲ 난포((蘭圃) 최철견(崔鐵堅)이 1546년에 건립한 난포고택(蘭圃古宅ㆍ경북유형문화재 제80호)과 유묵.

 

 

철견(鐵堅)은 시조 최한(崔漢)의 14세손으로 호는 난포((蘭圃)이며, 학행이 뛰어나 경주부윤(慶州府尹)의 천거(薦擧)로 청주목사(淸州牧使)와 전라도사(全羅都事)를 지냈다. 임진왜란 당시 70 고령인데도 창의하여 대장이 되고 손자인 인수(仁壽), 증손인 준립(竣立)과 함께 향리(鄕里) 경산(慶山)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영천(永川)의 권응수(權應銖)와 합류하여 영천ㆍ경주 등지에서 왜적과 싸웠고 특히 아화산성(阿火山城) 싸움에서 큰 공을 세웠다. 경북 경산시 용성면 곡란리(谷蘭里)에 있는 ‘난포고택(蘭圃古宅)’은 조선시대의 고가로 명종 1년(1546년)에 지었으며, 경북유형문화재 제80호로 지정되었다.

▲ 임진왜란 당시 성재(省齋) 최문병(崔文炳)이 의병장이 되어 왜적을 물리칠 때 사용했던 말안장(보물 제747호).

 

 

문병(文炳ㆍ1557∼1599)은 자는 일장(日章), 호는 성재(省齋)로 경산시 자인면에 살면서 학문에 힘쓰다가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향리에서 수천 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대장(大將)이 되어 천장산(天丈山)에서 적의 침입을 격퇴하였으며, 다시 청도의 의병장 박경전(朴慶傳)과 합세하여 두곡(杜谷)ㆍ선암(仙巖)ㆍ가지현(佳旨縣) 등에서 적을 무찔렀다. 이어 권응수(權應銖)와 합세하여 영천(永川)에서 적을 화공(火攻)으로 섬멸하여 감목관(監牧官)을 역임했으며, 후에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에 추증되었다. 경산 자인의 용계서원(龍溪書院)에 제향되었으며, 경산시 자인면 원당리에는 보물 제747호인 ‘최문병 의병장 안장’이 소장되어 있다. 이 안장은 보존상태가 양호한 희귀한 마구로서 등자ㆍ배띠ㆍ고들개 등 부속구들을 모두 갖추었다.

▲ 경북 경산시 용성면 용전동에 자리한 성재(省齋) 최문병(崔文炳)의 묘와 위패를 봉안한 경산시 자인면 원당리 용계서원.

 

 

기남(起南)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義兵將) 활동으로 공신록1등에 책정되어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올랐으며, 종제(從弟)이며 13세 응사(應泗ㆍ1520∼1612)의 셋째 아들인 벽남(擘南) 역시 임진왜란 때 기남(起南)과 함께 의병장(義兵將) 활동으로 유공(有功)하여 병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兵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에 올랐다. 조카 율도 숙부(叔父) 벽남(擘南)과 함께 전쟁에 참전하여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올라 한 집안에 의병3참판(義兵三參判)이 났다.

항경(恒慶ㆍ1560~1638)은 자는 덕구(德久), 호는 죽헌(竹軒)으로 진사(進士)를 지낸 정(淨)의 아들이다. 16세인 1575년 아버지가 성묘차 서울에서 성주에 남하(南下)하였다가 성주에서 병을 얻어 객졸(客卒)하니 사우지분(師友之分)인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도움을 받고 3년 시묘를 마친 후 “벼슬을 원치 않는다면 서울로 돌아 갈 것이 아니라 도학이 높은 한강(寒岡) 선생을 사사함이 어떠냐”는 어머니의 권유로 낙향을 결심하고 선영(先塋)에서 가까운 성주군 수륜면 남은리에 낙향하였다. 이는 8세 흡(洽)의 성주 천거 이후 두 번째의 성주 천거로 법산(法山)에 집성촌을 이루어 430여 년 동안 정착하는 시발이 되었다. 후일 법산(法山)은 소위 법산 최씨(法山崔氏) 마을로도 일컬어지게 된다.

▲ 경북 고령군 다산면 나정2리에 자리한 죽헌(竹軒) 최항경(崔恒慶)의 묘와 신도비.

 

 

항경(恒慶)은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1605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나 벼슬길에 뜻을 끊고 오암정사(鰲巖精舍)를 지어 경사(經史)와 예설(禮說)을 궁구하였다. 항경(恒慶)은 후일 강문향오현(岡門鄕五賢)의 한 사람으로 칭송되었으며, 그의 학행덕망을 높이 평가하여 한강(寒岡) 정구(鄭逑)와 동문들은 그를 ‘수하장(水下丈)’이라 불렀으며 도덕군자(道德君子)라 하였다. ‘수하(水下)’란 항경(恒慶)의 오암정사(鰲巖精舍)가 정구(鄭逑)의 회연서원(檜淵書院)보다 대가천 하류쪽에 자리잡고 있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또한 한강(寒岡) 정구(鄭逑)는 사림(士林)에 큰 의논이 있으면 반드시 수하장(水下丈) 항경(恒慶)과 의논하라고 하였다. 1620년 한강(寒岡) 선생이 졸(卒)하자 두 아들과 함께 친히 염빈(殮殯)하여 친상(親喪)을 당한 것 같이 하였고, 1,000명의 많은 유림들이 한강(寒岡) 선생을 회연서원(檜淵書院)에 봉향하기로 의논할 때 항경(恒慶)을 초대 원장으로 추대하였다. 그후 항경(恒慶)은 스승인 한강(寒岡) 선생의 추모사업에 진력하여 ‘오선생예설(五先生禮說)’을 백매원(百梅園)에서 교정하고, 문집을 간행하는 한편 신도비(神道碑) 건립 등 유업에 성의를 극진히 하였다.

▲ 최항경(崔恒慶)과 두 아들을 함께 배향한 경북 성주군 수륜면 남은리 법산마을의 오암서원(鰲巖書院).

영천 최씨는 14세 최상(崔祥)과 최유(崔裕)를 파조로 하여 참의공파(參議公派)와 참봉공파(參奉公派)로 나뉜다. 참봉공파는 후대에 몇 개의 파로 세분된다. 항경(恒慶)의 장자(長子)로 한성좌윤(漢城左尹)을 지낸 은의 네 아들은 모두 파조로 분파(分派)된다. 장남(長男) 진형(震衡)은 가선대부 한성부좌윤(嘉善大夫漢城府左尹)에 증직(贈職)되어 그 후손들은 좌윤공파(左尹公派), 차자(次子) 진화(震華)는 월주공파(月洲公派), 삼자(三子) 진태(震泰)는 아들 위(瑋)의 관직(官職)에 따라 방어사공파(防禦使公派), 사자(四子) 진중(震中)은 참판공파(參判公派)로 분파되었다. 그리고 항경(恒慶)의 차자(次子)인 매와(梅窩) 인의 후손들은 이후 매와공파(梅窩公派)로 분파되었다.



그 외 조선 때 학자(學者) 서림(瑞林)은 호는 관곡(寬谷)으로 학문과 행의(行儀)가 훌륭하여 학행(學行)으로 참봉(參奉)에 기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