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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성씨 연원(최)

삭녕 최씨(朔寧崔氏)의 연원

by 연송 김환수 2014. 7. 25.

삭녕 최씨(朔寧崔氏)의 연원
 

삭녕(朔寧)은 경기도 연천군(漣川郡)과 강원도 철원군(鐵原郡) 일부 지역을 차지했던 지명으로, 원래 고구려 소읍두현(所邑豆縣)인데 통일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삭읍(朔邑)으로 고쳤고, 고려 현종 9년(1018년)에는 동주(東州ㆍ鐵原)에 속했으며, 예종 1년(1106년)에 승령현(僧嶺縣) 감무(監務)를 겸하여 삭령(朔寧)으로 고쳤다. 조선 태종 때 지군사(知郡事)로 승격하였고, 태종 14년(1414년)에 안협현(安峽縣)을 합쳐서 다시 안삭군(安朔郡)이 되었다. 1416년 안협현을 다시 설치하여 삭령현이 되고, 고종 32년(1895년)에 군으로 승격하여 삭령군(朔寧郡)이 되었다. 1914년 일제에 의해 군이 폐지되어 내문면(內文面)ㆍ인목면(寅目面)ㆍ마장면(馬場面)은 강원도 철원군(鐵原郡)에 속하고, 나머지는 연천군(漣川郡)에 병합되었다.

▲ 최유가(崔瑜賈)가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역임하였다는 ‘고려사(高麗史)’ 20권 세가 20권 명종 24년(1194년) 9월 7일 기록과 국자감 대사성(國子監大司成)ㆍ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로 임명되었다는 명종 20년(1190년) 12월 28일 기록.

삭녕 최씨(朔寧崔氏) 시조(始祖)는 고려 중엽 때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지낸 최천로(崔天老)로 그의 선계(先系)는 문헌이 실전되어 알 수 없으며, ‘신유보(辛酉譜)’ 세록편(世錄篇)에는 시조 최천로와 최유가(崔瑜賈ㆍ兪嘉)를 이어 실었다. ‘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최유가(崔瑜賈)는 고려 제19대 명종 20년(1190년) 국자감 대사성(國子監大司成)ㆍ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를 거쳐 명종 24년(1194년) 참지정사(參知政事ㆍ종2품)를 역임하고, 이어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지내고 삭녕(朔寧)에 세거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모두 원조(遠祖)로서 중간 세계가 전해지지 않고 친어모군낭장(親禦侮軍郎將) 선보(善甫)와 함경전부사(含慶殿副使) 연(?)을 각기 낭장공계파(郎將公系派)와 부사공계파(副使公系派)의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으며, 조상들이 삭녕(朔寧)의 괴음촌(槐陰村)을 평장동(平章洞)으로 개칭하여 세거하였으므로 후손들이 삭녕(朔寧)을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의정 2명, 대제학 1명, 문과 급제자 32명을 배출했다.

▲ 시조 최천로(天老)와 중시조 최유가(崔瑜賈)를 제향하기 위해 부사공계파(副使公系派)에서 주관하여 건립한 경남 진주시 상대동 숭인사(崇仁祠).

최천로(崔天老)와 최유가(崔瑜賈) 때부터 대대로 세거해 온 구기(舊基)가 옛 삭녕(寧郡) 북방 40여 리에 위치한 마장면(馬場面) 대전리(大田里) 괴음촌(槐陰村)에 임좌(壬坐)로 전해 왔으며, 괴음촌(槐陰村) 구기(舊基) 앞에는 후손 문정공(文靖公) 항(恒)이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두 사람을 숭모(崇慕)하기 위해 세운 흥화정(興化亭)이 있었다고 전해오고 있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로는 낭장(郎將) 선보(善甫)의 아들 충(忠)이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고, 충(忠)의 아들 윤문(潤文)은 호조전리를 역임하고 우찬성(右贊成)에 추증되고, 윤문(潤文)의 셋째 아들 사유(士柔)는 태종(太宗) 2년(1402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역임한 후 세종 14년(1432년) 좌헌납(左獻納)을 거쳐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가 되었다. 후에 노인직(老人職)으로 지승문원사(知承文院事)에 올랐다가 은퇴하였고,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다.

 

 


▲ 문정공(文靖公) 최항(崔恒)의 유묵.

 

사유(士柔)의 아들 항(恒ㆍ1409~1474)은 삭녕 최씨 가문을 명문의 반석(盤石) 위에 올려 놓은 대표적인 인물이다. 자는 정부(貞夫), 호는 태허정(太虛亭)으로 세종 16년(1434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조선 초기 훈구파(勳舊派)의 대학자로서 세조(世祖)를 도와 문물제도 정비에 큰 역할을 했다. 호당(湖堂)에 녹선된 그는 집현전 부수찬(集賢殿副修撰)으로 있을 때 정인지(鄭麟趾)ㆍ박팽년(朴彭年) 등과 함께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에 참여했으며, 세종 26년(1444년) 집현전 교리(校理)로 오례(五禮)를 찬진했고, 집현전 응교(應敎)로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창제에도 참여했다. 이어 ‘동국정운(東國正韻)’ㆍ‘훈민정음해례(訓民正音解例)’ㆍ‘용비어천가보수(龍飛御天歌補修)’ 등을 찬진했다. 역사, 언어, 문장에 능통하여 당대의 팔문장(八文章)의 한 사람으로 명나라에 보내는 표전문(表箋文)은 거의 그가 담당하여 썼다.

또한 항(恒)은 수양대군(首陽大君)을 도와 계유정난(癸酉靖難)에 공을 세워 정난일등공신(靖難一等功臣)으로 책록되어 도승지(都承旨)에 올랐고, 세조 4년(1458년) 형조판서(刑曹判書)ㆍ공조판서(工曹判書)ㆍ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ㆍ이조판서(吏曹判書) 등을 역임했으며, 우의정(右議政) 및 좌의정(左議政)을 거쳐 두 차례나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 시호는 문정(文靖).

근면 성실하고 겸손을 바탕으로 한 그의 성품으로 40년 동안 벼슬길에 있으면서 한번도 탄핵을 받거나 외직(外職)으로 물러난 적이 없었으며, ‘경국대전(經國大典)’ㆍ‘동국통감(東國通鑑)’ㆍ‘고려사(高麗史)’ㆍ‘세종실록(世宗實錄)’ㆍ‘문종실록(文宗實錄)’ㆍ‘세조실록(世祖實錄)’ㆍ‘예종실록(睿宗實錄)’ 등을 편찬하는데 그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데가 없었다. 저서로는 ‘태허정집(太虛亭集)’ㆍ‘관음현상기(觀音現相記)’를 남겼다.

▲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도마리에 자리한 문정공(文靖公) 최항(崔恒)의 묘(경기도기념물 제33호)와
재실인 영모재(永慕齋).

광해군(光海君) 때 어우당(於于堂) 류몽인(柳夢寅)이 지은 ‘어우야담(於于野談)’에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항(恒)이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장원급제 할 무렵 세종(世宗)이 꿈을 꾸었다. 꿈 속에 한 마리의 큰 용(龍)이 성균관 서편 잣나무에 서리고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깨어나 사람을 시켜 가보게 했더니 한 선비가 그 잣나무 아래에 누워 낮잠을 자고 있었다. 이윽고 과거(科擧)를 보고 장원급제한 사람을 찾아보니 다름아닌 바로 그 선비였으며, 훗날 명신(名臣)이며 대학자(大學者)가 된 태허정(太虛亭) 최항(崔恒)이었다. 그로부터 그 잣나무를 장원백(壯元柏)이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조선조에 명성울 날린 항(恒)의 두 아들인 예조참의(禮曹參議)를 지낸 영린(永潾)과 좌찬성(左贊成)을 지낸 영호(永灝)도 대를 이어 나라에 충성하였다.

▲ 경기도 파주시 월롱면 덕은리(함영골)에 자리한 최항(崔恒)의 아들 최영호(崔永灝)의 묘.

 

항(恒)의 증손 흥원(興原ㆍ1529~1603)은 자는 복초(復初), 호는 송천(松泉)으로 전첨(典籤ㆍ종친부의 정4품 관직)을 지낸 수진(秀珍)의 아들로 명종 10년(1555년) 진사가 되어 선조 원년(1568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장령(掌令)ㆍ정언(正言)ㆍ집의(執義)ㆍ사간(司諫)ㆍ동래부사(東萊府使)를 역임했다. 1578년 부평부사(富平府使)로 재직중 효릉(孝陵) 정자각(丁字閣)의 수리를 기일 내에 끝맺지 못하여 파직당했으며, 이후 다시 승지(承旨)로 복귀하여 1588년 평안도 관찰사가 되었으나 지병으로 사직하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전임했다.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순찰사(都巡察使)가 되었고, 이어 우의정(右議政)ㆍ좌의정(左議政)에 승진하여 유성룡(柳成龍)이 파직되자 영의정(領議政)에 기용되어 세자(世子)를 강계(江界)까지 배종한 뒤 의주(義州)에 가서 왕을 시종했다. 이듬해 병으로 사직,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에 전임되어 영평부원군(寧平府院君)에 봉해졌다. 죽은 뒤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추록되었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시호는 충정(忠貞).

▲ 경기도 파주시 아동동에 자리한 충정공(忠貞公) 최흥원(崔興原)의 묘와 묘역 아래 세워진 최흥원신도비. 신도비는 1603년 선조(宣祖)가 하사한 순백색의 비로 일명 청백비 또는 청백리비로 불리며, 군부대 주둔으로 훼손ㆍ매몰되었던 것을 1982년 발견되어 문중에서 비문은 새로 새겨 세웠다.

 

항(恒)의 6세손이며 어모장군(禦侮將軍ㆍ정3품 무관 벼슬)을 지낸 영(穎)의 아들 상중(尙重)은 당대의 문신(文臣) 유희춘(柳希春)의 문하에서 글을 읽고 선조 9년(1576년)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선조 22년(1589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 검열(檢閱ㆍ정9품)이 되고 선조 33년(1600년) 헌납(獻納)ㆍ지평(持平)을 거쳐 선조 35년(1602년) 사간(司諫)을 마지막으로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후일 도승지(都承旨)에 추증(追贈)되고 대사헌(大司憲)에 가증(加贈)되었다.

변(?)의 아들 동립(東立ㆍ1557~1611)은 자는 탁이(卓爾), 호는 행원(杏園)ㆍ행우(杏雨)로 선조 18년(1585년) 진사가 되어 1589년 음보(蔭補)로 능참봉(陵參奉)에 제수되었다. 임진왜란 때 임금을 따라 의주(義州)까지 호종하고 그곳에서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였으나 부친상으로 출사하지 못하다가 선조 28년(1595년) 봉교(奉敎)를 거쳐 선조 30년1597년) 병조좌랑(兵曹佐郞)을 지냈으며, 이해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선조 32년(1599년) 병조정랑(兵曹正郞)에 올랐다. 이어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1599년 권신을 탄핵한 일에 연좌되어 수성도찰방(輸城道察訪)으로 좌천되었다가 곧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1607년 사면되어 순창군수ㆍ담양부사가 되고, 광해군 1년(1609년) 우부승지(右副承旨)에 이어 황해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이도(吏道)를 바로잡았다. 어려서는 성품이 난폭하여 동네의 싸움을 도맡아 하였으나, 형 홍한(弘?)의 충고로 학문을 닦게 된 그는 여러 벼슬을 역임하면서 서리(胥吏)들의 부정을 간과하지 않았고, 당시 권세가인 유영경(柳永慶)의 전횡을 시로써 풍자하여 그의 원망을 사기도 하였다. 순창군수로 있을 때에는 권세가들의 침탈로 양정(良丁)이 줄어들고 관부의 재정이 궁핍하여짐을 보고 법으로써 이를 억제하였다. 특히, 그는 예학(禮學)에 조예가 깊어 선유(先儒)들의 모든 예서(禮書) 주설(註說)을 재고증하기도 하였다.

▲ 행원(杏園) 최동립(崔東立)의 간찰(29.5X28㎝).

동립(東立)의 동생 동식(東式ㆍ1562~1614)은 자는 정칙(正則), 호는 율정(栗亭), 대사성 우성전(禹性傳)의 문인이다. 선조 27년(1594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고 학유(學諭)ㆍ헌납(獻納)을 거쳐 장령(掌令)이 되었으나 대신의 미움을 받아 경성부 판관(京城府判官)으로 좌천되었고, 부임한 날로부터 주색을 즐겨 곧 파직당하였다. 이듬해 직강(直講)ㆍ사예(司藝)를 거쳐 안변부사(安邊府使)가 되어 제방을 쌓고 도랑을 파는 등 관개사업을 크게 일으켰다. 광해군 4년(1612년) 보덕(輔德)을 거쳐 이듬해 대사간(大司諫)이 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취임하지 않았다. 광해군이 궁궐을 새로 짓고 천도하려 하자 한(漢)나라의 고사를 인용하여 그 부당함을 극간하였고, 정조(鄭造) 등이 폐모론을 발의하자 처음으로 반대 의견을 제시하고는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뒤 다시 벼슬하지 않았다.

▲ 경남 진주시 진성면 상촌리에 자리한 4세 최복린(崔卜麟)의 묘.

 

부사공계파(副使公系派) 파조 연(?ㆍ1428~1474)의 3세손 복린(卜麟ㆍ1349~1431)은 사설서(司設署) 영(令)을 지낸 수명(守明)의 아들로 공민왕 23년(1374년)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좌랑과 보문각 직제학을 지냈다. 후에 간관이 되어서는 관리의 공로와 과실을 엄격히 구분하여 공정하게 처리하였다. 우왕 8년(1382년) 고성군사(固城軍事)가 되었는데, 효자를 선발하여 정려를 내리는 등 효행을 일으키는 데 힘썼다. 조선이 건국되면서 관직에서 물러났으나 평소 친하게 지내던 하륜(河崙)의 추천으로 좌사간과 대사간을 지냈으며, 퇴임 후 진주(晋州)로 낙향해 전 판사(前判事) 강순(姜順) 등과 함께 사재를 모아 촉석루(矗石樓)를 중건하기 위해 주민들을 설득함으로써 기여하였다.

▲ 진주시 진성면 상촌리에 자리한 부사공계파 6세 최경천(崔景泉)과 부인 곡산 우씨(谷山禹氏) 합장묘.

복린(卜麟)의 손자 경천(景泉ㆍ1428~1474)은 자는 대재(大哉)로 함안군수(咸安郡守)를 지낸 도원(道源)의 아들이다. 세조 2년(1456년) 무과에 급제하여 옥포만호(玉浦萬戶)를 지냈으며, 이후 별시위부사정(別侍衛副司正)을 역임하였다.

응립(應立ㆍ1599~1637)은 자는 주극(柱極), 호는 동계(東溪), 항(恒)의 후손으로 인조 2년(1624년)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가동(家童)과 민병(民兵) 300여 명을 거느리고 길마재(鞍峴) 싸움에 참전하여 공을 세워 진위원종공신(振威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그뒤 태인(泰仁)의 동계(東溪)에 은거하다가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다시 백함생(白咸生)과 함께 강화도로 달려가 싸우다가 성이 무너지자 백함생(白咸生)과 같이 전사하였다.

▲ 충민공(愍公) 백광언(白光彦)을 제향하기 위해 1666년 창건한 전북 정읍시 옹동면 산성마을 모충사(慕忠祠)는 그후 여러 명을 추배하였고 1842년에는 동계(東溪) 최응립(崔應立)을 추배하였다.

항(恒)의 6대손인 상중(尙重ㆍ1551~1604)은 자는 여후(汝厚), 호는 미능재(未能齋)로 할아버지는 언수(彦粹)이고, 아버지는 어모장군 영(潁)이다. 유희춘(柳希春)의 문인으로 선조 9년(1576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589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검열(檢閱)이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원수 권율(權慄)의 계청(啓請)으로 그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5~6년간 그를 보필하였다. 그 뒤 예문관 봉교(藝文館奉敎)ㆍ헌납(獻納)ㆍ지평(持平)ㆍ장령(掌令)ㆍ교리(校理) 등을 역임하고 1602년 사간(司諫ㆍ사간원의 종3품 관직)을 끝으로 관직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에 돌아갔다. 그는 효성이 지극하였고, 선견지명이 있어서 정인홍(鄭仁弘)이 화심(禍心)을 품고 있다고 첫눈에 알아 보았다 한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는 호남을 내왕할 때 쌀을 가지고 다니며 굶주린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도승지(都承旨)에 추증되었다가 아들 연(?)의 공으로 대사헌(大司憲)에 가증(加贈)되었으며, 남원의 노봉서원(露峰書院)에 제향되었다.

▲ 미능재(未能齋) 최상중(崔尙重)과 아들 폄재(?齋) 최온(崔蘊)을 제향했던 전북 남원시 사매면 서도리 노봉서원(露峰書院) 터.

 

 


▲ 1956년 후손에 의해 편집·간행된 최계옹(崔啓翁)의 시문집인 ‘우와유고(迂窩遺稿)’.

 

상중(尙重)의 아들인 연(?ㆍ1576~1651)은 선조 37년(1604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를 거쳐 광해군 2년(1610년) 예조좌랑(禮曹佐郞)이 되었으나 대북파(大北派)에 의해 파직당한 뒤 은거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다시 장령(掌令)이 되고 응교(應敎)ㆍ집의(執義)ㆍ사간(司諫) 등을 역임하고 인조 14년(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좌승지(左承旨)로 왕을 남한산성(南漢山城)에 호종(扈從)했고, 청나라와의 화친에 반대했다. 이듬해 예조참의(禮曹參議)가 되고 호종의 공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을 지내다가 사퇴, 고향에 돌아가 여생을 보냈다. 후에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 남원(南原)의 방산서원(方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연(?)의 동생 온(蘊ㆍ1583~1659)은 자는 휘숙(輝叔), 호는 폄재(?齋)로 광해군 1년(1609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으나 대북파(大北派)의 전횡(專橫)으로 벼슬을 단념하고 은퇴하여 성리학(性理學) 연구에 전심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능참봉(陵參奉)이 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인조 2년(1624년)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켰다가 난이 평정되어 해산, 1636년 병자호란 때에도 이흥발(李興渤)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1639년 비안현감(比安縣監)을 지내다 사직, 1644년 형조좌랑(刑曹佐郞)이 되었으나 취임하지 않다가 1649년 효종이 즉위하자 비로소 사업(司業)이 되었다가 이듬해에 사직하고 효종 4년(1653년) 세자시강원 진선(世子侍講院進善)ㆍ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등을 거쳐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이르렀다. 재행(才行)과 학식을 겸비하였고 성품이 강직하여 언관(言官)의 직책에 적합한 인물이라는 평을 받았으며, 남원의 노봉서원(露峯書院)에 제향되었다.

▲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최시옹(崔是翁)의 문집인 동강유고(東岡遺稿).

그 밖의 인물로는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 행(荇)의 손자이며 휘지(徽之)의 아들인 계옹(啓翁ㆍ1654~?)과 시옹(是翁ㆍ1646~1730) 형제가 유명하다. 계옹(啓翁)은 숙종 7년(1681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설서(說書ㆍ정7품)를 거쳐 숙종 21년(1695년) 지평(持平)으로 동지사 서장관(冬至使書狀官)이 되어 청나라에 다녀 온 후에 정언(正言)ㆍ지평(持平)을 지내고, 숙종 30년(1704년) 장령(掌令)으로서 단종(端宗) 폐위를 지지한 대신들을 탄핵하다가 파직당한 후 숙종 36년(1710년) 홍문관(弘文館)에 등용되어서도 과격한 상소를 하여 제주목사(濟州牧使)로 좌천당하기도 하였다. 그의 동생 시옹(是翁)은 일찌기 남원(南原) 출신의 문인(文人) 윤증(尹拯)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학행(學行)으로 당대의 정치가이며 유학자인 박세채(朴世采)의 추천을 받아 지평(持平)이 되고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저서에 ‘동강유고(東岡遺稿)’가 있다.

▲ (上)최한기(崔漢綺)가 지은 수리 기술에 관한 육해신서(陸海新書)와 농업기계에 관한 심기도설(心器圖說). (下)1834년 최한기(崔漢綺)가 김정호와 함께 제작한 세계지도(서울대 규장각 소장).

 

조선 후기의 대표적 학자로서 실학파(實學派)의 거두(巨頭)이며 한국사상사(韓國思想史)에 중요한 업적을 이룩한 한기(漢綺ㆍ1803~1875)는 항(恒)의 14세손이며, 자는 운로(芸老), 호는 혜강(惠崗)·패동(浿東)·명남루(明南樓)로 치현(致鉉)의 독자로 태어났다. 아버지인 치현(致鉉)은 시고(詩稿) 10여 권을 낼 정도의 선비였으나 열살 밖에 안 되는 어린 독자를 두고 세상을 떠났다. 빈궁한 가정에서 자란 그는 순조 25년(1825년)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였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의 연구에 전심하다가 고종 9년(1872년) 아들 병대(柄大)가 고종의 시종(侍從)이 되자, 노인직(老人職)으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었다. 철저한 경험주의 철학을 기반으로 무실사상(務實思想)을 전개하여 실학의 철학적 기반을 확립했고, 교육사상에 있어서 직업교육을 제창했다. 성리학의 배타적이고 고루한 입장에서 벗어나 자유분방한 이론을 전개한 점에 있어서 한국사상사(韓國思想史)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고, 또한 삭녕 최씨(朔寧崔氏) 가문을 덕망있는 가문으로 이르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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