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東城)은 사천(泗川)의 옛 지명으로 경상남도 남부에 위치하며, 본래 신라의 사물현(史物縣)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사수(泗水)로 고쳐 고성군(固城郡)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그후 고려시대에 사주(泗州), 조선 태종 때 사천(泗川)으로 고쳤고, 고종 32년(1895년) 군(郡)으로 승격하였다.
동성·사천 이씨(東城泗川李氏)의 선대(先代)는 중국 농서(隴西)의 분파로 사천(泗川)에서 세거(世居)하였다. ‘동성이씨대동보(東成李氏大同譜)’에 의하면, 시조(始祖) 이식(李軾)은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국자진사(國子進士)로 송악군수(松岳郡守)를 역임했으며, 그의 6세손 자(慈)가 담양교도(潭陽敎導)를 지낼 때까지 모두 6대에 걸쳐 진사(進士)를 지냈고, 후손들이 사천(泗川)에서 누대에 걸쳐 사족(士族)으로 토착ㆍ세거(土著世居)하며 동성(東城)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와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는 사천 이씨의 시조가 국자감 진사(國子監進士)를 지낸 이세방(李世芳)으로 되어 있고, 사천 이씨가 급제 이익(李益)의 후예라는 일설을 소개하고 있다.
▲ 구암(龜巖) 이정(李楨)의 시문집인 구암선생문집(龜巖先生文集)과 유묵.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인 정(楨ㆍ1512~1571)은 자는 강이(剛而), 호는 구암(龜巖), 호조참판(戶曹參判) 담(湛)의 장남이다. 중종 31년(1536년) 진사로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에 보임되었다. 다음해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그뒤 예조정랑(禮曹正郞)을 거친 뒤 연로한 부모봉양을 위하여 선산부사로 나갔다가 명종 7년(1552년)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 이듬해 청주목사를 지냈다. 이때 선정을 베풀고 효행이 뛰어나 통정대부(通政大夫)로 가자(加資)되었다.
▲ 구암(龜巖) 이정(李楨)을 제향하기 위해 1611년 건립하였으나 1868년 훼철되어 1931년 다시 세운 경남 사천시 사천읍 구암리 구계서원(龜溪書院).
1559년 우부승지(右副承旨)ㆍ형조참의ㆍ좌부승지 등을 거쳐 이듬해 병조참의ㆍ대사간ㆍ호조참의ㆍ예조참의를 지내고, 경주부윤(慶州府尹)으로 나가 옛 신라의 열왕묘(列王墓)를 보수하고, 서악정사(西嶽精舍)를 세워서 후진교육에 힘썼다. 1563년 중앙의 요직에 잠시 있은 뒤 다시 순천부사로 나가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사사(賜死)된 김굉필(金宏弼)을 위하여 경현당(景賢堂)을 건립, 그를 제사하게 하였다. 선조 1년(1568년)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고향에 구암정사(龜巖精舍)를 지어 후진양성에 힘썼으며, 사천의 구계서원(龜溪書院)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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