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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성씨 연원(이)

수안 이씨(遂安李氏)의 연원

by 연송 김환수 2014. 7. 25.

수안(遂安)은 황해북도에 있는 지명이다. 고구려 때는 고소어(古所於)ㆍ장새(獐塞)였으며, 고려 현종 9년(1018년)에는 수안현(遂安縣)이 되어 곡주(谷州)에 속하였으며, 후에 다시 현령(縣令)을 두었다가 충선왕 2년(1310년)에는 수주(遂州)로 승격되었다. 태종 17년(1417년) 수안군(遂安郡)이 되었다가, 효종 4년(1653년) 잠시 현으로 강등되었었다. 옛 명칭은 요산군(遼山郡)이었고 군 관내에는 요동산(遼東山)이 있는데, 수안 이씨는 이 고지명(古地名)을 따서 ‘요산 이씨(遼山李氏)’라 부르기도 하였다. 연송(連松)이 이 지역을 다스리게 됨으로써 ‘마침내(遂) 살기 좋은(安)고장’이 되었다 하여, 지명을 수안(遂安)이라고 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 전의 이씨 이제만(李濟萬)의 글씨를 받아서 1782년(임인년) 판각한 수인 이씨 족보 서문.
 

수안 이씨(遂安李氏)의 시조 이견웅(李堅雄)은 경산(京山ㆍ星州)인으로 신라말 태봉왕(泰封王) 궁예(弓裔)의 정사가 문란해지자 918년 6월 27세의 젊은 나이로 홍유(洪儒)ㆍ배현경(裵玄慶)ㆍ유금필(庾黔弼)ㆍ신숭겸(申崇謙)ㆍ복지겸(卜智謙) 등과 더불어 왕건(王建)을 추대하여 고려 태조(太祖)가 되게 하였다. 927년 태조가 친히 후백제(後百濟) 견훤(甄萱)을 정벌할 때 이에 참전하여 큰 공을 세웠고, 935년 고려가 삼국을 통일하자 그간의 공로로

 

 벽상공신(碧山功臣)에 올랐고 벼슬이 삼중대광(三重大匡) 태사(太師) 평장사(平章事) 에 이르렀다. 이후 계보를 이어오다, 13세 연송(連松)이 고려 충숙왕 때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고 수안군(遂安君)에 봉해졌다고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通報)’에 전하며, 수안을 식읍으로 하사받아 후손들이 그 곳에 정착 세거하면서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수안 이씨 가문의 기틀을 잡은 사람들은 3세 사공공(司空公) 빈(彬), 4세 문충공(文忠公) 단(端), 6세 시랑공(侍郞公) 위(威), 9세 평장공(平章公) 송(竦), 10세 평장공 사덕(師德), 13세 수안군(遂安君) 연송(連松) 등이다. 그중에서도 연송(連松)은 수안 이씨의 중시조로서 문무를 겸비한 현신(賢臣)으로 꼽힌다. 

 

 

▲ 충남 천안시 병천면 매성리에 자리한 수안 이씨 숭조단(崇祖壇).
 

연송(連松)은 자(字)는 백심(栢心), 호는 용계(龍溪)ㆍ운잠(雲岑), 안향(安珦)의 문인이다. 충렬왕 22년(1296년) 장군(將軍)으로 원(元)나라에 사행(使行)하여 가서 탐라(耽羅)의 피화(皮貨)를 바쳤으며, 1303년 행재소(行在所ㆍ임금이 일시 머무는 곳)인 향수원(香水園)에 이르러 충선왕을 해치려는 음모가 있자 평리(評理) 박경량(朴景亮)ㆍ유복화(劉福和) 등과 함께 힘써 이를 막았다. 충숙왕 때에는 여러 해 흉년이 들어 관서지방의 백성들이 기아에 허덕이자 원나라에서 구호양곡 3만여 석을 얻어와 백성들을 구휼(救恤)하니 충숙왕이 그를 가상(嘉賞)하여 추충보정공신(推忠輔靖功臣)에 녹훈(錄勳)하고 수안군(遂安君)에 봉하였다. 그 후 관사 50여 간을 건립하고 양곡 1만 7천석을 관고(官庫)에 비축하였을 뿐만 아니라, 4천 6백석으로 의고(義庫)를 세우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충숙왕 7년(1320년) 충선왕을 따라 원나라에 갔다가 충선왕이 모욕을 당하자  금산사(金山寺)에서 음독자살했다. 시호는 문익(文翼).


 

 

▲ 수안 이씨 세보(신축보)..  

 

조선 현종 3년(1662년)에 수안군수 구음(具崟)이 사림(士林)과 의논하여 서원 건립을 관찰사 강백년(姜栢年)에게 건의하여 요동산 정남향 자리에 서원을 세웠으며, 1708년 숙종이 연송(連松)의 유덕을 기리기 위하여 ‘용계서원(龍溪書院)’이라 사액(賜額)하고 예관 홍상빈(洪尙賓)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게 했다.

연송(連松)의 장자인 휴공(庥公)은 자(字)는 중비(仲庇)로 고려조에서 받은 벼슬은 전리판서(典理判書) 삼중대광(三重大匡) 수안군(遂安君)이다. 처음에는 연경(燕京)에 가서 원나라 벼슬을 살았고, 1346년에 원나라가 충목왕(忠穆王)을 책봉하는 글을 보내면서 그의 선조 이래의 충성과 특히 부군(父君)의 순절을 기려 그에게 중서성 좌승상(中書省左丞相)의 벼슬을 내리고, 연경궁(延慶宮)에서 연회를 베풀고 구마(廐馬) 2필과 백금(白金) 50냥을 하사하였다. 고려 충정왕(忠定王) 때에 귀조(歸朝)하여 첨의정윤(僉議正尹)ㆍ시중(侍中)의 벼슬을 받고 수안군(遂安君)의 봉작을 받았다.

연송(連松)의 6세손인 인우(仁祜ㆍ?~1358)는 청주목사(淸州牧使) 관(觀)의 아들로 벼슬이 지밀직삼사부사(知密直三司副使) 좌장군(左將軍)에 이르렀다. 공민왕 7년(1358년) 선성(宣城)의 다루가치(達魯花赤)가 모반하여 도휘사(都揮使) 김원봉(金元鳳)을 죽이고 의주(義州)를 점령하였을 때 이방실(李芳實)과 같이 출전하여 적을 대파하니 공민왕이 그에게 금대(金帶)를 하사했다. 그 후 잔당들이 다시 공격해 오자 분전하였으나 전사하였는데, 시신도 수습하지 못한 채 애마가 물고 온 신발을 안장하였다고 하며 후손들이 추원사(追遠祠)를 건립하여 춘추(春秋)로 봉향(奉享)하였다.

인우(仁祐)의 둘째아들인 수생(遂生)은 자는 명중(明仲), 호(號)는 존암(尊巖)으로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을 개국할 때,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지조를 지킨 고려말의 충신으로 두문동(杜門洞) 72현 가운데 한사람이다. 최근 강원도 정선군 거칠현동에 72현 중 7현(全五倫ㆍ金冲漢ㆍ高天祐ㆍ李遂生ㆍ申晏ㆍ邊貴壽ㆍ金瑋)을 기리는 7현비가 건립되었으며, 민요 정선아리랑은 이 분들의 한 맺힌 삶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개성에 두문동 72현의 사당이 있으며, 수안군 죽대동(竹垈洞)에 그의 묘가 있다.


 

 
 

 ▲ 두문동 72현 중  이수생(李遂生)을 비롯한 7현이 정선의 서운산(瑞雲山)으로 내려와 산나물 등을 뜯어 먹고 살면서 절개를 지킨 강원도 정선군 남면 낙동리(거칠현동) 칠현공원에 고려 유신들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칠현사(七賢祠)와 칠현비.

수산(壽山ㆍ?~1376)은 충혜왕 때 총관(摠管)을 거쳐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올라 추성익대좌명공신(推誠翊戴佐命功臣)이 되고, 춘성군(春城君)에 봉해졌다. 공민왕 1년(1352년) 조일신(趙日新)의 난에 종적을 감추어 죽음을 면했고, 1354년 첨의평리(僉議評理)를 거쳐 찬성사(贊成事)에 올랐다. 1356년 행성낭중(行省郞中)이 되어, 친원파(親元派) 기철(奇轍)이 포살(捕殺)되자 그 일파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불려 수춘부원군(壽春府院君)에 봉해졌다. 동북면 도순문사(東北面都巡問使)로 나가 여진족(女眞族)을 평정, 경계를 정하고 나서 1365년 삼사우사(三司右使)를 거쳐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추충보절익대좌리공신(推忠保節翊戴佐理功臣)이 되었다. 이 해 권세를 잡은 신돈(辛旽)에 의해 정적으로서 한때 숙청되었으며, 1374년 공민왕이 시해되자 우왕을 즉위시키려는 이인임(李仁任)의 의견에 혼자 그 부당성을 지적, 종친 중에서 후계자를 뽑자고 주장했다. 공양왕이 충의(忠義)를 표창하고 그 묘에 제사를 올리고 자손들을 등용했다. 시호는 공량(恭郞).



수안 이씨(遂安李氏)는 특히 고려에서 훌륭한 인물을 많이 배출하여 가문을 빛냈고, 조선조에 와서는 안귀(安貴)는 자가 수선(守善)으로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문종과 단종 때에 공조판서를 지냈으며, 세조 때 사육신사건이 발생하자 상소하였다가 파면당하여 성천(成川)의 학동(鶴洞)에 은퇴하였다. 그 고을사람들이 그가 살던 곳을 선래(仙來)라 하였고, 학행(學行)하던 곳을 가학대(駕鶴臺)라고 불렀다. 

 

 

▲ 충남 천안시 병천면 매성리에 자리한 이복장(李福長)과 아들 이번의 정려(旌閭)와 정려비.
 

복장(福長)은 9세 때부터 병에 걸린 모친을 정성으로 모셨고,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병천(並川)의 작성산(鵲城山)에서 왜병을 대파하였으며, ‘충의효열록(忠義孝烈錄)’에 수록된 당대의 효자이다. 아들 번은 6세에 부친상을 당하여 나이가 어려 복상하지 못함을 안타까이 여기며 늘 죄인으로 자처하며 지내었다. 숙종 때 이들의 행실을 포상하며 정려를 내렸는데, 천안시 병천면 매성리(梅城里)에 효정각(孝旌閣)이 건립되어 있다.


 

 

▲ 화은(和隱) 이시항(李時恒)이 편찬한 김경서(金景瑞)의 전기인 김장군유사(金將軍遺事).  

 

시항(時恒ㆍ1672~1736)은 자는 사상(士常), 호는 화은(和隱)ㆍ만은(晩隱), 사헌부 지평 정한(廷翰)의 아들로 유상운(柳尙運)의 문인이다. 숙종 26년(1700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으나 과거시험에 부정행위를 한 자가 있었다 하여 파방(罷榜)되어 이듬해 다시 설과(設科), 이에 급제하였다. 전적ㆍ병조좌랑 등을 거쳐 어전찰방ㆍ덕천군수 등을 두루 지냈다. 특히 사륙변려체(四六騈儷體)의 문장에 능하여 영조 3년(1727년) 심수현(沈壽賢)이 사은사 겸 진주사(謝恩兼陳奏使)로 청(淸)나라에 갈 때 종사관으로 수행하여 그 문명을 떨쳤다. 만년에 향리로 돌아와 교육과 저술활동에 전념하여 ‘화은집(和隱集)’ㆍ‘김장군유사(金將軍遺事)’ 등 20여 권의 책을 남겼는데, 죽은 이듬해인 영조 13년(1737년) 아내 김씨가 노비(奴婢)를 팔아 그의 문집을 간행했다.



근대에 들어 수안 이씨는 각계에서 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효봉(曉峰ㆍ1888~1966)스님의 본명은 찬형(燦亨)으로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평양고등법원의 판사로 6년간 재직했는데, 사형선고를 내린 사건이 나중에 오판으로 밝혀지자 가책을 느껴 방황하다가 금강산 신계사(神溪寺)로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 1962년 불교조계종 통합종단의 초대종정에 올랐고, 1966년 입적(入寂)할 때까지 많은 불제자와 일화를 남긴 고승이다.

동인(東仁)은 고향이 황해도 수안이다. 한말(韓末)의 개화승(開化僧)으로 일찍이 개화사상에 눈을 떠 일본으로 밀항하여 일본정계의 거물들과 친교를 맺고 돌아와 김옥균(金玉均), 김홍집(金弘集) 등과 더불어 기울어가는 국운을 바로잡기 위해 많은 힘을 기울였다. 1881년 신사유람단이 출발할 때에는 참모역을 담당하였으며, 1882년 한미수호조약의 조문은 그가 미리 초안해둔 것을 기준으로 할 만큼 큰 영향력을 행사한 정계의 실력자였다.

상해임시정부의 의료인 희경(喜儆)은 당시 풍족한 생활이 보장된 의사이면서도 이역만리 중국 땅에서 김구(金九) 주석을 도와 독립운동에 적극 가담한 인물이고, 준식(俊植ㆍ1900∼1966)은 광복군사령관대리와 고급 참모부지대장을 역임하고 광복 후에는 국군창설에 크게 기여하고 각 군(軍)사령관을 거처 중장으로 예편하였고, 응준(應俊ㆍ1891∼1985) 역시 해방 후 국군 창설에 큰 공헌을 하였다. 그는 초대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하였으며, 예편 후에는 체신부장관ㆍ반공연맹이사장ㆍ국정자문위원 등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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