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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성씨 연원(이)

구원주 이씨(舊原州李氏)의 연원

by 연송 김환수 2014. 7. 25.

구원주 이씨(舊原州李氏)의 선계(先系)는 중국 절서성(浙西省)에서 살다가 기원전(紀元前) 200년대 한고조(漢高祖) 때 난(亂)을 피해 고조선(古朝鮮)에 들어와 원주(原州)에 정착(定着)ㆍ세거(世居)하였다. 이후 자손이 번성하여 씨족사회를 이루며 군거(群居)하다가 신라 제16대 흘해왕(訖解王ㆍ310~365년) 때 원시조(遠始祖) 진민(眞民)이 신라 조관(朝官)으로 관직에 나아가 문하시중 대아찬(門下侍中大阿澯)을 지냈고, 27세 도균(道均)은 21세에 문과시강(文科侍講)에 올라 어사대부(御使大夫) 진양군(進陽君)에 이르렀다.

 

 

▲ 시조를 배향한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 간현리 이곡사(梨谷祠).
 

도균(道均)은 성계(城桂)ㆍ춘계(椿桂)ㆍ공청(公淸) 등 세 아들을 두었는데, 고려 인종(仁宗)과 의종(毅宗) 때 병부상서(兵部尙書)와 평장사(平章事)을 지낸 둘째 아들 춘계(椿桂)가 구원주 이씨(舊原州李氏)의 시조(始朝)가 된다.


춘계(椿桂)의 아들 수승(守升)과 손자 단성(端誠)은 국자진사(國子進士)를 지냈고, 3세손 유광(有光)은 정3품 좌경군(左京軍)을 지냈다. 이들의 묘가 광주(廣州) 온정동(溫井洞)에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성계의 역성혁명(易姓革命)에 반대한 세력으로 몰려 석물은 파손되고 위토(位土)는 소실되었으며, 후손들이 사기편에 간단한 기록을 새겨 묘에 넣었으나 조선 후기 자취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곡사(梨谷祠) 뒤쪽에 자리한 추원단(追遠壇)과 시조와 2세 수승(守升), 3세 단성(端誠)의 단비(壇碑).
 

춘계(椿桂)의 7세손 희백(希伯)은 충숙왕 17년(1330년) 정동행성(征東行省)의 우사낭중(右司郎中)으로 있었는데 원나라 문종(文宗)이 충숙왕의 국왕인(國王印)을 회수하고 그의 아들 세자 정(禎)으로 고려국왕을 교체시키니 이가 곧 충혜왕(忠惠王)이다. 이런 혼란기를 맞이하여 장백상(蔣伯祥)이 고려에도 원나라의 직할지와 같은 행성(行省)을 둘 것을 황제에게 건의했고, 원나라 황제는 승상 백안(伯顔)의 건의에 따라 고려에 사신을 파견하는 등 실정을 조사했다.



희백(希伯)은 충혜왕에게 그 불가함을 조목조목 따져서 행성(行省) 설치를 중지하도록 했고, 충혜왕은 원나라 관서왕(關西王)의 장녀 덕녕공주(德寧公主)의 사위였으므로 외교와 압력을 동원하고 고려에 파견된 사신을 뇌물로 매수하는 등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원의 야욕을 막는데 성공했다. 이런 공이 인정되어 희백(希伯)은 상서도성(尙書都省)의 좌사랑중(左司郞中)으로 발탁되었고, 중앙 행정부서인 5부(五部) 산하의 남부부령(南部副令)을 지냈다.

희백(希伯)은 “심령(心靈)이 일견만리(一見萬里)하고 도통(道通)했으며, 일행천리(一幸千里)하는 조화무쌍(造化無雙)한 희귀인(希貴人)이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뛰어난 인재였다는 짐작이 가능하다.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 간현리 이곡사(梨谷祠) 뒤쪽에 자리한  중시조 이희백(李希伯)의 묘.
 

늙어 개성에 살다가 유언하기를, “만약 내가 세상을 뜨거든 나의 묘지는 수로로 운구하여 배가 닿는 곳에서 산을 구하라”고 했다. 희백(希伯)이 세상을 떠나자 당시 위위시 판사(衛尉侍判事)였던 아들 녹규(祿圭)는 부친의 유언대로 영구(零柩)를 모시고 황해로 나와 한강을 거슬러 오르는 험난한 행로 끝에 현재의 간현 이목곡(梨木谷) 섬강나루에서 날이 저물어 정박했는데, 다음날 아침 배를 띄우려 하니까 배가 못이 박힌 듯 움직이지 않았다.

 

상주가 “지난밤 꿈에 아버님을 뵈었다. 현몽으로 게시하심이 생전과 같았다. 이곳에서 구산(求山)하라.”고 말하며 지사(地師)를 앞세워 부근을 답습하니 현재의 이목동(梨木洞) 묘지를 쉽사리 찾아 안장하게 되었다.

“이곳은 길지(吉地)입니다. 치악산이 주봉이고 왼쪽은 백운산(白雲山) 문필봉(文筆峰)이 연(連)하여 장엄한 산맥의 정기가 길지에 의결(疑結)되었습니다. 삼태산(三台山)을 바라다보는 인산지수(仁山智水)의 절경지지(絶景之地)이며 진검상절병(眞劒上節柄)인 동시에 괘등(掛燈)형국이고 이중삼중으로 청룡과 백호가 옹위하고 있습니다. 이목동 입구의 섬강수(蟾江水)는 등유(燈油)에 비(比)하여 천만년을 장유불식(長流不息)하고 영세(永世)에 마르지 않을 것임으로 후손이 크게 번성하고 문관보다 무관이 많이 배출될 것입니다.”라고 지사(地師)가 말했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구원주 이씨 가문의 무과급제자는 문과 급제자 100명의 3배 이상을 헤아린다.

춘계(椿桂)의 9세손 녹규(祿圭)는 위위시 판사(衛尉侍判事)를 지냈으며, 림(琳)ㆍ린(璘)ㆍ침(琛) 세 아들을 두었다. 림(琳)은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출사(出仕)하여 종7품 주부(注簿)를 지냈으며 우왕(禑王) 때는 봉어(奉御) 및 동정(同正)으로 있었고, 고려가 멸망하자 을림(乙琳)이라 개명하고 방랑생활로 일관했다. 린(璘)은 공민왕 때 출사(出仕)하여 우왕(禑王) 때는 중정대부(中正大夫) 종부시령(宗簿侍令)을 지냈고, 1392년 이성계의 역성혁명(易姓革命)이 일어나자 두문동에 은거했다가 원주에 낙향하여 칠봉산(七峰山)에 몸을 숨겼다. 사돈인 원천석(元天錫)과 더불어 늘 송경(松京ㆍ개성)을 향해 하루 4번 절하며 망국의 한을 달랬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방진(邦珍)은 현감을 지냈고, 온(穩)은 현령, 세증(世曾)은 목사, 응엽(應曄)은 현감, 천연(千年)은 좌승지를 역임하였다. 인민(仁敏)은 선전관(宣傳官), 대수(大樹)는 군수, 분(芬)은 목사, 번(蕃)은 부호군을 역임하면서 가문을 빛냈다.

안세(安世)는 군수를 지냈으며, 형창(亨昌)과 연수(延秀)는 현감, 덕의(德義)는 목사, 성준(成俊)은 부사를 역임하였다. 또한 강중(剛中)은 병조판서에 올랐으며, 정식(挺植)은 절충장군(折衝將軍), 광적(光勣)은 도총관을 역임하면서 이름을 떨쳤다. 그외에도 정수(挺樹)와 극신(克新)은 군수가 되었고, 극심과 극양(克諒)은 부사가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