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 이씨(寧川李氏)의 시조(始祖) 이능간(李凌幹ㆍ1286?~1357)은 자는 여생(與生), 호는 송헌(松軒)으로 남원(南原) 거령현(居寧縣ㆍ지사면 영천리)에서 태어났다. 충선왕(忠宣王)이 총애하는 두 여자를 능간(凌幹)과 백문거(白文擧)에게 내린 적이 있었는데, 능간(凌幹)만이 그녀를 별당에 두고 감히 가까이 하지 아니하니 왕이 그를 의롭게 여겼다. 충선왕 복위 5년(1313년) 충선왕이 충숙왕(忠肅王)에게 선위(禪位)한 뒤 원(元)나라에 가 있을 때 반전별감(盤纏別監)으로 임명되었는데 청렴결백했다.
충숙왕 7년(1320년) 원나라는 상왕(上王)인 충선왕을 그들의 나라로 데려가 고려의 충성을 강요하였으며, 그해 12월 원나라는 충선왕이 그들을 배반할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혐의를 씌워 멀리 토번(吐藩ㆍ지금의 티베트 지역)으로 유배를 보내게 되었다. 귀양가는 충선왕에게 금(金)을 몰래 전해주어 왕을 궁핍하지 않게 했고, 1325년 충선왕이 죽자 재궁(梓宮ㆍ임금의 널)을 모시고 고려로 돌아왔다. 충숙왕 13년(1326년) 밀직사지사(密直司知事) 때 원나라에서 고려에 성(省)을 설치하여 고려를 원의 내지(內地)로 만들려고 하자, 김이(金怡)ㆍ전영보(全英甫) 등과 함께 원나라 황제에게 주청(奏請)하여 그 계획을 파기시켰다. 그 공로로 1등공신에 책록되었고, 사람들으로부터 면좌당(免左堂)이라는 액호(額號)를 받았다.
▲ 전북 임실군 지사면 영천리에 자리한 영천 이씨(寧川李氏) 시조 이능간(李凌幹)의 묘.
1328년 감찰대부(監察大夫)를 거쳐 1330년 충혜왕(忠惠王)이 즉위하자 첨의평리(僉議評理)를 지냈고, 충혜왕 복위 2년(1341년) 정승(政丞)에 올랐다. 이듬해 심양왕(瀋陽王) 고(暠)를 고려왕으로 즉위시키려 한 조적(曺)의 난이 일어났을 때 충혜왕을 시종(侍從)한 공으로 1등공신이 되고 영천부원군(寧川府院君)에 봉해졌다. 1351년 공민왕(恭愍王)이 즉위하자 좌정승(左政丞)ㆍ영도첨의사(領都僉議事)에 오르고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의 후손은 임실군 지사면 영천리에 대대로 살면서 영천부원군(寧川府院君) 이능간(李凌幹)을 시조로 받들고 영천 이씨(寧川李氏)라고 하였다. 영천(寧川)은 남원의 고호(古號)다.
▲ 영천 이씨(寧川李氏) 시조 이능간(李凌幹)의 묘 뒤쪽에 있는 솥바위.
영천 이씨는 세(世)를 거듭할수록 현달해 갔고, 5세 때에 4파로 나누어지는 등 모두 9파로 나누어졌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인 탕휴(湯休)는 시조 능간(凌幹)의 손자로 고려 말에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내다가 고려가 망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로 자신이 살던 집을 모두 불살라버리고 자손들을 고향으로 내려보냈으며, 자신은 관과 옷을 찢고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일생을 마쳤다. 아들 묵옹(默翁) 분(芬)도 아버지의 명을 받아 조선조에 벼슬하지 않고 금서(琴書)로 일생을 마쳤으며, 또 후손들에게 벼슬하지 말라고 유언을 했기 때문에 영천 이씨는 조선조에서 특출한 인물을 내지 못했고 또 가문도 번성하지 못했다.
그밖에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지낸 중엽(重燁)ㆍ부춘(富春)ㆍ재성(在誠) 등과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추증된 덕근(德根)ㆍ복겸(福謙)이 영천 이씨를 빛냈다.
대명공파(大明公派) 4세 분(李芬)의 아들 덕립(德立)이 파조로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을 지냈으며, 9세 명세(明世)는 한성판관(漢城判官) 겸 가선대부(嘉善大夫)ㆍ병조참의(兵曹參議)를 지내다 임진란(壬辰亂) 때 쌀 등을 내놓았다.
10세 희량(希良ㆍ1584~1645)은 자는 형재(馨哉), 호는 대명거사(大明居士)로 광해군 때 영교위(營校尉)ㆍ선전관(宣傳官)을 지냈으며, 1627년 정묘호란 때는 인조를 호위하여 강화도로 들어갔다. 그러나 강화(講和)가 성립하게 되자 반대상소를 올렸으며, 1631년 청나라가 가도(假島)를 침입하였을 때는 청나라를 치자는 상소를 올리는 등 청나라에 대한 강경론을 취하였다. 1632년 절충장군(折衝將軍)이 되었으며, 1633년에는 바라던 덕만동소보 권관(德萬洞小堡權官)이 되어 백성의 구휼을 건의하였다. 문집에 ‘대명거사유고(大明居士遺稿)’가 있다.
▲ 대명거사(大明居士) 이희량(李希良)의 문집인 ‘대명거사유고(大明居士遺稿)’.
초노공파(草蘆公派) 분(芬)의 둘째 아들 5세 숙(淑)이 파조로 군자감 주부(軍資監主簿)까지 지냈으며, 자세한 기록이 없다. 순(洵)은 별좌(別座)였고, 손자 대육(大毓)은 참봉을 제수하였지만 나가지 않았고 통정대부 통례원 좌통례(通政大夫通禮院左通禮)을 지냈다. 8세 식(寔)도 선공감역(繕工監役)에 있었고, 9세 취석(就碩)은 효행으로 복호(復戶)하였다.
후송공파(後松公派) 분(芬)의 셋째 아들 정(貞)이 파조로. 세상 사람들은 “옛날에는 왕족지현이 있었고 지금은 이공지충(李公之忠)이 있다”고 격찬했다. 10세 승언(承彦)은 세종 때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지냈고, 중길(重吉)은 효행으로 명정(命旌)됐으며, 노직(老職)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증직(贈職)되었다. 후손들이 큰 벼슬자리에 있었다.
경조공파(景祚公派) 분(芬)의 넷째 아들 측(側)이 파조로, 후손 득복(得福)은 군자감 참봉(軍資監參奉)을 지냈내다. 12세 경언(慶彦)은 무과에 들어 판관(判官)을 지냈고, 15세 은무(殷茂)에 이르러 번창하기 시작했다. 은무(殷茂)는 5남 1녀를 두었다. 17세 기만(基萬)이 가선대부를 지냈고, 18세 원조(元祚)도 가선대부가 되었다. 동생 귀권(貴權)도 가선대부가 되었는데 지금까지 당상관(堂上官)을 지낸 사람이 5명이나 된다.
주부공파(主簿公派) 8세 시건(時健)이 파조로 어모장군(禦侮將軍)을 지냈다. 아들 수부(守富)는 통정대부(通政大夫)가 되고, 손자 일복은 가선대부(嘉善大夫)ㆍ병조판서(兵曹判書)에 올랐다. 12세 상일(尙日)은 절충장군 용양위부호군(折衝將軍龍讓衛副護軍)에 오르고, 15세에는 8형제로 늘어나는 등 손록이 풍성해졌다.
송암공파(松岩公派) 9세 명(命)이 파조로, 12세 준수(俊秀)는 절충장군(折衝將軍)이 되고 담(淡)도 같은 직에 있었다. 16세 배근(培根)과 그 아들 흥필(興弼), 손자 석현은 모두 당상관(堂上官)에 증직되었다. 한말(韓末) 때 남원의 청장년을 이끌던 이시순(李始淳)과 남원의 마지막 읍장(邑長)을 지낸 이현준(李炫俊) 등이 후손이다. 17세 계순(啓淳)은 분위정(현 觀德亭)을 세우고 남원토성(南原土城)을 개수했다.
송애공파(松崖公派) 10세 춘절(春節)이 파조로 송애(松崖)는 아호(雅號)이다. 임진란(壬辰亂) 때 창의하여 조경남(趙慶男) 장군과 함께 여원치(女院峙)를 지켰고, 조 장군은 용추동으로 가고 춘절(春節)은 장호산에서 산서집(山西集)을 읽었다. 11세 중록(仲錄)은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창의했다가 강화했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와 독서에 열중했으며, 자호를 만회당(晩晦堂)이라 했다. 중록(仲錄)의 손자 13세 성동(成東)은 부호군(副護軍)에 있었고, 성동(成東)의 둘째 아들 덕근(德根)은 효행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에 증직되었다. 덕근德根)의 둘째 아들 복겸(福謙)도 효행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에 증직되었다.
졸재공파(拙齋公派) 11세 천남(天南)이 파조로, 선조 39년(1606년)생이고 47살에 용담(龍潭)에 왔다. 아들 형길(亨吉)은 부모상에 6년간이나 시묘한 사실이 남원지(南原誌)에 실렸고, 형길(亨吉)의 동생 승길(勝吉)은 인조조에 무과에 올라 선전관(宣傳官)을 지냈고, 형길의 아들 의방(義邦)도 무과에 올라 선전관을 지냈다. 19세 규화(圭和)는 익근(翊根)의 아들로 고종 때 현능참봉(顯陵參奉)을 지냈고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이르렀다. 또 규화(圭和)의 아들 20세 철섭(喆燮)은 상공교관(商工敎官)으로 있다가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이르렀다.
계림공파(鷄林公派) 2세 명(銘)의 셋째 아들 탕림(湯林)이 파조로 고려조에 감찰대헌에 있었다. 아들 을장(乙璋)과 손자 종석(從碩)은 조선조 태조가 임금이 되자 세상을 등지고 살았다. 6세 준평(俊平)은 단종조에 문과에 들어 여러 벼슬을 거쳐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오르고, 8세 윤생(允生)은 경기전(慶基殿) 참봉을 지냈고 임란(壬亂) 때 의병 800여 명을 모아 왜적과 싸웠으며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증직되었다. 12세 광석(光碩)은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에 올랐고, 아들 경조(慶祚)는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참판(戶曹參判)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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