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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성씨 연원(김)

구안동 김씨(舊安東金氏)의 연원

by 연송 김환수 2014. 8. 10.

구안동 김씨(舊安東金氏)의 연원

 

본관은 같으나 시조(始祖)를 달리하는 세칭 신안동(新安東)ㆍ구안동(舊安東) 두 가문이 있다. 안동 김씨(安東金氏)라 하면 고려조부터 구안동 김씨(舊安東金氏 혹은 先安東金氏)만을 일컬어 왔다.

 

그런데 조선 중기에 신안동 김씨(新安東金氏 : 시조(始祖) 김선평(金宣平) 신라(新羅) 말 고창군(古昌郡ㆍ안동의 고호)의 성주(城主)가 생겨나 구안동김씨(舊安東金氏)혼동이 생겼으며, 두 가문은 서로 일가(一家)는 아니므로 서로 통혼을 하였고 지금도 합법적으로 혼인할 수 있다.

구안동 김씨(舊安東金氏)의 시조는 신라 제56대 경순왕(慶順王)의 손자인 숙승(叔承ㆍ고려 때 공부시랑을 역임)으로 그는 경순왕의 넷째 아들인 은열(殷說ㆍ어머니는 고려 태조 왕건의 장녀인 낙랑공주)의 둘째 아들이 되며, 한림학사(翰林學士) 효인(孝印)의 아들로 고려(高麗)에서 명성을 날린 방경(方慶)을 중시조(中始祖)로 하여 문호를 열었다. 한편 경상도에서는 안동의 다른 명칭을 살려 상락 김씨(上洛金氏), 화산 김씨(華山金氏), 영가 김씨((永嘉金氏), 고창 김씨(古昌金氏), 복창 김씨(福昌金氏) 또는 선안동 김씨(先安東金氏)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 고려사(高麗史)에 실려 있는 구안동 김씨의 중시조(中始祖) 충렬공(忠烈公) 김방경(金方慶)의 열전(列傳).
 

방경(方慶ㆍ1212~1300)은 자는 본연(本然)으로 고려 제23대 고종(高宗) 때 음서(蔭敍)로 산원(散員)이 되어 식목녹사(式目錄事)를 겸하였고, 감찰어사(監察御史)를 거쳐 서북면 병마판관(西北面兵馬判官)으로 있을 때 몽골군의 침입을 위도(葦島)에서 방어하였다. 원종 4년(1263년)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에 승진, 진도(珍島)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치고 상장군(上將軍)으로 있다가 잠시 남경유수(南京留守)로 좌천, 곧 서북면 병마사로 복직되었다.

형부상서ㆍ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를 지내고 원종 10년(1269년) 원나라에 있을 때 임연(林衍)이 원종(元宗)을 폐하고 안경공(安慶公) 창(?)을 내세우자 원나라 세조(世祖)가 보낸 맹격도(孟格圖)의 군사 2천명과 합세해 진압하려 하였다가, 원종이 복위되었음을 알고 되돌아갔다. 이듬해 장군 배중손(裵仲孫) 등이 삼별초(三別抄)의 난을 일으켜 승화후(承化侯) 온(溫)을 왕으로 추대하자 추토사(追討使)의 명을 받고 삼별초 무리를 쳤고, 원종 12년(1271년)에는 몽골군과 합세해서 토벌하여 승화후(承化侯)를 죽이고 남은 무리들이 탐라(耽羅ㆍ濟州島)로 도망치자 원종 14년(1273년) 행영중군병마원수(行營中軍兵馬元帥)로서 몽골의 장군 흔도ㆍ홍다구(洪茶丘)와 함께 삼별초를 완전히 평정하고 시중(侍中)에 올랐다.

1274년 원나라에서 합포(合浦ㆍ馬山)에다 정동행성(征東行省)을 두고 일본을 정벌하려 할 때 고려군을 거느리고 중군장(中軍將)으로 출정해 원나라 군대와 함께 대마도(對馬島)을 쳤으나 풍랑으로 실패하고, 충렬왕 7년(1281년) 또다시 고려군 도원수로 제2차 정벌에 올랐으나 대폭풍이 일어나 큰 손해를 입고 돌아왔다. 벼슬에서 물러나려고 하자 원나라에서 추충정란정원공신(推忠靖亂定遠功臣)의 호를 주었고, 상락군개국공(上洛郡開國公)에 봉하였다. 그후 부하 장병들의 민폐를 막지 못한 것과 일본 정벌 후의 불공평한 논공행상(論功行賞) 등으로 민심을 잃어, 죽어서 예장(禮葬)을 치르지 못하고 고향 안동에서 장례를 지냈다. 충선왕 때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에 추서되었으며, 시호는 충렬(忠烈). 


 ▲ 안동시 녹전면 죽송리에 안장된 신안동 김씨의 중시조(中始祖) 충렬공(忠烈公) 김방경(金方慶)의 묘.

 

 ▲ 충렬공(忠烈公) 김방경(金方慶)의 묘지석 복사본(좌)과 탁본(우).
 

구안동 김씨는 역사적으로 볼 때 대체로 고려 말엽에서 조선 중기인 인조(仁祖) 때까지 상당한 세력을 떨쳤으며, 중시조 방경(方慶)의 현손대에서 21파로 분파되어 그중 13파만이 현존하고 있다. 13파 중에서도 영후(永煦)의 손자들인 익달(益達)의 제학공파(提學公派)ㆍ사렴(士廉)의 안렴공파(按廉公派)ㆍ사형(士衡)의 익원공파(翼元公派)가 구안동 인구의 60~70%를 차지해 통칭 ‘제안익 3파(提按翼三派)’로 불리우며, 이밖에 군사공파(郡事公派ㆍ七陽)ㆍ대사성공파(大司成公派ㆍ九容)ㆍ도평의공파(都評議公派ㆍ九鼎) 등 3파가 그에 버금간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고려사(高麗史)’에 찬연한 발자취를 남긴 중시조 방경(方慶)을 비롯한 그의 다섯 아들과 손자들이 가문의 중흥을 일으켜 명실상부한 명문세도가의 기틀을 마련하였는데, 그중 장남 선(?)은 밀직사부지사(密直司副知事), 차남 흔(?)은 찬성사, 셋째 아들 순(恂)은 삼사판사(三司判事), 넷째 아들 윤(?)은 밀직사지사(密直司知事)를 지냈다. 

 


  ▲ 밀직사부지사(密直司副知事)를 지낸 충렬공(忠烈公) 김방경(金方慶)의 장남 선(?)의 묘.

 

선(?)의 아들 승용(承用ㆍ대제학)ㆍ승택(承澤ㆍ중서시랑 평장사)과 순(恂)의 아들 영돈(永暾ㆍ좌정승)ㆍ영후(永煦ㆍ우의정) 등도 모두 이름을 날렸다. 특히 영후((永煦)의 후손이 조선 전기에 세력을 크게 떨쳐 사실상 ‘구안동’의 주축이 되었다.

영후(永煦ㆍ1292∼1361)는 호는 균헌(筠軒)으로 충숙왕 때 삼사우윤(三司右尹)이 되었으며, 충혜왕 복위 2년(1341년)에 사신으로 원(元)나라에 다녀왔다. 충혜왕 복위 3년(1342년)에는 심양왕(瀋陽王) 고(暠)의 모반에 따르지 않고 원나라에서 충혜왕(忠惠王)을 시종한 공으로 추성보절동덕익찬공신(推誠保節同德翊贊功臣)으로 삼사좌사(三司左使)가 되었다. 1343년 충혜왕이 원나라에 잡혀갈 때 백관이 모두 도망갔으나 혼자 목숨을 걸고 호위하였으며, 이듬해 충목왕(忠穆王)이 즉위하자 찬성사(贊成事)가 되었다. 이어서 제조정방(提調政房)ㆍ우정승(右政丞)을 역임하고 공민왕 1년(1352년)에 복창부원군(福昌府院君)에 봉해졌으며, 변정도감(辨整都監)의 폐지를 청했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공민왕 5년(1356년) 공민왕에게 공신호를 내린 원나라 순제(順帝)에게 사은사(謝恩使)로 다녀온 뒤 상락후(上洛侯)에 봉해졌다. 시호는 정간(貞簡).
 

 ▲ 고려 말의 충신 김사렴(金士廉)의 묘

 

 

 ▲ 고려가 망하자 청주(淸州)에 은거하여 수차에 걸친 이성계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은 김사렴(金士廉)의 묘.
 

정간공(貞簡公) 영후(永煦)의 후손 중에는 고려 말의 충신 사렴(士廉)이 유명하다. 문장에 능하여 공민왕 초엽 문과에 급제해 정몽주(鄭夢周)ㆍ이색(李穡)과 함께 직간(直諫)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공민왕 14년(1365년) 왕이 신돈(辛旽)을 총애하여 공신호를 내리자 신돈이 위험인물임을 상소했다. 1392년 고려가 망하자 청주(淸州)에 은퇴, 태조가 여러 차례에 걸쳐 좌사간(左司諫)에 기용하려 했으나 거절한 뒤 도산(陶山)으로 옮겨 은거하였다.

평소 그는 한양(漢陽)쪽을 향해 앉지도 않았으며 죽음에 임하여, “고려의 신하로서 군왕(君王)을 보필하여 나라를 보존치 못했을 뿐 아니라 신순(身殉ㆍ죽음으로 충절을 지킴)치도 못한 죄인이 무슨 면목으로 죽어서 선왕(先王)을 뵐 것인가. 내가 죽은 뒤 심심산중에 묻어 봉토(封土)하지 말며 돌을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후손은 벼슬에 나가지 말 것을 당부했다고 한다. 조선 제19대 숙종(肅宗)은 그의 충절을 가상히 여겨 ‘일편도산 만고수양(一片陶山 萬古首陽)’이라는 과제(科題)로 응과생들에게 과거를 보였고, 송시열(宋時烈)은 ‘충병일월 절고산악 만고수양(忠昞日月 節高山岳 萬古首陽)’이라고 그를 칭찬했다.

 

 ▲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목왕리에 자리한 익원공(翼元公) 김사형(金士衡)과 죽산 박씨(竹山朴氏)의 합장묘.

 

 

 ▲ 1402년 김사형(金士衡)ㆍ이무(李茂)ㆍ이회 등이 만든 우리나라에서 만든 최초 세계지도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 원본은 전하지 않고 사본만 전한다.
 

 

▲ 낙포대에 모셔져 있던 익원공 김사형의 구(舊) 영정.

사렴(士廉)의 동생 사형(士衡ㆍ1333∼1407)은 자는 평보(平甫), 호는 낙포(洛圃)로 공민왕 때 과거에 급제해 대간(臺諫)으로 있었고, 뒤에 개성윤(開城尹)이 되어 보리공신(輔理功臣)의 호를 받았다. 이성계(李成桂)가 위화도 회군을 단행한 뒤 교주강릉도관찰사(交州江陵道觀察使)로 나갔고, 밀직사(密直使) 겸 대사헌이 되었다가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로 승진하게 되었다.

공민왕 2년(1390년) ‘이초(彛初)의 옥사(獄事)’가 있는 뒤 그 당을 둘러싸고 찬성사 정몽주(鄭夢周)와 대결하고 서로 탄핵했다. 동판도평의사사(同判都評議司事)로 있다가 이성계를 받들어 조선 개국에 크게 공을 세워서 일등공신에 서훈(敍勳)되고 상락백(上洛伯)에 봉해졌다. 정종 1년(1399년) 등국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ㆍ좌정승을 거쳐 영사평부사(領司平府事)를 지낸 다음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봉해진 뒤 관직에서 물러났다. 시호는 익원(翼元).

중종 때 영의정을 지낸 수동(壽童ㆍ1457∼1512)은 자는 미수(眉馬), 호는 만보당(晩保堂)으로 사형(士衡)의 현손(玄孫)이다. 성종 8년(1477년)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檢閱)이 되고 홍문정자(弘文正字)에서 사인(舍人)에 올랐다. 연산군 때 경기도 관찰사와 우찬성(右贊成)을 거쳐 우의정이 되었고, 연산군의 폭정 때도 인재를 잘 써 많은 문신들이 화를 면하게 하였다. 중종반정에 가담하여 정국공신(靖國功臣)의 호를 받고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이 되었고,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다. 특히 예서(隷書)를 잘 써서 필명이 높았다. 시호는 문경(文敬).

수동(壽童)의 아우인 수경(壽卿)은 호는 양한재(養閑齋)로 성종 13년(1482년) 성균관 유생(儒生)으로서 원각사(圓覺寺)의 승려들에게 행패를 부리다가 장형(杖刑)에 처해졌고, 연산군 1년(1495년) 숭불정책에 반대하여 유배되었다. 나중에 풀려나와 1498년 사평(司評)이 되었고, 중종반정(中宗反正)에 참여하여 정국공신(靖國功臣) 3등으로 영안군(永安君)에 봉해지고 병조참지(兵曹參知)가 되었다. 중종 14년(1519년) 영흥부사(永興府使)로 있을 때, 공적이 없다는 조광조(趙光祖)의 탄핵으로 공신록에서 삭제되었다가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조광조 일파가 축출되자 복직되었다.

 


  ▲ 1731년 간행된 영모당(永慕堂) 김질(金質)의 행장과 그를 제향하는 전북 고창군 공음면 칠암리 도암서원(道岩書院). 
 

질(質ㆍ1496∼1516)은 자는 문소(文素), 호는 영모당(永慕堂)으로 사형(士衡)의 후손이다. 효심이 지극하여 부모를 지성으로 봉양하고, 사후에는 묘려(墓廬)를 지키는 등 효행이 뛰어났다. 그가 부친의 제삿날에 제물을 마련할 길이 없어 통곡했더니 꿩이 스스로 부엌에 날아들어서 그 꿩을 잡아 제물로 썼다 하며, 제사에 쓸 간장을 쥐가 흐려 놓아 통곡하니 밤새 쥐가 떼를 지어 장독 아래 모여 죽었다고 한다. 또 48세에 모친상을 당하여 무덤 옆에 여막(廬幕)을 지어 놓고 살았는데, 밤새 한길이 넘게 눈이 내렸으나 여막 둘레에는 눈이 내리지 않아 탄복한 사람들이 그곳을 가리켜 ‘제청산(祭廳山)’이라 이름지었다 한다. 죽은 뒤 효행이 널리 알려져 정문이 세워지고, 무장(茂長)의 도암사(道巖祠)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영모록(永慕錄)’ㆍ‘육사자책설(六事自責說)’ 등이 있다.

이렇듯 세력을 떨치던 구안동 김씨는 인조(仁祖) 때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자점(自點ㆍ1588~1651)이  역모죄(逆謀罪)로 처형되면서부터 정치적인 몰락을 초래하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그후 임진왜란(壬辰倭亂)이라는 역사상 최악의 국난 때 자기 몸을 불사른 충성(忠誠)으로 충의가문(忠義家門)의 명예를 더욱 빛낸 인물 중에 제갑(悌甲)과 그의 조카 시민(時敏)ㆍ시약(時若) 형제가 유명했다.

 

 ▲ 충북 괴산군 능촌리 충민사(忠愍祠) 내에 자리한 문숙공(文肅公) 김제갑(金悌甲)의 묘. 

 

 

 ▲ 문숙공 김제갑(金悌甲)의 묘역 오른쪽에 자리한 아들 참의공(參議公) 김시백(金時伯)의 단소(壇所)와 배위의 묘.

제갑(悌甲ㆍ1525∼1592)은 자는 순초(順初), 호는 의재(毅齋),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명종 8년(1553년)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를 거쳐 정언(正言)ㆍ충청도 관찰사ㆍ창성부사(昌城府使)를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원주목사(原州牧使)로서 왜장 모리[森吉成]의 군사가 쳐들어 오자 관ㆍ의병(官義兵)을 이끌고 싸웠는데 원주성(原州城)이 함락당하자 아들 시백(時伯)과 부인 이씨와 함께 순절하였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1966년 강원도민에 의해 원주역전 광장에 그의 충렬비(忠烈碑)가 세워졌다. 시호는 문숙(文肅). 

 

▲ 임진왜란 때 전공을 세운 충무공(忠武公) 김시민과 문숙공(文肅公) 김제갑의 위패를 봉안한 충민사忠愍祠). 

 

 ▲ 충북 괴산군 능촌리 충민사(忠愍祠) 경내에 자리한 문숙공(文肅公) 김제갑과 충무공(忠武公) 김시민의 신도비.
 

시민(時敏ㆍ1554∼1592)은 자는 면오(勉吾)로 제갑(悌甲)의 형 충갑(忠甲)의 아들이다. 1578년 무과에 급제하고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이 되었을 때 군사에 관한 일을 병조판서에게 건의한 것이 채택되지 않아 관직을 버렸다.1591년 진주판관(晉州判官)이 되어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목사 이경(李璥)과 함께 지리산에 피신하였다가 목사가 병사하자 그 직을 대리하면서 민심을 수습하여 피난했던 성민을 귀향시키고, 성을 수축하고 무기와 기재를 정비하는 한편, 군사의 항오(行伍)를 편성하여 군사체제를 갖추었다.

이때 왜적은 진주의 방위가 허술함을 알고 창원ㆍ진해ㆍ고성으로부터 사천에 집결한 다음 진주로 향하려 하였다. 이에 곤양군수(昆陽郡守) 이광악(李光岳), 의병장 이달(李達)ㆍ곽재우(郭再祐) 등과 함께 적을 격파하고 패주하는 적을 추격, 십수교(十水橋)에서 다시 승리를 거두어 고성ㆍ창원 등 여러 성을 회복하는 등 여러 차례의 전공으로 그해 8월 진주목사(晋州牧使)로 승진되었다. 취임 후 염초(焰硝) 500여 근을 만들고 총통 70여 병을 만들어 정병을 뽑아 이의 사용법을 연마케 하는 등 성을 지키는 방책을 강화하였다. 왜군의 10월 공격에서 적의 대군에게 포위되자 겨우 3,800명의 병력으로 7일간의 공방전 끝에 3만여 명의 적을 사상(死傷)하고 적탄을 맞아 진몰(陣歿)했으나 적에게 비밀로 했다가 안정된 후 상을 치렀다. 선무2등공신(宣武二等功臣)에 녹훈되고 영의정(領議政) 및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무(忠武).

 

 

 ▲ 충북 괴산군 능촌리 충민사(忠愍祠) 경내에 자리한 충무공(忠武公) 김시민(金時敏)의 묘.
 

시민(時敏)의 아우 시약(時若ㆍ?∼1627)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진주목사인 형 시민(時敏)을 도와 진주대첩의 공을 함께 세웠다. 그 후 괴산에 돌아와 의병을 일으키고 선조30년(1597년) 괴산(槐山) 의병의 선봉장(先鋒將)이 되어 창의병(倡義兵)을 거느리고 각지에서 왜적을 격파하였다.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서애 유성룡은 선조께 천거하여 특별히 별장(別將)을 제수받았다. 이후 각처에서 만호와 절충장군(折衝將軍)을 역임하였고, 인조반정 후 통정대부 동부승지(通政大夫同副承旨)에 제수하였으나 고사하였고 곧 의주부윤(義州府尹)으로 임명하였다. 그 뒤 창성부사(昌城府使)가 되었는데 후금의 침략이 걱정되던 때였다. 인조 5년(1627년) 미처 성을 보수하고 전쟁에 대비할 틈도 없이 불시에 대군의 호병(胡兵ㆍ후금)이 공격해 온 정묘호란(丁卯胡亂)에서 중과부적으로 두 아들과 함께 포로가 되었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숙종 9년(1683년) 정문(旌門)이 세워지고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숙(忠肅). 

 


  ▲ 충북 괴산군 청천면 덕평리 가지산에 자리한 충숙공(忠肅公) 김시약(金時若)의 묘. 2001년 묘역을 성역화할 때 발견된 제기유물(15점). 
 

 

치(緻ㆍ1577~1625)는 자는 사정(士精), 호는 남봉(南峰)ㆍ심곡(深谷)으로 부사(府使) 시회(時晦)의 아들로 중부(仲父)인 충무공(忠武公) 시민(時敏)에게 입양되었다. 선조 30년(1597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설서(說書)를 거쳐 1608년에는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광해군 때 사복시정(司僕寺正)ㆍ이조참의(吏曹參議)ㆍ동부승지ㆍ대사간을 거쳐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ㆍ부제학(副提學) 등을 지낸 다음 병조참지(兵曹參知)에 올랐으나 독직사건으로 파면되었다. 한때 이이첨(李爾瞻)의 심복으로 이조(吏曹)에 있으면서 흉한 일을 모의했으며, 대사간으로 있으면서 영창대군(永昌大君) 살해음모를 반대하는 정온(鄭蘊)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광해군의 폭정(暴政)이 심해지자 병을 핑계로 관직에서 물러나 두문불출(杜門不出)하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 때 심기원(沈器遠)과 내통, 벼슬길에 올랐으나 대북파(大北派)에 몰려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동래부사(東萊府使)를 거쳐 1625년에는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천문(天文)에 밝았으나 재물을 탐내어 비난을 받았다.

 


  ▲ 충북 증평군 증평읍 율리에 자리한 충무공(忠武公) 김시민(金時敏)의 아들 김치(金緻)의 묘와 그가 지은 ‘심곡비결(深谷秘訣)’의 김태동 소장본과 국립도서관 소장본(중앙 작은 책자). 

 

 

 ▲ 충익공(忠翼公) 김시양(金時讓)의 아버지인 비안현감(比安縣監) 김인갑(金仁甲)의 묘.

 

비안현감(比安縣監) 인갑(仁甲)의 아들 시양(時讓ㆍ1581∼1643)은 초명은 시언(時言), 자는 자중(子中), 호는 하담(荷潭)으로 선조 38년(1605년) 문과에 급제하여 삼사ㆍ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등의 벼슬을 지냈다. 전라도도사(全羅道都事)로 향시(鄕試)를 주관할 때 시제(詩題)로 왕의 실정(失政)을 비유한 문제를 출제하였다고 하여 종성(鍾城)에 유배되었다가 인조반정으로 풀려나와 예조좌랑(禮曹佐郎)ㆍ병조정랑ㆍ수찬(修撰)ㆍ교리(校理)를 역임하였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도체찰사(都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從事官)으로 활약하여 난이 평정된 뒤 응교(應敎)ㆍ문학(文學)을 겸임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 뒤 서북지방의 경비가 중요시되자 평안도 관찰사로 발탁되었고, 병조판서에 올라 팔도도원수(八道都元帥)ㆍ사도체찰사(四道體察使) 등을 겸임하며 척화(斥和)를 주장하였다. ‘선조실록(宣祖實錄)’을 개수(改修)할 때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겸 판춘추관사(判春秋館事)로서 이에 참여하였으나, 안질로 맹인이 되어 중도에서 사직하였다. 전적(典籍)과 경사(經史)에 밝았으며, 인조 때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시호는 충익(忠翼).
 

 

 ▲ 충북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에 자리한 충익공(忠翼公) 김시양(金時讓)의 묘.

 

시양(時讓)의 아들 휘(徽ㆍ1607∼1677)는 자는 돈미(敦美), 호는 사휴정(四休亭)ㆍ만은(晩隱)으로 인조 20년(1642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봉교(奉敎)로 임명되었으며, 인조 24년(1446년) 민회빈(愍懷嬪) 강씨(姜氏)가 사사(賜死)되자 정언(正言)으로 재직하면서 사사(賜死)의 경위를 규명하라는 일반 사림의 자격으로 소(疏)를 올렸다가 파직되었다. 효종 즉위년(1649년) 부수찬(副修撰)에 기용되고, 이조좌랑(吏曹佐郞)ㆍ이조정랑(吏曹正郞)ㆍ교리(校理)ㆍ응교(應敎)ㆍ헌납(獻納)ㆍ사간(司諫)ㆍ집의(執義) 등을 역임하였다. 현종(顯宗) 연간에는 충청도 관찰사ㆍ도승지ㆍ함경도 관찰사에 이어 현종 6년(1665년)에는 경상도 관찰사에 이어 강화유수(江華留守)ㆍ황해도 관찰사등을 역임하였다. 1666년에는 남인(南人)의 탄핵으로 삭직(削職)당했다가 현종 9년(1668년)에 형조참판을 거쳐 대사헌이 되었다. 숙종 1년(1675년)에는 이조판서를 지내고 이듬해에는 예조판서ㆍ개경유수(開京留守)를 역임하였으며, 그림을 잘 그렸다.

 


  ▲ 1683년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화지리에 세워진 요동백김응하장군묘비(遼東伯金應河將軍廟碑ㆍ강원도유형문화재 제105호)와 영정.
 

응하(應河ㆍ1580∼1619)는 자는 경의(景義)로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동생 응해(應海)와 우애가 지극해 향리에서 칭찬이 자자했다. 선조 37년(1604년) 무과에 급제했으나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하다가 병조판서 박승종(朴承宗)에게 선발되어 선전관이 되었고, 뒤에 박승종이 전라도 관찰사로 내려갈 때 비장(裨將)으로 기용되었다. 그뒤 이항복(李恒福)에 의해 경원판관(慶源判官)이 되었고, 삼수군수(三水郡守)·북우후(北虞侯)로 있으면서 국경지대의 방비를 튼튼히 했다. 광해군 10년(1618년) 명나라가 후금을 칠 때 조선에 원병을 청해오자 도원수 강홍립(姜弘立)을 따라 좌영장(左營將)이 되어 후금 정벌에 종군했다. 이때 명나라의 도독(都督) 유정(劉綎)이 경솔하게 행동하여 부차령(富車嶺)에서 패전하자 유정(劉廷)은 자살하고 그는 부하 3천명을 거느리고 적군 6만과 대치하여 싸우다가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적군에게 포위되어 몸에 수십 대의 화살과 창을 맞고 장렬히 전사하였다.

오랑캐들은 장군의 용맹과 충절에 감격하여 버드나무 밑에 장군을 묻고 유하장군(柳下將軍ㆍ버드나무밑에서 전사한 장군)이라는 푯말을 세워 주었다. 광해군 12년(1620년) 명나라 신종(神宗) 황제는 장군에게 요동백(遼東伯)을 봉(封)하고 처자에게 백금(白金)을 하사했으며, 우리 조정에서도 충무공(忠武公)의 시호를 내리고 영의정을 추증하였다. 현종 7년(1666년) 철원군 철원읍 화지리에 사당을 짓고 이듬해 7월에 사액(賜額)하였으며 사당의 칭호는 포충사(褒忠祠)이다. 현재 철원군 동송읍 양지리 여우산(如愚山ㆍ一名 軍糧峰) 기슭에 장군의 의관(衣冠)만으로 조성한 묘역(墓域)이 있다.
 

 

 ▲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양지리 여우산(如愚山) 기슭에 김응하(金應河) 장군의 의관(衣冠)만으로 조성한 묘역.
 

근대에 와서는 백범(白凡) 구(九)가 유명하였는데 그는 15세에 학자 정문재(鄭文哉)에게 한학(漢學)을 배우고, 18세 때 동학(東學)에 들어가 일찍부터 민권투쟁(民權鬪爭)의 선봉이 되었으며, 일본군 중위(中尉)를 때려죽인 죄로 사형 언도를 받았으나 탈옥하여 한때 중이 되기도 하였다. 그후 안중근 의사(安重根義士)의 이등방문 암살사건에 관련되어 투옥되었고, 3ㆍ1운동 후 상해로 망명한 그는 임시정부의 경무국장ㆍ내무총장ㆍ국무령(國務領)을 역임하면서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조직, 2년 뒤인 1930년 1월 이봉창(李奉昌)ㆍ윤봉길(尹奉吉) 등의 의거(義擧)를 지휘하며 현상이 붙은 채 상해(上海)를 탈출, 남경(南京)에서 장개석(蔣介石)을 만나 한국인 대일(對日) 전투 방책을 협의, 한국국민당을 조직했다. 1940년 중경(重慶)에서 임시정부 주석이 되어 광복군(光復軍)을 조직하여 항일전을 전개했으며, 해방이 되자 귀국하여 한독당(韓獨黨) 당수로 있다가 경교장(京橋莊)에서 육군 소위 안두희(安斗熙)에게 암살당함으로써 그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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