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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김씨 세계

안산 김씨(安山金氏)의 연원

by 연송 김환수 2014. 7. 25.
안산 김씨(安山金氏)의 연원
 

안산(安山)은 경기도 시흥군(始興郡) 수암면(秀岩面)의 옛 지명으로, 고구려(高句麗) 때는 장구현(獐口縣)이었다가 고려 초에 안산(安山)으로 개칭되었으며, 1913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시흥에 병합되었다.

 

시조(始祖) 김긍필(金肯弼)은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넷째 아들 대안군(大安君) 은열(殷說)의 후손으로(혹은 신라 태종 무열왕의 후손이라고도 함)으로 고려 현종 15년(1024년) 상서좌복야 상주국 안산현 개국후(尙書左僕射上柱國安山縣開國候)에 추봉되고 식읍(食邑) 1500호(戶)를 하사받아, 후손들이 안산(安山)에 정주(定住)하면서 관향(貫鄕)을 안산(安山)으로 하게 되었다고 한다. 1975년 고려 문종 때 사람인 경덕국사(景德國師)의 묘지석(墓誌石)이 발견되면서 기존에 알던 김긍필(金肯弼)이 김긍필(金兢弼)로 바뀌었다고 한다.

계파(系派)로는 의천파(義川派)ㆍ강진파(康津派)ㆍ황해도맹감파(黃海道孟鑑派)ㆍ합천파(陜川派)ㆍ안산파(安山派)ㆍ한산파(韓山派)ㆍ황해도맹균파(黃海道孟鈞派)ㆍ포천파(抱川派)ㆍ천안파(天安派)ㆍ괴산파(槐山派)ㆍ청산파(靑山派)ㆍ장단파(長湍派)로 나뉘어졌다.

 

▲ 영조 52년(1776년) 발간된 ‘안산김씨족보’.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 김은부(金殷傅) 이후 상계를 정확히 상고할 수 없어 충익공(忠翊公) 위(渭)가 일세조로 표시된 족보.

 

시조(始祖) 김긍필(金肯弼)의 아들 은부(殷傅ㆍ?∼1017)는 수주(水州) 안산현(安山縣)에서 출생했으며, 성종 때 견관승(甄官丞), 목종 때 어주사(御廚使)를 거쳐 현종 초에 공주절도사(公州節度使)가 되었다. 공주절도사(公州節度使)에 재임시인 현종 2년(1011년) 거란(契丹)의 침입으로 왕이 공주(公州)로 피난왔을 때 지성으로 시종하였고, 왕이 나주까지 피난갔다가 다시 공주(公州)에 돌아오자 장녀로 하여금 어의(御衣)를 지어 바치게 하여 왕비가 되니 그가 바로 원성왕후(元成王后)이다.

뒤에 다시 두 딸을 왕비로 바치니 원혜왕후(元惠王后)와 원평왕후(元平王后)이다. 그해 형부시랑(刑部侍郞)으로 거란 왕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거란에 다녀왔으며, 지중추사(知中樞事)ㆍ호부상서(戶部尙書)에 승진하고 중추사상호군(中樞使爽護軍)이 되었다. 죽은 뒤 국구(國舅)로서 추충수절창국공신 개부의동삼사 수사공 상주국 안산군개국후(推忠守節昌國功臣開府儀同三司守司空上柱國安山郡開國侯)에 추증되었다.

▲ 은부(殷傅) 이후 실전되었던 상계가 자세히 기록된 안산 김씨 족보.
 

그러나 은부(殷傅) 이후 세계가 실전되어 상계를 정확히 상고할 수 없어 고려에서 정난공신(靖難功臣)으로 낙랑군(樂浪君) 개국백(開國伯)에 봉해져 충익공(忠翊公)에 오른 위(渭)를 일세조로 삼고 안산(安山)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안산김씨대종사(安山金氏大宗史ㆍ1973년刊)’를 보면 시조 김긍필(金肯弼)로부터 14세손에 이르기까지 소목(昭穆)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안산김씨대종사(安山金氏大宗史)’에 의하면, 은부(殷傅)는 인천 이씨(仁川李氏)의 시조 이허겸(李許謙)의 딸을 배위(配位)로 맞아 2명의 아들을 두었다. 맏아들 충찬(忠贊ㆍ?∼1036)은 현종 16년(1025년)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가 되고, 덕종 2년(1033년) 예빈경지중추원사(禮賓卿知中樞院事)를 거쳐서 이듬해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가 되었다. 정종 1년(1035년) 병부상서(兵部尙書)로 옮겼다가 이듬해 지중추원사 병부상서로 죽었으며, 거란에 대해선 화호책(和好策)을 썼다. 시호는 공정(恭靖).
 

▲ 김은부(金殷傅)의 작은 아들로 왕사가 된 경덕국사(景德國師)의 묘지석.

은부(殷傅)의 작은 아들 난원(爛圓)은 화엄종(華嚴宗) 승려로서 문종 12년(1058년)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여 왕사가 되었고, 도승통(都僧統)을 역임하였다. 문종 19년(1065년) 문종의 아들인 후(煦ㆍ대각국사 의천)를 중이 되게 하였고 화엄교관(華嚴敎觀)을 가르쳤다. 구룡산(九龍山) 복흥사(福興寺) 주지를 지내다 죽은 후에 복흥사에 비를 세우고 시호로 경덕(景德)을 내리고 국사(國師)로 추존하였다. 그의 묘지(墓誌)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3세 충찬(忠贊)의 손자인 경용(景庸ㆍ1041~1125)은 아버지는 병부상서 원황(元晃)으로, 합문지후(閤門祗候)를 거쳐 광주판관(廣州判官)으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 어사중승(御史中丞)을 거쳐 숙종 3년(1098년) 좌우유덕(左右諭德)ㆍ상서이부시랑 지어사대사(尙書吏部侍郎知御史臺事), 1101년 병부상서 동지추밀원사(兵部尙書同知樞密院事), 1103년 지추밀원사, 1105년 판상서공부사(判尙書工部事)가 되고, 예종이 즉위하자 태자태사 수사공(太子太師守司空)ㆍ좌복야 참지정사(左僕射參知政事)ㆍ서경유수사(西京留守使)가 되었다.

1109년 평장사(平章事)로서 최홍사(崔弘嗣) 등과 함께 윤관(尹瓘)ㆍ오연총(吳延寵) 등의 여진정벌에 패한 책임을 들어 극론하고, 구성(九城) 환부를 강력히 주장하여 이를 실현하게 했다. 1110년 문하시랑 평장사 판형부사(門下侍郎平章事判刑部事), 1112년 문하시중으로 협모위사공신(協謀衛社功臣)의 호가 더해지고 이듬해에 수태부 판상서이부사(守太傅判尙書吏部事)로서 낙랑백(樂浪伯)에 봉해졌다. 여러 차례 벼슬길에서 물러나려 하므로 왕이 특별히 좌부승선(左副承宣) 안당영(安唐潁)을 보내 궤장(?杖)을 하사하고 얼마 후 허락했다. 예종 17년(1122년)에는 광국동덕익성공신(匡國同德翊聖功臣)에 낙랑공(樂浪公)이 되었으며, 예종으로부터 당시 최고의 국로(國老) 대접을 받았다.

 

▲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김은부(金殷傅)ㆍ김경용(金景庸)ㆍ김인규(金仁揆).

 

경용(景庸)의 아들 인규(仁揆ㆍ?~1142)는 과거에 급제하여 예종 12년(1117년) 급사중 추밀원좌승선 겸 태자좌찬선(給事中樞密院左承宣兼太子左贊善)이 되었고, 1122년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가 되었다. 이해에 지주사(知奏事)로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진사 나경순(羅景純) 등 31인의 급제자를 선발하였다. 인종 1년(1123년) 동지추밀원사, 1124년 검교사공 이부상서 지문하성사(檢校司空吏部尙書知門下省事), 1125년 참지정사가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이자겸(李資謙)이 패하자 이자겸의 아들 언(彦)이 사위였기 때문에 연좌되어 지춘주사(知春州事)로 좌천되었다. 그뒤 복직되어 1135년에 호부상서로서 예부낭중 왕창윤(王昌胤)과 금나라에 가서 희종(熙宗)의 등극을 축하하였고, 뒤에 수사공 좌복야 참지정사(守司空左僕射參知政事)를 지냈다. 성품이 너그러우며 인물이 출중하여 송(宋)나라 사신 서긍(徐兢)이 ‘고려도경(高麗圖經)’에서 그를 칭찬하였다.

인규(仁揆)의 아들 지우(之祐ㆍ1108~1151)는 자는 기복(基福)으로 관후(寬厚)한 성품이었으며, 어려서부터 문학을 좋아했다. 음서(蔭敍)로서 양온령동정(良?令同正)이 되었으며, 그뒤 대악서승(大樂署丞)ㆍ예빈주부(禮賓注簿)ㆍ선경부사인(善慶府舍人) 등을 역임하였다. 1148년 합문지후(閤門祗候)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안서도호부판관(安西都護府判官)으로 지방으로 나가 일을 잘 처리하였다. 청렴하고 강직하다는 칭송을 들었다.

 

▲ (上)경기도 하남시 감북동에 자리한 위정공(威靖公) 김정경(金正卿)의 묘. (下)위정공(威靖公)을 제향하는 충북 괴산군 장연면 광진리 위정사(威靖祠ㆍ충북문화재자료 제12호).

 

충익공(忠翊功) 위(渭)는 고려조에서 정난공신(靖難功臣)에 올랐으며, 그의 증손 정경(正卿ㆍ1345~1419)은 진주목사(晋州牧使) 성경(星慶)의 아들이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 일찍이 고려 때에 벼슬하였으나, 새 왕조 창업에 찬성하고 이성계(李成桂)를 지지하였다. 조선 개국 후 삼군절도사(三軍節度使)를 거쳐 이조전서(吏曹典書)를 지냈는데, 인사관리를 잘하였다. 태조 5년(1396년) 판예빈시사(判禮賓寺事)가 되어 전라도와 충청도 각지의 성을 수축하고 군비를 점검하는 한편 병선(兵船)의 허실을 조사하였다. 정종 2년(1400년) 방간(芳幹)의 난이 일어나자 한성부윤(漢城府尹)으로서 방원(芳遠)에 협력하여 이를 진압, 좌명공신(佐命功臣) 4등에 책록되고, 연성군(蓮城君)에 봉해졌다. 이에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안산(安山)으로 하였다.


태종 6년(1406년) 공안부윤(恭安府尹)이 되었는데, 병을 핑계로 명나라의 사행(使行)을 회피하여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태종 8년(1408년) 좌군 도총제(左軍都摠制)가 되고, 1409년에는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를 역임하고, 1410년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삼군 절도사(三軍節度使)를 거쳐 이조전서(吏曹典書)가 되었다. 용맹하고 매사에 적극적이었으나, 재물을 좋아하여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시호는 위정(威靖).


 

▲ (左)위정공(威靖公) 김정경(金正卿)의 셋째 부인으로 경기도 광주군 서부면 감북리에 자리한 화혜택주(和惠宅主) 개성 왕씨의 묘. (右)위정공과 합장된 부인 평산 신씨와 교하 노씨의 묘비.

정경(正卿)은 아들 다섯 명이 모두 관직에 올랐는데, 그중 장남 지(沚)와 삼남 척(滌)은 별장(別將)을 지냈고, 차남 관(灌)은 상호군(上護軍ㆍ정3품 무관직)을 지냈으며, 넷째 개(漑)는 세종 4년(1422년) 음보(蔭補)로 벼슬에 등용되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올랐고, 막내 한(澣)은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를 역임하여 가문을 크게 중흥시켰다.

 ▲ 위정공(威靖公) 김정경(金正卿)의 넷째 아들 평호공(平胡公) 김개(金漑)의 이름이 음각된 흥천사(興天寺) 종.

 

▲ 위정공(威靖公) 김정경(金正卿)의 막내아들로 괴산파(槐山派) 파조인 안성위(安城尉) 김한(金澣)의 묘.

 

그외 승문원 교감(承文院校勘)을 지낸 맹강(孟綱)의 아들 필(珌)은 당대의 성리학자 김식(金湜)의 문하에서 글을 배워 중종 14년(1519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전적(典籍)이 되었으나, 김식(金湜)이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연루되어 유배될 때 전송하여 처벌을 받은 후 정신이상을 가장하고 공사(公事)에서 물러났다.

 

▲ 충남 아산군 배방면 휴대리에 자리한 승문원 교감(承文院校勘) 김맹강(金孟綱)의 묘.

▲ 김맹강(金孟綱)의 아들 전적(典籍) 김필(金珌)의 묘

 

정조 19년(1795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한 처암(處巖)은 진사(進士) 양직(養直)의 아들로, 여러 벼슬을 거쳐 지평(持平)으로 추관(推官)되어 조인을 엄징하지 않은 죄로 순천(順天)에 유배(流配)되었다가 풀려나와 순조(純祖) 때 집의(執義)를 지냈다.


명국(明國ㆍ1600∼?)은 일명 명국(鳴國)ㆍ명국(命國)으로 자는 천여(天汝), 호는 연담(蓮潭)ㆍ취옹(醉翁)이며, 1636년과 1643년 두 차례에 걸쳐 통신사의 수행 화원으로 일본에 건너가 명성을 크게 떨쳤다. 1647년 창경궁 중수공사 때 화원 6명과 화승 66명을 데리고 책임 화원으로 일했으며, 1651년에는 한시각(韓時覺) 등과 함께 현종명성후 가례도감 의궤반차도(顯宗明聖后嘉禮都監儀軌班次圖) 제작에 참여하였다. 성격이 호방하고 해학에 능했으며 그의 집 앞에는 그의 그림을 얻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기도 했다고 전해지는데, 술을 좋아하여 몹시 취해야만 그림을 그리는 버릇이 있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화가 중 가장 거칠고 분방한 필법을 구사했던 인물로 유명하며, 사후에 ‘신필(神筆)’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대표작으로 ‘설중귀려도(雪中歸驢圖)’, ‘기려인물도(騎驢人物圖)’, ‘달마도(達磨圖)’ 등이 있다.

 

 

 연담(蓮潭) 김명국(金明國)의 달마도(達磨圖)와 설중귀려도(雪中歸驢圖).

 

그밖의 인물로는 호조참판(戶曹參判)을 지낸 휘(暉)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취길(就吉),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 취의(就義) 등이 유명했고, 성옥(聲玉)은 대사간(大司諫ㆍ정3품)을 역임하여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형(炯), 공조참의(工曹參議) 상빈(尙彬)과 함께 가문의 전통을 이었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경념(敬念)이 옥성(玉城)ㆍ흥명(興明)ㆍ선화(善化) 등 여러 학교를 설립하여 젊은 청년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켰다. 3·1운동에 참가한 후 독립신보(獨立新報)를 발간하고 해방후에는 반탁(反託) 운동에 참가했으며, ‘대한독립사(大韓獨立史)’를 편찬하는 등 훌륭한 업적을 남겨 가문을 더욱 빛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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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조

안산김씨(安山金氏)는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넷째 아들 대안군(大安君) 김은열(金殷에說)의 후손 김긍필(金肯弼)을 시조(始祖)로 한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그는 1024년 (고려 현종 15) 상서 좌복야(尙書左僕야)․상주국(上柱國)․안산현 개국후(安山縣開國候)에 추봉되고 식음(食邑) 1500호(戶)를 하사(下賜)받아, 후손들이 안산(安山)에 정주(定住)하면서 관향(貫鄕)을 안산(安山)으로 하게 되었다고 한다.

 

□ 본관의 유래

안산(安山)은 경기도 시흥군(京畿道始興郡) 수암면(秀岩面)의 옛 지명으로 고구려(高句麗) 때는 장구현(獐口縣)이었다가 고려(高麗) 초에 안산(安山)으로 개칭되었으며, 서기 1913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시흥에 병합되었다.

시조의 아들 은부(殷傅)는 공주 절도사(公州節度使)에 재임시 1011년(현종2) 거란(契丹)의 침입으로 왕(王)이 공주(公州)로 피난왔을 때 지성으로 시종하였고, 맏딸은 어의(御衣)를 지어 바친 인연으로 왕비(王妃 : 원성왕후)가 되었으며, 차녀(次女)는 원혜왕후(元惠王后), 삼녀(三女)는 원평왕후(元平王后)가 되어 세도가문(勢道家門)으로서의 지위를 굳혔다.

 

그러나 그후의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되어 상계(上系)를 정확히 상고(詳考)할 수 없으므로 고려조(高麗祖)에서 정난공신(靖難功臣)에 오른 충익공(忠翊功) 위(渭)를 일세조(一世祖역)하여 세계(世系)를 계승하고 있다.

 

□ 대표적인 인물

위(渭)의 증손(曾孫) 정경(正卿)은 조선 태조(太祖) 때 판예빈시사(判禮賓시事)를 지내고 정조사(正祖使)가 되어 명(明)나라에 다녀왔으며, 1400년(정조 2) 제2차 왕자(王子)의 난(亂) 때 공(功)을 세워 좌명사등공신(佐命四等功臣)으로 연성군(蓮城君)에 봉해졌고, 뒤에 이부 상서(吏部尙書)를 거쳐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이르렀다.

 

그의 다섯아들중 맏아들 지(沚랑)와 셋째 척(滌)은 별장(別將)을, 차남 관(灌)은 상호군(上護軍)을 지냈으며, 넷째 개(漑궁)는 1422년(세종 4) 음보(蔭補)로 벼슬에 등용되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올랐고, 막내 한(澣고)은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를 역임하여 가문에 크게 중흥시켰다.

 

또한 1519년(중종 14)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한 필(珌)은 승문원 교감(承文院校勘)을 지낸 맹강(孟綱)의 아들로 예조판서(禮曹判書) 맹철(孟鐵), 대제학(大提學) 지(地), 진주목사(晋州牧使) 자형(自刑), 공조참의(工曹參議) 창(敞), 형조참의(刑曹參議) 영(瑛)과 함께 이름을 날렸다.

 

그밖의 인물(人物)로는 호조참판(戶曹參判)을 지낸 휘(暉)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취길(就吉),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 취의(就義)․준(준) 등이 유명했고, 성옥(聲玉)은 대사간(大司諫 : 간쟁과 논박을 맡았던 사간원의 정3품 으뜸 벼슬)을 역임하여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형(炯), 공조참의(工曹參議) 상빈(尙彬)과 함께 가문의 전통을 이었다.

 

1795년(정조 19)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한 처암(處巖)은 진사(進士) 양직(養直)의 아들로 태어나 여러 벼슬을 거쳐 지평(持平)으로 추관(推官)이 되어 조인을 엄징하지 않은 죄로 순천(順天)에 유배(流配)되었다가 풀려나와 순조(純祖) 때 집의(執義)를 지냈으며, 명국(命國)은 인조(仁祖) 때 화가(畵家)로 인물(人物)과 수석(水石)을 잘 그렸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경념(敬念)이 옥성(玉城)․흥명(興明)․선화(善化) 등 여러학교를 설립하여 젊은 청년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켰으며, 3․1운동에 참가한 후「독립신보(獨立新報)」발간하고, 해방후에는 반탁(反託) 운동에 참가했으며「대한독립사(大韓獨立史)」를 편찬하는 등 훌륭한 업적을 남겨 가문을 더욱 빛냈다.

 

□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안산김씨(安山金氏)는 남한(南韓)에 16,99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 역대인물(歷代人物) - 안산김씨 조상 인물

 

김위(金 渭) 시호는 충익(忠翊). 고려(高麗)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다.

김원상(金元祥) 고려 때 대제학(大提學)․상호군(上護軍)을 역임하였다.

김성경(金星慶) 고려조(高麗朝)에 진주목사(晋州牧使)를 지냈다.

김주경(金珠慶) 고려 때 판서(判書)를 역임했다.

 

김정경(金定卿) 1345 (고려 충목왕 1) ~ 1419 (세종 1)

시호는 위정(威靖), 성경(星慶)의 아들. 1396년(태조 5) 판예빈시사(判禮賓侍事), 1406년 공안부윤(恭安府尹)으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00년(정종 2) 제2차 왕자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좌명공신(佐命功臣) 4등으로 연성군(蓮城君)에 봉해졌으며, 1410년(태종 10) 성절사(聖節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오고 삼군절도사(三軍節度使)를 거쳐 이조 전서(吏曹典書)가 되었다.

 

김이용(金利用) 조선(朝鮮) 때 별장(別將)을 지냈다.

김지(金 沚) 조선시대에 별장(別將)을 역임했다.

김관(金 灌) 조선때 상호군(上護軍)에 이르렀다.

김척(金 滌) 조선조(朝鮮朝)에 별장(別將)을 역임하였다.

 

김개(金 漑) 1405 (태종 5) ~ 1484 (성종 15)

자는 선택(宣澤), 시호는 평호(平胡), 연성군(蓮城君) 정경(定卿)의 아들. 1422년(세종 4) 음보(蔭補)로 남부녹사(南部錄使)가 되고, 전농시 주부(轉農寺主簿)․대호군(大護軍)․판통례문사(判通禮門事)․상서원 소윤(尙瑞院少尹)․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등을역임, 1455년(단종 3)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가 되었다. 1458년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지중추부사를 거쳐 좌참찬(左參贊)이 되었고 1473년(성종 4)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지냈다.

 

김한(金 澣) 1409 (태종 9) ~ 1485 (성종 16)

시호는 호평(胡平), 연성군(蓮城君) 정경(定卿)의 아들, 부인은 정종의 딸 고성옹주(高城翁主). 1457년(세조 2)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로 성절(聖節) 겸 천추부사(千秋副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김암(金 巖) 조선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김정(金 淨) 조선(朝鮮) 때 판결사(判決事)를 역임했다.

김맹강(金孟綱) 조선조(朝鮮朝)에 승문원 교감(承文院校勘)을 지냈다.

김맹전(金孟銓) 조선 시대에 사재감(司宰監)에 이르렀다.

김을신(金乙臣) 조선(朝鮮) 때 중군사직(中軍司直)에 올랐다.

김맹현(金孟鉉) 조선 때 중추부사(中樞府事)를 역임했다.

김맹철(金孟鐵) 조선(朝鮮) 때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역임하였다.

김지(金 地) 조선 시대에 대제학(大提學)을 지냈다.

김맹일(金孟鎰) 조선 때 직장(直長)을 역임했다.

 

김필(金 珌) 자는 자수(子修), 호는 모기재(慕箕齋), 맹강(孟綱)의 아들. 김 식(金 湜)의 문인, 1519년(중종 14)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 전적(典籍)에 이르렀다.

 

김임(金 琳) 조선조(朝鮮朝)에 중추부사(中樞府事)에 이르렀다.

김자형(金自荊) 조선(朝鮮) 때 진주목사(晋州牧使)를 지냈다.

김곤(金 坤) 조선조(朝鮮朝)에 판결사(判決事)를 역임했다.

김치화(金致和) 조선(朝鮮) 때 돈령부 도정(敦寧府都正)을 지냈다.

김건수(金乾壽) 조선시대에 부사과(副司果)에 올랐다.

김위(金 瑋) 조선 때 부정(副正)을 지냈다.

김광준(金光俊) 조선(朝鮮) 때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봉해졌다.

김창(金 敞) 조선조(朝鮮朝)에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이르렀다.

김영(金 瑛) 조선 때 형조참의(刑曹參議)에 올랐다.

김경효(金敬孝) 조선(朝鮮) 때 판관(判官)을 지냈다.

김사공(金士恭) 조선 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다.

김사온(金士溫) 조선 시대에 포천현감(抱川縣監)을 지냈다.

김사양(金士讓) 조선조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다.

김언량(金彦樑) 조선(朝鮮) 때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김익수(金益粹) 조선(朝鮮) 때 진주목사(晋州牧使)에 올랐다.

김의정(金義精) 조선 때 무안현감(務安縣監)을 지냈다.

김인손(金仁孫) 조선조(朝鮮朝)에 부사과(副司果)를 역임하였다.

김감(金 瑊) 조선시대에 별좌(別座)를 지냈다.

김손(金 遜) 조선(朝鮮) 때 부사과(副司果)에 올랐다.

김휘(金 暉) 조선 때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이르렀다.

김수온(金守溫) 조선시대에 중추부사(中樞府事)를 지냈다.

김취길(金就吉) 조선조(朝鮮朝)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했다.

김취의(金就義) 조선 때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를 지냈다.

김영주(金永柱) 조선시대에 첨정(僉正)에 이르렀다.

김사석(金思錫) 조선 때 상호군(上護軍)에 올랐다.

 

김명국(金命國) 초명은 명국(明國), 자는 천여(天汝), 호는 연담(淵潭)․국담(菊潭)․취옹(醉翁). 도화서(圖畵署)의 화원(畵員)을 거쳐 사학교수(四學敎授)가 되었고, 1636년(인조 14) 통신사(通信使)를 따라 일본에 다녀왔다.

 

김상보(金相輔) 조선시대에 호조참의(互助參議)를 역임했다.

김상경(金相經) 조선때 중추부사(中樞府事)를 역임했다.

김붕(金 鵬) 조선조(朝鮮朝)에 주부(主簿)에 올랐다.

김응두(金應斗) 조선시대에 현령(縣令)을 지냈다.

김서진(金瑞珍) 조선 때 훈도(訓導)를 역임했다.

김언재(金彦梓) 조선조에 부사과(副司果)에 이르렀다.

김찬(金 讚) 조선(朝鮮) 때 좌승지(左承旨)를 지냈다.

김항(金 沆) 조선조(朝鮮朝)에 병조정랑(兵曹正郞)을 역임했다.

김언규(金彦珪) 조선(朝鮮) 때 목천군수(木川郡守)에 이르렀다.

김환(金 丸) 조선 때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역임했다.

김경린(金景麟) 조선 시대에 사찰(司察)을 지냈다.

김중정(金重鼎) 조선조(朝鮮朝)에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이르렀다.

김만령(金萬齡) 조선 때 사직(司直)을 지냈다.

김인수(金麟壽) 조선시대에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이르렀다.

김효원(金孝元) 조선조에 훈련원 판사(訓鍊院判事)에 올랐다.

김여득(金麗得) 조선(朝鮮) 때 금위대장(禁衛大將)을 지냈다.

김재용(金在鎔) 조선 때 중추부사(中樞府事)를 역임했다.

김시정(金始精) 조선조(朝鮮朝)에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올랐다.

김말(金 秣) 조선(朝鮮) 때 정읍 현감(井邑縣監)에 이르렀다.

김진(金 震) 조선 때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역임하였다.

김영민(金英敏) 조선조(朝鮮朝)에 부사직(副司直)을 지냈다.

김영철(金英哲) 조선 시대에 부사직(副司直)에 이르렀다.

김정준(金廷俊) 조선(朝鮮) 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올랐다.

김희(金 曦) 조선 때 판관(判官)을 지냈다.

김성옥(金聲玉) 조선 시대에 대사간(大司諫)을 역임했다.

김석명(金錫命) 조선조(朝鮮朝)에 충청 병마절도사(忠淸兵馬節度使)․부총관(副摠官) 등을 지냈다.

김석범(金錫範) 조선(朝鮮) 때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역임했다.

김석민(金錫民) 조선시대에 오위장(五衛將)에 올랐다.

김석후(金錫厚) 조선 때 중추부사(中樞府事)에 이르렀다.

김석규(金錫圭) 조선 때 무과(武科)에 급제, 부사(府事)를 역임했다.

김석보(金錫保) 조선조(朝鮮朝)에 경상좌도 병마절도사(慶尙左道兵馬節度使)를 지냈다.

김덕강(金德剛) 조선(朝鮮) 때 군자감 주부(軍資監主簿)에 이르렀다.

김계훈(金繼勳) 조선 시대에 우후(虞侯)를 지냈다.

김억령(金億齡) 조선 때 돈령부 부정(敦寧府副正)에 올랐다.

김정준(金廷俊) 조선조(朝鮮朝)에 첨지부사(僉知府事)에 올랐다.

김유현(金有鉉) 조선시대에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역임했다.

김정(金 鼎) 조선(朝鮮) 때 단성 현감(丹城縣監)을 지냈다.

김천(金 천) 조선조(朝鮮朝)에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이르렀다.

김정원(金定遠) 조선 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했다.

김몽취(金夢就) 조선시대에 판관(判官)을 지냈다.

김흥성(金弘星) 조선(朝鮮) 때 중추부사(中樞府事)를 지냈다.

김현(金 鉉) 조선 때 형조 참의(刑曹參議)에 이르렀다.

김순행(金順行) 조선조에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올랐다.

김득길(金得吉) 조선(朝鮮) 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했다.

김득윤(金得潤) 조선조(朝鮮朝)에 주부(主簿)를 지냈다.

김득화(金得和) 조선(朝鮮) 때 직장(直長)에 올랐다.

김응규(金應奎) 조선 때 판관(判官)을 지냈다.

김세채(金世彩) 조선시대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김진화(金振和) 조선조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했다.

김진석(金震錫) 조선조(朝鮮朝)에 부사과(副司果)를 지냈다.

김덕일(金德馹) 조선 시대에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에 올랐다.

김덕록(金德騄) 조선(朝鮮) 때 교수관(敎授官)을 역임했다.

김지웅(金枝雄) 조선조(朝鮮朝)에 부사과(副司果)에 이르렀다.

김기현(金起賢) 조선(朝鮮) 때 무선전관(武宣傳官)을 지냈다.

김성옥(金聲玉) 조선 때 첨사(僉使)에 올랐다.

김상두(金相斗) 조선시대에 오위도총부 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을 지냈다.

김상태(金相兌) 조선(朝鮮) 때 현감(縣監)에 이르렀다.

김상정(金相鼎) 조선조에 양주목사(楊洲牧使)에 올랐다.

김상기(金相箕) 조선조(朝鮮朝)에 여산부사(礪山府使)를 역임했다.

김상익(金相翼) 조선때 남포현감(藍浦縣監)에 이르렀다.

김상벽(金相璧) 조선시대에 삼화 방어사(三和防禦使)를 지냈다.

김정오(金定五) 조선(朝鮮) 때 지례현감(知禮縣監)을 역임했다.

김양오(金養吾) 조선 때 좌승지(左承旨)에 이르렀다.

김양호(金養浩) 조선조(朝鮮朝)에 병조참판(兵曹參判)을 지냈다.

김양일(金養一) 조선시대에 장단방어사(長端防禦使)를 역임했다.

김양정(金養正) 조선(朝鮮) 때 자산 부사(慈山府使)에 이르렀다.

김양중(金養中) 조선조(朝鮮朝)에 숙천 부사(肅川府使)에 올랐다.

김양의(金養義) 조선시대에 풍덕부사(豊德府使)에 올랐다.

김양성(金養性) 조선 때 영장(營將)을 역임했다.

김양회(金養晦) 조선 시대에 흥해 군수(興海郡守)를 지냈다.

김양후(金養厚) 조선(朝鮮) 때 부사(府使)를 역임했다.

김양화(金養和) 조선조(朝鮮朝)에 경상좌수사(慶尙左水使)를 지냈다.

김순걸(金舜傑) 조선 때 군자감정(軍資監正)에 올랐다.

김준정(金俊鼎) 조선(朝鮮)때 공조 참의(工曹參議)를 역임했다.

김시견(金時堅) 조선 시대에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이르렀다.

김의중(金義重) 조선조(朝鮮朝)에 주부(主簿)를 지냈다.

김필택(金必澤) 조선 때 진해현감(鎭海縣監)에 올랐다.

김중명(金重命) 조선(朝鮮) 때 중추부사(中樞府事)를 지냈다.

김형(金 炯) 조선조(朝鮮朝)에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역임했다.

김상빈(金尙彬) 조선 때 공조참의(工曹參議)를 지냈다.

김양심(金養心) 조선시대에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다.

김처열(金處說) 조선(朝鮮) 때 지평 현감(砥平縣監)에 올랐다.

김처헌(金處憲) 조선 때 도총관(都摠管)을 지냈다.

김처한(金處漢) 조선 시대에 부총관(副摠官)을 역임했다.

김처겸(金處謙) 조선조(朝鮮朝)에 거창 부사(居昌府使)에 이르렀다.

김처곤(金處坤) 조선(朝鮮) 때 부산 첨절제사(釜山僉節制使)를 지냈다.

김처승(金處升) 조선조(朝鮮朝)에 다대 첨절제사(多大僉節制使)를 역임했다.

김제량(金悌良) 조선시대에 정언(正言)을 지냈다.

김태화(金兌華) 조선(朝鮮) 때 송라찰방(松蘿察訪)에 올랐다.

김노 : 조선조에 중추부사(中樞府事)에 이르렀다.

김종윤(金宗潤) 조선 때 예조 참의(禮曺參議)를 역임했다.

김환지(金還之) 조선 시대에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지냈다.

김충지(金忠之) 조선조(朝鮮朝)에 중추부사(中樞府事)에 이르렀다.

김중연(金重延) 조선(朝鮮) 때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김처암(金處巖) 자는 중려(仲礪), 1795년(정조 19) 진사(進士)로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고, 지평(持平) 등 여러벼슬을 거쳐 순조(純祖)때 집의(執義)에 이르렀다.

 

김성신(金省身) 조선 시대에 장연 현감(長連縣監)을 역임했다.

김경신(金敬身) 조선 때 운봉현감(雲峰縣監)을 지냈다.

김화종(金和鍾) 조선(朝鮮) 때 정언(正言)에 이르렀다.

김익종(金益鍾) 조선조(朝鮮朝)에 해미 현감(海美縣監)을 지냈다.

김기종(金箕鍾) 조선 때 도총부 도사(都摠府都事)에 올랐다.

김태종(金兌鍾) 조선시대에 영장(營將)을 지냈다.

김우종(金禹鍾) 조선조(朝鮮朝)에 참상부장(參上部將)을 역임했다.

김회종(金會鍾) 조선 때 진해 현감(鎭海縣監)을 지냈다.

김주종(金朱鍾) 조선(朝鮮) 때 승지(承旨)를 역임했다.

김홍종(金洪鍾) 조선조(朝鮮朝)에 부사과(副司果)에 이르렀다.

김응개(金應凱) 조선(朝鮮) 때 부총관(副摠官)에 이르렀다.

김천경(金千璟) 조선 시대에 정주 목사(定州牧使)를 지냈다.

김덕명(金德明) 조선(朝鮮) 때 숙천 부사(肅川府使)를 역임했다.

김덕준(金德峻) 조선 때 공조 참판(工曹參判)에 올랐다.

김치성(金致聲) 조선시대에 부호군(副護軍)에 이르렀다.

김주일(金柱逸) 조선조(朝鮮朝)에 공조 참의(工曹參議)를 지냈다.

김대흥(金大興) 조선(朝鮮) 때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이르렀다.

김만직(金萬直) 조선 때 공조참판(工曹參判)에 이르렀다.

김호원(金灝源) 조선 시대에 영장(營將)을 지냈다.

김정원(金定源) 조선조(朝鮮朝)에 좌승지(左承旨)에 이르렀다.

김익준(金益俊) 조선때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올랐다.

김낙구(金樂九) 조선조에 판관(判官)에 올랐다.

김낙문(金樂文) 조선 때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를 지냈다.

김낙영(金樂英) 조선조(朝鮮朝)에 부사과(副司果)에 이르렀다.

김낙형(金樂瀅) 조선 시대에 함경도 안무중 군사(咸鏡道按撫中軍使)를 역임했다.

김낙삼(金樂三) 조선(朝鮮) 때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올랐다.

김천국(金天國) 조선조(朝鮮朝)에 중추부사(中樞府事)를 지냈다.

김병섭(金秉燮) 조선시대에 장단 군수(長湍郡守)를 역임했다.

김창섭(金昌燮) 조선 때 정평(定平)․구성 군수(龜城郡守)에 이르렀다.

김명섭(金明燮) 조선조에 선전관(宣傳官)을 지냈다.

김홍섭(金鴻燮) 조선조(朝鮮朝)에 부사과(副司果)에 이르렀다.

김태휘(金台輝) 조선(朝鮮) 때 중추부사(中樞府事)를 지냈다.

김진국(金鎭國) 조선시대에 무과(武科)에 급제, 만호(萬戶)를 지냈다.

 

김경념(金敬念) 1882 (고종 19) ~ 1950

호는 신암(愼菴).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된 후 옥성(玉城)․흥명(興明)․오봉(五鳳)․선화(善化)․남제(南齊) 등 여러 학교를 설립하여 청년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한편 서북학회(西北學會)에 가담, 애국운동과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1919년 3․1운동에 참가하였으며, 그후 임시정부 연통제(聯通制)의 용천군 참사(參事)로 임명되어 활동하다가 일본 경찰에 피체, 평양옥에서 복역했다. 해방 후에는 반탁(反託)운동에 참여했으며「대한독립사(大韓獨立史)」를 편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