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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김씨 세계

남당유고 - 安山系 - 안산김씨의 초기 가계도

by 연송 김환수 2013. 11. 28.

[21쪽은 고려의 관제 일부를 정리해놓았다. 판독 생략]

 

[22쪽부터는 安山系라 하여 金氏의 가계도를 그려놓았다.

풀어쓴다. 괄호안은 출생연도나 배우자명이다]

 

(주) 읽을 수 없는 글자는 ■로 표시하였음

誤讀일수 있는 자는 해당 글자 뒤에(?)를 병기하였음

 

異體字인 경우는 인명, 지명등을 제외한 일반적인 부분에서는 표준자로 대체한 것도 있음

[ ]속에 주석을 달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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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당유고 - 安山系 - 안산김씨의 초기 가계도




안김 상계에 대한 자료는 부족하여 검증된 자료를 더 찾아 보아야 하고, 다른 문중(경주김씨)에서도 자신들의 직계 조상에 대한 계보 논란이 있기는 합니다.


계보연구 - 경주김씨계보연구회편에 실린 신라김씨 분관 선원도의 계보에는 무열왕계로 되어 있지만 남당유고를 보면 원성왕계 문성왕의 후손이고, 가승계보나 족보를 보면 경순왕 후손으로 되어 있습니다.

남당 박창화 선생이 1933년~1942년 사이에 일본 궁내성 왕실도서관(서릉부)에 근무할 당시에 안산계 자료를 필사하신 남당유고의 내용을 보면,

 
안김의 상계는 경순왕의 백부인 김억렴-유렴-태기(경진 920년)-안산김씨 시조 긍필(무신 946년)-은부(?-1017년)-약운(계묘 1003년)으로 나와 있습니다. 이를 근거로 하면 문성왕의 후손이됩니다.

경덕국사의 묘지명을 보면 김은부의 아들은 김충찬(金忠贊 998년이전∼1036), 충찬의 동생은 경덕국사(景德國師) 김난원(999~1066)입니다.

다시 남당유고 안산계를 보게 되면 약운(계묘 1003년) 계보다음에 원황(임인 1002년∼1062년)-준국(계해 1023년)으로 나와 있어 김충찬의 아들 준국이 후손이 없어 김원황을 양자(계자)로 삼아 계대를 이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후에는 원황-경용(1041∼1125년) - 인규(?~1142년)로 계대가 이어졌습니다.

남당유고 안산계는 김억렴-유렴-김태부(을유925년)-황산(신사921년)- 황도(안종, 을묘955년) - 일궁(인위, 신사 981년)-원충(갑오 994년,(설낭)-연흥궁(정묘1027년. 연흥궁주는 1102년 몰) *연흥궁은 정종의 비인 용절덕비다.

김원황 안산계는 김억렴-유렴-김태부(을유925년)-황산(신사921년)- 황도(안종, 을묘955년) -이궁(갑신984년, 은동)-원황(임인 1002년] 입니다.
* 일궁(인위)의 동생 이궁(은동)은 형제이며, 원황과 원충은 4촌간이 됩니다.

김지우 묘지명에 기록된 원황의 친부는 인위일 수 있고, 인위의 동생 은동의 양자가 되었다가, 충찬의 양자가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김억렴(金億廉)은 경순왕의 큰아버지(백부) 이며. 고려 태조의 제5비 신성왕후(神成王后)의 아버지로 관등은 잡간(匝干)이었고, 지대야군사(知大耶郡事)를 지내고 고려 태조 때에 후삼국 통일에 공이 있는 개국공신이나 태조공신을 가리키는 삼한공신이 된 사람이다.

경순왕은 그의 큰아버지인 김억렴의 딸을 천거해 왕건(王建)과 혼인하여 아들을 낳았다. 이가 욱(郁)으로 뒷날 그의 아들이 고려 제8대 현종(顯宗)이 되어 신성왕태후(神成王太后)로 추시(追諡)하였고 욱을 안종(安宗)으로 추봉하였다. 이후 모든 고려왕이 현종 계통이니 모두 김억렴의 혈통인 셈이다.

김유렴(金裕廉)은 김억렴의 아들이며, 917년(경명왕 1) 대아찬으로 시중에 올라 919년까지 재임하고, 931년 2월 왕건이 신라의 수도 금성을 방문하여 경순왕을 위로하고 돌아갈때 볼모가 되어 고려로 들어갔다. 김억렴과 그의 아들 김유렴은 경주인으로 삼한공신이 된 사람이다.


 


안산김씨 시조 이전 경순왕 상계 계보


비조(시조) : 대보공 김알지  → 2세 → 3세 → ....생략 .....

19세. 원성왕(元聖王) → 20세. 각간(角干) 예영(禮英)

21세. 상대등(上大等) 균정(均貞) → 22세. 신무왕(神武王)

23세. 문성왕(文聖王)  → 24세. 상대등(上大等) 안()

25세. 시중(侍中) 민공(敏恭)→ 26세. 角干(각간) 인경(仁慶=實虹(실홍)

27세. 시중(侍中, 伊飡이찬) 효종(孝宗) → 28세. 경순왕(敬順王)

29세.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 은열(殷說)

 

 안산김씨(安山金씨) 시조(始祖) 김긍필(金兢弼) : 1세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상주국(上柱國안산현개국후(安山縣開國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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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당유고 안산계

비조(시조) : 대보공 김알지  → 2세 → 3세 → ....생략 .....

19세. 원성왕(元聖王) → 20세. 각간(角干) 예영(禮英)

21세. 상대등(上大等) 균정(均貞) → 22세. 신무왕(神武王)

23세. 문성왕(文聖王)  → 24세. 상대등(上大等) 안()

25세. 시중(侍中) 민공(敏恭)→ 26세. 角干(각간) 인경(仁慶=實虹(실홍)

27세. 잡간(匝干) 억렴(億廉) → 28세. 시중(侍中) 유렴 裕廉 → 29세 태기(경진 920)

 

 안산김씨(安山金씨) 시조(始祖) 김긍필(金兢弼) : 1세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상주국(上柱國안산현개국후(安山縣開國侯)






 



 

신무왕(神武王)

이름은 우징(祐徵)이니 원성의 손자인 상대등 균정(均貞) 아들이다. 원년 기미(己未, 839)는 문종 개성 4년이다.

名祐徵 元聖孫上大等均貞子 元年己未 文宗開成四年

 

문성왕(文聖王)

이름은 경응(慶膺)이니 신무의 아들이다. 원년 기미(己未, 839)는 문종 개성 4년이다. 19년 정축(丁丑, 857) 9월에 왕이 병이 들자 유조(遺詔)를 내려 숙부인 의정(誼靖)에게 왕위를 전하게 하였다.

名慶膺 神武子 元年己未 文宗開成四年 十九年丁丑九月 王不豫 遺詔傳位於叔父誼 靖

 

출처 : 동경잡기(東京雜記) 신라기(新羅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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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山系

 

金台父(乙酉)(黃山(辛巳))[을유는 925년, 신사는 921년] - 黃稻(乙卯)(安宗)[을묘는 955년] - 一宮(辛巳)(因渭)[신사는 981년] - 元冲(甲午[994년])(雪娘) - 延興宮(丁卯)[연흥궁은 정종의 비인 容節德妃다. 정묘년은 1027년. 연흥궁주는 1102년 沒]

 

... 元冲(甲午)(雪娘) - 崇化宮(己巳)[기사는 1029년. 숭화궁주는 1094년 沒]

 

...黃稻(을묘)(安宗) - 二宮(甲申)(殷同)[갑신은 984년] - 元晃(壬寅)[임인은 1002년]

 

...黃稻(을묘)(安宗) - 三宮(己丑)(玄龍)[기축은 989년]- 元弘(戊申)(俊金)[무신은 1008년]

                           - 三宮(己丑)(可道) - 元質(乙巳) [을사는 1005년]

 

黃歸(戊午)(林復) - 林肅(丙子)(梁皐) - 林福

 

黃歸(戊午)(林復) - 波蘭(辛巳)(殷同) - ① 若蓮(丁酉)(玄甲) ② 若松(庚子)(玄世) ③ 若雲(癸卯) (元晃)

 

若雲(癸卯) (元晃) - 俊極(癸亥)

 

可道 - 仙愛(己丑)(玄涉) - 俊今(丁未)

 

? - ㉠ 億廉 [경순왕의 큰 아버지] - 神成[태조의 5비인 신성왕후?] - 安宗大王

 

?- ㉡ 裕(?)廉 - ① 台夔(?)- 肯弼 - 殷傅 [김은부는 ? -1017년. 현종의 장인]

                      ② 台父 [925년생]

                      ③ 台交 [928년생]

 

※ 1975년 세상에 알려진 福興寺景德國師墓誌銘(1072년?)에 의하면,

경덕국사 김난원(金爛圓. 999 - 1066.10.8)의 조부는 兢弼, 아버지는 殷, 어머니는 李氏다.

따라서 위의 기존에 알려진 肯弼은 兢弼의 잘못이다

 

金台交(戊子)(黃山)[무자는 928년] - 殷同(辛酉)(奇璧) [신유는 961년] - ①玄涉(壬午)(柳潤)[임오는 982년]

        ②玄濟(甲辰)(俊仙) [갑진은 1004년]

 

玄濟(甲辰)(俊仙) [갑진은 1004년] - 漢忠

 

玄濟(甲辰)(俊仙) [갑진은 1004년] - ㉠ 俊達(丁巳) [1017년] ㉡ 俊京(庚申) [1020년] ㉢ 俊仙(癸亥)(玄濟) [1023년]

 

俊仙(癸亥)(玄濟) [1023년] - 漢忠

 

金台交(戊子)(黃山)[무자는 928년] - 殷况(甲子)(丁緊(?))[갑자는 964년] - 玄器 (甲 申)(仙甜) [갑신은 984년]- 俊合

 

金台交(戊子)(黃山)[무자는 928년] - 殷平(丁卯)(辛召)[정묘는 967년] - 玄世(庚寅)(若 松)[990년] - 俊興

 

金台交(戊子)(黃山)[무자는 928년] - 黃甜(己巳)(含順)[기사는 969년] - 王錫(乙酉)(紫 羅) [을유는 985년]- 巨福(丁巳) [정사는 1017년]

 

金台交(秦裙) - ①殷錫(壬戌)(羅紬)[임술은 962년] - 玄甲(乙酉)(若蓮) [을유는 985년]

 

②殷吉(乙丑)(白祥)[을축은 965년] - 玄龍(己丑) [기축은 989년]

 

③秦甛(己巳)(可道) [기사는 969년]- 仙甜(戊子)[무자는 988년]

 

金台交(秦仙) -殷京(奇璧) - 玄禮(乙酉)(梁珍)[을유는 985년] - 元述(辛酉) [신유는 1021년]

 

玄禮(乙酉)(柳潤) - 俊德(丁卯) [정묘는 1027년]

 

■■(庚辰= 920년)(■■)(甲申 = 924년) - 金肯弼(戊申)(秦仙)[무신은 946년] - ① 殷悅(黃塞) ②殷傅(李山)

 

①殷悅(黃塞) - 玄同(丁酉)(若雲)[정유는 997년] - 俊福(庚申 = 1020년)

 

②殷傅(李山) - ⒜ 安山(李杉) - 公叶

 

元成(顯) - 德宗, 靖宗, 仁平, 景肅

 

元惠(顯) - 文宗, 平壤, 孝思

 

元平(顯) - 孝敬

 

■■(庚辰)(■■)(甲申) - 常夫人(文保能) - 因渭, 尙琴, 尙融

 

※ 위의 가계도를 기초로, 고려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연대표를 정리하면,

金元冲(994년 출생)

容節德妃(1027년 출생)

崇化宮主(1029년 출생)

金肯弼(946년 출생)...

 

이어서 24쪽 좌측부터 33쪽까지 고려의 관제에 대한 정리글이 이어진다.

 

33쪽 좌측부터 35쪽 우측까지는 주요관제 역대역임자들의 명단표가 그려져있다.

 

35쪽 좌측半은 임술년부터 계해년까지의 每月朔의 일진과 대소를 적고 있다.

 

그 다음부터의 행서체는 읽을 수 없어 생략하나, 39쪽 좌측을 보면,

 

文28甲寅四月27甲午太子覆試李嘏等及第...로 되어 있어 문종28년(1074년) 갑인년 4월의 고려사 세가의 기록을 축약해놓은 것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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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 쉽게 한글로 다시 적어 봅니다.

 

안산계

 

김태부(을유)(황산(신사))[을유는 925, 신사는 921] - 황도(을묘)(안종)[을묘는 955] - 일궁(신사)(인위)[신사는 981] - 원충(갑오[994])(설낭) - 연흥궁(정묘)[연흥궁은 정종의 비인 용절덕비다. 정묘년은 1027. 연흥궁주는 1102년 몰]

 

... 원충(갑오)(설낭) - 숭화궁(기사)[기사는 1029. 숭화궁주는 1094년 몰]

 

...황도(을묘)(안종) - 이궁(갑신)(은동)[갑신은 984] - 원황(임인)[임인은 1002]

...황도(을묘)(안종) - 삼궁(기축)(현룡)[기축은 989]- 원홍(무신)(준금)[무신은 1008]

- 삼궁(기축)(가도) - 원질(을사) [을사는 1005]

 

황귀(무오)(림복) - 림숙(병자)(량고) - 림복

 

황귀(무오)(림복) - 파란(신사)(은동) - 약련(정유)(현갑) 약송(경자)(현세) 약운(계묘) (원황)

 

약운(계묘) (원황) - 준극(계해)

가도 - 선애(기축)(현섭) - 준금(정미)

 

? - 억렴 [경순왕의 큰 아버지] - 신성[태조의 5비인 신성왕후?] - 안종대왕

?- (?)- 태기(?)- 긍필 - 은부 [김은부는 ? -1017. 현종의 장인]

                      ② 태부 [925년생]

                      ③ 태교 [928년생]

 

1975년 세상에 알려진 복흥사경덕국사묘지명(1072?)에 의하면,

경덕국사 김난원(김란원. 999 - 1066.10.8)의 조부는 긍필, 아버지는 은부, 어머니는 리씨다.

따라서 위의 기존에 알려진 긍필은 긍필의 잘못이다

 

김태교(무자)(황산)[무자는 928] - 은동(신유)(기벽) [신유는 961] - 현섭(임오)(류윤)[임오는 982] 현제(갑진)(준선) [갑진은 1004]

 

현제(갑진)(준선) [갑진은 1004] - 한충

현제(갑진)(준선) [갑진은 1004] - 준달(정사) [1017] 준경(경신) [1020] 준선(계해)(현제) [1023]

 

준선(계해)(현제) [1023] - 한충

 

김태교(무자)(황산)[무자는 928] - 은황(갑자)(정긴(?))[갑자는 964] - 현기 (갑 신)(선첨) [갑신은 984]- 준합

 

김태교(무자)(황산)[무자는 928] - 은평(정묘)(신소)[정묘는 967] - 현세(경인)(약 송)[990] - 준흥

 

김태교(무자)(황산)[무자는 928] - 황첨(기사)(함순)[기사는 969] - 왕석(을유)(자 라) [을유는 985]- 거복(정사) [정사는 1017]

 

김태교(진군) - 은석(임술)(라주)[임술은 962] - 현갑(을유)(약련) [을유는 985]

은길(을축)(백상)[을축은 965] - 현룡(기축) [기축은 989]

진첨(기사)(가도) [기사는 969]- 선첨(무자)[무자는 988]

김태교(진선) -은경(기벽) - 현례(을유)(량진)[을유는 985] - 원술(신유) [신유는 1021]

현례(을유)(류윤) - 준덕(정묘) [정묘는 1027]

 

■■(경진= 920)(■■)(갑신 = 924) - 김긍필(무신)(진선)[무신은 946] - 은열(황색) 은부(이산)

 

은열(황색) - 현동(정유)(약운)[정유는 997] - 준복(경신 = 1020)

은부(이산) - 안산(이삼) - 공협

                     ⒝ 원성() - 덕종, 정종, 인평, 경숙

                     ⒞ 원혜() - 문종, 평양, 효사

                     ⒟ 원평() - 효경

 

■■(경진)(■■)(갑신) - 상부인(문보능) - 인위, 상금, 상융

 

위의 가계도를 기초로, 고려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연대표를 정리하면,

김원충(994년 출생)

용절덕비(1027년 출생)

숭화궁주(1029년 출생)

김긍필(946년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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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당 박창화 유고 해설

http://www.coo2.net/bbs/zboard.php?id=con_1

 

                              남당유고 (南堂遺稿)

 

 

 

 

 

  박창화(朴昌和.1889 ~ 1962)

 

  박창화(朴昌和.1889 ~ 1962) 호는 남당(南堂).

 

화랑세기 필사본을 남긴 재야 사학자다. 호는 남당(南堂).

 

 

남당 유고 : 이 분이 화랑세기처럼 일본 궁내성에 숨겨져 있는 우리나라 고서들중 고구려사를 필사해 온 것이라 고 전해집니다

 

남당은 한국 고대사에 관한 많은 저술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화랑세기를 제외하고는 학계에서 인정을 못받고 있다. 기성학계에 계신 분들에게 남당유고 이야기를 하면 아예 말도 못 꺼내게 한다. 사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남당 박창화(1889-1962)가 남긴 30여권의 문집으로, 이 역시 화랑세기 필사본처럼 그가 일본 궁내성 도서관 서릉부에서 일하던 1933-44년 사이에 필사한 것이라 남당의 손자 박인규씨는 밝히고 있다. 현재 박창화가 남긴 유고집을 그의 호를 본따 ‘남당유고’라 총칭하고 있습니다

 

남당유고는 크게 세 종류로 구분합니다

역사서 : 1. 고구려사초  2. 고구려사략

 

소설형식 : 1. 을불대왕전(고구려 미천왕) 2. 소수림왕전 3. 어을우동전

그 외 세가,연표 형식의 책들도 있습니다

 

상고시대 가능한 가족혼 근친혼입니다 인간은 동물입니다 단지 다른 동물에비해 이성을가진것뿐입니다 종족보존과 번식을 제일로 삼는 동물입니다 그래서 남아 선호사상 과 혈통중심사회가 지배되어온 민족입니다

 

구약성서에 보면 아브라함의 사촌인 룻(고돔과 소모라에등장인물)은 두딸과 관계를맺어 자식을 번식하는이야기가 나옵니다 가족혼 근친혼은 흉이 아니고 고대 농경사회 종족보존과 번식 혈통사회를구축하는기본요소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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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창화(朴昌和.1889 ~ 1962) 호는 남당(南堂)

 화랑세기 필사본을 남긴 재야 사학자. 호 남당(南堂).

 

재야사학자이자 한문소설가로 한문에 대단히 능통해 거의 모든 저서를 한문으로 지어 남겼다. 한편 관련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고로 그 행적을 자세히 알 수 없다.

 

 

                           전설의 화랑세기 필사본

 

사망당시에 화랑세기 필사본을 자손들에게 남겼는데 이 것이 훗날 1989년에 사학계에 알려지면서 한국 고대 연구사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왔다. 그러나 화랑세기 필사본이 진서인가 위서인가 하는 여부는 아직도 논쟁 중에 있으며 오늘날 사학계에서는 위서로 확정짓고 있다.

 

1889년에 충북 청원에서 출생하였다. 어렸을적부터 학문을 좋아했으며 가족들의 증언에 따르면 학문에 몰두하여 되려 사교는 물론이거니와 가족들도 뒷전이었다고 한다. 이후 행적은 대개 불분명하여 대부분 손자 박인규의 증언에 따른다.

 

증언에 따르면 박창화는 일제강점기 시기에 잠시 교편을 잡았으나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에 가담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한편 박창화는 1927년부터 1928년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역사잡지인 <중앙사단>에 몇차례 역사 관련 논문을 발표하였다. <신라사에 대하여>(1927.12 ~ 1928.8)라는 논문과 <흰옷에서 김치까지>(1928.1) 등이 그것이다. 이는 2003년에 발견되어 세상에 다시 알려졌다.

 

1933년 ~ 1942년 사이에 일본 궁내성의 왕실도서관(도서료, 오늘날의 서릉부)에도 사무촉탁으로 근무했던 것으로 기록이 일본국회 도서관에 남아있다.

 

박창화 궁내성 근무기간 단기4266(1933년) -12년근무(1942년)

 

만주에서 독립운동하러 갔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궁내성에 근무하면서 왕실도서관 서릉부에서 일제가 약탈해간 고서들을 볼 수 있게 되었고 그 것을 손으로 옮겨 적었다고 한다.

 

해방 이후에는 교직에 몸담아 교육자 생활을 하였다. 손자 박인규의 증언에 의하면 이승만 정권 당시에 박창화 자신이 직접 일본에 가서 일제강점기 동안에 약탈해간 고서들을 되찾아 오겠다며 지원을 요청했으나 당시 정부는 그의 말을 믿지 않아 돕지 않았다고 한다.

 

1962년에 생을 마감하면서 손자인 박인규에게 유언하기를 "화랑세기 필사본은 소중한 것이니 잘 간직할 것이며, 강역고(疆域考)는 자신이 직접 작성한 것이며, 나머지는 있으나 마나한 책"이라고 하였다 한다. 화랑세기 필사본은 1989년에 학계에 알려졌으며 보다 내용이 상세한 또다른 판본이 1995년에 발견되었다.

 

화랑세기 외에도 강역고와 고구려사략, 을불대왕전 등을 비롯하여 30여권 가량 되는 문집을 남겼는데 이를 통틀어 <남당유고>라 한다. 남당유고 중에는 <고구려사략>이나 <고구려사초> 등 역사서의 형식을 띄고 있는 것도 있으나 한문소설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이 중 을불대왕전이나 어을우동전 등은 한문소설임이 확실히 밝혀졌는데 이는 해방 이후 대한민국에서 마지막으로 지어진 한문소설들이다. 한편 박창화가 소중히 아꼈다던 강역고는 그의 손자인 박인규에 의해 <우리나라 강역고>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실제로 박창화는 <고구려사략> <백제왕기> 등 삼국시대에 관한 위서로 추정되는 책들을 쓰기도 했습니다. (이 고구려사략도 그가 쓴 한문소설이라는 주장도 있고..)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실히 증언해줄 당사자가 사망한 후 한참 뒤에서야 발표되어 문제가 더 복잡하게 되었다.

 

박창화가 궁내청 서릉부에서 근무한 건 맞습니다. 드라마 '선덕여왕'이 한창 유행하던 2009년 8월즈음에 MBC 뉴스후에서 일본 국회도서관에서 1935년 궁내청 명부에서 85엔(연봉인지 월급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사무촉탁(계약직) 근무, 1941년에 오하라 마스카즈로 창씨개명한 것까지 확인했다.

 

그렇다면 진짜 박창화가 궁내청 서릉부에서 화랑세기 원본을 봤느냐?

 

한국인 학자 중에 유일하게 서릉부에 들어가 본 사람이 울산대 역사문화학과 허영란 교수인데, 뉴스후에서 인터뷰하길 서릉부에서 만든 목록만 토대로 파악해야 하는데 목록이 1950년대에 만들어진 것이고, 목록에서 누락되거나 이후에 추가로 개편되었다 해도 서릉부가 한국관련 자료의 공개를 막고 있기 때문에 (화랑세기 원본이)없다고 단언할 수 없다고 한다.

 

아마 궁내청 서릉부가 한국인 연구자의 자유로운 자료 열람을 허용하지 않는 한 진실은 알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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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세기 필사본은 남당(박창화)의 역사소설

박남수 국사편찬위 편사연구관 주장

 

 

화랑세기 잔본 

 

 

1989년 첫 공개 이후 학계에서 격렬한 진위 논쟁을 불러왔던 화랑세기 필사본이 남당(南堂) 박창화(朴昌和.1899-1962)가 쓴 역사소설임을 보여주는 문서가 발견됐다는 주장이 나왔다.

 

박남수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은 12"박창화의 유고를 정리.검토하는 과정에서 기존 화랑세기와는 또 다른 유형의 화랑세기 잔본(殘本)으로 추정되는 문서와 그 안에 수록된 향가 1수를 발견했다"고 말했다.

 

이 화랑세기 잔본은 1930년에 저작된 것으로 기존에 발견된 화랑세기 필사본보다 앞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박 연구관은 말했다.박 연구관은 13일 동국대 문화관에서 열리는 동국사학회 학술대회에서 '신발견 박창화 화랑세기 잔본과 향가 1'라는 논문을 통해 이 같은 주장을 펼 계획이다. 지난 1989년과 1995년 두차례 발견된 화랑세기 필사본은 작성자인 박창화가 소설적인 상상력을 동원해 만들어낸 허구라는 설과 김대문의 화랑세기를 그대로 옮겨 적은 것이라는 설이 팽팽히 맞서왔다.

 

박 연구관은 "이번에 발견된 잔본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나온 기사를 편년 형식으로 나열하고 관련 자료의 상관관계를 역으로 추적해 논리적인 고리를 만들면서 그 사이사이에 새로운 가공인물을 배치하는 방식"이라고 분석했다.가령 김흠돌의 난을 진압한 것으로 나오는 배장공이나 기존 발견된 화랑세기 필사본에서 배장공의 역할을 대신하는 오기공 등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등장하지 않는 인물이다.

 

그는 이어 "후대의 용어인 '안절(按節)'과 근대 용어인 '읍리(邑吏)' 등이 사용되는 점으로 볼 때 이 자료는 박창화가 쓴 일종의 역사소설로 보인다"고 말했다.잔본에 수록된 향가 '백해상백파가(碧海上白波歌)'도 표현어법이나 단어들이 옛 형태이기보다는 오히려 근대어에 가깝다는 것이 박 연구관의 주장이다.박 연구관은 잔본에서 사용되는 용어나 내용이 종전에 발견된 필사본과 겹치는 부분이 있다는 점을 들어 잔본이 종전에 발견된 화랑세기의 저본(底本) 성격을 띠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선도(仙徒), 가야파(加耶派), 진골파(眞骨派), 대원파(大元派) 등의 용어가 잔본과 기존 필사본에서 동일하게 쓰였고 김흠돌의 난과 체원공 누이의 행장 등에 대한 내용이 중복된다는 것이다.박 연구관은 이와 함께 '을불대왕전(乙弗大王傳)' 등 박창화가 쓴 다른 역사소설에서 화랑세기와 유사한 표현이 나오는 점도 화랑세기 필사본이 역사소설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한다고 말했다.

 

그는 다만 "박창화는 애당초 위서를 만들 의향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그는 소설적 흥미에서 화랑세기를 저작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이며 그것을 소일거리로 삼았음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1889.5.

탄생

碑石峴에서 탄생

-어려서 허약하여 巫 龍福母를 수양모로 삼음

1894

6

봄에 諺文을 깨우침

-겨울에 동학도가 야습하여 부친 石農公木川으로 끌고 가 살해하고자 함

이는 行廊 金明孫이 그의 처를 石農公이 총애하여 아들 斗億을 낳은 데 대한 음해였다고 함

1895

7

忍齋 李先生(峿堂次子)千字文音義를 가르침 봄에 千字를 끝냄

가을에 忍齋作詩를 명하여 詩題에 따라 靑天星森 地上載萬物 螢火小如燈秋露明似玉이라 지음

蒙牗聯珠詩를 읽어 가을에 蒙牗을 마침

史略을 시작하고, 한문의 문리를 얻어 스스로 해독함

-정월 16母夫人 安東金氏 타계

-여름에 大成母(27)가 와서 석농공의 小室이 됨

1896

8

忍齋 선생이 상경하여 十九史略을 사와 東國史略이 있는 지를 물음

仁應家에서 長篇抄를 빌려와 외움

1897

9

古文 漁父辭歸去來辭黃州竹樓記岳陽樓記醉翁亭記秋聲賦 등을 읽고 古風을 지음

田艮齋金斯文이 비를 무릅쓰고 와서 笠大衣不濕이라는 詩題不如歸去臥雲林이라 하니, 필묵으로 野老衣冠常帶雨 遠人鬚髮早知秋라 써서 답하고, 古風으로 三山花月落蒼鰲 二水風煙飛白鷺를 둠

1898

10

자주 출가하고자 하였는데, 어머니 없는 슬픔 때문이었음

이 해에 族譜를 간행하고, 겨울에는 밤새도록 책을 읽음

1899

11

鎭川姊夫가 지난 해부터 와서 독서하니 孔婿朴子라 칭함

남당은 독서와 서당교육을 놀이처럼 좋아함

-行廊 一萬이 그 처를 의심하여 넓적다리를 찌르고 쫓아내려 하니, 이를 말림

-笏山 得貴가 과부가 된 弟婦相通하여 官奴들의 야습을 받고 귀향함

1900

12

忍齋가 죽음

邁堂 선생이 農岩集 八大家를 가르친다 하여 邁堂家에서 기식하며 공부하니, 塾友로는 오직 朴鐘烈韓範錫이 있었음

-丹齋(系峿堂), 忍齋審齋(忍齋)는 모두 떠돌아다닌 배움으로 부실을 면치 못했다고 평가함

-매당의 학문과 행실은 인재보다 나으나 알지 못하는 곳이 많다고 평가함

-명손의 처가 석농공에게 총애를 잃어 발광함

1901

13

韓泰錫의 집에서 三國志를 읽음

鷄契를 지음

여름 松子洞 길에서 시를 지어 細雨霏霏日欲西 一雙布穀向人啼 原來萬物生癕裡 莫笑浮生等甕鷄라 함

三國志를 번역(新野~華容道까지 번역)

-鳳龍 동생과 칡뿌리를 다투어 캘 정도로 굶주림

-碑岩寺, 具何川, 李端川, 洪泗川 등을 유람

1902

14

-兵馬山에서 花遊

1904

16

日語를 배움

-처음으로 기차를 타고 한강을 건넘

1907

19

東明王 : 監獄署 倉庫 東明王 보고 府君祭祀각되였소고구려사에 대한 관심

1909

21

사범학교 수학 : “師範學校兒孩들하고 消日을 하는 貌樣이러고

1910

22

충북 옥천보통학교 本科副訓導로 부임

1911~1917

23~29

충북 영동공립보통학교 副訓導, 訓導 역임

1918

30

충북 부강공립보통학교 訓導 역임

(중국 여행 고구려 강역도 작성 추정)

1923.10.

35

도쿄 이주 - 역사연구

1927

39

․「신라사에 대하여논문 발표

1928

40

․?國罡上王記?

(궁내부 용역 업무 추정)

1930

42

1930(庚午) 上狀敦牂年紀資料(신발견 ?화랑세기? 잔본 所收) 제책

1933.2.~

1942

45~54

1933.12. 일본 宮內省 圖書寮에서 조선전고조사 담당 사무촉탁에 임명

1941

53

오바라 마사카즈(小原昌和)로 창씨개명

1942

54

귀국

1945~1946

57~58

청주사범청주중청주상업학교 강사

1947

59

청주사법학교 교사

1948~1950

60~62

괴산 공립 초급 여중학교 교사

1956

68

․?國罡上王記? 改衣

1962.3.

74

南堂 사망

1999

 

장손 박인규가 김경자씨로부터 남당의 유고를 인수보관

2001.3.

 

국사편찬위원회 국내사료수집팀 김대길박대중이 남당유고를 일괄촬영수집

 


남당은 한국 고대사에 관한 많은 저술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화랑세기를 제외하고는 학계에서 인정을 못받고 있다. 기성학계에 계신 분들에게 남당유고 이야기를 하면 아예 말도 못 꺼내게 한다.

 

사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심지어 화랑세기에 대해서도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신다. 그분들은 편견에만 사로잡혀있어서 그렇까?

 

그분들은 현대식 교육을 받으셨고 나름대로 평생을 역사연구에 바치신 분들이다. 편견이 전혀 없다고는 볼 수 없으나 대부분 합리적인 사고로 무장되어있다.

 

남당이 100% 조작을 했다고는 보지 않는다. 무엇인가 자료를 기반으로 하지 않으면 남당유고의 편찬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화랑세기를 진서로 믿는 입장에서는 그가 화랑세기를 보았다면 일본왕실도서관에는 화랑세기외에도 아직 알려지지 않은 무엇인가도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아직까지는 하나도 안 발견되었지만, 앞으로 고고학적 증거와 관련하여 맞는 것이 하나라도 나올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구려사초나 고구려사략같은 자료는 일본왕실도서관에 본래 없었고, 남당이 여러 기록들을 짜집기하고 상상력을 더해서 만든 것이라고 판단하는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딱 3가지만 들라면 다음을 들겠다.

 

기본적으로 남당유고는 일반사서로서의 기본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다.

 

1. 저자가 없다.

 

남당은 화랑세기 필사본은 저자가 김대문이라고 밝혔지만 다른 남당사서를 보면 <<저자가 없다>>. 저자란 책의 내용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위치에 있는 사람인데 저자가 없다는 것은 책임지지 않겠다는 말과 같다. 만일 어떤 사료를 그대로 옮겨 적었다면 화랑세기에서 보여준 것처럼 저자도 그대도 옮겨 적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남당이 그대로 필사하는 사람이라면 말이다. 그 많은 내용을 치밀하게 필사했다면 왜 정작 가장 중요한 저자 이름은 빠뜨리고 필사하지 않았을까? 어느 특정 저자가 혼자서 집필한 것이 아니고 어느 기관에서 단체로 편찬한 것이라서 저자가 없다고 반박할 수도 있다. 그러면 대표저자라도, 아니면 그 편찬한 기관이름이라도 적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런데 아무것도 없다. 한마디로 '믿거나 말거나'이다

 

저자가 없다고 하면 또 이렇게 이렇게 반론할 수도 있다. 구약성경을 보아라. 저자가 없지 않는냐? 저자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전 세계 기독교 교회에서는 구약을 역사로서 가르치지 않느냐?

 

구약이 전혀 무근거한 이야기를 연결해 놓은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절대자가 이 세상을 1주일만에 만들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나, 처음에 빛이 있으라고 했고(빅뱅), 마지막에 인간에 창조되는 등, 그 순서에는 나름대로 과학적인 면이 존재한다. 하지만 구약 그 자체를 사서로 보기보다는 종교의 경전으로 보는 것이 더 합당하다. 남당사서에 저자가 없는 이유는 저자가 바로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

 

2. 자국 역사를 쓰는데 남의 나라 기록으로 채웠다.

 

고구려 국가기록에 고구려기록을 써야하는 것임은 당연한데도, 백제의 무슨 제도가 어떻고, 무슨 좌평은 무엇을 하고..., 신라에서는 누가 무엇으로 승진하고, 또 무슨 일이 생기고 .... 심지어 외국 왕실의 스캔들 같은 자질구레한 기록으로 자국사를 메웠다. 권위를 부여할만한 공공사료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만일 현재 우리나라 사서를 집필하는데 중국 국가주석에 누가 되었다는 정도면 충분하지 중국 어느 성에서 누가 무엇으로 승진하고... 로 채우지는 않을 것이다. 삼국사기를 보면 자국과 관련된 사항이 아닌 외국기록에 관해서는 아주 중요한 일(예를 들어 혁거세조에 백제 시조인 온조가 즉위했다는 것)만 아주 객관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중국사서도 마찬가지다. 일본서기만 조금 다르게 왜국기록이 없는 곳을 백제기록으로 메웠는데 그것은 피치못할 사정이 있기 때문이다.

 

3. 일반인의 접근이 어려운 궁궐의 깊은 이야기까지 상세히

    나온다.

 

사서란 상세하고 정확히 기록하면 좋은 것이다. 하지만 지나치게 상세하면 오히려 의심을 받는다. 오늘같은 개방사회에서도 청와대에서 오늘 아침에 대통령이 비서나 영부인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정확히 알기는 어렵다. 그런데 남당유고를 보면 왕궁 깊은 곳에서 나누는 밀담까지 마치 옆에서 옅들은 것처럼 아주 실감나게 기록하고 있다. 도청기도 없고 인터넷도 없던 시대에 야밤에 궁궐 깊은 곳에서 나눈 여인네들 이야기까지 마치 실황중계하듯 기록하는 것이 가능했을까? 만일 오늘날 어느 방송국이 김연아 금메달 연기 현장중계를 본 사람이 6,721,534명이라고 한다면 보도의 신뢰성이 높아질까?

 

누가 누구와 밀통하여 누구를 낳고, 다시 누가 누구와 사통하여 누구를 낳고,...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정확히 알 수 있을까? 당시에 이미 유전자 검사시설이 갖추어졌었단 말인가? 반면에 삼국사기는 다음처럼 쓰고 있다. '누구는 어느 왕의 몇대손이다.' 그저 왕실의 통고일 뿐이다. 사실이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다. 사서는 이렇게 쓰는 것이다.

 

궁궐속에서 몰래 나누는 밀담을 일반인들이 아는 경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이전 드라마 선덕여왕을 보면 왕실의 여인네들 대화까지 나온다. 만일 천년뒤에 누가 드리마 선덕여왕 시나리오를 가지고 신라사 연구하는 사람들을 찾아가, 여기에 아주 상세한 신라사 자료가 있으니 이를 참조하여 신라사를 복원하라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

 

드라마 선덕여왕이 100% 무근거한 이야기는 아니다. 만일 100% 무근거하다면 역사드라마로 성립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드라마에서 보면 사서에 나오지 않는 여러가지 사건의 이면을 작자가 나름대로 속시원히 풀어가고 있는 점도 눈에 띤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드라마이지 그것으로 신라사를 구성할 수는 없다. 이는 고대에도 마찬가지였다고 생각한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일정한 직위를 가진 여러 관리들이 참석하여 이루어지는 객관적인 어전회의를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써야 믿을 수 있는 역사적 사실인 것이다.

 

또 혹시 항간에 떠도는 소문을 채록한 것일수도 있지 않느냐고 반박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항간에 떠도는 소문에 입각하여 한 나라의 역사를 구성할 수는 없다. 만일 소문의 내용이 아주 중요하여 꼭 써야 한다면 '소문에 의하면'이라는 단서를 다는 것이 사서 편찬자의 기본상식일 것이다. [예]삼국사기 신라본기 지마이사금 11년, 여름 4월: 도성 사람들이 그릇된 소문을 내서 왜병이 크게 쳐들어온다고 하니...

 

위에서 열거한 3가지에는 들어가지 않으나 과학적 근거에 입각하여 또 하나를 들자면 다음과 같다. 천문현상은 민심과 관련되는 것으로서 예로부터 통치도구의 하나로 아주 중요한 기록대상 중의 하나였다. 따라서 삼국사기나 고려사를 보면 금성이나 오로라 기록 등 오로지 삼국사기나 고려사에서만 기록된 고유의 천체현상들이 아주 많다.

 

그런데 왜 남당유고에는 천체기록이 다른 사서에 있는 것만 있고 독자적인 것은 단 하나도 없는 것일까? 다른 나라의 시시콜콜한 사건까지 적으면서 왜 자기 나라 국왕의 통치와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생길지도 모르는 천체현상은 하나도 기록하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다른 것들은 짜집기에 상상력을 더하여 만들어 넣을 수 있었으나 천문학적 지식이나 컴퓨터 시뮬레이션 기술이 없었던 그는 그것만은 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백번 양보해서 남당기록이 어떤 초능력자가 타임머신을 타고, 공간이동에 투명인간 능력까지 갖추고, 여러나라 왕궁을 동시에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기록해온 것이라 하자.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삼국사기 쓸 때부터도 이미 있었다고 가정하자. 만일 우리가 지금 20세기 현대사를 집필하다고 생각해보자. 그러면 집필진이 하는 일은 대충 다음과 같다. 우선 국내외 모든 사료를 다 모은다. 그 다음에 모은 사료 각각에 대하여 사료검증, 즉 신뢰도 검사를 한다. 그래서 합격한 것만 취하고 나머지는 버린다. 만일 부분 합격한 것이 있으면 그 부분만 취한다. 정치야사가 나오는 요즘의 일요신문 같은 주간지는 아마 버릴 것이다. 그리고 집필원칙을 정한다. 북한에 대한 호칭은 어떻게 할 것이며 ... 등등이다.

 

김부식을 비롯한 삼국사기 집필진은 유교적 합리주위로 무장한 유학자들이었다. 만일 그들이 남당의 고구려사초나 사략을 보았다면 삼국사기 집필을 위한 선택했을까? 그들은 아마 사료검증절차에서 과학적 합리성 부족으로 바로 탈락시켰을 것이다. 설령 당시에 존재하고 있었다고 해도 그 당시 유학자들에게도 정사를 구성하는 사료로서의 가치를 인정받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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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堂遺稿 高句麗史 關係 圖書

 

표지

高句麗史(十六世至卄世)

국사편찬위원회 PDF파일

24장

저자

미상

책의 분량

23장

복사할 수량

45면

책자발간(초벌해석)

고구리사초략(김성겸, 011-421-1621)

내용

第十六世 故國原帝紀

在位 331~371

표지와 내용이 다름


표지

高句麗史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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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장

저자

미상/南堂(표지)

책의 분량

71장

복사할 수량

142면

책자발간(초벌해석)

없음

내용

第四世 閔中帝紀~第十四世 烽上帝紀

在位 64~300, 삼국사기와 다름

마지막 장 표지에 南堂의 撰이 있음


표지

高句麗史略 三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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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장

저자

미상

책의 분량

17장

복사할 수량

32면

책자발간(초벌해석)

없음(정성일)

내용

제목 없음(芻牟紀)과 孺留紀로 구성

在位 B.C.40~A.D.28, 삼국사기와 다름

표지에는 三代라고 하였으나 二代만이 있음


표지

高句麗史抄(芻至烽美)

국사편찬위원회 PDF파일

83장

저자

미상

책의 분량

76장+1장(지도)

복사할 수량

149면+1장의 지도(칼라)

책자발간(초벌해석)

고구리사초략(김성겸, 011-421-1621)

내용

始祖 芻牟大帝紀~第十五世 美川大帝紀

在位 B.C.40~A.D.330, 삼국사기와 다름

표지에 ‘柔兆涒灘至月上弦在有洬書(丙申年 陰11月 上弦(7~8일)에 습기에 얼룩진 책이 있었다)’라고 쓰여 있음


표지

國罡上王記

국사편찬위원회 PDF파일

97장

저자

미상

책의 분량

96장

복사할 수량

189면

책자발간(초벌해석)

없음

내용

故國原王紀(16世)와 小獸林王紀(17世) 5년까지가 구분되지 않고 이어져 있음

표지에 ‘著雍執徐秋在江戶抄西未考者久至柔兆涒灘至月改衣(江戶시대(壬辰朝日戰爭(1592) 이후) 戊辰년 가을에 베낀 것이나 西曆을 고찰할 수 없는지가 오래되었다. 丙申年 陰11月에 이르러 표지를 고쳤다’라고 쓰여 있음.


표지

本紀新編列傳

국사편찬위원회 PDF파일

77장

저자

미상(고구려시대)

책의 분량

76장

복사할 수량

150면

책자발간(초벌해석)

없음(정성일 일부해석)

내용

東明聖王紀~新大王紀까지의 王紀

尙太后紀 등 왕비열전

明臨答夫傳 등 신하열전

溫祚太子 등 태자열전으로 구성

백제를 원수의 나라로 하여 깨뜨려야 끝이 난다는 기록이 있어 고구려시대로 짐작케 한다.


표지

없음(小獸林大帝紀)

국사편찬위원회 PDF파일

76장

저자

미상

책의 분량

75장

복사할 수량

149면

책자발간(초벌해석)

고구리사초략(김성겸, 011-421-1621)

내용

第十七世 小獸林大帝紀~第二十世 長壽大帝紀

在位 371~491


표지

없음(小獸林王紀)

국사편찬위원회 PDF파일

74장

저자

미상

책의 분량

73장

복사할 수량

144면

책자발간(초벌해석)

없음

내용

小獸林王紀, 國壤天王紀, 國罡好太王紀

天罡太后紀로 구성


표지

판독 곤란(安藏大帝紀)

국사편찬위원회 PDF파일

56장

저자

미상

책의 분량

55장

복사할 수량

107면

책자발간(초벌해석)

고구리사초략(김성겸, 011-421-1621)

내용

第二十二世 安藏大帝紀~第二十三世 安原大帝紀

在位 519~545


표지

乙弗大王傳

국사편찬위원회 PDF파일

102장

저자

미상

책의 분량

101장

복사할 수량

200면

책자발간(초벌해석)

없음(역사21 필명 조의선인 해석, 확인필요)

내용

미천왕(在位 300~331)의 傳記


표지

종이 재활용(中川大王紀)

국사편찬위원회 PDF파일

154장

저자

미상

책의 분량

153장

복사할 수량

301면

책자발간(초벌해석)

없음

내용

中川大王紀~烽山大王紀까지의 王紀

米何記, 叒仙開場記, 最熟仙人記, 細美眞宮記 등

于素大王紀, 紇來記 등 傳記


 

표지

芻牟鏡 券一․二(留記 芻牟鏡인 듯)

국사편찬위원회 PDF파일

32장

저자

黃周亮(고려 정종9년(1043) 무렵)1)

책의 분량

31장

복사할 수량

61면

책자발간(초벌해석)

고구리창세기(김성겸, 011-421-1621)

내용

慕漱帝紀와 芻牟의 성장과 탈출기


표지

芻牟鏡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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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장

저자

미상

책의 분량

61장

복사할 수량

115면

책자발간(초벌해석)

고구리창세기(김성겸, 011-421-1621)

내용

芻牟鏡 券一~券三까지

芻牟鏡 券一의 慕漱帝紀와 券二의 (추모) 성장기 및 券三부터는 本紀로 구성

留記 芻牟鏡에 수록된 黃周亮이 편찬했다는 내용이 없음


 

표지

芻牟鏡 中

국사편찬위원회 PDF파일

63장

저자

미상

책의 분량

62장

복사할 수량

118면

책자발간(초벌해석)

고구리창세기(김성겸, 011-421-1621)

내용

芻牟鏡 券四~券五까지


표지

芻牟鏡 下

국사편찬위원회 PDF파일

61장

저자

미상

책의 분량

60장

복사할 수량

113면

책자발간(초벌해석)

고구리창세기(김성겸, 011-421-1621)

내용

芻牟鏡 券六까지의 本紀와 后妃列傳으로 구성


표지

없음(芻牟鏡衍義 券一)

국사편찬위원회 PDF파일

35장

저자

미상

책의 분량

34장

복사할 수량

68면

책자발간(초벌해석)

없음

내용

芻牟鏡衍義 券一과 券二로 구성

芻牟鏡 券一․二과 다른 책(구결이 있음)


  

南堂遺稿 新羅史 關係 圖書

 

표지

金天大帝法興眞王紀

국사편찬위원회 PDF파일

51장

저자

미상

책의 분량

50장

복사할 수량

97면

책자발간(초벌해석)

없음(정성일 한문판독)

내용

법흥왕(在位 514~540)


표지

奈勿實聖訥祗慈悲炤智智證紀

국사편찬위원회 PDF파일

141장

저자

미상

책의 분량

140장

복사할 수량

277면

책자발간(초벌해석)

없음(정성일 한문판독)

내용

내물왕에서 지증왕까지의 기록

在位 377~514, 삼국사기와 다름

내물왕은 출생 및 성장 등 재위기간 중의 일이 아닌 기록이 있음


  

표지

없음(阿達羅紀)

국사편찬위원회 PDF파일

121장

저자

미상

책의 분량

120장

복사할 수량

238면

책자발간(초벌해석)

없음(정성일)

내용

아달라왕~내물왕 6년까지

在位 213~382, 삼국사기와 다름

召文國王歷 수록


표지

上章敦牂2)

국사편찬위원회 PDF파일

210장

저자

미상

책의 분량

209장

복사할 수량

209면

책자발간(초벌해석)

없음(필명 영재 Excel파일, 정성일 자료)

내용

신라(왕,왕족,6부), 召文國, 금관가야의 系譜 및 알 수 없는 계보가 있다.

요사지리지, 김유신의 후손 永郞公의 전기

宮內廳 實錄編修用紙를 사용했는데, 일본 大正天皇(在位 1912~1926)의 實錄을 편찬하는데 쓰인 용지라고 하며, 조선 순종(1874~1926)임금의 실록을 편찬하는데 쓰인 용지라는 견해도 있다.


  

표지

魏華眞鏡抄

국사편찬위원회 PDF파일

116장

저자

金華(䙴子)/朴達(玉耶)

책의 분량

115장

복사할 수량

228면

책자발간(초벌해석)

없음(필명 밝은눈 한문판독)

내용

1世 풍월주 위화랑의 傳記(道家類, 仙史)

위화랑의 조상이 召文國에 들어갔다가 신라로 돌아오는 이야기 등을 담고 있음.


표지

祗摩紀逸聖紀

국사편찬위원회 PDF파일

49장

저자

미상

책의 분량

48장

복사할 수량

93면

책자발간(초벌해석)

없음(정성일)

내용

祗摩紀~逸聖紀

在位 159~212, 삼국사기와 다름


표지

娑婆尼師今記

국사편찬위원회 PDF파일

36장

저자

미상

책의 분량

35장

복사할 수량

67면

책자발간(초벌해석)

없음(정성일)

내용

娑婆尼師今記

在位 126~158, 삼국사기와 다름


 

표지

미상(花郞世紀)

국사편찬위원회 PDF파일

83장

저자

大問3)(姓이 金씨라고 하나 의문이 있다)

책의 분량

82장

복사할 수량

161면

책자발간(초벌해석)

대역 화랑세기(이종욱)

내용

32명의 풍월주(화랑의 우두머리)의 전기


표지

花郞世紀(複寫)

국사편찬위원회 PDF파일

32장

저자

大問(姓이 金씨라고 하나 의문이 있다)

책의 분량

31장

복사할 수량

62면

책자발간(초벌해석)

대역 화랑세기(이종욱)

내용

32명의 풍월주(화랑의 우두머리)의 전기


 

 

南堂遺稿 百濟史 關係 圖書

 

표지

百濟王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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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장

저자

미상

책의 분량

76장

복사할 수량

150면

책자발간(초벌해석)

없음(정성일 일부해석)

내용

삼국사기 백제본기와 같거나 다른 기록이 섞여 있다. 고이왕 이전의 기년이 백제본기와 다르고 신라사 관계 도서와 짝을 이룬다.


 

  南堂遺稿 其他 圖書

 

표지

萬曆以前 朝鮮古刊本の 史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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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음

저자

박창화

책의 분량

알 수 없음

복사할 수량

알 수 없음

책자발간(초벌해석)

없음

내용

임진조일전쟁(1592) 이전에 일본에 존재했던 조선 고간본의 목록


 

1) 원문에는 ‘推忠盡節文德匡國功守太保特進兼門下侍中判尙書吏部事監修國史上柱國臣黃周亮奉勅撰’(추충진절문덕광국공수태보특진겸문하시중판상서리부사감수국사상주국신황주량봉칙찬) 라고 하였다.

 

황주량은 고려시대 문신으로 시호는 경문(景文)이며 1004년(목종 7) 문과에 급제하여 1013년(현종 4) 시어사(侍御史)로서 최충(崔冲) 등과 함께 수찬관(修撰官)이 되어 거란(契丹)의 침입으로 소실(燒失)된 역대의 실록(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1032년 중추사로서 수국사(修國史)가 되어 태조에서부터 목종에 이르는 7대(代)의 사적(事蹟)을 36권에 수록 완성하였고, 1037년 내사시랑 동내사 문하평장사(內史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를 역임하고 추충진절문덕광국(推忠盡節文德匡國) 공신의 호를 받았다. 1043년(정종 9) 수태보 겸 문하시중(守太保兼門下侍中)과 판상서이부사에 특진되었다.

 

2) 庚午년을 뜻함

 

3) 父가 吳起公이라고 하였으니 유추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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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황중연(黃中衍 1611 ~ )의 남당유고(南塘遺稿) 저서와는 관계없지만

저서의 한글이름이 같기에 착오방지 차원에서 참고로 인적사항을 소개합니다.

 

남당유고(南塘遺稿)권1 詩, 권2 書 권3 序, 記, 跋, 銘, 上樑文 권4, 祭文 권5 碑, 墓碣銘, 墓表, 行狀, 遺事, 實記, 傳, 附錄

 

 

성명(姓名) : 황중연(黃中衍)

본관(本貫) : 평해(平海)

시대(時代) : 1611 ~ ?

자(字) : 덕유(德裕)

호(號) : 남당(南塘)

이력(履歷)

영주문화 > 영주의 역사인물 > 조선시대

 

황중연(黃中衍 1611 ~ )

자는 덕유(德裕), 호는 남당(南塘), 본관은 평해(平海)이다.

- 인조 26년(1648)에 문과(文科) 급제하여 신녕현감(新寧縣監)을 지내다.

- 저서로《남당유고(南塘遺稿)》가 있다.

 

<국조 문과 방목>

황중연(黃中衍) : 인조(仁祖)26년(1648년), 식년시(式年試) 갑과3(甲科3)

 

인적사항

생년(生年) : 1611년, 신해

자(字) : 덕유(德裕)

호(號) : 남당(南塘)

본관(本貫) : 평해(平海)

거주지(居住地) : 미상(未詳)

가족사항

부(父) : 황상인(黃尙<인0x6F29>)

조부(祖父) : 황이(黃怡)

증조부(曾祖父) : 황준량(黃俊良)

숙(叔) : 황상겸(黃尙謙)

이력 및 기타

소과(小科) : 1642(임오) 진사시

특별시(特別試)

전력(前歷) : 진사(進士)

관직(官職) : 좌랑(佐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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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당유고 려사열전-文因渭

 

文因渭傳

 

因渭字尙父南平[전남 나주]人也父保能早孤寒甚寺漬館烹行酤致貨以敎子爲志因渭尙幼而購書貯翰每遇文士極盡其禮以托其意故長安寒士歲過其門者不知其數因渭雅麗溫柔且能勤讀習字九歲得寫經院米十六入光文院尋拜承事郞兼東宮侍禁內侍茶房寫經考官景宗[975-981년]寵愛之以內承旨司乘歷殿中丞寫經判官考功卽(?)轉秘府直長成宗[981-997년]時以千秋太后私臣兼東宮副詹事穆宗卽位[997년즉위]殿中少監太后宮詹事嘗爲致陽[김치양]所黜爲江州副使安宗移御泗水[992년]奉供以忠顯宗初工部尙書[현종 즉위년인 1009년 3월에 공부상서가 됨]歷戶部吏部禮部而至左僕射恭政判西京留守事而卒諡和懿平生不言人之長短拜佛阿勢雖微官末職未嘗輕蔑雖無創建誠守制度淸白滅私見人貧之施以己財不與人爭淡於榮進庚戌[현종 원년. 1010년]以後私財殆盡妻女困苦出入漬樓而不知以書畵自娛坦文流也冠於當世而不求値不論親疎孰贄(?)者必應一毫善人物功臣堂所傳法空雙冀固(?)有名焉居家焚香淡坐受(?)子女使之任便不禁出入故爲惡少所惑蕩盡家産亦不爲憂慰其子曰汝祖父爲吾汝曹幄廠二十年不拘風雨寒暑而晨昏磬力今至於此抑命也奈何吾祿雖薄猶可使無飢吾死將奈何其子乃悟自爲潢師而起家常持一符藏於懷中人不知其爲何及卒于孫啓之乃恭勤二字而已

 

※ 고려사에는 文仁渭로 나온다. 남당유고 려사열전 찬자가 거의 동시대의 인물인 金因渭와 이름을 착각했을 가능성이 크다.

 

文仁渭는 1019년 3월 신유일 卒. 본관은 長淵. 金致陽일파가 숙청될 때(1009년) 천추궁의 宮僚가 많이 연좌되어 죽고 귀양갔으나, 그 만은 康兆의 도움으로 죽임을 면하였다.

 

文仁渭의 열전은 별도로 없으나 金致陽의 열전에 간략하게 언급되어 있다.

 

위에서는 남평인이라 했으나 고려사에는 장연인으로 相異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황해도 장연현조에 소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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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당유고 려사열전- 黃瑩(황영)

남당유고 麗史列傳

고문서 01-76-165

 

(주) 읽을 수 없는 글자는 ■로 표시하였음.

 

誤讀일수 있는 자는 해당 글자 뒤에(?)를 병기하였음.

異體字인 경우는 인명, 지명등을 제외한 일반적인 부분에서는 표준자로 대체한 것도 있음.

 

[ ]속에 주석을 달았음.

순서는 원문에 따름.

 

黃瑩傳 靖宗乙亥生睿宗戊子卒七十四 [1035년 출생, 1108년 卒, 향년 74]

 

瑩字光玉周亮之孫也腆實好學冬夜與妻弟魏繼廷讀書聞鷄而止四方學者聞風而至稱曰■溪先生文宗召聞雙冀七政一曰安戚二曰用賢良三曰正風俗四曰偃干戈五曰興農■六曰明賞罰七曰振皇威也又言王子不可爲僧非廣嗣也內侍田翁中妻生文宗女將納司錄金漢忠爲其婿漢忠瑩之高弟也瑩謂漢忠曰君子不娶王女况其庶乎漢忠曰母命也及娶文宗厚遺而置奴婢如院瑩諫曰人君幸侍臣之妻已非其禮(?)■可以其女擬於公主乎文宗不悅良久命罷之尋復如初使漢忠母說瑩妻曰皇上之所不知也■妄言而禍其子興王之役侍臣皆寫經瑩曰陛下躬儉節用甚少浪費佛事甚多誰以陛下爲儉乎奢佛非孝也寫經非福也不若行一善而進一賢文宗曰吾亦知其未必可也愛親慈子之情卿亦一也竟不廳瑩乃與門生講學不倦而無意於朝宣肅亦優待竟至平章事而卒諡貞敬以雙冀大守文之學爲其宗㫖其徒有男女妻魏氏亦賢而有才能訓其徒時人多二妻而瑩獨主一妻

 

※ 황영은 일반적으로 생사년도 미상으로 알려져 있으며 황주량의 손자라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위계정(?-1107년)과의 관계도 기록에 보이지 않는다.

 

金漢忠(1043-1120)이 문종의 사위가 되었다는 기록도 고려사에 보이지 않는다.

 

고려사절요에는 김한충의 卒記에, 그의 아내가 文宗의 총애를 받은(관계한) 여종의 딸이었다고 되어 있어(其妻文宗幸婢之女) 위의 기록과 상이하다(그 말이 그 말인가?)

 

田翁中도 보지 못한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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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당유고 려사열전-鄭又玄

 

鄭又玄傳 [963년 출생]

又玄字子虛父扶風祖(門+東)(?)皆有文名隱居于黃山太湖之畔讀書鍊丹園收芋栗黃苽而自始光宗聞其名召爲安宗師壬辰[992년. 성종 11년]陪歸泗川宮以終其年又玄三十而魁與其妻爲內院學諭當時詩賦以又玄夫妻爲一宗而風靡曰蜀女賦銀綠(?)行皐蘭記等皆有名焉內院太學士皐蘭薨請諡文貞致陽阻之及其生子[1003년]而自稱都尉皇王逼大良爲僧知其將亂棄歸湖上逍遙自適以時往候崇敎神穴與僧臣等嚴其侍衛又廬皐蘭墓與妻往省(?)作寺刊經及詩流布于世者亦多矣其女姝卿美而有才籍于內院而繼其聲及配崔冲以乾瓢遺之曰士大夫所可食也伯夷採薇五柳餐菊黃江三香唯飄爲一不甘不苦醇厚一(?)味爾夫妻能得於此則可做事矣人以此指爲干飄先生秋雨打湖二三素心煮鴨烹蟹會飮亭上或詩或畵篆而刻之賞心樂志自以爲季鷹(魚+戶)尊何以過此杏山奇君甫善刻(?)濮(?)陽吳挂逸善畵稱爲黃江三賢顯宗卽位[1009년 즉위]召爲右常侍未幾辭曰臣有田八百畝可以自食性又疎(?)放不能補遺左右願怡(?)陶弘景之岺雲可釣賀知章之湖月上不得已使之任便契丹之役南巡又玄與刺使艾孔眞副使金殷傅享王于湖亭乃定逗遛觀望之計不至失計以功進左僕射平章事皆不進及薨賜諡文忠官庇葬事賜夫人金氏年穀三百石元成之配至(?)尊功在又玄云

※ 고려사에 의하면, 정우현은 성종 6년(987년) 8월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서희 열전에, 성종때 정우현이 봉사를 올려 시정을 비판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산 것을 서희가 무마하였다는 것이 보일뿐 별다른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동사강목에 의하면, 이 때는 성종 14년, 995년 9월이다).

위 기록의 김은부(? - 1017년)는 현종의 장인(元成王后의 아버지)이나, 애공진, 고란은 기존의 기록에 없는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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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당유고 려사열전-金漢忠

 

漢忠之高祖裕廉歸太祖爲功臣漢忠少雄偉力學登第宣宗朝累官引進使輕車都尉出守安西都護府爲政不苛民皆慕之獻宗初刑部侍郞肅宗封太子以漢忠兼左庶子至禮部尙書宋使遇颶風船幾敗覆漢忠以航海迎候拯救全活睿宗初拜尙書左僕射判秘省書事女眞之役以中軍兵馬使力戰有功又爲行營兵馬使尹瓘命諸軍撤內城材尾(?)以築九城徙南界民實之漢忠執不可曰如外城未畢而卒有緩急內無完城民將何保元帥雖有命吾不敢從後果如其言遷判工部事轉樞密院使以尙書左僕射致仕庚子九月[예종 15년. 1120년]卒年七十八諡元平性醇厚誠實敦友睦族其妻文宗庶女也賜田宅奴婢甚厚公暇每設酒食以宴諸僚曰聖恩至重不可獨享醉則每使其妻歌舞以悅人妻死不復娶嘗學殷鼎嗜蕎麥豚肉未嘗乏焉文宗從容問曰蕎麥太淡豚肉太膏汝果何嗜乎對曰膏所以肥(?)體淡所以養志二者不可缺一帝王之治天下亦不可偏於一上嘉之命扶餘候燧(?)師事之及候敗自稱罪人而未嘗啓齒

※ 위 기사는 고려사열전을 상당부분 그대로 전재한 것이다.

부인에 대해서는 漢忠妻文宗婢妾之女也以故雖至達官不得入臺省子景初景元景若라 하고 있으나, 고려사열전에는 문종의 딸이 7명인데, 扶餘公燧에게 시집간 積慶宮主와 樂浪公瑛에게 시집간 保寧宮主 외 5명은 皆蚤卒이라 하고 있어 누군지 파악이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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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당유고 고려사열전-金瑚傳

 

金瑚傳

金瑚彦陽公瑩之子也少學于水精菴主然然十三畵王輪寺觀音象名振天下以母微不達王侍郞冲薦于皇后宮初樹寫經院畵(?)員九品后寵之不次擢之一年中超至殿中少監六品兼寫經判官賜其母五品宮人祿掌酪亦得寵于上尋拜採蘭使調香少監常侍于后側公主王孫等師事之后崩[1118년]被讒流離放于杜陵窮於梅溪殆十年餘矣及翡翠院得寵仁宗[1122년 즉위]召之拜戶部尙書妻以通義候女司空瑜之室也瑜子珙父事之故特賜瑚殿下之號憲司劾之王以婢稱不採毅宗[1146년 즉위]亦傾嚮之官至平章事[정2품]而卒諡安懿瑚以方技美貌因緣后宮位至一品而尙主享貴盖鮮其儔矣亦能孝子其母文敬后崩[1118년 9월 5일]絶而復甦云

※ 김호는 고려사, 고려사절요에 전혀 보이지 않는다. 실존인물인지 의문이다.

1118년부터 10년후면 1128년인데, 고려사를 찾아봐도, 인종대 임명된 호부상서중에 김호라는 이름은 없다(1126 - 1128년사이 호부상서는 金珦(1135년 卒)-최유적-김부일-김부식-최홍의 순이다).

왕륜사는, 경기도 개성시 松岳山 高麗洞 竹仙臺 입구에 있었던 절로, 태조가 919년에 창건한 10寺중 하나다.

王冲(1078-1159년 3월 丁巳)으로 보아, 皇后宮의 황후는 예종의 비인 文敬王太后 李氏(이자겸의 딸)를 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通義候는 숙종의 아들인 王僑(1097-1119년 4월). 그 아들 사공(王)유는 인종19년(1141년) 5월 壬子日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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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당유고 고려사열전-李資玄

 

李資玄字眞精容貌魁偉性聰敏登第爲大樂丞忽棄官入春州淸平山葺文殊院居之蔬食布衣以禪道自樂睿宗遣內臣賜茶香金帛累詔徵之資玄曰始出都門誓不復踐京華不敢奉詔遂上表曰鳥養鳥庶無鍾鼓之憂觀魚知魚俾遂江湖之性王覽之知不可致幸南京(예종이 남경으로 행차한 때는 1117년임)遣其弟尙書資德諭赴行在作詩手書賜之資玄赴召王曰朕慕此老道德久矣不宜以臣禮見今上殿拜賜坐從容與語命留三角山淸凉寺再見問養性之要對曰英善於寡慾遂進心要一篇王歎賞待遇甚厚旣而固請還山乃賜茶湯道服以寵其行仁宗卽位[1122년 4월 즉위]亦傾嚮之有疾遣內醫胗視賜茶藥卒年六十五諡眞樂有吝財畜貨之評

※ 1061년 출생 1125년 4월 卒(일부 웹의 1031년 출생은 오류다).

이자현은 이자연(1003-1061년)의 손자.

위 기사는 고려사열전을 거의 그대로 전재한 것이다.

이자현의 사망기사는 고려사에는 없고 고려사절요에 보인다. 속세를 떠났다면서 왠 재물축적에는 그리도 열심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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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당유고 고려사열전-金就礪

 

金就礪傳

金就礪彦陽人也父富禮部侍郞蔭補正尉選充東宮衛累遷將軍鎭東北界擢大將軍康宗朝巡撫塞上邊民畏愛高宗三年[1216년]契丹遺種金山王子金始王子爲蒙古所逐來侵我國就礪以後軍兵馬使累建大功賊勢窮入保江東城蒙古元帥哈眞亦來攻與就礪相見就礪身長六尺五寸鬚過其腹每盛服必使兩婢子分擧其鬚而後束帶哈眞見其狀貌魁偉又聞其言大奇之引與同坐問年幾何曰近六十哈眞乃以兄事之賊平以功讓于元帥趙沖官至侍中而卒諡威烈爲人節儉正直忠義自守持軍律甚嚴士卒不敢犯秋毫有酒則用一巵與最下者有均飮故得其死力臨陣制賊多出奇計未嘗自矝

※ 金就呂墓誌銘(1234년)에 의하면, 할아버지는 彦良, 아버지는 富, 어머니는 宋氏이고 1234년 2월 21일 病으로 63세에 졸하였다. 이로써 보면 1172년 출생이다. 따라서 웹상에 출생연도 미상으로 나오는 것은 전부 오류다.

고려사에 보면, 조충(趙冲)·김취려(金就礪)가 합진[哈眞]·완안자연(完顔子淵) 등이 거느린 군사와 합세해 강동성을 함락한 것은 1219년 1월의 일로 , 이때 김취려는 48세인데, 위의 기록에는 김취려가 60이 다되었다 한 것은 近五十의 誤記 아니면 김취려가 합진을 欺罔한 것이다(위의 나이에 관한 문답은 고려사 열전에 그대로 나오는 데, 합진의 답변(我未五十)을 보면 近五十의 오기는 아닌 것 같다. 趙冲墓誌銘(1220년)에 의하면, 조충은 1220년 9월 3일에 50세로 병사하였으니 조충은 1171년생이고  동국통감에 김취려의 말로, 조충이 자기보다 연상이라 한 것과 모순이 없다. 이로써 보건대 김취려는 자기 나이에서 10살을 부풀려 합진에게 얘기한 것이다).

김취려 묘지명에는 就呂라 하였으나 그 손자인 金賆墓誌銘에는 就礪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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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당유고 고려사열전- 王稹

 

                              杞

王稹傳    ■■ - 承德(珹) - 珹(?)(仁宗■■) - ■(毅宗乙亥[1155년]生)

                                  - 稹(?)(明宗■■)                                      [왕진 : ? - 1220년 卒]

                    - ■■(■)

                                                ■■

                    - 仁宗(■)- 承(?)慶(?)(瑛) - 沔 (毅宗和順)

王稹明宗延禧公主之駙馬也[1179년 혼인함]封寧仁候其父珹[1178년 卒]睿宗女承德公主之子也稹容皃端爽柔娟能巧言而令色亦能知大體處事得中好讀書崇釋老不儉不奢賓客滿堂酒不及亂色不移荒與奴輩力穡自給不猗內賜聞人之急傾■視誠人服其賢與安平廣陵幷稱爲宗室三賢雅道則儆也慈悲則沔也德行則稹也公主入內或彌月不出未嘗介意昌化候疑其間語曰人主安可如是乎稹曰子不可以不孝臣不可以不忠小人之言何足信乎聞者莫不嗟歎戒子女以一日一善妹爲康宗之妃而女爲熙宗之妃孫爲高宗之妃皆有坤德以安宗廟稹之力不亦大乎終始孜孜高宗七年[1220년]薨諡曰肅懿有龜鑑二卷

※ 고려사열전을 참조하면 王稹의 가계는 다음과 같다

顯宗과 元惠王后 金氏 - 王基(1069년 卒 ) - 王瑛(1043-1112)과 保寧宮主 - 王禎(1130년 卒)과 興壽公主 - 王杞와 承德公主 - 王珹(1178년 卒) - 王稹(1220년 卒)과 延禧宮主 - 王侹(1234년 卒)과 敬寧宮主

따라서 위의 毅宗乙亥(1155년)은 왕진의 출생연도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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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당유고 려사열전-盧旦

 

盧旦傳 [ 1019년 출생, 1091년 卒 ]

旦字陽夫其母皐(?)蘭之孫也其學來自金渥崇尙麗詞門徒多道流女弁不以貞節爲貴而男女任使爲人媆雅少慾少時無定妻貧不能炊堂宇肅然衣食之節務極精潔西江娼女結契而救之至立生祠盖當時娼歌以旦作爲重故也得錢則娶貧農子敎之不喜權貴子故其徒多寒士畸人性愛竹自號小竹居士處于竹裏精舍癸丑[1073]如宋所至題咏瞺[膾의 오기]炙人口疑以爲唐人詩及皈遷禮部侍郞右諫議大夫無一言上曰何無一言曰平生不言人之長短况君上之過歟上曰吾所畏者不諫之諫也何必如汲長孺然後可乎旦嘗以事忤㫖(?)故其言如是也尋授翰林承旨任使宣宗陛左僕射參(?)政致仕日與徒弟講學逍遙而自娛辛未[선종 신미년은 1091]七月薨諡匡獻年七十三殷鼎妻亦以皐蘭之徒嘗與旦有私因旦而嫁鼎鼎饒居而猶持蕎麥戱曰貧處士爲殷處士十年蕎麥又登盤殷乃宰豚而迫(?)酒曰小竹平生唯一淡字豈謂今日受此膏粱旦嘗責鼎之慾故也然旦亦老取富婿奢其衣食會少時貧友享而施之殆無虛日

※ 노단의 출생연도는 일반적으로 미상으로 알려져 있다. 노단은 私學十二徒중의 하나인 匡憲公徒의 창시자다. 殷鼎은 文忠公徒의 창시자. 고란이 누구인지는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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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당유고 려사열전-黃周亮

 

黃周亮傳 成宗癸未生靖宗丙戌卒 [983년 출생, 1046년 卒]

黃周亮黃山人也精敏俊異少學于外祖大守文聞一而知十守文曰顔淵知十而早死殆不祥之兆歟周亮曰推一理則萬事可通聞一知十何足奇乎守文益奇之命其女禱于神登第立朝爲?輩所推文思出於漢魏詩格汲於晉唐目之以顔淵王勃顯宗時侍御使拾遺中丞進中樞院副使德宗時政堂文學判翰林院事靖宗時吏戶禮尙書參知政事女眞人仇屯等爭財殺其都領將軍開老議下宰輔徐訥等欲用邦憲周亮曰此輩雖歸化不慣風敎宜從其俗輸財償命王從之進平章事九年[정종 9년은 1043년으로 계미년임. 이 해 1월에 문하시중이 됨]爲門下侍中而卒諡曰景文契丹之亂宮闕書籍燒盡周亮奉詔訪問採?撰集太祖至穆宗七代事跡三十六卷以進

※ 위 본문에 보면 황주량은 정종 9년에 문하시중이 되고 그 해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동사강목에 의하면 1043년, 정종 9년 계미년 11월에 황주량이 卒했다고 되어 있어 일치하나 위의 靖宗丙戌卒은 1046년으로 3년의 오류가 보인다.

위의 傳 옆의 生卒기사는 누군가 追記한 것으로 보이는 데 어떤 근거에서 적어 넣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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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당유고 려사열전-王儆

 

王儆傳 [1117년 출생, 1177년 卒] [ 문종의 증손자이고 예종의 부마]

王儆文宗子燾[?-1099년]之孫也父源[아버지의 이름은 源이다. 왕원은 1083-1170.1.12]尙[여기서 尙은 配= 짝 짓다의 뜻이다]肅宗女安壽公主而生爲人端雅恬靜士好學未嘗以貴驕衣服飮食務潔而不務侈所居堂宇池園淡如野人出入者詩人墨客而已六歲始學畵於少監金瑚人物爲當世第一與李寧之山水幷稱尙睿宗女興慶公主[부인. 예종의 2녀. ?-1176년]亦能畵琴瑟甚和烹茶養竹與鶴鹿爲友市井朝廷之事未嘗掛口沈潛於經史諸子旁通六藝方技無不該博貫徹常謙虛若不知稱人之美而隱人之過接人溫詳處事寬厚平生不叱一奴聞人之善則單騎訪問喜若己(?)有寒士之不能自食者?以得活者亦不少故鄭仲夫之亂宗戚大臣亦多見逼獨晏然無事明宗七年丁酉[1177년]四月[임오일]作偈而薨年六十一安平公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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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당유고 려사열전-王沔

 

王沔傳 戊(?)辰(?)生           文宗 - 朝鮮公燾 - ■■[廣平]公源 - 安平公儆                                   [1158년?-1218년]

                                                - 江陵公溫 - ■■■[恭化侯]瑛(■■■)丙午 - 沔

王沔江陵公溫之孫也父瑛尙仁宗女承慶公主而生少聰悟好學請益于從叔安平博覽群書精通諸技能知禽獸草木之性慨然有活人之志閉門力究靑襄之學採藥于山煉丹于寺凡有疾?者無論貴賤貧富皆造其門略無憚色而治之得愈其室毅宗女和順宮主[1157년 궁주가 됨]也亦仁慈能承其夫之志與婢輩共救病傷而見汚穢未嘗一嚬人皆歎服以爲觀音菩薩之化身也崔忠獻亦嘗患?鍼灸於沔家見其?然有超人世之像尤極歎服沔恨毅宗之■祝福于家故時人欲爲沔報仇者多忠粹奴亦受恩于沔遂激忠粹兄弟誅義旼後欲修沔宮沔辭不受曰吾夫妻死何恨乎高宗五年[1218년]薨況靜純厚工於筆札廣陵公

 

※ 고려사절요에 의하면, 왕면의 아버지 왕영은 1186년 10월 卒인 데[고려사에는 10월 계미일],

1186년은 병오년이므로 위 부기의 丙午는 卒年을 의미하는 것 같다.

王瑛墓誌銘에 의하면 왕영은 1126년 출생해 1186년 10월 10일, 61세로 卒했는 데(따라서, 인터넷에 떠도는 1146년 출생자료는 오류다),

왕영묘지명에 의하면,

釐降承慶宮主改封爲恭化伯由是敦▨之恩越▨於諸王▨華?之樓三十▨餘年矣乃至庚寅今上卽位戒葛?之譏推?

승경궁주(承慶宮主)에게 장가들어 공화백(恭化伯)으로 고쳐 봉해지니, 이로 말미암아 두터운 ▨ 은총이 제왕(諸王)보다 ▨ 더하였으며, 영화로운 지위를 누린 것이 삼십▨여 년이었다.

경인년(의종 24, 1170)에 지금의 임금<明宗>이 즉위하자 비방이 일어나서 누를 끼칠까 경계하여 종실에게 ▨을 주니 ▨▨ 구족(九族)이 실로 모두 돈독해졌다. ▨▨ 관례에 따라 은명(恩命)을 내려 다시 후(侯)로 봉하였다...

하므로,

1186년 기준 30여년 이면 1150년 얼마전 결혼을 한 것 같고, 왕영은 1남 1녀만 있다고 하므로 왕면은 1150년대 언저리에 출생한 것 같다.

이 무렵의 무진년은 1148년이다.

하지만,

王瑛女王氏墓誌銘에 의하면, 왕영의 딸(어머니가 承慶宮公主 王氏)은 1185년 1월 13일에 36세로 죽었다(1150년 출생).

仁廟朝乃?之外祖也君平生?未??慈母?世隨父僅肅及其始?玉度蘭儀纖?中度德合家人▨愆

인종(仁宗)이 곧 누이의 외조부이다. 누이의 일생은, 나이 아직 일여덟 살이 되기도 전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아버지 슬하에서 공손하고 맑게 자라났고, 열대여섯 살이 되자 용모가 아름답고 행동이 법도에 맞아 훌륭한 규수가 되었다...

이로써 보면, 承慶宮公主는 1158년경 卒했으므로 왕면은 출생연도는 1158년경이 하한이고 ?로 보아 왕면은 누이의 남동생이므로 상한은 1150년일 것이다.

이 사이에 戊로 시작하는 간지는 戊寅(1158년)이므로 위 戊(?)辰(?)生은 戊寅生으로 읽어야 할 것 같다.

이 경우, 承慶宮公主는 왕면을 낳고 (또는 낳으면서) 죽은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 男八月生齒八歲? 女七月生齒七歲? <說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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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당유고- 亭先生墓志銘

 

江陵先生金仁存[? -1127년]公撰虎亭先生墓志銘 [1053년 출생, 1090년 卒]

吾友皇甫弼君字匡國黃州人也世守鄕祠有功六世祖悌恭[황보제공은 황주 황씨의 시조]從太祖納女于後宮乃神靜太后[900년? -983년 7월]也神靜之弟曰光謙[fl. 965년]娶鷄林白虎公主生塔及德塔娶惠宗女月華公主[혜종의 딸중 월화공주는 없다]生穎穎娶光宗女淳華公主[광종의 딸중 순화공주는 없다]生雪娘夫人初爲顯宗宮人未幾以上命下嫁于金平章元冲[김원충fl. 1036-1049년]生子祿崇穎[황보영을 말한다]取之爲嗣孫改名雋雋娶林塘先生黃周亮[? -1043년]之女黃華夫人生弼黃華之母乃塔弟德之女也君以文宗癸巳[1053년]三月五日生於玉門洞世業之邸以勳戚大家之子長於富貴豪華之中性亦豪放不束能文章有外祖黃先生之風自言大丈夫當將兵百萬立功塞外安可苟苟爲文十六[1068년]蔭補東宮公子事順宗以忠順宗亦愛其才許以將大用卽位[순종은 1083년 즉위]擢爲侍御史而旋遭天崩之痛[순종은 즉위 3개월만에 승하]君以哀毁過度遂以孀婦自處而不仕唯以詩酒自晦緣與郭君輿李君公壽[이공수. ? -1137년]柳君沃及薰李君資玄[이자현. 1061-1125년]南君寬沈君權從遊之吾輩皆年少於君故呼君以虎亭先生君呼吾輩以弟無異同母兄弟常會于園中白虎亭修道大觀齋吉祥吟風咏月講論仙佛品馬試射談及時務爲國當模金角干作詞須倣崔孤雲盖其學文得於黃華而武得於家傳仙佛多從柳白河公州也其文則緣及公壽(采+且)得之仙佛則輿及薰資玄得之武則沃及寬權得之矣君之所自期者儒仙將軍而吾輩亦欲推君以希其大成天胡不祐吾君遂使吾輩失其所宗耶使吾聖上棄此棟梁之臣歟不可知者天道也今上[宣宗]己巳[1089년]黃華夫人前回甲五日而[황화부인은 1029년생]卒李資玄南去不返先是朝議累欲起君而有從中沮之者君竟不再見天日當此哀痛遂成不起之疾越明年庚午[1090년]三月晦日考終于修道菴享年才三十八[황보필은 1053년생]嗚呼此何人斯春與人歸花落鳥啼水流天空而已顧君七尺玉樹之風采豪爽俊逸光風霽月之氣像今復安在哉噫君初娶金尙書元晃女賢而無嗣早卒後室鄭氏惟産公女也生子讓及女而離歸其家側室艾氏有一女皆幼吾季妹玉峰自幼從君而學詩君愛之不使離其左右及鄭氏妬艾氏而歸家吾妹亦已長君欲娶之爲繼室吾家君以君多嬖而離鄭不許然妹慕君而同居不歸緣力請于父母而得許成禮君喜形于色曰自今以後吾反爲君之弟也其言尙在耳妹爲君妻才三歲而年只十九也吾忍見渠耶渠欲削髮爲尼而因腹兒未出只垂血淚而臥枕緣何以爲心乎其所娠者男歟女歟君與緣欲爲骨肉者在此兒而已嗚呼以君之仁不壽其年耶以妹之賢不偕其夫歟君將從緣與沃在傍無一言及家事但喜其從故君於天上也命予書其壙曰順宗之臣皇甫弼七字足矣嗚呼君眞忠矣復何言乎乃銘曰松嶽之氣東仙之雄唯吾先生得傳玄風八子從君誰獲其功唯水逝之夕陽自紅嗚呼松柏日月長空 

[이어서 가계도가 나온다. 풀어쓴다]

 

悌恭(金氏) - 光謙(白虎) - (月華) - (淳華) - 雪娘(元冲) - (黃華) - (鄭氏 - , , 艾氏 - , 金氏 - )

 

光謙(白虎 - (華嚴) - 兪義(白華) - 孝奾, 元泉 - (黃周亮) -(黃華(), 白華(兪義))

 

皇甫弼은 기존 사서에 그 이름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金祿崇은 고려사 문종원년(1047) 3월 기사에,

 

신묘일. 門下侍郞平章事 皇甫穎, 자신의 뒤를 이을 후사가 없으니 외손자인 金祿崇을 후사로 삼도록 허락해 달라고 간청하기에 허락한 후 김녹숭에게 9품의 관직을 주었다”.라고 보이는 것이 유일하다.

 

皇甫穎 (? - 1047)은 이 해 10월 갑진일에 작고했다.

 

위 기록으로 보자면,

 

황보광겸과 백호공주- 황보탑과 월화공주(혜종의 딸)-황보영과 순화공주(광종의 딸) - 설낭부인(딸)과 김원충(사위) - 김녹숭(외손자이나 후사로 입적하여 이름을 皇甫雋으로 바꿈)과 황화부인(황주량의 딸. 1029년 출생) - 황보필(1053년 출생, 1090년 작고)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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童城記 [童城 崔氏가문의 略傳]

彦鄕 [최언향. 957-1018년]

童城崔氏多人傑人所知也光廟時有彦鄕者力農桑營水運兄弟三人俱有富名彦鄕妻許氏方介陽城孔岩社人也色美而有口辯柳河公以樹州使巡郡宿於彦鄕家方介薦枕以來遂爲河公之門吏

彦鄕掌河公船以其土地之所出輸于西江與宋商輩交易唐貨致財百倍置其奴隸於水路要處朝廷嘉其功薦爲水路判官

顯廟戊午[1018년. 현종 9년]卒享年六十二葬于孔岩山中麓

彦鄕之弟曰仙鄕連鄕仙鄕無子有一女爲彦鄕子長功妻連鄕之子曰允功娶彦鄕女元功連鄕亦先彦鄕而卒其妻琴氏爲彦鄕副室

彦鄕妻許氏己巳生[969년 출생]甲申歸彦鄕[984년 혼인]乙酉生[985년]長功戊子生[988년]成功辛卯生[991년]元功甲午生[994년]叔功丁酉生[997년]燕功庚子生[1000년]河公女潤癸卯生[1003년]山功乙巳生[1005년]孝功戊申生[1008년. 허씨는 40세]彦功

彦鄕副室琴氏本連鄕妻也連鄕沒事彦鄕生二子曰丁功曰能功女臨功丁功以燕公爲妻能功以山功爲妻

長功 [최장공. 985년-?]

長功體鴻大性混厚能理財用人初娶仙鄕女生一女而卒次娶魏侍郞德柔[위덕유는 고려사에 등장한다]女竹兒生子雲(乙巳)[1005년]德柔亦以河公之門生見長功之奇相而妻之以女子也方介色衰竹兒亦侍河公而生子響(戊申)[1008년]成功之妻盧氏亦侍于河公翌年[1009년]生女小吉配

庚戌[1010년]竹兒生子順漢甲寅[1014년]生子玉漢丁巳[1017년]生女能漢庚申[1020년]生女芳漢壬子[1012년. 연도가 거꾸로 내려간다]生女初月戊申[1008년]生子柳響

雲 [최운. 1005년 -1081년]

雲初名榮漢字子龍後慕崔孤雲之雲而自署以雲故遂爲行世之名狀魁傑倜儻十五[1019년]能騎射有悤(?)人之風長功甚愛之曰吾家積財累萬而無用人正待汝也興家三(?)家唯汝掌中而已以是雲用錢如水且好色年十六[1020년]能通隣里少女及姑姊無數長功不爲禁

初彦鄕欲營寺于杏花洞而迎僧敎子女未克長功繼其志而創藥王寺奏於河公而迎惠鱗于京寺以爲寺主卽己未之初夏也[1019년 4월]惠鱗到寺以來專事媚道長功妹燕功叔功妻琴簪先與鱗通于簪之兄家後簪兄嫂玉今又通于鱗時玉今女琴沙與雲有私鱗不知而亦通之

杏花洞者孔雀山之西麓也本爲連鄕妻琴氏之基而連鄕仙鄕成功叔功相繼入居仙鄕妻門氏侄子成功妻盧氏家許氏從子機等移住琴氏反爲客勢僅以妻女輩納媚於長功而保之機妻李白牙美而巧與長功相通其子忠亦與雲善故竹兒內妬而外不能言也

辛酉春[1021년 봄]惠鱗與琴沙閉戶晝行許忠見而告于雲雲抽窓而入叱之曰僧道固如是乎誓不可以汝爲師也鱗着慚哀乞于長功母許氏長功只因河公之擇送不卽逐之不復使雲學之雲曰鄕谷無可師之人請上京長功曰吾已買地欲爲汝築舍但待可婚之人也雲曰築舍何待婚姻乎吾嘗入京自擇也長功曰非汝妻則孰能守汝家乎雲曰母可守之竹兒笑曰汝父晝夜好內安可棄去而守汝家乎無己則白牙乎盖雲欲與忠同居而白牙實爲長功妾故也長功解其意而叱之曰汝能妬而白牙獨棄夫遠去乎竹兒見色而含漏曰然則吾當與雲去汝何怒於白牙乎雲曰父母不樂吾不去矣母勿泣也長功乃笑抱竹兒曰吾非怒也但汝妬亦有用處使兒能發孝心矣當買新唐紗汝祖(?)氏而報功竹兒拭漏而笑曰吾所欲者三光緞衫也於是浪高而平[이하 p. 8 우측부터 20쪽까지 판독 생략함. 소설로 보임]

 

[21쪽은 고려의 관제 일부를 정리해놓았다. 판독 생략]

[22쪽부터는 安山系라 하여 金氏의 가계도를 그려놓았다. 풀어쓴다. 괄호안은 출생연도나 배우자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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