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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김씨 세계

경순왕 상계 계보(알지 1세 - 은열 29세), 신라왕 계보도

by 연송 김환수 2013. 10. 5.

 

 始祖 金閼智(김알지)

 

追尊始祖大王(추존시조대왕) 三國史記(삼국사기)에 따르면 新羅第四代(신라제4) 昔脫解王(석탈해왕) 九年(9) 西紀 六五年(서기 65) 乙丑(을축) 三月四日(34) 三國遺事(삼국유사)에는 八月四日(84) 밤에 脫解王(탈해왕)이 들으니 慶州(경주)雞林(계림)에서 닭의 우는 소리가 들리는지라 왕께서는 사람이 살지 않는 숲속에서 닭이 우는 것을 以上(이상)하게 여기시고 匏公을 보내어 알아보게 하였다.

 

포공이 왕의 命令(명령)을 받고 始林(시림)에 가보니 한 나뭇가지에 조그마한 금빛갈의 ()가 걸려있는데 그 아래에는 흰 닭 한 마리가 울고 있었다. 匏公(포공)이 돌아와 ()事實(사실)을 아뢰니 ()께서는 곧 사람을 보내어 그 金櫃(금궤)를 가져오게 하고 뚜껑을 열어보니 ()속에는 조그마한 사내아이가 들어있었는데 그 모습이 奇異(기이)하였다. 왕께서는 크게 기뻐하시며 臣下(신하)들에게 이르시기를 이 어찌 하늘이 나에게 ()으로 아들을 내려 주신 것이 아니냐하시고 그 아이를 키우시니 그는 자라면서 聰明(총명)하고 智略(지략)이 뛰어 났다.

 

그래서 ()께서는 그의 이름을 閼智(알지)라고 부르고 金櫃(금궤)에서 나셨다하여 ()이라는 ()을 정해주셨다. 이로 말미암아 始林(시림)雞林(계림)이라고 고치시고 國號(국호)雞林(계림)으로 고쳤다고 ()해온다. 昔脫解王(석탈해왕)太子(태자)로서 섭정에 該當(해당)하는 大輔(대보)벼슬에 계셨으나 昔婆娑王(석파사왕)에게 讓步(양보)하시고 ()위에 오르지 않으셨다. 뒤에 始祖大王(시조대왕)이라고 追尊(추존)되셨다. 新羅(신라) 文武王碑(문무왕 비)眞澈大師碑(진철대사비)에는 雞林金氏(계림김씨) 始祖星漢王(시조성한왕)이며 文武大王(문무대왕)一五代祖(15대조)라고 記載(기재)되어 있다.

 

: 麻貞夫人(마정부인)이시니 昔脫解王(석탈해왕)王子(왕자) 角干康造(각간강조)의 따님이시다.

 

  신라김씨 김알지 계보도

 

 

二世

 

子 勢漢(세한)

一名(일명) 勢漢(세한) 舊譜(구보)에는 벼슬이 伊飡(이찬)이라 한다. 新羅文武大王碑(신라문무대왕 비)에는 ()星漢王(성한왕)으로 記載(기재) 하였으니 大王(대왕)으로 追尊(추존)되었음을 알 수 있다. ()()()失傳(실전)

 

三世

 

子 阿道(아도)

一名(일명) 阿道(아도) 新羅婆娑王(신라파사왕) 三二年辛亥(32년 신해) 西紀一一一年(서기111)에 벼슬이 波珍飡(파진찬) () 波彌干(파미간)에 이르렀다. 逸聖王(일성왕) 十五年(15) 丙寅年(병인년)葛文王(갈문왕)으로 追尊(추존)되셨다 한다. 三國史記(삼국사기)朴阿道(박아도)金阿道(김아도)誤記(오기)인 듯하다.

 

()()失傳(실전)

 

四世

 

子 首留(수류) 

一名(일명) 壽留(수류) 祗摩王(지마왕) 十五年丙寅(15년 병인) 西紀一二六年(서기126)首相格(수상 격)角干(각간)이 되셨다가 曾孫(증손) 味鄒王(미추왕)때 이르러 大王(대왕)이 되셨다. 

 

() : 失傳(실전)

 

五世

 

子 郁甫(욱보) 

一名(일명) 郁部(욱부) 逸聖王(일성왕) 戊子(무자) 西紀一二六年(서기126)首相格(수상격)角干(각간)이 되셨다가 曾孫(증손) 味鄒王(미추왕) 때 이르러 大王(대왕)으로 追封(추봉) 되셨다. 

() : 失傳(실전)

 

六世

 

子 仇道(구도)

一名(일명) 仇道(구도) 新羅(신라) 阿達羅王(아달라왕) 一九年(19) 西紀 一七二年(서기172) 一月(1)에 벼슬이 波珍飡(파진찬)이셨고 伐休王(벌휴왕) 二年(이년) 西紀一八五年(서기185) 二月(이월)에는 郁元師(욱원사)左軍主(좌준주)가 되시어 召文國(소문국) 지금의 義城(의성)에 있던 나라를 치시었다. 亦是(역시) 伐休王(벌휴왕) 五年(오년) 西紀一八八年(서기188) 三月(3)百濟軍(백제군)母山城(모산성) 지금의 鎭川(진천)侵犯(침범)하자 이를 물리치셨으며 또 西紀一八九年(서기189) 七月(7)百濟軍(백제군)新羅(신라)狥壤(순양)侵犯(침범) 하였을 때에는 百濟軍(백제군) ○○如名(500여명)殺獲(살획) 하였다. 그러나 西紀一九(서기190) 八月(8)百濟(백제)가 다시 圓山鄕(원산향) 지금의 醴泉(예천)襲擊(습격)하고 또 缶谷城(부곡성)侵犯(침범)하였을 때에는 報恩(보은)에서 복병에 패하여 缶谷城主(부곡성주)로 좌천 되셨다. 味鄒王(미추왕) 二年(2) 西紀二六三年(서기263) 二月(2)葛文王(갈문왕)으로 追尊(추존)되셨고 한다.

 

() : 述禮夫人朴氏(술례 부인 박씨) 葛文王(갈문왕) 伊漆(이칠)의 따님이시며 祗摩王(지마왕)孫女(손녀)이시다.

() 양위 모두 失傳(실전)

 

七世

 

子 末仇(말구)

一諱(일휘) 末屈(말굴) 삼국사기에 따르면 西紀二九一年(서기291) 儒禮王(유례왕) 八年 一月(81)에 가장 높은 伊伐飡(이벌찬)이 되셨는데 人品(인품)이 곧으며 忠誠(충성)스럽고 또 智略(지략)이 있어 儒禮王(유례왕)께서 자주 찾아오시어 要緊(요긴)政事(정사)는 모두 상의 하였다. 奈勿王(내물왕)卽位(즉위)追尊忠貞大王(추존충정대왕)으로 되심

 

() : 休禮夫人金氏(휴례부인김씨)

 

八世

 

子 奈勿王(내물왕)

一名(일명) 那密(나밀) 新羅(신라) 第 十七代王(17대 왕)으로 王號(왕호)麻立干(마입간)이니 訖解王(흘해왕)께서 아들이 없이 돌아가시자 西紀(서기) 三五六年(356) 四月(4)王位(왕위)에 오르신 () 많은 善政(선정)을 베푸셨다. 大王二年(대왕2) 봄에 使者(사자)各地方(각지방)에 보내시어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이 없는 늙은이들을 慰問(위문)하게 하시고 그들에게 곡식 석섬씩을 하사 하셨으며 특히 孝道(효도)에 뛰어난 사람들에게는 官職一級(관직일급) 주셨다.

 

()께서는 친히 始祖廟(시조묘)祭祀(제사)를 드리셨다. 九年(9) 四月(사월)에는 倭兵(왜병)이 크게 侵入(침입)하므로 ()은 풀로 허수아비 數千個(수천개)를 만들게 하시고 옷을 입혀 사람이 兵器(병기)를 들고 있는 것 같이 僞裝(위장)吐含山(토함산) 밑에 세우고 勇士(용사) 一千名(1천명)을 솥 고개 지금의 釜峴(부현) 동쪽 벌판에 잠복시켜 두었다가 ()全滅(전멸)시켰다.

 

大王(대왕)十一年(11) 西紀三六六年(서기366)에는 百濟(백제)修交(수교) 하셨고 十七年(17)에는 使者(사자)各地方(각 지방)에 보내시어 곡식을 풀어 가뭄으로 허덕이는 백성을 구제 하셨다. 十八年(18)에는 百濟(백제)禿山城主(독산성주)(永平(영평))男女(남녀) ○○(삼백명)을 이끌고 降服(항복)했다. 二一六年(216)에는 衛頭(위두)前奈(전내)符堅(부견)에게 보내어 親善(친선)을 꾀 하셨다. () 三七年(37)에는 强盛(강성)高句麗(고구려)仲父伊湌大西知(중부이찬대서지)의 아들인 四寸實聖(사촌실성)(뒷날 實聖王(실성왕))을 인질로 보내셨다.

 

八年(38) 五月(5)에 또 倭敵(왜적)侵犯(침범)하여 五日(오일)동안이나 金城(금성)攻擊(공격)하였으나 城門(성문)을 굳게 담은채 지키고 있자 ()退走(퇴주)함에 날샌 騎兵(기병) ○○(200)을 시켜 禿山(독산)(영일지방) 까지 追擊(추격)하여 ()全滅(전멸)시켰다. (40)八月(8)에는 靺鞨族(말갈족) 以北方(이북방)侵犯(침범)하였으므로 三陟地方(삼척지방)에서 擊破(격파)시켰으며 四二年(42)에는 江陵地方(강릉지방)旱魃(한발)이 심하므로 大赦令(대사령)을 내리시는 한편 一年(1)동안 稅金(세금)免除(면제)하셨다. 四六年(46) 西紀四一年(서기 401) 七月(7)高句麗(고구려)人質(인질)로 가 있던 四寸實聖(사촌실성)이 돌아 왔다.

 

四七年(47) 西紀四二年(서기402) 二月(2)逝去(서거)하셨으나 在位(재위) 四七年(47)동안 여러 차례의 畏鍼(외침)을 물리치시고 자비로써 百姓(백성)들을 다스리신 聖君(성군)이시었다. ()三國史記(삼국사기)瞻星臺(첨성대)서 남쪽 지금의 慶州(경주)시 교동 14-1번지임

 

() : 保反夫人金氏(보반부인씨)이니 味鄒王(미추왕)의 공주이시다.

 

九世

 

子 卜好(복호)

一名(일명) 寶露實聖王(보로실성왕) 十一年(11) 西紀 四一二年(서기412)高句麗(고구려)人質(인질)로 가셨다가 訥祗王(눌지왕) 二年(2) 西紀四一八年(서기418)朴堤上(박제상)忠誠心(충성심) 지혜로 高句麗(고구려)땅을 무사히 脫出(탈출)하여 還國(환국)하시었다. 訥祗王(눌지왕) 卽位(즉위)한 후 葛文王(갈문왕)으로 追尊(추존)되셨다.

 

() : 天命夫人(천명부인) 朴氏(박씨) 父角干仁保墓(부각간 인보) 兩位失傳(양위실전)

 

十世

 

子 習寶(습보)

一名(일명) 斯寶(사보) 伊湌(이찬)慈悲王(자비왕) 二年(2) 西紀四五九年(서기459)角干(각간)이 되셨다.

 

() : 烏生夫人金氏(오생부인) 訥祗王(눌지왕)公主(공주) () 兩位(양위)모두 失傳(실전)

 

十一世

 

子 智證王(지증왕)

() 智大路(지대로) 位號智哲路(위호지철로) 西紀四三七年生(서기437년생) ()은 체격이 長大(장대)하시고 膽力(담력)이 남달리 뛰어나셨다. 西紀(서기) 五百年(500)新羅(신라) 第三一代(31) ()炤智王(소지왕)이 아들이 없이 돌아가시자 再從弟(재종 제) (육촌아우)로서 第二二代(22) 王位(왕위)에 오르셨다.

 

왕은 재래의 原始的(원시적)文物制度(문물제도)一新(일신)하여 새 時代(시대)를 이루셨고 麻立干(마입간)으로 써오던 王號(왕호)를 처음으로 ()이라 부르기 시작하였다. 大王(대왕) 三年(3)에는 殉葬(순장)()하시고 農事(농사)를 장려하여 소로 밭갈이를 하는 ()을 가르쳤으며 四年(4)에는 國號(국호)를 다시 新羅(신라)()하셨습니다. 五年(5)에는 喪服(상복)입는 법을 ()하시고 波里城(파리성) 彌實成(미실성) 珍德城(진덕성) 骨火城(골화성)()을 쌓으셨다. 六年(6)에는 州郡縣制度(주군현제도)()하시고 悉直州郡主(실직주군주)異斯夫(이사부)任命(임명)하시고 어름을 저장하게 하시고 船舶(선박)便()을 도모하셨다.

 

七年(7)에는 饑饉(기근)이 심하므로 倉庫(창고)의 곡식을 풀어 百姓(백성)救濟(구제)하시고 서울에 東市(동시)設置(설치)하시고 陷穽(함정)을 파서 猛獸(맹수)의 피해를 막도록 하셨다. 十三年(13) 六月(6)에는 異斯夫(이사부)를 시켜 智路(지로)로써 干山國간산국(鬱陵鳥(울릉조)을 항복 받아 병합하셨다. 十五年(15) 西紀五一四年(서기514)逝去(서거)하시니 在任(재임) 十四年(14)이요 亨壽(형수)七十八歲(78)이시며 諡號(시호)智證大王(지증대왕)으로서 新羅(신라)에서 처음이로 諡號法(시호 법)始作(시작)되었다.

 

() : 廷帝王后(정제왕후) 朴氏(박씨) 伊湌登欣(이찬등흔)의 따님 三國史記(삼국사기)에는 牟梁部相公(모양부상공)의 따님으로 記錄(기록)되었다.

 

十二世

 

子 眞宗(진종) 

벼슬은 角干(각간)

 

() : 禹貞夫人(우정부인) 朴氏()

 

十三世

 

子 欽運(흠운)

벼슬은 舊譜(구보)에는 角干(각간)으로 記錄(기록) 되었으나 三國史記(삼국사기)에는 一吉飡(일길찬)이라 記錄(기록)되어있다.

 

() : 朗元夫人(낭원부인) 朴氏(박씨)

 

十四世

 

子 摩次(마차)

一名(일명) 摩叱次(마질차)

벼슬은 匝干(잡간)

 

() : 河次副因(하차부인) 朴氏(박씨)

 

 

十五世

 

子 法宣(법선) 

벼슬은 大阿飡元聖王二年(대아찬 원성왕 2) 西紀(서기) 七八六年(786)玄聖王()으로 追尊(추존)되었다.

 

十六世

 

子 義寬(의관)

벼슬은 伊飡(이찬) 元聖大王(원성대왕) 二年(2)

神英王(신영왕)으로 追尊(추존)되셨다.

 

() : 英懿王后(영의왕후) 金氏(김씨)이시다.

 

十七世

 

子 魏文(위문) 

一名(일명) 訓人(훈인) 벼슬은 伊飡(이찬)에서 侍中(시중)에 이르셨다. 元聖王(원성왕)卽位(즉위) 하자 興平王(흥평왕)으로 追尊(추존)되시었다.

 

() : 興吉王后(흥길왕후) 金氏(김씨)

 

十八世

 

子 孝讓(효양)

벼슬은 角干(각간) 一說(일설)에는 一吉飡(일길찬) 元聖王(원성왕) 二年(2)明德王(명덕왕)으로 追尊(추존)되셨다.

 

() : 繼烏夫人(계오 부인) 朴氏() 三國史記(삼국사기)()하면 昌近伊己(창근이기)의 따님이라 하였다. 昭文太后(소문태후)追尊(추존)되셨다.

 

十九世

 

子 元聖王(원성왕)

()敬信統一新羅(경신통일신라)國運(국운)이 기울기 시작하여 태종무열왕계의 왕통이 끊어지고 모반과 弑害(시해)가 연이어 貞元元年(정원원년) 西紀七八五年(서기785)元聖大王(원성대왕)께서 王位(왕위)卽位(즉위)하시자 그 뒤는 모두 우리 敬順王大王(경순왕대왕)()가 계승하게 되었다. ()二二代王(22대 왕)智證王(지증왕)昇退(승퇴)하신뒤 八代(팔대) 二七一年(271)만에 다시 왕위에 오르신 분은 昭聖王(소성왕) 哀莊王(애장왕) 憲德王(헌덕왕) 興德王(흥덕왕) 僖康王(희강왕) 閔哀王(민애왕) 神武王(신무왕)文聖王(문성왕) 憲安王(헌안왕) 憲康王(헌강왕) 定康王(정강왕) 眞聖女王(진성여왕) 孝恭王(효공왕) 敬順王(경순왕)十四(14)()이요 그 在任年數(재임 년수)一三五年(135)에 이른다.

 

大王(대왕)奈勿王(내물왕)十二世(12)()이시며 太宗武烈王(태종무열왕)()의 마지막 ()이신 惠恭王(혜공왕) 十六年(16) 西紀七八(서기780) 二月(이월)伊飡(이찬)金志貞叛亂(반란)하였을 때 伊飡(이찬) 벼슬에 있었는데 惠恭王()()을 받아 上大等(상대등)金良相(김량상)合勢(합세)하여 金志貞(김지정)을 목을 베고 ()平定(평정)하는데 공을 세우셨다.

 

亂離(난리)惠恭王(혜공왕)王妃(왕비)弑害(시해)되었으므로 上大等(상대등) 金良相(김량상)王位(왕위)卽位(즉위)하시니 이가 곧 三七大(37) 大王(대왕) 宣德王(선덕왕)이시다. 西紀七八(서기780) 宣德王(선덕왕)이 왕위에 오르시자 元聖王(원성왕)께서는 首相(수상)上大等(상대등)이 되셨다.

 

어느날 幞頭(복두)를 벗고 素笠(소립)을 쓰고 十二絃琴(십이현금)을 안고 天官寺(천관사) 우물에 들어가신 꿈을 꾸셨다. 餘三(여삼)이란 사람의 解夢(해몽)祈禱(기도)하고 時期(시기)오르기를 기다리셨다. 드디어 西紀七八四年(서기784) 一月(일월)宣德王(선덕왕)이 돌아가셨으나 아들이 없자 群臣(군신)들이 議論(의논)하여 周元(주원)을 다음 ()으로 추대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周元(주원)의 집은 閼川(알천)건너 京北(경북) 二十里(20)에 있었고 때마침 밤중에 많은 비가 내려 閼川(알천) 강물이 넘쳐 周元(주원)이 강물을 건너오지 못하였다. [群臣(군신)들은 오늘의 暴雨(폭우)는 하늘이 주원이 ()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이니 平素(평소) 德望(덕망)이 높고 君王(군왕)體貌(체모)를 갖추신 上大等敬信(상대등 경신)을 다음 ()으로 모시자]與論(여론)이 있어서 다시 群臣會議(군신회의)를 열어 大王(대왕)()으로 推戴(추대)하여 新羅(신라) 三八代(38) ()이 되셨다.

 

()께서는 王位(왕위)에 오르시자 始祖(시조)大王(대왕) 文武王祖父(문무왕조부)이신 興平王父親(여평왕 부친) 明德王(명덕왕)五廟(오묘)에 모시고 文武百官(문무백관)爵位(작위)를 일급씩 높이셨다. 二月(이월)에는 金元全(김원전)()나라에 보내시니 ()나라의 德宗(덕종)羅錦綾彩(라금릉채) 三四(34)衣服銀盒(의복은합)()禮物(예물)을 보내 왔었다. 이해에 가뭄이 들자 六六二三(66230석의 곡식을 풀어 百姓(백성)들을 救濟(구제)하셨다. 三年(3)에는 罪人(죄인)大赦(대면)하셨고 四年(4) 봄에는 종전에 활 쏘기로 人材(인재)登用(등용)하던 制度(제도)를 고치시어 讀書三品制(독서3품제)로써 人材(인재)를 뽑으니 春秋左氏傳禮記文選(춘추좌씨전예기문선)을 읽어 能通(능통)하고 論語孝經(논어효경)에 밝은 사람을 上品(상품)으로 하고 曲藝論語孝經(곡예논어효경)을 읽은 사람을 하품으로 하였다.

 

이것이 東方科擧制度(동방과거제도)始初였다. 詩傳書傳春秋禮記周易史記漢書後漢書(시전서전춘추예기주역사기한서후한서)諸子百家書(저자백가서)能通(능통)한 사람은 特別(특별)拔擢(발탁)하였고 이해에 가뭄이 심하였으므로 全國(전국)에 사람을 보내시어 按撫(안무)하셨다. 五年(5)에 가뭄이 심하여 國庫(국고)를 풀어 救恤(구휼) 하셨고 六年(6)에는 碧骨堤(벽골제)增築(증축)하여 농사를 장려 하셨다. 또 같은 해 五月(5)에는 곡식을 풀어 廣州(광주)公州(공주)에 굶주린 百姓(백성)救濟(구제)하셨다. 七月(칠월)에는 太子(태자) 仁謙(인겸)을 잃은 慘慽(참척)을 당하시고 太子(태자)에게 惠忠(해충)이란 詩號(시호)를 내리셨다. 前侍中伊飡悌恭(전시중이찬제공)謀叛(모반) 하므로 잡아 죽이셨다.

 

惠忠太子(혜충태자)의 아드님 大河飡俊邕(대하찬준옹)侍中(시중)으로 삼으시고 八年(8) 五月(오월)에는 王子(왕자) 義英(의영)太子(태자)()하셨으나 十年(10) 太子(태자)를 잃으셨다. 同年(동년) 七月(7)에는 奉恩寺(봉은사)를 세우셨고 十一年(11) 一月(1)에는 惠忠太子(혜충태자)의 아드님 俊邕(준옹)을 태자로 ()하셨다.

 

또 이해 四月(4)旱魃(한발)이 심하여 ()께서 친히 죄수를 다스리시니 六月(6)에 비가 내렸다. 十二年(12) 봄에는 饑饉(기근)이 들고 疾病(질병)流行(유행)하여 倉庫(창고)를 풀어 救濟(구제)하시었다. 十四年(14) 西紀(서기) 七九八年(798) 三月(3)望德寺(망덕사)의 두 () 서로 마주쳤는데 이해 十二月(12) 二十九日(29)()께서 돌아가셨으므로 元聖(원성)이라는 諡號(시호)하고 遺命(유명)에 따라 奉德寺(봉덕사) ()쪽에서 火葬(화장)하였다. 在位(재위)十四年(14)이시다. ()께서는 이 처럼 文治(문치)에 뛰어나신 英主(영주)이셨는데 窮達之辯(궁달지변)으로 친 히 身空訶腦歌(신공가뇌가)를 지으셨다.

 

() : 蓮達花夫人(연달화 부인) 淑貞王后金氏(숙정왕후 김씨) 角干(각간) 金神述(김신술)의 따님이시다.

 

二十世

 

子 禮英(예영)

一名(일명) 벼슬은 角干(각간)에 이르셨고 孫子(손자)이신 神武王(신무왕)王位(왕위)卽位(즉위)하시어 惠康王(혜강왕)으로 追尊(추존)하셨다.

 

() : 順成太后(순성태후) 金氏(김씨) 大河干(대하간) 金神述(김신술)의 따님이시다.

 

二十一世

 

子 均貞(균정)

追尊(추존) 成德王(성덕왕) 西紀八一八年(서기818)(憲德王(헌덕왕) 十年(10) 봄에 侍中(시중)이 되셨다. 憲德王(헌덕왕) 十四年(14) 三月(3)侍中(시중) 金憲昌西紀七八五年(서기785)에 자기 아버지 周元(주원)王位(왕위)卽位(즉위)하지 못하니 대신 元聖王(원성왕)王位(왕위)卽位(즉위)하시니 怨恨(원한)을 품고 있었다.

 

그는 菁州都督(청주도독)을 거쳐 態津州都督(태진주도독) 지금의 公州(공주)이 되었을 때 公州(공주)에서 叛亂(반란)을 일으켜 國號(국호)長安國(장안국)이라하고 年號(년호)慶雲元年(경운 원년)으로 ()한 뒤 光州(광주) 全州(전주) 晋州(진주) 尙州(상주) 都督(도독)을 하니 忠州(충주) 淸州(청주) 金海(김해)()의 벼슬아치와 () 고을 守令(수령)들이 服屬(복속)하였다. 晋州都督(진주도독) 向英(향영)은 몸을 빼서 密陽(밀양)으로 逃亡(도망)하고 慶州(경주) 春川(춘천) 梁山(양산) 平壤(평양) 原州(원주) 等地(등지)에서는 먼저 憲昌(헌창)叛亂(반란)을 알고 軍士(군사)를 단속하여 守備(수비)하였다.

 

十八日(18)全州將士(전주장사) 崔雄(최웅)이 서울로 逃亡(도망)하여 이 事實(사실)報告(보고) 하였다. 이에 憲德王(헌덕왕)將軍(장군) 八名(8)을 내어 王都八方(왕도팔방)守備(수비)()一吉飡張雄(일길찬장웅)先發(선발)하고 뒤이어 衛恭(위공)悌邕(제옹)을 보내고 伊飡均貞公(이찬균정공)과 그 아드님 祐徵(우징)匝干(잡간) 雄元(웅원)에게 三軍(삼군)掌握(장악)하게하여 이를 막아 치도록 하였다.

 

伊飡均貞公(이찬균정공)께서는 이 憲昌亂(헌청난)官軍總司令官(관군총사령관)이 되시어 이를 征伐(정벌) 하셨다. 伊飡均貞公(이찬균정공)께서는 敵軍(적군)屋山(옥산)에서 맞아 이를 擊滅(격멸)시키시고 諸將(제장)과 더불어 全軍(전군)指揮(지휘)하여 公州(공주) 고마나루(態津(태진))에 이르러 ()과 싸워 많은 ()斬獲(참획)하고 大勝利(대승리)를 거두었다. 憲昌(헌창)은 겨우 몸을 피하여 公州城(공주성) 안으로 들어가 굳게 지키므로 官軍(관군)()包圍(포위)하고 十日(10)동안 ()攻擊(공격)하여 ()陷落(함락)하게 되자 憲昌(헌창)은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을 알고 自殺(자살)하니 드디어 ()陷落(함락)되고 叛亂(반란)平定(평정)되었고 () 二三九(239)誅殺(주살)하였다.

 

흥덕대왕(興德大王) 十年(십년) 西紀八三五年(서기835) 河飡(하찬)으로서 上大等(상대등)에 오르셨다. 興德大王(흥덕대왕)이 돌아가심에 아드님 祐徵(우징)(神武王(신무왕))조카 禮徵(예징) 金陽(김양)의 도움으로 王位(왕위)에 오르시려 하였으나 조카 金悌隆(김제륭)(僖康王(희강왕))侍中(시중) 金明(김명)(閔哀王(민애왕))()의 도움을 받아 ()이 되려하였으므로 宮中(궁중)에 들어가 서로 싸우다가 (패하여 戰死(전사)하셨다. 이 싸움에 金陽(김양)은 화살에 맞았다. 後日(후일) 아드님 祐徵(우징)(神武王(신무왕))께서 反正(반정)하여 王位(왕위)에 오르시자 成德王(성덕)으로 追尊(추존) 되셨다.

 

() : 眞嬌夫人(진교부인) 憲穆太后(헌목태우) 朴氏(박씨) 

:貴勝夫人(귀승부인)

憲德王妃(헌덕왕비)

 

二十二世

 

子 神武王(신무왕)

() 祐徵(우징) 八二二年(822) 四月(사월) (憲德王十四年(헌덕왕 14))金憲昌(김헌창)()을 일으켰을 때 大河飡(대하찬)으로 아버님均貞公(균정공)과 함께 三軍(삼군)指揮(지휘)하여 공주 금강고마나루(公州錦江態津)에서 크게 싸워 ()을 무찌르고 大勝利(대 승리)를 거두어 亂離(난리)平定(평정)功勞(공로)가 있었다. 西紀八二八年(서기828) 一月(일월)에는 大河飡(대하찬)으로서 侍中(시중)이 되셨다가 西紀八三一年(서기831)(興德大王六年(흥덕대왕6)) 一月(일월)에는 侍中(시중)()하셨다.

 

西紀八三四年(서기834)(興德大王九年(흥덕대왕9)) 一月(일월)에 다시 侍中(시중)이 되셨으나 다음해 西紀八三五年(서기835) 二月(이월)에 아버님 均貞公(균정공)(追尊成德王(추존성덕왕))께서 上大等(상대등)이 되시어 入相(입상)하시므로 侍中(시중) 벼슬을 辭任(사임)하셨다가 西紀八三六年 (서기836) 十二月(12)興德王(흥덕왕)이 돌아가시자 아버님 均貞公(균정공)께서 王位(왕위)에 오르시려 하므로 金陽(김양)과 더불어 아버님을 도왔으나 亦是(역시) 王位(왕위)를 노리는 悌隆(제륭)(僖康王(희강왕)宮中(궁중)에서 對決(대결)하여 싸운 結果(결과) ()여 아버님은 戰死(전사) 하셨으므로 神武王(신무왕)께서는 敗走(패주)하셨다.

 

이에 競爭者(경쟁자)(僖康王(희강왕)新羅(신라) 第四十三代(43) 王位(왕위)에 올랐다. 西紀八三七年(서기837)(僖康王二年(희강왕2)) 四月(사월)에 아버님 均貞公(균정공)께서 失敗(실패)하여 怨望(원망)했다는 理由(이유)僖康王(희강왕)편인 金明(김명), 利弘(리홍)()謀害(모해)한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惑禍(혹화)가 미칠까 두려워 五月(오월)家族(가족)을 거느리고 黃山津口(황산진구)()하셨다. 그곳에서 배를 타시고 淸海鎭(청해진)으로 가시어 淸海鎭(청해진) 大使弓福(대사궁복)에게 依託(의탁)하셨다. 六月(6)에는 姑從妹夫(고종매부)禮徵(예징)河飡良順(하찬량순)亦是(역시) ()하여 淸海鎭(청해진)으로 ()을 찾아 依持(의지)하였다.

 

마침내 僖康王(희강왕) 三年(3) 西紀八三八年(서기838) 에는 僖康王(희강왕)편에서 僖康(희강)을 세우고 均貞(균정)敗死(패사)케한 金陽(김양), 利弘(리홍)()反亂(반란)을 일으켜 僖康王(희강왕)自決(자결)하고 金明(김명)이 스스로 王位(왕위)에 오르니 四十四代(44)閔哀王(민애왕)이다. 閔哀王(민애왕) 二年(2)西紀八三八年(서기838)二月(이월)에는 먼저 均貞公(균정공)을 도와 僖康王(희강왕)과 싸우다가 화살을 맞고 失敗(실패)하였던 金陽(김양)兵士(병사)募集(모집)하여 淸海津(청해진)으로 ()을 찾아 뵈었다.

 

이에 神武王(신무왕)께서는 閔哀王(민애왕)簒位(찬위)하였다는 말을 듣고 淸海鎭大使弓福(청해진대사궁복)에게 이르시기를 [金明(김명)이 임금을 殺害(살해)하고 스스로 ()이되어 利弘(리홍)軍部(군부)枉殺(왕살)하였으니 같은 하늘아래서 살 수 없다. 원하건데 將軍(장군)軍士(군사)를 빌려서 君父(군부)怨讐(원수)를 갚을까한다]하니 弓福(궁복)이 이를 ()承諾(승낙)하고 軍士(군사) 五千名(5000)을 주면서 그의 親知鄭年(친지정년)을 시켜 軍隊(군대)統率(통솔)하여 反亂(반란)平定(평정)하도록 하였다.

 

이에 그해 十二月(12)大王(대왕)께서는 金陽(김양)平東將軍(평동장군)으로 삼으시고 閻長張弁鄭年(염장장변정년), 駱金(낙금), 張建英(장건영), 李順行(이순행) ()과 더불어 軍士(군사)를 거느리시고 武州鐵冶縣(무주철야현)에 이르러셨다. 閔哀王(민애왕)大監金敏周(대독김민주)를 시켜 맞아 싸우게 하였다.

 

大王(대왕)께서는 駱金(낙금)李順行(이순행)을 보내시어 騎兵(기병) 三千名(3000)으로 突擊(돌격)하니 殺傷(살상)太半(태반)이었다. 다음해 一月(일월)에 밤낮으로 行軍(행군)하여 大邱(대구)벌에 이르니 閔哀王(민애왕)은 이소식을 전해듣고 伊飡大昕(이찬대흔)() 將兵(장병)으로 하여금 막게하였다. 그러나 大王(대왕)()이 싸워서 크게 이기고 閔哀王(민애왕)편의 軍士(군사)過半數(과반수)를 잃었다.

 

閔哀王(민애왕)은 서쪽 郊外(교외)의 큰 나무아래에 있었는데 左右(좌우)에 있던 閔哀王(민애왕)殘黨(잔당)을 깨끗이 掃蕩(소탕)하였다. 이리하여 西紀八三九年()(서기839) 四月(4) 二十六日(26) 禮徵(예징)()推戴(추대)를 받아 王位(왕위)에 오르시니 新羅(신라) 第四十五代(신라 제 45) ()께서는 卽位(즉위)하시자 先祖(선조)이신 伊飡禮英公(이찬예영공)追尊(추존)하여 惠康王(혜강왕)으로 ()하시고 先考(선고)이신 均貞公(균정공)成德大王(성덕대왕)으로 追尊(추존)하고 모후를 憲穆太后(헌목태후)로 높혔다. 王子慶膺(왕자경응)太子(태자)冊封(책봉)하시고 淸海津大使弓福(청해진대사궁복)感義軍使(감의군사)()하시고 食邑二千戶(식읍2000)를 내리셨다.

 

한편 利弘(리홍)은 두려운 나머지 妻子(처자)를 버리고 산속에 숨었으나 騎士(기사)를 보내어 斬殺(참살)하였다. 神武王(신무왕)께서는 전에 淸海鎭大使弓福(청해진대사궁복)에게 依託(의탁)하고 또 弓福(궁복)軍士(군사)를 빌릴 때 장차 王位(왕위)에 오르면 弓福(궁복)의 딸을 王妃(왕비)로 삼겠다고 約束(약속)을 한바있어 王位(왕위)에 오르신뒤 弓福(궁복)의 딸로서 王妃(왕비)를 삼겠다고 하였으나 여러 臣下(신하)들이 ()하기를 [弓福(궁복)出身(출신)徵賤(징천)하니 그 딸로서 王妃(왕비)를 삼는 것은 옳지못하다]挽留(만류)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해 七月(7)()께서는 不幸(불행)하게도 逆徒(역도)利弘(리홍)의 화살에 등을 맞으신 꿈을 꾸시고 등창이 생겨서 苦生(고생)하시다 가 十一月(11) 二十一日(21)에 돌아가셨다.

 

() 경주 제형산 북쪽 동방리

() : 貞從太后(정종태후) 朴氏(박씨)의 따님이시다.

 

二十三世

 

子 文聖王(문성왕)

() 慶膺(경응) 西紀(서기)八三九年(서기839) 七月(칠월) 神武王(신무왕)의 뒤를 이어 제사십육대 왕위에 오르셨다. 왕위에 오르시자 罪人(죄인)大赦(대사)하시고 禮徵(예징)上大等(상대등)으로 하시고 淸海鎭大使弓福張保皐(청해진대사궁복장보고)는 일찍이 [神考(신고)를 도와 先祖(선조)巨賊(거적)討伐(토벌)하였으니 어찌 그 功勞(공로)를 잊으랴]하시고 鎭海(진해)將軍(장군)으로 삼고 ()하여 衣服(의복)下賜(하사)하셨다.

 

父王(부왕)이신 神武王(신무왕)께서 張弓福(장궁복)의 약속에 따라 七年(칠년) 三月(삼월)弓福(궁복)의 딸을 次妃(차비)로 맞으려하니 廷臣(정신)들이 ()하기를 [夫婦(부부)()는 사람의 論理(논리)()夏禹(하우)塗山(도산)을 아내로 맞아 ()하였고 殷湯(은탕)()을 맞아 昌盛(창성)하였고 周幽王(주유왕)褒姒(포사)로 인하여 國難(국난)이 일어났으니 國家(국가)興亡(흥망)이 이와 같아 삼가지 않을 수 없나이다. 張弓福(장궁복)은 섬사람이온데 어찌 그의 딸이 王妃(왕비)가 되오리까하므로 그 計劃(계획)은 그만 두시었다. 弓福(궁복)은 자기 딸이 王妃(왕비)가 되지 못한데 크게 怨恨(원한)을 품고 ()八年() 西紀八四六年 (서기846) 봄에 逆賊(역적)謀議(모의)하니 朝廷(조정)에서는 이를 平定(평정)하려 하였으나 後患(후환)이 있을까 두려워하였다.

 

그렇다고 그대로 둘 수도 없어서 어찌 할 바를 몰랐다. 武州(무주)사람 閻長(염장)이란 勇士(용사)가 이 말을 듣고 아뢰기를 [朝廷(조정)에서 許諾(허락)하여 주시다면 小臣(소신)張弓福(장궁복)除去(제거) 하겠나이다]하니 ()께서는 이를 許諾(허락)하시었다. 閻長(염장)淸海鎭(청해진)張弓福(장궁복)에게로 가서 智略(지략)을 써서[나라를 背反(배반)하여 張弓福(장궁복)에게 依託(의탁)하는 것처럼 꾸며 그를 歡迎(환영)하는 宴會席上(연회석상)에서 술 취한 張弓福(장궁복)을 찔러 죽였다.

 

()九年(9) 二月(이월)에는 平議殿(평의전)臨海殿(림해전)修理(수리)하셨고 十一月 九日(119)에는 伊飡金式(이찬김식) ()謀叛(모반)平定(평정)하시고 十二年(12)에는 死刑囚(사형수)赦免令(사면령)을 내리시고 十三年(십삼년) 二月(이월)에는 淸海鎭(청해진)을 없애고 그곳의 百姓(백성)들을 碧骨郡(벽골군)으로 移住(이주)하게 하셨으며 阿飡元弘(아찬원홍)佛經(불경)을 가지고 왔으므로 ()께서는 郊外(교외)까지 나가시어 이를 맞으셨다.

 

十四年(14) 七月(칠월)에는 鳴鶴樓(명학루)修理(수리)하시고 十七年(17) 一月(1) 봄에는 使臣(사신)을 보내시어 西南州郡(서남주군)百姓(백성)들을 慰問(위문)하시었다. ()께서는 이와 같이 百姓(백성)들을 사랑하시고 文化財(문화재)를 아끼시는 賢君(현군)이었으나 三年(3) 봄에는 一吉飡元弼(일길찬원필)謀反(모반)하다가 逃亡(도망)했고 八年(8)에는 張弓福(장궁복)謀反(모반)하려 했고 九年(9) 五月(오월)에는 良順(량순)()謀反(모반)하다가 伏誅(복주)되었고 伏誅(복주)되었고 十年(십년) 九月(구월)에는 伊飡金式(이찬김식)()謀反事件(모반 사건)을 다 平定(평정)하시었다. ()十九年(19) 丁丑(정축) 西紀八五七年(서기857) 九月(구월)()께서는 病患(병환)이 드시어 과인은 不敏(불민)한 사람으로 높은()에 있어 위로는 하늘에 죄를 얻을까 두렵고 아래로는 民心(민심)을 잃을까 근심된다.

 

조석으로 조심조심하여 마치 살얼음을 밟은 것 같았는데 여러 臣下(신하)들이 左右(좌우)에서 補佐(보좌)하여 社稷(사직)()된 일은 없었으나 不幸(불행)하게도 ()든지 十餘日(10여일)이 되어도 病勢(병세)는 더하고 精神(정신)昏迷(혼미)하여 아침이슬과 같이 쓰러질까 두렵도다. 나라의 大業(대업)은 임금이 없어서는 아니 되며 모든 政事(정사)는 잠시라도 없앨 수가 없는 것이다.

 

舒弗邯誼靖(서불감의정)先王(선왕)孫子(손자)이시고 寡人(과인)叔父(숙부)로서 孝友明敏(효우명민)하고 寬厚仁慈(관후인자)하여 오래도록 輔政(보정)하였으니 이분을 모시면 위로 祖宗(조종)을 받들고 아래로는 蒼生(창생)鎭撫(진무)할만 하여 무거운 짐을 풀어 賢德(현덕)에게 맡기고자하니 어찌 恨歎(한탄)하리오. 항차 生死始終(생사시종)萬物(만물)大期(대기)壽命長短(수명장단)人命(인명)常分(상분)이니 죽는 사람은 常理(상리)에 이른 것이므로 죽는 사람을 과히 슬프 하지 말 것이요 모든 臣下(신하)들은 힘과 忠誠(충성)을 다하여 죽어가는 사람을 보내고 살아 있는 사람을 섬김에 어그러짐이 없도록 하라. 이 뜻을 국내에 밝혀 알게 하라 하시고 西紀八五七年(서기857) 九月(구월) 七日(칠일)에 돌아가시니 在任(재임)十九年(19)이었다. 諡號(시호)崇德興文之文(숭덕흥문지문)이요 行花知天之聖(행화지천지성)이라하여 文聖大王(문성대왕)으로 정하셨다.

 

() : 慶州孔崔趾(경주 공최지)에 있다.

 

() : 昭明王后(소명왕후) 朴氏(박씨) 伊飡魏昕(이찬위흔)의 따님이시다.

 

二十四世

 

子 安()

三國史記(삼국사기)에는 父王(부왕)이신 文聖王(문성왕) 九年(9) 西紀八四七年(서기847) 王子(왕자)太子(태자)冊封(책봉)하였다고 하고 十四年(14) 十一月(11)에는 王太子(왕태자)께서 돌아가셨다고 記錄(기록)되어 있으나 太子(태자)王子(왕자)는 이 어른이 아닌 듯하다. 憲安王(헌안왕)王位(왕위) 오르자 伊飡(이찬)에서 首相(수상)上大等(상대등)이 되시었다.

 

() : 元人夫人(원인부인) 朴氏(박씨)

 

() : 失傳(실전)

 

二十五世

 

子 敏恭(민공)

憲康王(헌강왕) 六年(6) 西紀八八(서기880) 二月(이월)伊飡(이찬)으로서 乂謙(예겸)의 뒤를 이어 侍中(시중)이 되셨다. 시중으로 계실 때는 太平聖代(태평성대)를 누리고 있을 때인데 西紀八八(서기880) 九月(구월)()께서는 左右群臣(좌우군신)들과 함께 月上樓(월상루)에 오르시어 四方(사방)觀望(관망)하셨는데 서울 지금의 慶州(경주)民家(민가)가 줄지어 늘어섰고 音樂(음악) 소리가 끊이지 않으므로 ()께서 敏恭(민공)께 이르시기를 내가 들은 건데 지금 百姓(백성)의집 들은 모두 기와로 덮었고 짚으로는 덮지 않는다고 하며 밥을 짓는 데는 숯을 쓰고 나무를 때지 않는다고 하니 사실이냐?고 묻자

 

敏恭公(민공공)께서 대답하여 아뢰기를 小臣(소신)도 그와 같은 말을 들었사온데 그것은 陛下(폐하)께서 卽位(즉위)하신 以來(이래)天地陰陽(천지음양)이 잘 調和(조화)가되고 風雨順調(풍우순조)로와 해마다 豊年(풍년)이 들어 백성들은 衣食(의식) 걱정이 豊足(풍족)하고 國境(국경)()일이 없으므로 市井(시정)에서는 모두들 기뻐하오니 이는 聖德(성덕)所致(소치)이옵니다라고 하시니 ()은 매우 기뻐하시면서 이는 실로 ()들의 힘이지 어찌 ()()이리오라 하셨다고 한다.

 

二十六世

 

子 實虹(실홍)

() 仁慶(인경) 벼슬은 角干(각간) 또는 舒弗翰(서불한)이시다. 三國史記(삼국사기)孝女知恩(효녀지은)()에 따르면 孝宗(효종)의 아버님 諱字(휘자)仁慶(인경)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實虹(실홍)仁慶(인경)同一人異名(동일인이명)이다. 敬順王(경순왕) 本紀(본기) 및 신도비명(神道碑銘)에 보면 後唐天成(후당천성) 二年(2) 西紀九二七年(서기927)卽位(즉위)하시어 祖考實虹(조고실홍)懿興王(의흥왕)으로 考孝宗(고효종)神興王(신흥왕)으로 追尊(추존)하셨다고 記錄(기록)되어 있다.

 

二十七世

 

子 孝宗(효종)

三國史記(삼국사기)孝女知恩(효녀지은)()()하면 ()께서는 少年時節(소년시절)花郞(화랑)으로 계실 때 그 무리가 千餘名 (1000여명)에 이르렀고 孝女知恩(효녀지은)을 종으로 샀던 주인에게 그 몸값 십여섬을 변상해주고 지은이로 하여금 奴隸(노예)()하게 하여주고 또한 ()백섬과 衣服(의복)을 내리셨다. 이 말을 들은 眞聖女王(진성여왕)께서 그 오빠인 憲康王(헌강왕)公主(공주)()에게 중매하시었다고 한다. 大阿飡(대아찬)으로서 侍中(시중)이 되셨고 뒤에 伊飡(이찬)으로 昇進(승진)하셨다.

 

() : 桂娥(계아)夫人(부인) 金氏(김씨)이니 憲康王(헌강왕)의 따님이시다.

 

二十八世

 

子敬順王(경순왕)

() () 西紀八九七年(서기897) 七月(칠월)誕生(탄생)하셨고 西紀九二七年(서기927) 十一月(11)姨從(이종)이신 景哀王(경애왕)의 뒤를 이어 新羅(신라) 第五十六代(56) 王位(왕위)에 오르셨다. 第五十一代(51) ()眞聖女王(진성여왕)失政(실정)으로 盜賊(도적)이 일어나고 나라안이 群雄割據(군웅할거)로 어지럽게 되자 眞聖女王(진성여왕)十一年(11)引責(인책)하여 그 庶姪(서질)孝恭大王(효공대왕)에게 讓位(양위)하였다.

 

그러나 孝恭大王(효공대왕)()에도 弓裔(궁예)甄萱(견훤)勢力(세력)漸漸(점점)커지기만하고 孝恭大王(효공대왕)은 아드님이 없이 돌아가셨으므로 사람들이 孝恭大王(효공대왕)妹夫(매부)이고 新羅(신라) 第八代(8)大王(대왕) 阿達羅尼師令(아달라니사령)의 먼 後孫(후손)朴景暉(박경휘)를 세워 ()을 삼으니 이가 곧 新羅第五十三代(신라 제53) () 神德王(신덕왕)이요 朴氏(박씨)로서는 七二八年(728)만에 비로소 王位(왕위)에 오른 셈이다. 神德王(신덕왕)이 돌아가시자 큰아드님 景明王(경명왕)王位(왕위)에 오르시고 그 뒤를 이어 景明王(경명왕)의 아우 景哀王(경애왕)王位(왕위)에 오르시었다.

 

景哀王(경애왕) 四年(4) 西紀九二七年(927) 十一月(11)後百濟(후백제)甄萱(견훤)新羅王都(신라왕도)侵犯(침범) 하였는데 景哀王(경애왕)()嬪族戚(빈족척)을 거느리고 飽石亭(포석정)에서 놀이를 하던 중 이어서 甄萱(견훤)에게 잡히고 말았다. 甄萱(견훤)宮中(궁중)掠奪(약탈)하고 景哀王(경애왕)脅迫(협박)하여 自殺(자살)케 한뒤에 ()姨從弟(이종제)敬順王(경순왕)權知國事(권지국사)를 삼고 退去(퇴거)하였다.

 

이에 敬順大王(경순대왕)은께서 王位(왕위)에 오르신 것이다 西紀九二九年(서기929) 七月(칠월)에는 甄萱(견훤)이 지금 경북 의성을 攻擊(공격) 하였고 十月(십월)에는 聞慶(문경)攻擊(공격) 하였으나 擊退(격퇴)되었다. 西紀九三一年(서기931)敬順王(경순왕) 五年(5) 二月(이월)에는 高麗太祖(고려태조)五十餘騎(50여기)를 거느리고 慶州(경주) 大王(대왕)拜謁(배알)할 것을 원함으로 大王(대왕)께서는 百官(백관)을 거느리시고 迎接(영접)하여 臨海殿(림해전)에서 잔치를 베푸셨다. 이때 大王(대왕)께서는 나는 하늘의 도움을 받지 못하여 患難(환난)이 일어났고 甄萱(견훤)不義(불의)姿行(자행)하며 마침내 나라를 侵害(침해)하니 憤痛(분통)함을 말할 수 없다하시면서 눈물을 흘리시니 周圍(주위)에서 흐느끼지 아니한 사람이 없었다. 高麗太祖(고려태조)도 눈물을 흘리면서 慰勞(위로) 하였다.

 

高麗太祖(고려태조)數十日(수십일) 머무른 뒤 돌아갈 때 ()께서는 從弟裕廉(종제유렴)으로 하여금 陪行(배행) 하도록 하셨다. 八月(8)에는 高麗太祖王建(고려 태조 왕건)使臣(사신)을 보내어 錦衫鞍馬(금삼안마)를 바치셨다. 大王六年(대왕 육년) 西紀九三二 年(서기932) 四月(4)()나라에 使臣(사신)을 보내셨다. 九年(9) 西紀九三五年(서기935) 十月(10)에 이르러 疆土(강토)는 거의 다 남에게 빼앗기어 國勢(국세)는 심히 衰弱(쇠약)하여져서 스스로 나라를 穩全(온전)하게 支撑(지탱)할 수가 없게 되었다. 大王(대왕)께서는 天命(천명)을 깨달으시고 群臣會議(군신회의)召集(소집)하여 國策(국책)議論(의논)하시었다. 大王(대왕)께서는 나라를 高麗太祖(고려태조)에게 讓渡(양도)할 것을 提議(제의)하자 어떤 이는 옳다하고 어떤 이는 옳지 않다고 하여 贊反(찬반)紛紛(분분)하였다.

 

특히 太子(태자)이신 () ()(麻衣太子(마의태자))께서는 나라의 存亡(존망)天命(천명)에 따르는 것이니 마땅이 忠臣義士(충신의사)들과 더불어 民心(민심)收拾(수습)하고 스스로 나라를 굳게 지키다가 힘이 다한 然後(연후)에 이를 議論(의논)함이 옳은 일이옵는데 어찌 千年(천년)社稷(사직)을 하루아침에 다른 사람에게 넘겨 주겠나이까하고 아뢰었다.

 

그러나 大王(대왕)께서는 외롭고 危險(위험)함이 이와 같아 形勢(형세)는 나라를 穩全(온전)하게 保全(보전)할 수가 없는데 無辜(무고)百姓(백성)들에게 이 이상 피를 흘리게 함은 나로서는 차마할 수 없는 일이다라고하신 뒤에 백성을 생각하시는 至極(지극)한 생각에서 侍郞(시랑) 金封休使(김봉휴사)國書(국서)高麗太祖(고려태조)에게 讓渡(양도)할 뜻을 전하시었다. 이에 太子(태자)痛哭(통곡)하면서 ()拜別(배별)하고 皆骨山(개골산)現在(현재) 金剛山(금강산)으로 들어가서 바위틈을 집을 삼고 베옷을 입고 草食(초식)으로서 애닮은 一生(일생)을 마치셨다고하여 世上(세상)사람들은 太子(태자)麻衣太子(마의태자)라고 불러온다.

 

그해 十一月(11)高麗太子(고려태자)大王(대왕)國書(국서)를 받고 大相王鐵 (대상왕철)()을 보내어 이를 迎接(영접)토록 하였다. 大王(대왕)께서는 新羅國都(신라국도)를 떠나 高麗太祖(고려태조)에게 歸附(귀부)하는데 香車寶馬(향차보마)三十里(삼십리)를 연이었고 길가의 國民(국민)들은 목메어 痛哭(통곡)하였다고한다.

 

高麗太祖(고려태조)郊外(교외)까지 나가서 大王一行(대왕일행)을 맞이하여 慰勞(위로)하면서 ()동쪽 甲第(갑제) 훌륭한 邸宅(저택)으로 침소를 정하여 드리고 高麗太祖(고려태조)長女(장녀) 柳花夫人(유화부인)樂浪公主(낙랑공주)大王(대왕)後妃(후비)로 삼으셨다. 또 그해 十二月(12)에는 大王(대왕)께서 高麗太祖(고려태조)天德殿(천덕전)에서 臣下(신하)가 되는 儀式(의식)庭見禮(정견례)를 드리니 新羅國(신라국)建國(건국)한지 九九二年(992)의 오랜 歷史(역사)는 그 ()을 내리고 千年(천년)社稷(사직)은 끝났다. 高麗太祖(고려태조)駙馬(부마)가 되신 敬順大王(경순대왕)에게 政丞公(정승공)을 삼으니 그 ()太子(태자)보다 윗자리이며 國祿(국록)으로 해마다 쌀 千石(1000)支拂(지불)하고 侍從(시종)하는 사람들을 보내주고 新羅(신라)慶州(경주)라 고쳐 부르고 大王(대왕)食邑(식읍)으로 ()하였다.

 

처음 大王(대왕)께서 高麗太祖(고려태조)에게로 歸附(귀부)하실 때에 高麗太祖(고려태조)는 크게 기뻐하면서 大王(대왕)에게 두터운 ()로서 待接(대접)하며 使者(사자)를 시켜 大王(대왕)에게 말씀하시기를 지금 나라를 寡人(과인)에게 넘겨주시니 그 은혜가 크옵니다.

 

원하옵건데 우리의 宗室(종실)婚姻(혼인)을 맺어 영원히 舅甥(구생)()를 맺고자 하옵니다.라고 하니 大王(대왕)께서 대답하시기를 우리 伯父億廉(백부억렴)께서는 知大耶郡事(지대야군사)로 계셨는데 그 따님이 婦德(부덕)이 있고 容貌(용모)가 아름다우니 그로서 內庭(내정)을 갖추심이 좋을까하옵니다고 하시어 高麗太祖(고려태조)는 그를 아내로 맞으니 이가 곧 神聖王后(신성왕후) 金氏(김씨)神聖王后(신성왕후)所生(소생)이 바로 顯宗(현종)임금의 아버지로서 安宗(안종)으로 追尊(추존)되신 분이다.

 

高麗景宗(고려경종)임금은 大王(대왕)公主(공주)를 맞이하여 왕비로 삼으니 이가 곧 憲成王后(헌성왕후)이시다. 景宗(경종)西紀九七五年 (서기975) 十月(십월)大王(대왕)을 상보(尙父상부) 로 모셨다. 尙父(상부)冊封(책봉)하는 景宗(경종)誥命(고명)에 이르기를 ()하노니 ()나라가 처음 나라를 세웠(啓聖(계성))을 때 먼저 (宮望(궁망))(姜太公(강태공)의 이름은 呂尙(여상)) ()하고 ()나라가 일어났을 때에는 먼저 蕭荷(소하)冊封(책봉)하였다.

 

이로부터온 天下(천하)가 크게 平定(평정)되고 龍圖(용도)(()系譜(계보))二十七代(27)를 세우고 麟趾(인지)(子孫(자손))四百年(400)을 밟아 日月(일월)이 거듭 밝고 天下(천하)가 길이 交泰(교태)하여 비록 無爲(무위)하여 ()로부터 始作(시작)하여 理致(이치)通達(통달)臣下(신하)에 이르기 까지 그 빛에 모두 順化(순화)되었다.

 

이제 觀光順化衛國功臣上柱國樂浪國王政丞食邑八千戶金傳(관광순화위국공신상주국락량국왕정승식읍팔천호김전)은 대대로 鷄林(계림)에 살게 하고 벼슬은 王爵(왕작)을 나누어 주거니와 그 英烈(영열)氣像은 구름을 누를 만하고 文章(문장)才藝(재예)는 땅을 박차고 뛰어 오를만하다. ()春秋(춘추)에 넉넉하고 封土()()()하니 가슴속에 六蹈三略(육도삼약)(兵書(병서))이 들어있고 七縱五甲(칠종오갑)(兵術(병술))要點(요점)은 손바닥을 가리키듯하다.

 

우리 太祖(태조)가 처음 陸隣(육린)友好(우호)를 닦으며 일찍 餘風(여풍)을 알아 바로 駙馬(부마)(왕의사위임)姻諠(인훤)를 베푸시어 안으로 大節(대절)을 갚아주었다. 이로서 집과 나라가 마침내 하나로 돌아가 群臣(군신)宛然(완연)三韓(삼한)에서 모이고 아름다운 이름이 뚜렷이 퍼지고 懿範(의범)(아름다운 규모의 뜻임)은 높이 빛났다.

 

그러므로 尙父都省令(상부도성령)()를 더하여 주고 아울러 推忠愼義崇德守節功臣(추충신의숭덕수절공신)()를 준다. 勳封(훈봉)()와 같으나 앞서의 八千戶(8,000)通算(통산)하여 一萬戶(10,000)食邑(식읍)으로 삼게한다라고 하였다. 西紀九七八年(서기978) 四月(사월)敬順大王(경순대왕)께서 애닮고 ()많은 一生(일생)을 마치시니 享壽(향수)八十二歲(82)이시고 諡號(시호)應天撫運之敬(應天撫運之敬)이요 應時率德之順(응시율덕지순)이라하여 [敬順(경순)이라하였다.

 

() : 京畿道(경기도) 漣川郡(연천군) 百鶴面(백학면) 高浪浦里(고랑포리)에 있다.

 

() : 竹房王后(죽방왕후) 朴氏(박씨)

二男(2)

() : 孝穆王氏(효목왕씨) 樂浪公主(낙랑공주) 뒤에 新鸞公主(신난공주)改號(개호)

五男(5)

() 高麗太祖(고려태조)第一(1 첫째) 公主(공주)

別妃(별비) : 順興安氏(순흥안씨) 

一男(1)

** 子女(자녀) 九男(9) 三女(3)를 두셨다.

 

二十九世

 

子 殷說(은열)

고려태조의 맏 따님이신 낙랑공주께서 낳으신 첫째 아드님으로서 대안군의 봉군을 받으셨고 벼슬이 태자소전을 역임하신 후 內史侍郞平章事(내사시랑평장사)에 이르셨고 顯宗(현종) 戊辰(무진) 西紀一二八年(1028) 三月(삼월) 四日(사일)에 돌아가시었다. ()는 나라에서 葬地(장지)下賜(하사)하여 開城郡 嶺南面(영남면) 龍興里(용흥리) 花谷五龍山南麓壬坐(화곡오용산남록임좌)에 모셨다. 李朝正祖八年(이조정조 8) 西紀一七八四年(서기1784)()誌石(지석)發見(발견)되어 ()親族關係(친족관계)分明(분명)하여졌다.

 

() : 全州李氏(전주이씨) 工部侍郞義興君瞻(공부시랑의흥군첨)의 따님 後裔(후예)들은 慶州(경주) 安東(안동) 金寧(김녕) 安山(안산) 江陵(강릉) 平海(평해) 水原(수원) 漢南(한남) 遂安(수안) 淸風(청풍) 公主(공주) 龍潭(용담) 上洛(상낙)()을 비롯한 많은 ()金氏(김씨)分派(분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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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김씨 시조 이전 경순왕 상계 계보

비조(시조) : 대보공 김알지  → 2세 → 3세 → ....생략 .....

19세. 원성왕(元聖王) → 20세. 각간(角干) 예영(禮英)

21세. 상대등(上大等) 균정(均貞) → 22세. 신무왕(神武王)

23세. 문성왕(文聖王)  → 24세. 상대등(上大等) 안()

25세. 시중(侍中) 민공(敏恭)→ 26세. 角干(각간) 인경(仁慶=實虹(실홍)

27세. 시중(侍中, 伊飡이찬) 효종(孝宗) → 28세. 경순왕(敬順王)

29세.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 은열(殷說)

 안산김씨(安山金씨) 시조(始祖) 김긍필(金兢弼) : 1세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상주국(上柱國안산현개국후(安山縣開國侯)


 

 

안산김씨 시조 이전 경순왕 상계 계보

 

비조. 始祖 金閼智(김알지) 벼슬 大輔(대보),

      雞林金氏(계림김씨) 始祖星漢王(시조성한왕)

2. 勢漢(세한) 벼슬 伊飡(이찬)

3. 阿道(아도) 벼슬 波珍飡(파진찬) () 波彌干(파미간)

4. 壽留(수류) 벼슬 角干(각간)

5. 郁甫(욱보) 一名(일명) 郁部(욱부) 벼슬 角干(각간)

6. 仇道(구도) 벼슬 波珍飡(파진찬)

7. 末仇(말구) 벼슬 伊伐飡(이벌찬)

8. 奈勿王(내물왕) 一名(일명) 那密(나밀)

9. 卜好(복호) 一名(일명) 寶露實聖王(보로실성왕)

10. 習寶(습보) 벼슬 角干(각간)

11. 智證王(지증왕) () 智大路(지대로)

12. 眞宗(진종) 벼슬 角干(각간)

13. 欽運(흠운) 벼슬 角干(각간)

14. 摩次(마차) 벼슬 匝干(잡간)

15. 法宣(법선) 벼슬 大阿飡(대아찬)

16. 義寬(의관) 벼슬 伊飡(이찬)

17. 魏文(위문) 벼슬 侍中(시중)

18. 孝讓(효양) 벼슬 角干(각간)

19. 원성왕(元聖王) ()敬信

20. 예영(禮英) 벼슬 각간(角干)

21. 균정(均貞) 벼슬 상대등(上大等)

22. 신무왕(神武王) () 祐徵(우징)

23. 문성왕(文聖王) () 慶膺(경응)

24. () 벼슬 상대등(上大等)

25. 민공(敏恭) 벼슬 시중(侍中)

26. 實虹(실홍) () 仁慶(인경) 벼슬 角干(각간)

27. 효종(孝宗) 벼슬 大阿飡(대아찬),시중(侍中),伊飡(이찬)

28. 경순왕(敬順王) () ()

29.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 은열(殷說)

 

안산김씨(安山金) 시조(始祖김긍필(金兢弼) : 1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상주국(上柱國안산현개국후(安山縣開國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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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김씨 족보

 

영조 48년(1724년 즉위 원년으로 볼 경우 *원년은 1725년임) 1771년(영조47년 신묘) 발행된 목판본, 경주김씨 족보입니다 .

 

 이 책은 고려 홍무 을해년인 1395년 발행됐던 책인데 이 책을 계속 중판하다 1771년에 다시 발행한 책입니다.

제1책에 홍무 을해년 처음 발행됐을 때 그 책에 붙었던 서문이 책머리에 시작됩니다.


그리고 이 후 계속해서 중판된 책마다에 붙였던 책의 서문이 이 책에 모두 실려 있습니다.

홍무 을해년이면 1395년(홍무28년)이며 이 해는 고려가 망하고 조선 태조(이성계) 4년입니다. 

 

 

 

 

신라김씨 시조 탄강도 계림

 

 

 

 

 

 

 

 시조 김알지 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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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김씨선원록서

신라김씨 선원록입니다.

 

이 책은 1887년 조선 고종황제 24년에 구한말 조선 왕실 인쇄소격인 박문국이

발행 한 책으로 박문국은 조선말엽 관인 인쇄소 입니다.

 

이 책은 조선말 동성동본을 가리기 위해 조선정부가 발행한 책으로 보입니다.

이 책 분량은 20장(40쪽)이며 판은 목활자본 입니다.

종이는 저지 즉 한지이며 책상태 미품으로 품질이 좋은 편니다.

 

 

신라김씨 각종 분관록 22페이지 안산김씨 기록은 29페이지에 있으며 

# 29페이지 연성김씨 : 사실 안산김씨라는 기록이 있음

 

신라김씨선원록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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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김씨 선원보

경주김씨 계림군파 대동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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