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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성씨 연원(김)

영광 김씨(靈光金氏)의 연원

by 연송 김환수 2014. 7. 25.

영광 김씨(靈光金氏)의 시조(始祖) 김심언(金審言ㆍ?~1018)은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넷째 아들 은열(殷說)의 5세손이다. ‘고려사(高麗史)’ 열전(列傳)에 의하면, 그는 김해군(金海君)에 봉해진 염(濂)의 셋째 아들(혹은 둘째 아들)로서 고려 최초 과거 급제자인 최섬(崔暹)의 문하(門下)에서 학문을 연마하고 그의 사위가 되었다. 성종(成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우보궐(右補闕ㆍ정6품)로서 기거주(起居注)를 겸했고, 성종 9년(990년) ‘봉사이조(封事二條)’를 올려 성종의 정책수행에 큰 지침이 되었다.

이 ‘봉사이조(封事二條)’는 ‘해동공자(海東孔子)’로 추앙된 최충(崔沖)이 덕종(德宗) 초년에 내외의 관청 벽에 다시 써 붙이게 하여 관리들의 귀감을 삼게 할 정도로 후대까지 국가의 지침이 되었다. 목종 4년(1001년) 지공거(知貢擧)를 역임한 후 현종(顯宗)이 즉위하자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에 승진되어 예부상서(禮部尙書)를 거치고, 내중시랑평장사(內中侍郞平章事)에 이르러 오성군(筽城君ㆍ오성은 영광의 별호)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관향(貫鄕)을 영광(靈光)으로 하게 되었다.
현종 9년(1018년) 그가 세상을 떠나자 왕은 애도의 뜻을 표하고 문안(文安)이란 시호를 내렸다.

 

 ▲ 전남 영광군 묘량면 삼학리에 세워진 문안공(文安公) 김심언(金審言) 동상과 기천사(岐川祠)에 봉안된 초상.
 

그후 후손들은 개성(開城) 서쪽에 터를 잡고 살면서 고려조에서 명성을 떨쳤는데, 시조 심언(審言)의 아들 윤보(允輔)가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판소부시사(判少府寺事)를 역임했고, 현손(玄孫) 극검(克儉ㆍ?∼1139)은 숙종조(肅宗朝)에 태자소사(太子少師ㆍ종2품)를, 6세손 영부(永夫ㆍ극경의 아들)는 중서시랑 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와 판병부사(判兵部事)를 역임하였다. 특히, 고려시대 중앙요직의 하나인 평장사(平章事)를 많이 배출하여 이 마을(전남 영광군 영광읍 월평리)을 평장동(平章洞)이라 불렀다.


그러나 고려 의종 24년(1170년) 정중부(鄭仲夫)와 이의방(李義方) 등이 난(亂)을 일으켜 많은 문신들이 화를 당할 때 동북면병마사 및 간의대부(諫議大夫)로 있던 보당(甫當ㆍ?∼1173)이 병마녹사(兵馬錄事) 이경직(李敬直) 등과 모의하여 이들을 물리치고, 쫓겨난 의종(毅宗)을 다시 세우고자 동계(東界)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그리하여 장순석ㆍ유인준(柳寅俊)을 남로병마사(南路兵馬使)로 내시 배윤재(裵允材)를 서해도 병마사로 삼았으며, 여기에 동북면지병마사 한언국(韓彦國)도 합세했다. 장순석 등은 거제(巨濟)에 유배되어 있던 의종(毅宗)을 받들고 경주로 나와 웅거했으나, 정중부(鄭仲夫)가 보낸 이의민(李義旼)ㆍ박존위(朴存威)에게 2개월도 못되어 진압되고 말았다.

9월에 지병마사(知兵馬事) 한언국(韓彦國)이 붙들려 죽고, 보당(甫當)과 병마녹사(兵馬錄事) 이경직(李敬直)은 개경에 보내져 이의방(李義方) 등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보당(甫當)은 체포되어 문초를 받던 중에 문신(文臣)으로서 이 모의에 가담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말함으로써, 1170년 무인난(정중부의 난) 당시에 살아 남았던 많은 문신이 이때에 죽임을 당했다. 이를 김보당의 난(또는 계사의 난)이라 한다. 이후 무인들은 스스로 정부의 요직을 독점하고 정권을 잡아 무인정권의 확립을 보게 되었으며, 그 뒤 영광 김씨(靈光金氏) 일문은 멸문(滅門)의 화를 입고 평장동(平章洞)은 폐허가 되었다. 그로 인하여 영광 김씨는 중간계대가 실전(失傳)되어 정확한 계대(係代)를 상고(詳考)할 수 없다. 

 

 

 ▲ 김극검 묘지명(金克儉墓誌銘)과 탁본. 가로×세로×두께 각각 45× 64×2㎝인 이 묘지명에 의하면 묘주(墓主)인 김극검(金克儉)은 고조가 김심언(金審言), 고조비는 삼계군부인 최씨(森溪郡夫人 崔氏), 증조는 김화성(金化成), 증조모는 양원군부인(陽原郡夫人), 조부는 김행경(金行瓊), 할머니는 양원군부인 이씨(陽原郡夫人 李氏), 아버지는 김수녕(金守寧)이다. 김극검의 부인은 한남군부인 김씨(漢南郡夫人 金氏)로 김태개(金台凱)의 딸이다.

시조 심언(審言)의 맏아들 윤보(允輔)의 후손으로 이어지는 정부(正父·경파)ㆍ태용(台用·장흥파)ㆍ 연(衍·영광파)ㆍ효민(孝敏·무장파)ㆍ광찬(光纘·양사파)ㆍ중보(重寶·용강파)ㆍ무수(懋修·삼화파)는 윤보(允輔)를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계대(係代)하여 왔으며, 강계파(江界派)만은 심언(審言)의 차남 문경(文卿)의 후손으로 세계(世系)를 계대(係代)하여 왔다.



경파(京派) 정부(正父)가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금오위 별장(金吾衛別將)을 역임했고, 현손(玄孫) 천보(千寶)가 고려 충숙왕(忠肅王)이 원(元 )나라에 억류될 때 시종했다가 돌아와 이등공신(二等功臣)에 올라 통화군(通化君)에 봉해지고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를 거쳐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역임하였다. 그의 손자 사순(思順)은 공민왕(恭愍王) 때 홍건적(紅巾賊)의 난(亂)을 토평(討平)하여 안사공신(安社功臣)에 올라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냈다.

 

▲ 시조인 문안공(文安公) 김심언(金審言)과 충절공(忠節公) 김해(金該)를 배향하는 전남 영광군 영광읍 월평리 기천사(岐川祠).
 

영광파(靈光派) 연(衍)의 손자이며 상호군(上護軍) 용(龍)의 아들인 해(該ㆍ1379∼1419)는 태종 1년((1401년)에 등과하여 갑산군수 겸 병마절제사(甲山郡守兼兵馬節制使)에 오르고 보공장군대호군(保功將軍大護軍)이 되었다. 세종 원년(1419년) 6월에 삼군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 이종무(李從茂) 휘하 절제사의 종군으로 대마도의 왜구를 정벌하다가 이노군전(尼老郡戰)에서 전사하니 조정에서 예관(禮官)을 보내어 초혼장(招魂葬)을 하였다. 영조 때 병조판서의 증직(贈職)되고 충절(忠節)의 시호를 내렸으며, 어제비문(御製碑文)으로 포양하였고 기천사(岐川祠)와 무령서원(武靈書院)에 배향되어 있다. 손자 개(漑)는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를 지냈으며, 효행과 학문이 출중하여 문하에서 많은 제자가 배출되었다.

 

 

▲ 민통선 내에 버려져 있던 묘를 군 장성이 문중에 알려 찾게 된 장흥파(長興派) 파조 문경공(文敬公) 김태용(金台用)의 묘.
 

장흥파(長興派)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지낸 태용(台用)을 파조(派祖)로 하며, 그의 증손(曾孫) 찬(瓚)ㆍ필(王畢ㆍ1426∼1470) 형제는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전한(弘文館典翰)과 이조참판(吏曹參判)을 각각 지냈다. 필의 아들 괴(塊)ㆍ물(物) 형제는 성종(成宗) 때 문과에 급제하고 봉사(奉事)와 전적(典籍)을 역임하였다.

괴(塊)의 아들 광원(光遠)은 일찍이 조광조(趙光祖)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문장과 행의(行誼ㆍ행실이 올바름)로 천거되어 승문원 습독(承文院習讀)이 되고, 기묘사화(己卯士禍)와 신사무옥(辛巳誣獄)에 연루되어 유배되었으나 서원(書院)에 향사(享祀)되었다.

 

 

▲ 설암(雪巖) 김필이 계유정난 뒤 장흥에 은거하다 후학을 위해 세운 사인정(舍人亭ㆍ전남유형문화재 제55호).
 

무장파(茂長派) 효민(孝敏)은 고려에서 서경유수(西京留守)를 역임하였고, 그의 16세손 성헌(聖獻)은 영조(英祖) 때 이조정랑(吏曹正郞)을 지냈다.

양사파(良士派) 광찬(光纘)은 고려에서 좌찬성(左贊成)을 역임하였으며, 그의 아들 호(浩)는 조선에서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 손자 맹수(孟粹)는 현령(縣令), 증손 학중(學中)은 지평(持平)을 각각 역임하였다.

용강파(龍岡派) 중보(重寶)는 호조참판(戶曹參判)을 지냈고, 아들 효흥(孝興)은 통정대부(通正大夫)에 올랐으며, 현손 희걸(禧傑)은 아들 몽학(夢學)과 함께 통정대부에 올라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오른 무지(武只)와 더불어 가문을 빛냈다.

삼화파(三和派)무수(懋修)는 황해도 해주에 살다가 평안도 삼화(三和)로 이거하여 삼화파(三和派)를 이루었다.

강계파(江界派) 예부상서(禮部尙書) 문경(文卿ㆍ심언의 차남)으로 이어지는 강계파는 문경의 손자 홍(泓)이 목사를 지냈고, 현손 보원(寶元)이 부사과(副司果)를, 6세손 서(恕)는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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