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화의 필사본 화랑세기에 대한 진위논쟁
『花郞世記』는 8세기 초에 신라의 김대문이 저술한 책으로, 화랑에 관한 내용이다.
삼국사기 열전 <설총> 조에 “김대문이 伝記 몇 권을 지었는데 그 가운데 고승전, 화랑세기, 樂本, 漢山記가 아직도 전하고 있다”고 서술되어있다.
삼국사기가 저술된 1145년경에는 여러 권의 화랑세기가 존재해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이에 관하여 네이버백과사전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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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부터 화랑세기는 사라진 책으로 분류되었다. 그런데 1989년 2월에 갑자기 지방의 한 사람이 소장하고 있던 필사본 화랑세기가 공개되었다.
그 책에는 화랑의 기원, 역대 화랑의 지도자인 風月主의 계보 및 행적 등이 향가와 함께 기록되어있었다.
역사학계의 연구자 가운데 일부는 책의 내용이 사실이라면서 김대문의 화랑세기가 맞는다고 인정하였지만, 다수의 연구자들은 책을 소장하게 된 경위가 분명치 않고, 책의 내용 중 골품제도 및 혼인제도에 관한 부분이 기존의 학계 연구결과와 다르다는 점에 주목하여 僞書로 보고 있다.
원본 화랑세기를 필사했다는 사람은 朴昌和(1889~1962)이다. 그는 1923년에 渡日하였으며, 1933년에서 1945년까지 일본 宮內省 도서료(현재의 궁내청 서릉부)에서 朝鮮典故를 조사하는 부서의 촉탁으로 근무했다고 알려져 있다.
궁내청이란 황실의 사무를 보는 관청이며, 書陵部는 황실의 도서 및 천황의 陵墓를 관리하는 부서이다.
이 서릉부가 관리하는 도서란 正倉院에 보관되어 있는 도서류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正倉院은 8세기 말에 세워진 보물창고로, 당시 光明황후(701~760)가 황실에서 소유하고 있던 귀중품들을 모두 東大寺에 기증하자 이를 보관하기 위하여 만든 건물이다.
正倉院에는 수만 점의 보물들이 있으며, 대부분 8세기 이전의 것들이다. 특히 무역을 통하여 입수한 통일신라시대의 유물들도 많이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없어진 당시의 가야금도 2개가 있으며, 신라에서 시행한 丁田(班田制)의 실태 등을 알 수 있는 경덕왕시대의 농촌자료도 발견되었다.
궁내청의 천황릉 관리에 대하여 井澤元彦은『역설의 일본사』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궁내청이 천황릉의 학술조사를 인정치 않는 진짜 이유는 무엇인가?
물론 그것이 공식 견해는 아니기 때문에 신문잡지에는 한 번도 실린 적이 없다. 그러나 알 만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것이 진짜 이유라는 소문이 있다.
본래 풍문에 지나지 않는 것을 굳이 받아들여야 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 일본의 고대사를 생각할 때 매우 유익한 재료이므로 감히 소문을 그대로 옮겨본다.
그것은 천황릉을 발굴하면 천황가와 한반도의 관계가 밝혀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천황가의 조상이 한반도에서 건너왔다는 증거가 나올 우려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궁내청은 신성한 천황릉을 훼손한다는 이유로 학계의 끈질긴 요구에도 불구하고 천황릉의 발굴을 거부하고 있다.
正倉院은 외인출입을 철저히 통제하지만 매년 1회 일반에게 공개를 한다고 한다. 하지만 그 때에도 황실도서 전체를 공개하는 것인지는 의심스럽다.
천황릉의 경우로 미루어 보아 황실의 도서도 전체는 학자들에게도 공개를 하지 않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특히 고대 한국에 관련된 도서는 그렇다.
그런데 박창화는 궁내성 도서료의 직원이었으므로 출입이 자유로웠을 것이다. 더욱이 그가 맡은 일은 이 正倉院 내의 조선관련 문서를 찾아내어 그 내용을 정리하는 것이었다.
그는 12년간 이 일을 계속했다. 12년간을 그곳에서 근무했으므로 그는 正倉院 내의 도서류는 눈을 감고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익숙해있었을 것이며, 우리가 알지 못하는 많은 우리나라 문서를 보았을 것이다.
光明황후가 황실의 보물을 기증한 것은 김대문이 화랑세기를 저술한 시기보다 50년 정도 뒤의 일이다. 이와 같은 타이밍과 당시 활발했던 신라-일본 간의 무역을 고려할 때 이 책이 일본으로 흘러들어가 正倉院에 보관되어왔을 가능성이 높다.
박창화가 궁내성 도서료에 근무했다는 것은 그의 한문 실력이 뛰어났음을 말해준다.
그가 김대문의 화랑세기를 그곳에서 발견했다면 그가 그것을 필사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는 그 가치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박창화는 귀국 후 정부관계자를 수차례 찾아가 일본으로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나는 박창화의 필사본이 眞書 화랑세기의 필사본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박창화는 화랑세기 필사본을 포함하여 많은 遺稿를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중에는 <강역고>와 같이 그의 저작이 분명한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 원본의 저작연대와 저술자가 밝혀지지 않아 화랑세기까지 僞作의 의심을 받고 있는 것 같다.
화랑세기 외의 遺稿들은 세상에 공표된 것도 아니어서 사료적 가치를 판단할 수는 없지만 저작연대와 저술자가 밝혀지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그것을 위작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고 본다.
그것이 박창화의 창작물이라면 그가 무슨 목적으로 그런 위작을 만들었는지 나는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다.
역사서를 위작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의 유고들은 모두 그가 궁내성에 근무할 때 필사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위서가 아닐 가능성도 그만큼 크다고 할 수 있다.
하여튼 그런 애매모호한 유고들이 있다고 하여 저작연대와 저술자가 분명한 화랑세기까지 도매금으로 위작의 의심을 받는 것은 억울한 감이 있다.
네이버백과사전에 의하면 학계에서는 다수가 박창화의 필사본 화랑세기를 위서라고 보고 있으며, 그 주요 이유는 그 필사본의 花郞徒 像이 학자들의 연구결과와 크게 다르다는 점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앞뒤가 뒤바뀐 전도된 논리로, 마치 신발이 너무 작아 발에 맞지 않으니까 발을 깎아야 한다는 말과 같다.
그것은 그들의 연구가 엉터리라는 증거는 될지언정 그 책이 위서라는 증거는 되지 않을 터이다.
화랑세기의 내용으로 볼 때 화랑도란 원래 군사조직이 아니라 성인식의 한 과정이었던 것 같다.
성인이 된 남녀가 산에 들어가 함께 생활을 하면서 미래의 신랑신부감을 찾는 행사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화랑이 소녀들로 조직된 源花에서 시작되었다는 것도 그것이 원래 군사조직이 아니었음을 잘 보여준다.
그렇지만 진흥왕 이후 점차 고구려와 백제의 공격이 격화되자 신라도 군국화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이에 따라 화랑의 조직도 군사화 하였고 실전에도 나아가 크게 활약하게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필사본 화랑세기에는 摩腹子라는 것이 나온다. 마복자란 임신한 여자가 왕이나 귀족과 성관계를 갖은 다음 낳은 아이로, 그 아이는 그 왕이나 귀족이 마치 자신의 양아들처럼 뒤를 돌봐 준다는 것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한국식 代父制度이다. 또 眞骨正統, 大元神統 등 이른바 姻統이라는 것도 나오는데 이것은 왕에게 왕비를 포함하여 女色을 공급하는 조직이다.
이들은 母系로 그 法統을 이어갔다고 하므로 이 책을 통하여 우리는 신라시대에 고대 모계사회의 遺風이 남아있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신라사회의 실태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매우 신기하고 귀중한 자료이다. 그렇지만 고려시대에는 그 내용은 별로 신기할 것도 없고 또 화랑세기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으므로 삼국사기. 삼국유사에는 굳이 기술되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김부식은 유학자였고 일연은 승려였다. 그들 입장에서는 이러한 내용을 그들의 저서에 담는 것은 그리 달가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삼국사기. 삼국유사의 화랑도 상과 화랑세기의 화랑도 상이 다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신라는 聖骨과 眞骨만이 모든 권력을 독차지한 신분주의 사회였다. 그리고 그것은 철저한 族內 혼인으로 유지되었다.
성골진골은 근친결혼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신당서 신라전에는 ‘兄弟女 姑姨 從姉妹, 皆聘爲妻, 王族爲第一骨, 妻亦其族, 生子皆爲第一族’ 이라고 하였다.
신라에서는 ‘형제의 딸, 부모의 자매, 사촌자매를 모두 처로 맞아들이며, 왕족은 제1골이고 그 처도 같은 친족이며, 그 자식도 모두 제1족이 된다.’는 것이다.
신라 지배층의 이와 같은 극단적인 순혈주의는 애당초 어디에서 기원한 것일까. 혹시 그것은 그들의 뿌리가 흉노로서, 그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만들어진 관습 아닐까?
상상의 나래가 끝없이 펼쳐지는, 흥미진진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일본에는 ‘國學’이라는 것이 있다. 에도시대에 생겨난 학문으로, 일본의 古典을 연구하여 불교와 유교에 물들기 이전의 순수한 일본인의 모습을 되찾자는 것이다.
많은 훌륭한 학자를 배출했지만 一派는 국수주의로 흘러 神道와 결합한 후 明治維新 때에는 國家神道로 재탄생하였고, 明治維新의 이론적 지주가 되어 황국사상을 고취시켰으며, 오늘날의 극우파로 이어지고 있다. 일본의 우파는 우리나라의 이른바 뉴 라이트와는 근본이 다르다.
그들은 그들 나름의 전통과 古典이라는 고유의 연구분야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앞에는 천여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홀연히 화랑세기가 등장한 것이다.
그야말로 유교불교의 윤리에 물들지 않은 천연의 모습 그대로. 이것이 眞書의 필사본이라면 참으로 감격이 아닐 수 없다.
그렇지만 박창화의 필사본을 대하는 학계의 태도는 냉담하기만 한 것 같다.
노태돈교수는 원고를 입수하고도 몇 년간 이를 공개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유는 이것이 위서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학계의 태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박창화가 스스로 한국의 고대사 서적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만 남아있다고 이야기를 했다면서 이것은 박창화가 스스로 화랑세기의 존재를 부정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고 한다.
학계에서는 이것을 박창화 필사본이 위서라는 유력한 근거로 내세우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박창화가 한국에는 고대사에 관한 자료가 적기 때문에 화랑세기를 발굴해낸 것이 얼마나 값진 것인가를 강조한 말일 수도 있는 것이다.
박창화 필사본 화랑세기는 뒷부분이 앞부분에서의 책 체제가 무너지고 내용도 간략해 진다고 한다. 위작론자들은 이것도 위작의 근거로 삼고 있는 것 같지만 이것은 박창화가 화랑세기의 필사를 늦게 시작하여 시간에 쫓겼음을 의미한다고 나는 본다.
아마도 일본군의 패망이 점차 현실로 다가와 조만간 귀국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자 박창화는 서둘러 화랑세기의 필사를 시작한 것 아닌가 추측한다.
화랑세기의 내용이 자신들의 연구결과와 다르다는 것을 박창화 필사본 위서론의 주요 근거로 삼는 학자가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들이 진정한 학자라면 설사 그것이 위서일 가능성이 90%라고 생각된다고 해도 나머지 10%의 가능성을 확인하기 위해 진력을 해야 마땅한 것이다.
이 책은 그만큼 귀중한 것이기 때문이다.
박창화 필사본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89년이고 그 全文이 확인된 것은 1995년의 일이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그 원본을 찾는 노력을 얼마나 기울였나.
KBS와 MBC에서도 그 소재를 찾으려 노력을 한 적이 있다는데 학계는 언제까지 뒷짐만 지고 있을 셈인가.
최소한 주일 한국대사관을 통해 일본정부에 그 책의 소장 여부를 확인해달라고 요청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되지만 그런 노력조차 한 것 같지 않다.
대한민국정부는 얼마나 노력했나.
박창화 필사본에 나오는 摩腹子, 姻統 등은 세계에서도 보기드믄 고대의 독특한 제도이다.
그것이 위작이 아니라면 이러한 생생한 모습을 담고 있는 화랑세기는 우리의 문화적 자긍심을 높여줄 것임은 말할 것도 없고 세계문화유산으로서도 그 가치가 충분한 매우 귀중한 책이 될 것이다.
고려시대 중엽까지 남아있던 화랑세기, 그 원본이 지금도 어딘가에 남아 있기를, 그리고 그것이 확인되어 박창화 필사본에 대한 진위논쟁에 종지부를 찍을 날이 빨리 오기를 기대한다.
출처 :우리역사문화연구모임(역사문) 원문보기▶ 글쓴이 : 귀거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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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세기(花郞世記)
화랑세기(花郞世記)는 김대문에 의해 저술된 신라시대 화랑도의 우두머리인 풍월주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다. 신라 성덕왕의 재위기간 (702년 - 737년) 사이에 쓰여졌다. 《화랑세기》는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서술할 때까지 남아 있었으나 이후 소실된 것으로 생각되어왔다
1989년 2월에 남당 박창화가 일본 천황가의 보물창고인 궁내청서릉부에서 필사했다고 주장하는 《화랑세기》 한문 필사본이 김해에서 발견되었다. 1995년에는 162쪽 분량의 또 다른 필사본(모본‧母本)이 발견되었다. 이 필사본에는 서기 540년부터 681년까지의 풍월주 32명의 전기가 담겨 있다
필사되었다고 주장되는 《화랑세기》는 유교적인 가치관에 얽매이지 않은 신라인의 신라에 대한 기록이라는 점 에서 중요한 위치를 가지지만, 현재까지 박창화가 필사한 원본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위작 시비가 끊이지 않고 있다.
《화랑세기》 필사본은 화랑도의 구체적인 구조 및 진골정통, 대원신통(진골 참조), 마복자 등 신라 사회에 대한 새로운 기록을 많이 전하고 있다. 문화방송 드라마 《선덕여왕》은 이 필사본을 소재로 삼고 있다
필사본 진서론
향가 문제
필사본 《화랑세기》에는 향가가 한 수 기록되어 있는데, 진서론자들은 아마추어 역사가인 박창화가 향찰로 향가를 창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겨 진서론의 근거로 사용한다. 하지만 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하여 위서론자들까지 위서론의 근거로 삼고 있는 실정이다
《화랑세기》필사본은 [박창화]가 1930~1940년대 일본 궁내성 왕실도서관(도서료.오늘날의 서릉부)에서 사무 촉탁으로 근무하면서 도서관내의 《화랑세기》를 필사한 것이다. 《화랑세기》필사본 안에는 미실이 사랑하는 연인인 사다함에게 보내는 향가인 <송출정가>가 적혀있다.
위서론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13세기에 쓰여진 삼국유사에 향가가 마지막으로 수록되어있고 1930년경에 필사된 이 책은 향가의 형식을 빌어 창작되었다고 하지만,《화랑세기》필사본이 지어진 일제강점기 시기 말에는 우리나라 국어학자들이 향가를 겨우 한두줄 해석하는 수준이었고 1942년에 와서야 양주동 선생이 한국인으로 처음으로 향가 25수 전편의 해독집인 <조선고가연구>을 출판하였다. 해방 후에는 지헌영(池憲英)을 비롯한 이탁(李鐸), 김준영(金俊榮) 등이 계속 연구·발표하고 있다. 진서론자들은 향가에 대한 해석조차 어려운 일제강점기 시기에 아마추어 역사가인 [박창화]가 향가를 창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겨 진서론의 근거로 사용한다.
용수 용춘 형제 문제
《화랑세기》에 의하면 진지왕에게는 용수와 용춘 두 아들이 있었고, 형인 용수가 천명공주와 혼인하여 춘추를 낳았으나 후에 동생 용춘이 천명공주를 아내로 삼고 춘추를 아들로 삼았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용수와 용춘이 형제인 두사람이 되나, 기존의 전통적인 사료 및 해석에 의하면 용수는 용춘의 이명(異名)으로 알려져 있다. <대역 화랑세기>의 역주해자인 서강대학교 총장이자 사학과 [이종욱]교수는 <대역 화랑세기>에 쓰기를 "《삼국사기》[태종무열왕] 즉위조에는 무열왕이 진지왕의 아들인 [이찬 용춘]의 아들이라고 나온다. 《삼국유사》[왕락편]에는 [용춘]은 [일작 용수]라고 되어있다. 이와 같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은 용춘과 용수를 동일인으로 보고 있으나,《화랑세기》를 통하여 형제였다는 것을 알수 있다."라고 하였다.
노비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이영훈 교수는, 화랑세기 필사본에 나타난 노(奴)와 비(婢)는 현재 알려져있는 천민(賤民)과 전혀 다른 개념으로, 20세기에 창작해낼 수 없는 내용이라고 주장했다
구지
화랑세기에는 무관랑이 월성의 궁궐 담장을 넘다가 구지에 빠져 죽었다는 기록이 있고, 이것은 다른 사료에서 발견되지 않은 기록이다. 구지란 일종의 해자(垓子, 성 주위를 둘러 판 방어용 인공 연못)로 보이는데, 이 구지로 추측되는 연못 유적이 박창화가 사망한 이후에 발견되었다
이 내용은 삼국사기 사다함 조에 보면 나오는 내용으로 사다함의 친구 무관랑이 해자에 빠져 죽었으며 사다함이 이를 슬퍼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이것은 화랑세기의 내용중 사실일 내용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완전히 위작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내용이 삼국사기의 내용보다는 정확한 것으로 보인다.
진평왕
화랑세기 필사본에는 기존 사서 어디에도 생몰 연대가 밝혀져 있지 않은 신라 26대 진평왕(재위 579-632)이 13살에 즉위했다는 기록이 있다. 연합뉴스 기자인 김태식은 삼국사기를 분석하여 이 기록이 정확하다고 주장했다
필사본 위서론
용수 문제
용수 혹은 용춘은 바로 김춘추 즉 태종무열왕의 아버지다. 그런데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는 용수와 용춘이 동일인물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필사본 《화랑세기》는 용수와 용춘이 형제간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용수의 사망시기에 대한 필사본 《화랑세기》의 기록은 황룡사탑의 중수기에 보이는 용수의 사망시기에 대한 기록과 배치된다. 선덕여왕이 즉위한 이후에도 용수는 생존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필사본 《화랑세기》는 선덕여왕이 즉위하기 전에 용수가 죽었고, 그 처와 아들을 아우인 용춘이 부양하는 책임을 맡았다고 하고 있다.
세종 문제
삼국유사에 따르면 세종은 금관가야의 마지막 임금 구형왕의 장남으로 삼국사기에는 노종으로 등장하며, 532년 구형왕이 신라에 항복하고 본국을 식읍으로 받자 이를 따라 그 동생 무덕(삼국유사의 무득), 무력과 함께 신라에 귀순하였다. 즉 김유신의 큰할아버지가 되는데, 여기서 세+종이라는 이름은 곧 누리+부와 같으므로 세종은 단양적성비의 내례부지(대아간지), 삼국사기
거칠부전의 노부(파진찬), 북한산비의 내부지(일척간), 마운령비의 내부지(이간),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노리부(이찬 상대등)와 동일인으로 추정되어 대아찬, 파진찬, 이찬으로 승진하는 행적을 비교적 자세히 알 수 있다.[
그러나 《화랑세기》에서는 영실과 보현공주의 아들 노리부(사도태후의 오라비), 태종와 지소태후의 아들 세종(6대 풍월주)(미실의 지아비)만이 등장할 뿐, 구형왕의 아들인 세종이나 노리부에 대한 기록은 없다. 오히려 작중 15세 유신공의 세계에서는 구형왕의 아들로 무력, 무득만이 등장하고 세종이 누락되어 있다
이에 대해 진서론은 삼국유사의 기록에 문제가 있으며, 구형왕의 아들 세종과 풍월주 세종이 동명이인이라고 주장한다.그러나 이 계보는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으므로 사실상 오류일 가능성이 희박하며, 김태식은 자신의 저서에서 동시대에 두세 명의 동명이인이 활동했다는 화랑세기의 기록이 거칠부와 황종이 서로 싸웠다고 하는 것만큼 무리한 것이라고 혹평한 바 있다.
박창화의 다른 저술
박창화가 저술한 다른 책들의 성격도 진위를 판별하는 논거가 될 수 있다. 그가 지은 것 중 '도홍기', '홍수동기', '어울우동기' 같은 음란 소설이 많다. 그가 쓴 수십권이 넘는 책 중 성이 모티브가 되는 것이 많다. 그리고 박창화가 위서를 만들려 한 예가 있다. 그가 남긴 유고에 '유기추모경'이 있다. 유기는 고구려 초기에 편찬된 사서의 이름이고 추모는 주몽의 다른 표기이다. 박창화가 썼으면서 고려 시대의 인물인 황주량이 왕명을 받아 쓴 것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유기추모경과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는 박창화의 다른 유고인 '추모경'은 한지에 쓰여 있고 황주량에 대한 기록이 없다.
금석문
등장인물 총 420명 중에, 다른 사료에서 나타나지 않고 화랑세기 필사본에서만 보이는 인물은 240여 명인데, 신라 금석문에서 독자적으로 확인되는 인물이 없다. 반면 타 사료에서 발견되는 180명 중 24명은 금석문에서 확인이 되었다. 또한, 필사본에서 신라 왕을 제(帝)나 대제(大帝)라 했지만 이 역시 금석문에서 찾아볼 수 없다는 지적이 있다
박창화 자신이 존재 부정
광복 이후에 박창화가 쓴 글에 의하면, 한국 역사는 삼국사기, 고려사, 이조실록이며 삼국사기 이전은 약간의 전설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광복 이전에 화랑세기 진본을 필사한 사람이라면 이런 표현을 할 이유가 없으며, 스스로 생전에 필사본 화랑세기에 대한 언급을 한 일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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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동아닷컴::주간동아
‘화랑세기’ 진위 논쟁 끝이 보이는가
‘신라’ 비밀 푸는 국보급 내용 담겨 … 13년의 위작 시비 속 재평가 작업 활발
역사평론가 이덕일씨는 올해 초 6~7세기 한반도를 중심으로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과 중국 일본을 아우르는 역사서 ‘오국사기’를 펴냈다. 그는 이 책을 쓰기 위해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비롯, ‘수서’ ‘당서’ ‘자치통감’과 ‘일본서기’ 등 중국·일본 사료까지 꼼꼼히 분석했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사료가 ‘화랑세기’다. 끊임없이 위작설에 시달려온 ‘화랑세기’에 대해 이덕일씨는 “대부분 사실로 믿는다”고 단언했다. 드디어 ‘화랑세기’ 필사본을 둘러싼 13년의 지루한 진위 논쟁이 마무리되는 것일까.
1989년 2월16일 부산에서 ‘화랑세기’ 필사본이 공개되었다. 32쪽짜리 이 필사본이 만약 ‘삼국사기’에 언급된 김대문의 ‘화랑세기’가 맞다면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사서인 ‘삼국사기’보다 무려 460여년이나 이른 기록이다. 더욱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가 고려인이 쓴 삼국시대 이야기라면 ‘화랑세기’는 신라인이 쓴 신라 이야기였으니 한국 고대사학계가 흥분하는 것은 당연했다. 남당 박창화(1889~1962)가 1933년 일본 궁내성 도서료 촉탁직으로 일할 때 필사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사료는 비록 필사본이지만 내용 면에서 ‘국보급’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문화재감정위원 조성용씨와 정중환 전 동아대 교수의 감정 아래 공개된 이 필사본은 곧 위작 논쟁에 휘말렸다. 임창순 문화재위원장, 이기백 한림대 교수, 이기동 동국대 교수 등 고대사 권위자들이 위작 가능성을 제기했다. 심지어 발견 당시 필사본을 검토한 정중환씨도 “왕족과 귀족들의 난혼과 성행위가 일본의 난혼과 흡사해 의혹이 있다”며 한걸음 물러났다. 이것이 ‘화랑세기’ 논쟁 1라운드다.
이덕일씨 “대부분 사실로 믿는다”
2라운드는 6년 뒤인 1995년 역사학회 월례 발표회장에서 벌어졌다. 신라골품제와 화랑도를 연구하던 서강대 이종욱 교수가 ‘화랑세기’를 면밀히 검토한 후 ‘화랑세기 연구서설-서사로서의 신빙성 확인을 중심으로’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교수는 위작론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이때 서울대 노태돈 교수(사학)가 “89년 발견된 ‘화랑세기’는 발췌본이고 원래 박창화의 필사본은 따로 있다”고 새로운 사실을 공개했다. 새로운 필사본은 책 제목과 서문 등 앞쪽 일부가 훼손돼 없어졌지만 162쪽 분량으로 32쪽의 발췌본에 비해 훨씬 자세했다. 노교수는 두 달 뒤 필사본 역시 가짜라는 내용의 논문을 한국고대사연구회에서 발표했다.
그러나 1999년 이종욱 교수가 ‘화랑세기’ 완역본을 출간하면서 논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한문 원문에 한글 역주해를 단 ‘화랑세기-신라인의 신라 이야기’(소나무)의 발간으로 좀더 많은 연구자들이 ‘화랑세기’를 접할 수 있게 되었고, 1년 뒤 아예 대중역사서 ‘화랑세기로 본 신라인 이야기’(김영사)를 펴냄으로써 ‘화랑세기’가 진본이라는 쪽으로 대세를 몰아갔다. ‘화랑세기’ 완역본 출간 때만 해도 이종욱 교수는 서문에서 “화랑세기는 위작으로 생각되어 왔으며 실제 위작일 수 있다”고 조심스럽게 시작했지만 ‘화랑세기로 본 신라인 이야기’에서는 “성경은 원본이 없다. 화랑세기도 원본은 없다”는 말로 자신감을 드러냈다.
2000년대 들어 진위 논쟁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이교수가 적극적으로 가짜가 아니라는 근거를 내놓은 반면, 위작론 쪽에서는 학술적 반박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 사이 ‘화랑세기’ 필사본 연구가 확산되면서 진짜임을 뒷받침해 주는 주장들이 속속 나오고, 또 진본임을 전제로 신라의 역사를 재조명하는 책들도 출간되고 있다.
‘화랑세기’에 등장하는 향가 1편을 통해 진위문제에 접근하고 있는 국문학계에서는 99년 성균관대 김학성 교수가 ‘필사본 화랑세기의 발견과 향가연구의 전망’이라는 글을 통해 노태돈 교수의 주장을 뒤집었다. 노교수는 ‘화랑세기’에 실려 있는 향가가 박창화의 창작이라고 주장했지만 김교수는 1942년 양주동에 와서야 향가 14수에 대한 완전 해독이 이루어진 것을 근거로 시기적으로도 박창화의 창작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최근 ‘화랑세기’ 관련 논문으로 눈에 띄는 것은 지난해 말 성균관대 이영훈 교수(경제학)가 발표한 ‘화랑세기에서 노(奴)와 비(婢)’다. 이교수는 98년 ‘한국사에서 노비제의 추이와 성격’이라는 논문을 통해 삼국시대의 노비 개념과 후대 천민이 된 노비의 개념이 다르다고 주장해 왔는데, 이종욱 교수의 ‘화랑세기’ 역주해본에 등장하는 ‘노’와 ‘비’(각 10회)를 분석한 결과 사실이었음이 확인됐다는 것이다. 즉 삼국시대의 노와 비는 우리가 알고 있는 사내종과 계집종의 개념이 아니라 정치적·군사적 신하의 관계였다.
‘우리 역사의 여왕들’(책세상)을 쓴 서강대 박물관의 조범환 학예연구원은 우리 역사에서 왜 신라시대에만 3명의 여왕(선덕, 진덕, 진성)이 존재했는지 추적하는 과정에서 ‘화랑세기’에 빚을 졌다. 그는 “화랑세기는 진위 여부를 떠나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를 통해서만 보아왔던 신라 사회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기 때문에 신라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 꼭 읽어야 할 책”이라고 말한다.
대중역사서나 역사소설에서 ‘화랑세기’를 인용하는 경우는 훨씬 많다. 이덕일씨는 ‘오국사기’ 이전에도 이희근씨와 함께 쓴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에서 “어느 부분이 진짜인가 진지하게 검토해야지, 연구자의 지식 외의 것이 담겨 있다고 해서 위작이라고 단정짓는 것은 사료에 대한 폭력”이라고 했다. 한국전통문화학교 이도학 교수(문화재관리학)는 지난해 펴낸 ‘한국고대사, 그 의문과 진실’(김영사)이라는 책에서 화랑도의 기원을 설명할 때 ‘화랑세기’를 인용했다. 그는 ‘삼국사기’ 열전에 기록돼 있는 순국지상주의의 무사정신으로 충만한 화랑들과 달리 ‘화랑세기’가 그들의 자유분방한 성을 다루었다고 해서 위서로 보기는 어렵다고 말한다.
이젠 연구의 외연 확대할 때
역사소설로는 정순태의 ‘김유신’, 이문영의 단편소설 ‘다정’, 김지수의 ‘문명왕후 김문희’ 등이 ‘화랑세기’를 바탕으로 씌어졌다. 김지수씨는 “빈약한 사료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는데 이종욱 교수의 역주해본 ‘화랑세기’가 가장 큰 도움이 됐다. ‘화랑세기’에 등장하는 복잡한 혈연관계와 인간관계를 짚어가며 소설적 영감을 얻었다”고 했다.
21세기 ‘화랑세기’ 논쟁은 확실히 가짜냐 진짜냐의 평행선에서 벗어나고 있다. 가짜라는 명백한 증거가 없듯이 진짜임을 확인해 주는 증거도 없다. 박창화가 필사했다는 원본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한 국문학자는 이제 진위 논쟁이 아니라 ‘화랑세기’ 연구의 외연을 확대할 필요성이 있다고 말한다.
“학자의 눈으로 보면 필사본은 분명 의심스러운 부분이 많다. 그러나 ‘화랑세기’ 필사본 혹은 발췌본만 놓고 진위를 다툴 게 아니라 필사자 박창화가 남긴 수많은 저술도 함께 검토해야 한다 (박창화의 손자 박인규가 1962년 작성한 목록에는 86권의 책이 있는데 대부분 창작물). 거기에는 진짜라는 쪽에 유리한 증거도 혹은 가짜라는 쪽에 유리한 증거도 있을 것이다. 그중에는 고구려 미천왕의 전기인 ‘을불대왕전’처럼 역사소설로서 완벽한 작품도 있다. 그것이 모두 세상에 공개된 후 누구나 ‘화랑세기’를 자유롭게 연구하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내용이 쓰여 있나
왕실 근친혼 등 통념 바꾸는 파격 기록
‘화랑세기’는 ‘삼국사기’에 신라시대 김대문이 지었다는 기록만 있을 뿐 멸실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1989년과 1995년 박창화가 원본을 보고 붓으로 옮겨 적었다는 ‘필사본’과 요약된 ‘발췌본’이 발견되었다. ‘화랑세기’ 필사본을 둘러싸고 10년이 넘도록 진위 논쟁이 계속되고 있는 것은 역사적 통념을 완전히 바꾸는 내용의 파격 때문이다. 주로 21명 풍월주(화랑의 대표)의 세보를 밝히면서 신라시대 진골 정통, 대원신통의 계보, 가야의 왕실 계보 등까지 왕을 중심으로 운용되던 신라시대 골품제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또 왕실의 근친혼 풍속과 남녀의 분방한 성관계를 가감 없이 기록하고 있다. 특히 하급자가 임신한 아내를 상급자에게 보내는 ‘마복자’(배를 맞춘 아들이라는 의미)제도는 인류역사상 초유의 제도라 해서 논쟁의 중심이 되었다.
(끝)
< 김현미 기자 > khmzip@donga.com
발행일 : 2002 년 05 월 09 일 (333 호)
쪽수 : 64 ~ 65 쪽
花 郞 世 紀 序文
花郞者仙徒也 我國 奉神宮 行大祭于天 如燕之桐山 魯之泰山也 昔燕夫人 好仙徒 多畜美人 名曰國花 其風東漸 我國以女子爲源花 只召大后廢之 置花郞 使國人奉之 先是 法興大王愛魏花郞 名曰[花郞] 花郞之名始此 古者 仙徒以奉神爲主 國公列行之後 仙徒以道義相勉 於是 賢佐忠臣 從此而秀 良將勇卒 由是而生 花郞之史 不可不知也
화랑은 선도이다. 우리 나라에서 신궁을 받들고 하늘에 대제를 행하는 것은 마치 연의 동산, 노의 태산에서 하는 것과 같다. 옛날 연부인이 선도를 좋아하여 미인을 많이 모아 이름하기를 국화라 하였다. 그 풍습이 동쪽으로 흘러들어 우리 나라에서도 여자로써 원화를 삼게 되었는데, 지소태후가 원화를 폐지하고 화랑을 설치하여 국인으로 하여금 받들게 하였다. 이에 앞서 법흥대왕이 위화랑을 사랑하여 이름을 화랑이라 불렀다. 화랑이라는 이름은 여기서 비롯하였다. 옛날에 선도는 단지 신 받드는 일을 주로 하였는데, 국공들이 봉신을 베풀어 행한 후, 선도는 도의를 서로 힘& #50043;다. 이에 어진 재상과 충성스러운 신하가 이로부터 빼어낫고 훌륭한 장군과 용감한 병졸이 이로부터 나왔다. 화랑의 역사를 알지 않으면 안 된다.
「화랑세기」가 말하는 신라 화랑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1989년과 1995년에 각각 성덕왕 때 한산주도독(경기도지사에 해당)을 지낸 신라인 김대문이 썼다는 「화랑세기」(花郞世記)의 필사본이 공개되자 역사학계는 한바탕 회오리가 쳤으며 그 여진은 현재진행형이다.
20세기 이후 누군가가 가짜로 꾸며냈다는 주장이 대세를 이루고 있는 가운데 필사본에 구현되고 있는 갖가지 다양한 신라사의 국면은 도저히 꾸며낼 수 없다는 진본론 또한 만만치 않다.
그 논쟁 여부야 차치하고 이 필사본 서문에서 규정하는 화랑도에 관한 정의는충격이었다. 「화랑세기」는 말한다. "화랑은 선도(仙徒)이다"라고.
선도란 신선(神仙)이 되고자 꿈꾸는 무리들을 가르키는 말로, 이에 따른다면 화랑도는 철저히 도교적 신선사상에 뿌리를 박은 종교집단이었음이 드러난다.
실제로 「화랑세기」에 의하면 선도인 신라화랑들은 애초에는 신궁(神宮)이라는신라 최고의 제사시설에서 일종의 제관(祭官)의 역할을 맡아 산꼭대기 등지에서 천신(天神)을 제사하는 일을 수행했음이 드러난다.
하지만 「화랑세기」에 따르면 이러한 종교적 사제로서의 화랑이라는 역할은 급속히 변모한 듯하다. 기존 문헌에서 익히 알려져 있듯이 화랑은 그 원류가 애초에는원화(原花.혹은 源花)라는 여성 우두머리가 이끌던 집단이었다.
여성 주축인 원화는 진흥왕 때 풍월주(風月主) 혹은 국선(國仙)이라 일컫는 (미소년) 남성 우두머리가 이끄는 화랑도로 대체된다. 이 장면을 「화랑세기」 서문에서는 "옛날에 선도는 신(神)을 받드는 일을 주로 했으나 국공(國公)들이 열을 지어나타난 뒤에 선도는 도의(道義)에 힘썼다"고 하고 있다.
국공(國公)은 별다른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종래 여성이 맡던 원화를 대신해풍월주로 등장한 남자들을 단순히 말할 뿐이다. 아울러 남성의 등장으로 종래 여성적인 선도는 남성적이고 때로는 무사적인 성격으로 급격히 변모했음을 암시한다.
이러한 선도로서의 화랑도는 「화랑세기」에 의하면 초반기에는 다소 불안정한모습을 보이다가 체계를 갖추며 그에 걸맞게 각종 역할을 수행한다.
「삼국사기」에는 단 한 번 이름만 보이고 지나가는 문노라는 사람이 풍월주로재임할 때 화랑도는 9부로 편제되었으며, 각 부별로는 실로 다양한 전인교육을 실시했음을 엿볼 수 있다. 검술을 익히는가 하면 음악과 기예를 닦기도 했다.
널리 알려진 향가라는 신라시가 또한 사실상 화랑도의 전유물이었다.
이러한 화랑도를 형성하는 집단 또한 다양했다. 풍월주를 우두머리로 하고 전임풍월주가 상선(上仙)으로서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하는 가운데 그 아래로는 각종 낭도 집단이 피라미드를 이루고 있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여성 또한 실로 막강한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사실이다.
이들 화랑도에 관여하는 여성 중에는 위로는 왕비라든가 태후 혹은 풍월주 아내가 있는가 하면 유화(遊花)라 해서 섹스를 전문적으로 제공하는 하층 집단도 있다.
이와같은 화랑도는 자연 그 세력이 팽배해지면서 각종 파벌을 형성하는가 하면전쟁에도 나서 무공을 세우기고 했고, 아울러 반란을 꾀하거나 반란을 평정하는데도관여한다.
심지어 화랑들에게는 동성애 흔적도 짙다.
그만큼 「화랑세기」가 묘사하는 신라 화랑상은 다양하다.
대표적인 「화랑세기」 신빙론자인 서강대 이종욱 교수가 집필한 「화랑」(휴머니스트 刊)은 새로이 출현한 「화랑세기」를 토대로 순국무사로만 인식된 기존 학계의 화랑상에 대한 공격적인 파괴를 시도하고 있다. 379쪽. 1만2천원
taeshik@yna.co.kr
화랑세기 필사본, 6년만의 개정판
필사자이자 역사학자인 남당 박창화
남당(南堂) 박창화(왼쪽)가 남긴 역사학 저술 중 고대 한국 강역 문제와 관련된 5편이 그의 후손에 의해 공개됐다. 원고 사진은 남당이 직접 쓴 '강역고'(彊域考)라는 논문 첫 대목으로 고려 예종 때 여진을 정벌하고 그곳에 설치한 윤관의 9성(九城)이 어디인가를 논한 '구성변'(九城辨)이다.//문화부 기사참조/문화/ 2004.6 .2 (서울=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1989년에 이어 1995년에 두 종류의 필사본이 각각 공개된 화랑세기(花郞世記)는 학계에서 극렬한 진위(眞僞) 논쟁을 촉발했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것처럼 이 화랑세기가 신라 성덕왕 3년(704)에 한산주도독(지금의 경기지사)에 임명된 김대문(金大問)이라는 신라인이 썼다는 바로 그 화랑세기인지, 아니면 필사자인 남당(南堂) 박창화(朴昌和.1889-1962)라는 사람이 김대문 저작인 것처럼 꾸며서 지어낸 역사소설인가 하는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그런 논란은 그것이 김대문 작품을 복사한 것임을 주장하던 서강대 이종욱(李鍾旭.59) 교수가 1999년 '화랑세기 역주본'(소나무)을 내면서 새로운 단계로 돌입했다. 이 역주본 출간을 계기로 필사본 화랑세기를 토대로 한 연구단행본만 5종 가량 출간됐으며, 그 진위 여부를 다룬 논문만도 스무 편 이상을 헤아리고 있다.
화랑세기 진위 논쟁에 중대한 분수령을 이룬 이 화랑세기 역주본이 초판 발간 이후 6년만에 같은 소나무 출판사에서 개정판을 최근 선보였다.
이 교수는 이번 개정판에 '대역(對譯) 화랑세기'라는 이름을 붙였으며 부제로는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를 선택했다.
가장 크게 달라진 대목은 종래에는 번역문을 앞에다 두고 원문을 부록처럼 뒤로 몰아서 배치했던 데 비해 이번 개정판은 '대역'이라는 말처럼 한쪽 페이지에는 원문을, 맞은편 페이지에는 그에 대한 번역을 수록했다는 점이다.
나아가 종래 역주본에는 번역문 및 원문과는 별도로 화랑세기가 진본임을 주장하는 글이 상당한 분량을 차지했으나, 개정판은 이를 거의 다 삭제했다. 대신 4쪽 남짓한 '머리말'만 붙이고 있을 뿐이다.
화랑세기 필사본에 등장하는 주요 용어를 해설하는 코너는 초판에도 있었으나 개정판에서는 대폭 보강했다.
개정판에 붙은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라는 부제는 이 교수가 화랑세기 필사본을 바라보는 시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필사본에 나타난 신라사회의 모습은 김대문과 같은 당대 신라인이 아니면 그려낼 수 없다는 것이다.
머리말에서 이 교수는 "지금 나는 다른 길을 택한 그들(화랑세기가 소설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화랑세기가 김대문의 저작이라는 사실을 설득할 생각이 없다"면서 "화랑세기를 소설로 보면 볼수록 그들의 연구는 신라와 멀어질 것이다"고 말하고 있다.
초판에서 두드러졌던 화랑세기 위서(僞書)론자들을 향한 격한 성토 분위기가 개정판에서는 비교적 절제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이 교수는 개정판에서 "지난 30여 년 동안 (내가) 전개해온 신라의 국가형성, 왕위계승, 지배세력, 골품제, 친족제, 화랑제 등 실로 다양한 면에 대한 연구가 화랑세기의 이야기와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고 하면서 "나는 지난 30여 년 동안 화랑세기를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로 이해할 준비를 해 왔던 셈"이라고 밝히고 있다. 494쪽. 1만8천원.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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