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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세기는 소설임을 박창화가 밝혔다

by 연송 김환수 2013. 11. 29.

화랑세기는 소설임을 박창화가 밝혔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듯 싶던 길고 지루했던 화랑세기 진위논쟁이 이제 막바지에 다다랐다. 여기에서 박남수 편수관의 연구와 인터넷의 화랑세기 위서론의 주장을 심층적으로 검토해보고자 한다.

 

그동안 화랑세기가 진본이라고 주장해 왔던 많은 사람들의 입장이 어떻게 변하게 될 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종욱 서강대총장 <화랑세기 - 신라인의 신라이야기>라는 책을 통해 박창화의 화랑세기가 신라인 김대문이 쓴 화랑세기이라고 주장해왔다.

 

서울대 경제학과 이영훈 교수는 < 화랑세기 필사본에 나타난 노()와 비()는 현재 알려져있는 천민(賤民)과 전혀 다른 개념으로, 20세기에 창작해낼 수 없는 내용>이라고 주장했다.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이도흠 교수는 필사본 수록 향가 1편을 집중적으로 분석한 결과, 어휘나 용례, 차제자 원리 및 운용법 등으로 볼 때 고려시대 이전에 기록됐음이 확실하며 20세기에 창작될 수는 없다고 결론내렸다.

 

도올 김용옥은 "과거 식민사관에 얽매여 고구려사를 보던 정통우익사학자들이, 지금 우익들은 만주 찾자고 그러는데, 새로운 자료 무시하다가 이제 와서 난리가 났다 그러는 거란 말이야. <화랑세기>가 위서라는데 그게 어떻게 위서예요. 좁은 시각에서 역사를 써왔단 말예요."(2004.1.9 한겨레 인터뷰)

 

고려대 정운용교수, 이희진박사, 김태식기자 등도 화랑세기가 진본임을 역설하던 사람들이다.

 

박창화의 저술을 모은 남당유고 속에는 도올을 비롯한 여러 학자들이 절대 보고 싶지 않은 구절이 들어있다.

 

박창화 스스로 화랑세기가 역사서가 아님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역사는 삼국사기 고려사 이조실록이다. 삼국사기 이전은 약간의 전설 뿐이다. 신라의 나정, 선도성모, 탈해의 작, 알지의 계 같은 것과 고구려의 단군 유화 금와 등의 전설과 백제의 소서노 같은 것이다. 이 전기를 기한 고기가 금에는 하나도 남어있지 않이 함으로 삼국유사 같이 허황한 기록이라도 유일한 사료로 참작하는 것이나 이것도 또한 개찬된 흔적이 있다.> - 박창화 강역개론

 

박창화는 사료 화랑세기를 보지 못한 것이다.

 

<박창화 강역개론 - 남당유고>

 

혹시 이 글이 작성되었을 당시에는 화랑세기를 발견하지 못했었고 이 글 작성 이후에 일본 궁내성에서 화랑세기를 본 것은 아닐까?

 

그러나 그럴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위의 글은 원고지에 작성되어 있다. 우 하단을 보면 20*20 이라는 숫자가 보인다. 언제 위의 글은 작성된 것일까?

 

박창화의 남당유고를 분석해보면 '실록편찬용지'라는 붉은 글이 인쇄된 용지에 작성된 것과, 한지에 작성된 것, 원고지에 작성된 것 등이 있다.

 

실록편찬용지는 화랑세기 본편 등이 적힌 용지로 일제의 대정천황이 1926년에 죽자 1927년부터 실록이 작성되기 시작해 1937년에 완성된다고 한다. 실록편찬용지는 이때의 것으로 보인다.

 

위의 원고지는 실록편찬용지에 작성된 글보다 늦게 작성된 것일 확률이 매우 높다. 같은 원고지에 같은 필체로 작성된 다른 원고를 보면 시기를 짐작할 수 있다.

 

<박창화 요동론 - 남당유고> 

 

위의 글을 보면 38선이 그어졌다는 구절이 있다. 즉 해방 이후의 글인 것이다.

 

박창화는 화랑세기를 발견하고 난 이후에도 여전히  화랑세기를 언급하지 않고 있다. 뿐만 아니라 고려때 작성된 유기추모경을 발견하고도 일체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박창화는 화랑세기라는 엄청난 대발견을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고 있지 않으며 스스로 그 존재를 부정하는 글을 적고 있는 것이다.

 

박창화는 일본 역사잡지 中央史壇에 "新羅史について"(신라사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연속 게재했다.(1927.12월,1928.2월) 또한 1928년 1월호에는 百服から沈積まで(흰옷에서 김치까지)라는 생활사 논문을 기고했다.

 

만약 박창화가 화랑세기를 천삼백년만에 발견했다는 소식이 알려졌다면 당시 일본 조선사학계는 발칵 뒤집혔을 것이다. 박창화는 이 사실을 논문으로 작성해 기고를 했다면 조선사 연구의 대가 대접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박창화는 그런 일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남당 박창화> 1895 -1962        

   <역사잡지 중앙사단>

     

박창화는 화랑세기와 흡사한 일을 추모경에서 다시 한번 더 하게 된다. 동일한 내용을 몇가지 형태로 변화시키는 것도 매우 유사하다.

화랑세기가 마치 김대문의 화랑세기를 옮겨적은 것처럼 사람들을 착오하게 했지만 그것은 읽는 사람들의 잘못일 수도 있다.

 

박창화는 화랑세기를 소설로 적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추모경의 문제는 매우 심각하다. 무언가 조작을 위해 고려 때의 인물을 끌여들이고 있다. 문하시중이자 감수국사인 황주량이 작성한 것으로 꾸미고 있다. 왜 하필 황주량일까? 고려사 열전을 보면 황주량을 끌여들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黃周亮.

 

黃周亮登第顯宗朝累轉侍御史歷拾遺中丞進累中樞院副使德宗朝拜政堂文學判翰林院事靖宗朝歷吏戶禮三部尙書叅知政事. 威雞州女眞仇屯高刀化二人與其都領將軍開老爭財乘其醉歐殺之事下輔臣議侍中徐訥等六人議曰 女眞雖是異類然旣歸化名載版籍與編氓同固當遵率邦憲今歐殺其長罪不可原請論如法. 周亮等十一人議曰 此輩雖歸化爲我藩籬然人面獸心不慣風敎不可加刑且律文云: ‘諸化外人同類自相犯者各依本俗法.’ 况其隣里老長已依本俗法出犯人二家財物輸開老家以贖其罪何更論斷? 王從周亮等議. 進門下侍郞平章事九年加推忠盡節文德匡國功臣特進守太保兼門下侍中判尙書吏部事上柱國卒謚景文. 初契丹兵陷京城燒宮闕書籍盡爲煨燼周亮奉詔訪問採掇撰集太祖至穆宗七代事跡共三十六卷以進配享靖宗廟庭宣宗贈開府儀同三司. - 고려사 열전

 

황주량은 거란침공으로 개경이 불타 서적이 없어진 후 태조에서 목종까지 7대의 사적을 곳곳을 돌아다니면 사료를 수집해 36권으로 만들어 바친 전력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구려의 유기를 그가 수집해 기록을 남겼다고 하기에 적합한 인물인 것이다. 여기서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박창화가 이런 가짜 역사서를 만드는 방식이다. 박창화는 추모경을 황주량이 작성한 것으로 만들어 놓고는 거의 내용이 동일한 또 다른 추모경을 만든다.

 

<유기추모경 - 황주량 저>

 

 

 <추모경 - 저자 생략>    

   <추모경연의 >

 

유기추모경, 추모경1,2권은 내용이 거의 동일하다. 추모경연의 즉 소설 추모경은 시작 부분은 앞의 두 추모경과 완전 동일하나 뒤에는 내용이 달라진다.  이 유기추모경이 진본이라면 엄청난 역사적 대 발견이 된다. 사라진 고구려의 유기가 환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구도 이 유기추모경이 고구려의 유기의 일부분이라 여기지 않는다. 박창화도 이 것이 고구려의 유기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런 문헌이 자신의 필사로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삼국사기 이전의 역사서가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다른 저작물 국강상왕기, 소수림대제기, 을불대왕전, 중천대제기, 아달라기, 안장대제기 등 역시 모두 진짜 역사서는 아닌 것으로 이야기 하고 있다. 

 

그런데 수많은 학자들이 모든 박창화의 저작은 박창화가 지은 것으로 여기면서 단 하나의 예외를 두고 있다.  그것이 바로 화랑세기다.

화랑세기는 박창화가 남긴 필사본이다.

 

박창화는 화랑세기를 두가지 본으로 남기고 있다. 화랑세기는 아마 박창화가 일본 궁내성도서료에 근무할 당시 궁내성에 소장된 사료를 보고 옮겨적은 것일 것이다라는 가정을 하고 있다.

 

그러나 박창화는 자신이 일본 궁내성도서관에서 옮겨적었다고 말한 적이 없다. 단지 그렇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을 뿐이다.

 

화랑세기 축약본

화랑세기 본편

 

그럼 화랑세기의 내용은 어떨까?

 

화랑세기가 매우 정교하게 짜여져 있음은 널리 알려져 있는 바다. 그러기에 역사학 전공자마저 출처의 불투명함과 조작의 가능성이 분명한 데도 모두 정신을 잃고 화랑세기에 빠져드는 것 아닐까?

 

그런데 화랑세기도 박창화가 죽고 난 이후에 발견된 사실은 어쩔 수 없이 엉터리로 기재되고 말았다.

 

 박창화는 1962년 죽는다. 2년뒤인 1964년 12월 황룡사탑 심초석이 도굴을 당한다. 그 뒤 1966년 도굴품이 반환되고 두터운 녹으로 덮여있던 금동판은 보존처리를 거쳐 비로소 905개의 글자가 판독될 수 있었다.

 

여기에는 화랑세기가 전혀 예상치 못했던 구절이 들어 있었다. 바로  용수에 대한 구절이다.

 

선덕여왕 12년에도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아버지인 용수가 살아 있었고 황룡사탑을 건립하는데 감독을 했던 것이다.

 

<황룡사 9층탑 심초석>

 

王之十二年癸卯歲欲歸本國頂辭南山圓香禪師

禪師謂曰吾以觀心觀公之國皇龍寺建九層窣堵波海東諸國渾降汝國

慈藏持語而還以聞乃 命監君伊干龍樹大匠非等率小匠二百人造斯塔焉

(선덕왕 12년 계묘년(643)에 신라에 돌아오고자 하여 종남산(終南山)의 원향선사(圓香禪師)에게 머리 조아려 사직하니

선사가 “내가 관심(觀心)으로 그대의 나라를 보매, 황룡사9층의 탑을 세우면 해동(海東)의 여러 나라가 모두 그대의 나라에 항복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자장이 이 말을 듣고 (신라에) 돌아와 나라에 알렸다. 이에 (왕은) 이간(伊干) 용수(龍樹)를 감군(監君)으로 하여 대장(大匠)인 백제의 아비(阿非) 등과 소장(小匠) 이백여인을 데리고 이 탑을 만들도록 하였다.)

 

 

                      <황룡사 찰주본기 1966년 발견>

                           

화랑세기는 이찬 용수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 하고 있을까? 화랑세기는 신라 때 작성된 이 금석문과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용수는 선덕여왕이 등극하기 전에 이미 죽었고, 선덕여왕 즉위하던 해에는 용수의 아들 김춘추와 마누라 천명공주는 용수의 동생 용춘의 자식과 부인이 되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당대의 금석문과 비교해 보면 명백한 착오인 것이다.

 

화랑세기 모본이다.

13세화랑 용춘의 기록 속에 나오는 내용이다. 김춘추의  아버지 용수는 13세화랑 용춘의 형이다.

 

龍樹殿君臨薨 以夫人及子托于公

(용수가 임종에서 부인과 아들을 공에게 맡겼다) 

 

 과연 용수가 죽은 그 시기는 언제일까? 그 시기는 이어서 나온다. 정확히 죽은 시점은 나오지 않지만 동생 용춘이 형 용수의 자식인 김춘추와 형수를 자기 자식과 부인으로 삼은 시기는 나온다. 이는 용수가 죽고 난 이후일 것이다.

 

善德乃委政于乙祭 而許公退居 公乃以天明公主爲妻 以太宗爲子 - 화랑세기

(선덕이 이에 정치를 을제에게 위임하면서 용춘이 물러나 살도록 허락했다. 공은 이에 천명공주를 처로 삼고 태종을 아들로 했다.)

 

 선덕이 왕위에 오르고 을제에게 위임한 시점은 삼국사기에 나온다.

元年 二月 以大臣乙祭摠持國政 - 삼국사기 신라본기 632년
(원년 2월 대신 을제에게 국정을 총지휘하도록 했다)

그러므로 화랑세기에 나오는 용춘이 물러나 살도록 허락한 시점은 선덕이 왕위에 오른 직후 였던 것이다. 이 시점에 용수가 죽고 없었기에 용춘은 형수를 부인으로 취했던 것으로 되어 있다.

 

화랑세기는 멀쩡히 살아서 선덕여왕 12년 무렵에 황룡사탑건립을 진두지휘하고 있던 사람을 12년전에 죽은 것으로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용수가 살아 있는데 용수의 부인인 천명공주는 동생 용춘의 처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왜 이런 오류가 발생했을까? 금석문이 너무 늦게 나왔기 때문이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전혀 없던 이야기가 황룡사심초석 아래서 나왔는데 이때는 이미 박창화가 죽고 난 이후라 박창화도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었던 것이 아닐까?

이 기록은 요약본 화랑세기에도 거의 동일하다. 

 

 

 

화랑세기는 천년 넘게 모습을 감추고 있다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책이 아니다. 근래에 작성된 것이며 작성자 마저 신라의 기록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를 심도있게 검토할 능력을 갖추지 못한 일부 성급한 학자들이 소설을 사서로 인용하면서 논문을 작성하며 대해프닝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박창화는 한문소설가 였음은 무수한 그의 소설이 입증하고 있다. 시를 쓰고, 소설을 쓰고, 역사 평론을 쓰는 사람이었다. 다만, 사료와 자신의 생각을 뚜렷이 구분하지 않은 몰지각함으로 인해 본의아니게 엄청난 피해를 후손에게 입히고 있는 셈이다.

 

<한문 소설 홍도기>

<고국원제기> - 고국원왕기를 고국원제기로 고치고 있다.  '왕명'을 지우고 '제휘'라고 고치는 것이 보인다.

 

 -- 보충

 

고고발굴과 화랑세기의 연관성은?


화랑세기가 진본임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자주 거론하는 고고학적 증거가 있다.

포석정 주변을 발굴했는데 포석이라는 기와가 발견되었다는 것과 경주 월성 동북을 발굴했더니 해자시설이 나왔다는 것이다.


화랑세기를 필사한 박창화가 죽은 이후에 발굴된 이런 고고자료는 화랑세기가 조작되지 않은 것임을 밝히는 엄청난 증거물이 되어 왔다.  과연 그럴까? 그런데 이 두 가지 대단한 증거물에 대한 해석에 이의는 없을까?


하나하나 살펴보자

<포석정 관련>

1. 포석정에서 겨울에 연회를 할 이유가 없다는 주장

많은 사람들이 경애왕이 추운 겨울에 포석정에 간 것은 술마시러 간 것이 아니라 제사를 지내려 갔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화랑세기의 포석사란 구절이 정확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더군다나 포석정주변 발굴에서 포석사란 명문기와가 출토되었으니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1998년 포석정 일대 건물지 발굴>

 

당시의 언론보도 내용이다.

 

<필사본이 가짜가 아닐 가능성은 포석정과 관련된 대목에서 더욱 확실해진다. 즉 삼국사기에는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술을 마시고 흥청망청하다 후백제 견훤에게 살해당한 것이 11월, 즉 양력으로 12월 겨울이라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 기록은 경애왕이 아무리 주색에 빠졌다 해도 한겨울에 포석정에서 놀았다는 것은 쉽게 믿기 힘들다.

 

포석정에 대한 기록은 이 때 뿐이다. 이것이 언제 만들어졌으며 어떤 구실을 했는지 알 길이 없다. 그런데 「화랑세기」 필사본에는 포석이 술마시고 노는 곳이 아니라 제사지내는 사당인 포석사, 혹은 줄여서 포사로 나오고 있으며 이미 통일전에 건립된 것으로 전하고 있다.

 

따라서 「화랑세기」 필사본의 포석에 대한 기록이 맞다면 경애왕은 12월 한겨울 추위에 술마시다 견훤에게 죽은 것이 아니라 견훤이 쳐들어오자 포석사라는 사당에 나아가 제사를 지내다 변을 당했을 가능성이 큰 셈이 된다.

 

그래야 12월 한겨울에 포석정에서 살해당했다는 삼국사기 기록이 이치에 맞는다. 포석이 술마시는 곳이 아닌 제사지내는 사당이라는 사실은 필사본 작성자인 박창화가「화랑세기」원본을 보지 않고는 도저히 꾸며낼 수 없는 명백한 증거이다.

 

포석정이 삼국통일전에 건립됐다는 화랑세기 필사본 기록은 최근 고고학적 발굴성과와도 맞아 떨어지고 있다. 경주문화재연구소는 포석정 일대에서 포석이라는 글자가 적힌 기와 조각을 발굴했다고 지난 5월 발표하면서 "이 기와는 줄무늬와 사선무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통일신라 이전) 때인 7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이는 포석정이 삼국시대에 만들어졌다는 의미이다. 즉 화랑세기 필사본이 삼국사기를 비롯한 어느 사서도 말해주지 않고 있는 포석정의 건립시기를 알아맞추고 있다. 이런 고고학 발굴성과와 「화랑세기」 필사본이 일치하는 것은 이것이 박창화의 꾸며낸 소설이 아니라 김대문의 원래 「화랑세기」를 직접 보고 베꼈다는 가장 명확한 증거가 된다.>- 연합뉴스 1999-07-05

2. 고려사, 고려사절요는 삼국사기와는 다른 기술을 하고 있다.

위의 기사는 고려사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작성된 기사다.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술마시다 견훤에게 살해당한 시점은 고려사에 의하면 음력 9월이다. 9월은 한겨울이 아니다. 928년 이해 9월1일은 양력 10월 17일이 된다. 10월에 야외에 나가 술마신다고 이상한 것은 아니다.  

九月 萱....猝入新羅都城. 時羅王與妃嬪宗戚出遊鮑石亭置酒娛樂忽聞兵至倉卒不知所爲. 王與夫人走匿城南離宮從臣伶官宮女皆被陷沒.
(9월 ....견훤이 갑자기 신라 도성에 들어갔다. 그때에 신라왕과 비빈 종척들과 더불어 포석정에 나가서 술자리를 마련하고 즐기다가 갑자기 적병이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 어찌할 바를 몰랐다. 왕과 부인은 더불어 성 남쪽 이궁으로 달아나 숨었으며, 시종하던 관원과 궁녀들은 모두 함몰되었다...)
冬十月甄萱遣將侵碧珍郡芟大小木二郡禾稼.
十一月燒碧珍郡稻穀正朝索湘戰死之.  - 고려사

물론 그 정확한 시기는 삼국사기의 11월인지 고려사의 9월인지 확실치 않아 애매하기는 하다.
삼국사기 견훤전만 해도 이 시기가 11월이 아닌 10월이라고 말하고 있다.
冬十月太祖將出師援助 萱猝入新羅王都 時王與夫人嬪御出遊鮑石亭
(10월에 태조가 장차 나아가 원조하려는데 견훤이 갑자기 신라왕도에 들어갔다. 이때 왕과 부인 빈 들이 포석정에 놀러 나갔다.)

포석정에 침입한 이후 견훤은 고려 왕건과 팔공산 아래서 기다리던 왕건과 전투를 하게 된다. 고려의 개국공신인 김락과 신숭겸이 이 전투에서 모두 죽는다. 왕건의 일생에서 가장 위험했던 순간이다.
이 사건은 언제로 기록되어 있을까?

大將申崇謙金樂力戰死之諸軍破北王僅以身免(대장 신숭겸 김락이 힘써 싸우다 죽었다 그 여러군이 패배했다 왕이 간신히 몸만 빠져나왔다) - 고려사절요 9월
고려사, 고려사 절요에는 9월의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려 최고의 개국공신이요 도이장가의 주인공인 이들의 죽음은 견훤의 포석정 침입사건 이후의 사건이다.

어찌 되었던 경애왕이 포석정에 놀러 나간 시기가 굳이 11월 한겨울이다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으며 이를 바탕으로 화랑세기가 맞다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3. 출토된 기와의 명문은 화랑세기에 나오는 鮑石祠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포석정 지역에서 발굴된 기와의 명문이 화랑세기에 나오는 것처럼 鮑石祠인 것으로 착각을 일으킨다.

그러나 그 기와의 글씨 어디에도 포석사가 새겨져 있지 않다. 8개 가량의 명문기와가 출토되었으나 모두 포석 두자만 새겨져 있다. 즉 포석사인지 포석정인지 구별할 자료는 어디에도 출토되지 않았다.

 

자세히 보면 글자도 다른 砲石이다.
포석정에 포석이란 글자가 나왔다고 화랑세기의 정확성이 입증된다?  왜 그렇지?


포석정에 포석이란 글자가 나오면 포석정 정자의 기와로 여기는 것이 더 당연하지 않을까?

                 <포석정 건물지 출토 기와 - 포석>


또한 발굴된 건물지는 그리 호화로운 규모는 아니다.

보고서 내용이다.-------------  
第 1建物址는 長軸方向이 南北(N-18°-E)으로 南北 2칸(주칸거리 180㎝), 東西 1칸(주칸거리 230㎝) 규모로 확인되었다....礎石積心石群 위에는 직경40㎝ 크기의 막돌礎石이 놓여져 있었다. 第 2建物址는 ..3칸 규모의 建物로 추정되나 南․北便에서 이에 대응하는 礎石이나 礎石積心石群이확인되지 않았다. ---------------

즉 이 발굴조사와 이때 출토된 포석이란 명문기와를 가지고 마치 국가제사가 행해지던 포석사의 존재가 입증된 것처럼 말해서는 안된다.
그냥 포석정의 존재가 입증되었닥고 하는 것이 더 옳다. 유상곡수연을 하는 일본이나 중국의 유적처럼 이곳에도 건물이 있었던 것이 입증되었고 그 건물은 크지 않은 기와건물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된 것이다.
또한 鮑石亭의 원이름이 砲石亭이었을 가능성도 제기될 뿐이다.

<溝池의 경우>

월성에 구지가 있었다는 사실이 매우 흥미롭게 언급된다. 이 사실 역시 마치 화랑세기가 이 지역 발굴 전에 이미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되어서 화랑세기가 진본임을 입증해준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산성을 제외하고 해자가 없는 성이 있기는 할까?
해자는 성벽을 높이는 것보다 더 효과가 있는 방어시설이다.
평지성에 구지가 있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워 새삼 말할 필요도 없다.


백제 풍납토성에는 일제 때까지 성벽아래의 해자 흔적이 남아 있었음이 사진으로 확인된다.


구지가 해자와는 다른 경주 월성의 독특한 시스템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우스꽝스런 설명이다. 월성 주변의 높낮이가 달라서 연못과 수로로 되어 있다고 하지만 어지간한 성은 모두 월성 정도의 높낮이 차이는 다 있다.

溝池는 국어사전에도 그냥 해자를 말하는 것으로 등장한다. 이 단어는 우리 사서에 자주 등장하는 구절이다.
염철론 에도 흉노는 성곽의 수비도 없고 구지의 확고함도 없다(匈奴無城郭之守溝池之固)라고 언급하고 사기를 비롯한 여러 사서에 구지는 늘 등장한다.

 

<경주 월성의 동북쪽 해자>


월성의 구지가 아주 신기한 것처럼 설명하면서 화랑세기에 구지가 나오므로 대단하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안된다. 그냥 구지는 해자다.
아무런 새로운 것도 없는 사실이 왜 화랑세기의 진실성을 입증하는 도구가 되는 것일까?
  
夜超宮墻 落于溝池而傷 未幾而卒 - 5세화랑 사다함 조
(밤에 궁궐 담장을 넘다가 구지에 떨어져 다쳐 얼마후 죽었다)

이 구절이 무척이나 신기한 것 처럼 말하지만, 만약 백제 풍납토성에 대한 글을 쓴다해도 이와 동일하게 쓸 수 있을 것이다. 중국 서안의 명나라 성에 대한 글에서도 동일한 사건을 쓸 수 있으며 북경 자금성 담장을 넘다가도 구지에 떨어질 수 있다.
즉 소설을 쓰는 사람의 입장에서 이런 구절은 별 것 아니라는 말이다.

역사를 공부한 사람이면 누구나 평지 성벽의 아래는 해자가 있을 가능성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해자가 없으면 적으로 부터 성이 공략당하기 쉽기 때문이다. 성벽아래 해자가 드러났다고 너무 놀라워 하면 사람들은 의아하게 생각하게 된다.

 

화랑세기를 전한 박창화가 죽은 이후에 이루어진 월성해자발굴과 포석정 일대 발굴로 이루어진 고고학적 성과는 필사본 화랑세기가 진본임을 입증한다는 주장은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임이 분명하다. 

 

 중국 서안 명대성벽과 해자

자금성 성벽과 해자

 

 

화랑세기 (花郞世記)

 

신라 중대의 학자이자 정치가인 김대문(金大問)이 지은 책이다.《삼국사기》 [열전](권46)에 의하면, 김대문은 귀족집안의 자제로서 성덕왕(聖德王) 3년(704)에 한산주(漢山州) 도독(都督)으로 임명되었으며, 몇몇 전기(傳記)를 지었는데 그중 《고승전(高僧傳)》, 《화랑세기(花郞世記), 《악본(樂本)》, 《한산기(漢山記)》가 남아있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김대문은 대체로 신문왕(神文王)·효소왕(孝昭王)·성덕왕(聖德王) 때 활동한 신라의 진골이었음을 알 수 있다.

 

《화랑세기》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의 [신라본기] 진흥왕 37년조에 "김대문의 [화랑세기]에는 '어진 재상과 충성스러운 신하가 여기에서 나왔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사가 여기에서 생겼다'라고 기록되어 있다"라는 구절이 있으며, [열전] 김흠운(金歆運)전에도 "김대문이 '어진 재상과 충성스러운 신하가 여기에서 나왔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사가 여기에서 생겼다'고 한 말이 바로 이를 가리킨 것이다. 3대의 화랑이 무려 2백여 명이나 되었는데, 그들의 꽃다운 이름과 아름다운 사적은 전기(傳記)에 기재된 바와 같다."라는 대목이 있다.

 

또,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에는 "원랑(原郞)으로부터 신라 말에 이르기까지 무릇 2백여명이요, 그 중에 사선(四仙)이 가장 어질었는데, 모두 세기(世記)의 기록과 같다"라고 적혀 있다. 《삼국사기》의 전기(傳記)와 《해동고승전》의 세기(世記)는 모두 김대문의 《화랑세기》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세기는 《화랑세기》를 줄여 부른 것이고, 전기는 《화랑세기》가 신라 화랑들과 낭도들의 삶을 소개한 책이라는 특징을 나타낸 듯하다.

 

조선시대부터 《화랑세기》는 사라진 책으로 분류되었다. 그런데 1989년 2월에 갑자기 지방의 한 사람이 소장하고 있던 필사본(筆寫本) 《화랑세기(花郞世紀)》가 공개되었다. 그 책에는 화랑의 기원, 역대 화랑의 지도자인 풍월주(風月主)의 계보 및 행적 등이 향가(鄕歌)와 함께 기록되어 있었다. 역사학계의 연구자 가운데 일부는 책의 내용이 사실적이라면서 김대문의 《화랑세기》가 맞다고 인정하였지만, 다수 연구자들은 책을 소장하게 된 경위가 분명치 않고, 책의 내용 중 골품제도 및 혼인제도에 관한 부분이 기존의 학계 연구결과와 다르다는 점에 주목하여 위서(僞書)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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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창화(朴昌和.1889 ~ 1962)

 

  박창화(朴昌和.1889 ~ 1962) 호는 남당(南堂).

 

화랑세기 필사본을 남긴 재야 사학자다. 호는 남당(南堂).

 

 

남당 유고 : 이 분이 화랑세기처럼 일본 궁내성에 숨겨져 있는 우리나라 고서들중 고구려사를 필사해 온 것이라고 전해집니다

 

남당은 한국 고대사에 관한 많은 저술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화랑세기를 제외하고는 학계에서 인정을 못받고 있다.

 

기성학계에 계신 분들에게 남당유고 이야기를 하면 아예 말도 못 꺼내게 한다. 사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남당 박창화(1889-1962)가 남긴 30여권의 문집으로, 이 역시 화랑세기 필사본처럼 그가 일본 궁내성 도서관 서릉부에서 일하던 1933-42년 사이에 필사한 것이라 남당의 손자 박인규씨는 밝히고 있다. 현재 박창화가 남긴 유고집을 그의 호를 본따 ‘남당유고’라 총칭하고 있습니다

 

남당유고는 크게 세 종류로 구분합니다

역사서 : 1. 고구려사초  2. 고구려사략

 

소설형식 : 1. 을불대왕전(고구려 미천왕) 2. 소수림왕전 3. 어을우동전 그 외 세가,연표 형식의 책들도 있습니다

 

상고시대 가능한 가족혼 근친혼입니다 인간은 동물입니다 단지 다른 동물에비해 이성을가진것뿐입니다 종족보존과 번식을 제일로 삼는 동물입니다 그래서 남아 선호사상 과 혈통중심사회가 지배되어온 민족입니다

 

구약성서에 보면 아브라함의 사촌인 룻(고돔과 소모라에등장인물)은 두딸과 관계를맺어 자식을 번식하는이야기가 나옵니다 가족혼 근친혼은 흉이 아니고 고대 농경사회 종족보존과 번식 혈통사회를구축하는기본요소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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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창화(朴昌和.1889 ~ 1962) 호는 남당(南堂)

 화랑세기 필사본을 남긴 재야 사학자. 호 남당(南堂).

 

재야사학자이자 한문소설가로 한문에 대단히 능통해 거의 모든 저서를 한문으로 지어 남겼다. 한편 관련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고로 그 행적을 자세히 알 수 없다.

 

 

                           전설의 화랑세기 필사본

 

사망당시에 화랑세기 필사본을 자손들에게 남겼는데 이 것이 훗날 1989년에 사학계에 알려지면서 한국 고대 연구사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왔다. 그러나 화랑세기 필사본이 진서인가 위서인가 하는 여부는 아직도 논쟁 중에 있으며 오늘날 사학계에서는 위서로 확정짓고 있다.

 

1889년에 충북 청원에서 출생하였다. 어렸을적부터 학문을 좋아했으며 가족들의 증언에 따르면 학문에 몰두하여 되려 사교는 물론이거니와 가족들도 뒷전이었다고 한다. 이후 행적은 대개 불분명하여 대부분 손자 박인규의 증언에 따른다.

 

증언에 따르면 박창화는 일제강점기 시기에 잠시 교편을 잡았으나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에 가담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한편 박창화는 1927년부터 1928년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역사잡지인 <중앙사단>에 몇차례 역사 관련 논문을 발표하였다. <신라사에 대하여>(1927.12 ~ 1928.8)라는 논문과 <흰옷에서 김치까지>(1928.1) 등이 그것이다. 이는 2003년에 발견되어 세상에 다시 알려졌다.

 

1933년 ~ 1942년 사이에 일본 궁내성의 왕실도서관(도서료, 오늘날의 서릉부)에서 근무했던 것으로 알려져있으나 이 것이 사실이라면 그가 정말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했을지는 의심스럽다.

 

만주에서 독립운동까지 했다는 그가 일본으로 건너가 그 곳 정부에서 근무했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이때에 왕실도서관에서 일제가 약탈해간 고서들을 볼 수 있게 되었고 그 것을 손으로 옮겨 적었다고 한다.

 

해방 이후에는 교직에 몸담아 교육자 생활을 하였다. 손자 박인규의 증언에 의하면 이승만 정권 당시에 박창화 자신이 직접 일본에 가서 일제강점기 동안에 약탈해간 고서들을 되찾아 오겠다며 지원을 요청했으나 당시 정부는 그의 말을 믿지 않아 돕지 않았다고 한다.

 

1962년에 생을 마감하면서 손자인 박인규에게 유언하기를 "화랑세기 필사본은 소중한 것이니 잘 간직할 것이며, 강역고(疆域考)는 자신이 직접 작성한 것이며, 나머지는 있으나 마나한 책"이라고 하였다 한다. 화랑세기 필사본은 1989년에 학계에 알려졌으며 보다 내용이 상세한 또다른 판본이 1995년에 발견되었다.

 

화랑세기 외에도 강역고와 고구려사략, 을불대왕전 등을 비롯하여 30여권 가량 되는 문집을 남겼는데 이를 통틀어 <남당유고>라 한다. 남당유고 중에는 <고구려사략>이나 <고구려사초> 등 역사서의 형식을 띄고 있는 것도 있으나 한문소설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이 중 을불대왕전이나 어을우동전 등은 한문소설임이 확실히 밝혀졌는데 이는 해방 이후 대한민국에서 마지막으로 지어진 한문소설들이다. 한편 박창화가 소중히 아꼈다던 강역고는 그의 손자인 박인규에 의해 <우리나라 강역고>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실제로 박창화는 <고구려사략> <백제왕기> 등 삼국시대에 관한 위서로 추정되는 책들을 쓰기도 했습니다. (이 고구려사략도 그가 쓴 한문소설이라는 주장도 있고..)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실히 증언해줄 당사자가 사망한 후 한참 뒤에서야 발표되어 문제가 더 복잡하게 되었다.

 

박창화가 궁내청 서릉부에서 근무한 건 맞습니다. 드라마 '선덕여왕'이 한창 유행하던 2009년 8월즈음에 MBC 뉴스후에서 일본 국회도서관에서 1935년 궁내청 명부에서 85엔(연봉인지 월급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사무촉탁(계약직) 근무, 1941년에 오하라 마스카즈로 창씨개명한 것까지 확인했다.

 

그렇다면 진짜 박창화가 궁내청 서릉부에서 화랑세기 원본을 봤느냐?

 

한국인 학자 중에 유일하게 서릉부에 들어가 본 사람이 울산대 역사문화학과 허영란 교수인데, 뉴스후에서 인터뷰하길 서릉부에서 만든 목록만 토대로 파악해야 하는데 목록이 1950년대에 만들어진 것이고, 목록에서 누락되거나 이후에 추가로 개편되었다 해도 서릉부가 한국관련 자료의 공개를 막고 있기 때문에 (화랑세기 원본이)없다고 단언할 수 없다고 한다.

 

아마 궁내청 서릉부가 한국인 연구자의 자유로운 자료 열람을 허용하지 않는 한 진실은 알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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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세기 필사본은 남당(박창화)의 역사소설

 

박남수 국사편찬위 편사연구관 주장

 

화랑세기 잔본 

 

1989년 첫 공개 이후 학계에서 격렬한 진위 논쟁을 불러왔던 화랑세기 필사본이 남당(南堂) 박창화(朴昌和.1899-1962)가 쓴 역사소설 임을 보여주는 문서가 발견됐다는 주장이 나왔다.

 

박남수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은 12"박창화의 유고를 정리.검토하는 과정에서 기존 화랑세기와는 또 다른 유형의 화랑세기 잔본(殘本)으로 추정되는 문서와 그 안에 수록된 향가 1수를 발견 했다"고 말했다.

 

이 화랑세기 잔본은 1930년에 저작된 것으로 기존에 발견된 화랑세기 필사본보다 앞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박 연구관은 말했다.박 연구관은 13일 동국대 문화관에서 열리는 동국사학회 학술대회에서 '신발견 박창화 화랑세기 잔본과 향가 1'라는 논문을 통해 이 같은 주장을 펼 계획이다. 지난 1989년과 1995년 두차례 발견된 화랑세기 필사본은 작성자인 박창화가 소설적인 상상력을 동원해 만들어낸 허구라는 설과 김대문의 화랑세기를 그대로 옮겨 적은 것이라는 설이 팽팽히 맞서왔다.

 

박 연구관은 "이번에 발견된 잔본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나온 기사를 편년 형식으로 나열하고 관련 자료의 상관관계를 역으로 추적해 논리적인 고리를 만들면서 그 사이사이에 새로운 가공인물을 배치하는 방식"이라고 분석했다.가령 김흠돌의 난을 진압한 것으로 나오는 배장공이나 기존 발견된 화랑세기 필사본에서 배장공의 역할을 대신하는 오기공 등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등장하지 않는 인물이다.

 

그는 이어 "후대의 용어인 '안절(按節)'과 근대 용어인 '읍리(邑吏)' 등이 사용되는 점으로 볼 때 이 자료는 박창화가 쓴 일종의 역사 소설로 보인다"고 말했다.잔본에 수록된 향가 '백해상백파가(碧海上白波歌)'도 표현어법이나 단어들이 옛 형태이기보다는 오히려 근대어에 가깝다는 것이 박 연구관의 주장이다.

 

박 연구관은 잔본에서 사용되는 용어나 내용이 종전에 발견된 필사본과 겹치는 부분이 있다는 점을 들어 잔본이 종전에 발견된 화랑세기의 저본(底本) 성격을 띠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선도(仙徒), 가야파(加耶派), 진골파(眞骨派), 대원파(大元派) 등의 용어가 잔본과 기존 필사본에서 동일하게 쓰였고 김흠돌의 난과 체원공 누이의 행장 등에 대한 내용이 중복된다는 것이다.

 

박 연구관은 이와 함께 '을불대왕전(乙弗大王傳)' 등 박창화가 쓴 다른 역사소설에서 화랑세기와 유사한 표현이 나오는 점도 화랑세기 필사본이 역사소설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한다고 말했다.

 

그는 다만 "박창화는 애당초 위서를 만들 의향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그는 소설적 흥미에서 화랑세기를 저작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이며 그것을 소일거리로 삼았음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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