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고분 이름이 왠 외국 이름? - 데이비드총(塚)
신라고분(新羅古墳)에 외국이름(外國名)이 붙어 있다.
데이비드총(David塚)
가운데 봉황로를 기준으로 왼쪽이 노서동고분군이며 오른쪽이 노동동고분군이다
고분을 발굴하고 나면 '00호 고분'이라는 이름에서 벗어나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된다,
발굴된 고분에서 왕의 묘지석이 나오거나 누구의 왕릉인지 알 수 있는 유물이 발견되면 00왕릉이라고 이름을 붙인다
그러나 그 고분의 주인공이 누군인지 알 수 없는 경우나 애매할 때에는 대개 특징있는 출토 유물의 이름을 붙이거나 능의 특징을 이름으로 붙인다.
노서동고분군에는
금관이 맨 처음 발견되었기 때문에 금관총,
광개토태왕의 호우가 나왔다고 해서 호우총
침상이 두 개 쌍으로 나와서 쌍상총,
은방울이 나왔다고 해서 은령총
봉황이 새겨진 금관이 나오고 스웨덴왕자가 발굴을 참관했다고 해서 서봉총
말뼈가 나왔다고 해서 마총
소뼈가 출토되었다고 해서 우총이 있고
노동동고분군에는
금동으로 만든 신발이 나왔다고 해서 식리총
금관과 금으로 만든 방울이 나왔다고 해서 금령총
고분이 있던 위에 옥포집이라는 식당이 있었다고 해서 옥포총이라 불리는 고분이 있으며
아직 발굴이 이루어지지않은 고분은 그냥 OO 호분이라고 부르고 있다.
경주 시내 한가운데 있는 노동, 노서 고분군은 대능원에 비해 관광객이 많이 찾지 않는 곳이지만 발굴을 통하여 수많은 유물과 값진 유물이 출토된 곳이며 아늑하여 신라분위기에 젖어들기엔 정말 좋은 곳이다.
노동 노서 고분군은 원래 하나의 구역인데 일제시대 일본인이 고의적으로 이 고분군을 가로질러 도로를 내므로서 고분군을 두 개로 분리시켰다. 이는 신라의 정기와 맥을 끊으려는 숨은 의도였다.
시내에서 봉황로를 따라 대능원쪽으로 가다보면 양쪽에 수많은 고분들을 보게 되는데, 길 왼쪽에 있는 고분군이 노동리고분군이고 오른쪽이 노서동고분군이다.
이 노서동고분군에 외국인의 이름이 붙여진 고분이 하나 있다.
'데이비드총(塚)' 이다.
노서동고분군을 들어서면 바로 왼쪽에 언덕처럼 생긴 금관총이 있고 금관총 바로 뒤가 서봉총이다.
고분을 발굴한 뒤에 원래대로 둥글게 봉토를 하지 않고 약 50cm정도로만 흙을 돋운 뒤 그냥 평토분으로 남겨둔 곳이다. 조금 높은 곳에서 보면 표주박형태로 되어 있어 쌍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표주박형태 고분의 뒷쪽(북쪽)분이 봉황 앉은 금관이 출토된 서봉총이고 같이 붙은 분(墳)의 남쪽분이 '데이비트총'이다.
지금은 정비를 하여 두 분의 형태를 쉽게 알 수 있지만 일제 강점기 시절에는 능 주변에 모두 민가가 들어서 있어 별도의 무덤처럼 보이거나 가옥에 묻혀 형태가 잘 안보이는 고분이 많았다.
130호고분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 본 데이비드총
130호 고분 위에서 내려다본 모습
아래의 앞에서 본모습
(오른쪽 위쪽에 대리석으로 새긴 서봉총 안내판이 보인다)
1926년 9월 일제에 의하여 서봉총이 발굴된다.
우연히 발견된 금관총에서 수많은 유물이 발견되자 노동리 금령총(127호), 식리총(126호), 옥포총(총독부 시대의 번호로 4호분)의 발굴을 계속하고, 노서동 금관총의 서쪽에 근처에 흙퍼내기 공사가 이루어지던 고분이 있어 이 고분의 발굴을 실시하였다.
이 시기, 경주에서는 대능원 뒤를 지나가던 협괘철도를 광역철도로 바꾸고 경주역에 기관고 공사를 하고 있었는데 공사장에 필요한 흙을 이 고분에서 파내어 갔던 것이다.
경주역공사를 위한 흙 채굴지점
(당시의 경주역은 지금 서라벌문화회관 자리였고 대능원 북편으로 철도가 놓여 있었음)
흙을 파내던 고분이 바로 서봉총이다.
발굴 결과, 서봉총에서는 봉황장식이 달린 금관을 비롯하여 '연수(延壽)'란 명문 적힌 은합 등 수많은 유물이 출토된다.
적석식 목곽의 형체가 거의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었고, 봉황이 세마리가 앉아있는 찬란한 금관, 이식, 대금구, 유리 용기, 은제 용기, 청동 초두, 칠기, 자수 직물 조각, 마구 등, 수많은 부장품이 매장 당시 그대로 존재하고 있었다.
금관을 발굴중인 스웨덴의 구스타프 아돌프 황태자
당시 일본에 신혼여행 중이던 스웨덴 황태자 구스타프 아돌프가 일본에서 건너와 직접 자기 손으로 금관을 들어내기도 했다.
이 서봉총에서 출토된 은합 위에는 연수원년신묘(延壽元年辛卯)라고 새겨진 명문이 있어 고신라 고분의 연대를 추정하는데 중요한 근거가 되기도 하였다.
데이비드총의 모습
천막 앞의 표지석은 서봉총의 주곽이 있던 곳을 표시한 것이고
데이비드총은 표지석이 있는 빈터 오른쪽 초갓집아래에서부터 시작하여 그 앞쪽 빈터까지 이어지는 부분이다.
이 사진은 130호 고분 위에서 찍은 것으로 보인다.
당시 서봉총 발굴의 담당자 고이즈미 아키오는 서봉총을 발굴하면서, 서봉총의 남쪽에 인접해 비슷한 규모를 가진 1기의 고분이 과거부터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고분은 서봉총과 짝을 이루는 쌍원분의 하나로, 무덤은 대부분 깎여 낮아져 있지만 주체부가 아직 잔존하고 있는 것으로 추측되는 고분이었다.
적석의 배열상태로 보아 북측 고분이 먼저 축조되었고 다음으로 남분이 그 가장자리에 붙여서 축조되었느데, 이로인해 표주형 고분 축조의 순서와 원인을 처음으로 알 수 있었다.
이렇게 두 개의 적석고분이 쌍으로 배치되어 있는 고분은 피장자의 관계뿐 아니라 고분의 축조 원인을 구명하는데 매우 흥미로운 결과를 가지고 있어 누구나가 발굴에 접해보고 싶어한다.
그러나 남쪽 고분은 고분의 끝머리가 대부분 민가가 들어선 대지의 아래에 묻혀 있는 상태라서 그 가옥을 철거하지 않으면 조사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서봉총과 짝을 이룬다고 생각되는 이 ‘남분’을 발굴하면, 북분인 서봉총과 마찬가지로 큰 유물이 발견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크지만, 총독부로부터 발굴 경비 지출을 거부당했기 때문에 발굴에 들어가는 막대한 비용을 구할 수가 없어 후일로 미루어 두었다.
발굴을 시작한 데이비드총
서 있는 인물 아래 부근에서 간간히 분구의 흔적이 확인된다.
데이비드총의 크기는 서봉총(직경36m)와 비슷하다.
그로부터 약 4년 후,
상해에 살고 있는 유태계 영국인으로 아시아 고고 미술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퍼시벌 데이비드경이 서봉총의 발굴소식과 미발굴 상태로 남아있는 남분의 이야기를 듣고 남쪽분의 발굴 자금을 제공하고 싶다고 고이즈미 아키오에게 제의 해 온 것이다.
데이비드 경은 인도에서 태어나 아버지 대부터 면사(綿絲) 사업으로 재산을 축적했고, 준남작의 작위를 가진 귀족으로 아시아 고고 미술에 이해가 깊은 자이면서 연구자이기도 했다.
제의를 한지 얼마 후 3천엔의 수표와 함께 데이비드의 편지가 고이즈미 아키오에게 도착했다.
편지에는 "당신의 발굴비용에 더해 지하에 잠자고 있는 조선의 고대 문화가 지상으로 나타나는데 다소나마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나는 이보다 더 기쁜 일은 없을 것이다. 혹시라도 나의 희망을 들어줄 수 있다면 발굴 시에 견학하는 것을 허락해주기를 원한다"라고 덧붙여져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 자기도 직접 발굴에 참여하겠다고 억지를 부리기도 한 것을 보아 또다른 생각도 있지 않았나 싶다.
표주형으로 붙은 고분은 대개가 부부의 묘이다.
서봉총이 출토 유물로 봐서 부인의 묘(墓) 라는 의견이 일치된 가운데 남쪽분은 남성의 무덤일 것이 틀림없으니 출토유물에 대한 기대감도 컸을 것이다.
이 데이비드의 자금 제공으로 조선총독부의 허가를 받은 고이즈미 아키오, 우메하라, 사진 담당인 사와 3명이 ‘남분’을 발굴한 것은 1929년 9월의 일이었고 약 40일만에 발굴을 끝내었다.
이때는 서봉총 발굴에 참여했던 최남주선생님도 고분 발굴에 함께 참여한다.
그 사이 데이비드는 약 30일간을 불국사호텔에 머물면서 발굴을 견학하거나 신라 유적을 답사했다고 한다.
금관등 화려한 유물이 나온 서봉총과 붙어 있는 고분이니만큼 거기에 대한 기대는 엄청나게 컸다.
데이비드총의 유물 출토 상태
오른쪽 잔 자갈이 있는 곳이 피장자를 안치한 목관이 있던 자리이고
왼쪽 도자기가 있는 부분이 머리쪽에(동쪽) 부장품을 넣은 나무상자가 있던 자리이다.
출토유물-금제 귀걸이
장신구는 부근의 다른 고신라고분에 비해서 검소하며,
좌우에 소형의 금제 귀걸이 한쌍,목에는 큼직한 곡옥과 환옥으로 구성된 목걸이, 양팔에는 2쌍의 금동제 팔찌, 손가락에는 반지를 끼고 있었으며 관모나 대금구등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런데 막상 고분을 발굴한 결과, 각재를 쌓아 만든 목곽은 완전히 부식되어 흔적도 없고 그 중앙에 놓아둔 목관의 바닥 부분이 간신히 확인될 뿐이었으며 목관의 중앙에 순금제 이식을 늘어뜨린 귀걸이와 큰 곡옥을 장식한 목걸이, 몇 개의 은 및 금동의 팔찌, 금은의 반지 등이 있었을 뿐 고분 주인공의 관도 허리띠도 대도 등·무기류도 부장되지 않았다.
다만 머리 위 한구석에 많은 토기 및 청동으로 만든 초두, 붉은 색의 칠기, 금동 마구가 조금 있었을 뿐이었다. 북분과 비교해서 형편 없는 유물뿐이었으며 특이한 유물은 한 점도 발굴되지 않았다.
결국 왕릉임을 알게 해주는 자료도 출토되지 않았고 그렇다고 이름을 붙일만한 특기할 만한 유물이 출토되지 않아 걸맞은 이름을 붙일 수 없었다.
그래서 결국 발굴한 이의 이름을 그대로 붙여서 '데이비드총'이라고 명명하였다.
퍼시벌 데이비드는 많은 돈을 투자하여 고분을 발굴했으나 얻은 것은 찬란한 유물이 아니고 '데이비드총.이라는 이름뿐이었다.
출토품이 미미해서였는지 이 고분에 대한 발굴기록은 현재 행방불명이며 일본·한국 어느 쪽에 있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다만 발굴 당시의 사진만 몇장 남아있을 뿐 이라고 한다.
데이비드총의 조성 시기는 대체로 6세기 전반으로 추정되며 고분 내에서무기와 무구류가 출토되지 않은 것을 보아 여성의 무덤으로 보고 있다. 인접한 서봉총도 여성의 묘로 보고 있는 데 왜 쌍원 합장분의 형태인가라는 의문에는 좀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물론 보문리 부부총이라고 불렸던 무덤이 부부가 아닌 둘 다 여성의 무덤이라고 밝혀져 부부가 아니라도 합장할 수는 있다는 것이 밝혀진 바 있다. 그러나 서봉총과 데이비드총의 조성 시기는 약 50년-100년의 차이가 나기 때문에 합장묘일 가능성은 적어보이며 혹시 후대에 조성된 데이비드총이 묘지 공간의 부족으로 서봉총을 잠식한 것은 아닐까....
데이비드총 뒷쪽의 서봉총은 당시 스웨던의 황태자 구스타프가 발굴에 참여하였다하여 스웨덴의 서(瑞)자가 들어가는 이름이 붙여졌으며 대리석으로 된 안내판도 잘 세워져 있으나
이 '데이비드총'은 안내판도 하나 없어 이 사실을 잘 알지 못하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표주형고분 전체가 서봉총인 것으로 잘못 알고 있을 뿐이다.
오타기지로군이 그린 노서동고분군
이층 기와집 바로 뒤 소나무 숲이 있는 곳에 서봉총과 데이비드총이 있다 이 그림은 금관총 발굴당시에 그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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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1)
상명대 박서희교수는 이 고분이 진평왕릉일 가능성이 크다고 조심스럽게 주장을 한다.
서봉총(瑞鳳塚) 출토 '연수'(延壽)라는 연호가 적힌 은합(銀盒. 은그릇)은 지금의 중국 서북부 지역인 신장(新疆) 일대를 무대로 활약한 고창국(高昌國) 국왕이 신라왕에게 보낸 선물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같은 맥락에서 이 은합에 새겨진 '연수'라는 연호는 고창국 국왕 국문태(麴文泰)가 재위 5년째인 서기 624년(신라 진평왕 42년)에 새로 선포한 바로 그 연호이며, 그렇기 때문에 서봉총은 진평왕릉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반박도 있다.
신라 적석목곽분 연구자인 이한상 동양대 교수는 "서봉총은 출토 유물로 보아 축조시기가 5세기말-6세기초라는 데는 이견이 없어 박 교수 논리를 따른다면 1세기 가량이나 차이가 나게 되는 모순에 봉착한다"고 말했다.
입구쪽에서 본 모습
검은 비석있는 곳이 서봉총이고 그 뒤쪽(사람이 지나가는 오른쪽)이 데이비드총이다
노서리 고분군
봉황대
125호 고분 봉황대
서봉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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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우리문화역사연구모임'카페에 정성일님이 쓴 글이다 2010. 3. 16>
이 무덤의 주인을 판단하기 위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중요한 근거는 延壽元年辛卯(연수원년신묘)라는 명문이다.
그러나 신묘년에 해당하는 391년 451년 511년 중에 신라, 고구려, 중국의 연호 중에 원년으로 삼을 만한 기록은 광개토왕의 원년이 유일하다.
그러나 광개토왕의 연호는 영락인데 다른 연호가 사용되었는지는 알 수 없음이 안타깝다.
또한 북분에서는 금관이 출토되었는데 여성의 것으로 추정하며, 남분은 남성의 것으로 추정하는데 이렇다 할 중요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또 북분은 남분의 경계석을 헐고 자리 잡았으니 여성이 후에 죽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북분의 금관 출토로 보아 왕비였을 가능성을 염두해 두고 연수원년을 광개토왕의 원년으로 가정하면
남당유고에 미추의 비인 광명이 392년 2월에 사망하였다고 하였으니, 미추왕릉으로 전해지는 무덤은 따로 있고 흘해는 광명을 따라 죽었으니 남분의 주인은 유례와 기림이 유력하다.
광명이 죽었을 때 분골(分骨)하였으니 분골이란 지금의 화장(火葬)하는 지낸 것으로 생각되므로 북분에는 유물은 있을지언정 시신은 없을 것이다.
만약에 북분에서 정상적인 여성의 시신이 발굴되었다면 그것은 본인이 큰 착오를 저지른 것이다.
혹은 머리카락이라도 남아있어 DNA추출이 가능하다면, 남분이 유례인 경우 광명과 아버지가 같고, 기림인 경우 어머니가 같은 형제이다.
남당유고의 진위여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고고학적으로 증명해야 하는데 자료를 쉽게 구할 수 없고 인터넷에 소개된 자료의 정확성을 알기 어려우니 고역이 아닐 수 없다.
본인의 견해를 자료삼아 학위논문의 소재로 삼는다면 자료를 공유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미추왕릉으로 傳하는 무덤의 발굴결과 신라본기의 사망시기와 다르다하여 미추왕릉이 아니라는 결론은 또한 나에겐 황당하다.
'역 사 방 > 고구려,백제,신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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