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堂 朴昌和와 그의 遺稿에 대한 몇 가지 문제
朴 南 守(국사편찬위원회)
Ⅰ. 머리말
Ⅱ. 南堂 朴昌和의 행장
Ⅲ. 「南堂 朴昌和先生 遺稿」에 대한 몇 가지 문제
Ⅳ. 머리말
Ⅰ. 머리말
1989년과 1995년에 발견된 ?花郞世紀?는 2007년 그 殘本이 발견됨으로써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다. 처음 두 본이 발견되었을 때는 그 진위를 눌러싼 논쟁의 연속이었다면, 잔본은 앞선 두 본의 초고로서 남당이 집필한 소설류로 인정되기 때문이다.
사실 남당 박창화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그의 작고 28년만의 일이었다. 김대문의 ?花郞世記?로 추정되는 ?花郞世紀?가 박창화의 유고로서 전하고 있어, ?花郞世紀?의 진위 문제를 풀 수 있는 인물로 주목되었던 때문이었다. ?화랑세기?는 1989년 2월 16일자 부산 ?국제신문?과 2월 17일자 ?서울신문?에 처음으로 보도되었고, 그 소장자 김경자(경남 김해시)씨는 ?화랑세기?를 金鍾鎭씨의 가정교사 朴昌和로부터 증여받은 것으로 밝혔다.
당시에 보도된 ?화랑세기? 서문에는 ?삼국사기?에 인용된 김대문 ?화랑세기?의 “賢佐忠臣 從此而秀 良將勇卒 由是而生”이란 구절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런데 새로이 보도된 ?화랑세기?에는 ?삼국사기?에 보이는 화랑들의 활동이나 화랑도의 성격 등에 대한 내용을 살필 수 없고, 오히려 신라 왕족과 귀족들의 문란한 성관계를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어서, 발견 당시부터 진위에 대한 찬반양론의 논쟁이 있었다.
그후 1995년 4월 22일 역사학회 제325회 월례연구발표회에서 이종욱 교수는 발췌본 ?화랑세기?(이하 ‘제1본’이라 함)를 신라인이 아니면 저술할 수 없는 책으로 규정한 반면, 노태돈 교수는 이른바 모본 ?화랑세기?(이하 ‘제2본’이라 함)를 새로이 확인하였음을 공식적으로 언급하고 발췌본과 모본 ?화랑세기?를 박창화의 위서로서 평가하였다.
이른바 필사본 ?화랑세기?에 대한 진위 논쟁은 제1본이 발견된 이후 17년여 동안 팽팽하게 맞서왔다. 2001년 3월 국사편찬위원회는 ?화랑세기?와 박창화의 유고를 일괄하여 수집 촬영한 바 있었다. 2007년 필자는 이들 자료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화랑세기? 잔본(이하 ‘제3본’이라 함)을 발견하여 학회에 보고하고, 이른바 ?花郞世紀? 제1, 2, 3본이 박창화의 소설적 창작욕에서 시작하여 僞書로 탈바꿈하였음을 밝힌 바 있다.
본고는 필자가 이미 발표한 「신발견 박창화의 화랑세기 잔본과 향가 1수」를 바탕으로 하여, 박창화의 생애와 그의 유고에 보이는 몇 가지 문제점을 살피고자 한다. 많은 질정을 바란다.
Ⅱ. 南堂 朴昌和의 행장
남당 박창화의 이력은 지금까지의 연구자들에 의해 대부분 밝혀져 왔다. 이에 대한 연구는 주로 박창화가 ?花郞世紀?를 포함하여 鄕歌를 창작할 정도의 능력을 소유하였는가, 그리고 ?화랑세기?가 어떠한 과정을 거쳐 우리 앞에 나타났는가 하는 논쟁으로 요약된다. 이는 이른바 필사본 ?花郞世紀?의 진위여부를 판별할 수 있는 핵심적인 문제로 인식되었기 때문이었다.
곧 신빙론의 관점에서는 남당의 유고에서 관등과 관직의 사용에 많은 오류를 보이고, 그 내용에 있어서 ?화랑세기?보다 구체성이 떨어진다는 점을 들어, 남당이 ?화랑세기?와 같이 치밀하고 정확한 작품을 만들 만큼 신라사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지 못한 것으로 평가하였다. 이로써 남당은 1933년 이후 궁내성 도서료에 근무할 당시에 ?화랑세기?를 필사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위작설의 관점에서는, 남당은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하였고, 사범학교를 나온 인테리로서 1930년대 혹은 1940년대 초반 일본 궁내성 서릉부에 근무할 때 신라 화랑에 대한 자기 나름의 이해에 입각하여 과거의 사실을 자기류로 재현해 보려는 창작 욕구에 의해 ?화랑세기?를 위작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어떠한 관점이든 간에 박창화가 1930년대 언젠가 ?화랑세기?를 자필로 쓴 사실은 서로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그 뒤 박창화의 신라사 관련 논문 「신라사에 대하여」(?中央史壇? 13-12․14-2, 1927․1928)가 ?역사비평? 62(2003)에 소개됨으로써, 그의 신라사에 대한 이해도가 꽤 깊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추적 작업과 더불어 남당의 손자 박인규에 의해 박창화의 ?우리나라 강역고?(민속원, 2004)가 간행됨으로써, 그의 이력과 소장도서에 대한 꽤 많은 정보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학문적 성향과 관련하여서는 아직도 분명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
그의 이력과 관련된 연보류로서는 「直系尊譜」(6장, 종서 괘문 첩문, 한문 종서 모필), 「南堂先生年譜」(3장, 괘선, 한문 종서, 모필), 「南堂先生五言詩」(3장, 괘선, 국한문 종서 모필)가 전하는데, 모두 「南堂관련문건」(소장자 고문서번호 01-김-133」;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南堂朴昌和先生遺稿? CD-133번 폴더)에 수록되어 있다. 먼저 그의 「直系尊譜」에는 남당의 이력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사항을 기술하고 있다.
南堂은 燮來인데 또한 昌和라고 한다. 字는 念祖이다. 高宗 己丑(1889) 5월 9일에 태어났다. 己酉年(1909) 봄에 敎官에 임명되어 師範學校를 나와 沃川․永同․淸州 학교등의 교사를 역임하였다. 培材에 들어가 中國을 돌아보고, 江戶로 나아가 芸閣에 근무한 지 20여 년 동안 疆域을 연구하고 「李衛異域說」 및 「平壤辨」 등 諸辨을 주창하여 발표하였다. 前人의 소인 발호배들이 능히 이를 □□하지 않았다. 1962년 3월 6일에 돌아가니 享年 74세였다. 墓는 分土洞 右麓에 있다.…
대체로 남당이 기록한 것이지만, 밑줄 친 부분은 그 후손이 추기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에 따르면 남당은 1962년 3월 6일 사망하였다. 그런데 위의 간략정보에서 그가 1889년 5월 9일생이고, 1909년 봄 교관으로 임용되어 사범학교에 들어가 沃川․永同․淸州 등의 보통학교에서 재직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그는 배재고등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하였는데, 지금까지의 알려진 바와 같이 중국을 여행하고 1924년 무렵 일본에 건너가 강역연구를 지속하였으며, 芸閣 곧 서릉부 도서료로 20여 년을 근무하고 1942년에 귀국하였다.
그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지금까지의 연구결과를 보완하여 그의 이력을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1889.5. |
탄생 |
․碑石峴에서 탄생 -어려서 허약하여 巫 龍福母를 수양모로 삼음 |
1894 |
6세 |
․봄에 諺文을 깨우침 -겨울에 동학도가 야습하여 부친 石農公을 木川으로 끌고 가 살해하고자 함 |
☞ 이는 行廊 金明孫이 그의 처를 石農公이 총애하여 아들 斗億을 낳은 데 대한 음해였다고 함 | ||
1895 |
7세 |
․忍齋 李先生(峿堂의 次子)이 千字文音義를 가르침 → 봄에 千字를 끝냄 ․가을에 忍齋가 作詩를 명하여 詩題에 따라 ‘靑天星森 地上載萬物 螢火小如燈秋露明似玉’이라 지음 ․蒙牗과 聯珠詩를 읽어 가을에 蒙牗을 마침 ․史略을 시작하고, 한문의 문리를 얻어 스스로 해독함 -정월 16일 母夫人 安東金氏 타계 -여름에 大成母(27세)가 와서 석농공의 小室이 됨 |
1896 |
8세 |
․봄 忍齋 선생이 상경하여 十九史略을 사와 東國史略이 있는 지를 물음 ․仁應家에서 長篇抄를 빌려와 외움 |
1897 |
9세 |
․古文 漁父辭․歸去來辭․黃州竹樓記․岳陽樓記․醉翁亭記․秋聲賦 등을 읽고 古風을 지음 ․田艮齋․金斯文이 비를 무릅쓰고 와서 ‘笠大衣不濕’이라는 詩題로 ‘不如歸去臥雲林’이라 하니, 필묵으로 ‘野老衣冠常帶雨 遠人鬚髮早知秋’라 써서 답하고, 또 古風으로 ‘三山花月落蒼鰲 二水風煙飛白鷺’의 句를 둠 |
1898 |
10세 |
․자주 출가하고자 하였는데, 어머니 없는 슬픔 때문이었음 ․이 해에 族譜를 간행하고, 겨울에는 밤새도록 책을 읽음 |
1899 |
11세 |
․鎭川의 姊夫가 지난 해부터 와서 독서하니 孔婿가 朴子라 칭함 ․남당은 독서와 서당교육을 놀이처럼 좋아함 |
-行廊 一萬이 그 처를 의심하여 넓적다리를 찌르고 쫓아내려 하니, 이를 말림 -笏山 得貴의 父가 과부가 된 弟婦와 相通하여 官奴들의 야습을 받고 귀향함 | ||
1900 |
12세 |
․忍齋가 죽음 ․邁堂 선생이 農岩集 八大家를 가르친다 하여 邁堂家에서 기식하며 공부하니, 塾友로는 오직 朴鐘烈과 韓範錫이 있었음 |
-丹齋(系峿堂의 子), 忍齋와 審齋(忍齋의 弟)는 모두 떠돌아다닌 배움으로 부실을 면치 못했다고 평가함 -매당의 학문과 행실은 인재보다 나으나 알지 못하는 곳이 많다고 평가함 -명손의 처가 석농공에게 총애를 잃어 발광함 | ||
1901 |
13세 |
․韓泰錫의 집에서 三國志를 읽음 ․鷄契를 지음 ․여름 松子洞 길에서 시를 지어 ‘細雨霏霏日欲西 一雙布穀向人啼 原來萬物生癕裡 莫笑浮生等甕鷄’라 함 ․三國志를 번역(新野~華容道까지 번역) -鳳龍 동생과 칡뿌리를 다투어 캘 정도로 굶주림 -碑岩寺, 具何川, 李端川, 洪泗川 등을 유람 |
1902 |
14세 |
-봄 兵馬山에서 花遊 |
1904 |
16세 |
․日語를 배움 -처음으로 기차를 타고 한강을 건넘 |
1907 |
19세 |
․“東明王 : 監獄署 倉庫 東明王 보고 府君祭祀가 각되였소” → 고구려사에 대한 관심 |
1909 |
21세 |
․사범학교 수학 : “師範學校의 兒孩들하고 消日을 하는 貌樣이러고” |
1910 |
22세 |
․충북 옥천보통학교 本科副訓導로 부임 |
1911~1917 |
23~29세 |
․충북 영동공립보통학교 副訓導, 訓導 역임 |
1918 |
30세 |
․충북 부강공립보통학교 訓導 역임 (중국 여행 → 고구려 강역도 작성 추정) |
1923.10. |
35세 |
․도쿄 이주 - 역사연구 |
1927 |
39세 |
․「신라사에 대하여」 논문 발표 |
1928 |
40세 |
․?國罡上王記? 抄 (궁내부 용역 업무 추정) |
1930 |
42세 |
․1930(庚午) 「上狀敦牂年紀資料」(신발견 ?화랑세기? 잔본 所收) 제책 |
1933.2.~ 1942 |
45~54세 |
․1933.12. 일본 宮內省 圖書寮에서 조선전고조사 담당 사무촉탁에 임명 |
1941 |
53세 |
․오바라 마사카즈(小原昌和)로 창씨개명 |
1942 |
54세 |
․귀국 |
1945~1946 |
57~58세 |
․청주사범․청주중․청주상업학교 강사 |
1947 |
59세 |
․청주사법학교 교사 |
1948~1950 |
60~62세 |
․괴산 공립 초급 여중학교 교사 |
1956 |
68세 |
․?國罡上王記? 改衣 |
1962.3. |
74세 |
․南堂 사망 |
1999 |
|
․장손 박인규가 김경자씨로부터 남당의 유고를 인수․보관 |
2001.3. |
|
․국사편찬위원회 국내사료수집팀 김대길․박대중이 남당유고를 일괄촬영․수집 |
남당 박창화의 이력에서, 그는 이미 어린 나이 때부터 漢學을 공부하고, 歷史書를 두루 섭렵하였으며, 漢詩 등에도 조예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그는 스스로 기술하였듯이 李衛異域說이나 平壤辨 등 각종 疆域에 관한 辨證에 힘을 쏟았다. 강역에 대한 공부는 이미 20세를 전후한 나이부터 시작되었고, 일본에 건너가 본격적인 근대적 역사학방법론을 배우면서, 고구려사와 신라사에 대한 근대적 인식을 접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그의 논문 「신라사에 대하여」에는 오늘날 논의되고 있는 신라사 쟁점들의 상당부분이 지적되어 있다.
요컨대 박창화는 어려서부터 함께 한학을 수학한 동년배의 학생들을 뛰어넘는 우수한 학생이었다. 그의 발군의 비상함은 이미 7세에 한문의 문리를 터득하고, 9세의 나이로 古風을 지을 줄 알았으며, 그를 만나러 온 구한 말의 巨儒 田艮齋․金斯文과 당당하게 시문을 주고 받을 정도의 이른바 그 지역사회에서 신동으로 꼽히는 인재였다. 사범학교에서 수학하게 된 계기 또한 그의 우수성으로 말미암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Ⅲ. 「南堂 朴昌和先生 遺稿」에 대한 몇 가지 문제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실에서는 청주출신 이민원의 접촉으로 박창화의 손자 박인규로부터 「남당박창화선생유고」 일괄 자료에 대한 촬영 허가를 받았다.
이에 2001년 3월 20일 국내사료수집 담당 김대길과 이민원, 박대중이 함께 청주 내덕동의 박인규댁에서 자료를 촬영하고, 일부 자료는 빌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촬영을 마치고 반납하였다.
박인규는 이들 자료 가운데 일부를 1989년과 1995년 두 차례에 걸친 신문 보도 이후 1999년 부산 김경자씨로부터 매입하여 일괄 보관하게 되었다고 하며, 이 자료를 공개하여 학술적으로 연구되기를 희망한다고 하였다.
당시 수집자 김대길은 일괄 수집된 자료의 목록을 작성하였으며, 현재 국사편찬위원회 사료관에서 CD-ROM의 형태로 이들 자료를 대출 열람할 수 있게 하였다. 이들 자료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커드번호 |
제 명 |
수 량 |
크 기 |
저 자 |
내 용 |
01-김-130 |
백시기 |
1책(6장) |
21×16 |
朴昌和 |
南堂 朴昌和가 정리한 자료 |
01-김-132 |
信敬堂小錄 |
1책(13장) |
21×16 |
|
南堂 朴昌和가 정리한 자료 |
01-김-133 |
南堂관련문건 |
1책(19장) |
|
|
南堂 朴昌和와 관련된 자료를 정리한 것 |
01-김-134 |
花郞世紀관련문건 |
1책(209장) |
|
|
南堂 朴昌和가 정리한 자료로 화랑세기와 관련된 자료임 |
01-김-135 |
무제 |
1책(6장) |
25.5×17 |
|
南堂 朴昌和가 정리한 자료로 자료명을 기록하지는 않았음 |
01-김-136 |
於乙于同紀 |
1책(16장) |
28×19.5 |
朴昌和 |
南堂 朴昌和가 정리한 자료로 어우동에 대한 내용을 정리하였음 |
01-김-137 |
地藏菴紀 |
1책(13장) |
29.5×17 |
|
南堂 朴昌和가 정리한 자료 |
01-김-138 |
中川大王紀 외 |
1책(154장) |
27.5×20 |
朴昌和 편 |
南堂 朴昌和가 정리한 자료 |
01-김-139 |
개소문전 외 |
1책(58장) |
25×17.5 |
朴昌和 편 |
南堂 朴昌和가 정리한 자료 |
01-김-140 |
사진자료 |
7장 |
|
|
南堂 朴昌和와 관련한 사진 자료 |
01-김-141 |
本紀新編列傳 |
1책(75장) |
28×20 |
朴昌和 편 |
南堂 朴昌和가 정리한 자료로 東明聖王紀 琉履明王紀 大武神王紀 國祖大王紀 次大王紀 新大王紀 尙太后紀 등 수록 |
01-김-142 |
小獸林王紀 |
1책(72장) |
27.5×19 |
朴昌和 편 |
南堂 朴昌和가 정리한 자료로 小獸林王紀 國壤天王紀 國岡好太王紀 天岡太后紀 수록 |
01-김-143 |
小獸林大帝紀 |
1책(75장) |
21×16 |
朴昌和 편 |
南堂 朴昌和가 정리한 자료로 小獸林大帝紀 故國襄大帝紀 永樂大帝紀 長壽大帝紀 등을 원고지에 수록 |
01-김-144 |
安藏大帝紀 |
1책×54장) |
26.5×14.7 |
朴昌和 편 |
南堂 朴昌和가 정리한 자료로 安藏大帝紀 安原大帝紀 수록 |
01-김-145 |
芻牟鏡 上 |
1책(61장) |
23×15.5 |
朴昌和 편 |
南堂 朴昌和가 정리한 자료로 慕漱帝紀 芻牟鏡 권1에서 3까지 수록 |
01-김-146 |
芻牟鏡 中 |
1책(60장) |
23×15.5 |
朴昌和 편 |
南堂 朴昌和가 정리한 자료로 芻牟鏡 권4에서 5까지 수록 |
01-김-147 |
芻牟鏡 下 |
1책(57장) |
23×15.5 |
朴昌和 편 |
南堂 朴昌和가 정리한 자료로 芻牟鏡 권6과 后妃列傳 수록 |
01-김-148 |
芻牟鏡衍義 |
1책(33장) |
24.5×15 |
朴昌和 편 |
南堂 朴昌和가 정리한 자료로 芻牟鏡과 관련된 내용 수록 |
01-김-149 |
留記芻牟鏡 |
1책(32장) |
21×16 |
朴昌和 편 |
南堂 朴昌和가 정리한 자료로 芻牟鏡 成長記로 200자 원고지에 수록 |
01-김-150 |
芻牟成長紀 還鄕紀 |
1책(16장) |
21×16.5 |
朴昌和 편 |
南堂 朴昌和가 정리한 자료로 제목과 洪州城義兵 兩班家德行 流水曲 등 수록 |
01-김-151 |
國岡上王紀 |
1책(95장) |
27.5×20 |
朴昌和 편 |
南堂 朴昌和가 정리한 자료로 故國原王紀 수록 |
01-김-152 |
乙弗大王傳 |
1책(101장) |
24×16.2 |
朴昌和 편 |
南堂 朴昌和가 정리한 자료로 乙弗大王傳 수록 |
01-김-153 |
高句麗史略 |
1책(68장) |
31×20 |
朴昌和 편 |
南堂 朴昌和가 정리한 자료로 始祖東明聖王紀 閔中帝紀 慕本帝紀 神明先帝紀 太祖皇帝紀에서 14세 烽上帝紀까지 수록 |
01-김-154 |
娑婆尼師今記 |
1책(35장) |
24×16.2 |
朴昌和 편 |
南堂 朴昌和가 정리한 자료로 婆娑尼師今記 수록 |
01-김-155 |
奈勿實聖訥祗慈悲炤智智證紀 |
1책(136장) |
26.6×19.4 |
朴昌和 편 |
南堂 朴昌和가 정리한 자료로 奈勿大聖神帝紀 實聖紀 訥祗天王紀 慈悲聖王紀 炤智明王紀 智證大帝紀 수록 |
01-김-156 |
祗摩紀逸聖紀 |
1책(47장) |
26.6×19.4 |
朴昌和 편 |
南堂 朴昌和가 정리한 자료로 祗摩紀 逸聖紀 수록 |
01-김-157 |
阿達羅紀 |
1책(117장) |
27.3×19.7 |
朴昌和 편 |
南堂 朴昌和가 정리한 자료로 阿達羅紀 伐休紀 助賁紀 味鄒尼師今紀 儒禮尼今紀 奈勿大聖帝紀 수록 |
01-김-158 |
魏華眞經抄 |
1책(110장) |
26×18.7 |
朴昌和 편 |
南堂 朴昌和가 정리한 자료로 魏華眞經을 초록하여 수록 |
01-김-159 |
金天大帝法興眞王紀 |
1책(48장) |
27×19.5 |
朴昌和 편 |
南堂 朴昌和가 정리한 자료로 金天大帝法興眞王紀 수록 |
01-김-160 |
宣毅公及裏平公年譜 |
1책(70장) |
24×16.2 |
朴昌和 편 |
南堂 朴昌和가 정리한 자료로 濡化之普 富貴花 수록 |
01-김-161 |
百濟王紀 |
1책(76장) |
27.5×19.5 |
朴昌和 편 |
南堂 朴昌和가 정리한 자료로 始祖溫祚王 沸流王 多婁王 己婁王 盖婁王 義慈王 百濟書紀 수록 |
01-김-162 |
大文守記 |
1책(56장) |
23×16 |
朴昌和 편 |
南堂 朴昌和가 정리한 자료로 淵公三喬 塔公記 江陵先生金仁存公撰虎亭先生墓志銘 등 수록 |
01-김-163 |
高句麗史 |
1책(23장) |
21.2×16.5 |
朴昌和 편 |
南堂 朴昌和가 정리한 자료로 第十六世故國原帝紀를 원고지에 수록 |
01-김-164 |
高句麗史略 |
1책(17장) |
21.2×16.5 |
朴昌和 편 |
南堂 朴昌和가 정리한 자료로 孺留紀 등을 원고지에 수록 |
01-김-165 |
麗史列傳 |
1책(29장) |
24×20 |
朴昌和 편 |
南堂 朴昌和가 정리한 자료로 黃瑩 金義珍 盧旦 殷鼎 金尙賓 등 23인의 列傳 수록 |
01-김-166 |
顯宗辛酉正月 |
1책(38장) |
24.5×16.5 |
朴昌和 편 |
南堂 朴昌和가 정리한 자료로 童城紀 安山系 등 수록 |
01-김-167 |
高麗史列傳 |
1책(35장) |
16.5×14.5 |
朴昌和 편 |
南堂 朴昌和가 정리한 자료로 徐弼 姜邯贊 崔沖 尹瓘 雙冀 金富軾 등 33인의 列傳을 수록 |
01-김-168 |
桃紅記 |
1책(89장) |
23.5×15.3 |
|
南堂 朴昌和가 정리한 자료로 桃紅紀를 수록 |
01-김-169 |
疆域槪論 |
1책(46장) |
20.5×15.5 |
朴昌和 |
南堂 朴昌和가 정리한 자료로 疆域學의 擡頭 疆域의 義意 등을 원고지에 수록 |
01-김-170 |
疆域問答 |
1책(30장) |
20.5×15.5 |
朴昌和 |
南堂 朴昌和가 정리한 자료로 李衛異域 王平異域 綏芬卒本 등 강역에 대한 내용을 문답식으로 원고지에 수록 |
01-김-171 |
遼東論 |
1책(38장) |
20.5×15.5 |
朴昌和 |
南堂 朴昌和가 정리한 자료로 明淸과 李朝가 遼東으로 인한 因果應報 등 요동지역에 대한 내용을 원고에 수록 |
01-김-172 |
疆域관련 원고 |
1책(55장) |
21×16 |
朴昌和 |
南堂 朴昌和가 정리한 자료로 衛滿朝鮮 지역 등을 수록하였으나 완전한 원고가 아님 |
이들 자료는 대체로 南堂의 年譜와 詩文, 疆域論, 고구려․백제․신라왕기를 비롯하여 ?花郞世紀? 관련 저작, 도가의 비기류, 소설류 등으로 분류된다.
남당의 年譜類는 앞서 살폈듯이 그의 직계존속 系譜圖와 개략적인 이력을 적은 「直系尊譜」와 1889년 그의 탄생으로부터 1901년까지 그의 주변에 일어난 사건을 연보형식으로 적은 「南堂先生年譜」가 있고, 「南堂先生五言詩」에는 壬寅(1902)~丙辰(1916)에 이르는 시기의 주변이나 주요한 일들을 五言詩 형식으로 지은 시문이다.
특히 疆域 관련 연구는 그의 학문에 있어서 가장 중심이 되는 테마였다. 그는 강역학의 유래를 한백겸과 안정복에서 비롯한다 하고, 安鼎福의 논조는 穏謹하여 遼東卒本說과 王平異域說이 유명하지만 그 밖의 것은 특서할만한 것이 별로 없고, 丁若鏞은 논조가 심히 날카로우나 才氣가 있고 근거없는 抑說을 많이 하여서 안정복보다도 着實하지 못한 점이 있다고 평한 바 있다.
그는 강역 문제를 야기하는 원인을 장소에 대한 오류로부터 비롯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이 오류를 수정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을 강역학의 임무라고 하였다. 이에 그는 李衛異域說과 平壤辨을 비롯하여 鴨淥辨, 熊津辨, 開城辨 等의 諸辨을 논술하였으나, 그가 술회하였듯이 당시 사람들에게 그다지 호응을 얻지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강역론은 고대 우리나라 지명을 모두 한반도 밖에서 구하였다는 점을 특징으로 한다. 이러한 관점은 「李衛異域說」에서 비롯한다. 「李衛異域說」이란 ‘이씨조선과 위만조선의 강역이 다르다는 것’으로서,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을 우리 역사의 정통에서 제외시키고 우리의 강역을 만주일원에서 구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명태조 朱元璋이가 衛滿朝鮮의 國號이던 朝鮮이라 하는 國號를 三韓의 地인 高麗國의 지역에 移置한 것이다.…… 遼東은 본시 中國領土가 안히였다. 箕子를 遼東에 封할 리가 없다.…… 遼東 箕子國說은 李世民의 僞造이다.…… 我國土를 中國領土로 證明하기 위한 箕子朝鮮 衛滿朝鮮의 불합리성이 自然暴露되엿다. 檀君을 國祖라 하는 우리 民族의 史는 史料이 비록 업다하더라도 扶餘로 高句麗로 新羅渤海로 高麗로 李朝에 至하여야 하는 것이지 箕子 衛滿을 正統中에 느어 朝鮮二字를 萬年 固持하자는 意見은 李氏自身이 自己가 獲得한 朝鮮에 대하여 너무나 工作을 널피한것갓다.(박창화, ?강역개론?, ?남당박창화유고?, pp.9~48, 소장자 고문서 번호 01-김-169; 국사편찬위원회 ?남당박창화유고? CD-ROM 169번 폴더; 박창화, ?우리나라 강역고?, 민속원, 2004, p.451․442․413․412)
위의 글에서 알 수 있듯이 남당은 요동 일원을 우리의 영토로 인식하였고, 李世民이 우리의 강역을 중국의 강역으로 편입하기 위해 箕子朝鮮과 衛滿朝鮮을 위조한 것으로 여겼다. 특히 단군을 국조로 하여 扶餘-高句麗-新羅․渤海-高麗-李朝로 이어지는 정통론을 내세웠다. 이러한 관점은 17~18세기 무렵의 역사 서술 방식을 승계한 것으로서, 이민족과의 관계에서 우리 역사를 자주적․자부적으로 서술하고, 중국계 정복왕조인 衛滿과 四郡二府가 조선 전체를 지배한 것처럼 서술한 종래의 인식체계를 비판한 것과 흐름을 같이 한다.
곧 그는 우리 민족의 자존적인 입장에서 삼국의 국왕을 ‘대왕’과 ‘帝’로 표기하고, 野人을 ‘倭와 화친하여 서로 시장을 열고 혼인하는 이들이나 그 나라를 野라고 칭’하거나 ‘오랑캐 또는 되놈(黑龍江 畔에 居하는 通古斯族)’ 등으로 사용하였다. 또한 그가 제시한 ‘단군-扶餘-高句麗-新羅․渤海-高麗-李朝’의 계통은 ‘단군-부여-고구려-발해-고려-조선’으로 인식하는 부여정통론의 체계와 흡사하다.
한편 그는 ?疆域槪論?에서 “來日에 유력한 재료를 얻으면 금일의 論이 변경할지도 모른다. 그쯤 自信이 不充分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곧 자신의 글이 후일에 새로운 자료로써 변경할 여지가 있다고 함으로써 그의 논거가 불충분함을 밝혔다. 그는 ?강역문답?에서 漢山을 白頭山으로, 南漢城을 通溝로, 대동강을 通溝 이하의 유역 곧 지금의 압록강으로 비정하였다. 그런데 그가 전거로서 제시한 서책이 中國地名辭書를 비롯하여 ?元一統志?, ?東輿圖? 등 근세의 것으로서, 엄정한 사료비판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였음을 볼 수 있다.
또한 그는 고지명을 비정하는 데 있어서 일제시기 당시에 유행하던 국어학적 방법론을 사용하였다. 예컨대 所夫里를 지금의 豊德으로 비정하는 데 있어서, 그 전거나 음운학적 방법을 매우 자의적으로 사용하였음을 볼 수 있다. 豊德은 곧 德水 큰물인데, 큰물이 코물로 변하여 당나라 사람들이 泗沘라고 번역하였으니, 본시 꽃부리[英]라는 말이 망국 후에 泗沘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또한 ?요동론?에서는 鐵嶺과 鐵原은 春州․原州와 뜻이 같고 牛首에서 바뀐 말로서 풀이하고, 이들을 卒本(소벌)부여의 지역으로 백제의 東北鄙 漢城의 소재인 지금의 중국 동북지역 龍井 지방에 비정하였다.
이처럼 불충분한 전거로써 그는 ‘明代의 遼東은 馬韓의 舊地이요 百濟의 地이며 新羅의 貝江鎭…’이라 하였다. 말하자면 삼국 공히 요동 지역에 있었는데, 이세민과 주원장이 고구려의 전역을 빼앗아 요동이라 하고, 대동강을 압록강이라 고쳐, 송화강에 있던 국경을 대동강으로 옮김과 아울러 고구려, 백제, 신라가 압록강 이남에서 일어난 것처럼 고쳤다는 것이다. 이러한 데는 조선이 중국으로부터 책봉을 받아 역성혁명을 인정받기 위해 협력한 소치라는 것이다.
이러한 논지는 조선의 개국 이후 대대적인 역사 위조가 있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그는 우리의 모든 역사를 다시 써야 한다는 관점을 견지하였던 바, 사실 그의 신라왕기 등 유고는 바로 그러한 관점의 소산이라 할 것이다. 그의 언급대로 그의 강역론이 당시 사람들에게 그다지 호응을 얻지 못하였던 것은, 기왕의 모든 사서를 부정하고 불충분한 논거로써 역사를 서술한 때문으로 생각된다.
이는 그의 많은 유고에 대한 신빙성을 의심케 한다. 사실 그를 알리게 한 ?花郞世紀?의 경우 잔본은 초고의 성격을 지니는 것이고, 이를 다시 정리하여 제2본과 1본이 만들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필자가 2007년 발견하여 정리한 잔본과 제1, 본의 관계에 대해서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화랑세기? 잔본은 내용상 ?화랑세기? 1, 2본의 속편에 해당한다. 둘째, ?화랑세기? 잔본은 용어의 사용례나 김흠돌의 난, 宝龍과 관련한 일련의 계보 및 혼인관계, 그리고 仙徒의 유래와 燕門에 관한 서술 등으로 미루어 보아 제1, 2본 ?花郞世紀?(1989․1995년 발견본)의 저본이었다. 셋째, ?화랑세기? 잔본은 박창화가 1930년에 저술한 것으로서, 그 내용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사를 편년 형식으로 나열하고, 관련 자료의 상관관계를 역으로 추적하여 논리적인 고리를 만들었으며, 필요시에 가공 인물과 스토리를 만들어가는 방식으로 만들어진 역사 소설이었다.
따라서 ?화랑세기? 1, 2본은 ?화랑세기? 잔본과 일부 내용상의 차이가 있지만, 박창화가 ?화랑세기? 잔본의 大綱을 그대로 유지한 채 수정하고, 일관된 체제로 정리하였다. 특히 잔본의 내용을 수정하게 된 데는 吳起公을 김대문의 아버지로 설정하면서부터였고, 수정된 내용은 ?花郞世紀?(1995년 발견본)에 채용되어 僞書로서의 면모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또한 그 동안의 진위논쟁과는 달리, 남당 박창화 자신이 그의 「李衛異域說」에서 ?화랑세기?를 본 적이 없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어, 그의 창작물로서 주목되었다.
그의 많은 고구려, 백제, 신라왕의 本紀類 또한 ?화랑세기?와 마찬가지로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비롯하여 근세의 중국측 자료나 전설 등을 정리하면서 자신의 관점과 추리에 따라 서술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의 「李衛異域說」 중에서 우리나라 歷史書의 傳承에 대한 朴昌和 自身의 이야기에서 그러한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나라 歷史는 三國史記 高麗史 李朝實錄이다. 三國史記 이전은 若干의 傳說뿐이다. 新羅의 蘿井 仙都聖母 脫解의 鵲 閼智의 鷄갓흔것과 高句麗의 檀君 柳花 金蛙等의 傳說과 百濟의 召西奴갓흔 것이다. 이 傳記을 記한 古記가 今에는 하나도 남어잇지 안히함으로 三國遺事갓히 虛荒한記錄이라도 唯一한史料로 參酌하는 것이나 이것도 또한 改竄된 痕迹이 잇다.(박창화, ?이위이역설?, ?남당박창화유고?, p.45, 01-김-169; 국사편찬위원회 ?남당박창화유고? CD 169번 폴더; 박창화, ?우리나라 강역고?, 2004, p.415)
위의 ?李衛異域說?은 南堂의 ?疆域槪論?에 포함된 내용이다. 이는 純漢文으로 草하였던 것을 광복 이후 어느 때인가 抄出한 것으로서 200자 갱지 원고에 쓰여 있는데, 동일한 용지에 국한문으로 抄한 「遼東論」에는 “오늘날 다시 三八線을 作하니 이와갓히 하다가 우리民族은 將且 어대로 가려하느냐”라는 문구가 있다.
이로 볼 때에 「李衛異域說」의 국한문 초본은 광복 이후에 쓰인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가 초한 고구려, 백제, 신라왕기에 대한 저작은 秘傳의 史書를 보고 정리하였다기 보다는 근세의 불확실한 중국측 자료와 민간 전설, 그리고 그의 역사적 사실의 추론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리가 그의 유고를 사서로서 인정할 수 없는 이유이다.
그는 당시 유럽으로부터 소개된 모계사회제 이론을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등에서 찾아 내고, 이를 ?화랑세기? 등에 재구성하거나 고구려, 백제, 신라왕기 등에 대입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화랑세기? 잔편에 보이는 통정관계와 그 주된 요지는 ?花郞世紀? 제1, 2본뿐만 아니라 南堂의 다른 저작물에서도 동일하게 확인된다.
곧 통정관계를 인간의 본능으로 묘사하고, 色供을 통하여 신분이나 지위를 상승한다든가 재부를 축적하는 수단으로 이용한 반면에 귀척자들은 많은 처첩을 거느리고 色貪하는 것이 다반사였으며, 근친간의 통정 또한 일반화되었다는 점 등은, ?花郞世紀? 제2본과 殘本, 그리고 南堂이 저작한 「乙弗大王傳」, 「鞠步信行記」 등의 주된 소재였다. 이러한 소재는 ?삼국사기? 신라 왕실에서의 숙질간의 혼인 및 ?삼국유사? 권 2, 紀異 2, 文虎王法敏條에서 武珍州의 州吏 安吉이 그의 처를 잠행중인 문무왕의 庶弟 車得公과 동숙케 한 사례로부터 취한 것이라 하겠다.
남당은 향가에도 많은 관심을 보였거니와, ?화람세기? 제2본과 잔본에 그의 ‘향가’를 전한다. ?화랑세기? 제2본에 보이는 ‘波浪歌’는 그 동안 ?花郞世紀? 진위논쟁의 가장 큰 이슈 가운데 하나였다. ‘波浪歌’가 신라시대의 鄕歌라면 ?花郞世紀?는 金大問의 ?花郞世記?를 필사한 것이 되고,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라면 ?花郞世紀? 또한 위작이 되기 때문이었다.
이종욱은 국문학자 정연찬의 해독과 견해에 따라 제2본에 보이는 ‘鄕歌’ ‘波浪歌’는 위작일 수 없으며, 향가만큼 확실하게 ?花郞世紀?가 위작이 아니라는 증거는 없다고 하였다.
노태돈은 가장 늦은 시기의 향가는 고려 예종 때의 悼二將歌이고, 근대에 들어 향가가 처음 해독된 것은 1929년 小倉進平에 의해서인데, 薛原郞과 世宗條, 그리고 金庾信의 世系를 볼 때 ?삼국유사?를 참조한 것이 확실하므로, 美室이 지어 불렀다는 향가는 1930년대 이후에 지어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박창화는 한성사범 출신으로서, 국어학자 權悳奎와 일찍부터 교분이 있었고, 소설가 金八峯에 따르면 그는 1910년대에 이미 국문 장편소설과 시를 쓰는 등 뛰어난 문학적 자질을 갖고 있었으므로 향가를 창작할 능력이 인정되는 바, 1930년대 이후 어느 시기엔가 이를 창작하였을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상반된 관점은 국문학자간에도 동일한 상황이다. 김학성은 ‘향가 연구의 초창기에 그 해독조차 한번도 해본 적이 없는 아마추어 역사가 혹은 유가적 한학자에 불과한 박창화가 향찰로 향가를 창작하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노릇’이라 하면서, 이는 ‘현존 최고의 향가이고 최초의 詞腦歌 형식의 작품’이라 보았다.
이에 대해 김완진은 처음 노태돈이 ‘波浪歌’를 보였을 때의 정황을 술회하며, ‘執音乎手’은 헌화가의 표현 그대로이며, 나머지 부분들은 향찰의 허울을 쓰고 있으나 향찰의 격조에 맞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花郞世紀? 제2본에 실린 鄕歌는 그 진위를 판별하는 절대적인 기준 역할을 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런데 ?花郞世紀? 잔본에는 「碧海上白波歌」라는 향가 형식의 시를 한시와 함께 수록하고 있어, 그 진위를 판별하는 결정적 증거를 제시한다.
碧海上]白波見我搖手招
[草隱海多盻 白羊水波支 我乙見古沙 手羽乙 爲乃.
푸른바다에 하양물결ㅣ 나를보고사 손짓을 하내
深海有限木有梢
深隱海多刀 限兮 有居等 端無隱 木支 何處 有沙里]
깊은바다도 끝에 있거든 끝없은 나무ㅣ 어느곳 있사리
?花郞世紀? 잔본에 소개되어 있는 ‘碧海上白波歌’는 향가 표현의 특징으로 꼽히는 義字末音添記法이 일부 채용되었다고 하지만, 한자의 音과 訓, 이두의 口訣 정도만 이해하면 쉽게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바다’의 古訓은 ‘바’ ‘바돌’ ‘바’ ‘바’ 등으로서 ‘바다(海多)’와는 차이가 있으며, ‘深’은 ?鷄林類事?에서 ‘及欣’으로 새기고 있어 ‘깊은(深隱)’과는 차이가 있다. 또한 ‘波’를 ‘水波’로 표현하고 있으나, ‘水’의 고훈은 ‘’ ‘믈’ ‘몰’ 등이며, ‘波’ 그 자체가 ‘믓결’ ‘믌결’로서 굳이 ‘水波’로 표기할 필요가 없다. 또한 ‘푸르다’의 고훈은 ‘퍼러다’ ‘프르다’ 등으로서 ‘草隱(풀은, 푸른)’으로 표현하는 것과 차이가 있으며, ‘白’의 古訓은 ‘힌’으로서 ‘하양(白羊)’과는 다르다.
‘草隱海多盻’에서 ‘盻’은 ‘碧海上’으로 보아 처소격이 분명한데, 獻花歌에서 보듯이 향가 일반으로 ‘盻’을 처소격으로 사용한 예가 없고 오히려 목적격 ‘을’ ‘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碧海上白波歌’가 義字末音添記法이나 한자의 音과 訓을 사용하여 향가를 흉내냈다고 하지만, 오히려 한시를 바탕으로 하여 근대 조선어의 음과 훈을 차용하여 만들어진 것이라 하겠다.
일찍이 필사본 ?花郞世紀? 제2본의 六世 世宗條에는 美室이 斯多含의 출정에 부쳐 불렀다는 노래인 이른바 ‘波浪歌’는 ‘解’하여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향가를 한문으로 풀이하였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이는 ?花郞世紀?가 金大問의 ?花郞世記?라면 매우 부자연스러운 것이 아닐 수 없다.
곧이어 나오는 ‘波浪歌’는 향가로 기술하면서, 바로 앞에 나오는 靑鳥歌는 한문으로 해독하여 기록하였다는 것은 서술의 일관성이 없을뿐더러, 김대문이 당대에 애송되었다는 청조가를 굳이 한자로 해독하여 기술하였다는 것 자체가 의문의 여지가 있는 것이다. 사실 ?삼국유사?에도 이러한 표현이 있으나, 鄕歌를 기록하고 한문으로 解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어, 이와는 차이가 있다.
또한 청조가는 漢詩에 ‘胡爲乎’ 부분만 이두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곧 ‘胡’는 ‘어찌’의 훈을 살리되, ‘爲乎’은 이두에서 일상으로 사용하는 ‘爲去乎(하거온)’의 준말로서 ‘하온’이다. 이처럼 이두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앞서 碧海上白波歌에서 ‘有居等’의 이두를 사용한 것과 닮아 있다.
이러한 두 시가의 특징은 ‘碧海上白波歌’에서와 같이 漢詩를 짓고 나서 이를 향가 형식으로 옮겼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波浪歌’가 훨씬 鄕歌에 유사한 점이 인정되므로, ‘碧海上白波歌’의 단계를 거쳐 ‘波浪歌’가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사실 ‘波浪歌’의 ‘早早歸良來良’에서 ‘良’을 제외한 ‘早早歸來’는 일반 漢詩에서 흔히 사용된 구절로서, ‘波浪歌’가 漢詩로부터 옮겨진 것임을 짐작케 한다. 이는 靑鳥歌를 ‘解曰云云’하였던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 박창화의 창작으로부터 비롯하였던 것이고, 박창화 본인으로서도 장문의 청조가를 향가로 옮기는 것은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花郞世紀? 제2본과 잔본에 보이는 鄕歌는 남당이 ?화랑세기?를 창작할 당시에 시작된 향가 연구에 주목하면서, 스스로 이를 해독하고자 하였던 사실의 반영이라 할 것이다. 그 자신이 이미 9세 때부터 古風의 시가를 익히고 시문에 능하였던 만큼, 향가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화랑세기?에 반영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Ⅳ. 머리말
박창화는 19세기 말에 태어나 구한 말과 일제시기의 격동기를 겪으면서 많은 유고를 남겼다. 그는 어려서부터 함께 한학을 수학한 동년배의 학생들을 뛰어넘는 우수한 학생이었다.
그의 발군의 비상함은 이미 7세에 한문의 문리를 터득하고, 9세의 나이로 古風을 지을 줄 알았으며, 그를 만나러 온 구한 말의 巨儒 田艮齋․金斯文과 당당하게 시문을 주고 받을 정도의 이른바 그 지역사회에서 신동으로 꼽히는 인재였다. 그의 우수성으로 인하여 그는 사범학교에 들어가 교사로서 생활하고, 다시 일본의 서릉부 도서료로서 근무하였던 것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동양 역사서나 고시문을 익혔던 만큼 역사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그가 어려서 허약함으로 인하여 무녀를 수양모로 모셨고, 그의 아버지와 행랑 김명손의 처로부터 배다른 형제를 가졌던 것, 그로 인하여 동학도의 야습을 받은 것, 일제 치하에서 교사로서 활동하고 나아가 서릉부의 도서료로서 근무했던 이력은, 일정하게 그의 유고에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강역론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바, 17~18세기 유학자들의 역사서술방식을 계승하여 부여정통론의 관점에서 단군-부여-고구려-신라․발해-고려-이조로 이어지는 정통론을 세우고자 하였고, 나아가 우리나라 고대의 강역을 모두 만주 일원에서 구하고자 하였다.
사실 그가 ?화랑세기?에서 화랑의 원류인 仙徒가 燕나라로부터 유전였다고 한 것도 이러한 관점에서 비롯한 것으로 여겨진다.
화랑을 도가적으로 서술한 것은 그의 유고에 보이는 도가서인 ?魏華眞經? 등과 관련될 것이다. 또한 화랑의 무가적인 속성이나 동성애적 표현, 문란한 통정관계 등은 조선 후기 화랑을 무속적인 것으로 본 사회 일반의 습속과 일본 관학자들의 관점을 닮아 있다.
특히 통정관계를 인간의 본능으로 묘사하고, 色供을 통하여 신분이나 지위를 상승한다든가 재부를 축적하는 수단으로 이용한 반면에 귀척자들은 많은 처첩을 거느리고 色貪하는 것이 다반사였으며, 근친간의 통정 또한 일반화되었다는 관점은, 당시 유럽 사회학 일반에서 유행한 모계사회제 이론을 접하고 이를 우리 역사에 적용하고자 하는 경향을 따른 것이 아니었겠는가 추정된다.
아울러 ?화랑세기?에 보이는 향가는, 그가 1930년을 전후하여 일기 시작한 향가연구에 대한 지적 관심의 반영이라 할 것이다.
다양한 그의 저작과 유고에도 불구하고 당시 학계의 주목을 받지 못했던 것은, 그가 전거로서 제시한 서책이 中國地名辭書를 비롯하여 ?元一統志?, ?東輿圖? 등 근세의 것으로서, 엄정한 사료비판을 간과하고 이들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였으며, 고지명의 비정에 있어서 언어학적 체계보다는 근거 없는 음운으로써 자의적으로 풀이한 데 있다고 할 것이다.
특히 그는 우리나라 고대의 강역이 한반도 안으로 위축된 것이 이세민과 주원장에 의해 비롯되었으며, 조선 초기 중국의 책봉을 원하던 이성계에 의해 조장된 것이라는 관점을 보였다. 이로써 그의 유고에 보이는 삼국의 각 王紀는 고대 삼국이 만주 일원에 있었다는 전제에서 다시 정리된 것이라 하겠다.
그는 새로운 내용을 서술하면서도 어떠한 전거나 논증을 제시하지 않음으로써 그의 유고에 대한 신빙성을 의심케 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그의 유고 또한 그가 위서로서 꾸민 ?화랑세기?와 유사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사실 ?화랑세기?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사를 편년 형식으로 나열하고, 관련 자료의 상관관계를 역으로 추적하여 논리적인 고리를 만드는 한편 필요시에 가공 인물과 스토리를 만들어간 일종 faction으로서 평가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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