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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와 남당유고의 정체

by 연송 김환수 2013. 12. 4.

환단고기와 남당유고의 정체

 

환단고기 (桓檀古記)

 1979년 발행 환단고기 숙대 영인본

 

 

광무 원년(1897년) 초판발행 191130부 / 재판발행 1979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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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당유고 (南堂遺稿)

남당유고(南堂遺稿) 고려사 열전

남당유고(南堂遺稿) 고구려 사략

 

 

이유립 (1907-86). 평북 삭주군 구곡면 출생. 1927년 삭주 고등보통학교 졸업, 33년 조선유교회(친일단체) 가입, 35년 일월시보(조선유교회 기관지) 주필, 37년 동아일보 삭주지국장, 63년 단단학회 교주 역임, 1986년 사망.

  

이유립

   

박창화 (1889-1962), 충북 청원군 강외면 출생. 1908 관립 한성사범학교 졸업, 배재고, 황성 기독청년회관 교사 역임, 23년 이후 도쿄거주, 33-42 일본 궁내청 도서관 조선전적담당 조사사무 촉탁직 근무. 43년 귀국 이후 1962년 사망시까지 고향인근에서 교사생활 및 한학교육.

 

박창화(朴昌和.1889 ~ 1962) 호는 남당(南堂)

 

위에 열거한 두 사람에 대해 오늘 처음 들어보는 사람도 있을것이고, 한두번쯤 들어본 기억이 있는 사람도 있을것이다.

 

두 사람 모두 한국 정통사학계를 매우 혼란스럽게 하고 곤혹스럽게 만든 두 개의 책과 직접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다.

 

이유립은 환단고기를 세상에 낸 사람으로 알려져 있고, 박창화는 일제시대때 일본 궁내청 도서부에서 근무하며 화랑세기를 비롯한 각종 고서들을 필사해 세상에 남긴 ‘남당유고’의 당사자로 알려져 있는 사람이다.

   

이중 환단고기는 이미 정통사학계에서 위서로 판명내린 서책이다. 이 부분에 대해선 두 번 더 왈가왈부하는 것이 시간낭비일 뿐이다.

 

환단고기는 1979년 광오이해사에서 100부를 처음 출간 세상에 소개된 책이며, 이후 80년대 들어 79년판 환단고기의 오류를 일부 수정 다시 세상에 냈다.

 

하지만, 환단고기는 60년후 세상에 공개하라는 계연수의 유언에 따라 세상에 처음 공개하는것이라 주장해왔지만, 계연수의 실존여부는 확인되지 않았고, 환단고기 원본은 6.25때 불에 타 없어져 이유립이 기억에 의거 다시 필사(?)를 했다고 밝힌바 있다.

 

따라서 백번 양보해 봐도 환단고기는 이유립이 직접 지은 책 그 이상의 의미를 갖지 않고 있는 책이다.

 

무엇보다 환단고기를 필사했다는 이유립씨의 전력이 단단학회,커발한개천각교의 교주를 역임하는등, 주로 민족주의 계열 종교단체에서 활동해왔다는 점은 환단고기가 결국 민족종교 계열 인사들의 시각에서 써낸 국수주의적인 서책에 불과하다는 점만을 더 확실히 입증시켜주고 있을 뿐이다.

 

게다가 1920년 사망한 계연수가 60년후 세상에 내라고 유언을 했다는 사실 또한, 이미 79년에 환단고기 100부가 발간된바 있고, 또 그전에 이유립이 환단고기의 내용중 일부를 월간 ‘자유’지에 공개한 사실이 있어, 계연수의 유언(?)조차도 신뢰하기가 매우 어렵다.

 

일제시대에 나라를 잃은 설움과 울분에서 국수주의 관점에서 만들어진 이런저런 위서가 많다는 것은 사학계에선 이미 알려질 대로 알려진 사실이다. 헌데,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이러한 국수주의적 역사관(?)들이 일본의 내선일체론이나 대동아공영권 논리를 그대로 베껴쓰고 있다.

 

가령 고구려,백제,신라가 모두 대륙에 있었다고 주장한다면, 그럼 대체 그 시절 한반도에 살았던 사람들은 무엇이 되는건가. 그런식으로라면 정말 한반도내에 일본의 고대국가가 존재했다는 일본의 ‘임나일본부’ 설이 사실이라도 된다는 이야긴가.

 

또 한가지 중요한 사실은 국수주의 사학자,종교인들의 주장대로 세계 모든민족의 뿌리가 한반도에 있고 세계를 구원할 메시아가 한반도에서 나올것이니 모두 우리민족의 조상을 섬겨야 한다는 주장대로라면, 그게 바로 내선일체론에 입각 조선과 일본의 뿌리가 하나이니 조선이 일본에 병합되는것은 당연한 이치며 또한 모든 아시아도 일본을 중심으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대동아공영권’ 논리와 무엇이 다른지 한번 진지하게 물어보고 싶다.

 

한편, 박창화의 남당유고는 이유립의 환단고기와 이야기가 많이 다르다. 남당유고란 박창화씨가 일제시대 일본 궁내청 도서관 조선전적담당으로 일하면서(1933-42)필사한 책들로, 현재 박창화의 호를 따 이들을 ‘남당유고’라 총칭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와 생각해보면 ‘화랑세기 필사본’은 그 남당유고중 세상에 공개된 1호격이 되는 셈이다.

 

애초에 화랑세기 필사본이 세상에 알려진것은 박창화씨가 한학을 가르쳤던 제자 김종진씨의 미망인 김경자씨가 남편의 유품으로 남겨진 이 필사본에 대해 1989년 이태길 부산 광복회 지부장을 찾아가 감정을 의뢰했고, 이태길씨가 막상 이 필사본을 접해보니 감당할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 바로 그러한 과정을 통해 ‘화랑세기 필사본’이 세상에 처음 공개된 것이다.

 

그리고 이 화랑세기 필사본의 진위논란이 학계에서 계속되는 가운데 화랑세기를 소장하고 있다는 두 번째 인물이 나타났으며, 그것이 박창화의 손자 박인규씨다. 그리고 박인규씨의 집엔 화랑세기 외에도 박창화가 필사했다는 수십권의 책자가 소장되어 있었으며 바로 그것이 현재 ‘남당유고’라 불려지고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남당유고의 내용 또한 막상 펼쳐보면 의심가는 것들이 많다. 을불대왕전이나 어을우동전처럼 명백한 소설형식의 책인것도 10여권이나 되며, ‘고구려사초’니 ‘고구려사략’이니 하는 책들도 의외로 오류가 많은 것으로 알려져있다.

 

그러나 남당유고는 세상에 알려지게 된 과정이나 또는 성격으로 볼때 환단고기와 분명히 다른 점 세가지가 있다. 우선 이유립의 환단고기는 의도적으로 창작하여 세상에 내놓으려한 과정이 명명백백히 드러났다. 하지만 남당유고는 박창화가 의도적으로 세상에 내놓을 생각을 하지 않았던것 같다.

 

‘화랑세기 필사본’ 조차도 박창화가 죽은지(1962년) 30여년이나 지나 그의 제자 김종진씨의 미망인이 감정을 의뢰하는 과정에서 세상에 알려진것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둘째로 남당유고엔 억지로 위작하려한 흔적이 없다. 만약 남당이 이유립처럼 위서를 만들 생각이었다면, 그 일본 궁내성 서릉부에서 필사했다는 책들을 중심으로, 그 무슨 ‘환단고기’ 마냥 한권의 서책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야만 했을것이다. 그러나 남당은 전혀 그런 시도를 하지 않았다. 위서라면 역설적으로 감쪽같이 완벽한 역사책으로 둔갑시키기 위해 분명히 그런 작업을 해야한다.

 

세 번째, 너무나 상이한 이유립과 박창화의 삶의 과정이 그 근거다. 환단고기는 분명 민족종교 계열의 관점에서 국수주의적으로 우리의 역사를 왜곡한 위서다. - 설사 그 왜곡논리가 아이러니하게도 대동아 공영권과 비슷한 논리가 되어버렸다 할지라도 - 이유립 스스로 단단학회, 커발한 개천각교등을 창시 교주가 되기도 했고 안호상등 대종교 인사들과 역사연구 관련 단체를 만든 전력이 있는것만 봐도 그렇다.

 

그러나 박창화는 이유립처럼 위서를 만들어야할 뚜렷한 ‘목적의식’이 보이지 않는다.

그의 일생을 살펴보면 일제시대 약 10년 일본 궁내청 서릉부에서 일한것을 제외하곤 대체로 교편을 잡으며 평이한 일생을 살았다. 그리고 해방직후엔 사학계나 정부관계자와 접촉을 시도하며 일본이 가져간 우리나라 고서가 많으니 자신을 지원하면 그것을 되찾아 오겠노란 주장을 한 것 뿐이다.

 

만약 남당유고가 박창화가 어떤 목적의식을 갖고 의도적으로 만든 위서라면, 그것을 그냥 세상에 내놓으면 되지 구태여 정부나 학계에선 귀띰으로도 듣지 않는 그런 주장을 계속할 필요가 없는것 아닌가. 참고로 ‘고구려, 그 많은 수레는 다 어디로 갔을까’의 저자 김용만 교수는 박창화가 생전에 남당유고를 세상에 공개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아마도 박창화 자신 조차 자신이 필사한 저본(底本)을 크게 신뢰하지 않았던게 아닐까 ? ”하고 추정했다.

 

하지만 위서조작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남당유고를 100퍼센트 신뢰하기도 힘들다. 무엇보다 을불대왕전이나 어을우동전같은 10여권의 소설형식의 책들은 대관절 박창화가 이와같은 방대한 필사작업을 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를 의심하게 만드는 가장 큰 근거다.

 

정말 박창화가 다른 한문소설 같은걸 쓸 생각으로 이런 쓸데없는(?) 일을 벌인것일까. 그러나 박창화의 삶은 역사교사,한학자등으로 활동한 전력만이 나타날뿐, 소설가로 활동하려한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박창화가 소설을 쓰기 위해 만든 텍스트란 주장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

 

또 한가지 심각하게 짚고 넘어가지 않을수 없는것이 일제시대 박창화의 정체성이다. 그의 유고집이 정말 ‘일본 궁내성 서릉부’에서 일할 때 필사한 책인지를 직접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정말 일본황실 도서부에 조선에서 훔쳐간 고대사 관련 서적들이 있는지 여부를 알아내는 것 외엔 다른 방법이 없다.

 

다행히 근래들어 조선,중앙등 메이저 언론의 취재로 실제 ‘일본 궁내성 서릉부’에 조선,고려시대 서책들이 상당수 소장되어 있음을 확인할수 있었고, 얼마전엔 일본총리가 직접 일제강점에 대해 사과하면서 일본이 가져가 궁내청 서릉부에서 소장하고 있는 서책중 ‘조선왕실의궤’등을 반환하겠노란 약속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일본 궁내청 서릉부에 조선,고려시대 고서들이 소장되어 있음은 확인되었지만, 아직 고대사 관련 서책이 숨겨져 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이 부분의 진상을 알아내려거든 앞으로 보다 정교하고 치밀한 조사와 접근방식이 필요하다.

 

허나, 그렇기에 더더욱 의심이 가는것이 일제시대 남당 박창화의 정체성이다. 애초에 박창화씨 유족들은 그가 일본 궁내청 서릉부에서 일하기 전까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했었다 주장했으나, 이 주장은 근거가 없고 그는 1923년 이후 도쿄에서 거주했으며 그전까진 주로 국내에서 교편을 잡았다.

 

헌데, 과연 일본 궁내청 도서부에서 조선전적 담당 조사사무 촉탁직(1933-42년)으로 근무할 수 있는 정도의 사람이라면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 하는 문제다. - 최악의 경우 정말 골수 친일파였을 가능성도 배제할수 없다.

 

박창화는 해방후 친분이 있는 인사(최기철 청주 사범학교 교장)를 통해 정부인사들에게 접촉을 시도 일본이 일제강점기 빼앗아간 고서들이 일본 궁내청에 많이 있으니, 자신을 지원하면 그것을 되찾아 오겠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박창화가 접촉한 인사들은 대개 그의 전력을 문제삼아 거의 신뢰하지 않았고, 그후 박창화는 청주 사범학교에서 교편을 잡거나 고향에서 한학을 가르치다가 1962년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그의 화랑세기 필사본은 제자 김종진의 집에, 나머지 남당유고는 손자 박인규씨 집에 스승 또는 할아버지의 유품으로 조용히 잠자고 있다가 89년 김종진씨의 미망인 김경자씨가 화랑세기 필사본 감정을 의뢰하며 본격적으로 남당유고의 실체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설사 남당유고가 위작이다 하더라도 변하지 않는 중요한 사실은 한가지 있다. 그것은 일제강점기 또는 그 이전 을사보호조약때부터 일제가 불법으로 가져간 우리나라의 고서,문화재가 수두룩하다는 점이고 특히 그중 많은 고서들이 현재 일본 궁내청에 보관되어 있다는 점이다.

 

사실 남당유고의 실체를 확인하는것도 결국 일본 궁내청이 소장하고 있는 고대사 관련 고서를 확인하는것이 가장 쉬운 방법 아닌가. 국내에서 우리끼리 남당유고의 한자 하나하나를 따져가며 진위논란을 벌이는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는 수백,수천년이 지나도 결론이 나지 않는다.

 

따라서 지금으로선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것은 일본이 가져간 특히 현재 일본황실이 보관하고 있는 고서의 실체를 확인하고 돌려받는 일이다.

 

사실 얼마전까지만 해도 프랑스가 가져간 규장각 도서 반환요구 과정등을 예로들며, 일본의 경우는 상황이 더 절망적이란 생각이 지배적이었으나, 지금은 일본언론도 자기네가 보관하고 있는 한국 문화재,고서가 많음을 인정,보도하고 있고 일본총리 또한 궁내청이 소장하고 있는 조선왕실의궤등을 반환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으니 상황이 생각보다 많이 긍정적으로 돌아가고 있다.

 

그러나 고대사 관련 서적들은 일본도 공개하기를 매우 꺼릴것이니 조선,고려시대 서책과는 경우와 상황이 많이 다르다. 무엇보다 한국과 일본 고대사는 서로 뗄레야 뗄수없는 불가분의 관계 아닌가. 일본황실이 우리의 고대사 사서를 가져가 보관하고 있는것 또한 그네들의 뿌리가 한국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다.

 

위서 환단고기의 불에 한번 단단히 데일대로 데었던 정통사학계인지라 남당유고에 대한 접근에는 신중에 신중을 거듭하고 있다.

 

물론, 이런점은 탓할일이 아니다. 환단고기는 민족주의 계열 종교단체 인사들이 그네들의 국수주의적 역사관에 맞춰 만든 위서가 분명하다.

 

무엇보다 아이러니한 일은 정작 그런 주장을 하는 민족주의 계열 종교인, 역사가일수록 일본의 대동아공영권 논리를 그대로 따라가고 있다는 점이다. 마치 흉보면서 닮는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해주듯.

 

하지만 남당유고는 아직 제2의 환단고기로 결론내리는 것은 무리다. 남당유고는 그 쓰여진 과정과 세상에 나오게 된 사유도 환단고기와 전혀 다르며, 무엇보다 박창화에겐 위서를 만들어야할 목적의식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남당유고의 진위여부와 관계없이 이미 밝혀진 일본 궁내청에 일제시대 그네들이 가져간 우리의 고서들이 상당히 많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지금 중요한 일은 일본이 가져가 그네들 왕실에 보관하고 있는 고서들을 확인하고 그것을 되찾아오는데 총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남당유고의 진위여부를 갖고 소모적인 논쟁을 벌일만큼 시절이 그렇게 한가하지가 않다.

 

만약, 일제가 가져가 왕실에 보관하고 있는 고서들의 실체에 접근하게 된다면, 남당유고의 의문과 진상도 자연스럽게 풀릴수 있을것이다.

 

따라서 지금은 소모적인 논쟁은 잠시 접고 일본이 가져가 자신들의 왕실에 보관하고 있는 우리의 고서가 많다는 ‘중요한 사실’에 주목, 그것들을 되찾아 오는데 다함께 힘과 노력 그리고 지혜를 모으도록 하자.                * 출처 : http://www.leesangd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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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립 단단학회 교주 관련 기사, 사진

 

이유립씨가 쓴 고대사에 대한 기사가 많이 실려 있는 1970년대의 월간 자유

 

 

선우휘 주필이 국사 문제를 놓고 이유립씨와 대담한 기사를 실은 19781022일자 조선일보

 

 

강화도 마니산 등산로 초입에 있는 단단학회의 커발한 개천각.

이유립 선생이 지은 건물이다.

 

1984년 이유립씨가 수상한 배달문화상 상패를 들고 촬영에 응한 이유립씨 부인 신매녀 할머니. 강화도 마니산의 단단학회 건물에 거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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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립의 부인 신매녀씨 증언

 

계연수가 살았다는 선천은 신의주 남쪽 서해안에 있는 평북의 군으로 삭주와는 80km 떨어져 있다. 이기와 계연수는 이유립의 부친인 이관즙과 교류한 것으로 보인다. 계연수가 사망했을 때(1920) 이유립은 만 13세의 소년이었다. 이유립이 계연수에게 사사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으나 이유립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생전의 이유립은 계연수의 제자임을 자처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유립은 35세라는 늦은 나이에 21세인 삭주 출신의 신매녀(申梅女·86)씨와 결혼했다. 신매녀 할머니는 강화도 마니산에 단단학회(檀檀學會)’란 이름을 붙인 허름한 건물에서 살고 있는데, 유감스럽게도 그는 이유립씨에 대해 자세한 구술을 하지 못했다. 신매녀 할머니는 그는 평생 책밖에 모르고 산 양반이었다. 월남할 때 나는 쌀을 졌는데, 그이는 책을 지고 나왔다는 말로 설명을 마쳤다.

 

이유립은 네 살 때부터 한학을 공부했지만 신매녀 할머니는 겨우 한글을 깨우친 정도였다고 한다. 또 열네 살의 나이 차 때문에 남편을 어려워해 삭주에 살던 시절 남편을 찾아오는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다. 물론 신매녀 할머니는 환단고기를 편찬해 이유립에게 전했다는 계연수가 누구인지도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남편과의 고단했던 살림살이에 대해서는 비교적 정확히 기억해냈다.

 

이유립·신매녀 부부는 남과 북에서 모두 15녀를 낳았다. 이북에 있을 때는 이유립 선생이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으로 먹고살았고, 이남에 내려온 다음에는 신 할머니가 온갖 궂은일을 한 덕에 입에 풀칠을 했다고 한다. 두 사람은 이유립씨가 41, 신매녀씨가 27세이던 1948년쯤 월남하는데, 신씨는 그 이유를 “(토지개혁에 의해) 토지를 빼앗겼기 때문이라고 했다. 부부는 황해도 해안을 통해 38선을 넘었는데, 이유립이 3월에 혼자서 38선을 넘고 신매녀씨는 아이들과 함께 5월에 38선을 넘었다고 한다.

 

그런데 3월에 38선을 넘은 남편이 다시 이북으로 넘어갔다가 붙잡혀 북한에서 1년여 동안 감옥살이를 했다. 그 사이 신씨는 아이들과 38선을 넘어가 남한의 수용소에 수용됐다가, 수용소에서 정해준 청주에서 살림을 차리게 됐다. 그때만 해도 남북 사이엔 편지 왕래가 가능했으므로 그는 삭주에 있는 친정에 청주에 거처를 마련했다는 편지를 보냈다.

 

고성 이씨와 환단고기 사이의 관계

 

 

계연수의 스승이던 이기(왼쪽)는 생몰연대가 분명하고 사진까지 전하는 실존인물이다. 오른쪽은 이기의 문인으로 태백일사등을 모아 환단고기를 편찬한 계연수의 초상화. 커발한 개천각에 있는 것인데 이 초상화는 만화가 오선일씨가 그렸다.

 

이유립, 환단고기 가져오려 다시 북으로?

 

그 사이 석방된 이유립은 처가를 통해 가족이 청주에 있다는 것을 알고 다시 38선을 넘어와 계룡산 부근에 거처를 마련했다. 신씨도 친정을 통해 남편이 계룡산 밑에 있다는 것을 알고 찾아 나섰는데, 신매녀씨가 남편을 찾아 나선 날 이유립도 가족을 찾아 청주로 출발했다. 계룡산과 청주를 오가려면 조치원역에서 내려 차를 바꿔 타야 한다. 두 사람은 우연히 조치원역에서 만났다고 말했다.

 

월남할 당시 이유립은 자기 주관이 뚜렷해지는 불혹(不惑)을 넘긴 나이였다. 그렇다면 그는 환단고기를 가져오기 위해 두 차례나 38선을 넘은 것이 아닐까. 1949년 그가 오형기씨에게 자신이 갖고 있던 환단고기를 여러 부 필사시킨 것을 보면 이러한 추정은 사실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오형기씨에게 필사를 시키기 전 이유립씨가 갖고 있던 환단고기는 계연수가 편찬한 것인지, 아니면 그것을 필사한 것인지 지금으로서는 확인할 수 없다.

 

신매녀 할머니는 월남을 전후한 시기 이유립씨가 계연수가 편찬한 환단고기를 갖고 있었는지에 대해 알지 못했다. 다만 그는 남편은 책을 무척 소중하게 여겨, 공부하던 방은 쓸지도 못하게 했다며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

 

계연수의 스승이던 이기(왼쪽)는 생몰연대가 분명하고 사진까지 전하는 실존인물이다. 오른쪽은 이기의 문인으로 태백일사등을 모아 환단고기를 편찬한 계연수의 초상화. 커발한 개천각에 있는 것인데 이 초상화는 만화가 오선일씨가 그렸다.

“6·25전쟁이 났을 때 금산의 산속에 있는 집 헛간을 빌려 피난 살림을 했는데, 그만 불이 나 살던 집이 타버렸다. 그때 남편이 보던 책들도 타버렸는데 그 일로 인해 남편은 석 달을 앓아누웠다. 그러고는 다시 책을 갖고 다녔는데, 아마 다른 곳에 숨겨놓은 것을 가져왔거나 아니면 그의 머릿 속에 기억해놓은 것을 꺼내 새로 썼을 것으로 생각했다. 남편은 집 앞에 무궁화를 심고 무궁화꽃을 책갈피에 끼워두는 버릇도 있었다.”

 

6·25전쟁이 끝난 후 이들은 대전에 자리를 잡았다. 이승만 정부 시절 이유립은 이씨 왕조를 보존하자는 주장을 펼치다가 왕정주의자로 몰려 구금됐었다고 한다. 그리고 5·16군사정변이 일어나던 해에도 예비검속에 걸려 또 한 차례 구금됐다고 한다.

 

이유립은 피난지인 금산에서 화재를 당한 것말고도 대전을 거쳐 성남에 살던 시절 수해를 당해 책을 잃어버린 적이 있다. 그런데도 그는 환단고기를 갖고 있었으니 그의 환단고기는 머릿속에 암기한 것이거나 아니면 어딘가에 필사해놓았던 환단고기일 가능성이 크다.

 

대전에서 생활할 때 이유립은 책만 읽었으므로 생활은 부인이 책임져야 했다. 신 할머니는 구걸에서부터 행상까지 온갖 궂은일을 다 하며 남편과 아이들을 먹여살렸다고 한다. 생활이 궁핍했던 만큼 이들은 자녀들을 충분히 교육시키지 못했다.

 

대전에서 살 때 이유립 선생은 국사광복을 외치는 전단을 만들어 돌렸다. 그로 인해 조금씩 주목을 받다가 1970년대 간도 문제에 큰 관심이 있던 박창암씨와 연결돼 월간 자유에 역사 문제에 대한 글을 대량 기고했다. 그리고 의정부로 올라가 지내다 막 고려대에 입학한 전형배 사장 등 젊은 사람들을 제자로 받아들여 역사를 가르쳤다.

 

월남한 이유립씨에게서 오래전부터 우리 역사와 한문을 배운 사람 가운데 오형기(吳炯基·10여 년 전 작고)씨가 있다. 오형기씨는 유학을 공부한 사람으로 이유립씨보다는 10여 세 연하였다고 한다. 그는 친형이 좌익활동을 하다 사살된 이력이 있어 은거해 살면서 이유립씨에게서 역사와 한학을 배웠다고 한다. 전형배 사장은 이유립 선생은 월남한 직후인 1949년 오형기씨에게 그가 갖고 온 환단고기를 필사하게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환단고기 필사를 마친 오형기씨는 환단고기 말미에 환단고기발(桓檀古記跋)’이라는 제목의 발문을 써놓았다. 이유립씨와 제자들은 서기(西紀)는 물론이고 단기(檀紀)도 쓰지 않았다. 연도를 적어야 할 땐 환웅이 신시(神市)를 연 때를 기준으로 한 신시개천연호를 사용했다. 1949년은 60갑자로는 을축년이고 신시개천으로는 5846년이다. 오형기씨가 쓴 환단고기발에는 이렇게 해석되는 한문이 적혀 있다.

 

을축년(1949) 봄 나는 강화도 마리산(마니산)에 들어가정산(이유립의 호) 이유립씨로부터 환단고기를 정서하라는 부탁을 받고신기개천 5846년 을축 5월 상한(上澣·상순이라는 뜻) 동복 오씨 오형기 발(乙丑春余入江島之摩利山李靜山裕?氏囑余以桓檀古記正書之役神市開天五千八百四十六年乙丑五月上澣同福吳炯基跋)’

 

조병윤씨의 환단고기 인쇄 사건

 

1984년 이유립씨가 수상한 배달문화상 상패를 들고 촬영에 응한 이유립씨 부인 신매녀 할머니. 강화도 마니산의 단단학회 건물에 거주하고 있다.

 

이유립씨와 오형기씨가 모두 고인이 된 지금 이유립씨가 오형기씨로 하여금 필사본을 만들게 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오형기씨의 필사본이 있었기에 화재와 홍수로 환단고기를 잃은 이유립씨는 이를 다시 복원해낼 수 있었다. 전형배씨를 비롯해 이유립씨의 제자가 된 사람들은 오형기씨의 필사본을 복사하거나 영인해서 공부를 했다. 그러나 이유립씨는 오형기씨 필사본과 관련해 몇가지를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한다. 다음은 전형배씨의 기억이다.

 

이유립 선생은 오형기씨가 붙인 발문을 아주 못마땅하게 여겼다. 이유립 선생은 발문은 그 책을 쓴 사람이 붙이는 것이지, 필사를 한 사람이 붙이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을 여러 차례 했다. 또 이유립 선생은 오씨가 필사한 환단고기에는 오자가 있다며 환단고기를 가르쳐줄 때마다 틀린 글자를 지적하면서 수정해주었다.”

 

1970년대 말 이유립씨에게서 우리 역사와 한문을 배운 제자 가운데 선린상고 출신으로 영어와 한문을 아주 잘하던 조병윤(趙炳允·1956년생)씨가 있다. 신시개천 5876년인 서기 1979년 조병윤씨가 아주 큰 사건을 일으켰다. 이유립 선생의 허가를 받지 않고 박기엽(朴琪燁)씨가 이끄는 광오이해사(光吾理解社)를 통해 오형기씨가 필사한 환단고기를 영인 인쇄 출판하면서 판권란에 그 자신을 단단학회 대표로 적어놓은 것이다.

 

1979년 조병윤씨가 출판한 환단고기의 판권 부분. 조씨가 단단학회의 대표로 돼 있다.

 

이유립씨는 허락도 없이 영인 인쇄를 한 데다 단단학회 대표를 자칭한 조병윤씨에 대해 파문령을 내렸다고 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조병윤씨는 승려가 됐다고 한다. 이러한 사단을 겪었지만 조병윤씨가 출간한 환단고기는 외부로 전파됐다.

 

이 같은 사실은 정연종씨가 쓴 한글은 단군이 만들었다’(조이정 인터내셔날, 1996)는 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에는 환단고기는 1948(1949년을 잘못 적은 듯) 필사본 초판이 나오고 1979년 재판이 나왔다고 기록돼 있다.

 

조병윤씨가 환단고기를 출판한 후 이유립씨는 전형배씨에게 오형기씨의 발문을 제외한 환단고기 100부를 영인 인쇄하게 했다. 그러나 오형기 필사본이 안고 있는 오자는 일부만 수정한 채로 영인 인쇄했다는 것이 전씨의 증언이다. 그로 인해 세상에는 오형기씨 발문이 달린 환단고기와 오형기씨 발문이 삭제된 환단고기 두 종류가 등장하게 됐다. 전형배씨의 말이다.

 

한자 중에는 모양이 비슷한 것이 많다. 필사를 하다 보면 무자(戊子)년을 무오(戊午)년으로 적을 수 있다. 오형기씨의 환단고기에는 이러한 오자가 있는데 이유립 선생은 환단고기를 풀어줄 때 구두로 이러한 오자를 수정해주셨다.

 

지금 시중에 나와 있는 환단고기의 70~80%가 오형기씨 발문이 달려 있는 책을 원문으로 사용한 것이다. 이 환단고기는 이유립 선생이 세상에 내놓고자 한 것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오자도 수정하지 못한 것이다. 선생은 환단고기가 후세에 잘못 전해질까 봐 늘 노심초사하셨다. 오류는 연도인 숫자를 적는 과정에서 많이 발생하는데, 숫자 오류는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이라 위서 시비를 일으키는 주 원인이 될 수 있다. 환단고기의 진실을 밝히고자 한다면 이유립 선생이 오자를 고쳐주고 주석해준 것을 토대로 번역해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국내에서는 1982년 가지마 노보루가 환단고기를 번역 출판하기 전인 1979년과 1980년 환단고기의 영인 인쇄가 있었다. 그렇다면 가지마는 두 책 가운데 어느 것을 원본으로 삼았을까.

 

가지마의 환단고기에는 그가 구한 환단고기의 원문 사본(寫本)이 실려 있는데, 이 사본은 오형기씨 필사본과 모양이 똑같고 오형기씨의 발문이 붙어 있었다. 이로써 가지마는 한국에서 오형기씨의 발문이 붙은 조병윤씨 발행 환단고기를 입수했다는 것이 확인됐다.

 

박창암씨가 가지마에게 원고 전달

 

 

태백일사의 저자인 이맥이 쓴 태백일사 발문 다음에 오형기씨가 1949년 이유립씨의 부탁을 받아 환단고기를 필사했다고 기록해놓은 발문(오른쪽 사진 중간의 桓檀古記跋이라고 된 데서부터 왼쪽 사진 끝까지). 각 글자 옆에 연필로 쓴 글자는 이유립씨가 오자라고 지적한 것을 전형배씨가 받아 적어놓은 것이다.

 

그러나 거기서 취재를 멈출 수는 없었다. 가지마의 환단고기에서는 원문이 실려 있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 원문을 일본어로 번역해놓은 것이 실려 있다는 것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오형기씨 본()을 구한 가지마는 자신의 한문 실력으로 환단고기를 번역한 것일까. 아니면 한국에서 누군가가 풀어준 것을 일본어로 번역한 것일까. 이 의문도 전형배씨가 해답을 주었다.

 

이유립 선생은 우리에게 환단고기를 우리말로 풀어주는 강의를 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직접 우리말로 번역과 주석을 해놓은 원고도 갖고 계셨다. 어찌된 이유인지는 모르나 이유립 선생은 이 원고를 자유지 발행인인 박창암 장군(2003년 작고)에게 줬고, 박 장군이 이 원고를 가지마에게 줬다. 이유립 선생은 자신의 원고가 일본으로 간 것을 알고 나로 하여금 박 장군을 찾아가 원고를 돌려달라고 요구하게 했다.

 

내가 박 장군을 찾아가 원고 주인이 돌려받고자 한다. 출판되지 못하는 원고라면 빨리 주인에게 주어야 한다고 하니 박 장군은 화가 나서 내 정강이를 걷어차려고 발길질까지 했다. 박 장군은 이유립 선생이 주해한 환단고기를 일본어로 내준다는 조건을 걸고 가지마에게 원고를 넘긴 것으로 안다. 그 난리를 치고 나서 원고가 돌아왔는데, 돌아온 것은 이 선생이 직접 쓴 원본이 아니라 복사본이었다.

 

선생님의 원고를 가져간 가지마는 대종교를 배신한 강모씨의 설명을 덧붙여 환단고기를 일본 신도에 유리한 쪽으로 해석해버렸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유립 선생은 박창암 장군과 결정적으로 멀어지게 되었다. 박 장군도 결국 가지마에게 당한 셈이다.”

 

환단고기에는 誤字가 있다

 

강화도 마니산 등산로 초입에 있는 단단학회의 커발한 개천각. 이유립 선생이 지은 건물이다.

 

한문은 어떻게 끊어 읽느냐에 따라 그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 지금 시중에는 한때 이유립씨에게서 환단고기를 배운 사람이 이씨에게 배운 것을 토대로 주해한 것과 스스로의 실력으로 주해한 것 등 여러 종류의 주해본이 나와 있다. 전형배씨는 이렇게 말한다.

 

환단고기에는 분명 오자가 있을 수 있다. 환단고기로 묶인 네 종류의 책은 비밀리에 전수된 것이라 필사로 전해져왔다. 필사를 하다 보면 글자를 잘못 적거나 한두 줄을 통째로 빠뜨리고 옮겨 적을 수 있다. 이러한 책 네 권을 모아 다시 계연수 선생이 편집하고 이기 선생이 감수한 최초의 환단고기 30부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 책은 남한(한국)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월남할 당시 이유립 선생이 갖고 있던 환단고기도 남아 있지 않고, 오직 이유립 선생이 1949년 오형기 선생에게 필사시킨 것만 전하고 있다. 이유립 선생은 환단고기 강의를 하며 오형기 선생 필사본의 오자를 바로잡아주셨지만, 환단고기에는 이유립 선생도 알지 못한 오자가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오류는 계연수 선생이 필사한 환단고기나 이맥 선생 등이 저술한 태백일사 원본이 발견돼야 수정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으로선 이러한 책이 북한에 남아 있지 않을까 기대해보는 수밖에 없다.”

 

가지마에게 원고를 넘겨준 사건을 계기로 이유립씨는 박창암씨와 멀어지고 새로운 사람과 만난다. 그가 새로 만난 사람 중에는 군인 출신과 5공화국의 실세들이 있었다. 이유립이 자유지를 통해 잃어버린 고대사를 밝히던 1980, 서점가에서는 김정빈씨가 권태훈씨 일대기를 토대로 쓴 소설 ()’이 등장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또 박창암을 모델로 삼아 김태영씨가 쓴 소설 다물(고토를 회복하자는 고구려 말)’도 큰 인기를 모았다.

 

5공 실세, 군부와 연결된 이유립

 

이런 분위기에서 우리 것을 되찾으려는 민족주의적 경향이 일어나면서 5공 실세와 군인들이 이유립을 찾게 됐다. 이유립을 만난 5공 실세는 민족주의 운동을 일으키려 했다. 19835공화국은 국풍(國風) 83’이라는 행사를 벌였는데, 이는 이유립씨의 영향을 받아 5공 실세들이 마련한 민족주의 이벤트였다. 군인들은 이씨의 역사 강의를 주로 들었다.

 

1980년까지 이유립은 의정부 자일동에서 어렵게 살고 있었는데 그의 형편을 안 사람들은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그를 서울 상계동으로 모셨다. 의정부 시절의 이유립씨에 대해 전형배씨는 한겨울 끼니가 없어 사모님이 라면을 끓여놓고 일을 나가셨는데, 집이 워낙 추워서 점심때가 되면 삶은 라면이 꽁꽁 얼어 있었다. 이 선생은 이 얼음 라면을 깨서 점심과 저녁으로 드시며 공부를 하고 후학을 가르치셨다. 어렵게 사는 것에 단련이 되어서인지 외풍이 센 방에서도 끄떡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1984년 개천절 때 이유립은 배달문화상을 받고 제자들 덕분에 김포를 거쳐 서울 화곡동에 살게 되었다. 화곡동 시절 이유립은 군인들과 가깝게 지내며 그들에게 우리 역사를 자주 강의했는데 그로 인해 군에서는 고토를 회복하자는 다물회가 만들어졌다.

 

이때부터 전형배씨를 비롯한 제자들은 이씨의 문집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군인들의 도움으로 전형배씨가 김낙천(金洛天) 고려가 사장을 만나 부탁을 하자, 김 사장은 국가적으로 중요한 일이니 득실을 따지지 말자며 즉석에서 이유립 문집을 내는 데 동의했다. 그리하여 환단고기는 물론이고 자유지 등 여러 곳에 쓴 이유립의 글을 모아 5권짜리 대배달민족사출간 준비에 들어갔다. 그런 차에 강의를 하던 이유립 선생이 뇌출혈로 쓰러지며 타계했다(1986418). 그의 타계는 독립유공자 이유립옹 별세라는 제목으로 도하 언론에 보도됐다.

 

이석영씨 도움으로 강화도에 단단학회 건물 마련

 

생전의 이유립 선생과 교류하던 사람들 가운데 몇몇은 이유립 선생은 계연수 선생으로부터 경신년에 환단고기를 세상에 내라는 명령을 받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는 기록을 남겨놓았다. 이를 주장하는 대표적인 인물이 개천민족회를 이끄는 송호수 박사다. 경신년은 서기로 1980년이다.

 

일각에서는 조병윤씨도 이 말을 들었기에 1979년 환단고기를 인쇄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전형배씨는 계연수 선생이 경신년에 환단고기를 세상에 내라고 했다는 말을 외부인에게서는 들은 적이 있어도, 이유립 선생으로부터는 그러한 말을 단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고 강조했다.

 

생전에 이유립은 5·16 군사정변을 예언한 명리학자이자 사주첩경저자로 유명한 같은 고성 이씨의 이석영(李錫暎·1920~1983)씨와도 깊은 유대관계를 맺었다. 이유립은 참성단이 있는 강화도 마니산을 아주 중요하게 여겼는데 그는 이 산을 마리산으로 불렀다. 그는 이석영씨의 도움으로 마리산 입구에 건물을 짓고 단단학회간판을 내걸었다.

 

가운데 환웅, 좌우에 치우와 단군을 모신 커발한 개천각. 제단 맨 오른쪽에 금나라 시조인 아골타를, 맨 왼쪽엔 세종대왕을 그 오른쪽엔 광개토태왕을 모셨다.

이기와 이유립의 스승인 계연수는 단학회를 이끌었다. 계연수의 스승인 이기는 단군교 창립에 가담했다가 떨어져 나왔는데, 그후 대종교로 나가지 못한 세력이 유지한 단군교는 일제에 의해 폐쇄됐다는 것은 앞에서 밝힌 바 있다. 제에 의해 폐교 위기에 몰린 단군교를 단학회에 다시 합친다는 뜻으로 광복 후 이유립이 만든 것이 바로 단단학회(檀檀學會). 마리산에 허름하긴 하지만 단단학회 건물을 만든 이유립 선생은 열정을 갖고 커발한 개천각(開天閣)’을 지었다.

 

커발한은 커다랗고 밝고 환하다는 것을 축약한 우리말로 개천각을 묘사한 말이다. 환단고기는 환인을 인류를 만든 하느님으로, 환웅을 우리 민족의 계조로, 단군은 우리 민족을 토대로 국가를 만든 시조로 그렸다. 이 때문에 이유립은 우리 민족은 환웅부터 모셔야 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철학에 따라 이유립은 개천각 중앙에 환웅을 놓고 그 왼쪽에 치우, 오른쪽에 단군을 놓았다.

 

 

가운데 환웅, 좌우에 치우와 단군을 모신 커발한 개천각. 제단 맨 오른쪽에 금나라 시조인 아골타를, 맨 왼쪽엔 세종대왕을 그 오른쪽엔 광개토태왕을 모셨다.

 

금나라 시조 모신 커발한 개천각

 

커발한 개천각에 모신 인물 가운데 눈길을 끄는 것은 금나라 시조인 아골타다. 중국 정사(正史) 모음인 25() 가운데 하나인 금사(金史)’ 등은 아골타를 고려 사람 또는 신라 사람이라고 밝혀놓고 있다. 금나라는 송나라와 함께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송나라를 압박하다 몽골초원에서 일어난 원()나라에 패망했다.

 

이러한 금나라의 후예인 누르하치가 조선 중기 때 만주에서 후금을 세웠고 뒤를 이은 아들(태종)은 국호를 으로 바꾸고 중국과 조선을 지배해 들어갔다. 최근 재야사학계에서는 금과 후금-청을 우리 민족의 역사에 편입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강하게 일고 있는데 이유립은 일찌감치 금 태조를 커발한 개천각에 모심으로써 금과 후금-청을 우리 역사에 포함시킨은 것이다. 커발한 개천각에는 아골타가 대금제국 태조인 대성무원(大聖武元) 황제라는 이름으로 모셔져 있다.

 

커발한 개천각에는 붓으로 그린 계연수의 초상화도 있다. 계연수 초상화가 나오게 된 연유를 전씨는 계연수 선생을 비롯해 전해오는 초상화나 사진이 없는 분의 얼굴은 대전에서 오일룡이라는 필명으로 축구 만화를 많이 그린 만화가 오선일(吳宣日·58)씨가 그렸다. 오선일씨는 이유립 선생에게서 환단고기를 공부한 적이 있어 이 선생의 기억을 토대로 계연수 선생의 초상화를 그렸다라고 말했다.

 

오선일씨는 고등학생 때 나는 친구인 양종현씨와 함께 이유립 선생에게서 환단고기를 공부했다. 그때 내가 받은 호가 단우(檀宇)’인데 단석이라는 호를 받은 양종현씨와 함께 계연수 선생 등의 초상화를 그렸다라고 했다.

 

환단고기와 관련된 인물들은 고구려 유적이 많은 중국 집안 근처 한중 국경선 부근에 살았다. 선천에는 계연수가, 삭주엔 이유립과 단군세기를 계연수에게 준 이형식이, 태천엔 삼성기단군세기’ ‘북부여기를 계연수에게 제공한 백관묵이 살았다.

 

그러나 지금 커발한 개천각과 단단학회는 무속인들의 기도처가 됐다. 마니산은 기가 센 곳으로 알려져 무속인들이 기도처로 삼고 싶어하나, 국민관광지로 지정돼 있어 기도처를 지을 수 없다. 이러한 무속인들의 사정과 심각한 생활고에 직면한 86세의 신매녀 할머니의 사정이 맞아떨어지면서 단단학회와 커발한 개천각은 무속인들이 거처하며 기도를 올리는 공간이 된 것이다.

 

생전의 이유립 선생은 단군이 무속인들의 기도 대상이 되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고 하는데 불행히도 현실은 그가 바라지 않던 쪽으로 흘러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