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짜리 초대형 기와의 미스터리
토지박물관이 2007.11.16일 남한산성에서 발굴하여 발표한 통일신라시대 기와(왼쪽)와 조선시대 기와의 무게 비교. [토지박물관 제공]
저울에 올려 놓으니 19㎏을 오르락내리락 한다. 1천년 이상을 땅 속에 묻혔다가 막 꺼냈을 때는 무게가
20㎏을 넘었다고 한다.
최대 수분 함량이 1㎏ 안팎이나 되는 통일신라시대 초대형 암키와가 무더기로 출토된 남한산성 발굴
현장 사무실에 조사를 맡은 토지박물관 측은 저울 2개를 마련해 놓았다. 같은 지점에서 출토가 되었으나
제작 시기가 완전히 다른 기와 두 종류의 무게를 비교하기 위함이다.
비교대상은 통일신라시대 기와와 조선시대 행궁지 기와. 조선시대 기와라면 대체로 병자호란에 직면한
조선왕조가 임시수도로 지은 이른바 남한산성 행궁을 만들 때 사용한 것이다. 바짝 말린 평기와(암키와)
를 나란히 놓았더니 결과는 18.94㎏ 대 3.98㎏. 통일신라시대 평기와는 20㎏짜리 외에도 15㎏짜리도 많았
다. 작은 것이라 해도 그 무게는 종래 한국 고건축사의 통념을 훨씬 넘어선다. 평기와와 세트를 이루는
수키와 또한 중량이 만만치 않아 20㎏짜리와 짝을 이루었을 길이 65㎝짜리는 무게가 14㎏에 이르렀다.
기와 1장이 20㎏이건 15㎏이건 무슨 대수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토록 중량이 많이 나가는 기와
는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보고 사례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초대형 기와는 2년전 같은 남한산성
행궁지 발굴조사에서 몇 점이 확인됐는데, 유홍준 문화재청장과 함께 당시 발굴현장을 둘러본 소재구
국립고궁박물관장은 간단히 이렇게 평가한 바 있다. "세계 챔피언이네요."
토지박물관은 16일 남한산성에서 국내 최대 규모의 통일신라시대 초대형 수 백점을 발굴했다고 밝혔다. 토지박물관 연구원이 남한산성 발굴현장에서 통일신라시대 초대형 기와를 살펴보고 있다. [토지박물관 제공]
이런 기와를 실제 건물에 썼을까? 더욱 큰 미스터리는 발굴조사 결과 명백히 "그렇다"로 밝혀졌기 때문
이다. 이에 자연스럽게 의문은 "저런 기와를 무더기로 지붕에 올려놓았을 때 건물이 그것을 버텨낼 재간
이 있었겠는가"로 모아진다. 조유전 토지박물관장은 "사실 그 점이 나로서는 가장 궁금하다"고 말했다.
물론 이런 기와가 사용된 건물지는 규모가 장대하다. 길이 53m에 폭 17.5m에 이르기 때문이다. 삼국시대
건물지 중에서 길이 기준으로 이보다 더 긴 사례가 경주에서 두어 군데 보고된 적이 있기는 하지만, 폭은
훨씬 좁다는 점을 감안할 때 규모로보아 이번 남한산성 건물지가 현재까지는 최대임은 분명하다.
한데 막상 발굴조사 결과 기단을 드러낸 건물지는 거대한 크기나 초대형 기와지붕이라는 구조물에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토대는 허약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현장조사원 이형호 씨가 전했다.
토지박물관이 남한산성에서 발굴한 통일신라시대 대형기와(왼쪽)와 조선시대 행궁촐토 기와. 통일신라시대 기와는 국내 최대규모다.[토지박물관 제공]
뿐만 아니라 저런 기와들을 어디에서 어떻게 구웠는지도 의문으로 남아있다. 이런 의문 표시에 이씨는
"안 그래도 다음주(20일) 지도위원회에서 선생님들이 가마터 찾아내라고 주문하실까봐 마음이 조마조마
하다"면서 "나름대로 주변 일대를 뒤져봤으나 이렇다 할 만한 가마터는 없었다"고 말했다.
(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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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통일신라 건물은 軍 창고
무게 20㎏에 이르는 초대형 기와를 얹은 남한산성 내부 통일신라시대 대형건물은 용도가 군수품을 보관하기 위한 창고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지적됐다.
1점당 무게가 무려 20㎏에 가까운 통일신라시대 초대형 암키와 수백장이 남한산성에서 발굴된 같은 시대 초대형 건물지에서 무더기로 출토됐다.
크기와 무게 모두 "세계 최대"로 평가되는 이 암키와들은 건물 지붕을 치장하는 데 실제로 사용된 것으로 밝혀졌다. (서울=연합뉴스)
20일 토지박물관이 주최한 남한산성 8차 발굴 현장설명회에 참석한 고건축학 전공 김동현 전 국립문화재 연구소장과 성곽 전공 차용걸 충북대 교수, 고고학 전공 최병현 숭실대 교수, 윤근일 기전문화재연구원장 등 지도위원 대부분은 이 건물이 군창고라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
김동현 전 소장은 "이번에 발굴된 대형건물지는 벽체 두께가 2m나 되기 때문에 최대 20㎏에 이르는 암키와나 15㎏에 달하는 수키와를 올려 지붕을 쌓는다 해도, 그 하중을 견딜 수 있다"면서 "이런 건물은 용도를 창고로 볼 수밖에 없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윤근일 원장은 "벽체를 두텁게 하고 대형기와를 올림으로써 일단 유사시 적군이 쏜 불화살 공격에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으며, 나아가 벽체나 지붕을 통해 침입하려는 적을 지연시키거나 막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지도위원회는 한ㆍ중ㆍ일 관계 전문가를 초청한 국제학술대회와 특별전을 개최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한편 경기문화재단이 10년 계획으로 추진 중인 남한산성 행궁지 복원사업은 내년 완공을 목표로 했으나, 발굴조사 과정에서 뜻하지 않은 통일신라시대 유적과 유물이 출현함에 따라 공정에 다소간 차질을 빚게 됐다. (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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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초대형 기와의 비밀】
▣방송 :2009. 3. 21 (토) 21:40~22:30 (KBS 1TV)
▣진행 : 한상권 아나운서
▣연출 : 김정균 PD
남한산성에서 1300년 전의 초대형 기와가 무더기로 발굴되었다. 국내 어디서도 보고된 적이 없는 초대형 기와로 한 장의 길이가 무려 63cm, 그 무게만 20kg에 달한다. 통일신라인들은 무슨 이유로 이처럼 크고 무거운 초대형 기와를 만든 것일까?
그리고 이런 초대형 기와를 올린 건물은 대체 어떤 건물일까?
▲남한산성에서 발굴된 초대형 기와 무더기
발굴된 초대형 기와는 수퍼 기와?
▲원형으로 발굴된 초대형 기와 ▲길이와 무게가 조선시대 기와의 두 배
초대형 기와가 발견된 곳은 병자호란 당시 인조임금이 피신했던 남한산성의 행궁 터 앞마당. 수습된 기와는 토지박물관으로 옮겨졌다.
깨지지 않은 완형으로 발굴돼 보존처리를 마친 초대형 기와만 350여점에 달한다. 보통 40cm 이상의 기와는 특대형으로 분류하는데, 대부분이 50cm를 훌쩍 넘는다.
길이도 두께도 조선시대 기와의 두 배. 크고 두꺼운 만큼 무게도 국내 최고였다. 1300년 전 사람들은 과연 무엇 때문에 이처럼 크고 무거운 초대형 기와를 만든 것일까? 초대형 기와의 특징을 분석하기 위해 기와를 복원하여 압력과 인장 실험을 해보았다.
강도는 552kg. 70kg의 성인 8명이 올라가도 끄떡없다. 그 뿐 아니라 격파시범단의 격파에도 전혀 깨지지 않았으며 2000cc 중형차가 그 위를 지나가도 버텨냈다.
초대형 기와 건물의 존재,‘판축형 벽체’로 밝혀지다!
▲판축형 벽체 단면
과연 초대형 기와의 무게를 지탱할만한 건물이 존재했을까? 건물 내부의 초석을 따라 조성해 놓은 흙벽이 의문을 풀어주었다.
2m에 이르는 두꺼운 흙벽은 단순한 흙벽이 아니라 바닥에 자갈을 깔고 그 위에 해충을 방지하는 목탄을 올린 다음, 흙을 다져 층층이 쌓아올린 판축공법으로 만든 벽체이다.
판축형 벽체는 상부로부터 내려오는 하중을 안전하게 지반으로 전달 할 수 있는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초대형 기와지붕의 엄청난 무게를 지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출토된‘天主’명 기와, 종교시설일 가능성 추적!
▲'천주'가 새겨진 명문기와
발굴한 명문 기와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명문이 ‘말촌주’다. 그러나 우리는 그 동안 국내에서 발굴된 적이 없는 ‘천주’라는 글자가 새겨진 두 개의 명문기와에 주목하였다.
‘천주’라는 용어는 마테오리치가 ‘천주실의’ 집필한 이후부터 동양에서 카톨릭의 신을 가리키는 용어로 뿌리 내렸다.
기와의 '천주'라는 글자는 고대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용어일까?
남한산성 초대형 기와건물은 1300년 전의 종교 시설이었던 것일까?
초대형 기와건물은 문무왕 때 지은‘주장성(書長成)의 무기고’였다!
▲<삼국사기>에 주장성 축조 기사 ▲<마산정>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기와
성곽복원공사를 위한 발굴조사에서 입수시설의 지하 4m 위치에서 또 다른 석성의 흔적이 발견됐다. 석성의 흔적이 발견된 곳은 문무왕 12년(672)에 한산주에 주장성을 쌓았다는 <삼국사기>의 내용을 미루어 볼 때 주장성일 가능성이 높다.
또, 건물지에서 <마산정>이라는 명문기와가 발굴되었다.
초대형 기와 건물은 견고한 구조로 적이 지붕을 뚫지 못하도록 설계되었고, 신라의 중요한 지방 군사조직을 가리키는 '정'이 들어간 명문기와가 발굴된 것으로 보아 주장성의 핵심시설인 무기창고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주장성은 당군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한 한강방어 총사령부였다!
초대형 무기고를 만든 것은 이미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다음이다. 그런데 왜 최전방도 아닌 한강 유역에 거대한 성을 쌓았던 것일까?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후 당나라군은 신라를 향해 남진하기 시작한다. 신라는 당군의 남진을 막기 위한 한강 이남에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한다.
이 때 주장성은 나당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국력을 집결시켰던 한강방어 총사령부였다. 따라서 나당 전쟁 기간 동안 신라의 군수물자는 주장성으로 집결하였고, 초대형 기와건물에 보관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남한산성에서 발굴된 초대형 기와는 당나라 20만 대군과 맞서야 했던 신라의 국운을 건 역사가 담겨 있었다.
한반도를 통째로 삼키려는 당나라군을 몰아내기 위해 1300년 전 이 땅의 기술자들은 거대한 성을 쌓고 초대형 기와를 만들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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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남한산성 초대형 기와의 비밀 고정윤 2012-11-25 병자호란 당시 인조임금이 피난했던 남한산성 행궁 앞마당. 그곳에서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신라시대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국내 어디에서도 발굴된 적이 없는 신라시대 거대한 기와. 기와 한 장의 길이가 무려 63cm, 20kg 가까이 나가는 초대형 기와도 있다. 격파실험 결과, 보통 기와의 경우 10장이나 되는 기와가 산산조각이 났다. 그러나 초대형 기와는 단 한장도 깨지지 않았다. 500kg이상의 압력과 충격도 거뜬히 견뎌냈다. 신라인들은 왜 거대한 기와를 만들었을까? 남한산성과 초대형 기와는 대체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이제 비로소 남한산성의 숨어있던 진실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1300년전의 비밀을 간직해온 기와다. 길이가 무려 58cm나 되는 발굴 당시 역사학계를 대단히 놀라게했던 초대형 기와다. 조선시대 일반적으로 쓰였던 기와와 비교해보자. 상대적으로 대단히 작아보인다. 길이와 너비 그리고 두께에 있어서도 두배정도는 차이가 나 보인다. 크기도 크기지만 무게도 만만치 않아보인다. 이 정도면 20kg은 족히 나가보인다. 이 정도의 크기와 무게라면 우리가 알고있는 기와에 대한 상식을 벗어나는 것이다. 원래 기와는 너무 무겁게 되면 건물이 무너질 수 있기 때문에 건물이 지탱할 수 있는 무게를 고려해서 제작하게 되어있다. 그런데 무슨 이유로 크고 무거운 초대형 기와를 만들게 된 것일까? 지금부터 기와에 담긴 역사의 수수께끼를 추적해보자. 초대형 기와의 비밀을 풀기 위해서 먼저 기와공장을 찾았다. 모든 공정이 기계로 이루어지는 지금도 큰 기와를 만들때는 더 많은 공력이 들어간다. 공정과정에서 가장 신경을 쓰는 부분은 기와의 강도와 무게. 크고 두꺼운 기와일수록 강도가 강해 쉽게 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기계로 압축하더라도 무게때문에 기와의 크기는 40cm를 넘지 않는다. 완성된 기와의 두께는 2cm, 초대형 기와는 무려 6cm나 된다. 박헌영 사장 ㅣ 대동요업 : 옛날에 두껍게 만들어진 기와는 두가지로 봅니다. 첫째, 강도를 유지하기 위해서 만든거고 둘째, 여름의 열파, 겨울의 동파를 방지하기 위해서입니다. 남한산성 초대형 기와는 어느 정도 견고한 것일까? 강도실험을 위해서 초대형 기와를 복원해보기로 했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제와 무형문화재 보유자인 한형준옹. 실물을 보자 난감해했다. 한형준 ㅣ 중요무형문화재, 제 91호 제와장 보유자 : 이런 기와는 나도 처음 보는데... 우린 복원할 방법을 찾기 위해 3D스캔기로 특수촬영한 뒤, 전문가들과 초대형 기와를 분석했다. 분석결과, 일정한 크기로 빚은 흙을 잘라서 기와를 만드는 와통에 붙인뒤 두드려 만드는 와통제작방식으로 만든 것이 드러났다. 초대형 기와를 복원할 와통만해도 어마어마한 크기다. 전통기와의 와통에 3배가 넘는다. 우리가 분석한 방법으로 남한산성 초대형 기와를 복원할 수 있을까? 제와장은 점성이 강한 흙과 모래로 다진 흙을 층층이 쌓아올린뒤 한번 더 다지는 과정을 거쳤다. 이런식으로 흙을 숙성시켜야 기와형태를 만들 수 있는 탄성이 생긴다. 암키와 한장을 복원하는데 들어가는 흙도 엄청난 양이다. 제작과정에서 생기는 수축률을 고려한 기와 두장 분량의 흙이 50kg. 워낙 크고 무거워서 전문가들조차 와통에 붙이는 것이 만만치 않을 정도였다. 두 쪽으로 안되겠어. 흙(무게)을 못 이긴다 흙을 들면 (너무 커서)안을 수 없다 그런데 남한산성 행궁터 앞마당에서 발견된 초대형 기와에는 우리가 복원에 들어간 암키와보다 더 크고 무거운 것도 있었다. 심광주 학예실장 ㅣ 토지박물관 : 복원때문에 일부를 남겨놓았는데요. 박물관에서 보시는 것과 거의 같은 두께입니다. 깨지지 않고 완형으로 발굴된 초대형기와만 350여자. 심광주 학예실장 ㅣ 토지박물관 : 1.5m 깊이에서 이렇게 두꺼운 기와가 나오기 시작하는데 놀랐죠. 두꺼운 기와들이 건물에 사용된 기와인지 특수한 용도로 사용되었는지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 보존처리를 마친 초대형기와를 분류하자 조선시대 대형기와보다 무려 20cm 이상 큰 것으로 밝혀졌다. 가장 큰 수키와는 길이가 무려 63cm, 최대 두께만 6cm나 된다. 58cm 무게의 암키와 무게는 17.8kg, 조선시대 일반기와의 4배가 넘는 무게였다. 심광주 학예실장 ㅣ 토지박물관 : 여러 자료를 조사해봤는데 이것보다 큰 기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암키와를 복원할 흙을 숙성시켜서 와통에 붙이고 성형하는데 걸린 기간만 10일. 일정한 크기와 두께로 자른 숙성된 흙을 와통에 차례로 붙여나갔다. 암키와의 경우 보통 와통 하나에 넉장을 붙여서 기와형태를 빚는 성형작업에 들어간다. 와통을 돌려가면서 두드리면 기와의 밀도가 한층 높아진다. 초대형 와통에 붙인 흙의 무게는 약 100kg, 그늘에 10일간 건조시킨 뒤 같은 크기로 4등분하여 잘라서 떼어낸다. 떼어낸 기와는 10일간 더 건조시키는 과정을 거쳐 가마에 넣는다. 굽는 과정에서 불조절을 잘못하면 기와가 깨질 수도 있기 때문에 제와장은 가마곁을 떠나지 않았다. 가마를 헐고 복우너한 기와를 꺼낸 것은 3일 뒤, 다행히도 깨지거나 갈라진 것은 없다. 크기와 두께도 일정했다. 측정 결과, 암키와의 크기는 57cm, 크기와 두께 모두 원형에 가까웠다. 한형준 ㅣ 중요무형문화재, 제 91호 제와장 보유자 : 잘 됐습니다. 생각보다 두꺼운 것이라 (잘 될지) 못 믿었어요. 불을 때면서도 너무 두꺼워서 깨질까 걱정했는데 깨지지 않고 잘 되었습니다. 초대형 기와의 강도는 얼마나 될까? 실험에 참여한 시범단은 먼저 격파용 기와 10장에 도전했다. 단 한번에 열장의 기와를 모두 격파했다. 그럼 복원한 초대형 기와도 깰 수 있을까? 먼저 석장을 놓고 실험해봤다. 오히려 손만 튕겨나오고 기와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다시 한장만 놓고 실험한 결과도 마찬가지였다. 강동구 ㅣ 합기도 4단 : 일반 기와의 경우 격파시 통쾌하게 갈라지는 느낌이 있었지만 대형기와의 경우 야구배트로 전봇대를 치는 느낌이랄까. 손이 찌릿하고 다르다는 느낌이 강하게 듭니다. 이번에는 승용차로 충격을 가해보았다. 놀랍게도 1,300kg 중형차가 지나가도 초대형기와는 깨지지 않았다. 남한산성 초대형 기와는 어느 정도의 압력과 충격을 견딜 수 있을까? 강도실험기기로 점차 압력을 높여보기로 했다. 격파용 현대기와는 70kg 압력에서 산산조각이 났다. 그런데 초대형 기와는 500kg의 압력도 거뜬하게 견뎌냈다. 거기서 51kg의 압력을 더하자 균열이 생기더니 두동강으로 갈라졌다. 초대형 기와의 강도는 무려 552kg이다. 남한산성에서 발굴된 1,300년전의 기와는 552kg 이하의 충격에서는 절대 깨지지 않는 초강력 슈퍼기와였다. 보다 단단하고 견고한 기와를 만들기 위해서 크고 두꺼운 초대형 기와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격파용 기와보다 몇 배나 단단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암키와와 수키와는 남한산성에서 발굴된 것 가운데 가장 큰 기와다. 약 18kg짜리 암키와를 얹고 그 위에 또다시 수키와를 얹는다고 상상해보자. 몇 장만 되더라도 그 무게가 엄청나게 나갈 것이다. 그래서 발굴 당시부터 초대형기와를 둘러싼 논란이 많았다. 실제로 이런 초대형 기와를 올린 건물이 있었을까? 남한산성 행궁지 복원을 위한 발굴과정에서 초대형 기와와 함께 대형건물지가 동시에 발견됐다. 건물의 기둥을 올릴때 사용된 초석이다. 초석 사이의 거리를 측정하면 사라진 초석의 위치까지 찾아낼 수 있어서 건물의 규모를 밝힐 수 있다. 발굴된 초석으로 볼때 어마어마한 규모의 건물지였다. 남북의 거리가 53.5m, 측면이 18m나 되는 초대형 건물이 있었다는 것이다. 노현균 전문위원 ㅣ 경기문화재단 : 16칸 정도 되는데 국내 뿐만 아니라 동양 최대 크기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의문을 푸는 결정적 단서는 초석의 크기다. 초석의 가로 세로 크기로 지붕을 지탱한 건물 기둥의 크기를 계산할 수 있었다. 건물지 안팎을 두줄로 에워싼 초석은 80개, 그 위에 직경 30cm의 기둥을 올린 구조다. 그렇다면 직경 30cm 기둥 80개로 엄청난 무게의 기와를 견딜 수 있을까? 먼저 초대형 기와를 올릴 경우 지붕의 무게가 어느 정도 되는지 계산해보았다. 전석훈 ㅣ 서진구조 구조기술자 : 지붕의 무게는 제곱미터당 200kg 정도 됩니다. 기와를 지탱하기 위한 것과 중량까지 더하면 제곱미터당 400kg 정도 되죠. 초대형 기와를 얹을 경우 단위면적당 지붕의 무게는 400kg인데 필요한 기와는 약 2만장이다. 따라서 지붕의 무게가 자그마치 500톤이다. 직경 30cm의 기둥이 지탱하기 힘든 무게다. 전석훈 ㅣ 서진구조 구조기술자 : 30cm 기둥가지고는 상식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대들보 크기에 비례해서 기둥 크기도 50cm 내지는 60cm가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무더기로 발견된 초대형 기와는 지붕용 기와가 아니었던 것일까? 미스터리를 풀어줄 또다른 단서가 발굴현장에 남아있었다. 초대형 건물지를 에워싼 두꺼운 흙벽의 흔적이다. 흙벽의 두께는 무려 2m, 확인결과 2m 두께의 흙벽을 쌓은뒤 돌로 마감처리한 긴 벽체가 건물의 초석을 따라 놓여있었다. 심광주 학예실장 ㅣ 토지박물관 : 바닥을 보시면 목단층의 검은색이 깔려있고 노란색과 갈색의 흙이 교대로 쌓여진 모습이 보이는데 성질이 다른 흙을 여러번 다져서 층위를 이루도록 한겁니다. 흙벽은 숯위에 층층히 다져서 쌓아올린 판축공법으로 만든 벽이었다. 판축공법은 일정한 간격의 나무틀을 대고 그 안에 흙을 부은 다음 꼼꼼하게 다져서 한층씩 쌓아올리는 축성기술이다. 한성백제의 왕성인 풍납토성이 1500년동안 한강변을 지켜온 비결도 판축공법으로 알려져 있다. 풍납토성을 절개한 단면을 보면 밑바닥부터 서로 다른 색깔의 흙을 다져서 층층히 쌓아올린 형태도 남한산성 건물지의 흙벽과 같은 모양이었다. 심광주 학예실장 ㅣ 토지박물관 : 판축으로 성을 쌓으면 무저니지 않게 됩니다. 물이 침투되지 않아서 흙으로 쌓더라도 원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건축기술사적인 측면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판축공법으로 조성한 2m 두께의 벽이 500톤이나 되는 초대형 기와지붕의 무게를 지탱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대형건물지는 언제 만들어졌을까? 우린 판축형 벽체의 바닥에서 수습한 숯의 탄소연대를 측정해보기로 했다. 탄소연대측정은 방사선 원소연대를 측정해서 유적지의 연대를 알아내는 방법이다. 홍 완 박사 ㅣ 한국지질자원연구원 : 신뢰도 95.4%에서 목탄 추정 연대 660년~880년 사이로 측정되었습니다. 이것은 이 시료가 1,300년전 정도에 고사된 나무시료일 가능이 높다는 뜻입니다. 남한산성 건물지의 판축벽체는 초대형 기와와 같이 삼국통일 이후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확인됐다. 노현균 전문위원 ㅣ 경기문화재단 : 한마디로 기둥과 같은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죠. 2m나 되는 벽체가 판축으로 다져지고 바깥으로 견고한 벽체는 상부로부터 내려오는 물체를 안전하게 하부로 전달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실제로 남한산성 행궁터 앞마당에는 1,300년전 통일신라인들이 지혜를 담아서 만든 초대형 기와건물이 있었던 것이다. 2미터 두께의 벽이라면 거의 성벽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도 콘크리트 효과를 내는 판축공법으로 쌓고 돌로 마감처리를 했다고 하니 얼마나 견고하게 쌓았는지 짐작이 간다. 건축공학적으로도 이런 판축벽재를 기둥으로 사용하면 초대형 기와 지붕의 무게를 충분히 지탱할 수 있는 구조라고 한다. 복도식 회랑까지 갖추고 있는 초대형 건물인데 무엇을 했던 곳일까? 기록에서 사라진 남한산성의 숨겨진 비밀을 밝히는 본격적인 추적에 나섰다. 남한산성에서 발굴된 10여종의 명문기와 중에서 우리가 주목한 명문이 있었다. 이 기와조각에 새겨진 명문은 국내 고대 기록과 유물에선 한번도 나오지 않은 글자다. 뚜렷하게 새겨진 천주라는 두 글자. 고고학계의 논란의 분분한 가운데 이 명문이 가톨릭에서 하느님을 가리키는 천주와 같은 용어일 가능성이 있다는 의견이 제기됐다. 심광주 학예실장 ㅣ 토지박물관 : 이 기와가 발굴되었을때 깜짝 놀랐습니다. 전통시대에는 천주라는 용어가 사용되지 않다가 기독교 이후에 사용되는 용어라고 알고 있었는데 천주라는 용어가 나오면서 학계에서는 다양한 견해가 제기됐습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남한산성 초대형 건물은 종교시설일 가능성도 있다. 그런데 기독교박물관에서 예상치못한 뜻밖의 유물을 만났다. 통일신라시대 것으로 알려진 십자가 형태의 유물들이다. 아기를 안고 있는 마리아상처럼 보이는 유물도 있었다. 정말로 1,300년전 통일신라시대에 기독교가 유입되었던 것일까? 중국 서안에서 그 실마리를 찾았다. 서안의 비림, 안으로 들어서자 비림이란 이름처럼 수많은 비석들이 숲을 이루며 전시되어 있었다. 중국에서 발굴된 고대 비석이었다. 웅장한 거북받침을 한 이 비석은 당나라때 대진사유적에서 발굴된 대진경교유행중국비다. 기독교의 일파인 메스토리우스교가 당나라때 경교라는 명칭으로 유행하게된 사연을 적은 비석이다. 시리아문자와 한자로 된 비문에는 7세기 당태종때 서역에서 들여온 경교가 중국에 뿌리내렸다고 전하고 있다. 당나라때 경교가 유행할 수 있었던 것은 당나라 황실의 보호덕분이었다. 박정신 교수 ㅣ 숭실대 기독교학과 : 경교는 635년 전래 이후 200년 간 황실의 지원보호 하에 번창했습니다. 당연히 고위직, 귀족이 경교신자가 되고 중요한 도시인 장안을 비롯해 광주, 소주 등지에 경교 사찰이 창건되게 됩니다. 신라에도 당나라를 통해서 경교가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셈인데 경교에서 천주라는 용어도 사용했을까? 경교 경전에서 확인된 신을 가리키는 용어는 일신, 세존, 미사가, 천존 등이다. 미사가는 메시아를 한자로 음역한 것이다. 예수는 한자로 음역해서 이서라고 썼고 마리아는 말염이라 했다. 그러나 경전 어디에도 천주는 없었다. 황정욱 교수 ㅣ 한신대 신학과 : 종교 경전을 보면 절대자를 표현하는 여러가지 개념이 나오는데 천주라는 말은 경전속에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천주가 종교적인 용어로 정착한 자취는 북경의 남당성당에 남아있다. 마테오 리치가 16세기 북경에 와서 가톨릭을 전파하기 위해 집필한 천주실의다. 이때부터 동양에서는 천주가 하느님을 가리키는 용어로 쓰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남한산성 명문기와의 천주는 종교적인 의미로 해석하기엔 시기적으로 무리가 있다. 만일 이 건물이 종교시설이 아니라면 천주라는 글자 그대로 하늘의 주인이 되고자하는 바람을 담은 명문일 수도 있다. 여하튼 해발 500미터의 험준한 산 정상에 이처럼 거대한 기와건물을 짓는다는 것은 보통 공사가 아니었을 것이다. 분명 건물의 규모나 구조로 볼때 대단히 중요한 시설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과연 7세기 신라인들에게 이곳은 어떤 곳이었을까? 가파른 산 정상을 따라 굽이굽이 이어지는 남한산성이 현재의 모습을 갖춘 것은 병자호란 12년전, 인조 임금때였다. 그런데 성곽복원공사를 하던 도중 조선시대 성곽 밑에서 고대 석성이 발견됐다. 김병희 선임 연구원 ㅣ 중원문화재연구원 : 배수구를 통해서 성벽 밖으로 물이 흘러나가는 구조입니다. 고대 성곽이 발견된 지점인 성안의 물을 밖으로 흘려보내는 배수구 시설의 지하 4m 땅속이었다. 조선시대 성곽시설을 걷어내면서 비로소 그 모습을 드러낸 고대 석성의 흔적. 안과 밖을 모두 돌로 쌓아올린 전형적인 7세기 신라성벽이었다. 차용걸 교수 ㅣ 충북대 역사교육과 : 아래에서 나오는 것은 안팎을 모두 돌로 쌓는 안팎겹축식이라 해서 한문으로 협축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신라의 트레이드마크입니다. 오늘날 남한산성 아래쪽 신라성벽이 고스란히 남아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는 남한산성 자리에 통일신라시대 성곽이 있었다는 뜻이다. 혹시 문무왕때 한산주에 축성한 것으로 전하는 주장성이 아닐까? 한산주 지역에서 확인된 성 중에 가장 유력한 주장성 후보지는 남한산성이다. 둘레 4360보 -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12년 - 결정적인 단서는 주장성의 둘레다. 4360보를 당나라 자로 계산하면 약 8km, 이에 가장 근접한 것은 남한산성 뿐이다. 남한산성의 수평둘레도 약 8km다. 남한산성은 7세기 문무왕때 쌓은 주장성을 바탕으로 세운 셈이다. 그렇다면 초대형 기와건물은 주장성의 핵심건물일 가능성이 크다. 기와건물지에서 이 건물의 용도를 밝혀줄 중요한 명문을 찾았다. 기와에서 확인된 명문은 마산정, 정은 신라의 군사조직을 가리킨다. 신라의 핵심군사조직은 중앙의 구서당과 지방군에 해당하는 10개의 정이다. 10개의 정은 이름과 깃발의 색깔까지 기록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마산정의 이름이 사서에는 없다. 그렇다면 마산정은 실제 군사조직이었을까? 사라는 지명, 와초는 기와지붕이라는 뜻 의문을 풀어줄 새로운 단서가 발견됐다. 충남 홍성에서 발견된 명문기와에서 10개의 정에는 없는 또다른 정이 확인된 것이다. 사라는 삼국사기에서 신라의 핵심군사지역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태종무열왕이 장병을 거느리고 사라지정에 이르렀다 - 삼국사기 권42 660년 - 사라정은 백제 공격을 막던 660년 태종무열왕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방문한 신라의 핵심적인 군사주둔지다. 그렇다면 마산정도 역시 신라의 핵심적인 군사조직일 가능성이 크다. 이문기 교수 ㅣ 경북대 역사교육과 : 한산주 지역에는 한산주정이 성립하는데 그 예하부대로서 마산정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고 또는 마산지역에 군대가 주둔했다는 것에서 유래한 지명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우린 사라명문기와가 출토된 홍성의 석성산성에서 초대형 기와건물의 용도를 밝혀줄 결정적 단서를 찾았다. 석성산성 안에서 발굴된 이 건물지에도 두꺼운 벽체의 흔적이 남아있다. 건물지 초석 주변에서 발굴된 벽체 유적. 이 벽체 역시 흙벽을 쌓은뒤 돌로 마감처리를 했다. 석성산성의 벽체건물지는 규모는 다르지만 남한산성 건물지와 거의 동일한 구조다. 신라의 군사주둔지 건물에서 어김없이 발견되는 성벽에 가까운 벽체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최규성 명예교수 ㅣ 상명대학교 : 벽체가 1m60cm으로 매우 두껍고 그걸 석벽으로 또 쌓았죠. 무기고일 가능성이 크죠. 왜냐면 적군이 쳐들어왔을때 잘 보존하기 위해서는 쉽게 파괴되면 안되거든요. 석벽으로 되어있으면 온전히 보존할 수 있죠. 무기고는 적의 주요공격대상인데 지붕을 뚫고 침입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지붕과 벽이 쉽게 뚫리지 않도록 견고한 구조로 짓는다. 중국의 서안에서 발견된 무기고도 견고한 벽체로 이루어진 건물이다. 기둥사이에 복도식 회랑을 설치한 구조로 남한산성의 기와건물과 같은 양식이다. 이한상 교수 ㅣ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 벽체가 두껍다고 하면 1차적으로 외부로부터 무기의 탈취를 방어하는 목적이 강하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남한산성에서 발굴된 초대형기와건물은 문무왕때 쌓은 주장성의 무기창고가 아닐까? 심광주 학예실장 ㅣ 토지박물관 : 발굴 건물지는 통일신라시대 군창지로 추정합니다. 1,300년전 남한산성에는 판축형 벽체 위에 500톤급 초대형기와지붕을 올린 난공불락의 무기고가 있었던 것이다. 무기창고는 그 어떤 경우에도 지켜내야하는 핵심적인 군사시설이다. 아무리 날렵한 적이라고 해도 이처럼 견고하고 무거운 기발을 쉽게 돌파해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바로 그래서 무기고를 지을때부터 초대형 기와를 제작해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한가지 이상한 점이 있다. 문무왕이 지금의 남한산성 자리에 8km나 되는 주장성을 쌓은 것은 672년의 일이었고 초대형 무기고를 만든 것도 그 즈음으로 보인다. 이미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다음인데 최전방도 아닌 한강유역에 이처럼 거대한 산성을 쌓았던 것일까? 신라의 왕도였던 경주의 남산기슭에서 발굴된 산천왕사는 당시 신라가 처한 다급한 상황을 보여주는 곳이다. 사천왕사는 문무왕이 삼국통일을 이루는 과정에서 창건한 절이다. 사천왕사터에서 발굴된 녹유전 조각은 이곳이 호국사찰이었음을 보여준다. 50만 당나라대군을 물리친 설화가 전해져오고 있는 이곳은 신라가 당나라군과 맞서 싸우기 위해 호국의지를 모았던 절이다. 이문기 교수 ㅣ 경북대 역사교육과 : 당시 당의 공력은 세계최강이었고 거대한 제국이었던 당나라 50만 대군이 신라를 공격한다는건 신라의 존망을 가늠하는 위기상황이었습니다. 긴급대응책이었다고 말할 수 있죠. 당나라대군이 한반도를 삼키려하자 신라는 선제공격을 선택했고 당군이 통치하던 웅진도독부를 탈환한다. 전선이 임진강유역으로 북상한 것은 당군이 평양에 주둔하면서부터다. 신라는 당군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한 3개의 방어선을 구축하는데 다시 주장성이 최후의 한강방어사령부였던 것으로 보인다. 서영교 박사 ㅣ 중원대 : 당시 주장성은 한강유역을 방어하는 최후의 보루였습니다. 대당전쟁이 본격화되자 신라전역에서 수집된 군수물자는 주로 한강을 이용해서 주장성으로 집결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주장성의 무기고에는 당나라와의 전투를 위해 수많은 군수물자가 비축되어있었을 것이다. 나당전쟁의 격전지였던 임진강유역에서 발견된 철촉이다. 그런데 이것은 화살촉으로 보기에는 너무 크다. 철촉의 길이가 무려 21cm, 무게도 71.8g이나 나간다. 유세현 부관장 ㅣ 영집 궁사박물관 : 촉의 길이가 길고 삼각형 모양으로 관통력이 뛰어날것 같습니다. 전체적인 무게로 봐서는 활로 사용하기 보다는 쇠뇌에 활용되었던것 같습니다. 화살보다 큰 철촉을 사용하는 노는 활을 기계적인 장치에 달아 발사하는 무기다. 또한 전문 궁사가 필요한 활과는 달리 누구든 쉽게 배워서 전투에 사용할 수 있다. 기계장치 위에 활시위를 당기고 조준하여 방아쇠를 당기기만 하면 된다. (당나라)황제가 말하기를 신라에서 만든 쇠뇌는 일천보를 나간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 권6 669년 - 고속카메라를 설치하고 성능실험을 했다. 발사한 화살은 1mm 두께의 함석판 4장을 뚫었다. 당시 신라가 자랑하는 대표적인 무기였다. 신라노의 사정거리는 일천보, 그래서 천보라고도 불렀는데 당나라 황제가 신라의 천보를 탐냈을 정도로 그 성능이 탁월했다. 신라전역에서 만들어진 이런 비밀병기들은 주장성의 무기고로 집결한뒤 격전이 벌어진 한강 이북의 전투지에 보급됐다. 한탄강과 전국의 넓은 평야가 한눈에 보이는 경기도 연천의 대전리산성. 나당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매소성전투가 벌어진 현장이다. 당나라 20만대군은 이곳 매소성에 총사령부를 설치하고 신라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팽팽한 대치상황이 깨진것은 675년 음력 9월, 신라는 당나라 20만대군과 정면승부를 벌인다. 당군은 신라군의 여섯배가 넘는 숫자였지만 신라군은 주장성을 최후의 보루로 삼아 당군과 끝까지 대적했다. 결과는 신라의 완벽한 승리였다. 신라는 3만여필의 말과 무기를 탈취한다. 이문기 교수 ㅣ 경북대 역사교육과 : 당전쟁이 신라의 피흘린 항전의 결과이지 우연히 주어진 결과가 아닙니다. 신라인의 각고의 노력이 숨어있습니다. 고고학적 자료로는 남한산성의 대형건물지로 드러납니다. 초대형 기와건물은 나당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최정점에 있었던 주장성의 핵심무기고였다. 초대형 기와의 건물로 비로소 기록보다 더 생생한 주장성의 역사가 되살아난 것이었다. 남한산성에서 발굴된 기와들은 20만 당나라 대군에게 맞서서 국운을 걸고 싸워야 했던 신라인들의 역사가 담겨있었다. 한반도를 통째로 집어삼키려 했던 당나라를 물리치기 위해서 1300년전 이 땅의 기술자들은 거대한 산성을 쌓고 초대형 기와를 제작했던 것이다. 주장성의 무기창고 위에 올려졌던 이 기와는 영원한 동맹국인줄 알았던 나라도 언제든지 적으로 돌변할 수 있다는 비정한 현실의 무게를 보여주는 역사의 거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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