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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와 눈물을 외면한 댓가 / 러일전쟁, 정확한 역사인식

by 연송 김환수 2013. 11. 24.

피와 눈물을 외면한 댓가

 

작성자 : 이동식 2005-06-11

 

100년 전 동아시아에서 있었던 국제전, 1904년에 발발해서 1905년에 끝난 러시아와 일본간의 러일전쟁에 대해서, 우리들은 일본이 러시아와 싸워 이겨서 한반도에 대한 종주권을 확립한 전쟁쯤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일본인들의 시각은 다르다.

 

세계의 벽지시골 같은 작은 나라가 처음으로 유럽문명과 피흘리는 대결을 하여 승리한 전쟁이 바로 일·러전쟁이며,

 

이 전쟁이야말로 유색인종이 백인을 이긴 최초의 역사적 대결이며,

 

아시아로 팽창하려는 러시아세력을 꺾어 조선반도를 보호하고 일본을 방어한 자위전쟁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을 일본인들이 갖도록 한 사람은 역사가가 아니라 일본의 한 소설가였다.

 

'국민작가'라는 영예로운 호칭으로 기억되고 있는 시바료타로(司馬遼太郞)가 쓴 <언덕 위의 구름>이라는 소설의 영향 때문이다.

 

 

 

이 러일전쟁의 수훈갑은 육상에서는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 바다에서는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였다.

 

노기 마레스케는 많은 희생은 내었지만 여순전투에서 러시아대군을 격파했고, 도고 헤이하치로는 쓰시마 앞바다에서 러시아의 전설적인 발틱함대를 순식간에 궤멸시킴으로서 항복을 받아내었다.

 

이순신을 가장 존경했다는 도고 헤이하치로의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하거니와,

 

육상에서는 난공불락으로 소문나 있던 여순요새를 공략하기 위해 자기 두 아들 가쓰스케야쓰스케까지 적탄에 맞아 죽어 가는 처참한 모습을 두 번씩이나 쌍안경으로 지켜보며 마의 203고지를 점령하게 한 노기의 뚝심있는 지휘력은 일본전쟁사의 전설이 되었다.

 

 

도고 헤이하치로

 

그러나 러일전쟁의 의미를 국제적인 시각에서 재조명한 시바료타로는, 그의 소설에서, 이 노기대장에 대해서는 분노를 감추지 못한다.

 

뤼순 요새를 무조건 소총 돌격이라는 말도 안되는 전술로 공격해, 62백 명의 사상자를 낸 것은 무능과 무모함의 극치라는 것이다.

 

전쟁이 끝난 뒤 공훈을 심사하는 자리에서도 도고 헤이하치로는 무난히 원수로 진급했지만 노기의 진급은 좌절됐다.

 

노기는 메이지 왕 앞에서 소중한 황군 6만 명을 잃은 죄를 씻기 위한 할복자살을 허용해줄 것을 간청했다.

 

 

< 러일전쟁 >

 

190428일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이 이끄는 일본제국 해군의 연합함대는 중국 랴오둥(요동) 반도 내 러시아 조차항구인 뤼순(현 다롄)항에 주둔하던 러시아 극동함대에 기습공격을 했다. 러일전쟁의 시작이다. 봉쇄당했던 러시아 함대는 6개월 뒤인 810, 한반도 남쪽을 돌아 모항인 블라디보스토크로 탈출하려다 서해 공해상에서 기다리던 도고의 함대에 다시 일패도지했다. 황해해전이다.

 

극동함대를 지원하려고 파견된 발틱함대는 대서양-인도양-남중국해를 거치는 33의 일년간 항해 도중 뤼순항 함락 소식을 듣고,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했다. 1905527일 대한해협의 동쪽 쓰시마 해역을 통과하던 발틱함대는 도고의 함대에 포착되어 38척의 함대 중 35척이 궤멸되고, 3척만이 회생했다. 쓰시마해전이다.

 

< 러일전쟁 당시 뤼순 공방전 >

 

20세기에 접어들어 사용된 맥심 기관총은 공포스런 성능을 자랑했다.

 

러일전쟁 당시 뤼순 공방전(1904819051)에서 일본군은 러시아군의 맥심 기관총 및 야포의 십자포화 앞에 곤욕을 치렀다.

 

이 전투에서 러시아군 사상자는 28200명인 데 비해 일본군 사상자는 57789명에 달했다. 승리한 쪽이 패배한 쪽보다 2배나 많은 사상자를 냈는데 상당수가 맥심 기관총에 희생된 것으로 알려졌다.

 

 

메이지유신과 함께 사무라이의 자살이 금지된 터여서 마음대로 자살할 수는 없었다. 메이지는 짐의 생전에는 할복할 수 없다는 명령을 내렸다.

 

왕이 내린 막대한 상금을 부하들의 유족에게 모두 나눠준 노기는 말년에는 왕실자제들을 교육시키는 '학습원'이란 대학의 원장으로 있다가 1912년 메이지가 사망하자 할복으로 삶을 마쳤다.

 

노기의 부인(乃木靜子)도 함께 그의 뒤를 따랐다.

 

노기가 죽은 후, 그는 곧 천황을 모시는 일본국민의 모범이 된다.

여순전투에서 아들을 잃은 6만여 명의 일본의 어머니들은 노기의 애국심에 감동한다.

 

노기는 일본군충성스러운 신민의 전형으로서 추앙되었고 군신(軍神)’으로 떠받들어졌다.

 

수많은 일본인들이 천황을 위해 자신을 바친 노기의 뒤를 따르자고 외친다.

 

그리고는 이젠 천황 자체가 신으로 올라선다. 수많은 일본군들이 출정을 하면서 천황께 서약을 한다;

 

천황폐하 만세! 소신(小臣) 다나까는 기쁜 마음으로 죽습니다. 일곱 번 다시 태어나도 천황폐하를 위해 그리 하겠습니다.”

 

부모님께 고합니다. 나의 죽음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십시오. 몸은 비록 죽습니다만 '보국(報國)의 적성(赤誠)'은 영원히 살아 황국(皇國)의 기초가 될 것입니다.”

 

 

 

 

여기에 새로운 신화가 곁들여진다. 전쟁에서 죽더라도 야스쿠니 신사로 돌아온다는 신화가 그것이다. 일본의 젊은이들은 야스쿠니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전쟁터로 떠났다.

 

태평양전쟁 때 가미카제 특공대원들이 죽으면 반딧불이가 되어 야스쿠니 신사로 돌아온다고 굳게 믿고 육탄 공격을 감행했다.

 

그렇게 해서 야스쿠니 신사에는 이처럼 천황의 이데올로기에 희생된 246만 명의 사망자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사망자 가운데 일제의 침략 전쟁과 관련해서 사망한 자가 약 245만이라고 한다.

 

단순히 전쟁에 나가서 숨진 사람들만이 아니라 전쟁을 일으키고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 몬 전범들도 함께 모셔져 있다.

 

이것이 야스쿠니 신사이다. 그런데도 보통 신사와 크게 다르지 않더라고 어느 유명 한국인이 말하니 사람들의 억장이 무너지는 것이다.

 

러일전쟁 당시까지만 해도 2류국이었던 일본이 강대국이던 러시아를 맞아 전쟁을 승리로 이끈 데에는 치밀한 사전 준비도 뒷받침이 되었지만 육군의 노기(乃木希典)장군과 해군의 도고(東鄕平八郞)제독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고 할 정도로 그만큼 두 장수의 공은 혁혁했다.

 

특히 여순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러·일전쟁의 승전 기반을 굳힌 노기장군의 뚝심과 지략 그리고 두 아들을 바치기까지 한 희생정신은 우리가 본받을 만한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그 노기대장도 오로지 천황을 위한다는 명분, 곧 천황 이데올로기에 희생된 사람이라는 인식이 중요하다.

 

그도 결국은 천황의 명령 한마디를 지키기 위해 수 만 명의 젊은이들을 사지로 내몰았다. 그 뒤에는 그로 인해서 더 많은 젊은이들이 전쟁의 광풍 속에 스러져 갔다.

 

그 천황은 전쟁이 끝나도 아무 책임을 지지 않고 일생을 마쳤고, 그의 명령 하나에 움직였던 많은 군인들이 전범이 되어 처형됐다.

 

 

 

 

 

일본이 일으킨 한국침략으로부터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행보는 일본의 맹목적인 국민국가주의와 군국주의가 천황 이데올로기와 결합돼 일어난 인류사적인 과오이며 죄악이다.

 

일본의 군국주의는 한창 잘 나갈 때에 너무 신이 난 나머지 패망을 위한 신작로를 달렸고, 뻔한 결과를 외면하고 과속을 한 때문에 수많은 국민들의 피와 눈물이 흘렀다.

 

그런 인식이 없으면 일본은 또 다시 60여 년 전의 비극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 그리해서 이웃나라에 죄를 짓고 또 일본 국민 자신들에게도 죄를 짓고 큰 피해를 준다.

 

그런데도 과거로부터 교훈을 배우지 못하는, 아니 교훈을 외면하려는 사람들이 다시 일본에 늘고 있다. 60년이란 세월이 너무나 길기 때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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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고 헤이하치로 제독과 이순신 장군

 

러일 전쟁 승리의 영웅 일본 해군 제독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와 이순신 장군 관련 일화

 

 

일본이 도자기나 만드는 야만국인 줄 알았는데, 러시아 발틱함대를 이긴 것을 보고서야 문명국임을 알게 되었다"라는 영국 윈스턴 처칠의 말처럼 일본의 러일전쟁 숭리는 일본 역사상 최고최대의 큰 사건이었다.

 

그리고 당시 일본 함대의 총사령관인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제독은 세계적인 명장이 되었으며, 일본 역사 10대 영웅 중의 한 명으로 이름이 올라 가게 되었다.

 

러일 전쟁 승전 축하연이 있던 날 밤, 아사히 신문 기자가 도고 제독에게 "각하의 업적은 영국의 넬슨 제독, 조선의 이순신 제독에 비견할 만한 빛나는 업적이었습니다."라고 아부성 발언을 하자, 도고 제독은 그 기자를 즉각 야단을 쳤다는 기록이 있다.

 

"나를 이순신 제독에 비교하지 말라. 그 분은 전쟁에 관한 한 신의 경지에 오른 분이다. 이순신 제독은 국가의 지원도 제대로 받지 않고, 훨씬 더 나쁜 상황에서 매번 승리를 끌어 내었다.

 

나를 전쟁의 신이자 바다의 신이신 이순신 제독에게 비유하는 것은 신에 대한 모독이다"

 

도저히 믿기지 않겠지만 세계적인 전쟁 영웅 도고 제독의 말은 사실이었다.

 

일본 해군 소장 가와다 이사오가 쓴 "포탄을 뚫고"라는 책을 보면,

"이순신 장군은 당시의 조선에서 유일하게 청렴한 장군이었고 충성심과 전술전략 운영 능력은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조선은 이순신 장군의 정신과 전술을 금방 잊어 버리고 38년만에 병자호란을 다시 당했다.

 

조선에서는 이순신 장군의 이름이 까마득히 잊혀졌지만 일본에서는 그를 존경하여 메이지(明治) 시기 신식 해군이 창설되었을 때 그의 업적과 전술을 연구하였다"라고 밝히고 있는데, 실제 19세기 말 일본 해군사관학교에서는 "이순신전술전략"이라는 교과목을 가르치고 있었다.

 

8년간이나 영국에서 넬슨 장군을 연구하였던 도고 제독의 우상은 언제나 이순신 장군이었다.

 

러일전쟁 승전 후 도고 제독이 세계적인 영웅이 되어 있을 즈음, 미국 해군사관학교 4학년 임관 후보생들이 일본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이들이 도고 제독을 방문하여 이것저것 인터뷰하는 과정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고 질문한 적이 있었다. 이 때에 도고 제독의 대답은 너무나 간단했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분은 조선의 수군을 지휘한 이순신 제독입니다"

영국의 넬슨 정도만 알던 미국 사관 생도들은 이순신이 누구인지 몰라 잠시 어리둥절해 했다.

 

1905527일 새벽 러시아 발틱함대가 블라디보스톡 항으로 가기 위해 대한해협으로 방향을 잡았다는 소식을 접한 진해 앞 바다의 일본 함대는 진해만에서 대한해협 방면으로 마중을 나가 아직 잠이 덜 깬 발틱함대를 기습하여 격파하기로 작전계획을 세웠다.

 

큰 전투 경험이 없었던 일본의 병사들은 불안하고 초조하다. 그런데, 이 때 도고 총사령관의 특별한 지시가 없었는데도 거의 비슷한 시간에 대부분의 일본 군함에서 간단하지만 엄숙한 신사참배가 있었다.

 

갑판 위에 자그마한 제단을 만들어 놓고 일제히 승전을 기원하는 예식이 거행되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 때에 제단에 모셔진 신은 조선의 이순신 장군이었다. 일본 해군들은 자기네들이 전쟁의 수호신으로 모시고 있는 이순신 장군에게 러시아 발틱함대를 이길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달라고 기원했다. 공교롭게도 이 예식이 행해지던 해역은 그 옛날 일본인 조상들이 무더기로 수장되었던 바로 그 남해 바다였다.

 

조선 사람들의 기억 속에 거의 잊혀지고 있던 이순신 장군의 혼령이 일본 사람들의 존경과 기도에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몰라도, 어쨌든 일본은 일본 역사상 최대의 승리를 거두었고 그 승리는 일본을 세계의 강대국으로 끌어올리는 계기가 되었다.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가 러시아 발틱함대를 격파한 1905년 쓰시마 해전에서 창안해서 사용한 전술은 정자전법(丁字戰法)이다.

 

이 정자전법(丁字戰法: 敵前回頭作戰)은 설정된 목표를 향해 일시에 집중 포격을 가하여 함포의 명중율을 높임으러써 적에게 치명적 타격을 입히는 전법으로 사실 이순신 장군의 학익진(鶴翼陣)을 이용한 일제 집중타방 전법(一濟 集中打方 戰法)을 그대로 모방한 것이다. 다만 글자의 모양에 따라 T자형 전법으로 서양에 소개된 후, 2차 세계대전때까지 근세 해전의 주 전법이 되어 온 전술이다.

 

面白があるそれは日露戦争東郷平八郎日本海海戦大勝利して凱旋した元帥になったそのおいの席上であるがおべっかをつかってこの大勝利歴史偉大なものだちょうどナポレオンをトラファルガーの海戦ったネルソン提督匹敵すべきあなたは軍神であるといった東郷はそれにえておほめにあずかってれいるがわせればネルソンというのはそれほどの人物ではない軍神する提督があるとすればそれは李舜臣ぐらいのものであろう李舜臣べれば自分下士官にもしないものであるっています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러일전쟁 당시 토오고오 헤이하치로오가 동해해전에서 대승리를 하고 개선했다. 그는 원수가 되었다. 그 축하연에서 어떤 사람이 아첨하는 말을 늘어놓았다. “이번의 대승리는 역사에 남을 위대한 것입니다. 나폴레옹을 트라팔가해전에서 패배시킨 넬슨 제독에 필적할 만한 당신은 군신입니다라고 했다. 토오고오는 이에 답하여 칭찬의 말씀은 고맙지만, 사실 넬슨은 그렇게 대단한 인물은 아닙니다. 정말로 군신의 이름에 어울리는 제독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순신 정도겠지요. 이순신에 비교하면 나 자신은 하사관만큼도 못한 존재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中三国人民連帯歴史理論安藤彦太郎寺尾五郎宮田節子吉岡吉典()中三国人民連帯歴史理論(日本朝鮮研究所1964) 안도오 히코타로오, 테라오 고로오, 미야타 세츠코, 요시오카 요시노리(), “, , 중 삼국인민연대의 역사와 이론” (일본조선연구소, 1964)

 

はいつぞや頭山満翁われて東郷さんのおにおいしったことがあるのです」。こう昵懇韓国人李英介氏していた。「そのとき元帥にこうわれた、『あなたのお李舜臣将軍先生です」。名提督というものは々と沈潜した重厚さがありからげてくる寂寥えたところがある提督李舜臣もこういうであったかもれないあとでまたいたことだが東郷曰、「自分はネルソンにべられるかもれないしかし李舜臣えている(中略)明治三十八年五月二十七日未明、「敵艦見との警報連合艦隊鎮海湾から出動するのであるが全艦隊もなく各艦将士西李舜臣鎮魂った李提督一五九八年十一月十八日夜明南海島北側水路残敵急迫中左腋下から貫通海戦七年連勝のこの提督ったのである李提督としてれずにいた日本海軍には栄光があった

 

저는 예전에 토오야마 미쓰루옹과 함께 도고씨의 저택을 방문하여 만나뵌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저와 친한 한국인 이영개씨가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원수님이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네 나라의 이순신 장군은 제 스승이십니다.”라고요.’ 명제독이란, 남색의 깊이와 침잠하는 중후함이 있어, 무언가 밑바닥에서 솟아오르는 듯한, 적요함을 견뎌낸 점이 있다.

 

제독 이순신도 이런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또 나중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도고는 자신은 넬슨에 비교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순신은 나를 넘어서 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중략)

 

메이지 38527일 새벽, ‘적함 발견이란 경보를 접하고, 연합함대는 진해만에서 출동했는데, 전함대가 앞바다로 나오자마자, 각함의 장병들은 멀리 서쪽을 바라보며 이순신에게 진혼의 예를 올렸다.

 

이제독은 15981118일 새벽, 남해도 북쪽의 수로에서 잔적을 소탕하다 유탄에 왼쪽 어깨 아래를 관통당해, 해전 7년 연승의 제독은 숨을 거두었다. 이제독을 스승으로서 잊지 않은 한, 일본해군에는 항상 영광이 있었다

 

藤塚明直アドミラル李舜臣」『慶熙8(京城公立中学校同窓会1977) 후지즈카 아키나오, ‘이순신 제독을 찬양함’ “경희8(경성공립중학교동창회, 19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