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나일본부설은 허구, 주류세력 아닌 단순 용병
한반도 지배 주장 日, `무덤` 때문에 거짓 들통
백제 도우러 온 일본 전사집단…대부분 한반도 귀화
서남해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는 왜(倭)계 무덤의 주인이 한반도에 용병으로 왔던 일본인이라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전남 해남서 발굴된 용두리 왜계 고분.
"백제 삼근왕이 사망해 동성왕이 귀국했는데 지쿠시코쿠(筑紫國ㆍ북부 규슈계) 군사 500인이 호위했다."
일본서기 유랴쿠(雄略) 243년조의 기록이다. 475년 고구려군 공격에 백제는 21대 개로왕이 전사하고 수도 한성을 내준다. 어렵게 웅진에 터를 마련했지만 4년 만에 3명의 국왕이 바뀌는 내분이 겹쳐 통치기구가 사실상 와해된다.
일본에 머물던 동성왕(479~501년)은 휘하 무사단을 이끌고 돌아와 백제 24대 왕에 오른다. 왕은 용병(傭兵)을 적극 끌어들여 백제를 위기에서 구해낸다.
이후 500인의 무사단은 어떻게 됐을까. 문헌에서는 그들의 흔적을 찾기 힘들다. 그리고 왜인 용병은 비단 500명뿐이었을까.
그런데 그들의 행적을 유추할 수 있는 왜(倭)계 무덤이 최근 한반도 남부에서 무더기로 발견돼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지난해 11월 고흥 풍양면 야막고분을 발굴하던 나주문화재연구소는 무덤 위에 돌을 깔고 봉분을 덮은(즙석) 낯선 형태의 고대 무덤을 찾아냈다.
권택장 연구사는 "3세기 후반~7세기 말 왜의 고훈(古墳)시대의 보편적 무덤"이라고 했다. 왜계 무덤은 분묘 양식과 주요 부장품 모두가 일본계인 것을 이른다. 야막고분을 포함해 현재까지 확인된 왜계고분은 모두 25기다.
영산강 일대에서는 고창 칠암리, 담양 고성리ㆍ성월리, 함평 장고산ㆍ신덕ㆍ표산, 광주 월계동ㆍ쌍암동ㆍ명화동, 영암 자라봉, 해남 용두리ㆍ조산ㆍ장고산 등 6세기 초 조성된 것으로 밝혀진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 13기가 나왔다.
원형과 사각형의 분구가 붙은 형태의 이 무덤은 고훈시대 지배계층의 분묘 양식이다. 환구대도, 협갑(脇甲ㆍ갑옷) 등 부장품도 일본열도산이다.
왜계는 같은 시기 공주 단지리ㆍ안영리, 부여 능산리 등 충청권에서 3기가 발굴됐고 경남 고성군 송학, 의령군 경산리ㆍ운곡리, 사천시 신진리, 거제시 장목, 창녕균 송현동 등 대가야권에서도 6기가 출토됐다. 신안 배널리, 고흥 안동ㆍ야막 등 3기는 5세기 초 만들어진 묘다.
영산강 외의 것들은 모두 단순히 무덤 표면에 돌을 쌓거나 내부에 요석(腰石)을 설치하고 붉게 채색한 중ㆍ하위층 무사의 무덤이다.
동성왕이 혼란한 내부를 수습하는 방편으로 선택한 것이 남으로의 영토 확장이었다. 그는 13대 근초고왕(346~375년) 이래 백제의 영향권에 있던 영산강 방면을 백제 영토에 편입하기 위해 지방관을 파견하는데 이 일을 용병에게 맡긴다.
"왕이 무진주(武珍州ㆍ광주로 추정)를 순행했다"는 삼국사기 동성왕 20년조(498년) 기록을 볼 때 지방관들은 중앙의 통제를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왜계 무덤에서 금제 귀걸이, 목관ㆍ제기 등 백제 왕실에서 하사한 다량의 위신재(威信財)가 나온 것도 이들이 백제 예속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왜인 용병의 상당수는 백제인화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위신재(威信財)란 금제 귀걸이, 은 귀이개, 천하석과 벽옥을 굽은 옥(곡옥), 옥구슬(환옥), 길쭉한 옥(관옥), 청자사이호(靑磁四耳壺) 등은 장신구의 기능뿐만 아니라 신분을 표시하고 권위의 상징물이다. 이러한 장신구를 예전에는 장식품이라 하지 않고 위신재(威信財)라고 하였다. 최상급 위신재로는 금동관이나 철제초두(술·음식·약 등을 끓이거나 데우는 데 사용하던 그릇) 같은 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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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평 신덕리 고분은 그들의 귀화 가능성을 보여준다. 신덕 1호분은 전형적인 전방후원분이지만, 바로 옆 2호분(아들 묘로 추정)은 백제의 능산리식 횡혈석실로 조성됐다.
전방후원분은 또 6세기 초에만 한정된다. 538년 사비(부여) 천도 후 한반도 남부를 직접 지배하게 되면서 용병의 도움이 더 이상 필요없게 됐음을 의미한다.
공주, 부여 왜계묘의 피장자는 고구려 방어를 위한 용병이었을 가능성을 고려해 볼 수 있다. 서부 경남지역의 무덤들은 대가야계 왜인 용병으로 판단된다.
대가야는 6세기 초 서부경남에 교두보를 확보한 것으로 추측된다. 5세기 초 신안과 고흥 고분의 주인공은 백제가 해로를 통해 여수반도와 하동지역을 공략할 때 동원된 왜인으로 해석된다.
이 같은 자료들은 그동안 일본이 믿어온 임나일본부설을 부정하는 증거이기도 하다.
박천수 경북대 교수는 "일본 사학계는 왜가 한반도 남부지역을 지배한 임나일본부가 4세기부터 발전해 6세기에 소멸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지배계층의 전방후원분이 한반도에서 6세기 초 일시적으로 나타나며, 정치 중심세력화를 뜻하는 고분군을 형성하지 못한 점으로 미뤄 왜인들은 그저 용병 역할만 한 것을 알 수 있다"고 반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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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의 나라 멸망에 운 왜국, 일본으로 홀로서기
소년한국일보| 2007-12-11
■ 백제의 멸망에 충격을 받은 왜국
백제의 멸망은 주변국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특히 백제를 조상의 나라, 스승의 나라라고 생각하고 있던 왜국이 가장 큰 충격을 받았지요.
663년 9월 부흥 백제국의 수도였던 주류성이 당나라에게 함락되자 왜국에서는 백제가 다시 살아날 희망이 사라졌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일본서기’에는 일본인들이 “이제 백제의 이름이 끊어지게 되었다. 조상의 무덤이 있는 곳에 어떻게 다시 갈 수 있겠는가?”라고 한탄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서기 660년 백제 의자왕이 신라와 당 연합군에 항복을 하자 나라를 잃은 백제 유민들은 바다를 건너 지금의 규슈섬 북부로 몰려들었습니다. 백제의 멸망에 크게 당황한 왜국의 제명 여왕은 백제를 구원하기 위해 친히 군사를 이끌고 수도였던 아스카에서 규슈로 이동합니다.
제명 여왕은 백제의 멸망을 자기 나라의 멸망과 똑같이 받아들였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제명 여왕을 의자왕의 여동생이라고 말하기도 해요. 왜국 전역에서 군사들을 모아 백제에 보내려 할 정도였답니다.
당시 왜국은 일본 열도 전체를 지배하지는 못했어요. 군사를 보내려면 각지의 호족들이 자기가 거느리던 군사를 내줘야 했기 때문에 다소 시일이 걸렸지요. 그러는 사이 제명 여왕이 661년 7월 24일 죽고 말았습니다.
그 아들 천지왕은 어머니의 뜻을 받들어 8월 백제 파견군 편성을 완료했지요. 그리고는 9월에 백제 왕자 부여풍을 호위해 백제 땅으로 보내기로 합니다. 이 때 왜국의 군사 5000 명이 함께 파견했지요. 천지왕은 이 일을 마친 뒤에야 왜국의 수도인 아스카로 되돌아가 11월 어머니의 빈소를 마련합니다. 죽은 여왕의 장례식보다 백제 구원군 파견이 더 중요했던 것이지요.
661년부터 백제 부흥군을 위해 적극 협조했던 왜국은 2 년 반에 걸친 준비 기간을 끝에 663년 3월 전함 1000 척과 병력 2만 7000 명을 백제로 보냈습니다. 왜국으로서는 온 힘을 다해 백제를 도운 것입니다. 하지만 그 해 8월 신라군을 공격할 계획으로 백강을 따라 군대를 진입시키려다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하고 맙니다. 당나라 군대가 먼저 강에서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여기서 백강은 금강 하구, 또는 전라 북도에 있는 동진강 하구, 충남 아산군 남쪽의 당진군 주변이라는 등 여러 가지 견해들이 있습니다.
■ 백제의 그늘에서 벗어난 일본
백제 부흥군의 내분으로 제대로 연합 작전을 펴지 못했던 것도 패배의 한 원인입니다. 백강 전투의 패배는 왜국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답니다. 곧 신라와 당이 연합하여 일본 열도로 공격해올 것이라는 두려움을 갖게 된 것이지요.
그러자 왜국은 한반도와 가장 가까운 규슈섬 북쪽에 663년부터 성을 쌓기 시작합니다. 백제 망명 귀족의 지도에 따라 태재부 관청과 도성도 만듭니다. 태재부를 방어하기 위해 평지에는 수성을, 산에는 대야성과 기이성을 쌓았습니다. 태재부란 왜국이 한반도와 교류하던 입구로, 왜군이 백제를 돕기 위해 출발한 곳이기도 합니다. 규슈 섬 전체를 통치하는 곳이자, 왜국의 외교를 주관하는 관청이라 매우 중요했습니다.
태재부의 방어 구조는 고구려와 백제에서 보이는 평지성과 산성의 결합된 형태입니다. 왜국에서는 이 외에도 국지성, 이토성 등 각지에 백제 방식으로 11 개의 산성을 쌓아 당과 신라의 침략에 대비했습니다.
그러나 왜국이 염려하던 당과 신라의 침략은 없었습니다. 왜국은 신라를 크게 견제하며 외교 관계를 끊었습니다. 이제 일본 열도에 고립된 왜국은 스스로의 길을 걷기 위해 670년 나라 이름을 일본으로 바꿉니다.
일본으로 넘어간 백제 유민들은 일본 정부에서 높은 벼슬을 받고, 일본 고대 문화 발전에 큰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일본에게 백제라는 나라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일본은 백제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나 새로운 나라로 발전해 갑니다.
김용만(우리 역사 문화 연구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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