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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사 방/일본,지도,민박

일제의 중국인 3천명 학살시 조선인은 모두 살려주었다.

by 연송 김환수 2014. 1. 18.

중국인 3천명 학살된 일제만행 현장 가보니

 

연합뉴스 최종수정 2014-01-17 20:21

 

중국 랴오닝성 푸순시 핑딩산 학살기념관에 세워진 희생자 추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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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핑딩산 사건 현장' 역사교육장으로 복원

 

(선양=연합뉴스) 신민재 특파원 = "일제의 참혹한 학살에서 살아남은 이들이 일본에 요구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을 인정하고 사죄하라는 것입니다. 이마저도 거부하는 일본은 역사 문제에서 독일을 배워야 합니다."

 

중국 랴오닝(遼寧)성 푸순(撫順)시에 있는 핑딩산(平頂山) 학살기념관의 저우쉐량(周學良) 관장은 17일 중국 외교부가 초청한 외신기자 30여명 앞에서 일본 정부의 태도를 강하게 비판했다.

 

핑딩산 사건은 1931918일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 동북지역에 대한 침략을 본격화한 일제가 1년 뒤인 1932916일 자행한 대규모 양민 학살 사건이다.

 

중국 핑딩산 학살기념관에 전시된 유골 (푸순=연합뉴스) 신민재 특파원 = 중국 랴오닝성 푸순시에 있는 핑딩산 학살기념관에 전시된 주민 유골들의 모습.

일제는 1932916일 푸순 핑딩산에서 항일유격대를 지원했다는 구실로 주민 3천여명을 무차별 학살했다. 중국 당국은 1970년부터 현장에서 유골 800여구를 수습해 일제의 잔학성을 고발하는 역사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2014.1.17 <<국제뉴스부 기사 참조>> smj@yna.co.kr

 

당시 만주 일대의 석탄, 철광석 등 광물자원 수탈과 철도 운송의 거점이었던 푸순시를 점령하고 있던 일본군에 대해 항일 유격대가 야간 기습을 감행하자 분노한 일본군은 주민이 이들을 지원했다는 구실로 한 마을 주민 3천여명을 무차별 학살했다.

 

일본군은 주민에게 사진을 찍는다며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핑딩산 아래에 모은 뒤 기관총을 난사해 살해하고 불태운 시체를 구덩이에 파묻었다.

 

현장에서 가까스로 탈출한 일부 주민이 이 사실을 알려 미국 언론 등에 보도되면서 사건의 참상이 세상에 드러나게 됐다.

 

중국 당국은 1970년 학살 현장에 대한 유해 발굴을 시작해 불에 탄 유골들을 수습했고 1972년 현장에 기념관을 세워 역사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현재 기념관에는 800여 구의 유골이 수습돼 유리막에 싸여 일반인에 공개되고 있다.

 

일본 도쿄 지방법원과 고등법원은 2002년과 2005년 이 사건의 피해자 유족들이 제기한 배상 청구를 기각했다.

 

 

벽에 가득한 중국 핑딩산 학살 피해자 명단 (푸순=연합뉴스) 신민재 특파원 = 중국 랴오닝성 푸순시에 있는 핑딩산 학살기념관 내부의 모습. 1932916일 일제가 학살한 주민 3천여명의 이름이 벽과 천장에 기록돼 있다. 2014.1.17 <<국제뉴스부 기사 참조>> smj@yna.co.kr

 

당시 일본 법원은 국가가 권한을 남용해 해당 사건을 저지른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국가권력의 집행 과정에서 발생한 피해배상 책임은 면해진다는 주장을 내놨다.

 

일본 정부는 이 같은 전시 피해 보상 문제에 대해 과거 일본이 피해국들과 외교관계를 수립하면서 모두 정리된 사안이라고 주장해왔다.

 

지난 2009년에는 일본 의원 24명이 핑딩산 학살 생존자에게 사과 서한을 전달하기도 했다.

 

중의원 의원 10명과 참의원 의원 14명은 이 편지에서 "인간으로서, 일본 주민들이 뽑은 의원으로서 우리는 마음속 깊이 미안함을 느낀다"고 전했다.

 

저우쉐량 관장은 "당시 피살된 마을 주민 가운데 조선인은 없었다"면서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일본군은 학살을 저지르기 전에 마을 주민 가운데 조선인을 모두 불러냈다"고 설명했다.

 

그는 "우리가 볼 때 (한일합방 이후여서) 당시 조선과 일본이 특수한 관계였기 때문으로 본다"고 덧붙였다.

 

핑딩산 학살의 생존자들은 일본 정부에 대해 사죄와 후세에 대한 교육을 요구하고 있다.

 

저우 관장은 현장을 취재한 일본 기자들에게 "여기서 보고 들은 것을 모두 일본 국민에게 전해달라"면서 "이는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아베 총리의 신사 참배는 중국과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인의 감정을 상하게 했으며 특히 2차 대전 A급 전범에 대한 참배는 우리 인류를 짓밟는 행위"라고 비판했다.

smj@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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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일본군의 푸순 핑딩산 대학살 희생자 3000명에 한국인도 있었다" 증언

 

 

한국일보 원문 입력 2014.01.17 21:02

 

중국 선양의 학살기념관·박물관 가보니

항일유격대 지원 이유로 주민 무참히 총살한 사건

 

샤오징취안 전 기념관장 "침략전쟁 자원공급지 삼아 탄광 노역에도 한인 동원"

유리 속에 유골 발굴 현장기름통 등 곳곳 잔인성 흔적

 

   

17일 중국 랴오닝 푸순시의 핑딩산 학살 기념관에서 1932년 일본군에 의해 숨진 3,000여명의 주민 중 800여구의 유골이 발굴된 현장을 외신 기자들이 대형 유리창을 통해 둘러보고 있다.

 

 

1932년 일본군에 의해 저질러진 푸순(撫順) 핑딩산(平頂山)) 대학살 당시 한국인도 희생됐다는 주장이 나왔다.

 

17일 중국 랴오닝(遼寧)성 선양(瀋陽)시에서 북동쪽으로 2시간 가까이 차로 달려 도착한 푸순(撫順)시의 핑딩산(平頂山) 학살 기념관. 일본이 1932916일 항일 유격대를 지원했다는 이유로 이곳 주민 3,000여명을 모아놓고 기관총으로 쏴 숨지게 한 비극을 간직한 곳이다.

 

기념관은 당시 희생된 800여구의 유골 발굴 현장을 대형 유리로 감싼 뒤 세워져 있었다. 30m 가량 길게 이어진 현장의 뒤엉킨 유골은 82년의 세월에도 그대로 남아 당시의 참상을 보여줬다.

 

어머니가 갓난아이를 감싸 안은 모습과 절규하듯 입을 크게 벌린 유골, 해골 한 가운데를 관통한 총탄 구멍과 몸도 가누기 힘들었을 장애인의 유골 등은 보는 이의 가슴을 찢었다. 1공간 안에 무려 8구의 유골이 함께 쌓여 있는 곳과 어린이 유골만 몰려 있는 곳도 있었다.

 

곳곳에는 기름통과 나무 장작들의 흔적이 보였다. 일본군이 기관총을 난사한 것으로도 모자라 시체 더미 위에 기름을 뿌리고 불을 질렀다는 증거이다.

 

샤오징취안(肖景全) 전 푸순핑딩산학살기념관장은 "1932915일 랴오닝민중자위대의 공격을 받은 일본군이 그 이튿날 곧바로 이 일대 주민들을 보복 차원에서 학살한 것이 핑딩산 대학살의 진실"이라며 "3,000여명의 희생자 중에는 한국인이 있었다는 증언도 있다"고 밝혔다.

 

그는 또 "당시 푸순에는 일본군에 의해 끌려 와 푸순탄광에서 일하던 많은 한국인이 있었다""푸순탄광에서 노역 중 숨진 1만여명의 희생자 중에도 구체적 수치는 알 수 없지만, 분명히 한국인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일본은 1931년 노천탄광이나 다름없고 지정학적으로도 중요한 이곳을 점령해 침략 전쟁의 주요 자원 공급 기지로 삼았다. 푸순탄광은 연간 채굴량이 1만톤에 달할 정도로 컸으나, 노역은 모두 한국인과 중국인의 몫이었다는 것이 샤오 전 관장의 설명이다.

 

이에 앞서 16일 찾은 랴오닝성 선양시 918 역사박물관도 일제의 침략상을 볼 수 있는 곳이었다.

 

벽 면에 새겨진 '918을 잊지말아라(勿忘九一八)'1991년 당시 장쩌민(江澤民) 총서기의 휘호가 맨 처음 눈에 들어왔다. 918이란 1931918일 일본 관동군이 당시 펑톈(奉天지금의 선양) 북쪽 류탸오후(柳條湖) 부근에서 자신들이 관할하던 철도를 폭파한 뒤 중국인의 소행으로 몰아 이 일대를 점령한 만주사변을 일컫는 숫자다.

 

박물관 앞엔 이날을 가리키는 탁상용 달력을 형상화한 대형 조각물도 세워져 있었다. 박물관 안은 일본군국주의가 1894년 청일전쟁으로 한반도와 중국 대륙에 대한 야욕을 드러낸 뒤 1927'동방회의'를 열고 '대륙정책'을 확정한 과정, 만주사변 이후 19323월 만주국을 세운 일 등 침략의 역사가 당시의 사진과 유물로 증명돼 있었다.

 

징샤오광(井曉光) 918 역사박물관장은 "매년 100여만명이 찾아 일본 군국주의의 잔혹성을 확인하고 간다""최근 일본의 우경화가 노골화하면서 방문객이 더 늘었다"고 말했다.

 

선양 제2차 연합군 전쟁포로 수용소 유적 전시관은 일본군의 범죄가 한국과 중국뿐 아니라 미군과 영국군에게도 가해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곳이다. 당시 연합군 포로 2,000여명은 이 곳에서 일본의 세균전 부대인 관동군 731부대와 100부대에 의해 생체 실험 대상이 됐고 이중 최소 300명이 숨진 것으로 알려졌다.

 

왕젠쉐(王建學) 중국근현대사 사료학학회 부회장은 "중국인뿐 아니라 평화를 사랑하는 전 세계인이라면 기억해야 하는 역사가 바로 일본 군국주의 침략사"라며 "2차 대전 당시 서방의 침략자였던 독일은 이미 잘못을 뉘우치고 사과했지만 동방의 침략자였던 일본은 역사적 사실마저 부인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번 행사는 중국 외교부가 랴오닝성 정부와 함께 외국 기자들을 초청, 12일 일정으로 진행됐다.

 

지난달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靖國) 신사 참배 이후 인해전술식의 국제 여론전을 펴고 있는 중국이 일제의 만행을 폭로하기 위해 마련됐다.

 

그러나 저우쉐량(周學良) 푸순시박물관장은 "과거의 역사를 강조하는 것은 묵은 원한을 키우려는 것이 아니라 이를 교훈으로 삼아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으면서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선양푸순= 사진 박일근특파원 ik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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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 3000명 동시 학살일본잔혹함에 `울컥`

 

매일경제 원문 입력 2014.01.17 17:33

 

 

중국 랴오닝성 푸순시에 있는 핑딩산학살사건기념관에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는 유골의 처참한 모습. 정혁훈 특파원

 

17일 중국 랴오닝성 성도인 선양에서 동쪽으로 자동차를 타고 1시간30분을 달려 도착한 푸순시. 중국 외교부가 베이징에 파견된 외신기자들을 위해 마련한 일제 만행 유적지 취재 둘째 날 일정이 시작된 곳이다.

 

일행은 전날 선양에 있는 918 만주사변 역사박물관과 연합군 포로수용소에서 이미 일제의 잔혹한 만행을 확인했던 터라 마음 한구석엔 지루함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푸순시 핑딩산학살사건기념관에 들어선 전 세계 6개국(한국일본인도싱가포르영국스페인) 기자 38명은 일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일본군에 의해 처참하게 학살당한 유골 800여 구가 200여 평 남짓한 좁은 공간에 빼곡하게 들어차 있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중국 정부는 이 유골 발굴 지역을 원형 그대로 보존해 후세에 알리기 위해 발굴 장소 바로 위에 건물을 덮어 기념관으로 만들어 버렸다.

 

참혹한 모습으로 포개져 있는 유골에는 남녀노소 구분이 없었다. 아이를 안고 있다가 숨진 것으로 추정되는 엄마 유골은 일순간 울컥하게 만들었다.

 

턱이 부서져라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유골도 많았다. 학살 당시 고통을 이기지 못해 그랬으리라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졌다. 어떤 곳은 고작 1공간에 무려 8구의 시신이 포개져 있다.

 

마을 주민 3000여 명이 동시에 학살당한 핑딩산사건은 1932년 음력으로 추석(중추절)이던 915일 밤 일본군이 중국항일유격대의 습격을 받은 것이 발단이었다.

 

일본군은 핑딩산마을 주민들이 유격대를 알고도 신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튿날 군인 200여 명을 출동시켜 마을 주민 전원을 한곳에 모은 뒤 기관총 등으로 사살했다.

 

집중 사격에도 살아남은 주민들은 일일이 총검으로 확인 살해했다. 임신부의 경우 배를 갈라 태아까지 확인했다고 한다.

 

집단 학살극이 끝난 뒤에는 기름을 부어 시체를 태우고, 대포로 산을 붕괴시켜 유골을 완전히 매장하기까지 했다. 마을 주민들이 거주하던 800여 주택도 모조리 불타 없어졌다.

 

저우쉐량 기념관장은 "핑딩산 학살 사건은 산촌 빈민을 상대로 자행한 뒤 조작까지 시도한 대도살극"이라며 "80여 년이 지났지만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역사의 한 대목"이라고 힘줘 말했다.

 

자리를 옮겨 방문한 랴오닝성 기록보관소에서는 난징 대학살의 참상을 보여주는 일본 측 문건을 처음으로 공개했다. 일본이 중국에 세운 국영회사인 남만주철도에서 파견한 난징특무반 보고서가 그것이다.

 

여기에는 시체를 매장했다는 생생한 증언이 담겨 있다. 차오환린 보관소장은 "난징 대학살 사망자가 35만명에 달한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확인됐다"고 말했다.

 

이날 문건 공개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외조부로 1950년대 총리를 지낸 기시 노부스케가 당시 남만주철도를 관할하던 만주국 정부 고위 관료였던 점을 겨냥한 것으로 풀이된다.

 

[푸순(랴오닝성) = 정혁훈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