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도 (商道)
과거제도가 있던 시절 어느 서생이 몇 번 과거에 낙방한 후 시대의 흐름에 자신은 맞지 않는다고 여겨 속세를 떠나기로 했습니다.
그는 귀동냥으로 들은, 깊은 산중의 동굴에 기거한다는 도사를 찾아 나섰습니다.
도사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서생을 아래위로 살피며 말했습니다.
“자네는 무엇이 배우고 싶은가? 나는 돌을 금으로 바꾸는 술법이 있고, 공중을 날아다니거나 둔갑하는 술법도 있다네.”
“저는 그저 도(道)를 닦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서생은 엄격한 수행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몇 년 후, 서생이 수련인으로서 풍모를 갖춰갈 무렵 스승은 서생을 불렀습니다.
“나는 이곳에 웅장한 천궁을 짓고 싶다네. 그런데 자금이 조금 부족하니 자네가 좀 도와주게나. 자네도 이제 수련의 기본은 갖추었으니, 낮에는 산을 내려가 장터에서 연지를 팔고 해가 지면 돌아와 수련을 계속하도록 하게나.”
“예. 스승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만, 저는 돈이 없는데 어떡하면 연지를 구할 수 있을까요?”
스승은 서생에게 돌을 하나 가져오게 하여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돌은 즉시 최고급 연지로 변하여 방안 가득 쌓였습니다.
다음날 날이 밝자 서생은 스승의 뜻에 따라 연지를 짊어지고 산에서 내려와 장터로 향했습니다. ‘스승님은 돌도 금으로 바꾸실 수 있는데 왜 제자에게 번거로운 세상에 나가 돈을 벌라고 하시는 것일까?’ 서생의 발걸음은 무거웠고 불만이 마음 가득 차올라왔습니다.
“연지 사시오, 연지 사시오”
서생은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시선을 발끝에 떨구고 모기만 한 소리로 웅얼거렸습니다. 멀지 않은 곳에서 그를 지켜보던 스승은 ‘도를 닦는 사람이 세상을 저렇게 두려워하다니’하며 고개를 내젓고는 우악한 백정의 모습으로 변신하여 칼을 들고 건들거리며 서생의 곁으로 갔습니다.
“댁은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게요.”
“저… 연지를 팔고 있습니다.”
“뭐라고? 안 들려! 어디 한 번 저 오가는 사람들이 모두 듣도록 큰 소리로 말해 보시오.”
백정은 무용하게 칼을 휘두르며 위협적으로 말했습니다.
“연지 사시오. 연지 사시오.”
서생은 눈물을 찔끔 거리며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그래. 그 정도는 돼야지. 여기는 장사를 하는 곳이지 서생이 책을 읽는 곳이 아니란 말이오. 내, 댁 같은 샌님을 보면 배알이 꼴려서... 앞으로 서생을 줄곧 지켜보지요. 혹여 다시 목소리가 기어들어간다거나 한다면, 자릿세를 받던지, 물건을 압수하던지 할 것이오. 조금 늦게 온 사람은 이런 자리도 못 잡아 물건도 팔지 못하고 그냥 돌아간단 말이오.”
그러나 서생은 한 달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상자할 마음을 내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연지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귀부인에서 청루의 기생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여인네이고 보니 간혹 연지에 관심을 갖고 다가오는 여인에게 조차도 서생은 고개를 숙여 외면해 버렸습니다.
그러니 한 달이 지났어도 연지를 한 개도 팔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깊은 밤 가부좌를 하고 있어도 날이 새면 다시 온갖 사람이 오가는 아수라장 같은 장터로 나갈 걱정에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만월의 휘영청 한 달빛아래서 서생은 가부좌를 하고, ‘세속을 피해 산속으로 들어온 나에게, 스승님은 왜 장터에 나가 돈을 벌어오라는 것일까?’라는 생각을 하다가, 홀연히, 도의 길을 걷고 있는 자신이 세상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스승님은 나에게 세속을 초월하라는 것이로구나. 그렇다면 수행하는 마음으로 장사를 하자.’
이튿날 서생은 새로운 결심을 하고 장터로 나갔습니다. 그러나 막상 여인과 말을 섞자니 ‘색심은 수련인에게 가장 엄중한 것인데...’ 라는 생각에 더럭 겁이 났습니다.
그는 곧 ‘나는 수도인으로 세속을 초월한 사람이다. 어찌 여인네가 내 수련의 뜻을 움직일 수 있겠는가’ 라고 결의를 내자, 마음이 곧 초연해졌습니다.
스승은 서생을 시험하기 위해 묘령의 아가씨로 변신해 아리따운 자태로 연지를 고르며 그의 환심을 사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서생은 가부좌를 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마음은 늘 입정상태로 여심에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이번에 스승은 부귀한 노부인으로 변신해 연지를 산 후 그 자리에서 얼굴에 발랐는데 그 순간 누렇던 얼굴이 미모의 젊은 부인으로 변했습니다. 그 소문이 퍼지자 이웃마을 여인들까지도 연지를 사러 그의 노점으로 몰려들었습니다.
마침, 태후가 절에 가는 길에 사람들이 와글거리는 것을 보고는 무슨 일인가 알아보도록 했습니다. 태후는 연지의 소문을 듣고는 가지고 있던 백냥의 황금을 주고 남아 있던 연지를 모두 샀습니다.
서생이 스승의 희망이 마침내 이루어진 것을 기뻐하며 황금을 지고 산으로 올라오는데 군사 몇 명이 한 소녀를 겁탈하려 했습니다. 이에 서생은 망설임없이 군사들에게 황금 백냥을 주고 소녀를 구해주었습니다.
산으로 돌아간 서생은 스승에게 예를 갖추고 지금까지 일어났던 일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스승은 빙그레 웃으며 허공을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웅장하고 아름다운 궁전이 나타났습니다.
“자네는 이미 내가 천궁을 건립하는 것을 도왔네. 바로 속세의 사람에게 흔들리지 않는 자네 마음이 천계에서 궁전을 수련해 낸 것이라네.”
“알고 보니 이것이 바로 상도(商道)였군요.” 서생은 감탄을 금치 못하며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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