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잡기 (東京雜記)
분야 : 지리/인문지리
유형 : 문헌
시대 : 조선
성격 : 지지
편저자 : 성원묵(成原默)
제작시기 : 1845년
권수/책수 : 3권 3책
소장처 : 규장각 도서|장서각 도서
집필자 : 이수건
동경잡기
1845년(헌종 11) 성원묵(成原默)이 증보하여 중간(重刊)한 경주의 지지(地誌).
3권 3책. 목판본. 동경은 고려 때 경주의 별칭이다. 작자 미상으로 전부터 전해오던 ≪동경지 東京誌≫를 1669년(현종 10) 민주면(閔周冕)이 이채(李採) 등 향중 인사와 함께 편집, 보완하여 ≪동경잡기≫라고 개칭, 간행하였다.
이것을 1711년(숙종 37)남지훈(南至熏)이 첨보(添補)하여 재간(再刊)하고, 1845년 성원묵이 다시 증보, 정정하여 중간하였다. 1910년조선고서간행회(朝鮮古書刊行會)가 성원묵의 판본을 인쇄본으로 간행하였고,
1913년최남선(崔南善)이 주관하던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가 이것을 또 활자본으로 중간하였다.
내용 구성은 책머리에 목록이 있고, 권1에 진한기(辰韓紀)·신라기(新羅紀)·경주지계(慶州地界)·건치연혁(建置沿革)·관호연혁(官號沿革)·속현(屬縣)·진관(鎭管)·속임(屬任)·인리(人吏)·노비(奴婢)·읍명(邑名)·성씨(姓氏)·풍속(風俗)·산천(山川)·승지(勝地)·토산(土産)·성곽(城郭)·관방(關防)·봉수(烽燧)·궁실(宮室)·창고(倉庫)·학교(學校)·역원(驛院)·교량(橋梁)·사묘(祠廟)·능묘(陵墓)·기우소(祈雨所)가 있다.
권2에 불우(佛宇)·고적(古蹟)·수(藪)·호구(戶口)·군액(軍額)·전결(田結)·제언(堤堰)·각방(各坊)·각동(各同)·명환(名宦)·인물(人物)이 있고,
권3에 우거(寓居)·과목(科目)·음사(蔭仕)·효행(孝行)·우애(友愛)·충의(忠義)·정렬(貞烈)·기예(技藝)·서적(書籍)·제영(題詠)·잡저보유(雜著補遺)·이문(異聞)이 있으며, 권말에 남지훈과 성원묵의 발문이 각각 실려 있다. 조선광문회의 활자본에는 책머리에 ‘동경잡기간오(東京雜記刊誤)’가 첨부되어 있다.
이 책은 신라의 고도 경주의 읍지라는 점에서 다른 읍지에 비해 신라 시대의 사실이 풍부하게 담겨 있다.
신라기·불우·고적·인물 조항이 그 예이다. ≪동국여지승람≫의 편목을 토대로 하면서 조선 후기 일반 읍지의 항목을 많이 설정하였다. 각방·각동 조항은 경주부의 읍·면·이·동의 구획과 면리임(面里任)의 명칭 및 수령(守令)의 하부 행정체계를 구명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또한, 당시 영남 지방에 연분서원(年分書員)의 관할구역 으로서의 ‘동(同)’의 구획을 살필 수 있다. 특기할 사항은 신라기조에는 신라 건국에서 멸망까지의 역사를 본기형식(本紀形式)으로 기록하였다.
호구조는 기유식(己酉式)을, 전결조는 갑술양안(甲戌量案)을 각각 따르고 있다. 제영조에는 <회소곡 會蘇曲>을 비롯한 신라의 가곡(歌曲)이 많이 실려 있고,
이문조에는 <연오랑세오녀 延烏郎細烏女> 등의 신라의 설화·전설·기담(奇談)이 실려 있다.
전체적으로 군치(郡治)에 중요한 장시(場市)·전세(田稅) ·균세(均稅)·대동(大同) 등의 경제 조항이 누락된 반면 인물 관계의 문화적 내용의 비중이 크며, 시문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 규장각도서에 있다.
이 밖에도 1845년의 목판본 ≪동경잡기≫가 국립중앙 도서관과 동국대학교 도서관, 장서각도서 등에 있고, 1913년의 조선광문회 활자본 ≪동경잡기≫는 서울대학교·동국대학교 도서관, 국립중앙도서관, 국사편찬위원회 등에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동경통지(東京通志)』
동경잡기(東京雜記)
RIKS+CRMA+KSM-WV.1711.0000-20090715.AS_BC_229
분류 고서-지리서 / 사회-지리-지지
작성주체 편자 : 민주면(閔周冕)
판종 목판본
발행사항 간사지: 慶州 / 간사년: 肅宗37(1711)刻(後刷)
형태사항 크기: 33.6×21.7 / 선장, 3권3책 / 저지 / 한자 /
판식: 四周雙邊 半郭 18.4 x 16.6 cm, 有界, 10行16字 註雙行, 內向2葉花紋魚尾
비고 版心題 : 雜記
卷末 : 歲辛卯(肅宗37,1711)仲春下澣府尹宜寧南至熏(1645-?)識 通政大夫行慶州都護府使閔周冕 纂集都監進士李埰進士金建準……刊局都監從仕郞李遠徵……
소장정보 현소장처 : 미국 버클리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아사미 문고)
소장처분류기호 20.6
≪동경지 東京誌≫를 1669년(현종 10) 민주면(閔周冕)이 이채(李採) 등 향중 인사와 함께 편집, 보완하여 ≪동경잡기≫라고 개칭, 간행하였다.
동경잡기 (東京雜記)
권1
진한기辰韓紀
경상도는 본래 진한(辰韓)의 땅인데, 뒤에 신라(新羅)의 소유가 되었다.【 여지승
람(輿地勝覽) 에 나온다.】 진한은 마한(馬韓)의 동쪽에 있다. 스스로 말하기를, “망
명한 진(秦)나라 사람이 난리를 피하여 한(韓)으로 들어오니 한이 동쪽 경계를 분할
하여 주었으므로 성책(城栅)을 세웠다.” 하였다. 그 언어가 진나라 사람과 비슷하다.
혹 진한(秦韓)이라고도 한다. 항상 마한 사람으로 군주를 삼았는데 통치한 바가 무
릇 열 두 나라였다. 땅은 오곡을 심기에 적합하며, 민간에는 누에와 뽕이 풍요하여
비단과 베를 잘 짰으며, 소와 말을 탔으며, 혼례는 예로써 하였으며, 길을 가는 자
는 길을 양보하였다. 【 동국통감(東國通鑑) 에 나온다.】
慶尙道 本辰韓之地 後爲新羅所有【出輿地勝覽1)】辰韓 在馬韓之東 自言秦之亡人
避役入韓 韓割東界以與之 立城栅 其言語有類秦人 或謂之秦韓 常用馬韓人作主 所統
凡十有二國 地宜五穀 俗饒蠶桑 善作縑'布 乘駕牛馬 嫁娶以禮 行者讓路【出東國通
鑑】
신라기新羅紀
신라 시조 원년(기원전 57년) 여름 4월 병진에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가 즉위
하였다. 이보다 앞서 조선(朝鮮)의 유민(遺民)들이 동해 바닷가의 산곡(山谷) 사이에
흩어져 살면서 육촌(六村)을 이루었으니, 알천(閼川)의 양산(楊山), 돌산(突山)의 고
허(高墟), 자산(觜'山)의 진지(珍支), 무산(茂山)의 대수(大樹), 금산(金山)의 가리(加
利), 명활산(明活山)의 고야(高耶)이다. 이것이 바로 진한의 육부(六部)인데, 육부의
우두머리가 함께 박혁거세를 세워 군주를 삼았다.【 동국통감 에 나온다. 상세한 내
용은 고적(古蹟)에 보인다.
新羅始祖元年夏四月丙辰 始祖朴赫居世立 先是 朝鮮遺民 分居東海濱山谷間 爲六
村 曰閼川楊山 曰突山高墟 曰觜7山珍支 曰茂山大樹 曰金山加利 曰明活山高耶 是爲辰
韓六部 六部長共立赫居世爲君【出東國通鑑 詳見古蹟】
시조始祖
성은 박(朴)이요 이름은 혁거세(赫居世)로 한(漢)나라 선제(宣帝) 오봉(五鳳) 원년
갑자(甲子, 기원전 57)에 즉위하였다. 호는 거서간(居西干)이다. 거서간은 진한 사람
들이 왕을 일컫는 말이다. 혹 귀인을 부르는 칭호라고도 한다. 국호를 서라벌(徐羅
1)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경상도(慶尙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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伐)이라고 하였는데, 라자(羅字)는 나자(那字)로 쓰기도 하고 야자(耶字)로 쓰기도
한다. 또 서벌(徐伐)이라고도 한다. 세속에서 경자(京字)를 새겨 서벌(徐伐)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또 사라(斯羅)라고 하기도 하고, 또 사로(斯盧)라고 하기도 한다.
재위 기간은 61년이다.
姓朴 名赫居世 漢宣帝五鳳元年甲子 即'位 號居西干 居西干 辰人稱王之語 或云呼貴
人之稱 國號徐羅伐 羅 一作那一作耶 又云徐伐 俗訓京字 云 徐伐 以此 又云斯羅 又
云斯盧 在位六十一年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
혹은 자충(慈充)이라고도 한다. 김대문(金大問)이 이르기를, “차차웅은 방언으로
무당을 말하는 것이다.” 하였다. 세상 사람들이 무당은 귀신을 섬기기 때문에 두려
워하고 공경하여 드디어 존장(尊長)을 자충이라 일컬었다. 남해차차웅은 혁거세의
태자로 신장이 장대하고 성품이 신중하고 지략이 많았다. 원년 갑자(甲子, 4년)는
한나라 평제(平帝) 원시(元始) 4년이다.
或云慈充 金大問云 次次雄 方言謂巫也 世人以巫事鬼神 故畏敬之 遂稱尊者爲慈充
赫居世太子 身長大 性沉7厚 多智略 元年甲子 漢平帝元始四年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
이름은 유리(儒理)요 남해차차웅의 태자이다. 남해차차웅이 장차 훙서(薨逝)하려
할 적에 유리와 석탈해(昔脫解)에게 이르기를, “내가 죽은 뒤에 너희 박씨(朴氏) 석
씨(昔氏) 두 성 중에서 나이가 많은 자로 왕위를 계승하게 하라.” 하였다. 남해차차
웅이 훙서하기에 이르러 유리가 탈해가 평소에 덕망이 있다고 하여 왕위를 양보하
였다. 이에 탈해가 말하기를, “왕위는 큰 보배인지라 보통 사람이 감당할 바가 아닙
니다. 내가 들으니 성덕과 지혜를 가진 사람은 이[齒]가 많다고 하였습니다. 한 번
떡을 깨물어 봅시다.” 하였다. 이에 떡을 깨물어 보니 유리의 잇자국이 많았다. 이
에 곧 즉위하고 호를 이사금(尼師今)이라고 하였다. 또 잇금[尼叱今]이라고도 하니,
잇금이라는 칭호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원년 갑신(甲申, 24년)은 한나라 경시(更
始) 2년이다. 5년 무자에 이웃 나라의 백성들이 유리왕이 인정(仁政)을 베푼다는 소
문을 듣고 와서 귀의하는 자가 많았다. 이 해에 민간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여 비
로소 도솔가(兜率歌)를 지으니 이것이 가악(歌樂)의 시초이다.
名儒理 南解太子 南解將薨 謂儒理及昔脫解曰 吾死後 爾朴昔二姓 以年長嗣位焉 及
薨 儒理以脫解素有德望 推讓其位 脫解曰 神器大寶 非庸人所堪 吾聞聖智人多齒 試以
餠噬7之 儒理齒理多 乃立之 號尼師今 又云尼叱今 尼叱今之稱 自此始 元年甲申 漢更
始二年 五年戊子 隣國之民 聞王行仁政 來歸者衆 是年民俗歡樂 始制兜率歌 此歌樂之
始也
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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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은 석(昔)이요 이름은 탈해(脫解)이다. 유리가 장차 훙서하려 할 적에 말하기를,
“선왕[남해차차웅]의 고명(顧命)에 ‘내가 죽은 뒤에 아들과 사위를 막론하고 나이가
많고 어진 자로 왕위를 계승하게 하라.’ 하셨다. 이 때문에 과인이 먼저 즉위하였으
니, 이제 의당 왕위를 탈해에게 전하여야 한다.” 하였다. 이에 탈해가 유명(遺命)에
따라 왕위를 계승하였다. 원년 정사(丁巳, 57년)는 한나라 명제(明帝) 중원(中元) 2
년이다.
姓昔 名脫解 儒理將薨曰 先王顧命曰 吾死後 母論子壻 以年長且賢者繼位 是以寡人
先位 今也宜其傳位焉 脫解從遺命嗣位 元年丁巳 漢明帝中元二年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
성은 박(朴)이요 이름은 파사(婆娑)이다. 유리의 둘째 아들이다. 원년 경진(庚辰,
80년)은 한나라 장제(章帝) 건초(建初) 5년이다.
姓朴 名婆娑 儒理第二子 元年庚辰 章帝建初五年
지마이사금祇摩尼師今
이름은 지마(祇摩)이니 파사의 태자이다. 원년 임자(壬子, 112년)는 한나라 안제
(安帝) 영초(永初) 6년이다.
名祇摩 婆娑太子 元年壬子 安帝永初六年
일성이사금逸聖尼師今
이름은 일성(逸聖)이니 유리의 장남이다. 지마가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즉위하였
다. 원년 갑술(甲戌, 134년)은 한나라 순제(順帝) 양가(陽嘉) 3년이다.
名逸聖 儒理長子 祇摩無子 故立 元年甲戌 順帝陽嘉三年
아달라이사금阿達羅尼師今
이름은 아달라(阿達羅)이니 일성의 장남이다. 원년 갑오(甲午, 154년)는 한나라
환제(桓帝) 영흥(永興) 2년이다. 3년 병신(丙申, 156)에 계립령(雞'立嶺)의 길을 열었
으니, 바로 지금의 새재[鳥嶺]이다. 5년 무술(戊戌, 158년)에 죽령(竹嶺)의 길을 열
었다.
名阿達羅 逸聖長子 元年甲午 桓帝永興二年 三年丙申 開雞'立嶺路 即'今鳥嶺 五年戊
戌 開竹嶺路
벌휴이사금伐休尼師今
성은 석(昔)이요 이름은 벌휴(伐休)이다. 【발휘(發揮)라고 된 곳도 있다.】 탈해
의 아들 각간(角干) 구추(仇鄒)의 아들인데 아달라가 훙서할 적에 아들이 없었으므
로 나라 사람들이 그를 왕으로 세웠다. 벌휴이사금은 바람과 구름[風雲]을 점쳐 수
재(水災)와 한재(旱災) 및 풍년과 흉년을 미리 알았고, 또 사람의 사악함과 정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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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알았으므로 사람들이 성인이라고 일렀다. 원년 갑자(甲子, 184년)는 한나라 영제
靈帝) 중평(中平) 원년이다.
姓昔 名伐休 【一作發揮】 脫解子角干仇鄒子 阿達羅薨 無子 國人立之 王占風雲
預知水旱及年之豐儉 又知人邪正 人謂之聖 元年甲子 靈帝中平元年
내해이사금奈解尼師今
이름은 내해(奈解)니 벌휴의 둘째 아들인 이매(伊買)의 아들이다. 용모(容貌)와 의
표(儀表)가 웅위(雄偉)하고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 원년 병자(丙子, 196년)는 한나라
헌제(獻帝) 건안(建安) 원년이다.
名奈解 伐休第二子伊買子 容儀雄偉 有俊才 元年丙子 獻帝建安元年
조분이사금助賁尼師今
이름은 조분(助賁)이니 벌휴의 장남인 골정(骨正)의 아들이다. 원년 경술(庚戌,
230년)은 촉한(蜀漢) 후주(後主 유선(劉禪)) 건흥(建興) 8년이다.
名助賁 伐休長子骨正之子 元年庚戌 蜀漢後主建興八年
점해이사금沾解尼師今
이름은 점해(沾解)니 조분의 동복(同腹) 아우이다. 원년 정묘(丁卯, 247년)는 촉한
후주 연희(延熙) 10년이다.
名沾解 助賁母弟 元年丁卯 後主延熙十年
미추이사금味鄒尼師今
성은 김(金)이요 이름은 미추(味鄒)니 알지(閼智)의 7대손이다. 조분이 그 딸을 주
어 아내 삼게 하였다. 이에 이르러 점해가 후사가 없이 훙서하였으므로 나라 사람
들이 그를 왕으로 세웠다. 이것이 김씨가 나라를 소유한 시초이다. 원년 임오(壬午,
262년)는 촉한 후주 경요(景耀) 4년이다.
姓金 名味鄒 閼智七代孫 助賁以其女妻之 至是薨 無嗣 國人立之 此金氏有國之始也
元年壬午 後主景耀四年
유례이사금儒禮尼師今
성은 석(昔)이요 이름은 유례(儒禮)니 조분의 장남이다. 원년 갑진(甲辰, 284년)은
진(晋)나라 무제(武帝) 태강(太康) 5년)이다.
姓昔 名儒禮 助賁長子 元年甲辰 晋武帝太康五年
기림이사금基臨尼師今
이름은 기림(基臨)이니 조분의 손자이다. 원년 무오(戊午, 298년)는 진나라 혜제
(惠帝) 원강(元康) 8년이다. 10년 정묘(丁卯, 307년)에 국호를 신라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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名基臨 助賁孫 元年戊午 惠帝元康八年 十年丁卯 國號新羅
흘해이사금訖解尼師今
이름은 흘해(訖解)니 내·해의 아들 각간 우로(于老)의 아들이다. 기림이 훙서할 적
에 아들이 없었으므로 군신(群臣)들이 의논하여 말하기를, “흘해는 어리나 노성(老
成)한 덕이 있다.” 하고, 곧 그를 왕으로 세웠다. 원년 경오(庚午, 310년)는 진나라
회제(懐帝) 영가(永嘉) 4년이다.
名訖解 奈解子角干于老子也 基臨薨 無子 群臣議曰 訖解幼 有老成之德 乃立之 元
年庚午 懐帝永嘉四年
내물이사금奈勿尼師今
일명 내밀(奈密)이라고도 한다. 성은 김이요 이름은 내물(奈勿)이니, 구도갈문왕
(仇道葛文王)의 손자이다. 흘해가 아들이 없이 훙서하였으므로 그를 왕으로 세웠다.
원년 병진(丙辰, 356년)은 동진(東晉) 목제(穆帝) 영화(永和) 12년이다.
一云奈密 姓金 名奈勿 仇道葛文王之孫 訖解薨 無子 立之 元年丙辰 穆帝永和十二
年
실성이사금實聖尼師今
이름은 실성(實聖)이니 알지의 후손이다. 내물이 훙서할 적에 아들이 어렸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그를 왕으로 세웠다. 원년 임인(壬寅, 402년)은 동진 안제(安帝) 원
흥(元興) 원년이다.
名實聖 閼智裔孫 奈勿薨 子幼 國人立之 元年壬寅 安帝元興元年
눌지마립간訥祇麻立干
김대문(金大問)이 이르기를, “마립(麻立)은 방언(方言)으로 말뚝[橛]을 이른다. 말
뚝은 정성스럽게 잡고 위치를 조준(照準)하여 고정시키는 것인데 왕의 말뚝이 위주
가 되고 신하의 말뚝은 그 아래 벌려 세운다. 인하여 마립간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이름은 눌지(訥祗)인데 실성을 시해하고 자립하였다. 원년 정사(丁巳, 417년)는 동
진 안제(安帝) 의희(義熙) 13년이다. 22년 무인(戊寅, 438년)에 백성들에게 우거(牛
車)의 법을 가르쳤다.
金大問云 麻立 方言謂橛也 橛謂諴'照2)準位而置 則王橛爲主 臣橛列於下 因以名之
名訥祇 弑實聖而自立 元年丁巳 安帝義熙十三年 二十二年戊寅 敎民牛車之法
자비마립간慈悲麻立干
이름은 자비(慈悲)이니 눌지의 장남이다. 원년 무술(戊戌, 458년)은 송(宋)나라 효
무제(孝武帝) 대명(大明) 2년이다.
2) 장서각 중간본에는 操라고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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名慈悲 訥祗長子 元年戊戌 宋武帝大明二年
소지마립간炤智麻立干
이름은 소지(炤智)이니 자비의 장남이다. 어려서 효행이 있었고 겸양과 공손으로
스스로를 지켰다. 원년 기미(己未, 479년)는 송나라 순제(順帝) 승명(昇明) 3년이다.
12년 경오(庚午, 490년)에 처음으로 시장을 열어 사방의 재화를 유통시켰다.
名炤智 慈悲長子 幼有孝行 謙恭自守 元年己未 順帝昇明三年 十二年庚午 初開市肆
以通四方之貨
지증마립간智證麻立干
이름은 지대로(智大路)이니 내물왕의 증손이다. 지대로는 옥체가 장대하였고 담력
이 남보다 훨씬 뛰어났는데 전왕(前王)이 훙서할 적에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왕위
를 계승하였다. 원년 경진(庚辰, 500년)은 제(齊)나라 폐제(廢帝 동혼후(東昏侯)) 영
원(永元) 2년이다. 3년 임오(壬午, 502년)에 순장(殉葬)을 금하였다. 이보다 앞서 왕
이 훙서하면 남녀 각각 5인을 순장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금하였다. 주군(州郡)의
장관에게 명하여 농사를 권장하게 하니, 비로소 소를 이용하여 경작하였다. 4년 계
미(癸未, 503년)에 군신들이 상언(上言)하기를, “시조(始祖)가 창업(創業)한 이후로
국호가 일정하지 않아 사라(斯羅)라고 일컫기도 하고 사로(斯盧)라고 일컫기도 하고
신라(新羅)라고 일컫기도 하였습니다. 신(新)이라는 것은 덕업(德業)이 날로 새로워
진다는 뜻이고, 라(羅)라는 것은 사방을 망라(網羅)한다는 뜻이니, 신라로 국호를 삼
는 것이 마땅합니다. 또 살펴보건대, 예로부터 국가를 소유한 자는 모두 제(帝)라고
일컫거나 왕(王)이라고 일컬었습니다. 우리는 나라를 세운 지 지금 22세(世)가 되었
는데 다만 방언으로 왕을 칭호하고 아직 존호(尊號)를 정하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군신들이 의논을 정하여 삼가 신라국왕(新羅國王)이라는 호를 올립니다.” 하니, 왕
이 그대로 따랐다. 5년 갑신(甲申, 504년)에 상복법(喪服法)을 제정하였다. 15년 갑
오(甲午, 514년)에 왕이 훙서하자 시호를 지증(智證)이라 하였다. 시법(諡法)이 이로
부터 시작되었다.
名智大路 奈勿王曾孫 王體鴻大 膽力過人 前王薨 無子 故繼位 元年庚辰 齊廢帝永
元二年 三年壬午 禁殉葬 前此 王薨 殉以男女各五人 至是禁焉 分命州郡主 勸農 始用
牛耕 四年癸未 群臣上言 始祖創業以來 國號未定 或稱斯羅 或稱斯盧 或稱新羅 新者
德業日新 羅者 網羅四方之義 則其爲國號宜矣 又觀自古有國家者 皆稱帝稱王 自我立
國 至今二十二世 但稱方言 未定尊號 今群臣定議 謹上號新羅國王 王從之 五年甲申
制喪服法 十五年甲午 王薨 諡曰智證 諡法始此
법흥왕法興王
이름은 원종(原宗)이니 지증의 장남이다. 신장이 7척이고 관후(寬厚)하여 사람을
사랑하였다. 원년 갑오(甲午, 514년)는 양(梁)나라 고조(高祖) 천감(天監) 13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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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경자(庚子, 520년)에 율령(律令)을 반포하여 비로소 백관(百官)의 공복(公服)을
제정하였다. 23년 병진(丙辰, 536년)에 비로소 연호를 건원(建元) 원년이라 칭하였
다. 25년 무오(戊午, 538년)에 외관(外官)이 가솔을 거느리고 임지에 부임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名原宗 智證長子 身長七尺 寬厚愛人 元年甲午 梁高祖天監十三年 七年庚子 頒示律
令 始制百官公服 二十三年丙辰 始稱年號 建元元年 二十五年戊午 許外官挈家之任
진흥왕眞興王
이름은 실맥종(彡麥宗)이니 【삼(彡)은 음(音)이 실이다.】 법흥의 아우 입종(立
宗)의 아들이다. 원년 경신(庚申, 540년)은 양나라 고조 대동(大同) 6년이다.
名彡【音失】麥宗 法興弟立宗之子 元年庚申 梁高祖大同六年
진지왕眞智王
이름은 금륜(金輪)이니 진흥의 차남이다. 원년 병신(丙申, 576년)은 진(陳)나라 선
제(宣帝) 대건(大建) 8년이다.
名金輪 眞興次子 元年丙申 陳宣帝大建八年
진평왕(眞平王
이름은 일정(日浄)이니, 진흥의 태자 동륜(銅輪)의 아들이다. 원년 기해(己亥, 579
년)는 양나라 선제 대건 11년이다.
名日浄 眞興太子銅輪之子 元年己亥 宣帝大建十一年
선덕왕(善德王)
이름은 덕만(德曼)이니 진평의 장녀이다. 관인(寬仁)하고 명민(明敏)하였다. 전왕
이 훙서하였는데 아들이 없었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그를 왕으로 세웠다. 원년 임진
(壬辰, 632년)은 당(唐)나라 태종(太宗) 정관(貞觀) 6년이다. 9년 경자(庚子, 640년)
에 자제들을 당나라에 보내 국학(國學)에 입학시켜 주기를 청하였다.
名德曼 眞平長女 寬仁明敏 前王薨 無子 國人立之 元年壬辰 唐太宗貞觀六年 九年
庚子 遺子弟於唐 請入國學
진덕왕(眞德王)
이름은 승만(勝曼)이니 진평왕의 동복 아우 국반(國飯)의 따님이다. 자질(姿質)이
풍려(豐麗)하고 신장이 7척이었는데 손을 드리우면 무릎 아래까지 내려올 정도였다.
원년 정미(丁未, 647년)는 당나라 정관 21년이다. 2년 무신(戊申, 648년)에 동사(冬
使) 함질허(邯帙許)를 차견하여 당나라에 입조(入朝)하게 하였다. 이에 당 태종(太
宗)이 칙문(勅問)하기를, “신라는 대조(大朝 당나라)를 섬기는데 무엇 때문에 연호
를 별도로 칭하는가” 하자, 질허가 아뢰기를, “천조(天朝)가 정삭(正朔)을 반포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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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았기 때문에 선조 법흥왕 이후로 사사로이 연호를 기록하였습니다. 만약 대조에
서 명령을 내린다면 소국(小國)이 어찌 감히 사사로이 연호를 사용하겠습니까”
하니, 태종이 그 말을 옳게 여겼다. 3년 기유(己酉, 649년)에 비로소 중국 제도에
의거하여 관복(官服)을 만들었다. 4년 경술(庚戌, 650년)에 사신을 당나라에 파견하
여 백제의 군사를 대파한 일을 고하였는데, 왕이 스스로 태평송(太平頌)을 짓고 비
단을 짜서 무늬를 놓아서 당나라에 바쳤다. 그 가사는 다음과 같다.
名勝曼 眞平母弟國飯之女 姿質豐麗 長七尺 垂手過膝 元年丁未 貞觀二十一年 二年
戊申 差冬使邯帙許 朝唐 太宗勅問 新羅臣事大朝 何以別稱年號 帙許言天朝未頒正朔
故先祖法興王以來 私有紀年 若大朝有命 小國又何敢焉 太宗然之 三年己酉 始依華制
爲冠服 四年庚戌 遣使大唐 告破百濟之衆 王自製太平頌 織錦爲文 以獻唐 其詞曰
위대한 당나라 대업을 세우니 大唐開鴻業
거룩한 제왕의 모책이 창성하도다 巍巍皇猷昌
전란을 끝내어 천하를 평정하고 止戈戎衣定
문치를 닦아 백왕을 계승하였네 修文契百王
【 통감 에 계자(契字)가 계자(繼字)로 되어 있다. 通鑑契作繼】
하늘을 대신하여 은택을 비처럼 뿌리고 統天崇雨施
만물을 다스림엔 땅의 도를 본받았네 理物體含章
인덕을 깊이 펴기를 일월과 같이하고 深仁諧日月
천운을 따라 우당3)의 치세를 힘썼네 撫運邁虞唐
【 통감 에 일월은 일용으로 되어 있고 우당은 시강으로 되어 있다. 通鑑日月作
日用 虞唐作時康】
깃발은 어찌 그리 찬란하며 幡旗何赫赫
북소리는 어찌 그리 우렁찬가 鉦鼓何鍠鍠
외방의 오랑캐로 황명을 어기는 자는 外夷違命者
하늘의 재앙을 받아 멸망하리라 顚覆被天殃
순후한 풍속이 곳곳에 어리니 淳風凝幽顯
원근에서 다투어 상서를 바치네 遐邇競呈祥
사시의 기후는 옥촉4)처럼 화창하고 四時和玉燭
칠요의 광명은 만방을 돌아드네5) 七曜巡萬方
산악의 정기는 보필할 재상을 낳고 維嶽降宰輔
황제는 충량한 신하에게 일을 맡겼네 維帝任忠良
삼황오제의 덕 하나로 이룩되니 五三成一德
3) 우당(虞唐)에서 우(虞)는 순(舜)임금이, 당은 요(堯) 임금이 다스린 나라 이름으로 태평성세(泰平盛世)를
말한다.
4) 옥촉(玉燭)은 사시(四時)의 기운이 화창한 것으로, 태평성세를 형용한 말이다. 이아(爾雅) 석천(釋天)에
“사시의 기운이 화창한 것을 일러 옥 촛불[玉燭]이라 한다.” 하였다.
5) 칠요(七曜)는 일(日), 월(月), 금(金), 목(木), 수(水), 화(火), 토(土)의 일곱 개의 별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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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당나라 황도(皇道)가 빛나도다 昭我唐家皇
이에 고종이 가상히 여겼다. 이 해에 비로소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였다.
高宗嘉焉 是歲 始行中國年號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성은 김이요 이름은 춘추(春秋)이니 진지왕의 아들인 이찬(伊飡) 용춘(龍春)의 아
들이다. 의표(儀表)가 영위(英偉)하고 어려서부터 세상을 구제할 뜻이 있었다. 원년
갑인(甲寅, 654년)은 당나라 고종(高宗) 영휘(永徽) 5년이다. 7년 경신(庚申 660
년)에 당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 등과 더불어 백제(百濟)를 치니 백제가 망하였
다.
姓金 名春秋 眞智王子伊飡龍春之子 儀表英偉 幼有濟世志 元年甲寅 高宗永徽五年
七年庚申 與唐將蘇定方等 共伐百濟百濟亡
문무왕(文武王)
이름은 법민(法敏)이니 태종의 태자이다. 의표가 영특하고 총명하며 지략이 많았
다. 무열이 소정방과 더불어 백제를 평정할 적에 법민이 종군하여 큰 공을 세웠다.
이에 이르러 즉위하였다. 원년 신유(辛酉, 661년)는 당나라 고종 용삭(龍朔) 원년이
다. 4년 갑자(甲子, 664년)에 부인 또한 중국의 의상을 입게 하였다. 8년 무진(戊
辰, 668년)에 당나라 병사와 함께 고구려를 치니 고구려가 망하였다. 14년 갑술
(甲戌, 674년)에 대내마(大奈麻) 덕복(德福)이 당나라로 들어가 숙위(宿衛)하고 역
술(曆術)을 배워 돌아와 새로운 역법(曆法)으로 고쳐 사용하기를 청하였다. 15년 을
해(乙亥, 675년)에 모든 관사와 주군의 인장을 주조하여 나누어 주었다.
名法敏 太宗太子 姿表英特聰明 多智略 武烈與蘇定方平百濟 法敏從之 有大功 至是
即7位 元年辛酉 高宗龍朔元年 四年甲子 令婦人亦服中朝衣裳 八年戊辰 與唐兵共伐高
句麗 高句麗亡 十四年甲戌 大奈麻德福入唐宿衛 傳學曆術而還 請改用新曆法 十五年
乙亥 鑄百司州郡印 頒之
신문왕(神文王)
이름은 정명(政明)이니 문무왕의 장남이다. 원년 신사(辛巳, 681년)는 고종 개요
(開耀) 원년이다. 6년 병술(丙戌, 686년)에 사신을 보내 당나라에 들어가 예전(禮
典)과 사장(詞章)을 청하니, 측천무후(則天武后)가 담당 부서로 하여금 길흉(吉凶)에
관계된 중요한 예(禮)를 베끼게 하고, 아울러 규계(規誡)에 관계되는 문사(文詞)까지
도 채집하여 50권으로 엮어서 하사하였다.
名政明 文武王長子 元年辛巳 高宗開耀元年 六年丙戌 遣使入唐 請禮典幷詞章 則
天令所司 寫吉凶要禮 幷采文詞涉於規誡者 勒成五十巻 賜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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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소왕(孝昭王)
이름은 이홍(理洪)이니 신문의 태자이다. 원년 임진(壬辰, 692년)은 측천무후 사
성(嗣聖) 9년이다.
名理洪 神文太子 元年壬辰 武后嗣聖九年
성덕왕(聖德王)
이름은 흥광(興光)이니 효소의 아우이다. 효소가 훙서하였는데 아들이 없었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그를 왕으로 세웠다. 원년 임인(壬寅, 702년)은 측천무후 사성 19년
이다. 17년 임자(壬子, 712년)6)에 처음으로 누각(漏刻)을 만들었다.
名興光 孝昭弟也 孝昭薨 無子 國人立之 元年壬寅 嗣聖十九年 十七年壬子 始造漏
刻
효성왕(孝成王)
이름은 승경(承慶)이니 성덕의 둘째 아들이다. 원년 정축(丁丑, 737년)은 현종(玄
宗) 개원(開元) 25년이다. 6년 임오(壬午, 742년)에 왕이 훙서하였는데, 유명(遺命)
에 따라 법류사(法流寺) 남쪽에서 관을 태워 뼈를 동해에 뿌렸다.
名承慶 聖德第二子 元年丁丑 玄宗開元二十五年 六年壬午 王薨 以遺命 燒柩於法
流寺南 散骨東海
경덕왕(景德王)
이름은 헌영(憲英)이니 효성의 아우이다. 효성이 아들이 없었으므로 그를 세워서
태자를 삼았는데, 이에 이르러 왕위를 계승하였다. 원년 임오(壬午, 742년)는 현종
천보(天寶) 원년이다.
名憲英 孝成之弟 孝成無子 立爲太子 至是嗣位 元年壬午 天寶元年
혜공왕(惠恭王)
이름은 건운(乾運)이니 경덕의 적자(嫡子)이다. 원년 을사(乙巳, 765년)는 대종(大
宗) 영태(永泰) 원년이다. 16년 경신(庚申, 780년)에 이찬(伊飡) 김지정(金志貞)이
무리를 모아 왕궁을 에워싸자 상대등(上大等) 김양상(金良相)이 이찬 경신(敬信)과
더불어 군사를 일으켜 김지정 등을 죽였으나 왕과 후비(后妃)는 난병(亂兵)에게 해
를 당하였다. 양상이 자립하여 왕이 되어서 전왕에게 혜공이란 시호를 올렸다.
名乾運 景德嫡子 元年乙巳 代宗永泰元年 十六年庚申 伊飡金志貞 聚衆圍王宮 上大
等金良相 與伊飡敬信 擧兵誅志貞等 王與后妃 爲亂兵所害 良相自立爲王 諡王曰惠恭
선덕왕(宣德王)
이름은 양상(良相)이니 내물의 10대손이다. 원년 경신(庚申, 780년)은 덕종(德宗)
6) 성덕왕(聖德王) 17년은 무오(戊午, 718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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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중(建中) 원년이다. 6년 을축(乙丑, 785년)에 왕이 훙서하였는데 유명에 따라 불
교의 제도에 의하여 화장하여 뼈를 동해에 뿌렸다. 아들이 없었으므로 나라 사람들
이 상대등 경신(敬信)을 왕으로 세웠다.
名良相 奈勿十世孫 元年庚申 德宗建中元年 六年乙丑 王薨 遺命 依佛制燒火 散骨
東海 無子 國人立上大等敬信
원성왕(元聖王)
이름은 경신(敬信)이니 내물의 12세손이다. 원년 을축(乙丑, 785년)은 덕종 정원
(貞元) 원년이다. 4년 무진(戊辰, 788년)에 비로소 독서출신법(讀書出身法)을 정하
였다. 14년 무인(戊寅, 798년)에 왕이 훙서하였는데 유명에 따라 봉덕사(奉德寺) 남
쪽에서 관을 태웠다.
名敬信 奈勿十二世孫 元年乙丑 德宗貞元元年 四年戊辰 始定讀書出身法 十四年戊
寅 王薨 以遺命 燒柩於奉德寺南
소성왕(昭聖王)
이름은 준옹(俊邕)이니 원성의 손자이다. 원년 기묘(己卯, 799년)는 당나라 덕종
정원 15년이다.
名俊邕 元聖之孫 元年己卯 德宗貞元十五年
애장왕(哀莊王)
이름은 청명(清明)인데 중희(重熙)로 개명(改名)하였다. 소성왕의 태자이다. 원년
경진(庚辰, 800년)은 당나라 덕종 정원 16년이다. 3년 임오(壬午, 302년)에 가야산
(伽耶山) 해인사(海印寺)를 창건하였다.
名淸明 更名重熙 昭聖太子 元年庚辰 德宗貞元十六年 三年壬午 創伽耶山海印寺
헌덕왕(憲德王)
이름은 언승(彥昇)이니 소성왕의 동복 아우이다. 왕을 시해하고 자립하였다. 원년
기축(己丑, 809년)은 헌종(憲宗) 원화(元和) 4년이다.
名彥昇 昭聖同母弟 弑王自立 元年己丑 憲宗元和四年
흥덕왕(興德王)
이름은 수종(秀宗)인데 경휘(景徽)로 개명하였다. 헌덕의 동복 아우이다. 원년 병
오(丙午, 826년)는 경종(敬宗) 보력(寶曆) 2년이다.
名秀宗 改名景徽 憲德母弟 元年丙午 敬宗寶曆二年
희강왕(僖康王)
이름은 제륭(悌隆)이니 원성왕의 손자인 이찬 헌정(憲貞)의 아들이다. 원년 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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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丙辰, 836년)은 문종(文宗) 개성(開成) 원년이다. 3년 무오(戊午, 838년)에 김명(金
明)과 이홍(利弘) 등이 난을 일으키자 왕이 목을 매어 자진하였다. 김명이 자립하였
다.
名悌隆 元聖王孫伊飡憲貞之子 元年丙辰 文宗開成元年 三年戊午 金明利弘等作亂
王自縊 金明自立
민애왕(閔哀王)
이름은 명(明)이니 원성의 증손이다. 원년 무오(戊午, 838년)는 문종 개성 3년이
다. 김양(金陽)이 우징(祐徵)을 받들고 쳐들어가 공격하니 왕은 병사들이 이르렀다
는 소식을 듣고 달아나 월유댁(月遊宅)으로 들어갔다가 인하여 해를 당하였다. 군신
들이 예로써 안장하였다. 우징이 즉위하였다.
名明 元聖曾孫 元年戊午 文宗開成三年 金陽奉祐徵入擊 王聞兵至 奔入月遊宅 因被
害 群臣以禮葬之 祐徵立
신무왕(神武王)
이름은 우징(祐徵)이니 원성의 손자인 상대등 균정(均貞)의 아들이다. 원년 기미
(己未, 839년)는 문종 개성 4년이다.
名祐徵 元聖孫上大等均貞子 元年己未 文宗開成四年
문성왕(文聖王)
이름은 경응(慶膺)이니 신무의 아들이다. 원년 기미(己未, 839년)는 문종 개성 4
년이다. 19년 정축(丁丑, 857년) 9월에 왕이 병이 들자 유조(遺詔)를 내려 숙부인
의정(誼靖)에게 왕위를 전하게 하였다.
名慶膺 神武子 元年己未 文宗開成四年 十九年丁丑九月 王不豫 遺詔傳位於叔父誼
靖
헌안왕(憲安王)
이름은 의정(誼靖)이니 신무왕의 이복(異腹) 아우이다. 원년 정축(丁丑, 857년)은
선종(宣宗) 대중(大中) 11년이다. 5년 신사(辛巳, 861년)에 왕이 병이 들어 자리에
누워 좌우에게 이르기를, “나의 사위 응렴(膺廉)이 어려서부터 노성한 덕이 있었으
니 의당 왕으로 세워야 할 것이다.” 하였다.
名誼靖 神武王異母弟 元年丁丑 宣宗大中十一年 五年辛巳 王寢疾 謂左右曰 甥膺廉
幼有老成之德 宜立之
경문왕(景文王)
이름은 응렴(膺廉)이니 희강왕의 아들인 아찬(阿飡) 계명(啓明)의 아들이며, 헌안
왕의 사위이다. 원년 신사(辛巳, 861년)는 의종(懿宗) 함통(咸通) 2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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名膺廉 僖康王子阿飡啓明之子 憲安王之壻 元年辛巳 懿宗咸通二年
헌강왕憲康王
이름은 정(晸)이니 경문왕의 아들이다. 왕은 성품이 총민하고 책 보기를 좋아하여
한 번 보면 모두 암송하였다. 원년 을미(乙未, 877년)는 희종(僖宗) 건부(乾符) 2
년이다. 3년 정유(丁酉, 877년)에 고려(高麗) 태조(太祖) 왕건(王建)이 송악군(松岳
郡)에서 태어났다.
名晸 景文王子 王性聰敏 喜看書 一覽皆誦 元年乙未 僖宗乾符二年 三年丁酉 高麗
太祖王建 生於松岳郡
정강왕(定康王)
이름은 황(晃)이니 헌강의 아우이다. 원년 병오(丙午, 886년)는 희종 광계(光啓)
2년이다.
名晃 憲康之弟 元年丙午 僖宗光啓二年
진성왕(眞聖王)
이름은 만(曼)이니 정강의 누이이다. 원년 정미(丁未, 887년)는 희종 광계 3년이
다. 왕은 평소에 각간(角干) 위홍(魏弘)과 사통(私通)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항상 궁
안으로 불러들여 용사하였다. 홍이 죽기에 이르러 연소한 미장부(美丈夫)를 몰래 끌
어들여 음란한 짓을 행하였다. 어떤 사람이 시정(時政)을 비방하는 글을 지어 조정
의 길에 방을 붙였다. 어떤 사람이 고하기를, “아마 이는 대야주(大耶州)의 은자(隱
者)인 거인(巨仁)의 소행일 것이다.” 하였다. 이에 왕이 거인을 잡아서 옥사에 가두
고 장차 형벌을 가하려 하였다. 이에 거인이 옥사의 벽에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우공7)이 통곡하자 삼년 동안 가뭄이 들었고 于公慟哭三年旱
추연8)이 슬픔을 머금자 오월에 서리가 내렸나니 鄒衍含悲五月霜
지금 나의 깊은 근심이 도리어 옛날과 같건만 今我幽愁還似古
황천은 아무 말 없이 푸르디 푸를 뿐이로구나 皇天無語但蒼蒼
그날 저녁에 갑자기 번개와 우레가 치고 비와 우박이 쏟아지니 왕이 두려워하여
그를 풀어주었다. 5년 신해(辛亥, 891년)에 북원(北原)의 적장(賊將) 양길(梁吉)이
7) 우공(于公)은 한(漢)나라 무제(武帝)와 소제(昭帝) 때 동해(東海)의 군결조(郡決曹)로 옥사 판결이 공평하
기로 유명하였다. 동해의 효부(孝婦)가 시어머니를 죽였다는 누명을 쓰고 옥리의 심문에 못 이겨 거짓
자복하여 그의 옥안(獄案)이 이루어졌다. 우공이 태수에게 “효부가 시어머니를 죽이지 않았을 것이다.”
고 말하였으나 태수가 말을 들어주지 않자, 그 옥안을 안고 관부에서 울었다. 마침내 태수가 효부를 논
죄하여 죽였는데, 그 후에 동해군에 3년 동안 가뭄이 들었다. 한서(漢書) 권71 「'우정국전(于定國傳)」7
8) 추연(鄒衍)은 전국 시대 제(齊)나라 사람이다. 추연이 연(燕)나라 혜왕(惠王)에게 벼슬하면서 충성을 다
바쳤음에도 혜왕이 좌우의 참소하는 자들의 말을 믿고 그를 감옥에 가두었다. 이에 추연이 하늘을 우러
러 통곡하자 여름 5월이었는데도 하늘에서 서리가 내렸다 한다. 열자(列子) 「'탕문(湯問)」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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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보좌관 궁예(弓裔)를 파견하여 병사를 거느리고 10여 군을 습격하여 주현(州縣)
을 겁략(劫掠)하였다. 그 무리가 5천 명에 이르렀다.
名曼 定康妹也 元年丁未 僖宗光啓三年 王素與角干魏弘通 至是常入內用事 及弘死
潛引年少美丈夫滛之 有人譏謗時政 榜於朝路 或告曰 殆是大耶州隱者巨仁所爲 王命拘
巨仁獄 將刑之 巨仁書於獄壁曰 于公慟哭三年旱 鄒衍含悲五月霜 今我幽愁還似古 皇
天無語但蒼蒼 其夕忽震雷雨雹 主懼而釋之 五年辛亥 北原賊帥梁吉 遣其佐弓裔 率兵
襲十餘郡 劫掠州縣 衆至五千
효공왕(孝恭王)
이름은 요(嶢)이니 헌강의 서자이다. 진성이 양육하여 세워서 태자로 삼았는데,
이에 이르러 즉위하였다. 원년 정사(丁巳, 897년)는 소종(昭宗) 건녕(乾寧) 4년이다.
名嶢 憲康庶子 眞聖養之 立爲太子 至是即7位 元年丁巳 昭宗乾寧四年
신덕왕(神德王)
성은 박이요 이름은 경휘(景暉)이니 아달라(阿達羅)의 원손(遠孫)인 대아찬(大阿
飡) 예겸(乂兼)의 아들이다. 효공이 훙서하였는데 아들이 없었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그를 왕으로 세웠다. 원년 임신(壬申, 912년)은 후량(後梁) 태조(太祖) 건화(乾化) 2
년이다.
姓朴 名景暉 阿達羅遠孫大阿飡乂兼之子 孝恭薨 無子 國人立之 元年壬申 後梁太祖
乾化二年
경명왕(景明王)
이름은 승영(昇英)이니 신덕의 태자이다. 원년 정축(丁丑, 918년)은 후량 말제(末
帝) 정명(貞明) 3년이다. 2년 무인(戊寅, 917년)에 궁예의 휘하가 왕건(王建)을 추
대하자 궁예는 달아나다가 부하에게 피살되었다. 왕건이 즉위하여 원년이라고 일컬
었다.
名昇英 神德太子 元年丁丑 末帝貞明三年 二年戊寅 弓裔麾下推戴王建 弓裔出奔 爲
下所殺 建即7位稱元
경애왕(景哀王)
이름은 위응(魏膺)이니 경명의 동복 아우이다. 원년 갑신(甲申, 924년)은 후당(後
唐) 장종(莊宗) 동광(同光) 2년이다. 견훤(甄萱)에게 피살되었다.
名魏膺 景明母弟 元年甲申 後唐莊宗同光二年 爲甄萱所殺 【事見古蹟】
경순왕(敬順王)
성은 김이요 이름은 부(傅)이니 문성의 후손인 이찬 효종(孝宗)의 아들이다. 견훤
이 왕으로 세웠다. 원년 정해(丁亥, 927년)는 후당 명종(明宗) 천성(天成) 2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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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왕의 시신을 모셔다가 서당(西堂)에 빈렴하고 군신들과 통곡하고 시호를 올렸다.
5년 신묘(辛卯, 931년)에 왕이 고려에 사신을 보내 만나기를 청하였다. 고려의 왕
이 50기(騎)를 거느리고 신라의 서울에 이르니, 왕이 백관과 더불어 교외에서 맞이
하여 임해전(臨海殿)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술기운이 얼큰해지자 왕이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하늘의 도움을 받지 못하여 견훤이 망쳐놓았습니다.” 하고, 인하여 줄
줄 눈물을 흘리며 우니 좌우 사람들이 오열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고려의 왕도 또
한 눈물을 흘리며 위로하였다. 고려의 왕이 인하여 수십 일을 머물다 돌아갔는데
왕이 혈성(穴城)까지 이르러 전송하였다. 고려의 왕이 처음 이르렀을 적에 군사들을
엄히 단속하여 털끝만큼도 범하지 않았다. 이에 서울 사람들과 사녀(士女)들이 서로
경하하여 말하기를, “지난번에 견훤이 왔을 적에는 승냥이나 호랑이를 만난 것 같
더니 이제 왕공(王公)이 이르매 부모를 만난 것 같다.” 하였다.
9년 을미(乙未, 935년)에 왕이 국력이 쇠약해지고 형세가 고립되어 스스로 보전
할 수 없다고 하여 군신들과 더불어 고려에 항복할 것을 모의하였다. 왕자가 말하
기를, “마땅히 충신(忠臣) 의사(義士)들과 더불어 민심을 수습하여 힘이 다한 뒤에
그만두어야 합니다. 어찌 의당 1000년의 사직을 하루아침에 쉽사리 남에게 내어
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왕이 이르기를, “이처럼 위태로워 형세상 보전할 수 없
다. 백성들로 하여금 간뇌도지(肝腦塗地)하게 하는 것은 내가 차마 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이에 시랑(侍郞) 김봉휴(金封休)로 하여금 국서를 가지고 고려에 가서 항복
을 청하게 하였다. 왕자는 통곡하며 왕을 하직하고 개골산(皆骨山)으로 들어가 바위
를 의지하여 집을 짓고 삼베옷을 입고 풀뿌리를 캐서 먹으며 지내다 일생을 마쳤
다.
11월에 고려의 왕이 국서를 받고 교외에 나와 왕을 맞이하여 위로하였다. 유화궁
(柳花宮)에 머물게 하고서 장녀인 낙랑공주(樂浪公主)를 아내로 삼아주고 정승(政
丞)을 삼아 낙랑왕(樂浪王)에 봉해 주었다. 이에 나라는 없어져 경주(慶州)가 되고
신라는 망하였다. 신라는 박씨로 왕이 된 사람이 10분, 석씨로 왕이 된 사람이 8분,
김씨로 왕이 된 사람이 38분이니 도합 56세 992년이다.
【이상은 동국통감 에 나오는데 삼국사(三國史) 를 겸하여 상고하였다.】
姓金 名傅 文聖之後伊飡孝宗之子 爲甄萱所立 元年丁亥 後唐明宗天成二年 擧前王
屍 殯於西堂 與群下慟哭上諡 五年辛卯 王遣使高麗 請相見 麗王以五十騎 至京 王與
百官郊迎 宴於臨海殿酒酣王曰 小國不天 甄萱椓喪 因泫然泣下 左右莫不鳴咽 麗王
亦流涕慰藉之 因留數旬而還 王送至穴城 麗王之初至 肅隊而行 不犯秋毫 都人士女相
慶曰 昔甄氏之來也 如逢豺虎 今王公之至也 如見父母 九年乙未 王以國弱勢孤 不能自
安 乃與群下謀降高麗 王子曰 當與忠臣義士 收集民心 力盡而後已 豈宜以一千年社稷
一朝輕以與人 王曰 孤危若此 勢不能全 至使無辜之民 肝腦塗地 吾不忍也 乃使侍郞金
封休 賚書請降 王子慟哭辭王 入皆骨山 倚巖爲屋 麻衣草食 以終其身 十一月 麗王受
書出郊迎勞 館于柳花宮 妻以長女樂浪公主 拜爲政丞 封樂浪王 國除爲慶州 新羅亡 新
羅 朴氏十王 昔氏八王 金氏三十八王 合五十六世九百九十二年【以上出東國通鑑 兼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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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史】
경주지계(慶州地界)
동으로 울산부계(蔚山府界)까지 62리, 장기현계(長鬐7縣界)까지 83리이며, 남으로
언양현계(彥陽縣界)까지 62리이며, 서쪽으로 청도군계(淸道郡界)까지 76리, 영천군
계(永川郡界)까지 53리이며, 북으로 영일현계(迎日縣界)까지 36리, 청송부계(靑松府
界)와 영덕현계(盈德縣界)까지 150리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783리이다. 【 여지승
람(輿地勝覽) 에 나온다.】
東至蔚山府界六十二里 至長鬐'縣界八十三里 南至彥陽縣界六十二里 西至淸道郡界七
十六里 至永川郡界五十三里 北至迎日縣界三十六里 至靑松府界盈德縣界一百五十里
距京都七百八十三里 【出輿地勝覽9)】
건치연혁(建置沿革)
본래 신라의 옛 도읍이다. 한(漢)나라 오봉(五鳳) 원년(기원전 57년)에 시조 혁거
세(赫居世)가 개국(開國)하여 도읍을 세우고 국호(國號)를 서야벌(徐耶伐)이라고 하
였는데, 혹 사라(斯羅)라고 하기도 하고 혹 사로(斯盧)라고 하기도 하다가 뒤에 신
라라고 일컬었다. 탈해왕 9년(65년)에 시림(始林)에 괴이한 닭의 일이 있어 이름을
계림(雞'林)으로 고치고 인하여 이를 국호를 삼았다. 기림왕(基臨王) 10년(307년)에
다시 신라라고 하였다. 고려 태조 18년(935년)에 경순왕(敬順王) 김부(金傅)가 와서
항복하니 나라는 없어지고 경주(慶州)가 되었다가 23년(940년)에 승격하여 대도독
부(大都督府)가 되었다. 성종(成宗) 6년(987년)에 동경유수(東京留守)로 고쳤다가
14년(996년)에 유수사(留守使)라 일컫고 영동도(嶺東道)에 예속시켰다. 현종(顯宗)
3년(1012년)에 강등되어 경주방어사(慶州防禦使)가 되고, 5년(1015년)에 안동대도
호부(安東大都護府)로 고쳤다가 21년(1030년)에 다시 동경유수가 되었다. 그 당시
에 예방(銳方)이 올린 삼한회토기(三韓會土記)에 고려삼경(高麗三京)이라는 글이 있
었기 때문에 다시 동경유수를 둔 것이다. 신종(神宗) 5년(1202년)에 동경야별초(東
京夜別抄)가 반란을 일으켜 주(州)ㆍ군(郡)을 겁략하므로 군사를 보내 평정하였다.
7년(1024년)에 동경(東京) 사람들이 신라가 다시 성한다는 말을 만들어 상주(尙州)
ㆍ청주(淸州)ㆍ충주(忠州)ㆍ원주도(原州道)에 격문을 보내 반란을 도모하였으므로
지경주사(知慶州事)로 강등시키고, 관내(管內)의 주(州)ㆍ부(府)ㆍ군(郡)ㆍ현(縣)ㆍ향
(鄕)ㆍ부곡(部曲)을 빼앗아 안동과 상주에 나누어 예속시켰다. 고종(高宗) 6년(1219
년)에 다시 유수(留守)로 고쳤으며, 충렬왕(忠烈王) 34년(1308년)에 계림부(雞'林
府)로 고쳐 일컬었으며, 신우(辛禑)가 낙랑(樂浪)이라고 별도로 일컬었다. 본조(本
朝)에서는 태종조(太宗朝)에 다시 경주라는 옛 이름을 회복하였고, 세종조(世宗朝)
9)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경상도(慶尙道)」경주부(慶州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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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진(鎭)을 두었다. 【 여지승람 에 나오는데 고려사(高麗史) 의 지리지(地理志)
를 겸하여 상고하였다.】
本新羅古都 漢五鳳元年 始祖赫居世 開國建都 國號徐耶伐 或稱斯羅 或稱斯盧 後稱
新羅 脫解王九年 始林有雞7怪 更名雞7林 因以爲國號 基臨王十年 復號新羅 高麗太祖十
八年 敬順王金傅來降 國除爲慶州 二十三年 陞爲大都督府 成宗六年 改爲東京留守 十
四年 稱留守使 屬嶺東道 顯宗三年 降爲慶州防禦使 五年 改安東大都護府 二十一年
復爲東京留守 時銳方所上三韓會土記 有高麗三京之文 故復置之 神宗五年 東京夜別抄
作亂 攻劫州郡 遣師討平之 七年 以東京人 造新羅復盛之言 傳檄尙淸忠原州道 謀亂
降知慶州事 奪管內州府郡縣鄕部曲 分隷安東尙州 高宗六年 復爲留守 忠烈王三十四年
改稱雞7林府 辛禑別號樂浪 本朝太宗朝 復慶州舊號 世宗朝置鎭 【出輿地勝覽 兼高麗
史10)地理志11)】
관호연혁(官號沿革)【본부(本府)에 전해 내려오는 선생안(先生案) 을 상고해 내
어 아래와 같이 차례로 나열하지만 고려사 와 같지 않으니 어느 것이 옳은 지는
자세하지 않다. 以本府流來先生案 考出列序如左 而與麗史不同 未詳孰是】
고려 태조(太祖) 23년 경자(庚子, 940년)에 신라를 없애고 경주사(慶州司)라고 불
렀으며 안동대도호 도독부(安東大都護都督府)를 두었다. 성종(成宗) 13년 갑오(甲午,
994년)에 안동대도호를 고쳐 동경유수관(東京留守官)을 삼았다. 목종(穆宗) 5년 임
인(壬寅, 1002년)에 이를 고쳐 안동금주대도호부(安東金州大都護府)를 삼았다. 현종
(顯宗) 3년 임자(壬子, 1012년)에 동경유수(東京留守)를 고쳐 경주방어사(慶州防禦
使)를 삼았고, 현종 5년 갑인(甲寅, 1014년)에 경주방어사를 고쳐 안동대도호부를
삼았고, 현종 9년 무오(戊午, 1018년)에 안동도호부를 고쳐 경주대도호부를 삼았고,
현종 18년 정묘(丁卯, 1027)에 목(牧)을 삼았고, 현종 21년 경오(庚午, 1030년)에
목을 고쳐 동경유수관을 삼았다. 【이하 동경유수관을 고쳐 동경지관(東京知官)을
삼고, 후에 지관을 고쳐 상서(尙書)를 삼고, 또 대판(大判)ㆍ사록(司錄)ㆍ법조(法曹)
ㆍ기실(記室) 등의 관원을 두었는데 어느 해에 그렇게 하였는지 자세하지 않다. 지
관의 일은 야별초(夜別抄)의 반란으로 인하여 강등되어 지주(知州)가 된 듯하다.】
충렬왕(忠烈王) 11년 을유(乙酉, 1285년)에 대판을 고쳐 시랑(侍郞)을 삼았다가 4
년 뒤인 기축(己丑, 1289년)에 다시 대판이라 불렀다. 충렬왕 21년 을미(乙未,
1295년)에 대판을 고쳐 판관(判官)을 삼았다가 정유년(丁酉年, 1297년)에 다시 시
랑이라 불렀다. 충렬왕 34년 무신(戊申, 1308년)에 상서를 고쳐 부윤(府尹)을 삼았
으며 시랑을 고쳐 판관을 삼았다. 신우(辛禑) 4년(1378) 무오에 부윤으로서 원수(元
帥)를 겸하였고, 고려말에는 부윤으로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를 겸하였고 판관으로
권농방어사(勸農防禦使)를 겸하였다. 우리 태조조(太祖朝)에 권농방어사를 폐지하였
10) 중간본에는 高麗史가 考麗史로 되어 있다.
11) 고려사(高麗史) 권57 「7지리지(地理志)」경상도(慶尙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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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효종(孝宗) 원년 경인(庚寅, 1650년)에 예천(醴泉)의 역적이 달아나 기계촌(杞溪
村)에 거접(居接)하여 주인을 시해하였기 때문에 윤(尹)을 강등하여 목(牧)을 삼았
다. 금상조(今上朝 헌종(憲宗)) 기해(己亥, 1839년)에 다시 승격하여 윤(尹)을 삼았
다가 을사(乙巳, 1845년)에 적자(賊子)가 아비를 시해하였기 때문에 강등하여 부사
(府使)를 삼았다. 【역대 부관(府官)의 성명은 선생안 에 자세히 보인다.】
麗太祖二十三年庚子 除羅號爲慶州司 置安東大都護都督府 成宗十三年甲午 改安東
大都護 爲東京留守官 穆宗五年壬寅 改爲安東金州大都護府 顯宗三年壬子 改東京留守
爲慶州防禦使 顯宗五年甲寅 改慶州防禦使爲安東大都護府 顯宗九年戊午 改安東都護
爲慶州大都護府 顯宗十八年丁卯 爲牧 顯宗二十一年庚午 改爲東京留守官 【此下改爲
東京知官 後改知官爲尙書 又置大判司錄法曹記室等官 而未詳在於何年 知官事 疑因夜
別抄之亂 而降爲知州也】忠烈王十一年乙酉 改大判爲侍郞 四年己丑 復號大判 忠烈王
二十一年乙未 改大判爲判官 丁酉 復號侍郞 忠烈王三十四年戊申 改尙書爲府尹 侍郞
爲判官 辛禑四年戊午 以府尹兼元帥 高麗末 以府尹兼兵馬節制使 判官兼勸農防禦使
我太祖朝 廢勸農防禦使 孝宗元年庚寅 以醴泉逆奴 逃接杞溪村 弑主 故降尹爲牧 今上
朝己亥 復陞爲尹 乙巳 以賊子弑父 故降爲府使【歷世府官姓名 詳見先生案】
속현(屬縣)
안강현(安康縣) 부의 북쪽 45리에 있다. 본래 신라의 비화현(比火縣)인데 경덕왕
(景德王)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의창군(義昌郡) 영현(領縣)으로 하였다.【의창은
지금의 흥해(興海)이다.】고려 현종 때에 경주에 예속되었다. 공양왕(恭讓王)이 감무
(監務)를 두었다. 우리 태조조에 다시 경주의 속현이 되었다. 신증(新增) g 그곳에
토성(土城)이 있는데 그 토성 안에 엎드린 거북이 같은 산의 형세가 있기 때문에
구성(龜城)이라고 한다.
기계현(杞溪縣) 부의 북쪽 70리에 있다. 본래 신라의 모혜현(芼兮縣)인데 화계현
(化雞7縣)이라고도 하였다. 경덕왕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의창군의 영현으로 하였
다. 고려 현종 때 경주에 예속되었다. 2신증新增 w 이 현의 남쪽 5리쯤에 읍(邑)의
기지(基址)가 있고, 현의 서쪽 지명은 북관촌(北館村)인데 향교(鄕校)의 기지가 있
다.
자인현(慈仁縣) 부의 서쪽 110리에 있다. 본래 신라의 노사화현(奴斯火縣)인데 기
화현(其火縣)이라고도 한다. 경덕왕 때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장산군(獐山郡)에 예
속되었다.【지금의 경산(慶山)이다.】 고려 현종 때 경주의 속현이 되었다. 7신증新
增 숭정(崇禎) 정축년(1637, 인조 15) 인조조(仁祖朝)에 현인(縣人) 이창후(李昌後)
와 김응명(金應鳴) 등이 상소하여 나누어 설치하기를 청하였다.
신광현(神光縣) 부의 북쪽 80리에 있다. 본래 신라의 동잉음현(東仍音縣)인데 신
을현(神乙縣)이라고도 한다. 경덕왕 때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의창군의 영현으로 하
였고, 뒤에는 일어진(昵7於鎭)이라고도 일컬었다. 고려 태조 13년(930년)에 태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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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히 행행하여 성을 쌓고 이름을 신광진(神光鎭)이라고 고쳤다. 현종 때 경주에 예
속되었다. C신증新增 � 그곳에 토성이 있는데 둘레가 230보이다.
구사부곡(仇史部曲) 부의 서쪽 100리에 있다. 본래 신라의 마진량현(麻珍良縣)이
다. 경덕왕이 여량현(餘粮縣)으로 고쳐 장산군에 예속되었다. 뒤에 강등되어 부곡
(部曲)이 되었다가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신증新增 � 우리 효종조 계사년(1653,
효종 4)에 자인현으로 옮겨 예속되었다.
죽장부곡(竹長部曲) 부의 북쪽 110리 지점인 청송부계(靑松府界)에 있다. 본래 신
라의 장진현(長鎭縣)이다. 고려 때 강등되어 부곡이 되었다.
북안곡부곡(北安谷部曲) 부의 서쪽 100리에 있는데 영천(永川)의 동남촌(東南村)
으로 넘어 들어간다.
<安康縣> 在府北四十五里 本新羅比火縣 景德王改今名 爲義昌郡領縣 【義昌今興
海】 高麗顯宗時 來屬 恭讓王置監務 我太祖朝復屬之 �新增 有士城 城中 有山形如
伏龜 故號龜城 ○<杞溪縣> 在府北七十里本新羅芼兮縣 一云化雞景德王改今名 爲義
昌郡領縣 高麗顯宗時 來屬 {新增 � 縣南五里許 有邑基 縣西地名北館村 有鄕校基址
○<慈仁縣> 在府西一百十里 本新羅奴斯火縣 一云其火 景德王改今名 屬獐山郡 【今
慶山】 高麗顯宗時 來屬 �新增 � 崇禎丁丑仁祖朝 縣人李昌後金應鳴等 疏請分設 ○
<神光縣> 在府北八十里 本新羅東仍音縣 一云神乙景德王改今名 爲義昌郡領縣 後稱
昵'於鎭 高麗太祖十三年 親幸城之 改名神光鎭 顯宗時 來屬 新增 & 有土城 周二百三
十步 ○<仇史部曲> 在府西百里 本新羅麻珍良縣 【珍一作彌】 景德王改餘粮縣 屬獐
山郡 後降爲部曲 改今名 q新增 � 我孝宗朝癸巳 移屬慈仁縣 ○<竹長部曲> 在府北一
百十里靑松府界 本新羅長鎭縣 高麗時 降爲部曲 ○<北安谷部曲> 在府西百里 越入永
川東南村
진관(鎭管)
군(郡)이 넷이니, 울산(蔚山)ㆍ양산(梁山)ㆍ영천(永川)ㆍ흥해(興海)이다. l신증新
增 � 지금은 울산은 부(府)로 승격하였다.
현(縣)이 여섯이니, 청하(淸河)ㆍ영일(迎日)ㆍ장기(長鬐ㆍ기장(機張)ㆍ동래(東萊)
ㆍ언양(彥陽)이다. +신증新增 p 지금은 동래는 따로 독진(獨鎭)을 설치하였고 기장은
전선(戰船)을 설치하여 속오군(束伍軍)을 혁파하였기 때문에 모두 경주의 진관(鎭
管) 속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郡四 蔚山梁山永川興海 @新增 e 今則蔚山 陞爲府 縣六 淸河迎日長鬐'機張東萊彥陽
�新增 � 今則東萊別設獨鎭 機張置戰船 革罷束伍 故皆不在於鎭屬中
속임(屬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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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향소(留鄕所) 좌수(座首) 1인, 별감(別監) 3인
대동(大同) 유사(有司) 2인
관청(官廳) 감관(監官) 2인
상평창(常平倉) 감관(監官) 1인
군기(軍器) 감관 2인
향약(鄕約) 도약정(都約正), 부약정(副約正), 직월(直月) 각 1인 【각 면(面)에 또
한 모두 약정과 직월 1인을 두었다.】
향교(鄕校) 도유사(都有司) 1인, 장의(掌議) 1인, 행유사(行有司) 2인, 전곡(典穀)
1인
서악서원(西岳書院) 원장(院長) 1인, 유사 1인, 전곡 1인
옥산서원(玉山書院) 원장 1인, 유사 1인, 전곡 2인
지소(紙所) 감관 1인
신라시조묘(新羅始祖廟) 수호관(守護官) 1인
경순왕영당(敬順王影堂) 유사 1인
의국(醫局) 도감(都監) 1인, 도약정 예겸유사(都約正例兼有司) 1인, 감제(監劑) 3
인
무학당(武學堂) 교수(敎授) 1인, 유사 1인
양무당(養武堂) 중군(中軍) 1인, 영장 예겸천총(營將例兼千摠) 1인, 파총(把摠) 2
인, 기고관(旗鼓官) 1인, 지구관(知彀'官) 15인, 기패관(旗牌官) 16인, 초관(哨官) 16
인
<留鄕所> 座首一人 別監三人 ○<大同> 有司二人 ○<官廳> 監官二人 ○<常平倉>
監官一人 ○<軍器> 監官二人 ○<鄕約> 都約正副約正直月各一人【各面亦皆有約正直
月一人】○<鄕校> 都有司一人 掌議一人 行有司二人 典穀一人 ○<西岳書院> 院長一
人 有司一人 典穀一人 ○<玉山書院> 院長一人 有司一人 典穀二人 ○<紙所> 監官一
人 ○<新羅始祖廟> 守護官一人 ○<敬順王影堂> 有司一人 ○<醫局> 都監一人 都約
正例兼有司一人 監劑三人 ○<武學堂> 敎授一人 有司一人 ○<養武堂> 中軍一人 營
將例兼千摠一人 把摠二人 旗鼓官一人 知彀7官十五人 旗牌官十六人 哨官十六人
인리노비(人吏奴婢) 【부(附)】
향리(鄕吏) 16인, 가리(假吏) 166인, 관노비(官奴婢)는 모두 88명
鄕吏十六人 假吏一百六十六人 官奴婢並'八十八口
읍명(邑名)
진한(辰韓), 서야벌(徐耶伐), 신로(新盧), 사라(斯羅), 낙랑(樂浪), 계림(雞7林), 월성
(月城), 동경(東京), 금오(金鰲), 문천(蚊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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辰韓 徐耶伐 新盧 斯羅 樂浪 雞'林 月城 東京 金鰲 蚊川
성씨(姓氏)
본부(本府) 박(朴)ㆍ석(昔)ㆍ김(金)【모두 신라의 종성(宗姓)이다.】이(李),【급량
(及梁)】최(崔),【사량(沙梁)】정(鄭),【본피(本彼)】손(孫),【모량(牟梁)】배(裴),【한
저(漢柢】설(薛),【습비(習比)】〇이상 6부의 성씨에 대해서는 고적(古蹟)에 상세히
보인다. 강(康),【동주(洞州)】설(偰,【회골(回鶻】〇인물 하(人物下)에 상세하다,
양(楊)【속성(續姓)이다.】
안강(安康) 안(安), 노(盧), 김(金), 황(黃), 염(廉), 소(邵), 변(邊),【모두 당성(唐
姓)이다.】윤(尹)【송생(松生)】
기계(杞溪) 유(兪), 양(楊), 익(益),【맹(孟)이라고도 한다.】김(金)【김해(金海)】
자인(慈仁) 박(朴), 한(韓), 정(鄭), 주(周), 임(任),【진도(珍島)】변(邊)【가은(加
恩)】
신광(神光) 서(徐), 진(陳), 윤(尹), 신(申)
구사(仇史) 정(鄭), 석(石), 조(曹), 전(全)【장산(章山)】
죽장(竹長) 갈(葛),【속성이다.】이(李), 김(金), 송(宋)【모두 내성(來姓)이다.】
성법이(省法伊) 김(金), 최(崔)【모두 속성이다.】
북안곡(北安谷) 이(李), 송(宋), 갈(葛)
<本府>朴昔金【並7新羅宗姓】李【及梁】崔【沙梁】鄭【本彼】孫【牟梁】裴【漢
柢'】薛【習比】○已上六部姓 詳見古蹟 康【洞州】偰7【回鶻'】○詳人物下 楊【續】○
<安康> 安盧金黃廉邵邊【並7唐】尹【松生】○<杞溪> 兪楊益【一作孟】金【金海】○
<慈仁> 朴韓鄭周任【珍島】邊【加恩】○<神光> 徐陳尹申 ○<仇史> 鄭石曹全【章
山】○<竹長> 葛【續】李金宋【幷來】○<省法伊> 金崔【幷續】○<北安谷> 李宋葛
풍속(風俗)
군자의 나라君子之國
삼국사(三國史) 에 “당나라 태종이 김춘추(金春秋)의 말을 듣고 감탄하여 말하기
를, ‘참으로 군자의 나라로다.’ 하였다.” 하였다.
三國史云 唐太宗聞金春秋之言 嘆曰 誠君子之國也
의복의 빛깔은 흰 것을 숭상한다.服色尙素
수서(隋書) 에, “의복의 빛깔은 흰 것을 숭상하며, 부인들은 머리털을 땋아서 머
리에 틀어 올리고, 여러 가지 비단과 구슬로 장식한다.” 하였다.
隋書 服色尙素 婦人辮7髮繞頭 以雜綵及珠爲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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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인에는 술과 음식만 있을 뿐이다.婚嫁唯酒食
수서 에 “혼인의 예절에는 다만 술과 음식만 있을 뿐이며, 많이 장만하고 적게
장만하는 것은 빈부(貧富)의 정도에 따라 한다.” 하였다.
同上 婚嫁之禮 唯酒食而已 輕重隨貧富
정월 초하루에는 서로 경축한다.元日相慶
당서(唐書) 에, “정월 초하루에는 서로 경축하는데, 이날은 해와 달의 신(神)에게
절한다.” 하였다.
唐書 元日相慶 是日拜日月神
사람을 만나면 반드시 꿇어앉는다.見人必跪7
당서(唐書) 에, “사람을 만나면 반드시 꿇어앉는데 손으로 땅을 짚는 것으로 공
손함을 삼는다.” 하였다.
同上 見人必跪則以手据地爲恭
찰밥으로 까마귀에게 제사지낸다.糯7飯祭烏
신라 소지왕(炤智王)이 이미 금갑(琴匣)의 화(禍)12)를 면하자 나라 사람들이 말하
기를, “만약 까마귀와 쥐와 용과 말과 산돼지의 공(功)이 아니었더라면 임금께서는
화를 입었을 것입니다.” 하였다. 마침내 정월의 첫 자일(子日), 첫 진일(辰日), 첫
오일(午日), 첫 해일(亥日)에는 모든 일에 조심하고 감히 함부로 행동하지 않아 신
일(愼日)로 삼았다. 이날을 속담으로 달도(怛'忉라고 하는데, 슬퍼하고 근심하여 금
기(禁忌)한다는 뜻이다. 또 정월 16일을 오기일(烏忌日)로 정하고, 찰밥으로 제사하
였다. 나라의 풍속이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서출지(書出池) 주
(註)에 보인다.】
新羅炤智王 旣免琴匣之禍 國人以爲若非烏鼠龍馬豬7之功 則王之身戚矣 遂以正月上
子上辰上午上亥等日 忌愼百事 不敢動作 以爲愼日 俚言怛'忉言悲愁而禁忌也 又以十
六日 爲烏忌之日 以糯'飯祭之 國俗至今猶然【詳見書出池註】
을야13)의 길쌈乙夜績麻
12) 신라 소지왕(炤智王)이 즉위한 지 10년 되던 해 천천정(天泉亭)에 행차하다가 까마귀와 쥐가 옆에 와
서 우는 것을 보았는데 쥐가 사람의 말을 흉내 내어 이르기를, “저 까마귀가 가는 곳을 찾아가시오.” 하
였다. 이에 왕이 괴이하게 여겨 기사(騎士)를 시켜 따라가게 하였는데 피촌(避村)이라는 곳에 이르자 돼
지 두 마리가 싸움을 하였다. 그것을 구경하는 동안 까마귀는 간 곳 없고 어떤 노인이 연못 속에서 나
와 글을 바쳤는데, 그 외면에 쓰여 있기를 “뜯어보면 두 사람이 죽고, 뜯어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는
다.”고 되어 있었다. 왕이 이를 보고 두 사람이란 서민을 이른 것이고, 한 사람이란 왕을 이른 것이라
여겨 열어 보니, 그 안에 이르기를, “금갑을 쏘아라(射琴匣).” 하였다. 왕이 급히 궁중에 들어가 금갑을
쏘자, 그 안에서 몰래 간통을 하고 왕을 죽이자고 모의하던 중과 궁주(宮主)를 복주(伏誅)하였다. 이를
금갑(琴匣)의 화(禍)라 한다. 삼국유사(三國遺事) 「'사금갑조(射琴匣條)」7
13) 을야(乙夜)는 하룻밤을 갑(甲), 을(乙), 병(丙), 정(丁), 무(戊)의 오야(五夜)로 나누었을 때 밤 10시경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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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왕(儒理王) 때 육부(六部)를 두 편으로 나누어 왕녀(王女) 두 사람으로 하여
금 각기 부내(部內)의 여자를 거느리고 편을 나누어, 가을 7월 16일부터 매일 일찍
대부(大部)의 뜰에 모여 길쌈을 하다가 을야(乙夜)가 되어서야 파하곤 했다. 8월 보
름이 되어 그들이 해놓은 일의 많고 적음을 살펴서 진 편에서 술과 음식을 장만하
여 이긴 편에게 사례하였다. 이때 노래와 춤과 온갖 유희를 다하는데 이를 가배(嘉
俳)라 하였다. 이때 진 편의 한 여자가 일어나 춤을 추며 탄식하기를, “회소(會蘇)
회소”라고 하였는데 그 소리가 슬프고도 운치가 있었다. 후세 사람이 그 소리를 본
떠 노래를 짓고 ‘회소곡(會蘇曲)’이라고 하였다. 지금까지 그런 풍속이 행하여지고
있다.
儒理王時 中分六部爲二 使王女二人 各率部內女子分朋 自秋七月旣望 每日早集大部
之庭 績麻乙夜而罷 至八月望 考其功之多少 負者置酒食 以謝勝者 於是 歌舞百戲7皆作
謂之嘉俳 是時 負家一女起舞 嘆曰會蘇會蘇 其音哀雅 後人因其聲而作歌 名會蘇曲 國
俗至今行之
풍월주風月主 화랑花郞
법흥왕(法興王) 원년(元年, 514년)에 동남(童男)으로 얼굴과 풍채가 단정한 자를
뽑아서 풍월주(風月主)라 부르며, 착한 선비를 구하여 무리를 만들어 효(孝)ㆍ제(悌)
ㆍ충(忠)ㆍ신(信)을 장려하였다. 〇처음에 신라의 임금과 신하들은 인재를 알 수 없
음을 근심하여, 무리를 지어 모여 놀게 하여 그들의 행의(行義)를 살펴본 뒤에 등용
하려고 하였다. 마침내 아름다운 여자 두 사람을 뽑아서 받들어 원화(源花)를 삼아
남모(南毛)라고 하고 준정(俊貞)이라고 하였는데, 모인 무리가 300여 명이었다. 그
러나 두 여자는 미모를 서로 다투어 질투하였다. 준정이 자신의 집에 술을 준비한
다음 남모에게 억지로 권하여 취하자 물에 던져 죽였다. 남모의 무리들이 그 시체
를 찾아가지고 고발하여 준정은 복주(伏誅)되었다. 그리하여 드디어 원화(源花)의
제도를 폐지하였다. 그 뒤에 다시 미모의 남자를 모아 단장하고 꾸며 화랑(花郞)이
라 일컬으니, 많은 무리가 운집(雲集)하였다. 도의(道義)로써 서로 권면(勸勉)하기도
하고 노래와 풍악으로 서로 즐기기도 하면서 산수(山水)를 찾아다니며 노닐어 아무
리 먼 곳이라도 가지 않는 곳이 없었다. 이로 인하여 간사한 사람과 바른 사람을
알게 되어 가려서 등용하였다.
法興王元年 選童男容儀端正者 號風月主 求善士爲徒衆 以勵孝悌忠信 ○初新羅君臣
患無以知人 欲使類聚群遊 以觀行義 然後擧而用之 遂簡美女二人 奉爲源花 曰南毛曰
俊貞 聚徒三百餘人 二女爭娟相妬 俊貞置酒私第 強勸南毛 酒至醉 投河殺之 其徒得其
屍以告 俊貞伏誅 遂廢源花 其後 更聚美貌男子 粧飾之 名花郞 徒衆雲集 或相磨以道
義 或相悅以歌樂 遊遨7山水 無遠不至 因此知人邪正 擇而用之
칼춤의 유희舞劒之戲'
해당하는 시간이다. 여기서는 늦은 밤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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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창랑(黃倡郞)은 신라 사람이다. 속설에 전하기를, “나이 일곱 살 때에 백제(百
濟)에 들어가서 시가에서 칼춤을 추니, 구경꾼들이 담처럼 둘러섰다. 백제의 왕이
그 소식을 듣고 그를 불러다 보고는 마루에 올라와서 칼춤을 추라고 명령하였다.
창랑은 기회를 타서 백제왕을 찔러 죽였다. 이에 백제 사람들이 그를 죽였다. 신라
사람들이 슬프게 여겨 그의 얼굴 모습을 본떠서 가면(假面)을 만들어서 칼춤 추는
형상을 하였는데, 지금도 그 탈춤이 전해지고 있다.” 한다. 〇신라에는 또 향악(鄕
樂)으로 금환(金丸), 월전(月顚), 대면(大面), 속독(束毒), 준예(狻'猊) 다섯 가지의 가
면극이 있다. 문창(文昌) 최치원(崔致遠)이 금환(金丸)을 읊은 시(詩)는 다음과 같다.
黃倡郞新羅人也 諺傳年七歲 入百濟 市中舞劍 觀者如堵 濟王聞之 召觀 命升堂舞劍
倡郞因剌王 國人殺之 羅人哀之 像其容 爲假面 作舞劍之狀 至今傳之 ○新羅 又有鄕
樂金丸月顚大面束毒狻'猊五技 崔文昌致遠 金丸詩
몸 돌리고 팔 흔들어 금환을 희롱하니 回身掉臂弄金丸
달 구르듯 별 뜨듯 눈 가득히 보이네 月轉星浮滿眼看
의료14)가 있다 한들 이보다 낫겠는가 縱有宜僚那勝此
넓은 바다에 파도 잔잔해짐을 알겠어라 定知鯨海息波瀾
월전(月顚)을 읊은 시는 다음과 같다. 月顚詩
어깨 높고 목 움츠리고 머리털은 꼿꼿한데 肩高項縮髮崔嵬
팔을 걷어 부치고 선비들 술잔을 다투누나 攘臂群儒鬪酒盃
노랫소리 듣고서 사람들 모두 웃으니 聽得歌聲人盡笑
저녁에 세운 깃발 새벽까지 재촉하네 夜頭旗幟暁頭催
대면(大面)을 읊은 시는 다음과 같다. 大面詩
황금빛 얼굴을 가진 바로 그 사람이 黃金面色是其人
손에 구슬 채찍 잡고 귀신을 부리네 手抱珠鞭役鬼神
빨리 닫고 천천히 걷고 운치 있는 춤을 추니 疾歩徐趨呈雅舞
완연히 요 임금 시대에 단봉이 춤추는 듯 宛如丹鳳舞堯春
속독(束毒)을 읊은 시는 다음과 같다. 束毒詩
봉두난발에 쪽빛 얼굴 사람과는 다른데 蓬頭藍面異人間
14) 의료(宜僚)는 금환(金丸)을 잘 놀리는 사람이다.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시남(市南)의 의료는 공놀이
[弄丸]를 함으로써 두 집안의 난리가 화해되었고, 손숙오(孫叔敖)는 우선(羽扇)을 쥐고 잠만 달게 잠으
로써 초인(楚人)이 전쟁을 그만두었으니, 나도 부리가 석 자만 되었으면 좋겠다.” 하였다. 장자(莊子)
「7서무귀(徐無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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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를 거느리고 뜰에 와서 난새처럼 춤추네 押隧來庭學舞鸞
둥둥둥 북을 치매 바람은 선들선들 打皷鼕鼕風瑟瑟
남으로 달아남 북으로 뜀 까닭이 없네 南奔北躍也無端
준예(狻7猊)를 읊은 시는 다음과 같다. 狻7猊詩
멀리 유사를 건너 만리 길 오느라고 遠涉流沙萬里來
털옷은 해어지고 흙먼지만 붙었어라 毛衣破盡着塵埃
머리 흔들고 꼬리 치며 인덕에 길이 드니 搖頭掉尾馴仁德
웅장한 그 기운 어찌 뭇 짐승과 같겠는가 雄氣寧同百獸才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목욕한다.浴東流水
김극기(金克己)의 문집(文集)에, “동도(東都)의 풍속에 6월 보름에 동쪽으로 흐르
는 물에 목욕하고, 인하여 계음(禊7飮)을 하는데 이를 유두연(流頭宴)이라고 한다.”
하였다. 이는 하삭(河朔)15)에 피서(避暑)하는 술잔치를 잘못 알고 계음(禊7飮)이라고
한 것이다.
金克己集 東都遺俗 以六月望浴東流水 因爲禊'飮 謂之流頭晏 蓋以河朔避暑之飮 誤
爲禊'飮耳
가게를 벌여놓고 교역을 한다.列肆交易
물건을 싣는 데는 수레를 사용한다.任載用車
백성의 풍속은 질박하다.民俗質朴
관풍안(觀風案)에, “신라시대의 유풍(遺風)이 있다.” 하였다.
觀風案云云 有羅代之遺風
토지는 비옥하고 풍속은 순박하다.土厚風淳
이첨(李詹)의 기(記)에, “백성들이 예의과 겸양을 안다.” 하였다.
李詹記云云 民知禮讓
번화하고 아름다움이 남쪽 지방에서 으뜸이다.繁華佳麗甲於南方
정인지(鄭麟趾)의 기문에 이런 말이 있다.【이상은 여지승람 에 나온다.】
鄭麟趾記【以上出輿地勝覽】
15) 하삭(河朔)은 하삭음(河朔飮)의 준말로, 여름에 피서하면서 술을 마시는 흥취를 뜻한다. 삼국시대 위
(魏)나라 광록대부(光祿大夫) 유송(劉松)이 원소(袁紹)의 군대를 진압하러 가서 원소의 자제들과 삼복(三
伏) 더위에 밤낮으로 술을 마셔서 흠뻑 취했던 데서 유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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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新增 �
여자는 쪽을 찐다.女子北髻7
신라 때 국도(國都)의 북방이 허전하게 텅비었으므로 여자들이 뒤통수에다 쪽을
쪘다. 인하여 북계(北髻라고 명명하였는데 지금까지도 오히려 그러하다. 꼬리가 짧
은 개를 세상에서 동경구(東京狗)라고 하는데 또한 북방이 허전하였기 때문에 그렇
게 명명한 것이다.
羅時以國都北方虛缺 女子結髻'於腦後 因名北髻至今猶然 狗之短尾者 世謂之東京狗
亦以北方虛故也
선배는 남자를 통칭하는 명칭이다.先輩男子通稱之號
산천(山川)
낭산(狼山) 부(府)의 동쪽 9리에 있다. 진산(鎭山)이다.
명활산(明活山) 부의 동쪽 11리에 있다. �신증新增 7 이 산 아래 언덕이 있어 한지
원(閑地原)이라고 명명하였는데 곧 부성(府城)의 내맥(來脈)이다. 예로부터 나무를
심어 숲을 이루었다. 가정(嘉靖) 임오년(1522, 중종 17)부터 백성들이 대부분 함부
로 경작하여 산맥을 잘라 끊어 물을 끌어 전답에 댔다. 천계(天啓) 계해년(1623, 인
조 1)에 사리역(沙里驛)의 역졸(驛卒)이 마위전(馬位田)으로써 민전(民田)과 바꾸어
이곳으로 옮겨와 거처하였다. 금년에 읍인(邑人)이 소장(訴狀)을 관청에 올려 내맥
을 손상시켰다고 하였으므로 감사(監司)에게 신청하여 사리(沙里)의 옛 역을 철수하
여 다른 곳으로 옮겼다.【지금 살펴보니, 명활산에서 뻗어 나온 한 줄기가 낭산이
되고 낭산으로부터 월성(月城)이 되며, 또 뻗어 나온 한 줄기가 부룡(府龍)이 된다.
여지승람 에서 낭산을 진산이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
토함산(吐含山) 부의 동쪽 30리에 있다. 신라 때에는 동악(東嶽)이라고 부르고,
중사(中祀)를 거행하였다.
금강산(金剛山) 부의 북쪽 7리에 있다. 신라 때에는 북악(北嶽)이라고 불렀다.
비월동산(非月洞山) 부의 서쪽 67리에 있다.
선도산(仙桃山) 부의 서쪽 7리에 있다. 신라 때에는 서악(西嶽)이라고 불렀다. 혹
은 서술(西述), 서형(西兄), 서연(西鳶)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함월산(含月山) 부의 동쪽 50리에 있다. 신라 때에는 남악(南嶽)이라고 불렀다.
<狼山> 在府東九里 鎭山 ○<明活山> 在府東十一里 �新增 � 山下有原 名曰閑地原
乃府城來脉7也 自古種樹成藪 自嘉靖壬午年間 民多冒耕 而鑿斷山脉引水灌田 天啓癸
亥年間 沙里驛卒 以馬位田 換得民田 移居於此 今年因邑人呈狀 爲其有傷來脉申請監
司 撤移沙里舊驛【今按明活山一枝爲狼山 自狼山爲月城 而一枝爲府龍 輿地勝覽 以狼
山爲鎭山者 非也】○<吐含山> 在府東三十里 新羅稱東嶽 爲中祀 ○<金剛山> 在府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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七里 新羅號北嶽 ○<非月洞山> 在府西六十七里 ○<仙桃山> 在府西七里 新羅號西嶽
或稱西述 或稱西兄 或稱西鳶 ○<含月山> 在府東五十里 新羅號南嶽
금오산(金鰲山) 일명 남산(南山)이라고도 한다. 부의 남쪽 6리에 있다. 〇당 나라
의 고운(顧雲)이 최 문창(崔文昌)16)에게 다음과 같은 시를 주었다.
<金鰲山> 一名南山 在府南六里 ○唐顧雲贈崔文昌詩
내 들으니 바닷가에 세 마리의 금오가 있어 我聞海上三金鰲
머리 위에 높디높은 산을 이었다 하네 金鰲頭戴山高高
산 위엔 구슬궁 진주대궐 황금전이요 山之上兮珠宮貝闕黃金殿
산 아래엔 천리만리 끝없이 넓은 물결 山之下兮千里萬里之洪濤
그 곁에 한 점의 계림이 푸른데 傍邊一點雞'林碧
금오산이 정기 모아 빼어난 인재 낳았네. 鰲山孕秀生奇特
<형산(兄山)> 안강현(安康縣) 동쪽 21리에 있다. 신라 때에는 북형산(北兄山)이라
부르고 중사(中祀)를 거행하였다.
<울개산(蔚介山)> 부의 서쪽 30리에 있다.
<복안산(伏安山)> 부의 남쪽 30리에 있다.
<묵장산(墨匠山)> 부의 남쪽 40리에 있다.
<지화곡산(只火谷山)> 부의 서쪽 40리에 있다.
<단석산(斷石山)> 월생산(月生山)이라고도 한다. 부의 서쪽 23리에 있다. 속설에
전하기를, “신라의 각간(角干) 김유신(金庾信)이 고구려와 백제를 치고자 하여 신검
(神劒)을 구해가지고 월생산의 석굴 속에 숨어들어가 검술(劍術)을 수련(修鍊)하였
다. 시험삼아 큰 돌을 잘라서 산더미처럼 쌓였는데, 그 돌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
아래에 절을 창건하고 단석사(斷石寺)라 명명하였다.” 한다.
<자옥산(紫玉山)> 안강현(安康縣)의 서쪽 13리에 있다.
<달성산(達城山)> 안강현 남쪽 20리에 있다.
<비학산(飛鶴山)> 신광현(神光縣) 서쪽 5리에 있다.
<인박산(咽薄山)> 부의 남쪽 35리에 있다. 속설에 전하기를, “각간 김유신이 보
검(寶劍)을 지니고 깊은 골짜기에 들어가서 향(香)을 사르고 하늘에 고유(告由)하여
병법(兵法)을 기도하던 곳이다.” 한다.
<사라현(舍羅峴)> 부의 북쪽 30리에 있다.
<건대령(件代嶺)> 부의 동쪽 36리에 있다.
<여근곡(女根谷)> 부의 서쪽 41리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백제의 장군 우소
(亏7召)가 이곳에 병사를 매복시켜 두었는데, 신라의 선덕여왕(善德女王)이 각간(角
干) 알천(閼川)에게 습격하도록 명하여 한 사람도 남김없이 엄습하여 다 죽였다.”
16) 최치원(崔致遠)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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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
<성현(成峴)> 부의 북쪽 58리에 있다.
<팔조령(八助嶺)> 부의 동쪽 65리에 있다.
<마북산(馬北山)> 신광현(神光縣) 북쪽 26리에 있다.
<시령(杮�嶺)> 부의 동쪽 65리 장기현(長鬐7縣)의 경계에 있다.
<추령(楸嶺)> 부의 동쪽 30리에 있다.
<성령(荿嶺)> 부의 동쪽 40리에 있다.
<치술령(鵄'述嶺)> 부의 남쪽 50리에 있다. 곧 박제상(朴堤上)의 아내가 바라보며
곡하다가 자진한 곳이다.
<바다[海]> 부의 동쪽 70리에 있다.
<팔조포(八助浦)> 부의 동쪽 70리에 있다. 어량(魚梁)이 있다.
<형산포(兄山浦)> 안강현 동쪽 20리에 있다. 굴연(堀淵)의 하류이다.
<동천(東川)> 북천(北川)이라고도 하고 알천(閼川)이라고도 한다. 부의 동쪽 5리
에 있다. 추령에서 발원(發源)하여 굴연으로 흘러 들어간다. V신증新增 � 세상에 전
하기를, “시내가 동북으로부터 흘러나와 곧장 읍의 거주지로 뚫고 들어오므로 고려
현종조(縣宗朝)에 전라, 충청, 경상 3도의 군정(軍丁)을 징발하여 돌로 제방을 쌓고
나무를 심어 숲을 이루어서 수해를 방지하였다.” 한다.
<서천(西川)> 부의 서쪽 4리에 있다. 발원지가 셋인데, 하나는 인박산(咽薄山)에
서 발원하며 하나는 묵장산(墨匠山)에서 발원하며 하나는 지화곡산(只火谷山)에서
발원한다. 합류(合流)하여 형산포(兄山浦)로 들어간다.
<온지연(温之淵)> 안강현 동쪽 24리에 있다. 용당(龍堂)이 있는데 가물 때 비가
내리기를 빌면 감응이 있다.
<굴연천(堀淵川)> 부의 북쪽 20리에 있다. 어량(魚梁)이 있다.
<사등이천(史等伊川)> 황천(荒川)이라고도 한다. 부의 동쪽 30리에 있다. 토함산
(吐含山)에서 발원하여 서천으로 흘러 들어간다.
<兄山> 在安康縣東二十一里 新羅稱北兄山 爲中祀 ○<蔚介山> 在府西三十里 ○
<伏安山> 在府南三十里 ○<墨匠山> 在府南四十里 ○<只火谷山> 在府西四十里 ○
<斷石山> 一云月生山 在府西二十三里 諺傳 新羅角干金庾信 欲伐麗濟 得神劒 隱入
月生山石窟鍊劍 試斷大石 疊積如山 其石尙存 創寺其下 名曰斷石 ○<紫玉山> 在安
康縣西十三里 ○<達城山> 在安康縣南二十里 ○<飛鶴山> 在神光縣西五里 ○<咽薄
山> 在府南三十五里 諺傳金角干携寶劒入深壑 燒香告天 祈禱兵法處 ○<舍羅峴> 在
府北三十里 ○<件代嶺> 在府東三十六里 ○<女根谷> 在府西四十一里 世傳百濟將軍
于召 伏兵于北 新羅善德王命角干閼川 掩殺之無孑遺 此王知幾三事之一也 ○<成峴>
在府北五十八里 ○<八助嶺> 在府東六十五里 ○<馬北山> 在神光縣北二十六里 ○<杮�
嶺> 在府東六十五里 長鬐'縣界 ○<楸嶺> 在府東三十里 ○<筬嶺> 在府東四十里 ○
<鵄7述嶺> 在府南五十里 即7朴堤上妻 望哭自盡處 ○<海> 在府東七十里 ○<八助浦>
在府東七十里 有魚梁 ○ <兄山浦> 在安康縣東二十里 堀淵下流 ○<東川> 一云北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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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云閼川 在府東五里 出楸嶺入堀淵 �新增 俗傳川流自東北 直衝邑居 故高麗顯宗朝
發全羅忠淸慶尙三道軍丁 築石爲堤 成植林藪 以防水害云 ○<西川> 在府西四里有三
源 一出咽薄山 一出墨匠山 一出只火谷山 合流入兄山浦 ○<温之淵> 在安康縣東二十
四里 有龍堂 禱雨有應 ○<堀淵川> 在府北三十五里 有魚梁 ○<史等伊川> 一云荒川
在府東三十里 源出吐含山 入西川
<문천(蚊川)> 부의 남쪽 5리에 있다. 사등이천의 하류이다. 〇김극기(金克己)의
시(詩)는 다음과 같다.
<蚊川> 在府南五里 史等伊川下流 ○金克己詩
동황17)이 한 손으로 내려준 은택 東皇一手恩
만물이 골고루 받았도다 萬彙均沾被
꽃 마음은 따스한 바람에 놀라고 花心驚惠風
새 소리는 화창한 기운에 감응하네 鳥聲感和氣
붉디붉은 빛은 복숭아꽃에 오르고 朱朱上緋桃
희디흰 빛은 오얏꽃을 찾았도다 白白尋練李
꾀꼬리 혀는 노래하는 아이와 다투고 鶯舌鬪歌童
제비 허리는 춤추는 기녀를 기만하네 燕腰欺舞妓
고운 봄날을 맞이하여 占斷艶陽天
그윽한 승경 찾아가네 追攀幽勝地
토령의 정상에 올라보고 將升兎嶺巓7
문천의 물가를 따라가네 却並7蚊川涘
공중을 우러러 아득히 바라보고 仰空遙送目
언덕에 올라 고요히 귀 기울이네 臨岸靜傾耳
첩첩한 산은 병풍처럼 둘러있고 屛開簇簇山
출렁이는 물은 거울처럼 반짝이네 鏡轉溶溶水
구름 끝엔 황곡이 붙어 날고 雲端帖黃鵠
수면에는 붉은 잉어 뛰어 오르네 浪面跳紫鯉
그윽한 향기는 혜초 난초에서 움키고 幽馨掬'蕙蘭
빼어난 빛은 연과 마름에서 맛보겠네 秀色飡荷芰'
아름다운 경치는 만나기 어렵거니 美景苦難逢
덧없는 인생을 어찌 오래 믿겠는가 浮生寧久恃
세상 밖 놀음을 하려 할진댄 要成域外遊
인간 세상 누를 모두 버려야 하리 都遣人間累
붓을 놀려 미친 듯 시를 써보고 走筆縱狂吟
17) 동황(東皇)은 동방의 군주란 뜻으로 동군(東君)이라고도 칭하는데, 봄은 오행(五行)에 있어서 동방에
해당하기 때문에 봄의 신(神)을 지칭하는 말로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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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잔을 들어 흠뻑 취함을 자랑하네 飛觴誇爛醉
시비는 통발을 잊은18) 듯하고 是非兩忘筌
영욕은 헌신짝 벗 듯하네 榮悴俱脫屣
푸른 술 아직도 다하지 않았는데 綠醅猶未闌7
붉은 해는 홀연히 서산에 지누나 紅晷忽將墜
오늘 저녁이 어떤 때이며 今夕是何時
이내 몸은 누구의 아들인가 此身誰氏子
만약 봉래산의 신선이 아니라면 若非蓬島仙
참으로 칠원의 관리19)이리라 眞箇漆園吏
삶과 죽음도 외려 마음에 잊었거니20) 浮休尙忘情
감과 머묾을 어찌 개의하겠는가 去住寧介意
머리 들어 연하를 하직하고 擧頭謝煙霞
부축 받으며 발길을 돌리노니 扶腋回杖履
다만 두려워라 거마가 내달리는 세상에서 但恐車馬場
아침 일찍부터 명리를 따르는 것이 晨興趁'聲利
또 불계시(祓7禊'詩)는 다음과 같다. 又祓'禊7詩
금년 봄에 날씨 궂어 갠 날 적고 今年濕蟄少開霽
열흘 동안의 장맛비 강물을 엎어놓은 듯 十日愁霖如倒河
즐거워라 홀연히 씻은 듯 구름 걷히니 忽喜陰雲淨似掃
남산에 만 줄기 푸른 산이 드러나네 南山萬朶開靑螺
빼어난 산세 오백 리를 치달리다가 逸勢橫奔五百里
중도에 구부러져 비스듬히 솟았어라 中塗拗怒成坡陀
그 아래 한 줄기 문천이 있으니 下有蚊川一帶水
천만 번 서리고 꺾여 구불구불 흐르네 千盤萬折流逶'蛇
월정교 어귀로 흘러 내려가니 走向月精橋口過
놀란 물결 부서져 옥을 울리는 듯 驚瀾崩碎響鳴珂
엄장루 아래 이르러선 점점 질펀해져 嚴莊樓下漸汗漫
물결 잔잔 모래 평평 비단을 펼친 듯 浪息沙平鋪蜀羅
낙읍의 제생 십 일만 명이 洛邑諸生十一萬指
물에서 불계하니 어깨 서로 닿는구나 臨流祓7禊'肩相磨
18) 시비비비를 완전히 잊어버린다는 뜻이다. 장자(莊子) 외물(外物)에 “통발은 고기를 잡는 것인데 고기
를 잡고 나면 통발은 잊어버리고, 올가미는 토기를 잡는 것인데 토기를 잡고 나면 올가미는 잊어버리는
것이다(筌者所以在魚 得魚而忘筌 蹄者所以在兎 得兎而忘蹄).”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19) 칠원(漆園)의 관리는 장자(莊子)를 가리킨다. 장자가 몽(蒙)의 칠원이란 곳의 관리로 있었기 때문에 이
렇게 부르는 것이다.
20) 장자 각의(刻意)에 “그 삶은 물거품[浮]과 같고 그 죽음은 쉼[休]과 같다.” 하였는데, 이는 동정(動
靜)에 무심하고 생사(生死)를 하나로 보는 자세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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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때 아름다운 경치 예부터 얻기 어렵나니 良辰美景古難必
성대히 모여 영화21)를 따름 누가 사양하랴 盛集誰辭追永和
더구나 나는 젊어서부터 방광하였으니 而予况又少放狂
붉은 놀잇배 끌고 흰 물결 따르리라 擬拖紅船隨素波
어찌하여 총총히 학사로 향하겠는가 胡爲忩忩向學舎
자리를 맞대고 함께 금잔을 기울이세 促席共倒金叵'羅
포도 같은 푸른 물빛 움킬 만하여라 蒲萄綠漲色可掇7
통쾌히 마셔 붉은 안색 된 줄 몰랐네 痛飮不省朱顔酡
맑게 즐겨 반쯤 취해도 객은 흩어지지 않았건만 淸歡半酣'客未散
대숲 저 편에서 붉은 해가 먼저 지는구나 竹外紅日先蹉陀
취기에 의기가 갑자기 마구 솟아나니 乘酣7意氣忽橫出
청천에 올라가서 노양22)의 창 휘두르고파라 欲上靑天橫魯戈
<토상지(吐上池)> 부의 동쪽 40리에 있다.
<고위산(高位山)> 부의 남쪽 25리에 있다. 천룡사(天龍寺)의 주산(主山)이다.
【이상은 여지승람 에 나온다.】
<吐上池> 在府東四十里 ○<高位山> 在府南二十五里 天龍寺主山也【以上出輿地勝
覽23)】
신증新增 G
<표암(瓢巖)> 부의 동북쪽 5리에 있다. 이알평(李謁平)이 내려와 살던 곳이다. 세
상에 전하기를, “신라 때 이 바위가 국도(國都)에 해를 끼친다 하여 박을 심어 이
바위를 덮었기 때문에 이렇게 명명한 것이다.” 한다.
<어을어산(於乙於山) 안강현의 진산이다. 현의 서북을 가로 지르고 있다.
<삼승산(三勝山)> 안강현 서쪽 20리에 있다. 골짜기 가운데의 물과 돌이 깨끗하
고 기이하다. 사부(師傅) 정극후(鄭克後)가 서당을 지었다.
<도덕산(道德山)> 안강현 서쪽 10리에 있다. 자옥산(紫玉山)의 서북 봉우리다. 위
에 장암(場巖)이 있고 중간에 두덕암(斗德菴)이 있다. 【자세한 것은 불우조(佛宇條)
에 보인다.】
<화개산(華蓋山)> 옥산서원(玉山書院)의 주산이다. 모양이 화개(華蓋)와 같기 때
문에 이렇게 명명한 것이다.
<설창산(雪倉山)> 안강현 동쪽 8리에 있다. 양좌촌(良佐村)의 주산이다.
21) 영화(永和)는 진(晉)나라 목제(穆帝)의 연호이다. 왕희지(王羲之)의 난정기(蘭亭記)에 의하면, 영화 9년
늦은 봄에 회계(會稽) 산음(山陰)의 난정(蘭亭)에서 왕희지․7사안(謝安) 등 42인의 명사(名士)들이 모여 계
사(禊7事)를 행하고는 이어 유상곡수(流觴曲水)를 하고 시를 지으며 성대한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22) 노양(魯陽)은 노(魯)나라 양공(陽公)을 말한다. 노나라 양공이 한(韓)나라와 한창 전쟁을 하는데 해가
저물려 하자 창을 휘둘러 해를 걷어서 90리 뒤로 물러나게 하였다 한다. 회남자(淮南子) 「7남명훈(覽冥
訓)」'
23)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경상도(慶尙道)」경주부(慶州府) 산천조(山川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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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학산(舞鶴山)> 안강현 서쪽 15리에 있다.
<무릉산(茂陵山)> 안강현 서남쪽 10리에 있다.
<곤제산(昆弟山)> 안강현 남쪽 15리에 있다. 두 봉우리가 나란히 솟아 있는 모습
이 형제와 같기 때문에 이렇게 명명한 것이다.
<봉서산(鳳棲山) 사성산(四聖山)> 부의 동쪽 50리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신
라 때 성승(聖僧) 네 명은 남쪽 봉우리에 살고 봉황은 북쪽 봉우리에 모여 들었기
때문에 남쪽 봉우리를 사성산이라고 명명하고 북쪽 봉우리를 봉서산이라고 명명하
였다.” 한다.
<형제산(兄弟山)> 부의 동쪽 20리에 있다. 두 봉우리가 나란히 솟아 있는 모습이
형제와 같기 때문에 이렇게 명명한 것이다.
<아미산(峨眉山)> 부의 남쪽 70리에 있다. 날씨가 가물 때 비가 내리기를 빌면
감응이 있다.
<승삼산(僧三山)> 부의 북쪽 10리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고려 때 중 셋이
관가의 뜰에 들어와 호랑이로 변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명명한 것이다.” 한다 .
<봉좌암(鳳坐巖)> 기계현 서남쪽 10리에 있다. 이 바위 서쪽에 석굴이 있고, 그
아래 진기암(鎭氣菴)의 옛터가 있다.
<태화산(太華山)> 기계현 북쪽 15리에 있다.
<운주산(雲住山)> 기계현 서쪽 15리에 있다. 안국사(安國寺)의 주산이다. 산세가
높고 험준하고 구름이 항상 머무르기 때문에 이렇게 명명한 것이다.
<설창산(雪倉山)> 부의 서쪽 5리 쯤에 있다.
<사산(蛇山)> 기계현 동쪽에 있다. 그 위에 신라시대의 태봉(胎峯)이 있다.
<비장산(臂長山)> 부의 서쪽 30리에 있다. 금곡사(金谷寺)의 주산이다. 그 북쪽에
신라 시대의 태봉이 있다.
<생아현(生鵝峴)> 기계현 북쪽 40리에 있다.
<대현(大峴)> 기계현 북쪽 15리에 있다.
<화내현(火乃峴)> 기계현 서쪽 20리에 있다.
<마조현(磨造峴)> 기계현 동쪽 10리에 있다.
<안현(鞍峴)> 기계현 남쪽 5리에 있다.
<용암(龍巖)> 신광현 동쪽 5리에 있다. 이 바위 위에 누워 있는 용[臥龍]의 형상
이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명명한 것이다.
<독산(獨山)> 향교산(鄕校山)이라고도 한다. 신광현 동쪽 2리에 있다. 넓은 들 가
운데 하나의 조그마한 산이 우뚝 솟아 있는데 그 위에 토성이 있다. 그 토성의 모
양이 두 겹으로 되어 있고 그 안에 우물이 있는데 큰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 세
상에 전하기를, “향교의 터이다.” 한다.
<안지산(安趾山)> 신광현 북쪽 3리에 있다. 그 위에 토성이 있는데 모양이 세 겹
으로 되어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신라 때 진평왕(眞平王)이 유람하던 곳이다.” 한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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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富山)> 부의 서쪽 30리에 있다. 품상촌(品上村)의 주산이다. 그 산 위에 옛
터가 있는데 속칭 장자(長者)의 터라 한다. 또 용정(湧井)이 있고 산허리에 석굴이
있는데 그 안에는 10여 명을 수용할 수가 있다.
<귀존애(貴尊崖)> 부의 서쪽 45리에 있다.
<구미산(龜尾山)> 부의 서쪽 30리에 있다. 그 위에 기우제를 지내는 곳이 있다.
<인애산(仁崖山)> 부의 서쪽 40리에 있다.
<연적봉(硯滴峯)> 부의 서쪽 55리에 있다. 모양이 연적과 같기 때문에 이렇게 명
명한 것이다.
<석두산(石頭山)> 부의 서쪽 50리에 있다.
<동경부(東京阜)> 부의 서쪽 80리에 있다. 경계가 청도(淸道)와 접하였다.
<독표령(禿瓢嶺)> 부의 서쪽 40리에 있다.
<마질령(麻叱嶺)> 부의 서북쪽 50리에 있다.
<여현(礪峴)> 안강현 서쪽 30리 영천(永川)의 경계에 있다.
<화절현(花折峴)> 부의 서쪽 17리에 있다.
<마전현(馬轉峴)> 부의 서쪽 20리에 있다.
<검단산(檢丹山)> 안강현 남쪽 20리에 있다. 사방촌(士坊村)의 서쪽이다.
<차령(車嶺)> 부의 동쪽 55리에 있다.
<호혈굴(虎穴窟)> 묵장산(墨匠山) 동쪽에 있다. 그 안에는 3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다.
<시산(匙山)> 부의 남쪽 30리에 있다.
<망산(望山)> 부의 남쪽 20리에 있다. 그 위에 기우제 지내는 곳이 있다.
<한천(寒川)> 발원지가 셋인데, 하나는 옥산동(玉山洞)에서 나오며 하나는 여현
(礪峴)에서 나오며 하나는 두리동(豆里洞)에서 나와 합류하여 굴연천(堀淵川)으로
들어간다.
<달성천(達城川)> 발원지가 둘인데, 하나는 대현곡(大峴谷)에서 나오며 하나는 성
법곡(省法谷)에서 나와 합류하여 굴연천으로 들어간다.
<호읍천(虎邑川)> 비학산(飛鶴山)에서 발원하여 흥해(興海)의 곡강(曲江)으로 흘
러 들어간다.
<우박천(牛朴川)> 발원지가 셋인데, 하나는 토상(吐上)에서 나오며 하나는 신원
(新院)에서 나오며 하나는 석을지(石乙只)에서 나와 합류하여 울산(蔚山)의 태화강
(太和江)으로 들어간다.
<의곡천(義谷川)> 발원지가 둘인데, 하나는 감존(甘存)에서 나오며 하나는 노곡
(蘆谷)에서 나와 합류하여 청도의 공암천(孔巖川)으로 들어간다.
<죽장천(竹長川)> 청송(靑松) 경계의 유현(柳峴)에서 발원하여 영천(永川)의 장항
천(獐項川)으로 들어간다.
<모량천(牟梁川)> 발원지가 일곱인데, 하나는 우징동(雨徵洞)에서 나오며 하나는
달천동(達川洞)에서 나오며 하나는 선동동(仙童洞)에서 나오며 하나는 아화(阿火)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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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나오며 하나는 도이동(道伊洞)에서 나오며 하나는 고천(古川)에서 나오며 하나는
단석산(斷石山)에서 나와 합류하여 서천(西川)으로 들어간다.
<瓢巖> 在府東北五里 李謁平所降處 俗傳新羅時 以此巖有害於國都 種瓢以覆 故名
焉 ○<於乙於山> 安康縣鎭山也 橫截縣西北 ○<三勝山> 在安康縣西二十里 谷中水石
淸奇 師傅鄭克後構書堂 ○<道德山> 在安康縣西十里 紫玉山西北峯也 上有場巖 中有
斗德菴【詳見佛宇】○<華蓋山> 玉山書院主山也 形如華蓋 故名焉 ○<雪倉山> 在安
康縣東八里 良佐村主山也 ○<舞鶴山> 在安康縣西十五里 ○<茂陵山> 在安康縣西南
十里 ○<昆弟山> 在安康縣南十五里 有雙峯並7峙 形如兄弟故名 ○<鳳棲山四聖山> 在
府東五十里 俗傳新羅時 四聖僧住于南峯 鳳鳥常集于北峯 故名其南曰四聖 名其北曰鳳
棲 ○<兄弟山> 在府東二十里 雙峯並7峙 如兄弟 故名 ○ <峨眉山> 在府南七十里 天
旱禱雨 有應 ○<僧三山> 在府北十里 俗傳高麗時 三僧入公庭 化爲虎 故名 ○<鳳坐
巖> 在杞溪縣西南十里 巖西有石窟 其下有鎭氣菴舊址 ○<太華山> 在杞溪縣北十五里
○<雲住山> 在杞溪縣西十五里 安國寺主山也 以山勢高峻 雲氣常住 故名 ○<雪倉山>
在府西五里許 ○<蛇山> 在杞溪縣東 上有羅代胎峯 ○<臂長山> 在府西三十里 金谷寺
主山也 其北有羅代胎峯 ○<生鵝峴> 在杞溪縣北四十里 ○<大峴> 在杞溪縣北十五里
○<火乃峴> 在杞溪縣西二十里 ○<磨造峴> 在杞溪縣東十里 ○<鞍峴> 在杞溪縣南
五里 ○ <龍巖> 在神光縣東五里 巖上有臥龍形 故名 ○<獨山> 一云鄕校山 在神光縣
東二里 廣野中 有一小山㞳7起 上有士城 形二重 其內有井 大旱不渴 俗傳 鄕校基云 ○
<安趾山> 在神光縣北三里 上有土城 形三重 俗傳新羅眞平王所遊處也 ○<富山> 在府
西三十里 品上村主山也 山上有舊基 俗稱長者基 又有湧井 山腰有石窟 中可容十餘人
○<貴尊崖> 在府西四十五里 ○<龜尾山> 在府西三十里 上有祈雨處 ○<仁崖山> 在
府西四十里 ○<硯滴峯> 在府西五十五里 形如硯滴 故名 ○<石頭山> 在府西五十里
○<東京阜> 在府西八十里 境接淸道 ○<禿瓢嶺> 在府西四十里 ○<麻叱嶺> 在府西
北五十里 ○<礪峴> 在安康縣西三十里永川界 ○<花折峴> 在府西十七里 ○<馬轉峴>
在府西二十里 ○<檢丹山> 在安康縣南二十里 士坊村西 ○<車嶺> 在府東五十里 ○
<虎穴窟> 在墨匠山東 中可容三十餘人 ○<匙山> 在府南三十里 ○<望山> 在府南二
十里 上有祈雨處 ○<寒川> 有三源 一出玉山洞 一出礪峴 一出豆里洞 合流入于堀淵
川 ○<達城川> 有二源 一出大峴谷 一出省法谷 谷流入于堀淵川 ○<虎邑川> 源出飛
鶴山 流入于興海曲江 ○<牛朴川> 有三源 一出吐上 一出新院 一出石乙只 合流入于
蔚山太和江 ○<義谷川> 有二源 一出甘存 一出蘆谷 合流入于淸道孔巖川 ○<竹長川>
源出靑松界柳峴 流入于永川獐項川 ○<牟梁川> 有七源 一出雨徵洞 一出達川洞 一出
仙童洞 一出阿火 一出道伊洞 一出古川 一出斷石山 合流入于西川
승지勝地
<봉황대(鳳凰臺)> 부의 남문 밖에 있다. 〇<부운대(浮雲臺)> 부의 서쪽 45리에
있다. 봉황대와 같으나 약간 높다. 세상에 전하기를, “신라의 왕이 유람하던 곳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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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한다. 〇<독락당(獨樂堂)> 옥산서원(玉山書院) 북쪽 1마장 정도에 있다. 회재
(晦齋) 이언적(李彥迪) 선생의 별장이다. 〇오봉(五峯) 이호민(李好閔)이 독락당 주
인 이준(李浚) 【바로 선생의 서손(庶孫)이다.】에게 증별(贈別)한 시는 다음과 같
다.
<鳳凰臺> 在府南門外 ○<浮雲臺> 在府西四十五里 如鳳凰臺而差高 俗傳 羅王所遊
處也 ○<獨樂堂> 在玉山書院之北一馬場許 晦齋李先生別墅也 五峯李好閔 贈別獨樂
堂主人李浚【即7先生庶孫也】詩
예전 자옥산 지날 적에 昔過紫玉山
천석의 기이함 보지 못했었지 不見泉石奇
천석을 보지 못해도 괜찮지만 泉石可不見
도맥은 실로 여기에 있도다 道脈賓在斯
이 사람이 또 남쪽으로 돌아가 斯人又南歸
나에게 깊은 슬픔을 더하게 하는구나 使我增長悲
봉황대엔 누런 국화 피어 있을 테고 鳳臺黃菊開
개울가엔 붉은 단풍 드리웠으리라 河岸丹楓垂
내 길에 올라도 늦지 않았으니 吾道亦未晚
필마를 몰아 지금 응당 따르리라 匹馬今當隨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의 시는 다음과 같다. 柳西厓詩
이군은 신실하고 후덕한 선비로 李君信厚士
늙을수록 기이함 많은 나를 위로하였지 憐我老多奇
봄바람 불제 한번 들렀었고 春風一見過
가을날에 다시 이곳에 왔도다 秋日復來斯
진퇴가 오래전에 이미 정해졌으니 行藏久已定
세상일을 어찌 슬퍼할 것 있으랴 世事安足悲
장차 술 한 잔의 기쁨을 다하고 且盡一盃懽'
두 줄기 눈물을 떨구지 마시게나 莫遣雙淚垂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이 淸風與明月
이때에 또한 서로 따르는구려 此時又相隨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시는 다음과 같다. 旅軒張先生詩
백두산에서부터 자옥산에 이르니 白頭至紫玉
산악의 정기 모여 가장 기특하네 融結方最奇
우리나라 현인은 회재에 이르러 東賢至晦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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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맥이 여기에서 바로 잡혔다오 道脈正於斯
어이하여 먼 변방에서 별세하여 如何終絶徼'
길이 산하의 슬픔이 되고 말았는가 永作山河悲
다행히도 저술이 남아 있어 幸賴有著述
훌륭한 가르침 일성처럼 드리워졌어라 的訓日星垂
즐거워하시던 바를 스스로 찾을 만하니 所樂自可尋
지팡이 짚고 신 신고 따를 필요 없다오 不須杖屨'隨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의 시는 다음과 같다. 東岳李安訥詩
사람도 좋고 새도 또한 좋은데 人好鳥亦好
더구나 시내와 산이 기이함에랴 况乃溪山奇
산중에 한가로운 땅이 있으니 山中有閑地
내 이곳에서 늙고 파라 我欲老於斯
양기24)를 진실로 울 만한데 楊歧'良可泣
묵사25)를 어이 슬퍼하지 않으랴 墨絲詎無悲
길이 어진 마을 거처하며 永依仁里居
남기신 밝은 가르침 받들리라 仰承明訓垂
선철이 떠난 지 이미 오래이니 先哲去已遠
이분을 놔두고 누구를 따를손가 捨子孰追隨
서애 유성룡의 시는 다음과 같다. 柳西厓詩
여기서 도화동까지의 거리는 此去桃花洞
아득하여 칠사26) 남짓이나 되는데 迢'迢7七舎餘
잔설을 밟고 홀로 와서 獨來殘雪後
멀리 벗의 거처를 방문하였네 遙訪故人居
옛 의리는 지금도 오히려 남아있고 舊義今猶在
24) 양기(楊岐)는 다기망양(多岐亡羊)이란 고사를 차용하였다. 양자(楊子)의 이웃 사람이 양을 잃고 그 무
리를 다 동원하고 다시 양자의 종까지 동원하여 찾으려 하였다. 이에 양자가 묻기를, “한 마리 양을 잃
고 찾으러 가는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많은가” 하자, 그가 말하기를, “갈림길이 많기 때문입니다.” 하였
다. 찾으러 갔다가 돌아오는 것을 보고, 양자가 “양을 찾았는가” 하고 묻자, “잃었습니다.” 하였다. 양
자가 다시 “어째서 잃었는가” 하자, 그가 말하기를 “갈림길 속에 다시 갈림길이 있어 나는 양이 어디
로 갔는지 알 수 없기에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하였다. 이에 심도자(心都子)가 말하기를, “대도(大道)는
갈림길이 많아 양을 잃고 학자는 방도(方道)가 많아 생명을 잃는다.” 하였다.” 열자(列子) 「7설부(說符) 」7
25) 묵자(墨子)가 실을 염색하는 사람을 보고 탄식하기를, “푸른 물을 들이면 푸르게 되고, 누런 물을 들이
면 누렇게 되니, 넣는 곳에 따라 그 색이 변하는 구나.” 하였는데 묵사(墨絲)는 이것을 차용한 것으로,
사람이 환경의 변화에 따라 심성이 바뀌는 것을 슬퍼한다는 뜻이다. 묵자(墨子) 「7소염(所染)」'
26) 1사(舍)가 30리이므로 칠사(七舍)는 곧 210리의 거리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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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귀던 정은 깊어 소원하지 않누나 交情病未踈7
봄바람에 한번 서로 이별하려니 春風一相別
시름겨운 눈물 각자 줄줄 흐르오 危涕各漣如
.
<양직암(養直菴)> 독락당 북쪽에 있는데 지금은 계정(溪亭)이라고 부른다. 앞쪽은
시냇물을 대하였는데 물이 고여 소용돌이를 이루고 밑바닥이 훤히 보일 정도로 맑
다. 선생이 손수 심은 소나무와 대나무가 좌우에 빽빽이 늘어서 있다.
在獨樂堂北 今稱溪亭 前臨澗水 渟滀爲匯 淥'浄徹底 先生手植松竹森列左右
관포(灌圃) 어득강(魚得江)의 시는 다음과 같다. 灌圃魚得江詩
일찍이 자옥산 가운데가 좋은 것을 보고 曾看紫玉山中好
공이 서당을 지음은 이 시내 때문이지 公作書堂爲此溪
오늘 영령이 문득 놀라 괴상히 여기니 今日英靈却驚怪
생전에 일찍이 해계서27)를 보지 못했도다 生曾不見駭鶏犀
태초의 시내와 산이 나의 늙음을 용납하여 混沌溪山容我老
청년 때부터 이곳에 살아 까마귀 머리 희어졌구나28) 青年住此白烏頭
세상 사람들이 모두 내가 가난한 귀신인 줄 아나 世人皆識吾貧鬼
만 섬의 연하는 부유한 이 부끄럽게 할 수 있으리 萬斛煙霞富可羞
선생이 차운한 시는 다음과 같다. 先生次曰
서툴고 게으름 은거에 합당함을 스스로 알아 自知踈'懶合幽棲
복축한 이래 자옥산의 계곡을 사랑하였다오 卜築由來愛紫溪
지휘에 비로소 참을 잃은 까치29)임을 깨닫고 指揮始悟忘眞鵲
처세에 오히려 서각으로 물 비춰봄30) 혐의하였소 處世猶嫌照水犀
27) 해계서(駭鶏犀)는 통천서각(通天犀角)을 말한다. 이 뿔에는 적색의 결이 있는데 마치 한 가닥 줄이 밑
에서부터 끝까지 통하는 것 같다. 이 뿔에다 쌀을 담아 많은 닭 가운데 두면 닭이 가서 쪼으려 하다가
한 자 쯤 떨어진 곳에서 놀라 물러나기 때문에 남인(南人)들이 통천서(通天犀)를 명명하여 해계서라고
한다. 포박자(抱朴子) 「7등섭(登涉)」'
28) 전국 시대 연(燕)나라 태자 단(丹)이 일찍이 진(秦)나라에 볼모로 가 있었는데 진왕이 그에게 예우를
하지 않았다. 이에 태자 단이 진왕에게 본국(本國)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요청했으나 진왕이 들어주지
않고, 속여 말하기를, “까마귀의 머리가 희어지고 말의머리에 뿔이 나게 하면 보내주겠다(烏頭白馬生角
乃可許耳).” 하였다. 여기에서는 몹시 늙었음을 형용한 말인 듯하다.
29) 장자(莊子)가 조릉(雕陵)의 밤나무 동산을 지나가는데 큰 까치 한 마리가 장자의 이마에 부딪치고 날아
가 밤나무 숲에 앉아 무언가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장자가 돌멩이를 집어 들고 쫓아가 살펴보니, 버마
재비는 매미를 잡으려고 정신이 팔려 자신의 형체를 잊고 있었고, 까치는 버마재비를 잡으려고 정신이
팔려 있었다. 장자는 이것을 보고 ‘까치가 이익을 보고 참을 잊었다(見利而忘眞)’ 하였다. 참을 잊은 까
치는 여기에서 유래하였다.
30) 진(晉)나라의 온교(温嶠)가 우저(牛渚)를 지나다가 깊은 물속에 기괴한 물건들이 있을 것이라 하여 서
각(犀角)을 태워서 물에 비췄더니 기괴한 수족(水族)들이 보이는데 혹은 붉은 옷을 입고 말과 수레를 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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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난 공은 일찍이 시내와 산의 형승 차지해서 多公早占溪山勝
맑은 조정에 벼슬 그만두고 백발에 이르렀구려 投紱7淸朝至白頭
평소의 심사 어긋남을 스스로 탄식하노니 自歎平生心事謬
양진과 경세 둘 다 몹시도 부끄럽다오 養眞經世兩堪羞
용주(龍洲) 조경(趙絅)의 시는 다음과 같다. 龍洲趙絅詩
자옥산 남쪽 기슭이 은거할 곳을 제공하니 玉山南麓供幽棲
구름은 송림 애워 싸고 달은 시내에 비취누나 雲擁松林月印溪
백년이 뒤인 지금 선생을 상상하니 存想先生百年後
마음이 통하여 영서31)가 필요치 않도다 心通不必待靈犀
오도가 동방에 와서 어둡다가 다시 밝아졌나니 吾道東來暗復明
염락32)으로 연원을 거슬러 올라감이 선생에서 시작되었네 遡源㾾'洛自先生
험난함을 겪게 함은 하늘의 뜻이었나니 試看險阻天心在
드디어 훌륭한 문장이 택반33)에서 이루어지게 하였도다 遂使玄文澤畔成
<관어대(觀魚臺)> 곧 계정(溪亭) 아래에 있는 반석(盤石)이다. 갈아 놓은 듯이 평
탄하니 3,40명이 앉을 만하다.
<영귀대(詠歸臺)> 곧 관어대 동쪽 언덕에 우뚝 솟아 평평하게 펼쳐져 있는 것이
다.
<탁영대(濯纓臺)> 정혜사(浄惠寺) 동쪽 시냇가 언덕에 있다.
<징심대(澄心臺)> 또한 정혜사 동쪽 시냇가 언덕에 있다. 탁영대와 짝을 이루어
우뚝 솟아 있다.
<세심대(洗心臺)> 서원의 행단(杏壇) 아래에 있다. 반석으로 평평하게 펼쳐 있는
데 주위가 매우 넓으며 남쪽 면에 퇴계 선생(退溪先生)이 큰 글자로 쓰신 세심대(洗
心臺)라는 세 글자를 새겨 놓았다. 시냇물이 산골짜기로부터 반석 사이를 휘감아 흘
러 폭포를 이루고 있고, 그 아래는 깊은 못이 있어 용추(龍湫)라고 한다. 양면이 깎
은 듯한데 길이가 4,5장(丈)이나 되고 넓이가 1장 쯤 된다. 여기에도 또한 용추의
서쪽면 석벽 위에 퇴계 선생이 큰 글자로 쓰신 용추라는 두 글자를 새겨 놓았다.
것도 보였다. 꿈에 수신(水神)이 나타나서 “남의 비밀을 비추어 보는 것은 좋지 못하다.” 하였다. 진서
(晉書) 권7 「7온교전(溫嶠傳)」'
31) 영서(靈犀)는 영검이 있는 무소 뿔을 말한다. 무소의 뿔은 한 가닥의 흰 줄이 밑에서부터 끝에까지 통
하므로, 이를 피차의 마음이 무언 중에 통하는 것을 비유한다.
32) 염락(濂洛)은 북송(北宋) 성리학(性理學)의 선구자인 주돈이(周敦頤)가 살던 곳인 염계(濂溪)와 그 제자
인 정호(程顥)와 정이(程頤) 형제가 살던 곳인 낙양(洛陽)의 병칭이다.
33) 택반(澤畔)은 전국 시대 촉(蜀)나라의 충신 굴원(屈原)이 회왕(懷王)에게 추방을 당한 후, 못가[澤畔]에
서 행음(行吟)하던 일을 말하는데, 그가 지은 어부사(漁父辭)에 자세히 보인다. 여기서는 회재가 1547년
(명종, 2)에 윤원형(尹元衡) 일당이 조작한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강계에
유배되어 만년을 보내면서 구인록(求仁錄) ,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 , 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
義) , 봉선잡의(奉先雜儀) 등 중요한 저술을 남긴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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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불어나 부딪히는 바람에 용자(龍字)의 오른쪽이 이지러졌다. 이 용추 가에는
늙은 느릅나무가 줄을 지어 그늘이 반석을 덮고 있다.
【이상의 대명(臺名)은 모두 회재 선생이 명명한 것이고 퇴계 선생이 또한 편액을
썼는데 그 필적이 독락당에 보관되어 있다.】
<하룡추(下龍楸)> 곧 세심대의 하류이다. 좌우에 암석이 빽빽이 솟아 있고 폭포
가 흘러 못을 이루었는데 그 깊이를 측량할 수 없다.
<쌍벽정(雙碧亭)> 용추 남쪽 언덕에 있다. 반송(盤松) 몇 그루가 그 위를 비스듬
히 가리고 있다.
<사자암(獅子巖)> 징심대 북쪽 1마장 쯤에 있다.
<침류정(枕流亭)> 부의 서쪽 50리 의곡촌(義谷村)에 있다. 겹겹의 봉우리가 깎은
듯이 평평하고 흐르는 물이 굽이돈다. 진사(進士) 최기남(崔起南)이 지었는데 지금
은 없어졌다.
<가연호정(駕淵湖亭)> 부의 남쪽 20리에 있다. 높고 평평한 봉우리가 있어 아래
로 깊은 못을 대하고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신라왕이 유상(遊賞)하던 곳이다.” 한
다. 만력(萬曆) 연간에 진사 김득지(金得地)가 바위 위에 정자를 지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반구대(盤龜臺)> 부의 남쪽 70리에 있다. 3층으로 대(臺)를 이루었는데 그 모양
이 엎드린 거북과 같기 때문에 이렇게 명명한 것이다. 큰 시내가 굽이 돌아 흘러
아래에 맑은 못이 이루어지니 그 천석(泉石)의 빼어남은 진실로 별천지이다.
<봉림대(鳳臨臺)> 안강현 동쪽 굴연(堀淵) 하류에 있다. 끊어진 기슭이 우뚝 솟아
물을 대하고 있다. 회재 선생이 명명하였다.
<수운정(水雲亭)> 안강현 동쪽 설창산(雪倉山) 남쪽 기슭에 있다. 큰 들이 평평하
게 펼쳐지고 흐르는 냇물을 굽어보고 있다. 참봉(叅7奉) 정엽(鄭曄)이 그 위에다 정
자를 지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설천정(雪川亭)> 수운정 왼쪽에 있다. 형승(形勝)이 수운정과 병칭된다. 군수 이
의활(李宜活)이 지은 것이다.
<육의당(六宜堂)> 부의 동쪽 30리 토상호(吐上湖) 가에 있다. 아름다운 경치는 또
한 하나의 별천지이다. 현감 최계종(崔繼宗)이 지은 것이다.
<觀魚臺> 即'溪亭下盤石也 平坦如練 可坐三四十人 ○<詠歸臺> 即7觀魚臺東岸巖石
斗起平鋪 ○<濯纓臺> 在浄惠寺東溪岸 ○<澄心臺> 亦在浄惠寺東溪岸 與濯纓臺雙峙
○<洗心臺> 在書院杏壇下 盤石平鋪 周圍甚廣 刻退溪先生所書洗心臺三大字於石南面
澗水自山谷縈7流於盤石間 爲瀑布 下有深潭 名曰龍湫 兩面如削成 長可四五丈 廣可一
丈許亦刻退溪先生所書龍湫二大字於湫西面石壁上 水漲衝激 缺龍字右邊 湫岸老楡成行
蔭覆盤石 【以上臺號 皆晦齋先生所命 而退溪先生 亦皆書額筆跡 藏在獨樂堂】○<下
龍湫> 卽洗心臺下流也 左右巖石矗立 瀑流成潭 深不可測 ○<雙碧亭> 在湫南岸 盤松
數株 偃蓋其上 ○<獅子巖> 在澄心臺北一馬場許 ○<枕流亭> 在府西五十里義谷村 層
巒削平 流水彎廻 進士崔起南所構而今廢 ○<駕淵湖亭> 在府南二十里 有峯高平 俯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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深淵 俗傳 羅王遊賞處 萬曆中 進士金得地 作亭于巖上 今廢 ○<盤龜臺> 在府南七十
里 三層爲臺 狀如伏龜 故名 大川彎廻 下爲澄潭 其泉石之勝眞別區也 ○<鳳臨臺> 在
安康縣東堀淵下流 斷麓斗起臨水 晦齋先生命名焉 ○<水雲亭> 在安康縣東雪倉山南麓
平臨大野 俯瞰川流 叅7奉孫曄 作亭其上 今廢 ○<雪川亭> 在水雲亭左 形勝與水雲亭
並7稱 君守李宜活所構 ○<六宜堂> 在府東三十里吐上湖上 佳致亦一別區 縣監崔繼宗
所構
부윤(府尹) 문익공(文翼公) 정광필(鄭光弼)의 시는 다음과 같다. 府尹鄭文翼詩
천 년의 오랜 세월동안 아끼고 감추더니 慳'秘千年久
그윽한 은거지 그대를 기다려 열렸구나 幽居待子開
산의 형세 나는 봉황이 춤추는 듯하고 山形飛鳳舞
물의 기세 누운 용이 휘감아 도는 듯하네 水勢臥龍廻
돌이 늙었으니 소나무 의당 오래되었고 石老松宜古
모래사장 맑으니 백로 또한 오는도다 沙明鷺亦來
돌아감을 잊고 다시 술잔을 드니 忘歸更把酒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진다 하지 말라 休道日西頹
여러 봉우리가 겹겹으로 트인 곳에 群巒重坼處
한 골짜기가 마을을 안고 열렸어라 一壑抱村開
인근에 시선들이 집을 짓고 사니 隣近詩仙築
뜰에는 세속의 수레 돌아옴이 없어라 庭無俗駕廻
발을 뚫고 구름 그림자가 스며오고 透簾雲影落
장막을 헤치고 물빛이 비쳐 오네 侵幔7水光來
다만 임천의 흥취만 있을 뿐이니 只有林泉興
세도가 무너짐을 어이 알겠는가 何知世道頹
부윤 전식(全湜)의 시는 다음과 같다. 府尹全湜詩
정자가 탁 트이니 봄의 모습이 아름답고 亭敞春容媚
호수가 평평하니 거울처럼 펼쳐졌어라 湖平鏡面開
옛적에 산간의 표일함을 듣고서 舊聞山簡逸
지금에야 습지의 굽이로 향하네34) 今向習池廻
모든 근심이 말끔히 사라지나니 萬慮都消去
34) 산간(山簡)은 진(晉)나라 때 술을 몹시 좋아하였던 사람이다. 산간이 정남장군(征南將軍)으로 양양(襄
陽)에 있을 때 경치가 좋은 습씨(習氏)의 못을 고양지(高陽池)라 이름하고 날마다 그곳으로 가서 노닐며
흠뻑 취해서 돌아왔기에 당시 아동들이 노래하기를 “산공은 어디로 가는가? 고양지로 가는 게지. 해 저
물녘 말에 거꾸로 실려 돌아오나니 술에 흠뻑 취해서 아무 것도 모르네(山公出何許 往至高陽池 日夕倒
載歸 酩酊無所知).”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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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공의 벼슬도 기꺼이 바꾸어 오리라35) 三公肯換來
올라보니 무한한 정취가 있어 登臨無限意
더딘 해 먼저 기울어질까 두렵구나 遲日恐先頹
늦은 봄 띠풀로 엮은 정자 따뜻하여 春晚茅亭暖
높은 대에 비단 자리를 펼쳤어라 臺高綺席開
한가한 정서로 노래 몇 곡 부르고 閑情歌數闋7
호방한 기운으로 술 세 순배 돌렸네 豪氣酒三廻
취하여 혼연히 돌아감을 잊었다가 取醉渾忘返
헤어질 때에 다시 올 약속 하노라 臨分更約來
내일 아침 부서의 업무 있더라도 明朝有簿牒
옥산이 무너짐36)을 애석해 하지 않으리 不惜玉山頹
정랑(正郞) 전극항(全克恒)이 고인의 시구를 모아 그 뒤를 다음과 같이 이었다.
正郞全克恒 以集句次曰
텅빈 집에는 시골 정취가 있고 【고적】 虛院野情在 【高適】
멀리 보니 물상이 오는도다 【동인】 遐觀物象來 【同人】
임천을 마음 내키는 대로 찾아다녀 【낙빈왕】 林泉恣探歷 【駱賓王】
거마를 매어두고 서성거리노라 【두심언】 車馬繫遲廻 【杜審言】
멀리 있는 물은 하늘과 겸하여 맑고 【두보】 遠水兼天浄 【杜甫】
길게 부는 바람은 달을 전송하러 오네 【한유】 長風送月來 【韓愈】
근심을 잊는 데는 오직 술이 있을 뿐이니 【장언천】 忘憂惟有酒 【張言川】
옥산이 기울어짐을 괴이하게 여기지 말라 【노조린】 不怪玉山頹 【盧照隣】
<만귀정(萬歸亭)> 안강현 동쪽 20리에 있다. 그 고을 사람 장유랑(蔣惟亮)이 지었
다. 형강(兄江)을 굽어보고 넓은 들판이 평평히 펼쳐지는데 크고 트이고 깨끗하고
수려함이 동도(東都)에서 제일이다. 동해의 상선(商船)들이 모두 이 정자 아래에서
정박한다. 사부(師傅) 정극후(鄭克後)가 기문을 지었다.【 잡저보유(雜著補遺) 에 보
인다.】
<이락당(二樂堂)> 금오산 동쪽 기슭에 있다. 그 고을 사람 임적(任勣)이 지은 객
당(客堂)이다. 앞쪽은 연못을 대하고 있는데 돌을 쌓아 층계를 만들고 인하여 누정
(樓亭)을 지었다. 그 위에 올라가 보면 완연히 물 가운데 서있는 것 같다. 연못에
35) 삼공(三公)은 의정부(議政府)의 영의정(領議政)이나 좌 · 우의정과 같은 높은 벼슬을 말한다. “삼공의
벼슬도 기꺼이 바꾸어 오리라”는 육의당(六宜堂)이 아늑하고 경치가 좋아 높은 벼슬과도 바꿀 정도라는
뜻이다.
36) 세설신어(世說新語) 「'용지(容止)」7에 “진(晉)나라 혜강(嵇康)의 자태가 마치 외로운 소나무가 홀로 선
것처럼 빼어나 그가 술이 취해서 넘어지면 옥으로 된 산이 무너지는 것과 같았다.”라고 하였고 이백(李
白)의 양양가(襄陽歌)에 “옥산(玉山)이 절로 거꾸러지는 것이지 남이 민 게 아니라네(玉山自倒非人推).”
하였다. 고문진보(古文眞寶) 전집(前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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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을 가득 심어 놓았는데 가을이면 무성하게 피어 만 떨기의 붉은 꽃이 찬란히
난간까지 비친다.
<萬歸亭> 在安康縣東二十里 鄕人蔣惟亮所構 府壓兄江 平臨大野 宏豁明麗 甲於東
都 東海商船 皆泊於亭下 師傅鄭克後爲記 【見雜著補遺】○<二樂堂> 在金鰲山東麓
鄕人任勣所構客堂也 前臨池湖 築石爲階 仍構樓亭 登臨則宛在水中 種蓮滿湖 當秋盛
開 萬朶紅萼輝映軒楹
토산(土産)
<백반(白礬)> 사라현(舎羅峴)에서 산출된다. 〇<사철(沙鐵)> 부의 동쪽 팔조보(八
助浦)에서 산출된다. 〇<석류황(石硫黃)> 비월동산(非月洞山)에서 산출된다. 〇<전
복[鰒]> 〇<연어(鰱7魚)> 〇<광어(廣魚)> 〇<은구어(銀口魚)> 〇<대구어(大口魚)>
〇<홍합(紅蛤)> 〇<청어(靑魚)> 〇<방어(魴'魚)> 〇<황어(黃魚)> 〇<홍어(洪魚)> 〇
<김[海衣]> 〇<미역[藿]> 바다 속에 나물이 있으니 속명(俗名)으로 미역이라 한다.
그 종류는 곤포(昆布), 다시마[塔士麻]와 같은 것으로 통틀어 미역이라 한다. 〇<송
이[松蕈]> 〇<잣[海松子]> 〇<꿀[蜂蜜]> 〇<칠(漆)> 〇<산무애뱀[白花蛇]> 〇<천
문동(天門冬)> 〇<하수오(何首鳥)> 〇<오수유(吳茱萸)> 〇<산수유(山茱萸)> 〇<왜
저(倭褚> 〇<농어[鱸'魚]> 〇<문어(文魚)> 〇<송어(松魚)> 【이상은 여지승람 에
나온다.】 �신증新增 � 〇<조협(皁7莢)> 〇<조각자(皁'角刺)> 〇<마황(麻黃)> 〇<인삼
(人蔘)> 〇<맥문동(麥門冬)> 〇<수문호(水璊7瑚)> 〇<수정(水晶)>
<白礬> 出舎羅峴 ○<沙鐵> 出府東八助浦 ○<石硫黃> 出非月洞山 ○<鰒> ○<鰱'
魚> ○<廣魚> ○<銀口魚> ○<大口魚> ○<紅蛤> ○<靑魚> ○<魴7魚> ○<黃魚> ○
<洪魚> ○<海衣> ○<藿> 海中有菜 俗名爲藿 其類如昆布塔士麻 通謂之藿 ○<松蕈>
○<海松子> ○<蜂蜜> ○<漆> ○<白花蛇> ○<天門冬> ○<何首烏> ○<吳茱萸> ○
<山茱萸> ○<倭褚 ○<鱸'魚> ○<文魚> ○<松魚>【以上出輿地勝覽37)】 �新增 � ○
<皁'莢> ○<皁'角刺> ○<麻黃> ○<人蔘> ○<麥門冬>○<水璊'瑚>○<水晶>
성곽(城郭)
<읍성(邑城)>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4075척, 높이가 12척이다. 그 안에 우물 80
개가 있다.
<징례문(徴禮門)> 읍성의 남문이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탔는데 숭정(崇禎) 임신년
(1632, 인조 10)에 부윤(府尹) 전식(全湜)이 중수(重修)하고 동 ․서 ․북의 세곳의
문도 차례로 이어서 세웠다.
<금성(金城)> 부의 동쪽 4리에 있다. 박혁거세 21년 갑신(甲申, 기원전 37년)에
서울의 성을 건축하고 금성이라 하였다. 흙으로 쌓았는데 둘레가 2407척이다. 26년
37)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7경상도(慶尙道)」경주부(慶州府) 토산조(土産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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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축(己丑, 기원전 32년)에 금성에 궁실을 지었다.
<월성(月城)> 부의 동남쪽 5리에 있다. 파사왕(婆娑王) 12년 신축(辛丑, 91년)38)
에 쌓았다. 모양이 반달과 같기 때문에 이렇게 명명한 것이다. 혹 재성(在城)이라고
도 한다. 흙으로 쌓았는데 둘레가 2023보(步)이다. 여지승람 에는 둘레가 3023척
이라고 하였다. 그해 가을에 왕이 이곳으로 옮겨 거처하였다. 처음 탈해왕(脫解王)
이 젊은 시절 토함산(吐含山)에 올라가 성 안에 살 만한 곳을 찾았는데 일월의 형
세와 같은 양산(楊山)의 한 봉우리를 보고, 곧 내려와서 찾으니 바로 호공(瓠公)의
집이었다. 그 집 곁에다 몰래 숫돌과 숯을 묻어 놓은 다음 호공에게 이르기를, “이
집은 우리 조상의 집이다.” 하니, 호공이 쟁변하다가 드디어 관가에 소송하였다. 관
가에서 말하기를, “무엇으로 너의 집이라는 사실을 징험하겠는가” 하니, 탈해가 말
하기를, “나는 본래 대장장이인데 잠깐 이웃 고을에 나간 사이에 남에게 빼앗겼습
니다. 땅을 파서 징험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는데, 과연 숫돌과 숯을 찾아내었는지
라 드디어 탈해에게 주어 거처하게 하였다. 이곳이 바로 월성의 터이다. 유례왕(儒
禮王) 7년 경술(庚戌, 290년)에 큰 홍수가 나서 월성이 무너졌다. 8년 신해(辛亥,
291년)에 보수하여 쌓았다. 소지왕(昭智王) 9년 정묘(丁卯, 487년) 에 지붕을 이고,
10년 무진(戊辰, 488년)에 이곳으로 옮겨 거처하였다.
<邑城> 石築 周四千七十五尺 高十二尺 內有井八十 ○<徴禮門> 邑城南門也 火於
壬辰兵亂 崇禎壬申 府尹全湜重修 東西北三門次第繼建 ○<金城> 在府東四里 赫居世
二十一年甲申 築京城 號曰金城 土築 周二千四百七尺 二十六年己丑 營宮室於金城 ○
<月城> 在府東南五里 婆娑王十二年辛丑築 形如半月 故名 或稱在城 土築 周一千二
十三步 輿地勝覽 周三千二十三尺 秋王移居于此 初脫解王少時 登吐含山 望城中可居
之地 見楊山一峯 如日月勢 乃下尋之 即'瓠公宅也 潛埋礪炭于其側 謂瓠公曰 此是吾祖
家屋 瓠公爭辨 遂訟于官 官曰 何以驗汝家 脫解曰 我本冶匠 乍出隣鄕 爲人所奪 請掘
地以驗 果得礪炭 遂與脫解 居之 此即7月城之址 儒禮七年庚戌 大水 月城頹毀 八年辛
亥 補築 炤智九年丁卯 葺之 十年戊辰 移居于此
이인로(李仁老)39)의 시는 다음과 같다. 李仁老詩
외로운 성 약간 굽어 반달 닮았는데 孤城微彎象半月
가시덤불 다람쥐 굴을 반쯤 가리웠네 荆棘半掩猩㹳7穴
곡령의 푸른 소나무 기상이 울창한데 鵠嶺靑松氣鬱蔥
계림의 누른 잎은 가을에 쓸쓸하여라40) 雞7林黃葉秋蕭瑟
38) 파사왕(婆娑王) 12년은 신묘(辛卯)이다.
39) 이인로(李仁老)는 고려 명종 때의 학자(1152~1220)로 자는 미수(眉叟, 호는 쌍명재(雙明齋)이다. 강
좌칠현(江左七賢)의 한 사람으로 우간의대부를 지냈으며 초서와 예서에 능하였다. 저서에 은대집(銀臺
集) , 쌍명재집 , 파한집(破閑集) 이 있다.
40) 곡령(鵠嶺)은 개성(開城)에 있는 송악산(松嶽山)의 별칭이다. 신라 말기에 최치원(崔致遠)이 신라가 망
하고 고려가 일어날 것을 예측하여 고려 태조 왕건(王建)에게 글을 보내기를, “계림의 누른 잎이요 곡령
의 푸른 솔이라(雞'林黃葉 鵠嶺靑松).”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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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아의 자루를 거꾸로 잡은 뒤에41) 自從太阿倒柄後
중원의 사슴은 누구 손에 죽었던고42) 中原鹿死何人手
강가의 여자들은 속절없이 옥수화43)를 전하는데 江女空傳玉樹花
봄바람은 몇 번이나 금제의 버들을 떨쳤던가44) 春風幾拂金堤柳
<만월성(滿月城)> 월성 북쪽에 있다. 흙으로 쌓았는데 둘레가 4945척이다.
<명활성(明活城)> 월성 동쪽에 있다. 진흥왕(眞興王) 15년 갑술(甲戌, 554년)에
쌓고 진평왕(眞平王) 15년 계축(癸丑, 593년)에 개축(改築)하였다. 둘레가 3000보
이다. 여지승람 에는 둘레가 7818척이라고 하였다. 자비왕(慈悲王) 16년 계축(癸
丑, 473년)에 지붕을 이고 18년 을묘(乙卯, 475년)에 이곳으로 옮겨 거처하였다.
<남산성(南山城)> 월성 남쪽에 있다. 진평왕 13년 신해(辛亥, 591년)에 쌓았다.
둘레가 2054보이다. 여지승람 에는 둘레가 7544척이라고 하였다. 문무왕(文武王)
19년 기묘(己卯, 679년) 증축(增築)하였다.
<부산성(富山城)> 부의 서쪽 32리에 있다. 문무왕 3년 계해(癸亥, 663년)에 쌓았
다. 돌로 쌓은 성인데 둘레가 3600척이고 높이가 7척이다. 지금은 반이 무너졌다.
그 안에는 네 개의 시내와 하나의 연못과 아홉 개의 샘이 있고, 군창(軍倉)이 있었
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관문성(關門城)> 부의 동쪽 45리 울산 경계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6799척이다. 지금은 만리성(萬里城)이라 부른다. 【이상은 여지승람 에 나오는데
사이사이에 빠진 것을 보충하였다.】
<滿月城> 在月城北 土築 周四千九百四十五尺 ○<明活城> 在月城東 眞興王十五年
甲戌 築 眞平王十五年癸丑 改築 周三千步 輿地勝覽 周七千八百十八尺 慈悲王十六年
癸丑 葺之 十八年乙卯 移居于此 ○<南山城> 在月城南 眞平王十三辛亥 築 周二千五
十四步 輿地勝覽 周七千五百四十四尺 文武王十九年己卯 增築 ○<富山城> 在府西三
十二里 文武王三年癸亥 築 石城 周三千六百尺 高七尺 今半頹圮內有四川一池九泉
有軍倉 今廢 ○<關門城> 在府東四十五里蔚山界 石築 周六千七百九十九尺 今稱萬里
城【以上出輿地勝覽45) 而間補其遺】
41) 태아(太阿)는 보검(寶劍)의 이름이다. 한(漢)나라 유향(劉向)의 상소(上疏)에, “태아를 거꾸로 쥐고서 칼
자루를 남의 손에 쥐어 주었다.” 하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임금이 정권(政權)을 남에게 맡긴 데 비유한
말이다.
42) 진(秦)나라의 환관 출신 승상인 조고(趙高)가 신하들의 마음을 떠보기 위하여 이세 황제에게 사슴을 말
이라고 속여 바친 일에서 유래하여, 윗사람을 농락하면서 위세를 마음대로 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쓰
이게 되었다. 사기(史記) 권6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7
43) 옥수화(玉樹花)는 남조(南朝) 진(陳)나라의 후주(後主)가 지어 불렀다는 옥수후정화(玉樹後庭花)를 가리
킨다. 이는 모두 후주가 총애하던 장귀비(張貴妃)와 공귀빈(孔貴嬪)의 미색을 찬미한 내용이라 한다. 후
주가 이 노래를 부르며 놀다가 수(隋)나라의 침공을 받고 경양궁(景陽宮)의 우물 속에 숨었다가 수나라
군사에게 사로잡혔다. 그래서 이 노래를 망국의 노래라 한다. 이백(李白)의 금릉가(金陵歌)에 “천자가 경
양궁의 우물에 빠졌으니 그 누가 옥수후정화를 부르랴(天子龍沈景陽井 誰歌玉樹後庭花).” 하였다.
44) 수(隋)나라 양제(煬帝)가 변하(汴'河)에 행궁(行宮)을 짓고 강 언덕에 버들을 많이 심어서 음란하게 놀
아, 나라가 망한 뒤에 버들만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45)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7경상도(慶尙道)」경주부(慶州府) 성곽조(城郭條)와 고적조(古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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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방(關防)
<감포영(甘浦營)> 부의 동쪽 72리에 있다. 〇수군만호(水軍萬戶) 1인을 둔다. 정
덕(正德) 임신년(1512, 중종 7)에 돌로 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736척이고 높이가
13척이다. 그 안에 네 개의 우물이 있다. 【 여지승람 에 나온다.】 |신증新增 � 지금
은 동래(東萊)로 진(鎭)을 옮겼다.
<甘浦營> 在府東七十二里 ○水軍萬戶一人 正德壬申 石築城 周七百三十六尺 高十
三尺 內有四井【出輿地勝覽46)】 �新增 � 今移鎭于東萊
봉수(烽燧)
<형산봉수(兄山烽燧)> 부의 북쪽 45리에 있다. 동쪽으로 영일현(迎日縣) 사화랑산
(沙火郞山)에 호응하고, 서쪽으로 영천군(永川郡) 소산(所山)에 호응한다.
<하서지봉수(下西知烽燧) 부의 동쪽 70리에 있다. 남쪽으로 울산군(蔚山郡) 유포
(柳浦)에 호응하고, 북쪽으로 독산에 호응한다.
<독산봉수(禿山烽燧)> 부의 동쪽 54리에 있다. 남쪽으로 하서지에 호응하고, 북
쪽으로 장기현(長鬐'縣) 복길(卜吉)에 호응한다.
<대점봉수(大岾烽燧)> 부의 동쪽 57리에 있다. 남쪽으로 울산군 가리산(加里山)에
호응하고, 북쪽으로 동악에 호응한다.
<동악봉수(東岳烽燧)> 부의 동쪽 57리에 있다. 남쪽으로 대점에 호응하고, 서쪽
으로 고위산에 호응한다.
<고위산봉수(高位山烽燧)> 부의 남쪽 25리에 있다. 동쪽으로 동악에 호응하고,
남쪽으로 소산(蘇所)에 호응하며, 서쪽으로 내포점에 호응한다.
<내포점봉수(乃布岾烽燧)> 부의 서쪽 26리에 있다. 동쪽으로 고위산에 호응하고
서쪽으로 주사산에 호응한다.
<주사산봉수(朱砂山烽燧)> 부의 서쪽 42리에 있다. 동쪽으로 내포점에 호응하고
서쪽으로 영천군 방산(方山)에 호응한다. F신증新增 � 지금은 도음곡촌(道音谷村)의
앞산으로 옮겼다.
<소산봉수(蘇山烽燧)> 부의 남쪽 75리에 있다. 남쪽으로 언양현(彦陽縣) 부로산
(夫老山)에 호응하고, 북쪽으로 고위산에 호응한다. 【이상은 여지승람 에 나온
다.】
<兄山烽燧> 在府北四十五里 東應迎日縣沙火郞山 西應永川郡所山 ○<下西烽燧>
在府東七十里 南應蔚山柳浦 北應禿山 ○<禿山烽燧> 在府東五十四里 南應下西知 北
應長鬐7縣卜吉 ○<大岾烽燧> 在府東五十七里 南應蔚山加里山 北應東岳 ○<東岳烽
條)
46)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경상도(慶尙道)」경주부(慶州府) 관방조(關防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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燧> 在府東五十七里 南應大岾 西應高位山 ○<高位山烽燧> 在府南二十五里 東應東
岳 南應蘇山 西應乃布岾 ○<乃布岾烽燧> 在府西二十六里 東應高位山 西應朱砂山
○<朱砂山烽燧> 在府西四十二里 東應乃布岾 西應永川郡方山 �新增 � 今移于道音谷
村前山 ○<蘇山烽燧> 在府南七十五里 南應彥陽縣夫老山 北應高位山【以上出輿地勝
覽47)】
궁실(宮室)
<집경전(集慶殿)> 객관(客館)의 북쪽에 있다. 우리 태조(太祖) 강헌대왕(康獻大王)
의 화상[睟'容]을 봉안하였다. 세종조(世宗朝)에 전우(殿宇)를 개조하고 임진왜란 때
강릉(江陵)으로 옮겨 봉안하였다. 부의 기지(基址)와 계체(階砌는 모두 남아 있다.
<객관(客館)>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의 동헌기(東軒記)에, “신라가 계림(雞'林)
에 도읍하였더니, 고려 태조가 삼국을 통일하자, 나라가 없어지고 경주(慶州)로 되
었다. 얼마 뒤에 대도독부(大都督府)로 승격하였으며, 성종(成宗)은 동경 유수(東京
留守)를 두었고, 현종(顯宗)은 유수를 폐지하고 경주 방어사(慶州防禦使)로 강등하
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유수를 두었으며, 중간에 변고(變故)를 겪어 지경주사
(知慶州事)로 강등하였다. 고종(高宗)은 다시 유수로 하였고, 충렬조(忠烈朝)에 계림
부(雞'林府)로 고쳐 일컬었다. 우리 태종공정대왕(太宗恭定大王) 15년(1415년)에 다
시 경주부로 하고, 세종장헌대왕조(世宗莊憲大王朝)에 태조강헌대왕의 화상을 집경
전에 모셨다.
경주부는 경상도(慶尙道)에서 가장 크다. 토지는 비옥하고 백성과 물화가 풍부하
다. 인심은 순박하여 옛날 신라 때에 유풍(遺風)이 있다. 여기저기에 기이한 승경지
(勝景地)와 옛 현인(賢人)들의 유적(遺跡)이 있어 전대 인물들의 풍류를 넉넉히 상
상할 수 있다. 거정(居正)이 젊은 시절 영남(嶺南)을 유람할 적에 여러 이름난 곳을
거쳐 경주에 이르니, 번성하고 화려함이 실로 동남(東南) 여러 고을 중에 으뜸이었
다. 다만 객관이 누추하고 좁아서 비록 의풍루(倚風樓) 한 채가 있었으나, 올라가
조망(眺望)하며 답답한 심회를 펴기에는 부족하였다. 이것이 이 고을의 큰 결점이었
다. 가만히 생각건대, ‘경주가 주(州)가 된 것이 고려 때부터 이미 500년이 된다.
이 고을에 원으로 온 이 중에 어진 이가 몇 사람이며, 유능한 이가 몇 사람이었는
지 알 수 없으나, 어찌 한 사람도 퇴락(頹落)한 객관을 수리한 사람이 없어 이 지경
에 이르게 하였던 말인가.’ 하였다. 임오년(1462, 세조 8) 겨울에 내가 봉명사신(奉
命使臣)으로 경주에 오니, 나의 벗 자헌대부(資憲大夫) 김담(金淡)이 부윤(府尹)이었
으며, 승의랑(承議郞) 신중린(辛仲磷이 통판(通判)이었다. 감사(監司) 복천(福川) 권
개(權愷) 공이 나를 위하여 의풍루 위에 주연을 마련하였다. 그 자리에서 내가 전에
생각했던 바를 거론하니 부윤이 웃으며 말하기를, ‘그대가 내 마음을 먼저 알았네
47)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7경상도(慶尙道)」경주부(慶州府) 봉수조(烽燧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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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려. 이미 통판과 의논하여 장차 객관을 중수하기로 하고 재목을 쌓아놓고 기와를
구우면서 시일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뿐일세.’ 하였다. 감사가 그 말을 듣고 또 가
상히 여겼다. 거정이 말하기를, ‘경주 객관이 중수되어 새롭게 됨은 운수가 있는 것
이로군. 어진 부윤이 있고 어진 통판이 있으며 또 감사가 있어, 뜻이 같고 의논이
합치하였으니 일은 기일을 지정하여 할 수 있게 되었군.’ 하였다. 얼마 안 되어 김
부윤은 이조 판서가 되어 소환되고, 계미년(1463, 세조 9) 여름에 봉원(蓬原) 정흥
손(鄭興孫) 공이 이어 부윤이 되었다. 신 통판이 일의 유래를 자세히 아뢰고 객관의
옛터에 그 규모를 늘려 크게 경영하여 지으려 하니, 그 고을의 대족(大族)인 지금의
영의정 고령부원군(高靈府院君) 신숙주(申叔舟) 공과 대사성(大司成) 김영유(金永濡)
공이 또 그 일을 가상히 여겨 목수 서휴(徐休)를 보내어 그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
먼저 대청(大廳) 5칸을 세우니 앞뒤에 툇마루가 있고, 크고 시원하고 널찍하다. 동
쪽과 서쪽에 헌(軒)이 있는데 각각 상방(上房)과 곁방[挾室]이 있어 서늘하고 따뜻
함이 알맞게 되었다. 단청을 하니 무늬와 광채가 눈부시게 빛나서 보는 사람들이
훌륭하게 여겼다. 갑신년(1464, 세조 10) 겨울에 신 통판이 감찰(監察)로 소환되니,
양석견(楊石堅) 공이 와서 이를 이어 수선하여 낭무(廊廡를 날개처럼 붙이고 담을
둘러쌓아 공사가 이미 완성되었다. 병술년(1466, 세조 12) 봄 1월에 정 부윤이 임
기가 차서 소환되고, 화성(和城) 최선복(崔善復) 공이 이어 부윤이 되었으며, 2월에
는 양 통판이 체직되고 정란손(鄭蘭孫)이 이어 통판이 되었다. 아직 마치지 못한 공
사는 두 분 후(侯)가 필시 조치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하루는 신공(辛公)이 나에게 말하기를, ‘경주의 동헌(東軒)이 장차 새롭게 되려는
데 의풍루가 또 불타 버려서 선유(先儒) 가정(稼亭) 이곡(李穀) 선생의 기문도 따라
서 없어졌으니, 경주의 지나간 문적을 증거할 길이 없네. 그대만큼 일의 시말을 잘
아는 이가 없으니, 부디 기문을 써 주시게.’ 하였다. 거정이 말하기를, ‘내가 지난날
경주의 부족한 점이라고 여기던 것을 몇몇 군자의 힘으로 한 번에 크게 새로 중수
하였으니 어찌 기쁜 마음으로 쓰지 않겠는가. 더구나 춘추(春秋) 에도 공사를 일으
킨 것은 반드시 기록하였으니 이는 민사(民事)를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네.’ 하였
다. 내가 살펴보건대, 요즘 수령이 된 자는 거의 다 백성을 수고롭게 하고 많은 사
람을 동원하며, 시기는 적당치 못한데 공사를 지나치게 벌려서 누각(樓閣) 하나를
세우고 청사(廳舍) 하나를 영조(營造)하는 데에도 정사를 방해하고 백성을 해침이
많았다. 그런데 이제 김 부윤과 신 통판이 앞에서 일을 처음 시작해서는 목재 하나
와 돌 하나도 비용을 백성에게 부담시키지 않았으며, 뒤를 이은 정 부윤과 양 통판
은 급히 서두르지도 않고 백성을 수고롭게 하지 않으면서 백성을 부리기를 때에 맞
추어 하였으니, 이 몇몇 군자는 춘추 의 예(例)를 보더라도 포장(褒獎)하고 기록할
만하다. 거정은 직책이 예원(藝苑)에 참여하여 있으니 문사에 능하지 못하다고 하여
사양할 수 없었다. 이에 우선 일의 대강을 써서 돌려보낸다. 최(崔)ㆍ정(鄭) 두 분
후(侯)의 명성에 관해서는 계속하여 쓸 사람이 또한 반드시 있을 것이다.” 하였다.
<集慶殿> 在客館北 太宗朝奉安我太祖康獻大王睟7容 世宗朝改造殿宇 壬辰兵亂 移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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于江陵府 基址階砌'俱在 ○<客館> 徐四佳居正東軒記 新羅氏都雞'林 麗祖統三爲一 國
除爲慶州 俄陞大都督府 成宗置東京留守 顯宗廢留守 降爲慶州防禦使 未幾 復置之 中
更變故 降知慶州事 高宗復爲留守 忠烈朝 改稱雞'林府 我太宗恭定大王十五年 復爲慶
州府 世宗莊憲大王朝 安太祖康獻王大睟7容於集慶殿 府於慶尙一道最鉅 土地豐衍 民物
富庶 人心淳朴 有古新羅氏之遺風 往往有奇形勝地 古賢遺跡 前代人物之風流 亦足想
見矣 居正少遊嶺南 歷名區抵于慶 繁華佳麗 實東南諸郡之冠 第恨館宇湫隘 雖有倚風
一樓 不足以登眺暢叙湮鬱 是一州之大欠也 竊以謂慶爲州 自高麗氏已五百年 吏于州
不知賢幾人能幾人 何無一人修擧 廢墜至於如是哉 壬午冬 奉使至于慶 吾友金資憲淡爲
尹 辛承議仲磷'爲通判 監司福川權公愷 觴余倚風樓上 予擧前說而告之 尹笑曰 子先得
我心矣 已謀諸通判 將重新客館 積材陶瓦 以待歲月耳 監司聞而亦嘉之 居正曰 慶之重
新 其有數乎 得賢尹賢通判 又得賢監司 志同議合 事可指日爲也 未幾 金尹以吏曹判書
召還 癸未夏 蓬原鄭公興孫繼尹 辛通判具白事由 因客館舊址 增大其規模 將經營締構
矣 而鄕之大族今領議政高靈府院君申公叔舟 大司成金公永濡 又嘉其事 遣梓人徐休 董
其役 先起大廳五間 前後有楹 宏敞廣濶 東西有軒 各有上房俠室 涼7燠'得宜 施之丹雘
文彩眩耀 觀者韙7之 甲申冬 辛通判以監察召還 楊公石堅繼之修繕 翼以廊廡繚'以垣墻
事旣告成 丙戌春正月 鄭尹秩滿召還 和城崔公善復繼尹 二月 楊通判見遞 鄭通判蘭孫
繼之 功之未訖者 兩侯措置 亦必有餘裕矣 一日 辛公語余曰 慶之官廨7將新 而倚風樓又
火 先儒稼亭李先生記 亦隨以亡 慶之往牒 無文可徵 知事之終始 莫如子 幸記之 居正
曰 僕前日所欠於慶者 得數君子一大重新 豈不可喜而可書也 况春秋興作必書 重民事也
予觀今爲守令 率皆勞民動衆 時屈擧贏建一樓營一廨妨政害民多矣 今金尹辛通判 創
始於前 一材一石 費不及民 繼而鄭尹楊通判 勿亟'勿勞 使民以時 如數君子者 在春秋之
例 亦可褒而可書也 居正職參藝苑 不可以不文辭 姑書大槩而歸之 若崔鄭兩侯之聲 繼
而書者亦必有人矣
�신증新增 � 연우(延祐) 7년 경신(1320, 충숙왕 7)에 화재를 당하여 천순(天順) 8
년 갑신(1464, 세종 10)에 중창하였다. 가정(嘉靖) 임자년(1552, 명종 7)의 화재에
100여 칸이 탔는데, 신라시대부터 전해오던 325근 15냥 무게의 청동(靑銅)으로 된
큰 화로도 함께 타버렸다. 4년이 지난 을묘년(1555, 명종10)에 중창하였다. 만력
경인년(1590, 선조 23)에 화재를 당하였으나 구기(舊基)와 계체(階砌가 오히려 남
았다. 임인년(1602, 선조 35)에 남청방(南廳房)의 유지(遺址)에 정청(正廳)과 동서
의 헌(軒)을 경영하여 세웠는데, 이것이 바로 지금의 객사이다.
�新增 延祐七年庚申 灾天順八年甲申 重創 嘉靖壬子 灾百餘間燒燼 羅代所傳三
百二十五斤十五兩重靑銅大火爐 並'燒 越四年乙卯 重創 萬曆庚寅 灾舊基階砌7尙在 壬
寅 就南廳房遺址 營建正廳及東西軒 即'今所謂客舎也
오봉(五峯) 이호민(李好閔)의 시는 다음과 같다. 五峯李好閔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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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고에 왕업이 일어난 지역인지라 千古興王地
산의 형상 봉황이 춤추며 오는 듯 山形鳳舞來
내일 아침엔 해가 남쪽으로 이르리니 明朝日南至
어젯밤에 적이 동쪽으로 물러났도다 昨夜賊東回
풍월 속에 시선은 갔는데 風月詩仙去
관하의 옥피리 소리 슬퍼라48) 關河玉笛哀
평소에 옛일에 감회가 일어 平生感舊意
길게 휘파람 불며 억지로 대에 오르노라 長嘯強登臺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의 시는 다음과 같다. 東嶽李安訥詩
새재 너머 계림부에 嶺外雞'林府
오산49)이 바다 위로 올라와 鰲山海上來
하나는 성 북쪽을 따라 지나가고 一從城北過
다섯은 북두의 서쪽을 보고 도네 五見斗西回
자주 빛 인끈의 영광 뽐낼 만하나 紫綬榮堪詑7
창안의 늙음은 슬퍼할 만하여라 蒼顏老可哀
임금을 연모하는 마음 더욱 간절하니 戀君心更切
어느 곳이 고향을 바라보는 누대인가 何處望鄕臺
북악은 구름에 잇닿아 우뚝 솟았고 北嶽連雲起
서천은 성곽을 감돌아 흐르는구나 西川繞郭來
성이 황폐하니 탑만 외로이 섰고 城荒塔孤立
들이 넓으니 새가 쌍쌍히 돌아오네 野廣鳥雙回
마정은 그 터가 신이하고50) 馬井基神異
어정엔 취한 경치 슬프도다51) 魚亭醉景哀
삼성52)은 물을 데가 없고 無憑問三姓
48) 시선(詩仙)은 이백(李白)을 가리킨다. 그의 춘야낙성문적(春夜洛城聞笛)에 “그 누가 몰래 옥피리를 불
어서, 그 소리 봄바람에 흩어 넣어 낙양성에 가득하게 하나. 이 밤 곡조 속에 절양류 소리 들리니, 그
누군들 고향 생각 아니 일어날손가(誰家玉笛暗飛聲 散入春風滿洛城 此夜曲中聞折柳 何人不起故園情).”
하였다.
49) 오산(鰲山)은 동해에 있다는 신선이 사는 산이다.
50) 마정(馬井)은 양산(楊山) 기슭의 나정(蘿井)을 말한다. 나정 곁 숲 사이에 백마가 꿇어 앉아 절을 하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었으므로 그곳을 찾아가 살펴보니 자주 빛이 도는 큰 알 하나가 있었다. 말이 사람
을 보더니 길게 울고는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그 알을 깨어보니 사내아이가 나왔는데 모습이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육부(六部)의 사람들이 그 태어남이 신이(神異)하다고 하여 임금으로 세우니 이가 바로 혁
거세왕(赫居世王)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권1 「'기이(紀異)」7
51) 어정(魚亭)은 포석정(鮑石亭)을 말한다. 포석정의 돌에 포어(鮑魚)를 새겨 놓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
이다. 경애왕(景哀王)이 포석정에 나가 놀 적에 견훤(甄萱)의 병사가 갑자기 도성에 들이 닥쳤다. 이에
왕이 부인과 함께 성 남쪽의 이궁(離宮)으로 달아나 숨었는데, 견훤이 병사를 풀어 왕을 찾아 자진하도
록 겁박하고 억지로 왕비를 욕보였다.
52) 삼성(三姓)은 신라(新羅) 때 왕위에 올랐던 박씨(朴氏), 석씨(昔氏), 김씨(金氏)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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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53)은 다만 누대를 비웠어라 九聖但空臺
이민구(李敏救)의 시는 다음과 같다. 李敏求詩
옛 나라엔 의관이 없어지고 故國衣冠盡
거친 성에는 세월이 오누나 荒城歲月來
봄기운 이니 아득한 들이 변하고 春生遙野變
날 저무니 큰 강이 돌아 흐르네 日暮大江回
고운 돌은 외롭고 분함을 품고 錦石含孤憤
구슬 언덕은 칠애54)를 일으키네 珠陵起七哀
교외의 옛터를 바라볼 수 없으니 郊墟不可望
가장 높은 누대에 올라가지 말라 莫上最高臺
<영청(營廳)> 경주부가 옛날에는 관찰사의 본영(本營)이었기 때문에 영청(營廳)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지고 다만 빈터만 남아 있다.
<빈현루(賓賢樓)> 객관 동쪽에 있다. 하동(河東) 정인지(鄭仁趾)의 기문에, “금상
(今上 세종(世宗)) 23년(1441년)에 추밀부사(樞密副使) 김익생(金益生) 공이 경주
(慶州)에 부윤이 되었다. 경주는 신라 천 년의 옛 도읍으로, 번화하고 아름다움이
남방의 으뜸이다. 김공이 정사를 본 지 두어 달 만에 해이하였던 정사가 경장(更張)
되고 적체되었던 소송(訴訟)이 처리되니, 덕화(德化)는 펴지고 명성은 드러났다. 이
듬해 관계(官階)가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진되니 특별한 은전(恩典)이었다. 하루는
공이 통판에게 말하기를, ‘이 고을은 경내(境內)의 수읍(首邑)으로서 매년 봄가을에
감사(監司)와 원수(元帥)가 반드시 여기에서 무예를 시험하는데, 성 밖에 장막을 쳐
서 시험장을 삼는다. 그러나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오는 날이면 위의(威儀)와 형식이
걸맞지 않게 된다. 어찌 고칠 바를 도모하지 않는가’ 하였다. 여러 아전들에게 의
논하니 아전들이 그 계획에 찬동하였다. 이에 성안 객관의 동편에 터를 잡으니 그
지형이 구불구불 뻗어 면세(面勢)가 매우 적합하였다. 그 전면을 개척하니 화살이
멀리 날아갈 수 있게 되었고, 그 가운데를 시험장으로 만드니 말이 힘껏 달릴 수
있게 되었다. 흙을 쌓아서 대(臺)를 만드니 높이가 두어 길[仞이나 되었다. 그 위
에 누(樓)를 세우니 다섯 칸이었다. 바라보면 날아갈 듯하다. 아래로는 수많은 인가
를 굽어보고 사면의 여러 산들을 마치 자리 아래에 둔 듯하다. 한 달쯤 되는 동안
에 웅장하게 한 고을의 장관을 이루었으니 그 기쁨을 짐작할 수 있다. 김공이 임기
53) 구성(九聖)은 속설에 신라 때 아홉 명의 성인이라고 한다. 이들이 노닐던 곳이 구성대(九聖臺)인데, 금
오산에 있다.
54) 칠애(七哀)는 위진(魏晉)시대 악부(樂府)의 일종인 시 제목이다. 위(魏)나라의 왕찬(王粲)과 조식(曹植),
진(晉)나라 장대(張戴) 등이 칠애시(七哀詩)를 지었는데 사회의 동란을 반영하고 슬픈 감정을 표현하는
오언시(五言詩)이다. 당(唐)나라 여향(呂向)은 조식의 칠애시 주에서 “칠애는 아파서 슬프고, 의리상 슬
프고, 느꺼워 슬프고, 원망스러워 슬프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서 슬프고, 입으로 탄식하여 슬프고, 코
가 시어서 슬픈 것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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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차서 떠나가고, 영가(永嘉) 권극화(權克和) 공이 대신하여 부윤이 되어 와서 기
둥에 단청을 하여 김공의 뜻을 이어 완성하였다. 권공(權公)은 그 위에 다시 더 빛
나게 하려고 안평대군(安平大君)에게 이름을 지어주기를 청하여, 큰 글자로 쓴 빈현
루(賓賢樓) 세 글자를 얻어 편액으로 걸었다. 이 얼마나 경주의 다행인가. 공은 또
나에게 빈현루라고 명명(命名)한 뜻을 자세히 풀이하라고 하였다. 나는 생각건대,
정사는 성주(成周)55)보다 더 융성함이 없었다. 대사도(大司徒)가 향삼물(鄕三物)56)
로써 어진 이와 능(能)한 이를 천거할 때에 활 쏘고 말 달리는 것으로 재예(才藝)를
고시(考試)하는 과목을 삼았으며, 시경(詩經) 「7행위편(行葦篇)」'에, ‘화살을 발사하
자 모두 적중하니 손님을 차례하되 화살을 많이 명중함으로써 하도다.’57) 하였으니,
연회로 술 마실 때에도 반드시 사례(射禮)로써 우선을 삼았다. 대체로 활을 쏜다는
것은 그 방도는 덕행을 살필 수 있으며58) 그 효용(效用)은 천하에 위엄을 보일 수
있는 것이다. 간성(干城)59)의 장수와 조아(爪牙)60)의 무사(武士)도 다 이것으로 말
미암아 얻어지는 것이다. 임금이 이것을 서두르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그러므로 말
하기를, ‘군사는 천일(千日)을 쓰지 않을 수 있지만 하루라도 준비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하였다.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에게 경계하기를, ‘병기(兵器)를 잘 정비하여
문왕(文王)의 빛남을 우러러보게 하며, 무왕(武王)의 큰 공(功)을 선양(宣揚)하소서.’
하였고, 소공(召公)이 강왕(康王)에게 고하기를, ‘육사(六師)61)를 크게 베풀어 우리
의 덕 높은 조상의 명령을 무너뜨리지 마소서.’ 하였다. 성왕과 강왕은 예(禮)를 제
작하고 음악을 일으켜서 잘 수성(守成)한 임금이다. 그런데도 주공과 소공이 이처럼
경계하였으니, 성인의 뜻을 알 수 있다.
고려는 중엽 이후로 문관은 안일에 빠지고 무관은 놀기를 즐겨하여 누대(樓臺)는
음악을 연주하고 노래하고 춤추는 장소가 되었고 꽃과 달은 유람하고 완상하고 읊
조리는 자리가 되고 말았다. 상하의 사람들이 서로 취한 꿈속에서 잊어버려 깨어
있는 이가 없었으니, 점차로 쇠미하고 떨치지 못하게 되었다. 마침내 왜구가 기세를
떨쳐 아무런 두려움과 거리낌 없이 백성들을 도륙하고 살해하여, 개와 닭까지도 모
55) 주(周)나라는 무왕(武王)이 은(殷)나라를 쳐서 이기고 천하를 빼앗았지만 얼마 안 있다가 죽고 그 아들
성왕(成王) 때에 그의 숙부인 주공(周公)이 모든 체제를 갖추었으므로 성주(成周)라고 부른다.
56) 향삼물(鄕三物)의 첫째는 육덕(六德)이니, 지(知) ․인(仁) ․성(聖) ․의(義) ․충(忠) ․화(和)이고, 둘째는
육행(六行)이니, 효(孝) ․우(友) ․목(睦) ․인(婣 ․임(任) ․휼(恤)이고, 셋째는 육예(六藝)이니, 예(禮) ․7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이다. 주례(周禮) 「7지관(地官)」사도(司徒)
57) 원문에 사시기균(射矢旣均)으로 되어 있으나 시경 「7행위편(行葦篇)」'에는 사시기균(射矢旣均)의 사자
(射字)가 사자(舍字)로 되어 있다.
58) 예기(禮記) 사의(射義)에 “활을 쏘는 것은 성덕을 관찰하기 위함이다(射者所以觀盛德也).” 한 데서 온
말이다.
59) 간성(干城)은 방패와 성이라는 뜻으로, 나라를 지키는 믿음직한 사람을 가리킨다. 시경 「7토저편(兎罝7
篇)」7에 “굳세고 굳센 무부여, 공후의 간성이로다.(赳赳武夫여 公侯干城)” 하였다.
60) 조아(爪牙)는 맹수의 발톱과 이빨로 힘과 위엄이 있는 용사(勇士)를 이른다. 시경 「7기보편(祈父篇)」'에
“기보야, 나는 왕의 발톱과 이빨인데, 어찌하여 나를 근심에 전전하여, 머물러 살 곳이 없게 하는고(祈
父 予王之爪士 胡轉予于恤 靡所止居)” 하였다.
61) 육사(六師)는 육군(六軍)과 같은 말로, 1군은 1만 2500명이다. 고대에 천자국은 6군이고 제후국의 대
국은 3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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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절멸(絶滅)되고 사직(社稷)은 이로 인하여 폐허가 되어 버렸다. 어찌 오늘날 거
울삼아 경계해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옛날부터 국세(國勢)의 강약(强弱)과 백성들
의 휴척(休戚)은 군비(軍備)의 득실(得失)에 달려 있는 것이다. 우리 국가는 열성(列
聖)이 서로 이어 안팎이 태평하다. 그러나 또 편안할 때에 위태한 것을 잊지 않으며
잘 다스려질 때 혼란함을 잊지 않았다. 그리하여 무사(武士)를 등용하는 과거제도를
설치하여 3년마다 한 번 시험을 통해 그 준수하고 걸출한 무사를 얻고, 훈련하는
법을 갖추어 봄가을로 훈련하여 그 정예(精銳)를 뽑는다. 이것이 어찌 위무(威武)를
떨치고 선양하여 길이 다스리고 오래 편안하게 하는 길이 아니겠는가. 경주의 부윤
을 지낸 사람이 많으나 누(樓)를 세운 것은 공에서 시작되었으니, 공은 국가의 대체
(大體)를 안다 할 수 있겠다. 후일의 군자들은 힘쓸지어다.” 하였다.
l신증新增 � 정통(正統) 임술년(1442, 세종 24)에 조성(造成)되었는데 지금은 철폐
되었으니, 바로 이른바 군기청(軍器廳)이다. 그래도 오히려 빈현으로써 편액을 삼았
다.
<營廳> 府舊爲觀察使本營故有營廳 今廢 但有空址 ○<賓賢樓> 在客館東 ○鄭河東
麟趾記 上之二十三年 樞副金公益生 尹于慶 慶是新羅千年舊都 繁華佳麗 甲於南方 公
視事數月 政之弛者張 訟之滯者理 德化行名聲著 越明年 陞階爲資憲 特恩也 一日公謂
通判曰 是州爲界之首 每春秋 監司元戎 必於是焉而試武藝 張幕於城外 以爲場 或風或
雨之日 儀形不稱 盍7圖所以改之耶 詢于群吏 吏協厥謀 乃卜地于城中客館之東偏 厥地
紆餘 面勢甚宜 闢其前 矢可以及遠 場其中 馬足以騁力 累土爲臺 高可數仞起樓其上
而五其楹 望之翼如也 俯壓千家 四面衆山 如在席下 旬月之頃 奐焉爲一州之壯觀 喜可
知也 公告滿而來 永嘉權公克和代尹 迺7丹楹而畢公之志焉 公更欲侈之 而求名於安平大
君 得大書賓賢樓三字 以揭之 慶之幸何如也 公又使予衍其命名之義 予惟治莫盛於成周
大司徒以鄕三物 賓興賢能 射御爲考藝之目 行葦之詩曰 射矢旣均 序賓以賢 燕飮之際
亦必以射禮爲先 夫射也者 其道可以觀德行 其用可以威天下 干城之將 爪牙之士 皆由
此擧 宜乎王者之是急 故曰兵可千日不用 不可一日不修 周公之戒成王曰 克詰戎兵 以
覲文王之耿光 以揚武王之大烈 召公之告康王曰 張皇六師 無壞我高祖寡命 成康制禮作
樂 持盈守成之主 而周召之告戒如此 聖人之意可見矣 其在高麗中葉以後 文恬武嬉 樓
臺焉管絃歌舞之場 花月乎遊賞玩詠之席 上下相忘於醉夢之中 無有醒寤 駸'駸7乎衰微不
振 卒之海寇鴟7張 屠害生靈 無所畏忌 雞7犬爲之一空 社稷因以丘墟 豈不爲今日之殷鑑
歟 自古國勢之強弱 生民之休戚 皆係乎武備之得失 我國家 列聖相承 中外昇平 然且安
不忘危 理不忘亂 立武擧之科 三年大比 以求其俊傑 設備習之法 春秋訓鍊 以選其精銳
此豈非奮揚威武 長治久安之道乎 慶之尹積幾人矣 樓之建始於公 公其知國家之大體乎
後之君子 其勉旃7焉 F新增 k 正統壬戌 造成 今廢 即7所謂軍器廳也 猶以賓賢爲扁
<의풍루(倚風樓)> 객관의 서쪽에 있다. 가정 이곡의 시서에, “내가 동경(東京)의
객사(客舍)에 도착한 뒤에 동루(東樓)에 올라가 보았더니 아름다운 경치가 별로 눈
에 띄지 않았다. 그래서 서루(西樓)에 올라가 보았더니 꽤나 장려(壯麗)하였음은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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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 앞이 툭 틔어서 성곽과 산천이 한 눈에 모두 들어왔다. 그런데 삼장법사(三藏法
師) 선공(旋公)62)이 의풍루라고 큰 글자로 쓴 현판만 붙어 있을 뿐, 제영(題詠)한
것은 볼 수 없었다.
생각건대, 이 계림부는 천년을 이어 온 왕도(王都)로서 고현(古賢)의 유적이 가는
데마다 남아 있고, 본국(本國)에 편입되어 동경이 된 뒤로 또 장차 500년이 되려고
하니, 번화(繁華)하고 가려(佳麗)한 면에서 동남(東南) 지방의 으뜸이 되는 곳이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부절(符節)을 나누어 받고 이곳에 와서 풍속을 관찰하고 교화를
선양한 자들 또한 시인(詩人) 묵객(墨客)이 많았을 것이니, 짐작건대 홍벽(紅壁) 사
롱(紗籠)63)과 은구(銀鉤) 옥저(玉筯)64)가 그 사이에서 휘황하게 비쳤을 것이 분명하
다. 그런데 지금 보이는 것으로는 빈헌(貧軒)에 걸린 절구(絶句)한 수가 유일한데,
이 시는 선유(先儒) 김군수(金君綏)가 수창(首昌)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 혹자는 말하기를, ‘과거에 관사에 화재가 났을 적에 시판(詩板)도 함
께 없어지고 말았다.’라고 한다. 그러나 김공의 시만 어째서 유독 불타지 않았으며,
화재가 난 뒤의 시들은 또 어째서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이렇게 본다면 혹자의 말
도 신빙성이 부족하다고 하겠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향교의 어떤 유생이 말하기를, ‘김공의 시가 우연히 남아
있는데, 이를 통해서 우리는 백 년 전의 풍류인물(風流人物)을 상상해 볼 수가 있
다. 대개 그 당시에는 백성이 순박하고 정사가 간편해서 일이 생기면 선뜻 처리하
고 흥이 일면 곧장 풀곤 하였다. 그래서 심지어는 문서를 앞에 벌여 놓고 이와 함
께 악기를 뒤에 진열해 놓더라도 남들이 그르게 여기지 않았고 자기 자신도 혐의로
여기지 않았다. 그런데 백 년이 지난 뒤에는 스스로 겉모양을 닦는 데에만 급급한
나머지 한번 찡그리고 한번 웃는 것조차 때에 맞지 않을까 겁내고 있으니, 어떻게
감히 등림(登臨)하여 소영(嘯詠)함으로써 부유(腐儒)의 시비 거리를 제공하려고 하
겠는가. 지금 선생으로 말하면 풍속을 관찰하고 교화를 선양할 책임도 없이 자연의
승경을 찾아다니는 것으로 일을 삼고 있다. 그리하여 만 길 높이의 풍악(楓岳)과 설
산(雪山 설악산(雪嶽山))을 마음껏 관람하고, 다시 철관(鐵關)65)을 넘어 동해로 들
어와서 국도(國島)66)의 기이한 비경(秘境)을 끝까지 돌아보았으며, 마침내는 해안을
62) 선공(旋公)은 승려(僧呂) 조의선(趙義旋)을 가리키는데, 순암(順菴)으로 많이 알려졌다. 가정집(稼亭集) 권3 ‘조정숙공사당기(趙貞肅公祠堂記)’에 “특사정혜원통지견무애삼장법사(特賜定慧圓通知見無礙'三藏法
師) 주천원연성사(住天源延聖寺) 겸주본국영원사(兼住本國塋原寺) 복국우세정명보조현오대선사(福國祐世
靜明普照玄悟大禪師) 삼중대광(三重大匡) 자은군(慈恩君)”이라는 그의 명호가 소개되어 있다.
63) 홍벽(紅壁) 사롱(紗籠)은 붉은 칠을 한 벽 위에 푸른 깁으로 장식해 놓은 시문이라는 뜻이다. 당(唐)나
라의 시인 허혼(許渾)의 ‘재유고소옥지관(再游姑蘇玉芝觀)’ 시에 “달빛 어린 푸른 창은 오늘 밤의 술자리
요, 비 자욱했던 붉은 벽엔 거년의 글씨로다(月過碧窓今夜酒 雨昏紅壁去年書).”라는 구절이 있다.
64) 은구(銀鉤)와 옥저(玉筯)는 초서(草書)와 전서(篆書) 등의 멋진 필법으로 써넣은 글씨를 말한다. 진(晉)
나라 색정(索靖)이 서법을 논하면서 “멋지게 휘돌아가는 은빛갈고리[婉若銀鉤]”라는 표현으로 초서를
형용하였다. 진서(晉書) 권60 「7색정전(索靖傳)」옥저는 진(秦)나라 이사(李斯)가 창안한 소전(小篆)의
서체를 말한다.
65) 철령(鐵嶺)이다.
66) 국도(國島)는 고성(固城) 위에 위치한 안변(安邊) 앞 바다의 작은 섬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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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 남하(南下)하여 총석정(叢石亭)의 옛 비갈(碑碣)67)과 삼일포(三日浦)의 단서(丹
書) 여섯 글자68)를 어루만져 보았다. 그리고는 영랑호(永郞湖)와 경포(鏡浦)에 배를
띄우고 사선(四仙)의 유적을 탐방하였는가 하면, 성류굴(聖留窟)을 촛불로 밝혀 그
유괴(幽怪)한 모습을 빠짐없이 구경한 뒤에 드디어 이곳에 이르렀으니, 선생의 유람
이야말로 원하는 대로 실컷 구경했다고 이를 만하다. 그렇기는 하지만 신라 고도(古
都)의 장관(壯觀)과 조망(眺望)이 모두 이 누대 안에 모여 있는데, 한 마디 말도 없
이 떠난다면 이는 선생에게 부끄러운 일이 될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에 내가 응답하여 말하기를, ‘그래서 내가 이미 앞에서 운운하지 않았던가. 다
만 나는 시인 묵객의 무리가 되지 못하는 것이 유감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제생(諸生)의 말에 깊이 느껴지는 점이 있었고, 또 이를 통해서 세상의 변천도 살펴
볼 수 가 있었으므로, 장구(長句) 사운(四韻)의 시 한 수를 지어서 이 누대에 오르
는 자들에게 보여주기로 하였다.” 하였다. 시는 다음과 같다.
<倚風樓> 在客館西 ○稼亭李穀詩序 予至東京客舎 登東樓 殊無佳致 乃陟西樓 頗壯
麗軒豁 城郭山川 一覽而盡 三藏法師旋公 大書倚風樓三字 而無題詠者 惟是府千年舊
都 古賢遺跡 往往而有 自入本國 爲東京 亦將五百載 其繁華佳麗 冠於東南 而仗節觀
風 剖符宣化者 又多詩人墨客 意必有紅壁紗籠銀鉤玉筋 輝暎其間 以今所見 惟賓軒所
題一絶句在耳 先儒金君綏首唱也 或言曩7館舎灾詩板隨以亡 然金詩何獨不火 火後之作
亦何不見 或者之言 不足徵也 有一鄕校生曰 金詩偶存 可以想見百年前風流人物也 蓋
於其時 民醇政簡 遇事輒裁 遇興輒發 至於簿領陳於前 絲竹列於後 人不爲非 而自不爲
嫌也 百年之後 促促然務自修飭 一嚬一笑 恐或不時 安敢登臨嘯詠 以取腐儒之誚今先
生無觀風宣化之勞 以尋眞探勝爲事 縱觀楓岳雪山萬仞又踰鐵關 入東海 以窮國島之奇
秘 遂遵海而南 摩挲叢石亭之古碣三日浦之丹書六字 舟泛永郞湖鏡浦 以訪四仙之遺躅7
燭照聖留窟 以極其幽怪 而卒至於斯 其於遊觀 可謂厭飫'矣 然新羅古都 壯觀遐眺 萃於
此樓 而無一語而去 爲先生羞 余應之曰 吾豈不云云乎哉 但不能爲詩人墨客之流耳 然
於諸生之言 深有所感 而且得以觀世變 因成長句四韻 以示登斯樓者云 詩曰
동도의 풍물이 아직도 번화하건만 東都文物尙繁華
다시 고루 일으켜 자하를 떨쳤네 更起高樓拂紫霞
성곽은 천년을 이은 신라 때 세웠고 城郭千年羅代樹
여염은 태반이나 부처 모신 집들일세 閭閻一半梵王家
구슬 발 다 걷으니 마치 그림 같은 산 珠簾捲盡山如畵
옥피리 불어도 아직 기울지 않은 해 玉笛吹殘日未斜
기둥에 기대 시 읊노라니 도로 우습나니 倚柱吟詩還自笑
67) 총석정(叢石亭)의 옛 비갈(碑碣)은 사선봉(四仙峯) 동쪽 봉우리 위에 비면(碑面)이 떨어져 나가고 닳아
없어진 채 남아 있는 비갈을 말한다. 가정집 권6 동유록(東遊錄)에 상세한 내용이 보인다.
68) 삼일포(三日浦)의 단서(丹書) 여섯 글자는 신라 시대의 이른바 사선(四仙)이 사흘 동안 머물며 노닐었
다는 곳의 석벽(石壁)에 새겨진 “술랑도남석행(述郞徒南石行)”이라는 붉은 색의 여섯 글자를 말하는데,
사선의 이름과 관련하여 이 비문의 해석이 다양하여 아직 정설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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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와도 벽사롱은 필요치 않다오 重來不必要籠紗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의 기문에, “새재[鳥嶺] 이남은 본래부터 명승지가 많
다고 일컫는다. 거정은 젊은 시절 사마자장(司馬子長)의 뜻69)이 있어 새재를 넘어
상주(尙州)에 들르고 상주를 거쳐 선산(善山)에 갔으며 화산(花山)을 경유하여 성주
(星州)에 이르고 김해(金海)와 진주(晉州)를 지나서 함안(咸安)과 밀양(密陽)을 찾은
다음 경주에 도착하였다. 경주는 곧 옛적의 계림(雞'林)으로 신라의 수도였던 곳이
다. 산수는 빼어나고 풍경은 기절(奇絶)하며 옛 어진 이들의 유적이 많아서 멀리 유
람하는 사람의 질탕(跌宕)한 기운을 채워주기에 충분하다. 다만 한스러운 것은 객관
이 누추하고 좁은 것이다. 비록 의풍루가 있으나 사면의 처마가 낮게 처져 시루
[甑] 속에 앉은 것 같아서 사람을 갑갑하게 하였다. 임오년(1462, 세조 8) 겨울에
봉명사신이 되어 다시 이르니 부윤 김담(金淡) 공이 나를 맞아 누에 올라 조용히
술 마시며 시를 읊었다. 내가 말하기를, ‘등왕각(滕'王閣)은 천하에 이름난 명승으로
이 누각에 올라 조망하는 사해(四海)의 호걸(豪傑), 문인(聞人), 재사(才士)들이 매우
많았지만, 왕중승(王中丞)을 만나 비로소 중수되고 한퇴지(韓退之)를 만나 기문이
지어졌다. 이 누를 중수하고 기를 쓰는 일을 누구에게 부탁할 것인가’ 하니, 김 부
윤이 빙그레 웃었다.
두어 해를 지난 뒤에 객관이 중수되고 통판(通判) 신중린(辛仲磷이 나에게 기문
을 청하였으므로 대략 전말을 써서 돌려보냈다. 조금 있다가 들으니 의풍루가 또
불에 탔다고 하였다. 불에 탄 뒤에 새로 짓지 못한 지가 2년이 되었다. 정해년
(1467, 세조 13) 봄에 이후(李侯) 염의(念義)가 부윤으로 와서 정사는 잘 닦아지고
폐해는 제거되었다. 이에 누를 새로 지을 것을 계획하고 곧 누의 옛터에 그 규모를
더욱 확대해서 경영하여 세우니, 우뚝 솟아 한 도(道)의 장관(壯觀)이 되었다. 이를
이어 부윤 전동생(田秱生)과 통판 유자빈(柳子濱)이 더욱 아름답게 꾸며서 공사가
비로소 완성되자, 거정에게 기문을 청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사물이 흥하고 폐하는
것은 사물의 이치이다. 그러나 한번 성하고 한번 쇠하게 되는 것은 또한 시운(時運)
에 관계 되지 않는 것이 없다. 신라의 시초에는 하늘이 이인(異人)을 내려 보내 원
시(原始)의 생활을 개화시키고 나라를 세워 임금과 신하가 서로 도와 어질고 후하
게 정치하고 삼성(三姓)이 서로 전하여 거의 천년 만에 마침내 능히 고구려를 평정
하고 백제를 병합하여 동방의 땅을 넓게 차지하였다. 이것이 바로 당사(唐史) 에서
인인(仁人)과 군자(君子)와 시서(詩書)의 나라라고 칭찬한 바로 인물의 번화함이 성
대하였음을 충분히 상상해 볼 수 있다. 경순왕(敬順王)이 국토를 바치고 고려에 항
복하기를 오월(吳越)의 전왕(錢王)70)과 같이 하였으니, 이때부터 이후로는 주(州)로
69) 사마자장(司馬子長)에서 자장(子長)은 사마천(司馬遷)의 자이다. 사마천은 유람을 좋아하여 남북으로
천하의 산천을 다니면서 호한(浩瀚)한 기운을 얻어 이를 문장으로 발휘하여 사기(史記) 를 지었다 한
다. 고문진보(古文眞寶) 후집(後集) 상추밀한태위서(上樞密韓太尉書)
70) 전왕(錢王)은 오월왕 전숙(錢俶을 말한다. 송(宋)나라가 중원을 차지한 뒤에 아직 통일되지 않은 다른
나라를 차례로 평정하자 전숙은 토벌 당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항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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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기도 하고 부(府)로 되기도 하고 현(縣)으로 되기도 하여 연혁에 따라 일정하지
않았다. 고려가 쇠하자 섬나라 오랑캐가 침범하여 누관(樓觀)들은 불타버리고, 풍경
은 시들고 손상되었으니, 가정(稼亭)71) 이 선생(李先生)의 기문을 읽어보면 당시에
변고가 많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성조(聖朝 조선(朝鮮))가 천지처럼 함육(涵育)하여
변방이 안정된 지 이제 백년이 되었다. 경주는 땅은 넓고 민가는 조밀하여 물산은
풍부하고 재화(財貨)는 넉넉하여 동남(東南) 부고(府庫)의 제일이 되고, 관원도 또한
인재를 얻어서 일이 폐하거나 실추된 것이 없어서 관각(館閣)과 누대(樓臺) 같은 것
조차도 다 일신(一新) 되었으니, 하늘이 전일(前日)에 아낀 것이 바로 오늘을 기다
린 것인 줄 어찌 알겠는가.
이제 이 누각에는 첨유계극(幨7帷'棨戟)72)이 순림(巡臨)하고 시인묵객이 유람할 때
난간에 기대서서 옛날과 지금을 생각하고 고도(古都)의 흥폐(興廢)를 느끼며, 시대
와 사물의 변천을 살펴서 편안하고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성정(性情)을 쏟아내어 누
에 올라 글을 짓던 옛 사람의 기상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것이 어찌 태평시대의
성대한 일이며 물리(物理)의 흥하고 폐하는 기틀이 아니겠는가. 오호라, 평양(平壤)
은 삼조선(三朝鮮)과 고구려의 옛 도읍으로서 산하와 인물의 훌륭함이 경주와 더불
어 서로 갑을(甲乙)을 다툰다. 목은(牧隱) 선생73)이 일찍이 평양의 풍월루(風月樓)
의 기문을 썼는데 거정이 그 중수기(重修記)를 썼고, 가정(稼亭) 선생이 의풍루의
기를 썼는데 거정이 또 그 중수기를 쓰게 되었다. 거정처럼 재주 없는 몸으로 동경
(東京)과 서경(西京)의 두 곳에서 가정ㆍ목은 부자(父子)의 이름을 잇게 되었으니
어찌 다행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글이 졸렬하다고 하여 사양하지 못하고 즐거이
기문을 짓는다.” 하였다.
徐四佳記 嶺以南素稱多名區勝地 居正少有司馬子長之志 踰嶺而尙而善 由花而星 歷
金晉訪咸密 抵于慶 慶即7古之雞'林 而新羅氏之所都也 山河秀異 雲物奇絶 多有古賢遺
跡 足以償遠遊跌宕之氣 第恨館宇湫隘 雖有倚風一樓 四簷7低垂 如坐甑中 使人悶悶然
壬午冬 奉使再至 府尹金公淡 邀予登樓 從容觴詠 予曰 滕'王閣 天下之名勝 四海豪傑
聞人才士登臨眺望者 不知幾人 乃得王中丞而重新 韓退之而作記 斯樓之修之 記當屬之
何人乎 金尹莞然 越數載 館宇重新 辛通判仲磷'倩7予記 略書顚末 歸之 俄聞倚風樓又火
火而未新者 再稔 丁亥春 李侯念義來尹 政修斃袪謀所以重新 乃即'樓之舊址 增大其規
模 經營締構 巋'然爲一道之壯觀 繼而得田府尹秱生柳通判子濱 又加賁飾 功乃就緖 索
記於居正 予惟物之興廢 物之理也 而其所以一盛一衰者 亦莫不關於時運 當新羅之初
天降異人 闢淳厖7建邦國 君臣相濟 仁厚爲政 三姓相傳 幾於一千年 卒能平麗合濟 富有
東土 此正唐史所稱 仁人君子詩書之國 足以想人物繁華之盛矣 敬順王納土降麗 如吳越
錢王 自是以後 或州或府或縣 隨沿革不同 高麗之衰 島夷侵軼樓觀灰燼 雲物凋喪 讀
稼亭李先生記 可見當時之多故矣 聖朝天地涵育 邊陲7妥帖 百年于玆矣 慶地廣民稠 物
71) 가정(稼亭)은 이곡(李穀)의 호이다.
72) 첨유계극(幨7帷'棨戟)은 관찰사를 말한다. 첨유는 장막이고 계극(棨戟)은 창으로, 관찰사가 관내를 순행
할 때에 앞에 세우고 뒤에 따르게 하는 물건들이다.
73) 목은(牧隱)은 이색(李穡)의 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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阜財殷 爲東南府庫之最 吏又得人 事無廢墜 雖館宇樓榭亦皆一新 是寧知天之靳7於前
日者 乃所以待今日耶 今斯樓也 幨7帷'棨㦸7之巡臨 騷人墨客之遊賞 憑欄徙倚 俛7仰古今
感古都之興廢 覽時物之惟遷 夷然豁然 陶寫性情 有古登樓作者之氣像 此豈非太平之盛
事而物理興廢之機耶 嗚呼 平壤 三朝鮮高句麗之古都 山河人物之勝 與慶相爲甲乙 牧
隱先生甞7記風月樓 而居正記重新 稼亭先生記斯樓 而居正又記重新 以居正之不材 名繼
稼牧父子之名於東西二京 豈非幸耶 故不以文拙辭而樂爲記
이달충(李達衷)의 시는 다음과 같다. 李達衷詩
당시에는 스스로 소중화라 일렀더니 當時自謂小中華
반월성 텅 비어 저녁노을에 잠겼어라 半月城空鎻晚霞
마을엔 금불찰에 청태 낀 비석 있고 里有苔碑金佛刹
지경은 봉래섬 신선 집에 이어졌네 境連蓬島玉仙家
북천에 물이 줄어 여울 소리 목 메이고 北川水落灘聲咽
서악에 구름 달리니 빗발이 비끼네 西岳雲奔雨脚斜
많은 일들 일순간에 흥망하나니 一瞬興亡多少事
헌함에 기대어 시 읊으며 오사모74) 젖히노라 憑軒朗詠岸烏紗
8신증新增 } 연우(延祐) 7년 경신년(1320, 충숙왕 7)에 화재가 났는데, 그 후에 중
수하였다. 천순(天順) 갑신년(1464, 세조 10)에 화재가 났는데, 성화(成化) 무자년
(1468, 세조 14)에 개수하였다. 가정(嘉靖) 임자년(1552, 명종 7)에 화재가 났는데,
그 후에는 어느 해에 중수했는지 어느 해에 도로 없어졌는지 알 수 없으나 지금 옛
터가 오히려 남아있다.
延祐七年庚申 灾厥後重修 天順甲申 灾成化戊子 改修 嘉靖壬子 灾厥後未知某年
重修 某年還廢 而即'今舊址猶在
<남정(南亭)> 주(州)의 남쪽 5리 오릉(五陵) 북쪽에 있다. 부윤 김담이 세웠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〇<동정(東亭)> 부의 동남쪽 5리에 있다. 지금은 없어졌다.
<南亭> 在州南五里五陵北 府尹金淡所建 今廢 ○<東亭> 在府東南五里 今廢
전록생(田祿生)의 시는 다음과 같다. 田祿生詩
반월성 비었는데 강에 비췬 달은 밝고 半月城空江月白
고운75)이 신선되어 간 뒤 들의 구름 한가롭네 孤雲仙去野雲閑
다시 왕찬의 등루부76)를 지으려 하나 更尋王粲登樓賦
74) 오사모(烏紗帽)는 벼슬아치들이 일반적으로 쓰는 관모(官帽)이다.
75) 고운(孤雲)은 최치원(崔致遠)의 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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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속 시정은 쉽게 풀리지 않아라 方寸詩情未易寬
<이견대(利見臺)> 부의 동쪽 70리 해안에 있다. 〇세상에 전하기를, “왜국(倭國)
이 자주 신라를 침범하니 문무왕(文武王)이 이를 근심하여 죽으면 용(龍)이 되어 나
라를 수호하고 도적을 방어하겠다고 맹세하였는데, 장차 훙서(薨逝)하려 할 때에 유
명(遺命)을 내리기를, ‘나를 동해 가의 물속에 장사지내라.’ 하였다. 신문왕(神文王)
이 유명을 따라 장사지낸 뒤에 추모하여 대(臺)를 쌓고 바라보았더니 큰 용이 바다
가운데 나타났다. 이로 인하여 이견대(利見臺)77)라고 명명하였다.” 한다. 대 아래
10보 쯤 되는 바다 가운데 네 뿔이 우뚝 솟은 돌이 네 문과 같은 곳이 있는데, 이
곳이 바로 안장한 곳이다. 지금까지 대왕암(大王巖)이라고 일컫는다.
在府東七十里海岸 ○世傳倭國數侵新羅 文武王患之 誓死爲龍 護邦國而禦冠盗 將薨
遺命葬于東海濱水中 神文王從之 葬後追慕 築臺望之 有大龍見于海中 因名曰利見臺
臺下十步海中 有石四角聳出如四門 是其葬處 至今稱爲大王巖
이문화(李文和)의 시는 다음과 같다. 李文和詩
신라 때 군왕의 효자대에 羅代君王孝子臺
지금 올라보니 이끼 이미 짙었네 如今登眺已封苔
예정우개78)는 창자가 끊어질 듯하고 霓旌羽蓋膓堪斷
높은 집 아로새긴 담은 터가 절로 무너졌네 峻宇雕墻址自頹
은하수 가에 또렷이 북두를 보고 雲漢分明看北斗
안개 속에 어렴풋이 동래를 바라보네 煙濤髣'髴7望東萊
가련쿠나 물결 위의 흰 갈매기는 可憐波上白鷗鳥
조수가 오고 갈제 의구히 돌아오네 潮去潮來依舊廻
<금장대(金藏臺)> 서천(西川) 언덕 위에 있다.
<함벽정(涵碧亭)> 의풍루 남쪽에 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이상은 여지승람 에
나오는데 사이사이에 빠진 것을 보충하였다.】
�신증新增
<부아(府衙)> 객관 서북쪽에 있는데 부윤이 집무하는 곳이다.
<금학헌(琴鶴軒)> 부아의 동쪽에 있다.
<제승정(制勝亭)> 금학헌 남쪽에 있다.
76) 왕찬(王粲)은 삼국 시대(三國時代) 건안칠자(建安七子)의 한 사람이다. 그가 형주 자사(荊州刺史)인 유
표(劉表)의 식객으로 있을 때 성루(城樓)에 올라 울울한 마음으로 고향을 생각하며 지은 작품이 등루부
(登樓賻)이다.
77) 이견대(利見臺)는 주역(周易) 건괘(乾卦) 구오(九五)에, “나는 용이 하늘에 있으니 대인을 만나 봄이 이
롭다(飛龍在天 利見大人).” 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78) 예정우개(霓旌羽蓋)는 무지개같이 찬란한 깃발과 좋은 깃으로 만든 일산으로 임금이 쓰는 물건이다.
여기서는 신문왕(神文王)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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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이헌(佐貳軒)> 객관 북쪽에 있다. 판관의 관아이다.
<광풍루(光風樓)> 금학헌 동쪽에 있다. 부윤 박수홍(朴守弘)이 창건하였다. 누 앞
에는 돌을 쌓아 연못을 만들었는데 연못 안에는 작은 대를 지었으며 자미화(紫薇
花) 한 그루를 심었다.
<군기청(軍器廳)> 객관 동남쪽에 있다. 바로 빈현루의 옛터이다. 남쪽계단 아래
연지(蓮池)가 있다.
<양무당(養武堂)> 부아의 북쪽에 있다.
<무학당(武學堂)> 성 서문 밖에 있다. 지금은 영장(營將)의 호수헌(虎睡軒)이다.
<향사당(鄕射堂)> 성 동문 밖에 있다.
<의국(醫局)> 부아의 북쪽에 있다.
<영선청(營繕廳)>, <연리청(掾7吏廳)>, <교방(敎坊)>, <약방(藥坊)> 모두 성 안에
있다.
<종각(鍾閣)> 징례문(徵禮門) 밖의 봉황대(鳳凰臺) 아래에 있다. 봉덕사(奉德寺)의
종(鍾)을 매달았다.【고적(古蹟)에 상세히 보인다.】
<金藏臺> 在西川岸 ○<涵碧亭> 在倚風樓南 今廢【以上出輿地勝覽79) 而間補其
遺】 z新增 � ○<府衙> 在客館西北 府尹衙舎也 ○<琴鶴軒> 在府衙東 ○<制勝亭> 在
琴鶴軒南 ○<佐貳軒> 在客館北 判官衙舎也 ○<光風樓> 在琴鶴軒東 府尹朴守弘所創
樓前築石爲池 池中築小臺 樹紫薇花一株 ○<軍器廳> 在客館東南 即'賓賢樓舊基 南階
下 有蓮池 ○<養武堂> 在府衙北 ○<武學堂> 在城西門外 今之營將虎睡軒也 ○<鄕射
堂> 在城東門外 ○<醫局> 在府衙北 ○<營繕> ○<掾7吏廳> ○<敎坊> ○<藥坊> 俱
在城中 ○<鍾閣> 在徵禮門外鳳凰臺下 縣奉德寺鍾 【詳見古蹟】
창고(倉庫)
<부창(府倉)> 부아(府衙)의 남쪽에 있다.
<상평창(常平倉)> 부창(府倉)의 남쪽에 있다.
<대동청(大同廳)> 제승정(制勝亭)의 남쪽에 있다.
<관청(官廳)> 부아의 북쪽에 있다.
<안강창(安康倉)> 부의 북쪽 45리 안강현 토성(土城) 가운데 있다.
<형산창(兄山倉)> 부의 북쪽 45리 형산강 가에 있다. 옛날에 창고가 없어 전세
(田稅)로 받아들이는 미곡을 위로 바칠 때는 충주(忠州)의 가흥창(可興倉)으로 수송
하였고, 아래로 운송할 때는 양산(梁山)의 감동창(甘同倉)으로 운송하였는데, 백성들
이 이를 매우 괴롭게 여겼다. 이 창고를 설치한 것은 위로 바칠 때와 아래로 운송
할 때의 조운(漕運)을 편리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동해창(東海倉)> 부의 동쪽 70리에 있다. 예전에는 창고가 없었다. 또한 조운의
편리함을 위해 설치한 것이다.
79)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경상도(慶尙道)」경주부(慶州府) 누정조(樓亭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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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광창(神光倉)> 부의 북쪽 80리 신광현 토성 가운데 있다.
<기계창(杞溪倉)> 부의 북쪽 70리 기계현에 있다.
<죽장창(竹長倉)> 부의 북쪽 110리 죽장현에 있다.
<북안곡창(北安谷倉)> 부의 서쪽 100리 북안곡현에 있다.
【이상의 각창에는 모두 감관(監官) 1인을 두되, 모두 부(府)와 현(縣)의 좌수(座
首)로 예겸(例兼)하게 하였다. 오직 북안곡창과 형산창과 동해창에만 별도로 감관을
두었다.】
<빙고(氷庫)> 월성(月城)에 있다.
<府倉> 在府衙南 ○<常平倉> 在府倉南 ○<大同廳> 在制勝亭南 ○<官廳> 在府衙
北 ○<安康倉> 在府北四十五里安康縣土城中 ○<兄山倉> 在府北四十五里兄山江邊
古無倉舎 田稅米穀 上納則輸運于忠州可興倉 下運則輸運于梁山甘同倉 民甚苦之 此倉
之設 所以便上下漕運也 ○<東海倉> 在府東七十里 古無倉舎 亦因漕運之便而置之 ○
<神光倉> 在府北八十里神光縣土城中 ○<杞溪倉> 在府北七十里杞溪縣 ○<竹長倉>
在府北一百十里竹長縣 ○<北安谷倉> 在府西百里北安谷縣 【以上各倉 皆置監官 一
人 而並'以府縣座首例兼 惟北安谷兄山東海倉別置】○<氷庫> 在月城
학교(學校)
<향교(鄕校)> 부의 남쪽 4리 계림 서쪽 문천(蚊川) 북쪽에 있다. 신라 신문왕 2
년 임오(壬午, 682년)에 비로소 국학(國學)을 세웠다. 고려 이후로는 향학(鄕學)이
되었으나 터는 예전대로였다. 우리 성묘조(成廟朝) 홍치(弘治) 임자년(1492, 성종
23)에 부윤 최응현(崔應賢)이 중수하였는데 제도는 성균관을 모방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임시로 도덕산(道德山) 두덕암(斗德菴)에 위패(位牌)를 봉안하였다. 그러나 교
사(校舎)가 불에 타 오래도록 석채례(釋采禮)를 행하지 못하였다. 만력(萬曆) 경자년
(1600, 선조 33)에 이시발(李時發)이 부윤으로 있을 때 중건하였는데 성전(聖殿)이
3칸이고 전사청(典祀廳)이 3칸이다. 위판(位板)을 도로 봉안하였다. 갑진년(1604,
선조 37)에 윤성(尹腥)이 부윤으로 있을 때에 동무(東廡와 서무(四廡 각 12칸과
전사청 각 2칸을 중건하였다.
<대성전(大成殿)>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
<동배(東配)> 연국복성공(兗7國復聖公) 안씨(顔氏)80), 기국술성공(沂國述聖公) 공씨
(孔氏)81).
<서배(西配)> 성국종성공(郕國宗聖公) 증씨(曾氏)82), 추국아성공(鄒國亞聖公) 맹씨
(孟氏)83) 【이상은 오성(五聖)이다.】
<전내(殿內)의 동쪽에 종향(從享)된 분> 비공(費公) 민손(閔損), 설공(薛公) 염옹
80) 안회(顔回)를 말한다.
81) 자사(子思)를 말한다.
82) 증삼(曾參)를 말한다.
83) 맹가(孟軻)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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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冉'雍), 여공(黎公) 단목사(端木賜), 위공(衛公) 중유(仲由), 위공(魏公) 복상(卜商)이
다.
<전내(殿內)의 서쪽에 종향(從享)된 분> 운공(鄆公) 염경(冉7耕), 제공(齊公) 재여
(宰予), 서공(徐公) 염구(冉'求), 오공(吳公) 언언(言偃), 영천후(穎川侯) 전손사(顓7孫
師) 【이상은 십철(十哲)이다.】
<동무(東廡에 종향된 분> 금향후(金鄕侯) 담대멸명(澹臺滅明), 임성후(任城侯) 원
헌(原憲), 여양후(汝陽侯) 남궁괄(南宮适), 내무후(萊蕪侯) 증점(曾㸃'), 수창후(須昌
侯) 상구(商瞿), 평여후(平輿侯) 칠조개(漆雕開), 휴양후(睢'陽侯) 사마경(司馬耕), 평
음후(平陰侯) 유약(有若), 동아후(東阿侯) 무마시(巫馬施), 양곡후(陽穀侯) 안신(顔
辛), 상채후(上蔡侯) 조술(曹卹, 지강후(枝江侯) 공손룡(公孫龍), 풍익후(馮翊侯) 진
상(秦商), 뇌택후(雷澤侯) 안고(顔高), 상규후(上邽7侯) 양사역(壤駟亦), 성기후(成紀
侯) 석작촉(石作蜀), 거평후(鉅平侯) 공하수(公夏首), 교동후(膠東侯) 후처(后處), 제
양후(濟陽侯) 해용점(奚容蒧), 부평후(富平侯) 안조(顔祖), 부양후(滏陽侯) 구정강(句
井疆), 견성후(甄城侯) 진조(秦祖), 무성후(武成侯) 현성(縣成), 즉묵후(即'墨侯) 공조
구자(公祖句玆), 견원후(汧源侯) 연급(燕伋), 완구후(宛句侯) 안지복(顔之僕), 건성후
(建城侯) 악해(樂欬, 당읍후(棠邑侯) 안하(顔何), 임려후(林慮侯) 적묵(狄墨), 운성
후(鄆城侯) 공충(孔忠), 서성후(徐城侯) 공서점(公西蒧), 임복후(臨濮7侯) 시지상(施之
常), 화정후(華亭侯) 진비(秦非), 문등후(文登侯) 신정(申棖, 제음후(濟陰侯) 안쾌(顔
噌), 사수후(泗水侯) 공이(孔鯉)【이상은 공문(孔門)의 제자이다.】 난릉백(蘭陵伯)
순황(荀況), 휴양백(睢'陽伯) 곡량적(穀梁赤), 내무백(萊蕪伯) 고당생(高堂生), 악수백
(樂壽伯) 모장(毛萇, 팽성백(彭城伯) 유향(劉向), 중모백(中牟伯) 정중(鄭衆), 구씨백
(緱氏伯) 두자춘(杜子春), 양향후(良鄕侯) 노식(盧植), 영양백(榮陽伯) 복건(服虔), 사
공(司空) 왕숙(王肅), 사도(司徒) 두예(杜預), 창려후(昌黎侯) 한유(韓愈), 예국공(豫
國公) 정호(程顥), 신안백(新安伯) 소옹(邵雍), 온국공(温國公) 사마광(司馬光), 건녕
백(建寧伯) 호안국(胡安國), 화양백(華陽伯) 장식(張栻, 위국공(魏國公) 허형(許衡)
【이상은 주(周)나라 말기부터 송(宋)․'원(元)나라에 이르기까지의 유현(儒賢)이다.】
홍유후(弘儒侯) 설총(薛聰)【신라 도성 사람이다.】 문성공(文成公) 안향(安珦) 【초
명은 유(裕)이고 고려 흥주인(興州人)이다. 흥주는 지금의 풍기(豊基)이다. 호는 회
헌(晦軒) 선생이다.】 문경공(文敬公) 김굉필(金宏弼) 【현풍인(玄風人)이다. 호는 한
훤당(寒暄堂) 선생이다.】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 【한양인(漢陽人)이다. 호
는 정암(靜菴) 선생이다.】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 【예안인(禮安人)이다. 호는
퇴계(退溪) 선생이다. 이상은 본국(本國)의 유현이다.】
<서무(西廡에 종향된 분> 단보후(單父侯) 복부제(宓不齊), 고밀후(高密侯) 공야장
(公冶長), 북해후(北海侯) 공석애(公晳哀), 곡부후(曲阜侯) 안무요(顔無繇), 공성후(共
城侯) 고시(高柴), 수장후(壽張侯) 공백료(公伯寮), 익도후(益都侯) 번수(樊須), 거야
후(鉅野侯) 공서적(公西赤), 천승후(天乘侯) 양전(梁鱣, 임기후(臨沂侯) 염유(冉'孺),
목양후(沐陽侯) 백건(伯虔), 제성후(諸城侯) 염계(冉7季), 복양후(濮7陽侯) 칠조치(漆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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哆, 고원후(高苑侯) 칠조도보(漆雕徒父), 추평후(鄒平侯) 상택(商澤), 당양후(當陽侯)
임부제(任不齊), 모평후(牟平侯) 공양유(公良孺), 신식후(新息侯) 진염(秦冉, 양보후
(梁父侯) 공견정(公肩定), 요성후(聊城侯) 교단(鄡單), 기향후(祈鄕侯) 한보흑(罕父
黑), 치천후(淄川侯) 신당(申黨), 염차후(厭次侯) 영기(榮旂, 남화후(南華侯) 좌인영
(左人郢, 구산후(胊7山侯) 정국(鄭國), 악평후(樂平侯) 원항(原亢), 조성후(胙'城侯)
염결(廉潔), 박평후(博平侯) 숙중회(叔仲會), 고당후(高堂侯) 규손(邽7巽), 임구후(臨胊7
侯) 공서여(公西如), 내황후(內黃侯) 거백옥(蘧7伯玉), 장산후(長山侯) 임방(林放), 남
돈후(南頓侯) 진항(陳亢), 양평후(陽平侯) 금장(琴張), 박창후(博昌侯) 보숙승(步叔乘)
【이상은 공문(孔門)의 제자이다.】중도백(中都伯) 좌구명(左丘明), 임치백(臨淄伯)
공양고(公羊高), 승씨백(乘氏伯) 복승(伏勝), 고성백(考城伯) 대성(戴聖), 강도상(江都
相) 동중서(董仲舒), 곡부백(曲阜伯) 공안국(孔安國), 기양백(岐陽伯) 가규(賈逵), 부
풍백(扶風伯) 마융(馬融), 고밀백(高密伯) 정현(鄭玄), 임성백(任城伯) 하휴(何休), 언
사백(偃師伯) 왕필(王弼), 신야백(新野伯) 범녕(范寧), 도국공(道國公) 주돈이(周敦
頤), 낙국공(洛國公) 정이(程頤), 미백(郿伯) 장재(張載), 휘국공(徽國公) 주희(朱熹),
개봉백(開封伯) 여조겸(呂祖謙), 포성백(蒲城伯) 진덕수(眞德秀), 숭안백(崇安伯) 채
침(蔡沈), 임천군공(臨川郡公) 오징(吳澄) 【이상은 주나라 말기부터 송 ․원나라에
이르기까지 유현이다.】 문창공(文昌公) 최치원(崔致遠) 【신라인이다.】 문충공(文
忠公) 정몽주(鄭夢周) 【고려 영일인(迎日人)이다. 호는 포은(圃隱) 선생이다.】 문
헌공(文獻公) 정여창(鄭汝昌) 【함양인(咸陽人)이다. 호는 일두(一蠹 선생이다.】 문
원공(文元公) 이언적(李彥迪) 【경주인(慶州人)이다. 호는 회재(晦齋) 선생이다. 이상
은 본국의 유현이다.】
만력(萬曆) 갑진년(1604, 선조 37) 이안눌(李安訥)이 부윤으로 있을 때 중건하였
는데 명륜당(明倫堂)이 5칸이고 동재(東齋)와 서재(西齋)가 각 5칸이고 명륜당 동
쪽 담 밖에 제독청(提督廳) 4칸이 있다. 그 제독청 동쪽에 연못을 파고 그 안에 연
꽃을 심었으며 돌을 쌓아 작은 누대를 만들고 자미화(紫薇花) 한 그루를 심었다. 숭
정(崇禎) 후 을미년(1655, 효종 6)에 명륜당 북쪽에 송단(松壇) 쌓고 사부(師傅) 정
극후(鄭克後)가 기문을 지었다.【보유(補遺) 에 보인다.】
<성전(聖殿)> 전면에 옛날에는 계단과 정로(正路)가 없었다. 기유년(1669, 현종
10) 가을에 동무와 서무에 비가 새는 곳이 있어 개수하여 공사를 마치고, 부사(府
使) 주면(周冕)이 유생(儒生)들과 상의하여 안압지(鴈7鴨池) 임해전(臨海殿)의 옛터에
있던 돌계단을 가져다가 성전의 계단 아래에 깔고 또 정로도 쌓았다. 또 송단 동쪽
가에 존경각(尊經閣)을 건립하였다.
<鄕校> 在府南四里雞'林西蚊川北 新羅神文王二年壬午 始立國學 高麗以後爲鄕學 而
基則仍舊 我成廟朝弘治壬子 府尹崔應賢重修 制度倣成均館 壬辰之亂 權奉位板于道德
山斗德菴 而校舎灰燼 久闕釋采 萬曆庚子 府尹李時發時 重建 聖殿三間 典祀廳三間
還安位板 甲辰 府尹尹腥時 重建東西廡'各十二間典祀廳各二間 ○<大成殿> 大成至聖
文宣王 ○<東配> 兗7國復聖公顔氏 沂國述聖公孔氏 ○<西配> 郕國宗聖公曾氏 鄒國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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聖公孟氏 【以上五聖】○<殿內東從享> 費公閔損 薛公冉7雍 黎公端木賜 衛公仲由 魏
公卜商 ○<西從享> 鄆公冉7耕 齊公宰予 徐公冉'求 吳公言偃 穎川侯顓7孫師 【以上十
哲】○<東廡'從享> 金鄕侯澹臺滅明 任城侯原憲 汝陽侯南宮适 萊蕪侯曾點 須昌侯商
瞿 平輿侯漆雕開 睢7陽侯司馬耕 平陰侯有若 東阿侯巫馬施 陽穀侯顔辛 上蔡侯曹卹枝
江侯公孫龍 馮翊侯秦商 雷澤侯顔高 上邽7侯壤駟赤 成紀侯石作蜀 鉅平侯公夏首 膠東
侯后處 濟陽侯奚容蒧 富平侯顔祖 滏陽侯句井彊 甄城侯秦祖 武成侯縣成 即7墨侯公祖
句玆 汧源侯燕伋 宛句侯顔之僕 建城侯樂欬棠邑侯顔何 林慮侯狄黑 鄆城侯孔忠 徐城
侯公西蒧 臨濮7侯施之常 華亭侯秦非 文登侯申棖濟陰侯顔噌 泗水侯孔鯉【以上孔門弟
子】蘭陵伯荀况 睢'陽伯殼梁赤 萊蕪伯高堂生 樂壽伯毛萇彭城伯劉向 中牟伯鄭衆 緱
氏伯杜子春 良鄕侯盧植 榮陽伯84)服虔 司空王肅 司徒杜預 昌黎侯韓愈 豫國公程顥
新安伯邵雍 温國公司馬光 建寧伯胡安國 華陽伯張栻魏國公許衡【以上自周末至宋元
儒賢】弘儒侯薛聰【新羅國都人】文成公安珦 【初名裕 高麗興州人 今豐基 號晦軒先
生】文敬公金宏弼【玄風人號寒暄堂先生】文正公趙光祖【漢陽人號靜菴先生】文純公
李滉【禮安人號退溪先生 以上本國儒賢】○<西廡'從享> 單父侯宓不齊 高密侯公治長
北海侯公晢'哀 曲阜侯顔無繇 共城侯高柴 壽張侯公伯寮 益都侯樊須 鉅野侯公西赤 千
乘侯梁鱣臨沂侯冉7孺 沐陽侯伯虔 諸城侯冉'季 濮'陽侯漆雕哆高苑侯漆雕徒父 鄒平侯
商澤 當陽侯任不齊 牟平侯公良孺 新息侯秦冉梁父侯公肩定 聊城侯鄡單 祈鄕侯罕父
黑 淄川侯申黨 厭次侯榮旂南華侯左人郢胊7山侯鄭國 樂平侯原亢 胙'城侯廉潔 博平侯
叔仲會 高堂侯邽7巽 臨胊7侯公西如 內黃侯蘧7伯玉 長山侯林放 南頓侯陳亢 陽平侯琴張
博昌侯步叔乘【以上孔門弟子】中都伯左丘明 臨淄伯公羊高 乘氏伯伏勝 考城伯戴聖
江都相董仲舒 曲阜伯孔安國 岐陽伯賈逵 扶風伯馬融 高密伯鄭玄 任城伯何休 偃師伯
王弼 新野伯范寧 道國公周敦頤 洛國公程頤 郿伯張載 徽國公朱熹 開封伯呂祖謙 蒲城
伯眞德秀 崇安伯蔡沈 臨川郡公吳澄【以上自周末至宋元儒賢】文昌公崔致遠 【新羅
人】文忠公鄭夢周【高麗迎日人號圃隱先生】文獻公鄭汝昌【咸陽人號一蠹'先生】文元
公李彥迪【慶州人號晦齋先生 以上本國儒賢】○萬曆甲辰 府尹李安訥時 重建明倫堂五
間東西齋各五間 明倫堂東墻外 有提督廳四間 廳東鑿池 種蓮其中 築石作小臺 樹紫薇
花一株 崇禎後乙未 築松壇于明倫堂北 師傳鄭克後作記【見補遺】○<聖殿>前面 古無
階級正路 己酉秋 東西廡'雨漏處 修改訖工 府使周冕與儒生相議 仍取鴈'鴨池臨海殿舊基
石砌安於殿階下 且築正路 又建尊經閣於松壇東畔
<서악서원(西岳書院)> 부의 서쪽 선도산(仙桃山) 【일명 서형산(西兄山)이다.】
아래 태종릉(太宗陵) 북쪽에 있다. 가정(嘉靖) 신유년(1561, 명종 16)에 부윤 귀암
(龜巖) 이정(李楨) 공이 신라의 각간(角干) 김유신(金庾信)의 사당을 세워 제사지내
기를 논의하였는데, 부의 유생들이 홍유후(弘儒侯) 설총(薛聰)과 문창공(文昌公) 최
치원(崔致遠)도 아울러 제향(祭享)하기를 청하였다. 이에 귀암이 퇴계 이 선생에게
84)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경도(京都)」上 단묘조에는 榮陽伯으로 되어있으나 오례통고
(五禮通考) 「'길례(吉禮)」7와 세종오례(世宗五禮) 「'길례서례(吉禮序例)」7에는 滎陽伯으로 나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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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뢰었다. 계해년(1563, 명종 18)에 세 현인을 한 사당에 봉안하고 퇴계 선생이 서
악정사(西岳精舎)라고 명명하고 강당을 시습당(時習堂)으로, 동재(東齋)를 진수재(進
修齋)로, 서재(西齋)를 성경재(誠敬齋)로, 동하재(東下齋)를 절차재(切磋齋)로, 서하
재(西下齋)를 조설재(澡7雪齋)로, 전루(前樓)를 영귀루(詠歸樓)로, 문을 도동문(道東
門)이라 하였다. 누미(樓楣) 사이에 퇴계 선생의 필적을 게시했는데 모두 임진왜란
때 타버렸고 위판(位板)은 산곡(山谷) 가운데 옮겨 보관하였다. 만력 경자년(1600,
선조 33) 이시발(李時發)이 부윤으로 있을 때에 옛터에다 초가집을 짓고 위패를 도
로 봉안하였다. 임인년(1602, 선조 35) 이시언(李時彥)이 부윤으로 있을 때에 묘우
(廟㡰')를 중건하였으나 오히려 옛 모습을 다 회복하지 못하였다. 경술년(1610, 광해
군 2) 최기(崔沂)가 부윤으로 있을 때에 강당과 재사(齋舍) 및 전사청(典祀廳)과 장
서실(藏書室)을 중건하였다. 천계(天啓) 계해년(1623, 인조 1) 여우길(呂祐吉)이 부
윤으로 있을 때에 부의 유생인 진사 최동언(崔東彥) 등이 소장을 진달하여 사액(賜
額)을 청하였으므로 사악서원이라고 사액하였다. 편액은 원진해(元振海)의 글씨이
다. 병술년(1646, 인조 24) 이민환(李民寏)이 부윤으로 있을 때에 영귀루(詠歸樓)를
중건하였다. 묘우(廟宇)의 제도는 동향인데, 홍유후 설총, 개국공 김유신, 문창공 최
치원을 차례로 배향하였다.【정극후(鄭克後)의 서악지(西岳志)에 삼현(三賢)의 사적
(事蹟)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西岳書院> 在府西仙桃山下【一名西兄山】太宗陵北 嘉靖辛酉 府尹龜巖李公楨 議
以新羅角干金庾信立祠享之 府儒請以弘儒侯薛聰文昌公崔致遠並7享 龜巖禀7於退溪李先
生 歲癸亥奉安三賢于一祠 退溪先生 命名曰西岳精舎 講堂曰時習 東齋曰進修 西齋曰
誠敬 東下齋曰切磋 西下齋曰澡'雪 前樓曰詠歸 門曰道東 樓楣間 揭先生筆 而俱燬'于壬
辰 位板則移藏于山谷中 萬曆庚子 府尹李時發時 構草舎于舊址 還安位板 壬寅 府尹李
時彥時 重新廟宇 而猶未盡復 庚戌 府尹崔沂時 重創講堂齋舎及典祀廳藏書室 天啓癸
亥 府尹呂祐吉時 府儒進士崔東彥等 陳疏請額 賜額曰西岳書院 扁額則元振海筆也 丙
戌 府尹李民寏時 重建詠歸樓 廟制東向 弘儒侯開國公文昌公以次並'享【鄭克後西岳志
備記三賢事蹟】○龜巖李公楨 題西岳精舎詩 柳綠花紅物色殷 傍隨肯學少年群 千年大
地俗非古 一箇迂儒心似薫 素食幾驚中澤鴈岸巾空望出山雲 仙桃洞裹'新開宇 探勝歸來
滌垢紛 虞家數語相傳後 萬古斯文白日明一唯參乎心黙契 再賢回也道重亨 光風東洛從
容意 秋月西林感慨情 會友琢磨今有地 丁寧無負此堂名 ○退溪先生次曰 羅墟麥秀幾悲
殷 創置仍遭物議群 欲使英才欣式穀 可無遊處善相薫 千年白日元無翳萬古靑山一任雲
珍重箇中眞樂事 莫將餘外較紛紛 箕敎吾東曾善國 至今天步屬文明 多材聖作非無本 至
道人行詎自亨 寥落塵編尋寶訣 奮興豪傑出常情 儒宮好闢仙山境 老我增思實趁'名 ○八
溪鄭宗榮次曰 大東文敎自箕殷 羅代名賢濟濟群 興亡百變餘山海 治亂千秋混臭薫 旌別
終歸人正表 指揮重見士如雲 藏修可托西山下 鄒魯曾多外議紛 南中州郡如棊7布 分陜無
能負聖明 已喜文翁治化振 還憐中子道心亨 東都重見西山學 誠敬兼多澡7雪情 共訪靑衿
酬且問 依然沂上詠歸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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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암 이정 공이 서악정사에 제한 시[題西岳精舍詩]는 다음과 같다.
退溪先生西岳精舎詩
버들은 푸르고 꽃은 붉어 물색이 은성한데 柳綠花紅物色殷
꽃과 버들 완상하며 즐겨 배우는 소년들85) 傍隨肯學少年群
천 년 세월 대지에 풍속이 고아하지 않으니 千年大地俗非古
일개 오활한 선비 마음이 타는 듯하여라 一箇迂儒心似薫
소식은 못 가운데 기러기를 거의 놀라게 하고 素食幾驚中澤鴈7
두건 젖혀 쓰고 속절없이 산에서 나오는 구름을 바라보네 岸巾空望出山雲
선도동 안에 새로 정사를 짓고서 仙桃洞裹7新開宇
승경 구경하고 돌아와 속세의 때를 씻네 探勝歸來滌垢紛
우가의 몇 마디 말86)이 서로 전해진 뒤에 虞家數語相傳後
만고의 사문이 대낮처럼 밝았나니 萬古斯文白日明
일유삼호87)는 마음으로 묵묵히 계합한 것이고 一唯參乎心黙契
재현회야88)는 도가 거듭 형통한 것이라네 再賢回也道重亨
동락의 광풍89)은 조용한 뜻이요 光風東洛從容意
서림의 추월90)은 감개한 정이로다 秋月西林感慨情
벗을 모아 탁마할 곳 지금 있으니 會友琢磨今有地
정녕 이 당의 이름을 저버리지 말지어다 丁寧無負此堂名
퇴계 선생이 차운한 시는 다음과 같다.
退溪先生次曰
85) 정호(程顥)의 시 ‘춘일우성(春日偶成)’에 “구름 엷고 바람 솔솔 한낮이 가까울 제, 꽃과 버들 완상하며
앞 냇가로 나가네. 사람들은 내 마음 즐거움을 알지 못하고, 장차 한가함 탐하는 배우는 소년이라 하리
(雲淡風輕近午天 傍花隨柳過前川 時人不識余心樂 將謂偸閑學少年).” 하였다.
86) 우가(虞家)는 유우씨(有虞氏)인 순(舜) 임금으로 “우가(虞家)의 몇 마디 말”은 순 임금이 우왕(禹王)에
게 제위(帝位)를 물려주려 하면서 경계한 말을 가리킨다. 서경(書經) 대우모(大禹謨)에 “인심은 위태롭
고 도심은 미묘하니, 오직 정밀하게 살피고 오직 전일하게 지켜야 진실로 중도(中道)를 잡을 수 있다(人
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 하였다.
87) 일유삼호(一唯參乎)에서 삼(參)은 공자의 제자인 증삼(曾參)을 말한다. 논어(論語) 「7이인(里仁)」'에 “공
자가 말하기를, ‘삼아! 우리의 도는 한 가지 이(理)가 만 가지 일을 꿰뚫고 있다.’ 하니, 증자가 ‘예’ 하고
대답하였다(參乎 吾道一以貫之 曾子曰唯).” 하였다.
88) 공자가 제자 안연(顔淵)을 두고 “어질도다. 안회여! 한 그릇의 밥과 한 표주박의 물로 누추한 거리에
사는 것을 남들은 그 곤궁한 근심을 견디지 못하거늘, 안회는 도를 즐기는 마음을 변치 않으니, 어질도
다. 안회여!(賢哉回也 一簞食 一瓢飮 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 不改其樂 賢哉回也)”라고 한 것을 의미한
다. 논어(論語) 「'옹야(雍也)」7
89) 광풍(光風)은 광풍제월(光風霽月)의 준말로 비가 온 뒤의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을 말한다. 황정견(黃庭
堅)이 주돈이(周敦頤)의 쇄락(灑落)한 인품을 형용하여 광풍제월과 같다고 하였다. 렴락풍아(濂洛風雅)
권1 육선생화상찬(六先生畵像贊)
90) 추월(秋月)은 빙호추월(氷壺秋月)의 준말로 얼음으로 만든 호리병에 맑은 가을달이 비친 것과 같이 티
없이 고결한 정신을 뜻한다. 주자(朱子)의 스승인 연평(延平) 이통(李侗의 인품을 형용한 말이다. 주자
대전(朱子大全) 권87 제연평이선생문(祭延平李先生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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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수91)의 신라 터전 망국 슬픔 얼마이더냐 羅墟麥秀幾悲殷
이곳에 정사 지어 물의를 일으켰도다 創置仍遭物議群
영재를 선으로 인도하려 한다면 欲使英才欣式穀
학문을 익힐 처소를 마련해야 되지 않겠는가 可無遊處善相薫
천년의 밝은 해는 빛이 가려질 리가 없고 千年白日元無翳7
만고의 푸른 산은 구름이 오건 말건 萬古靑山一任雲
진중한 그 가운데 참된 즐거움 있으니 珍重箇中眞樂事
외인들의 분분함을 가지고 교계하지 마소 莫將餘外較紛紛
기자 홍범 우리 동방 일찍이 좋은 나라 箕敎吾東曾善國
지금은 하늘 운수 문명에 속하였다오 至今天步屬文明
많은 인재 성인이 일으키매 근본 없지 않나니 多材聖作非無本
지극한 도 사람이 행하지 어찌 절로 형통하랴 至道人行詎自亨
적막한 묵은 책에 보결을 찾으려 하니 寥落塵編尋寶訣
분발한 호걸들은 보통 생각에서 벗어나리 奮興豪傑出常情
유궁이 선산의 경내에 좋이 열렸으니 儒宮好闢仙山境
늙은 나도 당의 이름에 걸맞길 더욱 생각노라 老我增思實趁'名
팔계(八溪) 정종영(鄭宗榮)이 차운한 시는 다음과 같다.
八溪鄭宗榮次曰
우리나라 문교 은나라 기자로부터 시작되어 大東文敎自箕殷
신라시대 명현이 제제92)하게 무리를 이루었네 羅代名賢濟濟群
흥망은 백번 변하여 산과 바다에 남았고 興亡百變餘山海
치란은 천추에 악취와 향기를 뒤섞었어라 治亂千秋混臭薫
정별93)은 사람의 의표를 마침내 바르게 하였고 旌別終歸人正表
지휘는 구름 같은 선비를 거듭 보게 하였네 指揮重見士如雲
학문 닦음을 서산 아래에 의탁할 만하나니 藏修可托西山下
추로94)에 일찍이 분분한 외부의 의논 많았어라 鄒魯曾多外議紛
91) 기자(箕子)가 주(周)나라로 조회하러 가는 길에 은(殷)나라 도성 터를 지나노라니 궁궐은 폐허가 되고
그 자리에 벼와 가장이 무성히 자란 것을 보고 슬퍼하여 이른바 맥수지가(麥秀之歌)란 노래를 지었다.
그 가사에 “보리 이삭은 이미 자랐고 벼와 기장도 무성하구나. 저 교활한 아이놈[紂王]은 어찌 나의 충
고를 듣지 않았던고(麥秀漸漸兮 禾黍油油 彼狡童兮 不與我好兮)” 하였는데, 은나라 유민(遺民)들이 이
노래를 듣고 울지 않는 이가 없었다 한다. 사기(史記) 권38 「7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
92) 시경 「'대아(大雅)」문왕편(文王篇)에 “제제히 많은 선비여, 문왕이 이들 때문에 편안하도다(濟濟多士
文王以寧).” 하였다.
93) 서경(書經) 「7필명(畢命)」'에 주(周)나라 강왕(康王)이 필공(畢公)에게 내린 책명(冊命)에 “선한 이는 정
려(旌閭)로 표창하고 악한 이는 가려내라(旌別淑慝).” 라고 하였다.
94) 추로(鄒魯)는 맹자(孟子)의 출생지인 추나라와 공자(孔子)의 출생지인 노나라를 말한다. 여기에서 유래
하여 유학 또는 문교가 흥성한 곳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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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중의 주군이 바둑판처럼 펼쳐져 있으니 南中州郡如棊7布
분섬95)은 성명을 저버릴 수가 없어라 分陜無能負聖明
문옹96)이 치화를 진작시킴을 이미 기뻐하고 已喜文翁治化振
중자97)의 도심이 형통함을 도리어 사랑하노라 還憐中子道心亨
동도에서 거듭 서산98)의 학문을 보겠노니 東都重見西山學
성경에 겸하여 조설99)의 정이 많아라 誠敬兼多澡7雪情
함께 청금100)을 방문하여 수작하고 물으니 共訪靑衿酬且問
의연히 기수 가 영귀101)란 이름이 있구나 依然沂上詠歸名
퇴계 선생의 서악정사 시는 다음과 같다.
退溪先生西岳精舎詩
동도라 현사는 비방 어이 잦은가 東都賢祀謗何頻
변경하여 새로운 학궁을 만들었네 變置眞成學舎新
다만 청아102)를 잘 길러 육성한다면 但使菁莪能長育
성상의 깊은 은혜 유림에 미치리라 涵游聖澤屬儒紳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이 서악서원을 배알하고 원생들에게 보인 시는 다음과
같다.
金鶴峰謁西岳示院生詩
서형산 아래의 정사 그 이름 예전에 들고서 西兄精舎舊聞名
95) 분섬(分陝)은 섬서성 섬현(陝縣)을 분계로 삼아 다스린다는 뜻이다. 주(周)나라 초기에 주공 단(周公旦)
과 소공 석(召公奭)이 섬현을 분계로 삼아서 주공은 섬현의 이동 지방을 다스리고 소공은 섬현의 이서
지방을 다스렸다. 후세에는 지방관으로 부임하는 데에 비유한다.
96) 문옹(文翁)은 한(漢)나라 경제(景帝) 때 여강(廬江) 사람이다. 촉(蜀) 땅의 군수가 되자 성도(成都)의 시
장 가운데에 학관(學官)을 설치하여 입학자는 요역을 면제하고 성적이 우수한 자는 군현의 관리로 삼았
다. 이에 촉군(蜀郡)에 문풍이 크게 진작되고 교화가 크게 행해졌다고 한다. 한서(漢書) 권89 「'순리전
(循吏傳)」문옹(文翁)
97) 중자(中子)는 수(隋)나라 용문(龍門) 사람인 왕통(王通)으로 자는 중엄(仲淹)이다. 어려서부터 독학하였
고, 일찍이 장안(長安)에 노닐면서 태평(太平)에 대한 십이책(十二策)을 진달하였으나, 그 계책이 쓰이지
못할 것을 알고 하분(河分)에 물러나 살면서 사람을 교수하여 수업한 자가 1000명이나 되었다. 자주 부
름을 받았으나 나가지 않았다. 그가 죽자 문인들이 사시(私諡)하여 ‘문중자(文中子)’라고 일컬었다.
98) 서산(西山)은 남송(南宋)의 학자로 심경(心經) 의 저자인 진덕수(眞德秀)를 가리킨다. 그는 주자(朱子)
를 학문의 종주로 삼으면서 이학(理學)을 계승하였으므로 소주자(小朱子)라고 일컬어지기도 하였다.
99) 서악서원(西岳書院)의 서재(西齋)가 성경재(誠敬齋)이고 서하재(西下齋)가 조설재(澡'雪齋)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100) 청금(靑衿)은 청색으로 깃을 두른 선비의 복장, 또는 선비를 지칭하는 말로 쓰인다. 시경 「'정풍(鄭
風)」자금편(子衿篇)에 “푸르고 푸른 그대의 옷깃이여(靑靑子衿).”라고 한 말에서 유래한다.
101) 논어(論語) 「7선진(先進)」'에서 공자의 제자 증점(曾點)이 자신의 뜻을 말하라는 공자의 명에 슬(瑟)
을 울리다 말고, “늦은 봄날 봄옷이 이루어지거든 어른 대여섯 사람, 동자 예닐곱 사람과 함께 기수(沂
水)에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을 쐬고 시를 읊으면서 돌아오겠다(莫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
者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 하였다. 여기서는 서악서원의 전루(前樓)가 영귀루(詠歸樓)이기 때
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102) 청아(菁莪)는 시경 「7소아(小雅)」'의 편명인 청청자아(菁菁者莪)의 준말로, 그 내용은 인재 교육을 찬
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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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 나그네 처음으로 만 리 길을 돌아왔네 遠客初回萬里程
귀옹103)이 서원을 세운 뜻 누가 알리오 誰識龜翁開院意
계림의 잎마다 풍성을 다하는도다 雞'林葉葉盡風聲
<옥산서원(玉山書院)> 안강현 서쪽 자옥산(紫玉山) 동쪽 화개산(華蓋山) 아래에
있다. 문원공(文元公) 회재(晦齋) 이 선생의 서원이다. 융경(隆慶) 6년 임신년(1572,
선조 5)에 부윤 이제민(李齊閔)이 고을의 사림(士林)을 거느리고 터를 정한 다음 곧
묘우(廟宇)를 건립하였다. 계유년(1573, 선조 6)에 서악(西岳)의 향현사(鄕賢祠)로부
터 위판을 옮겨 봉안하였다. 묘우는 3칸인데 서향으로 만들었고 체인묘(體仁廟)라고
하였으며, 그 왼쪽에 전사청(典祀廳) 2칸이 있다. 묘 앞에 강당 3칸이 있는데 구인
당(求仁堂)이라 하였으며, 동재(東齋)를 양진재(兩進齋), 서재(西齋)를 해립재(偕立
齋), 동하재(東下齋)를 민구재(敏求齋), 서하재(西下齋)를 암수재(闇修齋)라 하였으
며, 전루(前樓)를 무변루(無邊樓), 외문(外門)을 역락문(亦樂門)이라 하였다. 강당
동쪽에 경각(經閣) 3칸이 있다.
대궐에서 선사(宣賜)한 서책 및 서원에서 구비한 서책 수 백여 권이 보관되어 있
다. 강당 북쪽에 비각(碑閣) 1칸이 있는데, 비는 곧 신도비(神道碑)이다. 관찰사 박
소립(朴素立)이 묘가 멀리 있어 수호하기가 어렵다고 하여 이곳에 옮겨 세운 것이
다. 만력 갑술년(1574, 선조 7)에 관찰사 김계휘(金繼輝) 공이 사액(賜額)해주기를
계청(啓請)하였으므로 옥산서원이라고 사액하였다. 편액은 이산해(李山海) 공의 글
씨이다.
<玉山書院> 在安康縣西紫玉山東華蓋山下 文元公晦齋李先生書院也 隆慶六年壬申
府尹李齊閔率鄕中士林 以定其基 仍建廟宇 癸酉 自西岳鄕賢祠 移安位版 廟則三間 其
制西向 號體仁 其左有典祀廳二間 廟前有講堂三間 號求仁 東齋曰兩進 西齋曰偕立 東
下齋曰敏求 西下齋曰闇修 前樓曰無邊 外門曰亦樂 講堂東有經閣三間 ○宣賜書册及院
備書册累百餘巻藏焉 講堂北有碑閣一間 碑乃神道諀也 觀察使朴素立 以墓在遐遠 難於
守護 移竪焉 萬曆甲戌 因觀察使金公繼輝啓請 賜額曰玉山書院 扁額則李公山海筆也
축문(祝文)은 다음과 같다.
학문은 심오하고 學問淵深
도덕은 고상하여 道德高厚
후인을 계도 하였으니 啓佑後人
향사가 더욱 오래리라 享祀悠久
체인묘명(體仁廟銘)은 다음과 같다.
103) 귀옹(龜翁)은 서악서원을 세운 귀암(龜巖) 이정(李楨)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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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을 낳는 봄이 生物之春
나에게 있어서는 인이니 在我爲仁
자신으로써 체득한다면 體之以身
어찌 사람을 자라게 하지 않으리오 何不長人
구인당명(求仁堂銘)은 다음과 같다.
마음의 덕이 어찌 줄어들겠는가 心德何損
놓아두고서 멀다고 하는도다 放而曰遠
한 번 생각하여 돌이킬 줄 알면 一念知反
곧 이것이 바로 근본이니라 即7此是本
양진재명(兩進齋銘)은 다음과 같다.
선을 가림은 밝게 하여야 하고 擇善惟明
자신을 반성함은 성실하게 하여야 하나니 反身惟誠
어느 것이 중대하고 어느 것이 가벼운가 孰重孰輕
성인과 현인이 함께 행하느니라 聖賢同行
해립재명(偕立齋銘)은 다음과 같다.
경직하고 의방하여104) 敬直義方
안과 밖이 서로 도움을 內外交相
굳게 잡아 잊지 않아야 惟操不忘
하늘로부터 받은 덕이 빛나리라 天德之光
무변루명(無邊樓銘)은 다음과 같다.
부족하지도 않고 남지도 않으며 靡欠靡餘
끝도 없고 처음도 없도다 罔終罔初
광풍제월(光風霽月)이여 光歟霽歟
태허에 노니는도다 遊于太虛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의 무변루시(無邊樓詩)는 다음과 같다.
104) 주역(周易) 「7곤괘(坤卦)」문언(文言)에 “군자는 경으로 내면을 곧게 하고 의로써 외면을 바르게 한
다(君子 敬以直內 義以方外).” 한다고 한 것에서 나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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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고에 자옥이란 산 이름 전하리니 萬古山傳紫玉名
해동의 부자는 회재 선생이로다 海東夫子晦先生
무변105)루 아래 오동나무에 달이 비치니106) 無邊樓下梧桐月
당시에 선생의 맑은 의미107)를 상상할 수 있네 想得當年意味淸
역락문명(亦樂門銘)은 다음과 같다.
풍성을 듣고 곧 돌아오고 聞風即7回
도를 바라보고 왔으니 望道而來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不亦樂哉
나라의 영재들이여 邦之英材
이 명(銘)은 모두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이 지은 것이다.
銘皆盧蘇齋守愼所題也
초당(草堂) 허엽(許曄)이 서원(書院)의 기문을 지었는데, 그 기문에, “합천 군수(陜
川郡守) 권덕린(權德麟) 공은 회재 이 선생의 제자이다. 융경(隆慶) 6년(1572, 선조
5) 늦가을에 편지를 보내와서 말하기를, ‘선생을 위하여 서원을 지었는데 그 시말을
기록하고 또 재사의 이름을 지어 주시오.’ 하였다. 허엽이 이 편지를 받아 간직해두
고는 병을 앓아 시일만 끌면서 즉시 초를 잡지 못하였다. 만력 계유년(1573, 선조
6) 겨울에 선생의 손자 이준(李浚)이 와서 권군이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전
하였으므로 이를 위해 애도하였다. 권군은 소싯적부터 학문에 뜻을 둔 선비였는데
갑자기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으니, 아! 무슨 운명이란 말인가. 죽은 벗의 부탁에
감회가 있어 삼가 졸렬한 말을 써서 이군이 돌아가는 편에 부친다.
가만히 생각건대, 선생의 덕용(德容)을 다행히 엽이 성균관에 드나들 때 뵈었고,
선생의 덕행(德行)을 또 퇴계 선생이 지은 행장(行狀)에서 자세히 보고서 선생을 경
모(敬慕)하며 우러러 찬탄한 지가 오래되었다. 일찍이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 를
보니, 정자(程子)와 주자(朱子)가 지나가면서 한 번 말을 쉬거나 한 번 읊조린 곳마
다 서원을 세우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는 어진 이를 좋아함이 이러한 점이 있는
것이다. 더구나 선생이 머물며 학업을 닦은 곳이야 말할 나위 있겠는가. 부윤 이제
민(李齊閔)이 그 고을의 13가지 소원을 채택하여 그 터를 정해 놓은 다음, 감사에
105) 무변(無邊)은 주자(朱子)가 육선생화상찬(六先生畵像贊)에서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頤)의 인품과 기상
이 쇄락(灑落)함을 기려서 “맑은 바람 밝은 달은 끝없이 펼쳐지고, 뜰 가운데의 풀은 무성히 푸르렀네
(風月無邊 庭草交翠).”라고 한데서 나온 말이다.
106) 송(宋)나라의 학자 소옹(邵雍)의 ‘월도오동상음(月到梧桐上吟)’에 “달은 오동나무 위에 이르고, 바람은
버드나무 가로 불어오네. 서재가 깊숙하고 사람도 없어 조용하니, 이 경치 누구와 함께 말하겠나(月到梧
桐上 風來楊柳邊 院深人復靜 此景共誰言).”라고 하였는데, 이는 성인(聖人)의 마음이 하늘의 달빛처럼
깨끗하고 봄바람처럼 온화함을 비유한 것이라 한다.
107) 소옹의 ‘청야음(淸夜吟)’에 “달이 하늘 중심에 이르고 바람이 수면에 불어올 때 일종의 맑은 의미를
짐작건대 아는 이 적으리(月到天心處 風來水面時 一般淸意味 料得少人知).”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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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보고하여 서원을 건립할 것을 청하였다. 그리고 창고의 남는 것을 출연하여 그
비용을 주로 채우고 향로(鄕老)와 유사(儒士) 또한 그 힘을 다하였다. 그리하여 임
신년(1582, 선조 15) 2월에 일을 시작하여 8월에 공사를 마쳤는데, 사우(祠宇)와
강당 및 동재와 서재, 전루(前樓)에 이르기까지 도합 40여 칸이니, 아 성대하도다.
경주 안강현의 양좌동(良佐洞)은 바로 선생이 거쳐하셨던 곳이다. 그 동네 서쪽
15리에 자옥산이 있으니, 선생이 별장을 짓고 유식(遊息)과 장수(藏修)의 처소로 삼
은 곳이다. 거기에 탁영대(濯纓臺), 징심대(澄心臺), 관어대(觀魚臺), 세심대(洗心臺)
등이 있는데 모두 선생이 이름을 붙이고 항상 소요하며 스스로 즐기시던 곳이다.
지금의 서원은 바로 세심대 위쪽에 있으니, 상하로 용추(龍湫)의 맑고 깊음이 사랑
할 만하다. 내가 비록 그곳을 답사하지 못하고 권공이 보여준 것에만 의거하였으나
이미 송연히 흥기하였다. 내가 비록 선생의 문하에서 제자의 예를 갖추고 선생의
말씀을 듣지는 못하였으나 심경 에 부주(附註)한 것을 보고 가만히 스스로 존경하
여 나의 스승으로 여겼다. 드디어 동재를 민구재(敏求齋)라고 이름 하였으니, 공자
가 가르친바 ‘옛것을 좋아하여 급급히 그것을 구하였다.’는 뜻을 취한 것이며, 서재
를 암수재(闇修齋)라고 하였으니 주자의 자찬(自贊) 중에 ‘잠잠히 날마다 수양한다.’
는 뜻을 취한 것이다. 누를 납청루(納淸樓)라 하였으니 청(淸)이라는 것은 기(氣)이
고 기는 양(陽)이다. 이 누각에 오르는 자는 청을 받아들여 양을 보양하고 양을 보
양하여 도(道)를 응결되게 함이 여기에 갖추어져 있을 것이다.
만력 계유년(1573, 선조 6)에 옥산서원이라고 사액하니 의연히 주자가 강의(講
義)하던 지명과 같다. 명호(名號)의 아름다움과 사문(斯文)의 빛남이 지극하다 하겠
다. 아! 나는 쇠약하고 병이 들어 한 번도 이 서원으로 가서 사우(祠宇)를 우러러
절하고 그 고을 선비들과 더불어 선생의 바른 학문을 강론하여 밝혀 진작(振作)하
고 경각(警覺)하는 일을 이루지 못하고 한갓 동쪽을 바라보며 서글퍼할 따름이다.
오직 바라건대, 이 서원에 거처하는 선비들은 부윤이 이 서원을 세운 뜻에 감격하
고 선생이 머무르던 곳임을 생각하여 선생의 도덕이 고후(高厚)함을 사모할 뿐만
아니라 그 심원하고 치밀한 공부를 배우며 그 심원하고 치밀한 공부만 배울 것이
아니라 그 독실하고 견고한 뜻을 힘쓴다면 선생의 고향은 영원히 훌륭한 선비들이
많은 추로(鄒魯)가 될 것이며 우리 국가에서 인재를 취하여 세상을 경륜하는 것이
더욱 유원하고 무궁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어찌 선생에게 영광이 되지 않
겠는가. 오호라! 힘쓰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납청(納淸)은 노 소재(盧蘇齋)가 무변
(無邊)으로 고쳤다.】
<소학당(小學堂)> 부의 동쪽 2리에 있다. 언제 창건했는지 알 수 없으나 성화(成
化) 을미년(1475, 성종 6)에 부윤 양순석(梁順石)이 중수하였다. 학술이 있는 자를
가려 스승을 삼고 어린아이를 모아 가르쳤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사마소(司馬所)> 향교의 남쪽 문천(蚊川) 가에 있다. 언제 창건했는지 알 수 없
으나 임진왜란 때 불에 타고 주춧돌과 섬돌만이 아직도 남아 있다.
<매월당(梅月堂)> 사우는 금오산(金鰲山) 남변(南邊)의 동구에 있다. 바로 용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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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茸長寺)의 옛터로 김시습(金時習) 공이 유식(遊息)하던 곳이다. 공의 사적은 율곡
(栗谷) 선생이 교지를 받들어 지은 공의 전기(傳記) 중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공
의 평소 발자취는 국내의 명산에 두루 펴져 있는데 유독 금오산에 거처한 것은 장
차 임종하려는 듯한 뜻이 있었으니, 사유록(四遊錄) 을 보면 알 수 있다. 사유록
에 “금오산에 거처함으로부터 멀리 유람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다만 해변에 한가
로이 거닐며 교외에 유유자적 노닐며 매화를 찾고 대숲을 물으면서 항상 읊조리고
취하여 스스로 즐겼다.”고 한 것은 바로 공이 스스로 기록한 말이다. 세상에 전하기
를 매월로써 당을 명명한 것도 또한 금오산의 매화와 달의 뜻의 취한 것이라고 한
다. 금오신화 를 제한 시[題金鰲新話詩]에 이른바 “나직한 집의 푸른 담요엔 온기
가 넉넉한데, 창에 가득한 매화 그림자엔 달이 처음 밝게 비취네.”라고 한 것이 바
로 이것이다.
<용장사(茸長寺)> 언제부터 황폐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섬들은 아직 남아 있
다. 경술년(1670, 현종 11) 봄에 부사 주면(周冕)이 관찰사 민시중(閔蓍重) 공에게
품의(稟議)하고 경내(境內)의 인사들과 도모하여 이곳에 사우를 창건한 다음, 장차
공이 손수 그린 진상(眞象)을 모사하여 봉안하고 중을 모아 수호하려 하였으나, 공
사를 마치지 못하고 체직(遞職)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윤색(潤色)하는 책임은 자연
후일의 군자에게 있게 되었으므로 우선 전말을 비워둔다.
許草堂曄作書院記曰 陜川郡守權公德麟 晦齋李先生之學徒也 隆慶六年季秋 以書來
曰 爲先生起書院 其記始末 且名齋舎哉 曄受而藏之 疾病遷延 未即7起草 萬曆癸酉冬
先生之孫浚來傳 權君已下世 爲之驚悼 少年志學之士 遽至於是 噫是何司命也 感念亡
友之囑 謹寫拙詞 以付李君之還 竊惟先生之德容 幸及瞻睹於游泮之日 先生之德行 又
得備聞於退溪所撰行狀 景慕而仰歎者 久矣 嘗見大明一統志 程朱所過一憩馬一 嘯咏'之
地 無不起書院 好賢之無已 有如是者 況先生之所棲遲做業者乎 府尹李侯齊閔採鄕十三
之願 躬卜定其基 告于監司 請建書院 出其庫餘 以主其費 鄕老儒士 亦盡其力 壬申二
月始事 八月訖功 則祠宇與講堂曁'東西兩齋及乎前樓 摠四十餘間 吁7盛矣哉 慶州安康縣
之良佐洞 即'先生之居也 洞之西十五里 有紫玉山 先生建別墅 以爲遊息藏修之所 有濯
纓澄心觀魚洗心等臺 皆先生所題目而常逍遙自樂者也 今之書院 正當洗心臺之上 上下
龍湫 澄泓可愛 予雖未得躡'斯境而 據權公之示 已竦7然興起矣 予雖未及摳7衣於先生之門
而聞先生之語 得見心經附註 竊自尊之 以爲吾之師矣 遂名其東齋曰敏求 取孔子所訓好
古敏以求之之義也 其西齋曰闇修 取朱子自贊中闇然而日修之義也 樓曰納淸 淸者氣也
氣者陽也 登斯樓者 納淸而養陽 養陽以凝道 斯其具也 萬曆癸酉 賜額玉山書院 依然朱
子講義之地 名號之美 斯文之光 可謂至矣 嗟夫 予衰且病 無由一入院中 瞻拜祠宇 得
與鄕士子 講明先生之正學 以致提撕'警覺之事 徒爲東望悵'悵7而已 惟願士子之居是院者
感府尹營建之意 思先生棲息之所 不但慕其道德之高厚 而且學其深潛縝密之功 不但學
其深潛縝密之功 而且礪其篤實堅確之志 則先生之鄕 永爲鄒魯之多士 而我國家取材而
經世者 益悠遠而無窮矣 豈不于先生有光哉 鳴呼 可不勉哉【納淸 盧蘇齋改以無邊】○
<小學堂> 在府東二里 不知何時肇建 而成化乙未 府尹梁順石重修 擇有學術者爲師 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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童蒙訓誨 今廢 ○<司馬所> 在鄕校南蚊川上 不知何時肇建 而火于壬辰 遺礎階砌'尙在
○<梅月堂> 祠宇在金鰲山南邊洞口 即7茸長寺舊基 而金公時習遊息之地也 公之事蹟
具載於栗谷李先生奉敎所撰傳中 公之平日足跡 殆遍於國內名山 而獨居金鰲 有若將終
焉之志 觀於四遊錄可知也 其曰自居金鰲 不愛遠遊 但優遊海濱 放曠郊廛 探梅問竹 常
以吟醉自娛者 是公自志之言也 世傳以梅月名堂者 亦取金鰲梅月之意 題金鰲新話詩所
謂 矮屋靑氈暖有餘 滿窓梅影月明初者 是也 ○<茸長寺> 未知自何時荒廢 而階砌7尙存
庚戌春 府使周冕禀7議于觀察使閔公蓍重 謀諸境內人士 草創祠宇於此 將欲摹安公手寫
眞象 募僧守護 未及訖工而遞 潤色之責 自有後來之君子 姑闕顚末云
역원(驛院)
<구어역(仇於驛)> 부의 동쪽 48리에 있다.
<조역(朝驛)> 부의 동쪽 25리에 있다.
<사리역(沙里驛)> 부의 북쪽 6리에 있다. E신증新增 � 천계(天啓) 갑자년(1624, 인
조 2)에 한지원(閑地原)으로 옮겼다가 금년에 도로 옛터로 옮겼다.
<노곡역(奴谷驛)> 부의 남쪽 26리에 있다.
<아화역(阿火驛)> 부의 서쪽 45리에 있다.
<仇於驛> 在府東四十八里 ○<朝驛> 在府東二十五里 ○<沙里驛> 在府北六里 z新
增 � 天啓甲子 移居閑地原 今年還移舊基 ○<奴谷驛> 在府南二十六里 ○<阿火驛> 在
府西四十五里
김극기(金克己)의 시는 다음과 같다. 金克己詩
어느 곳이 슬퍼할 만한가 何處堪惆'悵7
새벽에 일어나 먼 길을 나설 때라오 晨興遠邁時
길에 오르기를 급히 서둘렀으나 登途雖促促
떠나기는 오히려 머뭇거리네 去國尙遲遲
잿마루 나뭇가지에 아침 해 솟아오르니 嶺杪'新曦湧
숲 사이에 자던 안개 걷히는구나 林間宿霧披
잔을 들어도 함께 말할 이 없고 擧盃無與語
뜰의 나무는 무성하게 푸르렀네 庭樹綠猗'猗7
<의곡역(義谷驛)> 부의 서쪽 57리에 있다.
<경역(鏡驛)> 안강현에 있다. 부와의 거리는 40리이다.
<잉보역(仍甫驛)> 부의 남쪽 55리에 있다.
<義谷驛> 在府西五十七里 ○<鏡驛> 在安康縣 距府四十里 ○<仍甫驛> 在府南五十
五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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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극기의 시는 다음과 같다. 金克己詩
아득하고 아득한 산 아래 길에 悠悠山下路
말 가는대로 맡겨두고 서늘한 날씨 읊네 信轡7詠涼'天
물속엔 가시랭이 머금은 게 있는데 水有含芒蟹
숲에는 잎으로 몸 가린 매미 없어라 林無翳'葉蟬
시냇물 소리는 빗소리처럼 맑고 溪聲淸似雨
들 기운은 연기처럼 담담하구나 野氣淡如烟
밤이 되어 외로운 객사에 드니 入夜投孤店
촌부는 아직도 자지 않고 있네 村夫尙未眠
<인비역(仁庇驛)> 기계현(杞溪縣) 서쪽 6리에 있다. 부와의 거리는 76리이다.
<육역(六驛)> 신광현(神光縣)에 있다. 부와의 거리는 75리이다.
<모량역(牟梁驛)> 부의 서쪽 23리에 있다.
<仁庇驛> 在杞溪縣西六里 距府七十六里 ○<六驛> 在神光縣 距府七十五里 ○<牟
梁驛> 在府西二十三里
김극기의 시는 다음과 같다. 金克己詩
만리 고향 그리는 마음 오랜 세월 흔들리더니 鄕心萬里久搖㫌'
홀연히 고향 향하여 채찍을 휘두르며 달려가노라 忽向家山振策行
먼 재는 점점 타향의 물색에 잠겨 가고 遙嶺漸沈他界色
어지러운 물소리는 처음으로 고향소리 울려주네 亂流初放故園聲
끊어진 나무토막이 바람을 따르는 자취 거두어 會收斷梗隨風迹
떠다니는 구름이 봉우리 그리워하는 정 위로하리 持慰浮雲戀岫情
세상의 영화와 쇠퇴는 웃음거리에 붙일 만하니 世上榮枯堪一笑
어찌 분주히 명성을 위해 괴로이 달리겠는가 何須擾擾苦馳名
정이오(鄭以吾)의 시는 다음과 같다. 鄭以吾詩
역로는 가을이라 고목에서 매미가 우는데 驛路蟬吟老樹秋
동도에 유람하는 객 홀로 누에 오르노라 東都遊客獨登樓
오후의 저택엔 잡초가 무성히 우거졌고 五侯池館蓬蒿遍
옥적 한가로운 소리에 지난일 아득하여라 玉笛閑吹往事悠
조준(趙浚)의 시는 다음과 같다. 趙浚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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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림의 산수에 맑은 가을 깃들려 하는데 雞'林山水欲淸秋
만고의 흥망에 객은 누에 기대었어라 萬古興亡客倚樓
외려 후인들 미혹하여 거울삼을 줄 모르니 尙使後人迷不鑑
하늘 동쪽 오늘날 나 홀로 근심에 잠기네 天東此日獨悠悠
<보이원(甫伊院)> 부의 동쪽 2리에 있다.
<동원(東院)> 부의 동쪽 7리에 있다.
<용두원(龍頭院)> 부의 동쪽 13리에 있다.
<장령원(長嶺院)> 부의 동쪽 25리에 있다.
<혜리원(惠利院)> 부의 동남쪽 32리에 있다. 하륜(河崙)의 서문(序文)에, “계림은
신라의 옛 도읍인데, 전조에 들어와서도 큰 부[巨府]가 되었으니, 인물이 번성하고
많았던 것은 사적(史籍)에서 자세히 볼 수 있다. 고려 말엽에 이르러 수십 년 동안
왜구가 근심거리가 되었으니 매우 슬픈 일이다. 내가 경오년(1390, 우왕 6) 봄에
울주(蔚州)로 가려는데, 경주의 성남(城南)을 지나게 되어 천왕사(天王寺)에서 유숙
하였다. 당두(堂頭 주지) 연 상인(然上人)이 좋은 말로 응접하여 주었다. 이튿날 절
문을 나오니 절의 동쪽은 멀리까지 인가가 없었다. 90여 리를 가서 울주에 이르렀
는데 외로운 성은 바다와 거리가 채 10리도 안 되었으며 전함(戰艦)이 포구(浦口)
에 나누어 정박하여 불의의 환난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 수졸(戍卒)들은 대개 두 달
에 한 번 씩 교대하며, 생선과 소금 등을 매매하는 자들이 또한 때때로 이르렀다.
그 90리를 왕래하는 사이에 춥거나 덥거나 비가 오거나 혹 날이 저물어도 머물러
쉴 곳이 없었다. 도둑도 염려되고 맹수도 두려워서 신음하며 불안에 떨며 수풀 사
이에서 날이 밝기를 기다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돌아오는 길에 또 천왕사에서
묵게 되었는데, 나그네의 고통과 수졸들의 어려움에 대해 말하게 되었다. 상인(上
人)이 말하기를, ‘나는 비록 출가하였으나 늙은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하여 고향 땅
을 멀리 떠나지 못하였습니다. 그대가 말한 바를 나도 자세히 알고 있습니다. 어버
이는 이미 돌아가셨으니 명복을 기원한 나머지 재물로써 그 길의 중간쯤에 조그마
한 원사(院舍) 짓기를 원하나 힘이 부족합니다.’ 하였다. 내가 그 말을 듣고 의롭게
여겼다. 이튿날 상인은 나를 대비원(大悲院)까지 전송하여 주었다.
정축년(1397, 태조 6) 봄에 내가 부윤이 되어 이르니 상인은 아직도 탈이 없이
있었다. 관청에서 퇴근한 여가에 그와 함께 예전 일을 이야기하는데, 상인이 말하기
를, ‘내가 전번에 말한 그 길의 반쯤 되는 곳에서 옛 사람들이 이른바 덕방동(德方
洞)이라고 하던 곳을 찾아내었습니다. 앞뒤가 다 산이며 초목이 무성하고 시냇물이
그 가운데를 흐르고 있었습니다. 따뜻한 방을 만들 수도 있고 서늘한 마루를 만들
수도 있었으며, 곁에는 노는 땅이 있어서 또 채소나 과일을 심을 수도 있었습니다.
과연 진실로 원사를 두어 나그네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기에 알맞은 곳이었습니다.
정주(靜州) 남득온(南得溫)과 절제사(節制使) 이종주(李從周)가 함께 그 비용을 도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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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어서 거의 낙성하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내가 그 말을 듣고 기뻐하여 쉬는 날
함께 한 번 가보려고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제 내가 사신(使臣)의 명을 받들고 또 부의 경내(境內)를 지나게 되었는데, 상
인이 나와서 보고 만면에 희색을 띠며 말하기를, ‘나의 원사가 이미 낙성하였습니
다. 그때 그대는 바야흐로 중국에 가게 되었으므로 감히 청하지 못하였고, 양촌(陽
村) 권공(權公)108)이 이미 기문을 썼습니다. 그러나 나는 아직 원(院)의 이름을 짓
지 못하였으니, 부디 그대가 이름을 지어서 나의 원사를 빛나게 해 주십시오.’ 하였
다. 내가 말하기를, ‘우리나라에서 길가에 원우(院宇)를 두는 것은 곧 주례(周禮)
의 지관(地官) 유인(遺人)에, 10리마다 여(廬)가 있고, 여에는 음식이 있다고 한 여
숙 제도(廬宿制度)의 유의(遺意)로서 위정자(爲政者)가 당연히 힘써야 할 일이다. 이
제 상인이 어버이에게 효도하는데 정성을 다하고, 또 그 나머지를 미루어 길 가는
나그네에게까지 미치게 하였으니, 이것은 사람에게 혜택을 주고 사물(事物)을 이롭
게 하려는 염원이 천성(天性)의 고유한 바에서 발로되어 그만 두려 하여도 그만 둘
수 없는 것이 이와 같은 것이다. 저 심산유곡 속의 적막한 데에 앉아 마른 나무나
식은 재처럼 세상에 아무 것도 하는 바가 없는 자와 비교한다면 그 거리가 어찌 멀
지 않겠는가. 의당 그 원(院)에 이름을 지어 후인들로 하여금 보고 느끼는 바가 있
도록 할 것이다. 이에 혜리원(惠利院)이라 명명하고, 이어 전후에 서로 이야기한 내
용을 차례로 적어 서문을 삼는다.“ 하였다.
<모화촌원(毛火村院)> 부의 동쪽 43리에 있다.
<요광원(要光院)> 부의 동쪽 37리에 있다.
<이견원(利見院)> 이견대(利見臺) 곁에 있다.
<전동촌원(典洞村院)> 부의 동쪽 57리에 있다.
<남원(南院)> 부의 남쪽 5리에 있다.
<태로원(太櫓院)> 부의 남쪽 6리에 있다. 신라의 김생(金生)이 쓴 태로원(太櫓院)
이라는 석 자의 큰 글씨가 있다.
<천룡원(天龍院)> 부의 남쪽 25리에 있다.
<구사원(仇沙院)> 부의 남쪽 34리에 있다.
<회은촌원(回隱村院)> 【혹은 전읍(錢邑)이라고도 한다.】 부의 남쪽 38리에 있
다.
<구량화촌원(仇良火村院)> 부의 남쪽 50리에 있다.
<대비원(大悲院)> 【일명 두두원(豆豆院)이라고도 한다.】 부의 남쪽 15리에 있
다.
<금장원(金藏院)> 부의 서쪽 25리에 있다. 일명 금척원(金尺院)이라고도 한다.
【이문(異聞)에 상세히 보인다.】
<미륵원(彌勒院)> 부의 서쪽 30리에 있다.
<고원(高院)> 부의 서쪽 40리에 있다.
108) 권근(權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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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경원(永慶院)> 부의 서쪽 60리에 있다.
<과쌍원(果雙院)> 부의 서쪽 35리에 있다.
<감조촌원(甘助村院)> 부의 서쪽 40리에 있다.
<풍정원(楓井院)> 부의 서쪽 7리에 있다.
<신원(新院)> 부의 서쪽 56리에 있다.
<천은원(天恩院)> 부의 동쪽 14리에 있다.
<관원(館院)> 부의 북쪽 7리에 있다.
<화산촌원(花山村院)> 부의 북쪽 15리에 있다.
<광제원(廣濟院)> 부의 북쪽 16리에 있다.
<소야원(所也院)> 안강현 동쪽 15리에 있다.
<한보원(閑甫院)> 안강현 남쪽 2리에 있다.
<여원(礪院)> 안강현 서쪽 20리에 있다.
<인다원(仁多院)> 기계현 서쪽 13리에 있다.
<다질원(多叱院)> 안강현 북쪽 11리에 있다.
<죽동원(竹洞院)> 신광현 남쪽 5리에 있다.
<대후원(待侯院)> 죽장현 남쪽 20리에 있다.
【이상은 여지승람 에 나온다.】
<甫伊院> 在府東二里 ○<東院> 在府東七里 ○<龍頭院> 在府東十三里 ○<長嶺
院> 在府東二十五里 ○<惠利院> 在府東南三十二里 ○河崙序 雞7林 新羅氏之古都 入
前朝爲巨府 人物之繁夥史具可見也 及其叔世 倭寇爲患者 數十年 可悲之甚矣 予於庚
午春 將適蔚州 道過城南 寄宿天王寺 堂頭然上人 接以良話 明日出門 則寺以東 杳無
人煙 行九十餘里 以至于蔚州 則孤城去海 不滿十里 賴有戰艦分泊浦口 以備不虞耳 其
戍卒率兩月一更代 魚鹽之貿易者 亦時至 其於九十里往還之間 祁寒暑雨 或値日暮 無
所於止息 草竊之可慮 虎豹之可畏 不能不呻吟 耿耿以待曙光於林莽之間矣 予將還 又
宿天王寺 語及羈旅之苦行役之難 上人曰 予雖出家 爲養老親 不能遠離鄕井 子之所言
予所悉知也 親已歿 願以追福之餘 就於半途 構一小院 力不能足耳 予聞而義之 明日
上人送至大悲院 丁丑春 予尹府而至 則上人尙無恙 公退之暇 相與之話 舊上人乃曰 予
於向之半途 卜得古之人所謂德方洞者 前後皆山 草木叢茂 澗水中流 可以爲燠'房 可以
爲涼'軒 旁有閑地 又可以種蔬果 誠宜置浣 以便行旅 而南靜州得温 李節制從周 共助其
費 幾乎有成矣 予聞而喜之 欲於暇日 相與一往觀之 而未遂也 今予奉使命 又過府境
上人出而見之 喜滿于色曰 吾之院旣成 而子方有中國之行 不敢請 陽村權公 已記之矣
予猶不得院名 請子109)幸名之 以光吾院 予曰 吾東方道途之有院宇 即'周禮廬宿之遺意
而爲政者之所當務也 今上人孝其親以誠 又推其餘 以及於行路之人 是其惠人利物之念
發乎天性之所固有 而不容已者若此 其視深山窮谷之中 坐於空寂 如槁木寒灰 無所事於
世者 相去豈不遠乎 是宜有以名其院 而使夫來者 有所觀感也 於是名之 曰惠利 仍次其
前後之相語者 以爲序云 ○<毛火村院> 在府東四十三里 ○<要光院> 在府東三十七里
109) 중간본에는 予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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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利見院> 在利見臺傍 ○<典洞村院> 在府東五十七里 ○<南院> 在府南五里 ○<太
櫓院> 在府南六里 有新羅金生太櫓院三大字 ○<天龍院> 在府南二十五里 ○<仇沙院>
在府南三十四里 ○<回隱村院>【或云錢邑】在府南三十八里 ○<仇良火村院> 在府南
五十里 ○<大悲院> 在府南十五里【一名豆豆院】○<金藏院> 在府西二十五里 E新增 j
一名金尺院【詳見異聞】○<彌勒院> 在府西三十里 ○<高院> 在府西四十里 ○<氷慶
院> 在府西六十里 ○<果雙院> 在府西三十五里 ○<甘助村院> 在府西四十里 ○<楓
井院> 在府西七里 ○<新院> 在府西五十六里 ○<天恩院> 在府東十四里 ○<館院>
在府北七里 ○<花山村院> 在府北十五里 ○<廣濟院> 在府北十六里 ○<所也院> 在
安康縣東十五里 ○<閑甫院> 在安康縣南二里 ○<礪院> 在安康縣西二十里 ○<仁多
院> 在杞溪縣西十三里 ○<多叱院> 在安康縣北十一里 ○<竹洞院> 在神光縣南五里
○<待侯院> 在竹長縣南二十里【以上出輿地勝覽110)】
교량(橋梁)
<대교(大橋)> 문천(蚊川) 위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효불효교(孝不孝橋)> 부의 동쪽 6리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신라 때에 아들
7형제를 둔 어머니가 있었는데, 그가 사통(私通)하는 남자가 물의 남쪽에 있었으므
로 그의 아들들이 잠들기를 엿보아서 가곤 하였다. 그 아들들이 서로 말하기를, ‘어
머니가 물을 건너 밤에 다니시니 자식된 자의 마음에 편안할 수 있겠는가.’ 하고,
드디어 돌다리를 놓으니, 어머니가 부끄럽게 여겨 행실을 고쳤다. 당시 사람들이 그
다리를 효불효(孝不孝)라 명명하였다.” 한다.
<굴연천교(掘淵川橋)> 부의 북쪽 20리에 있다. 일명 광제원교(廣濟院橋)라고도 한
다. @신증新增 � 금년에 큰비가 내려 시냇물의 흐름이 바뀌어 옛길을 잃어버렸으므
로 부의 북쪽 15리로 옮겨서 다리를 만들었다.
<신원교(神元橋)> 부의 서쪽 10리에 있다.【이상은 여지승람 에 나온다.】
(신증新增 m
<남정교(南亭橋)> 부의 남쪽 5리에 있다.
<大橋> 在蚊川上 今廢 ○<孝不孝橋> 在府東六里 世傳新羅時 有七子之母 所私在
水南 伺其子寢 往奔之 其子相謂曰 母涉水夜行 於子心安乎 乃作石橋 母慙而改行 時
人名其橋 曰孝不孝 ○<掘淵川橋> 在府北二十里 一名廣濟院橋 (新增 M 今年大雨 川
水變遷 失其故道 移就府北十五里爲橋 ○<神元橋> 在府西十里【以上出輿地勝
覽111)】 �新增 <南亭橋> 在府南五里
사묘(祠廟)
110)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경상도(慶尙道)」경주부(慶州府) 역원조(驛院條)
111)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7경상도(慶尙道)」경주부(慶州府) 교량조(橋梁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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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단(社稷壇)> 부의 서쪽에 있다. �신증新增 중간에 부의 동쪽 동쪽(東川)으
로 옮겼다가 금년에 또 부의 성 서쪽 2리쯤으로 옮겼다.
<문묘(文廟)> 향교(鄕校)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부의 동쪽 7리에 있다.
<혁거세묘(赫居世廟)> 부의 남쪽 월남리(月南里)에 있다. 우리 세종 11년(1429
년)에 묘를 세우고, 매년 봄과 가을 중월(仲月)에 향과 축문을 내려 제사하게 하였
다.
<석탈해사(昔脫解祠)> 동악(東嶽) 산정(山頂)에 있다. 탈해왕(脫解王)이 무열왕(武
烈王)의 꿈에 나타나 말하기를, “소천(疏川) 언덕에서 나의 해골을 파내어 소상(塑
像)을 토함산(吐含山)에 안치(安置)하라.” 하였다. 무열왕이 그 말대로 하였더니, 두
개골(頭蓋骨)의 둘레는 3척 2촌, 뼈의 길이는 9척 7촌이며, 치아는 하나처럼 붙었
고 뼈마디는 모두 이어져 있었다. 드디어 동악에 사당을 세웠다. 지금은 없어졌다.
<성모사(聖母祠)> 서악(西嶽)의 선도산(仙桃山)에 있다. 성모(聖母)는 본래 중국
황실(皇室)의 여자로 이름은 사소(娑蘇)이다. 일찍이 신선되는 술법을 터득했는데,
해동(海東)에 와서 머무르며 오래도록 돌아가지 않고 드디어 신(神)이 되었다. 세상
에 전하기를, “혁거세는 곧 성모가 낳았다.” 한다. 그러므로 중국 사람이 지은 찬
(讚)에, “선도성모가 어진 이를 잉태하여 나라를 창건하였다.”라는 말이 있다.
<경순왕영당(敬順王影堂)> 부의 동북쪽 4리에 있다. 절일(節日)마다 주(州)의 수
석(首席) 아전이 삼반(三班)을 거느리고 제사한다. 신증新增 G 천계(天啓) 병인년
(1626, 인조 4)에 관찰사 김시양(金時讓)이 후손으로서 순행하다가 본부에 이르러
영당에 제사를 지내고 그 고을의 후손들을 모아 유사(有司)를 의논하여 정해서 해
마다 상례(常例)로 사당을 수리하게 하였다.
<신모사(神母祠)> 치술령(鵄'述嶺) 위에 있다. 신모(神母)는 곧 박제상(朴堤上)의
아내이다. 제상이 왜국에서 죽으니, 그의 아내가 그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금하지 못
하여 치술령에 올라 일본을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죽어서 드디어 치술령의 신모가
되었다. 그 마을 사람들이 제사지냈는데 뒤에는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는 곳이 되었
다.
<여단(厲'壇)> 부의 북쪽에 있다.
【이상은 여지승람 에 보인다.】
<독단(纛壇)> 부의 서문 밖에 있다.
<社稷壇> 在府西 �新增 中移于府東東川 今年 又移于府城西二里許 ○<文廟> 在
鄕校 ○<城隍祠> 在府東七里 ○<赫居世廟> 在府南月南里 我世宗十一年 立廟 毎歲
春秋仲月 降香祝幣以祭 ○<昔脫解祠> 在東嶽頂 脫解王夢於武烈王而言曰 抜我骨於
疏川丘 塑像 安於吐含山 王從其言 髑7髏'周圍三尺二寸 骨長九尺七寸 齒凝如一 骨節皆
連鎻 遂立祠於東嶽 今廢 ○<聖母祠> 在西岳仙桃山 聖母本中國帝室之女 名娑蘇 早
得神仙之術 來止海東 久而不還 遂爲神 世傳赫居世乃聖母之所誕也 故中國人讃_ 有仙
桃聖母娠賢肇邦之語 今廢 ○<敬順王影堂> 在府東北四里 毎節日 州首吏率三班以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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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增 天啓丙寅 觀察使金時讓 以姓孫 巡到本府 行祭影堂 會鄕之姓孫 議定有司 以
修祀事 歲以爲常 ○<神母祠> 在鵄7述嶺上 神母即7朴堤上妻也 堤上死於倭國 其妻不
勝其慕 登嶺望日本 慟哭而死 遂爲其嶺神母 其村人祀之 後爲祈雨之所 ○<厲7壇> 在
府北【以上出輿地勝覽112)】 �新增 <纛壇> 在府西門外
능묘(陵墓)
<혁거세릉(赫居世陵)> 담암사(曇巖寺) 곁에 있다. 관(官)에서 전지(田地)의 개간이
나 땔나무 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혁거세왕이 승천한 지 7일
뒤에 오체(五體)가 땅에 흩어져 떨어졌다. 나라 사람들이 합쳐서 장사지내려고 하였
으나 요사스런 뱀의 방해로 인하여 각각 장사지내고, 드디어 오릉(五陵)이라 하였
다.” 한다. 사릉(蛇陵)이라고도 한다.
<미추왕릉(味鄒王陵)> 부의 남쪽 황남리(皇南里)에 있다. 유례왕(儒禮王) 때에 이
서국(伊西國) 【지금의 청도(淸道)이다.】 사람이 금성(金城)을 침공하였다. 우리 병
사가 방어하였으나 대항할 수 없었다. 홀연히 이상한 군사가 와서 도와주었는데 모
두 댓잎[竹葉]으로 귀고리를 하고 있었다. 이에 힘을 합쳐 적을 격파하였다. 적군이
물러간 뒤에 그 군사들은 간 곳을 알 수 없었고, 다만 미추왕릉 앞에 쌓여 있는 댓
잎이 보일 뿐이었다. 이에 선왕(先王)이 음(陰)으로 도운 공(功)이 있었음을 알았다.
인하여 죽현릉(竹現陵)이라 불렀다. 또는 죽장릉(竹長陵)이라고도 한다.
<법흥왕릉(法興王陵)> 애공사(哀公寺) 북쪽 봉우리에 있다.
<태종무열왕릉(太宗武烈王陵)> 영경사(永敬寺) 북쪽에 있다.【지금의 서악리(西岳
里)이다.】
<赫居世陵> 在曇巖寺傍 官禁田柴 世傳王升天七日後 五體散落于地 國人欲合而葬
因蛇妖 各葬之 遂號五陵 亦云蛇陵 ○<味鄒王陵> 在府南皇南里 儒禮王時 伊西國
【今淸道】人來攻金城 我兵禦之 不能抗 忽有異兵來助 皆珥竹葉 幷力擊賊破之 軍退
後 不知所歸 但見竹葉積於味鄒陵前 乃知先王陰隲�有功 因號竹現陵 一云竹長陵 ○
<法興王陵> 在哀公寺北峯 ○<太宗武烈王陵> 在永敬寺北 【今西岳里】
매계(梅溪) 조위(曹偉)의 시는 다음과 같다. 梅溪曹偉詩
길 가의 촌락 사이에 道傍墟落間
파릇파릇 보리가 패어났구나 靑靑麥已秀
우뚝 솟은 몇 길 산봉우리 斗起數仞'峯
엎드린 짐승처럼 둥그렇네 穹窿'如伏獸
부러진 비석 거친 풀 속에 쓰러져 斷碣臥荒草
112)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경상도(慶尙道)」경주부(慶州府) 사묘조(祠廟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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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직하게 귀두를 드러내었네 昻然見龜首
우거진 초원은 길게 뻗쳤고 莽蒼原陸長
구불구불 냇물은 흘러가누나 迤'邐7川原走
이곳이 무열왕릉이라고 하니 云是武烈陵
인산의 제도가 누추하지 않구나 因山制非陋
말에서 내리니 머리가 쭈뼛하여 下馬髮蕭森
공손히 서서 소매를 여미네 拱立斂雙袖
비문을 어루만지며 읽어보지만 摩挲讀碑文
결락되어 실로 알기 어려워라 缺落難實究
아득하고 아득한 긴 세월에 茫茫歲月荒
버려둔 채 지키는 사람 없네 委棄無人守
생각건대 옛적에 음이 양이 되었으니 憶昔陰爲陽
이만113)은 참 임금이 아니었네 二曼非眞后
강한 이웃 제멋대로 침노하여 强隣肆侵軼'
사방 국경에 병란이 많았는데 四境多兵鬪
무열왕이 들어가 왕통을 이으니 惟王入繼統
우뚝히 공덕이 성대하였네 卓焉功德茂
조아를 유신에게 맡겼으니 爪牙委庾信
무략은 하늘이 준 것이로다 武略殆天授
백제를 병합하여 패도를 열고 幷濟開霸7圖
백년간의 도둑을 다 쓸어내니 剗'掃百年寇
당나라 황제가 그 공훈을 가상히 여겨 皇唐嘉乃勳
비단 하사품 듬뿍 내려주었네 厥篚堆錦繡
왕으로 책봉하는 은명 내리니 疇庸錫鴻命
영토가 길고 넓게 뻗쳤어라 鬪土綿廣袤
준걸들은 모두 등용되고 俊乂共登庸
창고는 날로 풍부해졌네 倉廥7日殷富
우물 물이 갑자기 핏빛으로 변하자 井水忽爲血
아 대운을 막을 길이 없게 되어 大運嗟莫救
칼과 신은 무덤 속으로 들어가고 劒履就窀'穸
영령은 하늘로 돌아가고 말았구나 英爽歸昻宿
옛 사기에서 대략 고증할 수 있으나 舊史粗可徵
기재가 소루함이 한스럽구나 紀載恨疏漏
인간의 일은 뜬구름과 같으니 人事如浮雲
누가 영원히 살 수 있겠는가 誰能了宇宙
113) 이만(二曼)은 선덕여왕(善德女王)과 진덕여왕(眞德女王)을 가리킨다. 선덕여왕의 이름은 덕만(德曼)이
고 진덕여왕의 이름은 승만(勝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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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성114)은 만고에 닫혔는데 佳城萬古閑
저물녘에 족제비가 휘파람 부네 日暮嘯鼪鼬7
<진흥왕릉(眞興王陵)> 부의 서쪽 서악리(西岳里)에 있다.
<선덕왕릉(善德王陵)> 낭산(狼山) 남쪽 산마루에 있다.
<효소왕릉(孝昭王陵)> 부의 동쪽 분남리(芬南里)에 있다.
<성덕왕릉(聖德王陵)> 부의 동쪽 도지곡리(都只谷里)에 있다.
<헌덕왕릉(憲德王陵)> 부의 동쪽 천림리(泉林里)에 있다.
<흥덕왕릉(興德王陵)> 안강현 북쪽에 있다. 신증新增 c 속칭 장릉(獐陵)이라고도
한다.
<김유신묘(金庾信墓)> 부의 서쪽 서악리에 있다.
<김인문묘(金仁問墓)> 부의 서쪽 서원(西原)에 있다.
<금양묘(金陽墓)> 태종왕릉에 배장(陪葬)하였다.
【이상은 여지승람 에 나온다.】
�신증新增 �
<괘릉(掛陵)> 부의 동쪽 35리에 있다. 어느 왕의 능인지 알 수가 없다. 세상에
전하기를, “물속에 장사지내면서 돌 위에다 관을 걸어놓고 인하여 흙을 쌓아 능을
만들었기 때문에 이렇게 명명하였다.” 한다. 석물이 아직도 남아 있다.
<남해왕릉(南解王陵)>, <유리왕릉(儒理王陵)>, <파사왕릉(婆娑王陵)> 모두 사릉
(蛇陵)의 원내(園內)에 있다.
<탈해왕릉(脫解王陵)> 성의 북쪽 양정(壤井) 언덕에 있다.
<내물왕릉(奈勿王陵)> 첨성대(瞻星臺) 서남쪽에 있다.
<진지왕릉(眞智王陵)> 영경사(永敬寺) 북쪽에 있다.
<진평왕릉(眞平王陵)> 한지(漢只)에 있다.
<진덕왕릉(眞德王陵)> 사량군(沙梁部)에 있다.
<신문왕릉(神文王陵)> 덕망사(德望寺) 동쪽에 있다.
<경덕왕릉(景德王陵)> 모지사(毛祗寺) 서쪽 산봉우리에 있다.
<희강왕릉(僖康王陵)> 소산(蘇山)에 있다.
<신무왕릉(神武王陵)> 형제산(兄弟山) 북쪽에 있다.【지금의 동방동(東方洞)이
다.】
<문성왕릉(文聖王陵), <헌안왕릉(憲安王陵)> 모두 공작지(孔雀趾)에 있다.
<헌강왕릉(憲康王陵)>, <정강왕릉(定康王陵)> 모두 보리사(菩提寺) 동남쪽에 있
다.
114) 가성(佳城)은 무덤을 뜻한다. 한(漢)나라 등공(滕'公)이 말을 타고 가다가 동도문(東都門) 밖에 이르자
말이 울면서 앞으로 나가지 않은 채 발로 오랫동안 땅을 구르기에, 사졸(士卒)을 시켜 땅을 파 보니 깊
이 석 자쯤 들어간 곳에 석곽(石槨)이 있고, 거기에 “가성(佳城)이 울울(鬱鬱)하니, 삼천년 만에야 해를
보도다. 아아! 등공이여 이 실(室)에 거처하리라.”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한다. 서경잡기(西京雜記)
권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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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성왕릉(眞聖王陵)> 황산(黃山)에 있다.【지금의 양산군(梁山郡) 황산역(黃山驛)
이다.】
<효공왕릉(孝恭王陵)> 사자사(獅子寺) 북쪽에 있다.
<신덕왕릉(神德王陵)> 죽성(竹城)에 있다.
<경명왕릉(景明王陵)> 황복사(黃福寺) 북쪽 기슭에 있다.
<경경왕릉(景京王陵)> 남산 해목령(蟹目嶺)에 있다.【이상은 삼국사기(三國史記)
에 나온다. 나머지는 모두 수장(水葬)하거나 화장(火葬)하였다.】
<眞興王陵> 在府西西岳里 ○<善德王陵> 在狼山南嶺 ○<孝昭王陵> 在府東芬南里
○<聖德王陵> 在府東都只谷里 ○<憲德王陵> 在府東泉林里 ○<興德王陵> 在安康縣
北 �新增 � 俗號獐陵 ○<金庾信墓> 在府西西岳里 ○<金仁問墓> 在府西西原 ○<金陽
墓> 陪葬太宗王陵【以上出輿地勝覽115)】 �新增 � ○<掛陵> 在府東三十五里 不知何王
陵 俗傳葬於水中 掛柩於石上 因築土爲陵 故名焉 石物尙在 ○<南解王陵> <儒理王
陵> <婆娑王陵> 俱在蛇陵園內 ○<脫解王陵> 在城北壤井丘 ○<奈勿王陵> 在瞻星臺
西南 ○<眞智王陵> 在永敬寺北 ○<眞平王陵> 在漢只 ○<眞德王陵> 在沙梁部 ○
<神文王陵> 在望德寺東 ○<景德王陵> 在毛祗寺西岑 ○<僖康王陵> 在蘇山 ○<神武
王陵> 在兄弟山北 【今東方洞】○<文聖王陵> <憲安王陵> 俱在孔雀趾 ○<憲康王
陵> <定康王陵> 俱在菩提寺東南 ○<眞聖王陵> 在黃山 【今梁山郡黃山驛】○<孝恭
王陵> 在獅子寺北 ○<神德王陵> 在竹城 ○<景明王陵> 在黃福寺北麓 ○<景京王陵>
在南山蟹目嶺 【以上出三國史 餘皆水葬火葬】
기우소(祈雨所)
<시조묘(始祖廟)> 〇<김각간묘(金角干墓)> 〇<백률사(栢栗寺)> 〇<북형산(北兄
山)> 〇<온지연(温之淵)> 〇<구미산(龜尾山)> 〇<망산(望山)> 〇<치술령(鵄7述嶺)>
始祖廟 ○金角干墓 ○栢栗寺 ○北兄山 ○温之淵 ○龜尾山 ○望山 ○鵄7述嶺
동경잡기 권2
불우(佛宇)
<영묘사(靈妙寺)> 부(府)의 서쪽 5리(里)에 있다. 당 나라 정관(貞觀) 6년(635)에
신라의 선덕왕(善德王)이 창건하였다. 불전(佛殿)은 3층인데 체제가 특이하다. 속설
115)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경상도(慶尙道)」경주부(慶州府) 능묘조(陵墓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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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절터는 본래 큰 연못이었는데, 두두리(豆豆里) 사람들이 하룻밤 만에 메우고 드
디어 이 불전을 세웠다.”고 전한다. 지금은 없어졌다.
<분황사(芬皇寺)> 부의 동쪽 5리에 있다. 선덕왕 3년(634)에 세웠다. 고려의 평
장사(平章事) 한문준(韓文俊)이 지은 화쟁국사비(和諍國師碑)가 있는데, 오금석(烏金
石)이다.
<靈妙寺> 在府西五里 唐貞觀六年 新羅善德王建殿宇三層 體制殊異 諺傳 寺址本大
澤 豆豆里之衆一夜塡之 遂建此殿 今廢 ○<芬皇寺> 在府東五里 善德王三年建 有高
麗平章事韓文俊所撰和諍國師碑 乃烏金石也
김극기(金克己)의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金克己詩
이끼는 빈 섬돌을 두르고 대나무는 처마에 스치니 苔繞空階竹拂簷'
경내가 청량하여 여름 더위 받지 않네 境淸不復受朱炎
중은 한가로워 고아한 웃음 지으며 누런 눈 돌리고 僧閑雅笑廻黃眼
손은 취하여 고담준론을 하며 붉은 수염 떨치네 客醉高談奮紫髥
연꽃 핀 못에서 나는 언제나 혜원116)을 찾는데 蓮沼我常尋慧遠
버드나무 선 문에서 공은 또한 도잠117)을 이끄네 柳門公亦引陶潛
술잔을 머금고 거나하여 돌아갈 길 잊었는데 含盃傲亢忘歸路
쓸쓸히 석양은 발의 중턱까지 비추네 淅瀝殘陽下半簾
하였다. 신증新增 a 고려 숙종(肅宗) 때 약사여래(藥師如來)의 동상을 주조하였는
데 무게가 30만 6700근이었다. 후에 이를 작게 고쳤다.
(新增 M 高麗肅宗朝 鑄藥師銅像 重三十萬六千七百斤 後改小之
<불국사(佛國寺)> 토함산(吐含山)에 있다. 석교(石橋)가 둘 있으니, 청운교(靑雲
橋)와 백운교(白雲橋)라 한다. 제작이 지극히 정교하다. 신라 사람 김대성(金大成)이
창건한 것이다. 과거 모량리(牟梁里)에 사는 가난한 여자에게 대성이란 아들이 있었
는데, 일찍 죽었다. 그가 죽던 날 밤에 재상 김문량(金文亮)의 집에 신(神)이 나타나
공중에서 외치기를 “모량리의 대성이 이제 너희 집에 점지되었다.” 하였는데, 과연
문량의 처가 임신을 하여 아들을 낳았다. 아기는 태어나서 7일 동안 금으로 새긴
대쪽을 오른손에 쥐고 있었는데, 거기에 ‘대성’이란 두 글자가 새겨져 있었으므로
그대로 이름지었다. 장성해서는 그 가난한 여자를 자기 집에 모셔 두고 어머니와
함께 봉양하였으며, 또 이 절을 창건하여 중 표훈(表訓)에게 상주하면서 두 어머니
의 장수(長壽)를 빌어주도록 부탁하였다.
116) 혜원(慧遠)은 중국 진(晉) 나라 말년에 여산(慮山)에 있던 중이다. 그는 연못에 흰 연꽃을 심고 중과
속인 중에서 유명한 선비 16명으로 백련사(白蓮社)를 조직하였다.
117) 도잠(陶潛)은 중국 진(晉) 나라의 시인이다. 자는 연명(淵明)으로 그는 문 앞에 버드나무 다섯 그루를
심어놓고 오류선생(五柳先生)이라 자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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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國寺> 在吐含山中 有石橋二 曰靑雲曰白雲 制作極巧 新羅人金大城所創 初牟梁
里貧女有子 曰大成 早死 其死之夜 國宰金文亮家 有神唱于空云 牟梁里大成 今托汝家
文亮妻果有身 及生男 右手握七日 有金簡在其手 鐫大城二字 因以名之 旣壯 迎置貧女
于家 養之與母同 又創此寺 請僧表訓 常住以祝二母壽
점필재(佔7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佔'畢齋金宗直詩
사찰 경내에 찾아드니 爲訪招提境
소나무 사이에 불긋푸릇 겹겹일세 松間紫翠重
푸른 산 반쪽에는 비가 내리고 靑山半邊雨
지는 해 위쪽에는 종이 울리네 落日上方鍾
말은 중과 더불어 부드러워지고 語與居僧軟
술잔은 옛정을 따라 짙어가네 杯隨故意濃.
탑 위에 기대앉아서 頹然一榻上
살쩍이 더부룩함을 마주보네 相對鬢7髼鬆'
�신증新增 � 김시습(金時習)의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金時習詩
돌 다듬어 만든 층계는 작은 연못을 누를 듯하며 斲7石爲梯壓小池
높고 낮은 누각들 잔물결 따라 비치네 高低樓閣映漣漪'
옛적 일 벌이기를 좋아한 사람은 어디로 갔는가 昔人好事歸何處
세상에선 부질없이 세상에서 가장 기이하다 하누나 世上空留世上奇
진 나라와 수 나라의 궁전과 위 나라의 사찰은 秦宮隋殿魏招提
당시 속인의 눈을 미혹시켰을 뿐이네 剩得當時俗眼迷
사람은 가고 세대가 달라져도 모두 적막하여 人去代殊俱寂寞
석양에 오직 까마귀만 깃들일 뿐이네 夕陽唯有老烏棲
<지림사(祗林寺)> 함월산(含月山)에 있다.
在含月山
이달충(李達衷)의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李達衷詩
지림사에서 부처님을 뵈온 뒤 謁佛祗林後
반월성의 관사로 돌아올 때 還官半月時
깊은 산에선 골짜기에 구름이 일고 山深雲在峽
오래된 나무에선 가지에 풀이 돋네 木老草生枝
용맹이 적으니 사슴이 졸고 勇少伊尼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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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게 읊조리니 느린 말이 지치네 吟長款段疲
이번 길은 참으로 자랑할 만하구나 此行眞可詑'
가는 곳마다 새로운 시를 지었으니 觸處有新詩
<감은사(感恩寺)> 부의 동쪽 50리에 있다. 그 동쪽 3리에 이견대(利見臺)가 있다.
절의 옛 기록에 “신라의 문무왕(文武王)이 유조(遺詔)로 뼈를 동해 가에 장사지내게
하고 드디어 바다의 용이 되니, 신문왕(神文王)이 부왕(父王)을 위하여 동해 가에
절을 세웠다. 금당(金堂)의 섬돌 밑에 구멍 하나를 뚫어놓았는데, 바로 용이 절에
들어와 돌던 곳이다. 그 구멍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하였다. 지금은 없어졌다.
<백률사(栢栗寺)> 금강산(金剛山)에 있다. 전단(栴7檀)나무로 조각한 불상이 있다.
〇전사경(全思敬)의 서루기(西樓記)에, “계림(雞7林)에 있는 누관(樓觀) 중에서 백률
사의 누(樓)가 최고이다. 선유(先儒) 정지상(鄭知常) 등이 시가를 읊어 그 아름다움
을 극찬하였다. 절을 창건한 연월(年月)은 상고할 길이 없지만, 너무 심하게 훼손되
어 경치와는 걸맞지 않는다. 영평군(鈴平君) 상국(相國) 윤승순(尹承順)이 부윤이 된
지 2년 만에 왜구(倭寇)가 물러가자 군사들이 오랫동안 한가하였다. 그래서 절의 주
지 견해(見海)와 수령 심우경(沈于慶)과 중수할 것을 계획하고, 통례문 지후(通禮門
祗侯) 김정미(金精美)와 안일(安逸) 김군자(金君子)에게 명하여 수졸(戍卒)을 거느리
고 그 공사를 감독하게 하였다. 그 절의 향배(向背)라든지 증손(增損)을 적절하게
한 것은 모두 공(公)의 의도에서 나온 것인데, 올라가서 바라볼 거리는 옛날보다 배
나 풍성하다. 이 절은 나라에서 향(香)을 내려주어 왕실의 복을 비는 곳이며 사대부
들이 항상 왕래하는 곳이다. 더군다나 신라 고도(古都)의 웅장한 모습과 멀리 트인
조망이 모두 이 누에 있음에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옛것을 좋아하는 군자가 아
니면 누가 잔폐한 것을 화려하게 바꾸어 사방의 유람객들과 공유하겠는가? 불전(佛
殿)을 수리하여 부처에게 복을 구하는 것은 윤공(尹公)의 뜻이 아니다.” 하였다.
<感恩寺> 在府東五十里 其東三里有利見臺 寺中古記云 新羅文武王遣詔 藏骨於東海
邊 遂爲海龍 神文王爲父王 創寺於東海上 金堂砌7下開一穴 乃龍之入寺旋繞之處 其穴
至今尙在 今廢 ○<栢栗寺> 在金剛山 有栴'檀像 ○全思敬西樓記 雞7林樓觀之中 栢栗
寺樓居其最 先儒鄭知常輩作詩題詠 極道其美 創始歲月則不可考也 殘廢已甚 不與景致
相稱 鈴平君尹相國承順尹府之二年 倭寇旣退 戎兵久閒 與寺住持見海府倅'沈于慶 謀欲
重新 命通禮門祗侯金精美安逸金君子 領戍卒而督其役 其向背增損之宜 皆自公意 而登
臨觀覽之富倍於昔日矣 惟玆寺也 降香祝釐之所 士大夫之所常往來 況新羅古都壯觀遐
眺摠在此樓乎 非好古君子 孰能革殘廢爲華構 與四方遊覽者共之哉 如曰修營佛宇邀福
於釋氏者 非尹公之志也
정지상의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鄭知常詩
새벽에 작은 누 머리에서 일어나 晨興小樓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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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을 걷고 하늘을 바라본다 捲箔觀天宇
누 아래는 바로 계림이라 樓下卽雞7林
기괴한 것 이루 헤아릴 수 없네 奇怪不可數
고목에서 안개가 아물아물 피어올라 老樹烟濛'濛7
일만 호에 비꼈네 橫斜一萬戶
흰 구름은 동쪽 산으로 날고 白雲飛東山
푸른 물은 서쪽 포구로 달리네 綠水走西浦
우뚝 솟은 황금 사찰 突兀黃金刹
마주 바라보며 아침 햇살에 따사롭구나 相望朝欲煦
숲이 빽빽한 반월성에 有森月城中
꽃과 대나무는 이제 주인이 없네 花竹今無主
부질없이 옛 풍류만 남아 空餘古風流
한 곡조 높은 소리에 춤을 추네 一曲高聲舞
최고운을 생각해보니 記憶崔儒仙
문장이 중국 땅을 진동시켰네 文章動中土
무명옷 입고 갔다가 비단옷 입고 돌아오니 絲往錦還鄕
나이 스물아홉도 안 되었네 年未二十九
백옥 위에 파리가 똥을 갈기듯 白玉點蒼蠅
당시에 쓰여지지 못했네 不爲時所取
지금까지 남산에는 至今南山中
오직 채소밭 하나 남아 있네 唯有一遺圃
아득히도 먼 구세 손이 邈哉九世孫
소년으로 졸오에 들어갔네 結髮混卒伍
불러다 선비의 관을 높게 씌우니 喚來峨其冠
사람들이 어진 이의 후예임을 알게 되었네 人識賢者後
또 설총 선생이 있었으니 亦有薜先生
용 같고 범같이 일어났네 蔚然龍與虎
방언으로 오경을 강의하니 方言講五經
학자가 동로118)에 견주었네 學者比東魯
세상에서는 이 군자라 불렀으니 俗呼二君子
이백과 두보처럼 명성을 나란히 하였네 齊名同李杜
읊조리며 맑은 바람 앞에 서니 嘯詠臨淸風
묵은 병도 나을 수 있을 듯 宿疾猶可愈
돌아와 부처님을 뵈오니 朅'來謁金仙
빈 당에 한 가닥 향이 타고 있네 虛堂香一炷
118) 노(魯) 나라는 중국의 동쪽에 있어 ‘동로(東魯)’라고도 하는데, 공자의 고국으로 그의 유풍이 남아 학
자가 많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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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를 조아려 우리 임금님을 위해 비나니 稽首祝吾君
만년 하늘의 보우를 받으시길 萬年受天祐
상상컨대 부처님의 오묘한 맑은 거울 想像妙明鏡
나의 이 마음 알아 주시리 知予此心否
차를 민자천에서 시음하니 試茶閔子泉
차 그릇에 운유가 일어나네 甌7面發雲乳
수옹119)의 시를 세 번 거듭 읊으니 三復壽翁詩
벽에 가득 구슬을 토해놓은 듯 満壁珠璣吐
즐거워라 근심할 바 없으니 樂哉無所憂
이 즐거움 얼마나 예스러운가 此樂何太古
일산을 날리며 송문을 내려오니 飛蓋下松門
송문에 해가 중천에 높이 떠 있네 松門日卓午
박효수(朴孝修)의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朴孝修詩
좋은 날 내 걸으니 我行及良辰
봄 산에 두견새 우는구나 春山聞杜宇
붉은 깃발이 돌아가는 길 인도하니 紅斾引歸程
옛 풍속의 예절이 남아 있구나 古風餘禮數
푸른 솔 그늘에서 길 비키라 소리치고 喝道靑松陰
종을 쳐서 구름 속 문을 여네 撞鍾啓雲戶
마치 보타산120)에 오른 듯 如上補陁山
불전이 은포를 스치네 寶殿拂銀浦
흰 꽃은 사시사철 피어 있어 白華四時開
향기가 언제나 봄날 같구나 芬馥恒春煦
거주하고 있는 중은 오직 두세 사람 居僧惟兩三
누가 향화의 주인인가 孰爲香火主
서루에 올라 멀리 둘러보니 眺望登西樓
처마와 기둥이 날아 춤추는 듯 簷7楹若飛舞
남쪽 트인 곳에 인가가 조밀하여 南曠人烟稠
문물은 신라의 옛 땅일세 文物舊羅土
금찰이 인가 사이에 섞여 있어 金刹間人廬
아마도 열에 아홉은 되는 듯 算得十中九
성인의 자취 세속에 섞여 있으니 聖跡雜凡蹤'
지나는 손이 구경하기에 바쁘네 過客奔看取
119) 최해(崔瀣)를 말한다.
120) 중국 복건성(福建省) 아모이[廈門] 앞바다에 있는 산으로, 관세음보살이 있는 곳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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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저택과 아름다운 절들이 甲第與珠宮
전란 뒤에 채마밭이 되었구나 亂後成野圃
본당에 백의관음이 있으니 堂有白衣尊
묘한 조화가 비할 데 없네 妙化無雙伍
거문고와 옥피리로 바다를 건넜다는 琴笛泛鯨濤
지난 일의 기록이 벽에 가득 쓰여 있네 往事森壁後
병화가 두려워서 여기 와 빌었더니 畏兵來乞玆
방패와 창이 바로 위세를 감추었네 干戈旋韜虎
둔함을 한탄하여 총명해지기를 빌면 悔鈍來乞聰
어리석은 자에게 총명을 준다네 與聰於戇魯
마음으로 구하는 것에 응해주니 應諸心所求
넓은 문은 닫힌 적이 없다네 普門未曾杜
시원한 감로가 많아서 泠7泠'甘露多
뿌려주니 뜨거운 번뇌 나아지네 灑餘熱惱愈
나는 피로 기름 만들고 我以血作油
이 몸으로 믿음의 심지 삼노니 此身爲信炷
다만 바라건대 황제께서 만년 장수 누리시고 但願帝萬齡
우리 임금 온갖 복을 누리시며 吾君享百祐
삼한은 태평성대가 되어 三韓向昇平
언제나 태121)를 타고 비122)를 제거하소서 乘泰常除否
아기가 어미를 그리듯 만방이 와서 嬰'慕萬方來
우러러 문왕사유123)를 마시게 하소서 仰吸文四乳
온 천하가 다 같이 기뻐하며 普率同一懽'
강자와 약자가 먹고 먹힘이 없게 하소서 強弱無呑吐
자연히 수역이 열려진다면 自然開壽域
세상은 복희씨 옛 시절로 돌아가리 世復羲皇古
이를 생각하며 밤 깊도록 앉았으니 念玆坐夜深
달이 바로 중천에서 누를 비추네 月正當樓午
<천주사(天柱寺)> 월성(月城)의 서북쪽에 있다. 〇속설에, “소지왕(炤智王)이 거문
고 갑(匣)을 활로 쏘아 넘어뜨렸더니 그 속에 있던 자는 바로 이 절의 중이었다.”고
전한다. 그 북쪽에 안압지(雁鴨池)가 있다. �신증新增 이는 바로 신라 왕의 내불당
(內佛堂)으로 지금의 제석원(帝釋院)이다. 나라 사람들이 해마다 뜰에 이름난 꽃을
심고 복을 빈다.
121) 태(泰)는 64괘(卦)의 하나로 하늘과 땅의 사귀어 만사가 형통함을 상징한다.
122) 비(否)는 64괘의 하나로 하늘과 땅의 상극(相克)이 되어 운수가 비색함을 상징한다.
123) 문왕사유(文王四乳)는 “중국 주(周) 나라 문왕은 젖이 넷이었다” 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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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장사(錫杖寺)> 부의 북쪽 10리에 있다. 〇세간에, “신라의 중 양지(良志)가 석
장(錫杖) 끝에 포대(布袋) 하나를 걸어놓으면, 석장이 저절로 날아가 시주(施主)의
집에 이르러 흔들어 소리를 내면 사람들이 이를 알고 돈을 넣어준다. 포대가 가득
차면 날아 돌아오니, 그가 살던 곳을 석장사라 한다.”고 전한다.
<법광사(法光寺)> 신광현(神光縣) 서쪽 비학산(飛鶴山) 아래에 있다. 〇세간에,
“진평왕(眞平王)이 원효(元曉)로 하여금 기부금을 모아 2층의 불전(佛殿)을 세우게
하였다.”고 전한다. 세칭 금당(金堂)이라 하는데, 지금까지 남아 있다.
<천룡사(天龍寺)> 고위산(高位山)에 있으니, 부의 남쪽으로 25리 떨어진 곳이다.
<무장사(鍪藏寺)> 부의 동북쪽 30리 지점인 암곡촌(暗谷村) 북쪽에 있다. 속설에,
“고려 태조(太祖)가 삼국을 통일한 후 무기와 투구를 그 골짜기 속에다 감추었으므
로 그렇게 명명하였다.”고 전한다. 옛날 비석이 있다.
<용장사(茸長寺)> 금오산(金鰲山)에 있다. 시승(詩僧) 설잠(雪岑)이 일찍이 이 절
을 짓고 살았다. 설잠의 속명(俗名)은 김시습(金時習)이다.
○<天柱寺> 在月城西北 ○俗傳 炤智王射琴匣而倒 乃是寺僧也 其北有鴈'鴨池 s新
增 � 即7新羅王內佛堂 今帝釋院也 國人歲植名花于庭 祈福 ○<錫杖寺> 在府北十里 ○
世傳 新羅僧良志 錫杖頭 掛一布帒 錫杖自飛 至檀越家 振拂而鳴 人知之納錢 布帒満
則飛還 名其所住曰錫杖寺 ○<法光寺> 在神光縣西飛鶴山下 ○世傳 眞平王使元曉募
緣 創立二層殿 俗號金堂 至今尙在 ○<天龍寺> 在高位山 府南距二十五里 ○<鍪藏
寺> 在府東北三十里暗谷村北 諺傳 麗祖統三後 藏兵鍪於谷中 因名之 有古碑 ○<茸
長寺> 在金鰲山 詩僧雪岑嘗構此 居焉 岑俗名金時習
�신증新增 김시습의 용장사유회시(茸長寺有懷詩) 는 다음과 같다.
金時習茸長寺有懷詩
용장산 골짜기가 깊으니 茸長山洞窈
사람이 오는 것이 보이지 않네 不見有人來
가랑비는 시내의 대로 옮겨가고 細雨移溪竹
비낀 바람은 들의 매화를 감싸주네 斜風護野梅
작은 창가에서 사슴과 함께 졸고 小窓眠共鹿
낡은 의자에서 재와 함께 앉아 있네 枯椅坐同灰
어느새 처마 가에는 不覺茅簷7畔
뜰의 꽃이 떨어졌다 또 피네 庭花落又開
【이상은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에 나오는데, 간간이 빠진 것을 보충하였
다.】【以上出輿地勝覽124)而間補其遺】
124)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7경상도(慶尙道)」경주부(慶州府) 불우조(佛宇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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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新增 � <정혜사(浄惠寺)> 자옥산(紫玉山) 아래에 있다. 회재(晦齋) 이언적(李
彦迪) 선생이 소싯적에 여기에서 학업을 닦았다. 절의 창건 연대는 언제인지 모르지
만 예로부터 신라의 고찰(古刹)이라고 전해 온다. 부처님 앞 탁자(卓子)의 다리에
‘치화원년정월일조(致和元年正月日造)’라는 여덟 글자가 있고, 선생이 손수 쓴 동유
록(同遊錄)이 법당의 북쪽 벽에 있으며, 영잠(楹箴) 7구가 북쪽 벽 동창(東窓) 왼쪽
에 있다. 후인들이 더럽혀질까 염려하여 드디어 그 글자를 모두 새기고 분칠하고
덮어 놓았다. 옥산서원(玉山書院)을 창건한 뒤, 이로 인하여 완호사(完護寺)라 하였
다.
<두덕암(斗德菴)> 정혜사 서북쪽 도덕산(道德山)의 허리에 있다. 암석이 병풍으로
가린 것처럼 벽립(壁立)해 있고, 반석(盤石)이 평편하게 깔려 있어 주위가 매우 넓
다. 차가운 샘물이 바위 밑에서 솟아나오는데 암자의 중이 돌로 함(函)을 만들어 물
을 담아두었다. 그 함은 바로 부엌문 밖에 있다. 임진왜란 때에 향교의 위판(位版)
을 임시로 이곳에 봉안하여 병화(兵火)를 면할 수 있었다.
<원원사(遠願寺)> 부의 동쪽 봉서산(鳳棲山) 기슭에 있다. 어느 해에 창건하였는
지는 알 수 없으나 숭정(崇禎) 경오년(1630)에 중수(重修)하였고, 병신년(1656)에
화재가 나자 곧바로 중건하였다.
<개선사(開善寺)> 금오산(金鰲山) 동쪽 기슭에 있다. 임진년에 불에 탄 것을 숭정
신미년(1631)에 중수하였다.
<심원사(深源寺)> 부의 서쪽 70리에 있다.
<장천사(障川寺)> 부의 남쪽 60리에 있다. 앞에는 시냇물이 있어, 시내를 따라
남쪽으로 5리를 가면 반구대(盤龜臺)가 있다.
<황룡사(黃龍寺)> 부의 동쪽 30리에 있다.
<단석사(斷石寺)> 단석산(斷石山)에 있다.
<금곡사(金谷寺)> 부의 북쪽 20리에 있다.
<안곡사(安谷寺)> 기계현(杞溪縣) 서쪽 15리에 있다.
<태화사(太華寺)> 기계현 북쪽 20리에 있다.
<대둔사(大屯寺)> 치술령(鵄7述嶺) 서쪽 기슭에 있다.
<거동사(巨洞寺)> 죽장현(竹長縣) 서남쪽 15리에 있다.
<밀곡사(密谷寺)> 부의 북쪽에 있다.
新增 / <浄惠寺> 在紫玉山下 晦齋李先生少時隷業於斯 其創建不知其幾年 自古傳稱
新羅古刹 佛前卓子足 有致和元年正月日造八字 而有先生手書同遊錄在於法堂北壁中
楹箴七句在於北壁東窓之左 後人恐其塵汚 遂皆刻其字 粉而籠之 玉山書院創建後 因爲
完護寺 ○<斗德菴> 在浄惠寺西北道德山腰 巖石壁立如屛障 盤石平鋪 周圍甚廣 冷泉
瀉出巖底 菴僧以石作函而貯之 正當廚門外 壬辰之亂 鄕校位版 權奉於此 得免兵火 ○
<遠願寺> 在府東鳳棲山麓 未知某年所創 而崇禎庚午重修 丙申災 旋卽重建 ○<開善
寺> 在金鰲山東麓 火于壬辰 崇禎辛未重修 ○<深源寺> 在府西七十里 ○<障川寺> 在
府南六十里 前有溪水 沿溪而南五里 有盤龜臺 ○<黃龍寺> 在府東三十里 ○<斷石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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在斷石山 ○<金谷寺> 在府北二十里 ○<安谷寺> 在杞溪縣西十五里 ○<太華寺> 在
杞溪縣北二十里 ○<大屯寺> 在鵄7述嶺西麓 ○<巨洞寺> 在竹長縣西南十五里 ○<密谷
寺> 在府北
고적(古蹟)
<진한육부(辰韓六部)> 조선의 유민(遺民)들이 동해가 산곡에 나누어 살았다. 여섯
마을이 있었으니, 하나는 알천양산촌(閼川楊山村)으로, 지금의 담암사(曇巖寺) 근방
이다.【바로 지금의 부 남쪽 월남(月南)ㆍ남건(南建) 등의 마을이다.】그 촌장 알평
(謁平)이 일찍이 표암봉(瓢巖峰)으로 내려왔다. 둘은 돌산고허촌(突山高墟村)으로,
지금의 남산부(南山部) 구량벌(九良伐)ㆍ마등오(麻等烏)ㆍ도북(道北)ㆍ회덕(回德) 등
의 남촌(南村)이 이에 속한다.【바로 지금의 부 남쪽 구량화(仇良火)ㆍ마등오 등의
마을이다.】 그 촌장 소벌도리(蘇伐都利)가 일찍이 형산(兄山)으로 내려왔다. 셋은
무산대수촌(茂山大樹村)으로, 지금의 장복부(長福部) 박곡(朴谷) 등의 서촌(西村)이
이에 속한다.【바로 지금의 부 서쪽 모량(牟梁)ㆍ박곡 등의 마을이다.】그 촌장 구
례마(俱禮馬)가 일찍이 이산(伊山)으로 내려왔다.【다른 본에는 모두 비산(比山)으로
되어 있다.】넷은 자산진지촌(觜7山珍支村)으로, 지금의 통선부(通仙部) 시파(柴巴)
등 동남촌(東南村)이 이에 속한다.【바로 지금의 부 동쪽 빈자(賓子)ㆍ시기(柴己) 등
의 마을이다.】그 촌장 지백호(智伯虎)가 일찍이 화산(花山)으로 내려왔다. 다섯은
금산가리촌(金山加利村)으로, 지금의 가덕부(加德府) 상서지(上西知)ㆍ하서지(下西
知)ㆍ내아(乃兒) 등의 동촌(東村)이 이에 속한다.【바로 지금의 동해가 상서지ㆍ하
서지ㆍ내아 등의 마을이다.】그 촌장 지타(祗沱가 일찍이 명활산(明活山)으로 내려
왔다. 여섯은 명활산고야촌(明活山高耶村)으로, 지금의 임천부(臨川部) 물이촌(勿伊
村)ㆍ잉구며촌(仍仇旀村)ㆍ궐곡(闕谷)【다른 본에는 갈곡(葛谷)으로 되어 있다.】등
의 동북촌(東北村)이 이에 속한다.【바로 지금의 천북(川北)ㆍ물이(勿伊)ㆍ갈곡 등의
마을이다.】그 촌장 호진(虎珍)이 일찍이 금강산(金剛山)으로 내려왔다. 〇위의 글을
상고해보면 6부(部)의 시조는 모두 하늘에서 내려온 것 같다.【 삼국유사(三國遺事)
에 나온다.】유리왕(儒理王) 9년(32) 봄에 6부의 이름을 바꾸고 이어 성(姓)을 내
려주었다. 양산부(楊山部)를 급량(及梁)으로 바꾸고 이씨(李氏) 성을 내려주고, 고허
부(高墟部)를 사량(沙梁)으로 바꾸고 최씨(崔氏) 성을 내려주고, 대수부(大樹部)를
점량(漸梁)으로 바꾸고【일명 모량(牟梁)이다.】손씨(孫氏) 성을 내려주고, 진지부
(珍支部)를 본피(本彼)로 바꾸고 정씨(鄭氏) 성을 내려주고, 가리부(加利部)를 한기
(漢祇部)로 바꾸고【일명 한기(韓岐)이다.】배씨(裵氏) 성을 내려주고, 명활부(明活
部)를 습비(習比)로 바꾸고 설씨(薛氏) 성을 내려주었다.【 동국통감(東國通鑑) 에
나온다.】고려 태조 23년(940)에 주(州)를 승격시켜 대도독부(大都督府)로 하고, 6
부의 이름을 바꿔 급량을 중흥부(中興府)로, 사량을 남산부(南山部)로, 본피를 통선
부(通仙部)로, 습비를 임천부(臨川部)로, 한기를 가덕부(加德部)로, 모량을 장덕부(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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德部)로 하였다.【일명 장복(長福)이다. 여사지리지(麗史地理志) 에 나온다.】
<양산라정(楊山蘿井)> 부의 남쪽 7리에 있다. 한(漢) 나라 선제(宣帝) 지절(地節)
원년(69)에 고허촌장(高墟村長) 소벌공(蘇伐公)이 양산(楊山) 기슭 나정(蘿井) 부근
의 숲을 바라보니, 백마(白馬)가 꿇어앉아 절하는 모양을 하고 있었다. 즉시 가서
보니 말은 홀연히 사라지고 큰 알이 있었다. 그 알을 쪼개보니 거기서 어린아이가
나왔다. 거두어 길렀더니, 나이 13세에 이르러서는 자질이 뛰어나고 숙성(夙成)하였
다. 6부의 사람들이 그 탄생이 신이(神異)하다 하여 임금을 삼고 혁거세거서간(赫居
世居西干)이라고 불렀다. 진한(辰韓) 사람들은 박[瓠]을 박(朴)이라 하는데, 큰 알이
박[瓠]과 같으므로 박(朴)으로 성(姓)을 삼았다.
<알영정(閼英井)> 부의 남쪽 5리에 있다. 신라 시조 5년(53)에 용이 이 우물에
나타나, 오른쪽 갈비에서 여아(女兒)를 낳았다. 한 노파가 보고 기이하게 여기어 그
아이를 거두어 기르고, 우물 이름으로 그 아이의 이름을 삼았다. 장성하자 덕이 있
고 용모가 아름다웠다. 시조가 데려다가 왕비를 삼으니, 어진 행실이 있어서 내조
(內助)를 잘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두 성인[二聖]’이라 하였다.
<금성정(金城井)> 부의 안에 있다. 신라 시조 때에 용이 이 우물에 나타났다.
<추라정(雛羅井)> 부의 남쪽 7리에 있다. 신라 소지왕(炤智王) 때 용이 이 우물에
나타났다.
<시림(始林)> 부의 남쪽 4리에 있다. 탈해왕(脫解王) 9년(65)에 왕이 밤에 금성
(金城)의 서쪽 시림(始林)의 숲에서 닭이 우는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대보(大輔)
호공(瓠公)을 보내어 보게 하였더니, 금빛 나는 조그만 궤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흰 닭이 그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 왕이 궤를 가져다가 열어보니 작은 사내아이가
있었다. 왕이 기뻐하여 말하기를, “이 어찌 하늘이 나에게 훌륭한 후사(後嗣)를 보
내준 것이 아니겠는가” 하고는, 거두어 기르고 이름을 알지(閼知)라고 하였다. 그
아이가 금궤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씨(金氏)로 하고, 인하여 그 숲을 계림(鷄林)이
라 하고, 인하여 나라 이름으로 삼았다. 숲 속에 높이가 3척 정도 되게 돌을 쌓은
것이 있는데, 속설에 “알지가 태(胎)를 풀 때에 가위를 놓아두었던 돌인데 가위 날
의 흔적이 있다.”고 전한다. 알지의 7대손 미추(味鄒)가 조분왕(助賁王)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왕이 아들이 없어 미추가 대신 왕위에 올랐으니, 이것이 김씨가 나라를
소유하게 된 시초였다.【알지는 삼국유사 에 어린아이의 호칭이라고 한다.】
<영창궁(永昌宮)> 신라 文武王 때에 세웠다. 지금은 그 소재를 알 수 없다.
<요석궁(瑤石宮)> 신라의 중 원효(元曉)가 일찍이 노래를 부르기를,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허락할까? 내 하늘을 지탱할 기둥을 다듬으리라.” 하였다. 태종왕(太宗
王)이 듣고 말하기를, “이 스님은 귀한 부인을 얻어 어진 아들을 낳고 싶다는 말이
다. 나라에 대현(大賢)이 있다면 이로움이 그보다 큰 것이 없다.” 하였다. 당시 요석
궁에 종실의 과부가 있었다. 왕이 요석궁의 관리에게 명하여 원효를 찾게 하였다.
원효가 남산에서 와서 유교(楡橋)를 지나다가 관리를 만나자 거짓으로 실족하여 물
속에 빠졌다. 관리가 원효로 하여금 요석궁에 가서 옷을 말리게 하고 인하여 유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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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게 하니, 과부가 과연 임신을 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바로 설총(薛聰)이다. 요석궁
의 터는 향교의 남쪽에 있고, 유교는 궁터의 남쪽에 있다.
<황학루(黃鶴樓)> 객관(客館) 동쪽에 있었는데, 지금은 폐허가 되었다.
<금송정(琴松亭)> 금오산(金鰲山) 꼭대기에 있다. 〇옥보고(玉寶高)가 노닐며 즐
기던 곳이다. 옥보고는 신라의 사찬(沙粲) 공영(恭永)의 아들로 경덕왕(景德王) 때
사람이다. 그는 지리산(智異山) 운상원(雲上院)에 들어가 거문고를 50년 동안 배우
고 자신이 새로운 곡조 30곡을 만들어서 타니 검은 학[玄鶴]이 와서 춤추었으므로
마침내 ‘현학금(玄鶴琴)’이라 명명하였으며, 또 ‘현금(玄琴)’이라 하기도 한다. 세간
에는 옥보고가 선도(仙道)를 얻었다고 전한다.
<辰韓六部> 朝鮮遺民分居東海濱山谷間 有六村 一曰閼川楊山村 今曇巖寺【即7今之
府南月南南建等村】其長謁平初降于瓢巖峰 二曰突山高墟村 今南山部九良伐麻等烏道
北回德等南村屬焉【即'今之府南仇良火麻等烏等村】其長蘇伐都利初降于兄山 三曰茂山
大樹村 今長福部朴谷等西村屬焉【即7今之府西牟梁朴谷等村】其長俱禮馬初降于伊山
【一作皆比山】四曰觜'山珍支村 今通仙部柴巴等東南村屬焉【即'今之府東賓子柴己等
村】其長智伯虎初降于花山 五曰金山加利村 今加德部上下西知乃兒等東村屬焉【即7今
之東海邊上西知下西知乃兒等村】其長祇沱'初降于明活山 六曰明活山高耶村 今臨川部
勿伊村仍仇旀村闕谷 【一作葛谷】等東北村屬焉【即'今之川北勿伊葛谷等村】其長虎珍
初降于金剛山 ○按上文 六部之祖似皆從天而降【出三國遺事125)】儒理九年春 改六部
名 仍賜姓 以楊山部爲及梁 姓李 高墟部爲沙梁 姓崔 大樹部爲漸梁【一云牟梁】姓孫
珍支部爲本彼 姓鄭 加利部爲漢祇【一云韓岐】姓裵 明活部爲習比 姓薛【出東國通
鑑】高麗太祖二十三年 陞州爲大都督府 改六部名 及梁爲中興部 沙梁爲南山部 本彼爲
通仙部 習比爲臨川部 漢祇爲加德部 牟梁爲長德部【一云長福 出麗史地理志126)】○
<楊山蘿井> 在府南七里 漢宣帝地節元年 高墟村長蘇伐公 望楊山麓蘿井傍林間 有白
馬跪'拜狀 即'觀之 馬忽不見 有大卵 剖之 嬰7兒出焉 收養之 及年十三歲 岐嶷7夙成 六部
人以其生神異 立爲君 稱赫居世居西干 辰人謂瓠爲朴 以大卵如瓠 以朴爲姓 ○<閼英
井> 在府南五里 新羅始祖五年 龍見是井 右脇誕生女兒 老嫗'見而異之 收養之 以井名
名之 及長 有德容 始祖納以爲妃 有賢行 能內輔 時人謂之二聖 ○<金城井> 在府內
新羅始祖時 龍見是井 ○<雛羅井> 在府南七里 新羅炤智王時 龍見是井 ○<始林> 在
府南四里 脫解王九年 王夜聞金城西始林樹間有雞'鳴聲 遣大輔瓠公視之 有金色小櫝7掛
樹枝 白雞7鳴於其下 王取櫝7開之 有小男兒在 王喜曰 此豈非天遺我令胤乎 乃收養之 名
曰閼智 以其出於金櫝故姓金氏 因名其林曰雞7林 因以爲國號 林中築石 高可三尺 諺傳
閼智解胎時 置剪子石 有刀痕在 閼智七世孫味鄒娶助賁王女 王無子 味鄒代立 是金氏
有國之始【閼智 三國遺事云 小兒之稱】○<永昌宮> 新羅文武王時建 今未詳所在 ○
<瑤石宮> 新羅僧元暁甞'唱歌云 誰許没柯斧 我斫支天柱 太宗王聞之曰 此師欲得貴婦
産賢子之謂爾 國有大賢 利莫大焉 時瑤石宮有宗室寡婦 王勑宮吏覓元暁 自南山來 過
125) 삼국유사(三國遺事) 권1 「'기이편(紀異篇)」신라시조 혁거세왕(新羅始祖 赫居世王)
126) 고려사(高麗史) 권57 「'지리지(地理志)」경상도(慶尙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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楡橋 遇宮吏 佯墮水中 吏使元暁至宮曬'衣袴 因留宿 寡婦果有身生子 即'薛聰 宮基在鄕
校南 楡橋在宮基南 ○<黃鶴樓> 在客館東 今廢 ○<琴松亭> 在金鰲山頂 ○玉寶高遊
樂之處 寶高 新羅沙粲恭永之子 景德王時人 入智異山雲上院 學琴五十年 自製新調三
十曲 彈之 有玄鶴來舞 遂名玄鶴琴 又云玄琴 世傳寶高得仙道
<포석정(鮑石亭)> 부의 남쪽 7리에 있는 금오산의 서쪽 기슭에 있다. 돌을 다듬
어 포어(鮑魚)의 모양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렇게 명명한 것이다. 유상곡수(流觴曲
水)한 흔적이 완연하다. 〇고려 태조 10년(927)에 후백제(後百濟)의 견훤(甄萱)이
근품성(近品城)을 공격하여 불사르고 나아가 신라의 고울부(高鬱府) 【지금의 영천
(永川)이다.】 를 습격하고 서울 근교까지 바싹 다가오니, 신라 경애왕(景哀王)이 연
식(連式)을 고려에 파견하여 급박한 사정을 호소하였다. 태조가 시중(侍中) 공훤(公
萱)과 대상(大相) 손행(孫幸)과 정조(正朝) 연주(聯珠) 등에게 말하기를, “신라는 우
리와 우호(友好)를 맺은 지 이미 오래되었소. 이제 급박하게 되었으니 구하지 않을
수 없소.” 하고는, 공훤 등을 파견하여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달려가게 하였으나,
미처 도착하기 전에 견훤이 졸지에 신라의 도성(都城)으로 쳐들어갔다. 그때 경애왕
은 비빈(妃嬪)ㆍ종척(宗戚)들과 포석정에 나가 술자리를 벌이고 즐기다가, 갑자기
적병이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 창졸간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왕은 왕비와 함께 달
아나 성 남쪽 이궁(離宮)에 숨고, 종신(從臣) 및 영관(伶官)과 궁녀들은 모두 함몰되
었다. 견훤은 군사를 풀어 마구 약탈하게 하고, 왕궁에 들어가 거처하면서 좌우로
하여금 경애왕을 찾아내어 궁중에 가두고 핍박하여 자결하도록 하였으며, 왕비를
능욕하고 그의 부하들을 풀어놓아 경애왕의 빈첩들을 더럽히게 하였다. 그리고 왕
의 표제(表第) 김부(金傅)를 세워 왕으로 삼고, 왕의 아우 효렴(孝廉)과 재상 영경
(英景) 등을 포로로 하고 자녀(子女)와 백공(百工), 병기와 보물 등을 모두 빼앗아
돌아갔다.
<鮑石亭> 在府南七里金鰲山西麓 鍊石作鮑魚形故名焉 流觴曲水遺跡宛然 ○高麗太
祖十年 後百濟甄萱攻燒近品城 進襲新羅高鬱府【今永川】逼至郊畿 新羅景哀王遣連式
告急 王謂侍中公萱大相孫幸正朝聯珠等曰 新羅與我同好已久 今有急 不可不救 遣公萱
等 以兵一萬赴之 未至 萱猝入新羅都城 時景哀王與妃嬪宗戚 出遊鮑石亭 置酒娛樂 忽
聞兵至 倉卒不知所爲 王與夫人走 匿城南離宮 從臣伶官宮女皆被陷没 萱縱兵大掠 入
處王宮 令左右索王 置宮中 逼令自盡 強辱王妃 縱其下 亂其嬪妾 立王表弟金傅爲王
虜王弟孝廉宰臣英景等 盡取子女百工兵仗珍寶以歸
이인로(李仁老)의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李仁老詩
석호의 궁에는 가시가 나고127) 石虎宮中有棘生
127) 남북조(南北朝) 시대에 후조(後趙) 임금 석호가 궁전에서 큰 잔치를 베풀었는데 승려 불도증(佛圖證)
이 읊조리기를, “전(殿)이여, 전이여, 가시가 숲을 이루어 장차 사람의 옷을 찢으리로다.” 하므로, 석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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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타의 거리에는 다니는 사람이 없네 銅駞7陌上無人行
우뚝 솟은 정자와 금송은 반이나 영락했는데 危亭琴松半零落
희미한 달빛은 여전히 옛 성을 비추누나 殘月依依照古城
당시의 음악 소리 마침내 처량해지고 當時絲管竟悽咽
둥둥 뜬 황금 술잔 굽이 따라 꺾어져 흘렀네 泛泛金觴隨曲折
중류에서 위 나라의 산하는 속절없이 애석하구나.128) 中流空惜魏山河
취향에 들어 진 나라의 일월도 아랑곳 않았네129) 醉鄕不管陳日月
매계(梅溪) 조위(曺偉)의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梅溪曺偉詩
맑은 시내 한 줄기 굽이쳐 흐르는데 淸溪一派流縈7回
황량한 골짜기 구불구불 열렸어라 荒涼'洞壑迤7邐'開
시냇가엔 포어들 깔려 있고 鮑魚散落溪水側
묵은 돌엔 봄도 지나 푸른 이끼 끼었구나 春殘石老生蒼苔
신라 왕은 옛날에 정치하기 싫어하고 羅王昔日厭萬機
금수레 옥가마로 놀러만 다니었네 金輿玉輩長徘徊
이곳에서 놀면서 맑은 물결 희롱하며 流連此地弄淸泚'
술잔을 둥둥 물에 띄워 보내었네 羽觴泛泛隨波來
군신이 술에 취해 한껏 노래하니 君臣酣7歌入醉鄕
퉁소소리 북소리 뇌성처럼 땅에 울려 簫鼓動地知春雷
적병이 심복에 들어온 줄도 몰랐으니 不悟敵兵入心腹
대낮에 철기가 소리 없이 들이닥쳤네 白日鐵騎潛䘖7枚
궁정에서 흘린 피를 차마 어찌 말하리 蹀'血宮庭那忍說
창황 중에 서울 거리는 폐허로 변하였네 倉皇朝市飛塵埃
궁녀들은 적군 앞에서 애처로이 울부짖고 宮娥宛轉啼軍前
보배 비녀는 속절없이 풀섶에 버려졌네 寶鈿零落委草萊
해목령 위에는 슬픈 구름 피어오르고 蟹目嶺上愁雲凝
솔바람 소리는 아직도 천 년의 슬픔을 띠었구나 松聲尙帶千年哀
그대는 보지 못 하였는가 君不見
임춘각130)에서 술이 얼큰하게 취하여 臨春閣中醉醺醺
문 밖에 한장군131)이 온 것도 알지 못해 不知門外韓將軍
가 사람을 시켜 궁전의 돌 밑을 파보니 가시가 나 있었다. 석호의 수양손(收養孫) 염민(冉'閔)의 아명(兒
名)이 극노(棘奴)인데, 후일 석호의 자손이 모두 염민의 손에 죽음을 당하였다
128) 전국시대 위(魏) 나라 무후(武侯)가 서하(西河)에 배를 타고 내려가다가 중류에서 말하기를, “아름답
도다, 산하(山河)의 험고함이여! 이는 위 나라의 보배로다.” 하니, 오기(吳起))가 “나라는 왕의 덕에 있지
산하의 험한 데 있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129) 진(陳) 나라 후주(後主)가 주색에 빠져 밤낮없이 음탕하게 놀다가 나라를 망쳤음을 의미한다.
130) 진(陳) 나라 후주(後主)가 지은 화려한 누각의 이름이다.
131) 진(陳) 나라 후주(後主)를 멸망시킨 수(隋) 나라 장수 한금호(韓檎虎)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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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 벽월의 노래132) 끝나기도 전에 玉樹璧月歌未闋7
강남의 왕업이 연기처럼 사라진 것을 江南王業隨烟滅
앞에 전복된 수레는 뒷수레의 경계이건만 前車可爲後車戒
뒷수레도 뒤이어 전복하였네 後車相尋迷覆轍
바라건대 천공은 귀신에게 잘 지키게 하여 我願天公令鬼守
후인들이 이 돌을 거울삼도록 남겨주소서 留與後人鑑此石
<첨성대(瞻星臺)> 부의 동남쪽 3리에 있다. 선덕왕 때에 돌을 다듬어서 대(臺)를
쌓았는데 위는 네모지고 아래는 둥글며 높이는 19척이다. 그 안을 다닐 수 있게 만
들어 사람이 안에서 오르내리면서 천문(天文)을 관측한다.
<瞻星臺> 在府東南三里 善德女主時 鍊石築臺 上方下圓 高十九尺 通其中 人由中而
上下以候天文
안축(安軸)의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安軸詩
전대의 흥망 속에 세월은 흘렀건만 前代興亡歲月經
석대는 천 척이나 푸른 하늘에 솟아 있네 石臺千尺聳靑冥
누군가 오늘날 천상을 살핀다면 何人今日觀天象
한 점 문성이 사성이 되었다 하리라133) 一點文星作使星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선생의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圃隱鄭先生詩
첨성대는 반월성에 우뚝 서 있고 瞻星臺兀月城中
옥피리 소리는 만고의 풍치를 머금었네 玉笛聲含萬古風
문물은 이미 신라를 따라 다 없어졌건만 文物已隨羅代盡
오호라 산수는 예나 이제나 같구나 嗚呼山水古今同
매계(圃隱) 조위(曺偉)의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梅溪曺偉詩
벼와 기장 무성해 밭둑길에 그늘지고 離離禾黍暗阡陌
한가운데 솟은 대는 높이가 백 척일세 中有崇臺高百尺
뿌리는 대지 속에 깊숙이 뻗쳐 있고 根連黃媼7地中深
그림자는 청산을 마주하여 구름 밖에 우뚝하네 影對靑山雲外矗
치병으로 임금 정하던134) 당년에 민심은 순박했고 齒餅富年民物醇
132) 벽월(璧月)은 야광주로, 진(陳) 나라 후주(後主)의 가곡에 “벽월은 밤마다 차고 옥수(玉樹)는 아침마다
새롭네.”라는 구절이 있다.
133) 문장을 맡은 문성(文星)이 있고 사신을 맡은 사성(使星)이 있는데, 지금 글 잘하는 사람이 사신이 되
었다고 칭찬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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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화씨135)의 역상도 차례로 마련했네 羲和曆象次第陳
규표136) 세워 그림자를 재어 해와 달 관측하고 立圭測影觀日月
대에 올라 구름을 바라보고 별을 점쳤네 登臺望雲占星辰
천문이 도수에 맞아 태계137)가 평온하고 乾文順度泰階平
낭렵138)이 나타나지 않아 하늘이 맑았네 狼鬛不現天宇淸
장마도 가뭄도 들지 않아 백성이 탈이 없고 雨暘不愆民不瘥
풍년을 즐기는 노래 소리 사방을 덮었네 豐登四野謳謠聲
만고에 세상사는 구렁에 배 감추기139)여서 乾坤萬古舟藏壑
금사발140)이 끝까지 온전한 것 보지 못했네 不見金甌7終妥帖
분분한 인간 세상 몇 번이나 티끌 됐나 紛紛人世幾番塵
찬란한 궁궐이 모두 가시밭이 되었네 金碧觚'稜盡荊棘
겁화141)에도 타지 않고 저만 홀로 서 있어 劫火不焼渠獨在
포갠 돌 우뚝이 풍우에도 까딱없네 累石巍然風雨外
노 나라의 관대는 지금 남아 있는지 魯中觀臺今有無
신라 때의 제작 한번 정말 감탄할 만하구나 羅時制作堪一噫
<구성대(九聖臺)> 금오산(金鰲山)에 있다. 속설에, 신라 때에 구성(九聖)이 놀던
곳이라고 전한다.
<아진포(阿珍浦)> 다파나국(多婆那國)은 왜국(倭國)의 동북쪽 1천 리에 있는데,
일명 용성국(龍城國)이라 한다. 그 국왕 함달파(含達婆)가 여국(女國)의 왕녀에게 장
가들어 왕비로 삼았는데, 임신한 지 7년 만에 큰 알을 낳았다. 왕이 말하기를, “사
람이 알을 낳은 것은 상서롭지 못하다. 마땅히 버려야 한다.” 하니, 왕녀는 비단에
그 알을 싸서 궤 속에 넣고 배에 실어 바다에 띄워 보내면서 축원하기를, “어디든
지 인연이 있는 땅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가정을 이루어라.” 하였다. 아진포에 이
르러 한 노파가 열어보니, 작은 아이가 그 속에 있었다. 거두어 길렀더니 장성하자
풍신(風神)이 빼어나고 지식이 출중하였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이 아이는 성씨
(姓氏)를 알지 못한다. 처음에 올 때에 까지가 날아오며 울었으니, ‘작(鵲)’ 자에서
134) 신라 유리왕(儒理王)과 탈해왕(脫解王)이 왕위를 서로 양보할 적에 떡을 물어 이의 흔적이 많은 사람
이 왕위에 오르기로 한 고사가 있다.
135) 중국의 전설적인 인물로, 요(堯) 임금 때 역법(曆法)을 관장하던 희씨(羲氏)와 화씨(和氏)를 말한다.
136) 규표(圭表)는 해의 그림자를 재는 기구이다.
137) 태계(泰階)는 별 이름인데 상중하의 세 계급으로 나뉘고, 각 계급에 두 별씩 있다. 맨 윗계급의 윗별
은 천자(天子), 아랫별은 여왕(女王), 중간 계급의 윗별은 제후(諸侯), 삼공(三公), 그 아랫별은 경대부(卿
大夫), 맨 아랫계급의 윗별은 원사(元士), 그 아랫별은 서인(庶人)을 상징한다. 이 별들이 평온하면 오곡
이 풍년이 들고 천하가 태평하다고 한다.
138) 낭렵(狼鬣은 이리의 갈기란 뜻으로, 불길한 별의 이름인 듯하다.
139) 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7에 “배를 구렁에 감추고 산을 못에다 간직하여 안전하다고 생각하나,
밤중에 힘이 센 자가 짊어지고 간다.” 라고 하였다.
140) 중국 남조(南朝)의 양(梁) 나라 무제(武帝)가 “우리나라는 금사발[金甌 같아서 조금도 상한 데나 이
지러진 데가 없다.” 하였다. 이로 인해 영토와 국체(國體)가 완전하고 견고함을 비유한다.
141) 불경(佛經)에 “천지의 종말에 불이 나서 모든 것이 타버리는데, 그것을 겁화(劫火)라 한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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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鳥)’ 자를 떼고 ‘석(昔)’ 자로 씨(氏)를 삼아야 한다. 또 궤 속에서 나왔으니, 벗
어났다는 뜻의 ‘탈해(脫解)’로 이름 지어야 한다.” 하였다. 왕이 그의 현명함을 듣고
딸을 그의 아내로 삼아주었다. 유리왕(儒理王)이 서거하자 탈해가 유명(遺命)에 따
라 왕위를 계승하였으니, 이 분이 신라의 제4대 왕이 되었다.
<서출지(書出池)> 금오산(金鰲山) 동쪽 기슭에 있다. 〇신라 소지왕(炤智王) 10년
(488) 1월 15일에 왕이 천천정(天泉亭)에 거둥하였는데 까마귀와 쥐의 이상한 일이
있었으므로 왕이 기사(騎士)에게 명하여 까마귀를 좇아가게 하였다. 남쪽으로 가다
피촌(避村)에 이르니 돼지 두 마리가 서로 싸우고 있었다. 기사는 주춤거리고 서서
그것을 구경하다가 갑자기 까마귀의 종적을 놓쳐버렸다. 그때 한 늙은이가 못 속에
서 나오더니 서신을 받들어 올렸는데, 겉봉에 “열어보면 두 사람이 죽고, 열어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을 것이다.”라고 쓰여 있었다. 기사를 시켜 왕에게 바치게 하
니, 왕이 이르기를 “두 사람이 죽는 것보다는 열어보지 않아서 한 사람이 죽는 것
이 낫다.” 하였다. 일관(日官)이 아뢰기를, “두 사람이란 서인(庶人)이며 한 사람이
란 왕을 이르는 것입니다.” 하였다. 왕이 그렇게 여기고 열어보니, 서신에 “거문고
갑(匣)을 쏘아라.”라고 되어 있었다. 왕이 궁에 들어가 거문고 갑을 보고 활로 쏘니,
내전(內殿)에서 분수(焚修)142)하는 중이 궁주(宮主)와 몰래 간통하며 간계를 꾸미고
있었다. 두 사람은 복주(伏誅)되고, 그 못을 ‘서출지(書出池)’라고 명명하였다.
<안압지(鴈7鴨池)> 천주사(天柱寺)의 북쪽에 있다. 문무왕(文武王)이 궁궐 안에 못
을 만들고 돌을 쌓아 산을 만들었는데 무산십이봉(巫山十二峰)을 본떴으며, 꽃을 심
고 진기한 새들을 길렀다. 그 서쪽에 임해전(臨海殿)이 있는데, 언제 창건했는지는
모른다. 애장왕(哀莊王) 5년인 갑신년(804)에 중수하였는데, 그 터의 주초와 섬돌이
아직도 밭이랑 사이에 남아 있다.
<성부산(星浮山)> 부의 남쪽 20리에 있는데, 봉우리 하나가 우뚝 솟아 있다. 〇
신라시대에 벼슬 얻기를 도모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아들에게 횃불을 높이 묶
어서 성부산 정상에 올라가 들도록 명하였다. 경성(京城) 사람들이 요성(妖星)이 나
타났다고 하자, 왕은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사람을 모집하여 재앙을 물리칠 방술을
행하려 하였다. 그러자 그 아비가 왕명에 응하려 하였는데, 일관이 아뢰기를, “이것
은 큰 요괴가 아니라 다만 한 집의 아들이 죽고 아버지가 울게 될 징조입니다.” 하
였다. 이날 밤 그 아들이 과연 범에게 물려 죽었다.
<여나산(余那山)> 부의 남쪽 40리에 있다. 세간에, “한 서생(書生)이 이 산에 살
고 있었다. 그는 글을 읽어 과거에 급제하고 이어 세족(世族)의 집안과 혼인하였다.
뒤에 과거(科擧)의 시관(試官)이 되자 처갓집에 연회를 베풀고 기뻐하며 여나산가
(余那山歌)를 지었다. 이후로 과거의 시관이 된 자가 연회를 베풀 때는 먼저 이 곡
을 노래하였다.”고 전한다.
<봉생암(鳳生巖)> 남산(南山)에 있다. 신라의 정사와 교화(敎化)가 순후하고 아름
다워 봉황새가 이 바위에서 울었다. 이로 인해 봉생암이라 명명하고, 나라 사람들이
142) 부처 앞에서 향을 태우고 불공을 드리는 일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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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를 지어 찬미하였다.
<九聖臺> 在金鰲山 諺傳 新羅時 九聖所遊之處 ○<阿珍浦> 多婆那國在倭國東北一
千里 一名龍城國 其國王含達婆娶女國王女爲妃 有娠七年 乃生大卵 王曰 人而生卵 不
祥 宜棄之 其女以帛裹7之 置櫃143)中 載船浮海 祝曰 任到有緣之地 立國成家 至阿珍浦
有老母開見之 小兒在焉 取養之 及壯 風神秀朗 知識過人 或曰 此兒不知姓氏 初來時
有鵲飛鳴 宜去鳥 以昔爲氏 又解櫝7而出 宜名脫解 王聞其賢 以女妻之 及儒理薨 脫解
從遺命繼位 是爲新羅第四王 ○<書出池> 在金鰲山東麓 ○新羅炤智王十年正月十五日
王幸天泉亭 有烏鼠之異 王令騎士追烏 南至避村 兩猪相鬪 留連見之 忽失烏所在 時有
老翁自池中出 奉書 外面題云 開見 二人死 不開 一人死 使來獻之 王曰 與其二人死
莫若不開 但一人死耳 日官奏云 二人者庶人也 一人者王也 王然之 開見 書中云 射琴
匣 王入宮 見琴匣射之 乃內殿焚修僧與宮主潛通而爲奸也 二人伏誅 名其池曰書出池
○<鴈7鴨池> 在天柱寺北 文武王於宮內爲池 積石爲山 象巫山十二峯 種花卉 養珍禽
其西有臨海殿 不知創於何時 而哀莊王五年甲申重修 基礎砌'猶在田畝間 ○<星浮山>
在府南二十里 一峯秀出 ○新羅時 有人謀求官 命其子縛高炬 夜登山頂擧之 京城人以
爲妖星現 王憂懼 募人禳之 其父將應命 日官奏 此非大怪 但一家子死父哭之兆 是夜
其子果爲虎所害 ○<余那山> 在府南四十里 世傳 有一書生居是山 讀書擢第 聯婚世族
後掌試 設宴其婚家 喜而作余那山之歌 自後 掌試者設宴 先歌此曲焉 ○<鳳生巖> 在
南山 新羅政化淳美 鳳鳴于巖 因爲名 國人作歌美之
<월명항(月明巷)> 금성(金城) 남쪽에 있다. 신라 헌강왕(憲康王)이 학성(鶴城)을
유람하고 개운포(開雲浦)에 이르렀는데, 홀연히 기이한 모습과 괴상한 복장을 한 사
람이 왕 앞에 나아가 노래하고 춤추며 왕의 덕을 찬미하였다. 그는 왕을 따라 서울
에 들어와 스스로 처용(處容)이라 이름하고, 달밤이면 언제나 저자에서 노래하고 춤
추었는데 끝내 그의 소재를 알 수 없었다. 당시 그를 신(神)으로 생각하였고, 그가
노래하고 춤추던 곳을 후세 사람들이 월명항이라 하였다. 그로 인하여 처용가(處容
歌)와 처용무(處容舞)를 만들어서 가면을 쓰고 유희하였다.
<月明巷> 在金城南 新羅憲康王遊鶴城 至開雲浦 忽有一人 奇形詭服 詣王前 歌舞讃"
德 從王入京 自號處容 每月夜 歌舞於市 竟不知所在 時以爲神 其歌舞處 後人名爲月
明巷 因作處容歌處容舞 假面以戲'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李益齋詩
옛날 신라 처용옹이 新羅昔日處容翁
푸른 바다 속에서 왔다고 하네 見說來從碧海中
자개 이빨 붉은 입술로 달밤에 노래부르고 貝齒赬脣歌月夕
솔개 어깨 자주 소매로 봄바람에 춤추었다네 鳶肩紫袖舞春風
143) 중간본에는 樻7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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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첨(李詹)의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시내에 가득한 밝은 달에 밤은 깊어가는데 満川明月夜悠悠
동해의 신인이 시루에 내려왔네 東海神人下市樓
길이 넓으니 긴 소매로 춤출 수 있고 路闊可容長袖舞
세상이 태평하니 백 전을 막대에 걸고 놀 만하네144) 世平宜掛百錢遊
고상한 종적은 아스라히 신선의 고장으로 돌아가고 高蹤'縹7緲歸仙府
남긴 노래는 전해져 경주에 있네 遺曲流傳在慶州
골목 어귀에 봄바람이 때로 한번 일어나니 巷口春風時一起
의연히 꽃 꽂은 머리를 불어 스치는 듯하네 依然吹動挿花頭
<열박령(悅朴嶺)> 부의 남쪽 30리에 있다. 동도(東都)의 기생 전화앵(囀7花鶯)이
묻힌 곳이다. 悅朴嶺> 在府南三十里 東都妓囀7花鶯所埋之地
김극기(金克己)의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金克己詩
옥 같은 용모 혼을 재촉해간 지 오래인데 玉貌催魂隔世
하늘 끝에는 산꼭대기만 겹겹이 보이네 空端只見層巓'
신녀의 비는 무협에서 거두고145) 神女雨收巫峽
미인의 바람은 낙천에서 끊어졌네146) 麗人風斷洛川
구름은 춤추는 옷자락처럼 땅에 끌리고 雲學舞衫曳地
달은 노래하는 부채처럼 하늘에 떠 있네 月偸歌扇當天
길손들은 몇 명이나 꽃다운 자질을 가슴아파하여 行客幾傷芳性
수건 가득히 피눈물을 흘렸을까 満巾紅淚泫然
<만파식적(萬波息笛)> 신문왕(神文王) 때 동해 가운데 작은 산이 떠와서 감은사
(感恩寺)를 향해 물결을 따라 왔다갔다하였다. 왕이 이상히 여겨 바다에 배를 띄워
그 산에 들어가니, 산 위에 한 그루의 대나무가 있기에 명하여 피리를 만들었다. 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병이 나았으며, 가뭄에는 비가 오고, 장마에는 비가
개며, 바람은 그치고, 물결은 잔잔해져서 ‘만파식적’이라 불렀다. 대대로 보물로 전
해졌다. 효소왕(孝昭王) 때에 이르러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이라 가호(加號)하
였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144) 진(晋) 나라 완수(阮修)가 지팡이 끝에 백 전을 걸고 다니다가 술집에 이르면 술을 사서 실컷 마셨다
한다.
145) 초(楚) 나라 송옥(宋玉)이 지은 고당부(高唐賦)에, “양왕(襄王)이 고당에서 놀다가 낮잠을 자는데, 꿈
에 한 부인이 나타나 말하기를, ‘저는 무협(巫峽)의 남쪽에 사는데 아침에는 구름이 되고, 저녁에는 비가
됩니다.’라고 하였다.” 하였다.
146) 위(魏) 나라 조식(曹植)이 낙신부(洛神賦)를 지어, 낙천(洛川)의 여신인 복비(宓妃)의 아름다움을 묘사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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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적(玉笛)> 길이가 1자 9치인데, 그 소리가 맑고 깨끗하다. 세속에선 동해의
용이 바친 것이라고 한다. 대대로 보물로 전하였다.
<萬波息笛> 神文王時 東海中有小山浮來 向感恩寺 隨波往來 王異之 泛海入其山
上有一竿竹 命作笛 吹此笛 則兵退病愈旱雨雨晴風定波平 號萬波息笛 歷代傳寶 至孝
昭王 加號萬萬波波息笛 今亡 ○<玉笛> 長尺有九寸 其聲淸亮 俗云 東海龍所獻 歷代
傳寶之
박원형(朴元亨)의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朴元亨詩
신라가 옛날에 나라를 열었으니 新羅有國開往昔
풍속이 순박하고 소략하여 제작이 없었네 民風朴略無興作
옥적이란 보물을 언제 만들었는가 玉笛一物成何日
실도 아니고 돌도 아니며 또 대도 아니라네 非絲非石又非竹
예악은 야박한 풍속을 돌이킬 수 있는데 禮樂可堪回薄俗
하물며 형산의 옥을 쪼아 만들었음에랴 況復雕琢荊山玉
당시에는 초목도 혜택을 입었으니 當時草木猶被澤
계림에 지금 누런 잎이 떨어질 줄 어찌 생각했으랴 豈料鷄林今黃落
오래된 첨성대 포석정을 짓누르듯 瞻星臺古壓鮑石
피리 소리 멀리 집집마다 퍼졌네 笛聲遠播人人屋
하루아침에 온갖 일이 연기처럼 사라지니 一朝萬事烟霞滅
보배로 여기던 것 사람이 아니라 물건이기 때문이네 所寶非人猶在物
돈으로 따져 일 전도 안 되는 것 論錢未満一錢直
완전하거나 이지러지거나 도외시했을 것을 置之度外隨完缺
내 와서 홀연히 한 곡조를 듣고 我來忽聞一聲曲
붓을 잡고 노래를 짓노라니 글재주가 졸렬하네 把筆作歌詞華拙
유독 보지 못하였는가 獨不見
상왕의 상저147)는 구름처럼 매몰되고 商王象筯雲埋没
천년 전 목야148) 싸움 아득히 생각나는 것을 牧野千載遐思發
이석형(李石亨)의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李石亨詩
계림의 지난 일을 일찍이 들었으니 鷄林往事聞夙昔
묻건대 옥적은 어느 시대에 만들었는가 借問玉笛何代作
듣자 하니 신라의 태평 시절에 聞說新羅太平日
147) 상왕(商王)의 상저(象筯) : 상(商) 나라 임금 주(紂)가 상아(象牙)로 젓가락을 만들자, 기자(箕子)가 탄
식하기를 “상아로 젓가락을 만드니 다음에는 옥으로 술잔을 만들 것이고 이어 온갖 사치품을 다 만들
것이다.” 하였다.
148) 주(周) 나라 무왕(武王)이 상 나라 주왕을 토벌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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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악기 현악기로 태평을 연주했네 太平風月屬絲竹
대의 소리 오히려 위천의 속됨149)을 꺼려 竹聲猶嫌渭川俗
남전옥150)을 다듬도록 공장에게 명했네 命工斲7得藍田玉
가늘고 미끈하게 다듬으니 윤택이 절로 나고 磨礱'細膩7光潤澤
여섯 구멍을 교묘하게 뚫으니 별들이 뒤섞인 듯 巧鑿六孔星錯落
현악이 금석의 곡조와 조화하며 和絲調曲諧金石
맞부딪는 맑은 소리에 장내가 고요해졌네 戞'戞7淸聲定場屋
당시의 온갖 것들 모두 사라지고 當時萬物皆烟滅
지금까지 남아있는 건 오직 이것 至今存者唯此物
귀신이 백방으로 잘 지켜 無乃鬼物煩守直
완전무결하게 영구히 전한 것이 아니겠는가 傳之永久完無缺
현악기와 어우러지게 내 한 곡조 부르려 하나 我欲凝絲歌一曲
곡조도 되지 않고 가사 또한 졸렬하네 曲且不成詞亦拙
그대는 보지 못하였는가 君不見
기산의 석고가 인멸된 지 오래인데 岐山石鼓久湮没
창려 한퇴지가 홀로 노래 지은 것을151) 昌黎老韓歌獨發
신증新增 E 속설에, “고려 태조가 이 옥적을 완상(玩賞)하려고 사람을 시켜 가져
오게 하였다. 조령(鳥嶺)을 지나다 이 옥적을 불었으나 소리가 나지 않자, 태조는
그것이 신물(神物)임을 알고 돌려보냈다. 그 뒤 불에 타서 부서져 지금은 공방고(工
房庫)에 보관되어 있다.”고 전한다.
新增 . 諺傳 麗祖欲翫之 使人取去 行過鳥嶺吹之 聲不出 麗祖知其神物而還之 其
後火焼破碎 至今藏在工房庫
<옥대(玉帶)> 진평왕(眞平王) 원년(579)에 신인(神人)이 궁전 뜰에 내려와서 왕
에게 이르기를, “상제(上帝)가 나에게 옥대를 전해주도록 명하셨습니다.” 하니, 왕이
꿇어앉아 받았다. 그리고는 교제(郊祭)와 묘제(廟祭)152) 등 큰 제사에 언제나 착용
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찬미하기를, “구름 밖 하늘에서 보내주신 옥대, 임금의 곤룡
포에 점잖게 어울리네. 우리 임금 지금부터 몸 더욱 무거워지시니, 내일 아침에는
쇠로 섬돌을 만들어야 하리.” 하였다. 경순왕(敬順王)이 고려에 항복한 뒤 태조에게
바쳤다. 그것은 금을 새기고 옥을 박아 모나게 만든 허리띠로, 길이가 10위(圍)이고
띠쇠가 62개였다. 물장고(物藏庫)에 보관하도록 명하였다. 일찍이 신라의 사자(使
者) 김율(金律)이 고려에 오니, 태조가 묻기를, “신라에는 세 가지 보물인 장륙금상
149) 중국 위천(渭川)은 대[竹]의 산지(産地)로 유명한데, 위수(渭氺)는 물이 항상 흐리므로 속되다고 한
것이다.
150) 남전(藍田)은 섬서성 남전현 동쪽에 있는데, 옥(玉)의 산지로 유명하다.
151) 한유(韓愈)가 지은 ‘석고가(石鼓歌)’를 말한다.
152) 교제(郊祭)는 천제(天祭)이고, 묘제(廟祭)는 임금의 조상 제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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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丈六金像)ㆍ구층탑(九層塔)ㆍ성제대(聖帝帶)가 있다고 들었는데, 사실인가” 하자,
김율이 성제대는 모르겠다고 대답하였다. 태조가 웃으면서 “경은 높은 신하인데 어
찌 알지 못하는가” 하니, 김율이 부끄럽게 여겼다. 돌아와 경순왕에게 보고하니,
왕이 여러 신하에게 두루 물었으나 아는 자가 없었다. 90세가 넘은 황룡사(皇龍寺)
의 중이 말하기를, “제가 들으니, 진평대왕(眞平大王)이 착용하던 것으로 대대로 보
물로 전해 내려와 남고(南庫)에 간직되어 있다 합니다.” 하였다. 드디어 창고를 열
고 찾으니, 비바람이 갑자기 몰아치며 대낮이 캄캄하게 어두워졌다. 그래서 좋은 날
을 가려 재계하고 제사를 지낸 뒤에야 찾아내었다. 나라 사람들이 진평왕이 성골(聖
骨) 출신의 왕이기 때문에 성제대라고 일컬었던 것인데, 이때 와서 고려에 바친 것
이다.
<정전(井田)> 신라시대 정전(井田)으로, 터가 아직까지 남아 있다.
<사절유댁(四節遊宅)> 신라의 서울 사람들은 부유하고 윤택한 집을 금입택(金入
宅)이라 하였는데 모두 35채가 있었다. 또 사계절에 유상(遊賞)하는 곳을 사절유택
이라 하였는데, 봄의 동야택(東野宅), 여름의 곡량택(谷良宅), 가을의 구지택(仇知
宅), 겨울의 가이택(加伊宅)이다.
<재매곡(財買谷)> 김유신(金庾信)의 종녀(宗女) 재매부인(財買夫人)이 죽자 청연
(靑淵)의 골짜기에 장사지냈다. 그로 인하여 재매곡이라 하였다. 매년 봄철이면 동
종(同宗)의 사녀(士女)들이 재매곡의 남쪽 시냇가에 모여 잔치를 열었다. 이때는 온
갖 꽃이 활짝 피고 송화(松花)가 골짜기에 가득했다. 골짜기 어귀에는 암자(菴子)를
짓고, 인하여 송화방(松花房)이라 하였다.
<일정교(日精橋)> 일명 춘양교(春陽橋)라고 한다. 옛날에는 부의 동남쪽 문천(蚊
川)에 있었다.
<玉帶> 眞平王元年 有神人降於殿庭 謂王曰 上帝命我傳賜玉帶 王號受 凡郊廟大祀
皆服之 時人 讃p曰 雲外天頒玉帶圍 辟7雍龍袞雅相宜 吾君自此身彌重 唯擬明朝鐵作墀'
及敬順王降高麗 獻于太祖 乃鐫金安玉排方腰帶 長十圍 六十二銙7也 命藏于物藏庫 初
新羅使金律來高麗 太祖問曰 聞新羅有三寶 丈六金像九層塔 幷聖帝帶也 有諸 律對不
知聖帝 太祖笑曰 卿爲貴臣 何以不知 律慙 歸告敬順 徧'問羣臣 無知者 有皇龍寺僧年
過九十者曰 予聞 眞平大王所服 歷代傳寶 藏在南庫 遂開庫覓之 風雨暴作 白晝晦暝
乃擇日齋祭 然後得之 國人以眞平是聖骨之王 故稱聖帝帶 至是來獻 ○<井田> 新羅時
井田遺基尙存 ○<四節遊宅> 新羅王京人 以富潤153)之家爲金入宅 凡三十五宅 又以四
時遊賞之地爲四節遊宅 春東野宅 夏谷良宅 秋仇知宅 冬加伊宅 ○<財買谷> 金庚信宗
女財買夫人死 葬於靑淵上谷 因名之 每春月 同宗士女會宴於其谷之南澗 于時 百卉敷
榮 松花満洞 府谷口架築爲菴 因名松花房 ○<日精橋> 一云春陽橋 舊在府東南蚊川上
<월정교(月精橋)> 옛날에 부의 서남쪽 문천에 있었다. 두 다리의 옛터가 아직도
남아 있다. 舊在府西南蚊川上 兩橋遺址尙存
153) 중간본에는 閏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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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극기(金克己)의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金克己詩
반월성 남쪽 토령 가에 半月城南兎嶺邊
무지개 모양의 다리가 문천에 거꾸로 비쳐 있네 虹橋倒影照蚊川
용이 꿈틀꿈틀 은하에 오르니 꼬리가 땅에 드리워지고 蜿'蜒騰漢尾垂地
무지개가 냇물을 마시매 허리가 하늘에 걸쳤네 螮蝀7飮河腰跨天
맨손으로 푸른 이무기를 벤 주처의 용맹154)이요 手斬蒼蛟周處勇
몸이 백학으로 변화한 정령위는 신선일세155) 身成白鶴令威仙
옛 현인들의 뛰어난 자취는 모두 세속을 놀라게 하는데 昔賢逸跡皆驚俗
자꾸 왔다갔다하는 이 몸이 부끄럽구나 慙愧區區數往還
<귀교(鬼橋)> 신원사(神元寺) 옆에 있다. 〇 삼국유사(三國遺事) 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진지왕(眞智王)이 사량부(沙梁部)의 도화랑(桃花娘)이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궁중으로 불러들여 총애하려고 하니, 도화랑이 말하기를, “저에게는 남편이 있
으니, 죽어도 다른 마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하였다. 왕이 장난삼아 이르기를, “남
편이 없으면 되겠느냐” 하니, “그렇습니다.” 하였다. 이해에 왕이 돌아가시고 2년
뒤에 도화랑의 남편도 죽었다. 열흘째 되던 날 밤 왕이 평소의 모습으로 도화랑의
방에 와서 이르기를, “네가 옛날에 허락하였는데, 이제 남편이 없으니 되겠느냐”
하고, 7일 동안 머물다가 홀연히 사라졌다. 도화랑이 드디어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
는데, 이름을 비형(鼻荊)이라 하였다. 진평왕(眞平王)이 거두어 궁중에서 길렀다. 15
세가 되자 밤마다 월성(月城)을 날아 넘어 서쪽으로 가 황천(荒川) 언덕에 이르러
귀신들과 놀다가 여러 절에서 울려오는 새벽 종소리를 듣고 흩어지는 것이었다. 왕
이 용사(勇士)를 시켜 엿보게 하여 그런 줄을 알고 비형에게 묻기를, “네가 귀신들
을 데리고 논다니, 정말이냐” 하니, 그렇다고 하자, “그렇다면 네가 귀신들을 시켜
서 신원사 북쪽 도랑에 다리를 놓게 하라.” 하였다. 비형이 그 무리를 시켜서 돌을
다듬어 하룻밤 동안 큰 다리를 완성하였으니, 이로 인해 ‘귀교’라 한 것이다. 왕이
또 묻기를, “귀신들 가운데 인간 세상에 나와 조정의 정사를 도울 만한 자가 있느
냐” 하니, 대답하기를 “길달(吉達)이란 자가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이튿
날 비형이 길달과 함께 왕을 뵈니, 집사(執事)의 벼슬을 주었다. 과연 길달은 충직
하기가 비길 데 없었다. 당시 각간(角干) 임종(林宗)이 아들이 없었으므로 왕이 후
사(後嗣)를 삼도록 명하였다. 임종은 길달에게 명하여 흥륜사(興輪寺)에 누문(樓門)
154) 중국 삼국시대 사람인 주처(周處)는 용력(勇力)이 있어 남산의 백액호(白額虎)를 잡았고, 물로 들어가
서는 이무기와 싸워 이겼다.
155) 전설에, 요동의 정령위(丁令威)가 신선술을 배워 학(鶴)으로 변신하고 요동의 성문에 있는 화표주(華
表柱)에 앉으니, 사람들이 아무도 그를 알아보는 이가 없었다. 한 소년이 활을 당겨 쏘려 하자 마침내
날아 공중을 배회하며 말하기를 “새여! 새여! 정령위여! 집을 떠난 지 천년 만에 이제 비로소 돌아왔네.
성곽은 예전과 다름없는데 사람들은 옛사람이 아니니, 어찌하여 신선술을 배우지 아니하여 무덤이 총총
히 있는가(有鳥有鳥丁令威 去家千年今始歸 城郭如故人民非 何不學仙塚纍7纍.”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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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창건하게 하고, 길달문(吉達門)이라 명명하였다. 어느 날 길달이 여우로 변하여
달아나자, 비형이 귀신을 시켜 그를 잡아 죽였다. 그 뒤로 귀신들이 비형의 이름만
들어도 두려워 떨며 달아났다. 당시 사람이 다음과 같은 가사(歌詞)를 지었다.
○<鬼橋> 在神元寺傍 ○三國遺事 眞智王聞沙梁部桃花娘之美 召致宮中 欲幸之 娘
曰 妾有夫 雖死靡他 王戲'曰 無夫則可乎 曰可 是年王薨 後二年 娘夫亦死 浹旬夜 王
如平生到娘室曰 汝昔有諾 今無夫 可乎 留御七日 忽然不見 娘遂有娠生子 名曰鼻荊
眞平王收養宮中 年十五 每夜飛過月城 西至荒川岸 與鬼衆遊 聞諸寺暁鍾而散 王使勇
士 伺之 知其然 問荊曰 汝領鬼衆遊 信乎 曰然 曰 然則汝使鬼衆成橋於神元寺北渠 鼻
荊使其徒鍊石 一夜成大橋 因名鬼橋 王又問 鬼中有出見人間 輔朝政者乎 曰 有吉達者
可 翌日 荊與俱見 王賜爵執事 果忠直無雙 時角干林宗無子 王命爲嗣 林宗令吉達創樓
門於興輪寺 名吉達門 一日達變狐而遁 荊使鬼捕殺之 自後 其衆聞鼻荊名 怖畏而走 時
人作詞曰
성제의 혼이 낳은 아들 聖帝魂生子
비형랑의 집이로다 鼻荊郞室亭
날고 달리는 모든 귀신들은 飛馳諸鬼衆
이곳에 머물지 말라 此處莫留停
경주의 풍속에 지금도 이 가사를 문에 붙여 귀신을 쫓는다. 이것이 동경(東京) 두
두리(豆豆里)의 시초이다. 州俗 至今帖此詞于門 以辟7鬼 此東京豆豆里之始
<백운량(白雲梁)> 이 역시 문천에 있다.
<상서장(上書莊)> 금오산(金鰲山) 북쪽에 있다. 〇고려 태조가 일어나자, 신라의
최치원(崔致遠)이 태조가 반드시 천명을 받을 것을 알고 글을 올렸는데, “계림(鷄
林)은 누런 잎이요, 곡령(鵠嶺 송악(松嶽))은 푸른 솔이로다.”라는 말이 있었다. 신
라 왕이 이를 듣고 미워하니, 최치원이 바로 가족을 데리고 가야산(伽倻山) 해인사
(海印寺)에서 은거하다가 생을 마쳤다. 그의 밝은 감식안(鑑識眼)을 신라 사람들이
탄복하여 그가 살던 곳을 ‘상서장’이라 하였다.
<봉덕사종(奉德寺鍾)> 신라 혜공왕(惠恭王)이 주조한 종으로 구리의 무게가 12만
근이다. 이 종을 치면 소리가 1백여 리까지 들린다. 뒤에 봉덕사가 북천(北川)에 침
몰되자 천순(天順) 4년(1460)인 경진년(庚辰年)에 종을 영묘사(靈妙寺)에 옮겨 달았
다. 〇한림랑(翰林郞) 김필해(金弼奚)의 종명(鍾銘)에, “무릇 지극한 도(道)는 형상
(形像) 밖까지 포함하기 때문에 보아도 그 근원을 볼 수 없고, 큰 소리는 천지 사이
를 진동하기 때문에 들어도 그 소리를 들을 수 없다. 그러므로 가설(假說)을 설정하
여 삼진(三眞)의 오묘한 일을 살피고, 신종(神鍾)을 달아 일승(一乘)의 원만한 소리
를 깨닫게 한다.156) 종이라는 것은 부처님이 탄생하신 곳에서 상고해보면 계이국
156) 처음에는 미혹한 중생(衆生)을 위하여 삼승(三乘)을 설법하다가, 마지막에는 삼승을 부수고 일승(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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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罽7膩'國)에 증거가 있고, 중국(中國)에서 찾아보면 고연(鼓延)이 처음 만들었다.157)
텅 비어 잘 울리므로 그 소리는 다함이 없고, 무거워 구르기 어려워 그 몸이 쭈그
러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왕자(王者)의 큰 공을 그 위에 새기는 것이고 중생(衆生)
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도 그 가운데 있는 것이다. 삼가 생각건대 성덕대왕(聖德大
王)은, 덕은 산하(山河)와 더불어 높고 명성은 일월(日月)과 나란히 높이 걸렸다. 충
성스럽고 어진 이를 등용하여 세상을 어루만지고, 예악(禮樂)을 숭상하여 풍속을 살
폈다. 들에서는 근본인 농업에 힘쓰고, 시장에는 넘쳐나는 물건이 없었다. 시속은
금옥(金玉)을 싫어하고 세상은 문재(文才)를 숭상하였다. 여색(女色)을 생각지 않고
노년의 경계에 마음을 두어 40여 년 국가에 군림해 정사를 부지런히 하여 한 번도
전쟁으로 백성을 놀라게 한 일이 없었다. 그러므로 사방의 이웃 나라들이 만 리 먼
곳에서 복종해 와서 오직 임금의 풍화(風化)를 흠모하기만 할 뿐, 화살을 날려 엿보
는 일이 없었다. 연(燕) 나라와 진(秦) 나라가 인재를 등용한 것158)과 제(齊) 나라
와 진(晉) 나라가 교대로 패권을 잡은 일을 어찌 나란히 견주어 말할 수 있겠는가
사라쌍수(沙羅雙樹)159)의 시기는 예측하기 어렵고, 천추(千秋)의 밤은 길어지기 쉬
워 승하하신 지 이제 34년이 되었다. 근자에 효사(孝嗣) 경덕대왕(景德大王)이 생존
해 계실 때 큰 기업을 계승해 지켜서 나라의 온갖 정사를 잘 다스렸다. 일찍이 자
친(慈親)을 여의어 세월이 갈수록 그리워하더니, 거듭 부왕(父王)을 잃게 되자 궁궐
에 이를 때마다 더욱 슬퍼하였다. 추모의 정이 갈수록 슬퍼지고 영혼의 명복을 빌
고픈 마음은 더욱 간절해져, 삼가 구리 12만 근을 희사하여 큰 종 하나를 주조하려
하셨는데, 뜻만 세운 채 성취하지 못하시고 문득 세상을 떠나셨다. 지금 우리 성상
께서는 행실은 조종(祖宗)과 합치되고 뜻은 지극한 이치에 부합되어, 기이한 상서
(祥瑞)는 천고에 유다르고 아름다운 덕은 당세에 으뜸이시다. 육가(六街)160)의 용
구름은 옥계(玉階)를 덮어 비를 뿌리고, 구천(九天)의 우레 북은 금궐(金闕)에 소리
를 진동시킨다. 과일나무 숲은 외경(外境)에 무성하고 연기 아닌 서기(瑞氣)가 서울
에 빛난다. 이는 바로 그 탄생하신 날에 맞추고 그 정사에 임하셨을 때에 응한 것
이다. 우러러 생각하건대 대군(大君)께서는, 은덕은 땅처럼 공평하여 백성을 인교
(仁敎)로 감화시키고, 마음은 하늘의 거울 같아 부자(父子)의 효성(孝誠)을 권장하였
다. 아침에는 어진 외삼촌에게, 저녁에는 보필하는 충신에게서 채택하지 않는 말이
없었으니, 무엇을 행하신들 허물이 있었겠는가? 이에 선왕의 유언을 돌아보아 드디
어 일찍부터 품으셨던 뜻을 성취하셨다. 유사(有司)는 일을 처리하고 공장(工匠)은
재주를 다하였으니, 해는 신해년(辛亥年)이고 달은 12월이다. 이때에 해와 달은 광
휘를 더하고 음(陰)과 양(陽)은 기운을 조화하여, 바람은 부드럽고 하늘은 고요한데
乘)을 설법하였는데, 삼승 일명 삼진(三眞)은 가설이고, 일승은 실설(實說)이라 한다.
157) 산해경(山海經) 에 “염제(炎帝)의 손자인 고연(鼓延)이 처음으로 종을 만들었다.” 하였다.
158) 전국시대에 연(燕) 나라 소왕(昭王)은 악의(樂毅)를 등용하여 공을 이루었고, 진(秦) 나라 목공(穆公)
은 백리해(百里奚)와 유여(由餘)를 등용하여 공을 이루었다
159) 부처가 한 쌍의 사라수(沙羅樹) 사이에서 열반에 들었다 한다.
160) 당(唐) 나라 때 장안성(長安城)의 거리가 좌우로 여섯으로 나뉘었으므로 육가(六街)라 불렀다. 여기서
는 하늘에 있는 거리를 비유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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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령스러운 기물(器物)이 만들어졌다. 모양은 산처럼 우뚝 섰고 소리는 용(龍)의 울
음과 같아 위로 유정천(有頂天)161) 꼭대기까지 이르고 가만히 끝없는 지옥까지 통
하리니, 보는 자는 기이하다 일컫고 듣는 자는 복을 받으리라. 원컨대, 이 묘한 인
연이 선왕의 영령(英靈)을 받들어 음문(音聞)162)의 맑은 소리를 들으시고 말 없는
법연(法筵)에 오르시어 삼명(三明)163)의 수승한 마음에 계합하시고 일승(一乘)의 진
경(眞境)에 처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왕가의 자손들이 금지(金枝)와 함께 길이 무성
하며 국가의 기업이 철위산(鐵圍山)164)처럼 더욱 번창하여, 유정(有情)과 무식(無
識)165)이 지혜의 바다에서 물결을 함께 하여 모두 티끌 세계에서 벗어나 아울러 깨
달음의 길에 오르게 하소서. 신(臣) 김필해는 글이 졸렬하고 재주가 없으나 감히 조
서(詔書)를 받들어 반초(班超)166)의 붓을 빌리고 육좌(陸佐)의 말에 따라 그 원하는
뜻을 기술하여 종에 새긴다.” 하였다. 그 명(銘)은 다음과 같다.
<白雲梁> 亦在蚊川上 ○<上書莊> 在金鰲山北 ○高麗太祖之興 新羅崔致遠知必受
命 上書 有鶏林黃葉鵠嶺靑松之語 羅王聞而惡之 致遠即7帶家 隱居伽倻山海印寺終焉
其鑑識之明 羅人服之 乃以其所居 名上書莊 ○<奉德寺鍾> 新羅惠恭王鑄鍾 銅重十二
萬斤 撞之 聲聞百餘里 後寺淪於北川 天順四年庚辰 移懸于靈妙寺 ○翰林郞金弼奚鍾
銘曰 夫至道包含於形像之外 視之不能見其原 大音震動於天地之間 聽之不能聞其響 是
故憑開假說 觀三眞之奥載 懸擧神鍾 悟一乘之圓音 夫其鍾也 稽之佛生 則験在於罽'膩7
尋之帝鄕 則始制於鼓延 空而能鳴 其響不竭 重爲難轉 其軆7不褰所以王者元功克銘其
上 羣生離苦亦在其中也 伏惟聖德大王 德共山河而並7峻 名齊日月而高懸 擧忠良而撫俗
崇禮樂以觀風 野務本農 市無濫物 時嫌金玉 世尙文才 不意子靈 有心老誡 四十餘年
臨邦勤政 一無干戈驚擾百姓 所以四方隣國萬里歸賓 惟167)有欽風之望 未曾飛矢之窺
燕秦用人 齊晉替霸豈可並'輪雙轡7而言矣 雙樹之期難測 千秋之夜易長 晏駕已來于今三
十四也 頃者孝嗣景德大王在世之日 繼守丕業 監撫庶機 早隔慈規 對星霜而起戀 重違
嚴訓 臨闕殿以增悲 追遠之情轉悽 益魂之心更切 敬捨銅一十二萬斤 欲鑄大鍾一口 立
志未成 奄爲就世 今我聖上 行合祖宗 意符至理 殊祥異於千古 令德冠於當時 六街龍雲
蔭灑於玉階 九天雷鼓震響於金闕 菓木之林離離乎外境 非烟之色煥煥乎京師 此即'投玆
誕生之日 應其臨政之時也 仰惟大君 恩若地平 化黔黎於仁教 心如天鏡 奬父子之孝誠
是知朝於元舅之賢 夕於忠臣之輔 無言不擇 何行有愆 乃顧遺言 遂成宿意 爾其有司辦
事 工匠盡模 歲次大淵 月惟大呂 是時日月借暉 陰陽調氣 風和天静 神器化成 狀如岳
立 聲若龍吟 上徹於有頂之巓潛通於無底之下 見之者稱奇 聞之者受賜 願玆妙因奉翊
161) 불경(佛經)에 의하면 하늘에 여러 층이 있는데, 유정천(有頂天)은 유형 세계(有形世界)의 최상층이다.
162) 소리가 들린다는 뜻으로 관세음보살은 소리 듣는 이치를 깨달아 부처가 되었다 한다.
163) 삼명(三明)은 숙명통(宿命通)ㆍ천안통(天眼通)ㆍ누진통(漏盡通)으로, 곧 과거의 업상(業相)이나 인연
(因緣)을 알아 내세의 상을 명확이 하며 현재의 고상(苦相)을 깨달아 일체의 번뇌를 끊어버릴 수 있는
것을 말한다.
164) 불경(佛經)에 이 세계를 둘러싼 철산(鐵山)이 있는데, 이를 철위산(鐵圍山)이라 한다.
165) 의식이 없는 것으로 곧 초목이나 돌 같은 것을 말한다.
166) 중국 동한(東漢) 때의 장군인 반표(班彪)의 아들이다. 그는 붓을 던지면서 “국경 밖에 나가 공을 세울
것이지 어찌 붓으로 글씨나 쓰고 있으랴” 하고, 서역(西域)을 정벌하여 정원후(定遠侯)에 봉해졌다.
167) 중간본에는 唯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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尊靈 聽音聞之淸響 登無說之法筵 契三明之勝心 居一乘之眞境 乃至瓊萼7之叢 共金柯
以永茂 邦家之業將鐵圍而彌昌 有情無識慧海同波 咸出塵區 並7昇覺路 臣弼奚 文拙無
才 敢奉聖詔 貸班超之筆 隨陸佐之言 述其願旨 銘記于鍾也 其詞曰
하늘은 상168)을 드리우고 紫極懸象
땅은 방위를 여니 黃輿啓方
산하가 자리잡고 山河鎭別
구역이 나뉘었네 區宇分張
동해 가는 東海之上
신선이 사는 곳으로 衆仙所藏
땅은 도학에 있고 地居桃壑
경계는 부상에 이어 있네 界接扶桑
여기에 우리나라가 있어 爰有我國
합하여 한 고장이 되었네 合爲一鄕
임금의 거룩하신 덕은 元元聖德
대가 갈수록 더욱 새롭고 曠代彌新
묘하고 묘한 맑은 교화는 妙妙淸化
원근에 두루 미쳤네 遐邇克臻
은혜를 먼 곳까지 입히니 將恩被遠
만물도 고루 젖어드네 與物霑均
성하구나 천년토록 茂矣千葉
온갖 무리를 편안히 하네 安乎萬倫
수심어린 구름 돌연 벗겨지니 愁雲忽脫
지혜의 해169)는 봄이 없네 慧日無春
공순하고 효성스런 사왕께서 恭恭孝嗣
모든 정사를 계승하여 繼業千機
세상 다스림을 고법대로 하시니 治俗仍古
풍속을 변화시킴에 어찌 어긋나랴 移風豈違
날마다 부왕의 훈계 생각하며 日思嚴訓
언제나 모후의 자애로움 사모하네 常慕慈輝
다시 명복을 빌려고 更以修福
종을 만들어 기원하네 天鍾爲祈
거룩하도다 우리 임금이여 偉哉我后
덕의 감응이 가볍지 않아 感德不輕
168) 일(日)ㆍ월(月)ㆍ성(星)ㆍ신(辰) 등의 천상(天象)을 말한다. 주역 에 “하늘이 상(象)을 드리우니 성인
(聖人)이 이를 법받는다.” 하였다.
169) 지혜의 해[慧日]는 부처나 불법을 태양에 비유하여 쓰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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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배로운 상서가 자주 나오고 寶瑞頻出
신령스런 징조가 매양 생기네 靈符每生
임금이 어질고 하늘이 도우시니 主賢天佐
시절이 태평하고 백성이 평안하네 時泰國平
추모의 정만이 일어나니 追遠惟動
원하는 바대로 성취되리 隨所願成
선왕의 유명을 돌아보아 乃顧遺命
이에 종을 주조하였네 于斯寫鍾
신인이 힘을 도우니 神人奬力
진기한 기물이 형체를 이루었네 珍器形容
위엄은 양곡에 떨치고 震威晹谷
소리는 삭봉에 맑게 울리네 淸韻朔峯
보고 들음에 모두 믿으니 開見俱信
꽃다운 인연이 진실로 모이리라 芳緣允鍾
능히 마귀도 보전하고 能保魔鬼
어룡을 구제하네 救之魚龍
둥글고 빈 신체가 圓空神體
바야흐로 거룩한 자취를 나타내어 方現聖蹤'
길이 이 홍복을 永是鴻福
언제나 거듭거듭 드리우소서 恒恒轉重
부윤(府尹) 예춘년(芮椿年)이 남문(南門) 밖에 옮겨 종각(鐘閣)을 지어 달아놓고
군사의 징집 및 성문을 여닫을 때에 쳤다.
<담암사(曇巖寺)> 일명 담엄사(曇嚴寺)라고도 한다. 옛터가 사릉(蛇陵) 남쪽에 있
다.
<천관사(天官寺)> 오릉(五陵) 동쪽에 있다. 〇김유신(金庾信)이 어렸을 때에 모부
인(母夫人)이 날마다 엄한 훈계를 하여 함부로 남과 교유(交遊)하지 않았는데, 하루
는 우연히 창기(娼妓)의 집에서 자게 되었다. 모부인이 불러놓고 훈계하기를, “나는
이미 늙어서 밤낮으로 네가 자라 공명을 세워 임금과 어버이를 영화롭게 하기를 바
라고 있는데, 이제 너는 천한 아이들과 음란한 술집에서 논단 말이냐” 하고, 울음
을 그치지 않으니, 유신은 곧 모부인 앞에서 스스로 맹세하기를 “다시는 그 문 앞
을 지나가지 않겠습니다.” 하였다. 하루는 술이 취하여 집에 돌아오는데 말이 전에
다니던 길을 따라 잘못 그 창기의 집으로 갔다. 창기는 기쁘기도 하고 원망스럽기
도 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나와 맞이하였다. 유신이 이를 깨닫고는 타고 온 말을 베
고 안장을 버리고 돌아갔다. 그 여자가 원망하는 노래 한 곡을 지어 세상에 전해지
고 있다. 절은 바로 그 여자의 집이며, 천관(天官)은 그 여자의 이름이다. 〇고려 이
공승(李公升)의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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府尹芮椿年移置南門外 構屋以懸 凡徵軍及城門開閉時 擊之 ○<曇巖寺> 一云曇嚴
舊址在蛇陵南 ○<天官寺> 在五陵東 ○金庾信爲兒時 母夫人日加嚴訓 不妄交遊 一日
偶宿女隷家 母面教之曰 我已老 日夜望汝成長 立功名 爲君親榮 今乃爾與屠沽小兒 遊
戯滛房酒肆耶 呼泣不已 庾信即'於母前 自誓不復過其門 一日被酒還家 馬遵舊路 誤至
娼家 娼且欣且怨 垂泣出迎 庾信旣悟 斬所乘馬 棄鞍而返 女作怨詞一曲 傳之 寺即7其
家也 天官其女號也 ○高麗李公升詩
절을 천관이라 부르니 옛적에 사연이 있었으리 寺號天官昔有緣
홀연 세운 내력을 들으니 마음이 처연하네 忽聞經始一凄然
정이 많은 공자 꽃 아래서 놀더니 多情公子遊花下
원망 머금은 가인 말 앞에서 흐느끼네 含怨佳人泣馬前
말은 정이 있어 도리어 옛길을 알았는데 紅鬛有情還識路
하인은 무슨 죄로 공연히 채찍을 맞았는가 蒼頭何罪謾'加鞭
오직 남은 한 곡조 가사가 오묘하여 唯餘一曲歌詞妙
달에서 함께 산다는 이야기만 만고에 전하네 蟾兎同居萬古傳
<황룡사(皇龍寺)> 월성(月城) 동쪽에 있다. 지금은 폐허가 된 채 장륙존상(丈六尊
像)만 남아 있다. 〇신라 진평왕(眞平王)이 담당 관청에 명하여 월성 동쪽에 새 궁
전을 짓게 하였는데, 황룡(黃龍)이 그곳에 나타났다. 왕이 의심하여 고쳐서 절을 만
들고 이름을 ‘황룡사’라 하였다. 고려 현종(顯宗)이 조유궁(朝遊宮)을 헐고 그 재목
으로 이 절의 탑을 수축하였다. 송(宋) 나라 학사(學士) 호종단(胡宗旦)이 사신으로
와서 초헌(軺7軒)을 타고 이 절의 양화문(兩花門)을 지나다가 진사(進士) 최홍빈(崔鴻
賓)이 다음과 같은 시를 써놓은 것을 보았다.
<皇龍寺> 在月城東 今廢 只有丈六像 ○新羅眞平王 命所司 築新宮於月城東 黃龍現
其地 王疑之 改爲佛寺 號曰黃龍 高麗顯宗撤朝遊宮 以其材 修寺塔 學士胡宗旦170)乘
使軺過寺兩花門 見進士崔鴻賓留頭云
고목은 삭풍에 울고 古樹鳴朔吹
잔 물결은 지는 해에 일렁이네 微波漾'殘暉
배회하며 옛일을 생각하니 徘徊想前事
어느새 눈물이 옷깃을 적시네 不覺淚沾衣
호종단은 깜짝 놀라며 경탄하기를, “참으로 불세출의 재주로구나.” 하였다. 자기
나라로 돌아가 복명(復命)할 때에 상(上)이 동도(東都)의 남아 있는 옛일을 묻자, 드
디어 이 시를 아뢰었다 한다. 〇김극기(金克己)의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胡瞿然驚曰 眞不世才也 及復命 上問東都遺事 遂奏此詩 ○金克己詩
170) 중간본에는 朝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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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의 큰 집들은 五侯耽耽宇
한여름에도 더위를 타지 않네 當夏不受暑
염관171)이 위신 잃음을 부끄러이 여겨 炎官恥失威
누추한 작은 집에 성가시게 화풀이를 하네 陋屋煩遷怒
마음을 졸이니 시름은 불과 같고 焦心愁似火
몸을 달구니 땀은 비오듯 하네 爍'軆7汗如雨
섭정능172)을 따라서 願隨葉静能
청허부173)에 날아 들어가 飛入淸虛府
몸은 푸른 옥두꺼비를 타고 身騎靑瑤蟾
손은 흰 옥토끼를 희롱하고 싶네 手弄白玉兎
애석하게도 범속한 냄새가 나서 可惜凡骨腥
구름 낀 하늘에서 돌아갈 길 잃었네 雲霄'失歸路
차라리 그윽한 곳에 숨어 사는 사람을 찾아가 不如叩幽人
맑고 온화한 말에 젖어듦이 나으리 霑灑淸軟語
새벽에 일어나 등나무 지팡이를 짚고 曉起理枯藤
서사의 주인을 찾네 來尋西社主
달팽이는 섬돌을 두른 이끼에서 침을 흘리고 蝸涎繞砌7苔
새는 구름 속으로 치솟은 나무에서 지저귀네 鳥哢侵雲樹
전각은 웅장하고 화려함을 과시하여 殿閣誇壯麗
하늘을 향하여 날아가려 하는구나 尋空欲飛去
집안 가득 만다라174)꽃이 一室曼陁花
어지러이 떨어져 옥티끌 같네 縯紛落玉塵
오래 앉았노라니 황금 향로에서는 坐久黃金鴨
침향 연기 모락모락 피어오르네 沈烟橫篆縷
불을 살려 향기로운 차를 달여 보니 活火試芳茶
꽃무늬 자기에 흰 젖이 뜨네 花甆浮白乳
향기롭고 달콤한 내음 더욱 짙어가는데 香甜味尤永
한 모금 마시니 온갖 생각이 사라지네 一啜7空百慮
저녁 빛이 질펀한 숲에 드니 暮色入平林
긴 행랑에서 법고가 우네 長廊嗚法鼓
재주는 적고 온갖 경치는 굉장하니 才微萬象驕
붓을 잡고 읊조리기 더욱 괴롭네 把筆吟尤苦
171) 염관(炎官)은 더위를 관장하는 신이다.
172) 섭정능(葉静能)은 당(唐) 나라 때의 도사(道士)로 섭정(葉静)이라고도 한다.
173) 청허부(淸虛府)는 맑고 빈 마을로 곧 신선이 사는 세계를 말한다.
174) 만다라(曼陀羅)는 성화(聖花)로서 연꽃을 말한다. 부처가 설법할 때에 하늘에서 네 가지 꽃이 비오듯
이 떨어졌는데, 이 꽃은 그 중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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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층층 사다리는 빙빙 둘러 하늘로 날아가려 하고 層梯繚7繞欲飛空
만수 천산은 한눈에 바라보이네 萬水千山一望通
몸은 노오175)가 신선을 따라 오르내린 밖에 나왔고 身出盧敖登降外
눈은 수해176)가 오가던 가운데를 삼키네 眼呑竪亥去來中
성사177)의 그림자는 처마 앞 비에 떨어지고 星槎'影落薝7前雨
달 속의 계수 향기는 난간 아래 바람에 나부끼네 月桂香飄檻下風
동도를 굽어보니 수많은 집들이 俯視東都何限戶
벌집 개미구멍처럼 아득히 보이네 蜂窠'蟻穴轉溟濛7
�신증新增 � 경덕왕(景德王) 13년(754)에 종을 주조하였으니, 길이가 1장 3촌이
고, 두께가 9촌이고, 무게가 49만 7581근이었다. 속설에 “지금 절터 밭이랑 사이에
묻혀 있다.”고 전한다.
景德王十三年鑄鍾 長一丈三寸 厚九寸 重四十九萬七千五百八十一斤 俗傳 今埋在寺
基田畝間云
<가섭연좌석(迦葉宴坐石)> 황룡사에 있다. 돌의 높이는 5~6척 정도 되며, 둘레는
겨우 세 아름이다. 속설에, 가섭(迦葉)이 편히 앉아 쉰 돌이라 한다. 또 석가모니의
장륙존상(丈六尊像)이 있는데, 진평왕(眞平王) 때에 주조한 것이다. 황철(黃鐵) 5만
7000 근과 황금 3만 푼이 들었다. 후인이 연좌석을 다음과 같이 찬미하였다.
<迦葉宴坐石> 在皇龍寺 石高可五六尺 圍僅三肘俗傳迦葉宴坐石 又有釋迦丈六像
眞平王時所鑄 黃鐵五萬七千斤 黃金三萬分 後人讃�宴坐石曰
지혜의 해가 빛을 감춘 지 얼마나 되었는가 慧日沉'輝不記年
오직 연좌석만 여전히 남아 있구나 惟餘宴坐石依然
상전은 몇 번이나 벽해가 되었는가 桑田幾度成滄海
어여쁘게도 우뚝이 모습 아직 변치 않았구나 可惜巍然尙未遷
그리고 장륙존상을 다음과 같이 찬미하였다. 讃�丈六像曰
티끌 세상 어디인들 불계(佛界)가 아닐까만 塵方何處匪眞鄕
175) 노오(盧敖)는 진(秦) 나라 때 사람으로 벼슬이 박사(博士)였는데, 뒤에 신선을 만나러 북해(北海)로 갔
다가 신선이 되었다.
176) 수해(竪亥)는 하(夏) 나라 사람으로 우(禹) 임금의 신하이다. 우임금의 명령으로 동극(東極)에서 서극
(西極)까지 5억(億) 10선(選) 9800보(步)를 걸었다 한다.
177) 성사(星槎는 사신(使臣)을 지칭하는 바, 한(漢) 나라 장건(張騫)이 뗏목을 타고 바다를 끝없이 항해한
끝에 천상의 은하에 이르러 견우(牽牛)와 직녀(織女)를 보았다는 전설에 근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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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화의 인연이 우리나라에 가장 많네 香火因緣最我邦
아육왕178)이 만들기 어려워서가 아니라 不是育王難下手
월성의 옛터를 찾아온 것일세 月城來訪舊行藏
<사천왕사(四天王寺)> 낭산(狼山)의 남쪽 기슭에 있다. �신증新增 � 신라 문무왕
(文武王) 19년인 기묘년(679)에 창건되었다.
<봉성사(奉聖寺)> 부의 동쪽 4리에 있다. 신증新增 ` 신라 신문왕(神文王) 5년인
을유년(685)에 창건되었다.
<영흥사(永興寺)> 부의 성(城) 남쪽에 있다.
<흥륜사(興輪寺)> 부의 남쪽 2리에 있다. �신증新增 � 신라 진흥왕(眞興王) 5년인
갑자년(554)에 창건되었다.
<신원사(神元寺)> 부의 남쪽 월남리(月南里)에 있다.
<창림사(昌林寺)> 금오산(金鰲山) 기슭에 있다. 신라시대 궁전의 옛터가 있었는
데, 후인이 그 자리에 이 절을 세웠다. 지금은 폐허가 되었다. 옛 비석이 있는데 글
자가 없다. 원(元) 나라 학사(學士) 조자앙(趙子昻)의 창림사비(昌林寺碑) 발문(跋文)
에, “이것은 당(唐) 나라에 와 있던 신라의 중 김생(金生)이 쓴 그 나라의 창림사비
인데 글자의 획이 매우 법도가 있으니, 당 나라의 이름난 조각가라 할지라도 이보
다 썩 나을 수는 없다. 옛말에 ‘어디인들 재주 있는 사람이 나지 않으랴’ 하였는데,
참으로 그렇구나.” 하였다.
<남산사(南山寺)> 신라 사람 대세(大世)는 방외(方外)에 뜻을 두고 있었다. 진평
왕 9년(587)에 중 담수(淡水)와 말하기를, “이 신라의 산골에서 일생을 마친다면
못 속의 고기나 새장 속의 새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내 장차 뗏목을 타고 바다에
떠서 오월(吳越)에 이르러 스승을 따라 명산(名山)에서 도를 닦으려 한다. 만일 범
골(凡骨)을 바꾸고 신선(神仙)을 배울 수 있다면 광활한 하늘 밖으로 훨훨 바람을
타고 갈 수 있으리니, 이것은 천하의 기이한 유람이요 장쾌한 구경이다. 그대는 나
를 따라가겠는가” 하니, 담수가 응답하지 아니하였다. 대세가 물러나 마침 구칠(仇
柒)이란 자를 만났는데, 강개하고 기이한 절조가 있었다. 드디어 그와 함께 남산사
에서 노닐었는데, 홀연 비바람이 치고 나뭇잎이 떨어져 뜰 앞의 고인 물에 뜨자, 대
세가 말하기를 “나는 그대와 더불어 서쪽으로 갈 뜻이 있다. 각자 나뭇잎 하나씩을
가지고 배로 삼아 그것이 떠내려가는 차례를 가지고 누가 먼저 가는지 보기로 하
자.” 하였다. 조금 뒤에 대세의 잎이 앞서 가자, 대세가 웃으며 “나는 가네.” 하니,
구칠이 발끈하여 “나도 남자인데 어찌 나만 그리 하지 못하겠는가” 하고, 드디어
서로 벗이 되어 남해(南海)에서 배를 타고 떠났다. 그 뒤로 그들이 간 곳을 알지 못
한다.
<四天王寺> 在狼山南麓 �新增 � 新羅文武王十九年己卯成 ○<奉聖寺> 在府東四里
新增 ; 新羅神文王五年乙酉成 ○<永興寺> 在府城南 ○<興輪寺> 在府南二里 �新增
178) 아육왕(阿育王)은 인도의 국왕으로 불법을 크게 일으켜 많은 불상과 탑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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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眞興王五年甲子成 ○<神元寺> 在府南月南里 ○<昌林寺> 金鰲山麓 有新羅時宮
殿遺基 後人卽其地建此寺 今廢 有古碑無字 元學士趙子昻昌林寺碑跋云 右 唐新羅僧
金生所書其國昌林寺碑 字畫7深有典刑 雖唐人名刻 無以遠過之也 古語云何地不生才 信
然 ○<南山寺> 新羅人大世有方外志 眞平王九年 與僧淡水語曰 在此新羅山谷之間以
終一生 則何異池魚籠鳥 吾將乘桴'泛海 以至吳越 追師訪道於名山 若凡骨可換 神仙可
學 則飄然乘風於泬寥之表 此天下之奇遊壯觀也 子能從我乎 淡水不答 大世退 而適遇
仇柒者 耿介有奇節 遂與之遊南山寺 忽風雨落葉泛庭潦大世曰 吾有與君西遊之志 各
取一葉爲之舟 以觀其行之先後 俄而 大世之葉在前 大世笑曰 吾其行乎 仇柒勃然曰 予
亦男兒也 豈獨不然乎 遂相與爲友 自南海乘舟而去 後不知其所往
<주암사(朱巖寺) 지맥석(持麥石)> 김극기(金克己)의 시서(詩序)에 다음과 같은 내
용이 있다.
하지산(下枝山)은 세속에서 부산(富山)이라 부른다. 산의 남쪽에 주암사란 절이
있고 북쪽에 대암(臺巖)이 있는데 깎아지른 듯 기이하게 빼어나서 먼 산과 먼 바다
를 바라봄에 마치 학을 타고 하늘에 올라 삼라만상을 내려다보는 것 같다. 대석(臺
石)의 서쪽에 지맥석이 있는데 사방이 깎아지른 듯하여 올라갈 수 없을 듯하지만
그 위에는 평탄하여 사람 1백 명이 앉을 수 있다. 옛날 대서발(大舒發) 김유신(金庾
信) 공(公)이 여기에 보리를 가져와 술 재료를 공급하여 군리(軍吏)들을 대접하던
곳으로, 지금도 말의 발자국이 남아 있다. 지맥암(持麥巖)에서 서쪽으로 8,9보쯤 가
면 주암(朱巖)이 있다. 옛적에 도인(道人)이 신중(神衆)179) 삼매(三昧)를 얻고 일찍
이 스스로 면려하기를, “실로 궁녀(宮女)가 아니면 내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리라.”
하였다. 신중이 듣고는 가서 궁녀를 훔쳐 공중으로 날아 새벽에 갔다가 저녁에 돌
려보내곤 하였는데, 일찍이 때를 어긴 적이 없었다. 궁녀가 두렵고 무서워 왕에게
아뢰니, 왕이 궁녀에게 가서 머무는 곳에 단사(丹砂)로 표시하도록 명하고, 이어 갑
사(甲士)에게 명령하여 찾게 하였다. 안으로 성시(城市)로부터 멀리 높은 산 깊은
골짜기의 인적이 드믄 으슥한 곳까지 찾아도 찾아낼 수 없었는데, 홀연히 이 바위
에 이르러 보니 단사의 흔적이 바위 문에 남아 있고 납의(衲衣)를 입은 늙은 중이
그 안에 한가로이 앉아 있었다. 왕이 그의 요망스럽고 미혹하는 행위에 노하여 사
나운 군사 수천 명을 보내어 죽이고자 하였다. 중이 마음을 고요히 하고 눈을 감은
채 한 번 주문을 외우자 음병(陰兵) 수만 명이 산골짜기에 늘어서 있는 것이 마치
세상에서 그려놓은 귀신의 형상과 같았다. 왕의 군졸들이 두려워 땅에 엎드려 나아
가지 못하고 돌아왔다. 왕이 그가 이인(異人)임을 알고 궁궐로 맞아들여 국사(國師)
로 삼으니, 그 요상한 일이 드디어 없어졌다고 한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朱巖寺持麥石> 金克己詩序 下枝山俗號富山 山之陽有寺 曰朱巖寺 北有臺巖 巉'絶
奇秀 臨遠山望遙海 若駕鶴上漢 下視萬像 臺石之西有持麥石 四方削成 若不可陟而上
其上平坦 可坐百人 昔大舒發金公庾信持麥於此 以供酒材 燕饗軍吏之地也 至今馬迹存
焉 自持麥巖 西行八九步 有朱巖 昔道人得神衆三昧 嘗自勵云 苟非宮人 不足動心 神
179) 신중(神衆)은 불법을 수호하는 모든 신령의 무리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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衆聞之 往竊宮人 騰虛而去 晨往夕還 未嘗愆期 宮人恐懼 白於王 王命宮人 凡所歸宿
以丹砂誌之 仍命甲士物色求之 內自城市 遠至高山窮谷幽絶之處 不可得也 忽至此巖
見有丹痕 留在巖戶 而衲衣老僧宴坐其內 王怒其妖惑 遺猛士數千人 欲兵之 僧冥心閉
目 一念神呪 陰兵數萬連亘山谷 若世所畵神象者 王卒恐懼 伏地不能進而還 王知其異
人 迎入大內 拜爲國師 其妖遂絶云 其詩曰
아득히 먼 구름가의 절은 迢'迢7雲際寺
특별한 구역으로 티끌세상과 격리되어 있네 異境隔塵凡
조도는 구불구불 푸른 하늘로 오르고 鳥道彎靑漢
봉대는 푸른 바위에 걸쳐 있네 蜂臺駕碧巖
땅의 정령은 골짜기에로 스며들어 가고 地靈潛洞壑
하늘 바람은 대나무와 삼나무를 스쳐가네 天籟7颭'筠杉
멀리 바라보니 가슴이 확 트이고 縱望襟懷曠
말이 재갈 벗은 것처럼 가볍구나 飄如馬脫銜
또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높이 솟은 천 길 묏부리에 兀兀千仞7岡
우뚝한 한 개의 돌이로다 巖巖一株石
깎아지른 듯 사방은 험준한데 巉'絶四方險
위는 평평하여 자리를 깐 듯하네 上頭平似席
상상컨대 서발공이 想像舒發公
사람을 시켜 이곳에 보리를 가져와 令人此持麥
낮밤으로 군리들을 호궤하니 日夕犒'軍吏
곰 같은 장수들이 다투어 힘을 떨쳤으리 熊羆7爭奮力
부월을 가지고 여러 번 출정하니 仗鉞頻出征
왕사를 마침내 대적할 자 없었네 王師竟無敵
수비할 때는 산이 우뚝 막아선 것 같고 守之若山峙
공격할 때는 번개 치듯 빨랐네 攻之知電擊
삼한을 한 집으로 만드니 三韓爲一家
큰 공훈을 금책에 새겨졌네 茂烈勒金册
영웅의 넋은 지금 어디 있는가 英魄今安在
푸른 이끼만 말굽 자국을 덮었네 綠苔没馬迹
내 우연히 와서 기이한 곳 찾아서 我來偶探奇
올라 구경하고 옛일을 회고하네 登覽懷古昔
친히 채찍 잡고 따르지는 못했지만 不必親執鞭
남은 위엄 늠름하기 어제 같네 餘威凛'如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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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달은 굽어 있는 각궁이요 素月彎角弓
푸른 구름은 말아놓은 유막일세 靑雲卷油幕
골짜기에는 대인호180)가 많고 谷饒大人虎
숲에는 군자학181)이 많네 林足君子鶴
놀란 우레가 바위 묏부리를 찢으니 驚雷裂巖嶂7
북소리와 징소리 듣는 듯하구나 髣'髴7來皷鐸
슬프다 내 가문의 명예 떨어뜨림이여 嗟予墮家聲
자질구레하게 문학을 전공했네 齷齪攻翰墨
반생에 겨우 과거에 올랐으니 半生登一第
두 귀밑털이 이미 희어졌네 雙鬢'已衰白
후왕을 어찌 기약할 수 있으랴 侯王安可期
산야에서 지내는 것을 분수로 받아들였네 已分臥林壑
다만 원컨대 남은 용맹 빌어서 但願借餘勇
사장에서 길이 으뜸 되기를 詞場長逐北
<곤원사 북연(坤元寺北淵)> 신원사(神元寺) 남쪽 2리에 있다. 고려 정중부(鄭仲
夫)의 난에 의종(毅宗)이 거제(巨濟)로 도망하였다. 동북면 병마사(東北面兵馬使) 간
의대부(諫議大夫) 김보당(金甫當)이 군사를 일으켜 역적을 토벌하고 다시 전왕(前
王)을 세우려고 장순석(張純錫) 등으로 하여금 전 왕을 모시고 이 고을에 나와 있게
하였다. 이의민(李義旼) 등이 성 안으로 들어가 전왕을 끌어내어 곤원사 북쪽 못가
에 이르러 시해(弑害)하고는 요로 싸고 가마솥 두 개를 마주 씌워 못 속에 던졌다.
헤엄 잘 치는 절의 중이 가마솥을 가져가고 시체를 버리니, 시체가 물가에 떠내려
가 여러 날이 되도록 까마귀와 솔개가 감히 건드리지 못하였다. 전(前) 부호장(副戶
長) 필인(弼仁) 등이 몰래 관을 마련하여 물가에 매장하였다.
<왕가수(王家藪)> 부의 남쪽 15리에 있다. 고을 사람들이 목랑(木郞)을 제사하는
곳이다. 목랑은 속칭 두두리(豆豆里)라고 하는데, 비형(鼻荊)의 일 이후로 세속에서
는 두두리를 대단히 성대하게 섬긴다. 고종(高宗) 18년(1231)에 몽고(蒙古)의 원수
(元帥) 살례탑(撒禮塔)이 와서 저고여(箸古與)가 암살된 사건을 토죄(討罪)하였다.
동경(東京)에서 급히 사람을 보내어 아뢰기를 “목랑이 말하기를 ‘내가 이미 적군의
진영에 도착하였는데 원수는 누구누구입니다. 우리들 다섯 명이 적과 싸우려고 하
니, 10월 18일을 기하여 무기와 안장 얹은 말을 보내준다면 우리들이 곧바로 승전
보를 올리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이어 최우(崔瑀)에게 다음과 같은 시
를 보내었다.
<坤元寺北淵> 在神元寺南二里 高麗鄭仲夫之亂 毅宗遜于巨濟 東北面兵馬使諫議大
夫金甫當起兵 欲討賊臣 復立前王 使張純錫等 奉前王 出居是州 李義旼等入城 出前王
180) 주역(周易) 에 “대인(大人)은 범처럼 변한다.” 하였다.
181) 포박자(抱朴子) 에 “군자는 학처럼 변한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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至坤元寺北淵上 弑之 裹'以褥 合兩釜 投淵中 寺僧有善泅'者取釜棄屍 屍出水涘有日 烏
鳶不敢傷 前副戶長弼仁等密具棺 奉瘞水濱 ○<王家藪> 在府南十五里 州人祀木郞之
地 木郞俗稱豆豆里 自鼻荊之後 俗事豆豆里甚盛 高宗十八年 蒙古元帥撒禮塔來 討箸
古與之死 東京馳奏有木郞言 我已到敵營 元帥某某人也 我等五人欲與交戰 期以十月十
八日 若送兵鞍馬 我等便當報捷 因以詩寄崔瑀曰
장수와 요절 재앙과 상서는 한결같지 않은데 壽夭災祥非一貫
사람들은 이에 대하여 일찍이 알지 못하도다 人人居此未曾知
재앙을 없애고 복을 오게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인데 除災致福是難事
하늘 위나 인간 세상에서 나를 두고 누가 하랴 天上人間捨我誰
최우가 이를 믿고 사적으로 안장 얹은 말을 마련하여 내시(內侍) 김지석(金之蓆)
을 시켜 보내주었으나 그 후 아무런 효험이 없었다.
瑀信之 私備畫'韂鞍馬 遣內侍金之蓆送之 其後無験
<임관군(臨關郡)> 부의 동쪽 45리에 있다. 성덕왕(聖德王) 때에 모화군(毛火郡)에
성을 쌓아 일본이 침략해 오는 길을 막았는데, 경덕왕(景德王)이 임관(臨關)이라 고
쳐 불렀다. 고려시대에 주(州)에 예속시켰다. 석성(石城)의 남은 터가 아직까지 남아
있는데, 사람들이 관문(關門)이라 한다.
<상성군(商城郡)> 본래 서형산군(西兄山郡)이었다.
<동안군(東安郡)> 본래 생서랑군(生西郞郡)이었다.
<음즙화현(音汁火縣)> 신라 파사왕(婆娑王)이 음즙벌국(音汁伐國)을 빼앗아 음즙
화현을 두었다. 뒤에 안강현(安康縣)에 합하여 예속시켰다.【신라에서는 ‘화(火)’를
많이 일컫는데, ‘화’는 바로 ‘불(弗)’에서 전이된 것이고, ‘불’은 바로 ‘벌(伐)’에서 전
이된 것이다.】
<약장현(約章縣)> 본래 악지현(惡支縣)이다.
<동기정(東畿停)> 본래 모지정(毛只停)이다. 〇김부식(金富軾)이 말하기를, “신라
사람들은 영(營)을 정(停)이라고 하였으니, 바로 진을 치고 주둔하는 곳이다.” 하였
다.
<남기정(南畿停)> 본래 근내정(根乃停)이다.
<서기정(西畿停)> 본래 두량미지정(豆良彌知停)이다. 〇이첨(李詹)이 말하기를,
“지금 밀양부(密陽府) 두야보부곡(豆也保部曲)이 바로 그곳이다.” 하였다. 양(良)과
야(也), 미지(彌知)와 보(保)는 방언(方言)에 서로 비슷하니, 이첨의 말이 옳을 듯하
다.
<북기정(北畿停)> 본래 우곡정(雨谷停)이다.
<막야정(莫耶停)> 본래 관아량지정(官阿良支停)이다. 일명 북하량(北河良)이라고
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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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법이부곡(省法伊部曲)> 법(法)은 잉(仍)으로 쓰기도 한다. 부의 북쪽 70리에
있다.
<팔조부곡(八助部曲)> 부의 동쪽 65리에 있다.
<대포부곡(大庖7部曲)>
<대창부곡(大昌部曲)> 부의 서쪽 70리에 있다.
<남안곡부곡(南安谷部曲)> 부의 서쪽 60리에 있다.
<근곡부곡(根谷部谷)> 안강현(安康縣) 서남쪽 5리에 있다.
<도계부곡(桃界部曲)>
<호명부곡(虎鳴部曲)> 안강현 동남쪽 7리에 있다.
<호촌부곡(虎村部曲)> 신광현(神光縣) 동남쪽 5리에 있다.
<하서지목책(下西知木栅)> 부의 동쪽 60리에 있다. 그 안에 연못 하나와 우물 둘
이 있다. 【이상은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에 나오는데, 간간이 빠진 것을 보
충하였다.】
<臨關郡> 在府東四十五里 聖德王時 築城於毛火郡 以遮日本賊路 景德王改臨關 高
麗時 合屬于州 石城遺址尙存 人謂之關門 ○<商城郡> 本西兄山郡 ○<東安郡> 本生
西郞郡 ○<音汁火縣> 新羅婆娑王取音汁伐國 置音汁火縣 後合屬於安康縣【新羅多稱
火 火乃弗之轉 弗乃伐之轉】○<約章縣> 本惡支縣 ○<東畿停> 本毛只停 ○金富軾云
羅人謂營爲停 乃屯營之地 ○<南畿停> 本根乃停 ○<西畿停> 本豆良彌知停 ○李詹云
今密陽府豆也保部曲即7其地 良與也 彌知與保 方言相近 詹言恐是 ○<北畿停> 本雨谷
停 ○<莫耶停> 本官阿良支停 一云北河良 ○<省法伊部曲> 法一作仍 在府北七十里
○<八助部曲> 在府東六十五里 ○<大庖7部曲> ○<大昌部曲> 在府西七十里 ○<南安
谷部曲> 在府西六十里 ○<根谷部曲> 在安康縣西南五里 ○<桃界部曲> ○<虎鳴部
曲> 在安康縣東南七里 ○<虎村部曲> 在神光縣東南五里 ○<下西知木栅> 在府東六十
里 內有一池二井【以上出輿地勝覽182) 而間補其遺】
신증新增 F <매월당(梅月堂)> 금오산(金鰲山)에 있다. 김시습(金時習)이 머물러
살던 곳으로 옛터가 아직도 남아 있다. 섬돌 아래 북향화(北向花)가 있다. 〇김시습
의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梅月堂> 在金鰲山 金時習棲息之處 遺址尙在 階下有北向花 ○金時習詩
나직한 집 푸른 담요에 따스한 기운 넉넉한데 矮屋靑氈暖有餘
창에 가득한 매화 그림자에 달이 처음 밝았네 満窓梅影月明初
등불 돋우고 긴 밤에 향을 사르고 앉아 挑183)燈永夜焚香坐
한가히 인간에서 보지 못하는 글을 짓네 閑著人間不見書
옥당에서 글 짓는 데는 이미 마음이 없고 玉堂揮翰已無心
182)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경상도(慶尙道)」경주부(慶州府) 고적조(古跡條)
183) 중간본에는 桃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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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 창에 단정히 앉았노라니 밤이 한창 깊었네 端坐松窓夜正深
동병에 향을 꽂고 가만히 오궤184)에 기대 앉아 香揷銅甁烏几'静
풍류스런 이야기를 낱낱이 찾아보네 風流奇話細搜尋
<산아당(産兒堂)> 금오산에 있다. 돌을 깎은 것이 마치 애기 낳은 모양과 같다.
속설에, 신라시대에 후사(後嗣)를 구하고 복을 빌던 곳이라고 전하는데, 가위질을
한 흔적이 있다.
<기암(碁巖)> 금오산에 있다. 돌을 깎은 것이 마치 바둑판 모양과 같다. 속설에
신라시대에 신선들이 바둑을 두던 곳이라고 전한다.
<비파암(琵琶巖)> 금오산에 있다. 돌이 바위 꼭대기에 비스듬히 놓인 것이 마치
비파의 모양과 같다.
<포비암(布飛巖)> 금오산에 있다. 돌이 마치 씨줄과 날줄로 베를 짜는 모양과 같
다. 속설에, 신라시대에 신선들이 베를 짜던 곳이라고 전한다.
<우징동(雨徵洞)> 부의 서쪽 40리에 있다. 동(洞) 가운데 5리쯤 되는 곳에 바위
가 우뚝 서 있는데 높이가 1백여 척이나 된다. 그 바위는 남과 북으로 나누어져 있
다. 남쪽 바위에는 글자가 몇 줄 새겨져 있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이끼가 끼어 글자
를 알아볼 수 없다. 북쪽 바위는 사방이 병풍처럼 깎아지른 듯하여 올라갈 수 없다.
바위 표면에 일곱 상(像)이 새겨져 있는데 대단히 크고 길이가 한 길 남짓 된다. 속
설에 ‘승상암(僧像巖)’이라 하기도 하고 ‘상인암(上人巖)’이라 하기도 한다.
<복두암(幞7頭巖)> 부의 서쪽 30리 부산성(富山城)의 동쪽 모퉁이에 있다. 돌이 복
두(幞7頭) 모양으로 불쑥 튀어나왔으므로 명명한 것이다. 혹은 ‘장군석(將軍石)’이라
고도 한다. 이 돌 남쪽에 암자가 하나 있다. 이것도 ‘복두암(幞7頭菴)’이라고 하는데
지금은 폐허가 되었다. 이 바위의 남쪽 10보쯤 되는 곳에 돌이 하나 있는데 ‘선인
대(仙人臺)’라 한다. 그 위는 평평하여 10여 명이 앉을 수 있다.
<옥동(玉洞)> 안강현(安康縣) 남쪽 15리에 있다. 속설에, 옥이 이 동(洞)에서 나
오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생겼다고 전하는데, 한편으론 신라시대에 감옥이 이 동에
있었기 때문에 ‘옥동(獄洞)’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지금까지도 관가에 송사하는 자가
이 동을 지날 때면 비록 숨이 헐떡이고 갈증이 나더라도 이 동의 물을 마시는 것을
꺼린다.
<효자리(孝子里)> 부의 남쪽 5리 사정리(沙正里)에 있다. 신라시대 사람 손시양
(孫時揚)이 그의 부친 윤백(允伯)을 지극히 효성스럽게 섬겼다. 이로 인해 후인들이
그가 살던 곳을 효자리라고 이름하였다. 그 비(碑)가 아직도 남아 있는데 글자가 깎
여 알아볼 수가 없다.
<화주(火珠)> 분황사(芬皇寺) 구층탑(九層塔)은 신라 삼보(三寶)의 하나인데, 임진
왜란 때 왜적이 그 반을 훼손하였다. 뒤에 어리석은 중이 개축(改築)하려고 하다가
184) 오궤(烏几는 앉을 때 몸을 기대는 궤안(几'案)으로, 검은 염소 가죽으로 장식한 오피궤(烏皮几를 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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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그 반을 훼손하고서 구슬 하나를 얻었는데, 모양은 바둑돌 같고 빛은 수정(水精)
같았으며, 들어서 비추면 그 바깥까지 꿰뚫어 볼 수가 있다. 태양이 비추는 곳에서
는 솜을 가까이 대면 불이 일어나 그 솜을 태운다. 지금은 백률사(栢栗寺)에 보관되
어 있다.
<석조(石槽)> 길이가 7척 2촌, 넓이가 3척 5촌으로, 흥륜사(興輪寺)의 고물(故物)
이다. 부윤 이필영(李必榮)이 사람을 시켜 금학헌(琴鶴軒) 북쪽 뜰로 끌어오게 하여
백련(白蓮)을 심고 이를 새겨 기록하였다.
<상사암(相思巖)> 금오산(金鰲山) 위에 있다. 그 크기가 1백여 아름이나 된다. 칼
로 자른 듯이 우뚝하게 서 있어 기어오를 수가 없다. 속설에, 상사병(相思病)에 걸
린 자가 이 바위에 빌면 영험이 있다고 전한다.
<애공사(哀公寺)> 부의 서쪽 10리에 있다. 신라시대에 창건한 것이다. 그 아래에
제방으로 막아 논을 만들었는데, 속칭 ‘애공량(哀公梁)’이라 한다.
<북명사(北椧寺)> 부의 남쪽 30리에 있다. 지금은 여염(閭閻)이 되었다. 속칭 ‘명
곡(椧谷)이라 하는데, 석탑(石塔)이 아직도 남아 있다.
<호원사(虎願寺)> 부의 서쪽 천변(川邊)에 있다. 신라시대에 김현(金現)이 창건한
것이다. 【일이 이문(異聞) 에 보인다.】
<좌우창(左右倉)> 남산(南山)의 성 안에 있다. 신라 문무왕(文武王) 3년인 계해년
(663)에 장창(長倉)을 이곳에 세웠는데, 지금도 주출돌이 완연하다.
<달천창(達川倉)> 부의 서쪽 30리에 있다. 옛터가 아직도 남아 있다.
<설창(雪倉)> 안강현(安康縣) 동쪽 8리 양좌촌(良佐村) 뒷산 위에 있다. 옛터가
아직도 남아 있다. 또한 버려진 우물이 있는데 아주 가물지 않으면 마르지 않는다.
<産兒堂> 在金鰲山 鑿石如産兒狀 俗傳 新羅時求嗣祈福之處 有剪刀痕 ○<碁巖>
在金鰲山 刻石如碁局狀 俗傳 新羅時仙人局戲7之處 ○<琵琶巖> 在金鰲山 有石橫在巖
頭 如琵琶狀 ○<布飛巖> 在金鰲山 有石如經緯狀 俗傳 新羅時仙人經緯之處 ○<雨徵
洞> 在府西四十里 洞中五里許有巖屹立 高百餘尺 其南北分坼 南巖 銘字數行 歲久苔
蝕 字不可暁 北巖 四方屛立 不能陟 巖面刻七像 甚大 長丈餘 俗傳僧像巖 或云上人巖
○<幞7頭巖> 在府西三十里富山城之東角 有石突然如幞7頭狀 故名 或云將軍石 石之南
有一菴 亦號幞'頭菴 今廢 巖之南十步許有一石 名曰仙人臺 其上平坦 可坐十餘人 ○
<玉洞> 在安康縣南十五里 俗傳 玉出是洞 故名 一云 新羅時 獄在是洞 故亦名獄洞
至今訟于官者過此洞 雖喘渴 忌飮洞水 ○<孝子里> 在府南五里沙正里 新羅時人孫時
揚事其父允伯至孝 後人因名所居爲孝子里 其碑尙存 而字刓7不能暁 ○<火珠> 芬皇寺
九層塔 新羅三寶之一也 壬辰之亂 賊毀其半 後有愚僧欲改築之 又毀其半 得一珠 形如
碁子 光似水精 擧而燭之 則洞見其外 太陽照處 以綿近之 則火發燃綿 今藏在栢栗寺
○<石槽> 長七尺二寸 廣三尺五寸 興輪寺故物也 府尹李必榮使人曳入琴鶴軒北庭 以
種白蓮 刻而識之也185) ○<相思巖> 在金鰲山上 其大百餘圍 截然屹立 不可攀躋俗傳
祟'相思疾者禱此巖 有験云 ○<哀公寺> 在府西十里 羅時所創 其下防梁作水田 俗號哀
185) 중간본에는 也가 빠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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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梁 ○<北椧寺> 在府南三十里 今爲閭閻 俗稱椧谷 石塔猶在 ○<虎願寺> 在府西川
邊 新羅金現所創 【事見異聞】○<左右倉> 在南山城內 新羅文武王三年癸亥 作長倉
於此 至今礎石宛然 ○<達川倉> 在府西三十里 遺址尙存 ○<雪倉> 在安康縣東八里良
佐村後山上 遺址尙在 亦有廢井 非極旱不涸'
숲[藪]
<비보수(裨補藪)> 부의 성(城) 가운데 부윤(府尹)의 관사 북쪽에 있다.
<시림(始林)> 부의 동남쪽 5리 월성(月城) 서쪽에 있다.
<남정수南亭藪> 하나는 문천(蚊川) 북쪽에 있고, 하나는 문천 남쪽에 있다. 남수
(南藪)는 바로 오릉(五陵)이며, 북수(北藪)는 지금 없어졌다.
<오리수(五里藪)> 부의 동쪽 8리 지점인 동천(東川) 가에 있다. 길이가 5리가 되
므로 명명한 것이다.
<한지수(閑地藪)> 부의 동쪽 8리에 있으니 곧 ‘한지원(閑地原)’이다. 예전에 숲이
었다가 중간에 없어졌다. 금년에 사리역(沙里驛)을 철폐하여 옮긴 후 예전대로 나무
를 심어 후일에 숲을 조성할 지역으로 만들었는데, 계속하여 바뀌지 않을 수 있을
지 모르겠다.
<임정수(林井藪)> 부의 동북쪽 5리 지점인 백률사(栢栗寺) 서쪽에 있다.
<고양수(高陽藪)> 부의 북쪽 4리에 있다. 곧 옛날의 이른바 ‘논호수(論虎藪)’인데,
지금은 속칭 ‘고양수’라 한다. 예전에는 ‘임정수(林井藪)’와 서로 이어져 있었는데,
지금은 간악한 백성들이 침범하여 경작해 밭을 만들어 둘로 나뉘어졌다.【이상의
각각의 숲들은 고래(古來)로 나무를 심어 숲을 조성한 의미가 우연치 않은데, 지금
은 거의 다 나무를 베어내 경작하고 개간한 곳이 두루 편재해 있으니 애석하기 그
지없다. 법전에 “비보소(裨補所)의 숲 안에서 나무를 베거나 밭을 경작하는 자는 장
(杖) 80에 처하고, 이익을 환수하며 관직을 몰수한다.” 하였으니, 수령이 된 자가
몰라서는 안 될 것이다.】
<裨補藪> 在府城中府尹衙舎北 ○<始林> 在府東南五里月城西 ○<南亭藪> 一在蚊
川北 一在蚊川南 南藪即'五陵也 北藪今廢 ○<五里藪> 在府東八里東川邊 延袤五里故
名 ○<閑地藪> 在府東八里 即'閑地原也 舊有藪 中廢 今年 沙里驛撤移之後 依前種樹
以爲後日成藪之地 未知有能繼此不替者否耶 ○<林井藪> 在府東北五里栢栗寺西 ○
<高陽藪> 在府北四里 即'古所謂論虎藪也 今則俗稱高陽藪 古與林井藪相連 今爲奸民
割耕之田 分而爲二 【右各藪 古來種樹成林 意非偶然 于今斬伐殆盡 耕墾殆遍 可勝惜
哉 法典 裨補所林藪內伐木耕田者 杖八十追利没官 爲守令者不可不知可186)也】
호구(戶口)
186) 중간본에는 可가 빠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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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전성기 때 서울은 1360방(坊) 17만 8936호(戶)였다. 경주부(慶州府)에는 현
재 인호(人戶)는 1만 6244호이며, 인구는 5만 4956명이다. 【호구는 해마다 증감
되어 본래 수효가 정해져 있지 않다. 따라서 우선 기유년(己酉年) 현재의 호구를 기
록한다.】
新羅全盛時 京中 一千三百六十坊 十七萬八千九百三十六戶 本府即'今人戶一萬六千
二百四十四 人口五萬四千九百五十六 【戶口逐年增損 本無定數 故姑錄己酉見戶】
군액(軍額)
별대군(別隊軍)은 490명이고, 속오군(束伍軍)은 1570명이다.
別隊四百九十 束伍一千五百七十
전결(田結)
갑술년의 양안(量案)에 의하면, 원래의 전답은 1만 8539결(結) 3(負) 9(束)인데,
자인현(慈仁縣)이 나누어진 뒤 2243결 78부 7속이 자인현으로 이속(移屬)되었다.
따라서 남은 전결(田結)은 1만 6295결 25부 2속이다. 〇세금을 내는 전답은 8626
결 70부 6속이다. 〇계사년에 구사현(仇史縣)이 자인현으로 이속된 뒤 전결 591결
99부 9속이 자인현으로 또 이속되었다. 〇기유년에 원래의 전답은 1만 5703결 25
부 2속이다. 〇세금을 내는 전답은 9627결 84부 9속이다.【전결은 해마다 가감이
있어 본래 정해진 규정이 없다. 따라서 우선 기유년에 상정(詳定)한 수효를 기록한
다.】
甲戌量案 元田畓一萬八千五百三十九結三負九束 慈仁分縣後 二千二百四十三結七十
八負七束移屬慈仁縣 因存田結一萬六千二百九十五結二十五負二束 ○出稅田畓八千六
百二十六結七十負六束 ○癸巳 仇史縣移屬慈仁後 田結五百九十一結九十九負九束移屬
慈仁縣 ○己酉 元田畓一萬五千七百三結二十五負二束 ○出稅田畓九千六百二十七結八
十四負九束【田結 逐年嬴7縮 本無定規 故姑錄己酉詳定之數】
제언(堤堰)
서면(西面)
<대곡제(大谷堤)> 대곡촌(大谷村)에 있다. 경주부 서쪽으로 25리 떨어진 곳이며,
논에 9섬의 볍씨를 뿌린다.
<밀이제(蜜耳堤)> 밀이촌(蜜耳村)에 있다. 경주부 서쪽으로 30리 떨어진 곳이며,
논에 32섬의 볍씨를 뿌린다.
<개오곡제(開吾谷堤)> 개오곡리(開吾谷里)에 있다. 경주부 서쪽으로 40리 떨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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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이며, 논에 17섬의 볍씨를 뿌린다.
<부운제(浮雲堤)> 부운리(浮雲里)에 있다. 경주부 서쪽으로 40리 떨어진 곳이며,
논에 27섬의 볍씨를 뿌린다.
<여기제(女妓堤)> 아화역(阿火驛) 북쪽에 있다. 경주부 서쪽으로 45리 떨어진 곳
이며, 논에 18섬의 볍씨를 뿌린다.
<아화말제(阿火末堤)> 아화역(阿火驛) 남쪽에 있다. 경주부 서쪽으로 45리 떨어진
곳이며, 논에 18섬의 볍씨를 뿌린다.
<어화제(於火堤)> 천촌(泉村)에 있다. 경주부 서쪽으로 45리 떨어진 곳이며, 논에
17섬의 볍씨를 뿌린다.
<봉덕제(奉德堤)> 도음곡촌(道音谷村)에 있다. 경주부 서쪽으로 45리 떨어진 곳이
며, 논에 18섬의 볍씨를 뿌린다.
<도제(刀堤)> 부산리(富山里)에 있다. 경주부 서쪽으로 30리 떨어진 곳이며, 논에
5섬의 볍씨를 뿌린다.
<모길제(毛吉堤)> 신평촌(新坪村)에 있다. 경주부 서쪽으로 35리 떨어진 곳이며,
논에 20섬의 볍씨를 뿌린다.
<부동제(釜洞堤)> 도음곡(道音谷)의 봉수대(烽燧臺) 아래에 있다. 경주부 서쪽으
로 35리 떨어진 곳이며, 논에 21섬의 볍씨를 뿌린다.
<곤제제(鵾'梯堤)> 아화역(阿火驛)에 있다. 경주부 서쪽으로 40리 떨어진 곳이며,
논에 19섬의 볍씨를 뿌린다.
<능천제(能川堤)> 능천촌(能川村)에 있다. 경주부 서쪽으로 45리 떨어진 곳이며,
논에 15섬의 볍씨를 뿌린다.
<부산내제(富山內堤)> 부산리(富山里)에 있다. 경주부 서쪽으로 30리 떨어진 곳이
며, 논에 52섬의 볍씨를 뿌린다.
<신제(新堤)> 도음곡촌(道音谷村)에 있다. 경주부 서쪽으로 45리 떨어진 곳이며,
논에 25섬의 볍씨를 뿌린다.
<大谷堤> 在大谷村 府西距二十五里 水田落種九石 ○<蜜耳堤> 在蜜耳村 府西距三
十里 水田落種三十二石 ○<開吾谷堤> 在開吾谷里 府西距四十里 水田落種十七石 ○
<浮雲堤> 在浮雲里 府西距四十里 水田落種二十七石 ○<女妓堤> 在阿火驛北 府西距
四十五里 水田落種十八石 ○<阿火末堤> 在阿火驛南 府西距四十五里 水田落種十八
石 ○<於火堤> 在泉村 府西距四十五里 水田落種十七石 ○<奉德堤> 在道音谷村 府
西距四十五里 水田落種十八石 ○<刀堤> 在富山里 府西距三十里 水田落種五石 ○
<毛吉堤> 在新坪村 府西距三十五里 水田落種二十石 ○<釜洞堤> 在道音谷烽燧下 府
西距三十五里 水田落種二十一石 ○<鵾7梯堤> 在阿火驛 府西距四十里 水田落種十九
石 ○<能川堤> 在能川村 府西距四十五里 水田落種十五石 ○<富山內堤> 在富山里
府西距三十里 水田落種五十二石 ○<新堤> 在道音谷村 府西距四十五里 水田落種二
十五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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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면(北面)
<승삼내제(僧三內堤)> 승삼촌(僧三村) 동쪽에 있다. 경주부 북쪽으로 15리 떨어진
곳이며, 지금은 쓰지 못한다.
<말승내제(末承內堤)> 물천(勿川)에 있다. 경주부 북쪽으로 30리 떨어진 곳이며,
지금은 쓰지 못한다.
<분황제(分皇堤)> 갈곡(葛谷)에 있다. 경주부 북쪽으로 30리 떨어진 곳이며, 논에
18섬의 볍씨를 뿌린다.
<나리제(羅里堤)> 나리촌(羅里村) 북쪽에 있다. 경주부 북쪽으로 25리 떨어진 곳
이며, 논에 35섬의 볍씨를 뿌린다.
<금광내제(金光內堤)> 견곡(見谷)에 있다. 경주부 북쪽으로 15리 떨어진 곳이며,
논에 34섬의 볍씨를 뿌린다.
<금광외제(金光外堤)> 견곡(見谷)에 있다. 경주부 북쪽으로 15리 떨어진 곳이며,
논에 217섬의 볍씨를 뿌린다.
<동산제(東山堤)> 동산동촌(東山洞村)에 있다. 경주부 북쪽으로 35리 떨어진 곳이
며, 논에 39섬의 볍씨를 뿌린다.
<소리제(所里堤)> 갈곡리(葛谷里)에 있다. 경주부 북쪽으로 25리 떨어진 곳이며,
논에 35섬의 볍씨를 뿌린다.
<소질방제(所叱方堤)> 갑산(甲山)의 북쪽 기슭에 있다. 경주부 북쪽으로 40리 떨
어진 곳이며, 논에 25섬의 볍씨를 뿌린다.
<僧三內堤> 在僧三村東 府北距十五里 今廢 ○<末承內堤> 在勿川 府北距三十里
今廢 ○<分皇堤> 在葛谷 府北距三十里 水田落種十八石 ○<羅里堤> 在羅里村北 府
北距二十五里 水田落種三十五石 ○<金光內堤> 在見谷 府北距十五里 水田落種三十
四石 ○<金光外堤> 在見谷 府北距十五里 水田落種二百十七石 ○<東山堤> 在東山洞
村 府北距三十五里 水田落種三十九石 ○<所里堤> 在葛谷里 府北距二十五里 水田落
種三十五石 ○<所叱方堤> 在甲山北麓 府北距四十里 水田落種二十五石
안강현(安康縣)
<도마제(刀馬堤)> 홍천리(洪川里) 서쪽에 있다. 경주부 북쪽으로 60리 떨어진 곳
이며, 논에 7섬의 볍씨를 뿌린다.
<홍천제(洪川堤)> 홍천리(洪川里)에 있다. 경주부 북쪽으로 50리 떨어진 곳이며,
논에 27섬의 볍씨를 뿌린다.
<갑산제(甲山堤)> 갑산리(甲山里)에 있다. 경주부 북쪽으로 40리 떨어진 곳이며,
논에 30섬의 볍씨를 뿌린다.
<득량제(得良堤)> 능동리(陵洞里)에 있다. 경주부 북쪽으로 55리 떨어진 곳이며,
논에 50섬의 볍씨를 뿌린다.
- 126 -
<육통제(六通堤)> 육통리(六通里)에 있다. 경주부 북쪽으로 55리 떨어진 곳이며,
논에 45섬의 볍씨를 뿌린다.
<배계제(排溪堤)> 노당리(魯堂里)에 있다. 경주부 북쪽으로 55리 떨어진 곳이며,
지금은 쓰지 못한다.
<설리제(雪理堤)> 안강현(安康縣)에 있다. 경주부 북쪽으로 55리 떨어진 곳이며,
지금은 쓰지 못한다.
<대동제(大洞堤)> 대동리(大洞里)에 있다. 경주부 북쪽으로 35리 떨어진 곳이며,
논에 40섬의 볍씨를 뿌린다.
<정혜제(定惠堤)> 옥산(玉山)의 동남쪽 3리에 있다. 경주부 북쪽으로 55리 떨어
진 곳이며, 논에 40섬의 볍씨를 뿌린다.
<인자화제(引自火堤)> 인자화리(引自火里)에 있다. 경주부 북쪽으로 45리 떨어진
곳이며, 논에 29섬의 볍씨를 뿌린다.
<刀馬堤> 在洪川里西 府北距六十里 水田落種七石 ○<洪川堤> 在洪川里 府北距五
十里 水田落種二十七石 ○<甲山堤> 在甲山里 府北距四十里 水田落種三十石 ○<得
良堤> 在陵洞里 府北距五十五里 水田落種五十石 ○<六通堤> 在六通里 府北距五十
五里 水田落種四十五石 ○<排溪堤> 在魯堂里 府北距五十五里 今廢 ○<雪理堤> 在
安康 府北距五十五里 今廢 ○<大洞堤> 在大洞里 府北距三十五里 水田落種四十石
○<定惠堤> 在玉山東南三里 府北距五十五里 水田落種四十石 ○<引自火堤> 在引自
火里 府北距四十五里 水田落種二十九石
신광현(神光縣)
<오야지제(吾也知堤)> 지덕리(知德里)에 있다. 경주부 북쪽으로 80리 떨어진 곳이
며, 논에 35섬의 볍씨를 뿌린다.
<대제(大堤)> 신광현(神光縣) 안에 있다. 경주부 북쪽으로 80리 떨어진 곳이며,
논에 55섬의 볍씨를 뿌린다.
<죽동제(竹洞堤)> 죽동리(竹洞里)에 있다. 경주부 북쪽으로 80리 떨어진 곳이며,
논에 56섬의 볍씨를 뿌린다.
<吾也知堤> 在知德里 府北距八十里 水田落種三十五石 ○<大堤> 在神光縣內 府北
距八十里 水田落種五十五石 ○<竹洞堤> 在竹洞里 府北距八十里 水田落種五十六石
기계현(杞溪縣)
<안심신제(安心新堤)> 가천(駕川)에 있다. 경주부 북쪽으로 90리 떨어진 곳이며,
논에 17섬의 볍씨를 뿌린다.
<벌치동제(伐致洞堤)> 벌치동촌(伐致洞村)에 있다. 경주부 북쪽 80리 떨어진 곳이
며, 논에 20섬의 볍씨를 뿌린다.
- 127 -
<安心新堤> 在駕川 府北距九十里 水田落種十七石 ○<伐致洞堤> 在伐致洞村 府北
距八十里 水田落種二十石
남면(南面)
<금광제(金光堤)> 월남리(月南里)에 있다. 경주부 남쪽으로 10리 떨어진 곳이며,
논에 29섬의 볍씨를 뿌린다.
<두응동제(頭應洞堤)> 두응동리(頭應洞里)에 있다. 경주부 남쪽으로 20리 떨어진
곳이며, 논에 93섬의 볍씨를 뿌린다.
<이제(二堤)> 두응동제(頭應洞堤) 아래에 있다. 경주부 남쪽으로 20리 떨어진 곳
이며, 논에 103섬의 볍씨를 뿌린다.
<오배동제(吾背洞堤)> 수가마동(藪可馬洞)에 있다. 경주부 남쪽으로 35리 떨어진
곳이며, 논에 25섬의 볍씨를 뿌린다.
<소산제(蘇山堤)> 구량화촌(仇良火村)에 있다. 경주부 남쪽으로 80리 떨어진 곳이
며, 논에 27섬의 볍씨를 뿌린다.
<재량제(才良堤)> 재량촌(才良村)에 있다. 경주부 남쪽으로 30리 떨어진 곳이며,
논에 32섬의 볍씨를 뿌린다.
<金光堤> 在月南里 府南距十里 水田落種二十九石 ○<頭應洞堤> 在頭應洞里 府南
距二十里 水田落種九十三石 ○<二堤> 在頭應洞堤下 府南距二十里 水田落種一百三
石 ○<吾背洞堤> 在藪可馬洞 府南距三十五里 水田落種二十五石 ○<蘇山堤> 在仇良
火村 府南距八十里 水田落種二十七石 ○<才良堤> 在才良村 府南距三十里 水田落種
三十二石
북안곡현(北安谷縣)
<유등곡신제(柳等谷新堤)> 유등곡촌(柳等谷村)에 있다. 경주부 서쪽으로 70리 떨
어진 곳이며, 논에 70섬의 볍씨를 뿌린다.
<신원제(新院堤)> 신원(新院)에 있다. 경주부 서쪽으로 60리 떨어진 곳이며, 논에
25섬의 볍씨를 뿌린다.
<신제(新堤)> 유등곡촌(柳等谷村)에 있다. 경주부 서쪽으로 60리 떨어진 곳이며,
논에 92섬의 볍씨를 뿌린다.
<대부제(大釜堤)> 저연(楮硯)에 있다. 경주부 서쪽으로 60리 떨어진 곳이며, 논에
7섬의 볍씨를 뿌린다.
<소부제(小釜堤)> 저연(楮硯)에 있다. 경주부 서쪽으로 60리 떨어진 곳이며, 논에
5섬의 볍씨를 뿌린다.
<고룡제(古龍堤)> 창암(倉巖) 밖에 있다. 경주부 서쪽으로 65리 떨어진 곳이며,
논에 6섬의 볍씨를 뿌린다.
- 128 -
<황암방제(黃巖防堤)> 유등곡촌(柳等谷村)에 있다. 경주부 서쪽으로 60리 떨어진
곳이며, 논에 13섬의 볍씨를 뿌린다.
<柳等谷新堤> 在柳等谷村 府西距七十里 水田落種七十石 ○<新院堤> 在新院 府西
距六十里 水田落種二十五石 ○<新堤> 在柳等谷村 府西距六十里 水田落種九十二石
○<大釜堤> 在楮硯 府西距六十里 水田落種七石 ○<小釜堤> 在楮硯 府西距六十里
水田落種五石 ○<古龍堤> 在倉巖外 府西187)距六十五里 水田落種六石 ○<黃巖防堤>
在柳等谷村 府西距六十里 水田落種十三石
옥포원(玉浦院)
<외제(外堤)> 유등곡촌(柳等谷村)에 있다. 경주부 서쪽으로 60리 떨어진 곳이며,
논에 62섬의 볍씨를 뿌린다.
<내제(內堤)> 유등곡촌(柳等谷村)에 있다. 경주부 서쪽으로 60리 떨어진 곳이며,
논에 7섬의 볍씨를 뿌린다.
<신제(新堤)> 저연(楮硯)에 있다. 경주부 서쪽으로 60리 떨어진 곳이며, 논에 6섬
의 볍씨를 뿌린다.
<신소제(新小堤)> 유등곡촌(柳等谷村)에 있다. 경주부 서쪽으로 60리 떨어진 곳이
며, 논에 12섬의 볍씨를 뿌린다.
<오리제(五里堤)> 오리동(五里洞)에 있다. 경주부 서쪽으로 60리 떨어진 곳이며,
논에 25섬의 볍씨를 뿌린다.
<외제(外堤)> 반정(半亭)에 있다. 경주부 서쪽으로 60리 떨어진 곳이며, 논에 11
섬의 볍씨를 뿌린다.
<外堤> 在柳等谷村 府西距六十里 水田落種六十二石 ○<內堤> 在柳等谷村 府西距
六十里 水田落種七石 ○<新堤> 在楮硯 府西距六十里 水田落種六石 ○<新小堤> 在
柳等谷村 府西距六十里 水田落種十二石 ○<五里堤> 在五里洞 府西距六十里 水田落
種二十五石 ○<外堤> 在半亭 府西距六十里 水田落種十一石
동면(東面)
<오리제(五里堤)> 말방촌(末方村)에 있다. 경주부 동쪽으로 40리 떨어진 곳이며,
논에 9섬의 볍씨를 뿌린다.
<장고제(長古堤)> 윤화리(輪火里)에 있다. 경주부 동쪽으로 40리 떨어진 곳이며,
논에 13섬의 볍씨를 뿌린다.
<대조제(大鳥堤)> 개이동(開伊洞) 능지촌(陵旨村)에 있다. 경주부 동쪽으로 40리
떨어진 곳이며, 논에 17섬의 볍씨를 뿌린다.
<장산제(長山堤)> 개이동(開伊洞) 능지촌(陵旨村)에 있다. 경주부 동쪽으로 35리
187) 중간본에는 北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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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어진 곳이며, 논에 17섬의 볍씨를 뿌린다.
<영제(影堤)> 방어지리(放禦旨里)에 있다. 경주부 동쪽으로 30리 떨어진 곳이며,
논에 23섬의 볍씨를 뿌린다. 불국사(佛國寺)와 10리 정도 떨어져 있는 곳으로, 절
뒷산의 수목(樹木)과 불전(佛殿)의 단청이 비치기 때문에 ‘영제’라고 하였다.
<허영제(許永堤)> 구적리(仇賊里)에 있다. 경주부 동쪽으로 30리 떨어진 곳이며,
논에 7섬의 볍씨를 뿌린다.
<조역제(朝驛堤)> 조역(朝驛)에 있다. 경주부 동쪽으로 30리 떨어진 곳이며, 논에
85섬의 볍씨를 뿌린다.
<토상제(吐上堤)> 토상촌(吐上村)에 있다. 경주부 동쪽으로 40리 떨어진 곳이며,
논에 97섬의 볍씨를 뿌린다.
<순제(筍堤)> 방어지리(放禦旨里)에 있다. 경주부 동쪽으로 30리 떨어진 곳이며,
논에 17섬의 볍씨를 뿌린다.
<복두제(伏頭堤)> 조역(朝驛)에 있다. 경주부 동쪽으로 30리 떨어진 곳이며, 논에
19섬의 볍씨를 뿌린다.
<풍등제(風登堤)> 아배동(阿倍洞)에 있다. 경주부 동쪽으로 25리 떨어진 곳이며,
논에 18섬의 볍씨를 뿌린다.
<당사제(堂祀堤)> 구적리(仇賊里)에 있다. 경주부 동쪽으로 35리 떨어진 곳이며,
논에 22섬의 볍씨를 뿌린다.
<부제(釜堤)> 평리(坪里)에 있다. 경주부 동쪽으로 20리 떨어진 곳이며, 논에 19
섬의 볍씨를 뿌린다.
<순제(筍堤)> 어이동(於伊洞)에 있다. 경주부 동쪽으로 20리 떨어진 곳이며, 논에
53섬의 볍씨를 뿌린다.
<서출제(書出堤)> 금오산(金鰲山) 동쪽 기슭에 있다. 경주부 동쪽으로 15리 떨어
진 곳이며, 논에 17섬의 볍씨를 뿌린다.
<산저제(山底堤)> 보문평(普門坪)에 있다. 경주부 동쪽으로 10리 떨어진 곳이며,
논에 5섬의 볍씨를 뿌린다.
<대지제(大枝堤)> 개이동(開伊洞)에 있다. 경주부 동쪽으로 40리 떨어진 곳이며,
논에 100섬의 볍씨를 뿌린다.
<덕방제(德方堤)> 구어역(仇於驛)에 있다. 경주부 동쪽으로 50리 떨어진 곳이며,
논에 100섬의 볍씨를 뿌린다.
<사근교신제(沙斤橋新堤)> 석을지촌(石乙只村)에 있다. 경주부 동쪽으로 45리 떨
어진 곳이다.【논에 15섬의 볍씨를 뿌린다.】
<배제(排堤)>【오금촌(五琴村)에 있다. 경주부 동쪽으로 40리 떨어진 곳이며, 논
에 14섬의 볍씨를 뿌린다.】
<五里堤> 在末方村 府東距四十里 水田落種九石 ○<長古堤> 在輪火里 府東距四十
里 水田落種十三石 ○<大鳥堤> 在開伊洞陵旨村 府東距四十里 水田落種十七石 ○
<長山堤> 在開伊洞陵旨村 府東距三十五里 水田落種十七石 ○<影堤> 在防禦旨里 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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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距三十里 水田落種二十三石 佛國寺相距十里許 而寺之後山樹木及佛宇丹雘無不照暎
故名 ○<許永堤> 在仇賊里 府東距三十里 水田落種七石 ○<朝驛堤> 在朝驛 府東距
三十里 水田落種八十五石 ○<吐上堤> 在吐上村 府東距四十里 水田落種九十七石 ○
<筍堤> 在防禦旨里 府東距三十里 水田落種十七石 ○<伏頭堤> 在朝驛 府東距三十里
水田落種十九石 ○<風登堤> 在阿倍洞 府東距二十五里 水田落種十八石 ○<堂祀堤>
在仇賊里 府東距三十五里 水田落種二十二石 ○<釜堤> 在坪里 府東距二十里 水田落
種十九石 ○<筍堤> 在於伊洞 府東距二十里 水田落種五十三石 ○<書出堤> 在金鰲山
東麓 府東距十五里 水田落種十七石 ○<山底堤> 在普門坪 府東距十里 水田落種五石
○<大枝堤> 在開伊洞 府東188)距四十里 水田落種一百石 ○<德方堤> 在仇於驛 府東
距五十里 水田落種一百石 ○<沙斤橋新堤> 在石乙只村 府東距四十五里【水田落種十
五石】 ○<排堤>【在五琴村 府東距四十里 水田落種十四石】
없어진 방죽[廢堤]
<서면(西面)> 봉성제(奉城堤), 소산제(小山堤), 광지제(光地堤)
<읍내(邑內)> 와와제(瓦臥堤), 배반제(排班堤)
<남면(南面)> 거물동제(巨勿洞堤), 남의일제(南宜一堤), 묵장제(墨匠堤), 월남소제
(月南小堤)
<천북(川北)> 모장제(毛莊堤), 무과제(武科堤), 승삼외제(僧三外堤), 말승외제(末承
外堤)
<안강현(安康縣)> 저동제(苧洞堤), 구지일제(仇之一堤), 금성제(金城堤), 초제(草
堤)
<신광현(神光縣)> 윤화내제(輪火乃堤), 신제(新堤), 쌍계제(雙溪堤)
<북안곡현(北安谷縣)> 적지제(赤池堤), 천와제(阡臥堤), 양이제(亮移堤), 발산제(鉢
山堤)
<기계현(杞溪縣)> 물두지제(勿豆只堤), 고통곡제(古通谷堤)
<西面> 奉城堤 小山堤 光地堤 ○<邑內> 瓦臥堤 排班堤 ○<南面> 巨勿洞堤 南宜
一堤 墨匠堤 月南小堤 ○<川北> 毛莊堤 武科堤 僧三外堤 末承外堤 ○<安康> 苧洞
堤 仇之一堤 金城堤 草堤 ○<神光> 輪火乃堤 新堤 雙溪堤 ○<北安谷> 赤池堤 阡臥
堤 亮移堤 鉢山堤 ○<杞溪> 勿豆只堤 古通谷堤
각방(各坊)
읍내(邑內)
<6방(坊)> 좌우도(左右道)ㆍ황오리(皇五里)ㆍ성남(城南)ㆍ성내(城內)ㆍ사정(沙正)
188) 중간본에는 北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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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황남(皇南)이다. 이상 여섯 방에는 검독관(檢督官) 1명, 유사(有司) 1명, 권농(勸
農)을 각 1명씩 두었다.
<六坊> 左右道 皇五里 城南 城內 沙正 皇南 以上六坊 檢督官一人 有司一人 勸農
各一人
동면(東面)
<노동(路東) 3방> 사리(沙里)에서 능지(陵旨)까지가 내방(內坊), 도음방동(道音方
洞)에서 하신(下薪)까지가 외방(外坊), 괘릉(掛陵)에서 용가산(龍加山)까지가 빈자(賓
子)이다.
<노서(路西) 2방> 입곡(入谷)에서 구어역(仇於驛)까지가 1방, 사일(沙日)에서 냉
천(冷川)까지가 1방이다. 이상 동면에는 검독관 1명, 노동(路東)과 노서(路西)에 유
사 각 1명, 매방마다 권농을 각 1명씩 두었다.
<路東三坊> 自沙里至陵旨爲內坊 自道音方洞至下薪爲外坊 自掛陵至龍加山爲賓子
○<路西二坊> 自入谷至仇於驛爲一坊 自沙日至冷川爲一坊 以上東面 檢督官一人 路
東東路西 有司各一人 每坊 勸農各一人
동해변(東海邊)
<2방> 감포(甘浦)에서 구지(仇之)까지가 1방, 내아(乃兒)에서 이견대(利見臺)까지
가 1방이다. 이상에는 검독관 1명, 창감관(倉監官)을 예겸(例兼)한 유사(有司) 2명,
권농 2명을 두었다.
<二坊> 自甘浦至仇之爲一坊 自乃兒至利見臺爲一坊 以上 檢督官一人 倉監官例兼有
司二人 勸農二人
남면(南面)
<노동 2방> 월남(月南)에서 화곡(花谷)까지가 1방, 와지(臥旨)에서 박달(朴達)까
지가 1방이다.
<노서 2방> 비을지(非乙只)에서 소야(所也)까지가 1방, 잉보(仍甫)에서 차동(次
洞)까지가 1방이다. 이상 남면에는 검독관 1명, 노동과 노서에 유사 각 1명, 매방마
다 권농을 각 1명씩 두었다.
<路東二坊> 自月南至花谷爲一坊 自臥旨至朴達爲一坊 〇<路西二坊> 自非乙只至所
也爲一坊 自仍甫至次洞爲一坊 以上南面 檢督官一人 路東路西 有司各一人 每坊 勸農
各一人
서면(西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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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2방> 대곡(大谷)에서 부운(浮雲)까지가 1방, 군곡(裙谷)에서 사화랑(沙火
郞)까지가 1방이다.
<노서 2방> 고천(古川)에서 신평(新平)까지가 1방, 도음곡(刀音谷)에서 의곡(義
谷)까지가 1방이다. 이상 서면에는 검독관 1명, 노동과 노서에 유사 각 1명, 매방마
다 권농을 각 1명씩 두었다.
<路東二坊> 自大谷至浮雲爲一坊 自裙谷至沙火郞爲一坊 〇<路西二坊> 自古川至新
坪爲一坊 自刀音谷至義谷爲一坊 以上西面 檢督官一人 路東路西 有司各一人 每坊 勸
農各一人
천북(川北)
<2방> 고양(高陽)에서 모아(毛兒)까지가 1방, 금장대(金藏臺)에서 견곡(見谷)까지
가 1방이다. 이상에는 검독관 1명, 유사 1명, 매방마다 권농을 각 1명씩 두었다.
<二坊> 自高陽至毛兒爲一坊 自金藏臺至見谷爲一坊 以上 檢督官一人 有司一人 每
坊 勸農各一人
안강현(安康縣)
<강동(江東) 3방> 모서평(毛西坪)에서 호명(虎鳴)까지가 1방, 오금(五琴)에서 유
금(有今)까지가 1방, 양좌동(良佐洞)에서 다질촌(多叱村)까지가 1방이다.
<강서(江西) 3방> 사방(士坊)에서 갑산(甲山)까지가 1방, 근곡(根谷)에서 옥산(玉
山)까지가 1방, 산대방(山臺坊)에서 사리동(沙里洞)까지가 1방이다. 이상 안강현에는
좌수(座首) 1명, 창감관을 예겸하여 강동(江東)·강서(江西)를 겸찰(兼察)하는 별감(別
監) 2명, 검독관 2명이 별감을 예겸하고, 또 유사 2명을 두어 강동과 강서를 나누
어 관장하고, 매방마다 권농을 각 1명씩 두었다.
<江東三坊> 自毛西坪至虎鳴爲一坊 自五琴至有今爲一坊 自良佐洞至多叱村爲一坊
〇<江西三坊> 自士坊至甲山爲一坊 自根谷至玉山爲一坊 自山臺坊至沙里洞爲一坊 以
上安康縣 座首一人 倉監官例兼兼察江東西別監二人 檢督官二人別監例兼 又有有司二
人 分掌江東西 每坊 勸農各一人
신광현(神光縣)
<전부 1방이다> 좌수 1명, 창감관을 예겸한 별감 1명, 검독관 1명, 별감을 예겸
한 유사와 권농을 각 1명씩 두었다.
<合爲一坊> 座首一人 倉監官例兼別監一人 檢督官一人 別監例兼有司勸農各一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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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현(杞溪縣)
<3방> 현내(縣內)에서 개동(介洞)까지가 1방, 와읍지(臥邑旨)에서 지거곡(只擧谷)
까지가 1방, 고통곡(古通谷)에서 대사동(大寺洞)까지가 1방이다. 이상에 좌수 1명,
창감관을 예겸한 별감 1명, 검독관 1명, 별감을 예겸한 유사 1명, 매방마다 권농을
각 1명씩 두었다.
<三坊> 自縣內至介洞爲一坊 自臥邑旨至只擧谷爲一坊 自古通谷至大寺洞爲一坊 以
上 座首一人 倉監官例兼別監一人 檢督官一人 別監例兼有司一人 每坊 勸農各一人
죽장현(竹長縣)
<전부 1방이다> 좌수 1명, 창감관을 예겸한 검독관 1명, 좌수를 예겸한 유사와
권농을 각 1명씩 두었다.
<合爲一坊> 座首一人 倉監官例兼檢督官一人 座首例兼有司勸農各一人
북안곡현(北安谷縣)
<2방> 현내(縣內)에서 천경(天境)까지가 1방, 대창(大昌)에서 저연(楮硯)까지가 1
방이다. 이상에 좌수 1명, 별감 1명, 검독관 1명, 좌수를 예겸한 유사 1명, 매방마
다 권농을 각 1명씩 두었다.
<二坊> 自縣內至天境爲一坊 自大昌至楮硯爲一坊 以上 座首一人 別監一人 檢督官
一人 座首例兼有司一人 每坊 勸農各一人
각동(各同)
【영남(嶺南)의 여러 읍에서 해마다 서원(書員)이 관장하는 구역을 나눈 것 ‘동
(同)’이라 한다.嶺南諸邑 年分書員所掌189)之界限謂之同】
남문(南門) 밖 길 동쪽에서 배반(排班)까지가 부동초(府東初)이다.
동방동(東方洞)에서 상신리(上薪里)까지가 이동초(二同初)이다.
능지(陵旨)에서 윤화리(輪火里)까지가 이동이(二同二)이다.
입곡(入谷)에서 구어역(仇於驛)까지가 삼동초(三同初)이다.
한천(寒川)에서 남산신리(南山新里)까지가 삼동이(三同二)이다.
장기현(長鬐'縣) 경계에서 범곡리(凡谷里)까지가 동해변사동초(東海邊四洞初)이다.
이견대(利見臺)에서 이십내리(二十乃里)까지가 사동이(四同二)이다.
내아리(乃兒里)에서 월내동(月乃洞)까지가 오동(五同)이다.
남문(南門) 밖 길 서쪽에서 용장리(茸長里)까지가 부남초(府南初)이다.
189) 중간본에는 堂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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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분로(犬墳路) 서쪽에서 초동(草洞)까지가 이동초(二同初)이다.
비을지(非乙只)에서 수중내(守中乃)까지가 이동이(二同二)이다.
전읍(錢邑)에서 언양계(彦陽界)까지가 이동삼(二同三)이다.
마등오(馬等烏)에서 천룡사(天龍寺)까지가 삼동(三同)이다.
북문(北門) 밖에서 밀이(密耳)까지가 부서초(府西初)이다.
부운(浮雲)에서 도질동(道叱洞)까지가 이동초(二同初)이다.
고천(古川)에서 도음곡(道音谷)까지가 이동이(二同二)이다.
도음곡(道音谷)에서 감존(甘存)까지가 삼동(三同)이다.
동천(東川)에서 물천리(勿川里)까지가 부북초(府北初)이다.
갈곡(葛谷)에서 무장(䥐7藏)까지가 이동초(二同初)이다.
금장대(金藏臺)에서 서풍정(西風亭)까지가 이동이(二同二)이다.
인자화(引自火)에서 중명동(重明洞)까지가 안강현(安康縣)의 동초(東初)이다.
모아(毛兒)에서 사방(士坊)까지가 남이동(南二同)이다.
호명(虎鳴)에서 대동(大洞)까지가 남초(南初)이다.
근곡(根谷)에서 두리동(豆里洞)까지가 서초(西初)이다.
산대방(山臺坊)에서 노당(魯堂)까지가 북초(北初)이다.
양좌동(良佐洞)에서 다질촌(多叱村)까지가 북이동(北二同)이다.
신광현(神光縣) 안에서 마조(麻助)까지가 일동(一同)이다.
기계현(杞溪縣) 안에서 척현(尺峴)까지가 동초(東初)이다.
화미말(禾尾末)에서 가천(駕川)까지가 남서면(南西面)이다.
지가곡(芝歌谷)에서 대사동(大寺洞)까지가 북면(北面)이다.
죽장현(竹長縣) 상감곡(上甘谷)에서 하감곡(下甘谷)까지가 일동(一同)이다.
북안곡(北(安谷) 오리동(五里洞)에서 수성동(水城洞)까지가 초동(初同)이다.
저연(楮硯)에서 대창(大昌)까지가 이동(二同)이다. 【이상 33동이다.】
自南門外路東至排班爲府東初 〇自東方洞至上薪里爲二同初 〇自陵旨至輪火里爲二
同二 〇自入谷至仇於驛爲三同初 〇自寒川至南山新里爲三同二 〇自長鬐'地境至凡谷里
爲東海邊四同初 〇自利見臺至二十乃里爲四同二 〇自乃兒里至月乃洞爲五同 〇自南門
外路西至茸長里爲府南初 〇自犬墳路西至草洞爲二同初 〇自非乙只至守中乃爲二同二
〇自錢邑至彥陽界爲二同三 〇自馬等烏至天龍寺爲三同 〇自北門外至密190)耳爲府西初
〇自浮雲至道叱洞爲二同初 〇自古川至道音谷爲二同二 〇自道音谷至甘存爲三同 〇自
東川至勿川里爲府北初 〇自葛谷至䥐'藏爲二同初 〇自金藏臺至西風亭爲二同二 〇自引
自火至重明洞爲安康東初 〇自毛兒至士坊爲南二同 〇自虎嗚至大洞爲南初 〇自根谷至
豆里洞爲西初 〇自山臺坊至魯堂爲北初 〇自良佐洞至多叱村爲北二同 〇自神光縣內至
麻助爲一同 〇自杞溪縣內至尺峴爲東初 〇自禾尾末至駕川爲南西面 〇自芝歌谷至大寺
洞爲北面 〇自竹長縣上甘谷至下甘谷爲一同 〇自北安谷五里洞至水城洞爲初同 〇自楮
硯至大昌爲二同 【以上三十三同】
190) 중간본에는 蜜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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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환(名宦)
고려(高麗)
<위영(魏英)> 태조(太祖) 18년(935) 12월에 신라 경순왕(敬順王)이 항복하니, 그
국도(國都)를 경주(慶州)로 하여 그대로 식읍(食邑)으로 주고 위영을 주장(州長)으로
삼았다.
<정극영(鄭克永)> 인종(仁宗) 때 유수(留守)를 지냈다.
<최호(崔顥)> 정종(靖宗) 때 부유수(副留守)를 지냈다. 판관(判官) 나지열(羅旨說),
사록(司錄) 윤염(尹廉), 장서기(掌書記) 정공한(鄭公翰) 등과 함께 전한서(前漢書) ,
후한서(後漢書) , 당서(唐書) 를 판각하여 바치니, 각각 벼슬과 상을 하사하였다.
<채정(蔡靖)> 장서기(掌書記)로 있으면서 청렴한 덕이 있었다. 그 후 동경(東京)
사람들이 영주(永州) 사람들과 함께 난을 일으키자 조정에서 안무사(安撫使)를 파견
할 것을 논의하였으나 적임자를 찾기 어려웠다. 동경 사람들이 채정을 사모하여 마
지않는다는 말을 듣고, 마침내 채정을 유수부사(留守副使)로 임명하였다. 그가 단기
(單騎)로 부임하니, 동경 사람들이 그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반심(反心)을 품은 자
들이 모두 안정되었다.
<엄수안(嚴守安)> 판관(判官)으로 있을 때 원종(元宗)이 원(元) 나라에서 군사를
청하여 와서 고도(古都)를 수복하려 하니, 임유무(林惟茂)가 항거하고자 하여 야별
초(夜別抄)로 하여금 백성을 달래어 해도(海島)와 산성(山城)에 들어가 보전하게 하
였다. 별초(別抄) 9명이 금주(金州)에 이르자, 엄수안이 안렴사(安廉使) 최유(崔儒)
에게 말하기를, “권신(權臣)의 말을 듣고 경솔하게 백성을 동원해서는 안 됩니다.
마땅히 별초를 체포하여 변란에 대비해야 합니다.” 하니, 최유가 그의 말대로 별초
를 가두었다. 얼마 안 되어 임유무가 죽임을 당하자 온 지방이 평온해졌다. 삼별초
(三別抄)가 반란을 일으켜 진도(珍島)에 웅거하고 주와 현에 격문(檄文)을 보내어
백성으로 하여금 모두 진도로 들어오게 하고, 또 별초를 가둔 자는 죄를 주겠다고
공언하니, 금주(金州)의 수령 이주(李柱)가 두려워하여 도망하였다. 엄수안이 임시로
금주의 일을 맡아 보며 민심을 위안(慰安)하였다. 밀성(密城) 사람들이 수령을 죽이
고 반란을 일으키자, 안렴사 이숙진(李淑眞)이 변란을 듣고 금주로 달아났다. 적이
그를 찾았으나 잡지 못했다. 엄수안이 금주 수령 김훤(金晅)과 더불어 논의하여 군
사를 정돈해 이숙진을 도와 적을 토벌할 것을 계획하니, 적이 이를 듣고 그 괴수의
목을 잘라 가지고 와서 항복하였다.
<권단(權㫜')> 유수 시절 예로부터 고을에 창고 하나가 있었는데, 백성에게 비단
과 명주를 부과하여 저장해 두고, 이름을 갑방(甲坊)이라 하였다. 공납(貢納)으로 충
당하고도 매우 많이 남았는데, 모두 유수가 차지하였다. 권단은 갑방을 철폐하고 1
년 수입으로 3년의 공납을 지출했다. 사호(司戶) 중에 백성의 세금을 도둑질한 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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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아 관청 뜰에서 머리를 부수어 죽이니, 보는 사람들이 벌벌 떨었다. 충렬왕(忠烈
王) 초기에 불러들여 전리총랑(典理摠郞)에 임명하였다.
<최성지(崔誠之)> 관기(管記)를 지냈다.
<안유(安裕)> 유수를 지냈다.
<안석(安碩)> 공민왕(恭愍王) 때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임명되니, 스스로 자기를
알아주는 임금을 만났다 여겨 아는 것을 다 말하니, 임금은 그가 사정(事情)에 어둡
다고 여겼다. 안석은 이에 어머니가 연로하다는 이유로 군수(郡守)가 되기를 청해,
외직으로 나가 계림윤(雞7林尹)이 되었다. 시호(謚號)는 문경(文敬)이다.
<윤선좌(尹宣佐)> 처음에 한양 부윤(漢陽府尹)이 되니, 왕이 좌우 신하들에게 이
르기를, “윤 부윤(尹府尹)이 청렴하고 검소하여 목민관(牧民官)을 시킨 것이다.” 하
였다. 뒤에 왕이 수령(守令)을 직접 뽑게 되었는데, 계림윤(雞'林尹)의 차례가 되자
붓을 멈추고 생각하기를, “조신(朝臣)들이 조정에 가득해도 윤 부윤(尹府尹) 만한
사람이 없다.” 하고, 즉시 계림윤으로 선정하였다.
<魏英> 太祖十八年十二月 新羅敬順王來降 以國爲慶州 仍爲食邑 以魏英爲州長 〇
<鄭克永> 仁宗朝留守 〇<崔顥> 靖宗時 爲副留守 與判官羅旨說司錄尹廉掌書記鄭公
翰等 刻前後漢書唐書以進 各賜職賞 〇<蔡靖> 爲掌書記 有淸德 其後東京與永州作亂
朝延議遣安撫使 難其人 聞東京人思靖不已 乃拜靖留守副使 單騎之任 東京人聞其至
反側悉安 〇<嚴守安> 爲判官 元宗自元請兵而來 將復古都 林惟茂欲拒之 令夜別抄諭
人民 入保海島山城 別抄九人至金州 守安告按廉崔儒曰 不可聽權臣之言 輕動百姓 宜
執別抄待變 儒從之 囚別抄 未幾 惟茂誅 一方晏然 及三別抄叛 據珍島 傳檄州縣 令民
皆入珍島 又聲言囚別抄者罪之 金州守李柱懼而逃 守安權知州事 慰安民心 密城人殺其
宰以叛 按廉李淑眞聞變奔金州 賊搜不獲 守安與金州守金晅謀 勒兵挾淑眞爲討賊計 賊
聞之 斬其魁以降 〇<權㫜7> 爲留守 舊有一庫 賦民綾羅貯之 名甲坊 充貢獻 贏7餘甚多
皆爲留守所私 㫜7撤甲坊 以一年所收 支三年貢 司戶有盗民租者 碎其腦于庭 觀者股慄
忠烈初 徵拜典理摠郞 〇<崔誠之> 爲管記 〇<安裕> 爲留守 〇<安碩> 恭愍王時 拜
政堂文學 自謂知遇 知無不言 上以爲闊於事情 碩乃以母老請郡 出尹鶏林 謚文號 〇
<尹宣佐> 初爲漢陽尹 王謂左右曰 尹尹淸儉 故使牧民 後王親注守令 至鶏林尹 輟筆
思曰 朝臣盈庭 無如尹尹 即'注之
<전록생(田禄生)> 판관(判官)을 지냈다.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爲判官 李益齋詩
전랑이 우리 계림의 판관이 되었더니 田郞作倅'吾鷄林
부로들이 지금까지 깨끗한 덕을 그리워하네 父老至今懷淸德
<이무방(李茂芳)> 공민왕(恭愍王) 때 부윤을 지냈다. 일찍이 대 기근이 들었었는
데 이무방이 부임하자 마침 풍년이 들었다. 이무방이 백성의 편의를 따라 어염(魚
鹽)을 판매해 의창(義倉)을 설치하여 진대(賑貸)할 것을 마련하였다.
<이성공(李成功)> 유수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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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인렬(禹仁烈)> 부윤을 지냈다.
<정세운(鄭世雲)> 유수를 지냈다.
<유숙(柳淑)> 유수를 지냈다.
<최형(崔瑩)ㆍ배천경(裵天慶)> 모두 부윤을 지냈다.
<나익희(羅益禧)> 부윤을 지냈다. 쳥렴하고 근면하며 자혜로와 남방(南方) 백성들
이 칭송하였다.
<안보(安輔)ㆍ조운흘(趙云仡> 모두 부윤을 지냈다.
<李茂芳> 恭愍朝 爲府尹 初歲大饑 及茂芳至 適歲稔 茂芳因民之便 販魚鹽 置義倉
以備賑貸 〇<李成功> 爲留守 〇<禹仁烈> 爲府尹 〇<鄭世雲> 爲留守 〇<柳淑> 爲
留守 〇<崔瑩> 〇<裵天慶> 俱爲府尹 〇<羅益禧> 爲府尹 廉勤慈惠 南方稱頌之 〇
<安輔> <趙云仡 俱爲府尹
본조(本朝)
<고거정(高居正)ㆍ함부림(咸傅霖)ㆍ권극화(權克和)ㆍ유관(柳觀)ㆍ이호성(李好誠)ㆍ
김담(金淡)ㆍ최선복(崔善復)ㆍ유규(柳規)ㆍ이약동(李約東)> 모두 부윤을 지냈다.
<조달생(趙達生)> 판관을 지냈다.
<양순석(梁順石)> 학교를 일으키고 백성을 사랑하였다.
<이세필(李世弼)ㆍ최응현(崔應賢)> 학교를 힘써 일으켰다.
<허계(許誡)> 정사를 한 것이 깨끗하고 간결하였다.
<황맹헌(黃孟獻)> 모두 부윤을 지냈다.【이상은 여지승람(輿地勝覽) 에 나온다.】
|신증新增 �
<이현보(李賢輔)> 부윤을 지냈으며, 호는 농암(聾巖)이다. 치적(治績)이 있어 비석
을 세워 덕을 칭송했는데, 난(亂)을 겪으면서 비석이 없어졌다.
<유지선(柳智善)> 선정비(善政碑)가 있다.
<이몽필(李夢弼)> 선정비가 있다.
<이정(李楨)> 호는 귀암(龜巖)이다. 큰소리 한번 내지 않고 노기(怒氣) 한번 띄우
지 않고도 백성들이 저절로 교화되었다. 학문을 일으키고 교육을 확립하는 것을 제
일의 급선무로 삼아 서악서원(西岳書院)을 창립하니, 선비와 백성들이 세월이 오래
될수록 더욱 잊지 못하여 비를 세워 덕을 칭송하였다.
<이현배(李玄培)> 선정비가 있다.
<구사맹(具思孟)> 호는 팔곡(八谷)으로, 치적이 있다.
<황윤길(黃允吉)>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 에 보인다.
<이시발(李時發)> 선정비가 있다.
<이시언(李時彦)> 선정비가 있다.
<이안눌(李安訥)> 청덕비(淸德碑)가 있다.
<권첩(權怗> 벼슬 중에 죽었다. 청덕비와 선정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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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길(呂祐吉)> 청덕비가 있다.
<윤의립(尹毅立)> 선정비가 있다.
<전식(全湜)> 호는 사서(沙西)이다. 학식으로 일컬어졌으며, 유애비(遺愛碑)가 있
다.
<민기(閔機)> 창덕비가 있다.
<박서(朴遾�)> 유애비가 있다.
<엄정구(嚴鼎耈)> 선정비가 세 곳에 세워져 있다.
<방위(方瑋)> 판관을 지냈으며, 청덕(淸德)이 있어 비를 세워주었다.
<高居正> <咸傅霖> <權克和> <柳觀> <李好誠> <金淡> <崔善復> <柳規> <李約
東> 俱爲府尹 〇<趙達生> 爲判官 〇<梁順石> 興學愛民 〇<李世弼> 〇<崔應賢> 務
興學校 〇<許誡> 爲政淸簡 〇<黃孟獻> 俱爲府尹 【以上出輿地勝覽191)】 �新增 � 〇
<府尹李賢輔> 號聾巖 有政績 立碑頌德 而經亂失碑 〇<柳智善> 有善政碑 〇<李夢
弼> 有善政碑 〇<李楨> 號龜巖 不動聲色而民自化 以興學立敎爲第一務 創立西岳書
院 士民愈久不忘 立碑頌德 〇<李玄培> 有善政碑 〇<具思孟> 號八谷 有治績 〇<黃
允吉> 見海東名臣錄 〇<李時發> 有善政碑 〇<李時彦> 有善政碑 〇<李安訥> 有淸
德碑 〇<權怗 卒于官 有淸德善政碑 〇<呂祐吉> 有淸德碑 〇<尹毅立> 有善政碑
〇<全湜> 號沙西 以學識稱 有遺愛碑 〇<閔機> 有淸德碑 〇<朴遾�> 有遺愛碑 〇<嚴
鼎耈> 有善政碑立於三處 〇<方瑋> 爲判官 有淸德 立碑
인물(人物)
신라(新羅)
<물계자(勿稽子)> 내해왕(奈解王) 때 사람이다. 골포(骨浦)ㆍ칠포(漆浦)ㆍ고포(古
浦) 세 나라가 신라의 갈화성(竭火城)을 공격하자 왕이 병사를 거느리고 구원하여
적군을 대파했다. 물계자가 수십여 명의 머리를 베었으나 논공(論功)할 때 책록되지
못하자, 아내에게 말하기를, “신하된 도리로 위급한 것을 보고는 목숨을 바치고 난
(亂)에 임해서는 자기 몸을 잊어야 하는 것이오. 지난날 포상(浦上)의 갈화 전투는
위급하고 어려웠다 할 수 있는데 목숨을 바치고 일신을 잊고서 싸웠다고 사람들에
게 알려지지 못했으니, 불충한 것이오. 불충한 몸으로 임금을 섬겨 선조에게 누를
끼치게 되었으니, 효도라 할 수 있겠소? 충효의 도리를 잃고서 무슨 면목으로 조정
에 설 수 있겠소” 하고, 드디어 거문고를 가지고 사체산(師彘7山)으로 들어가 돌아
오지 않았다.
<석우로(昔于老)> 내해왕(奈解王)의 아들이며 흘해왕(訖解王)의 아버지이다. 조분
왕(助賁王) 때 대장군(大將軍)이 되어 감문국(甘文國)을 정벌하고 그 땅을 군(郡)ㆍ
현(縣)으로 만들었다. 첨해왕(沾解王) 때 사벌국(沙伐國)이 배반하여 백제(百濟)에
191)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경상도(慶尙道)」경주부(慶州府) 명환조(名宦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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붙자, 석우로가 병사를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여 멸망시켰다. 후에 왜국(倭國) 사신
을 마주하여 모욕을 주기를, “조만간 너희 왕을 소금 만드는 종[鹽奴]으로 만들고
왕비를 밥 짓는 여자[爨'婦]로 만들겠다.” 하였다. 왜왕이 노하여 병사를 보내 쳐들
어와서 석우로를 잡아 불태워 죽였다. 미추왕(味鄒王) 때 왜국의 대신(大臣)이 내빙
(來聘)하자 석우로의 아내가 왕에게 청하여 사사로이 잔치를 베풀고는, 그가 술에
취하자 장사(將士)를 시켜 뜰로 끌어내려 불태워 죽여 전날의 원한을 갚았다.
<박제상(朴堤上)> 파사왕(婆娑王)의 5세손으로, 벼슬하여 삽량주(歃7良州) 【지금
의 양산(梁山)이다.】간(干)이 되었다. 일찍이 눌지왕(訥祗王)의 아우 복호(卜好)가
고구려(高句麗)에 볼모로 가고, 미사흔(味斯欣)이 왜국(倭國)에 볼모로 가자 왕이 이
를 근심하였다. 박제상이 고구려에 가서 복호를 맞아 돌아오고, 또 배반한 자처럼
꾸며 바다 건너 왜국에 들어가서 몰래 미사흔을 돌려보냈다. 왜왕이 노기를 띠며
힐문하니, 대답하기를,
“우리 임금의 뜻을 이루도록 했을 뿐이오.”
하였다. 왜왕이 말하기를,
“네가 계림(鷄林)의 신하라고 말하면 반드시 오형(五刑)을 갖추어 벌하겠지만, 왜
국의 신하라고 말하면 반드시 상을 주고 녹을 후하게 주겠다.”
하니, 대답하기를,
“차라리 계림의 개나 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는 되지 않겠소.”
하였다. 왜왕이 박제상의 다리를 벗기고 갈대를 베어내어 그 위를 달리게 하면서
묻기를,
“어느 나라 신하인가”
하니, 말하기를,
“계림의 신하이다.”
하였다. 또 달군 쇠 위에 서게 하고 묻기를,
“어느 나라 신하인가”
하니, 말하기를,
“계림의 신하이다.”
하며, 끝내 굽히지 않자, 드디어 목도(木島)에서 불태워 죽였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통곡하고는, 대아찬(大阿飡)에 추증하고 미사흔으로 하여금 박제상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내로 삼게 하였다.
<백결선생(百結先生)> 자비왕(慈悲王) 때 사람이다. 집안이 너무 가난해서 옷을
백 군데나 꿰매 입었기 때문에 백결선생이라 불렀다. 늘 거문고를 가지고 다니며
모든 희로애락(喜怒哀樂)을 반드시 거문고로 표현하였다. 세모(歲暮)에 이웃에서 방
아를 찧자, 그의 아내가 절구소리를 듣고는, “남들은 다 방아를 찧는데 우리만 없으
니 어떻게 해를 넘기겠습니까” 하니, 선생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명(命)에 달린 것이고, 부하고 귀한 것은 하늘에 달린 것인데, 당신은 무엇을 상심
하오” 하고는, 거문고를 타서 절구 소리를 내어 아내를 위로 하였다. 세상에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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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전하여 대악(碓7樂)이라 하였다.
<이사부(異斯夫)> 내물왕(奈勿王)의 4세손이다. 지증왕(智證王) 때 연변(沿邊)의
관리가 되어 마희(馬戱)로 가야국(伽倻國)을 빼앗았다. 후에 아슬라주(阿瑟羅州)의
군주(軍主)가 되었다. 우산(于山) 【지금의 울릉도(鬱陵島)이다.】 사람들이 어리석
고 사나워서 위엄으로 귀부(歸附)시키기가 어려우니 계교로 굴복시켜야겠다고 생각
하여, 나무로 사자의 형상을 많이 만들어 전선(戰船)에 나누어 싣고 그 섬으로 가
서, 거짓으로 말하기를, “너희가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 즉시 이 짐승을 풀어놓아 밟
아 죽게 할 것이다.” 하니, 그 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곧 항복하였다.
<사다함(斯多含)> 내물왕의 7세손이다. 풍채가 맑고 빼어났으며 의지와 기개가
방정하여 당시 사람들이 화랑(花郞)으로 추대하니, 그의 낭도(郎徒)가 몇천 명이 되
었다. 진흥왕(眞興王)이 이사부(異斯夫)에게 가야국(伽倻國)을 정벌하도록 명하자,
사다함이 종군(從軍)하기를 청하여 드디어 그 나라를 멸망시켰다. 왕이 그의 공을
책록(策錄)하고 가야 사람들을 노비로 하사하자, 사다함이 받고 나서 모두 풀어주었
다. 또 전원(田園)을 하사하였는데 사양하였다. 왕이 강권하자, 알천(閼川)의 불모지
를 받겠다고 하였다.
<검군(劍君)> 대사(大舎) 구문(仇文)의 아들로, 사량궁(沙梁宮) 사인(舎人)이 되었
다. 당시 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자식을 팔아 먹고사는 상황이었다. 궁중의 사인들이
창예창(唱翳7倉)의 곡식을 훔쳐서 나누어 가졌는데 검군이 홀로 받지 않자, 사인들이
그가 누설할까 두려워서 몰래 음식에 독을 넣어 죽였다.
<거칠부(居漆夫)> 내물왕의 5세손이다. 젊어서 방자했으나 원대한 뜻이 있어 머
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고구려의 경내에 들어가 중 혜량(惠亮)을 찾아뵈니, 혜량이
손을 잡고 은밀히 말하기를, “그대는 제비 턱에 호랑이 눈을 지녔으니 앞으로 틀림
없이 장수가 될 것이오. 이 나라가 비록 작지만 사람을 볼 줄 아는 사람이 없다고
는 할 수 없으니 그대가 잡힐까 두렵소. 빨리 돌아가야 할 것이오.” 하여, 거칠부가
신라로 돌아갔다. 진흥왕(眞興王) 때에 왕명으로 거칠부 등 8명의 장군이 고구려를
침략하여 죽령(竹嶺) 밖의 10군(郡)을 빼앗았다. 혜량이 나와서 길에서 뵈니, 수레
에 함께 타고 돌아왔다. 관직이 상대등(上大等)에 이르렀다.
<실혜(實兮)> 대사(大舍) 순덕(純德)의 아들이다. 성품이 강직하고 정도(正道)를
지켜 구차하지 않았다. 왕의 총애하는 신하 진제(珍提)가 여러 번 왕에게 참소하자,
영림(泠7林)의 관원으로 좌천시켰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그대는 할아버지 때부
터 충성(忠誠)으로 당대에 알려졌는데, 이제 아첨하는 신하에게 모함을 받아 멀리
죽령 밖으로 좌천되는데도 어째서 직언(直言)으로 해명하지 않으시오” 하니, 실혜
가 대답하기를, “옛날에 굴원(屈原)도 홀로 강직했기 때문에 배척당했소이다. 옛날
부터 그런 것이거늘 슬퍼할 게 뭐 있겠습니까” 하였다. 결국 해명하지 않고 돌아
가 장가(長歌)를 지어 그의 뜻을 나타내었다.
<김후직(金后稷)> 진평왕(眞平王) 때 사람이다. 왕이 사냥을 좋아하여 후직이 간
절히 간했으나 듣지 않았다. 죽을 때 그의 아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남의 신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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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어서 임금의 나쁜 점을 바로잡지 못했으니, 내가 죽거든 꼭 임금이 사냥다니는
길가에 묻어다오.” 하였다. 그의 아들이 그대로 따랐다. 훗날 왕이 사냥을 나가는데
마치 “임금님 가지 마십시오.”라는 소리가 나는 듯하였다. 왕이 돌아보며 물으니,
시종이 “김후직의 묘입니다.” 하고, 드디어 임종할 때의 말을 진달하였다. 왕이 눈
물을 줄줄 흘리고는 종신토록 다시는 사냥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이것을 ‘묘간(墓
諫)’이라 하였다.
<해론(奚論)> 모량(牟梁) 사람이다. 그의 아버지 찬덕(贊德)은 용맹한 뜻과 뛰어
난 절개로 당대에 이름이 높아, 진평왕이 가잠성(椵岑城)의 영(令)으로 선발하였다.
백제가 대대적으로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오자 찬덕이 사졸들에게 말하기를, “의리
없이 사는 것은 의리 있게 죽는 것만 못하다.” 하고는 곧 기세를 올려 분발하고 격
려하여 싸우면서 성을 지켰다. 양식과 물이 다 떨어졌는데도 시체를 뜯어먹고 오줌
을 마셔가며 지치지 않고 힘껏 싸웠으나 성이 함락당하게 되자, 하늘을 우러러 크
게 부르짖기를, “우리 임금님께서 내게 이 성을 맡겼는데 보존할 수가 없습니다. 원
컨대 죽어서 큰 악귀(惡鬼)가 되어 백제 사람들을 잡아먹고 이 성을 수복하게 해주
소서.” 하고, 마침내 양팔을 휘두르며 눈을 부릅뜨고 홰나무로 달려가 부딪혀 죽었
다. 해론은 나이 20여 세에 아버지의 공으로 대내마(大奈麻)가 되었다. 그 후 왕이
해론에게 명하여 금산당주(金山幢主)로 삼아 한산주도독(漢山州都督) 변품(邊品)과
함께 가잠성을 습격하여 빼앗게 했다. 백제가 이 소식을 듣고 군사를 일으켜 쳐들
어오자, 해론 등이 이를 맞아 싸웠다. 병사들이 교전(交戰)하자, 해론이 장수들에게
이르기를, “예전에 우리 아버지께서 이곳에서 운명하셨는데 내가 지금 역시 백제
사람들과 이곳에서 싸우게 되었으니, 이날이 바로 내가 죽는 날이오.” 하고는, 드디
어 짧은 병기를 가지고 적진으로 달려가 여러 사람을 죽이고 죽었다. 왕이 이 소식
을 듣고 눈물을 흘렸으며, 당시 사람들도 애도하지 않는 이가 없어서 장가(長歌)를
지어 애도하였다.
<눌최(訥催)> 대내마(大奈麻) 도수(都水)의 아들이다. 백제의 병사들이 봉잠(烽岑)
ㆍ기현(旗懸)ㆍ혈책(穴柵)의 세 성으로 쳐들어오자, 눌최가 굳게 지키며 구원병을
기다렸으나 이르지 않자, 비분강개하여 눈물을 흘리며 사졸들에게 말하기를, “이제
고립된 성에 구원병이 없어 날로 위태로워지니, 이는 참으로 지사(志士)가 충절을
다 바칠 시점이다.” 하니, 사람들이 모두 목숨을 걸고 싸웠다. 성이 함락되자 눌최
도 죽었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슬피 통곡하고 급찬(級飡)을 추증하였다.
<온군해(温君解)> 진덕왕 6년(652)에 무열왕(武烈王)이 이찬(伊飡)으로 당 나라에
갔다가 오는 길에 해상에서 고구려의 순라병(巡邏兵)을 만났다. 시종하던 온군해가
높은 갓에 큰 옷을 입고 배 위에 앉아 있자, 순라병이 무열왕으로 생각하고 죽였다.
무열왕은 작은 배를 타고 모면할 수 있었다. 왕이 온군해에게 대아찬(大阿飡)을 추
증하고 자손에게 후하게 상을 내렸다.
<김인문(金仁問)> 자(字)는 인수(仁壽)이고, 무열왕의 둘째아들이다. 유교 서적을
많이 읽었고 겸해서 노장(老莊)이나 불교의 설을 섭렵했으며 또 예서(隸書)와 활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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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말타기에도 능했다. 나이 23세에 당 나라에 들어가 숙위(宿衛)하여 벼슬이 보국
대장군 상주국 임해군 개국공(輔國大將軍上柱國臨海郡開國公)에 이르렀다. 측천무후
(則天武后) 때 졸하자, 대의서령(大醫署令) 육원경(陸元景) 등으로 하여금 영구를 호
송하게 하였다. 효소왕(孝昭王)이 대각간(大角干)을 추증하였다.
<관창(官昌)> 장군 품일(品日)의 아들이다. 어려서 화랑이 되었으며 남과 잘 사귀
었다. 태종왕(太宗王) 때 군사를 내어 당 나라 군사들과 더불어 백제를 공격할 때
관창이 부장(副將)이 되었다. 황산(黃山) 들에 이르자 품일이 말하기를, “네가 비록
어리나 뜻과 기개가 있으니, 오늘이 바로 공명을 세울 때이다.” 하니, 관창이 “예”
하고는 즉시 말에 올라 창을 비껴 들고 적진으로 곧장 나아가 공격하여 여러 명을
죽이다가 백제 사람에게 포로가 되었다. 산 채로 원수(元帥) 계백(階伯)에게 보내지
니, 계백이 투구를 벗기게 하였다. 그리고는 그 어리고 용감함을 아껴 차마 죽이지
못하고 탄식하기를, “신라에는 기사(奇士)가 많다더니, 과연 그러하구나.” 하고 놓아
주었다. 관창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내가 적진에 들어가 장수를 목 베고 기를 빼앗
지 못한 것이 매우 한스럽다.” 하고, 우물물을 움켜 마신 뒤 재차 적진으로 돌진하
니, 계백이 사로잡아 목을 베어 말안장에 매달아 돌려보냈다. 품일이 옷소매로 피를
닦으며 말하기를, “우리 아이의 면목이 살아 있는 것 같구나. 나랏일을 위해 죽을
수 있었도다.” 하였다. 삼군(三軍)이 이를 보고 비분강개하여 북을 울리고 고함을
지르면서 나아가 백제 군사를 공격하여 크게 패배시켰다. 왕이 급찬(級飡)을 추증하
고 예로써 장사지내 주었다. 〇이첨(李詹)이 다음과 같이 변증(辨證)하였다. 을축년
(1385) 겨울에 계림(雞7林)에 객으로 갔을 때 부윤(府尹) 배천경(裵天慶)이 향악(鄕
樂)을 베풀어 위로하였는데, 가면을 쓴 동자(童子)가 뜰에서 칼춤을 추기에 물어보
았더니 이런 이야기를 하였다. 신라시대에 15,6세 가량의 황창(黃昌)이라는 아이가
있었는데 칼춤을 잘 추었다. 이 아이가 왕을 뵙고 말하기를, “신이 임금님을 위하여
백제의 왕을 쳐서 임금님의 원수를 갚겠습니다.” 하였다. 왕이 허락하자 곧 백제로
가서 시가(市街)에서 춤을 추니, 백제 사람들이 담처럼 둘러서서 구경하였다. 백제
왕이 소문을 듣고 불러들여 궁중에 이르자 춤을 추게 하고 구경하니, 황창이 그 자
리에서 왕을 쳐서 살해하고는 마침내 좌우의 신하들에게 살해되었다. 그의 어머니
는 소식을 듣고 울부짖다가 결국 실명(失明)하였다. 어떤 사람이 그 어머니를 위하
여 도로 눈을 뜨게 하려고 꾀를 내어 사람을 시켜 뜰에서 칼춤을 추게 하고는 거짓
으로 말하기를, “황창이 와서 춤을 추는구나. 전에 듣던 이야기가 거짓이었구나.”
하니, 그의 어머니가 기뻐서 눈물을 흘리자 바로 눈을 뜨게 되었다. 황창이 어린 나
이로 나랏일을 위하여 죽을 수 있었기 때문에 향악에 실려 전해 내려오는 것이라
하였다. 내가 일찍이 삼국사(三國史) 를 보니, 무릇 관직을 제수하거나 이웃 국경
을 침범한 것은 대부분 기록하였으며, 해[日]와 별, 우레나 비의 변고라든지 초목과
금수의 요괴에 이르기까지 기록하지 않은 게 없었다. 그런데 나라의 임금이 적국의
어린아이에게 살해된 것이나 동자(童子)가 적국의 임금에게 원수를 갚은 일은 다
작은 일이 아닌데 양국의 역사에 실리지 않았으니, 정말 의심스럽다. 오직 열전(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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傳)에만 황창의 일에 관한 전말이 실려 있는데, 그 충의(忠義)가 장하여 읽어 보매
사람들을 비통하게 한다. 이 아이는 틀림없이 관창일 것이니, 전해지는 것이 잘못되
었을 것이다. 무릇 적국에 대해 변란을 도모하는 자는 혹은 행상을 가장하거나 혹
은 거짓으로 죄를 지은 것으로 가장하고서 감언이설과 아첨하는 말로 속여도 더러
정상이 탄로되거나 일이 누설되어 성사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백제는 이미
신라와 적국이 되었으니, 황창이 공공연하게 병기를 가지고 번화한 사거리에 갈 수
는 없었을 것이다. 만약 과연 이랬다면 백제 사람들이 관창을 잡아 형구(刑具)를 갖
추어 심문하였을 것이니, 어찌 내버려두어 임금의 뜰에서 간악한 짓을 하도록 하였
겠는가? 이것은 인정과 사리에 맞지 않는 것이다. 내가 옛사람들 중에서 황창과 견
줄 만한 사람을 찾아 함께 논해본다면, 춘추시대 애공(哀公) 11년에 왕기(汪錡)가
애공을 위하여 수레에 탔다가 국서(國書)의 난에 함께 죽은 일을 들 수 있겠다. 공
자(孔子)는 이에 대해, “창과 방패를 잡고 사직을 보위하였으니 상(殤으로 대우하
지 않는 것이 옳다.” 하였다.192) 무릇 의(義)에 죽어 인(仁)을 이루는 것은 정말 어
려운 일인데, 동자로서 감행한 것은 오직 왕기와 관창에게서 볼 수 있다. 이야기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변증하지 않을 수 없다. 황창이 춤추는 것을 보는 이를 위하여
변증하는 것이고, 또 사서(史書)를 읽는 사람을 위하여 다른 점을 고증하는 것이다.
<勿稽子> 奈解王時人 骨浦漆浦古浦三國攻新羅竭火城 王率兵 救之 大破其師 勿稽
子斬獲數十餘級 及其論功 又不見錄 乃語妻曰 爲臣之道 見危則致命 臨亂則忘身 前日
浦上竭火之役 可謂危且難矣 而不能以致命忘身聞於人 不忠也 旣以不忠而仕君 累及於
先人 可謂孝乎 旣失忠孝 將何面立朝乎 遂携琴 入師彘7山 不返 〇<昔于老> 奈解王之
子 訖解王之父 助賁王時 爲大將軍 伐甘文國 以其地爲郡縣 沾解王朝 沙伐國背 附百
濟 于老將兵討滅之 後對倭使嫚7言曰 早晩以汝王爲鹽奴 王妃爲㸑'婦 倭王怒 遺兵來討
執于老 焼殺之 味鄒王時 倭大臣來聘 于老妻請於王 私饗之 及醉 使壯士曳下庭 焚之
以報前怨 〇<朴堤上> 婆娑王五世孫 仕爲歃'良州【今梁山】干193) 初 訥祗王弟卜好質
干麗 味斯欣質于倭 王憂之 堤上往高麗 迎卜好還 又詐爲叛者 浮海入倭國 竊遣欣還
倭王怒詰之 對曰 欲成吾君之志耳 倭王曰 汝言鶏林臣則必具五刑 若言倭國臣者 必賞
重祿 對曰 寧爲鶏林之犬㹠不爲倭國之臣子 倭王剝堤上脚 刈蒹7葭使趨其上 問曰 何
國臣乎 曰 鶏林臣 又使立於熱鐵上 問曰 何國臣乎 曰 鶏林臣 終不屈 遂焼殺木島中
王聞而慟之 贈大阿飡 使欣娶堤上女爲妻 〇<百結先生> 慈悲王時人 家極貧 衣百結
因號之 常以琴自隨 凡喜怒悲歡 必於琴宣之 歲將暮 隣里舂'粟 其妻聞杵聲曰 人皆舂7粟
我獨無 何以卒歲 先生嘆曰 死生有命 富貴在天 汝何傷乎 乃鼓琴作杵聲以慰之 世傳以
爲碓7樂 〇<異斯夫> 奈勿王四世孫 智證王時 爲沿邊官 以馬戲7取伽倻國 後爲阿瑟羅州
軍主 謂于山【今鬱陵島】人愚悍 難以威來 可以計服 乃以木多造獅子形 分載戰船 抵
其島 誑'之曰 汝若不服 即7放此獸 踏殺之 國人懼乃降 〇<斯多含> 奈勿王七世孫 風標
192) 춘추시대 노 나라 동자 왕기(汪錡)가 전쟁에서 죽었는데, 예법에 20세 미만에 죽은 것은 상(殤이라
하여 성인(成人)의 예를 쓰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공자가 “왕기가 어린아이로서 국가를 위하여
무리를 지어 싸우다가 죽었으니 성인의 예를 써도 좋다.” 하였다.
193) 중간본에는 于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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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秀 志氣方正 時人請奉爲花郞 其徒幾千人 眞興王命異斯夫伐伽倻國 多含請從軍 遂
滅其國 王策功 賜伽倻人口 多含受 已皆放 又賜田園 辭 王強之 請受閼川不毛之地 〇
<劍君> 大舎仇文之子 爲沙梁宮舎人 時値年饑 民賣子而食 宮中諸舎人盗唱翳7倉穀 分
之 劍君獨不受 舎人等懼漏洩 密置毒於食而殺之 〇<居柒夫> 奈勿王五世孫 少跅弛
有遠志 祝髮爲僧 入高句麗境 謁僧惠亮 亮握手 密言曰 汝燕頷7虎視 將來必爲將帥 此
國雖小 不可謂無知人 恐子見執 宜疾歸 柒夫還國 眞興王朝 王命柒夫等八將軍侵高句
麗 取竹嶺以外十郡 亮出謁於道 同載以歸 官至上大等 〇<實兮> 大舎純德之子 性剛
直守正不苟 嬖人珍堤屢譖'於王 謫官冷林 或謂曰 君自祖考 以忠誠聞於時 今爲佞'臣之
毀 遠宦竹嶺之外 何不直言自辨 實兮答曰 昔屈原孤直見擯自古而然 何足悲乎 遂不言
而往 作長歌以見意 〇<金后稷> 眞平王時人 王好田獵 后稷切諫 不聽 將死 語其子曰
我爲人臣 不能匡救君惡 我死須瘞於王遊田路側 其子從之 他日 王出田 中路有聲 若曰
王毋去者 王傾問之 從者曰 金后稷墓也 遂陳臨死之言 王潸7然出涕 終身不復田獵 人謂
之墓諫也 〇<奚論> 牟梁人也 其父讃e德有勇志英節 名高一時 眞平王選爲椵岑城令 百
濟大發兵來攻 讃H德謂士卒曰 與其無義而生 不若有義而死 乃激昻奮勵 且戰且守 糧盡
水渴 猶食屍飮尿 力戰不怠 城將破 仰天大呼曰 吾王委我以一城而不能全 願死爲大癘'
喫盡百濟人以復此城 遂攘臂瞋目 走觸槐樹而死 奚論年二十餘 以父功爲大奈麻 其後
王命奚論爲金山幢主 與漢山州都督邊品 襲椵岑城 取之 百濟聞之 擧兵來 奚論等逆之
兵旣相交 奚論謂諸將曰 昔吾父殞身於此 我今亦與百濟人戰於此 是我死日也 遂以短兵
赴敵 殺數人而死 王聞之流涕 時人無不哀悼 爲作長歌吊之 〇<訥催> 大奈麻都水之子
百濟兵來攻烽岑旗懸穴栅三城 訥催固守待救 兵不至 慷慨流涕 謂士卒曰 今孤城無援
日益阽危 此誠志士盡節之秋 人皆殊死戰 及城陷 訥催死 王聞之悲慟 追贈級飡 〇<温
君解> 眞德王六年 武烈王以伊飡入唐 還至海上 遇高句麗邏兵 從者温君解高冠大衣 坐
於船上 邏兵以爲武烈 殺之 武烈乘小船得兔 王贈君解大阿飡 優賞子孫 〇<金仁問>
字仁壽 武烈王第二子 多讀儒書兼涉老莊浮屠之說 又善隷書射御 年二十三 入唐宿衛
官至輔194)國大將軍上柱國臨海郡開國公 則天時卒 令大醫署令陸元景等 押送靈柩 孝昭
王追贈大角干 〇<官昌> 將軍品日之子 少爲花郞 善與人交 太宗王時 出師 與唐兵攻
百濟 昌爲副將 至黃山之野 品日謂曰 爾195)雖幼 有志氣 今日是立功名之秋 昌曰唯 即7
上馬橫槍 直擣7敵陣 殺數人 爲濟人所虜 生致之元帥階伯 階伯俾'脫冑 愛其少且勇 不忍
殺之 嘆曰 新羅多奇士 果然 及縱之 昌曰 向吾入賊陣 不能斬將搴旗 深所恨也 掬'井水
飮訖 再突陣 階伯擒斬之 繫首於馬鞍送之 品日以袖拭血曰 吾兒面目如生 能死於王事
矣 三軍見之 慷慨鼓譟進繫濟兵 大敗之 王贈級飡 以禮葬之 ○李詹辨曰 乙丑冬 客于
鶏林 府尹裵公設鄕樂以勞之 有假面童子舞劍於庭 問之云 羅代有黃昌者 年可十五六歲
善舞 此謁於王曰 臣願爲王 擊百濟王以報王之仇 王許之 則往舞於通衢 國人觀者如堵
王聞 召至宮中 使舞而觀之 昌擊王於座 殺之 遂爲左右所害 母聞號哭 遂喪明 人有爲
194) 중간본에는 補로 되어 있으나 삼국사기(三國史記) 권44 「7열전(列傳)」김인문조(金仁問條)에 輔國大
將軍으로 나와 있다.
195) 중간본에는 尒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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其母謀還明者 令人劍舞於庭 紿之曰 昌來舞矣 前言誣耳 母喜泣之 即'還明 以昌幼而能
死事 故載之 鄕樂流傳云 余嘗觀三國史矣 凡職官除拜 隣境侵伐 率皆書之 以至日星雷
雨之變 草木禽獸之妖 無不紀焉國君而見害於敵國之竪 童子而報仇於敵國之君 皆非細
事也 兩國之史不載 固可疑也 惟列傳載官昌事首末 其忠義藹7然 讀之 令人悲惋此必官
昌也 傳者誤耳 凡謀變於敵國者 或假行商 或僞得罪 誣以甘言佞7辭 或情見事洩 其不濟
者多矣 濟旣與羅爲敵國 昌不應公然持兵 往於通衢大道之中 若果如是 濟人得昌 將具
刑以訊之矣 豈使縱之 逞奸於王庭乎 此人情事理之不通者也 吾求古人之可擬官昌者幷
論 春秋哀公十一年 汪錡爲公爲之乘 偕死於國書之難 孔子曰 能執干戈 以衛社稷 可無
殤7也 夫死義成仁者固難矣 童子而敢爲者 獨見汪錡與昌耳 議論謬誤 不可不辨 爲見舞
昌者辨之 且別爲讀史者 爲考異云
<김흠운(金歆運)> 내밀왕(奈密王)의 8세손이다. 태종왕(太宗王)이 고구려와 백제
가 침범하는 것을 분통하게 여겨 이들을 치려고 도모하여 김흠운을 낭당대감(郎幢
大監)을 삼았다. 이에 백제 땅에 이르러 조천성(助川城)으로 진격하니, 백제인들이
습격하여 화살이 비오듯이 쏟아졌다. 김흠운이 말을 비껴타고 창을 움켜쥐고 대기
하고 있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적이 어둠을 타고 와 지척을 분간할 수 없으니
비록 죽더라도 알아볼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하물며 공은 신라의 귀골(貴骨)인데
만약 적의 손에 죽는다면 적에게는 다행이고 우리에겐 수치입니다.” 하니, 김흠운이
말하기를, “대장부가 이미 몸을 나라에 바쳤거늘 어찌 남이 알아주고 말고를 따지
겠는가” 하였다. 종자(從子)가 말을 끌고 피하도록 권했으나 김흠운은 칼을 휘두르
며 드디어 적진으로 돌진하여 여러 사람을 죽이고 자신도 죽었다. 당시 사람들이
‘양산가(陽山歌)를 지어서 이를 슬퍼했다.
<필부(匹夫)> 사량(沙梁) 사람이다. 태종왕이 필부로 칠중성(七重城)의 현령을 삼
았다. 이듬해(660)에 고구려가 쳐들어와서 성을 포위하자 필부가 성을 지키며 싸운
지가 20일이 되어 고구려 병사들이 병력을 이끌고 되돌아가려 하였는데, 역신(逆
臣) 비삽(比 口+歃이 몰래 성 안에 식량이 떨어졌다는 것을 적에게 알려, 적이 마
침내 싸움을 시작했다. 필부가 이를 알고 비삽의 목을 베어 성밖으로 던지고 군사
들에게 명령을 내리기를, “충신(忠臣)과 의사(義士)는 죽더라도 굽히지 않는 법이다.
힘을 내어라. 성의 존망이 이 일전(一戰)에 달려 있다.” 하고, 주먹을 휘두르며 한번
호령하니, 병자까지도 모두 일어나 앞을 다투어 적진으로 나아갔다. 적이 바람을 타
고 불을 놓아 성을 공격하여 쳐들어오므로 필부가 적을 향해 대항하니, 쏜 화살이
그의 몸에 집중하여 고슴도치처럼 되어 피가 발뒤꿈치까지 흘러내려 마침내 쓰러져
죽었다.
<설계두(薛罽7頭)> 무덕(武德) 4년(621)에 바닷길을 이용하여 배를 타고 당 나라
에 들어가니, 마침 태종(太宗)이 고구려를 정벌하는 때였다. 설계두는 자천(自薦)하
여 좌무위과의(左武衛果毅)가 되어 요동(遼東)에 이르러 고구려 사람들과 주필산(駐
蹕7山) 아래서 싸워 있는 힘을 다하여 분전하다가 죽었다. 당 나라 황제가 어의(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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衣)를 벗어 시신을 덮어 주고 대장군의 직임을 제수했으며 예로써 장사지내 주었다.
<김대문(金大問)> 일찍이 한산주 도독(漢山州都督)이 되었다. 그리고 일찍이 고
승전(高僧傳) , 화랑세기(花郞世紀) , 악본한산기(樂本漢山記) 약간 권을 저술했
다.
<설총(薛聰)> 자는 총지(聰智)이며 원효(元曉)의 아들이다.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예리하였으며, 장성해서는 박학하고 글을 잘 지었으며 글씨도 잘 썼다. 방언(方言)
으로 구경(九經)196)의 뜻을 풀이하여 후생들을 훈도하였으며, 또 속어(俗語)로 이두
(吏讀)를 만들어 관청에서 쓰게 하였다. 신문왕(神文王)이 한번은 한가하게 있을 때
설총을 인견하여 말하기를, “오늘 오랜 비가 처음 그치고 훈풍이 산들산들 부니, 높
은 담론과 좋은 해학으로 답답한 심사를 풀 수 있을 것이오. 그대는 필시 기이한
이야기를 들은 것이 있을 것이니, 어찌 나를 위해 말해 주지 않겠소” 하니, 설총이
아뢰기를, “예. 신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옛날 화왕(花王)197)이 처음
왔을 때 이것을 향원(香園)에 심고 푸른 휘장으로 보호하였습니다. 봄이 되어 아름
다운 꽃을 피우니, 온갖 꽃을 능가하여 홀로 빼어났습니다. 이에 온갖 곱고 예쁜 꽃
들이 분주히 달려와서 뵙지 않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홀연히 이름을 장미(薔
薇)라고 하는 한 아름다운 여인이 붉은 얼굴과 옥같이 하얀 이에 고운 화장과 단정
한 옷차림으로 애교 있고 사뿐사뿐 앞으로 나와 아뢰기를, ‘첩이 임금님의 훌륭한
덕을 듣고 향기로운 장막에서 잠자리를 모시고자 합니다. 임금님께서는 저를 받아
주시겠습니까’ 하였습니다. 그때 또 이름을 백두옹(白頭翁)198)이라고 하는 한 장부
가 베옷에 가죽띠를 두르고 흰머리에 지팡이를 짚고 늙고 병든 모양으로 꾸부정하
게 와서 아뢰기를, ‘저는 서울 밖 큰 길가에 살고 있습니다. 좌우에서 올리는 고량
진미(膏粱珍味)가 풍족하시더라도 상자 속에 저장해 두는 것 중에는 반드시 양약(良
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비록 실과 삼[麻]이 있다 해도 왕골과 기
름사초를 버리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임금께서도 역시 이럴 의사가 있으신지
요’ 하니, 왕이 이르기를, ‘장부의 말에도 일리가 있지만 미인은 얻기 어려우니 장
차 어찌해야 하겠는가’ 하였습니다. 장부가 아뢰기를, ‘무릇 임금이 된 자는 노성
(老成)한 신하를 가까이하여 흥하고 요염한 여인을 가까이하여 망하지 않은 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요염한 여인과는 합하기 쉽고 노성한 신하와는 친하기 어렵습니
다. 이런 까닭에 하희(夏姬)199)는 진(陳) 나라를 멸망시켰고 서시(西施)200)는 오(吳)
196) 구경(九經)은 아홉가지 유교 경전으로 곧 시경(詩經) , 서경(書經) , 역경(易經) , 춘추좌전(春秋左
傳) ,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 ,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 , 의례(儀禮) , 주례(周禮) , 예기禮記 를
말한다.
197) 모란(牡丹)이다.
198) 백두옹(白頭翁)은 할미꽃이다.
199) 하희(夏姬)는 춘추시대 정(鄭) 나라 여자로, 진(陳) 나라 대부 어숙(御叔)의 아내이자 하징서(夏徵舒)
의 어머니이다. 모습이 아름다워 진영공(陳靈公) ․'공녕(孔寧) ․'의행보(儀行父) 등과 모두 사통(私通)하였
다. 진영공이 하징서에게 죽음을 당하고, 초 나라가 진 나라를 멸망시키자 그녀를 연윤양로(連尹襄老)에
게 주었다. 연윤양로가 죽자 청 나라로 돌아갔는데, 초 나라 신공무신(申公巫臣)이 아내로 삼아 진(晋)
나라로 도망갔다.
200) 서시(西施)는 전국시대 월(越) 나라의 미인이다. 월왕 구천(句踐)이 오왕(吳王) 부차(夫差)에게 패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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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멸망시켰으며, 맹자(孟子)는 불우하게 생을 마쳤고 풍당(馮唐)201)은 낭관(郎
官)이라는 낮은 벼슬자리에 머무른 채 머리가 희었습니다. 예로부터 이러했으니 제
가 어찌하겠습니까’ 하니, 화왕이, ‘내가 잘못했소.’ 하고 사과하였습니다.” 하였다.
이에 왕이 안색을 바로하고 이르기를, “그대의 말에 풍자하고 비유함이 매우 간절
하니, 이것을 써서 경계로 삼겠소.” 하였다. 벼슬이 한림(翰林)에 이르렀다. 고려 현
종(顯宗) 때 홍유후(弘儒侯)에 추봉(追封)하고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였다.
<녹진(祿眞)> 길찬(吉飡) 수봉(秀奉)의 아들이다. 소성왕(昭聖王) 12년(819)에 상
대등(上大等) 충공(忠恭)이 정사당(政事堂)에 앉아 내외의 관직을 주의(注擬)하는데,
청탁이 몰려들어 충공이 어떻게 하지 못하고 있다가 병이 들어 물러나와 의원을 부
르니, 진단하기를, “병이 심장(心臟)에 들었으니 모름지기 용치탕(龍齒湯)을 복용해
야 합니다.” 하였다. 그래서 드디어 문을 닫고 들어앉아 손님들을 만나지 않았다.
집사시랑(執事侍郞) 녹진이 뵙기를 청하자 문지기가 거절하니, 녹진이 말하기를,
“하관(下官)인 내가 상공(相公)께서 손님을 사절하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한
말씀 아뢰어 답답한 심사를 풀어드리고 싶을 뿐이니, 뵙지 않고서는 물러가지 않겠
다.” 하였다. 문지기가 세 차례나 왕복하며 아뢰고서야 만나뵐 수 있게 되었다. 녹
진이 아뢰기를, “삼가 기체(氣體)가 편치 않으시다고 들었는데, 아침 일찍 조회에
들어가시고 밤늦게 파하여 안개와 이슬을 쏘이게 되어 혈기의 조화를 손상시켜 신
체의 안정을 잃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그렇지 않네.” 하였다.
녹진이 아뢰기를, “그렇다면 공의 병환은 침이나 약을 쓸 필요 없이 한 마디 말로
다스릴 수 있습니다.” 하였다. 충공이 말하기를, “들을 수 있겠는가” 하니, 녹진이
아뢰기를, “저 목수(木手)가 집을 지을 적에 재목 중에 큰 것은 들보나 기둥으로 쓰
고 작은 것은 서까래로 쓰며, 굽은 것과 곧은 것을 각기 제자리에 배치한 뒤에야
큰 집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재상(宰相)이 정치를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재능
이 큰 자는 높은 자리에 두고, 작은 자는 낮은 관직을 주어 안으로 육조(六曹)와 온
갖 집사(執事)들, 밖으로 방백(方伯)과 군수가 있어서 조정에 빈 자리가 없이 모두
적임자를 얻은 뒤에야 왕정(王政)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그러하지 못하여 사
정(私情)에 끌려 공정성을 잃어버리고 특정인을 위하여 자리를 선택하여, 좋아하는
사람이면 비록 인재가 아닐지라도 반드시 진출시키고 미운 사람이면 비록 유능한
인재라도 반드시 배척하여, 그 취사선택(取捨選擇)이 마음을 괴롭히고 시비를 분별
하는 것이 뜻을 어지럽게 하니, 비단 국사(國事)에 해를 끼칠 뿐 아니라 일을 맡아
하는 사람도 병이 나고 맙니다. 만약 관직을 맡아 청렴결백하게 하고 일에 임하여
신중하고 공손하게 하여 뇌물이 들어오는 문을 막고 청탁이 들어오는 길을 끊고,
승진시키고 내치는 것을 반드시 어리석음과 현명함에 따라서 하고, 주고 빼앗는 것
을 반드시 애증(愛憎)에 따라서 하지 않는다면, 저울 같아서 경중(輕重)을 바꿀 수
뒤 미인계로 그녀를 사서 오왕에게 보내니, 오왕은 그녀에게 혹하여 고소대(姑蘇台)를 짓고 정사를 돌보
지 않아 드디어 월왕 구천과 범소백(范少伯)의 침공으로 망하였다.
201) 풍당(馮唐)은 중국 한(漢) 나라 때 사람이다. 훌륭한 인재였으나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여 백발
이 되도록 말직인 낭관(郎官)으로 있다가 우연히 문제(文帝)를 뵙게 되어 재상까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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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고 먹줄 같아서 곡직(曲直)을 속일 수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형벌이나 정사
가 합당하여 국가가 화평해질 것이니, 비록 날마다 공손홍(公孫弘)처럼 동각(東閣)
을 열어놓고,202) 조참(曹叅처럼 술자리를 마련하여203) 친구들과 함께 담소하며 즐
겨도 괜찮을 것이니, 어찌 굳이 복약(服藥)과 식이(食餌)에 구구하게 마음을 쓰면서
공연히 시일을 허비하고 업무를 폐지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충공이 기뻐
하여 의원을 돌려보내고 왕에게 조회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경(卿)이 날짜를 정해
놓고 약을 복용한다더니 어찌하여 갑자기 와서 조회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신
(臣)이 녹진의 말을 들은 것이 약과 마찬가지였으니, 어찌 용치탕을 마시는 정도의
효과뿐이겠습니까” 하고는 이어 왕에게 진달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과인(寡人)이
임금이고 경이 재상인데 이런 인재가 있는 것을 태자(太子)에게 모르게 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태자가 들어와 하례하기를, “신이 듣건대 임금이 현명하면 신하가
정직하다고 하였습니다. 이 또한 국가의 아름다운 일입니다.” 하였다.
<김양(金陽)> 태종왕(太宗王)의 9세손이다. 흥덕왕(興德王)이 죽었는데 후사가 없
자, 왕의 사촌동생 균정(均貞)이 왕의 사촌동생의 아들 제륭(悌隆)과 서로 왕위를
다투었다. 김양이 균정을 추대하여 왕을 삼아 적판궁(積板宮)으로 들어가니, 제륭의
무리인 김명(金明) 등이 몰려와 포위하고 균정을 살해하였다. 김양은 하늘에 호소하
고 마음에 맹세하였다. 김명이 제륭을 살해하고 스스로 즉위하자, 김양이 군사를 모
집하여 청해진(淸海鎭)으로 들어가 균정의 아들 우징(祐徵)을 만났다. 우징이 그와
함께 거사(擧事)를 도모하여 김명을 토벌하여 죽였다. 그리고는 우징을 맞아 즉위하
게 하니, 이 사람이 바로 신무왕(神武王)이다. 김양은 벼슬이 시중(侍中)에 이르렀
다. 죽은 뒤에 서발한(舒發翰)을 추증하고, 부의(賻儀)와 장례를 한결같이 김유신(金
庾信)의 전례에 따라 시행하였으며, 태종왕릉에 배장(陪葬)하였다.
<최치원(崔致遠)> 자(字)는 고운(孤雲)이다. 풍채가 수려하고 어려서부터 정밀하
고 명민하였다. 당 나라에 들어가 학문을 부지런히 하여 단번에 급제하였다. 황소
(黃巢)의 난이 일어나자 고변(高騈)이 제도병마도통(諸道兵馬都統)이 되어 최치원을
불러 종사관(從事官)으로 삼아 서기(書記)의 일을 맡기니, 표(表)ㆍ장(狀)ㆍ서계(書
啓)ㆍ징병(徵兵)ㆍ고격(告檄)이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 고려 현종(顯宗) 때에 내
사령(內史令) 벼슬과 문창후(文昌侯)라는 시호를 추증하고 공자(孔子)의 묘정(廟庭)
에 종사(從祀)하였다. 신당서(新唐書) 예문지(藝文志)에 최치원의 사륙집(四六集)
1권과 계원필경(桂苑筆耕) 20권이 실려 있고, 또 최씨문집(崔氏文集) 30권이
있다. 최치원이 나이 28세 때에 본국으로 돌아와 부모를 뵙고 싶어하는 뜻이 있자,
당 나라 희종(僖宗)이 그것을 알아차리고 조서(詔書)를 본국에 사신으로 오게 하였
다. 왕은 그를 머무르게 하려고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사(侍讀兼翰
202) 공손홍(公孫弘)은 한(漢) 나라 무제(武帝) 때의 재상으로, 그는 동각(東閣)을 열어놓고 손님을 접대하
는 데 봉급을 다 썼다고 한다.
203) 조참(曹參)은 한(漢) 나라 초기의 재상으로, 그는 노자(老子)의 무위(無爲)에 기초를 두고 정치하여 새
로 일을 만드는 것을 싫어하였기 때문에, 건의하러 손님이 오면 술을 먹여 취하게 하여 돌려보냈다 한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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林學士守兵部侍郞知瑞書監事)를 삼았다. 최치원이 서쪽 당 나라에서 벼슬하다가 동
쪽 고국으로 돌아온 이래로 계속 난세를 만나 앞길이 순탄하지 못하여 걸핏하면 허
물을 얻게 되니, 스스로 불우함을 가슴아파하며 더 이상 벼슬에 나아갈 뜻이 없었
다. 그리하여 여기저기 방랑생활을 하며 산림이나 강가에 대(臺)와 정자를 지어 놓
고 소나무와 대나무를 심고 서적을 베개 삼아 풍월(風月)을 읊으며 지냈다. 이를테
면 경주(慶州)의 남산(南山), 강주(剛州)의 빙산(冰'山), 합천(陜川)의 청량사(淸涼7寺)
및 지리산(智異山)의 쌍계사(雙溪寺), 합포현(合浦縣)의 별장 같은 곳이 모두 그가
유람하던 곳이다. 뒤에 가족을 데리고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에 숨어 살면
서 동복형인 승려 현준(賢俊) 및 정현 법사(定玄法師)와 도우(道友)가 되어 한가로
이 지내며 여생을 마쳤다. 【이상은 輿地勝覽 에 나오는데, 여러 사서(司書)를 더
참고하여 세대에 따라 순서를 바꾸고 이어 증보하였다.】
<金歆運> 奈密王八世孫也 太宗王憤麗濟侵軼謀伐之 以㰴7運爲郎幢大監 於是 抵百
濟地 進攻助川城 濟人來襲 飛矢雨集 歆運橫馬握槊'待之 或曰 賊起暗中 咫尺不辨 雖
死無知者 况公新羅貴骨 若死賊手 敵之所幸 我之所恥 歆運曰 大丈夫旣以身許國 何計
人之知不知哉 從者控馬勸避 歆運以劍揮之 遂突陣 格殺數人而死 時人爲作陽山歌以傷
之 〇<匹夫> 沙梁人也 太宗王以匹夫爲七重城縣令 明年 高句麗來圍 匹夫且守且戰者
二旬 麗兵欲引還 逆臣比(口+歃密以城內食盡告敵 敵遂復戰 匹夫知之 斬比(口+歃
投之城外 令軍士曰 忠臣義士死且不屈 勉哉 城之存亡在此一戰 奮拳一呼 病者皆起 爭
先赴敵 敵乘風縱火 攻城突入 匹夫向敵對射 矢集其身如蝟 血流至踵 乃仆7而死 〇<薛
罽'頭> 武德四年 隨海舶入唐 會太宗征高句麗 罽'頭自薦爲左武衛果毅 至遼東 與麗人戰
于駐蹕7山下 力鬪而死 帝脫御衣 覆其尸 授職大將軍 以禮葬之 〇<金大問> 嘗爲漢山
州都督 嘗著高僧傳花郞世紀204)樂本漢山記若干巻 〇<薛聰> 字聰智 元暁之子 生而明
銳 旣長 博學善屬文能書 以方言解九經義 訓導後生 又以俚語製吏札 行於官府 神文王
嘗燕居 引聰謂曰 今日宿雨初歇 薰風微涼高談善謔 可以舒鬱 子必有異聞 盍7爲我陳之
聰曰唯 臣聞 昔花王之始來也 植之香園 護以翠幕 當三春而發艶 凌百花而獨出 於是
艶艶之靈夭夭之英無不奔走上謁 忽有一佳人 名曰 薔薇 朱顔玉齒鮮粧靚7服 伶俜而來
綽約而前曰 妾聞王之令德 願薦枕於香帷王其容我乎 又有一丈夫 名曰白頭翁 布衣韋
帶 戴白持杖 龍鍾而步 傴7僂'而來曰 僕在京城之外 居大道之傍 竊謂左右供給膏梁雖足
巾衍儲藏 須有良藥 故曰 雖有絲麻 無棄菅蒯不識王亦有意乎 王曰 丈夫之言亦有道理
而佳人難得 將如之何 丈夫曰 凡爲君者 莫不親近老成而興 昵7比夭艶而亡 然而夭艶易
合 老成難親 是以夏姬亡陳 西施滅吳 孟軻不遇以終身 馮唐郞潛而皓首 自古如此 吾其
奈何 花王謝曰 吾過矣 於是 王愀'然作色曰 子之言 諷諭深切 請書之以爲戒 官至翰林
高麗顯宗時 贈弘儒侯 從祀文廟 〇<祿眞> 吉飡秀奉之子 昭聖王十二年 上大等忠恭坐
政事堂 注擬內外官 請托坌7至 忠恭莫能擧措 感疾而退 召醫 診之曰 病在心臓 須服龍
齒湯 遂杜門不接賓客 執事侍郞祿眞請見 門者拒之 祿眞曰 下官非不知相公謝客 願獻
一言 以開鬱悒7之懷耳 不見不退也 門者三復乃見 祿眞曰 伏聞氣軆'不調 得非早朝晩罷
204) 중간본에는 花郞世記로 되어 있으나 花郞世紀가 맞는 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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蒙犯霧露 傷榮衞'之和 失支軆'之安乎 曰未也 祿眞曰 然則公之病不須砭'石 可一言理之
忠恭曰 可得聞乎 祿眞曰 彼梓人之作室也 材大者爲梁柱 小者爲椽榱偃者植者各安所
施 然後大廈成焉 宰相之爲政也亦然 才巨者置高位 小者授下官 內則六官百執事 外則
方伯郡守 朝無闕位 皆得其人 然後王政成焉 今則不然 徇私而滅公 爲人而擇官 愛之
雖不才必進 憎之 雖有能必斥 取舎勞其心 是非亂其志 不獨害於國事 爲之者亦病矣 若
其當官淸白 莅'事恪恭 杜貨賂之門 絶請托之路 黜陟必以幽明 予奪不以愛憎 如衡焉 不
可枉以輕重 如繩焉 不可欺以曲直 如是則刑政允穆 國家和平 雖日開公孫之閣 置曹叅7
之酒 與朋友故舊談笑自樂可也 又何必區區於服餌之間 徒自費日廢事爲哉 忠恭悅 謝醫
朝王 王曰 謂卿剋日服藥 何遽來朝 對曰 臣聞祿眞之言同於薬石 豈止飮龍齒湯而已哉
因爲王陳之 王曰 寡人爲君 卿爲相 而有人如此 不可使儲君不知也 太子入賀曰 臣聞
君明則臣直 此亦國家之美事也 〇<金陽> 太宗王九世孫 興德王薨 無嗣 王之堂弟均貞
與堂弟之子悌隆爭立 陽奉均貞爲王 入積板宮 悌隆之黨金明等來圍之 殺均貞 陽號天誓
心 及金明弑悌隆自立 陽募集兵士 入淸海鎭 見均貞之子祐徵 祐徵與謀擧事 討金明殺
之 奉迎祐徵即'位 是爲神武王 陽官至侍中 卒 追贈舒發翰 其贈賻斂葬一依金庾信舊例
陪葬太宗王陵 〇<崔致遠> 字孤雲 美風儀 少精敏 入唐 學問無怠 一擧及第 黃巢之亂
高騈爲諸道兵馬都統 辟7爲從事 委以書記 表狀書啓徵兵告檄皆出其手 高麗顯宗時 贈內
史令文昌侯 從祀孔子廟庭 新唐書藝文志載崔致遠四六集一巻桂苑筆耕二十巻 又有崔氏
文集三十巻 致遠年二十八歲 有歸寧之志 唐僖宗知之 授詔書以來 留爲侍讀兼翰林學士
守兵部侍郞知瑞書監事 致遠自西仕大唐東歸故國 皆遭亂世 迍7邅'蹇連 動輒得咎 自傷不
遇 無復仕進意 逍遙自放 山林之下 江海之濱 營臺榭植松竹 枕藉書史 嘯詠風月 若慶
州南山剛州氷山陝川淸涼7寺及智異山雙溪寺合浦縣別墅 皆遊覧之所也 後帶家 隱伽倻山
海印寺 與母兄浮圖賢俊及定玄師 結爲道友 棲遲偃仰以終老焉 【以上出輿地勝覽205)
而更考諸史 隨其世代 改其次序 仍加增補】
고려(高麗)
<배현경(裵玄慶)> 초명(初名)은 백옥(白玉)이다. 담력(膽力)이 남보다 뛰어나 태조
(太祖)가 4방(四方)을 정벌할 때에 배현경의 공이 많았다. 여러 번 승진하여 대광
(大匡)에 이르렀다. 병이 위독하자 태조가 그의 집에 거둥하여 손을 잡고 문병하고
는 문을 나서자, 그가 죽었다. 시호(諡號)는 무열(武烈)이다.
<최언위(崔彦撝> 신라 말기 사람이다. 성품이 너그럽고 후덕하며 글을 잘하였다.
나이 18세에 당 나라에 유학하여 급제하였다. 42세에 고국으로 돌아오니, 태조가
나라를 세우고 그를 태자사부(太子師傅)에 임명하고 문한(文翰)의 소임을 맡겼다.
당시의 귀족들이 모두 그를 스승으로 섬겼다. 벼슬이 대상(大相)에 이르렀고, 시호
는 문영(文英)이다.
<동경노인(東京老人)> 역사에서 그의 이름이 전하지 않는다. 신라 경순왕(敬順王)
205)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경상도(慶尙道)」경주부(慶州府) 인물조(人物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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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고려에 항복하자, 은거하고 따르지 않았다. 고려 성종(成宗)이 동경(東京)에 행차
하여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초야에 숨어 사는 어진 이를 찾게 하고, 또 명하여 충
신과 효자를 정려(旌閭)하게 하니, 동경노인이 시 두 편을 지어 내상(內相) 왕융(王
融)에게 바쳤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裵玄慶> 初名白玉 膽力過人 太祖征討四方 玄慶功居多 累進大匡 疾篤 太祖幸其第
執手問疾 出門而卒 謚武烈 〇<崔彦撝 羅季人 性寛厚 能文 年十八遊學入唐及第 四
十二東還 太祖開國 命爲太子師傅 委以文翰之任 一時貴游皆師事之 官至大相 謚文英
〇<東京老人> 史失其名 新羅敬順王降高麗 隱居不從 高麗成宗幸東京 勑有司 搜訪隱
滯丘園者 又勑旌忠臣孝子 老人作詩二篇 獻內相王融云
구천의 빛이 움직여 별들을 운행하니 九天光動轉星辰
해의 깃발 용의 깃발 바다를 따라 순행하네 日斾龍旗竝海巡
누런 잎 계림은 일찍이 적막하더니 黃葉鷄林曾索寞
피는 꽃은 이제 다시 상원의 봄이라네 烟花今復上園春
또 한 수는 다음과 같다. 又
마을에는 충신 효자 정문으로 광채가 나고 閭閻光彩旌忠孝
산골에는 떠들썩하게 은사를 찾는도다 丘壑喧傳訪隱淪
비록 지난날 주로를 따라가지는 못하였지만 縱昔未隨周老往
다행히 이제 중국의 위의가 새로움을 몸소 보겠네 幸今親覩漢儀新
<최승로(崔承老)> 성품이 총명하고 민첩하여 학문을 좋아하고, 글을 잘 지었다.
11세 때 태조가 불러 보고 매우 가상하게 여겨 원봉성(元鳳省) 학생(學生)에 소속
시키고 안장 얹은 말을 하사하였으며, 상례(常例)에 따라 녹봉 20석(石)을 주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문병(文柄)을 맡겼다. 성종(成宗) 때에 정광(正匡)이 되고, 문하시
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거쳐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임명되었으며, 청하후(淸河
侯)에 봉해졌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며, 성종의 묘정에 배향하였다.
<최양(崔亮)> 성품이 너그럽고 후덕하였으며 글을 잘 지었다. 성종이 잠저(潛邸)
에 있을 때에 불러들여 사우(師友)로 삼았다. 즉위하여서는 드디어 발탁하여 등용하
니, 매우 사람들의 여망(輿望)에 맞았다. 벼슬이 내사문하평장사(內史門下平章事)에
이르렀다. 시호는 광빈(光彬)이고, 성종의 묘정에 배향하였다.
<최항(崔沆)> 최언위(崔彦撝의 손자이다. 갑과(甲科)에 급제하여 내사사인(內史舎
人)이 되었다. 목종(穆宗)이 신임하고 중히 여겨 크고 작은 정사를 반드시 그와 논
의하였다. 김치양(金致陽)이 반역을 도모하자 채충순(蔡忠順) 등과 더불어 계책을
정해 현종(顯宗)을 맞이하여 세웠다. 정당문학(政堂文學)과 이부 상서(吏部尙書)를
역임하고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에 임명되었다. 추충진절위사공신(推忠盡節衛社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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臣)의 호를 하사하고 청하현 개국자(淸河縣開國子)에 봉했으며 식읍(食邑) 500호
(戶)를 내려주었다. 또 수정공신(守正功臣)의 호를 더 주었다. 시호는 절의(節義)이
고, 현종의 묘정에 배향하였다.
<이주좌(李周佐)> 목종 때 급제하여 벼슬이 형조상서 판어사대사(刑曹尙書判御史
臺事)에 이르렀다. 조정에 선 40여 년 동안 대신의 체통이 있었다.
<최제안(崔齊顔)> 최승로(崔承老)의 손자이다. 현종(顯宗)․7덕종(德宗)․'정종(靖宗)․7문
종(文宗) 네 임금을 섬겼으며, 벼슬이 태사문하시랑(太師門下侍郞)에 이르렀다. 시호
는 순공(順恭)이고, 문종의 묘정에 배향하였다.
<김부일(金富佾)> 그의 선조는 신라 왕족이다. 어려서 학문에 힘써 과거에 급제
하여 직한림원(直翰林院)이 되었다. 인종(仁宗) 때에 벼슬이 검교태보 수태위 문하
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판상서예부사 상주국(檢校太保守太尉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
章事判尙書禮部事上柱國)에 이르렀다. 생계를 위한 일을 하지 않았으며 문장이 화려
하고 풍부하였다. 그래서 모든 사명(辭命)을 반드시 그에게 윤색(潤色)하도록 명하
였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그의 아우 김부의(金富儀)․7김부식(金富軾)과 함께 모두
문한시종(文翰侍從)이 되었다. 그래서 그 어머니를 태부인(太夫人)에 봉하고 해마다
나라에서 곡식을 하사하였다.
<김부의(金富儀)> 숙종 2년(1097)에 급제하여 여러 번 승진하여 직한림원(直翰林
院)이 되었다. 인종 때에 수사공 상서좌복야 정당문학 판상서예부사 감수국사 주국
(守司空尙書左僕射政堂文學判尙書禮部事監修國史柱國)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의(文
懿)이다.
<김부식(金富軾)> 숙종 때 급제하여 직한림원(直翰林院)이 되고 우사간(右司諫)을
역임하였다. 인종이 즉위하자 이자겸(李資謙)은 국구(國舅)이므로 그에 대한 예우를
백관(百官)과 같이 할 수 없다고 하니, 여 여러 사람들이 그 논의에 부화뇌동하였
다. 김부식만 오직 주장하기를, “임금의 조정에서는 군신(君臣)의 예를 바르게 하고,
사사로이 대할 때는 부자간의 친밀함을 온전히 해야 합니다.” 하니, 왕이 옳다고 하
였다. 묘청(妙淸)이 조광(趙匡)·유참(柳旵) 등과 서경(西京)을 검거하여 반란을 일으
키자 김부식이 원수(元帥)가 되어 서경을 평정하고, 수충정난정국공신 검교태보 수
태위 문하시중 판상서이부사 감수국사 상주국(輸忠定難靖國功臣檢校太保守太尉門下
侍中判尙書吏部事監修國史上柱國)이 되었다. 의종(毅宗)이 즉위하자 낙랑군 개국후
(樂浪郡開國侯)를 봉하고 식읍 1천 호를 하사하였다. 77세에 죽었다. 시호는 문열
(文烈)이다. 사람됨이 체격이 장대하고 낯이 검고 눈이 불거졌으며, 문장으로 세상
에 이름을 날렸다. 송 나라의 사신 노윤적(路允迪)이 왔을 때에 김부식이 관반(館
伴)이 되었는데, 그 부사(副使) 서긍(徐兢)이 김부식이 글을 잘 짓고 고금(古今)의
일에 통달한 것을 보고 그 사람됨을 좋아하여 고려도경(高麗圖經) 을 저술하면서
김부식의 가계(家系)를 실었다. 또 그의 초상화를 그려가지고 가서 황제에게 아뢰
니, 마침내 사국(司局)에 명하여 판(板)에 새겨 널리 전파하게 하였다. 이로 말미암
아 그의 이름이 천하에 알려졌다. 뒤에 송 나라에 사신으로 가니, 가는 곳마다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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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禮)로 대우하였다. 세 차례 예부(禮部)의 과거를 주관하였는데, 선비를 잘 뽑았다고
일컬어졌다. 문집 20권이 있다.
<김한충(金漢忠)> 신라의 대보(大輔) 김알지(金閼智)의 후손이다. 어려서부터 뛰
어나 학문에 힘써 과거에 급제하였다. 예종(睿宗) 때에 윤관(尹瓘)에게 여진(女眞)을
정벌하도록 명하였는데, 김한충이 중군병마사(中軍兵馬使)가 되어 힘껏 싸워 공이
있었다. 벼슬이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에 이르렀다.
<김인위(金因渭)> 김부(金傅)의 후손으로 벼슬이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다.
<김경용(金景庸)> 용모가 장대하고 수려하여 귀골의 풍채가 있었다. 합문지후(閤
門祗候)로서 광주 판관(廣州判官)으로 나갔는데, 정사를 까다롭지 않게 하였다. 숙
종ㆍ예종 두 조정에 벼슬하여 병부(兵部)ㆍ호부(戶部)ㆍ공부(工部) 등 3부의 상서
(尙書)와 문하평장사를 역임하고 문하시중 상주국에 승진하였으며, 협모위사치리공
신 판상서리형부사 낙랑군개국백(協謀衛社致理功臣判尙書吏刑部事樂浪郡開國伯)에
가자(加資)되고 식읍 7백 호를 받았다.
<김인규(金仁揆)> 급제하여 좌승선(左承宣)과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를 역임하였
다. 예종 때에 지주사(知奏事)에 올랐고, 여러 번 승진하여 수태위 평장사(守太尉平
章事)에 이르렀다.
<노영순(盧永淳)> 기계(杞溪) 사람이다. 의종 때에 춘주도(春州道)에 도적이 성행
하자 왕이 노영순을 파견하여 토벌하였다. 벼슬이 평장사에 이르렀다. 시호는 의정
(懿貞)이다.
<김군수(金君綏)> 김부식의 아들이다. 명종 때에 장원 급제하여 직한림원이 되고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에 임명되었다. 조충(趙冲을 대신하여 서북면병마사(西北面
兵馬使)가 되었는데 청렴결백하고 백성을 사랑한다고 일컬어졌다. 뒤에 반역자 한순
(韓恂)과 다지(多智)를 베어 죽이고 그 머리를 상자에 담아 서울로 보냈다. 병마사
김취려(金就礪)가 자신에게 먼저 보고하지 않은 것을 미워하여 드디어 김군수를 한
남(漢南)으로 귀양보내니, 당시 사람들이 원통하게 여겼다.
<김인경(金仁鏡)> 초명(初名)은 양경(良鏡)이다. 재주와 식견이 정밀하고 명민하
였으며 예서(隸書)를 잘 썼다. 명종 때에 급제하였다. 조충을 따라 강동성(江東城)에
서 거란 군사를 토벌하여 공을 세웠다.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를 역임하였
다. 김인경은 문재(文才)ㆍ무재(武才)ㆍ이재(吏才)가 모두 풍부하고 천품이 맑고 고
와 한 점의 티끌도 없었다. 낭서(郎署)로부터 상부(相府)에 이르기까지 고아한 글과
중대한 책서(冊書)가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고, 왕공(王公)의 처첩(妻妾)에서 소 치
는 아이 말 모는 하인에 이르기까지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시호는 정
숙(貞肅)이다.
<최여해(崔汝諧)> 성품이 너그럽고 후덕하였으며, 급제하여 울주 통판(蔚州通判)
에 보임(補任)되었다. 일찍이 명종이 익양공(翼陽公)으로 있을 때 최여해가 그 부
(府)의 전첨(典籤)으로 있었다. 하루는 태조가 홀(笏)을 명종에게 주자, 명종이 그것
을 받고 용상에 앉고 최여해는 백관(百官)들과 함께 하례하는 꿈을 꾸었다. 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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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자 기이하게 여겨 명종에게 보고하였다. 명종이 즉위하자 최여해가 축하하는 표
문(表文)을 가지고 서울에 와서 환관을 통하여 아뢰니, 왕이 비로소 놀라며 이르기
를, “최 전첨이 왔구나.” 하고 인견하여 위로하고는 바로 좌정언(左正言)에 임명하
였다. 여러 번 승진하여 추밀원사 산기상시(樞密院使散騎常侍)에 이르렀다. 그가 사
직하는 표문에 이르기를, “중추원에서 직임을 맡았으니, 실로 오늘의 은덕과 영화를
알겠으며, 북궐(北闕)에서 조회를 드렸으니, 비로소 그때의 꿈의 감응되었음을 믿겠
습니다.” 하고, 이어 사직을 청하니, 특별히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임명하였다. 시호
는 문정(文貞)이다.
<김연성(金鍊成)> 김인경(金仁鏡)의 아들이다. 장원 급제하여 벼슬이 한림학사 승
지(翰林學士承旨)에 이르렀다.
<김승무(金承茂)> 김연성의 아들이다. 재주와 식견이 있어 어려서 과거에 급제하
였다. 사한(史翰)을 역임하고 여러 번 승진하여 시어사(侍御史)에 이르렀다.
<김경손(金慶孫)> 고종(高宗) 때 사람이다. 성품이 장중하고 너그러우며 지혜와
용기가 보통 사람들보다 뛰어나고 담력과 지략이 있었다. 음직(蔭職)으로 벼슬길에
진출하여 화려하고 중요한 직책을 역임하였다. 여러 번 전공을 세워 조정에서나 민
간에서 신임하고 존중하였는데, 갑자기 최항(崔沆)에게 살해되어 사람들이 모두 슬
퍼하고 안타까워하였다.
<김혼(金琿)> 김경손의 아들이다. 충렬왕(忠烈王) 때에 대장군 중찬(大將軍中贊)
이 되었다. 왕이 원(元) 나라에 가자 임시로 행성(行省)의 일을 대행하였다. 뒤에 낙
랑군(樂浪君)을 봉하고, 추성익조공신(推誠翊祚功臣)의 호를 하사하고, 다시 계림부
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주었다. 시호는 충선(忠宣)이다.
<이진(李瑱> 널리 제자백가(諸子百家)에 통달하고 시에 능하다는 명성이 있었다.
충렬왕 때에 급제하여 검교정승(檢校政丞)이 되었다. 임해군(臨海君)에 봉해졌다. 시
호는 문정(文定)이고, 호는 동암(東菴)이다.
<이제현(李齊賢)> 이진의 아들이다. 충렬왕 때에 급제하였다. 충선왕(忠宣王)이
연경(燕京)의 저택(邸宅)에 머무를 때에 만권당(萬卷堂)을 지어놓고 이르기를, “장안
(長安)의 문학하는 선비들이 모두 천하의 빼어난 이들인데 우리 부중(府中)에는 그
런 사람이 없으니, 이는 나의 수치다.” 하고, 이제현을 불러 도성에 오게 하였다. 당
시 요수(姚燧)ㆍ염복(閻復)ㆍ원명선(元明善)ㆍ조맹부(趙孟頫 등이 모두 왕의 문하
(門下)에서 교유하였는데, 요수 등이 이제현에 대하여 칭찬하고 감탄해 마지않았다.
뒤에 서촉(西蜀)에 사신으로 갔는데, 가는 곳마다 읊은 시가 사람들의 입에 회자(膾
炙)되었다. 충선왕이 강남(江南)에 강향사(降香使)로 갈 때에 이제현도 따라갔다. 왕
이 누대(樓臺)의 절경을 만날 때면 흥취를 일으키고 회포를 풀면서 이르기를, “이런
곳에 이생(李生)이 없어서는 안 된다.” 하였다. 연경과 강남에 시종(侍從)한 공으로
상주하여 고려왕부단사관(古麗王府斷事官)에 임명하였다. 뒤에 다시 원 나라에 갔는
데 원 나라에서 우리나라를 중국의 한 성(省)으로 삼으려 하자, 이제현이 도당(都
堂)에 글을 올려 그 논의가 마침내 중지되었다. 충선왕이 토번(吐藩)으로 유배를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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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되자, 이제현이 원 나라 낭중(郎中) 및 승상(丞相) 배주(拜住)에게 글을 올렸다.
얼마 뒤 황제가 타사마(朶思麻) 지방으로 양이(量移)206)하도록 명하였으니, 배주의
주청(奏請)에 따른 것이다. 이윽고 고국으로 돌아오자 여러 소인배들이 난을 선동하
고 있었다. 이제현은 자취를 감추고 나오지 않은 채 역옹패설(櫟7翁稗說) 을 저술하
였다. 공민왕(恭愍王)이 즉위하여 아직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였을 때 이제현에게
명하여 정승을 대행하여 정동성(征東省)207)의 일을 임시로 처리하도록 하였다. 당
시는 왕이 원 나라에 있었기 때문에 나라가 비어 있었는데도 합당하게 조처하여 사
람들이 그에 힘입어 안정되었다. 벼슬이 문하시중 계림부원군(門下侍中鷄林府院君)
에 이르렀다. 국사(國史)를 그의 집에서 편찬하였는데 사관(史官) 및 삼관(三館)이
모두 모였다. 젊어서부터 동료들이 감히 이름을 부르지 못하고 반드시 익제(益齋)라
는 호로 불렀다. 뒤에 공민왕의 묘정(廟庭)에 배향하였다.
<윤신걸(尹莘傑)> 기계(杞溪) 사람이다. 충렬왕 때에 급제하여 벼슬이 첨의평리
기성군(僉議評理杞城君)에 이르렀다.
<이인기(李仁琪)> 성품이 너그럽고 후덕하였으며 풍채가 수려하고 예법에 익숙하
였다. 무예(武藝)와 용기로 이름을 날렸다. 호군(護軍)이 되어 중방(重房)의 장수들
이 세력을 믿고 기세부리는 것을 미워하여 장수들에게 항거하고 꾸짖고서 충선왕에
게 호소하였다. 충선왕은 이인기를 곧게 여겼지만, 장수들이 모두 원 나라의 부인과
환관의 당(黨)이어서 어쩔 수 없이 이인기의 관직을 삭탈하였다. 얼마 안 되어 순서
를 뛰어넘어 지언부사(知讞7部事)에 임명하고, 곧이어 판문하사(判門下事)로 승진시
켰다.
<최해(崔瀣)> 최치원의 후손이다. 9세 때부터 시를 잘하였다. 충숙왕 8년(1321)
에 원 나라의 제과(制科)에 급제하여 요양로 개주판관(遼陽路蓋州判官)에 임명되었
다. 고국으로 돌아오자 예문관(藝文館)․'성균관(成均館)․7전교관(典校館)의 삼관(三館)
이 영빈관(迎賓館)에 나와 영접하였다. 여러 차례 승진하여 검교성균관대사성(檢校
成均館大司成)에 이르렀다. 최해는 재주가 남다르고 뜻이 높아 이단(異端)에 현혹되
지 않았으며 습속(俗習)에 빠지지 않고 옛사람에 합치되기를 힘썼다. 연우(延祐) 연
간에 과거가 처음 시행되자, 조서를 듣고 말하기를, “배운 바를 시험해 볼 수 있겠
다.” 하더니, 이윽고 과연 제과에 급제하였다. 그 과거에 장원한 송본(宋本)이 그의
재주를 칭찬하여 여러 번 시에 드러냈다. 한번은 동래현(東萊縣)을 지나가다가 해운
대(海雲臺)에 올라 합포만호(合浦萬戶) 장선(張瑄)이 소나무에 써놓은 시를 보고 말
하기를, “아! 이 나무는 무슨 액운이 있어서 이런 졸렬한 시를 만나게 되었단 말인
가” 하고, 드디어 깎아낸 다음 흙으로 발라 놓았다. 길을 떠나 안동(安東)에 당도
하였는데, 장선이 그 말을 듣고 노하여 맹장(猛將) 3,4명에게 추격하도록 명하니,
206) 양이(量移)는 먼 곳으로 귀양가거나 좌천된 사람을 참작하여 가까운 지방으로 옮기는 것을 말한다.
207) 정동성(征東省)은 정동행성(征東行省)의 준말로, 원 나라가 고려 개경(開京)에 두었던 관청의 이름이
다. 원 나라 세조(世祖)가 일본을 정벌할 때에 처음에는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이란 관부(官府)를
개경에 설치하여 일본 정벌에 관한 사무를 행하다가, 동정(東征)을 그만둔 뒤로 그것을 정동행성으로 고
쳐 원 나라의 관리를 상주시키고 고려의 내정(內政)을 감시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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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 한 명을 잡아와 칼을 씌워 대문 밖에 세워 놓았다. 최해는 몰래 죽령(竹嶺)을
넘어 서울로 돌아와 대단히 유림(儒林)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뒤에 도성 남쪽 사
자산(獅子山) 아래 살면서 사자갑사(獅子岬寺)의 승려에게 밭을 빌려 경작하여 전원
(田園)을 만들어 자급자족하며, 예산농은(猊山農隱)이라 자호(自號)하였다. 좌우명
(座右銘) 과 예산은자전(猊山隱者傳) 이 있다.
<崔承老> 性聰敏好學 善屬文 年十一 太祖召見 甚嘉之 命隷元鳳省學生 賜鞍馬 例
食二十石 自是 委文柄 成宗朝爲正匡 歷門下侍郞平章事 拜門下侍中 封淸河侯 諡文貞
配享成宗廟庭 〇<崔亮> 性寬厚 善屬文 成宗在潛邸 引爲師友 及即'位 遂加擢用 甚協
人望 官至內史門下平章事 諡匡彬 配享成宗廟庭 〇<崔沆> 彦撝'之孫 登甲科 遷內史
舎人 穆宗倚以爲重 政無大小 必與圖議 金致陽謀不軌 與蔡忠順等定策 迎立顯宗 歷政
堂文學吏部尙書 拜門下平章事 賜推忠盡節衞'社功臣號 淸河縣開國子 食邑五百戶 又加
守正功臣號 諡節義 配享顯宗廟庭 〇<李周佐> 穆宗朝登第 官至刑曹尙書判御史臺事
立朝四十餘年 有大臣之軆〇<崔齊顔> 承老之孫 事顯德靖文四朝 官至太師門下侍郞
諡順恭 配享文宗廟庭 〇<金富佾> 其先新羅宗姓 少力學 登第 直翰林院 仁宗朝 官至
檢校太保守太尉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判尙書禮部事上柱國 不事生産 文章華贍 凡
辭命 必命潤色 諡文簡 與其弟富儀富軾 皆爲文翰侍從 封其母大夫人 歲賜廪粟 〇<金
富儀> 肅宗二年登第 累遷直翰林院 仁宗朝 守司空尙書左僕射政堂文學判尙書禮部事監
修國史柱國 諡文懿 〇<金富軾> 肅宗朝登第 直翰林院 歷右司諫 仁宗即7位 以李資謙
國舅 禮數不可與百官同 衆議雷同 富軾獨曰 王庭 正君臣之禮 私覿全父子之親 詔可
妙淸與趙匡柳旵等 據西京反 富軾爲元帥 平西都 拜輸忠定難靖國功臣檢校太保守太尉
門下侍中判尙書吏部事監修國史上柱國 䝘7宗即'位 封樂浪郡開國侯 食邑一千戶 卒年七
十七 諡文烈 爲人豐貌碩軆面黑目露 以文章名世 宋使路允迪來 富軾爲館伴 其介徐兢
見富軾善屬文通古今 樂其爲人 著高麗圓經 載富軾世家 又圖形以歸 秦于帝 乃詔司局
鏤板以廣其傳 由是名聞天下 後奉使如宋 所至待以禮 三掌禮圍 以得士稱 有文集二十
巻 〇<金漢忠> 新羅大輔閼智之後 少雄偉 力學登第 睿宗朝 命尹瓘伐女眞 漢忠爲中
軍兵馬使 力戰有功 官至尙書右僕射 〇<金因渭> 金傅之後 官至平章事 〇<金景庸>
容儀偉麗 有貴介風彩 以閤門祗候出爲廣州判官 爲政不苛 仕肅睿兩朝 歷兵戶工三部尙
書門下平章事 陞門下侍中上柱國 加協謀衞'社致理功臣判尙書吏刑部事樂浪郡開國伯 食
邑七百戶 〇<金仁揆> 中第 歷左承宣左諫議大夫 睿宗朝 進知奏事 累遷至守太尉平章
事 〇<盧永淳> 杞溪人 毅宗朝 春州道寇賊興行 王遣永淳討平之 官至平章事 諡懿貞
〇<金君綏> 富軾之子 明宗朝 擢魁科 直翰林院 拜左諫議大夫 代趙冲爲西北面兵馬
使 以淸白愛民稱 後斬叛臣韓恂多智 函首送京 兵馬使金就礪嫌其不先報己 遂流君綏漢
南 時人寃之 〇<金仁鏡> 初名良鏡 才識精敏 善隸書 明宗時中第 從趙冲討契丹兵于
江東城 有功 歷中書侍郞平章事 仁鏡文武吏才俱贍 天資淸婉 無一㸃'塵累 自郞署至于
相府 高文大册皆出其手 王公妾婦以至牛童馬走 無不知其名 諡貞肅 〇<崔汝諧> 性寬
厚 登第 補蔚州通判 初明宗爲翼陽公 汝諧爲其府典籖 一日夢太祖授笏於明宗 明宗受
之 坐御床 汝諧與百僚賀 覺而奇之 以告明宗 及即7位 汝諧䝴7表至京 因宦官以奏 王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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驚曰 崔典籖來矣 引見慰籍之 乃拜左正言 累遷至樞密院使散騎常侍 謝表云 西垣備職
寔知此日之恩榮 北闕朝天 始信當年之夢感 因乞骸 特授政堂文學 諡文貞 〇<金鍊成>
仁鏡之子 擢魁科 官 至翰林學士承旨 〇<金承茂> 鍊成之子 有才識 少登第 歷史翰
累遷至侍御史 〇<金慶孫> 高宗朝人 性莊重和裕 智勇絶人 有膽略 以蔭進 歷華要 累
立戰功 朝野倚重 遽爲崔沆所害 人皆痛惜 〇<金琿> 慶孫之子 忠烈朝 爲大將軍中贊
王如元 權署行省事 後封樂浪君 賜推誠翊祚功臣號 改封鶏林府院君 諡忠宣 〇<李瑱
博通百家 有能詩聲 忠烈朝登第 檢校政丞臨海君 諡文定 號東菴 〇<李齊賢> 瑱7之子
忠烈朝登第 忠宣留燕邸 構萬巻堂曰 京師文學之士皆天下之選 吾府中未有其人 是吾羞
也 召齊賢至都 時姚遂閻復元明善趙孟頫7等 咸遊王門 燧等稱嘆不置 奉使西蜀 所至題
咏'膾炙人口 忠宣之降香江南也 齊賢從之 王每遇樓臺佳致 寄興遣懷曰 此間不可無李生
也 以燕吳侍從功奏 授高麗王府斷事官 後復如元 元欲立省本國 齊賢上書都堂 其議遂
寢 忠宣流吐蕃 齊賢獻書元郞中及丞相拜住 旣而 帝命量移于朶思麻之地 從拜住所奏也
旣還國 羣小益扇亂 齊賢屛迹不出 著櫟'翁稗說 恭愍即'位 未至國 命齊賢攝政丞 權斷征
東省事 時王在元 國空虛 措置得宜 人賴以安 官至門下侍中鶏林府院君 撰國史於其第
史官及三館皆會焉 自少 儕'輩不敢斥名 必稱益齋 後配享恭愍廟庭 〇<尹莘傑> 杞溪人
忠烈朝登第 官至僉議評理杞城君 〇<李仁琪> 性寬厚 美風儀 習禮度 以武勇顯 爲護
軍 疾重房諸將怙7勢使氣 抗辱之 諸將訴忠宣 忠宣雖直仁琪 以諸將皆上國婦寺黨 不得
已削仁琪職 未幾 超授知讞7部事 俄遷判門下事 〇<崔瀣> 致遠之後 九歲能詩 忠肅八
年中元朝制科 授遼陽路蓋州判官 及東還 藝文成均典校三館出迎于迎賓館 累官至檢校
成均大司成 瀣才奇志高 不惑異端 不溺習俗 而務合於古人 延祐科興 聞詔 乃曰 可試
所學 旣而 果中制科 同年壯元宋本稱其才 屢形於詩 甞'過東萊縣 登海雲臺 見合浦萬戶
張瑄題詩松樹曰 噫 此樹有何厄 遭此惡詩 遂削去之 塗以土 行至安東 瑄聞之怒 命猛
將三四追之 得傔'從一人歸 械立門外 瀣潛踰竹嶺還京 大爲儒林所笑 後居城南獅子山下
晩從獅子岬寺僧借田而耕 開園田取足 自號猊山農隱 有座右銘及猊山隱者傳
<이달충(李達衷)> 숙종 때에 급제하여 여러 번 승진하여 성균관 좨주(祭酒)에 이
르렀다. 공민왕(恭愍王) 원년(1352)에 전리판서(典理判書)에 임명되고 감찰대부(監
察大夫)로 전임되었다가 호부 상서(戶部尙書)로 승진하였다. 15년(1357)에 명유(名
儒)로 뽑혀 밀직제학(密直提學)이 되고,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문정(文
靖)이다. 성품이 강직하여 흔들리지 않았고 사람을 알아보는 감식안이 있었다. 일찍
이 동북면 도순문사(東北面都巡問使)로 있다가 돌아오게 되자, 우리 환조(桓祖)께서
들판에서 그를 전송하였는데, 태조(太祖)께서 환조 뒤에 서 있었다. 환조께서 술을
따라 주자 이달충이 선 채로 받아 마시더니, 태조께서 술을 따라 주자 꿇어앉아 마
셨다. 환조께서 이상하게 여겨 까닭을 물으니, 말하기를, “이 아드님은 진실로 이인
(異人)입니다. 공(公)께서 따라가지 못할 것이니, 공의 가업(家業)을 이 아드님이 필
시 크게 일으킬 것입니다.” 하고, 자손들을 부탁하였다. 그가 지은 제정집(霽亭集)
이 세상에 전해오는데, 그의 시문(詩文)을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이 크게 칭찬하
였다. 신돈(辛旽)이 바야흐로 세도를 부릴 적에 이달충이 한 번은 여러 사람이 모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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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은 자리에서 신돈에게 말하기를, “사람들이 상공(相公)께서 주색(酒色)을 좋아한
다고 합니다.” 하니, 신돈이 좋아하지 않았다. 신돈이 처벌을 당하게 되자 이달충이
지은 시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李達衷> 肅宗朝登第 累官成均祭酒 恭愍元年 拜典理判書 轉監察大夫 遷戶部尙書
十五年 以名儒擢 爲密直提學 封鶏林君 諡文靖 性剛直不撓 有鑑識 嘗爲東北面都巡問
使 及還 我桓祖餞于野 太祖立桓祖後 桓祖行酒 達衷立飮 太祖行酒 乃跪7飮 桓祖怪問
之 曰 此子誠異人 非公所及 公之家業 此子必能大之 因以子孫屬之 所著霽亭集行于世
其詩文大爲益齋所稱賞 辛旽方用事 達衷嘗於廣坐 謂辛旽曰 人謂相公好酒色 旽不悅
及旽伏誅 達衷作詩
범의 위엄을 빌리니 곰들이 겁을 내고 有威能假虎熊羆'懾7
사내로서 미혹하니 부녀들이 따르네 媚或爲男婦女趨
누런 개와 흰 매는 더욱 미우니 黃狗蒼鷹尤所惡
검은 닭과 흰 말은 무슨 죄인가 烏鷄白馬是何辜
<이보림(李寶林)> 익재 이제현의 손자이다. 사람됨이 엄정하고 방정하며 정사(政
事)에 재능이 있었다. 여러 차례 자리를 옮겨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되고, 계림군(鷄
林君)에 봉해졌다.
<이성서(李成瑞)> 충정왕(忠定王) 때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고, 공민왕(恭愍王)
이 즉위하자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로 승진하였다. 공민왕이 홍건적(紅巾賊)을 피
하여 남쪽으로 파천(播遷)하면서 양광도도순문 겸 병마사(楊廣道都巡問兼兵馬使)에
임명하자 군사를 징집하는 데 공이 있었고, 덕흥군(德興君)의 변란에 최영(崔瑩)을
따라 적을 쳐서 또 공이 있어, 모두 제1등으로 책봉(策封)되었다. 원 나라에 가서
새해를 하례하고 태위감대경(太尉監大卿)에 임명되었다. 시호는 공간(恭簡)이다.
<이존오(李存吾)> 자는 순경(順卿)이다. 일찍이 부친을 여의고 학문에 힘썼으며,
강개(慷慨)하여 뜻과 절조(節操)가 있었다. 공민왕 9년(1360)에 과거에 급제하여 수
원서기(水原書記)에 조용(調用)되고, 선발되어 사한(史翰)에 보임되었다. 정몽주(鄭
夢周)ㆍ박상충(朴尙衷)ㆍ이숭인(李崇仁)ㆍ정도전(鄭道傳)ㆍ김구용(金九容)ㆍ김제안
(金齊顔) 등과 벗이 되었으며, 강론(講論)을 잘하여 쉬는 날이 없었다. 감찰규정(監
察糾正)에 임명되고, 15년(1366)에는 정언(正言)이 되었다. 신돈이 정권을 잡아 참
람하고 불법을 자행하였으나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는데, 이존오가 분연히 몸을 돌
보지 않고 말하기를, “요물(妖物)이 나라를 그르치니 제거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드디어 상소를 올려 극언(極言)하였다. 마침 신돈이 임금과 걸상을 마주하고 있자,
이존오가 신돈을 지목하며 꾸짖기를, “늙은 중이 어찌 이렇게까지 무례할 수가 있
는가” 하니, 신돈이 두렵고 놀라 얼떨결에 걸상에서 내려앉았다. 왕이 매우 노하여
장사감무(長沙監務)로 좌천시켰으나, 국인(國人)들이 칭송하여 말하기를, “참다운 정
언(正言)이로다.” 하였다. 뒤에 공주(公州)의 석탄(石灘)에 살면서 근심과 분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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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이 났다. 병이 위독해지자 사람을 시켜 부축해 일어나서 말하기를, “신돈이 아직
도 기세가 대단한가? 신돈이 죽어야 내가 비로소 죽을 것이다.” 하였는데, 자리로
돌아가 편안히 눕기도 전에 죽으니, 나이 31세였다. 그가 죽은 지 3개월 만에 신돈
이 처형을 당했다. 임금이 그의 충성을 생각하여 성균관 대사성을 추증했다.
<김진양(金震陽)> 공민왕 때 과거에 급제하여 10년도 되지 않아 화려하고 중요한
관직을 역임하고, 좌상시(左常侍)로 전직되었다. 조준(趙浚) 등의 죄를 논핵(論覈하
니, 대간(臺諫)들이 번갈아 상소하여, “김진양의 무리가 없는 일을 만들어내어 화란
(禍亂)을 초래하고 있습니다.” 하여, 장(杖)을 맞고 원지(遠地)로 유배되어 죽었다.
호는 초옥자(草屋子)이며, 이숭인(李崇仁)이 전(傳)을 지었다.
<김자수(金子粹)> 자(字)는 순중(純仲)이다. 공민왕 말년에 장원 급제하였다. 우왕
(禑王) 초년에 정언(正言)이 되어 일에 대해 간언하다가 전라도(全羅道) 돌산수(突山
戍)로 유배되었다. 공양왕 때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되고, 여러 차례 승진하여 벼슬
이 형조 판서에 이르렀다. 뒤에 조선조에 벼슬하였다. �신증新增 어떤 이는 말하기
를, “김자수는 고려를 위하여 절개를 지키다가 죽었다. 그가 임종할 때 시를 지어,
‘평생 충효(忠孝)에 뜻한 바를 오늘날 누가 알아주겠는가(平生忠孝意 今日有誰知)’라
고 운운하였다.” 하였으니, 이 글에서 조선조에 벼슬했다는 것은 알 수 없는 일이
다.
<李寶林> 益齋之孫 爲人嚴毅方正 有政事材 累轉政堂文學 封鶏林君 〇<李成瑞>
忠定朝拜密直副使 恭愍即'位 陞尙書左僕射 王避紅賊南遷 命爲楊廣道都巡問兼兵馬使
簽兵有功 興王之變 從崔瑩擊賊 又有功 俱策爲一等 如元賀正 授太尉監大卿 諡恭簡
〇<李存吾> 字順卿 早孤力學 慷慨有志節 恭愍九年登第 調水原書記 選補史翰 與鄭
夢周朴尙衷李崇仁鄭道傳金九容金齊顔相友 善講論無虛日 授監察糾正 十五年 爲正言
辛旽當國 陵僭不法 無敢言者 存吾奮不顧身曰 妖物誤國 不可不去 遂上疏極言 時旽與
王對床 存吾目旽叱之曰 老僧何得無禮如此 旽惶駭不覺下床 王愈怒 貶長沙監務 國人
稱之曰 眞正言也 後居公州之石灘 憂憤成疾 疾革 使扶起曰 旽尙熾乎 旽亡吾乃亡 返
席未安而卒 年三十一 歿三月 旽誅 王思其忠 贈成均大司成 〇<金震陽> 恭愍朝登第
不十年 歷敭華要 轉左常侍 論覈7趙浚等罪 臺諫交章 震陽輩搆'釁7生事 以致禍亂 杖流遠
地卒 號草屋子 李崇仁作傳 〇<金子粹> 字純仲 恭愍王末 擢魁科 辛禑初 爲正言 以
言事流全羅道突山戍 恭讓朝 除成均大司成 累官至刑曹判書 後仕本朝 新增 0 或云 子
粹爲麗朝死節 臨死有詩曰 平生忠孝意 今日有誰知云云 而此云仕本朝者 未可知也
본조(本朝)
<설장수(偰7長壽)> 원 나라 숭문감승(崇文監丞) 설손(偰'遜)의 아들이다. 설손이 원
나라 말기 공민왕 때에 난을 피하여 우리나라로 왔다. 설장수는 벼슬이 판삼사사(判
三司事)에 이르렀다. 뒤에 조선조에 벼슬하여 관향(貫鄕)을 하사해 줄 것을 청하자,
태조가 계림(鷄林)으로 관향을 삼도록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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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균(金稛)> 김인위(金因渭)의 후손이다. 태조 때에 개국공신으로 계림군(鷄林
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제숙(齊肅)이다.
<이래(李來)> 이존오(李存吾)의 아들이다. 과거에 급제하고, 좌명공신(佐命功臣)에
참여하여 계림군에 봉해지고, 태종(太宗)의 묘정(廟庭)에 배향하였다.
<설순(偰7循)> 설손의 손자이다. 박학하고 글을 잘하였다. 두 번 급제하여 벼슬이
제학(提學)에 이르렀다.
<김맹성(金孟誠)> 김균의 아들이다. 벼슬이 형조 판서에 이르렀고, 시호는 희경
(僖敬)이다.
<김신민(金新民)> 급제하여 벼슬이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에 이르렀다. 그의 아
들 김승경(金升卿)도 급제하여 벼슬이 형조 참판에 이르렀다.
<이문형(李文炯)> 급제하여 벼슬이 예조 참판에 이르렀다. 풍채가 옥같이 온유하
였으며 문아(文雅)하다고 일컬어졌다.
<이윤인(李尹仁)>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후손이다. 급제하여 여러 번 승진
하여 벼슬이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에 이르렀다.
<정효상(鄭孝常)> 갑술년(甲戌年) 과거에 장원 급제하였다. 익대좌리공신(翊戴佐
理功臣)에 참여하여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졌다.
<손소(孫昭)> 세조(世祖) 때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이시애(李施愛)의 난에 공이
있어 적개공신(敵愾功臣)에 책록(策錄)되고, 계천군(溪川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양
민(襄敏)이다.
<김영유(金永濡)>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형조 참판에 이르렀다.
<김천령(金千齡)> 병진년(丙辰年) 과거에 장원 급제하여 벼슬이 직제학에 이르렀
다. 재주가 있다는 명성이 있었다.
<최숙생(崔淑生)> 과거에 급제하였다. 시문(詩文)을 잘하였고 특히 사륙문(四六
文)에 능하였다. 시호는 충재(盅齋)이다.
<손중돈(孫仲暾)> 손소(孫昭)의 아들이다. 성품이 청렴하고 검소하였다.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참찬(叅'贊)에 이르렀다. �신증新增 시호는 경절(景節)이다. 연산군
(燕山君) 때에 말[言] 때문에 체포되었다가 중종(中宗) 때에 상주 목사(尙州牧使)에
임명되어 소문난 치적(治績)이 있어 포상을 받았다. 상주 백성들이 화상을 그려 생
전에 사당을 지었으며, 뒤에 상주 사람들이 따로 학사(學舍)를 세워 속수서원(涑水
書院)이라 명명하고 신우(申祐)와 함께 제향하였다. 사당은 경현사(景賢祠)라고 한
다. 【 이상은 여지승람(輿地勝覽) 에 나오며, 간간이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
輿地勝覽) 으로 보충하였다.】
<偰'長壽> 元朝崇文監丞遜之子也 遜於元季恭愍王時 避兵東來 長壽官至判三司事 後
仕本朝 請賜鄕貫 我太祖命以鷄林爲貫 〇<金稛> 因渭之後 太祖朝開國功臣 封鶏林君
諡齊肅 〇<李來> 存吾之子 登第 叅7佐命功臣 封鶏林君 配享太宗廟庭 〇<偰'循> 遜之
孫 博學能文 再登第 官至提學 〇<金孟誠> 稛之子 官至刑曹判書 諡僖敬 〇<金新民>
登第 官至知中樞院事 子升卿登第 官至刑曹叅'判 〇<李文炯> 登第 官至禮曹叅'判 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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姿玉裕 以文雅稱 〇<李尹仁> 益齋之後 登第 累官至平安道觀察使 〇<鄭孝常> 擢甲
戌科壯元 叅'翊戴佐理功臣 封鶏林君 〇<孫昭> 世祖朝登科 李施愛之亂 有功 策敵愾
功臣 封鶏川君 諡襄敏 〇<金永濡> 登第 官至刑曹叅'判 〇<金千齡> 魁丙辰科 官至直
提學 有才名 〇<崔淑生> 登弟 能詩文 尤工四六 號盅齋 〇<孫仲暾> 昭之子 性淸儉
登第 官至叅'贊 �新增 � 諡景節 燕山時 以言見逮 中廟朝 拜尙州牧 有聲績見褒 尙民圖
像立生祠 後州人別建學舎 號涑水書院 與申公祐並'享焉 祠號景賢 【以上出輿地勝
覽208) 而間以新增補之】
-신증新增 r
신라(新羅)
<김유신(金庾信)> 경주 사람으로 수로왕(首露王)의 13세손이다. 부친 서현(舒玄)
은 경진일(庚辰日) 밤에 형혹성(熒惑星)과 진성(鎭星) 두 별이 자기에게 내려오는
꿈을 꾸고, 모친 만명(萬明)은 동자(童子)가 황금 갑옷을 입고 구름을 타고 집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이윽고 임신하여 20개월 만에 낳았는데, 등에 칠성(七星) 무
늬가 있었다. 부친이 말하기를, “경(庚) 자와 유(庾) 자가 서로 비슷하고 진(辰)자와
신(信) 자가 음(音)이 서로 가까우며, 게다가 옛사람 가운데 유신(庾信)이라는 사람
이 있었음에랴” 하고, 드디어 유신이라고 이름 지었다. 장성하여 선덕(善德)ㆍ태종
(太宗)ㆍ문무(文武) 세 임금을 섬겼으며, 고구려와 백제를 통합하였다. 그 사적이
동사(東史) 본전(本傳)에 갖추어져 있다. 가정(嘉靖) 신유년(1561)에 사당을 세워
향사하고, 뒤에 인하여 서악서원(西岳書院)이라고 하였다.
<귀산(貴山)ㆍ추항(箒7項)> 둘 다 사량(沙梁)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서로 사이가
좋았고 같이 원광법사(圓光法師)에게서 세속오계(世俗五戒)를 배웠다. 그 첫째는 임
금을 충성으로 섬기고[事君以忠], 둘째는 어버이를 효도로 섬기며[事親以孝], 셋째
는 벗과 믿음으로 사귀고[朋友以信], 넷째는 싸움에 임해서는 물러서지 않으며[臨
戰無退], 다섯째는 생명을 죽이되 분별 있게 한다[殺生有擇]는 것이었다. 진평왕(眞
平王) 때에 백제가 크게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오자 왕이 장군 건품(乾品) 등으로 하
여금 막도록 하였는데, 귀산과 추항이 모두 소감(少監)으로 따라갔다. 신라의 군사
가 힘이 딸려 군사를 거두어 돌아가자, 귀산이 큰 소리로 외치기를, “내가 듣건대
군사는 싸움에 임하여 물러서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어찌 감히 달아나겠는가” 하
고, 부항과 함께 창을 휘두르며 분전하다 온몸에 상처를 입고 중도에서 죽었다.
<부과(夫果)․7취도(驟徒)․'핍실(逼實)> 형제 세 사람이 모두 사량 사람이다. 취도는
일찍이 출가하여 법명(法名)을 도옥(道玉)이라고 하였다. 태종 때에 백제가 쳐들어
오자 도옥이 그의 무리에게 말하기를, “내가 이미 학업을 정밀하게 하여 본성을 회
복하지 못하였으니, 종군(從軍)하여 몸 바쳐 나라에 보답하는 것만 못하다.” 하고,
208)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7경상도(慶尙道)」경주부(慶州府) 인물조(人物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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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法衣)를 벗고 군복을 입고서 ‘취도’라고 개명하였다. 그 뜻은 빨리 달려가 군인
의 무리가 된다는 의미이다. 드디어 군대를 따라 적진으로 달려가 창과 칼을 들고
돌격하여 분투하다가 죽었다. 뒤에 문무왕이 웅진(熊津)에서 백제와 싸우는데 부과
가 당주(幢主)로서 전사하였는데, 공을 논함에 으뜸이었다. 그 후 고구려의 잔적(殘
賊)들이 성을 점거하고 반란을 일으키자 신문왕이 핍실을 귀당(貴幢)으로 삼으니,
떠나기에 앞서 그 아내에게 말하기를, “나의 두 형이 이미 국사(國事)로 죽었는데
내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여 구차히 살 수 있겠는가? 오늘 당신과의 생이별이 결국
사별이 될 것이다.” 하였다. 급기야 적진과 대치하게 되자 단신으로 나가 분투하여
적 수십 명을 베어 죽이고 전사하였다.
<김흠춘(金欽春)> 사량(沙梁) 사람이다. 진평왕 때에 화랑이 되었는데, 매우 어질
고 신임이 두터워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얻었다. 문무왕이 승진시켜 총재(冢宰)로
삼으니, 충성스럽게 임금을 섬기고 너그럽게 백성을 대하여, 나라 사람들이 모두 어
진 정승이라고 칭송하였다.
<김반굴(金盤屈)> 각간(角干) 김흠춘의 아들이다. 태종왕 때에 당 나라 고종(高
宗)이 소정방(蘇定方)에게 명하여 백제를 정벌하게 하자, 김흠춘이 왕명을 받들어
군사를 거느리고 응전하였다. 황산벌에 당도하였는데 전세가 불리하자 김흠춘이 김
반굴을 불러 이르기를, “신하의 도리는 충성만한 것이 없고 자식된 도리는 효도만
한 것이 없는데, 위태로움을 보고 생명을 바쳐야 충성과 효도가 둘 다 온전하다.”
하니, 김반굴이 “네.”라고 대답하고는 적진에 돌입하여 분투하다가 전사하였다.
【이상은 삼국사(三國史) 에 나온다.】
<김영윤(金令胤)> 김반굴의 아들이다. 신문왕(神文王) 때에 고구려의 잔적 실복
(悉伏)이 성을 점거하고 반란을 일으키자 왕이 토벌할 것을 명하고 김영윤을 보기
감(步騎監)으로 삼았다. 장차 떠나려 하면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나의 이번 길에
서 종족(宗族)이나 붕우(朋友)에게 나쁜 소문을 듣게 하지 않겠다.” 하였다. 실복이
진을 치고 대비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어떤 사람이 고하기를, “궁지에 몰린 도적은
몰지 않는 법이니, 마땅히 왼쪽으로 옮겨 적의 피로가 극도에 달하기를 기다려 공
격해야 한다.” 하니, 김영윤이 말하기를, “싸움터에 임하여 용기를 내지 않는 것은
예경(禮經)에서 경계한 것이며, 전진만 할 뿐 후퇴하지 않는 것이 사졸의 떳떳한 분
수이다.” 하고, 드디어 적진으로 달려가 분투하다가 전사하였다. 왕이 그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리면서 이르기를, “그런 아비가 없으면 그런 아들이 없었을 것이다.” 하였
다.
<김흔(金昕)> 김양(金陽)의 사촌형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였다.
헌덕왕(憲德王)이 장차 당 나라에 사람을 들여보내려고 하였는데 적임자를 찾기 어
려웠다. 어떤 사람이 정신이 맑고 빼어나며 기개와 도량이 깊고 침착하다고 김흔을
추천하여, 마침내 입조(入朝)하도록 명하였다. 1년여 만에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자
황제가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를 제수하고, 헌덕왕은 왕명을 욕되게 하지 아니
하였다고 특별히 남원 태수(南原太守)에 임명하였다. 여러 번 승진하여 이찬 겸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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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伊飡兼相國)에 이르렀다. 뒤에 대장군이 되어 청해병(淸海兵)을 방어하다가 패전
하자, 스스로 목숨 바쳐 평정시키지 못하였다고 하여 더 이상 벼슬하지 않고 소백
산(小白山)에 들어가 갈포 옷을 입고 채소를 먹으며 여생을 마쳤다.【이상은 삼국
사(三國史) 에 나온다.】
<金庾信> 王京人 首露王十三世孫也 父舒玄 庚辰夜 夢熒惑鎭二星降於己 母萬明 夢
見童子衣金甲乘雲入堂 尋有娠 二十月而生 背有七星文 父曰 庚與庾字相似 辰與信聲
相近 況古人有名庾信 遂名之 及壯 事善德太宗文武三王 統合麗濟 事績具在東史本傳
嘉靖辛酉 立祠享之 後因以爲西岳書院 〇<貴山> <箒'項> 皆沙梁人也 少相善 同受五
戒於圓光法師 一曰事君以忠 二曰事親以孝 三曰交友以信 四曰臨戰無退 五曰殺生有擇
眞平王時 百濟大發兵來 王使將軍乾品等拒之 貴山箒7項並'以少監赴焉 羅軍力困 引還
貴山大言曰 吾聞士臨戰無退 豈敢奔北乎 與箒'項揮戈力鬪 金瘡満身 半路而卒 〇<夫
果> <驟徒> <逼實> 兄弟三人沙梁人也 驟徒嘗出家 名道玉 太宗時 百濟來伐 道玉語
其徒曰 吾旣不能精術業以復性 不如從軍殺身以報國 脫法衣 着戎服 改名驟徒 意謂馳
驟而爲徒也 遂随軍赴敵 持槍劍突陣 力鬪死之 後 文武王與百濟戰於熊津 夫果以幢主
戰死 論功第一 後 高句麗殘賊據城叛 神文王以逼實爲貴幢 臨行 謂其婦曰 吾二兄旣死
於國 吾何畏死而苟存乎 今日與爾生離 終是死別也 及對陣 獨出奮擊 斬殺數十人而死
〇<金欽春> 沙梁人 眞平王時 爲花郞 仁深信厚 能得衆心 文武王陟爲冢宰 事上以忠
臨民以恕 國人翕然 稱爲賢相 〇<金盤屈> 角干欽春子也 太宗時 唐高宗命蘇定方伐百
濟 欽春受王命 率兵應之 至黃山原 戰不利 欽春召盤屈曰 爲臣莫若忠 爲子莫若孝 見
危致命 忠孝兩全 盤屈曰唯 乃入賊陣 力戰死之【以上出三國史】〇<金令胤> 盤屈子
也 神文王時 高句麗殘賊悉伏以城叛 王命討之 以令胤爲步騎監 將行 謂人曰 吾此行也
不使宗族朋友聞惡聲 及見悉伏結陣以待 或告曰 窮寇勿迫 宜左次以待 疲極而擊之 令
胤曰 臨戰無勇 禮經之所譏 有進無退 士卒之常分 遂赴敵 格鬪而死 王聞之 流涕曰 無
是父 無是子 〇<金昕> 陽之從父兄也 幼而聰悟好學 憲德王將遣人入唐 難其人 或薦
昕精神朗秀氣宇深沉遂令入朝 歲餘還 皇帝詔授金紫光祿大夫 王以不辱命 特授南原太
守 屢遷至伊飡兼相國 後爲大將軍 禦淸海兵 敗績 自以不能死綏 不復仕宦 入小白山
葛衣蔬食以終其身 【以上三國史】
고려(高麗)
<이달존(李達尊)> 자(字)는 천각(天覺)이다.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아들이
며, 문사(文詞)에 능하였다. 충숙왕(忠肅王) 때에 급제하여 헌납(獻納)에 올랐다. 충
혜왕(忠惠王)이 원 나라에 갈 때에 부친과 함께 시종하였다. 왕이 복위(復位)하자
전리총랑(典理摠郞)에 임명되었는데, 환국하는 도중에 죽으니 나이 28세였다. 【이
상은 고려사(高麗史) 「'열전(列傳)」7에 나온다.】
<李達尊> 字天覺 益齋之子也 工文詞 忠肅朝登第 陞獻納 忠惠如元 與父從之 王復
位 授典理摠郞 東還 道卒 年二十八 【以上出高麗史列傳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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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조(本朝)
<이원익(李元益)> 이제현의 손자이다. 벼슬이 대사성(大司成)에 이르렀다. 급제한
연대를 고증할 수 없으며, 문과문(文科門)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선(李瑄)> 이원익의 아들이다. 벼슬이 판서에 이르렀다. 급제한 연대를 고증할
수 없으며, 과목문(科目門)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지대(李之帶)> 이선의 아들이다.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벼슬이 한성 판윤(漢
城判尹)에 이르렀다.
<이종윤(李從允)> 경주부 남쪽 월남리(月南里)에 거주하였다. 급제하여 양사(兩
司)를 역임하였고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제주 목사(濟州牧使)가 되었는데
임지에서 죽었다. 성품이 청렴하고 검소하며 드러내지 않아 옛사람의 기풍이 있었
다. 청백리로 일컬어졌다. 제주명환기(濟州名宦記) 에, “정사를 청렴하고 간략하게
하기를 숭상하여 아전들이 사랑하고 백성들이 기꺼워하였다. 임기가 만료되자 상소
하여 유임을 요청하였는데 마침내 임지에서 죽으니, 사람들이 몹시 애석해하였다.”
하였다.
<이번(李蕃)> 자(字)는 숙한(叔翰)이다. 안강현(安康縣) 양좌동(良佐洞)에 거주하
였다. 자품(資稟)이 수려하고 남달랐으며 용모가 단정하였다. 약관(弱冠)의 나이로
부(府)의 학교에 유학하였는데, 스승을 따르고 벗을 가려 사귀었으며 경학(經學)에
통하고 문사(文詞)에 능하였으며, 필법 또한 묘하였다. 성종(成宗)이 남도(南道) 도
회(都會)의 유제(儒製)를 보다가 이번이 장원한 글 두어 편(篇)을 보고 가상하게 여
겨 즉시 역마에 태워 대궐로 오도록 명하고는 종이와 붓을 주어 다시 시험 보이고
의복과 음식을 하사하였다. 또 국학(國學)에 머물러 허락하여 학업을 마치도록 허락
하니, 많은 선비들이 영화롭게 여겼다. 홍치(弘治) 을미년(1495)에 사마시(司馬試)
에 합격하였다. 언적(彦迪)이라는 아들을 두었으니, 바로 회재선생(晦齋先生)이다.
<이언적(李彦迪)> 자는 복고(復古)이고, 이번의 아들이다. 정덕(正德) 계유년
(1513) 중종(中宗) 때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갑술년(1514)에 급제하여 벼슬이 좌찬
성(左贊成)에 이르렀다. 영의정을 추증하였으며 시호는 문원공(文元公)이다. 명종(明
宗)의 묘정(廟庭)에 배향하였으며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였다. 문집 5권과 구경
연의(九經衍義) · 구인록(求仁錄) · 대학보유(大學補遺) · 봉선잡의(奉先雜儀) 등의
저서가 세상에 전해온다. 호는 회재선생이다.
<조한보(曺漢輔)> 호는 망기당(忘機堂)이다. 옛글을 박람하고 문학에 종사하였는
데 소견이 선학(禪學)으로 흐르자 회재선생이 글을 지어 변론하였다.
<김순(金洵)>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승지(承旨)에 이르렀다. 회재선생이 강계
(江界)로 유배갔을 때에 김순이 만포 첨사(滿浦僉使)가 되었다. 병이 위중하자 선생
이 말하기를, “명예는 매우 좋지 못한 것이어서 조물주가 모두 해치려고 하는데, 이
209) 고려사(高麗史) 권110 「'열전(列傳)」이제현조(李齊賢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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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명예가 많으니 대단히 염려스럽다.” 하였다.
<이응인(李應仁)> 회재 선생의 사자(嗣子)이다. 8세에 생모 이씨(李氏)의 부고(訃
告)를 듣고 매우 슬프게 곡하였다. 하루는 이질을 앓는데 너무 괴로워하므로 온 가
족이 위태롭게 여기고 고기 먹기를 권유하여도 듣지 않아 이튿날 아침에 석이버섯
국을 주었더니, 이응인이 어려서 아직 본 적이 없어 소 천엽인 줄 알고 먹지 않았
다. 과거에 모친 이씨가 옷을 벗어 보내주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늘 옷을 만지며
울면서 말하기를, “우리 어머니 옷이다.” 하며 어머니를 끊임없이 그리워하였다. 양
모 박 부인(朴夫人)이 등을 어루만지며 울음을 그치게 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너의
어머니이고 죽은 사람은 숙모이다.” 하니, “이분도 어머니이고 그분도 어머니입니
다.”라고 대답하였다. 회재 선생이 이 말을 듣고 기특하게 여겼다. 뒤에 처음으로
벼슬을 하여 여러 번 고을의 책임을 맡았는데, 가는 곳마다 소문난 치적(治績)이 있
었다.
<손엽(孫曄)> 손중돈(孫仲暾)의 손자이다.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남달랐으며 일찍
부터 뛰어나다는 소문이 있었다. 문장이 민활하고 풍부하였으며 특히 시를 잘하였
다. 명종(明宗)이 경주 고을에 인재가 많다 하여 특명으로 경관(京官)을 파견해 ‘신
라옥적(新羅玉笛)’이라는 글제로 제생(諸生)들을 시험하였다. 당시 손엽이 15세였는
데, 시관(試官)이 손엽이 지은 글을 보고 기특하게 여겨 높은 등수로 뽑으니, 이때
부터 이름이 알려졌다. 선조(宣祖) 무진년 (1568)에 진사(進士)가 되었고 더욱 글
짓는 데 노력하여 누차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급제하지 못하였다. 뒤에 집경전 참봉
(集慶殿叅'奉)에 임명되었다.
<최진립(崔震立)> 경주부 남쪽 이조촌(伊助村)에 거주하였으며, 청백리(淸白吏)
사성(司成) 최예(崔汭)의 7세손이다. 만력(萬曆) 임진왜란 때 분연히 학업을 놓고 일
어나 왜적을 많이 죽여 전공을 세웠다. 뒤에 무과에 급제하여 전후로 지낸 직임에
모두 소문난 치적이 있었다. 청백리로 존숭되었고 벼슬이 공조 참판과 부총관(副摠
管)에 이르렀다. 병자호란(丙子胡亂)에 공주 영장(公州營將)이 되어 군사를 거느리
고 난을 치러 갔는데 감사 정세규(鄭世規)가 그의 연로함을 민망히 여겨 황박(黃珀)
으로 대치하게 하고 뒤에 남도록 하니, 최진립이 분연히 말하기를, “근력은 비록 쇠
했으나 뜻은 과혁(裹'革)210)에 있다.” 하고, 눈물을 뿌리며 따라갔다. 용인(龍仁)의
험천(險川)에 이르자 왜적이 철기(鐵騎)로 육박하니, 최진립이 진(陣) 앞에 우뚝 서
서 활을 쏘면 반드시 적을 죽였다. 전군(前軍)이 궤멸되어 종자(從者)가 사태가 다
급해졌다고 고하니, 최진립이 말하기를, “나는 죽을 곳을 찾았다.” 하고, 마침내 죽
었다. 인조(仁祖) 때에 병조 판서를 추증하고, 그 마을에 정문(旌門)을 세우도록 명
하였고, 그의 아들 최동량(崔東亮)에게 벼슬을 주었다. 효종(孝宗) 때에 ‘정무(貞武)’
로 증시(贈諡)하였다.
<정극후(鄭克後)> 안강현(安康縣) 남쪽 곤계산(昆季山) 아래에 살았다. 쌍봉노인
(雙峯老人)이라 자호(自號)하였으며, 정습명(鄭襲明)의 후손이다. 독실하게 배우고
210) 과혁(裹'革)은 말가죽으로 시신을 싼다는 뜻으로, 전쟁터에서 죽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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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써 실천하였으며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문하(門下)에 유학(遊學)하였다. 어
린 나이에 문학으로 이름을 세상에 드날렸다. 자주 과거에 응시했으나 합격하지 못
하였고, 만년에는 문장을 수련하고 저술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았다. 서악지
(西岳志) · 역년통고(歷年通考) 가 모두 이미 간행되었으며, 저술한 책 약간 권이 집
에 수장되어 있다. 문학과 덕행으로 천거되어 사부(師傅)가 되었다.
<문응성(文應星)> 경주부 북쪽 흑림촌(黑林村)에 살았다. 강성군(江城君) 문익점
(文益漸)의 후손이다. 임진년에 왜구가 갑자기 침략하여 경주부가 왜적의 통로가 되
었다. 초기에 공사(公私) 간에 황급하여 뿔뿔이 달아나는데, 문응성이 그런 와중에
주선하여 성전(聖殿) 동서무(東西廡의 위판(位板)을 자옥산(紫玉山) 속에 임시로 봉
안하여 끝까지 보호될 수 있었다. 난이 평정된 뒤 특별히 참봉(叅'奉)에 임명되었다.
<최낙(崔洛)> 경주부의 아전(衙前)이다. 문재(文才)와 필재(筆才)가 모두 풍부하고
사려가 원대했다. 임진왜란에 사람들은 모두 목숨을 구하고자 겨를이 없었는데, 최
낙은 그런 상황에서 주선하여 동도(東都)의 사적(事蹟)에 대한 문적(文籍)을 짊어지
고 아주 궁벽한 곳에 감추어 두었다. 그리하여 천년의 고적(古迹)이 병화(兵火)와
약탈 속에서도 보존되어 후인의 참고자료가 될 수 있었으니, 그 공로는 옛사람이
땅을 파고 사서(史書)를 감추어둔 것보다 못하지 않다. 이에 인물(人物) 끝부분에
기록하여 후인이 보고 느낄 거리로 삼는다.
<李元益> 益齋之孫 官至大司成 登第年代不可攷 不錄於文科門 〇<李瑄> 元益之子
官至判書 登第年代不可攷 不錄於科目門 〇<李之帶> 瑄之子 登武科 官至漢城判尹
〇<李從允> 居府南月南里 登第 歷兩司 陞通政 爲濟州牧 卒于官 性質淸儉 不爲表襮
有古人風 以淸白見稱 濟州名宦記云 政尙淸簡 吏愛民悅 考満 上書請留 竟卒于官 人
甚惜之 〇<李蕃> 字叔翰 居安康縣良佐洞 資禀'秀異 儀容端正 弱冠遊府庠 從師取友
通經學 工文詞 筆法亦妙 成廟見南道都會儒製 得蕃居魁數篇 嘉賞之 即'命乘傳赴闕 給
紙筆 更試之 賜衣食 具許留國學 使卒其業 多士榮之 弘治乙卯中司馬 有子曰彥迪 即'
晦齋先生 〇<李彦迪> 字復古 蕃之子也 正德癸酉中廟朝 中司馬 甲戌登第 官至左贊
成 贈領議政 文元公 配享明宗廟庭 從祀文廟 有文集五巻 九經衍義求仁錄大學補遺奉
先雜儀等書行于世 號晦齋先生 〇<曺漢輔> 號忘機堂 博覧古書 從事文學 而所見流於
禪學 晦齋先生作書以辨之 〇<金洵> 登武科 官至承旨 晦齋先生謫江界時 洵爲満浦僉
使 病重 先生曰 名譽甚不好 造物皆欲害之 此人亦多名譽 甚可慮也云 〇<李應仁> 晦
齋先生之嗣子也 八歲聞生母李氏訃 哭甚哀 一日患痢頗苦 擧家危之 勸肉不從 翌朝進
石茸羹 應仁幼未嘗見 錯認牛千葉 不食 初 母李氏解衣送之 至是 每泣且摩曰 吾母衣
也 念母不已 母朴夫人撫背 止其泣曰 我是汝母 亡者即7叔母也 對曰 此亦母 彼亦母也
晦齋聞而奇之 後筮仕 屢典縣邑 所至有聲績 〇<孫曄> 仲暾之孫 幼頴異 早有俊聲 其
爲文敏贍 尤長於詩 明廟以慶邑人材之盛 特命新羅玉笛爲題 發遣京官 試諸生 時 曄年
十五 考官得曄所製 奇之 擢置高等 由是知名 宣廟朝戊辰 成進士 益自力爲文 屢擧不
第 後除集慶殿叅7奉 〇<崔震立> 居府南伊助村 淸白吏司成汭七世孫也 萬曆壬辰之變
慨然投筆 多殺倭賊 立戰功 後登武科 前後歷職皆有聲績 以淸白見重 官至工曹叅'判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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摠管 丙子之亂 爲公州營將 將領兵赴難 監司鄭世規愍其年老 以黃珀代之 令落後 震立
慨然曰 筋力雖衰 志在裹'革 揮泣從行 至龍仁險川 賊以鐵騎蹙之 震立特立陣前 射必殪
之 先軍潰 從者以事急告 震立曰 吾得死所矣 遂死之 仁祖朝 贈兵曹判書 命旌其閭 官
其子東亮 孝宗朝 贈諡貞武 〇<鄭克後> 居安康南昆季山下自號雙峯老人 襲明之後 篤
學力行 遊學旅軒之門 早歲以文學名世 累擧不第 晩年專以攻文著書爲己任 西岳志歷年
通考皆已刊行 所述若干卷藏於家 以文行薦爲師傅 〇<文應星> 居府北黑林村 江城君
益漸後也 壬辰 倭寇猝發 本府爲賊路 初頭 公私蒼黃奔潰 而應星周旋其間 權奉聖殿東
西廡'位板于紫玉山中 終始保護 亂定後 特除參奉 〇<崔洛> 本府椽吏也 文筆俱贍 計
盧長遠 壬辰之亂 人皆偸生不暇 而洛周旋其間 擔運東都事蹟案 藏置於深僻地 使千年
往迹得保於兵火搶'攘中 以資後人考據 功不下古人之掘地藏史 玆錄於人物之下 以爲來
者觀感之地云爾
동경잡기 권3
우거(寓居)
고려(高麗)
<오세재(吳世才)> 자는 덕전(德全)이니, 고창현(高敞縣)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배
움에 힘써 육경(六經)을 필사(筆寫)하여 읽었으며, 날마다 주역(周易) 을 외웠다.
오세재는 이인로(李仁老)ㆍ임춘(林椿)ㆍ조통(趙通)ㆍ황보항(皇甫抗)ㆍ함순(咸淳)ㆍ이
담지(李湛之) 등과 더불어 스스로 당대의 호걸이라 하여 결의(結義)하여 벗이 되니,
‘칠현(七賢)’이라 일컬었다. 술을 마실 때마다 시를 지었으며 방약무인(傍若無人)하
였다. 명종(明宗) 때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성품이 소탈하고 준일하였으며 검속함이
적어 세상에 받아들여지지 못하였다. 동경(東京 경주(慶州))에 우거(寓居)하여 곤궁
하게 살다가 죽었다. 이규보(李奎報)가 사사로이 시호를 지어 ‘현정(玄静)’이라 하였
다. 【 고려사(高麗史) 「'열전(列傳)」7에 나온다.】
<안치민(安置民)> 자는 순지(淳之)이고 호는 기암(棄菴)이다. 은거하여 출사(出仕)
하지 않았다. 이규보가 정동성(征東省)의 막료(幕僚)로 있을 때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주었다.
고아한 시는 황정견의 시체보다 뛰어나고 詩高全勝庭堅軆7
풍부한 문장은 유자후의 풍도가 남아있네 文贍猶存子厚風
아쉬워라 나라를 빛내는 솜씨를 이루지 못한 채 但恨未成華國手
초야에서 읊조리며 가을벌레 소리를 배우는 것이 草間呼呌學秋蟲
또 한 수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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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썹은 실처럼 드리워졌고 眉毛垂似絲
눈동자는 물처럼 맑네 眸子烱如水
내 방덕공211)을 보지 못했으나 我不見龐公
그대를 보니 그인가 싶네 見君疑即7是
【 여지승람(輿地勝覽) 에 나온다.】
<吳世才> 字德全 高敞縣人 少力學 手寫六經以讀 日誦周易 世才與李仁老林椿趙通
皇甫抗咸淳李湛之等 自以爲一時豪俊 結爲友 稱七賢 每飮酒賦詩 傍212)若無人 明宗時
登第 性踈7雋少檢 不容於世 僑寓東京 窮困而卒 李奎報私謚曰 玄靜 【出麗史列
傳213)】<安置民> 字淳之 號棄菴隱居不仕 李奎報在征東幕 贈詩曰 詩高全勝庭堅軆7
文贍猶存子厚風 但恨未成華國手 草間呼呌學秋蟲 又眉毛垂似絲 眸子烱如水 我不見龐
公 見君疑即'是 【出輿地勝覽214)】
�신증(新增) - 본조(本朝)
<김시습(金時習)> 자는 열경(悅卿)이다. 유양양(柳襄陽)에게 올린 글에 이르기를,
“나는 을묘년(1435, 세종 17)에 경도(京都) 반궁(泮宮 성균관(成均館))의 북쪽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지 8개월 만에 글자를 알았으며, 3세에는 글을 엮었다. 그리하여
영묘(英廟 세종의 묘호(廟號))께서 대언사(代言司) 승정원))에 불러 지신사(知申事
박이창(朴以昌))가 무릎 위에 안고 시험하였는데, 글을 짓고 시를 지은 것이 적지
않았다. 곧 입계(入啓)하니, 물건을 하사하였다.” 하였다. 김시습이 5세 때, 세종(世
宗)이 대궐 안으로 불러들여 운자(韻字)를 부르며 삼각산(三角山)에 대한 절구(絶句)
를 짓도록 하였는데, 즉시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우뚝 솟은 세 봉우리 하늘을 꿰뚫으니 束聳三峯貫太淸
올라가면 두성 우성 딸 수 있으리라 登臨可摘斗牛星
멧부리는 구름과 비를 일으킬 뿐만 아니라 非徒岳峀興雲雨
국가를 만세토록 편안하게 할 것이네 能使邦家萬世寧
이에 세종이 가상하게 여기고 찬탄하여 물건을 하사하여 포상하였다. 세조(世祖)
가 즉위한 뒤 거짓으로 미친 척하고 중이 되었는데, 불법(佛法)에 얽매이지 않았다.
211) 방덕공(龐德公)으 후한(後漢)의 은사(隱士)로, 유표(劉表)로부터 수차의 부름을 받고도 끝내 나가지 않
고 현산(峴山) 기슭에서 농사 짓고 살았으며, 뒤에는 처자(妻子)를 거느리고 녹문산(鹿門山)으로 들어가
약초를 캐며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후한서(後漢書) 권83
212) 중간본에는 旁으로 되어 있다.
213) 고려사(高麗史) 권102 「'열전(列傳)」이인로조(李仁老條)
214)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경상도(慶尙道)」경주부(慶州府) 우거조(寓居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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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한(淸寒)’이라 자호(自號)하였으며, 또 다른 호는 ‘매월당(梅月堂)’이다. 성리(性
理)ㆍ음양(陰陽)ㆍ의술(醫術)ㆍ복술(卜術)ㆍ백가(百家)에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
다. 문장(文章) 드넓고 자유분방하였으며, 저술한 매월당시집(梅月堂詩集) ㆍ 역대
년기(歷代年紀) ㆍ 금오신화(金鰲新話) 가 세상에 유행하였다. 나라 안의 명산대천
(名山大川)을 두루 유람하였으며, 금오산(金鰲山)에다 집을 짓고 살았다. 일찍이 자
화상(自畵像)을 그리고 다음과 같은 찬(贊)을 지었다.
이하215)를 굽어보니 俯視李賀
해동에 빼어났도다 優於海東
헛된 명예를 드날리니 騰名謾7譽
아! 너는 누구를 만났는가 於爾孰逢
네 모습 지극히 묘하고 爾形至妙
네 말은 몹시 허황되니 爾言大侗7
너를 버려둠은 宜爾置之
산골짝 속이 마땅하리로다 丘壑之中
【일이 본전(本傳)에 보인다.】
<金時習> 字悅卿 上柳襄陽書曰 僕乙卯年 生京都泮宮之北 生八月能知書 三歲能綴
文 英廟召于代言司 知申事抱于膝上 作文作詩不少 即'入啓 賜物云 時習五歲 世宗召入
內 呼韻令製三角山絶句 卽賦云 束聳三峯貫太靑 登臨可摘斗牛星 非徒岳峀興雲雨 能
使邦家萬世寧 上嘉歎 賜物褒之 世祖即7位之後 佯狂爲僧 不拘禪律 自號淸寒 又號梅月
堂 性理陰陽醫卜百家 無不通解 文章浩汗自肆 所著梅月堂詩集 歷代年紀 金鰲新話 行
于世 遍遊國內名山大川 因卜築於金鰲山以居之 嘗手寫其像 作贊曰 俯視李賀 優於海
東 騰名謾'譽 於爾孰逢 爾形至妙 爾言大侗宜爾置之 丘壑之中【事見本傳】
과목(科目)
문과(文科)
<최예(崔汭)> 홍무(洪武) 계유년 태조(太祖) 때 대과에 급제하였고, 벼슬은 사성
(司成)에 이르렀다.
<윤통(尹統)> 영락(永樂) 갑오년 태종(太宗) 때 대과에 급제하였고, 벼슬은 참판
(叅'判)에 이르렀다.
<손소(孫昭)> 경태(景泰) 계유년 노산(魯山 단종(端宗)) 때 생원(生員)ㆍ진사(進
士) 양시(兩試)에 합격하였고, 천순(天順) 기묘년 세조(世祖) 때 대과에 급제하였다.
215) 이하(李賀)는 당(唐)나라의 종실(宗室)로 자는 장길(長吉)이다. 나이 일곱에 문장에 능하다는 소문이
났는데, 당시의 문장가였던 한유(韓愈)와 황보식(皇甫湜)이 믿지 않고 직접 찾아가 시를 짓게 하였더니,
즉석에서 ‘고헌과(高軒過)’라는 시를 지어 귀빈이 찾아왔다는 뜻을 읊었다. 27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
였다. 당서(唐書) 「'이하전(李賀傳)」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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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문(人物門)에 보인다.】
<이종윤(李從允)> 천순(天順) 임오년 세조 때에 생원ㆍ진사 양시에 합격하였고,
성화(成化) 무자년에 대과에 급제하였다. 【인물문에 보인다.】
<황정(黃玎)> 성화 갑오년 성종(成宗) 때 대과에 급제하였고, 벼슬은 정언(正言)
에 이르렀다.
<손중돈(孫仲暾)> 홍치(弘治) 기유년 성종 때에 대과에 급제하였다. 【인물문에
보인다.】
<이철명(李哲明)> 홍치 을묘년 연산군(燕山君) 때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갑자년에
대과에 급제하였으며, 벼슬은 예조좌랑(禮曹佐郞)에 이르렀다.
<신맹경(辛孟卿)> 홍치 갑자년 연산군 때 대과에 급제하였고, 벼슬은 예조정랑(禮
曹正郞)에 이르렀다.
<이언적(李彦迪)> 정덕(正德) 계유년 중종(中宗) 때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갑술년
에 대과에 급제하였다. 이분이 바로 회재 선생(晦齋先生)이다. 【인물문에 보인다.】
<이을규(李乙奎)> 알평(謁平)의 후손이다. 가정(嘉靖) 신묘년 중종 때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을미년에 대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며, 벼슬은 승문원 교리(承文院校
理)에 이르렀다.
<김세량(金世良)> 정덕 기묘년 중종 때 생원시에 합격하였는데 이을규(李乙奎)
방(榜)에 2등으로 올랐으며, 벼슬은 군수(郡守)에 이르렀다. 세량은 겸양하고 공손
하였으며 문장과 행실이 뛰어나 회재 선생이 깊이 허여하였다. 회재 선생이 강계(江
界)로 귀양 갔을 때 세량은 진해(鎭海) 수령으로 있었다. 하루는 꿈속에서 선생을
뵈었는데 선생이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주었다.
신발을 침상 아래 던지고 떠나니 投履床下去
정기가 하늘과 통하누나 精氣與天通
담담히 한 초목 속에서 淡然一草裡
홀로 신선봉을 노니누나 獨遊神仙峯
깜짝 놀라 깨어나 목 놓아 통곡하고 그 자식에게 말하기를, “선생께서 돌아가셨
다.” 하였는데, 후에 들으니 과연 돌아가신 날이었다.
<권덕린(權德麟)> 회재 선생의 제자로, 문예(文藝)로 저명하였다. 가정 계축년 명
종 때 대과에 급제하였고, 벼슬은 군수에 이르렀다.
<이의활(李宜活)> 판관(判官) 응인(應仁)의 아들로, 만력 계축년 광해군 때 생원
시에 합격하였고, 무오년에 대과에 급제하였으며, 벼슬은 군수에 이르렀다.
<김종일(金宗一) 천계(天啓) 갑자년 인조(仁祖) 때 생원ㆍ진사 양시에 합격하였고,
이듬해에 별과(別科)에 장원하였으며, 일찍이 양사(兩司)216)의 옥당(玉堂)을 지냈다.
지금 살아 있다.
216)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을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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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구징(李耈徵)>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호)의 후손으로, 부사(府使) 경한
(景漢)의 손자이다. 인조 을묘년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효종(孝宗) 정유년에 대과
에 급제하였으며, 일찍이 예조좌랑을 지냈다. 지금 살아 있다.
<崔汭> 洪武癸酉 太祖朝登第 官至司成 ○<尹統> 永樂甲午 太祖朝登第 官至參判
○<孫昭> 景泰癸酉 魯山朝中司馬兩試 天順己卯 世祖朝登第【見人物門】○<李從允>
天順壬午 世祖朝中司馬兩試 成化戊子登第【見人物門】○<黃玎> 成化甲午 成宗朝登
第 官至正言 ○<孫仲暾> 弘治己酉 成宗朝登第【見人物門】○<李哲明> 弘治乙卯燕
山朝中進士 甲子登第 官至禮曹佐郞 ○<辛孟卿> 弘治甲子燕山朝登第 官至禮曹正郞
○<李彦迪> 正德癸酉 中宗朝中生員 甲戌登第 卽晦齋先生也【見人物門】○<李乙奎>
謁平之後 嘉靖辛卯 中宗朝中進士 乙未登科壯元 官至承文院校理 ○<金世良> 正德己
卯 中宗朝中生員 登李乙奎榜第二 官至郡守 世良謙恭 有文行晦齋先生深許可 先生謫
江界 世良爲鎭海倅一日夢見先生 先生贈詩曰 投履床下去 精氣與天通 淡然一草裡 獨
遊神仙峯 驚覺號泣 語其子曰 先生逝矣 後聞之 果易簀7日也 ○<權德麟> 晦齋先生門
弟 以文藝聞 嘉靖癸丑明宗朝登第 官至郡守 ○<李宜活> 判官應仁之子 萬曆癸丑光海
朝中生員 戊午登第 官至郡守 ○<金宗一> 天啓甲子仁祖朝 俱捷司馬兩試 翌年登別科
壯元 曾經兩司玉堂 今在 ○<李耈徵> 益齋之後 府使景漢之孫 仁祖朝己卯中進士 孝
宗朝丁酉登第 曾經禮曹佐郞 今在
무과(武科)
<이지대(李之帶)>
<임몽서(任夢瑞)> 벼슬이 현감(縣監)에 이르렀다.
<최경천(崔擎天)> 벼슬이 감찰(監察)에 이르렀다.
<이원림(李元林)> 지대(之帶)의 손자로, 벼슬이 군수에 이르렀다.
<이통(李通)> 회재 선생의 종제(從弟)로, 벼슬이 경력(經歷)에 이르렀다.
<이운(李運)> 통(通)의 동생으로, 벼슬이 만호(萬戶)에 이르렀다.
<이경해(李景海)> 익재의 후손으로, 지대(之帶)의 5세손이다. 젊어서 유학(儒學)을
공부하여 문예(文藝)로 칭송 받았다. 임진왜란 때 의를 떨쳐 왜적을 토벌하여 전공
(戰功)을 많이 세웠으며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벼슬이 주부(主簿)에 이
르렀다.
<이경한(李景漢)> 경해(景海)의 동생이다. 임진왜란 때 왜적을 토벌하여 전공을
많이 세웠으며, 이괄(李适)의 난에 원종공신에 책록되었다. 벼슬이 자헌대부(資憲大
夫)에 이르렀으며, 누차 부사(府使)에 임용되었다. 후에 숭정판중추부사(崇政判中樞
府事)에 추증되었다.
<이경호(李景湖)> 경한(景漢)의 동생이다. 임진왜란 때 좌병영 우후(左兵營虞候)
로 전쟁을 감독하고 왜적을 토벌하여 가는 곳마다 대부분 승리하였다. 원종공신에
책록되었으며, 이름난 무인으로 칭송 받았다. 벼슬이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이르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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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네 고을을 역임했다.
<이경택(李景澤)> 경호(景湖)의 동생으로, 벼슬이 주부(主簿)에 이르렀다.
<권사악(權士諤> 군수 덕린(德麟)의 조카다. 젊어서 유학을 공부하여 문예로 칭
송받았으며, 누차 향시(鄕試)에 합격하였다. 임진왜란 때 붓을 던지고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의를 떨쳐 왜적을 토벌하여 전공을 많이 세웠으며, 원종공신에 책록되었
다. 벼슬이 현령에 이르렀다.
<손시(孫時)> 중돈(仲暾)의 손자로, 벼슬이 판관(判官)에 이르렀다.
<손종로(孫宗老)> 시(時)의 아들로, 벼슬이 현감에 이르렀다. 병자호란 때 쌍령(雙
嶺)에서 전사하였다.
<신계영(申繼榮)> 벼슬이 현감에 이르렀다.
<신사충(申士忠)> 계영(繼榮)의 증손으로, 벼슬이 주부에 이르렀다.
<이지(李地)> 벼슬이 현감에 이르렀다.
<신상뢰(辛商賚)> 예조정랑 맹경(孟卿)의 후손이다. 계해년 인조반정 때 2등으로
녹훈(錄勳)되어 통정대부로 승진하였으며, 벼슬이 부사에 이르렀다.
<금덕화(琴德華)> 무예가 절륜하였으며, 벼슬이 현감에 이르렀다.
<이몽량(李夢亮)> 벼슬이 군수에 이르렀다.
<이준(李浚)> 회재 선생의 서손(庶孫)이다. 제현(諸賢)들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선
생문집의 서발(序跋)을 두루 구하여 이로써 칭찬 받았다. 통정대부로 승진하였으며,
벼슬이 군수에 이르렀다.
<이용(李容)> 준(浚)의 아들로, 벼슬이 주부에 이르렀다. 후에 늙었다고 하여 절
충장군(折衝將軍)으로 승진하였다.
<이홍정(李弘浄)> 을규(乙奎)의 아들로, 벼슬이 만호에 이르렀다.
<정기룡(鄭奇龍)> 벼슬이 판관에 이르렀다.
<이희룡(李希龍)> 벼슬이 감찰에 이르렀다.
<최봉천(崔奉天)> 【충의문(忠義門)에 보인다.】
<최진립(崔震立)> 【인물문(人物門)에 보인다.】
<최계종(崔繼宗)> 진립(震立)의 동생으로, 벼슬이 현감에 이르렀다.
<오담(吳湛)> 부친상에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으며, 벼슬이 주부에 이르렀다.
<이방린(李芳隣)> 벼슬이 판관에 이르렀다.
<이덕룡(李德龍)> 벼슬이 현감에 이르렀다.
<조위(曹緯)> 벼슬이 주부에 이르렀다.
<이용갑(李龍甲)> 지대(之帶)의 6세손으로, 벼슬이 만호에 이르렀다.
<주세심(朱世諶)> 벼슬이 만호에 이르렀다.
<김세범(金世範)> 아홉 고을을 역임했다.
<김호(金虎)> 【충의문에 보인다.】
<이승형(李升亨)> 벼슬이 첨사(僉使)에 이르렀다.
<김세적(金世績)> 벼슬이 만호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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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남(李應男)> 벼슬이 현감에 이르렀다.
<이보신(李輔臣)> 벼슬이 군수에 이르렀다.
<최희창(崔希昌)> 벼슬이 만호에 이르렀다.
<박홍원(朴弘遠)> 벼슬이 첨사에 이르렀다.
<김우적(金禹績)> 벼슬이 만호에 이르렀다.
<신제립(辛悌立)> 벼슬이 만호에 이르렀다.
<최국성(崔國成)> 계종(繼宗)의 손자로, 전(前) 행현감(行縣監)이다. 지금 살아 있
다.
<손흠(孫欽)> 종로(宗老)의 아들로, 전 행첨사(行僉使)이다. 지금 살아 있다.
<김대일(金大鎰)> 전 행만호(行萬戶)이다. 지금 살아 있다.
<오필환(吳必寏)> 시임(時任) 만호이다.
【본부(本府)에서 무과에 급제한 이가 많지 않은 것은 아니나 번거로워 모두 기록
하지 않고, 단지 6품 이상만 기록하였다.】
<李之帶> ○<任夢瑞> 官至縣監 ○<崔擎天> 官至監察 ○<李元林> 之帶之孫 官至
郡守 ○<李通> 晦齋先生從弟 官至經歷 ○<李運> 通之弟也 官至萬戶 ○<李景海>
益齋之後 之帶之五代孫 少業儒以文藝稱 壬辰之亂 奮義討賊 多立戰功 錄原從功 官至
主簿 ○<李景漢> 景海之弟 壬辰之亂 討賊功多 賊适之變 錄原從功 官至資憲 累任府
使 後贈崇政判中樞 ○<李景湖> 景漢之弟 壬辰之亂 以左兵營虞侯 督戰討賊 所向多
捷 錄原從功 見稱名武 官至通政 歷典四邑 ○<李景澤> 景湖之弟 官至主簿 ○<權士
諤 郡守德麟之從子 少業儒以文藝稱 累中鄕解 壬辰之亂 投筆登武科 奮義討賊 多立
戰功 錄原從功 官至懸令 ○<孫時> 仲暾之孫 官至判官 ○<孫宗老> 時之子 官至縣監
丙子之戰 死於雙嶺 ○<申繼榮> 官至縣監 ○<申士忠> 繼榮之曾孫 官至主簿 ○<李
地> 官至縣監 ○<辛商賚> 正郞孟卿之後 癸亥反正錄勳二等 陞通政 官至府使 ○<琴
德華> 武藝絶倫 官至縣監 ○<李夢亮> 官至郡守 ○<李浚> 晦齋先生庶孫 出入諸賢門
下 偏求先生文集序跋 以此見稱 陞通政 官至郡守 ○<李容> 浚之子 官至主簿 後以老
陞折衝 ○<李弘浄> 乙奎之子 官至萬戶 ○<鄭奇龍> 官至判官 ○<李希龍> 官至監察
○<崔奉天>【見忠義門】○<崔震立>【見人物門】○<崔繼宗> 震立之弟 官至縣監 ○
<吳湛> 父喪盧墓三年 官至主簿 ○<李芳隣> 官至判官 ○<李德龍> 官至縣監 ○<曹
緯> 官至主簿 ○<李龍甲> 之帶之六世孫 官至萬戶 ○<朱世諶> 官至萬戶 ○<金世
範> 歷典九邑 ○<金虎>【見忠義門】○<李升亨> 官至僉使 ○<金世績> 官至萬戶 ○
<李應男> 官至縣監 ○<李輔臣> 官至郡守 ○<崔希昌> 官至萬戶 ○<朴弘遠> 官至僉
使 ○<金禹績> 官至萬戶 ○<辛悌立> 官至萬戶 ○<崔國成> 繼宗之孫 前行縣監 今
在 ○<孫欽> 宗老之子 前行僉使 今在 ○<金大鎰> 前行萬戶 今在 ○<吳必寏> 時任
萬戶 【本府登武科者 不爲不多 而煩不能盡記 只擧六品以上錄之】
음사(蔭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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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괄(李彦适)> 벼슬이 찰방(察訪)에 이르렀다.
<이응인(李應仁)> 벼슬이 판관(判官)에 이르렀다. 【인물문에 보인다.】
<정침(鄭忱> 습명(襲明)의 13세손으로, 벼슬이 주부에 이르렀다.
<김말종(金末宗)> 벼슬이 현감에 이르렀다.
<이의잠(李宜潛)> 응인(應仁)의 아들이다. 집안에서는 효성스러웠고 관청에서는
청렴하다는 평판이 있었다. 벼슬이 현감에 이르렀다.
<권응생(權應生)> 군수 덕린(德麟)의 손자로, 벼슬이 현감에 이르렀다.
<손종하(孫宗賀)> 중돈(仲暾)의 증손으로, 벼슬이 주부에 이르렀다.
<김경두(金景斗)> 벼슬이 현감에 이르렀다.
<주사호(朱士豪)> 벼슬이 현감에 이르렀다.
<오경로(吳敬老)> 효성과 청렴으로 천거되어 현감이 되었다.
<최동언(崔東彦)> 현감 계종(繼宗)의 아들로, 벼슬이 현감에 이르렀다. 지금 살아
있다.
<최동량(崔東亮)> 진립(震立)의 아들이다. 아버지의 공덕으로 녹용(錄用)되어 일
찍이 지평 현령(砥平縣令)에 배수되었으나, 북사(北使)를 접대하는 일로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뒤에 두 고을을 역임하였다.
<李彥适> 官至察訪 ○<李應仁> 官至判官 【見人物門】○<鄭忱 襲明十三世孫 官
至主簿 ○<金末宗> 官至縣監 ○<李宜潛> 應仁之子 居家有孝行 居官有淸名 官至縣
監 ○<權應生> 郡守德麟之孫 官至縣監 ○<孫宗賀> 仲暾之曾孫 官至主簿 ○<金景
斗> 官至縣監 ○<朱士豪> 官至縣監 ○<吳敬老> 以孝廉薦爲縣監 ○<崔東彦> 縣監
繼宗之子 官至縣監 今在 ○<崔東亮> 震立之子 以父蔭錄用 嘗拜砥平縣令 以其接待
北使辭不赴 後歷典二邑
효행(孝行)
신라(新羅)
<손순(孫順)> 흥덕왕(興德王) 때 사람으로 어머니를 봉양하는 데 효성이 지극하
였다. 어린아이가 있어서 매양 어머니의 음식을 빼앗아 먹으니, 손순이 그의 아내에
게 말하기를, “아이가 어머니의 음식을 빼앗아 먹는데, 아이는 또 낳을 수 있지만
어머니는 다시 찾을 수 없다.” 하고는, 아이를 등에 지고 취향산(醉鄕山)에 가서 땅
을 파고 묻으려 하다가, 난데없이 매우 기이하게 생긴 석종(石鐘)을 얻었다. 부부가
깜짝 놀라고 이상하게 여겨, 아내가 말하기를, “이 보물을 얻게 된 것은 아마도 아
이의 복일 것이니, 아이를 묻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손순도 그렇게 여기고, 곧 아
이와 종을 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종을 집 들보에 달아 놓고 치니, 소리가 왕궁에까
지 들렸다. 임금이 사람을 시켜 알아보니, 자세히 아뢰었다. 임금이 이르기를, “옛날
곽거(郭巨)가 아들을 묻으려 하자, 하늘이 황금 가마솥을 내려 주었다더니217), 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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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순이 아들을 묻으려 하자 땅에서 석종이 나왔으니, 전후의 일이 서로 부합된다.”
하고, 마침내 집 한 채와 쌀 50석을 하사하였다.
<지은(知恩)> 한기부(韓岐部) 사람으로,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봉양하
며 나이 32세가 되도록 시집을 가지 않았다. 봉양할 것이 없어서 품팔이를 하고 구
걸을 하여 어머니를 봉양하였는데, 날이 갈수록 고달프기만 하여 쌀 10석을 받고
부잣집에 몸을 팔았다. 종일토록 일을 하고 저물어서야 밥을 지어 돌아와 봉양하니,
어머니가 말하기를, “예전의 음식은 비록 거칠어도 달더니만, 지금은 비록 좋긴 하
지만 가슴이 찌르듯이 아프니, 어인 까닭이냐” 하였다. 딸이 사실대로 이야기하니,
어머니가 말하기를, “너를 남의 종이 되게 하였느니, 빨리 죽는 것이 낫다.” 하고
대성통곡을 하니 딸도 통곡하였다. 효종랑(孝宗郞)이 밖을 나갔다가 그 광경을 보고
돌아가 부모에게 청하여 쌀 100섬을 보내고 아울러 의복까지 주었다. 화랑도(花郞
徒) 수 천 명이 다투어 곡식을 내어 주었다. 임금 또한 그 사실을 듣고 역시 벼
500섬과 집 한 채를 하사하였으며, 다시 군사를 보내어 곡식을 지키게 하고, 그 마
을에 방(牓을 붙여 ‘효양리(孝養里)’라 하였다. 이어 표문(表文)을 올려 당 나라 황
실에 아름다움을 돌렸다.
<孫順> 興德王時人 養母至孝 有小兒 每奪母食 順謂其妻曰 兒奪母食 兒可得 母難
再求 負兒歸醉鄕山 掘地欲埋 忽得石鍾甚奇 夫婦驚怪 妻曰 得物 殆兒之福也 不可埋
也 順亦以爲然 乃負兒與鍾而還家 懸鍾於樑撞之 聲聞王宮 王使人審之 具奏 王曰 昔
郭巨瘞子 天賜金釜 今孫順埋兒 地出石鍾 前後同符 乃賜屋一區 粳米五十石 ○<知
恩> 韓歧7部女人 少孤養母 年三十二猶不嫁 無以爲養 傭作行乞以飼之 日久困憊 就富
家賣身 得米十石 窮日供役 暮則作食歸養 母曰 向食雖麤7而甘 今食雖好肝心若剌 何也
女以實告 母曰 使爾爲婢 不如速死 乃大哭 女亦哭 孝宗郞出見 歸請父母 輸米百石 幷
與衣物 郞徒幾千 競出石栗 王聞之 亦賜租五百石 家一區 復命差兵守粟 牓'其里曰 孝
養 仍奉表 歸美於唐室
본조(本朝)
<허조원(許調元)> 13세에 아버지 정문(程文)이 미친병에 걸리자, 스스로 손가락을
베어 피를 내어 약에 타서 올렸는데, 병이 마침내 나았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 마을
에 세웠다.
<남득온(南得溫)> 어머니가 돌아가자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태종(太宗) 때
마을에 정문을 세웠다.
<김윤손(金允孫)> 아버지가 호랑이에게 잡혀가자 윤손이 달려가 호랑이를 쫓아가
왼손으로 목덜미를 움켜잡고 오른손으로 입을 막고 호랑이를 때려 죽여서 아버지가
217) 한(漢) 나라 때 곽거(郭巨)가 가난한 살림으로 그 모친을 효성으로 공양하는데 그 아들이 모친의 반
찬을 축내었다. 아들은 없더라도 또 낳으면 된다 하고, 아들을 묻기 위하여 땅 3척을 팠는데, 금 솥이
나왔다고 한다. 태평어람(太平御覽) 권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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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났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 마을에 정문을 세웠다.
<박희남(朴希楠)>
<희장(希樟)>
<희정(希楨)> 형제 세 사람이 모두 효성이 있어 아버지가 돌아가자 3년 동안 시
묘살이를 하였다. 상복을 벗은 뒤에도 여전히 소복(素服)을 입고 고기를 먹지 아니
하였으며, 초하루와 보름에 곡을 하고 제사를 올리기를 또 3년을 하고서야 그쳤다.
<최영린(崔永嶙> 아버지를 섬기는 데 지극히 효성스러웠고 아버지가 돌아가자 3
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으며, 소금과 간장을 먹지 않았다. 상이 끝난 뒤에도 여전
히 삭망제(朔望祭)를 중지하지 않았다.
【이상은 여지승람 에 나온다.】
<許調元> 年十三 父程文得狂疾 自斫手指 和藥以進 疾乃愈 事聞旌閭 ○<南得溫>
母死 廬墓三年 太宗朝 旌其閭 ○<金允孫> 父爲虎所攫 允孫挺身逐虎 左手扼其胡 右
手塞其口 因擊殺之 父得生 事聞旌閭 ○<朴希楠><希樟><希楨> 兄弟三人 俱有孝誠
父歿 廬墓三年 服闋'猶素衣 不食肉 朔望哭奠 又三年而止 ○<崔永嶙 事父至孝 及歿
廬墓三年 不食鹽醬 喪畢 猶不廢朔望祭 【以上出輿地勝覽218)】
신증(新增) N
<김응벽(金應璧)> 아우 응규(應奎)ㆍ응정(應井)과 더불어 모두 효성이 있었다. 친
상(親喪)을 당하자 삼형제는 묘 옆에 여막(廬幕)을 짓고 모셨는데, 질풍과 큰비에도
중지하지 않았다. 묘에 절을 할 때는 항상 섬돌위에 서서 곡을 하였으므로, 삼형제
가 디딘 곳이 모두 뚫어져 깊이가 여러 치나 되었다. 어느 날 저녁 비바람이 크게
일고 갑자기 소리가 났는데, 세 형제가 머리를 모으고 들으니 죽은 아버지의 소리
였다. 깜짝 놀라 여막 밖으로 나갔으나 보이는 것이 없었다. 얼마뒤 또 소리가 나기
에 괴이하게 생각하고 신주(神主)를 끌어안고 다 같이 나와 살펴보았는데, 금새 여
막 북쪽 산 좌우가 무너져 여막을 덮쳐버렸다. 그들은 또한 개 한 마리를 길렀는데
그 이름을 ‘신춘(神春)’이라 하였다. 집안 소식을 알고 싶으면 세 형제는 개 이름을
불러 목에 편지를 매달아 각기 자신의 집으로 보냈는데, 개가 능히 그 뜻을 알고
세 집을 왕복하였으며, 집에서도 편지를 개에 매달아 소식을 전하였다. 상복을 벗고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아침저녁으로 반드시 재복(齋服 재계할 때 입는 옷)을 입고
공경히 가묘(家廟)에 배알하기를 종신토록 중지하지 아니하였다. 일이 조정에 알려
져 마을에 정문을 세웠다. 정문은 부(府)의 남쪽 10리 금광제(金光堤) 위에 있다.
<이승증(李承曾)> 부모를 섬기는 데 정성과 효성을 극진히 다하였고 상을 당해서
는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면서 한 번도 집으로 돌아가지 아니하였다. 그 당시 도
적 팔룡(八龍)의 도당(徒黨)이 각 고을마다 들끓어 백성을 죽이고 약탈하였는데, 승
증이 시묘살이를 하는 곳을 지나며 그곳을 가리키면서 서로 경계하기를, “이곳은
효자가 사는 곳이니 함부로 날뛰지 말라.” 하고, 마침내 졸개들을 모아 피해 갔다.
218)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경상도(慶尙道)」경주부(慶州府) 효자조(孝子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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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나이에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누차 관직을 제수하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
았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 마을에 정문을 세웠다. 정문은 부의 동쪽 첨성대(瞻星臺)
북쪽에 있다. 행적이 삼강속록(三綱續錄) 에 구비되어 있다.
<최진간(崔震幹)> 진사 신린(臣隣)의 아들이다. 임진왜란 때 조모를 모시고 피난
하여 황룡산(黃龍山)에 숨었다. 왜적이 산을 뒤져 칼로 그 조모를 치려고 하자 진간
은 왜적의 칼날을 무릅쓰고 달려가 구원하다가 한칼에 함께 죽음을 당했으며, 그의
아내 정씨(鄭氏) 또한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 마을에 정문을
세웠다. 정문은 부의 남쪽 봉황대(鳳凰臺) 서쪽에 있다.
<이씨(李氏)> 사인(士人) 조영(曹英)의 아내이다. 강도 수십 명이 불을 밝히고 들
이닥쳐 그 시아버지를 칼로 치려 하자, 이씨는 몸으로 가리고 말하기를 “나를 죽이
지 시아버지를 해치지 말라.” 하였다. 이에 도적이 의롭게 여겨 두 사람 다 풀어주
고 나와서 서로 말하기를 “효부(孝婦)의 집안이니 함부로 범하지 말라.” 하였다. 일
이 조정에 알려져 마을에 정문을 세웠다. 정문은 안강현(安康縣) 남쪽 갑산촌(甲山
村)에 있다.
<장막동(張莫同)> 천한 종이다. 계모를 지극 정성으로 모셨으며, 어미가 죽자 3년
동안 죽만 먹고 소금과 간장을 먹지 않았다. 탈상한 뒤에도 3년 동안 상복을 더 입
었다. 왜란을 당하여 몸을 돌보지 않고 왜적을 토벌하여 전공을 많이 세웠으며, 충
성과 효성이 모두 지극하였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 마을에 정문을 세웠다. 정문은
부의 동쪽 5리에 있다.
<최포(崔包)> 부의 남천면(南川面) 부리(鳧里)에 살았다. 어려서부터 문장으로 이
름이 났으며, 효성이 독실하였다. 아버지가 눈이 멀자 포는 잠시도 아버지 곁을 떠
나지 않고 조석으로 밥을 손수 먹여 드렸다. 진사시에 응시하여 시험을 친 뒤 방방
(放榜)도 기다리지 않고 하향하였는데, 도중에 방 소식을 들었다. 집으로 돌아와 아
버지를 배알하니, 아버지가 “너는 방에 붙었느냐” 하자, 포가 “방에 붙었습니다.”
하니, 아버지가 큰 소리를 내면서 깜짝 놀라 일어났는데, 두 눈이 갑자기 떠졌다.
사람들이 효성에 감복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언괄(李彦适)> 회재 선생(晦齋先生)의 동생으로, 안강현 동쪽 양좌촌(良佐村)
에 살았다. 어머니를 섬기는 데 지극히 효성스러웠고 봉양을 위해 벼슬까지 버렸으
며 몸소 맛난 음식을 만들어 올렸다. 어머니 상을 당하자 피눈물을 흘리며 애훼(哀
毁)하였고 상례와 제례에 예를 다하였다. 회재 선생이 귀양살이를 하게 되자 선생을
위해 밤마다 분향하고 하늘에 빌었으니, 그 독실한 효성과 우애는 천성에서 나온
것이다. 벼슬이 찰방(察訪)에 이르렀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 호역(戶役)을 감면해 주
었다.
<이의윤(李宜潤)> 판관 응인(應仁)의 아들로 회재 선생의 후손이다. 타고난 자질
이 순수하고 아름다웠으며, 어린 나이에 배움에 뜻을 두고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호)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배움에 독실하고 행실에 힘써 선조의 공업을 무너뜨릴
까 두려워하여 자호(自號)하기를 ‘무첨당(無忝'堂)’이라 하였다. 부모를 섬기는 데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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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히 효성스러웠다. 계사(癸巳)의 난에 아버지가 돌아가자 비록 난리 속에 떠돌면서
도 상례와 제례에 예를 다하였으며 피눈물을 흘리며 애훼하였다. 여러 동생들과 더
불어 우애가 특히 돈독하였다. 아버지가 병이 들었을 때, 똥이 단가 쓴가를 맛보았
고 목욕하고 하늘에 빌면서 자기 몸으로 대신하기를 청하였다. 임종 때 석류(石榴)
를 먹고 싶어 하였으나 때가 여름이라 구해 드리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일평생을
석류를 먹지 않았으며 석류를 보기만 하면 번번이 눈물을 흘렸다. 새벽마다 사당에
알현하기를 비바람이 몰아쳐도 중지하지 아니하였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 호역(戶
役)을 감면해 주었다.
<이의징(李宜澄)> 의윤(宜潤)의 동생이다. 어린 나이에 배움에 힘썼고 부모를 섬
기는 데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거상(居喪)에 예를 다한 것이 그의 형과 똑같았으며
애훼하여 몸을 상하게 할 정도였다. 거상을 끝내고 얼마 안 되어 형과 아우가 연이
어 죽었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 호역을 감면해 주었다.
<이교(李皦)> 의징(宜澄)의 아들로, 계모를 잘 섬기어 효성을 극진히 하였다. 그
리고 학문과 덕행이 있어 고을 사람들이 선적(善籍)에 그 일을 기록하였으며, 누차
향천(鄕薦)에 들었다.
<이우춘(李遇春)> 안강현(安康縣) 동쪽 양좌촌(良佐村)에 살았다. 임진왜란 때 어
머니가 늙고 병이 들어 멀리 피신할 수가 없었으므로, 우춘은 어머니를 업어다 수
풀 속에 숨겨두고 바라볼 수 있는 땅에 숨어 엎드려 있었는데, 왜적이 달려들어 칼
을 휘두르며 그의 어머니에게 향하자 우춘은 허둥지둥 달려가 몸으로 막다가 한칼
에 함께 죽음을 당하였다.
<정삼효(鄭三孝)> 안강현 서쪽 적화곡(赤火谷)에 살았다. 습명(襲明)의 후손으로,
진사 형(珩)의 사자(嗣子)이다. 임진왜란 때 산속으로 피하여 숨었으나 왜적이 갑자
기 들이닥쳐 아버지가 미처 달아나지 못하였다. 왜적이 가까이 오려하자 삼효가 몸
으로 막다가 한칼에 함께 죽음을 당하였다.
<이효증(李孝曾)> 안강현 동쪽 유금촌(有今村)에 살았다. 어머니를 봉양하는 데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집안이 가난하여 양식이 부족하였으나 맛난 음식을 힘써 마
련하여 봉양하였다. 어쩌다가 흉년이 들어 공양(供養)을 뜻대로 하지 못하면 반드시
눈물을 흘리며 그치지 않았다. 밤에는 어머니 곁에서 시중을 들며 찬지 더운지를
물었는데, 시종일관 태만하지 않았다. 상을 당하자 제사에 예를 다하였으며, 3년 내
내 여막 밖으로 나오지 않아 수 이랑의 밭이 황폐한 채로 있었다.
<서사원(徐思遠)> 부의 서쪽 견곡촌(見谷村)에 살았다. 임진왜란 때 아버지가 왜
적에게 죽음을 당하자 사원은 반드시 복수하겠다고 맹세하고, 거상중인데도 뛰쳐나
가 자진 입대(入隊)하여 왜적을 치러 달려갔다. 친척들이 모두 말리자, 사원이 말하
기를 “아버지가 왜적에게 돌아가셨는데 자식이 복수를 모르면 어찌 자식이라고 하
겠는가” 하고, 종 다섯 명을 거느리고 대진(大陣)을 따라 왜적 가운데 들어가 힘을
다해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이시인(李時仁)> 부의 북쪽 모아촌(茅兒村)에 살았다. 교리(校理) 을규(乙奎)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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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이다.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면서 한 번도 집에 돌아가지 않았다. 어느 날 집
안사람이 불이 났다고 달려와 고하자, 시인은 말하기를 “사우(祠宇)가 괜찮으니, 다
른 것이야 어찌 걱정할 것이 있겠느냐.” 하고는, 곡하고 제사를 지내기를 전과 같이
하였다. 죽을 마시며 상을 마쳤으며 소금과 간장을 맛보지 않았다. 다시 국상(國喪)
을 당하자 방상(方喪)을 행하였다.
<진위(陣韡> 부의 북쪽 오금촌(五琴村)에 살았다. 성격이 순박하고 효성스러웠으
며, 친상에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박학하고 문장에도 능하였는데, 누차 응시
하였으나 합격하지 못하였다.
<김우범(金禹範)> 부의 북쪽 사방촌(士坊村)에 살았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극
진하게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뒤에 어머니가 돌아가자 6년의 상을 치렀으며, 또 스
승을 위하여 심상(心喪) 3년을 치렀다. 그의 처 김씨(金氏) 또한 3년 동안 재소(齋
素)219)하였다.
<정연성(鄭延性)> 부의 서쪽 부산촌(釜山村)에 살았다. 습명(襲明)의 후손이다. 3
세에 어머니를 잃고 5세에 아버지를 잃은 뒤 서모(庶母)에 의탁하였다. 약관(弱冠)
이 되기 전에 부모의 3년 상을 추복(追服)220)하였으므로 고을 사람들이 선적(善籍)
에 그 일을 기록하였다.
<이여주(李汝舟)> 부의 서쪽 사정리(沙正里)에 살았다. 어머니가 병이 나자 손가
락 한 마디를 잘라 그 죽음을 구원하였으며, 형이 병이 나자 또 한 손가락을 잘랐
다.
<손시(孫時)> 안강현 양좌촌(良佐村)에 살았다. 계천군(鷄川君) 소(昭)의 4세손이
다. 어머니를 봉양하는 데 효성이 지극하여 아침저녁으로 국과 고기 등의 반찬을
반드시 몸소 장만하였으며, 매월 초하루와 보름마다 목욕하고 하늘에 절을 하며 어
머니를 위해 축수(祝壽)하였다.
<이경한(李景漢)ㆍ경호(景湖)ㆍ경택(景澤)> 형제가 안강현의 마을에 살았다. 모두
효행이 있었으며 함께 무과에 급제하였다. 경택은 두 형님이 먼저 벼슬길에 오르자
자기도 벼슬에 나가면 부모를 모실 사람이 없다 하여, 다시 벼슬을 구하지 않았다.
항상 부모의 옆에서 몸소 약과 음식을 공양하였으며, 의대(衣帶)를 풀지 않은 채 어
머니 잠자리 옆에서 팔베개를 베고 가매(假寐)하기를 10여 년이나 하였다. 그러다
가 경택이 먼저 죽자 경한과 경호 형제는 그 늙은 어머니가 슬퍼하여 몸이 상할까
두려워하여 차마 고하여 알리지 못하고 임시로 핑계를 대어 숨겼는데, 이를 들은
사람들이 슬퍼하였다. 인조 때 예조(禮曹)의 계청(啓請)으로 인해 특별히 포상을 내
렸다.
<김녀(金女)> 부의 남쪽 용장촌(茸長村)에 사는 사인(士人) 김정민(金廷敏)의 딸
이다. 임진왜란 때 그 어머니 견씨(堅氏)와 함께 따로따로 산 속에 숨었는데, 왜적
이 산을 뒤져 칼로 그의 어머니를 치려하자 그녀가 달려들어 가로막았으나 한칼에
219) 재소(齋素)는 몸과 마음을 정결히 가져 육식을 피하고 소찬을 드는 것이다.
220) 추복(追服)은 상을 당하였을 때 어떤 사정으로 복상(服喪)하지 못하다가 추후에 복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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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죽음을 당하였다. 왜적이 물러간 뒤 종 곰년[古音年]이 가서 발견하였는데, 피
가 흘러 엉긴 나머지 모녀의 몸이 하나가 되어 있었으므로 떼어서 각기 장사지냈
다. 지금 금오산 기슭에 두 무덤이 서로 마주 대하고 있다.
<이영(李瑩)> 부의 남쪽 중리촌(中里村)에 살았다. 을규(乙奎)의 증손이다.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는 데 그 효성을 극진히 다하였으며, 나이 60이 넘어서도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고을 사람들이 선적(善籍)에 그 일을 기록하였다.
<김녀(金女)> 안강현 마을에 살았다. 13세에 도적의 무리 수십 명이 불을 밝히고
갑자기 쳐들어와 칼로 그의 아버지를 치려하자, 그녀는 아버지를 감싸 안고 슬프게
울부짖으며 “우리 아버지는 죄가 없으니, 죽이려면 나를 죽이고 아버지를 죽이지
말라.” 하였다. 도적이 칼을 휘둘러 이마를 치자, 도적 가운데 한 사람이 말리면서
말하기를 “이 사람은 효녀이니, 죽여서는 안 된다.” 하고, 두 사람을 풀어 주었다.
그래서 이마에 칼자국이 남아 있다.
<金應璧> 與弟應奎應井 俱有孝誠 及遭親喪 三人廬于墓側 雖疾風大雨 不廢拜墓 常
立階上而哭 三人當足處 皆穿深至數寸許 一夕風雨大作 忽有聲 三人聚首而聽 乃其亡
父聲也 驚出廬外 則無所見 俄而又有其聲 心怪之 抱神主 同出候之 少頃 廬北之山 左
右崩頹 壓於廬墓 又畜一犬 名之曰神春 欲知家信 則三人必呼犬名 繫書于頸 各送其家
犬能解其意 往復于三家 家亦繫書以通 服闋'歸家 晨昏必齋服 祇謁家廟 終身不廢 事聞
旌閭 閭在府南十里金光堤上 ○<李承曾> 事父母 盡其誠孝 及遭喪 廬墓三年 一不歸
家 時劇賊八龍徒黨 彌滿各邑 殺掠人民 而過承曾所廬地 指點相戒曰 此孝子居也 愼勿
輕動 逐收兵避去 早年中生員 屢除職 終不就 事聞旌閭 閭在府東膽星臺北 行蹟俱在三
綱續錄 ○<崔震幹> 進士臣隣之子 壬辰之亂 奉祖母 避匿於黃龍山中 賊探山 欲刃其
祖母 震幹冒賊刃奔救 同死一劍 妻鄭氏亦自縊 事聞旌閭 閭在府南鳳凰臺西 ○李氏 士
人曹英之妻 劇盜數十 明火突入 將刃其舅李氏 以身翼蔽曰 願殺我 毋害舅 賊義而兩釋
之 出而相告曰 孝婦之家 愼勿犯也 事聞旌閭 閭在安康縣南甲山村 ○<張莫同> 賤隷
也 事繼母至誠 母死 歠7粥三年 不食鹽醬 服闋加服三年 當倭亂 忘身討賊 多立戰功
忠孝兩至 事聞旌閭 閭在府東五里 ○<崔包> 居府南川面鳧里 少有文名 誠孝篤至 父
病盲 包須臾不離側 朝夕之食 必自手進 及擧進士 過試後 不待榜 下鄕 中路聞榜 歸謁
于父 父曰汝得叅'榜否 包曰 叅7榜矣 父大聲驚起 兩眼忽開 人謂孝感所致 ○<李彦适>
晦齋先生之弟 居安康縣東良佐村 事母至孝 爲養棄官 躬奉甘旨 及其遭喪 泣血哀毀 喪
祭盡禮 當先生遷謫之日 爲先生夜夜焚香祝天 其孝友之篤 出於天性 官至察訪 事聞于
朝 減其戶役 ○<李宜潤> 判官應仁之子 晦齋先生之孫 天資粹美 早歲志學 受業於寒
岡之門 篤學力行 恐墜先業 自號無忝7堂 事親至孝 癸巳之亂 丁父憂 雖在兵火流難中
喪祭盡禮 泣血哀毀 與其諸弟 友愛尤篤 父病 嘗糞甛苦 沐浴禱天 請以身代 臨終 欲嘗
石榴 而時當夏月 不得進 故平生不食 見輒流涕 家廟晨謁 風雨不廢 事聞于朝 減其戶
役 ○<李宜澄> 宜潤之弟 早歲力學 事親至孝 居喪盡禮 一如其兄 哀毀致傷 服闋7未幾
兄弟相繼死亡 事聞于朝 減其戶役 ○<李皦> 宜澄之子 善事繼母 極其誠孝 且有學行
鄕人書之善籍 屢入鄕薦 ○<李遇春> 居安康縣東良佐村 壬辰之亂 母老且病 不能遠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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遇春負置林奔間 隱伏於相望之地 及倭人奔刧7揮劍而向其母 遇春蒼黃疾走 以身翼蔽 同
死一劍 ○<鄭三孝> 居安康縣四赤火谷 襲明之後 進士珩嗣子也 壬辰之亂 避匿山中
賊猝至 父未及走 賊且近前 三孝以身翼蔽 同死一劍 ○<李孝曾> 居安康縣東有今村
養母至孝 家窮食貧 甘旨竭力營辦 或値凶歲 供億不如意 則必涕泣不已 夜則陪侍親側
問其燠7寒 終始不怠 及其遭喪 祭奠盡禮 三年之內 不出廬外 數畝之田 任其荒廢 ○<徐
思遠> 居府西見谷村 壬辰倭亂 父爲賊所害 思遠誓必復讎挻身於衰麻中 自募赴賊 宗
族皆止之 思遠曰 父死於賊 而子不知復 豈曰子乎 乃率奴五丁 隨大陣 入賊中 力戰死
之 ○<李時仁> 居府北茅兒村 校理乙奎之孫 居廬三年 一不歸家 一日家人以失火奔告
時仁曰 祠宇免矣 他何足恤 哭奠自如 歠'粥終喪 不嘗鹽醬 復遭國恤 亦行方喪 ○<陳
韡 居府北五琴村 性純孝 親喪廬墓三年 博學能文 屢擧不中 ○<金禹範> 居府北士坊
村 早喪父 奉母備養 後丁憂 行喪六年 又爲師心喪三年 其妻金氏亦爲之齋素三年 ○
<鄭延性> 居府西富山村 襲明之後 三歲喪母 五歲喪父 托於庶母 未弱冠 追服父母三
年喪 鄕人書之善籍 ○<李汝舟> 居府西沙正里 母病 斷指一節 以救其死 兄病 又斷一
指 ○<孫時> 居安康縣良佐村 鷄川君昭之四世孫 奉母至孝 朝夕羹炙之饌 必躬執爲之
每月朔望 沐浴拜天 爲母祝壽 ○<李景漢><景湖><景澤> 兄弟居安康縣里 皆有孝行
而俱登武科 景澤以爲二兄先出仕路 我亦從仕 則侍親無人 不復求官 常在親側 身供藥
餌 不脫衣帶 曲肱假寐於母枕邊者 積十餘年 景澤先死 景漢景湖恐其老母哀傷 不忍告
知 權辭掩諱 聞者悲之 仁祖朝 因禮曹啓請 特加褒賞 ○<金女> 居府南茸長村士人金
廷敏女也 壬辰之亂 與其母堅氏 分匿山中 賊探山 將刃其母 女疾走翼蔽 同死一劍 賊
去後 奴古音年往視之 流血凝結 兩軆7爲一解 而分葬之 至今金鰲山麓 兩墳相對焉 ○
<李瑩> 居府南中里村 乙奎之曾孫 奉養老母 極其誠孝 年過六十 廬墓三年 鄕人書之
善籍 ○<金女> 居安康縣里 年十三 有賊徒數十 明火突入 將刃其父 女抱父哀號曰 我
父無罪 願殺我 毋害父 賊揮劍擊其額 賊中一人止之曰 此孝女 不可害也 乃兩釋之 額
上因有劍痕
<이전인(李全仁)> 회재 선생(晦齋先生)의 서자이다. 회재 선생이 관서(關西)로 귀
양가자, 따라가 밤낮으로 옆에서 시중을 들면서 말씀과 행동을 반드시 기록하여
관서문답록(關西問答錄) 을 만들었다. 회재 선생이 돌아가자 관을 싣고 돌아오는데
얼음과 눈이 산에 가득하여 상여가 나아갈 수가 없었다. 마침 나무꾼이 있어 흙을
져다 길에 뿌려 편안히 가게 하였는데, 전인이 관 앞의 맨땅에 엎드려 있으니 보는
사람이 눈물을 뿌렸다. 상기(喪期)가 끝나자 소장(疏章)을 올려 회재 선생이 지은
진수팔규(進修八規) 를 바쳤다. 명묘(明廟 명종)이 감사에게 하유(下諭)하기를, “지
금 전인이 상소한 말을 보건대, 몸은 비록 초야에 있으나 그 아버지의 진수(進修)한
정성을 잊지 않으니, 참으로 가상하다.” 하고, 선생의 관직을 복직시키도록 명하였
다. 또 선생의 문집을 퇴계 선생(退溪先生) 문하에 왕복시켜 발양한 바가 있었다.
퇴계 선생이 일찍이 그를 칭찬하기를 “시서(詩書)에 익숙하고 의로운 방도를 알았
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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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준(金士俊)> 부의 서쪽 견곡촌(見谷村)에 사는 정병(正兵)이다. 어머니가 병
이 들자 손가락을 잘라 흐르는 피를 마시게 하였다. 일이 관가에 알려져 그 신역(身
役)을 회복해 주었는데, 사준은 자식 된 직분으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하며 극
력 사양하고 따르지 아니하였다.
<이상헌(李尙獻)> 안강현에 살았다. 익재(益齋)의 후손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자 3
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으며, 문예(文藝)로써 칭송을 받았다.
<이광익(李光翼)> 기계현(杞溪縣)에 살았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를 봉양
하는 데 효성이 지극하였다. 집안이 매우 가난하여 조석의 끼니조차 잇지 못할 정
도였으나 봉양하는 데 좋은 음식이 올렸다. 이웃 사람들이 그 효성에 감탄하여 음
식물을 보내주면, 오직 봉양하고 제사지내는데 족할 만큼만 취할 뿐 그 나머지 용
도가 없이 주는 것은 조금도 받지 않았다. 밤낮으로 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고 손으
로 방바닥을 만져보아 조금이라도 차면 비록 밤중이라도 반드시 일어나 몸소 군불
을 지피곤 하였는데, 하루는 회오리바람에 불이 튀어나와 그의 수염이 그슬리기도
하였다. 명의(名醫)가 서울에서 삼척(三陟)으로 와 살고, 인삼(人蔘)이 또 삼척에서
생산되었는데, 광익이 그 소문을 듣고는 친구에게서 약간의 베를 빌어 단정하게 짚
신을 신고 패랭이를 쓴 채 짐을 지고 걸어가 어머니의 병세를 묻고 인삼을 사서 7
일 길을 왕복하여 그 약을 썼다. 어머니의 병이 심해졌을 때 그 당시 한참 추운 겨
울이었는데, 야밤에 반드시 목욕을 하고 하늘에 빌기를 20일이 넘도록 하였다. 어
머니가 돌아가자 예제(禮制)에 지나칠 정도로 애훼(哀毁)하였으며, 3년 내내 죽을
먹었다. 만년에는 몇 간의 초옥을 부모의 산소 옆에 짓고 종신토록 흠모하는 마음
을 깃들였다. 사람됨이 온순하고 청렴하여 가난한 것을 분수로 여겼으며, 사람을 대
하고 물건을 접하는 데 정성스러움이 한결같았다. 여러 책을 널리 읽었으며 문사(文
詞)가 예스럽고 굳건하였으나, 어머니가 병이 잦아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누차
초시(初試)에 합격하였으나 끝내 성공을 거두지 못하여 고을 사람들이 애석하게 여
겼다. 선적(善籍)에 기록되어 있으며, 누차 향천(鄕薦)에 들었다.
<오여번(吳汝藩)> 세재(世才)의 후손이다. 부의 북쪽 사방촌(士坊村)에 살았다. 어
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봉양하는 데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집안이 가난하
여 자뢰할 것이 없어 몸소 농사를 짓고 뽕나무를 가꾸었으며 아내도 땅을 갈고 길
쌈을 하여 어머니를 공양하여 몸에 편한 물건은 모두 다 공급하였다. 어머니가 돌
아가자 예제에 지나칠 정도로 애훼하였으며, 장례를 지낼 때 몸소 삼은 짚신 40여
켤레를 모두 여러 상여꾼들에게 나누어 주고 말하기를 “어머니를 모시고 험한 곳을
가는데 그대들의 발이 상할까 두려우므로 이것을 주는 것이다.” 하니, 여러 상여꾼
들이 감탄하여 서로서로 삼가면서 그 가는 길을 끝까지 편안하게 모셨다. 이어 묘
에다 여막을 짓고 한 번도 집에 돌아가지 않았다. 임금이 돌아가자 방상(方喪) 3년
을 하였으며, 그의 스승을 위하여 심상(心喪) 3년을 하였는데, 3년 동안 제사나 기
일에는 반드시 쌀과 찬을 가지고 가서 도우며 함께 제사를 지냈다. 여번이 죽은 뒤
에 그 아들 긍(兢)이 쌀과 찬으로 제사를 돕기를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와 같이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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였다. 그 집에서 받지 않으면 긍은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고 이 예를 그만두는 것은 내 차마 못하겠습니다.” 하고는 억지로 올리니, 사람들이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다.” 하였다.
<한소사(韓召史221))> 안강현 산대방(山臺坊)에 사는 수군(水軍) 박춘득(朴春得)의
아내이다. 집안이 매우 가난하여 아침밥을 먹으면 저녁거리가 없을 정도였다. 그리
하여 몸소 품팔이를 하여 그 시부모를 섬겼는데, 모든 몸을 편안하게 하는 도구나
입에 알맞은 음식을 지성으로 공양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이웃 사람들이 칭찬하였
다. 일이 관가에 알려져 누차 포상을 하였다.
<최계생(崔戒生)> 부의 동쪽 돌지촌[石乙只村]에 사는 천한 종이다. 밤에 불이
나자 아버지는 토굴 속에 있었는데 늙어서 나올 수가 없었다. 계생이 그 맹렬한 화
염을 무릅쓰고 들어가 아버지를 안고 나오다가 함께 죽었다.
<손진(孫眞)의 두 딸> 기계현(杞溪縣) 마을에 있는 절에 사는 종이다. 큰딸은 사
옥(四玉)으로 20세였고, 작은딸은 예분(禮分)으로 13세였는데, 지성으로 어머니를
모셨다. 어느 날 밤 어머니가 문 밖에 나갔는데 호랑이가 움켜잡고 마당에서 눌러
타고 있었다. 두 딸이 몸에 1백 근이나 되는 짐을 안고 손으로 횃불 막대를 들고
곧장 나가 불을 던지니, 호랑이가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고 달아나 죽음에서 벗어
날 수 있었다. 일이 관청에 들리어 완문(完文)을 작성해 주었다. 뒤에 어머니가 병
이 들어 위독하게 되자 막내딸이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려 입에 넣으니 어머니의
병이 곧 나았다.
<우소사(禹召史)> 첨지(僉知) 이용(李容)의 첩이다. 부모를 모시는데 지극히 효성
스러웠다. 부모가 난리 통에 죽어 후하게 장례를 치루지 못하였으므로 평생토록 옷
에 햇솜을 두지 않았다. 애써 개장(改葬)한 뒤 6년 동안 상복을 입었다. 시부모를
모시는 것 또한 정성과 공경을 극진히 다했으며, 시어머니가 병으로 위독하자 똥이
단가 쓴가를 맛보았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자 3년의 복을 더하였다.
<최동량(崔東亮)> 남면(南面) 이조촌(伊助村)에 살았다. 병자호란 때 마을 사람이
의병을 일으킬 것을 꾀하자 동량은 호서(湖西)의 진중(陣中)에 있던 그의 아버지 진
립(震立)을 따르려고 혼자 먼저 떠났다. 그러나 그가 도착하기도 전에 아버지가 이
미 전사하여, 시신을 찾아 돌아와 장례를 치르고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김종일(金宗一)> 안강현 북쪽 노당촌(魯堂村)에 산다. 9세에 아버지를 여의었는
데 상례를 어른같이 치렀다. 젊은 시절 일찍이 주정을 부렸는데, 어머니가 이를 꾸
짖자 이때부터 늙을 때까지 술을 끊고 마시지 않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자 예를 다
해 장례를 치르고 묘 옆에 여막을 짓고 죽을 먹으며 한 번도 집에 돌아가지 않았
다. 어머니가 병이 나 수박을 먹고 싶어 하였는데, 철이 아니라서 구할 수가 없었
다. 이 때문에 늙을 때까지 수박을 먹지 않았다. 고을 사람들이 선적(善籍)에 그 일
을 기록하였다. 나이가 지금 74세이다.
<주담수(朱聃壽)> 부의 남쪽 중리촌(中里村)에 산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어머
221) 소사(召史)는 성(姓) 뒤에 붙여 과부임을 나타내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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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를 효성으로 모셨다. 나이 66세에 어머니가 돌아가자 3년 동안 죽을 먹었으며 예
로써 장사와 제사를 지냈으며, 새벽마다 사당에 배알하여 늙어서도 그치지 않았다.
어머니가 병이 들어 수박을 먹고싶어 하였는데 철이 아니라 구할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평생토록 수박을 먹지 않았다. 나이가 지금 75세이다.
<김쉬하(金淬7河)> 안강현 남쪽 대동촌(大同村)에 살았다. 아버지 병환이 위급해지
자 두 번이나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려 입에 넣으니, 아버지 병이 곧 나았다. 집안
이 매우 가난하여 칭대(稱貸)로 생계를 꾸렸으며 선조를 봉양하는데 그 정성을 극
진히 다하였다.
<정명서(鄭明緖)> 부의 동쪽 개곡촌(開穀村)에 살았다. 습명(襲明)의 후손으로 아
버지가 병이 나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려 입에 넣었다.
<명춘(命春)> 안강현 다질촌(多叱村)에 산다. 시어머니가 늙어 병이 나자 명춘은
10여 년을 봉양하되 조금도 게으른 생각이 없었으며 음식을 먹을 때 마다 꼭 친히
숟가락을 잡고 먹여드렸으며, 시어머니가 똥을 싸도 반드시 손수 소제하고 세탁하
였는데 시어머니의 나이가 다할 때까지 그의 아들딸을 시키지 않았다. 명춘의 나이
는 지금 60여 세이다.
<예준(禮俊)> 안강현 양좌촌(良佐村)에 사는 사노(私奴)이다. 아버지가 병이 나자
손가락을 잘랐다.
<이창형(李昌馨)> 안강현 음즙화촌(音汁火村)에 살았다. 아버지가 병이 나자 손가
락을 잘랐다.
<이인희(李仁希)> 본부(本府)의 하리(下吏)이다. 지성으로 부모를 봉양하였으며, 3
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李全仁> 晦齋先生之庶子 從先生關西謫所 晝夜侍側 言動必記 作關西問答錄 先生
易簀輿櫬7而返 氷雪盈山 輀不得進 時有樵夫 負士鋪路 使之安行 全仁露伏柩前 觀者
灑泣 喪畢陳疏 獻先生所撰進修八規 明廟下諭監司曰 今觀全仁疏辭 身在草野 不忘其
父進修之誠 良用嘉焉 命復先生官職 又以先生文集 往復於退溪先生門下 有所發揮焉
退溪先生嘗稱之曰 習詩書 知義方 ○<金士俊> 居府西見谷村 正兵也 母病斷指 流血
以灌 事聞于官 復其身役 士俊以職分所當爲 力辭不從 ○<李尙獻> 居安康懸 益齋之
後 父喪廬墓三年 以文藝見稱 ○<李光翼> 居杞溪縣 早222)孤 事母至孝 家甚貧 朝夕
不繼 而養有兼珍之膳 隣里感其孝而致饋者 則惟取足於養與祭而已 其餘無處而饋 則一
介不取 晝夜不離親側 手撫其突 稍冷則雖中夜 必起而親自爇7火 一日回風反火 火延其
鬚 有良醫 自京來寓三陟 人蔘又産其地光翼聞之 稱貸於親舊得若干布 端着草履 戴平
涼'笠 荷擔徒行 問母病 貿人蔘 往返於七日程而用之 及母疾篤 時當盛寒 夜必沐浴禱天
訖二十餘日 母亡 哀毀踰禮 歠7粥三年 晩年爲結數椽屋於父母塋下 以寓終身之慕焉 爲
人溫恭廉謹 任分安貧 待人接物 一以誠款 博覽群言 文詞古健 以母病多 不能應擧 累
中發解終未有成 鄕邦惜之 書之善籍 屢入鄕薦 ○(吳汝藩) 世才後也 居府北士坊村 少
喪父 奉母至孝 家貧無以自資 躬農桑 妻辟'纑以供母 便身之物 莫不畢給 母歿223) 哀毀
222) 중간본에는 旦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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踰禮 及至葬 身織履224)四十餘件 悉以頒諸擔軍曰 舁'母涉險 恐其傷足 故以此授之 諸
軍感而相飭 竟安其行 仍廬墓側 一不歸家 及遭國恤 方喪三年 爲其師心喪三年 三年內
祭奠及忌日 必以米饌來助而與祭焉 汝藩死後 子兢米饌助祭 一如父在時 其家不受 兢
泣曰 父歿而廢此禮 吾不忍也 遂强進之 人謂父有子矣 ○<韓召史> 居安康縣山臺坊
水軍朴春得妻也 家甚貧 朝不謀夕 以身傭賃 養其舅姑 凡便身之具 適口之味 無不至誠
供之 隣里稱之 事聞于官 累加褒賞 ○<崔戒生> 居府東石乙只村 賤隷也 夜失火 父在
土宇中 老不能出 戒生冒入烈焰 抱父同死 ○<孫眞兩女> 居杞溪縣里寺婢也 長曰四玉
年二十 次曰禮分 年十三 至誠養母 一日夜 母出門外 有虎攫取蹲'坐於庭 二女身擁百斤
擔 手持爇7火木 直前投火 虎驚吼捨去 得免於死 事聞于官 成給完文 後母病篤 末女斷
指流血以灌 母病乃瘳○<禹召史> 僉和李容妾也 事親至孝 以父母死於亂離中 不得厚
葬 平生衣不挾新絮 經營改葬後 服喪六年 事舅姑亦盡誠敬 姑疾革 嘗糞甛苦 姑歿 加
服三年 ○<崔東亮> 居南面伊助村 丙子之亂 鄕人謀起義兵 而東亮欲從其父震立於湖
西陣中 獨身先行 未至 父已戰死 尋屍還葬 廬墓三年 ○<金宗一> 居安康縣北魯堂村
九歲而孤 執喪如成人 少時嘗使酒 母責之 自是至老 絶口不飮 母歿葬祭盡禮 廬墓歠7粥
一不歸家 母病欲嘗西瓜 非時不得用 至老不食西瓜 鄕人書之善籍 年今七十四 ○<朱聃
壽> 居府南中里村 早孤事母孝 年六十六 丁憂 歠7粥三年 葬祭以禮 家廟晨謁 至老不輟
母病 欲嘗西瓜 而非時不得 用平生不食西瓜 年今七十五 ○<金淬7河> 居安康縣南大洞
村 父病革再斷指 流血以灌 父病乃瘳家甚貧 稱貸資生 而奉先極盡其誠 ○<鄭明緖>
居府東開穀村 襲明之後 父病 斷指流血以灌 ○<命春> 居安康縣多叱村 其姑老病 命
春奉養十餘年 少無怠意 每飮食 必親指匙以饋 姑遺矢225) 亦必手自掃除洗濯 不使其子
女 以盡姑年 命春年今六十餘矣 ○<禮俊> 居安康縣良佐村 私奴也 父病斷指 ○<李昌
馨> 居安康縣音汁火村 父病斷指 ○<李仁希> 本府下吏也 至誠養親 廬墓三年
우애(友愛)
<이계(李桂)> 안강현(安康縣) 동쪽 유금촌(有今村)에 살았다. 우춘(遇春)의 아들이
다. 형제가 어려서 고아가 되었는데 서로 의지하면서 화목과 기쁨을 극진히 다하였
다. 맛있는 음식이 조금이라도 있을 경우 그 형이 먹지 않았으면 계는 혼자 먹지
않고 반드시 같이 앉아 함께 먹었다. 형이 나무해야 하고 물을 길어야 하는 걱정이
있을 때에는 계는 종을 나눠 보내어 형을 돕도록 하였고, 형에게 춥고 더운 고통이
있을 때에는 겨울옷과 여름옷을 나누어 주었다. 그가 죽으려고 할 때 그 아들 딸에
게 말하기를 “내가 입는 의복은 나를 장사지내는 데 전부 다 사용하지 말고, 다른
날 형님의 초상에 염습(歛7襲)할 거리로 삼도록 하여라.” 하고는, 그 반을 나누어 몸
소 봉표한 다음 갈무리해 두었다.
223) 중간본에는 沒로 되어 있다.
224) 중간본에는 屨7로 되어 있다.
225) 屎와 같은 뜻으로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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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길(鄭延吉)> 부의 서쪽 부산촌(富山村)에 살았다. 습명(襲明)의 후손으로, 주
부(主簿) 침(忱의 아들이다. 그 형 연경(延慶)과 우애가 지극히 두터워 아침저녁으
로 드나들며 반드시 문안을 드렸고, 맛있는 음식이 조금이라도 있을 경우 형에게
올리지 않았으면 먼저 입에 넣지 않았다. 임진왜란 때 형이 왜적에게 사로잡히자
연길은 허둥지둥 달려가 자기 몸으로 대신할 것을 청하고는 왜적이 메고 가는 자루
를 자신이 메고 왜적을 위하여 길잡이가 되니, 왜적이 형을 버리고 동생을 데리고
갔다. 한 가닥의 새끼로 그의 손을 묶어놓고 자주 잡아끌면서 도망가지 못하게 하
였는데, 포로 중에 한 사내가 있어 연길을 의롭게 여기고 애달프게 여겨 왜적이 깊
이 잠든 틈을 기다려 묶은 새끼를 풀어준 다음, 대신 스스로 자기 손을 묶고는 “빨
리 도망가시오. 내가 대신하겠소.” 하고, 마침내 연길을 탈출하도록 하였으니, 이 역
시 하나의 의사(義士)이다.
<최홍택(崔弘澤)> 부의 북쪽 오금촌(五琴村)에 살았다. 이복동생 홍준(弘濬)과 우
애가 지극하여, 동생이 나무를 하고 물을 길어야 하는 근심이 있을 때는 생모(生母)
의 종들을 나눠 보내주었다. 고을 사람들이 선적(善籍)에 그 일을 기록하였다.
<오주간(吳周幹)> 부의 동쪽 개곡촌(開穀村)에 살았다. 진사 절(㦢')의 아들이다.
형 주한(周翰)과 우애가 매우 두터웠다. 형이 가난하여 집을 마련하지 못하자 주간
은 그가 사는 담장 안에 방을 만들어 함께 살았으며, 맛있는 음식을 조금만 얻어도
반드시 형에게 주었다. 형이 죽게 되자 그가 부리던 비복(婢僕)을 형의 자손을 위해
주니, 고을 사람들이 칭찬하고 감탄하였다.
<김득의(金得義)> 부의 남쪽 중리촌(中里村)에 살았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었다.
임진왜란 때 매제(妹弟)와 함께 황룡산(皇龍山) 속에 숨었는데, 왜적이 산을 뒤져
매제가 왜적에게 들켰다. 왜적이 칼로 매제의 어깨를 쳐 상처를 내자 득의는 갖은
방법으로 간호하면서 7년 전쟁 중에 시종 업고 다니며 적을 피하고, 걸식하면서 입
에 풀칠을 하여 끝내 두 사람이 온전히 생명을 보존하였다.
<이안성(李安性)> 기계현(杞溪縣)에 살았다. 무과에 올랐다.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그의 형이 사형에 해당하는 율법을 범하였는데, 대신 처벌받을 것을 애걸하여
무기를 들고 의로움을 떨치며 힘을 다해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이우남(李友柟> 부의 북쪽 모서평촌(茅西坪村)에 살았다. 형을 잘 섬겨 반드시
고기와 술로 대접했으며, 조카들을 불쌍히 여겨 특별히 노비(奴婢)까지 주었다. 고
을 사람들이 선적(善籍)에 그 일을 기록하였다.
<李桂> 居安康縣東有今村 遇春之子 兄弟少孤相依 極其和悅 一有美味 其兄不食 則
桂不獨食 必對坐共餐 兄有樵汲之憂 桂分臧獲以助之 兄有寒暑之苦 分冬夏衣 將死謂
子女曰 我所着衣服 切勿盡用於吾喪 以爲他日兄喪歛'襲之資 分其半 親自封表而藏之
○<鄭延吉> 居府西富山村 襲明之後 主簿忱'之子 與兄延慶 友愛篤至 晨昏出入 必候
問焉 得一美味 不進於兄 則不先入口 壬辰之亂 兄爲倭所獲 延吉蒼黃疾走 請以身代
取賊擔囊 身自負之 爲賊前路 賊乃捨兄 執弟而去 以一條索縶�其手 頻頻動引以防逃脫
被擄人中有一漢 義而哀之 俟倭睡熟 解所縶�之索 自縶�其手曰 願急去 吾請自當 遂令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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吉得脫 亦一義士也 ○<崔弘澤> 居府北五琴村 與異母弟弘濬 友愛篤至 弟有樵汲之憂
以所生母奴婢分給之 鄕人書之善籍 ○<吳周幹> 居府東開穀村 進士㦢'之子 與兄周翰
友愛篤至 兄貧不能爲家 周幹於所居垣內 作室同處 得一美味 必以饋兄 及兄臨死 許其
所使婢僕 以爲兄子孫計 鄕人稱歎焉 ○<金得義> 居府南中里村 早喪父母 壬辰之亂
與妹弟 隱匿皇龍山中 賊探山 妹弟爲賊所遇 以劍擊其肩 得義百般救療 七年兵火中 終
始負行避賊 乞丐糊口 竟至兩全 ○<李安性> 居杞溪縣 登武科 丁酉兵亂 其兄犯死律
乞以身代 仗劍奮義 力戰死之 ○<李友柟 居府北茅西坪村 善事家兄 必有酒肉 顧恤
從子 特給奴婢 鄕人書之善籍
충의(忠義)
<김호(金虎)> 부의 남쪽 월남촌(月南村)에 살았다. 무과에 급제하였다. 임진왜란
때 왜적의 기세가 들끓자 사람들은 모두 몰래 숨어 버렸는데, 호는 앞장서서 의병
(義兵)을 일으켜 최진립(崔震立)과 함께 죽음을 맹세하고 충성을 다하기로 했다. 왜
적의 길을 끊고 누차 싸워 대승을 거두었는데, 전후로 왜적의 목을 잘라 바친 것이
수 천 급이나 되었다. 전공(戰功)으로 부산 첨사(釜山僉使)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
기도 전에 왜적의 포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백이소(白以昭)> 부의 서쪽 부산촌(富山村)에 살았다. 위인이 장대하였으며, 용
력(勇力)이 출중하였다. 임진왜란 때 어머니를 모시고 아내를 거느리고 산 속에 은
닉시킨 다음, 혼자 활과 화살을 가지고 산을 탐색하는 왜적을 방어하여 30여 명의
목을 베었다. 그리하여 왜적이 감히 산에 들어오지 못하고 온 산에 숨어 있던 사람
들이 이에 의지하여 목숨을 온전히 할 수 있었다. 갑오년(1594)에 무과에 급제하였
다. 정유재란에 발분하여 왜적을 토벌하다가 몸에 적탄을 맞았다. 영천(永川) 창암
(倉巖)의 싸움에서 원님이 그를 만류하기를 “탄환의 상처가 아직 완쾌되지 못하였
으니 종군해서는 아니되오.” 하고 병사(兵使) 또한 만류하니, 이소가 말하기를 “신
하된 사람으로 이 같은 국난을 당하였으니, 응당 진중(陣中)에서 죽어야하는 법 어
찌 감히 살기를 바라겠소.” 하고는, 스스로 병사를 모아 진중으로 뛰어들어 힘을 다
해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이파수(李葩7秀)ㆍ이분수(李芬秀)> 형제가 부의 서쪽 부산촌(富山村)에 살았으며,
모두 봉사(奉事)이다. 임진왜란 때 형제가 스스로 의병을 모집하여 서문(西門) 밖에
서 힘을 다해 싸우다가 모두 전사하였다. 분수의 아내 김씨(金氏) 또한 왜적에게 잡
혀 죽을 때까지 항거하다가 역시 죽음을 당하였다.
<최봉천(崔奉天)> 부 안에 살았다. 무과에 급제하였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
켜 왜적을 토벌하여 전공으로 특별히 좌수영 우후(左水營虞侯)에 제수되었다. 창암
(倉巖) 싸움에서 적진 속으로 돌격하여 힘을 다해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난이 평정
된 뒤 2품을 추증하고 부모에게도 작위를 봉하였다.
<이희룡(李希龍)> 안강현 북쪽 다질촌(多叱村)에 살았다. 무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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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찰(司憲府監察)로 봉직하며 서울에 있었다. 임진왜란 때 적의 형세를 엿보라는 명
을 받들고 충주(忠州)에 갔다가 적을 만나 전사하였다. 그의 아들 문진(文軫)이 집
에서 아버지가 전사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속으로 복수할 것을 맹세한 다음 곧
충주로 향하였는데 신령(新寧)에 이르러 또 적을 만나 힘을 다해 싸우다가 죽었다.
<권복흥(權復興)> 안강현 다질촌에 살았다. 임진왜란 때 발을 절기 때문에 의병
(義兵)에 참여할 수가 없자, 발분하여 전마(戰馬)를 갖추고 가동(家僮을 거느리고
곧장 부산(釜山)으로 향하다가 다대포(多大浦)에서 왜적을 만나 적진 속으로 달려
들었는데, 칼이 꺾이고 화살이 떨어져 왜적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박이손(朴利孫)>
<김윤복(金允福>
<황희안(黃希安)> 모두 장사(壯士)이다. 임진왜란 때 각기 요해처(要害處)를 맡아
죽을힘을 다해 막았으며 왜적의 수급을 많이 바쳤다. 어사(御使) 이상신(李尙信)이
그 사실을 조정해 보고하자, 임금께서 매우 가상하게 여겨 관찰사 한준겸(韓浚謙)에
게 명하여 교서(敎書)를 내려 유시하고, 주육(酒肉)과 포목(布木)을 많이 마련하여
호궤(犒7饋)하고 반급(頒給)하였으며, 품계를 높이고 공신에 녹용하였다.
<옥동(玉同)> 최진립(崔震立)의 종이다. 임진왜란 때 그 주인이 의병을 일으켜 왜
적을 토벌할 때, 옥동의 나이는 겨우 15,6세였는데, 성심껏 주인을 받들었으며 어렵
고 위태함을 피하지 않았다. 어느 날 왜적이 갑자기 닥치자 종과 주인이 함께 숲
속으로 숨었다. 적이 멀리서 보고 대대적으로 수색하자 옥동은 면할 길이 없음을
알고는 먼저 뛰쳐나갔다. 왜적이 여러 방법으로 꾀었으나, “여기에는 사람이라곤 없
고 아무 골짜기 속에는 피난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그쪽으로 가라.” 하였다. 왜적이
그 소년의 아름다운 용모를 아까워하여 차마 무기를 대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갔기
때문에 종과 주인이 목숨을 온전히 할 수 있었다.
<기별(奇別)> 최진립의 종 옥동(玉同)의 조카이다. 병자호란 때 험천(險川)싸움에
서 진립은 그가 거느리던 몇 명의 종에게 이르기를 “내가 비록 나이는 많으나 마땅
히 전쟁터에서 죽고자 하는데 너희들 가운데 기꺼이 나를 따를 자가 있는가” 하고
는, 이어 옷을 벗어던지며 이르기를, “나를 따를 사람은 이 옷을 입어라.” 하였다.
그러자 기별은 눈물을 흘리며 옷을 입고 말하기를 “주인이 이미 충신이 되는데 종
이 홀로 충성스런 종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고는, 마침내 진중(陣中)에서 함께 죽
었다. 시체를 찾아보니, 그 주인 시체 옆에 있었다.
<애경(愛卿)> 부의 북쪽 모아촌(茅兒村)에 사는 사비(私婢)이다. 3대에 걸쳐 그
주인을 섬겼는데, 충성과 사랑이 독실하였다. 임진왜란 때 피신하던 중 얻은 것이
비록 작더라도 꼭 주인께 드렸으므로 주인은 이 덕택에 살 수 있었다. 주인이 병에
걸릴 때마다 반드시 그 똥이 쓴지 단지를 맛보았다.
<흔월(欣月)> 부의 남쪽 월남촌(月南村)에 사는 사비(私婢)이다. 임진왜란 때 그
의 주인 김씨(金氏)가 남편을 잃고 또 자식이나 조카도 없었는데, 흔월이 지성으로
봉양하여 주인이 이 덕택에 목숨을 보전하였다. 뒤에 김씨가 늙어 홀로 살 수 없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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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었는데, 흔월은 시종여일하게 조석으로 봉양하였다. 김씨가 죽자 염(斂)하여 장사
지내는 일과 제사지내는 예를 정성을 다해 마련하였다. 자신이 죽게 되자 그의 자
식들에게 이르기를 “상전이 살아계실 때는 오직 나만을 의지하였는데 이제 외로운
혼이 되었으니, 다시 누구를 의지하겠는가? 내가 죽어서 그분의 무덤 곁에 묻히면
지하에서나마 두 혼이 거의 믿고 의지할 수 있을 것이다. 너희들은 반드시 함께 보
호하여 제사를 지내야 한다.” 하고는, 말이 끝나자 죽으니, 이웃 사람이 모두 그 지
극한 정성에 감탄하였다.
<金虎> 居府南月南村 登武科 壬辰之亂 賊勢鴟7張 人皆竄伏 虎首起倡義 與崔震立
誓死效忠 遏'絶賊路 累戰大捷 前後獻馘7數千餘級 以功除釜山僉使 未及卦任 爲賊砲所
傷死 ○<白以昭> 居府西富山村 爲人壯大 勇力絶人 壬辰之亂 奉母率妻 匿置山中 獨
持弓矢 以禦探山之賊 斬首三十餘級 賊不敢入山 一山避匿之人 賴以得全 甲午登武科
丁酉兵亂 發憤討賊 身中賊丸 永川倉巖之戰 邑倅7止之曰 丸瘡未完 不可從軍 兵使亦止
之 以昭曰 爲人臣子 遭此國亂 當死陣中 何敢求生 遂自募赴陣 力戰死之 ○<李葩'秀>
○<李芬秀> 兄弟居府西富山村 皆奉事也 壬辰之亂 兄弟自募義兵 力戰于西門外 皆死
之 芬秀妻金氏 亦爲賊所逼 至死拒之 亦被殺 ○<崔奉天> 居府內 登武科 壬辰之亂
倡義討賊 以戰功特除左水榮虞侯226) 倉巖之戰 突入賊中 力戰死之 亂定後 追贈二品
父母封爵 ○<李希龍> 居安康縣北多叱村 登武科 以司憲府監察 供職在京 壬辰之亂
承命覘7賊 至忠州 遇賊戰死 其子文軫 在家聞父戰死 誓心報讎直向忠州 行至新寧 又
遇賊力戰死之 ○<權復興> 居安康縣多叱村 壬辰之亂 以足蹇擯不得與於義旅 發憤備
戰馬 率家僮直向釜山 遇賊於多大浦 馳入賊陣 劍折矢盡 爲賊所害 ○<朴利孫> ○
<金允福> ○<黃希安> 皆壯士也 壬辰之亂 分據要害處 戮力捍'禦 獻馘'甚多 御史李尙
信上其事 上嘉之 命觀察使韓浚謙 下敎書以諭之 多辦酒肉木布 犒7饋227)頒給 陞資錄功
○<玉同> 崔震立奴也 壬辰之亂 其主倡義討賊 時玉同年纔7十五六 盡心奉主 不避艱危
一日賊猝至 奴主同竄林藪 賊望見 大來搜索 玉同度不得免 挻身先出 多方誘之 曰 此
無人矣 某谷中 多有避兵者 可以去矣 賊愛其年少美姿容 不忍加兵 仍向他處 奴主得以
俱全 ○<奇別> 崔震立之奴 玉同之姪也 丙子險川之戰 震立謂所率奴數人曰 吾雖年至
當死戰場 爾輩肯有從我者否 因解衣投之曰 從我者須着此衣 奇別泣而衣之曰 主旣爲忠
臣 奴獨不爲忠奴乎 遂同死陣中 及尋屍 屍在其主之側 ○<愛卿> 居府北茅兒村 私婢
也 歷事其主三世 忠愛篤至 倭亂奔竄中 所得雖毫末 必以供主 主賴以活 每主病 必嘗
糞甛苦 ○<欣月> 居府南月南村 私婢也 壬辰之亂 其主金氏 喪其夫 又無子姪 欣月至
誠奉養 賴以得全 後金氏年老 無以自存 欣月朝夕奉侍 始終如一 及金氏歿歛7葬之事 祭
奠之禮 竭誠供辦 及其將死 謂其諸子曰 上典在世 惟我是依 今作孤魂 更誰爲托 我死
葬其墓側 則地下兩魂 庶有依賴 汝等須共爲保護 以修祀事 言訖而死 隣里咸歎其至誠
정렬(貞烈)
226) 중간본에는 候로 되어 있다.
227) 중간본에는 餉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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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新羅)
<설씨(薛氏)> 율리(栗里)의 민간 여자이다. 아버지가 늙었는데도 북적(北狄)의 침
략에 대비하는 군사로 소집되자 딸이 자신이 대신 가지 못함을 한탄하였다. 이에
소년 가실(嘉實)이 대신 가기를 원하였다. 설씨가 들어가 그 사실을 아버지에게 고
하니, 아버지가 가실에게 말하기를, “들으니, 그대가 나대신 가려 한다니, 내 딸을
그대에게 시집보내겠다.” 하였다. 이에 가실이 혼인할 기일을 청하니, 설씨가 말하
기를, “첩이 이미 마음으로 허락하였으니 죽어도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돌아오기를
기다려서 혼례를 하여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는, 거울을 반쪽씩 나누어 신표
(信標)로 삼았다. 가실은 말 한 필을 남겨 두고 드디어 떠났다. 그런데 6년이 지나
도 돌아오지 않자, 아버지가 말하기를, “처음에 3년으로 기한을 정했으니 이제 다
른 집으로 시집가는 것이 어떠냐” 하였다. 설씨가 말하기를, “전날 아버지 때문에
가실과 약혼하였는데 신의를 저버리고 언약을 지키지 않는다면 어찌 사람의 정리
(情理)라 하겠습니까? 그것만은 끝까지 감히 따르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아버지
가 너무 늙었으므로 같은 동네 어떤 사람에게 강제로 시집보내기로 결정하였는데도
설씨는 완강하게 거부하고 외양간에 가서 말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이때 가실이
돌아왔는데, 몸이 마르고 의복이 남루하여 설씨가 알아볼 수가 없었다. 가실이 깨진
거울을 던지자, 설씨가 그것을 보고 소리 내어 울었다. 드디어 날을 가려서 혼례를
치렀다. 【 여지승람 에 나온다.】
<薛氏> 栗里民女也 父年老 當防秋 女恨身不得代行 少年嘉實願代 薛入以告於父 父
曰 聞君欲代老人之行 願以女奉箕箒於是 嘉實請期 薛曰 妾旣以身許 有死無易 待歸
成禮 未晩也 乃分鏡爲信 留一馬 遂行六年未還 父曰 始以三年爲期 可歸他族 薛曰 向
以親故 與嘉實約 棄信食言 豈人情乎 終不敢從 父老耄欲强婚於里人 旣定 薛固拒 至
厩見馬流淚 於是 嘉實來 形骸枯槁 衣裳襤褸228) 薛不知 嘉實以破鏡投之 薛得之號泣
遂約異日 成禮 【出輿地勝覽229)】
�신증(新增) < 본조本朝
<김씨(金氏)> 훈도(訓導) 김연(金鍊)의 아내다. 임진왜란 때 연이 상경하여 돌아
오지 않자 김씨는 세 살 난 어린아이를 안고 산골짜기에 숨었다가 잡혔다. 왜적이
치려고 앞으로 다가서자 김씨는 아이를 안고 통곡하며 죽음을 각오하고 따르지 아
니하니, 왜적이 아이를 빼앗아 산 채로 다른 숲에다 놓아두고 김씨를 죽였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 마을에 정문을 세웠다. 정문은 부의 서쪽 광교(廣橋) 가에 있다.
<견씨(堅氏)> 충순위(忠順衛) 이종찬(李宗纘)의 아내이다. 남편의 상을 당하자 3
년 동안 피눈물을 흘리며 소금과 간장을 먹지 않고 상복을 벗지 않았으며, 너무 슬
228) 중간본에는 襤褸가 藍縷로 되어 있다.
229)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7경상도(慶尙道)」경주부(慶州府) 열녀조(烈女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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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하여 몸이 몹시 여윈 나머지 저절로 죽었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 마을에 정문을
세웠다. 정문은 신원(新院)에 있다.
<정씨(鄭氏)> 충의위(忠義衛) 이저(李竚)의 아내이다. 일찍 남편을 잃고 예제(禮
制)에 지나칠 정도로 애훼(哀毁)하였으며, 이어 어머니 상을 당하여 주야로 통곡하
였다. 아버지가 병이 나자 병을 간호하여 돌보는데 그 정성을 다하였다. 일이 조정
에 알려져 마을에 정문을 세웠다. 정문은 월남촌(月南村)에 있다.
<최씨(崔氏)> 봉사(奉事) 손봉선(孫奉先)의 아내이다. 남편과 시어머니를 충실히
봉양하였으며 부도(婦道)를 굳게 지켰다. 임진왜란 때 봉선이 그의 계모와 구미산
(龜尾山) 속에 숨었는데, 갑자기 왜적을 만났다. 왜적이 칼로 그 어머니를 치려 하
자 봉선이 말하기를 “나를 죽이고 내 어머니는 죽이지 말라.” 하였으나, 모자가 한
칼에 함께 죽음을 당하였으며, 최씨는 몸으로 남편을 가리고 손으로 칼을 막아 손
이 잘리고 몸에 상처를 입어 피를 흘려 거의 죽게 되자, 왜적이 마침내 최씨를 버
리고 갔다. 최씨는 몸소 남편과 시어머니를 염(斂)하였는데, 하관(下官)을 한 뒤 그
자녀들에게 이르기를, “남편이 이미 어머니를 위해 죽었는데 내가 어찌 차마 홀로
살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목매어 자진하였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 마을에 정문을
세웠다. 정문은 부의 서쪽 작원(鵲院)에 있다.
<금씨(琴氏)> 안강현 마을에 살았다. 유학(幼學) 김눌(金訥)의 아내이다. 임진왜란
때 산골짜기로 피신하여 숨었는데, 왜적이 갑자기 들이 닥쳤다. 미색에 반하여 금씨
를 범하려고 하였으나, 금씨는 매우 강하게 항거하며 차고 있던 조그만 칼을 꺼내
왜적의 손을 찔렀다. 이로 인해 살해를 당하였다.
<단비(丹非)> 안강현 마을에 사는 사비(私婢)이다. 자태가 예뻐 18세에 이웃에 사
는 선비의 눈에 들었는데 21세가 되어 그 선비가 죽자 끝내 재가(再嫁)하지 않고
80여 세까지 살다가 죽었다.
<방금(方今)> 안강현 마을에 사는 사비(私婢)이다. 어려서부터 자태가 예뻤는데
19세에 과부가 된 뒤, 끝내 재가하지 않고 70여 세까지 살다가 죽었다.
<정씨鄭氏)> 부의 남쪽 중리촌(中里村)에 살았다. 봉사(奉事) 주청(朱淸)의 아내이
다. 청이 죽자 정씨는 밤낮으로 통곡하며 빈소 곁을 떠나지 않았다. 명절 제사 때에
는 반드시 남편의 계절에 맞는 옷과 버선을 만들었으며, 제사가 끝나면 옷은 태우
고 버선은 묻곤 하였다. 매서운 추위와 삼복더위에도 자신의 몸에는 늘 온전한 옷
이 없었으나 남편을 위해 옷을 만듦은 3년 내내 시종 한결같았다. 복을 끝낸 뒤에
도 소복하고 베옷을 입었으며, 술과 고기를 먹지 않고 일생을 마쳤다. 고을 사람들
이 선적(善籍)에 그 일을 기록하였다.
<정씨(鄭氏)> 흥해(興海) 사람 예조정랑(禮曹正郞) 사명(四溟)의 딸이다. 시집간
지 1년도 못 되어 남편 이단(李壇)이 병으로 죽자, 정씨는 남편을 따라 죽으려고 칼
을 잡고 스스로 목을 찌르기를 여러 번 하였고, 새끼로 스스로 목을 매기를 서너
차례나 하였는데, 근방에 있던 사람이 죽어가는 소리를 듣고 허둥지둥 달려와 구원
하였다. 그 뒤로는 늘 사람을 시켜 지키면서 자결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정씨는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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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코 죽고자하여 장례가 끝난 뒤 이불로 얼굴을 덮어쓰고 일가 사람들에게도 얼굴
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미음도 먹지 않고 오직 냉수만 먹었는데, 1년이 되자 너무나
슬퍼하여 몸이 야윈 나머지 저절로 죽었다. 남편의 초상(初喪) 때부터 자신이 죽을
때까지 통곡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오직 “죽은 뒤 나를 남편의 묘 곁에 묻으면
죽어도 유감이 없겠다.”라고만 하였다.
<김씨(金氏)> 안강현 북쪽 노당촌(魯堂村)에 살았다. 교리(校理) 김종일(金宗一)의
누이동생이다. 아들 하나를 낳고 과부가 되어 피눈물로 3년 상을 치르며 예를 다하
였다. 아들이 약관의 나이로 마마를 앓다가 죽자, 김씨는 통곡하며 말하기를 “내가
참고 견디며 죽지 않은 것은 자식이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이제 또 아들이 죽었으
니 다시 무엇을 바라겠는가.” 하고는, 스스로 죽으려 하니, 오빠가 이치로 타이르고
또 비복을 시켜 지키도록 하였다. 어느 날 종에게 이르기를, “오빠가 날마다 오셔서
보는데 요기할 거리가 없구나. 모쪼록 소주(燒酒)를 많이 준비하여 내 잠자리 옆에
놓아두어라.” 하여, 종이 그 말대로 하였다. 이날 밤새도록 언문으로 글을 써서 단
단히 봉한 뒤 잠자리에 들었다. 종이 이를 걱정하지 않고 깊이 잠을 잤는데, 아침이
되어 그녀를 보니 그녀는 이미 죽고 술병은 비어 있었다. 그 봉한 글을 열어 보니
몸을 처치한 후의 일과 오빠와 남편의 형제에게 부탁하는 내용으로서 그 후사(後
嗣)를 세우는 일이었다.
<한씨(韓氏)> 기계현(杞溪縣)에 사는 사인(士人) 이영(李楹)의 아내이다. 몹시 부
도(婦道)를 잘 지켰으며 사람들이 그 현명함을 칭찬하였다. 혼인한 지 1년이 채 못
되어 남편이 병이 들어 죽자, 한씨는 종에게 말하기를 “나는 일찍이 양친을 잃고
지금 다시 남편을 잃었으니, 내 차라리 죽어 따를지언정 차마 홀로 살지 않겠다.”
하고는, 아무 것도 먹지 않고 13일 만에 죽었다.
<용개(龍介)> 부의 서쪽 부산촌(富山村)에 사는 사비(私婢)이다. 1남 2녀를 낳고
29세에 과부가 되었는데, 악한에게 겁탈을 당할까 두려워하여 항상 잠자리에서도
옷을 벗지 않았으며, 또한 식칼이나 낫 등의 물건을 대비해 놓았다. 나이 58세가
되어 죽었는데, 이웃 사람들이 모두 칭찬하였다.
<어둔개(於屯介)> 부의 남쪽 명곡리(椧谷里)에 사는 수군(水軍) 박인옥(朴仁玉)의
딸이다. 나이 17세에 동해(東海) 사람에게 시집가 몇 해를 살았는데, 남편이 병이
들자 어둔개는 정성을 다해 돌보았다. 남편이 죽자 어둔개는 통곡하며 말하기를
“남편이 이미 죽었으니 내가 어찌 차마 홀로 살겠는가? 내 나이가 젊고 자식이 없
으니, 우리 부모는 반드시 나의 정절을 지키려는 뜻을 빼앗을 것이다.” 하고는, 스
스로 목을 매었다. 집안사람들이 달려들어 구원하였으나, 몰래 도망가 바다에 몸을
던져 죽었다.
<양씨(楊氏)> 부의 동쪽 개곡리(開穀里)에 사는 충의위(忠義衛) 김홍엽(金弘燁)의
아내이다.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무장산(䥐'藏山)에 피해 숨었는데 왜적이 갑자기
들이닥쳐 앞으로 몰아내었다. 깊은 연못 위에 이르자 스스로 몸을 던져 죽었다.
<김씨(金氏)> 안강현 마을에 사는 유학(幼學) 권사립(權士立)의 아내이다. 임진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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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 때 왜구가 그녀의 용모가 예쁜 것을 보고 몹시 급박하게 달려들었는데, 김씨는
끝내 면할 길이 없음을 알고 마침내 머리를 풀어 헤쳐 얼굴을 가리고 물에 몸을 던
져 죽었다.
<조금(趙今)> 안강현 서쪽 옥산동(玉山洞)에 살았다. 나이 21세에 과부가 되었는
데 끝내 재가하지 않고 70여 세에 죽었다.
<덕금(德今)> 기계현 북쪽 성법촌(省法村)에 살았으며, 봉사(奉事) 장진룡(張震龍)
의 첩이다. 병자호란 때 남편이 쌍령(雙嶺) 싸움터에서 죽자, 덕금은 천리 험한 길
을 헤치고 가 남편의 시신을 찾아서 돌아와 장사를 지냈으며 정성을 다해 제사를
지냈으므로 고을 사람들이 그를 칭찬하였다.
<박소사(朴召史)> 기계현 남쪽(南村)에 살았다. 나이 19세에 시집가 25세에 남편
을 잃었는데, 성심을 다해 장례를 치르고 6년 동안이나 애훼하였으며, 종신토록 절
개를 지키고 개가하지 않았다. 부모를 효성으로 섬겼으며 어머니가 늙어 병이 나
눈이 멀자 성심으로 봉양하였고, 어머니가 돌아가자 6년 상을 입었다. 또 자식이
없는 숙부를 위해 3년 상을 입었다.
<한씨(韓氏)> 부의 서쪽 대곡촌(大谷村)에 살았으며, 우견(又堅)의 딸이다. 물가에
살았는데 남편의 상을 당해 빈소를 차리고 아직 장례를 치르지 않았는데, 하루는
큰비가 내려 물이 넘쳐 관이 물에 떠내려갔다. 한씨는 물에 몸을 던져 관을 끌어안
고 서로 떴다 가라앉았다 하다가 이윽고 관이 언덕 가에 걸려 사람과 관이 모두 온
전하였다. 상을 끝낸 뒤 절대 고기를 먹지 않았다.
<김소사(金召史)> 기계현의 마을에 사는 백성 이명생(李命生)의 아내이다. 일찍
남편을 잃었는데 자식도 없어 양식을 구걸하여 장사와 제사를 지내고 6년 상을 입
었다. 지성으로 시어머니를 봉양하여 시종일관 게으르지 않았다. 시어머니가 역병으
로 죽었는데, 소사는 스스로 관을 메고 가서 매장하였으며, 지금 복상(服喪)이 끝난
지가 이미 한 해가 넘었는데도 아직까지 상복을 벗지 않고 있다.
<金氏> 訓導金鍊妻也 壬辰之亂 鍊上京未還 金氏抱三歲兒 避匿山谷中 被執 賊捶'擊
以前 金氏抱兒痛哭 矢死不從 賊奪其兒 生置他藪 而殺金氏 事聞旌閭 閭在府西廣橋邊
○<堅氏> 忠順衞7李宗纘妻也 居夫喪 泣血三年 不食鹽醬 不脫喪服 紫毀自盡 事聞旌
閭 閭在新院 ○<鄭氏> 忠義衞7李竚妻也 早喪夫 哀毀踰禮 繼遭母喪 晝夜號泣 及父病
救療備至 殫'竭其誠 事聞旌閭 閭在府南月南里 ○<崔氏> 奉事孫奉先妻也 備養夫姑
甚執婦道 壬辰之亂 奉先與其繼母 避匿龜尾山中 忽遇賊 將刃其母 奉先曰 願殺我 毋
害母 母子同死一劍 崔氏身以掩夫 手以防刃 折手傷身 流血幾死 賊乃捨去 崔氏親斂
夫姑 已窆謂其子女曰 夫旣爲母而死 吾何忍獨活 遂自縊而死 事聞旌閭 閭在府西鵲院
○<琴氏> 居安康縣里 幼學金訥妻也 壬辰之亂 避匿山谷中 賊猝至 悅其姿色 欲犯之
琴氏拒之甚確 抜所佩小刀 剌賊手 因被害 ○<丹非> 安康縣里私婢也 有容色 年十八
爲隣居士人所眄 及年二十一而士人死 終不再嫁 至八十餘乃死 ○<方今> 安康縣里私
婢也 少有容色 年十九而寡 終不再嫁 至七十餘乃死 ○<鄭氏> 居府南中里村 奉事朱
淸妻也 淸死 鄭氏晝夜號哭 不離殯側 俗節祭祀 必作夫節衣及襪 祭罷焼其衣 而瘞其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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祁寒大暑 軆7常無全衣 而爲夫製衣 則三年之內 始終如一 闋'服後 素服麻絰不御酒肉以
終其身 鄕人書之善籍 ○<鄭氏> 興海人禮曹正郞四溟之女 嫁未朞年 夫李壇病死 鄭氏
欲自決以從之 取刀自剄7者 數次 以索自縊者三四次 傍人聞其將絶聲 蒼黃奔救 自後常
使人守之 不令自決 鄭氏期以必死 自殯斂後 以被蒙面 不見一家人面目 不進米飮 終年
唯飮冷水 及朞柴毀自盡 自初喪 至臨死 哭不絶聲 惟曰 死後 埋我於家翁墓側 則死無
憾矣 ○<金氏> 居安康縣北魯堂村 校理宗一妹也 生一子而寡 泣血三年 執喪盡禮 子
弱冠死於痘 金氏號痛曰 吾隱忍不即7死者 以有子也 今子又死 吾復何望 遂欲自決 其娚
喩以理 且以婢僕守之 一日謂其婢曰 兄娚日日來見 而無以療飢 須多備焼酒 置我枕邊
婢如其言 是日達夜書諺文 堅封藏之 然後就寢 婢不以爲慮而熟睡 朝而視之 則已逝而
甁竭矣 啓其封書 則處置身後事 及付兄娚與夫之兄弟 以屬其立後事也 ○<韓氏> 居杞
溪縣 士人李楹妻也 甚執婦道 人稱其賢 未朞年 夫病死 韓氏謂其婢曰 吾早失兩親 今
又喪夫 吾寧死從 不忍獨活 因絶食十三日而死 ○<龍介> 居府西富山村私婢也 生一男
二女 廿'九而寡 恐爲强暴所汚 常於枕席 不解衣裳 又置刀鎌等物 以備之 年五十八而死
隣里咸稱焉 ○<於屯介> 居府南椧谷里 水軍朴仁玉女也 年十七嫁東海人 居數歲 夫得
病 於屯介盡誠扶救 及夫死 於屯介慟哭曰 良人旣死 吾何忍獨活 吾年少無子 父母必奪
吾志矣 因欲自縊 家人奔救之 潛走投海而死 ○<楊氏> 居府東開穀里 忠義衛金弘燁妻
也 丁酉之亂 避隱䥐'藏山中 賊猝至 驅出前行 到深淵上 自投而死 ○<金氏> 居安康縣
里 幼學權士立妻也 壬辰之亂 倭寇見其姿色 迫之甚急 金氏知其終不得免 乃披髮掩面
投水而死 ○<趙今> 居安康縣西玉山洞 年二十一而寡 終不再嫁 七十餘乃死 ○<德今>
居杞溪縣北省法村 奉事張震龍妾也 丙子之亂 夫死於雙嶺戰場 德今千里跋涉 尋屍還葬
祭奠盡誠 鄕人稱之 ○<朴召史> 居杞溪縣南村 年十九而嫁 二十五喪夫盡心治喪 哀毀
六年 終身不改所守 孝養父母 母老病盲 誠心奉養 及母死 服喪六年 又爲無後叔父 服
喪三年 ○<韓氏> 居府西大谷村 又堅之女也 傍水而居 遭夫喪 殯而未葬 一日大雨 水
溢屍柩漂出 韓氏投水抱柩 互相出沒 俄而柩礙7230)於岸邊 人與柩兩全 喪畢後 絶不食肉
焉 ○<金召史> 居杞溪縣里 百姓李命生妻也 早喪夫無子 乞糧葬祭 服喪六年 至誠養
姑 終始不怠 姑死於癘'疾 召史自負埋窆今服闋'已踰年矣 猶不脫衰
기예(伎藝)
<김생(金生)> 승려이다. 어려서부터 글씨에 능하여 나이 80세가 넘어서도 여전히
붓을 잡고 쉬지 않았다. 예서(隷書)ㆍ행서(行書)ㆍ초서(草書)가 모두 입신(入神)의
경지에 이르렀다. 학사(學士) 홍관(洪灌)이 사신이 되어 송(宋)나라로 갔을 때, 김생
의 행초서 한 권을 한림(翰林) 양구(楊球)와 이혁(李革)에게 보였는데, 두 사람은 크
게 놀라며 말하기를, “뜻밖에 오늘 다시 왕우군(王右軍 왕희지(王羲之))의 친필(親
筆)을 보는구나.” 하였다. 관이 말하기를, “이것은 신라 김생의 글씨라오.” 하자, 두
사람은 웃으면서 말하기를, “천하에 왕희지 외에 어찌 이렇듯 신묘한 필적이 있단
230) 중간본에는 碍자로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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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인가” 하였다.
<솔거(率居)> 한미(寒微)한 출신이라 족계(族系)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태어나면
서부터 그림을 잘 그렸다. 일찍이 황룡사(黃龍寺) 벽에 가지와 줄기가 구불구불한
노송(老松)을 그렸는데, 새와 참새들이 이 그림을 보고 날아들어 발버둥 치다가 떨
어지곤 하였다. 세월이 오래 되어 색채가 흐려지자 절에 있던 중이 덧칠을 하였는
데, 새와 참새들이 다시는 오지 않았다. 분황사(芬皇寺) 관음보살과 진주(晋州) 단곡
사(斷谷寺)의 유마상(維摩像)이 모두 솔거의 필적인데, 세상에서는 신화(神畵)라로
전해진다. 【이상은 삼국사(三國史) 에 나온다.】
<설경성(薛景成)> 고려 때 사람으로 자칭 홍유후(弘儒侯) 설총(薛聰)의 후손이라
고 한다. 대대로 의술을 업으로 삼았는데 그 의술이 정묘하였다. 키가 크고 풍채와
체격이 아름다웠으며 성품이 근신하고 중후하였다. 충렬왕(忠烈王)이 병에 걸릴 때
마다 반드시 경성으로 하여금 치료하게 하여 이 때문에 명성이 났다. 원(元)나라 세
조(世祖)가 병이 들어 사신을 보내어 의원을 구하였는데, 안평공주(安平公主)가 행
장이며 돈과 옷 두 벌을 하사하고 그를 파견하였더니, 약을 써서 효력이 있었다. 세
조가 기뻐하여 숙사(宿舍)와 양곡(糧穀)을 하사하고, 문지기에게 칙명을 내려 아무
때나 출입하게 하였다. 그가 오면 앞에서 바둑을 두게 하고 친히 그것을 구경하시
고는 매우 후하게 상을 내렸다. 이로부터 자주 왕래하였는데 세조는 그를 만날수록
더욱 후하게 대우하였다. 경성은 비록 천자에게 인정을 받고 국왕에게 사랑을 받았
으나 일찍이 자손을 위해서 은택을 부탁한 적이 없었고, 또한 재산에도 관심을 두
지 않았다. 벼슬은 지도첨의사사(知都僉議司事)에 이르렀다. 【고려사(高麗史)에 나
온다.】
<金生> 僧人也 自幼能書 年踰八十 猶操筆不休 隷書行草皆入神 學士洪灌 奉使入宋
以金生行草一巻 示翰林楊球李革二人 大駭曰 不圖今日復見王右軍手書 灌曰 此乃新羅
金生書也 二人笑曰 天下除右軍 焉有妙筆如此哉 ○<率居> 所出微 故不記族系 生而
善畵 嘗於黃龍寺壁 畵老松枝幹盤屈 鳥雀往往望之飛入 及到蹭蹬而落 歲久色暗 寺僧
以丹靑補之 鳥雀不復至 又芬皇寺觀音菩薩 晉州斷谷寺維摩像 皆其筆蹟 世傳爲神畵
【以上出三國史】○<薛景成> 高麗時人 自言弘儒侯聰之後 世業醫 精其術 身長美風
儀 性謹厚 忠烈每遘'疾 必使景成治之 由是有名 元世祖不豫 遣使求醫 安平公主賜裝錢
及衣二襲遣之 用藥有効 世祖喜賜館廪 勑門者時得出入 至使圍碁於前 親臨觀之 賞賜
甚厚 自是數往還 世祖遇之益厚 景成雖見知天子 蒙幸國王 未嘗爲子孫求恩澤 亦不治
産業 官至知都僉議司事 【出高麗史231)】
서적(書籍)」
부 소장 책판 府藏冊板
231) 고려사(高麗史) 권122 「'열전(烈傳)」설경성조(薛景成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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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경편(自警篇) , 활인심방(活人心方) , 상서언토(尙書諺吐) , 상서(尙書) , 호
전춘추(胡傳春秋) , 중용(中庸) , 대학(大學) , 장자필담(莊子筆談) , 용재총화(慵'
齋叢話) 유양잡조(酉陽雜俎) , 역대세년가(歷代世年歌) , 이학지남(吏學指南) ,
무원록(無寃錄) , 강해률(講解律) , 둔촌시(遁村詩) , 북경팔경시(北景八景詩) ,
불자기문(不自棄文) , 송宋)나라 양휘(楊輝)의 산법(算法) , 구성궁잠서(九成宮蠶
書) , 증급유방(拯急遺方) , 삼국유사(三國遺事) , 익재난고표시(益齋亂槀7表詩) ,
창진방(瘡疹方) , 주자시집(朱子詩集) , 백리지남(百里指南) , 초서천자(草書千
字) , 원육전대전(元六典大全) , 효경(孝經) , 성리대전(性理大典) , 당음(唐音) ,
제왕운기(帝王韻記) , 시향도(時享圖) , 연주시격(聯珠詩格) , 소전대명률(小全大
明律) , 약운(略韻) , 관혼상제의(冠婚喪制儀) , 십초시(十抄詩) , 남악창수(南嶽
唱酬) , 의안방(醫眼方) , 구황촬요(救荒撮要) , 삼국사(三國史) , 용학지남(庸學
指南) , 양산묵담(兩山墨談) , 유선록(儒先錄) , 황명명신언행록(皇明名臣言行錄)
, 춘종(春種) . 【 고사촬요(攷事撮要) 에 나온다. 닳아서 쓰지 못한다.】 논어(論
語) , 맹자(孟子) , 초마사(抄馬史) , 주자행장(朱子行狀) , 심경(心經) , 병학지
남(兵學指南) , 단계찬요(丹溪纂要) , 파한집(破閑集) , 보한집(補閑集) , 동인시
화(東人詩話) , 희지서첩(羲之書帖) , 만죽산방집첩(萬竹山房集帖) , 한석봉(韓石
峯)의 글씨, 조맹부(趙孟頫가 쓴 ‘적벽부(赤壁賦)’와 ‘완화체(浣花體)’, 동파(東坡)의
필적(筆迹), 회암(晦菴)이 대자(大字)로 쓴 ‘효제충신 예의염치 숙흥야매(孝悌忠信禮
義廉恥夙興夜寐)’, 최고운(崔孤雲)이 대자로 쓴 ‘광제암문(廣濟嵒門)’, 김생(金生)이
대자로 쓴 ‘태로원(太櫓院)’, 황고산(黃孤山 황기로(黃耆老))이 대자로 쓴 ‘정허동직
(静虛動直)’, 마애비(磨崖婢) , 백련초해(百聯抄解) , 동몽선습(童蒙先習) , 천자
문(千字文) .
自警篇 ○活人心方 ○尙書諺吐 ○尙書 ○胡傳春秋 ○中庸 ○大學 ○莊子筆談 ○
慵'齋叢話 ○酉陽雜俎 ○歷代世年歌 ○吏學指南 ○無寃錄 ○講解律 ○遁村詩北景八
景詩 ○不自棄文 ○宋楊輝算法 ○九成宮蠶書 ○拯急遺方 ○三國遺事 ○益齋亂槀7表
詩 ○瘡疹方 ○朱子詩集 ○百里指南 ○草書千字 ○元六典大全 ○孝經 ○性理大全
○唐音 ○帝王韻記 ○時享圖 ○聯珠詩格 ○小全大明律 ○略韻 ○冠婚喪制儀 ○十抄
詩 ○南嶽唱酬 ○醫眼方 ○救荒撮要 ○三國史 ○庸學指南 ○兩山墨談 ○儒先錄 ○
皇明名臣言行錄 ○春種 【出攷事撮要 刓7不用】○ 論語 ○孟子 ○抄馬史 ○朱子行狀
○心經 ○兵學指南 ○丹溪纂要 ○破閑集 ○補閑集 ○東人詩話 ○羲之書帖 ○萬竹山
房集帖 ○韓石峯書 ○趙孟頫7所書 赤壁賦及浣花體 ○東坡筆迹 ○晦菴所書孝悌忠信禮
義廉恥夙興夜寐大字 ○崔孤雲所書廣濟嵒門大字 ○金生所書太櫓院大字 ○黃孤山所書
静虛動直大字 ○磨崖婢 ○百聯抄解 ○童蒙先習 ○千字文
향교 소장 판鄕校所藏板
‘충효당(忠孝堂)’ 세 대자(大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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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忠孝堂三大字
서악서원 소장 판西岳書院所藏板
서악지(西岳志) , 역년통고(歷年通考) , 최고운(崔孤雲)이 대자로 쓴 ‘쌍계석문
(雙溪石門)’ 네 글자.
정혜사 소장 판淨惠寺所藏板
회재문집(晦齋文集) , 구경연의(九經衍義) , 구인록(求仁錄) , 대학보유(大學補
遺) , 봉선잡의(奉先雜儀) , 회재 선생(晦齋先生)이 짓고 퇴계 선생(退溪先生)이 쓴
‘십육영(十六詠)’과 ‘원조오잠(元朝五箴)’, 김남창(金南窓)이 쓴 ‘원조오잠’과 ‘태극문
변(太極問辨)’, 익재집(益齋集) , 낙옹패설(櫟7翁稗說) , 초한서(抄漢書) , 효행록
(孝行錄) , 매월당사유록(梅月堂四遊錄) , 태극도설(太極圖說) , 한호(韓濩)가 쓴
‘적벽부(赤壁賦)’.
晦齋文集 ○九經衍義 ○求仁錄 ○大學補遺 ○奉先雜儀 ○晦齋所製退溪所書十六詠
及元朝五箴 ○金南窓所書元朝五箴及太極問辨 ○益齋集 ○櫟'翁稗說 ○抄漢書 ○孝行
錄 ○梅月堂四遊錄 ○太極圖說 ○韓濩所書赤壁賦
제영(題詠)
고려(高麗)
김군수(金君綏)의 시(詩) 金君綏詩
무열왕의 후손인 문열공의 가문으로 武烈王孫文烈家
계림의 진골은 본시 많지 않도다 鷄林眞骨固無多
고향은 아직도 하늘 남쪽 모퉁이에 있는데 故鄕尙在天南角
이제 다행히 사신으로 와서 노니네 今幸來遊作使華
장일(張鎰)의 시 張謚詩
4백 년 동안의 전 장상의 집 四百年前將相家
다투어 누대를 열어 얼마나 웅장함을 자랑하였던가 競開臺樹幾雄誇
지금 번화함을 누구에게 물으리 只今繁麗憑誰問
들 살구 산 복숭아가 꽃이슬에 우네 野杏山桃泣露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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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사평(閔思平)의 시 閔思平詩
계림에 옛적 나라를 일으켰을 때 鷄林古興232)國
최씨와 설씨 어진 인재 나왔네 崔薛出賢材
예악은 중국을 배우니 禮樂學中夏
성대하게 문채가 빛이 나누나 郁郁乎文哉
그 임금 고려에 국토를 바친 뒤로는 自其王納土
사국을 나누어 막부를 열었네 分司幕府開
백성들은 다 어진 이의 후손이라 民皆賢者後
큰 갓에 위의가 의젓하도다 峩7冠儼容儀
이달충(李達衷)의 시 李達衷詩
고운의 사업은 누구 집에 붙였는가 孤雲事業屬誰家
영재를 꼽아보니 그다지 많지 않도다 屈指英材也不多
익재며 졸옹도 모두 이미 가셨으니 益老拙翁俱已逝
산천은 응당 다시 정기를 쌓아야 하리로다 山川應復藴精華
정추(鄭樞)의 시 鄭樞詩
궁성은 50대요 宮省五十世
의관은 천년이로다 衣冠一千年
영웅은 물이 바다로 흐르듯 떠나가고 英雄水朝海
문물은 풀만 하늘에 연했도다 文物草連天
이원굉(李元紘)의 시 李元紘詩
계림은 가장 웅대한 번으로 鷄林最雄藩
형승이 남방에 으뜸이로다 形勝冠南州
땅에는 가득히 집들이 번성하고 撲地閭閻盛
성에 연달아 절들이 즐비하네 連城塔廟稠
김구용(金九容)이 권부윤(權府尹)을 전송하는 시 金九容送權府尹詩
계림의 수림은 푸르게 보이는데 鷄林樹色望中靑
한 점의 문성이 익성으로 내리누나 一點文星降翼精
232) 중간본에는 與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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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발 그림자는 비꼈는데 봄 햇살은 따사롭고 旌斾影斜春日暖
노래 소리 은은한데 뭉게구름 일어나네 謳歌聲隱霱雲生
천년 옛 나라에는 유적도 많건만 千年故國多遺迹
10년 전 놀던 벗 이별의 정이 새롭도다 十載曾遊慘別情
멀리서 상상컨대 의풍루 위 달밤에 遙想倚風樓上月
한가히 부는 옥피리에 맑은 여운 있으리라 閒吹玉笛有餘淸
권근(權近)의 응제시(應制詩) 權近應制詩
아득한 옛날 박혁거세는 伊昔赫居世
오봉 년간에 나라를 세웠도다 開邦五鳳年
천년의 긴 세월을 서로 전하다가 相傳千歲久
치우친 한 모퉁이 겨우 보전하였네 粗保一隅偏
계림의 문득 땅을 바치고 却獻鷄林土
송악의 하늘에 와서 조회하였네 來朝鵠嶺天
면면히 이어지던 삼성의 종사가 綿綿三姓祀
영원히 끊겼으니 참으로 가련하도다 永絶正堪憐
김요(金銚의 시 金銚7詩
늘어진 벼와 기장 모두가 농가인데 離離禾黍盡農家
곳곳의 유허에는 탑과 절이 허다하네 處處遺墟塔廟多
옛 나라라 천추에 조시가 변하였건만 古國千秋市朝變
산꽃은 예전 그대로 봄을 독차지 하였구나 山花依舊占年華
박원형(朴元亨)의 시 朴元亨詩
동도의 성곽이 민가로 변하였는데 東都城郭變村家
옥피리 한가로이 부니 봄 생각이 많도다 玉笛閒233)吹春思多
연이은 오릉에는 거친 풀만 우거졌으니 五塚纍'纍7荒草合
천년의 일들이 모두가 아침 꽃과 같도다 一千年事摠朝華
성간(成侃)의 시 成侃詩
민가의 절반이 모두 절이니 閭閻半是梵王家
한 조각 석양에는 옛 뜻이 많도다 一片斜陽古意多
233) 중간본에는 閑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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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곳의 능에서 금그릇이 나왔는고 幾處諸陵金盌7出
들꽃과 우는 새만 그대로 봄이로다 野花啼鳥自年華
그 당시 성중에는 몇 집이나 있었는지 當日城中問幾家
못가의 누대 곳곳 석양이 짙도다 池臺處處夕陽多
지금도 초목은 예전대로 무성한데 祇今草木渾依舊
나무꾼에게 맡겨 경치를 관리하네 留與樵人管物華
윤자운(尹子雲)의 시 尹子雲詩
신라의 유허에는 백성들의 집이요 羅代遺墟百姓家
오릉의 가을 풀에는 석양이 짙구나 五陵秋草石陽多
아득한 지난 일 물을 곳이 없는데 微茫往事問無處
울 밑의 찬 국화엔 이슬이 맺혔구나 籬下寒花泣露華
정효상(鄭孝常)의 시 鄭孝常詩
전생의 나의 집은 어디이던가 前身何處是吾家
홀로 서니 아득히 감회가 많구나 獨立蒼茫百感多
천년의 왕씨와 사씨234)의 일 적막도 한데 寂寞千年王謝事
한가로이 옥피리 부니 여전히 호화롭네 閒吹玉笛尙豪華.
노반(盧盼)의 시 盧盼詩
옛날에 봄 제비는 누구 집에 들어가나 舊時春燕入誰家
요동 학235)이 돌아오매 무덤만 많구나 遼鶴歸來丘壠多
다만 지금 사람들은 그전 일을 아는 까닭에 只有今人能解事
한가로이 옥피리 불며 봄빛을 희롱하네 閒吹玉笛弄韶華
최숙정(崔淑精)의 시 崔淑精詩
234) 왕씨(王氏) 사씨(謝氏)는 육조(六朝) 시대 때의 망족(望族)으로, 후대에는 고문 세족(高門世族)을 뜻하
는 말로 쓰였다. 유우석(劉禹錫)의 시 ‘오의항(烏衣巷)’에, “옛날에 왕씨 사씨 집 앞 살던 제비가, 날아와
서 심상한 백성집에 들어가네(舊時王謝堂前燕 飛入尋常百姓家).” 하였다.
235) 전설에 요동의 정령위(丁令威)가 신선술을 배워 학(鶴)으로 변신하고 요동의 성문에 있는 화표주(華表
柱)에 앉으니, 사람들은 아무도 그를 알아보는 이가 없었으며, 한 소년이 활을 당겨 쏘려 하자 마침내
날아 공중을 배회하며 말하기를 “새여! 새여! 정령위아! 집을 떠난 지 천년만에 이제 비로소 돌아왔네.
성곽은 예전과 다름없는데 사람들은 옛사람이 아니니, 어찌하여 신선술을 배우지 아니하여 무덤이 총총
히 있는가(有鳥有鳥丁令威 去家千年今始歸 城郭如故人民非 何不學仙塚纍'纍.” 하였다. 수신후기(搜神後
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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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누런 잎이 서풍에 흩날릴 때 當年黃葉起西風
옥피리 소리 쇠잔하매 왕운이 끝났도다 玉笛吹殘王氣終
삼성이 전하던 성곽은 남았건만 三姓代傳城郭在
천년이 지난 뒤 조시는 비었구나 一千年過市朝空
포석정 무너진 곳에는 가을 잡초 푸르고 亭摧7鮑石秋蕪綠
첨성대 우뚝한데 석양이 붉게 타네 臺兀瞻星夕照紅
옛 자취 완연한데 사람은 다 갔으니 陳迹宛然人去盡
난간에 기대어 말없이 기러기를 보내누나 倚闌'無語送飛鴻
김담(金淡)의 시 金淡詩
상마에 봄은 짙고 땅에 가득 민가인데 春在桑麻撲地家
전당강가 십만 가호엔 노을이 깃들었네 錢塘十萬氣蒸霞
6년 동안 휘파람을 부니 부끄러움 없으랴만 六年坐嘯能無愧
머리 위 푸른 하늘은 비단 한 겹 차이나네 巾上靑天只隔紗
박문우(朴文佑)의 자인현(慈仁縣) 시 朴文佑慈仁縣詩
낙엽 진 산 모습은 야위기만 한데 葉脫山容瘦
햇살이 비껴드니 마루가 밝네 軒明日脚斜
시내 건너 긴 대나무 두둑에 隔溪修竹塢
개가 짖으니 인가가 있나 보구나 犬吠有人家.
십이영(十二詠)
<계림영이(鷄林靈異)>
서 사가(徐四佳)236)의 시 徐四佳詩
금계가 울던 나무 푸르기만 하더니 金鷄啁哳樹蒼蒼
9백 년 세월에 잎이 모두 누렇구나 九百年來葉盡黃
박씨가 나라를 열어 석씨에게 전하더니 朴祖開邦傳鵲祖
김씨 왕이 땅 바치니 전왕237)인 듯하구나 金王納土似錢王
236) 사가(四佳)는 서거정(徐居正)의 호이다.
237) 전왕(錢王)은 오대(五代)시대 오월왕(吳越王) 전숙(錢俶을 가리킨다. 그는 송나라가 중원을 완전히 차
지하기도 전에 나라를 가지고 송나라에게 항복하였다.
- 202 -
삼성이 다 전복됨을 가슴 아파하노니 傷心三姓皆顚蹶
눈앞의 여러 왕릉 이미 황폐해졌도다 滿目諸陵已廢荒
천고의 영웅들의 한스러움이 끝없는데 千古英雄無限恨
옅은 안개 시든 풀잎에 석양만이 비추누나 淡烟衰草更斜陽
어세겸(魚世謙)의 시 魚世謙詩
지난 일을 일찍이 노인에게 들었는데 往事曾聞兀老蒼
웃으며 붓을 잡고 술을 따르누나 笑呼毛穎趂鵝黃
닭이 울던 나무 아래 새 임금이 나타났고 鷄號樹下開新主
까치 울던 강가에 옛 임금이 바뀌었네 鵲噪'江邊換舊王
백성이 늘어나 개 짖는 소리 들렸는데 民物漸多聞狗吠
산천은 겨우 낭황238)만을 기록하누나 山川粗得記狼荒
한 번 송악의 솔이 푸르른 뒤로는 一從鵠嶺靑松後
머리를 돌리니 옛 왕조가 또 석양이로다 回首前朝又夕陽.
<오산기승(鰲山奇勝)>
서거정의 시 徐四佳詩
바닷가 금오산 바라보기 좋건만 海上金鰲眺望宜
풍류와 문물이 옛날과는 다르구나 風流文物異前時
깨어진 비석에 어쩌다가 김생의 글씨가 보이고 破碑或見金生字
옛 절간에는 최치원의 시가 남아 있네 古寺曾留致遠詩
터만 남은 저택에는 냉이만 우거졌고 甲第有基荒薺合
주인 없는 동산에는 끊긴 다리 위태롭네 名園無主斷橋危
봄 시름이 이처럼 바다보다 깊은데 春愁如許深於海
그 누가 쇠 피리를 흥겹게 불고 있나 鐵笛何人滿意吹
어세겸의 시 魚世謙詩
푸른 산 푸른 바다 서로 어울리는데 靑山碧海兩相宜
그 누가 금오를 보내어 한 시대를 상서롭게 하였던고 誰遣金鰲瑞一時
교목은 안개를 띠고 옛 나라에 남았는데 喬木帶烟餘古國
238) 유자후(柳子厚)가 지은 시에, “성대(聖代)의 강토(疆土)가 남해 가에까지 닿아 낭황(狼荒)에도 산천을
기록했네.” 하였다. 낭황은 먼 오랑캐의 땅이란 말인데, 여기서는 작자가 남쪽 지방이란 뜻으로 인용하
였다.
- 203 -
시인은 망국을 탄식하여 새 시를 모두 읊조리네 騷人嘆黍摠新詩
부용으로 쪼개 내니 예부터 명승인데 芙蓉擘出從來勝
잔나비 매달려 우니 바라보기 위태롭네 猿狖攀呼望處危
주야로 높은 산에는 푸른 안개 덮였는데 日夕孱顔靑靄合
저녁 바람이 귀밑머리에 불어 오누나 晩風偏向鬢7邊吹
<포정감회(鮑亭感懷)>
서거정의 시 徐四佳詩
포석정 앞에서 말을 세울 때 鮑石亭前立馬時
아스라이 생각에 잠겨 옛 일을 생각하네 沉7吟懷古思依依
곡수에 술잔을 띄우던 터 아직도 남았건만 流觴曲水基猶在
취한 춤 미친 노래 일은 이미 틀렸도다 醉舞狂歌事已非
주색에 빠지고서 망하지 않은 나라 없으니 未有荒滛不亡國
강개하여 흐르는 눈물 어이 감내하리 那堪慷慨獨霑衣
오릉 길을 지나며 시를 읊조리노니 行行吟過五陵路
석보와 금성에는 석양이 비추누나 石堡金城共落暉
어세겸의 시 魚世謙詩
포석정 가에 저녁 해가 떨어질 때 鮑石亭邊日落時
들 해당화 주인 없이 저 홀로 피었구나 野棠無主自相依
당년에 삼풍계239)를 살피지 않더니만 當年不省三風戒
슬프게도 눈 깜짝할 사이에 만사가 틀어졌구나 瞥眼堪傷萬事非
꽃이 져서 물에 떨어짐은 어쩔 수 없지만 花落不禁隨白水
잔 치느라 청의를 갈아입음240) 차마 어찌 하였나 杯行何忍易靑衣
이곳의 무궁한 한을 곰곰이 생각하다가 尋思是處無窮恨
석양을 원망하는 우는 새에 부치노라 付與啼禽怨夕暉
<문천빙망(蚊川騁望)>
서거정의 시 徐四佳詩
239) 삼풍계(三風戒)는 서경(書經) 이훈(伊訓)에 ‘무풍(巫風)’, ‘음풍(淫風)’, ‘난풍(亂風)’을 삼풍(三風)이라
하여 경계한 것을 말한다.
240) 진(晉) 나라 회제(懷帝)가 유총(劉聰)에게 잡혀 하인들이 입는 푸른 옷을 입고 장수들 앞에서 술을 따
랐다. 따라서 임금이 신하에게 항복하는 굴욕을 ‘청의행주(靑衣行酒’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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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다가 문천을 건너 딴 마을로 가노라면 行渡蚊川過別村
옛 도읍 아득한 생각 번거롭기만 하도다 故都遐想不勝繁
까마귀 깊은 숲에서 우니 황금 갑옷 생각나고 烏啼深樹思金甲
개구리 겨울 못에서 우니 옥문지가 생각나네 蛙吠寒塘憶玉門
흰 젖이 솟았다는 말 황당한데 불교를 숭상했으며 白乳荒唐崇像敎
황창 동자 강개히 임금 원수 갚았다네 黃童慷慨報君寃
흐르는 물에 옛 왕조의 한을 씻을 길 없으니 流水241)不洗前朝恨
북해의 술동이242)로 시원히 씻어야겠네 蕩滌須憑北海尊
어세겸의 시 魚世謙詩
게으른 동복에 지친 말 타고 외로운 마을에 닿으니 倦童疲馬抵孤村
들풀과 숲 속 꽃들 제 스스로 번성하누나 野草林花各自繁
쓸쓸하여 지난 일을 물을 사람 없으니 寂寞無人咨往事
황량하여 어느 곳이 궁궐이던고 荒涼7何處是脩門
금오산에 달 밝으니 새로운 한을 더하고 月明鰲峀添新恨
문천에 비 내리니 옛 통한을 씻는구나 雨過蚊川洗舊寃
눈에 가득한 강산은 예나 이제나 다름없으니 滿目江山今古意
그 누가 말세의 풍속을 태고로 돌릴꼬 斲'漓7誰解返汚尊
<반월고성(半月古城)>
서거정의 시 徐四佳詩
반월성 머리에 해는 지려고 하는데 半月城頭日欲西
멀리 노니는 나그네의 생각이 처량하다 遠遊情思轉凄凄
푸르른 양산에는 운연이 흐릿하고 靑浮楊麓雲烟老
누런 시림에는 세월이 아득하네 黃落始林歲月迷
명활촌 남쪽에는 구름이 아득하고 明活村南雲渺渺
흥륜사 북쪽에는 잡초만 무성하네 興輪寺北草萋'萋7
일평생 불우하니 그 어디에 쓰이랴 百年坎軻知何用
술동이 앞에서 흠뻑 취해나 볼까나 贏'得樽前醉似泥
어세겸의 시 魚世謙詩
241) 중간본에는 流水가 水流로 되어 있다.
242) 한 나라 공융(孔融)이 북해 태수(北海太守)를 지냈으므로 공북해(孔北海)라 하였는데, 그는 늘 말하기
를, “자리 위에는 손님이 항상 차고, 항아리 속에는 술이 비지 않아야 한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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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월성 동쪽 일본의 서쪽에 破月城東日本西
광한전엔 바람과 이슬이 더욱 차가우리 廣寒風露想增凄
예 처의 영약은 지금 어디 있을꼬 羿妻靈藥今誰在
당 명황의 은교는 자취 하마 아득하네 唐帝銀橋迹已迷
텅 빈 동산에 그윽한 새는 마음껏 노래하고 空苑幽禽隨意囀7
옛 들판의 향기로운 풀은 한껏 우거졌네 古原芳草滿情萋'
가련타 당시의 생황 불고 노래하던 땅이 可憐當日笙歌地
지금은 농가 담벼락의 흙이 되어 버렸구나 化作田家壁上泥
<첨성노대(瞻星老臺)>
서거정의 시 徐四佳詩
옛 대 우뚝하니 그 이름 첨성이라 古臺牢落號瞻星
유적이 의연히 반월성에 가깝도다 遺跡依然近月城
땅도 야위고 하늘도 거칠어 세월이 오랜지라 地悴天荒年已久
바람에 꺾이고 비에 깎여 형세가 기울었네 風摧7雨剝勢曾傾
외로운 산에 지는 해는 금선의 부처 그림자요 孤山落日金仙影
옛 성에는 가을을 슬퍼하는 옥피리 소리로다 故壘悲秋玉笛聲
삼성의 천년도 눈 깜짝할 사이라 三姓千年曾一瞥
올라가서 바라보매 마음 더욱 슬프도다 不堪登眺更傷情
어세겸의 시 魚世謙詩
태사가 천문을 살피고 뭇별을 바라보던 곳 太史觀天候列星
백척이나 높은 대가 층성을 누르누나 崇臺百尺軼'層城
하늘 한 번 바라보매 재앙과 상서가 드러나고 紫霄'一望災祥著
황도는 슬프게도 해와 달이 기울었네 黃道終嗟日月傾
그래도 금오가 아침마다 그림자를 보내건만 尙有金烏朝送影
다시는 옥루가 밤에 소리를 전하지 않네 更無玉漏夜傳聲
올라가서 다시 천문을 보지 말지어다 登臨且莫看雲物
옛 나라가 사람의 가슴을 애달프게 하노니 古國令人解愴情
<분황폐사(芬皇廢寺)
서거정의 시 徐四佳詩
- 206 -
분황사가 황룡사와 마주하고 있는데 芬皇寺對黃龍寺
천년의 옛터에는 풀만 저대로 새롭구나 千載遺基草自新
흰 탑은 우뚝 솟아 길손을 부르는 듯 白塔亭亭如喚客
푸른 산은 말이 없어 사람을 시름겹게 하는구나 靑山默默已愁人
그 옛날 전삼243)의 말을 아는 중조차 없는데 無僧能解前三語
속절없이 장륙금신244)만 남았네 그려 有物空餘丈六身
민가의 태반이 절이었음을 알겠노니 始信閭閻半佛宇
법흥왕의 어느 대가 요진245)과 닮았던고 法興何代似姚秦
어세겸의 시 魚世謙詩
옛 절에 한 번 노니니 중은 예스럽지 않고 古寺一遊僧不古
신라 천 년의 일이 외려 새롭기만 하구나 新羅千載事還新
궁전 너는 남았는데 농부들이 차지했고 殿宇有基資野叟'
산하는 주인이 없어 진인246)에게 귀속되었네 山河無主屬眞人
외로운 탑은 이미 앞 뒷면이 허물어졌는데 孤塔已湮前後面
늙은 소나무는 아직도 반쪽 몸이 남았구나 老松猶在半邊身
1천 상자의 불경은 법사들만 괴롭혔으니 千函聞道煩三藏
1백 가지 계책이 어찌 한 요진을 보호하랴 百計何能護一秦
<영묘구찰(靈妙舊刹)>
서거정의 시 徐四佳詩
옛 절이 높이 솟아 하늘에 닿았는데 舊刹岧'嶤接上蒼
천 년의 지난 일 너무나도 쓸쓸하네 千年往事已凄涼7
돌 감실은 퇴락하여 그윽한 길을 묻었는데 石龕零落埋幽俓
구리 방울만이 댕그랑 댕그랑 석양에 울고 있네 銅鐸丁當語夕陽
옛 노인은 지금도 여왕을 이야기하고 遺老至今談女主
옛 종은 여전히 당나라 황실을 기억하네 古鍾依舊記唐皇
짧은 비석을 어루만지며 잠시 서성이노라니 摩挲短碣移時立
243) 당 나라 항주(杭州)의 무착선사(無着禪師)가 문수(文殊)를 만나 문답한 말에, “전삼삼 후삼삼(前三三
後三三).”이란 말이 있다.
244) 장륙금신(丈六金身)은 키가 1장 6척의 불상을 가리킨다. 석가가 탄생했을 때 인도 사람의 키는 보통
8척이었는데 후세의 불교도들이 석가를 존경한 나머지 그 불상을 만들 때 보통 사람의 키의 배인 1장
6척으로 불상을 만들었다.
245) 요진(姚溱)은 중국 남북조시대 요장(姚萇의 진(秦)나라라는 뜻으로, 이때 불교가 가장 성했다.
246) 진인(眞人)은 고려 태조를 두고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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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겨지고 이끼 끼어 글자가 반은 거칠구나 剝落莓'龍字半荒
어세겸의 시 魚世謙詩
뜰에 가득한 소나무와 전나무는 새벽에 푸른데 滿庭松檜曉曉蒼蒼
단풍잎은 사람을 반겨 시원함을 보내누나 楓葉迎人解送涼'
당대의 천화는 진실로 복지였는데 一代天花眞福地
백년의 가을 풀엔 또 석양이 비추누나 百年秋草又斜陽
귀신이 함께 지켜 높은 전각 남기었고 鬼神共護餘高殿
용상247)이 다투어 나아가 부처를 받드누나 龍象爭趨奉覺皇
남겨진 감실을 가지고 여왕을 자랑 말라 莫把遺龕誇女主
옛 도읍 종묘사직이 이미 황폐해졌으니 古都宗社已榛荒
<오릉비조(五陵悲吊)
서거정의 시 徐四佳詩
서라벌 천년의 왕기가 사라졌으니 徐伐千年王氣鎖
오릉의 깊은 곳에서 옛 왕조를 조상하네 五陵深處吊前朝
말이 울고 용이 낳았다는 말은 이미 황당하고 馬嘶龍誕曾荒怪
작포의 계림도 모두 적막하구나 鵲浦鷄林共寂寥
옥대의 보배는 금궤를 따라 없어졌고 玉帶寶隨金樻'盡
동타의 그림자는 돌양과 함께 흔들리네 銅駝影接石羊搖
다시는 치병248)으로 왕위를 전할 수 없고 更無齒餠能傳祚
봄 나무엔 해마다 백로249)만 우는구나 春樹年年語伯勞
어세겸의 시 魚世謙詩
해 저물어 나그네 넋조차 녹아나는데 日暮征人魂欲鎖
슬픈 바람 급히 이니 서리 찬 아침이로다 悲風急起澟7霜朝
왕후는 종자 있어 무덤이 많건만 王侯有種多丘隴7
혼백은 갈 곳 없어 허공으로 돌아가네 魂魄無歸返泬寥
누워있는 돌 기린은 부질없이 참담하니 石臥麒麟空慘慘
247) 불경에서 “물에서는 용이 제일 크고 육지에서는 코끼리가 크다.” 하여 뛰어난 제자를 용상(龍象)이라
한다.
248) 치병(齒餠)은 떡을 물어서 이의 흔적을 보아 이가 많던 사람이 임금이 된 고사로 삼국사기(三國史
記) 에 나온다.
249) 백로(伯勞)는 때까치의 일종으로 일명 ‘반설(反舌)’이라고도 하는데, 종달새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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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내 마음 깃발처럼 흔들리기만 하누나 心縣旗斾正搖搖
가엾도다 삼성이 모두 진토 되었으니 可憐三姓俱塵土
홍애의 어깨 치고 이로250)를 지났으면 擬拍洪厓過二勞
<남정청상(南亭淸賞)>
서거정의 시 徐四佳詩
성곽이며 백성들이 맞는가 아닌가 城郭人民是又非
난간에 기대어 휘파람 불며 돌아가기 잊었네 倚闌7豪嘯澹忘歸
알영전 안에는 용이 떠났을 것이요 閼英殿裹7龍應去
탈해왕 해변에는 까치가 없어졌으리라 脫解海邊鵲不依
나정의 나무 그늘은 여전히 어둡건만 蘿井樹陰依舊暗
죽장릉의 죽순은 지금도 통통하구나 竹陵筍籜7至今肥
가련타 그 당시의 번화하던 곳에 可憐當日繁華地
천지는 무정하여 몇 번이나 저물었던고 天地無情幾夕暉
어세겸의 시 魚世謙詩
옛 나라의 번화하던 일 이미 다 글렀구나 古國繁華事已非
다만 시인들만이 나귀 타고 돌아가네 只應騷客跨驢歸
세월이 오래니 동해도 오히려 얕아진 듯 年深東海疑還淺
바람이 부드러워 남정은 아직 기댈 만하네 風軟南亭尙可依
풀이 돋은 양지 언덕에는 누런 송아지 튼튼하고 草合陽坡黃犢健
꽃이 떠있는 봄 물에는 흰 물고기 살찌누나 花浮春水白魚肥
산천이 이와 같으니 유람하며 즐길지어다 山川如此須行樂
어찌 높은 곳에 올라 지는 해를 한탄하랴 何用登臨恨落暉
<문옥적성(聞玉笛聲)>
서거정의 시 徐四佳詩
옛 나라의 흥망은 웃음 속에 새로운데 故國興亡一笑新
당시의 삼보는 모두 티끌이 되었구나 當時三寶盡成塵
250) 홍애(洪厓)는 고대의 신선으로, 좌사(左思)의 시에, “왼손으로 홍애의 어깨를 치겠다.”라는 구절이 있
다. 이로(二勞)는 이진(二塵)과 같은 말로 불교에서는 먼 시간을 겁(劫)이라 하고, 도가(道家)에서는 진
(塵)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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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레로 항복하던 임금이 누구던가 金輿自屈知何主
옥피리는 그대로 전하니 또 몇 봄이 지났던고 玉笛仍傳又幾春
애석하여 단지 옛 물건을 보존할 뿐이요 愛惜只堪存古物
풍류는 구태여 옛 사람을 본받을 것 없네 風流不必効前人
무너진 성 지는 해에 자꾸 불지를 말아라 殘城落日休三弄
길이 영웅으로 하여금 눈물이 수건을 적시게 하노니 長使英雄淚滿巾
어세겸의 시 魚世謙詩
금오산에 달은 밝아 천기가 새로운데 月白金鰲天氣新
한 가락 옥피리에 들보 위의 먼지가 움직이네251) 一聲吹徹動梁塵
지방을 자름252)은 멀리 곤륜산을 떠나던 날이 상상되고 截肪遠想離崐7日
음률을 고르니 때로는 절류춘곡253)이 들리누나 按律時聞折柳春
구름이 푸른 하늘에 멈추니 귀모254)를 놀라게 하고 雲遏'靑霄7驚鬼母
구슬이 푸른 바다에 뛰니 교인255)을 울게 하네 珠跳蒼海泣鮫人
신라의 서울에 옛 물건 많이 남지 않았으니 羅都舊物無多在
이를 주어 빈왕에게 두건 잦혀 쓰고 듣게 하여라 留使豳'王聽岸巾
<과유신묘(過庾信墓)>
서거정의 시 徐四佳詩
김유신의 무덤 앞에 석수가 우뚝하니 金老墳前石獸危
천년의 검기가 아직까지 기이하도다 千年劍氣尙奇奇
윤건과 백우선은 제갈량에 견주겠고 綸巾白羽追前業
붉은 여지 누런 파초실256)은 후인의 생각을 일으키네 丹荔黃蕉起後思.
길손이 있어 시를 지어 장렬함을 자랑하건만 有客題詩誇壯烈
무덤을 뚫고 요리257)에게 가까이 갈 이는 없도다 無人穿塚塚近要離
오래 된 천관사는 지금의 어디에 있는고 天官寺古知何處
251) 옛날 진청(秦靑)이 노래를 잘 불러 들보 위에 있는 먼지가 날라 움직였다 한다.
252) 옥피리의 깨끗한 결이 기름덩이를 잘라 놓은 듯하다는 말이다. 위문제(魏文帝)가 아름다운 옥(玉)의
품질을 말하였는데, “지방을 잘라 놓은 것 같은 것이 그 중의 하나이다.”라고 하였다.
253) 악부(樂府) ‘절양류곡(折楊柳曲)’을 말한다. 한나라 때 장안(長安) 사람들이 손님을 보내기 위하여 패
교(覇橋)에 이르러 버들가지를 꺾어 주었기 때문에 생긴 곡으로, 이별곡의 뜻으로 쓰인다.
254) ‘귀자모신(鬼子母神)’의 준말로, 어린애를 품고 석류를 쥐고 있는 야차귀신(夜叉鬼神)의 하나이다.
255) 인어(人魚)를 말한다. 전설에 인어가 울어서 눈물을 흘리면 구슬이 된다고 하였다.
256) 파초실은 바나나이다. 소식(蘇軾)이 지은 ‘조주한문공묘비(潮州韓文公廟碑)’에 보인다.
257) 한 나라 처사(處士) 양홍(梁鴻)이 객지에서 죽자, 여관 주인이, “이 근처에 요리(要離)의 무덤이 있는
데, 요리는 옛날의 열사(烈士)이고, 양군(梁君)은 높은 절조가 있는 선비이니 그 옆에 장사지냄이 좋겠
다.” 하여 그대로 장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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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고의 절세미인 이름이 전하네 萬古蛾眉姓字隨
어세겸의 시 魚世謙詩
장군은 국가와 더불어 안위를 함께 하였으니 將軍與國共安危
백 번의 전장에서 매양 기이한 계책을 내었도다 百戰場中每出奇
일어나 강한 인국을 멸하기를 물건 줍듯이 하여 起滅强隣同俯拾
길이 장사들로 하여금 추모하게 하도다 長敎壯士費追思
별이 머리 위에 임한 것은 충렬 때문이요 星臨頭上因忠烈
칼이 허리에서 뛴 것은 난리 때문이로다 劍躍腰間爲亂離
석 자의 거친 무덤에 한 잔 술을 올리나니 三尺荒墳一盃酒
구원에서도 이와 같이 반드시 서로 따르리라258) 九原如此定相隨
칠영(七詠) 점필재(佔7畢齋) 김종직(金宗直)의 시 佔'畢齋金宗直詩
<회소곡(會蘇曲)>
회소곡 회소곡 서풍이 넓은 뜰에 부니 會蘇曲會蘇曲西風吹廣庭
밝은 달이 화려한 집에 가득하네 明月滿華屋
공주님이 윗자리에 앉아 물레를 돌리니 王姬壓坐理繅7車
육부의 여아들이 떨기처럼 많구나 六部女兒多如簇
네 바구니는 벌써 찼는데 내 바구니 비었으니 爾筥7旣盈我筐空
술 빚어 놓고 야유하고 웃으며 희롱하네 釃'酒揶揄笑相謔
한 아낙네 탄식하니 천 가구가 기뻐하고 一婦嘆千室歡
앉아서 사방으로 하여금 길쌈을 힘쓰게 하네 坐令四方勤杼7柚
가배 놀이 비록 규중의 예의를 잃었으나 嘉俳縱失閨中儀
발하로 왁자지껄 다투는 것보다 낫도다259) 猶勝跋河爭嗃嗃
<우식곡(憂息曲)>
아가위꽃 바람 따라 부상에 떨어지니 常棣7華隨風落扶桑
부상 만리 길 고래 같은 물결 이네 扶桑萬里鯨鯢7浪
설사 서신이 있어도 누가 가져올 건가 縱有音書誰得將
아가위꽃 바람 따라 계림에 돌아오니 常棣7華隨風返鷄林
258) 구원(九原)은 춘추 시대에 진(晉) 나라 귀족들의 묘지가 있던 곳이다. 조문자(趙文子)가 숙예(叔譽)와
함께 구원을 구경하며, 땅 밑의 사람을 다시 살려 낸다면 여기에 매장된 선현(先賢)중에 누구를 따를까
하고 옛 사람의 인품을 칭도한 말이 있었다.
259) 당나라 중종(中宗)이 시신(侍臣)들에게 줄다리기를 시켰는데 이를 발하(跋河)라 한다.
- 211 -
계림의 봄빛은 쌍궐에 둘렀는데 鷄林春色擁雙闕
어울리는 기쁜 마음 이렇게도 깊구나 友于歡情如許深
<치술령(鵄7述嶺)>
치술령 꼭대기에서 일본을 바라보니 鵄'述嶺頭望日本
하늘에 닿은 고래 물결 가이 없도다 粘天鯨海無涯岸
고운 님 가 실 때는 손만 흔들었는데 良人去時但搖手
살았는지 죽었는지 소식조차 끊겼구나 生歟死歟音耗斷
오랜 이별에 죽든 살든 어찌 만날 때 있으랴 長別離死生寧有相見時
하늘을 우러러 부르짖다가 무창의 돌260)로 화하니 呼天便化武昌石
열녀의 기운은 천년토록 창천에 사무치네 烈氣千載干空碧
<달도가(怛7忉'歌)>
놀랍고 놀랍고 슬프고 슬프도다 怛7怛'復忉7忉'
임금이 하마터면 목숨을 보전하지 못할 뻔했네 大家幾不保
유소장막261) 속에 현학금이 거꾸러지니 流蘇帳裹'玄鶴到
어여쁜 왕비가 해로하기 어렵구나 揚且之晢7難偕老
슬프고 놀랍도다 슬프고 놀랍도다. 忉7怛'忉7怛'
신물이 알리지 않았던들 어찌 되었을꼬 神物不告知奈何
신물이 알려주어 나라의 운수가 길도다 神物告兮基圖大
<양산가(陽山歌)>
적국이 큰 돼지가 되어262) 敵國爲封豕
우리 강토를 먹어 들어오니 荐'食我邊彊
씩씩한 화랑의 무리 赳赳花郞徒
보국하느라 겨를이 없네 報國心靡遑
창을 메고 처자와 하직하고 荷戈訣妻子
샘물로 입가시고 건량을 씹는구나 嗽泉啖糗7粮
적병이 밤에 보루를 치니 賊人夜劘'壘
260) 무창(武昌)에 있는 망부석(望夫石)을 가리킨다. 멀리 간 남편이 돌아오기를 날마다 산 위에서 기다리
다 그만 돌로 화한 것이다.
261) 유소(流蘇)는 다섯 가지 채색의 새의 깃으로 수식하는 것인데, 수레나 누대의 장막 등에 미관으로 장
식한다.
262) 좌전(左傳) 에 “오(吳) 나라가 긴 뱀과 큰 돼지처럼 중국(中國)을 먹어 들어온다.”라고 한 말이 보인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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씩씩한 혼백이 칼끝에 흩어졌네 毅魂飛劍鋩
머리 돌려 양산의 구름을 바라보노라니 回首陽山雲
높이 솟은 무지개 빛이 나도다 矗矗虹蜺'光
슬프다 네 명의 장부들이여 哀哉四丈夫
마침내 북방의 강함 닮았구나 終是北方强强
천추에 으뜸가는 귀신이 되어 千秋爲鬼雄
서로 더불어 초장을 음미하소서263) 相與歆椒漿
<대악(碓'樂)>
동쪽 집에서는 기장과 벼를 방아 찧고 東家砧舂7黍稻
서쪽 집에서는 겨울옷을 다듬이질 하네 西家杵搗264)寒襖7
동쪽 집 서쪽 집의 방아소리 다듬이소리에 東家西家砧杵聲
설을 지낼 거리가 넘치고 넘치는데 卒歲之資贏7復贏'
우리 집 움 속엔 곡식도 없고 儂7家窖'乏甔石
우리 집 상자 속엔 비단조각도 없구나 儂7家箱無尺帛
누더기옷 한 벌과 명아주국 한 사발로도 懸鶉'衣兮藜羹椀
영계기의 즐거움265) 배부르고 따뜻하네 榮期之樂足飽煖
조강지처여 조강지처여 부질없이 걱정 마오 糟妻糟妻莫謾7憂
부귀는 재천이니 구한다고 될 것인가 富貴在天那可求
팔 베고 누워도 지극한 맛이 있으니 曲肱而寢有至味
양홍과 맹광266)은 참으로 좋은 짝이였소 梁鴻孟光眞好逑
<황창랑(黃昌郞)>
이러한 사람이여 어려서 나라를 떠났도다 若有人兮纔7離齠'
석 자 못 되는 어린 사람이 어찌 그리 씩씩하였나 身未三尺何雄驍
평생에 왕기267)를 자신의 스승으로 삼아 平生汪錡我所師
나라 위해 치욕을 씻으니 마음에 후회 없어라 爲國雪恥心無憀
263) 당 나라 시인이 상산사호(商山四皓)의 사당에 제사지내며 지은 시에, “초장(椒漿) 한 잔을 드리다.”는
구절이 있다.
264) 중간본에는 槝으로 되어 있다.
265) 옛날에 영계기(榮啓期)라는 사람이 나이 90세에 가난하여 사슴 갖옷을 입고 세 개의 띠를 매고 거문
고를 타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공자가 지나다가, “무엇이 그리 즐거운가” 하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즐겁고, 남자된 것이 즐겁고, 오래 사니 즐겁다.” 하였다.
266) 양홍(梁鴻)의 처 맹광(孟光)이 양홍과 뜻을 같이하여 부귀를 구하지 않고 가난하게 숨어 품팔이로 살
면서 남편을 공경하여 밥상을 높이 들어 눈썹과 가지런히 하였다.
267) 왕기(汪錡)는 노 애공(魯哀公)의 폐동(嬖童)인데, 제(齊)가 노나라를 침입할 때 애공의 수레에 배승(陪
乘)했다가 죽으니, 애공은 나라를 위하여 죽었다 하여 성인(成人)의 예로 빈(殯)을 하였다. 공자는 그것
을 잘한 일이라고 칭찬하였다. 좌전(左傳) 「'애공(哀公)」711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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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날이 목에 닿아도 다리를 떨지 않고 劍鐔'擬頸股不戰
칼끝이 심장을 겨눠도 눈도 깜빡 않았도다 劍鍔指心目不搖
공을 이루고는 태연히 춤 그치고 사라지니 功成脫然罷舞去
태산을 옆에 끼고 북해를 건너뛰는 듯 挾山北海猶可超
잡영(雜詠) 유호인(兪好仁)의 시
외로운 신하 한번 죽어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니 孤臣一死答君恩
만리 먼 부상 땅에 한나라의 절268)이 드높아라 萬里扶桑漢節尊
치술령 고갯마루의 세 길 되는 돌에 鵄7述峯頭三丈石
수심어린 구름이 아직도 망부의 혼을 띠고 있네 愁雲猶帶望夫魂
팔월이라 금성에는 달도 정말 둥근데 八月金城月正圓
곱고 가는 모시를 짜며 어여쁨을 다투네 纖纖麻枱鬪嬋娟
회소곡269)이 구슬픈 가배의 저녁에 會蘇凄斷嘉俳夕
양부의 풍광이 아직도 완연하구나 兩部風光尙宛然
남완270) 누대에는 비단옷이 고운데 南阮271)樓臺艶綺羅
봄바람에 언제나 너울거리네 春風長是步婆娑
달 밝은 만호에 다듬이 소리 차가우니 月明萬戶砧聲冷
백결선생의 노래를 두드려 다하누나 擣'盡先生百結歌
하늘을 흔들고 땅을 흔들며 삼광을 쓰러뜨렸고 軒天撼7地踣三光
강산의 정기 타서 만방에 우뚝이 뛰어났네 河嶽英靈聳萬方
덧없는 세상에 돌양이 서있는 김유신의 무덤이요 浮世石羊興武墓
가을바람 누런 잎 상서장272)이로다 西風黃葉上書莊
동타가 가시밭에 있으니273) 서울도 틀렸구나 荊棘銅駝九陌非
268) 한무제(漢武帝) 때에 소무(蘇武)가 흉노(匈奴)에 사신으로 갔더니, 흉노가 협박하며 항복하라 하였다.
소무가 듣지 않으니, 19년 동안 억류되어 온갖 고초를 겪었다. 그는 거기에서 한 나라의 절(節, 정절(旌
節))을 가지고서 항상 놓지 않아 깃발이 다 떨어졌다.
269) 신라 유리왕(儒理王) 9년에 가배(嘉俳)놀이를 할 때 진 편의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회소(會蘇), 회
소’ 하면서 춤을 추었는데, 그 소리가 너무도 구슬프고 처량하였으므로, 후인(後人)이 그것을 ‘회소곡(會
蘇曲)’이란 노래로 지었다.
270) 진(晉) 나라 완씨(阮氏)가 남북촌에 나누어 살았는데 남완(南阮)은 가난하고, 북완(北阮)은 호화롭게
살았다.
271) 중간본에는 南阮이 南院으로 되어 있다.
272) 최치원(崔致遠)이 고려 태조에게 ‘계림황엽(鷄林黃葉)’이란 문구가 든 편지를 쓴 옛집을 가리켜 ‘상서
장(上書莊)’이라 한다.
273) 진(晉) 나라 색정(索靖)이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알고, 궁문(宮門)에 세워 있는 동타(銅駝)를 가리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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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화하던 홍진이 이제는 재만 날리누나 軟紅今化劫灰飛
천지가 백 번 변하여 남은 것이 없는데 乾坤百變無餘物
금오산만 남아 있어 온 사방이 푸르구나 留得鰲山碧四圍
잡저보유(雜著補遺)
만력(萬曆) 27년 기해(1599, 선조 32) 12월 27일.
萬曆二十七年己亥十二月二十七日
<선유기사(宣諭記事)>
금년 여름 안무어사 사헌부 집의(按撫御史司憲府執義) 이상신(李尙信)이 영남(嶺
南)으로부터 돌아와 복명(復命)을 마쳤는데, 그 서계(書啓)는 대략,
“경주(慶州)와 울산(蔚山)은 왜적이 쳐들어오는 첫 길목에 해당하여 장수와 병사
들이 죽을힘을 다해 요해처(要害處)를 나누어 점거한 채 왜적의 흉악한 예봉을 막
아 시종일관 조금도 긴장을 풀지 않았습니다. 동도(東都)가 온전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힘 덕택인데, 어찌 은전(恩典)을 베풀어서 그들의 노고를 위로하지 않으십니
까.”
라고 하였다. 임금께서 이를 윤허하고, 신(臣) 한준겸(韓浚謙)에게 다음과 같이 유
시하기를,
“지금 이상신의 서계를 보고 경주와 울산 두 고을이 극력 힘을 다해 싸운 공을
내 심히 가상하게 여기노라. 장차 어사(御史)를 보내어 그들을 위로할 것이니, 경
(卿)은 주육(酒肉)과 목포(木布)를 많이 마련하여 어사가 도착하는 날 배불리 먹이
고 나누어 주어 내 뜻을 알리도록 하라.”
하였다. 이윽고 선유어사 세자시강원 필선 지제교(宣諭御史世子侍講院弼善知製敎)
신(臣) 윤휘(尹暉)가 교서(敎書) 한 통을 받들고 달려가 경주부(慶州府)에 도착하여
두 고을의 장수와 병사들을 모은 다음, 날을 가려 교서를 반포하였는데, 그 교서에
이르기를,
“바다의 왜적들이 은택을 저버리고 석천(射天)의 흉악한 모략274)을 멋대로 행하
여 변경이 금성탕지(金城湯池)를 잃으니, 일패도지의 참혹한 화를 차마 볼 수 있겠
는가. 승승장구하는 적을 막지 못한 나머지 대세가 이미 기울어져 많은 백성들이
모두 그림자만 돌아보며 구차하게 살고 있을 뿐인데, 그대들이 그래도 몸을 떨쳐
개연히 대적하였도다. 만사를 무릅쓰고 죄를 물어 추악한 무리를 사로잡을 때 상처
를 싸매고 피를 마신 것이 얼마이던가. 사람들이 전쟁터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며, “마침내 네가 가시밭 속에 있게 될 것이로다.”라고 탄식하였다.
274) 은(殷)나라 무을(武乙)이 무도하여 허수아비를 만들어 천신(天神)이라 하고 바둑을 두다가 천신을 대
신한 사람이 지면 욕을 하고, 가죽주머니에다 피를 담아 매어달고는 올려다보며 활로 쏘아 맞히면서 ‘하
늘을 맞혔다(射天).’ 하였는데, 곧 반역을 뜻한다. 사기(史記) 「7은기(殷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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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여러 왕조(王朝)의 위엄과 은택에 평소부터 복종하였기 때문이긴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제각각 싸운 것은 실로 그대들의 충성스러운 의분에 말미암은 것이로다.
아내도 없고 가족도 없어지매 이미 얽매일 일조차 없었기에 그대들의 창과 그대들
의 극(戟)이 더욱 왜적을 막는 정성을 다할 수 있었도다. 홀로 남은 몸으로 한창 기
세를 떨치는 왜적과 대항할 줄을 어찌 알았는가. 갑옷을 입고 병기에 묻혀 누더기
에 이가 생긴 것이 몇 년이며 칼로 밥을 짓고 창으로 쌀을 일어 화살통과 방패가
없어진 것이 몇 밤이던가. 처첩은 즉묵(卽墨)275)의 대열에 편입되었고 왕개미조차
휴양(睢'陽)276)의 성원(聲援)을 다하였도다. 달이 가고 때가 지날수록 오히려 모구
(旄'丘)277)의 큰 절개를 탄복하고, 해가 가고 세월이 쌓일수록 농수(壟樹)278)가 누렇
게 되어 떨어짐을 얼마나 느꼈던가. 그대들의 몸은 구사일생으로 겨우 살아났고 우
리 나라는 망할 뻔하다가 다시 일어났도다. 이에 국토가 보존된 것은 참으로 그대
들의 보장(保障)에 힘입어 아직까지 보전되었음을 알겠도다. 그대들이 일찍이 의를
떨쳐 일으켜 앞장서지 않았다면 나라는 마침내 남쪽 땅을 잃어버린 지 오래되었을
것이다. 때를 놓치지 않고 포상을 베풀어 적진에 다투어 달려간 여러 사람의 마음
을 위로하는 것이 마땅한 법인데, 다만 흉악한 왜적이 이제 처음으로 지나갔으나
우리나라의 급난(急難)은 예전부터 있어서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니, 어찌 감히 그대
들을 존중하고 그대들을 기리는 것을 잊어서 그리했겠는가. 공훈(功勳)을 기록하는
법전(法典)을 궤짝 속에 오래도록 방치해두고 하룻저녁이라도 배불리 먹을 양식조
차 이어주지 못한 것은 나의 덕이 없는 소치로 내 안타깝게 여기노니, 어찌 마음이
편안할 리가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내 한 사람의 가까운 신하를 보내어 그대들의 7
년 동안 쌓인 노고를 위로하고, 장수와 군사들의 싸우고 싶어 하는 기개를 격려하
며, 모든 백성의 난을 싫어하는 마음을 위로하는 바이다. 그러나 어찌 이것이 그대
들의 공적에 보답하는 데 충분하겠는가. 잠깐 내 뜻을 전하여 밝히는 것일 따름이
로다. 하늘은 높고 햇빛은 멀지만 해바라기의 정성을 잃지 않는 것을 가상하게 여
기고, 골짜기가 깊고 숲이 깊지만 내 우로(雨露)의 은택을 두루 베풀지 못함을 부끄
러워하노라. 그러므로 이에 교시(敎示)하노니, 의당 잘 알 것으로 생각하노라.”
하였다.【지제교(知製敎) 박이장(朴而章)이 지어 올린 것이다.】이어 술자리를 베
275) 중국의 땅 이름으로, 지금 산동성 평도현(平度縣) 동남지방이다. 전국 시대 연(燕)의 장수 악의(樂毅)
가 제(齊)를 공격하여 제 나라 성(城) 70여 개가 모두 함락되었을 때 오직 즉묵(卽墨)과 거(莒 두 성만
이 남아 있었다. 사기(史記) 「7연세가(燕世家)」'
276) 중국 하남성 상구현(商丘縣) 남쪽에 있는 지명으로, 안녹산의 난 때 회양성(睢'陽城)을 지키다 죽은 장
순(張巡)을 가리킨다. 회양 태수 허원(許遠)과 함께 성을 지키며 적장 윤자기(尹子琦)와 싸워 몇 번이나
물리쳤으나, 몇 달이나 고수하다가 중과부적에 식량마저 떨어진 상태에서, 그의 명성을 시기한 임회 절
도사(臨淮節度使) 하란진명(賀蘭進明)이 고의로 구원병을 보내지 않는 바람에 성이 함락되면서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구당서(舊唐書) 권187
277) 모구(旄'丘)는 앞은 높고 뒤는 낮은 언덕으로, 시경(詩經) 모구편(旄7丘篇)에 “모구의 칡은 마디가 굵
어졌다. 숙이여 백이여 어찌 이리도 오랜 세월이 걸리는가? (旄7丘之葛兮 何誕之節兮 叔兮伯兮 何多日
也)” 하였다. 이는 여국(黎國) 임금이 나라를 잃고 위국(衛國)에 와서 머문 지가 오래 되어도 위국에서
자기네를 원조하여 본국으로 보내주지 않는다고 원망하여 지은 시이다.
278) 농수(壟樹)는 비교적 높은 언덕 위에 있는 나무, 또는 묘지에 있는 나무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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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고 목포(木布)를 차등에 따라 하사하였다. 이에 경주 절충장군(慶州折衝將軍) 황
희안(黃希安) 등 215명과 울산 절충장군 박봉수(朴鳳壽) 등 165명이 모두 뜰에 나
와서 임금의 은혜와 돌보심에 감격하여 모두 탄복하고 기원하였으며 심지어는 눈물
을 흘리는 사람까지 있었다. 술이 한창일 때 자리에서 일어나 모두의 뜻으로 말을
하기를,
“애초에 창을 메고 왜적을 토벌하여 다행히 조그마한 공을 세운 것은 오직 부형
의 원수를 갚고 조석에 달린 목숨을 이어보려고 한 것일 뿐이었는데, 뜻밖에도 보
잘 것 없는 노고가 위로 성상의 귀에까지 들리어 벼슬을 내리시고 은덕을 베풀어
주시니, 분수에 이미 지나칩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목숨이 오늘의 은택을 입을
줄이야 어찌 알았겠습니까.”
하고는, 다함께 임금의 은덕에 배부르고 술에 취하여 임금의 교화에 고무하여 밤
이 되어서야 파하였다. 패수(灞'水) 가에서 군사들을 위로하고 산동(山東)에서 교화
를 펼친 옛 일도 이보다는 못하였을 것이니, 아! 아름답도다! 또 모두 말하기를,
“성대한 일이니, 후세의 군사들과 백성들이 보고 느끼도록 기록하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이다.”
하였다.【신(臣) 준겸(浚謙)】이 직책이 이 도(道)의 주인으로서 공경히 절한 다
음, 삼가 그 전말을 기록하고, 이어 연회에 참석한 관리 및 장수와 군사들의 성명과
직함을 아래에다 적는다.
때는 만력(萬曆) 27년 12월 27일, 어사 봉정대부 세자시강원 필선 지제교(御史奉
正大夫世子侍講院弼善知製敎) 신(臣) 윤휘(尹暉), 관찰사 가선대부 겸병마수군절도
사 순찰사(觀察使嘉善大夫兼兵馬水軍節度使巡察使) 신 한준겸(韓浚謙), 겸울산도호
부사 절충장군 수좌도병마절도사(兼蔚山都護府使折衝將軍守左道兵馬節度使) 신 곽
재우(郭再祐), 수경주부윤 통정대부 경주진병마절제사(守慶州府尹通政大夫慶州鎭兵
馬節制使) 신 이시발(李時發), 절충장군 행부호군(折衝將軍行副護軍) 신 박봉수(朴鳳
壽), 절충장군 행부호군 신 박이손(朴利孫), 절충장군 행부호군 신 김윤복(金允福),
절충장군 행부호군 신 황희안(黃希安), 절충장군 행부호군 신 박응탁(朴應琢).
<宣諭記事> 今年夏 按279)撫御史司憲府執義李尙信 回自嶺南復命訖 書啓 略曰 慶
州蔚山 當賊路初程 將士戮力 分據要害 捍7禦兇鋒 終始不少懈 東都之得全 蓋賴其力
盍7施恩典 以慰其勞 上可之 諭臣浚謙 若曰 今觀李尙信書啓 慶蔚兩邑 力戰之功 予甚
嘉之 將遣御史以勞之 卿其多辦酒肉木布 候御史到日 犒'饗頒給 以諭予意者 旣而宣諭
御史世子侍講院弼善知製敎臣尹暉 賷奉敎書一通 馳到慶州府 合兩邑將士 擇日頒敎 其
書曰 海賊負恩澤 初肆射天之兇謀 邊圉7失金湯 忍見塗地之酷禍 長驅莫遏大勢已傾 衆
皆顧影而偸生 爾尙奮身而敵愾 執訊獲醜於萬死 裹'瘡飮血者幾時 人可即'戎 縱累朝威惠
之素服 衆各爲戰 實爾輩忠憤之所由 靡室靡家 已無繫累之事 爾矛爾㦸益殫7捍'衞7之誠
庸詎知孑遺之餘 猶抗此方張之勢 袵金浴鐵 蟣7生虎褐之年年 炊劍浙矛 魚服獸盾之夜夜
妻妾編即'墨之行伍 蚍'蜉7絶睢'陽之聲援 涉月踰時 猶歎旄7丘之誕節 經歲積稔 幾感壟樹之
279) 중간본에는 安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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隕黃 爾身九殞而一生 我國幾亡而再造 是知彊域之得保 實賴保障之猶存 非汝輩早奮義
而先之 則國家遂失南也 久矣 宜擧不踰時之軍賞 用慰爭赴敵之衆心 第兇賊初過于今
而我國孔棘猶昔 玆焉未暇 夫豈敢忘是崇是褒 久緩策勳之典于槖于囊 未繼宿飽之饟 由
予不德之攸致 轉予于恤之何安 故遣予一箇邇臣 以勞爾七年積苦 激將士願戰之氣 慰黎
庶厭亂之情 豈足酬乎爾功 聊以敷乎予意 天高日遠 嘉乃不失葵藿之忱谷邃林深 慚7我
不徧'雨露之澤 故玆敎示 想宜知悉【知製敎朴而章製進】仍宣酒醖 賜以木布有差 於是
慶州折衝將軍黃希安等二百十五員名 蔚山折衝將軍朴鳳壽等一百六十五員名 咸造在庭
感激恩眷 莫不咨嗟攅祝 至有流涕者 酒半起而合辭言曰 始之荷戈討賊 幸立尺寸之功
只欲復父兄之讐 延朝夕之命 而不圖微勞上徹王 爵橫加 恩至渥矣 分已逾矣 豈知萬死
餘生 復蒙今日之需澤耶 相與飽德醉酒 鼓舞聖化 夜分乃罷 雖古之勞軍灞7上布敎山東
殆無以過此 猗7歟休哉 咸曰 盛事也 不可以不記以爲後來軍民觀感之地【臣浚謙】職是
道主 拜手稽首 謹叙其顚末 而仍記押宴官僚 曁7將士之名 姓職號于下 時萬曆二十七年
十二月二十七日 御史奉正大夫世子侍講院弼善知製敎臣尹暉 觀察使嘉善大夫兼兵馬水
軍節度使巡察使臣韓浚謙 兼蔚山都護府使折衝將軍守左道兵馬節度使臣郭再祐 守慶州
府尹通政大夫慶州鎭兵馬節制使臣李時發 折衝將軍行副護軍臣朴鳳壽 折衝將軍行副護
軍臣朴利孫 折衝將軍行副護軍臣金允福 折衝將軍行副護軍臣黃希安 折衝將軍行副護軍
臣朴應琢
<김시습(金時習)> 〇<부자묘시(夫子廟詩)>
공묘 뜰의 소나무 푸른 연기 머금었으니 孔庭松檜翠含烟
하늘이 사문을 보우한 지가 몇 백 년이던가 天祐斯文幾百年
바다에 뗏목을 띄우려 한 마음280) 지금 어그러지지 않았으니 浮海夙心今不爽
삼조 동안 동쪽 나라에 제사가 밝고 깨끗하네 三朝東域祀明蠲'
<문천시(蚊川詩)>
문수는 콸콸 옛 서울을 빙 돌아 흘러 蚊水沄'沄7遶'古京
모래를 씻으며 소리 없이 서쪽으로 내려가네 淘沙西下細無聲
마치 경순왕이 왕건에게 귀순할 때 還如敬順歸王化
갑옷 벗고 투항하여 싸우지 않은 것과 같도다 卸7甲投降不敢爭
<남정시(南亭詩)>
푸른 나무 무성하게 정자에 둘러 있는데 綠樹陰陰遶'一亭
280) 논어(論語) 공야장(公冶長)에, “도가 행해지지 않으니, 내 뗏목을 타고 바다를 항해하려 한다.[道不
行 乘桴'浮于海 從我者其由與]”라고 한 말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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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 북쪽 향기로운 풀은 난간 앞에 푸르도다 蚊陽芳草檻前靑
거문고 뜯고 바둑 두던 고을 선비들 흩어졌는데 一鄕斯友琴棋散
때때로 맑은 바람만 네 난간을 흔드누나 時有淸風撼7四欞'
<북천김주원공지시(北川金周元公址詩)>
원성왕과 김주원281)이 서로 사양하던 때 元聖周元相讓時
북천은 장마가 져서 가없이 물이 불었도다 北川霖雨漲無涯
백이숙제와 태백282)이 어찌 아름다움을 독차지 하리 夷齊太伯那專美
천고의 강산에 옛 사당이 남아 있네 千古江山有舊祠
<천룡사283)감구시(天龍寺感舊詩)>
최제안284)이 두 여자를 천녀와 용녀로 부르고 齊顔二女號天龍
장수를 축원하기 위해 절간을 지었도다 爲祝延齡作梵宮
지난 일은 이미 티끌 같은 꿈이 되었는데 往事已成塵土夢
부질없이 산새만 남아 바람 속에 지저귀네 空餘山鳥自呼風
<태로원【곧 남교(南郊)이다. 포석정(鮑石亭)과의 거리가 2,3리이다. 】회고시(太
櫓院【即'南郊距鮑石亭二三里】懷古詩)>
벼와 기장 축축 늘어진 들판이 아득한데 禾黍離離原野長
높고 낮은 언덕 위에 소와 염소 흩어져 있네 高低壟上散牛羊
남교에서 그 옛날 술 취한 이를 부축하여 南郊昔日人扶醉
아름다운 열두 여인이 걸어간 곳이로다 紛黛金釵十二行
<등동산령망해시(登東山嶺望海詩)>
동쪽으로 아스라한 부상을 바라보니 東望扶桑縹7緲中
가없는 바다와 하늘이라 생각 또한 무궁하네 海天無際思無窮
281) 김주원(金周元)은 신라의 진골로, 아버지는 각간(角干) 유정(惟靖)이다. 무열왕의 둘째아들인 김인문
(金仁問)의 5세손으로 알려졌으나,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무열왕의 셋째아들인 문왕(文王)의 5세손이라
고 한다. 원성왕에게 왕위를 양보했다.
282) 태백(太伯)은 주(周)나라 고공단보(古公亶父)의 장남으로, 계력(季歷)에게 왕위를 양보하고 주나라의
태백(太伯)이 되었다.
283) 천룡사(天龍寺)는 경북 월성군 내남면(內南面) 용장리(茸長里)에 있던 절로, 1040년 최제안(崔齊顔)이
중건했다. 전설에 의하면 옛적에 천녀(天女)와 용녀(龍女) 두 딸을 가진 부모가 그들을 위하여 절을 세
우고 천룡사라고 했다 한다.
284) 최제안(崔齊顔)은 고려의 문신으로,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을 지낸 승로(承
老)의 손자이며 숙(肅)의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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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 같은 물결은 아득히 해를 머금었고 鯨波淼'淼7涵朝日
자라 같은 섬은 망망히 먼 하늘과 격하였네 鰲背茫茫隔遠空
세상에서 선단의 효험을 듣지 못하였고 世上不聞丹竈'驗
사람 중에 머리 허연 늙은이만 보일 뿐이네 人間唯見白頭翁
우산에 올라 어찌 울 필요가 있겠는가285) 牛山何必流寒涕
생사와 흥망은 예나 이제나 마찬가지라오 生死興亡古今同
<근사재 박계현의 십육영 近思齋朴啓賢十六詠>
<독락당시(獨樂堂詩)>
단청이 화려하지 않은 독락당에 丹碧非奢獨樂堂
수레에서 내리니 끊어진 풍경에 가슴이 뭉클하네 下車磬折感衷腸
궁통의 소재가 끝내 어디이던가 窮通所在終何事
단사표음 변치 않으매 맛이 심원하도다 不改顔瓢一味長
<자계곡구시(紫溪谷口詩)>
곡구에선 말을 타고 먼지를 내지 말 것이니 谷口休揚馹騎塵
들에서 밭가는 사람을 더럽힐까 두렵다오 原頭恐浼耦'耕人
깊은 숲에서 왕왕 도롱이 쓴 노인을 만나더라도 深林往往逢簑笠
밝은 세상 정자진286)으로 여기지 말지어다 莫是明時鄭子眞
<자옥산시(紫玉山詩)>
자옥산 일천 봉우리 맑은 하늘에 솟았으니 千峯紫玉落晴天
빼어난 경치는 기록에 전하는 것보다 낫구나 形勝曾於國誌傳
오늘에사 참모습을 보고 또 보노라니 今日看看眞面目
당장에라도 귀거래사를 짓고 싶게 하는구나 令人直欲賦歸篇
<무학산시(舞鶴山詩)>
285) 제경공(齊景公)이 우산(牛山)에서 놀다가 제 나라를 바라보며 “아름답도다. 이 나라여, 울창한 태산
(泰山)은 예부터 죽음이 없는데 나만 죽어서 여기를 떠나겠구나.” 하자, 곁에 있던 안자(晏子)가 비웃으
며 “장공(莊公)ㆍ영공(靈公)이 죽지 않았다면 임금께서 어떻게 이 자리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는 불
인(不仁)입니다.” 하였다.
286) 정자진(鄭子眞)은 한(漢)나라의 고사(高士) 정박(鄭樸)을 말한다. 그는 곡구(谷口)에서 입을 닫은 채
도(道)를 닦으며 살았는데, 성제(成帝) 때 대장군 왕봉(王鳳)이 예를 갖추어 초빙했으나 응하지 않았으
며, ‘곡구자진(谷口子眞)’이라 자호(自號)하였다. 한서(漢書) 「7고려전(高士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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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락당 앞 무학산 獨樂堂前舞鶴山
천추에 학이 날아 돌아옴을 보는 듯하네 千秋如見鶴飛還
신선처럼 노니노라니 왕자교287)의 무리를 만날 듯한데 仙遊倘'遇王喬輩
산 위의 백운은 부질없이 절로 한가하네 山上白雲空自閑
<정혜사시(浄惠寺詩)>
정혜사는 지은 지 몇 년이런가 浄惠伽藍創幾年
등덩굴 깊은 곳 하늘과 가깝구나 藤蘿深處近諸天
글 읽는 이 떠나가고 신선의 집만 남았건만 讀書人去仙寮在
늙은 중은 여전히 현인을 얘기하네 耆衲猶能說大賢
<도덕산시(道德山詩)>
도덕산이 자취봉과 연하여 겹치니 道德山連紫翠重
두 큰 산이 자웅을 겨룰 만하도다 堪將兩大較雌雄
높이를 어찌 말할 것이 있겠는가 等閑高幷何須說
선현의 높은 도덕에 견줄 만하다네 却比先賢道德崇
<화개산시(華蓋山詩)>
우뚝한 화개산 하늘 동쪽에 솟았으니 亭亭華蓋起天東
동해의 현자들이 찾을 만하도다 東海群賢若可從
내 산에게 묻고자 하나 산은 대답치 않고 我欲問山山不諾
천 바위 만 골짝이 가슴을 씻어 주네 千巖萬壑盪'心胸
<자계시(紫溪詩)>
맑은 시내 오르노라니 그지없이 고요한데 上盡淸溪靜不喧
묻노니 그대여 어디에서 참 근원을 찾으려는가 問君何地覓眞源
석양에 지팡이 짚고 망연히 서있노라니 倚筇斜日茫然久
어여뻐라 잔잔한 여울 취한 혼을 씻어주네 只愛潺湲洗醉魂
<양진암시(養眞庵詩)>
287) 왕자교(王子喬)는 주(周)나라 영왕(靈王)의 태자로, 생황을 불어 봉황의 울음소리를 잘 내었는데, 신선
부구공(浮丘公)을 만나 숭산(嵩山)으로 들어가 도술을 배운 지 30여 년 후 백학(白鶴)을 타고 구씨산(緱
氏山) 산마루에 올라가 며칠을 있다가 떠나버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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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한 정자가 시냇가에 서있으니 朴素溪亭壓水頭
십년 동안 내내 토구를 계획하였네288) 十年心計一菟7裘'
그 당시 송죽을 손수 심었거니 當時手種松兼竹
풍상을 견딘 지가 몇 년이나 지났던가 戰勝風霜閱幾秋
<관어대시(觀魚臺詩)>
누대에 올라 진종일 홀로 물고기를 보고 있자니 臨臺盡日獨觀魚
지극한 즐거움에 사물의 근원까지 알 것 같구나 至樂應須到物初
만수(萬殊)를 한 이치로 귀결 짓고 싶다면 欲把萬殊歸一理
묻노니 그대는 일찍이 칠원289)의 글을 보았는가 問君曾見漆園書
<영귀대시(詠歸臺詩)>
봄바람이 만물에 불어 향기를 다투는데 東風着物競芳菲
봄옷을 막 해 입고 홀로 읊조리며 돌아오네 春服初成獨詠歸
당년에 도를 행하던 곳에 오래도록 앉았노라니 坐久當年行道處
물고기와 새들도 담박한 경지에 노니누나 游魚飛鳥解忘機
<탁영대시(濯纓臺詩)>
옛 현인 이곳에서 얼마나 한가롭게 지냈을까 昔賢曾此幾閑行
누대 아래 흐르는 냇물 바닥까지 투명하네 臺下溪流徹底淸
한 모금만으로도 만 가지 시름을 없애주니 一(口+帀)只應除萬慮
감히 세속의 갓끈을 씻지 못하게 하는구나 令人不敢濯塵纓
<징심대시(澄心臺詩)>
징심대의 경계 가장 깊고 그윽하니 澄心臺境最幽深
병풍같은 푸른 절벽 나무 그늘이 좋아라 翠壁如屛嘉木陰
게다가 벽옥을 머금은 맑은 소가 있는데 更有淸潭涵碧玉
288) 벼슬을 내놓고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계획을 말한다. 춘추시대(春秋時代) 노(魯) 나라의 우보(羽父)가
은공(隱公)에게 환공(桓公)을 죽이기를 청하였는데, 은공이 “그가 어렸기 때문에 내가 섭정한 것인데, 이
제 장성하였으니 임금의 지위를 그에게 넘겨 줄 것이다. 사람을 시켜 토구(菟'裘에 집을 짓게 하도록 하
라. 나는 거기에서 늙을 것이다.” 하였다. 이후로 벼슬을 내놓고 고향으로 돌아감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
다. 좌전(左傳) 「'은공(隱公)」11年
289) 몽(蒙)의 칠원(漆園)이란 곳에서 관리가 되었던 장자(莊子)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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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에나 그리움 속에 거문고를 뜯을런지 相思何日奏瑤琴
<세심대시(洗心臺詩)>
자옥산은 높고 시냇물은 깊은데 紫玉山高溪水深
비탈길에 바위 있어 오를 만하도다 盤阤7290)有石可登臨
세심대 황폐하여 보이는 이 없으니 洗心臺廢無人見
세심을 물을 길 없어 서글피 바라보네 悵7望無由問洗心
<사자암시(獅子巖詩)>
사자같은 기괴한 바위 벽담에 누웠으니 獅子奇巖枕碧潭
지금까지도 유적을 찾을 만하구나 至今遺跡付宜探
만상이 모두 귀결하는 곳을 보고 싶다면 要看萬象皆歸處
이곳에다 모름지기 초암을 지어야 하리라 此地終須結草菴
<용추시(龍湫詩)>
물결조차 머무는 이 용추에 波瀾渟蓄是龍湫
신물이 굼틀거리며 검푸른 물속에서 노니네 神物蜿7然黑處游
연못 속에서 잠만 잔다고 말하지 말지어다 莫道淵潛但貪睡
가물 때나 장마 때나 이곳에서 비느니라 旱天霖雨此曾求
<징례문(徵禮門)의 상량문(上梁文)> 정랑(正郞) 전극항(全克恒)이 지은 것이다.
기술하건대, 붉은 이끼 푸른 이끼의 황폐한 성은 보름달 형상으로 남아 있고, 푸
른 기와 붉은 난간의 웅장한 건물은 구름과 잇닿은 형세로 솟아 있다. 비록 다시
규얼(圭臬291)로 잰다고 해도 그 뛰어난 만듦새는 견줄 것이 없으며, 길고 짧은 것
을 다 재어서 따져본다고 해도 빼어난 규모는 헤아릴 길이 없으니, 사람의 힘이 아
니라 귀신이 있어 도와준 것이다. 이곳은 옛 탈해왕(脫解王)의 나라요, 실로 박혁거
세(朴赫居世)가 세운 나라이다. 언덕 위의 정자에서 한 번 바라보면 용이 서리고 호
랑이가 웅크린 듯한 여러 봉우리요, 동구 밖의 세 갈래 길에는 개가 짖고 닭이 우
는 사방 지경(地境)이다. 당(唐 요(堯)의 나라)나라 서울의 문물은 배수(裵秀)292)의
여도(輿圖)로 알 수 있고, 초(楚)나라 산천의 형세는 굴원(屈原)의 사부(詞賦)에 남
290) 중간본에는 阤7가 陁로 되어 있다.
291) 규얼(圭臬은 해 그림자를 재는 기구이다.
292) 배수(裵秀)는 진(晋)나라 사람으로, 자는 계언(季彦)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8세에 글을 지
었으며, 지방직을 많이 거쳐 우공지역도(禹貢地域圖) 18편을 지어 올린 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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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있다. 경애왕(景哀王)의 황음(荒淫)을 당하고, 진지왕(眞智王)의 부강(富强)을 펼
칠 때는 철봉(鐵鳳)이 용마루에 잇닿아 선각(仙閣)이 삼하(三河)의 모래톱을 포옹한
듯하였고, 옥룡(玉龍)이 낙수받이를 받들어 주궁(珠宮)이 구락(九洛)의 물가를 가로
지른 듯하였으니, 번창하고 화려했을 때는 마음껏 구경하던 곳이었으나 가득 찼다
가 넘칠 때는 화를 부른 곳이었다.
한서가 바뀌매 포석정의 성상이 얼마나 지났으며, 초목이 쓸쓸하매 계림의 문물
이 한낱 꿈이 되었다. 한(漢)나라의 소고(簫鼓)는 유수(流水)에 빠져버렸고, 진(晋)나
라의 의관(衣冠)은 옛 언덕이 되어버렸다. 옛 서라벌의 영토가 이제는 대도호(大都
護)의 진영(鎭營)이며, 경주부 성곽의 남문 누각은 바로 옛 나라의 남은 터인데, 어
느 때에 건립된 것이던가. 그 옆으로 높은 골짝과 닿아있어 길게 뻗친 교외를 굽어
보고 있다. 누각의 길은 세 번을 쉬어야 하는데 은은히 성벽이 우뚝 솟아 있고, 정
원의 큰 길은 사방에서 모이는데 가벼이 관개(冠蓋)가 뒤를 따른다.
이곳이야말로 영남의 요충지요, 정말이지 강남의 절경이다. 임천(林泉)이 어우러
져 집집마다 동산의 꽃과 오솔길의 대나무요, 도서(島嶼)가 빙 둘러 곳곳마다 언덕
의 지초와 물가의 난초로다. 신령스런 터를 독차지하여 빼어나서 아름다운 경치의
으뜸이니, 어찌 뭇 선인(仙人)들이 노닐고 군자들이 자적(自適)하던 곳이 아닐까.
병란 속에 노략질당하는 궁색한 운을 만나고 오랑캐들 겁탈하는 흉악한 음모를
당하여, 구슬 같은 집과 방은 맹렬한 불을 따라 모두 붉게 타버렸고, 수를 새긴 대
들보와 서까래는 차가운 잿더미로 변하여 모두 검게 타버렸다. 슬픈 가을 나그네가
되어 어느 곳에서 두보(杜甫)의 시를 읊으며, 한가한 날 시름을 씻으며 어느 곳에서
중선(仲宣)의 부(賦)293)를 쓸 것인가. 국가에서 개구리가 노한 것을 보고 출정하였
으나, 양이 도망간 것을 인하여 우리를 고치는 격이었다. 국토를 개척하고 강계를
여니 대황(臺隍)이 현수(峴首)의 준험한 곳에 의지하였고, 도랑을 깊이 파고 보루를
높게 쌓으니 보장(保障)이 진양(晋陽)의 웅장한 곳을 의거하였다.
순찰사(巡察使) 오공(吳公)이 중요한 지방에 부임하였는데 그의 재주는 문무(文
武)를 겸전하여 임금의 교화를 선양하자 감당(甘堂)으로 소백(召伯)294)의 순행(巡
行)을 노래하듯 하였고, 부월(斧鉞)을 짚고 지휘하자 고류(高柳)로 조공(趙公)의 덕
행을 칭송하듯 하였다. 게다가 군사들을 진열하고 군대를 호령하니 대장 깃발이 휘
날리는 병영이요, 괘(卦)를 방정하게 하고 시초(蓍草)를 둥글게 하니 나무를 깎고
시위를 만들어 발사한다. 단련하고 연마하니 다섯 번이나 신칙하고 아홉 가지를 정
벌하는 군사요, 쌓고 뚫으니 일백 번 이기고 일만 번 안전한 계책이로다.
가군(家君)이 서울에서 벼슬하다가 경주의 부윤이 되니, 파릉(巴陵)으로 좌천되어
293) 중선(仲宣)은 삼국시대(三國時代) 건안칠자(建安七子)의 한 사람인 왕찬(王粲)의 자이다. 형주(荊州)에
있을 때 성루(城樓) 위에 올라가 울울한 마음으로 고향을 생각하며 지은 등루부(登樓賦)에, “참으로 아
름답지만 내 땅이 아니니, 어찌 잠시인들 머물 수 있으리요(雖信美而非吾土兮 曾何足以少留).” 하였다.
294) 감당(甘堂)은 시경 소남(召南)의 ‘감당편(甘棠篇)’을 가리키고, 소백(召伯)은 주나라 소공(召公)이다.
그가 지방을 순행할 때 팥배나무[甘棠] 밑에서 쉬었는데, 남국(南國)의 백성들이 소공의 선정(善政)을
잊지 않은 나머지, “무성한 저 감당나무를 자르지도 말고 베지도 말라. 소백께서 쉬시던 곳이다(蔽芾7甘
棠 勿剪勿伐 召伯所憩).”라는 노래를 지어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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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양루(岳陽樓)를 개수(改修)한 등왕(滕7王) 격이요, 관사(官舍)를 수리했을 때 ‘희우
정기(喜雨亭記)’를 지은 소동파(蘇東坡) 격이다. 일천 간 넓은 집은 생각건대 모두가
기뻐하는 비호처요, 아홉 길 높은 집은 어찌 혼자만 누리는 안락처이겠는가. 통판
(通判) 이공(李公)은 농서(隴'西)의 명문(名門)인 이하(李下)의 후손으로, 황룡새(黃龍
塞)295)에서 금생에 원비장군(猿臂將軍)으로 태어났으며, 백옥경(白玉京)296)에서 전
생에 사신(蛇神)ㆍ사백(詞伯)이었다. 공적이 반자(半刺)보다 깊으니 자취가 왕희지
(王羲之)의 못과 같으며, 뜻이 삼성(三城)을 쌓으니 호기가 진등(陳登)297)의 호해(湖
海)와 같도다. 모두 생각하기를 기둥을 중첩하고 두공에 단청을 하니 비바람의 재해
를 피하며, 정자를 넓히고 누대를 높이니 고명(高明)의 지위에 걸맞다고 한다. 따라
서 청련거사(靑蓮居士)의 소원이 이미 세 번 오르는 것에 조화되었으니, 자부신군
(紫府神君)의 일이 어찌 두 번 거행함을 꺼리겠는가. 더구나 왕공(王公)은 험준한
곳에 설치하여 언제나 예기치 않은 일에 대비하고 막을 것을 생각하였으며, 장자(長
子)는 군사를 이끌 때 반드시 걱정이 없는 때에 막는 것에 의존했던 것임에랴. 이
때문에 민산(岷山)의 깊은 지역에 있는 검문(劍門)은 만부(萬夫)라도 뚫을 수 있는
곳이 아니었으며, 진(秦)나라의 웅장한 서울에 있는 함곡관(函谷關)은 천하의 견고
한 곳이었으니, 어찌 옛 현인을 좇아 거듭 기이한 공적을 거두지 않을 것인가.
이에 사간(斯干)298)에서 옛 제도를 탐구하고, 대장(大壯)299)에서 옛 법도를 상고
하였으며, 용성(容成)300)은 역서(曆書)를 견주어 기둥을 세움에 날을 택하는 마땅함
을 알았고, 영장(郢7匠)301)은 도끼를 휘두르고 재목을 선택함에 바람이 나는 듯한 공
교함을 바쳤다.
높은 데를 따르고 낮은 데를 등지니 오늘 우뚝 솟은 것을 바라보게 되었으며, 옛
것을 버리고 새것에 나아가니 당시 누추함을 비웃게 되었다. 층을 이룬 처마에 눈
발이 휘돌면 병예(屛翳302)의 궁전에 비끼어 통하고, 채색한 난간에 바람에 불면 비
렴(飛廉)303)의 길을 막는다. 겹문이 열리면 도리어 설령(雪嶺)이 아득히 걸렸는가
의심하고, 일백 척 높은 누각은 다시 유종원(柳宗元)이 올라와 바라보는가 의아하
295) 황룡새(黃龍塞)는 황룡부(黃龍府)라고도 하며 길림성(吉林省) 농안현(農安縣)에 있다.
296) 백옥경(白玉京)은 원래 도가(道家)의 원시천존(元始天尊)이 산다는 도읍인데 일반적으로 왕경(王京)을
뜻한다.
297) 원룡(元龍)은 삼국 시대 진등(陳登)의 자이다. 그는 호기가 높기로 이름나 허사(許汜가 형주목사(荊
州牧使) 유표(劉表)와 천하의 인물을 논하면서, “진원룡(陳元龍)은 호해(湖海)의 선비라 호기가 없어지지
않았다.” 하였다. 이에 유표가 무슨 까닭이 있느냐고 묻자, 허사가 “하비(下邳를 지나다 그를 방문하니
손님을 맞는 예(禮)도 갖추지 않고 오랫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자신은 큰 침상 위에 올라가 높
고 손님은 침상 아래에 눕게 하였다.”고 대답하였다. 이 사실을 들은 유비(劉備)가 “나 같으면 백 척의
누각 위에 자고 그대를 땅에 재울 것이니, 어찌 침상의 위와 아래의 차이 뿐이겠는가.” 하였다. 삼국지
(三國志) 「7위지(魏志)」진등전(陳登傳)
298) 시경 「7소아(小雅)」'의 편명으로, 주선왕(周宣王)이 궁성을 지은 일을 읊었다.
299) 주역 의 괘명(卦名)으로, 우뢰가 하늘에 있음을 상징한다.
300) 황제(黃帝) 때의 사관(史官)으로, 처음으로 율력(律曆)을 만들었다 한다.
301) 장자(莊子) 서무귀(徐无鬼)에 나오는 목수 이름이다.
302) 신의 이름으로, 운신(雲神)이나 우사(雨師)라고도 한다.
303) 신금(神禽)의 이름으로, 풍기(風氣)를 부린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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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흰 마름 붉은 여뀌가 여동빈(呂洞賓)의 맑은 유람을 이루니, 가을 물 긴 하늘이
어찌 왕발(王勃)의 뛰어난 경치일 뿐이겠는가. 귀와 눈을 치달려 이에 보고 듣는 즐
거움을 다하고, 육신을 마음대로 하여 이에 울적한 마음을 씻어버린다. 잠깐 좋은
노래를 일으키고, 아름다운 계책을 편다.
들보를 동쪽으로 드니 抛梁東
만리의 푸른 바다 한눈에 바라보내 萬里滄溟一望通
문득 신라의 전성기를 생각하니 却憶新羅全盛日
아름다운 자리에 해신이 와서 춤을 추었다오 海神來舞綺筵中
들보를 서쪽으로 드니 抛梁西
검술을 닦던 봉우리에 봄 해가 낮네 鍊劍峯頭春日低
어느 곳에 황량하게 무덤을 파는가 何處荒涼'舒發墓
잘린 비석 글자도 없이 풀만 무성하도다 斷碑無字草萋7萋'
들보를 남쪽으로 드니 抛梁南
천 길 금오산 봉우리가 쪽빛인양 푸르도다 千丈鰲岑綠似藍
학사의 유적이 지금까지 남아 있으니 學士至今遺跡在
옛 산장에 고개를 돌리매 그리움을 어이 견디리 古庄回首思何堪
들보를 북쪽으로 드니 抛梁北
아득히 삼소304)를 바라보니 구름 기운 검도다 遙望三霄7雲氣黑
대궐을 그리는 외로운 신하의 마음을 알고자 한다면 要識孤臣戀闕心
뭇 별들이 북극성을 돌고 있음을 보아야 하리 須看列宿環宸極
들보를 위로 드니 抛梁上
바람이 맑고 달이 밝은 적이 몇 번이던가 幾度風淸兼月朗
학창의에 윤건 쓰고 묵묵히 앉았노라면 鶴氅7綸巾黙坐時
일종의 의미가 어이 그리 상쾌한지 一般意味何蕭爽
들보를 아래로 드니 抛梁下
맑은 창에 홀로 기대어 넓은 들을 바라보네 獨倚晴窓臨大野
우주는 아득하고 사람들 많기도 한데 宇宙茫茫人許多
뉘라서 정말이지 대장부인지 모르겠네 不知誰是男兒者
304) 삼소(三霄는 삼천(三天)과 같은 말로 도교(道敎)에서 일컫는 청미천(淸微天)과 우여천(禹餘天), 대적
천(大赤天)을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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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 바라건대, 상량(上梁)한 뒤에 하늘은 맑고 땅은 평화로우며, 집은 풍족하고
사람은 만족하리라. 한 잔 술로 문장을 담소하면 대부(大夫) 사마상여(司馬相如)요,
한밤중에 풍류를 노래하면 종사(從事) 두목(杜牧)이리라. 서천 절도사(西川節度使)가
변방을 계획함에 용천검(龍泉劍)이 빛이 나고, 남국(南國) 가인(佳人)의 석상(席上)
에는 연루(燕樓)305)의 한이 없으리라. 도성 사람들이 거듭 감상하니 때로 계서(雞'
黍)306)의 맹세를 찾고, 시골 손님들이 자주 머무니 간혹 어초(魚樵)의 흥을 일으키
리라. 사계절을 돌면서 상쾌함을 다투고, 천 리의 아득한 회포를 쏟아놓으리라.
<徵禮門上梁文> 正郞全克恒所著 述夫頳苔翠蘚荒城 餘滿月之形 碧瓦朱欄傑構 聳連
雲之勢 雖復陳圭置臬妙範無方較短量長 奇模不測 非人力也 有鬼相之 奧若脫解王之
邦 實惟赫居世之國 亭皐一望 龍盤虎踞之諸峯 里閏三分 狗吠鷄鳴之四境 唐都物候 裵
秀之輿圖可知 楚壁山川 屈平之詞賦卽在 當景哀之荒樂 席眞智之富强 鐵鳳連甍仙閣
擁三河之滸 玉虬'承霤 珠宮橫九洛之涯 繁華爲縱觀之場 滿溢是招損之地 炎涼7代謝 幾
過鮑石之星霜 灌莽蕭條 一夢鷄林之文物 漢家簫鼓沉'流水 晉代衣冠成古丘 昔之徐耶伐
寰7區 今者大都護鎭管 府城南門樓者 蓋故國之餘址 而何時所建耶 爾其傍連絶壑 俯壓
長郊 閣道三休 隱隱垣墉之却峙 庭衢四會 翩翩冠蓋之相追 玆嶺外之要衝 信江南之佳
麗 林泉糾合 園花徑竹之家家 島嶼縈7迴岸芷汀蘭之處處 占靈基而得雋 爲勝地之先鳴
豈非列仙之庭 君子攸芋者也 洎金戈鐵馬 逢否運於搶7攘 鑿齒雕題 逞凶謀於劫掠 珉房
砥室 隨烈火而皆紅 綉桷7琱'楣 變寒灰而盡黑 悲秋作客 底處詠子美之詩 暇日消憂 何從
題仲宣之賦 國家見蛙怒而憑軾 因羊亡而補牢 拓土開疆 臺隍依峴首之峻 深溝高壘 保
障據晉陽之雄 巡察使吳公任重藩 維才全文武 承流宣化 甘棠歌召伯之巡 仗鉞褰7帷高
柳頌趙公之德 加以陳師鞠旅 高牙大纛之營 方卦圓蓍 剡木弦弓之射 鍜7乃礪乃 五申九
伐之兵 築斯鑿斯 百勝萬全之策 家君分憂北闕 作尹東京 謫守巴陵 修岳陽之滕7子 始治
官舎 記喜雨之蘇公 廣廈千間 竊意俱歡之庇 高堂九仞何心獨享之安 通判李公 隴7西名
門 李下華胃 黃龍塞上 今生猿臂將軍 白玉京中 夙世蛇神詞伯 功深半刺 跡猶逸少之池
亭 意築三城 氣則元龍之湖海 咸以爲重楹畵棋 斯避風雨之災 廣榭'崇臺 乃稱高明之位
故靑蓮居士願 已諧於三登 紫府神君役 何憚於再擧 而況王公設險 常思備禦不虞 長子
率師 必倚關防無患 是以岷墟奧壤 劍門非萬夫之開 秦塞雄都 函谷是四海之固 盍'導往
哲 重緝奇功 於是探舊制於斯干 稽前規於大壯 容成校曆立柱 知擇日之宜 郢7匠揮斤掄'
材 獻生風之巧 因高背下 瞻此日之崔嵬 去故就新 笑當時之朴陋 層軒回雪 斜通屛翳'之
宮 綵檻臨風 直遏7飛廉之路 重門擊柝 還疑雪嶺之遙懸 百尺高樓 更訝柳州之登眺 白蘋7
紅蓼 可成洞賓之淸遊 秋水長天 奚啻7子安之勝槩驅馳身目 于以極視聽之娛 放浪形骸
於焉洩鬱怏之思 聊興善頌 式播徽猷 抛梁東 萬里滄溟一望通 却憶新羅全盛日 海神來
舞綺筵中 抛梁西 鍊劍峯頭春日低 何處荒涼7舒發墓 斷碑無字草萋7萋抛梁南 千丈鰲岑
綠似藍 學士至今遺跡在 古庄回首思何堪 抛梁北 遙望三霄7雲氣黑 要識孤臣戀闕心 須
305) 연루(燕樓)는 연자루(燕子樓)의 준말이다. 당나라 정원(貞元) 년간에 상서(尙書) 장음(張愔이 이 누각
을 짓고 애첩 관반반(關盼盼)을 살게 하였다.
306) 계서(鷄黍)는 닭 잡아 죽을 끓이고 기장을 앉혀 밥을 짓는다는 뜻으로, 남을 관대(款待)하고 향응(響
應)함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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看列宿環宸極 抛梁上 幾度風淸兼月朗 鶴氅7綸巾黙坐時 一般意味何蕭爽 抛梁下 獨倚
晴窓臨大野 宇宙茫茫人許多 不知誰是男兒者 伏願上梁之後 乾淸坤夷 家給人足 一樽
談笑文翰 則大夫相如 五夜笙歌風流 則從事杜牧 西川節度籌邊 有龍劍之光 南國佳人
席上 無燕樓之恨 都人襲賞 時尋雞'黍之盟 野客頻留 或起漁樵之興 環四時而競爽 寫千
里之長懷
<향교송단기(鄕校松壇記)> 사부(師傅) 정극후(鄭克後)가 지은 것이다. 기문은 다
음과 같다.
사람이나 물건이나 하늘과 땅 사이에 난 것은 마침내 없어지고 민멸되지 않는 것
이 없는데, 유독 성인(聖人)의 도(道)만은 만고에 걸쳐 길이 남아 일월(日月)과 더불
어 밝음을 같이하니, 이것이 배와 수레가 다가오고 이슬과 서리가 내리는 까닭이다.
피와 기운을 지닌 자는 누구라도 어버이를 존귀하게 여기지 않는 자가 없다. 수목
이 그 사이에서 생겨나 자라고 무성하고 말라버리는 것이 사람의 일과는 관계가 없
는 듯하지만, 혹 성인이 노닐며 읊조리는 곳이나 여러 제자들이 나열하여 모시는
곳에 뿌리를 내리면 사람들이 그것을 아끼고 보호하여 오래되어도 쇠하지 않는 것
은 공경하는 대상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궐리(闕里)307)의 단(壇) 위에 있는 은행나무는 그것이 어느 해에 시들고 어느 해
에 없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행단(杏壇)’이란 이름은 길이 전해져서 오늘에 이르
러서도 어제의 일과 같다. 이것은 수목이 생겨나 무성하고 죽고 또 오래 사는 것이
역시 사람과 관계가 있는 것을 의미한다. 궐리에는 또 공자(孔子)께서 손수 심은 회
(檜)나무가 있는데, 그 수가 셋이며 그 크기는 소를 가릴 정도였다. 진(秦)ㆍ한(漢)
을 거치면서도 여전히 구름처럼 무성하였는데, 진(晉)나라 영가(永嘉) 연간에 말라
죽었으며, 수(隋)나라 때 다시 살아났다가 당(唐)나라 때 또 말라 죽었으며, 송(宋)
나라 강정(康定) 연간에 다시 살아났는데, 여진족(女眞族)이 남쪽을 침범하자 그 화
가 세 그루의 회나무까지 미쳐 다시는 살아나지 못했다. 이에 가져다 목재로 만들
어 공인(工人)에게 명하여 옛 성인의 얼굴과 여러 현인의 초상을 그리게 하였으니,
이는 수목의 삶과 죽음이 또한 시운(時運)에 관계되지만, 그것이 없어지고 없어지지
않는 것은 단지 하늘에 달려 있을 뿐인 것이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국학(國學)을 세운 것은 신라 신문왕(神文王) 때이다. 그때
이후 선비의 기풍이 크게 일어나 우리나라의 문화가 중국과 버금가게 되자, 중국
사람들이 우리를 ‘소중화(小中華)’라고 이르기도 하고, ‘군자의 나라[君子之國]’라고
이르기도 하였는데, 우리나라에 학교를 일으킨 효과는 이것이 그 시초이다. 고려 이
후로 국학은 향학(鄕學)으로 변하게 되었는데 학궁(學宮)이 있던 터는 그대로 두었
으니, 바로 오늘날의 향교(鄕校)가 그 자리이다. 조선조 2백 년 동안 이 도(道)를
북돋고 기르기를 지극히 하여 이곳에 수재들이 모였으며 양무(兩廡에 제사를 올리
307) 궐리(闕里)는 산동성 곡부현(曲阜縣)에 있는 마을로, 공자가 이곳에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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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까지 하였으니, 이는 천운이 끊임없이 순환하는 이치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임
진년의 변란에 깨끗이 재로 변하여 무성한 풀밭이 된 지 8년이 되었다.
만력 경자년에 부윤 이 상공(李相公) 시발(時發)이 이곳에 부임하여 마침내 옛 터
에 성묘(聖廟)를 새로 세우고, 또 소학(小學)의 가르침으로 제생(諸生)들을 이끌었
다. 그 후 15년인 갑인년에 동악(東岳) 이 상공(李相公) 안눌(安訥)이 이곳에 부윤
으로 와서 성묘의 뒤에 이륜당(彛倫堂)을 세웠으니, 역시 옛 제도를 따른 것이다.
몇 달 사이에 장대하고 아름다워지니 문옹(文翁)의 기풍이 크게 변하게 되었다. 전
후의 두 상공께서 도를 지키고 학교를 일으킨 공적이 이에 크다고 하겠는데, 끝내
그 연월(年月)을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는 자가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간혹 이것을
부족하게 여겨 탄식하였다.
사람들이 함께 보는 식물로 말하면 학궁 옆에 전에는 소나무와 잣나무가 없었는
데, 지난날 성묘를 다시 세우던 이듬해인 신축년 봄에 밀성(密城) 손공(孫公) 기양
(起陽)이 이곳에서 벼슬할 때 제생들을 거느리고 비가 내리는 남산에서 소나무를
캐어다 앞문의 앞쪽과 뒷담의 뒤쪽에 몇 그루를 옮겨 심었다. 이제 50여 년이 되어
아름드리가 되어 하늘을 찌를 듯하지만, 나무가 담 뒤에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날
마다 추위를 견뎌 내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하였다. 금년 봄에 마침
내 일꾼을 부려 돌을 날라 섬돌 앞에 석 자 높이의 층계를 만들고 땅을 파서 그것
을 쌓았다. 뒤에는 여러 길이나 되는 담이 있어 커다랗게 하나의 송단(松壇)을 만들
었다. 이로부터 유궁(儒宮)에 들어오는 자들이 이곳에서 도를 강론할 수 있고, 이곳
에서 예를 익힐 수 있으며, 이곳에서 노닐며 읊조릴 수가 있었다. 이뿐만이 아니라
경서(經書)를 마주하여 잠심(潛心)할 때면 마치 면전에서 명하는 말을 듣는 듯하고
바람이 부는 날에 귀를 기울이면 아련히 거문고 소리가 아련히 들리는 듯하니, 후
생(後生)들이 이곳에서 흥기(興起)함이 무궁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하나의 송단은 장차 궐리(闕里)의 행단(杏壇)과 더불어 먼 후일까지
전할 것이며, 또 마땅히 천지와 더불어 영원할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전할 만한 일
이므로, 이에 글로 기록하여 우리 군자들에게 알리는 바이다.
<鄕校松壇記> 師傅鄭克後所著 記曰 夫人物之生於天地間者 未有不終歸於澌7盡泯滅
者 而獨有聖人之道 旦萬古而長存 與日月而並7明 此其所以舟車所至 霜露所墜 凡有血
氣者莫不尊親者也 其有樹木之生植榮悴於其問者 似無與於人事 而或托根於聖人游詠之
地 羣弟子列侍之場 則人皆愛惜而保護之 愈久而不衰者 以其所敬存焉耳 若闕里壇上之
杏 未知其何年枯何年盡 而杏壇之名 則傳之於永久 至今如昨日事 是則樹木之生而榮死
且壽者 亦係乎人也 闕里中 又有手植檜 其數有三 其大蔽牛 歷秦漢猶榮茂如雲 至晉永
嘉年中枯死 隋時復生 唐時又枯死 宋康定間復生 女眞南侵 厄及三檜 樹不復生 於是取
以爲材 命工刻先聖容 及其諸賢像 惟肖是樹木之生與死 亦係於時運 而其所以喪與未喪
者 則只在於天而已 吾東方始立國學 在於新羅神文之世 自時厥後 儒風蔚興 我國文章
至有伯仲於中國 中國之人稱之以小中華 或謂之君子之國 我東方興學之效 此其權輿也
麗氏以來 國學變爲鄕學 而學宮之基 則仍舊焉 即7今之鄕校 其地也 國朝二百年 培養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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植之極其道 此地鍾秀 而至有陞祀於兩廡此則天運循環 無往不復之理也 不幸壬辰之變
蕩然灰燼 鞠爲茂草者八年 萬曆庚子歲 府尹李相公時發 來莅7于玆 遂即7重新聖廟于舊址
且率諸生以小學之敎 爾後十有五年甲寅 東岳李相公安訥 尹玆東土 仍建彛倫堂于聖廟
之後 亦仍舊制也 數月之間 輪焉奐焉 而文翁之風丕變焉 前後二相公 衞'道興學之功 於
是爲大 而迄7未有記其年月 以傳諸後者 人或以爲缺歎於斯矣 就以植物之人所共見者言
之 學宮之傍 舊無松栢之樹 往在重新聖廟之翌年辛丑春 密城孫公起陽 領敎事于玆 率
諸生取松于南山之雨 移種於前門之前後墻之後者 凡若干株 於今五十有餘年 拱把而欲
叅7天 顧以樹在墻後 人以未得日對歲寒之姿爲歉'焉 今年春 遂用役夫運石而砌7之前爲三
尺之階 闢地而築之 後有數仞'之墻 恢恢然作一松壇 自玆以往 凡入于儒宮者 可以講道
於斯 可以習禮於斯 可以游詠於斯 不特此也 潛心於對經之時 則如承面命之辭 側聽於
風來之日 則怳'聞琴瑟之響 後生之興起於斯者 爲無窮矣 然則 此一松壇 將與闕里之杏
壇 垂之於悠久 而且當與天壤俱弊矣 此其可以傳也 於是乎 書以識哉 用諗于吾黨之君
子云
<만귀정기(萬歸亭記)> 시(詩)까지 사부 정극후(鄭克後)가 지은 것이다. 기문은 다
음과 같다.
객이 오천자(烏川子)에게 이르기를,
“그대가 일찍이 아산(牙山)의 장로정(蔣老亭)을 명명하여 ‘만귀(萬歸)’라고 하였는
데, 만귀라는 뜻을 어떻게 얻게 되었는가? 거기에 대한 설이 있는가”
하니, 오천자가 대답하기를,
“그대는 천하의 이치를 아는가? 온 천하 사람들이 천자에게 조종(祖宗)하는 것은
천자가 만물의 으뜸이기 때문에 만방(萬方)이 천자에게 귀의하는 것이며, 사방의 강
물이 동해로 흐르는 것은 동해가 모든 물의 목적지이기 때문에 모든 물줄기가 동해
로 귀의하는 것이다. 어찌 중국(中國)에서만 그렇겠는가? 우리나라도 마찬가지 경우
가 있다. 동방의 만백성들이 한양(漢陽)에 조종하는 것은 한양이 만세(萬世)의 서울
이기 때문에 만백성이 한양으로 귀의하는 것이며, 진한(辰韓)의 강물 또한 동해로
흐르는 것은 동해가 모든 물이 모이는 곳이기 때문에 모든 물줄기가 동해로 귀의하
는 것이다. 땅은 크고 작은 차이가 있으나 그 이치로 말하면 같다. 그러나 저 멀리
있는 것으로 이름을 붙일 수가 없기에, 지금 우선 적이 만 가지가 모여 하나로 돌
아간다는 뜻을 취하여 내 이 정자에 이름을 붙였는데, 괜찮은가? 게다가 강의 이름
또한 ‘형강(兄江)’이니, 이 강이 여러 물의 우두머리요 경주에서 으뜸임을 알 수 있
을 것이다. 경주의 수 백리 안을 돌며 조그만 냇물도 가리지를 않으므로 모두 이
강으로 귀의한다. 돌아가는 곳의 근원이 흐르고 흘러 밤낮을 쉬지 않는 것이 어찌
만경(萬頃)의 물결에만 그칠 뿐이겠는가. 그렇다면 ‘만귀(萬歸)’라는 이름은 역시 그
큰 수를 든 것이다.”
하였다. 객이 말하기를,
“만귀란 뜻은 여기에만 그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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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니, 오천자가 말하기를,
“천하의 이치는 끝이 없다. 마치 달빛이 모든 강에 비추지만 그 비추는 빛은 하
나일 뿐인 것과 같으니, 이는 근본은 하나이지만 만 가지로 달라지는 것이다. 이제
‘만귀정(萬歸亭)’은 하나이지만, 만귀란 뜻은 그 가짓수가 또한 많으니, 내 우선 그
줄거리를 대략 들어 보겠다. 천지가 열린 뒤로 또 몇 천년이 지났지만 한 사람도
여기에 건물을 지은 자가 없었다. 이제 주인이 처음으로 이곳을 경영하여 정자를
세웠으니, 이는 만년(萬年)이 귀숙(歸宿)하는 바이다. 사계절이 바뀔 때마다 무성하
고 시드는 것이 한결같지 않아서 온갖 경치가 눈앞에 펼쳐지니, 이는 만상(萬象)이
귀중(歸重)하는 바이다. 우뚝 솟은 정자가 강가에 임하여 귀로 듣고 눈으로 보는
자, 등을 구부리고 앞을 지나는 자들이 모두 ‘아름답다! 정자여! 하늘이 만들고 땅
이 간수하였다가, 때를 기다려 사람에게 남겨준 것인가’라고 칭송하니, 이는 만인
(萬人)이 귀미(歸美)하는 바이다. 또 사람이 태어날 때는 모두 3만6천 일을 한 시기
로 하는데, 이제 나나 주인이 얻은 나이는 이미 2만여 일을 지났으니, 지금으로부
터 또 1만 일을 누리고 돌아갈 것이니, 이 또한 족하다.”
하였다. 이에 주인이 술을 들어 객에게 권하며 한 잔, 한 잔, 1백 잔, 3백 잔을
하여 1만 잔으로 돌아갈 것을 기약하였다. 이어 이 사실을 기문으로 지어주기를 부
탁하였다. 시는 다음과 같다.
동남쪽의 만 골짝이 형강으로 달려가니 東南萬壑赴兄江
천 년의 빼어난 기운 이 나라를 돕는구나 淑氣千年蔭此邦
몰래 사람을 기다려 뛰어난 경치를 남겨두니 慳7秘待人留勝境
땅을 넓혀 경영하여 맑은 창을 내었도다 經營拓地啓晴窓
차가운 못의 빼어난 빛깔은 푸른 하늘과 하나요 寒潭秀色靑天一
모래톱에 한가히 나는 백조는 쌍쌍이로다 沙渚閑飛白鳥雙
그 속의 무궁한 뜻을 묘사하고 싶건만 欲寫箇中無盡意
노년이라 어떻게 깃대 같은 필력을 얻겠는가 老來安得筆如杠'
【정극후는 오천(烏川)에서 태어났으므로 ‘오천자(烏川子)’라 자호하였다.】
<萬歸亭記> 幷詩 師傅鄭克後所著 記曰 客謂烏川子曰 子嘗名牙山蔣老之亭曰萬歸
萬歸之義何居 其有說乎 烏川子曰 客亦知夫天下之理乎 四海之內 朝宗于天子 則天子
爲萬物之首 而萬方歸焉 四瀆之水 朝宗于東海 則東海爲衆流之委而萬派歸焉 豈惟中國
爲然 東亦有之 左海之內 朝宗于漢陽 則漢陽爲萬世之都而萬民歸焉 辰韓之水 亦朝宗
于東海 則東海爲衆流之聚而萬水歸焉 地有大小 其理則同 而彼其遠者 則不可得以名焉
今且竊取會萬歸一之義 吾以名斯亭可乎 況江以兄名 江之爲衆流之長 而甲於東都可知
矣 環東都數百里之內 不擇細流 而咸以是江爲歸焉 所歸之源 涓涓浩浩 而不舎晝夜者
豈止於萬頃波而已 然則萬歸之名 亦擧其大數焉 客曰 萬歸之義 其止於此乎 烏川子曰
天下之理爲無窮 如月落萬川 而其必照之光一而已 是則一本而萬殊也 今玆萬歸之亭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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也 而萬歸之義 則其端亦多 吾且略擧其槩蓋自開闢以來 又經幾千年 而無一人結構於
斯地 而今主人乃始經營於此 而亭之 此則萬年之所歸宿也 四時代序 敷榮衰謝之不一
而萬景森羅於目前 此則萬象之所歸重也 有亭翼然臨乎江上 耳者目者 傴7僂'而過于前者
咸稱曰 美哉亭乎 夫天作而地藏之 待時而以遺人乎 此則萬人之所歸美也 且人之生也俱
以三萬六千日爲期焉 今吾與主人所得之年 已經二萬有餘日矣 自玆以往 又享萬日而歸
焉 則斯亦足矣 於是 主人擧酒屬客一盃一盃百盃三百盃 期以萬盃而歸焉 因以請書以爲
記 詩曰 東南萬壑赴兄江 淑氣千年蔭此邦 慳7秘待人留勝境 經營拓地啓晴窓 寒潭秀色
靑天一 沙渚閑飛白鳥雙 欲寫箇中無盡意 老來安得筆如杠7【鄭系出烏川故自號烏川子】
이문(異聞)
<세초제천(細綃'祭天)> 아달라왕(阿達羅王) 4년(158)에 동해 바닷가에 연오랑(延
烏郞)과 세오녀(細烏女)라는 부부가 함께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연오랑이 바닷가에
서 마름을 따고 있을 때 갑자기 한 바위가 【혹 한 물고기라고도 한다.】 나타나
그를 등에 태우고 일본(日本)으로 가버렸다. 그 나라 사람들이 그를 보고 보통 사람
이 아니라 하여 곧 그를 왕으로 세웠다. 한편 세오녀는 남편이 돌아오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고 찾아보니 남편이 벗어놓은 신이 있어 그 바위에 올라가니 그 바위
는 그전과 같이 세오녀를 태우고 가버렸다. 그 나라 사람들은 놀랍고도 의아해서
왕에게 말씀을 올리고 부부가 서로 만나게 되었고, 세오녀는 귀비(貴妃)가 되었다.
이때 신라에서는 해와 달에 빛이 없어졌다. 일관(日官)이 해와 달의 정(精)이 지금
일본에 있기 때문에 이러한 괴변이 생기게 된 것이라고 상주하니, 임금은 사자를
보내어 두 사람을 찾아오도록 하였다. 연오랑이 말하기를 “내가 이곳에 오게 된 것
은 하늘이 그렇게 시킨 것이니, 이제 어떻게 돌아가겠습니까? 비록 그렇기는 하지
만 짐의 귀비가 손수 짠 가는 베가 있으니, 이것으로써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 좋을
것입니다.” 하고, 그 베를 내려 주었다. 사자(使者)가 돌아와서 아뢰고 그가 말한 대
로 제사를 지낸 후에야 해와 달이 그전과 같이 되었다. 그 베를 임금의 금고에 잘
넣고 그 금고를 ‘귀비고(貴妃庫)’라 하고, 하늘에 제사지내는 곳을 ‘영일현(迎日縣)’
이라 하였다.
<지기삼사(知幾三事)> 선덕여왕(善德女王) 때 당태종(唐太宗)이 세 가지 색깔의
모란을 그린 그림과 아울러 그 씨앗 석 되를 보냈는데, 여왕은 그 그림 속의 꽃을
보고 “이 꽃에는 틀림없이 향기가 없을 것이다.” 하고는 뜰에 그 씨를 심게 명하였
는데, 그것이 피고 지는 것을 기다려 보니 과연 그 말과 같았다. 또 영묘사(靈妙寺)
옥문지(玉門池)에서 한겨울에 개구리들이 모여들어 사나흘 동안을 울어 나라 사람
들이 괴상하게 여기고 여왕에게 아뢰었는데, 여왕은 급히 각간(角干) 알천(閼川) 등
에게 명하기를 정병(精兵)을 거느리고 속히 서교(西郊)로 가서 여근곡(女根谷)을 물
으면 반드시 적병(賊兵)이 있을 것이니 습격하여 죽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알천이
명을 받은 뒤 서교에서 물으니 부산(富山) 아래에 과연 여근곡이 있었는데 백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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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가 와서 매복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을 모두 죽였다. 여러 신하들이 여왕에게 아
뢰기를 “어떻게 아셨습니까” 하니 여왕이 말하기를 “꽃을 그렸는데 나비가 없기에
향기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는 바로 당나라 황제가 과인에게 짝이 없음을 놀린
것이다. 또 개구리가 노한 것은 전쟁의 상징이요 옥문은 여근(女根)인데, 계집은 음
(陰)으로써 그 빛깔은 희고 흰빛은 서쪽이므로 군대가 서쪽에 있을 것을 알았으며,
남근(男根)이 여근에 들어오면 반드시 죽는 법, 이것으로써 그들이 쉽게 패할 것을
알았다.” 하였다. 여왕이 평소에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짐은 아무 해 아무 달
아무 날에 죽을 것이니, 나를 도리천(忉7利天)에 장사지내라.” 하였는데, 신하들이 그
곳을 몰라서 “어디입니까” 하니, 여왕이 “낭산(狼山)의 남쪽이다.” 하였다. 그달 그
날이 되어 과연 돌아가셨으므로 낭산의 양지바른 곳에 장사지내었다. 그 후 문무왕
(文武王)이 여왕의 분묘 아래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창건하였는데, 천왕(天王)은
곧 불경(佛經)에서 말하는 ‘도리천’이다. 이것이 바로 세 가지 일의 기틀을 알았다는
것이니, 여러 신하들이 모두 그 거룩한 지혜에 감복하였다.
【이상은 동사보유(東史補遺) 에 나온다.】
<입산서천(入山誓天)> 김유신(金庾信)은 고구려ㆍ백제ㆍ말갈이 번갈아 국토를 침
략하는 것을 보고 개연히 평정할 뜻이 있었다. 그리하여 홀로 중악(中嶽)의 석굴 속
에 들어가 재계(齋戒)하고 하늘에 고하여 맹세하기를, “적국이 무도(無道)하여 우리
땅을 침략하여 어지럽히니, 한 보잘 것 없는 신하로서 재주와 힘을 헤아리지 않고
화란을 없애기로 결심하였으니, 하늘은 굽어 살펴 저에게 손을 빌려주소서.” 하였는
데, 갑자기 갈옷을 입은 한 노인이 와서 “이곳은 독충과 맹수가 많은데, 귀한 젊은
이가 이곳에 와서 홀로 있으니 무엇 때문인가” 하였다. 이에 유신이 재배(再拜)한
다음, 방술(方術)을 가르쳐 줄 것을 간절히 청하니, 노인은 마침내 비결(祕'訣)을 가
르쳐 주면서 “삼가 함부로 전수하지 말라. 의롭지 못한 데 쓰면 도리어 앙화를 받
을 것이다.” 하고는, 말이 끝나자 보이지 않게 되었다. 유신이 일찍이 보검을 가지
고 인박산(咽薄山)에 들어가 향을 피우고 하늘에 고하는데 밤에 허성(虛星)과 각성
(角星) 두 별이 나타나 그 빛줄기가 아래로 드리워져 보검이 마치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 동국통감(東國通鑑) 에 나온다.】
<사작백소(賜爵栢蘇)> 효성왕(孝成王)이 왕자로 있을 때, 일찍이 신충(信忠)과 더
불어 잣나무 아래에서 바둑을 두면서 말하기를, “훗날 내가 그대를 잊지 않을 것이
니, 그대 또한 곧은 절조를 변치 않아야 한다. 만약 어기는 사람이 있다면 이 잣나
무처럼 될 것이다.” 하였다. 왕이 즉위한 뒤 공신(功臣)을 기록할 때 신충을 빠뜨렸
는데, 신충이 노래를 지어 잣나무에 붙이니, 잣나무가 갑자기 말라버렸다. 왕이 괴
이하게 여기고 그것을 살피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노래가 있는 것을 알자 크게 놀
라면서 “각궁(角弓)을 잊을 뻔하였구나.” 하고, 신충을 불러 관작을 내리니, 잣나무
도 곧 되살아났다.
<처용가무(處容歌舞)> 헌강왕(憲康王)이 학성(鶴城)【지금의 울산(蔚山)이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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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 놀 때,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깜깜하게 끼는 바람에 헤매다가 길을 잃어버렸
다. 괴상하게 생각하고 좌우의 신하들에게 물으니 일관(日官)이 아뢰기를, “이것은
동해의 용이 일으킨 괴변이니, 응당 좋은 일을 행하여 그것을 풀어야 합니다.” 하였
다. 이에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용을 위해서 절을 짓도록 하라는 명령을 내린 뒤
구름과 안개가 걷혔으므로, ‘개운포(開雲浦)’라고 이름을 붙이니, 용이 기뻐하여 곧
자식 일곱을 거느리고 수레 앞에 나타나 덕을 찬양하고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그
가운데 한 아들이 수레를 따라 서울에 들어왔는데, 이름을 ‘처용(處容)’이라 하였다.
왕은 돌아온 뒤에 곧 영취산(靈鷲山) 동쪽 기슭의 좋은 땅에다가 절을 짓고 ‘망해사
(望海寺)’라고 하였는데, 용을 위해서 지은 것이다.
<어무상심(御舞祥審)> 헌강왕(憲康王)이 포석정(鮑石亭)에 갔을 때, 산신(山神)이
나타나 임금 앞에서 춤을 추었는데, 좌우의 신하들은 보지 못하였고 왕만 홀로 이
를 보았다. 왕이 스스로 춤을 추며 흉내 내어 보여주었다. 산신의 이름을 혹 ‘상심
(祥審)’이라고도 하기 때문에 나라 사람들이 이 춤을 전파하여 ‘어무상심(御舞祥審)’
이라고 한다. 어떤 사람은 “산신이 이미 나타나서 춤을 출 때 그 모습을 살펴 본떠
서 공장(工匠)에게 명하여 모각(模刻)하여 후인들에게 보여주었기 때문에 ‘상심’이라
한다.”라고 하기도 한다.
<도파가(都波歌)> 헌강왕(憲康王)이 금강령(金剛嶺)에 행행(行幸)하였을 때, 북악
신(北岳神)이 나타나 춤을 추었는데 이름이 ‘옥도령(玉刀鈴)’이었으며, 또 동례전(同
禮殿)에서 연회할 때, 지신(地神)이 나타나 춤을 추었는데 이름을 ‘지백우(地伯于)’
라 하였다. 그때 산신이 춤을 바치고 노래를 부르며 “지리다도파(智理多都波)”라 하
였는데, ‘도파(都波)’란 지혜로운 이치로 나라를 다스리는 자들이 미리 알고 대부분
도망하여 도읍이 장차 파한다는 것을 뜻한다. 지신과 산신은 나라가 장차 망하리라
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춤을 만들어 그것을 경계하였으나, 나라 사람들이 깨
닫지 못한 채 상서로운 징조라고 여긴 나머지 탐락(耽樂)을 더욱 극심하게 하여 나
라가 망하기에 이른 것이다.
<선풍기총(旋風起塚)> 대력(大曆) 14년(779) 혜공왕(惠恭王) 때, 갑자기 김유신
(金庾信)의 무덤에서 회오리바람이 일어났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있었는데 장군의
모양새와 같았으며, 또한 갑옷을 입고 무장을 한 자들이 40여 명이 있어 따라오더
니 죽현릉(竹現陵)으로 들어갔다. 얼마 후 능속에서 진동하고 곡읍(哭泣)하는 소리
가 나는 듯하였다. 혹 하소연하는 소리인 것 같기도 하였는데, 그가 말하기를, “신
에게는 평생 동안 세상을 돕고 난을 구제하여 통일을 시킨 공로가 있으며, 이제 혼
백(魂魄)이 되어서도 나라를 진호(鎭護)하며 재앙을 없애고 환란을 구제하는 마음이
잠시도 변함이 없는데, 경술년(庚戌年)에 신의 자손이 죄도 없이 죽음을 당하였습니
다. 임금과 신하들이 공렬(功烈)을 생각하지 않으니, 신은 멀리 다른 곳으로 옮겨가
서 다시는 수고롭게 힘쓰지 않고자 합니다. 대왕께서는 윤허하여 주옵소서.” 하니,
왕이 답하기를, “나와 공(公)이 이 나라를 수호하지 않으면 백성들을 어떻게 하겠는
가. 공은 다시 예전처럼 힘쓰라.” 하였다. 세 번을 청하였으나, 세 번 모두 허락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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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자, 회오리바람이 곧 돌아갔다. 혜공왕이 이를 듣고 두려워하여 곧 김경신(金敬
信)을 보내어 그 무덤에 나아가 사과하도록 하고, 공을 위하여 취선사(鷲仙寺)에다
가 보전(寶田)을 설치하였다.
<몽성입회(夢星入懷)> 원효(元曉)는 속성(俗姓)이 설씨(薛氏)였다. 어머니가 유성
(流星)이 품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임신을 하게 되었는데, 출산하려 할 때 오색
구름이 땅을 덮었다. 태어나면서부터 남달리 빼어나 배울 때에도 스승을 따르지 않
았다. 그가 사방을 노닐던 시말(始末)과 도를 넓히던 큰 자취는 당전(唐傳) 과 행
장(行狀)에 자세히 실려 있다. 원효대사가 하루는 춘정(春情)이 동하여 길에서 노래
를 불렀는데, 태종(太宗)이 그 소리를 듣고 대사를 요석궁(瑤石宮)으로 끌고 왔다.
그리하여 임신을 하여 설총(薛聰)을 낳게 되었다. 원효는 파계(破戒)하고 설총을 낳
은 뒤 속복(俗服)으로 바꿔 입고 스스로 ‘소성거사(小性居士)’라 불렀다. 우연히 큰
박을 가지고 춤추면서 노는 광대를 보았는데, 그 모양이 희한하고 기이하여 그 모
습대로 도구(道具)를 만들고는 화엄경(華嚴經) 의 ‘모든 무애인(無㝵'人)은 한결같이
생사를 벗어났다.’이란 구절을 가지고 ‘무애(無㝵7)’라고 이름을 붙였다. 이어 노래를
지어 세상에 퍼뜨리니, 방방곡곡이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일찍이 분황사(芬皇寺)에
머물며 삼매경(三昧經) 을 지을 때, 붓과 벼루를 소의 두 뿔 위에 놓았으므로 그것
을 ‘각승(角乘)’이라고 하였다. 입적(入寂)하자 설총은 유해를 빻아 소상(塑像)을 만
들어 분황사에 안치하고, 공경하고 사모하며 종천(終天)308)의 뜻을 나타내었다. 설
총이 그때 곁에서 예(禮)를 하였는데 소상이 문득 돌아보아 지금까지도 여전히 고
개를 돌린 채로 있다. 찬(讚)은 다음과 같다.
각승이 처음 삼매경을 여니 角乘初開三昧軸
춤추는 호로병 거리마다 걸렸도다 舞壺終掛萬街風
달 밝은 요석궁에서 봄잠 이루고 떠나니 月明瑤石春眠去
문 닫힌 분황사에 돌아보는 그림자 쓸쓸하여라 門掩芬皇顧影空
【 삼국유사(三國遺事) 에 나온다.】
<細綃7祭天> 阿達羅王四年 東海濱有延烏郞309)細烏女夫婦同居 一日延烏採藻海邊
忽有一巖 【一云一魚】負歸日本 國人見之曰 此非常人也 乃立爲王 細烏怪夫不來 尋
之 見夫脫鞋 亦上其巖 巖負歸如前 其國人驚訝 奏獻於王 夫婦相會 立爲貴妃 是時新
羅日月無光 日者奏日月之精 今在日本 故致斯怪 王遣使求二人 延烏曰 我到此地 天使
然也 今何歸乎 雖然朕之妃 有所織細綃以此祭天 可矣 仍賜其綃使者來奏 依其言而
祭之 然後日月如舊 藏其綃7於御庫 名其庫爲貴妃庫 名祭天所 爲迎日縣 ○<知幾三事>
善德女王310)時 唐太宗送畵牡丹三色 並'其實三升 王見畵花曰 此花定無香 仍命種於庭
308) 종천(終天)은 종신(終身)과 같은 말로 돌아가신 부모에 대한 슬픔을 이른다.
309) 중간본에는 迎烏郞으로 되어 있으나 삼국유사(三國遺事) 권1 「'기이편(紀異篇)」7에 延烏郞으로 나와
있다.
310) 중간본에는 善德女主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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待其開落 果如其言 又靈妙寺玉門池 冬月衆蛙集鳴三四日 國人怪之 聞於王 王急命角
干閼川等 率精兵 速去西郊 問女根谷 必有賊兵 掩殺之 閼川旣受命 問西郊 富山下果
有女根谷 百濟兵來伏 並7殺之 群臣啓王曰 何以知之 主曰 畵花而無蝶 知其無香 斯乃
唐帝譏寡人之無偶也 蛙有怒形 兵像也 玉門者女根也 女爲陰也 其色白 白西方也 故知
兵在西方 男根入於女根 則必死 以是知其易敗 王無恙時 謂群臣曰 朕死於某年某月日
葬我於㣼7利天 群臣罔知其處 奏云何所 主曰 狼山南也 至其月日果薨 葬於狼山之陽 後
文武王 倉四天王寺於王墳下 天王即7佛經所謂㣼'利天也 此乃知幾三事也 群臣皆服其聖
智【以上出東史補遺】○<入山誓天> 金庾信見麗濟靺鞨侵軼'國疆 慨然有削平之志 獨
入中嶽石窟 齋戒告天 誓之曰 敵國無道 侵擾我封場 一介微臣 不量材力 志淸禍亂 惟
天降監 假手於我 無何 有一老人被褐而來曰 此間多毒蟲猛獸 貴少年爰來獨處 何也 庾
信再拜 懇請授方術 老人遂授秘訣曰 愼勿妄傳 用之不義 反受其殃 言訖不見 庾信嘗携
寶劍 入咽薄山 燒香告天 夜有虛角二星 光鋩下垂 劍若動搖然【出東國通鑑】○<賜爵
栢蘇> 孝成王在潛邸 嘗與信忠 圍棊7栢樹下 謂曰 他日我不忘汝 汝亦不改貞操 有所負
者 有如此栢 王即'位 錄功臣而遺信忠 信忠作歌 帖栢樹 樹忽枯 王怪使審之 得歌大驚
曰 幾忘乎角弓矣 召賜爵 栢乃蘇 ○<處容歌舞> 憲康王出遊鶴城【今蔚山】忽雲霧冥
曀迷失道 怪問左右 日官奏云 此東海龍所變也 宜行勝事以解之 於是勅有司 爲龍創佛
寺 施令已出 雲開霧散 因名開雲浦 龍喜乃率七子 現於駕前 讚德歌舞 其一子隨駕入京
名曰處容 王旣還 乃卜靈鷲山東麓勝地置寺 曰望海寺 爲龍而置也 ○<御舞祥審> 憲康
王幸鮑石亭 山神現舞於御前 左右不見 王獨見之 王自作舞 以像示之 神之名 或曰 祥
審 故國人傳此舞曰御舞祥審 或云 神旣出舞 審像其貌 命工模刻 以示後 故曰像審 ○
<都波歌> 憲康王辛金剛嶺 北岳神呈舞 名玉刀鈴 又曰 同禮殿宴時 地神出舞 名地伯
于 時山神獻舞唱歌云 智理多都波 都波者 蓋言以智理爲國者 知而多逃 都邑將破云也
地神山神知國將亡 故作舞以警之 而國人不悟 謂爲現瑞 耽樂滋甚 以至於亡 ○<旋風起
塚> 大曆十四年惠恭時 忽有旋風從庾信塚起 中有一人 如將軍儀狀 亦有衣甲器仗者四
十許人 隨來入於竹現陵 俄而陵中 似有振動哭泣聲 或如告訴之音 其言曰 臣平生有輔
時救亂匡合之功 今爲魂魄 鎭護邦國禳災救患之心 暫無渝'改 庚戌年 臣之子孫無罪被誅
君臣不念功烈 臣欲遠移他所 不復勞勤 願大王允之 王答曰 惟我與公不護此邦 其如民
庶何 公復努力如前 三請三不許 旋風乃還 王聞之 懼乃遣金敬信 就其墓 謝過焉 爲公
置寶田于鷲仙寺 ○<夢星入懷> 元曉俗姓薛 母夢流星入懷 因而有娠 及將産有五色雲
覆地 生而穎異 學不從師 其遊方始末 弘道茂跡 具載唐傳與行狀 師一日風顚唱街 太宗
聞之 引師於瑤石宮 因有娠 生薛聰 曉旣失戒 生聰已後 易俗服 自號小性居士 偶得優
人舞弄大瓠 其狀瑰'奇 因其形 製爲道具 以華嚴經一切無㝵'人 一道出生死 名曰無㝵仍
作歌流于世 千村萬落 且歌且舞 曾住芬皇寺 撰三昧經 置筆硯於牛之兩角上 因謂之角
乘 旣入寂 聰碎遺骸 塑眞容 安芬皇寺 以表敬慕終天之志 聰時旁禮像忽顧 至今猶顧矣
讚曰 角乘初開三昧軸 舞壺終掛萬街風 月明瑤石春眠去 門掩芬皇顧影空 【出三國遺
事311)】
311) 삼국유사(三國遺事) 권4 「'의해편(義解篇)」원효불기(元曉不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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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로가무(葫蘆歌舞)> 옛날에 원효대사(元曉大師)는 백정이나 술장수들과 뒤섞여
지냈다. 일찍이 목이 굽은 호롱박을 어루만지며 시장에서 노래하고 춤추면서 그것
을 ‘무애(無㝵7)’라고 이름 붙였다. 그 뒤 일을 만들기를 좋아하는 자들이 위에다 금
방울을 달고 아래에다 채색 비단을 드리워서 장식으로 하여 두드리며 앞으로 나갔
다가 뒤로 물러갔다 하였는데, 모두 음절(音節)에 맞았으며, 마침내 경론(經論)의 게
송(偈頌)을 뽑아내어 ‘무애가(無㝵'歌)’라고 불렀는데, 밭을 가는 늙은이들까지도 그
것을 흉내 내어 유희로 삼았다. 무애지국(無㝵7智國)이 일찍이 제(題)하기를, “이 물
건은 오래도록 무용(無用)으로 사용했으나, 옛사람들은 도리어 불명(不名)으로 이름
하였네.” 하였으며, 근래에는 산인(山人) 관휴(貫休)가 게(偈)를 지은 것이 있는데,
“두 소매를 휘두르는 것은 이장312)을 끊은 까닭이요, 세 번 발을 드는 것은 삼
계313)를 건넌 까닭이다.” 하였는데, 이는 모두 진리를 가지고 비유한 것이다. 나도
또한 그 춤을 보고 찬을 지었는데, 다음과 같다.
배는 가을 매미 같고 腹若秋蟬
목은 여름 자라 같도다 頸如夏鼈
그 굽은 것은 사람을 따를 수 있고 其曲可以從人
그 빈 것은 물건을 받아들일 수 있네 其虛可以容物
밀석에 막힘을 당하지 않고 不見窒於密石
규호에 비웃음을 받지 않을 것이로다 勿見笑於葵壺
한상314)은 이것으로 세상에 숨었고 韓湘以之藏世界
장수315)는 이것으로 강호로 배를 띄웠네 莊叟'以之泛江湖
누가 이를 위해 소성거사라 이름을 지었는가 孰爲之名小性居士
누가 이를 위해 농서타리316)라 찬하였는가 孰爲之讚隴'西駝李
【 파한집(破閑集) 에 나온다.】
<이인상양(二人相讓)> 유례왕(儒禮王)이 인관(仁觀)과 서조(署調) 두 사람에게 벼
312) 이장(二障)은 불교에서 이른바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을 가리킨다. 모든 번뇌는 도(道)에
장애가 된다는 것이 번뇌장이고, 지식 또한 도에 장애가 된다는 것이 소지장이다.
313) 삼계(三界)는 불교에서 이른바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를 가리킨다.
314) 한상(韓湘)은 당(唐) 나라 한유(韓愈)의 조카로 신선술을 배워 팔선(八仙)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
가 일찍이 한유에게 “잠시 사이에 술을 만들 줄 알고 삽시간에 꽃을 피울 수 있다네(解造逡巡酒 能開頃
刻花).”라는 시구를 지어 보였는데, 한유가 이단이라고 배척하자 한상이 곧 작은 호리병의 술로 온 좌중
을 마시게 하였고, 화로에 연(蓮)을 심어서 삽시간에 꽃을 피우게 하였는 바, 이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315) 장수(莊叟 장자(莊子)를 가리킨다. 혜자(惠子)가 장자에게 말하기를 “나는 큰 박의 씨를 심어 다섯
섬들이나 되는 큰 박이 열렸는데 너무 커서 쓸모가 없으므로 부수어 버렸다.” 하니, 장자가 “왜 그것으
로 배를 삼아 강호(江湖)에 노닐 줄을 모르는가” 하였다. 장자(莊子) 「7소요유(逍遙遊)」'
316) 후위(後魏) 때 농서((隴7西)에 사는 이씨(李氏)가 대표적인 귀족 사성(四姓) 속에 끼지 못할까 걱정하여
잘 달리는 낙타를 타고 밤을 새워 서울에 들어갔으나 이미 정해진 뒤였다. 그리하여 이 사람을 타리(駝
李)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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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을 내렸다. 이전에 인관이 시장에서 솜을 팔아 서조가 곡식으로 솜을 사서 돌아
가는데, 갑자기 솔개가 나타나서 솜을 채 가지고 인관의 집에 떨어뜨렸다. 인관이
사장으로 되돌아가 서조에게 말하기를 “솔개가 당신의 솜을 우리 집에다 떨어뜨리
고 갔는데, 이제 당신에게 돌려드리겠습니다.” 하니, 서조가 “솔개가 채 가지고 당
신에게 준 것은 하늘이 한 일이니, 제가 어떻게 받겠습니까” 하였다. 인관이 “그렇
다면 당신에게 곡식을 돌려드리겠습니다.” 하니, 서조가 “제가 당신과 사고 판 지가
이미 3일이 지났으니, 곡식은 이미 당신 것이므로 받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그
리하여 두 사람이 서로 사양하다가 모두 시장에다 버리고 돌아가 버렸다. 시장을
관장하는 관리가 왕에게 아뢰자, 왕은 모두에게 벼슬을 하사하였다.
<삼룡변어(三龍變魚)> 원성왕(元聖王) 11년(795)에 당나라 사신이 서울에 와서
한 달 동안 묵고 돌아갔다. 그 후 어느 날 두 여자가 궁 안의 뜰에 들어와 아뢰기
를 “첩들은 곧 동지(東池)와 청지(靑池)에 사는 두 용의 아내입니다. 당나라 사신이
하서(河西) 사람 둘을 데리고 와서 저희들의 남편인 두 용과 분황사 우물에 사는
용을 저주하여 작은 물고기로 둔갑시켜 대통 속에 넣어가지고 돌아가 버렸습니다.
폐하께서는 두 사람에게 명하시어 저희들의 남편을 두고 가도록 하소서, 저희들은
바로 호국(護國)의 용입니다.” 하였다. 이에 왕은 하양관(河陽館)까지 좇아가서 친히
향연을 베풀어 주고 하서 사람들에게 칙명하기를, “너희들은 무엇 때문에 우리나라
의 용 세 마리를 가지고 여기까지 왔는가? 만약 사실대로 말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극형을 가할 것이다.” 하였다. 이에 세 마리의 물고기를 꺼내서 바치므로 세 곳에다
놓아두게 하였는데 제각기 물 위로 한 길이나 솟으며 기뻐 뛰다가 가버리니, 당나
라 사람들이 왕의 거룩하고 현명함에 탄복하였다.
<논호수(論虎藪)> 신라 풍속에 2월 초파일부터 15일까지 도성의 남녀들이 흥륜
사(興輪寺)의 전탑(殿塔)을 다투어 도는 ‘복회(福回)’를 행하였다. 원성왕(元聖王) 때
낭군(郎君) 김현(金現)이라는 자가 한밤중에 홀로 탑을 돌았는데, 한 처녀가 염불을
하며 따라 돌다가 서로 눈이 맞았다. 돌기가 끝나자 으슥한 곳으로 들어가 통정(通
情)을 하였는데, 여자가 돌아가려 할 때 김현이 따라가자 여자가 거절하였으나 억지
로 따라갔다. 그리하여 서산(西山)의 기슭에 이르러 한 초가집으로 들어갔는데, 한
노파가 나타나서 묻기를 “따라온 사람은 누구냐” 하니, 여자가 그 사정을 이야기
하였다. 노파가 말하기를 “비록 좋은 일이지만, 네 형제가 나쁜 짓을 할까 두렵다.”
하며, 낭군을 데려다가 숨겨두었다. 얼마 후 세 마리의 호랑이가 으르렁거리며 나타
나더니 인간의 말을 하며 “집안에 비린내가 나니, 허기를 채우는 데 얼마나 다행한
가.” 하였다. 노파와 여자가 꾸짖기를 “너희들의 코가 비상하구나! 무슨 미친 소리
를 하느냐” 하였다. 이때 하늘에서 “너희들은 목숨을 해치기를 좋아하니, 마땅히
한 놈을 죽여 응징해야겠다!” 하고 외치니, 세 마리 호랑이가 이 말을 듣고는 모두
걱정스러운 기색을 나타내었다. 여자가 말하기를 “세 오빠가 만약 멀리 달아날 수
만 있다면 내가 그 벌을 대신 받겠습니다.” 하자, 모두 기뻐하면서 달아나 버렸다.
여자는 들어가 낭군에게 말하기를 “천한 계집이 낭군에 대해서 비록 동류(同類)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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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면서도 하룻밤의 기쁨을 함께 하였으니, 의리로 본다면 부부의 의를 맺은 것이
나 다름이 없습니다. 세 오빠의 죄악은 하늘도 이미 미워하므로 한 집안의 재앙을
제가 떠맡으려고 합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의 손에 죽기보다는 차라리 낭군의 칼날
에 쓰러져 은덕을 갚는 것이 도리어 낫겠습니다. 첩이 내일 시장에 들어가 해악을
끼치면 나라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왕은 반드
시 중한 벼슬로 사람을 모집하여 나를 잡으려고 할 것입니다. 당신은 겁을 내지 마
시고 성의 북쪽에 있는 수풀 속까지 나를 추격하소서.” 하였다. 김현이 말하기를
“이류(異類)이면서도 짝을 맺은 것 자체가 보통 일이 아닌데, 어찌 차마 배우자의
죽음을 팔아서 한 세상의 작록(爵祿)을 바랄 수가 있겠소.” 하니, 여자가 “첩의 목
숨이 길고 짧은 것은 천명입니다. 또한 저의 소원이고 낭군의 경사이며, 제 집안의
복이고 나라 사람의 기쁨이기도 합니다. 한 목숨이 죽어서 다섯 가지의 이익이 갖
추어질 터인데 그것을 어길 수가 있겠습니까? 다만 첩을 위해서 절을 짓고 불경을
강하여 좀 더 나은 보답을 한다면 낭군의 은혜 더 없이 클 것입니다.” 하였다. 마침
내 서로 눈물을 흘리며 이별하였다. 이튿날 과연 사나운 호랑이가 성중에 들어왔는
데 몹시 표독하여 감히 상대하는 자가 없었다. 왕이 이것을 듣고 명을 내리기를
“호랑이를 죽이는 자에게 이급(二級)의 벼슬을 주겠다.” 하였다. 김현이 대궐로 나
아가 “소신이 하겠습니다.” 하자, 곧 먼저 벼슬을 하사하고 격려하였다. 김현이 짧
은 무기를 가지고 수풀 속으로 들어갔는데, 호랑이가 젊은 여자로 변신하고 환하게
웃으면서 말하기를 “어젯밤 낭군과 함께 즐겼던 일을 부디 당신께서는 소홀히 여기
지 마시옵소서. 오늘 내 발톱에 상처를 입은 사람은 모두 흥륜사의 간장을 상처에
바르고, 그 절의 나발 소리를 들으면 나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는, 마침내 김현
이 차고 있던 칼을 취하여 스스로 목을 찔러 쓰러졌는데, 바로 호랑이였다. 김현은
숲에서 나와 말하기를 “호랑이를 이미 처치하였다.” 하였다. 그 연유는 숨기고 누설
하지 않고, 단지 호랑이의 가르침대로 사람들을 치료하니, 상처가 모두 나았다. 오
늘날의 풍속에도 역시 그 처방을 이용한다. 김현은 등용된 후에 서천(西川)가에 절
을 짓고 호원사(虎願寺)라고 불렀으며, 늘 범망경(梵網經) 을 외며 호랑이의 명복
을 축원하였다. 그 숲을 ‘논호림(論虎林)’이라 부른다. 찬(讚)은 다음과 같다.
산 속 집 세 오빠의 죄악을 참지 못하니 山家不耐三兄惡
난향인들 어찌 꽃다운 허락만 하겠는가 蘭吐那堪一諾芳
깊은 의리 몇 가지이나 만 번 죽음 경시하여 義重數條輕萬死
숲 속에서 몸을 맡기매 황급히 꽃이 졌네 許身林下落花忙
【이상은 삼국유사 에 나온다.】
<배리(拜里)> 부의 남쪽 20리 떨어진 금오산(金鰲山) 기슭에 있다. 전설에 신라
시대의 민속은 다투어 불사(佛事)를 숭상하여 부모가 돌아가신 날에는 반드시 중을
청하여 밥을 대접하였다. 그러므로 당시 사람들은 기일(忌日)을 ‘승재(僧齋)’라고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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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었다. 한 늙은 정승이 그와 친한 중에게 말하기를 “내일은 우리 선친의 기일이니,
자네가 힘써 고승(高僧)을 찾아 모셔오게.” 하였다. 그 중이 과연 한 늙은 중을 데
리고 왔는데, 그를 살펴보니 고승 같지가 않았으므로 재상은 노하여 꾸짖기를, “네
가 어찌 고승일 수가 있느냐” 하였다. 그러자 노승이 노하여 일어나서 소매를 떨
치니, 새끼사자 한 마리가 소매 속에서 튀어 나왔는데 곧 그것을 타고 하늘로 올라
사라져 버렸다. 재상은 그제야 그 신묘한 것을 깨닫고 맨발로 좇아갔으나 그 중은
사라산(舍羅山)으로 날아 들어가 버렸다. 재상이 뉘우치고 종일토록 산 아래에서 바
라보며 절을 하였으므로, 그 아랫마을의 이름을 ‘배리(拜里)’라고 하였다.
금척원(金尺院) 부의 서쪽 25리 떨어진 곳에 있다. 전설에 신라의 왕이 황금으로
된 자[尺] 하나 얻었는데, 사람이 죽거나 병들었을 때 이 자를 가지고 그것을 재면
죽은 사람은 살아나고 병든 사람은 일어났으므로 나라의 보배가 되었다. 중국에서
이 소문을 듣고 사신을 보내어 그것을 요구했으나 신라의 왕은 그것을 주지 않으려
고 이곳에 숨기고 산을 30여 개나 만들어 그것을 비밀로 하였다. 이어 원사(院舍)
를 세웠기 때문에 ‘금척원’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혹은 신라의 시조(始祖)가
미천할 때 꿈에 신인(神人)이 하늘에서 내려와 황금자[金尺]를 그에게 주며 말하기
를 “너는 성스럽고 신령하며 문무(文武)에 뛰어나 백성들이 바라본 지가 오래되었
으니, 이 황금자를 가지고 금구(金甌를 바로 잡으라.” 하였는데, 꿈에서 깨니 황금
자가 손에 들려 있었다고 한다.
<작원(鵲院)> 부의 서쪽 30리 떨어진 곳에 있다. 전설에 김유신(金庾信)이 군대를
크게 일으켜 백제를 칠 때 이곳에서 머물러 진을 쳤는데, 백제의 왕이 장군의 귀신
같은 계책을 소문으로 듣고 이를 걱정하였다. 그러자 백제 왕의 딸이 나와 말하기
를, “그가 비록 귀신같은 장수라고는 하지만 우리나라에도 스스로 용감한 군사들과
무기가 있으니, 걱정할 것이 못 됩니다. 그러니 가서 한 번 엿보겠습니다.” 하고, 까
치로 둔갑하여 신라군의 진중에 날아들어 깃대 위에서 시끄럽게 울어댔다. 이에 여
러 장수들이 상서롭지 못하다고 여기니, 장군이 검으로 까치를 가리키자 까치가 땅
에 떨어져 사람으로 변하였는데 바로 백제 왕의 딸이었다. 그리하여 원(院)을 세우
고 ‘작원’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등 14인.
각수(刻手) 손귀언(孫貴彦)
서사리(書寫吏) 이진웅(李震雄), 손태흥(孫泰興)
교정 유사(校正 有司) 유학(幼學) 권훈(權勳), 유학 진성준(陳聖準)
간국도감(刊局都監) 종사랑(從仕郞) 이달징(李達徵), 주남정(朱南正), 정석기(鄭錫
麒), 최수(崔琇), 임대중(任大重), 이유필(李惟弼), 이필우(李必遇)
유사(有司) 유학 이륜(李埨), 진사(進士) 김건준(金建準)
찬집도감(纂集都監) 진사 이채(李埰)
통정대부 행 경주도호부사(通政大夫行慶州都護府使) 민주면(閔周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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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葫蘆歌舞> 昔元曉大聖 混迹屠沽中 嘗撫玩曲項葫蘆 歌舞於市 名之曰無㝵是後好
事者 綴金鈴於上 垂彩帛於下 以爲飾 拊'擊進退 皆中音節 迺7摘取經論偈頌 號曰無㝵7歌
至於田翁亦效之 以爲戱 無㝵'智國嘗題云 此物久將無用用 昔人還以不名名 近有山人貫
休作偈云 揮雙袖所以斷二障 三擧足所以越三界 皆以眞理比之 僕亦見其舞作讚 腹若秋
蟬 頸如夏鼈 其曲可以從人 其虛可以容物 不見窒於密石 勿見笑於葵壺 韓湘以之藏世
界 莊叟'以之泛江湖 孰爲之名小性居士 孰爲之讚隴7西駝李【出破閑集317)】○<二人相
讓> 儒禮王賜印觀署調二人爵 初印觀賣綿於市 署調以穀買之而還 忽有鳶攬綿墮印觀家
印觀歸市 謂署調曰 鳶墮汝綿於吾家 今還汝 署調曰 鳶攬與汝 天也 吾何受焉 印觀曰
然則還汝穀 署調曰 吾與汝市已三日 穀已屬汝 不受 二318)人相讓 幷棄於市而歸 掌市
官聞于王 幷賜爵 ○<三龍變魚> 元聖王319)十一年 唐使來京 留一朔而還 後一日有二
女進內庭奏曰 妾等 乃東池靑池二龍之妻也 唐使將河西二人而來 呪我夫二龍 及芬皇寺
井一龍 變爲小魚 貯筒以歸 願陛下勑二人留我夫 我夫乃護國龍也 王追至河陽館 親賜
享宴 勑河西人曰 爾輩何得取我三龍至此 若不以實告 必加極刑 於是 出三魚獻之 使放
於三處 各湧水丈餘 喜躍而逝 唐人服王之明聖 ○<論虎藪> 新羅俗 每仲春初八日至十
五日 都人士女 競遶7興輪寺殿塔 爲福會 元聖王時 有郎君金現者 夜深獨遶有一處女
念佛隨遶相感而目送之 遶7畢引入屛處 通焉 女將還 現從之 女辭拒而强隨之 行至西山
麓 入一茅店 有老嫗7問曰 附率者何人 女陳其情 嫗7曰 雖好事 恐汝弟兄之惡也 把郞而
匿之 少頃 有三虎咆哮而至 作人語曰 家有腥膻之氣 療飢何幸 嫗7與女叱曰 爾鼻之爽乎
何言之狂也 時有天唱 爾輩嗜害物命 宜誅一以懲惡 三虎聞之 皆有憂色 女曰 三兄若能
遠避 我能代受其罰 皆喜而遁去 女入謂郞曰 賤妾之於郞君 雖曰 非類 得陪一夕之歡
義重結褵之好 三兄之惡天旣厭之 一家之殃 予欲當之 與其死於他人之手 曷若伏於郞君
之刃 以報之德乎 妾以明日入市爲害 則國人無如我何 王必募以重爵而捉我矣 君其無怯
追我於城北林中 現曰 異類而交 蓋非常也 何可忍賣於伉儷之死僥倖一世之爵祿乎 女曰
妾之壽夭 蓋天命也 亦吾願也 郞君之慶也 予族之福也 國人之喜也 一死而五利備 其可
違乎但爲妾創寺 講眞詮資勝報則郞君之惠 莫大焉 遂相泣而別翌日 果有猛虎 入城中
剽甚 無敢當王聞之 申令曰 戡虎者 爵二級 現詣闕曰 小臣能之 乃先賜爵以激之 現將
短兵入林中 虎變爲娘子 熙怡而笑曰 昨夜共郞君繾7綣'之事 惟君無忽 今日被爪傷者 皆
塗興輪寺醬 聆其寺螺鉢聲 則可治 乃取現所佩刀 自剄'而仆乃虎也 現出曰 虎已搏矣
匿其由不洩 但依諭而治之 其瘡皆效 今俗亦用其方 現旣登庸 創寺於西川邊 號虎願寺
常講梵網經 以導虎之冥報 名其林曰 論虎林 讚曰 山家不耐三兄惡 蘭吐那堪一諾芳 義
重數條輕萬死 許身林下落花忙【以上出三國遺事320)】○<拜里> 在府南二十里金鰲山
西麓 俗傳 新羅時 民俗爭崇佛事 父母死日 必請僧飯之 故時人 稱忌日爲僧齋 有一老
相 謂其所親僧曰 明日乃吾先忌也 汝須力求高僧而來 其僧果率一老衲而來 視之不似高
317) 파한집(破閑集) 권하(卷下)에 실려 있다.
318) 중간본에는 二가 一로 되어 있다.
319) 중간본에는 王이 빠져있다.
320) 삼국유사(三國遺事) 권5 「'감통편(感通篇)」김현감호(金現感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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僧 相怒責之曰 汝烏得爲高僧乎 僧怒起拂袖 一獅兒自袖而出 卽乘之騰空而去 相始覺
其神異 徒步追之 僧飛入舍羅山 相悔之 終日望拜于山下 故其下里名 謂之拜里 ○<金
尺院> 在府西二十五里 俗傳 羅王得一金尺 人死人病 以此尺之 則死者生病者蘇 爲國
所寶 中國321)聞之 遣使求之 羅王不欲與之 藏於此 造山三十餘以秘之 因立院舍 故名
焉 或云 新羅始祖微時 夢見神人 自天而來 以金尺授之曰 汝聖神文武 民望久矣 持此
金尺 以正金甌夢覺則金尺在手云 ○<鵲院> 在府西三十里 俗傳 金庾信大擧兵 伐百
濟 留陣于此 濟王聞將軍神筭患之 濟王女進曰 彼雖神將 我國有自勇兵器 不足憂 然請
往覘7之 幻身爲鵲 飛入羅軍陣中 噪7于旗上 諸將以爲不祥 將軍以劍指之 鵲墜地化爲人
乃濟王女也 因立院以名之
等十四人
刻手孫貴彦
書寫吏李震雄
孫泰興
校正有司幼學權勳
幼學陳聖準
刊局都監從仕郞李達徵
朱南正
鄭錫麒
崔琇
任大重
李惟弼
李必遇
有司幼學李埨
進士金建準
纂集都監進士李埰
通政大夫行慶州都護府使閔周冕
동경지(東京誌) 는 신라의 박혁거세(朴赫居世) 이후의 사적(事蹟)을 기록한 것이
다. 언제 이 책이 만들어졌는지는 모르겠는데, 기유년(1669, 현종 10)에 민후(閔侯)
주면(周冕)이 간행한 판본(板本)은 세월이 오래 되어 잔결되었다. 근년에 경주부에
부임하여 옛 사적을 상세히 알고자 하는 자들은 단지 모두 구본(舊本)을 베껴서 볼
따름이요, 널리 유포시킬 방도를 생각지 않으니, 이는 한 부(府)의 흠이 되는 일일
뿐만이 아니다. 만약 구본이 만에 하나라도 유실되는 근심이 생기면 신라시대 1천
여 년의 사실(事實)이 장차 민멸되어 전해지지 못하는 나머지, 후세 사람들이 상고
하여 믿을 곳이 없게 되고 말 것이니, 어찌 크게 애석하지 않겠는가? 내가 부임한
이래로 이것을 불만으로 여기고 개간(改刊)하고자 하였으나, 때가 궁하여 겨를이 없
321) 중간본에는 中朝로 되어 있다.
었다. 이제 임기가 거의 만료되어 가므로 공무의 여가에 판목(板木)을 모아 구본 그
대로 다시 새겨서 오래도록 전하게 하고, 간략하게 그 전말을 책의 끝에 서술하는
바이다.
신묘년 중춘(仲春) 하한(下瀚)에, 부윤(府尹) 의령(宜寧) 남지훈(南至熏) 쓰다.
東京誌 誌新羅赫居以後事蹟者也 未知書成於何時 而己酉年間 閔侯周冕 所刊板本
歲久殘缺 近年莅7此府 而欲詳古蹟者 只皆謄覽舊本而已 不思廣布之道 此不但一府之欠
事 如使舊本 萬一有遺佚之患 羅代千餘年事實 將湮滅而不傳 後無考信之處 豈不大可
惜哉 余自到任以來 有歉'於此 欲爲改刊 而時詘7未遑矣 今者爪期已迫 公務稍暇 鳩聚板
子 仍舊重鋟以壽其傳 略敍顚末于卷尾云爾 歲辛卯仲春下澣 府尹宜寧南至熏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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