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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리학(사주학)/풍수이야기

[돈 버는 풍수] 풍수와 도굴

by 연송 김환수 2013. 7. 28.

[돈 버는 풍수] 풍수와 도굴

입력 2013-07-07 14:34:27

 

 

1927년 경주의 금관총 유물들이 도난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세상이 떠들썩할 정도의 큰 사건이었는데 당국이 재치를 발휘해 유물을 되찾은 사례다.

 

당시 당국은 천년 넘은 금 세공품은 아무리 녹여도 금방 알아본다” “무덤에서 나온 물건을 집 안에 두면 식구 중에 누가 몸이 아프다등의 얘기를 사실상 퍼뜨렸다. 그러자 겁을 먹은 도굴꾼이 수개월 뒤 훔쳐간 유물을 고스란히 돌려줬다고 한다.

 

무덤이 도굴을 당하면 그 속에 매장된 유물들을 되찾기가 매우 어렵다. 그런데 도굴이 아예 불가능하도록 미리 장치를 마련한 역사 속 인물의 묘가 있어 흥미를 끈다.

 

춘천시 서면 방동리에 있는 신숭겸 장군의 묘가 그렇다. 신 장군은 대구의 공산 전투에서 견훤의 군대를 맞아 싸우다 왕건을 대신해 전사한 평산 신씨의 시조다. 순절을 몹시 슬퍼한 왕건은 신 장군에게 장절(壯節)’이란 시호를 내리고 공신에 추봉했다.

 

도선 국사가 자신의 묏자리로 미리 잡아 놓은 명당을 신 장군의 절의에 감동해 선뜻 내주었다. 당시 신 장군의 시신은 적군이 머리를 가져가는 바람에 몸만 수습됐다.

 

왕건은 없어진 머리를 대신해 황금으로 두상을 만든 뒤 남은 시신에 덧붙여 성대하게 장사를 치렀다. 금으로 만든 값비싼 머리가 도굴될까 염려해 가짜 묘 두 기를 포함해 총 세 기의 묘를 나란히 조성했다. 현재도 신 장군의 묘역에는 세 기의 묘가 있는데, 어느 것이 진짜 무덤인지 알 수 없다고 한다.

 

도굴을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한 역사적 무덤도 있다. 충남 예산에 있는 남연군 묘다. 흥선대원군의 부모 묘이고 고종 임금의 조부모 묘다. 2대에 걸쳐 황제를 배출한 명당으로 유명하다.

 

천하의 명당을 찾아 전국을 떠돌던 흥선대원군이 하루는 삼각산 기슭에 있는 화계사를 찾았다. 그곳의 만인 스님은 대원군의 심중을 꿰뚫어 보고 덕산 가야산 동쪽에 2대에 걸쳐 천자가 나올 자리가 있고, 광천 오서산에는 만대에 영화를 누릴 자리가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대원군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가야산의 명당을 선택했고 때를 보아 연천에 있던 부모님의 묘를 그곳으로 이장했다. 명당의 발복 때문인지 이장 후 7년이 지나 차남인 이명복이 태어났고 11년이 지나서 그가 고종 임금이 됐다.

 

그런데 1868년 독일 상인인 오페로트가 사람들을 데려와 남연군 묘를 도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남 몰래 묘에 도착한 그들은 곧바로 봉분을 파헤쳤는데, 석회로 견고하게 조성된 묘라서 파기가 무척 어려웠고, 썰물 시간이 가까워지자 도굴을 포기한 채 철수했다.

 

이 사건은 묘 속에 부장된 유품을 도굴한 뒤 그것을 미끼로 천주교 신앙 허용과 통상 자유의 약속을 얻어내려 한 시도였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조상의 묘를 중히 여기는 조선의 풍습에서 묘를 도굴한 행위는 절대 용납될 수 없었다. 결국 이 사건은 천주교인을 모질게 박해하는 단초가 됐고 나아가 쇄국 정책을 강화하는 계기도 됐다.

 

조상의 묘가 도굴범에 의해 훼손되지 않도록 잘 관리하는 것은 후손이 지켜야 할 도리다.

 

고제희 < 대동풍수지리학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