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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사 방/역사 고려시대

고려시대 무신정권 마지막 집권자 최의

by 연송 김환수 2012. 8. 20.

 

고려시대 최씨 무신정권

            마지막 집권자 최의

 

 

1. 최항의 죽음과 김준의 소외

2. 김준 쿠데타 모의 발각

3. 최양백의 죽음, 김준 쿠데타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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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의 1 (최항의 죽음과 김준의 소외)

 

역사이야기 2012/07/27 04:04

http://blog.naver.com/youltae/20162968343 

 

최항의 사망 원인은 병으로 여겨진다. 한창 나이인 49살에 죽었는데, 암살되었다고 생각할 만한 정황은 남아 있지 않다. 그는 죽기 전에 아들 최의를 미리 세 사람에게 부탁해 놓았다. 유능, 선인열, 최양백이었다. 이들은 최항 사후 최의가 차질 없이 권력을 승계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유능은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재상을 지낸 유력 가문 출신이고, 선인열의 가문은 불확실하지만 문관 출신임은 틀림없다. 즉 유능과 선인열은 미천한 어머니를 둔 최의의 신분적 약점을 보완해주기 위해 최항이 선택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다 믿을 만한 무장으로 최양백을 붙여준 것이다.

 

최항이 최양백을 선택한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 때문에 앞 이야기(최항3)에서 추측만 했다. 다만 상식적으로 판단해 보자. 김준보다는 그래도 최양백이 더 믿을 만했기 때문이었을 것이고, 역으로 김준이 최양백 만큼 탐탁스럽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늙은 이공주는 제쳐놓고 말이다.

 

최양백은 최항의 유지를 충실하게 받들었다. 최항이 죽었을 때 그는 빈틈없고도 신속하게 움직였다. 먼저 최항의 죽음에 대해 보안을 철저하게 유지했다. 최고 권력자의 죽음이 섣불리 새어 나가 생길 수도 있는 혼란을 미연에 차단한 것이다. 김준과 이봉주에게도 전혀 알리지 않고 최항의 사저 밖에서 머물고 있던 선인열에게 먼저 은밀히 알렸다. 이어 최양백과 선인열은 삼별초 군사들을 급히 소집해서 어수선한 순간을 틈타 다른 곳에서 일지도 모를 군사적 움직임을 원천 봉쇄했다. 그리고는 최항의 죽음을 모두에게 알렸다.

 

최우에게서 최항으로 넘어갈 때 삼인방이 이끄는 가노 집단이 큰 역할을 했지만 최항에게서 최의로 넘어가는 과정에서는 가노 집단이 완전히 소외된 것이다. 아마 김준은 엄청난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다. 주군을 위해 온 몸을 다 바쳐 충성을 다 바쳤건만 가장 중요한 순간에 따돌림 당했으니, 그 순간 그에게 들었던 소외감이나 실망감을 구태여 표현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드디어 최씨 정권의 4대 후계자인 최의 시대가 열렸다. 이때 그의 나이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아마 20대 중반이나 후반쯤으로 짐작 된다. 최양백이 선인열과 더불어 빈틈없이 일을 처리해 놓았기에 김준은 속을 끓이면서도 일단 최의의 승계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김준은 최의 집권 후 계속해서 그의 눈 밖에 나는 행동을 한다. 그리하여 최의는 점점 김준을 멀리 하게 된다.

 

김준의 성격이 요즘말로 하면 사람 좋고, 허세 부리기도 좋아하고, 또 마당발이었던 모양이다. 비천한 출신이면서도 여러 신분의 사람들과 두루 친분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공과 사를 엄중히 구별할 줄 모르는 성격이었던 것 같다. 김준이 결정적으로 최의의 눈 밖에 난 사건은 청탁 때문이었다. 임연과 송길유에 대한 청탁이었다.

 

최의가 집권하고 난 뒤 임연이 남의 아내를 간통해 벌을 받아야 할 처지가 되었다. 이런 임연을 김준이 적극 비호하고 나섰다. 최의에게 호소하여 석방케 하고 후에 다시 벼슬까지 얻도록 해준다.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 버리면 그만이겠지만, 이때가 집권 초기였다는 점에 유념해야 한다. 즉 새로운 정권으로서 면모를 일신하여 엄정한 국가 관리의 기틀을 잡아 나가야 신망을 얻을 터인데, 초장부터 김준의 청탁으로 초를 친 것이다. 최의는 속으로 불쾌했을 거라는 말이다. ‘명색이 최고 권력자인데, 자리에 앉았는지 얼마나 되었다고 청탁인가? 벌써부터 깔보는 건가? 내 나이가 어리다고 깔보는 건가? 제가 힘이 있다고 깔보는 건가?’하는 불쾌감이 드는 것은 인지상정이었을 것이다. 아마 최의는 겉으로는 대범하게 임연을 풀어주면서도 속으로는 김준을 찍어 놓았을 것이다.

 

최의의 속마음이야 어쨌든 임연은 이때 김준의 덕으로 풀려나고 또 벼슬까지 다시 얻게 된다. 이때 입은 은혜로 해서 임연은 김준을 아버지라 부르고 그의 동생을 숙부라고 부른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임연은 김준의 심복이 되고 또 김준이 쿠데타를 일으킬 때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공을 세운다.

 

드라마 무신에서는 송길유가 충직하고도 듬직한 장군으로 그려지고 있지만 실제로는 악랄하기가 그지없어 백성들의 원망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백성들의 대한 그의 착취가 워낙 심해 결국에는 안찰사의 탄핵을 받게 되었다. 여기서 더 올라가면 도병마사에게 보고되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최소 면직이나 파면이었다. 여기에 김준이 또 끼어들었다.

 

그런데 도병마사는 높은 벼슬이어서 김준 혼자서 감당하기가 버거웠던 모양이다. 그래서 김준이 끌어들인 사람이 유경이었다. 이때 유능도 함께 끌어 들이려고 했지만 그는 김준이 최의에게 밉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고 발을 빼 버린다. 문관 출신의 유경은 대사성(종3품) 벼슬에 있는 사람으로서 김준과는 출신이 전혀 다르다. 폭넓은 김준의 대인 관계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김준은 호소와 강압을 섞어 유경으로 하여금 송길유의 탄핵이 도병마사까지 올라가지 못 하도록 막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비밀이 새어 나가 버렸다.

 

거성원발이라고 미천한 출신이지만 힘이 천하장사인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최의의 외삼촌이었다. 최의 집권 후 그의 심복이 되어 출세를 한 인물이다. 세력을 부리며 못 된 짓을 많이 하는 바람에 최의 정권이 여론의 비난을 받는데 한 몫을 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 거성원발이 그만 김준과 유경이 작당해서 송길유의 탄핵을 막은 사실을 알아 버렸다.

 

김준과 유경은 최의에게 심하게 질책을 받았다. 최의 앞에 엎드려서 빌었다고 하니 최의의 분노가 짐작이 된다. 최의는 송길유를 즉석에서 추자도로 귀양을 보내고 이후 김준과 유경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고 한다. 최의의 가병장 지위까지 상실한 김준이 할 수 있는 일은 쿠데타 말고는 없었다. 이때가 김준의 쿠데타가 일어나기 두 달 전이었다.

(다음으로 계속, 이승한의 고려 무인이야기 참조)

<조열태 씀. 역사소설 ‘진주성 비가’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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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의 2 (김준 쿠데타 모의 발각)

 

역사이야기 2012/08/11 11:37

http://blog.naver.com/youltae/20164065304 

 

송길유의 청탁 사건으로 김준은 완전히 최의의 눈 밖에 나버렸다. 그로서는 임연 사건 때 최의에게 직접 호소하여 무마시켜 준 경험이 있었으므로 또 부탁하기가 아무래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주군 모르게 일을 저지를 수 있었다는 것은 김준이 그만큼 주군인 최의를 무섭게 보지 않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겁 없이 설치다가 김준은 제대로 된통 걸린 것이다.

 

제 무덤을 판 김준은 억울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진짜로 억울한 사람은 유경이었다. 송길유와 돈독한 친분이 있는 사이도 아닌데 김준의 강압적인 부탁을 거절하다 못해 어쩔 수 없어서 들어 준 청탁이었다. 그러나 최의는 유경과 김준을 한통속으로 취급해 버렸다. 김준이 이 사건으로 인해 가병장의 지위를 상실한 것과 마찬가지로 유경도 정방에서 소외 되어 버렸다. 김준은 송길유를 구하려다 엉뚱하게도 사회적인 배경이 전혀 다른 유경을 동지로 맞이하게 된 셈이었다.

 

소외감을 이기지 못한 김준이 역시 소외 받아 집안에 틀어 박혀 칩거하고 있는 유경을 찾았다. 서로 술이나 한잔 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김준이 반란을 일으키겠다고 구체적으로 말을 꺼낼 필요는 없었다. 그저 김준이 대화 속에서 반란을 암시하는 말을 떠보았을 때 유경은 적극 맞장구쳤다. 서로의 마음이 일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김준은 아직 까지는 유경의 마음만 떠보았을 뿐 본격적인 거사 계획은 잡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 다른 곳에서도 반란을 준비하는 무리들이 있었다.

 

삼별초는 원래 야별초부터 시작했다고 다른 포스트에서 언급했다. 야별초의 군사 수가 늘어나다 보니 좌별초와 우별초로 나누어 진 것이다. 즉 삼별초의 기본 구성은 야별초가 된다. 여기에 신의군이 가세했다. 신의군은 원래 몽고군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탈출한 병사들을 급조해서 만든 부대였다. 그들이 사회 불안을 야기할 가능성도 있어서 불가피하게 군대로 포용했던 것이다. 아무래도 야별초 보다는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따라서 대우도 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연유인지 몰라도 신의군의 불만이 굉장히 컸다. 제대로 대우를 못 받는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사실은 이 시기에 몽고군 때문에 조운선도 제대로 들어오지 못해 재정 상태가 말이 아니어서 신의군뿐만 아니라 고위 관리의 녹봉도 제대로 주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그런데도 최의 정권에 빌붙어 있는 사람들은 호의호식했다. 그들은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할 생각도 없이 오히려 개인적인 축재에 더 안달이 나 있었다. 이러니 각계각층 어디서나 최의 정권에 대한 비난이 쏟아졌는데 그중에서도 신의군에게서 나오는 불만이 더욱 심했다. 신의군의 이런 불만 여론을 조성하고 있는 대표적인 지휘관들이 있었으니 박희실과 이연소였다. 이 두 지휘관이 신의군과 불만투성이인 여론을 등에 업고 반란을 꾀하고 있었던 것이다.

 

본격적인 반란 계획을 세운 김준이 사람들을 모아 나가기 시작했다. 우선 믿을 만한 인물은 같이 소외당한 유경과 같은 가노 출신인 이공주였다. 이공주는 이때 소외를 받지 않고 오히려 진급해 있었지만 순순히 김준의 제의에 따랐다. 이것으로 보아 최의가 이공주를 진급시킨 것은 가병들의 불만을 알아채고 달래고자 하는 의도였을 것으로 풀이 된다. 어쨌든 유경과 이공주는 김준이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인물들이었다. 김준의 동생(김승준)과 세 아들(김대제, 김용제, 김식제)도 당연히 반란군에 참여했다.

 

이외에 김준은 정4품 장군 박송비를 끌어들이는데 성공했고 또 한때 최항의 사돈이었던 최온 등 몇몇 인사들도 끌어들였다. 그리고는 본격적으로 군사를 일으킬 수 있는 삼별초 지휘관을 포섭하는 과정에서 박희실과 이연소를 만나게 된 것이었다. 박희실과 이연소는 오히려 김준보다 더 적극적으로 반란을 꾀하고 있었음이 드러났다.

 

1258년(고종 45년) 3월 25일, 어두워지고 난 뒤 비밀 장소에서 지금까지 반란 모의에 가담한 사람들이 모였다. 여기서 세부적인 계획을 세우고 거사 날짜는 사월 초파일 밤으로 잡았다. 관등 행사 때 작전을 실시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런데 이런 경우 반란 모의가 누설되는 경우는 동서고금을 통틀어 비일비재 했다. 거사가 실패해서 죽고 말 것이라는 불안감을 못이기는 사람이 나오게 마련이고, 또 역모를 고발함으로서 얻게 될 개인적인 영달에 눈이 머는 사람도 생기게 마련이다. 조선의 세조를 제거하려는 사육신의 계획도 도중에 김질의 고변으로 사달이 나고 만 경우이다. 야별초의 한 장교가 몇몇 장교들과 따로 협의해서 반란 계획을 최의에게 알리고 말았다.

 

여기에다 최양백까지 반란 계획을 알아챘다. 김준의 맏아들인 김대제가 그의 장인 최양백에게 찾아가서 반란 계획을 발설했다. 어쩌면 최양백을 설득 시켜서 같이 가담시키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여기서 추측할 수 있는 것은 김준이 소외감을 느끼고는 있었지만 아직 최양백을 꼭 죽여야 할 만큼 험악한 관계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런 관계였으면 김대제가 아예 말을 꺼내지 않았을 테니까. 최양백은 최항이 죽었을 때처럼 노련하게 행동했다. 겉으로는 따르는 체 하고 몰래 최의를 찾아가서 알렸다. 한마디로 뒤통수를 쳤던 것이다. 결국 최의는 야별초 장교들과 최측근인 최양백 양쪽으로부터 반란 모의를 받았다. 이제 반란군들의 운명은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승한의 고려 무인이야기 참조)

 

<조열태 씀. 역사소설 ‘진주성 비가’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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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의 3 (최양백의 죽음, 김준 쿠데타 성공)

 

역사이야기 2012/08/11 11:38

http://blog.naver.com/youltae/20164065394 

 

3월 25일의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 반란 모의를 받고 최의는 즉시 유능을 불러 최양백과 함께 대책을 논의했다. 유능은 우선 김준의 반란 제의를 받은 삼별초 지휘관들에게 연락을 취해 설득시키고, 날이 새면 삼별초 군사들을 소집해서 반란 세력을 쳐도 늦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의가 이 제안에 동의했다. 최의, 최양백, 유능은 이미 반란 음모를 알아챘고 또 삼별초만 장악하고 있으면 반란 세력쯤은 간단하게 제압할 수 있다고 안일하게 생각한 것이었다. 하룻밤만 지나면 김준의 운명은 끝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김준이 거꾸로 진압 계획을 알아버린 것이었다. 최양백의 딸, 즉 김대제의 부인이자 김준의 며느리가 반란군 진압 계획을 엿듣게 된 것이다. 어디에서 어떻게 들은 것인지는 나타난 것이 없다. 직접 최의의 사저에 있으면서 엿들은 것이 아니라면 친정집에서 아버지가 측근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엿들었을 것이다.

 

남편과 함께 있어야 할 최양백의 딸이 이 순간에 친정 쪽에 있었던 것이 김준에게는 천운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가장 긴요한 순간에, 가장 긴요한 곳에서, 가장 긴요한 정보를 딱 마침맞게 들을 수 있었을까? 김준이나 김대제가 정보를 얻기 위해서 보내어 놓았을지도 모른다는 추리가 떠오르기는 한다. 하지만 확실한 사실은 알 수 없다.

 

여하튼 놀라운 정보를 듣게 된 그녀는 바로 남편에게 알렸고, 김대제는 다시 김준에게 알렸다. 아마 그녀는 시아버지가 설마 자기 아버지를 죽이기야 할까 하고 생각했을 수 있다. 아니면 김준이나 김대제가 친정아버지는 다치지 않게 할 터이니 모든 사실을 낱낱이 파악해야 한다고 미리 언질을 줬는지도 모른다. 그랬더라면 반란이 성공하더라도 시아버지가 친정아버지를 유배 보내는 정도에 그칠 것 이라고 혼자 짐작했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도 저도 아니라면 그녀는 친정 따위야 어떻게 되든 오로지 남편과 시집 생각만 한 것이 된다. 만약 그게 진실이라면 이쪽을 택할지 저쪽을 택할지 짧은 시간 동안 그녀는 엄청난 갈등을 겪었을 것이다. 아무튼 그녀는 결정적인 순간에 남편을 택했다. 김준은 라이벌의 딸 때문에 기사회생한 것이었다.

 

아들의 다급한 보고를 받은 김준은 초조했다. 이젠 초파일로 정한 거사 날짜는 무의미했다. 그는 아들들을 데리고 박희실과 이연소를 만나러 갔다. 그 상황에서 믿을 사람들은 그들뿐이었다. 거사 계획이 누설되었음을 밝히고 잠시도 늦출 수 없으니 지금 당장 실행에 옮기자고 그들을 설득했다. 아연실색한 그들이 김준을 따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당장 잡혀 죽을 판이었으니 기다리고 자시고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먼저 처음 반란 계획에 동의한 삼별초의 지휘관들을 서둘러 소집하는 한편, 승낙은 했지만 다시 진압군에게 붙을 가능성이 많은 지휘관들을 사람을 보내 신속하게 제거했다.

 

삼별초의 군사들도 각각 반란군에 속한 그들의 지휘관을 따라 도성 안에 있는 활터에 모두 집결했다. 모여든 군사들 앞에서 김준은 “최의는 이미 죽었다.”고 높이 소리쳤다. 그리고 일부 병사들을 풀어 시내를 돌며 똑같이 소리치게 했다. 일종의 심리전이었고, 이 소리를 듣고 많은 군사들이 모였다고 하니 최의 정권에 대한 불만이 퍼져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유경과 박송비가 현장에 나타난 것도 이 시점이었다. 이미 거사는 김준의 주도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김준은 신속하게 행동을 취했다. 자신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곧장 최양백을 찾아가 그 자리서 죽였다. 최항이 죽을 때 용의주도하게 행동했던 최양백이었지만 이때는 그렇지가 못했다. 반란 모의에 대해 듣는 즉시 군사들을 소집해야 했는데 하룻밤을 늦추는 바람에 당했던 것이다. 하기야 딸이 배신할 줄 생각조차 못했으니 어쩌면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는지 모른다.

 

진압 세력에 붙을 만한 삼별초군의 처리는 임연에게 맡겨 놓고 김준은 최의의 사저로 향했다. 벌써 새벽이 가까워오고 있었다. 하룻밤 사이에 상전벽해의 상황이 벌어졌는데도 사저에 있는 최의 측에서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최의는 날이 새면 반란 세력들을 일망타진할 계획을 세워놓고 잠자고 있었던 것이다. 김준이 그 사실을 알고 역습을 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까마득하게 모르고서.

 

김준은 먼저 시간을 알리는 최의의 병졸들을 사로잡아 최의가 시간의 흐름을 깨닫지 못하게 했다. 반란 세력이 최의의 사저를 습격했을 때 의외로 사저를 지키는 가병들의 움직임이 없었다고 한다. 별 저항이 없거나 미미했다는 말이다. 이로보아 이미 사저에서도 반란군과 내통한 사병들이 많았음을 추측할 수 있다.

 

최의의 외삼촌인 거성원발이 최의의 옆방에서 자고 있다가 반란군이 쳐들어오는 것을 알아채고 저항했지만 이미 늦었다. 원발이 저항하려고 보니까 따르는 군사들은 거의 없었고, 최의는 벌써 다쳐있고, 적은 워낙 수가 많아 중과부적이었다. 최의를 업고 달아나려 했지만 최의가 너무 비대해 포기했다. 원발은 최의를 몰래 다락에 밀어 넣고 문을 가로막아 서서 잠시 저항했다. 그러나 달려드는 군사들이 너무 많아 그 혼자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결국 자신도 부상을 입자 최의를 그냥 둔 채 혼자 달아났다. 그러나 얼마가지 못해 반란군들에게 잡혀 주살되었고, 최의도 곧 발각되어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3월 25일 하룻밤 사이에 세상이 바뀌어 버렸다. 60여 년간 지속되던 철옹성 같았던 최씨 정권이 너무나 허무하게 무너져 버렸다. 그것은 최씨 정권이 최항의 집권이후 정치, 사회적으로 철저하게 고립된 때문이었다.

 

3월 26일 날이 밝자 김준과 유경 등은 군사들을 이끌고 궁궐로 향했다. 어느새 소문을 듣고 백관들이 대궐문 밖에 모여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백관들과 함께 김준과 유경은 고종이 머무르는 편전으로 가서 복정우왕(정권을 다시 왕에게 돌림)을 선언하고 조용히 국왕의 분부를 기다렸다. 이때 고종은 얼마나 감격했는지 눈물을 보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정권은 실질적인 힘을 가진 김준의 차지가 된다.

(이승한의 고려 무인이야기 참조)

<조열태 씀. 역사소설 ‘진주성 비가’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