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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사 방/역사 고려시대

고려도경 (高麗圖經), 원명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원문 해석

by 연송 김환수 2013. 7. 30.

고려도경 (高麗圖經)

 

송(宋)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25 x 15.5 cm (인쇄: 19 x 12 cm)

 

송(宋) 서긍(徐兢) 지음

송(宋) 건도(乾道) 3년(1167) 서천(徐蕆) 강음(江陰) 간행본

 

고려도경 한글 번역문을 붙임하였습니다.

 

고려도경 번역문.hwp

 

 

고려도경.hwp

 

 

 

 

 

중국에서의 지도, 지리 관련 저작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상주(商周, 기원전17세기-3세기)시기에는"직방(職方)" 과 "외사(外史)" 라는 관직이 있어서 전문적으로 지리와 관련된 문헌의 관리와 고증, 편집 일을 맡았고, 진(晉, 265-317)나라 때 승려 법현(法顯)의 <불국기(佛國記)>가 세상에 알려진 후부터 외국에 대한 기행문이 점차 성행하게 되었다.

 

"외국에 대한 기록(外記)" 은 고대 중국인들이 국경 밖의 외국에 관심을 갖고 이들에 대한 이해를 돕기위해 쓰여진 것으로 현존하는 인쇄본 중에 송(宋) 건도(乾道) 3년(1167)에 간행된 <선화봉사 고려도경(宣和奉使 高麗圖經)>이 가장 오래된 책이다. 중국과 한국은 지리적으로 인접하고 있는 가까운 나라로 예로부터 왕래가 매우 빈번하였다.

 

이러한 까닭에 중국 역사상 특별히 한국에 대해 기술하고 있는 저작이 적지 않은데, 그 중에서도 <계림기(雞林記)>, <계림지(雞林志)>, <계림유사(雞林類事)>, <조선부(朝鮮賦)>,<조선도설(朝鮮圖說)>, <조선지(朝鮮志)>,<조선사략(朝鮮史略)> 등은 널리 알려진 책들이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이 유실되어 없어지거나 일부만 남아있는 것에 반해 현존하는 서긍(徐兢)의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은 그 내용이 풍부할 뿐만하니라 현존하는 책 중 시기가 가장 이른 것으로, 오늘날 고대 한국과 중국의 관계사 및 교류사 연구에 있어 아주 귀중한 자료가 된다.

 

송 선화(宣和) 6년(1124)에 완성될 당시 이 책에는 글과 그림이 함께 있었다고 하나 정강(靖康)의 난(亂)으로 그림 부분이 없어져, 건도(乾道) 2년(1167) 서긍의 조카 서천(徐蕆)이 이를 간행할 때, 그림을 실을 수는 없었지만 책 이름에는 여전히 "도경(圖經)" 이란 원래 제목을 그대로 썼다.

 

서긍의 책은 송 건도 연간이후 명(明, 1368-1644) 중엽까지 다시 간행이 되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명말(明末)에 이르러 절강 해염(海鹽) 사람 정휴중(鄭休仲)이 필사본을 토대로 다시 간행하는데,청대(淸代) 편찬된 <사고전서(四庫全書)> 역시 필사본에 의거하여 수록하고 있지만 두 판본 모두 오류와 빠진 부분이 많다.

 

청 건륭(乾隆) 58년(1793), 섭현(歙縣) 포정박(鮑廷博)이 자신의 집안에서 소장하고 있던 고려도경의 사본과 명대 정휴중의 판본을 대조하여 수정을 거쳐 출판한 책이 <지부족재총서(知不足齋叢書)>에 수록이 되어있다.

 

그러나 건도본과 비교할 때,이 책 역시 잘못 기재하고 있는 부분들이 있다. 본원이 소장하고 있는 이 책은 현존하는 송대 간행된 건도본(乾道本) 고려도경으로, 인쇄된 글자의 자획이 단정하고 정교하게 조판된 희대의 보물이라 할 수 있다.

 

 

 

저자 : 서긍(徐兢,1091-1153)

 

송(宋)나라 휘종(徽宗)이 1123년 고려(高麗)에 국신사(國信使)를 보낼 때 수행한 서긍(徐兢)이 고려에서 한 달여 동안 머무르다 돌아간 뒤, 이듬해에 고려의 문물과 제도, 풍습 등을 300여 항목, 28개 문(門)으로 분류하여 글과 그림으로 기록, 정리한 뒤 황제에게 바친 이 책은 3년 후 송(宋)의 수도 개봉이 함락당하는 ‘정강의 변’때 그림이 유실되었다.

다행히 글은 남아 43년 후인 1167년 그의 조카 서천(徐?)이 재 간행한다.

그 후 이 책은 오랫동안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었다가 20세기에 이르러서야 우리 앞에 나타났다.

본 번역본은 민족문화추진회에서 국역번역사업의 일환으로 번역된 것이다.

전 40권. 원명은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이다.

 

목 차

제1권 건국 建國

제2권 세차 世次

제3권 성읍 城邑

제4권 궁궐문 門闕

제5권 궁전 宮殿 1

제6권 궁전 宮殿 2

제7권 관복 冠服

제8권 인물 人物 이자겸 / 윤언식 / 김부식 / 김인규 / 이지미

제9권 의례용품 儀物 1

제10권 의례용품 儀物 2

제11권 의장대 仗衛 1

제12권 의장대 仗衛 2

제13권 병기 兵器

제14권 기치 旗幟

제15권 수레와 말 車馬

제16권 관부 官府

제17권 사우 祠宇

제18권 도교 道敎

제19권 백성 民庶

제20권 부인 婦人

제21권 하급 관리

제22권 풍속

          雜俗 1 궁정의 화톳불 / 초롱을 잡는 관리 / 시간을 알려주는

          관리 / 고려 연회 / 공무 수행 / 답례 / 급사 / 말타는 부인

 

제23권 풍속

          雜俗 2 한탁(澣濯, 목욕과 세탁)

         종예(種蓺, 농업)

         고기잡이

         기록(刻記)

         도축(屠宰)

         무료 급식(施水)

         토산품(土産)

 

토산품으로는 소나무, 인삼, 더덕, 복령과 같은 약재나 나물과 같은 것과 모시, 삼베옷, 비단, 모직물 등의 천 그리고 구리와 같은 광물도 소개하고 있다. 또한 나전칠기와 같은 것은 세밀하고, 귀하다고 찬사를 한다. 밤이 복숭아만하며, 달고 맛있고, 사과나 참외, 복숭아, 배, 대추와 같은 것은 맛이 없고, 작다고 기록하고 있다.

 

제24권 사절의 행렬 節仗

제25권 조서를 받는 절차 受詔

제26권 연회 의례 燕禮

제27권 관사 館舍

제28권 장막류 供張 1

제29권 장막류 供張 1

제30권 생활용기 器皿 1

제31권 생활용기 器皿 2

제32권 생활용기 器皿 3

제33권 배 舟楫

제34권 바닷길 海道 1

제35권 바닷길 海道 2

제36권 바닷길 海道 3

제37권 바닷길 海道 4

제38권 바닷길 海道 5

제39권 바닷길 海道 6

제40권 동일한 문물 同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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宣和奉使高麗圖經 序

선화봉사고려도경 서

 

-宣和奉使高麗圖經序[徐兢] 선화봉사고려도경서 [서긍]

   

奉議郞充奉使高麗國信所提轄人船禮物賜緋魚袋臣徐兢

聞天子元正大朝會畢列四海圖籍于庭而王公侯伯萬國輻湊此皆有以揆之故有司所藏嚴毖特甚而使者之職尤以是爲急在昔成周職方氏掌天下之圖以掌天下之地辨其邦國都鄙四夷八蠻七鬪九貉五戎六狄之人民周知其利害而行人之官駱驛道路若賀慶槁襘之類凡五物之故莫不有治若康樂厄貧之類凡五物之辨莫不有書用以復命于王俾得以周知天下之故外史書之以爲四方之志司徒集之以爲土地之圖誦訓道之以詔觀事土訓道之以詔地事此所以一人之尊深居高拱於九重而察四方萬里之遠如指諸掌當沛公初入關蕭何獨收秦圖書及天下已定而漢盡得知其阸塞戶口者繄何之功隋長孫晟之至突厥每游獵輒記其國土委曲歸表聞於文帝口陳形埶手畫山川卒以展異日之效然則乘輶軒而使邦國者其於圖籍固所先務矧惟高麗在遼東非若侯甸近服可以朝下令而夕來上故圖籍之作尤爲難也皇帝天德地業畢朝萬國乃眷高麗被遇神考益加懷徠遴擇在廷將命撫賜恩隆禮厚前未之有時給事中臣允迪以通經之才超世之文取甲科著宿望中書舍人臣墨卿學問高明見於踐履恪守忠孝臨事不回竝命而行非獨其執節專對不減古人之膚使而風采聞望自足以壯朝廷之威靈聳外夷之觀聽拜命未行會聞王俁薨遂以奠慰之禮兼往臣愚猥承人乏獲聯使屬之末事之大者固從其長而區區得以專達者又不足以補報朝廷器使之萬一退而自訟曰周爰咨詢歌於皇華之詩則徧問以事正使者之職謹因耳目所及博采衆說簡去其同於中國者而取其異焉凡三百餘條釐爲四十卷物圖其形事爲之說名曰宣和奉使高麗圖經臣嘗觀崇寧中王雲所撰雞林志始疏其說而未圖其形比者使行取以稽考爲補已多今臣所著圖經手披目覽而遐陬異域擧萃於前蓋倣古聚米之遺制也雖然昔漢張騫出使月氏十有三年而後歸僅能言其所歷之國地形物產而已臣愚雖才不逮前人然在高麗纔及月餘授館之後則守以兵衛凡出館不過五六而驅馳車馬之間獻詶尊俎之上耳目所及非若十三歲之久亦粗能得其建國立政之體風俗事物之宜使不逃乎繪畫紀次之列非敢矜博洽飾浮剽以塵冕旒之聽蓋摭其事實以復于朝庶少逭將命之責也有詔上之御府謹掇其大槩爲之序云宣和六年八月日奉議郞充奉使高麗國信所提轄人船禮物賜緋魚袋臣徐兢謹序

천자가 정월 초하루에 큰 조회(朝會)를 갖는데, 뜰에다 천하[四海]의 도적(圖籍)을 다 늘어놓아 왕()()()()이 만국에서 모여들어도 그들을 다 헤아려 알 수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유사(有司 담당 관원, 여기서는 도적을 관장하는 책임 맡은 관원)가 그것들을 수장함이 특히 엄격하고 신중하며, 사신의 직책 중에서도 더욱 이것을 급선무로 하였다.

옛날 주() 나라의 직방씨(職方氏)는 천하의 지도를 맡아 가지고 천하의 땅을 관장해 다스려서 그 나라의 도비(都鄙 도회지와 변두리)와 사이(四夷)팔만(八蠻)칠민(七鬪)구맥(九貊)오융(五戎)육적(六狄)의 인민을 분간하고 그 이해(利害)를 두루 알았던 것으로, 행인(行人)의 관원들이 도로에 연달아 있었다. 경축과 군대의 위문, 재앙을 떨쳐 버리는 불제(祓除) 같은 따위의 행사에는 무릇 다섯 가지 종류의 일[五物] 치고 처리되지 않는 것이 없었으며, 안락과 재액빈곤 같은 따위의 경우에는 무릇 다섯 가지 일의 분별에 참고할 책이 없는 것이 없어, 그것들을 가지고 왕에게 복명하여 천하의 일을 두루 알 수 있게 하였던 것이다. 외사(外史)는 그 일들을 써서 사방의 지(관계기록)를 만들었고, 사도(司徒)는 그것들을 모아 지도를 만들고, 송훈(誦訓)은 그것들을 설명해서 살필 일을 일러 주고, 토훈(土訓)은 그것들을 설명해서 토지의 일을 일러 주었다. 이 때문에 더할 수 없는 존귀함으로서 깊숙한 구중궁궐에서 높이 팔짱끼고 지내면서도 사방 만리의 먼 곳을 손바닥 보듯이 환히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패공(沛公 후의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이 처음 함곡관(函谷關)으로 들어갔을 때 소하(蕭何)는 혼자서 진() 나라의 지도와 호적을 거둬들였는데, 천하가 평정되기에 이르러 한()에서 그 요해지와 호구를 남김없이 알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소하의 공로였다. () 나라의 장손성(長孫晟)이 돌궐(突厥)에 가서는 사냥 나갈 때마다 그 국토의 상세한 상황을 기록하곤 하였고, 돌아와 문제(文帝)에게 표문(表文)을 올리고서는 입으로는 그 형세를 말하고 손으로는 그 산천을 그리곤 하다가 마침내 그 일로 후일의 보람을 가져왔던 것이다.

그러니 유헌(輶軒 천자의 사자가 타는 수레)을 타고 다른 나라에 사신가는 자로서는 도적(圖籍)에 대해 실로 먼저 힘써야 할 일이다. 하물며 고려는 요하(遼河)의 동에 있어서, 아침에 명령을 내리면 저녁에 와서 바칠 수 있는 후복(侯服)이나 전복(甸服)과 같지 않기 때문에 도적의 작성은 더욱 어렵다. 황제는 천지와 같은 덕업(德業)으로 만국을 다 내조(來朝)하게 하여 고려가 예우를 받도록 돌보았거니와, 신령하신 선왕(先王)께서는 더욱 따르게 만드시어 인재를 뽑아 조정에 있게 하여 위무(慰撫)와 하사(下賜)의 어명을 받들게 하시었으니, 은혜의 융숭함과 예의 후함이 전례가 없었다.

이제 급사중(給事中) 신 윤적(允迪)은 경전에 통달한 재주와 세상에 뛰어난 문장으로 갑과(甲科)로 급제하여 오랜 명망이 드러나 있고, 중서 사인(中書舍人) 신 묵경(墨卿)은 학문의 훌륭함이 행실에 나타나 충효를 근엄하게 지키고 일에 임해서 마음이 변하지 않는데 이 두 사람이 함께 사명을 받들고 가게 되었으니, 이들은 비단 부절(符節)을 가지고 전대(專對 타국에 사신으로 가서 모든 질문에 응답함)하는 것이 옛날의 선량한 사신에 못지않을 뿐더러, 풍채와 명망도 조정의 위엄을 드높이고 외국인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하다. 임명을 받고서 아직 떠나기 전에 마침 왕우(王俁)가 훙거하였음을 알게 되어 드디어 제사를 지내고 조위(弔慰)하는 예를 겸임하고 갔다.

나는 우매한데도 외람되이 빈 자리를 채우게 되어 사신의 말석에 끼이게 되었다. 큰 일이야 물론 그 장()의 결정에 따라야 하겠지만, 단독으로 처리할 수 있는 소소한 것은 또 조정에서 자격에 따라 시킨 일의 만분의 일도 보답하기에 부족하다. 물러나 스스로 생각하기를, ‘성실하게 찾아서 묻고 의논하라고 황황자화(皇皇者華)의 시에 노래되었으니, 일을 두루 묻는 것은 정사(正使)된 사람의 직책일 것이다. 그래서 삼가 이목이 미치는 데 따라 널리 여러 설을 채택하여, 중국과 같은 것은 뽑아 버리고 중국과 다른 것들을 취하니 도합 3백여 조가 되었다. 이를 정리하여 40권으로 만들었는데, 물건은 그 형상을 그리고 일은 설명을 달아 선화봉사고려도경이라 명명하였다.

신이 숭녕(崇寧 11021106) 연간에 왕운(王雲)이 찬술한 계림지(鷄林志)를 본 적이 있는데, 처음에는 그 설()만 기록하였으나 그 형상은 기록하지 않았다. 근자에 사신 행차 때 그것을 가져다 참고하였는데 도움이 이미 많았다. 이제 신이 저술한 도경은 손으로 펼치고 눈으로 보고 하면 먼 이역땅이 다 앞에 모이게 되는데, 이는 옛날 쌀을 모아 지세의 모형을 만들던 유제(遺制)이다. 그렇기는 하나 옛날 한대(漢代)의 장건(張騫)이 월지(月氏)에 사신으로 나갔다가 13년 후에 돌아왔는데도, 겨우 월여를 머물렀을 뿐이요, 숙소가 정해진 뒤에는 파수병이 지켜 문 밖을 나가 본 것이 5~6 차례에 불과하였다. 따라서 거마를 달리는 동안과 연석에서 수작하는 경우에 이목이 미쳐 간 것은 13년이라는 오랜 세월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 건국(建國)과 입정(立政)의 근본과 풍속과 사물의 상황을 대충 터득할 수 있어서, 그것들을 그림과 기록에서 빠지지 않게 하였다. 감히 박식을 자랑하고 경박함을 가다듬어 황상의 총명을 흐리게 하자는 것이 아니라, 다만 사실들을 모아서 조정에 복명하여 명령받은 책임을 다소나마 면하기를 바라는 바이다. 어부(御府)에 바치라는 조명(詔命)이 있어 삼가 그 대강의 경위를 추려서 서문을 지었다.

선화 686

봉의랑(奉議郞) 충봉사고려국신소제할인선예물(充奉使高麗國信所提轄人船禮物) 사비어대(賜緋魚袋) () 서긍 근서(謹序)

 

[D-001]직방씨(職方氏) : 중국 경전의 하나인 주례(周禮)는 이상적인 관제(官制)를 엮어 낸 것인데 그 하관(夏官)의 하나로 직방씨(職方氏)가 들어 있다. 직방씨는 각 지방의 일을 맡아 보는 관직으로, ‘천하의 지도주례에 설명된 직방씨의 직책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D-002]천하의 지도 : 정현(鄭玄)의 주에 따르면 여지도(輿地圖) 즉 지도다. 서긍이 고려도경에 그렸던 그림은 설명된 내용으로 보아 실물들을 그린 것들이었을 것이다.

[D-003]사이(四夷)……육적(六狄) : ()에 복속했다는 미개 족속들을 나열한 것이다. 사이(四夷)는 동방의 이(), 남방의 만(), 서방의 융(), 북방의 적(). 그밖의 것들은 개별적인 명칭이 전해지지 않는다. 周禮 夏官 職方氏 鄭司農注

[D-004]행인(行人) : 주례에는 추관(秋官)에 속하는 벼슬로 빈객(賓客)을 맡아 보는 것이 그 직책이다. 대행인(大行人)소행인(小行人) 등이 있다. 행인은 사자의 의미로도 쓰였으나 역시 주례의 행인의 직책과 연결되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고 하겠다.

[D-005]다섯 가지 종류의 일[五物] : 주례우관 소행인의 직장(職掌) 설명에 나오는 말로, 제후국에, 1. 상사가 있으면 부의(賻儀)를 보내 도와 주고, 2. 흉년이 들면 구호 양곡을 거두어 보내 주고, 3. 전사(戰事)가 발생하면 재물을 모아서 지원해 주고, 4. 복된 일이 있으면 경하해 주고, 5. 수해나 화재 같은 재앙이 있으면 위문해 주는 다섯 가지다.

[D-006]외사(外史) : 주례의 춘관(春官)에 속하는 관원으로, 외국에 보내는 명령을 쓰는 일을 맡아보는 것으로 되어 있다.

[D-007]사도(司徒) : 주례지관(地官)의 대사도(大司徒)를 말한 것으로, 그 직장(職掌)은 나라 토지의 그림과 그 백성의 수효를 확정하여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돕는 것으로 되어 있다.

[D-008]송훈(誦訓) : 주례지관에 속하는 관원으로, 사방의 기록에 있는 오래된 일들을 설명해서 임금이 각 지방의 옛일을 살피게 해 주는 것이 그 직책이다.

[D-009]토훈(土訓) : 역시 주례지관에 속하는 관원으로, 지도를 설명해서 각 지방의 사정을 살펴 알게 하는 것이 그 직책이다. 임금이 지방을 순시할 때에는 토훈이 임금의 수레 양곁에 붙어 다니는 것으로 되어 있다.

[D-010]소하(蕭何) : ?~B.C.193. 한 고조 유방이 천하를 평정하는 데 큰 공을 세워 이른바 개국명상(開國名相)으로 꼽혀 장량(張良)한신(韓信)과 함께 삼걸(三傑)로 불리기도 한다. 漢書 卷39

[D-011]장손성(長孫晟) : 552609. 활쏘기를 잘했는데 그가 돌궐(突厥)에 수항사자(受降使者)로 간 일이 있었다. 그는 머리가 영리한 사람이어서 돌궐을 공략할 준비를 미리부터 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隋書 卷51

[D-012]문제(文帝) : ()의 제1대 임금. 그의 재위 기간(581604) 중에 중국이 통일되었다. 隋書 卷1

[D-013]선왕(先王) : 송 철종(宋哲宗, 재위 10851099)을 말함.

[D-014]인재를 뽑아 : 고려의 인재를 말함. 북송(北宋)의 철종(哲宗)은 원부(元符) 2(1099, 고려 숙종4)에 고려로 하여금 학인(學人)을 북송에 보내 빈공과(賓貢科)에 응시하도록 허락하였다. 그래서 고려에서는 자재들을 북송의 국자감에 보내 수학하여 빈공과에 응시하도록 하였다. 宋史 高麗傳

[D-015]윤적(允迪) : 성은 노(). 생몰 연대는 미상. 급사중(給事中)은 문하성(門下省)에 속하는 벼슬로서 제칙박정(制勅駁正)의 일을 관장한다. 고려사인종 원년 6월에는 노윤적의 관직 명이 예부 시랑으로 되어 있다. 송대의 관제(官制)로는 급사중에서 옮겨 가는 다음 자리가 예부 시랑이다

[D-016]묵경(墨卿) : 성은 부(). 생몰 연대는 미상. 세 차례에 걸쳐 고려에 사신으로 왔었다. 尙友錄 卷18중서 사인(中書舍人)은 중서성(中書省)에 속하는 관직으로, 조고제칙(詔誥制勅)을 관장하는데, 문사(文士)로서는 명예스러운 지위로 여겼다.

[D-017]왕우(?) : 고려 예종(睿宗). 11224월에 훙거(薨去). 高麗史 睿宗世家

[D-018]황황자화(皇皇者華)의 시에 노래되었으니 : 황황자화는 시경소아(小雅)의 편명. 사신을 보낼 때 불러 주던 노래로 인용된 구절은 제6장 끝 한 구.

[D-019]왕운(王雲) : ?1126. 자는 자비(子飛), 진사(進士)로 사신을 수행하여 고려에 다녀가 계림지(鷄林志)를 저술하여 비서성(秘書省)의 교서랑(校書郞)에 발탁되었고, 그 후 북송이 멸망할 때까지 형부 상서(刑部尙書)를 거쳐 자정전 학사(資政殿學士)까지 지냈다. 宋史 卷357》 《계림지는 산일되고 전해지지 않는다.

[D-020]그 설()……않았다 : 기록만 있었지 그림은 없었다는 말.

[D-021]쌀을 모아……유제(遺制) : 후한 때의 장수 마원(馬援, B.C.14~49), 외효(隗囂)가 이끄는 군사는 토붕와해(土崩瓦解)할 형세에 있음을 설명하면서 광무제(光武帝) 앞에서 쌀을 모아 산골짜기를 만들고 그 군사의 형세를 지적해 주어 광무제가 그 상황을 잘 알기에 이르렀다는 고사가 있다. 後漢書 卷54

[D-022]장건(張騫) : ?114. 한 무제(漢武帝) 건원(建元) 2(B.C.139)에 대월지(大月氏)에 사신으로 가게 되어 수행원 1백여 인을 거느리고 장안(長安)을 떠났으나 흉노(匈奴)에 잡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몇 차례의 탈주 끝에 대월지를 거쳐 원삭 3(B.C.126)에 간신히 귀국했다. 장건의 견문은 한 무제의 서역 경영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漢書 卷61

[D-023]봉의랑(奉議郞)……사비어대(賜緋魚袋) : 북송(北宋) 원풍(元豐, 10781085) 연간에 개정된 37()의 문산신관(文散新官) 중에서 봉의랑(奉議郞)은 제24계이고 구관(舊官)으로는 저작랑(著作郞)에 해당된다. 종정시(宗正寺)의 속관이다. 宋史 卷169북송 휘종(徽宗)의 정화(政和 11111118) 연간에 고려에 보내는 사신을 국신(國信)’으로 승격시켰는데, 국신은 국신사(國信使)의 약칭으로 나라의 신서(信書)를 가지고 가는 사신이라는 뜻이다. 宋史 卷487 高麗傳국신소(國信所)는 본래 거란[契丹]과의 교빙(交聘)을 관장하던 관서로, 고려에의 사신을 국신으로 승격시킨 것은 당시 북송에서 고려를 국제 관계상 중요시했음을 나타낸 것이다. 서긍은 고려와의 교빙을 담당한 국신소의 관속으로 충원되었는데 그 임무는 인원선박예물 등을 관리하는 일이었다. ‘제할(提轄)’은 인원과 물건 등을 관리하는 관직으로 탁지관(度支官)의 하나이다. ‘비어대(緋魚袋)’는 신분을 나타내는 상징물로, 송의 사륙(賜六) 중 끝의 것. 본래는 하급 조관(下級朝官)20년을 지낸 자에게 내리는 것인데 특지(特旨)로 내리기도 했다. 송대의 비어대는 귀천(貴賤)을 표시하는 데 쓰였으니 당대(唐代)에 조관의 신분증 구실을 했던 것과는 달랐다. 은색 주머니에 붉은 빛의 물고기 형상을 그린 것을 띠 뒤에 달고 다니게 되어 있었다. 唐書 車服志》《宋史 職官志

 

宣和奉使高麗圖經卷第一

建國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1

건국

 

 

 

-[建國] 건국

 

臣聞夷狄君長類以詐力自尊殊名詭號單于可汗無足稱者獨高麗自箕子之封以德取侯後世稍衰他姓亦用漢爵代居其位上有常尊下有等衰故襲國傳世頗可紀錄今謹稽諸史敍其歷代之王作建國記云

 

이적(夷狄)의 군장(君長) 등은 거개 속임수와 폭력으로 스스로를 높이되, 이름을 별나고 괴상하게 하여 선우(單于)’가한(可汗)’이니 하나, 족히 말할 만한 것이 없다. 오직 고려(高麗 우리나라의 범칭)는 기자(箕子)가 봉()해졌을 때부터 덕()으로 후()가 되었는데 후대에 점점 쇠약했으며, 타성(他姓 기자 이후의 여러 왕조를 뜻한다) 역시 한() 나라 관작(官爵)을 써서 갈음하여 그 자리를 차지하였으니, 위에는 일정한 높음이 있고 아래로는 차등이 있다. 그러므로 나라를 이어받고 대를 전하여 감에 있어 자못 기록할 만한 것이 있다.

이제 모든 사적을 고찰하고 그 역대의 왕을 서차(序次)하여 이 건국기(建國記)를 짓는다.

 

 

 

 

 

-[始封] 시봉

 

高麗之先蓋周武王封箕子胥餘於朝鮮寔子姓也歷周至漢高祖十二年燕人衛滿亡命聚黨椎結服役蠻夷浸有朝鮮之地而王之自子姓有國八百餘年而爲衛氏衛氏有國八十餘年先是夫餘王得河神之女爲日所照感孕而卵生旣長善射俗稱善射爲朱蒙因以名之夫餘人以其生異謂之不祥請除之朱蒙懼逃焉遇大水無梁勢不能渡因持弓擊水而呪之魚鱉竝浮因乘以濟至紇升骨城而居自號曰高句驪因以高爲氏而以高麗爲國凡有五部曰消奴部曰絶奴部曰順奴部曰灌奴部曰桂婁部漢武帝滅朝鮮以高麗爲縣屬元菟郡其君長賜之鼓吹伎人常從郡受朝服衣幘縣令主其名籍後稍驕不復詣郡於東界築小城歲時受之因名幘溝漊溝漊者高麗名城也於是始稱王焉王莽發其兵以誅匈奴不至降王爲侯而麗人益寇邊光武中興罷遣邊吏建武八年遣使來朝因復王號列爲外藩安帝以後部衆滋熾雖少鈔暴旋卽賓服初消奴爲王旣衰而桂婁伐之至王宮生而開目能視國人惡之及長壯勇和帝時頻掠遼東傳至王伯固伯固死有二子長曰拔奇者不肖次曰伊夷模國人立焉漢末公孫康擊破伊夷模於其國九都山下國人共立其子位宮位宮亦有勇力好鞍馬以其祖宮生而能視今王亦然句驪謂相似爲位故名曰位宮魏將毌丘儉屠之追至肅 今上御名刻石紀功而還位宮五世孫劉晉永嘉中與遼西鮮卑慕容廆隣廆不能制康帝建元初廆子皝帥師伐之大敗後爲百濟所滅其後慕容寶以其王高安爲平州牧安孫璉義煕中遣長史孫翼獻赭白馬以爲榮州牧高麗王樂浪郡公璉七世孫元隋文帝時率靺鞨寇遼東唐太宗時其東部大人蓋蘇文賊虐不道帝親征之威震遼海高宗又命李勣往平之俘其王高藏裂地而爲郡縣建安東都護府於平壤城以兵鎭守後武后遣將擊殺其王乞昆羽而立其王乞仲象亦病死仲象子祚榮立因有其衆四十萬據于挹婁臣于唐中宗時乃置忽汗州以祚榮爲都督渤海郡王其後遂號渤海初藏之俘也其酋長有劍牟岑者立藏外孫舜爲王又命高偘討平之都護府旣屢遷舊城頗入新羅遺民散奔突厥靺鞨高氏旣絶久而稍復至唐末遂王其國後唐同光元年遣使來朝國王姓氏史失不載長興二年王建權知國事遣使入貢遂受爵以有國云

 

고려의 선조는 대개 주 무왕(周武王)이 조선(朝鮮)에 봉한 기자 서여(箕子胥餘 기는 봉지, 서여는 기자의 이름)이니, 성은 자()이다. ()()을 지나 한 고조(漢高祖) 12(B.C.195)에 이르러 연() 나라 사람 위만(衛滿)이 망명할 때 무리를 모아 추결(椎結 상투를 가리킨다)하고 와서 오랑캐를 복속시켜 차차 조선 땅을 차지하고 왕 노릇을 하였다. 자성(子姓)이 나라를 차지한 지 8백여 년 만에 위씨(衛氏)의 나라가 되었고 위씨가 나라를 차지함이 80여 년이었다.

이에 앞서, 부여(夫餘)의 왕이 하신(河神)의 딸을 얻었는데 햇빛이 비치어 임신하였으며 알[]을 낳았다. 자라서 활을 잘 쏘았는데, 세속에서 활 잘 쏘는 것을 주몽(朱蒙)’이라 하므로, 따라서 주몽이라고 이름지었다. 부여 사람들이 그의 출생이 이상했던 때문에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제거할 것을 청하였다. 주몽이 두려워서 도망하다가 큰물을 만났는데 다리가 없어 건너지 못하게 되매 활을 가지고 물을 치면서 주문(呪文)을 외니, 물고기와 자라가 줄지어 떠올랐다. 그리하여 타고 건너가 흘승골성(紇升骨城만주 혼강(渾江) 유역의 환인(桓仁) 지방으로 비정(比定)된다)에 이르러 살면서 그곳을 스스로 고구려(高句驪)’라 부르고, 따라서 ()’로 성씨를 삼고 나라를 고려(高麗)라 하였다.

모두 5부족(部族)이 있었는데, 소노부(消奴部)절노부(絶奴部)순노부(順奴部)관노부(灌奴部)계루부(桂婁部)가 그것이다.

한 무제(漢武帝)가 조선을 멸하고 고구려를 현()으로 삼아 현도군(玄菟郡)에 소속시키고, 그 군장(君長)에게 고취(鼓吹)와 기인(伎人)을 내려주었다. 고려는 늘 현도군에 가서 조복(朝服)의복(머리에 쓰는 건의 하나)을 받아왔고, 현령(縣令)이 명적(名籍 호적)을 맡아 보았다.

뒤에는 점점 교만하여져 다시 군()에 나아가지 아니하니, 군에서 동쪽 경계에 자그마한 성을 쌓고 세시(歲時)에 받아가게 하였다. 따라서 그 성을 책구루(幘溝漊)’라고 이름하였는데, 고려 말로 성을 구루라 한다. 그리고 이때에 와서 비로소 왕이라 일컬었다.

왕망(王莽)이 고려 군사를 출동시켜 흉노(匈奴)를 치려고 했으나 가지 아니하매 왕을 낮추어 후()로 삼으니, 이 때문에 고려 사람들이 더욱 그의 국경을 침범했다.

광무(光武 동한(東漢)의 시조 유수(劉秀)의 묘호)가 중흥하여 변방에 관원 보내는 것을 폐지하매, 건무(建武) 8(32)에 사신을 보내어 조회(朝會)했다. 따라서 왕호(王號)를 복구시켜 주고 외번(外藩)의 반열(班列)에 끼워 주었다.

안제(安帝 후한 제6대 임금) 이후에는 5()의 민중이 번성하여 비록 다소 노략질하고 난동을 부리기도 했으나, 곧 되돌아서 빈복(賓服)하였다.

처음에는 소노부(消奴部) 출신이 왕이 되었는데 쇠약하여지매, 계루부(桂婁部)가 대신하여 왕이 되었다. 그리하여 왕은 궁()에까지 이르렀는데, (태조왕(太祖王))은 태어나서 바로 눈을 뜨고 능히 봤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미워했다. 궁은 장성하여 매우 건장하고 용맹스러워, 화제(和帝 동한 제5대 임금) 때 자주 요동(遼東)을 침략했다. 그리하여 백고(伯固 신대왕(新大王))까지 전하여 갔고 백고가 죽자 아들 둘이 있었는데, 형인 발기(拔奇)는 불초(不肖)했기 때문에 동생인 이이모(伊夷模)를 나라 사람들이 왕으로 세웠다.

() 나라 말기에 공손강(公孫康 요동 태수 공손도(公孫道)의 아들)이 이이모를 그 나라 환도산(丸都山) 아래에서 격파하니, 나라 사람들이 그 아들 위궁(位宮 삼국사기에는 산상왕(山上王)으로 기록)을 세웠는데, 위궁 또한 용력(勇力)이 있어 말타기를 좋아했다. 그의 선조(先祖) ()이 출생하면서 눈을 뜨고 능히 보았는데, 위궁 역시 그러했다. 고구려에서는 서로 같은 것을 일러 ()’라고 하므로, 이름을 위궁이라고 한 것이다. 뒤에 위() 나라 장수 관구검(毌丘儉)이 쳐들어와 고구려를 무찌르고 숙신(肅愼 여진족의 고대 명칭)에까지 추격해 가서 공로를 돌에 새겨 기록하고 돌아왔다.

위궁의 5대손 유()가 진() 나라 영가(永嘉 307~312) 연간에 요서(遼西)의 선비족(鮮卑族)인 모용외(慕容廆 전연(前燕)의 무선제(武宣帝))와 이웃하였는데, 모용외도 억제하지 못하였다. 강제(康帝) 건원(建元) 초에 모용외의 아들 모용황(慕容皝)이 군사를 거느리고 쳐들어가 크게 격파시켰는데, 뒤에 백제에게 멸망되었다.

그뒤에 모용보(慕容寶)가 고구려 왕 고안(高安)으로 평주목(平州牧)을 삼았다. 안의 손자 연(장수왕의 이름)이 의희(義煕 405~418) 연간에 장사(長史) 손익(孫翼)을 보내어 자백마(?白馬)를 바치니, 영주목 고려왕 낙랑군공(榮州牧高麗王樂浪郡公)을 삼았다.

()7대손 원(), 수 문제(隋文帝) 때에 말갈(靺鞨)을 거느리고 요동(遼東)을 침범했고, 당 태종(唐太宗) 때에는 동부(東部 순노부(順奴部)) 대인(大人) 개소문(蓋蘇文)이 잔학하고 무도하므로, 태종이 친히 정벌하여 위엄이 요동에 떨쳤다.

고종(高宗 당 나라 제3대 임금)이 또한 이적(李勣)을 명하여 가서 평정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왕 고장(高藏)을 사로잡고 그 땅을 갈라 군현(郡縣)을 만들었으며, 안동 도호부(安東都護府)를 평양성(平壤城)에 설치하고 군사를 두어 지켰다.

뒤에 무후(武后)가 장수를 보내어 그 왕 걸곤우(乞昆羽)를 죽이고 걸중상(乞仲象)을 왕으로 세웠으나 또한 병으로 죽으매, 중상의 아들 조영(祚榮대조영(大祚榮))이 즉위하였고 따라서 그 민중 40만을 차지하여 읍루(挹婁)에 웅거하여 당 나라의 신하가 되었다. 중종(中宗 당 나라 제4대 임금) 때에 와서 홀한주(忽汗州)를 설치하고 조영으로 도독 발해군왕(都督渤海郡王)을 삼으니, 그 뒤부터 드디어 이름을 발해라고 하였다.

처음에 고장(高藏)이 사로잡혔을 적에, 그 추장(酋長)에 검모잠(劍牟岑)이라는 자가 있어 고장의 외손자 순()을 왕으로 세우니, 또 고간(高侃)을 시켜 토벌하여 평정하였다. 도호부(都護府)가 이미 누차 옮겨져 옛성이 신라(新羅)로 들어간 것이 많게 되매, 유민들이 돌궐(突厥)말갈(靺鞨)에 분산되었다.

고씨(高氏)가 이미 멸망되었으나 오랜 뒤에는 점차 회복되어, 당 나라 말기에 이르러서는 드디어 그 나라에서 왕 노릇 하였고 후당(後唐) 동광(同光) 원년(923)에는 사신을 보내어 조회하러 왔었는데, 국왕(國王)의 성씨를 사관이 빠뜨리고 기재하지 않았다.

장흥(長興) 2(931)에 왕건(王建)이 나라 일을 권지(權知)하여 사신을 보내어 공물(貢物)을 바치고, 드디어 작위(爵位)을 받아 나라를 차지했다.

[D-001]관구검(毌丘儉) : 삼국(三國) 시대 위() 나라 사람. 고구려 동천왕(東川王) 18(244)에 침입하여 환도성(丸都城)을 함락시켰다. 위의 충신이었으므로, 뒤에 진()을 세운 사마씨(司馬氏)에 의해 제거되었다. 三國志 卷28

[D-002]이적(李勣) :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 나라 사람이다. 요동도 행군대총관(遼東道行軍大總官)으로 고구려 보장왕(寶藏王) 4(645)에 안시성을 침공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했다가 보장왕 25년에 재차 고구려를 쳐서 평양성을 함락시키고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唐書 李勣傳

[D-003]읍루(挹婁) : 고조선 때 만주(滿州) 지방에서 살던 부족(部族). 뒤에 숙신(肅愼), 말갈(靺鞨)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운 여진족을 말한다. 後漢書 東夷列傳

[D-004]검모잠(劍牟岑) : 고구려의 유장(遺將). 벼슬은 대형(大兄). 보장왕 27(668)에 나라가 망하자 신라 문무왕 10(670)에 유민을 규합하여 당병을 물리치고 신라로 가는 도중, 보장왕의 외손자 안승(安勝)을 만나 왕으로 세웠었는데, 뒤에 알력이 생겨 안승에게 피살되었다. 三國史記

 

 

宣和奉使高麗圖經卷第二

世次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2

세차

 

 

-[世次] 세차

臣聞史家之法傳遠者略而近者詳高麗歷世之王臣旣已槩敍之于前矣若乃王氏建國累世尊事本朝至王俁與今王楷又享禮加厚不可不條著之謹因其世次宗系而嗣以楷之行事云

사가(史家)의 법도(法度)가 시대가 먼 것은 간략하게 전하고 가까운 것은 상세하게 한다고 한다. 고려(高麗 고구려)의 역대 임금은 이미 앞에 대략 서술하였거니와, 지금 왕씨(王氏)가 나라를 세워 여러 세대 동안 본조(本朝 송을 말한다)를 존대하여 섬겼고, 왕우(王俁)와 지금 왕해(王楷)에 이르러서는 또한 대접하는 예[享禮]를 더 후하게 하였으니, 조목조목 드러내지 않을 수 없기에, 그 세차(世次)와 종계(宗系)를 적은 다음에 이어서 해()의 행적을 기록한다.

 

 

 

-[王氏]왕씨

 

王氏之先蓋高麗大族也當高氏政衰國人以建賢遂共立爲君長後唐長興三年遂自稱權知國事請命于明宗乃拜建元菟州都督充大義軍使封高麗王晉開運二年建卒子武立漢乾祐末武卒子昭立至皇朝建隆三年太祖皇帝御極奄有萬國昭遣使來朝賜以功臣之號仍加食邑開寶九年昭卒子伷立遣使請命封高麗國王太宗皇帝卽位改封大順軍使太平興國七年伷卒弟治上章乞襲封詔從之淳化六年契丹攻之治畏懦無守臣事北虜遂闕朝貢治卒弟誦立咸平三年其臣朱仁紹入朝具言國人思慕皇化逼於强虜未能如願朝廷嘉之賜詔褒諭大中祥符七年誦卒弟詢權知國事大破契丹復謹修貢且乞降尊號班正朔又求封冊眞宗皇帝初欲俯從議者難之遂寑止從班詔而已天聖中使人屢與女眞偕來貢方物天子加恩報禮優異後詢卒子隆立優柔不斷政荒力屈憚於北虜遂復臣事之而貢使又絶隆卒私諡曰正子德王欽欽弟穆王亨皆朝貢不通而朝廷亦罷遣使亨弟徽煕寧四年以權知國事復修方貢七年九年使人荐至神宗皇帝嘉其忠藎元豐元年命左諫議大夫安燾爲國信使起居舍人陳睦副之自明州定海絶洋而往徽病風痺僅能拜命且乞醫藥上覽其奏從之三年四年連使來朝六年徽卒立凡三十八年諡曰文世子勳立百日卒弟國原公運立命左諫議大夫楊景略爲祭奠使禮賓使王舜封副之右諫議大夫錢勰爲弔慰使西上閣門副使朱球副之七年七月自密之板橋航海而往八年哲宗皇帝踐祚使來奉慰又遣使來賀運立四年卒諡曰宣子堯立未閱歲而以病廢國人乃請其叔煕攝政未幾而堯卒諡曰懷煕乃襲位自元祐五年至元符元年貢使再至三年遣使綏撫遵元豐故事也皇帝嗣位遹追來孝丕承先烈薄海內外無不臣妾德被藩服恩行海隅迺者崇寧元年命戶部侍郞劉逵給事中吳栻持節往使禮物豐腆恩綸昭回所以加惠麗國而褒寵鎭撫之以繼神考之志益大而隆二年五月由明州道梅岑絶洋而往煕避契丹嫌名改煕曰顒然自神考有作務來遠人天相睿謨王徽襲爵以承其旨殆非偶然徽忠順循理知尊中國館待使華禮意勤厚至遇賈人亦有體貌治尙仁恕享國久長宜矣崇寧二年顒卒年五十世子俁立自長興三年壬辰迨今宣和六年甲辰王氏有國九世凡十七人合一百九十三年云

왕씨의 선조는 대개 고려의 큰 씨족이다. 고씨(高氏)의 정사가 쇠퇴하게 되매, 나라 사람들이 왕건을 어질게 여겨 드디어 함께 군장(君長)으로 세웠다. 후당(後唐) 장흥(長興) 3(932)에 마침내 스스로 권지국사(權知國事)라 칭하고 명종에게 봉작(封爵)하여 주기를 청하니, 곧 왕건에게 원도주도독(元菟州都督 고려사에는 원도가 현도(玄菟)로 나옴)을 제수(除授)하고 대의군사(大義軍使)에 충임(充任)하여 고려의 왕으로 봉하였다.

(후진) 개운(開運) 2(945)에 왕건이 죽고 아들 무(혜종(惠宗))가 즉위하였으며, (후한) 건우(乾祐) 말년에 무가 죽고 아들 소()가 즉위하였다.

황조(皇朝) 건륭(建隆) 3(962), 태조 황제(太祖皇帝)가 등극하여 만국을 다 차지하자 소()가 사신을 보내어 조회하러 왔으므로, 공신 호를 내리고 이어 식읍(食邑)을 더하였다.

개보(開寶) 9년에 소가 죽고 아들 주(경종(景宗))가 즉위하여 사신을 보내어 봉작(封爵)을 청하므로 고려국왕으로 봉하였고, 태종 황제(太宗皇帝)가 즉위하여 대순군사(大順軍使)로 고쳐 봉하였다.

태평흥국(太平興國) 7(982)에 주가 죽으매, 아우 치(성종(成宗)의 이름. 성종은 경종(景宗)의 종제(從弟))가 글을 올려 계승하여 봉작 받기를 원하므로 조칙(詔勅)을 내려 허락하였다. 순화(淳化) 6(순화 4년의 오기인듯)에 거란[契丹]이 공격하자 치가 나약하여 지키지 못하고 북로(北虜)를 신하가 되어 섬기면서 드디어 조공(朝貢)을 하지 않았다.

치가 죽고 아우 송(목종(穆宗)의 이름)이 즉위하였다. 함평(咸平) 3(1000)에 그의 신하 주인소(朱仁紹)가 조회하러 들어와 말하기를 나라 사람들이 황제의 덕화(德化)를 사모하나, 강한 오랑캐에게 핍박받아 소원대로 하지 못한다.’고 하므로, 조정에서 아름답게 여겨 조서(詔書)를 내려 포상하고 효유(曉諭)하였다.

대중상부(大中祥符) 7(1014)에 송이 죽고 아우 순(현종(顯宗)의 이름)이 나랏일을 권지(權知)하여 거란을 크게 깨뜨리고 다시 조공(朝貢)을 바쳤으며, 존호(尊號)를 내릴 것과 정삭(正朔)의 반사(頒賜)를 바랐고, 또한 봉책(封冊)을 청하였다. 진종 황제(眞宗皇帝)는 처음에 그대로 따르려고 하다가 의논하는 사람들이 어렵게 여기므로 드디어 중지하고, 따라서 조서만 내렸다.

천성(天聖) 연간에 사신이 여러 번 여진(女眞)과 함께 와서 방물(方物)을 바치므로, 천자가 은혜를 내려 보답하는 예()를 특별히 두텁게 하였다.

순이 죽고 아들 융()이 즉위했는데, 유약하고 결단성이 없어서 정사가 어지러워지고 힘이 모자라 북로(北虜)를 꺼리다가 드디어 다시 신하로 그들을 섬겼다. 그리하여 조공하는 사신이 끊어졌다. 융이 죽으매, ()이라고 사시(私諡)하였다.

아들 덕왕(德王) ()과 흠의 아우 목왕(穆王) ()도 모두 조공하러 오지 않았고, 조정에서도 사신 보내는 것을 폐지했다.

형의 아우 휘(문종(文宗)의 이름)가 희령(?) 4(1071)에 권지국사(權知國事)로서 다시 방물(方物)을 바쳤고 7년과 9년에 사신이 거듭 왔으므로 신종 황제(神宗皇帝)가 그 충성을 아름답게 여겨, 원풍(元豐) 원년(1078)에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안도(安燾)로 국신사(國信使)를 삼고 기거사인(起居舍人) 진목(陳睦)을 부사(副使)로 임명하여 명주(明州) 정해(定海)에서 바다를 건너갔었다.

이때 휘()는 풍병(風病)으로 마비되어 겨우 명령을 받았고, 또한 의약(醫藥)을 청하므로 황상께서는 그가 아뢴 것을 보고 그대로 따랐다. 3년과 4년에도 계속 사신이 와서 조회했다. 6년에 휘가 죽으니, 왕위에 있은 지 무릇 38년이었고 시호를 ()’이라고 했다.

세자(世子) ()은 즉위한 지 백일만에 죽고 아우 국원공(國原公) (선종(宣宗)의 이름)이 즉위했는데, 이때에 좌간의대부 양경략(楊景略)을 제전사(祭奠使), 예빈사(禮賓使) 왕순봉(王舜封)을 부사(副使)로 임명하고,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 전협(?)을 조위사(弔慰使), 서상각문 부사(西上閣門副使) 주구(朱球고려사에는 송구(宋球)로 나옴)를 부사로 임명하여, 77월에 밀수(密水) 판교(板橋)에서 배를 타고 건너갔다. 8(1085)에 철종 황제(哲宗皇帝)가 즉위하매, 위문하는 사신과 하례하는 사신을 함께 보내왔다.

()이 즉위한 지 4년만에 죽으니, 시호를 ()’이라고 했다. 아들 요()는 즉위한 지 1년도 못 되어 병으로 앓아눕자 나라 사람들이 그의 숙부(叔父) ()에게 섭정(攝政)하기를 청했다. 얼마 되지 않아 요가 죽으니, 시호를 ()’라고 했다.

희가 곧 왕위를 승습하여, 원우(元祐) 5(1090)에서 원부(元符) 원년까지에 공사(貢使)가 두 번이나 왔다. 그래서 3년에 무마하는 사신을 보냈는데, 이것은 원풍(?) 때의 고사에 따른 것이다.

황제(皇帝)가 왕위를 이어받아 선대를 추모하여 효성을 이루고 거룩하게 선조들의 업적을 계승하매, 사해(四海)의 안팎이 신하 노릇 하지 않는 사람이 없어 덕이 번복(藩服)에 덮이고 은혜가 사해에 퍼졌다.

그리하여 숭녕(崇寧) 원년(1102)에 호부 시랑(戶部侍郞) 유규(劉逵)와 급사중(給事中) 오식(吳拭)을 명하여 절()을 가지고 사신가도록 하되, 예물(禮物)을 풍성하게 하고 은륜(恩綸)이 분명하였다. 이는 고려에 은덕을 내리어 상주어 신임하고 무마함으로써 신고(神考 죽은 아버지)의 뜻을 더욱 거룩하고 훌륭하게 하였다. 25월에 명주도(明州道) 매잠(梅岑)에서 바다를 건너갔는데, 이때 희()가 거란 왕의 이름을 혐명(嫌名 임금 이름 글자를 피하여 쓰지 않음)하여 희()를 고쳐 옹()이라고 했다. 그러나 신고 때부터 시작하여 힘써 먼 나라 사람들을 오도록 하매, 하늘이 슬기로운 계책을 도와 주어 고려 임금 휘()가 봉작(封爵)을 승습하고 그 뜻을 이어 받드니, 참으로 우연한 일이 아니다.

휘는 충순(忠順)하여 사리를 따르며 중국을 높일 줄 알고, 사신을 대접하는 예와 뜻이 근간하고 후하였으며 상인을 대접하는 데 있어서도 역시 체모가 있었고 정사는 인자와 용서를 숭상하니, 나라를 장구하게 누림이 당연하다. 숭녕(崇寧) 2년에 옹()이 죽으니 나이 50세였고, 세자 우()가 즉위하였다.

장흥(長興) 3년 임진(931)으로부터 금상 선화(宣化) 6년 갑진(1124)까지 왕씨가 나라를 차지한 지 9()인데, 무릇 17인으로서 합하면 193년이다.

[D-001](후진)……즉위하였다 : 태조 왕건이 승하한 해는 943년이고, 혜종의 뒤를 이은 것은 동생 정종(定宗)이며, 정종의 뒤를 광종(光宗)이 계승했으므로 광종은 혜종의 아들이 아니고 동생이다. 이런 착오는 본서에 무수하므로 일일이 바로잡지 않는다.

[D-002]식읍(食邑) : 국가에서 종실(宗室)과 공신에게 내려주어 거기서 나오는 조세를 받아 쓰게 한 고을인데, 채지(采地)라고도 한다. 사기(史記)번쾌전(?)무성(武成)6천 호를 식읍으로 하사한다.” 하였다. 그러나 후대에 내려오면서 뜻이 변하여 봉작에는 으레 붙는 투식으로 바뀌었다.

[D-003]사시(私諡) : 친지나 제자들이 지어 주는 시호. 지위가 낮아 임금에게 시호를 받지 못한 덕망 높은 선비들이 가졌다.

 

-[世系]세계

 

 

 

()-()-()-()

                              치()

                              송()

                              순()-()-()

                                                  형()

                                                  휘()-()

                                                  운()-()

                                                  옹()-()-()

[C-001]세계(世系) : 본 세계는 착오가 많아 신빙할 것이 못 된다.

 

 

 

-[高麗國王 王楷] 고려국왕 왕해

 

楷楷王俁之世子也壬寅春三月俁病革召李資謙入議嗣事夏四月俁薨資謙等乃立楷爲王楷眉宇疏秀形短而貌豐肉勝於骨性慧多學亦甚嚴明在春宮時官屬有過必遭譴辱旣立雖幼沖國官頗畏憚之迺者信使至彼受詔拜表行燕饗禮升降進退綽有成人之風亦當爲東夷之賢王也

 

()는 왕우(?)의 세자이다. 임인년 봄 3월에 우가 병이 위독하매 이자겸(李資謙)을 불러들여 후사(後嗣) 일을 의논했었는데, 4월에 우가 죽자 이자겸 등이 곧 해를 세워 왕을 삼았다.

해는 용모가 준수하고 키는 작으나 얼굴이 풍후하며 살이 찐 편이었다. 성격이 지혜롭고 배운 것이 많으며, 또한 매우 엄명하며, 동궁(東宮)에 있을 때 관속(官屬)들이 과오를 범하면 반드시 꾸지람을 당했다. 즉위하여서는 비록 나이가 어렸지만 나라 관원들이 자못 두려워하고 꺼렸다.

이번에 신사(信使)가 가매, 그가 조서(詔書)와 표문(表文)을 받고 연향(燕饗)하는 예를 거행하는데, 올라가고 내려감과 나아가고 물러감이 여유가 있어 성인(成人)의 풍도가 있으니, 역시 동이(東夷)의 어진 왕이 됨직했다.

 

 

 

 

 

宣和奉使高麗圖經卷第三

城邑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3

성읍

 

 

 

 

-[城邑]성읍

 

臣聞四夷之君類多依山谷就水草隨時遷徙以爲便適固未嘗知有國邑之制西域車師鄯善僅能築墻垣作居城史家卽指爲城郭諸國蓋誌其異也若高麗則不然立宗廟社稷治邑屋州閭高堞周屛模範中華抑箕子舊封而中華遺風餘習尙有存者朝廷間遣使存撫其國入其境城郭巋然實未易鄙夷之也今盡得其建國之形勢而圖之云

 

사이(四夷)의 군장(君長)들이 흔히 산과 계곡을 의지하거나 물과 풀이 있는 곳을 따라 수시로 옮겨다니기를 편리하게 여겼으므로, 원래부터 나라에 도읍 제도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서역(西域)의 거사(車師)선선(鄯善) 등 나라가 겨우 담장을 쌓아 거성(居城)으로 만들 줄 알았으므로, 사가(史家)들이 그것을 가리켜 성곽 제국(城郭諸國)’이라 하였으니, 대개 그 특이함을 기록한 것이다.

그러나 고려 같은 나라는 그렇지 아니하여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세우고, 고을과 마을을 만들고, 높은 성첩(城堞)을 둘러 쌓아 중화(中華)를 모방하였으니, 아마도 이것은 기자(箕子)가 봉작(封爵) 받은 옛땅이라서 중화의 전해 오는 풍속과 습관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조정에서 간간이 사신을 보내어 그 나라를 위무하기 위하여 그들의 지경에 들어가면, 성곽들이 우뚝우뚝하여 실로 쉽사리 업신여길 수 없다. 이제 그 나라를 세운 형세를 모두 파악하여 그림으로 그린다.

 

 

 

-[封境] 봉경

 

高麗南隔遼海西距遼水北接契丹舊地東距大金又與日本流求001黑水毛人等國犬牙相制唯新羅百濟不能自固其圉爲麗人所幷今羅州廣州道是也其國在京師之東北自燕山道陸走渡遼而東之其境凡三千七百九十里若海道則河北京東淮南兩浙廣南福建皆可往今所建國正與登萊濱棣相望自元豐以後每朝廷遣使皆由明州定海放洋絶海而北舟行皆乘夏至後南風風便不過五日卽抵岸焉舊封境東西二千餘里南北一千五百餘里今旣幷新羅百濟東北稍廣其西北與契丹接連昔以大遼爲界後爲所侵迫乃築來遠城以爲阻固然亦恃鴨綠以爲險也鴨綠之水原出靺鞨其色如鴨頭故以名之去遼東五百里經國內城又西與一水合卽鹽難水也二水合流西南至安平城入海高麗之中此水最大波瀾淸澈所經津濟皆艤巨艦其國恃此以爲天塹水闊三百步在平壤城西北四百五十里遼水東南四百八十里自遼已東卽舊屬契丹今虜衆已亡大金以其地不毛不復城守徒爲往來之道而已鴨綠之西又有白浪黃嵒二水自頗利城行數里合流而南是爲遼水唐正觀間李勣大破高麗於南蘇旣渡怪其水淺狹問之云是遼源以此知前古未嘗恃此水以爲固此高麗所以退保鴨綠之東歟

[-001]:

 

고려는, 남쪽은 요해(遼海)로 막히고 서쪽은 요수(遼水)와 맞닿았고 북쪽은 옛 거란 땅과 연속되고 동쪽은 금() 나라와 맞닿았고, 또 일본유구담라(聃羅)흑수(黑水)모인(毛人) 등 나라와 견아상제(犬牙相制)의 모양으로 되어 있다. 오직 신라와 백제가 스스로 그 국경을 견고히 하지 못하여 고려 사람들에게 합병(合倂)되니, 지금의 나주도(羅州道)와 광주도(廣州道)가 이것이다.

그 나라는 경사(京師 남송의 서울 변경)의 동북쪽에 있는데, 연산도(燕山道)로부터 육로(陸路)로 가다가 요수(遼水)를 건너 동쪽으로 그 나라 국경에 이르기까지, 무릇 3790리이다.

만약 바닷길로라면, 하북(河北)경동(京東)회남(淮南)양절(兩浙)광남(廣南)복건(福建)에서 모두 갈 수 있는데, 지금 세워진 나라는 바로 등주(登州)내주(萊州)빈주(濱州)체주(棣州)와 서로 바라다보인다.

원풍(元豐) 이후부터 매양 조정에서 사신을 보내려면, 언제나 명주(明州) 정해(定海)에서 출항(出航)하여 바다를 가로질러 북으로 간다. 배 운행은 모두 하지(夏至) 뒤에 남풍(南風)의 바람 편을 이용하는데, 5일이 못 되어 곧 해안(海岸)에 닿는다.

옛적에는 봉경(封境)이 동서는 2천여 리, 남북은 15백여 리이었는데, 지금은 이미 신라와 백제를 합병하여 동북쪽은 조금 넓어졌지만 그 서북쪽은 거란[契丹]과 연속되었다.

옛적에는 대요(大遼)와 경계를 했었는데, 뒤에 대요의 침벌을 받게 되매, 내원성(來遠城)을 쌓아 요새로 삼았다. 그러나 이것은 압록강을 믿고 요새로 한 것이다.

압록강의 물 근원은 말갈(靺鞨)에서 나오는데, 그 물 빛깔이 오리의 머리 빛깔 같으므로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요동(遼東)에서 5백 리쯤 흘러가다 국내성(國內城)을 지나서 또 서쪽으로 흘러 한 강물과 합류하니, 이것이 염난수(鹽難水)이다. 두 강물이 합류하여 서남쪽으로 안평성(安平城)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고려에서는 이 강물이 가장 크다. 물결이 맑고 투명하여 지나는 나루터마다 모두 큰 배가 정박해 있는데, 그 나라에서 이를 천참(天塹)으로 여긴다. 강물의 너비가 3백 보()인데, 평양성(平壤城)에서 서북으로 450리이고, 요수(遼水)에서 동남으로 480리에 있다. 요수에서 동쪽은 옛날 거란에 소속되었는데, 지금은 그 오랑캐 무리가 이미 멸망되었고, 대금(大金)에서는 그 땅이 불모지(不毛地)이기 때문에 다시 성을 쌓아 지키지 않는다. 그리하여 한갓 왕래하는 길이 되었을 뿐이다.

압록강 서쪽에 또한 백랑(白浪)황암(?) 두 강이 있는데, 파리성(頗利城)에서 2리쯤 가다가 합류하여 남쪽으로 흐른다. 이것이 요수(遼水)이다.

() 나라 정관(貞觀) 연간(627~649)에 이적(李勣)이 남소(南蘇)에서 고려(고구려를 말함)를 크게 깨뜨리고, 강을 건너가서 그 강물이 매우 얕고 좁은 것을 괴이하게 여겨 물으니, ‘이것이 요수(遼水)의 근원이라고 했다. 이로써 전고(前古)에는 일찍이 이 강을 믿어 요새로 여기지 않았음을 알 수 있고, 이래서 고려가 물러들어가 압록강의 동쪽을 지키는 것이 아니겠는가?

 

 

 

 

-[形勢] 형세

 

高麗素知書明道理拘忌陰陽之說故其建國必相其形勢可爲長久計者然後宅之自漢末徙九都山下後魏至唐皆居平壤至李勣平其地建都護府則嘗遁寄稍東不詳其所唐末復國當是今所都地蓋嘗爲開州今尙置開成001其城北據崧山其勢自乾亥來至山之脊稍分爲兩岐更相環抱陰陽家謂之龍虎臂以五音論之王氏商姓也西位欲高則興乾西北之卦也來崗亥落其右一山屈折自西而北轉至正南一峯特起狀如覆盂因以爲桉外復有一桉其山高倍坐向相應賓主丙壬其水發源自崧山之後北直子位轉至艮方委蛇入城由廣化門稍折向北復從丙地流出巳上蓋乾爲金金長生在巳是爲吉卜自崧山之半下瞰城中左溪右山後崗前嶺林木叢茂形勢若飮澗蒼虯宜其保有東土歷年之久而常爲聖朝臣屬之國也

 

[-001]開成 : 城府

 

고려는 본디 글을 알아 도리에 밝으나 음양설(陰陽說)에 구애되어 꺼리기 때문에, 그들이 나라를 세움에는 반드시 그 형세를 관찰하여 장구한 계책을 세울 수 있는 곳이라야 자리잡는다.

() 나라 말엽(末葉)부터는 환도산(丸都山) 아래로 옮겼고, 후위(後魏)부터 당 나라 때까지는 모두 평양(平壤)에 있다가, 이적(李勣)이 그곳을 평정하고 도호부(都護府)를 설치함에 이르러서는, 도망하여 점점 동쪽으로 가서 살았기 때문에 그곳을 자세히 알 수 없다.

당 나라 말엽에 나라를 복구한 데가 곧 지금 도읍한 곳에 해당되는데, 대개 전에 개주(開州)이던 곳으로, 지금도 오히려 개성부(開城府)가 설치되어 있다.

그 성()은 북쪽으로 숭산(崧山송악산)에 의지했는데, 그 형세가 건해방(乾亥方)에서 뻗어내려오다가 산 등성이에 이르러서는 점차 나뉘어 두 줄기가 되어 다시 서로 감고 돌았으니, 음양가들이 말하는 청룡(靑龍)과 백호(白虎)이다.

오음(五音)으로 논한다면, 왕씨(王氏)는 상()에 해당하는 성이니, 서편이 높게 보이면 흥하는데, ()은 서북에 해당하는 괘()이다. 뻗어내린 산등성이가 해방(亥方 서북쪽)에서 끊어지고, 그 오른쪽에서 산 하나가 꺾어져서 서쪽에서 북쪽으로 돌다가 정남(正南)에 이르러 봉우리 하나가 우뚝 솟아 형상이 사발을 엎어놓은 것 같았는데 안산(案山)이 되었다.

그 밖에 또 안산 하나가 있어 그 높이가 배나 되는데, 좌향(坐向)이 서로 호응하여 객산(客山)은 남방[]에 있고 주산(主山)은 북방[]에 있다. 물은 숭산(崧山) 뒤에서 발원(發源)하여 북쪽[子位]으로 곧게 흐르다가 돌아서 동북쪽[艮方]에 이르러 꾸불꾸불하게 성으로 들어와 광화문(廣化門)에서 조금 꺾어져 북으로 향하다가 다시 남쪽[丙地]으로 흘러나간다.

이상은 대개 건괘(乾卦)는 금()이 되고 금의 장생방(長生方 가장 좋은 방위)은 동남쪽[巳方]에 있는 것이니, 이는 길한 자리가 되는 것이다.

숭산 중턱에서 성안을 내려다보면, 왼쪽에는 시내, 오른쪽에는 산, 뒤는 등성이, 앞에는 고개인데, 숲이 무성하여 형세가 시냇물을 마시는 푸른 용과 같으니, 그 자리가 동토(東土)에서 역년(歷年)을 오래도록 보유하면서, 항시 성조의 속국이 됨직하였다.

 

[D-001]오음(五音) : ()()()()()의 다섯 음.

 

 

 

 

 

-[國城] 국성

高麗自唐以前蓋居平壤本漢武帝所置樂浪郡而唐高宗所建都護府也以唐志考之平壤城乃在鴨綠水東南唐末高麗君長懲累世兵革之難稍徙而東今王城在鴨綠水之東南千餘里非平壤之舊矣其城周圍六十里山形繚繞雜以沙礫隨其地形而築之外無濠壍不施女墻列太上御名延屋如廊廡狀頗類敵樓雖施兵仗以備不虞而因山之勢非盡堅高至其低處則不能受敵萬一有警信知其不足守也外門十二各有摽名舊誌纔知其七今盡得之正東曰宣仁舊不見名止曰東大門曰崇仁舊曰東門 曰安定舊曰須恤乃麗人方言也東南曰長霸正南曰宣華舊不見門 曰會賓曰泰安舊名貞觀今易此名西南曰光德舊曰正州亦通其路耳州郡非門名所宜正西曰宣義曰狻猊正北曰北昌舊名崧山特登山之路非本名也東北曰宣祺舊名金郊今易此西南隅王府宮室居之其東北隅卽順天館極加完葺西門亦壯麗蓋爲中朝人使設也自京市司至興國寺橋由廣化門以迄奉先庫爲長廊數百間以其民居隘陋參差不齊用以遮蔽不欲使人洞見其醜東南之門蓋溪流至巳方衆水所會之地其餘諸門官府宮祠道觀僧寺別宮客館皆因地勢星布諸處民居十數家共一聚落井邑街市無足取者總其建國大槩而圖之其餘則互見於別篇

 

고려는, 당 나라 이전에는 대개 평양(平壤)에 있었으니, 본래 한 무제(漢武帝)가 설치했던 낙랑군(樂浪郡)이며, 당 고종(唐高宗)이 세운 도호부(都護府)이다. 당지(唐志)를 상고하여 보면 평양성은 바로 압록강 동남쪽에 있다하였는데, 당 나라 말엽에 고려의 군장(君長)들이 여러 대를 겪은 전란을 경계하여 점점 동쪽으로 옮겨갔다. 지금 왕성(王城)은 압록강의 동남쪽 천여 리에 있으니, 옛 평양이 아니다.

그 성은 주위가 60리이고, 산이 빙 둘러 있으며 모래와 자갈이 섞인 땅인데, 그 지형에 따라 성을 쌓았다. 그러나 밖에 호참(濠壍)과 여장(女墻 성가퀴)을 만들지 않았으며, 줄지어 잇닿은 집은 행랑채와 같은 형상인데 자못 적루(敵樓)와 비슷하다. 비록 병장(兵仗)을 설치하여 뜻밖의 변을 대비하고 있으나, 산의 형세대로 따랐기 때문에 전체가 견고하거나 높게 되지 않았고, 그 중 낮은 곳에 있어서는 적을 막아낼 수 없었으니, 만일 위급한 일이 있을 때는 지켜내지 못할 것을 알 수 있다.

열 두 외문(外門)에 각각 표시한 이름이 있었는데, 옛 기록에는 겨우 그 중 7곳을 말했으나 지금 다 알 수 있다. 정동(正東)에는 선인(宣仁)- 옛 기록에는 이름을 표시하지 않고 다만 동대문이라고 하였다. -숭인(崇仁)- 옛 기록에는 동문이라고 했다. -안정(安定)- 옛 기록에는 수휼(須恤)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고려 사람들의 방언이다. - 이 있고, 동남에는 장패(長覇)가 있고, 정남에는 선화(宣華)- 옛 기록에는 문이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다. -회빈(會賓),태안(泰安)- 옛 기록에는 정관(貞觀)이었는데 지금 이 이름으로 바뀌었다. - 이 있고, 서남에는 광덕(光德)- 옛 기록에는 정주(正州)라 했는데 또한 그쪽 길과 통한다. 군을 문 이름으로 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 - 이 있고, 정서에는 선의(宣義)산예(狻猊)가 있고, 정북에는 북창(北昌)- 옛 기록에는 숭산(崧山)이라 했다. 단지 등산하는 길이요 본 이름이 아니다. - 이 있고, 동북에는 선기(宣祺)- 옛 이름은 금교(金郊)였는데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 가 있다.

서남 모퉁이에는 왕부(王府), 궁실(宮室)이 있고, 그 동북 모퉁이에 있는 것이 곧 순천관(順天館)인데 매우 완전하게 수리되어 있으며, 서문(西門)도 또한 웅장하고 화려하니, 대개 중국에서 사신 오는 사람을 위해서 설치한 것이다.

경시사(京市司)에서 흥국사(興國寺) 다리까지와, 광화문(廣化門)에서 봉선고(奉先庫)까지에 긴 행랑집 수백 칸을 만들었는데, 이것은 민중들의 주거가 좁고 누추하며 들쭉날쭉 가지런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으로 가려서 사람들에게 그 누추함을 훤하게 들여다보이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다.

동남쪽의 문은, 대개 시냇물이 동남쪽[巳方]으로 흐르니 모든 물이 모이게 되는 곳이요, 그 나머지 모든 문과 관부(官府)궁사(宮祠)도관(道觀)승사(僧寺)별궁(別宮)객관(客館)도 모두 지형에 따라 여러 곳에 별처럼 널려 있다.

백성들의 주거는 열 두어 집씩 모여 하나의 마을을 이루었고, 바둑판 같은 시가지는 취할 만한 것이 없었다.

이상으로 건국(建國)의 대략을 총괄하여 그렸고, 그 나머지는 다른 편()에 상호 찾아볼 수 있다.

 

 

 

-[樓觀] 누관

 

 

王城昔無樓觀自通使以來觀光上國得其規模稍能 太上御名 治初惟王城宮寺有之今官道兩旁與國相富人稍稍僭侈入宣義門每數十家則建一樓俯近興國寺二樓相望左曰博濟右曰益平王府之東二樓臨衢不見摽牓簾幙華煥聞皆王族游觀之所人使經由則有婦女窺覘於其間衣服之飾不異民庶或云王每出游則其族始易錦繡也

 

왕성(王城)은 과거에는 누관(樓觀)이 없다가 사신을 통한 이래로, 상국(上國)을 관광(觀光)하고 그 규모를 배워 차차 건축하게 되었다. 당초에는 오직 왕성의 왕궁이나 절에만 있었는데, 지금은 관도(官道 나라에서 개설한 도로) 양쪽과 국상(國相 일국의 재상), 부자들까지도 두게 되어 점점 사치해졌다. 그래서 선의문(宣義門)을 들어가면 수십 가호마다 누각(樓閣) 하나씩이 세워져 있다.

흥국사(興國寺) 근처에 두 누각이 마주 보고 있는데, 왼쪽 것은 박제(博濟)’라 하고 오른쪽 것은 익평(益平)’이라 한다. 왕부(王府)의 동쪽에도 누각 둘이 거리에 임해 있어, 현판은 보이지 않으나 발과 장막이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들으니, 모두 왕족들이 놀이하는 곳이라고 했다.

사신이 지나가게 되면, 부녀자들이 그 속에서 내다보는데 의복 꾸밈새가 서민들과 다르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왕이 놀러 올 때면 왕족들이 비로소 비단 옷으로 바꾸어 입는다고 했다.

 

 

 

 

 

-[民居] 민거

 

 

王城雖大磽确山壟地不平曠故其民居形勢高下如蜂房蟻穴誅茅爲蓋僅庇風雨其大不過兩椽比富家稍置瓦屋然十纔一二耳舊傳唯倡優所居揭長竿以別良家今聞不然蓋其俗淫祠鬼神亦厭勝祈禳之具耳

왕성이 비록 크기는 하나, 자갈땅이고 산등성이여서 땅이 평탄하고 넓지 못하기 때문에, 백성들이 거주하는 형세가 고르지 못하여 벌집과 개미 구멍 같다. 풀을 베어다 지붕을 덮어 겨우 풍우(風雨)를 막는데, 집의 크기는 서까래를 양쪽으로 잇대어 놓은 것에 불과하다. 부유한 집은 다소 기와를 덮었으나, 겨우 열에 한두 집뿐이다.

전에는 전하기를 창우(倡優)들이 사는 집은 긴 장대를 세워 양가(良家)와 구별한다.’ 하였는데, 지금 들으니 그렇지 않고, 대개 그 풍속이 예절에 어긋난 제사와 귀신을 받들어서 그것들 역시 굿하고 기양(祈禳)하는 도구일 뿐이었다.

 

 

 

 

 

-[坊市 ] 방시

王城本無坊市惟自廣化門至府及館皆爲長廊以蔽民居時於廊間榜其坊門曰永通曰廣德曰興善曰通商曰存信曰資養曰孝義曰行遜其中實無街衢市井至有斷崖絶壁蓁莽繁蕪荒墟不治之地特外示觀美耳

 

왕성(王城)에는 본래 방시가 없고, 광화문(廣化門)에서 관부(官府) 및 객관(客館)에 이르기까지, 모두 긴 행랑을 만들어 백성들의 주거를 가렸다. 때로 행랑 사이에다 그 방()의 문을 표시하기를, ‘영통(永通)’광덕(廣德)’흥선(興善)’통상(通商)’존신(存信)’자양(資養)’효의(孝義)’행손(行遜)’이라 했는데, 그 안에는 실제로 시장 거리나 민가는 없고, 적벽에 초목만 무성하며, 황폐한 빈터로 정리되지 않은 땅이 있기까지 하니, 밖에서 보기만 좋게 한 것뿐이다.

 

 

 

 

 

-[貿易] 무역

高麗故事每人使至則聚爲大市羅列百貨丹漆繒帛皆務華好而金銀器用悉王府之物及時鋪陳蓋非其俗然也崇寧大觀使者猶及見之今則不然蓋其俗無居肆惟以日中爲虛男女老幼官吏工技各以其所有用以交易無泉貨之法惟紵布銀?以准其直至日用微物不及疋兩者則以米計?銖而償之然民久安其俗自以爲便也中間朝廷賜予錢寶今皆藏之府庫時出以示官屬傳玩焉

 

고려의 고사(故事), 매양 사신이 이르게 되면 사람들이 모여 큰 저자를 이루고 온갖 물화(物貨)를 나열하는데, 붉고 검은 비단은 모두 화려하고 좋도록 하려고 힘쓴다. 그러나 금과 은으로 만든 기용(器用)은 모두 왕부(王府)의 것을 때에 맞추어 진열한 것이지 실제로 그 풍속이 그런 것은 아니다. 숭녕(崇寧)이나 대관(大觀) 때의 사자는 이런 것을 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대개 그 풍속이 사람이 살면서 장사하는 가옥은 없고 오직 한낮에 시장을 벌여 남녀노소관리공기(工技)들이 각기 자기가 가진 것으로써 교역(交易)하고, 돈을 사용하는 법은 없다.

오직 저포(紵布)나 은병(銀鉼)으로 그 가치를 표준하여 교역하고, 일용(日用)의 세미한 것으로 필()이나 냥()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쌀로 치수(錙銖)를 계산하여 상환한다. 그러나 백성들은 오래도록 그런 풍속에 익숙하여 스스로 편하게 여긴다.

중간에 조정에서 전보(錢寶 화폐)를 내려 주었는데, 지금은 모두 부고(府庫)에 저장해 두고 때로 내다 관속(官屬)들에게 관람시킨다 한다.

 

 

 

 

 

-[郡邑] 군읍

縣之建實不副名特聚落之繁處自國之西北與契丹大金接境粗有壘壍其東南濱海亦有建於島嶼者惟西京最盛城市略如王城又有三京四府八牧又爲防禦郡一百一十八爲縣鎭三百九十爲洲島三千七百皆設守令監官治民惟牧守都護公廨數楹令長則隨所在舍於居民夷政租賦之外無健訟在官者公田不足以資用則亦仰給於富民云

 

주현(州縣)의 설치는 그 명칭에 맞지 않고, 취락(聚落)이 번성한 곳일 뿐이다. 나라의 서북(西北)으로부터 거란[契丹], 대금(大金)의 접경에 이르기까지 간간이 보루(堡壘)와 참호가 있고, 그 동남쪽은 해변에 닿았는데 섬에도 설치한 것이 있다.

오직 서경(西京 평양)이 가장 번성하여 성과 시가가 거의 왕성(王城)과 같다. 또한 3()4()8()이 있고, 또 방어하는 군() 118과 현진(縣鎭) 390, 주도(洲島) 37백을 설치하고 모두 수령(守令)감관(監官)을 두어 백성을 다스린다. 그런데 목()()도호(都護)의 공해(公廨)만은 여러 칸이고, 영장(令長)은 소재에 따라 거주하는 백성들의 집에 거처한다.

고려의 정사는 조부(租賦) 이외에는 고을에서 송사하는 일은 없다. 공전(公田)으로 국가 비용을 충당할 수 없으면, 부유한 백성에게서 공급받는다고 한다.

 

宣和奉使高麗圖經卷第四

門闕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4

문궐

 

-[門闕] 문궐

 

臣聞黃帝尙象於豫乃設重門擊柝以待暴客後世聖人又差尊卑而爲之等故天子之門曰皐曰庫曰雉曰應曰路凡五諸侯則去其二焉曰庫曰雉曰路而已魯爲周公後而新作雉門兩觀且不逃春秋之譏況其他侯乎高麗門闕之制亦頗遵古侯禮雖其屢聘上國亦頗效顰學步然材乏工拙終以朴陋云

 

 

황제(黃帝 중국 전설상의 제왕)와 요()()은 예방하기를 숭상하여 겹문을 설치하고 딱따기를 쳐서 폭객(暴客 도적)을 대비했고, 후세의 성인들은 또 존비(尊卑)를 나누어 등급을 만들었기 때문에, 천자(天子)의 문()은 고문(皐門)고문(庫門)치문(雉門)응문(應門)노문(路門)이라 하여 모두 다섯 문이고, 제후(諸侯)들은 이 중 두 문을 없애고 고문치문노문뿐이었다. 그래서 노() 나라는 주공(周公)의 후손으로서도 치문(雉門)에 새로 두 누관(樓觀)을 지었다가 춘추(春秋)의 꾸지람을 면하지 못하였거든, 더구나 그 나머지 제후들이겠는가?

고려의 궐문 제도는 자못 옛 제후의 예()를 따랐다. 비록 그들이 누차 상국에 빙문 다니며 본떠다가 모방한 것이지만, 재목이 모자라고 기술이 졸렬하여 결국 거칠고 세련되지 못했다고 한다.

 

 

 

-[宣義門]

宣義門卽王城之正西門也西爲金方於五常屬義故以名之其正門二重上有樓觀合爲瓮城南北兩偏別開門相對各有武夫守衛其中門不常開唯王與使者出入餘悉由偏門也自碧瀾亭以至西郊乃過此門而後入館王城之門唯此最大且華蓋爲國朝人使設也

 

선의문은 곧 왕성의 서쪽 정문인데, 서는 금방(金方)으로서 오상(五常 )에선 의()에 속하기 때문에 이름하게 된 것이다. 정문은 이중으로 되었고, 그 위에 누관이 있는데, 합쳐 옹성(甕城 성문을 둘러싼 작은 성)이 되어 있고, 북 양편에 따로 문을 내어 서로 마주보고 있는데, 각각 무부(武夫)가 수위하고 있다.

중문(中門)은 늘 열어놓지 않고 오직 왕이나 사자가 출입할 때만 열고 나머지는 모두 편문(偏門)으로 다닌다.

벽란정(碧瀾亭)에서 서교(西郊)에 이르기까지 바로 이 문을 지나야 관()에 들어갈 수 있는데, 왕성의 문으로는 오직 이 문이 가장 크고도 화려하다. 그런데 이 문은 국조(國朝 송 나라 조정) 사신을 위해 설치한 것이다.

 

 

 

-[外門 ] 외문

王城諸門大率草創唯宣義門以使者出入之所北昌門爲使者回程祠廟之路故極加嚴飾他不逮也自會賓長霸等門其制略同唯當其中爲兩戶無尊卑皆得出入其城皆爲夾柱護以鐵筩上爲小廊隨山形高下而築之自下而望崧山之脊城垣繚繞若蛇虺蜿蜒之形長霸門通安東府光德門通正州宣仁門通楊羅三州崇仁門通日本安定門通慶淸三州宣祺門通大金國北昌門通三角山薪炭松子布帛所出之道也

 

왕성의 모든 문은 거개 초창기(草創期)에 만든 것인데, 선의문(宣義門)은 사자(使者)가 출입하는 곳이고, 북창문(北昌門)은 사자가 회정(回程 돌아가는 길)하거나, 사묘(祠廟)하러 가는 길이기 때문에 아주 엄숙하게 꾸며져 다른 문은 이에 미치지 못한다.

회빈문(會賓門)장패문(長覇門) 등부터는 그 제도가 대략 같은데, 오직 그 한가운데에 쌍문을 만들어 존비(尊卑)에 구애없이 모두 출입할 수 있게 했다.

()은 모두 양쪽을 나무로 받치고 철통(鐵筩)으로 보호하였으며, 위는 회랑(回廊)처럼 되었는데 산 지형의 높고 낮은 대로 쌓았다.

아래서 숭산(崧山) 등성이를 바라보면, 성의 담장을 빙 두른 것이 마치 뱀이 꿈틀거리는 형상과 같다.

장패문은 안동부(安東府)로 통하고, 광덕문(光德門)은 정주(正州)로 통하고, 선인문(宣仁門)은 양주(楊州)전주(全州)나주(羅州) 3주로 통하고, 숭인문(崇仁門)은 일본으로 통하고, 안정문(安定門)은 경주(慶州)광주(廣州)청주(淸州) 3주로 통하고, 선기문(宣祺門)은 대금국(大金國)으로 통하고, 북창문은 삼각산(三角山)으로 통하는데, 신탄(薪炭 땔나무와 숯)[松子]포백(布帛)이 나는 지방이다.

 

 

 

-[廣化門 ] 광화문

廣化門王府之偏門也其方面東而形制略如宣義獨無瓮城藻飾之工過之亦開三門南偏門榜儀制令四事北門榜周易乾卦繇辭五字仍有春貼子云雪痕尙在三雲陛日脚初升五鳳樓百辟稱觴千萬壽衮龍衣上瑞浮

 

광화문은 왕부(王府)의 편문(偏門)인데, 동쪽으로 향했고, 모양과 제도는 대략 선의문과 같은데, 유독 옹성(甕城)이 없고, 문채나게 꾸민 공력은 더하다. 역시 문 셋을 냈는데, 남쪽 편문에는 의제령(儀制令) 4가지 일을 방시(榜示)했고, 북쪽 문에는 주역건괘(乾卦)의 요사(繇辭) 5글자 건()()()()()을 방시했으며, 또한 춘첩자(春帖字 입춘날 대궐 안 기둥에 써 붙이는 주련(柱聯))에 이렇게 썼다.

 

눈 자취 아직도 삼운폐에 있는데 / 雪痕尙在三雲陛

햇살이 비로소 오봉루에 오르네 / 日脚初升五鳳樓

제후들 잔 올려 축수하니 / ?稱觴千萬壽

곤룡포 자락에 서광이 어렸도다 / 袞龍衣上瑞光浮

 

 

 

-[昇平門] 승평문

昇平門卽王宮之正南門也上爲重樓旁起兩觀三門並列制益宏大四阿各有銅火珠爲飾自門之內左右分爲兩亭皆曰同樂矮牆幾百堵相屬以至神鳳門而門之制又壯大於昇平矣東曰春德通世子宮西曰太初通王居備坐又十餘步卽閶闔門乃王奉迎詔書之所也左右兩挾有承天門自是而上山勢稍逼中庭隘狹去會慶殿門不過數丈耳昇平神鳳閶闔三門制度文采大抵相類而神鳳爲冠題牓之字金書朱地有歐率更之體大抵麗人多法古不敢以臆說己見而妄爲俗體也

 

승평문은 곧 왕궁(王宮)의 정남문이다. 위에는 2층 누각을 만들고 양쪽에 두 누관을 세워, 3문이 죽 늘어서 있으니 제도가 더욱 굉장하고 웅대한데, 문의 네 모서리는 각각 동화주(銅火珠 문짝에 붙이는 장식)로 장식이 되어 있다.

문 안에서부터 좌우로 나누어 두 개의 정자를 만들고 모두 동락정(同樂亭)’이라고 했다. 나지막한 담장 몇 백이 서로 연속되어 신봉문(神鳳門)까지 이르렀는데, 신봉문의 제도는 승평문보다도 웅장하고 컸다. 동쪽 문에는 춘덕(春德)’이라고 편액했는데 세자궁(世子宮)으로 통하고, 서쪽 문은 태초(太初)’라고 했는데, 왕이 거처하는 비좌(備坐)와 통한다.

10여 보()쯤 가면 창합문(閶闔門)이 있는데, 곧 왕이 조서(詔書)를 받는 곳이다. 좌우 양쪽에 승천문(承天門)이 있고, 여기서부터 위로는 산세가 점차 급하고 뜰이 좁고, 회경전 문과의 거리가 두어 장()에 지나지 않는다.

승평신봉창합 3문의 제도와 채색은 대개 서로 비슷한데, 신봉문이 으뜸이다. 제방(題牓)의 글씨는 붉은색 바탕에 금자(金字)로 씌어 있는데, 구 솔경(歐率更구양순)의 글씨체이다. 대개 고려 사람들은 거개 옛 체를 법받았고, 감히 억설(臆說)이나 자기 소견을 가지고 망령되이 속체(俗體)를 쓰지 않는다.

 

 

 

-[同德門 ] 동덕문

同德左右二門相對其中卽昇平門也形制略似殿門而極高唯無臺觀昌德會賓春宮承休其制與同德不異特閤門與承天二門差?

 

동덕문은 좌우로 두 문이 서로 마주하고 있으며, 그 가운데 것이 곧 승평문이다. 모양과 제도는 대략 전문(殿門)과 같아 매우 높으나, 대관(臺觀)이 없다.

창덕(昌德)회빈(會賓)춘궁(春宮)승휴문(承休門)은 그 제도가 동덕문과 다르지 않은데, 특히 합문(閤門)승천(承天) 두 문이 조금 좁을 뿐이다.

 

 

 

-[殿門] 전문

會慶殿門在山之半石梯隥道高可五丈蓋正殿之門也並列三門中間唯詔書得入王與人使分左右而行門外列戟二十四枝甲冑之士執其儀衛守衛甚衆特嚴於它門爾

 

회경전(會慶殿)의 문은 산 중턱에 있고 돌사다리 높이가 5() 가량인데, 이것이 정전(正殿)의 문이다. 3문을 나란히 세웠는데, 중간 문은 오직 조서만 들어갈 수 있고, 왕과 사신은 좌우로 나누어 통행한다.

문밖에 창 24자루를 늘어 세웠고, 갑주(甲冑)를 입은 군사가 의위(儀衛)를 담당하고 수위병이 매우 많아서, 다른 문보다도 특히 엄중하다.

 

 

 

 

 

宣和奉使高麗圖經卷第五

宮殿一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5

궁전 1

 

 

 

-[宮殿] 궁전

臣仰惟神宗皇帝誕敷文敎覃被遐方貢琛面內者梯航呇001 惟高麗尤加禮遇因遣近侍銜命綏撫嘗頒睿旨凡相見處殿名鴟吻更不回避以是知聖謨宏遠不責蠻夷以小節而嘉其忠順之大義也夏童北虜氈城穹廬四時隨水草溫涼以徙初無定都若高麗自前史已載其依山谷而居少田業力作不足以自資其俗節於飮食而好修宮室故至今王之所居堂 太上御名仍在圓櫨方頂飛翬連甍丹碧藻飾望之潭潭然依崧山之脊蹭道突兀古木交蔭殆若嶽祠山寺而已今繪其形制仍不廢其名也

 

[-001]:

 

신종 황제(神宗皇帝)가 크게 문교(文敎)를 펴 먼 나라에까지 미치매, 보물을 바치고 알현(謁見)하려는 사람이 바다를 건너 답지하였다.

그 가운데 고려에게만 더욱 예우(禮遇)하여 주고, 따라서 근시(近侍)를 사신으로 보내어 위무하였으며, 일찍이 예지(睿旨 황제의 분부)를 내렸다.

무릇 바라보이는 궁전 이름과, 치미(鴟尾 용마루의 막새기와) 장식을 거리낌없이 했으니, 여기서 성상의 계책이 크고 원대하여 작은 일로 오랑캐를 책망하지 않고, 그들의 충성하고 순종하는 큰 의리만 아름답게 여김을 알았다.

하동(夏童)이나 북로(北虜)들은 털가죽으로 만든 천막을 가지고 사철 물과 풀이 있는 따뜻하고 서늘한 곳을 따라 옮겨다니고, 처음부터 일정한 도읍이 없었다. 그러나 고려는, 전대(前代)의 역사에 이미 기록되어 있는데, 산골짜기에 의지하여 살며, 농지가 적어 힘써 지어도 자급(自給)할 수 없으며 그 풍속은 음식을 절제하고 궁실(宮室)을 짓기 좋아한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왕이 거처하는 궁궐의 구조는 둥근 기둥에 모난 두공(頭工)으로 되었고, 날아갈 듯 연이은 용마루에 울긋불긋 단청으로 꾸며져 바라보면 담담(潭潭 깊고 넓은 모양)하고, 숭산(崧山) 등성이에 의지해 있어서 길이 울퉁불퉁 걷기 어려우며, 고목(古木)이 무성하게 얽히어 자못 악사(嶽祠)산사(山寺)와 같다.

지금 그 형상과 제도를 그리고, 그 명칭은 그대로 써 둔다.

 

 

 

-[王府] 왕부

王府內城環列十三門各揭名額隨方見義唯廣化門正東通長衢殿門十五唯神鳳爲最華內府十六尙書省爲冠九殿參差會慶爲正寑三閣鼎峙淸燕爲壯麗復有小殿以爲燕居之所日視事於便座唯施茵褥於榻上國官親侍跪列其側聽受王旨次弟傳出大臣五日一見別有議政之堂餘官則朔望之外四見於王聽旨受事則立於門外惟執奏官當門授之升堦復位皆脫屨膝行而進退往來廷趨必面王磬折其謹如此至餘屋宇則皆草創名浮於實不足詳紀析而圖之或互見於諸篇也

 

 

왕부에는 내성(內城)이 둘려 있고, 열 세 군데의 문에는 각각 편액(扁額)이 걸렸는데, 방향에 따라 의의를 나타내었다. 광화문(廣化門)이 정동(正東)의 문으로 긴 거리와 통했고, 궁궐 문은 15개인데 신봉문(神鳳門)이 가장 화려하다.

내부(內部)16인데 상서성(尙書省)이 으뜸이 된다. 아홉 궁전은 모양이 가지런하지 않은데 회경전(會慶殿)이 정침(正寢)이고, 세 각()이 솟발처럼 벌려 있는데, 청연각(淸燕閣)이 웅장 화려하다. 또 작은 궁전이 있어 연거(燕居 한가로이 거처하는 곳)하는 곳으로 쓴다.

날마다 편좌(便座)에서 정사(政事)를 보는데, 오직 인욕(茵褥 돗자리)을 탑() 위에 깔았다. 국관(國官)이나 친시(親侍)들이 그 곁에 꿇고 늘어 앉아 왕의 분부를 받아 차례로 전달한다.

대신은 5일에 한 번씩 알현하는데 따로 정사를 의논하는 당()이 있고, 나머지 관원들은 매달 1일과 15일 이외에 네 차례 왕에게 알현하여 분부를 받는다. 분부 받을 일이 있으면 문밖에 서서 받는데 집주관(執奏官)이 문에 서서 준다. 섬돌에 올라갔다 자리로 돌아갈 때는 언제나 신을 벗고 무릎 걸음으로 나아가고 물러가며, 궁정(宮廷)에서 추창(? 예도에 맞도록 허리 굽혀 빨리 걷는 것)할 때에는 반드시 왕을 향하여 절을 하니, 그 조심함이 이와 같다.

나머지 옥우(屋宇)에 있어서는 모두 초창(草創)한 것으로서 이름이 실재보다 과하여 상세히 기록할 것이 못 되므로 가려서 그렸는데, 여타의 편()에 섞여 보이기도 한다.

 

 

 

-[會慶殿 ] 회경전

會慶殿在閶闔門內別有殿門規模甚壯基址高五丈餘東西兩堦丹漆欄檻飾以銅花文彩雄麗冠於諸殿兩廊通三十間中庭甃石地虛不堅行則有聲常禮不敢居惟人使至則受詔拜表於庭下燕會則設使副之席於殿之西楹東向上節位於東序中節位於西序下節位於門之兩廈而北向餘禮則別殿以別之

 

 

회경전은 창합문(閶闔門) 안에 있는데, 따로 궁궐문이 있고 규모가 매우 웅장하다. 터의 높이는 5()쯤 되고, 서 양쪽의 섬돌은 붉게 칠하고, 난간은 동화(銅花 구리로 꽃무늬를 만든 것)로 꾸몄는데, 웅장하고 화려하여 모든 궁궐 중에 제일이다.

양쪽 행랑은 모두 30칸이고, 뜰안은 벽돌로 깔았는데 견고하지 못하여 다니면 소리가 난다.

상례(常禮 일상적인 예식) 때에는 감히 거처하지 않고 오직 사신(使臣)이 오게 되면 뜰아래에서 조서(詔書)를 받거나 표문(表文)에 절한다. 연회(燕會) 때에는 정사와 부사의 자리를 전(殿)의 서영(西楹)에 동으로 향하여 차리고, 상절(上節 상사에게 딸린 관속)들은 동쪽머리[東序], 중절(中節 부사에게 딸린 관속)은 서쪽머리[西序], 하절(下節 하례)은 문의 양쪽 행랑에 자리하여 북으로 향한다. 나머지 예식(禮式)은 딴 궁궐에서 하여 구별한다.

 

 

 

-[乾德殿 ] 건덕전

乾德殿在會慶殿之西北別有殿門其制五間視會慶差小故事人使至彼第三會王禮加勤特出姬侍則燕於其中彼使者至楷以拘衣制不講惟同會慶酬酢而止若朝廷非專遣使雖郡吏使臣持牒傳命亦燕於此殿特禮文有隆殺耳

 

건덕전은 회경전의 서북쪽에 있는데, 따로 궁궐문이 있고, 그 제도는 5칸으로 되어 회경전에 비하여 조금 작다.

예전에는 사신이 거기에 가면, 3차 연회 때에 왕의 예()가 더욱 정성스러워 특별히 궁녀를 불러 모시도록 하고 그 속에서 잔치를 하였다 한다. 이번에 갔을 때에는 해(인종의 이름)가 의복제도에 구애되어 시행하지 아니하고, 오직 회경전에서와 같이 수작(酬酢)하고 그쳤다.

만약 중국에서 보낸 자이면, 조정에서 보낸 사신이 아니고 군리(郡吏)의 사신이 통첩(通牒)을 가지고 가 명령을 전하더라도 역시 이 궁궐에서 잔치하나, 다만 예의 절차에 차등이 있을 뿐이다.

 

 

 

-[長和殿 ] 장화전

長和殿在會慶之後直北一崗地勢高峻形制益隘不逮乾德?皆帑藏其東貯聖朝所錫內府之珍其西以儲其國金帛之類警備之卒視他所加嚴焉

 

장화전은 회경전 뒤 정북 방향의 멧부리에 있는데, 지형이 높고 험준하며, 모양과 제도가 더욱 좁아 건덕전만 못하다.

양쪽 행랑은 모두 탕장(帑藏 왕실의 창고)인데, 동쪽 행랑에는 성조(聖朝 송 나라를 말한다)에서 내린 내부(內府)의 보물을 저장하고, 서쪽 행랑에는 그 나라의 금백(金帛) 따위를 저장한다. 경비하는 병졸이 다른 곳보다 더 엄중하다.

 

 

 

-[元德殿 ] 원덕전

元德殿在長和殿之後也地勢益高營治草率聞其王不常居惟隣國侵逼?有警則卽之發兵命將若刑殺樞要之士則與近臣親密者一二人議決于此

 

원덕전은 장화전 뒤에 있다. 지형이 더욱 높고 만듦새가 간소하다. 듣건대, 그 왕이 늘 거처하지 않고, 오직 이웃 나라가 침범하거나 변방이 시끄러우면, 거기로 나아가 병부(兵符)를 발하거나 장수에게 명령을 내린다. 만약 중요한 인사(人士)를 죽이려면 가까운 신하 1~2인과 여기에서 의결(議決)한다고 한다.

 

 

 

-[萬齡殿 ] 만령전

萬齡殿在乾德之後基 太上御名 差小而藻飾華麗蓋寑室也姬嬪侍女於兩廡列室而環居自崧山之半下視其室奧亦不甚寬敞諒其姬侍之數亦稱其居耳

 

만령전은 건덕전 뒤에 있는데, 터와 구조가 조금 작으나 문채나게 꾸며 화려하니, 이것이 침실이다. 비빈(妃嬪)과 시녀들이 양편 행랑에 방을 잇대어 빙 둘러 거처하는데, 숭산(崧山) 중턱에서 그 안을 내려다보니 또한 그다지 넓지 않았다. 생각건대, 그 궁녀나 모시는 자의 숫자도 그 방의 수와 같은 듯 싶었다.

 

 

 

 

宣和奉使高麗圖經卷第六

宮殿二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6

궁전 2

 

 

-[長齡殿 ] 장령전

長齡殿在乾德之東紫門內其制三間雖華煥不逮萬齡而規模過之每中朝使者欲行前期必有先書介紹至則於此受之賈人之至境遣官迎勞舍館定然後於長齡受其獻計所直以方物數倍償之

 

장령전은 건덕전 동쪽 자문(紫門) 안에 있고 그 제도는 3칸인데, 비록 화려함은 만령전(萬齡殿)만 못하나 규모는 크다.

매양 중국에서 사자가 고려에 가려면, 기일에 앞서 반드시 먼저 보내는 소개서(紹介書)가 있는데, 그 연락이 오면 여기에서 받는다. 고인(賈人 상인)이 국경에 이르면 관원을 보내어 맞아 위로하고, 사관(舍館)이 결정된 뒤에 장령전에서 그가 바치는 것을 받고서 그 값어치를 계산하여 방물(方物)로 두어 배쯤 되게 보상한다.

 

 

 

-[長慶殿 ] 장경전

長慶重光宣政三殿舊記雖載其名今聞更修重光長慶易爲別殿恐是今建閣之地宣政卽外朝也歲時與其臣屬會飮王誕日亦有節名王俁以八月十七日謂之咸寧其日大會公族貴臣近侍於長慶中國賈人之在館者亦遣官爲筵伴用華夷二部樂亦有致語嘗記其口號曰當時瑞色照宮林和氣濃濃破積陰香火千家祈國壽笙歌二部樂賓心興酣日影移珠箔舞罷花枝倒玉簪須盡淸歡酬美景從容莫訴酒杯深

 

장경중광(重光)선정(宣政) 3(殿)은 옛 기록에 비록 그 이름이 실려 있으나 지금 듣건대, 중광전장경전을 중수하여 다른 전(殿)으로 바꾸었다 하니, 아마도 지금 전각(殿閣)을 세운 곳이 선정전으로서 곧 외조(外朝 국왕이 국정을 처리하던 곳)일 것이다. 이곳에서 세시(歲時)에 그 신하들과 모여서 연회를 베푼다. 왕의 탄일(誕日)에도 명절 이름을 붙였으니, 왕우(王俁예종)817일 출생했으므로, 그 날을 함녕절(咸寧節)’이라 부른다.

그 날은 공족(公族)귀신(貴臣)근시(近侍)들을 장경전에 모두 모으고, 중국 상인으로 객관(客館)에 있는 사람도 관원을 보내어 연회에 참여시키는데 화이(華夷) 두 가지 음악을 쓰며 또한 치어(致語 임금에게 올리는 송덕문(頌德文))가 있다. 그 구호는 다음과 같다.

 

지금 궁궐 숲에 서기 비치어 / 當時瑞色照宮林

무르녹은 화기에 쌓인 음기 걷히었네 / 和氣濃濃破積陰

집집마다 향불 피워 국운을 빌고 / 香火千家祈國壽

두 나라 음악에 손님 마음 즐거우리 / 笙歌二部樂賓心

취기 돌자 햇살 주렴에 옮겼고 / ?日影移珠箔

춤을 끝낸 기생 머리 옥비녀가 삐딱 / 舞罷花枝倒玉簪

부디 좋은 때 실컷 즐겨야 하니 / 須盡淸歡酬美景

술잔 크다 말고 조용히 드세 / 從容莫訴酒杯深

 

 

 

-[延英殿閣 ] 연영전각

延英殿閣在長齡之北制度小大略如乾德王於此親試進士又其北曰慈和亦爲燕集之處前建三閣曰寶文以奉累聖所錫詔書西曰淸燕以藏諸史子集嘗太上御名 得其燕記文曰開府儀同三司守太保兼門下侍郞監修國史上柱國江陵郡開國侯食邑一千三百戶食實封三百戶臣金緣奉敎撰通奉大夫寶文閣學士左散騎常侍上護軍唐城郡開國男食邑三百戶賜紫金魚袋臣洪灌奉敎書幷篆額王以聰明淵懿篤實輝光之德崇尙儒術樂慕華風故於大內之側延英書殿之北慈和之南別創寶文淸燕二閣以奉聖宋皇帝御製詔勑書畫揭爲訓則必拜稽肅容然後仰觀之一以集周雄以來古今文書日與老師宿儒討論敷暢先王之道藏焉修焉息焉游焉不出一堂之上而三綱五常之敎性命道德之理充溢乎四履之間越今年丁酉夏四月甲戌有二日特召守太傅尙書令帶方公臣俌守太傅尙書公太原公臣侾守太保齊安侯臣偦守太保通義侯臣僑守太保樂浪侯臣景庸門下侍郞臣偉門下侍郞臣資謙臣緣中書侍郞臣仲璋參知政事臣晙守司空臣至和樞密院使臣軌知樞密院事臣字之同知樞密院事臣安仁等置高會于淸燕閣乃從容謂曰予顧德不類賴天降康廟社儲祉金革偃於三邊文軌同乎中夏凡立政造事大小云爲罔不資稟崇寧大觀以來施設注措之方其於文閣經筵求訪儒雅遵宣和之制也深堂密席延見輔臣法太淸之宴也雖禮有隆殺而優賢尙能之意則其致一也今入朝進貢使資諒齎桂香御酒龍鳳茗團珍菓寶皿來歸嘉與卿等樂斯盛美臣僚皆皇駭恐懼退伏階陛辭以固陋不敢干盛禮王趣令就坐溫顏以待之備物以享之其供張之設器皿之列觴豆之實菓核之品則六尙之名珍四方之美味無一不具復有上國玻梨馬腦翡翠犀兕瑰奇玩用之物交錯於桉上塤箎椌楬琴瑟鐘磬安樂雅正之聲合奏於堂下王執爵命近臣監勸曰君臣交際惟以至誠其各盡量不辭而飮左右再拜告旨而卒爵或獻或詶和樂孔皆及觴酒九行且令退息續有中貴人押賜襲衣寶帶以將其厚意焉旣而復召促席而坐使飮食擧措各自便或開懷以言笑或縱目以觀覽欄楯之外疊石成山庭除之際引水爲沼崷崒萬狀淸渟四徹洞庭吳會幽勝之趣生而終宴無憚暑之意盡醉劇飮夜艾而罷於是搢紳士大夫擧欣欣然有喜色而相告曰吾王以慈儉爲寶而無肆溢之行衣不御文繡器不用雕鏤猶慮一夫之不得所一事之不合度每日焦勞惻怛於宵旰之中至於燕群臣嘉賓則發內府之寶藏傾上國之異恩而窮日之力以火繼之猶不以爲侈其尊賢重禮好善忘勢之心實可謂高出百王之上矣臣嘗聞昔魯公用天子禮樂以化成風俗故於泮宮則先生君子與之爲樂其詩曰魯侯戾止在泮飮酒旣飮旨酒永錫難老燕於路寑則大夫庶士與之相宜其詩曰魯侯燕喜宜太夫庶士邦國是有旣多受祉今吾君奉天子恩意以寵待臣隣故公卿大夫懷天保報上之意言語法從賦我有嘉賓之詩瞽史歌工作君臣相悅之樂懽忻交通禮儀卒度當斯時也人靈之和氣天地之休應上下之施報風俗之化原皆出於飮食衎衎載色載笑之間豈止永錫難老旣多受祉而已耶必當億萬斯年享太平之福而對揚天子永永無疆之休臣愚且拙遭逢萬幸代匱宰府不以臣之不材特有書命之事辭不獲已謹拜手稽首而强爲之記

 

연영전각은 장령전(長齡殿) 북쪽에 있는데, 제도는 작으나 대략 건덕전(乾德殿)과 비슷하다. 왕이 여기에서 진사(進士)들을 친히 시험 보인다. 또 그 북쪽의 것을 자화전(慈和殿)이라고 하는데, 역시 연회하는 곳이다.

앞에 3()을 세웠는데 보문각(寶文閣)’이라고 하는 곳에는 열성(列聖 중국의 여러 임금)이 내린 조서(詔書)를 간직했고, 서쪽 것은 청연각(淸燕閣)’이라고 하는데 여러 가지 역사책과 제자백가의 글, 그리고 문집을 간수했다. 일찍이 그 청연각의 기문(記文)을 얻어 보니, 그 글은 이러하였다.

 

개부의동삼사 수태보 겸 문하시랑 감수국사 상주국 강릉군개국후 식읍일천삼백호 식실봉삼백호(開府儀同三司守太保兼門下侍郞監修國史上柱國江陵郡開國侯食邑一千三百戶食實封三百戶) () 김연(金緣)은 봉교(奉敎)하여 찬()하고, 통봉대부 보문각학사 좌산기상시 상호군 당성군개국남 식읍삼백호 사자금어대(通奉大夫寶文閣學士左散騎常侍上護軍唐城郡開國男食邑三百戶賜紫金魚袋) 신 홍관(洪灌)은 봉교하여 비문(碑文)을 쓰고 아울러 전액(篆額)했다.

왕께서는 총명하고 슬기로우며 독실하고 빛난 덕으로, 유술(儒術)을 숭상하고 화풍(華風 중화 풍속)을 흠모하기 때문에, 대내(大內)의 옆, 연영서전(延英書殿)의 북쪽, 자화전(慈和殿)의 남쪽에 따로 보문청연 두 각()을 지어 송() 나라 황제의 어제(御製 임금이 지은 글)조칙(詔勅)서화(書畫)를 모셔 놓고, 훈칙(訓則)으로 삼아 반드시 용의(容儀)를 엄숙하게 한 뒤에 절하고 우러러보았다.

한결같이 주공(周公)공자맹자양웅(揚雄) 이래의 고금 서적을 모아놓고 날마다 노사(老師)숙유(宿儒)들과 선왕(先王)의 도를 토론하여 부연하며 배우고 닦고 익히니, 한가할 때 집 밖을 나갈 것도 없이 삼강(三綱)오상(五常)의 교화와 성명(性命)도덕의 이치가 사방에 흘러 퍼졌다.

그리하여 이번 정유년(1117, 고려 예종12) 여름 4월 갑술일(2)에 특별히 수태부 상서령 대방공(守太傅尙書令帶方公) 신 보(), 수태부 상서공 태원공(守太傅尙書公太原公) 신 효(), 수태보 제안후(守太保齊安侯) 신 서(), 수태보 통의후(守太保通義侯) 신 교(), 수태보 낙랑후(守太保樂浪侯) 신 경용(景庸), 문하 시랑(門下侍郞) 신 위(), 문하 시랑 신 자겸(資謙)신 연(), 중서 시랑(中書侍郞) 신 중장(仲璋), 참지정사(參知政事) 신 준(), 수사공(守司空) 신 지화(至和), 추밀원사(樞密院使) 신 궤(),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신 자지(字之),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신 안인(安仁) 등을 불러, 청연각에서 성대한 모임을 차리고서 조용히 이르기를,

돌아보건대, 나는 덕이 부족한 몸인데 하늘이 내린 태평을 힘입어 종묘와 사직에 복이 쌓이고 3면의 변방에 병란(兵亂)이 일지 않고, 글과 법이 중하(中夏)와 같게 되어, 무릇 정책을 세워 일을 행함에 대소간(大小間)의 행사를 중국에 자품(資稟)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리고 숭녕(崇寧)대관(大觀) 이래로 시행하고 조치하는 방법과 보문각(寶文閣) 경연(經筵)에 선비들을 맞아들이는 것은 선화(宣和) 때 제도를 따른 것이요, 깊숙한 궁궐 조용한 자리에 재상들을 인견(引見)함은 태청(太淸)의 연회를 법받은 것이니, 비록 예()는 차등이 있다 하더라도, 어진 사람을 우대하고 재능 있는 사람을 높이는 뜻은 한가지다.

이번에 입조(入朝 송 나라에 조회하러 가는 것)했던 진공사(進貢使) 자량(資諒), 계향(桂香)어주(御酒)용봉(龍鳳)명단(茗團 송 나라 차)진과(珍菓)보명(寶皿)을 가지고 돌아왔기로, 아름답게 여겨 경들과 함께 이 훌륭하고도 아름다움을 즐기고자 하노라.’

하니, 신하들이 모두 황송하고 송구스러워 섬돌에 물러나 엎드리며,

고루(固陋)한 몸이라 감히 훌륭한 예식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하고 사양하니, 왕이 곧 도로 가 앉도록 하고, 온화한 안색으로 대하며 갖가지 음식을 갖추어 먹였는데, 거기에 차려놓은 그릇과 잔이나 접시에 담긴 음식과 갖가지 과일은, 육상(六尙)의 이름난 진품과 사방의 맛좋은 것들이 모두 갖추어져 있었다.

또한 상국(上國)의 파리(玻梨 유리)마뇌(馬腦 瑪瑙)비취(翡翠)서시(犀兕 무소의 뿔) 등 기이한 완상품들을 상 위에 진열하고, ()()()()()()()()의 즐겁고 단아한 곡조로 당() 아래서 합주(合奏)하도록 하고, 왕이 잔을 들고서 근신(近臣)을 시켜 권하며 이르기를, ‘군신 사이는 오직 지성으로 하여야 하는 것이니, 각기 양대로 사양하지 말고 마시라.’하니,

좌우 신하들이 재배(再拜)하면서 감사함을 아뢰고 잔을 비웠다. 그리고는 잔을 올리기도 하고 혹은 받기도 하여 화락한 즐거움이 매우 흡족하였다.

술잔이 아홉 번 돌게 되자, 잠시 물러가 쉬도록 하였다가, 이어서 궁중 귀인(貴人)들로 습의(襲衣 겹옷)와 보대(寶帶)를 가져다가 내리도록 하여, 그 후의(厚意)를 표시하였다.

그러고 나서 다시 불러 자리에 앉기를 재촉하고, 각기 편리한 대로 음식 먹고 행동하도록 하므로, 더러는 마음을 터놓고 담소하기도 하고 더러는 눈길 가는 대로 관람하기도 하였다. 난간 밖에는 돌을 쌓아 산을 만들고 마당에는 물을 끌어다가 못을 만들었는데, 오만 가지로 우뚝우뚝한 산과 사방에 고여 있는 맑은 물은 동정호(洞庭湖)와 오() 나라 회계산(會稽山) 같은 그윽한 흥취를 불러일으키니, 잔치가 끝나도록 더위를 잊고 취하도록 몹시 마시다가 밤이 깊어 파했다.

이에 진신(搢紳) 사대부(士大夫)들이 모두 흔연(欣然)하게 기쁜 기색을 띠며 서로 말하기를, ‘우리 임금님께서는 자애와 검소를 보배로 삼고 넘치는 행동이 없으며, 옷은 무늬있는 비단을 입지 않고 그릇은 조각한 것을 쓰지 않으면서도 오히려 한 사람이라도 제자리를 얻지 못하고, 한 가지 일이라도 법도에 맞지 않을까 하여, 날마다 소의간식(宵衣旰食)하는 중에도 노심 초사하여 가엾게 여기고, 반대로 여러 신하와 귀한 손님에게 잔치 대접함에 있어서는, 내부(內府)에 간수했던 진귀한 것과 상국(上國)에서 특별히 은사(恩賜)한 것까지 다 털어, 하루가 다 가도록 놀고 밤에까지 계속하고도 오히려 만족하게 여기지 아니하니, 어진이를 존대하고 예를 중하게 여기며 선()을 좋아하고 권세를 망각하는 마음이, 실로 역대의 왕들보다 뛰어나게 훌륭하다고 할 수 있다.’ 하였다.

듣건대, 옛날 노() 나라 임금이 천자의 예악으로 풍속을 교화하였기 때문에, 반궁(泮宮)에서 선생(先生)과 군자(君子)가 같이 즐겼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노후가 와서 반궁에서 술을 마시누나! 이미 좋은 술 마셨으니 길이 장수하리로다.(시경노송(魯頌)에 있다) 하였고, 노침(路寢 임금이나 제후가 정사를 보던 곳)에서 잔치하면서 정사와 서사(庶士)가 같이 서로 즐겼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노후가 잔치에서 기뻐하니 대부와 서사도 즐거워하는구나! 나라를 소유했으니 이미 많은 복을 받음이로다.’ (시경노송(魯頌)에 있다) 하였다 한다.

지금 우리 임금께서도 천자(天子 송 나라 임금을 말한다)의 은의(恩意)를 받들어, 신하들을 총애로 대우하였다. 그러므로 공경대부(公卿大夫)들은 천보(天保)의 시와 같이 임금에게 보답할 뜻을 갖고, 언어(言語 왕의 측근 관리)법종(法從)은 아유가빈(我有嘉賓)’ 의 시를 부(노래 부름)하고, 고사(瞽史)가공(歌工)은 군신(君臣)이 같이 즐기는 음악을 연주하여, 환희(懽喜)가 서로 교환되고 예의가 법도에 맞게 되었다.

이때를 당하여 사람과 신령의 화락함, 하늘과 땅의 아름다운 감응, 상하가 베풀어 주고 보답하는 것, 풍속을 교화시키는 근본이 모두 화락하게 음식을 들며 담소(談笑)하는 속에서 나오게 되었으니, 어찌 길이 늙지 않고 많은 복을 받는다는 것에 그칠 뿐이겠는가? 반드시 억만년토록 태평한 복을 누리며, 천자(天子 송 나라 임금을 말한다)의 한없는 아름다움을 대양(對揚 천자의 명을 받들어 백성에게 널리 알림)할 것이다.

신은 우매하고 졸렬한데도 만행(萬幸)한 때를 만나 변변치 못한 재능으로 재부(宰府)를 맡고 있는데, 신을 못났다 아니하고 특별히 글을 지으라는 명령이 계시기에 사양했으나 허락하여 주지 않으므로 삼가 머리 조아리고 두 번 절하며 억지로 기()를 짓는다.”

 

[D-001]육상(六尙) : 임금의 일용품 일체를 제공하는 여섯 가지 부서. () 나라는 상식(尙食)상약(尙藥)상의(尙衣)상사(尙舍)상온(尙醞)상련(尙輦)을 두었는데, 이를 육상이라 불렀다. 文獻通考 職官考

[D-002]소의간식(宵衣旰食) : 임금이 정사에 부지런하여 일찍 일어나고 저녁 늦게 식사한다는 뜻. 당서(唐書)유분전(劉賁傳)어진 사람을 임용하고 자신을 수양하며 일찍 일어나고 늦게 식사한다.……하였다.

[D-003]천보(天保) : 시경의 편명. 내용은 신하가 임금의 복을 빌어 주며 부르는 노래. 대략 다음과 같다. “하느님이 우리 임금 안정시키기를 매우 공고히 하셨구나! 우리 임금으로 하여금 모든 것을 다 좋게 하셨으니 무슨 복인들 내려 주지 않으랴……

[D-004]아유가빈(我有嘉賓) : 시경녹명편(鹿鳴篇)의 한 구절. 녹명편은 잔치를 베풀어 주며 부르는 노래인데, 대략에 화목하게 우는 사슴이여! 들에서 풀을 먹고 있구나! 나는 아름다운 손님을 위하여 음악을 연주하노라……하였다.

[D-005]군신(君臣)이 같이 즐기는 음악 : 치소(徵招)와 각소(角招)의 음률로 된 노래인데, 그 내용은 임금의 잘못을 간()하는 것이 무어 잘못이겠는가! 임금에게 간하는 사람은 임금을 좋아하는 신하이다.” 하였다. 孟子 梁惠王下

 

-[臨川閣 ] 임천각

臨川閣在會慶殿西會同門內爲屋四楹窻戶洞達外無重簷頗類臺門非燕集之地其中藏書數萬卷而已

임천각은 회경전(會慶殿) 서쪽, 회동문(會同門) 안에 있다. 집은 네 기둥으로 되었고 창문이 툭 트였으나 밖이 겹처마로 되어 있지 않아 자못 누대(樓臺)의 문과 같은데, 연회하는 곳이 아니다. 그 안에는 서책 수만 권이 간직되어 있을 뿐이다.

 

 

 

-[長慶宮 ] 장경궁

長慶宮在王府之西南由嵒山麓有二小徑北通王府東通宣義門長衢老屋數十楹王顒諸妹居其中後出適人遂虛其地荒蕪益甚俁疾革又卽之醫治已而不起因以爲祠奉之所俁之侍姬與其舊僚屬十數人守之比使者銜睿眷之隆遵元豐舊制祭奠前王弔慰其嗣皆於長慶拜而受之

장경궁은 왕부(王府) 서남쪽 유암산(由嵓山) 기슭에 있다. 두 갈래의 조그만 길이 있는데 북으로는 왕부와 통하고 동으로는 선의문(宣義門)과 통하며 긴 거리에는 낡은집 몇 채가 있다. 왕옹(王顒숙종)의 여러 자매가 그곳에 살았는데, 뒤에 시집가고 드디어 그곳을 비워 두었으므로 더욱 황폐해졌다. 왕우(王俁예종)가 병이 위독하여 거기에 가 치료했는데, 마침내 치유하지 못하고 죽었으므로 따라서 제사 모시는 사당으로 삼았다. 왕우를 모시던 궁녀와 그의 옛 관속 수십 인이 지킨다.

근래에는 사신이 예권(睿眷)의 융숭한 명을 받들고, 원풍(元豐) 시절의 예()대로 전왕(前王)에게 제사지내고 그 사왕(嗣王)에게도 조위(弔慰)하는데, 모두 장경궁에서 받는다.

 

 

 

-[左春宮 ] 좌춘궁

左春宮在會慶殿之東春德門內王之嫡長子初立曰世子旣冠而後居之屋宇制度殺於王宮其大門榜曰大和次曰元仁次曰育德聽事之堂無榜梁棟脩偉屛上書文王世子篇亦建官屬十數人右春宮在昇平門外御史臺之西王之姊妹諸女居之

 

좌춘궁은 회경전의 동쪽 춘덕문(春德門) 안에 있다. 왕의 적장자(嫡長子)가 처음으로 책봉(冊封)되면 세자(世子)라 하고, 관례(冠禮 성인이 되는 예식)를 하고 난 뒤에는 여기에 거처하는데, 건물의 제도는 왕궁(王宮)만 못하다.

대문의 편액은 대화(大和)’라 했고, 다음은 원인(元仁)’, 그 다음은 육덕(育德)’이라고 했다.

일 보는 집은 편액이 없고, 들보와 기둥은 길고 크며, 병풍에는 문왕세자(文王世子)편이 씌어 있었다. 또한 관속(官屬) 십수 인을 두었다.

우춘궁(右春宮)은 승평문(昇平門) 밖 어사대(御史臺)서쪽에 있는데, 왕의 자매 등 여러 여인이 거처한다.

 

 

 

-[別宮 ] 별궁

王之別宮與其子弟所居皆謂之宮王母姊妹別居者給官受田以奉湯沐或空不居許民射莫利而供租賦雞林宮在王府之西扶餘宮在由巖山之東又有辰韓朝鮮常安樂浪卞韓金冠六宮分置城內皆王伯叔昆弟之居也王繼母之宅號積慶今公族不見顯位而別宮十室九空其田土昔領於壽昌今皆屬之王府又置官以掌之

왕의 별궁 및 그 자제들이 거처하는 곳을 모두 궁이라 한다. 왕의 모비(母妃)와 자매 중에 따로 사는 사람은 집과 전토(田土)를 받아, 탕목(湯沐 생활비)에 쓰도록 하는데, 더러는 비워 두고 거처하지 아니하며, 민간에게 이득을 보게 하여 세금을 바치도록 한다.

계림궁(鷄林宮)은 왕부(王府) 서쪽에 있고 부여궁(扶餘宮)은 유암산(由巖山) 동쪽에 있으며, 또한 진한(辰韓)조선(朝鮮)상안(常安타본에는 장안(長安))낙랑(樂浪)변한(卞韓) 금관(金冠)6궁이 성안에 나뉘어 배치되어 있는데, 모두 왕의 백숙(伯叔)곤제(昆弟)가 거처하는 곳이다. 왕의 계모(繼母)가 거처하는 궁을 적경궁(積慶宮)이라 한다.

지금 공족(公族)으로서 현달한 자리에 있는 사람을 볼 수 없고, 별궁은 10채 중 9채는 비어 있다. 그 전토를 과거는 수창궁(壽昌宮)에서 관할했는데, 지금은 모두 왕부에 소속시켜 또한 관원을 두어 관장하게 한다.

 

宣和奉使高麗圖經卷第七

冠服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7

관복

 

 

-[冠服] 관복

臣聞東夷之俗斷髮文身雕題交趾高麗自箕子封時已敎以田蠶之利則當有衣冠矣漢史稱其公會衣服皆錦繡金銀自飾而大加主簿著幘如冠小加著折風如弁豈依倣商周冠弁之制而然乎唐初稍服五采以白羅爲冠革帶皆金珥逮我中朝歲通信使屢賜襲衣則漸漬華風被服寵休翕然丕變一遵我宋之制度焉非徒解辮削衽而已也然而官名參差朝衣燕服時有同異者謹列之作冠服圖

 

동이(東夷)의 풍속은 머리를 자르고 문신(文身)하며, 이마에 무늬를 새기고 발이 교차한다[雕題交趾]고 했다. 그런데 고려는 기자(箕子)를 봉했을 때부터 이미 농사와 누에치기의 이로움을 가르쳤으므로 마땅히 의관(衣冠)의 제도가 있었을 것이다.

() 나라 역사에, 그 공회(公會)할 때의 의복은 다 비단에 수놓고 금과 은으로 이를 장식하되, 대가(大加)주부(主簿)는 책()을 쓰는데 관()과 같고, 소가(小加)는 절풍(折風)을 쓰는데 고깔[]과 같다고 하였으나, 이것이 어찌 상(중국 고대 은 나라)이나 주()의 관()과 고깔의 제도를 모방해서 그렇겠는가? () 나라 초에 차츰 오색 옷을 입고, 백라관(白羅冠)을 쓰고, 혁대(革帶)에는 다 금이나 옥으로 장식하였더니, 우리 송 나라에 이르러 해마다 신사(信使)를 보내므로 자주 왕이 옷을 내려 점차 우리 중국풍에 젖게 되고, 천자의 총애를 입어 의복의 제도가 크게 갖추어지고 우리 송의 제도를 따르게 되었다. 그러니 다만 변발(辮髮)을 풀고 좌임(左袵)을 없앴을 뿐만이 아니다.

그러나 관직명이 일정하지 않고 조정에서 입는 옷과 집에서 입는 옷이 혹, 우리 송의 제도와 다른 것이 있으므로, 이를 들어 관복도(冠服圖)를 그린다.

 

[D-001]이마에……교차한다[雕題交趾] : 오랑캐의 풍속을 말한다. 예기(禮記)왕제(王制)에 동이(東夷)는 단발문신(斷髮文身)이라 했고, 남만(南蠻)은 조제교지(雕題交趾)라 하였다.

[D-002]관복도(冠服圖) : 관복의 만듦새를 그린 그림. 이 그림도 다른 그림과 같이 지금 전해오지 않는다.

 

 

 

-[王服 ] 왕복

高麗王常服烏紗高帽窄袖緗袍紫羅勒巾間繡金碧其會國官士民則加幞頭束帶祭則冕圭唯中朝人使至則紫羅公服象笏玉帶拜舞抃蹈極謹臣節或聞平居燕息之時則皁巾白紵袍與民庶無別也

 

고려왕은 일상복은 높은 오사모(烏紗帽)에 소매가 좁은 상포(緗袍 담황색(淡黃色) 도포)를 입고, 자색 비단으로 만든 넓은 허리띠[勒巾]를 띠고 이 허리띠는 사이사이에 금실과 푸른 실로 수를 놓았다. 나라의 관원(官員)과 사민(士民)이 모여 조회(朝會)할 때에는 복두(幞頭)를 쓰고 속대(束帶)를 띠며, 제사지낼 때에는 면류관(冕旒冠)을 쓰고 옥규(玉圭)를 든다. 다만, 중국의 사신이 가면 자색 비단 공복(公服)을 입고, 상아(象牙)로 만든 홀()을 들고 옥대(玉帶)를 띠고, 행례의 범절이 신하로서의 절의에 아주 조심한다. 혹 평상시 쉴 때에는 조건(皁巾)에 흰 모시[白紵] 도포를 입으므로 백성과 다를 바 없다 한다.

 

[C-001]왕복(王服) : 이하에 등장하는 관직 중 고구려 관직도 섞여 있고, 고려 시대에 없던 관직도 있는 등 믿을 수 없는 것이 많다.

[D-001]넓은 허리띠[勒巾] : 원래는 늑백(勒帛)으로 넓은 띠이다. 이 실물이 일본 나라[奈良] 지방의 정창원(正倉院)에 남아 있다. 넓은 띠로 뒤에는 끈으로 매게 되어 있다.

 

 

 

-[令官服 ] 령관복

高麗建官唐武德間有九等一曰大對盧摠知國事次曰太大兄次鬱折次太大夫人使者次衣頭大兄掌機密謀政事逗發兵馬選授官爵次大使者次大兄收位使者次上位使者次小兄次諸過節次先人又有掌賓客比鴻?以大夫使者爲之又有國子博士通事舍人典書客皆小兄以上爲之又諸大城置傉薩比諸督諸城置處問近支比刺史亦謂之道使其武官曰大摸達比衛將軍皁衣頭大兄以上爲之次末客比中郞將以大兄以上爲之其次領千人以下各有等差今其官稱勳秩往往竊倣中朝或詰其由則曰遵用開元故事至其衣冠亦或似之前世臣服以靑羅爲冠絳羅爲珥飾以羽毛比年國官悉以紫文羅袍紗製?其玉帶佩金魚唯官至太師太尉中書令尙書令者則服之

 

고려의 관제는 당() 나라 무덕(武德) 연간에 아홉 등급이 있었다. 첫째는 대대로(大對盧)인데 나라 일을 총괄하고, 다음이 태대형(太大兄), 다음이 울절(鬱折), 다음이 태대부인사자(太大夫人使者), 다음이 의두대형(衣頭大兄)으로 기밀을 맡고 정사(政事)를 논의하여 병마를 보내는 일과 관작(官爵)을 주는 일을 맡았고, 다음이 대사자(大使者), 다음이 대형수위사자(大兄收位使者), 다음이 상위사자(上位使者), 다음이 소형(小兄), 다음이 과절(過節), 다음이 선인(先人)이다. 또 빈객(賓客)을 맡는 이가 있어 중국의 홍려 경(鴻臚卿)에 비할 수 있으니, 대부사자(大夫使者)로 삼고, 또 국자 박사(國子博士)통사사인(通事舍人)전서객(典書客)이 있는데, 다 소형(小兄) 이상으로 한다.

 

또 여러 큰 성에는 욕살(傉薩)을 두었는데, 중국의 여러 독부(督府)에 비할 수 있으며, 여러 성에는 처려근지(處閭近支)를 두었는데, 이는 중국의 자사(刺史)에 비할 수 있는 것으로, 또는 도사(道使)라고도 한다. 무관(武官)에는 대모달(大摸達)이 있는데 이는 위장군(衛將軍)에 비할 수 있는 것으로 조의두대형(皁衣頭大兄) 이상이라야 될 수 있으며, 다음은 말객(末客)인데 중랑장(中郞將)에 비교되는 것으로 대형(大兄) 이상으로 그를 삼고, 그 다음은 영천인(領千人)인데 이하 각기 등차(等差)가 있다.

 

이제 그 관()의 이름이나 공훈[勳秩]의 품계가 간혹 중국을 모방하고 있으니, 누가 그 사유를 물으면 곧 개원(開元 당 현종의 연호) 고사(故事)를 쓰고 있다고 한다. 그 의관(衣冠)에 있어서도 또한 혹 비슷한 것이 있다. 전세(前世) 신하의 복식이 청라(靑羅)로 관을 하고 강라(絳羅 붉은 비단)로 이(원래는 귀걸이이지만, 여기서는 귀를 싸는 장식)를 하고 새깃[鳥羽]으로 장식하더니, 요즈음은 나라의 관원들이 거의 다 자문나포(紫文羅袍)를 입고 비치는 깁으로 만든 복두(幞頭)를 쓰며, 허리에는 옥띠[玉帶]를 띠고, 금어(金魚)를 차는데, 관직이 태사(太師)태위(太尉 1)중서령(中書令 1)상서령(尙書令 1)인 자라야 착용한다.

 

[D-001]홍려 경(鴻臚卿) : 홍려는 홍려시(鴻臚寺)의 약칭으로 당대의 관청 이름. 외국에 관한 사무와 조공(朝貢) 등의 일을 맡아 보던 곳이고, ()은 그 관아의 장을 말한다.

[D-002]독부(督府) : 당 나라에서 각 외지의 군정을 총괄하던 지방통치기관.

[D-003]도사(道使) : 고려는 성종 2년에 전국에 12목을 두었다가, 성종 14년에 전국을 10()로 나누고, 12()에 절도사를 두었다가 현종 때에 오도 양계로 나누고, 그 밑에 4도호부 8목을 두었다. 여기에 나온 관직제도는 고구려의 것과 뒤섞여 종잡을 수 없다.

[D-004]금어(金魚) : 황금으로 고기 모양과 같이 만든 대(). 당대(唐代) 3품관 이상이 차던 것.

 

 

 

 

-[國相服 ] 국상복

國相之服紫文羅袍毬文金帶仍佩金魚侍中太尉司徒中書門下侍郞平章事參知政事左右僕射政堂文學判尙書吏部事樞密使副同知院奏事等官通許服之

 

국상(國相)의 복색은 자문나포(紫文羅袍)에 둥근 문양이 있는 금띠[毬文金帶]를 띠고 이에 금어대(金魚袋)를 차는데, 시중(侍中 1)태위(太尉 1)사도(司徒 1)중서문하시랑(中書門下侍郞 2)평장사(平章事 2)참지정사(參知政事 2)좌우복야(左右僕射 2)정당문학(政堂文學 2)판상서이부사(判尙書吏部事)추밀부사(樞密副使 3)동지원주사(同知院奏事) 등의 관원들도 모두 이를 입는 것을 허락해 준다.

 

 

 

-[近侍服 ] 근시복

近侍之服紫文羅袍御仙金帶仍佩金魚自左右常侍御史大夫左右丞六尙書翰林學士承旨學士以上及祗待國朝使命接伴館伴官悉服之

근시의 복색은 자문나포(紫文羅袍)에 어선금대(御仙金帶)를 띠고 이에 금어대(金魚袋)를 차는데, 좌우상시(左右常侍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정3품 벼슬)어사 대부(御史大夫 3), 좌우승(左右丞),육상서(六尙書)한림 학사(翰林學士 한림원의 학사, 4)승지학사(한림원의 학사승지(學士承旨), 3) 이상 및 지대국조사명 접반관(祗待國朝使命接伴官)과 관반관(館伴官) 등이 다 입는다.

 

[D-001]좌 우승(左右丞) : 상서도성(尙書都省)의 종3품 벼슬

[D-002]육상서(六尙書) : 이부상서(吏部尙書)병부상서호부상서형부상서예부상서공부상서이며 정3품 벼슬이다.

 

 

 

-[從官服 ] 종관복

從官之服紫文羅袍御仙金帶御史中丞諫官給事侍郞州牧留守使副閤門執贊六尙直官都知兵馬四部護使等與其非泛恩數悉服之王之世子及王之兄弟亦然

 

종관의 복색은 자문나포(紫文羅袍)에 어선금대(御仙金帶)를 띠니, 어사 중승(御史中丞어사대의 중승, 4)간관(諫官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좌우 간의대부, 4)급사(給事 4)시랑(侍郞 육부(六部)의 정4품 벼슬), ()()의 유수(留守)와 사(使)부사(副使)합문 집찬(閤門執贊)육상 직관(六尙直官)도지병마(都知兵馬)사부호사(四部護使) 등과 특별한 은수(恩數 훈공에 의하여 왕의 특별한 은영(恩榮)을 입는 것)를 입은 자가 다 입으며, 왕의 세자(世子) 및 왕의 형제도 또한 그러하다.

 

[D-001]어선금대(御仙金帶) : () 대에 문신(文臣)이 띠던 띠의 이름

[D-002]도지병마(都知兵馬) : 고려 전기에 설치한 군사관련 관직으로 중앙과 지방으로 나누어 중앙은 문하 시중평장사참지정사 등이 겸임하고, 양계에서는 병마사(兵馬使)지병마사(知兵馬使)부사(副詞) 등으로 나뉘었다.

 

-[卿監服 ] 경감복

卿監之服緋文羅袍紅鞓犀帶仍佩銀魚六寺卿貳省部丞郞國子儒官祕書典職以上悉服之

 

경과 감의 복색은 비문나포(緋文羅袍)에 붉은 가죽 바탕의 무소 뿔의 띠[紅鞓犀帶]를 띠고, 이에 은어대(銀魚袋)를 차니, 육시 경이(六寺卿貳)성부 승랑(省部丞郞 상서도성(尙書都省)과 육부()의 승과 낭) 국자 유관(國子儒官 국자감(國子監)의 유관이 사업(司業))비서 전직(秘書典職비서성(秘書省)의 감()소감(少監) ) 이상은 다 이를 입는다.

 

[D-001]육시 경이(六寺卿貳) : 고려 시대에 설치된 6(六部) 이외의 중앙의 여섯 관청. 고려의 시()는 그 명칭이나 수가 고정되지는 않았다. 태조 때에는 9시를 두었다가 성종 때 태상시(太常寺)위위시(衛尉寺)태복시(太僕寺)예빈시(禮賓寺)대부시(大府寺)사농시(司農寺)사재시(司宰寺) 7시로 정비되었으며 이 후에도 여러번 변화를 겪었는데, 대략 6시라 함은 전의시(典儀寺)종부시(宗簿寺)사복시(司僕寺)전농시(典農寺)내부시(內府寺)예빈시(禮賓寺)를 말한다.

 

 

-[朝官服 ] 조관복

朝官之服緋文羅袍黑鞓角帶仍佩銀魚司業博士史館校書太醫司天兩省錄事以上悉服之其於階官亦限年數必待遷升而後改易也館伴見中朝人使於館中則各置二人服緋前導唯不佩魚當是倣本朝朱衣雙引之制也

 

조관의 복색은 비문나포를 입고 흑정각대(黑鞓角帶)를 띠고, 은어대(銀魚袋)를 차니, 사업박사(司業博士 국자감(國子監)의 사업과 박사)와 사관 교서(史館校書 직사관(直史館), 8), 태의(太醫)사천(司天)의 두 성()의 녹사(錄事 9) 이상은 다 이를 입는다.

 

그 계()나 관()은 또한 햇수를 따지며, 반드시 그 계나 관을 옮긴 뒤에야 갈아 입는다. 관반(館伴 사신의 접대관)이 중국의 사신을 관()에서 뵐 때에는 각기 두 사람의 비색 포[緋袍]를 입은 자로 앞을 인도하게 하는데, 다만 어대(魚袋)를 차지 않으니, 마땅히 이것은 중국의 (朱衣雙引 향도(嚮導)하는 관원은 붉은 옷을 입었으므로 주의리(朱衣吏)라고도 한다)의 제도를 본받은 것이라 생각된다.

 

 

 

-[庶官服 ]서관복

庶官之服綠衣木笏幞頭烏鞾自進士入官省曹補吏州縣令尉主簿司宰等悉服之

서관(庶官 6품 이하의 하급관원)의 복색은, 녹의(綠衣 서관의 옷은 포()라 하지 않고 의()라 하였다)에 목홀(木笏)을 들고, 복두(幞頭)를 쓰고, 검은 가죽띠[烏鞓]를 띠니, 진사(進士)로 입관(入官)한 때로부터 성조(省曹)의 보리(補吏)나 주현(州縣)의 영위(令尉) 주부(主簿각 관아의 종78품의 주부(注簿) 벼슬인 듯함)사재(司宰 사재감(司宰監)의 벼슬인 듯함) 등이 다 이를 입는다.

 

[D-001]주현(州縣)의 영위(令尉) : 주현의 최고 관직. 고려사(高麗史)75, “문종 108월에 여러 주()()의 자사(刺史), 통판(通判)과 현()의 영()() 및 장리(長吏) 등의 실적과 백성의 고락을 조사하기 위하여 관리를 보내어 살폈다.” 하였다.

 

 

 

宣和奉使高麗圖經卷第八

人物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8

인물

   

-[人物] 인물

臣聞東南之夷高麗人材最盛仕於國者唯貴臣以族望相高餘則或由進士選或納貲爲之與夫世祿吏職莫不有等故有職有階有勳有賜有檢校有功臣有諸衛仰稽本朝官制而以開元禮參之然而名實不稱淸濁混餚001 徒爲虛文耳今使者入境皆擇臣屬通敏者付以將迎之禮以州牧則有若刑部侍郞知全州吳俊和禮部侍郞知青州洪若伊戶部侍郞知廣州陳淑以迎勞餞送則有若銀青光祿大夫吏部侍郞朴昇中開府儀同三司守太保中書侍郞中書門下平章事金若溫開府儀同三司守太保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崔洪宰開府儀同三司守太保門下侍郞兼中書門下平章事林文友同知樞密院事拓俊京李資德凡此皆王之近臣也除王府四會之外與之燕飮酬酢衎衎如也以私覿送遺則有若戶部侍郞梁鱗金惟揀刑部侍郞林景淸工部侍郞盧令琚中侍大夫黃君裳工部郞中鄭俊左司郞中李之甫殿前承旨林寵臣朝散郞祕書丞金端閤門使金輔臣閤門通事舍人李穎之曹祺內殿崇班胡仁穎引進使王儀閤門祗候高唐愈閔仲衡通事舍人李漸梁文矩中衛郞劉及中亮郞彭京忠訓郞王承成忠郞李俊琦金世安保義郞李俊異承節郞許宜何景陳彥卿以傳命贊導則有若正議大夫禮部尙書金富佾通議大夫殿中監鄭覃尙書李璹中亮大夫知閤門事沈安之中亮大夫閤門副使劉文志閤門引進使金義元閤門通事舍人沈起王洙金澤李銳材金純正黃觀李淑陳迪閤門祗候尹仁勇朴承鄭擇陳偁通事舍人李德升吳子璵卓安皆以才能辯博乃膺是選爰自相見以迄言旋其相與燕樂游觀揖遜之儀文采雍容有足觀者今姑自李資謙而下圖其形者五人幷其族望而爲之說

 

[-001]:

동남쪽의 이적(夷狄)들 중에는 고려의 인재가 가장 왕성하다. 나라에 벼슬하는 자라야 귀신(貴臣)이 되며 족망(族望)으로 서로 겨루고, 나머지는 혹 진사(進士)를 하여 뽑히거나 혹 재물을 바치고 되기도 하는데, 세록(世祿) 받는 이직(吏職)까지도 등급이 있으니, 그러므로 직()이 있고 계()가 있고 훈()이 있고 사()가 있고 검교(檢校)가 있고 공신(功臣)이 있고 여러 위()가 있다.

이것은 본조(本朝)의 관제를 고찰하여 본받되 개원(開元)의 예()를 참작하여 한 것이다. 그러나 명실(名實)이 맞지 않고 청탁(淸濁)이 혼동되어 한갓 형식에 불과하다.

이번에 사자가 국경에 들어가매, 모든 신하들 중에 현명하고 민첩한 자들을 가리어 영접하는 예절을 맡겼는데, 주목(州牧) 중에는 형부시랑 지전주(刑部侍郞知全州) 오준화(吳俊和), 예부시랑 지청주(禮部侍郞知靑州) 홍약이(洪若伊)호부시랑 지광주(戶部侍郞知廣州) 진숙(陳淑)이 맡았고, 맞아 위로하고 전송하는 일은, 은청광록대부 이부시랑(銀靑光祿大夫吏部侍郞) 박승중(朴昇中), 개부의동삼사 수태보 중서시랑 중서문하평장사(開府儀同三司守太保中書侍郞中書門下平章事) 김약온(金若溫), 개부의동삼사 수태보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開府儀同三事守太保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 최홍재(崔洪宰), 개부의동삼사 수태보 문하시랑 겸 중서문하평장사(開府儀同三司守太保門下侍郞兼中書門下平章事) 임문우(林文友),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척준경(拓俊京)이자덕(李資德)이 맡았었는데, 이들은 모두 왕의 근신이다.

왕부(王府)에서의 네 차례 연회를 제외하고는 이들과 같이 잔치하며 담소하였는데 화락한 분위기였다.

사적(私覿 사사로이 임금과 만나는 것)과 송유(送遺 선물을 줌), 호부 시랑(戶部侍郞) 양인(梁鱗)과 김유간(金惟揀), 형부 시랑(刑部侍郞) 임경청(林景淸), 공부 시랑 노영거(盧令琚), 중시대부(中侍大夫) 황군상(黃君裳), 공부 낭중(工部郞中) 정준(鄭俊), 좌사 낭중(左司郞中) 이지보(李之甫), 전전 승지(殿前承旨) 임총신(林寵臣), 조산랑 비서승(朝散郞秘書丞) 김단(金端), 합문사(閤門使) 김보신(金輔臣), 합문 통사사인(閤門通事舍人) 이영지(李頴之)조기(曹祺), 내전 숭반(內殿崇班) 호인영(胡仁頴), 인진사(引進使) 왕의(王儀), 합문 지후(閤門祗候) 고당유(高唐愈)민중형(閔仲衡), 통사사인(通事舍人) 이점(李漸)양문구(梁文矩), 중위랑(中衛郞) 유급(劉及), 중량랑(中亮郞) 팽경(彭京), 충훈랑(忠訓郞) 왕승(王承), 성충랑(成忠郞) 이준기(李俊琦)김세안(金世安), 보의랑(保義郞) 이준이(李俊異), 승절랑(承節郞) 허의(許宜)하경(何景)진언경(陳彦卿)이 맡았으며, 전명(傳命)하고 찬도(贊導 안내)함은, 정의대부 예부상서(正議大夫禮部尙書) 김부일(金富佾), 통의대부 전중감(通議大夫殿中監) 정담(鄭覃), 상서(尙書) 이도(李璹), 중량대부 지합문사(中亮大夫知閤門事) 심안지(沈安之), 중량대부 합문부사(中亮大夫閤門副使) 유문지(劉文志), 합문 인진사(閤門引進使) 김의원(金義元), 합문 통사사인(閤門通事舍人) 심기(沈起)왕수(王洙)김택(金澤)이예재(李銳材)김순정(金純正)황관(黃觀)이숙(李淑)진적(陳迪), 합문 지후 윤인용(尹仁勇)박승(朴承)정택(鄭擇)진칭(陳稱), 통사사인 이덕승(李德升)오자여(吳子璵)탁안(卓安)이 하였는데, 모두 재능(才能)과 언변과 박식으로 뽑혀 이 일을 맡았다.

상면할 때부터 돌아올 때까지 같이 서로 연락(燕樂)하고 유관(游觀)하였는데, 그들의 읍손(揖遜 인사범절)하는 거동이 절차 있고 화락하여 볼 만한 데가 있었다.

지금 우선 이자겸(李資謙) 이하부터 그 형상을 그린 것이 다섯 사람인데, 아울러 그 족망(族望)까지 설명을 하겠다.

 

[D-001]세록(世祿) : 대대로 이어 받는 세습의 국록(國祿). 맹자(孟子)등문공 상(滕文公上)대대로 국록을 이어 받게 하는 것은 등 나라가 이미 실시하고 있다.” 하였다.

 

 

 

-[守太師尙書令李資謙] 수태사상서령 이자겸

高麗素尙族望而國相多任勳戚自王運娶李氏之後而俁爲世子時亦納李女爲妃由是門戶始光顯資謙之兄資義在前代時已爲國相坐事流竄故資謙視覆車之戒每自修飭俁深信重之使爲春宮傅友時楷尙沖幼資謙擇博學多聞之士八人以導翊之如金端輩頃自本朝賜第歸國正預選掄壬寅夏四月俁薨諸弟爭立先是顒有五子而俁居長資謙已立楷仲父帶方公俌意欲奪其位遂與門下侍郞韓繳如樞密使文公美謀爲不軌而禮部尙書李永吏部侍郞鄭克永兵部侍郞林存等十餘人爲內應未及擧而謀泄卽擒捕下吏資謙乃諷王放俌於海島而誅羣惡連逮支黨數百人故以定亂之功進封太師益加食邑采地位尙書令資謙風皃凝靜儀矩雍容好賢樂善雖秉國政頗知推尊王氏在夷狄中能扶奬王室亦可謂賢臣矣然而信讒嗜利治田疇第宅阡陌相連制度侈靡四方饋遺腐肉常數萬斤他皆稱是國人以此鄙之惜哉

고려는 본래부터 족망(族望)을 숭상하고 국상(國相)은 거개 훈척(勳戚 나라에 공이 있는 사람과 임금의 친척)을 임용한다. 왕운(王運 선종(宣宗))으로부터 이씨(李氏)의 후손에게 장가 들었는데, 왕우(? 예종)도 세자(世子) 때에 또한 이씨의 딸을 맞아 비()로 삼았다.

이로 말미암아 문호(門戶)가 빛나고 드러나기 시작하여, 자겸의 형 자의(資義)가 전대(前代) 왕 때에 이미 국상이 되었다가 일에 연좌되어 유찬(流竄 귀양보내는 것)되었기 때문에 자겸이 형의 일을 경계삼아 매양 스스로 조심하였으므로, 왕우가 깊이 신임하고 중히 여겨 춘궁(春宮 세자)의 스승이자 벗을 삼았다.

이때 왕해(王楷 인종)가 아직도 어렸지만, 자겸이 박식하고 견문이 많은 선비 8인을 선발하여 지도하게 하였다. 이를테면 김단(金端) 같은 무리는 그 무렵 본조(本朝)로부터 사제(賜第 임금의 명령으로 특별히 급제한 사람과 똑같은 자격을 주는 것)를 받고 귀국하였는데, 바로 이 선발에 참여되었다.

임인년(1122, 예종17) 여름 4월에 왕우(王俁)가 죽으매, 여러 아우들이 다투어 왕위에 오르려고 했다. 이에 앞서 왕옹(王顒 숙종)이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왕우가 맏아들이었다. 자겸이 이미 왕해를 세웠는데, 중부(仲父) 대방공(帶方公) ()가 그 왕위를 탈취하려고 하여 드디어 문하 시랑(門下侍郞) 한교여(韓繳如)추밀사(樞密使) 문공미(文公美)와 더불어 불궤(不軌 반역)를 음모하니, 예부 상서(禮部尙書) 이영(李永)이부 시랑(吏部侍郞) 정극영(鄭克永)병부 시랑(兵部侍郞) 임존(林存) 10여 인이 내응(內應)하기로 했었는데, 미처 거사하기 전에 음모가 누설되매, 곧 체포하여 하옥(下獄)하였다. 자겸이 이에 왕에게 풍간(諷諫)하여 보를 해도(海島)에 추방하고 여러 악인들을 베었으며 관련자 수백 인을 잡아들였다. 그리하여 변란을 안정시킨 공으로 태사(太師)로 승진시키고 식읍(食邑)과 채지(采地)를 더 주었으며 벼슬이 상서령(尙書令)에 이르렀다.

자겸은 풍모(風貌)가 의젓하고 거동이 화락하고 어진이를 좋아하고 선()을 즐겁게 여겨, 비록 정권을 장악하고 있으면서도 자못 왕씨(王氏)를 높일 줄 알아서, 오랑캐 중에서는 능히 왕실을 부장(扶獎)하는 자이니, 역시 현신(賢臣)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참소를 믿고 이득을 즐기며 전토(田土)와 제택(第宅)을 치장하여 전답이 연달아 있고 집 제도가 사치스러웠고, 사방에서 궤유(饋遺 선물)하여 썩는 고기가 늘 수만 근이었는데, 여타의 것도 모두 이와 같았다. 나라 사람들이 이 때문에 비루하게 여겼으니 애석한 노릇이다.

 

 

 

-[接伴正奉大夫刑部尙書柱國賜紫金魚袋尹彥植 

접반 정봉대부 형부상서 주국 사자금어대 윤언식

 

 

尹氏素以儒學知名瓘在王俁時爲樞府嘗朝貢至中國而彥植乃其子也世與李氏通昏又與資謙厚善楷在春宮而彥植亦預引翼之列故楷立而進官崇貴彥植美風姿人質修偉宛然有儒者之風不可以蠻夷接之也

윤씨는 원래 유학(儒學)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윤관(尹瓘)이 왕우(王俁) 때에 중추부사(中樞府事)가 되어 일찍이 조공하러 중국에 왔었는데, 언식은 곧 그의 아들이다. 대대로 이씨(李氏)들과 혼인했고, 또한 이자겸(李資謙)과 퍽 가깝게 지냈다. 왕해(王楷)가 세자로 있을 때 언식 역시 인익(引翼 인도하고 보익하다)의 반열에 참여하였기 때문에, 왕해가 즉위한 뒤 높고 귀한 벼슬에 승진되었다.

언식은 풍채가 아름답고 자질이 훤칠하여 완연(宛然)히 유자(儒者)의 기풍이 있어, 오랑캐로 대할 수 없었다.

 

 

 

-[同接伴通奉大夫尙書禮部侍郞上護軍賜紫金魚袋金富軾 

동접반 통봉대부 상서예부시랑 상호군 사자금어대 김부식

金氏世爲高麗大族自前史已載其與朴氏族望相埒故其子孫多以文學進富軾豐皃碩體面黑目露然博學强識善屬文知古今爲其學士所信服無能出其右者其弟富轍亦有詩譽嘗密訪其兄弟命名之意蓋有所慕云

김씨는 대대로 고려의 큰 씨족이 되어 전사로부터 이미 실려 오는데, 그들이 박씨(朴氏)와 더불어 족망(族望)이 서로 비등하기 때문에, 그 자손들이 문학(文學)으로써 진출된 사람이 많다. 부식은 풍만한 얼굴과 석대한 체구에 얼굴이 검고 눈이 튀어 나왔다. 그러나 널리 배우고 많이 기억하여 글을 잘 짓고 고금 일을 잘 알아, 학사(學士)들에게 신복(信服)을 받는 것이 그보다 앞설 사람이 없다.

그의 아우 부철(富轍) 또한 시()를 잘한다는 명성이 있다. 일찍이 그의 형제들의 이름 지은 뜻을 넌지시 물어 보았는데, 대개 사모하는 바가 있었다.

 

 

 

-[館伴金紫光祿大夫守司空同知樞密院事上柱國金仁揆]

   관반 금자광록대부 수사공 동지추밀원사 상주국 김인규

金景融王顒世太傅守中書令仁揆卽其子也顒父徽嘗娶金氏女。▣于仁揆有元舅之尊韓繳如等叛李資謙挾王楷以誅羣惡而仁揆與有力焉位司空使樞府仁揆頎而美髥皃魁秀進止端重。▣爲所擇以接使華也

 

 

김경융(金景融)은 왕옹(王顒) 때의 태부 수중서령(太傅守中書令)이니, 인규는 곧 그의 아들이다. 옹의 아버지 휘(문종)가 일찍이 김씨의 딸을 맞이하였으니, 왕해(王楷)가 인규를 원구(元舅 큰 외삼촌)로 존대할 분의가 있다.

한교여(韓繳如) 등이 반역하였을 때, 이자겸(李資謙)이 왕해를 도와 여러 반역 도당을 베었는데, 인규가 참여하여 공력이 있었기 때문에, 사공(司空)에 오르고 중추부(中樞府)에 있도록 했다. 인규는 키가 훤칠하고 수염이 아름답고 모습이 빼어났으며, 행동도 단정하고 장중하므로, 선발하여 사신을 접대하게 한 것이다.

 

 

 

-[同館伴正議大夫守尙書兵部侍郞上護軍賜紫金魚袋李之美 ] 

동관반 정의대부 수상서 병부시랑 상호군 사자금어대 이지미

高麗每中朝人使至必遴擇人材或經朝貢者以爲館伴之美卽資謙之子風皃秀美往嘗入覲天闕住館累月事無巨細悉稟之之美處決無不中禮進趨詳雅綽有華風每言及朝廷必卷卷有傾葵之意其忠誠亦可嘉尙云

 

고려는 매양 중조(中朝)에서 사신이 가게 되면 반드시 인재(人材)를 선발하거나 혹은 조공(朝貢) 갔던 사람으로 관반(館伴)을 삼는다.

지미는 곧 자겸의 아들인데, 풍채와 용모가 준수하고 아름답다. 언젠가 천궐(天闕 중국의 황제가 있는 궁궐)에 조회하고 여러 달 동안 관()에 머무르면서 크고 작은 모든 일을 지미가 처결하였는데 예()에 맞지 않는 것이 없었고, 동작이 찬찬하고 단아하여 여유 작작하게 중화(中華)의 풍도(風度)가 있었으며, 매양 조정(朝廷) 일에 언급되면 반드시 권권(眷眷 애타게 그리워하는 모습)하게 쏠리는 뜻이 있었으니, 그의 충성이 또한 가상하다고 할 만했다.

 

 

 

 

 

宣和奉使高麗圖經卷第九

儀物一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9

의물 1

 

 

-[儀物] 의물

臣聞諸蠻之國雖有君長其出入則不過以旌旜十數自隨與其臣屬略無介辨唯高麗素通朝聘久被漸摩故其君臣上下動有禮文王之巡行各有儀物神旗前驅甲士塞途六衛之軍各執其物雖不盡合典禮然而比之諸蠻粲然可觀此孔子所以欲居而不以爲陋也況箕子之國而爲聖朝眷懷之厚者乎今幷繪其儀物如後

 

여러 오랑캐 나라는 비록 임금이 있으나, 그 출입에는 정(깃대 끝에 오색 깃털을 단 기)과 전(깃대끝이 굽고 장식이 없는 기) 십여 개가 따르는 데에 불과하여 신하들과 거의 뚜렷한 분별이 없다. 다만, 고려는 본래 조빙(朝聘)을 통하여 오랫동안 중국의 영향을 받았으므로, 그 군신 상하가 거동할 적에 예문(禮文 예법의 명문)이 있으니, 왕의 순행(巡行)에 각기 의물(儀物)과 신기(神旗)가 있어, 선구(先驅)하는 갑사(甲士)가 사람이 오가지 못하게 길을 막고, 육위(六衛)의 군대가 각기 그 의물을 잡고 가니, 비록 다 전례(典禮)에 맞지는 않으나, 다른 여러 오랑캐에 비하면 찬연히 빛나 볼 만하다. 이것이 공자(孔子)가 살고 싶다 하고 더럽다 하지 않은 이유이다. 더구나, 고려는 기자(箕子)의 나라인데다가 성조(聖朝 송을 일컬음)의 권회(眷懷)함이 두터운 터이니 더욱 말할 나위 있겠는가? 이제 아울러 그 의물을 아래에 그린다.

 

[D-001]육위(六衛) : 좌우위(左右衛)신호위(神虎衛)흥위위(興威衛)금오위(金吾衛)천우위(千牛衛)감문위(監門衛)인데 고려 태조 2(919)에 두었고, 목종(穆宗)대에 직원과 장수를 갖추었다. 그뒤에 이군(二軍)을 육위의 위에 두었다. 이군은 응양군(鷹揚軍)용호군(龍虎軍)을 말한다.

 

 

 

-[盤螭扇 ] 반리선

盤螭扇二製以絳羅朱柄金飾中繡單螭蜿蜒屈曲一角無鱗形實類龍蓋蛟虯之屬也王行則在前衣錦袍拒風親衛軍執之燕則立于庭中禮畢乃徹

 

반리선이 둘이니, 강라(絳羅 붉은 비단)로 만들어 붉은 자루[朱柄]에 금색으로 장식을 하고, 가운데에 단리(單螭 한 마리의 작은 용)가 꾸불꾸불 굼틀거리는 그림을 수놓았는데, 그 제도가 뿔은 하나요 비늘은 없고, 그 모습은 용()과 비슷하되, 대개 교규(蛟虯 모두 전설상의 용) 류이다. 왕이 행차할 때면 앞에 세워 금포(錦袍)를 씌워 바람을 막는데, 친위군(親衛軍)이 이를 잡고, 잔치할 때는 뜰 가운데에 세우되, ()가 끝나면 거둔다.

 

[D-001]친위군(親衛軍) : 왕의 친위부대로서 둘이 있으니, 이를 이군(二軍)이라 한다. 이 이군은 바로 응양군(鷹揚軍)용호군(龍虎軍)이다.

 

 

 

-[?] 쌍리선

雙螭扇四采色裝飾略同單螭但繡形並列行禮則亦以親衛軍執之

 

쌍리선은 넷이다. 그 빛깔과 장식은 대략 단리(單螭)와 비슷한데, 다만 수놓은 모양이 나란히 벌렸고, 예를 행할 때는 친위군이 이를 잡는다.

 

 

 

-[繡花扇 ] 수화선

繡花扇二製以絳羅朱柄金飾中繡牡丹雙花扇之形制比之螭文其上微窪行禮排立在螭扇之次亦以親衛軍執之三色之扇各廣二尺高四尺其笴各長一丈云

수화선은 둘이다. 강라(絳羅)로 만들어 붉은 자루[朱柄]에 금색으로 장식하고, 가운데에 모란꽃 둘을 수놓았는데, 부채의 모습은 이문선(螭文扇)에 비하면 그 위가 조금 파였고, 예를 행할 때는 이선(螭扇)의 다음에 세운다. 또 친위군이 잡는 삼색선(三色扇)은 그 너비가 2, 높이가 4척인데 그 자루의 길이는 각각 10자가 된다고 한다.

 

 

 

-[羽扇 ]우선

羽扇四其制掇拾翠羽編次爲之下以銀飾狀如文禽塗以黃金頗覺華采但難於愛護歲月旣久則羽毛脫落其形上方今當圖其完形如初製而未久者庶可考也其制笴長一丈扇廣一尺五寸高二尺行禮則以金花曲脚幞頭錦衣親衛軍將執之

우선은 넷이다. 그 제도는 푸른깃[翠羽]을 모아 차차 엮어내려 아래를 은으로 장식하였는데, 모양이 문금(文禽) 같다. 여기에 황금(黃金)을 칠하여, 자못 화려한 문채가 나지만 다루기가 어렵고, 오래 되면 깃이 빠져 그 형상이 위가 모[]지게 된다. 이제 그 완전한 형상을 그렸는데, 처음의 모습에서 오래되지 않은 것과 같으니, 거의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제도는 자루의 길이가 10자요, 부채의 너비가 15, 높이가 2척이다. 예를 행할 때는, 금화곡각(金花曲脚)으로 장식한 복두와 비단옷[錦衣]을 입은 친위군(親衛軍)의 장군이 이를 잡는다.

 

[D-001]금화곡각(金花曲脚) : 고려사(高麗史)74충목왕 3(1347) 10월 김인관(金仁琯)이 급제하자 왕이 말과 붉은 띠를 하사하고 금화모를 쓰도록 허락하였다.” 한다.

 

 

 

-[曲蓋 ]곡개

曲蓋二其形六角各有流蘇絳羅被飾上爲明珠金銀間錯其柄微曲王之出入不覆其下唯以衛軍執之前驅數十步以爲儀式其制高一丈二尺廣六尺

곡개(曲蓋)는 둘이다. 그 모양은 6각이고, 각기 유소(流蘇 깃발이나 가마 등에 달던 술)가 있고, 강라(絳羅)로 장식하고, 위에 명주(明珠)와 금은을 섞어 장식하고 그 자루는 조금 굽었다. 왕이 출입할 때 그것을 받치지 않고 다만 위군(衛軍)에게 이를 잡혀서 수십 보() 앞에 가게 하여 위의를 갖춘다. 그 만듦새는 높이 12, 너비 6척이다.

 

[D-001]곡개(曲蓋) : 수레 위에 받쳐 햇빛을 막는 것. 곡직화개(曲直華蓋)란 것도 있고, 청곡병대산(靑曲柄大傘)이라는 것도 있다.

 

-[靑蓋 ] 청개

靑蓋之制略同中國絳羅爲裏廣幅垂下復加黃絲組綬以爲采飾聞常用以紅唯人使至則以靑羅罩之蓋麗人以紅爲最貴非國王不得用今此覆蓋亦恭順聖朝謙避使節之一端耳

 

청개의 만듦새는 거의 중국과 같다. 안쪽은 강라(絳羅)로 만들고, 넓은 폭을 아래로 늘이고, 또 노란 실로 짠 끈으로 장식했다. 듣건대, 보통 때는 다홍[]을 쓰나, 중국 사신이 오면 청라(靑羅)로 위를 가린다 한다. 대개 고려인은 다홍을 가장 귀히 여겨 국왕(國王)이 아니면 쓰지 못하는데, 이제 위를 덮는 것은 또한 중국 조정에 공순하여 사절(使節)에게 겸손하는 일단이다.

 

 

 

 

 

 

 

宣和奉使高麗圖經卷第十

儀物二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10

의물 2

 

 

-[華蓋 ]화개

華蓋之制文羅繪繡間錯爲之上有六角各出流蘇狀如佩環五采垂帶相比仍有鸞聲其蓋縱三尺橫六尺長二丈五尺大禮則以金吾仗衛軍執之立於閶闔門外

 

화개의 제도는 문라(文羅)에 그림과 수()를 섞어 꾸미고, 위는 육각(六角)이다. 각기 유소(流蘇)가 나왔는데, 그 모양이 패환(佩環 장식으로 차는 고리옥)과 같으며, 오채(五采 오색의 비단)를 가지런히 내렸는데 여기서 방울소리를 낸다. 그 뚜껑[]은 세로가 3, 가로가 6, 길이가 2() 5척이니, 대례(大禮)인즉 금오장위군(金吾仗衛軍 금오위의 의장병)이 이를 잡고, 창합문(閶闔門) 밖에 서 있다.

 

 

 

 

-[黃幡 ]황번

黃幡之制以文羅爲之上繡祥雲其形上銳兩角設流蘇動搖有聲幡之首尾通長九尺闊一尺五寸竿長一丈五尺大禮則以與華蓋並列而所執之軍服飾一等也

 

황번의 제도는 문라(文羅 무늬 있는 비단)로 만들고, 위에 상운(祥雲 상서로운 구름 무늬)을 수놓고, 그 형상이 위를 뾰족하게 하고, 두 귀에 유소(流蘇)를 내렸는데, 흔들면 소리가 난다. ()의 머리에서 끝까지 길이가 9, 너비가 15, 자루의 길이가 15척이며, 대례(大禮) 때에는 화개(華蓋)와 나란히 세우는데 그것을 잡고 선 군인의 복식(服飾)도 한가지이다.

 

 

 

 

-[豹尾 ] 표미

豹尾之制建於矛上大小不一當是隨其獸之形而取之迎詔則以千牛衛軍執之在前及門則立於同德昇平兩閤也

 

표미(豹尾)의 제도는 창[] 위에 꽂아 크고 작기가 같지 아니한데, 이는 그 표범의 꼬리 모양에 따라 취하기 때문이다. 조서[]를 맞을 때는 천우위군(千牛衛軍)이 이를 잡고 앞에 섰으며, ()에 이르면 동덕(同德)승평(昇平) 두 문 사이에 세운다.

 

[D-001]표미(豹尾) : 표범 꼬리를 단 의장. 당대의 벽화에서 이 표미의 그림이 발견되었다. 이 벽화에는 칼집도 표미로 장식하고 있다.

 

 

 

 

-[金鉞 ] 금월

金鉞之制略同柱斧於竿之杪立一翔鸞行則動搖有騫騰之勢王行則龍虎親衛軍將一人執之從于後

 

금월의 제도는, 주부(柱斧 수정으로 만든 작은 도끼)와 비슷하되 장대의 끝에 나는 난조(鸞鳥)를 한 마리 세워, 갈 적에는 움직여 치켜오르는 형상을 하니, 왕이 거둥하면 용호친위군(龍虎親衛軍)의 장군 한 사람이 이를 잡고 뒤에 따른다.

 

 

 

 

-[毬杖 ] 구장

毬杖之制以木刻成裹以白金中有小好貫采綬而垂之大禮則以散員校尉十人執之立於會慶殿兩階之下

 

구장(毬杖)의 제도는 나무를 깎아 만들고, [白金]으로 이를 감싸되, 그 가운데에서 조금 좋은 것은 채수(采綬)를 꿰어 늘어뜨렸다. 대례(大禮)에는 산원 교위(散員校尉) 10명이 이를 잡고, 회경전(會慶殿) 양쪽 층계 밑에 서 있다.

 

[D-001]구장(毬杖) : 격구할 때 쓰는 공채.

 

 

 

-[旂旆] 기패

旂旆之制以絳羅爲之次第相屬繫於竿上又於其杪以白羽爲之飾自群山島已見之惟領軍執事者各給焉蓋藉以指麾之物此衛軍所以旂頭爲高品也

 

기패의 제도는 강라(絳羅 붉은 비단)로 이것을 만들고, 차례로 잇대어 깃대[竿] 위에서 맺어 내려뜨리며, 또는 그 꼭대기에 흰 깃[白羽]으로 장식을 하는 것도 있다. 군산도(群山島)부터 이미 보이며, 다만 영군(領軍)이나 집사(執事)하는 이에게 각기 내려준다. 대개 이것에 의지하여 지휘하므로 위군(衛軍)은 기패를 소중히 여기고 있다.

 

 

 

宣和奉使高麗圖經卷第十一

仗衛一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11

장위 1

 

 

 

 

-[仗衛] 장위

臣聞高麗王城仗衛比他郡最盛蓋驍勇萃於此當中朝使至盡出之以示榮觀焉其制民十六以上充軍役其六軍上衛常留官府餘軍皆給田受業有警則執兵赴敵任事則執役服勞事已則復歸田畝偶合前古鄕民之制初高麗在魏世戶不過三萬至唐高宗下平壤收其兵乃三十萬今視前世又增倍矣其留衛王城常三萬人迭分番以守制兵之略軍有將將有領隊伍有正步列有等列爲六軍曰龍虎神虎興威金吾千牛控鶴分爲兩衛曰左衛右衛別以三等曰超軍猛軍海軍無黥墨之制無營屯之居唯給使於公以衣服爲別而已鎧甲上下連屬制如逢掖形狀詭異金花高帽幾及二尺錦衣青袍緩帶垂胯蓋其國人質侏儒特加高帽錦采以壯其容耳今繪圖各以名色列之于後

 

고려 왕성(王城)의 장위(仗衛 의장과 호위)는 다른 고을에 비하여 가장 성대하고, 날랜 군사가 모두 모였으며, 중국의 사절이 이르면 이들을 모두 내어 보여 영예로운 모양을 과시한다.

그 제도는 백성이 16세 이상이면 군역(軍役)에 충당되는데, 그 육군(六軍 육위(六衛))의 상위(上衛 상번(上番)하는 군사)는 항상 관부(官府)에 머무르고, 나머지 군사는 모두 전지[]를 지급하여 생업에 종사하게 하였다가, (외국의 침입 등 국가의 비상사태)이 있으면 무장을 하고 적지에 달려가고, 일을 맡게 되면 또 그 일에 종사하며, 일이 끝나면 다시 농토에 복귀하니, 우연하게도 옛날의 향민제도[鄕民之制]에 부합된다.

처음 위() 나라 때 고려(高麗 즉 고구려) 호수는 3만에 불과하더니, 당 나라 고종(高宗 649683)이 평양(平壤)을 함락시켰을 때 수합한 군사가 30만이었고, 지금은 전세(前世)에 비해 또 배가 증가되었다.

왕성에 머물러 숙위(宿衛)하는 군사는 항상 3만이며, 이들이 교대로 번()을 나누어 수비한다. 군사를 제어하는 방략은, ()에는 장()을 두고, 장에는 영()을 두고, 대오(隊伍)에는 정보(正步)를 두었으며 열()에는 등()을 두었다. 열은 육군(六軍)으로 되었는데 용호(龍虎)신호(神虎)흥위(興威)금오(金吾)천우(千牛)공학(控鶴)이며, 이를 나누어 양위(兩衛)를 만드니 좌위(左衛)우위(右衛)이며, 이를 또 3등으로 구별하여 초군(超軍)맹군(猛軍)해군(海軍)이라 한다.

경묵(?죄인의 얼굴이나 팔에 먹물로 죄명을 새겨넣는 형벌)하는 제도나 영둔(營屯)하는 거처는 없고, 오직 공적인 일에 사역되면 의복으로 구별할 뿐이다. 투구와 갑옷[鎧甲]은 아래위가 붙어 있는데 그 제도는 봉액(逢掖)과 같아서 형상이 궤이(詭異)하다. 금화고모(金花高帽 모자 위에 금화로 꾸민 전모(戰帽))는 거의 2[]나 되고, 비단옷과 푸른 도포[錦衣靑袍]에 헐렁하게 맨 띠[]는 고(저고리와 함께 입는 하의)에까지 드리우니, 대개 그 나라 사람은 키가 작아서 특별히 높은 모자와 비단옷[錦衣]을 입어 그 모양을 장하게 한 것이다. 이제 그림을 그려서 각각 그 명색(名色)을 뒤에 나열한다.

[D-001]향민제도[鄕民之制] : 중국 고대의 지방제도. 주제(周制)5()를 비(), 5비를 여(), 5여를 족(), 5족을 당(), 5당을 주(), 5주를 향()이라 하여, 향은 125백 가였다. 이후 춘추 시대의 제()와 진()() 시대에도 이와 비슷한 제도가 있었다.

[D-002]군사를 제어하는 방략 : 상장군(上將軍)대장군(大將軍)장군(將軍)중랑장(中郞將)별장(別將)산원(散員)()대정(隊正) 등으로 편성된다. 高麗史 百官志

[D-003]봉액(逢掖) : 옛날 선비가 입는 옆이 넓게 트이고 소매가 큰 도포(道袍)의 한 가지. 봉의(逢衣).

 

 

-[龍虎左右親衛旗頭] 용호좌우친위기두

龍虎左右親衛旗頭服毬文錦袍塗金束帶展脚幞頭略類中朝服度持小旗旆以令六軍蓋軍衛之隊長也唯王府之內衛者二人使者至則置一人於兵仗內乘馬前導蓋所以待使人而供給皆輟侍王之人禮至於此可謂至矣

용호좌우친위기두(龍虎左右親衛旗頭)는 구문금포(毬文錦袍 환상(環狀) 무늬가 있는 비단 도포)를 입고, 도금(塗金)한 띠를 띠며, 전각복두(展脚幞頭 복두의 일종. 후면에 좌우 양 뿔이 있는 것)를 쓰니 대략 중국의 복식(服飾) 제도와 같다. 작은 깃발[小旗]을 가지고 육군(六軍)을 호령하니 이것이 26위의 대장(隊長)이다. 왕부(王府) 안에는 지키는 자가 두 사람뿐인데, 사자(使者 중국 사신을 가리킴)가 오게 되면 한 사람을 병장(兵仗) 안쪽에 배치하여 말을 타고 앞서서 인도하게 한다. 이것은 사신을 대우하여 공급하는 것으로 모두 왕을 모시는 사람을 거둔 것이니, 예의가 이 정도면 지극하다고 할 만하다.

[D-001]용호좌우친위기두(龍虎左右親衛旗頭) : 용호좌우친위는 용호군(龍虎軍)을 말하는 것으로서, 고려사백관지에 용호군에는 두 영군(領軍)이 있고, 상장군대장군 각 1인을 두었으며, 매영에는 장군중랑장낭장별장산원대정을 두었다.’ 하였다. 기두는 사기자(司旗者) 즉 군기를 맡은 사람. 고려 때의 중앙군은 26(二軍六衛) 체제인데, 2군인 응양군(鷹揚軍)용호군(龍虎軍)은 왕의 친위군이며, 6위 가운데 좌우위(左右衛)신호위(神虎衛)흥위위(興威衛)3위는 수도 개경의 수비와 경수(更戍)를 담당하고, 금오위(金吾衛)는 경찰, 천우위(千牛衛)는 의장(儀仗), 감문위(監門衛)는 궁성 안팎 여러 문()의 수위를 담당하였다.

 

 

 

-[龍虎左右親衛軍將] 용호좌우친위군장

龍虎左右親衛軍將亦服毬文錦袍塗金束帶帽頭兩脚折而上右勢微屈飾以金花王出入則十餘人執羽扇金鉞以從

용호좌우친위군장 또한 구문금포(毬文錦袍)에 도금한 띠를 띠며, 모두(帽頭)의 뿔을 꺾어 올려서 오른쪽으로 조금 굽게 구부렸는데, (즉 절각복두(折脚幞頭)를 말함) 금화(金花)로 장식하였다. 왕이 출입할 때에는 10여 인이 우선(羽扇 새깃으로 만든 부채. 의장의 하나)과 금월(金鉞 금도끼. 의장의 하나)을 잡고 시종한다.

 

 

 

-[神虎左右親衛軍] 신호좌우친위군

神虎左右親衛軍服毬文錦袍塗金束帶金花大帽仍加紫帶繫於頷下如紘纓之屬形製極高望之巍然昔齊永寧中高麗使至服窮袴冠拒風中書郞王融戲之曰服之不衷身之災也頭上定是何物答曰此則古弁之遺像也今觀高帽之制其拒風之俗今猶然也

 

신호좌우친위군도 구문금포에 도금한 띠를 띠며, 금화대모(金花大帽 금화로 장식한 큰 모자)를 썼는데, 자주색 띠를 더하여 턱 아래에 맨 것이 갓끈[紘纓] 등속과 같다. 그 만듦새는 매우 높아 바라보기에 우뚝하다. 옛날 제() 나라 영녕(永寧) 연간에 고려 사신이 왔을 때 궁고(窮袴 통이 좁은 바지)를 입고 거풍(拒風)을 썼었다. 중서랑(中書郞) 왕융(王融)이 이를 희롱하여 말하기를, ‘의복이 맞지 않는 것은 몸의 재앙이다. 머리에 쓴 것은 무슨 물건이오?’ 하니, 대답하기를 이는 옛날 고깔[]의 유상(遺像)이오.’ 하였다. 지금 높은 모자의 제도를 보니, 그 거풍의 풍속은 아직도 그런가보다.

[D-001]() 나라 영녕(永寧) : 제는 중국 남북조 시대의 남제. 영명(永明)의 잘못. 남제서(南齊書58 동남이열전(東南夷列傳) 고려조에 이 기사가 보인다. 영명은 남제 무제(武帝)의 연호(483493).

[D-002]왕융(王融) : 중국 남제 때 사람. 자는 원장(元長). 벼슬은 중서랑에 이르고 문사(文辭)를 민첩하게 잘하여 창졸간에 글을 지어도 모두 공교하였다 한다. 南齊書 卷47

 

 

 

-[興威左右親衛軍] 흥위좌우친위군

興威左右親衛軍服紅文羅袍以五采團花點襭爲飾金花大帽黑犀束帶王之左右二十餘人出則執螭文繡花大扇曲蓋扈從前後常服自龍虎神威以下皆以紫帽無金飾諸衛中唯此一等人質差偉焉

 

흥위좌우친위군은 붉은 무늬의 비단을 입었는데, 옷깃에 점점이 오색 모양의 꽃송이로 장식하였으며, 금화대모를 쓰고, 흑서(黑犀 검은 무소뿔) 띠를 띠었다. 왕의 좌우에 20여 인이 있는데 출동할 때에는 이문수화(螭文繡花뿔 없는 용 무늬와 수 놓은 꽃 무늬)의 대선(大扇 의장의 하나)과 곡개(曲蓋 자루가 굽은 일산(日傘). 의장의 하나)를 잡고 전후에서 호종한다. 평상복은 용호신위 이하 모두가 자주색 모자[紫帽]를 썼는데 금으로 수식한 것이 없다. 여러 위() 가운데 이들의 인품만이 조금 훤칠하다.

 

 

 

 

-[上六軍左右衛將軍]상육군좌우위장군

上上六軍左右衛將軍被介冑烏革間鐵爲之文錦絡縫使相連屬自腰以下垂十餘帶飾以五采繡花左佩弓劍拱手鞠躬立於殿門之上惟受詔拜表日會慶殿中門六人兩偏門各四人屹然山立如土木偶恭肅之容亦可尙也

상육군좌우위장군은 개주(介冑 갑주(甲冑) 즉 갑옷과 투구)를 입었는데, 검은 가죽과 쇠로 만들었으며, 무늬 있는 비단으로 꿰매어 서로 붙어 있게 하였다. 허리 아래에는 10여 개의 띠를 드리웠는데 오색 수 놓은 꽃무늬[五采繡花]로 장식하였고, 왼쪽에는 활과 칼을 찼다. 손을 마주 끼고 국궁(鞠躬 몸을 굽히는 것)하여 궁전 문 위에 서 있는데, 수조(受詔 천자의 조서를 받는 것)를 하거나 배표(拜表 천자에게 올리는 표()를 절하고 보내는 것)하는 날에는 회경전(會慶殿) 중문에 6, 양쪽 곁문[偏門]에 각각 4인이 우뚝하게 산처럼 서 있는 것이 흙이나 나무로 만든 허수아비와 같다. 공손하고 엄숙한 모습이 또한 가상스럽다.

 

 

 

-[上六軍衛中檢郞將]상육군위중검랑장

上六軍衛中檢郞將蓋有功於宮禁者以次遷補王所親信賴以保捍內外常服皆紫衣幞頭唯大禮齋祭受詔拜表則介冑而出兜鍪不加於首而負於背裹紫文羅巾飾以珠貝左佩弓劍手執彈弓王行則在前有喧嘯則控弦不發而爲之警人皆肅然飛鳥過則以丸擊之夜則秉炬而行巡視不惰嘗疑執彈之義問之云取御史彈劾之義

 

상육군위중검랑장은 궁금(宮禁 왕궁)에 공이 있는 사람을 차례로 옮겨 보직을 하니, 왕이 친신(親信)하여 이들의 힘을 입어 내외를 보전하고 막는 것이다. 평상복은 모두 자주색 옷과 복두(幞頭)이며, 대례(大禮 국가의례)와 재제(齋祭 불교의식과 유교의식)수조(受詔)배표(拜表)에는 갑옷과 투구를 입고 나오는데 투구[兜鍪]는 머리에 쓰지 않고 등에다 맨다. 자문나건(紫文羅巾)을 썼는데 이것은 구슬로 장식하였다. 왼쪽에는 활과 칼을 차고 손에는 탄궁(彈弓)을 들었다. 왕이 출행할 때는 그 앞에 있으면서 훤소(喧嘯 큰 소리를 냄)가 있으면 시위를 당기는데 발사하지는 않고 경계만 하여 사람들이 모두 숙연해지게 한다. 새가 지나가면 탄환으로 쏘고, 밤에는 횃불을 들고 가면서 순시하기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전에 탄궁을 든 뜻이 의심스러워 까닭을 물으니, ‘어사가 탄핵하는 뜻을 취한 것이다.’ 하였다.

 

 

 

-[龍虎中猛軍] 용호중맹군

龍虎中猛軍服青布窄衣白紵窮袴復加鎧甲唯無覆膊首不施胄背負而行各執小矛上繫白旗大不盈尺繪雲爲飾迎詔入城受詔拜表則在衆仗之後夾道而進府會游觀惟不施甲冑兵仗中獨此軍最衆約三萬人

 

용호중맹군은 푸른 베로 만든 소매 좁은 저고리[靑布窄衣]와 흰 모시로 만든 좁은 바지[白苧窮袴]를 입고, 다시 투구와 갑옷을 덧입었는데, 오직 부박(覆膊 어깨를 가리는 것)만이 없다. 투구는 머리에 쓰지 않고 등에 매고 다닌다. 각각 작은 창을 들고 창 위에 흰 기를 달았는데, 큰 기는 한 자가 안 되며, 구름무늬를 그려 장식하였다. 조서를 맞이하여 성에 들어가거나 수조(受詔)하고 배표(拜表)할 때는 여러 의장(儀仗)의 뒤에서 길을 끼고 전진하며, ()에 모일 때와 유관(游觀)을 할 때는 투구와 갑옷을 착용하지 않는다. 병장(兵仗) 가운데 이 군사가 가장 많아 약 3만 인이나 된다.

 

 

 

-[金吾仗衛軍]금오장위군

金吾仗衛軍服紫寬袖衫圈着幞頭以采上束各隨其方之色方爲一隊隊爲一色間繡團花爲飾執持幡蓋儀物立於閶闔門外

 

금오장위군은 자관수삼(紫寬袖衫 자색 넓은 소매의 적삼)을 입었으며, 복두를 말아 썼는데[圈著] 색동[]으로 위를 묶어서, 각각 그 방위의 빛깔을 따라 한 방위가 한 대()가 되고 한 대가 한 빛깔이 되며, 간간이 둥근 꽃을 수놓아 장식하였다. 번개(幡蓋 번은 기치, 개는 일산 등 의물(儀物))를 들고 창합문(閶闔門) 밖에 선다.

 

 

 

-[控鶴軍] 공학군

控鶴軍服紫文羅袍五綵間繡大團花爲飾上折脚幞頭凡數十人以奉詔輿王與人使私覿往來則奉箱篚

 

공학군은 자문나포(紫文羅袍)를 입었는데, 오색 비단에 간간이 크고 둥근 꽃을 수놓아 장식하였고 절각복두(折脚?)를 썼다. 무릇 수십 인이 조여(詔輿 조서를 실은 가마)를 받들며, 왕이나 사신이 사사로이 보러 왕래할 때는 상비(箱篚상자와 대그릇)를 받든다.

 

 

 

 

 

宣和奉使高麗圖經卷第十二

仗衛[]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12

장위 2

  

 

 

-[千牛左右仗衛軍]천우좌우장위군

千牛左右仗衛軍服緋窄衣首加皮弁黑角束帶腰有二襜飾以獸文手執小戈上貫一鼔其制如鞉亦有執畫戟鐙杖豹尾之屬與此服飾皆一等也

 

천우위와 좌우위의 장위군은 비색(緋色) 착의(窄衣 좁은 옷)를 입고 가죽으로 만든 고깔[皮弁]을 썼으며, 검은 뿔로 만든[黑角] 띠를 띠었다. 허리에는 두쪽의 옷 가리개가 있는데 짐승 무늬로 장식하였고, 손에는 작은 창[小戈]을 들었는데 창위에 한 개의 북을 꿰어 다니 그 제도가 도(중국의 작은 북)와 같다. 화극(畫戟 그림을 그려 넣은 창)등장(鐙杖)표미(豹尾 표범 꼬리로 장식된 의장물) 등속을 든 사람도 있는데 복식은 모두 한 모양이다.

 

 

 

-[神旗軍] 신기군

神旗軍以皮蒙首上爲木鼻狀獸額示服猛也朱衣短後復加兩襜飾以獸文唯迎詔受禮則陳于前張五方大神旗載以車軸隨所向安立每車十餘人山路間關突兀時方大暑汗流浹背比之他儀最爲勞耳

신기군은 가죽으로 머리를 쌌는데, 상부에 목비(木鼻)를 만들어 짐승의 이마 모양이 되게 한 것은 용맹스러움을 표시한 것이다. 붉은 저고리는 짧고 뒤에 또 두 쪽의 옷가리개를 덧붙이고 있는데, 이는 짐승 무늬로 장식이 되어 있다. 조서(詔書)를 받거나 예()를 받을 때는 앞에 진열하여 오방대신기(五方大神旗)를 펼쳐 수레에 싣고 향하는 곳을 따라 꼼짝 않고 서 있는데, 수레마다 10여 인씩이다. 산길이 험난하고 높은데다 마침 큰 더위에 땀이 흘러 등을 흠뻑 적시니, 다른 장위군에 비하여 가장 수고가 많다.

 

 

 

-[龍虎上超軍]용호상초군

龍虎上超軍服青布窄衣文羅頭巾前襟與背皆有團號其制不一王宮使令咸以龍文餘以盤花悉皆蹙金雜作間繡制作精巧館中三節位側布列三二人名曰巡邏實察非常也人使出入則亦給使上節十餘人以等殺之

용호상초군은 청포(靑布)의 착의를 입고, 문라두건(文羅頭巾 무늬 있는 비단으로 만든 두건)을 썼다. 앞깃과 등에 모두 단호(團號 둥근 표시)가 있는데, 그 제도는 한결같지 않다. 왕궁의 사령(使令)은 모두 용무늬[龍文]로 하고, 나머지는 서려 있는 꽃무늬[盤花]로 하였는데 모두가 금박을 먹이고 간간이 수놓은 것도 섞였는데 그 제작이 정교하다. 관중(館中 사신이 머물러 있는 객사)의 삼절(三節)이 있는 곁에 두서너 사람을 배치하고 순라(巡邏)라 이름하니, 이는 실로 비상사태를 살피는 것이다. 사신이 출입할 때는 또 사령을 지급하는데, 상절(上節)에게는 10인이고 나머지는 등급에 따라 강쇄(降殺)한다.

[D-001]삼절(三節) : 정사부사 이외의 관원들을 상3절로 나눈다.

 

 

 

-[龍虎下海軍] 용호하해군

龍虎下海軍服青布窄衣黃繡盤鵰紅革銅帶執朱柄檛順天門守衛二十餘人每至館會則列于廷中酒行則聲喏而退東西兩序交互卷行復出門外용호하해군은 청포 착의를 입었는데, 서린 소리개[盤鵰]를 누렇게 수놓았으며 붉은 가죽과 구리로 만든 띠를 띠고 붉은 채찍을 들었다. 순천문(順天門)의 수위(守衛)20여 인인데, 매향 관회(館會)에 이르면, 뜰 가운데 벌여 있다가 술잔이 돌면 하고 물러나 동서 두 줄로 엇갈려 돌아가며 다시 문밖으로 나간다.

 

 

 

-[官府門衛校尉] 관부문위교위

官府門衛校尉服紫文羅窄衣展脚幞頭右佩長劍拱手而立考其所任之職總轄兵階戰陣獲敵首不願賜銀者次第遷補以留王府守衛諸門自會慶門置左右親衛將軍外其餘內則廣化外則宣義諸門皆有之至於寺觀官府時亦用焉然服飾人材皆所不逮當是一時旋置以他名色人充代非一等品秩也

관부문위교위는 자문라착의(紫文羅窄衣 자주색 무늬의 비단으로 만든 좁은 옷)를 입고 전각복두(展脚幞頭)를 썼으며, 오른쪽에 장검(長劍)을 차고서 손을 마주끼고 섰다. 그 맡은 직책을 보면 군사의 계급을 총할하며, 전진(戰陣)에서 적진의 수급(首級)을 노획하고서도 은자(銀子)의 하사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 차례로 여기에 보직되어 왕부(王府)에 머무르면서 여러 문들을 수위한다. 회경문(會慶門)에서부터 좌우친위 장군(左右親衛將軍)을 배치하였는데, 그 밖에는 안은 광화문(廣化門)과 밖은 선의문(宣義門) 등 여러 문에 모두 있으며, 사관(寺觀 불사와 도관(道觀))이나 관부(官府)에서도 또한 쓴다. 그러나 복식과 인재가 모두 앞의 것에 미치지 못하고, 한때에 임시로 배치하였다가 다른 명색(名色)의 사람으로 충당하는데, 이는 일등 품질(品秩)이 아니다.

 

 

 

-[六軍散員旗頭] 육군산원기두

六軍散員旗頭自紫燕島方見之亦軍中之總領者展脚幞頭紫文羅窄衣束帶革履手執旗旆仗衛儀物領軍執事每隊各一人行列進退視以爲准正中華人員之類也

육군산원기두는 자연도(紫燕島 인천항 서쪽 27리에 있음)에서 처음으로 보았는데, 이 또한 군중(軍中)의 총령자(總領者)이다. 전각복두를 쓰고 자색 문라 착의(文羅窄衣)에 띠를 띠고 가죽신을 신었으며, 손에는 기패(旗旆) 등 장위 의물(仗衛儀物)을 들었다. 영군 집사(領軍執事)는 대()마다 각각 한 사람인데 행렬의 진퇴는 이들을 보고 표준을 삼으니 바로 중국의 인원(人員)과 같은 유이다.

 

 

 

-[左右衛牽攏軍] 좌우위견롱군

左右衛牽攏軍服紫窄衣練鵲文錦絡縫烏紗軟帽布襦革履以馭衆馬唯使副上節官有之餘皆以龍虎超軍代之

좌우위견롱군은 자색 착의(紫色窄衣)를 입으니 연작문금(練鵲文錦 까치 무늬를 수놓은 비단)이다. 검은 깁[烏紗]을 연결하여 만든 연모(軟帽)를 쓰며, 베적삼에 짚신을 신고 많은 말을 몬다. 오직 사부(使副 정사와 부사)와 상절관(上節官)에게만 있고, 나머지는 모두 용호 초군으로 대신하였다.

 

 

 

-[領軍郞將騎兵] 영군랑장기병

領軍郞將騎兵服飾其等不一凡紫羅戰袍白袴皁屨文羅爲巾飾以珠貝者皆麗人也至服青綠緊絲大花戰袍其袴或以紫或以黃或以皁髡髮而巾制不袤切附於頂聞是契丹降卒使副會于王府還至奉先庫前岡阜之上見前驅數十騎鳴鑾馳驟跳梁鞍間輕銳驍捷意欲燿武島夷僻遠偶有勁卒而急於人知亦可笑也

 

영군랑장기병은 복식의 등급이 한결같지 않다. 무릇 자색 비단 전포[戰袍]를 입고 흰 고의[白袴]에 검은 짚신과 무늬 있는 비단으로 만든 두건에 구슬로 장식한 것은 모두 고려 사람이었다. 그리고 청록긴사대화전포(靑綠緊絲大花戰袍 청록색 촘촘한 실로 짠 옷감에 큰 꽃무늬가 있는 전포)를 입고, 바지가 자색황색 또는 검은 색인 것과, 머리를 깎고 두건이 길지 않으며 정수리에 딱 붙게 쓴 것은, 듣건대 거란[契丹]의 항졸(降卒)이라 한다. 사부(使副)가 왕부(王府)에서 회합하고 봉선고(奉先庫 선왕의 제사 때 쓰는 곡식 등 제물을 두는 곳집) 앞 언덕 위에 돌아왔을 때 앞에서 인도하는 전구(前驅) 수십 기()를 보았는데, 말방울을 울리며 치닫고 안장과 등자() 사이에서 날뛰는 것이 경쾌하고도 민첩하였다. 이것은 무술을 자랑하려는 것이다. 도이(島夷 고려를 말함)가 편벽되고 먼 곳에서 우연히 경졸(勁卒)을 만나 남이 알아주기에 급급하니 또한 가소로웠다.

 

 

 

-[領兵上騎將軍] 영병상기장군

領兵上騎將軍服紫羅窄衣展脚幞頭右帶虎韔左持弓矢兵仗內列凡百餘人分爲兩隊每人使出在前至廣化門則下馬止而不入歸館則止於順天外門行列則極齊飾非比郞騎也

영병상기장군은 자색 비단 착의[紫羅窄衣]를 입고, 전각복두를 썼으며, 오른쪽에는 호창(虎韔 호랑이를 그린 활집)을 띠고 왼손에는 활과 살을 들었다. 병장(兵仗) 안쪽 대열에 모두 1백여 인을 세워 두는데, 이를 양대(兩隊)로 나누어, 매양 인사(人使)가 나갈 때는 앞에 있다가 광화문에 이르면 말에서 내려 정지하고 들어가지 않는다. 귀관(歸館)하면 다시 순천문의 외문(外門)에 서 있는다. 행렬이 극히 정제하고 기율이 있어 낭기(郞騎)에 비할 바가 아니다.

 

宣和奉使高麗圖經卷第十三

兵器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13

병기

 

 

-[兵器] 병기

臣聞范曄書云夷者001言仁而好生萬物柢地而生出故天性柔順所以不若西戎之喜兵也高麗固箕子八條所敎之地然其兵器甚簡而疏豈原其性然耶兵法曰兵不犀利與徒搏同惟麗人之兵疏簡此所以屢爲匈奴所扼而不能與之校雖然異俗器械各有所施不可以不知今具其名物次之于左

[-001]:

범엽서(范曄書)에 이르기를 ()는 뿌리[]라 어질어서 생육하기를 좋아함[仁而好生]을 말하는 것이니, 만물은 땅에 뿌리를 박고 자라나는 것이므로 그 천성이 유순하다.’ 하였다. 따라서 싸움을 좋아하는 서융(西戎)과는 같지 않다. 고려는 본래 기자(箕子)가 팔조(八條)로 교화한 땅이지만, 그러나 그 병기가 매우 간단하고 성긴 것이 어찌 그 성품에 근원하여 그런 것이겠는가? 병법에 이르기를 병기가 견고하지 못하면 맨손으로 치는 것과 같다하였다. 고려 사람의 병기가 성기고 간단한 것은 여러 차례 흉노(匈奴)에게 곤액(困扼)을 당하여 능히 더불어 겨루지 못한 까닭이다. 그러나 습속이 다른 병기라 해도 각각 베푸는 바가 있는 것이니, 알아두지 않을 수 없다. 이제 그 사물의 명칭과 특징을 갖추어 아래에 그린다.

[D-001]범엽서(范曄書) : 후한서(後漢書)를 말한다. 범엽은 남조(南朝) () 나라 사람. 자는 울종(蔚宗). 널리 경사(經史)를 섭렵하고 글을 잘하였다. 문제(文帝) 원가(元嘉 424~453) 초에 여러 사가의 후한(後漢)의 사서(史書)를 정리하여 다시 새로운 후한서를 완성. 여기 인용된 기사는 동서(同書) 동이열전(東夷列傳)이다.

 

 

 

-[行鼔 ] 행고

行鼔之狀稍類雅樂之搏拊也中腔差長而以銅環飾之貫以紫帶繫於腰下軍行則在前與金鐃間擊其節頗緩金鐃之形與中華制度不異故略而不圖행고의 모양은 아악(雅樂)의 작은 북[搏拊]과 약간 닮았는데 중강(中腔 북의 불룩한 부분)이 조금 길고 구리 고리로 장식하였으며, 자주색 띠로 죄어 허리 아래 매었다. 군대가 행진하면 앞에서, 쇠징[金鐃]과 간격을 두고 치는데 그 음절이 자못 느리다. 쇠징의 모양은 중국의 제도와 다르지 않으므로 생략하고 그리지 않는다.

 

 

 

-[弓矢] 궁시

弓箭之制形狀簡略如彈弓其身通長五尺而矢不用竹多以柳條而復短小發射不候引滿擧身送之雖矢去甚遠而無力殿門守衛仗內騎兵及中檢郞將皆以虎?而挾之備不虞也

궁전(弓箭)의 제도는 형상이 간략하여 탄궁(彈弓)과 같다. 몸집의 전 길이가 5척이며, 화살은 대[]를 사용하지 않고 버드나무 가지로 만드는데 더 짧고 작다. 화살을 쏠 때는 시위가 충분히 당겨지기를 기다리지 않고 온 몸을 들어 쏘아 보내니, 화살이 비록 멀리 나가기는 해도 힘은 없다. 전문 수위(殿門守衛)와 장내 기병(仗內騎兵) 및 중검랑장(中檢郞將)이 모두 호창(虎韔 활집 이름)에 살을 끼고 있으니, 이는 뜻하지 않은 일에 대비하는 것이다.

 

 

 

-[貫革] 관혁

貫革之狀略如鞉鼔兩邊皆有皮耳動搖有聲貫於矛上每隊約二十餘人大禮則以千牛左右仗衛軍執之

관혁의 모양은 대략 도고(鞉鼓 소고. 손잡이가 달린 작은 북)와 같은데, 양변에 모두 가죽으로 만든 귀가 있어서 움직이면 소리가 나며, [] 위에 꿰어 달았다. ()마다 약 20여 인이고, 대례(大禮)에는 천우위(千牛衛)와 좌우위(左右衛)의 장위군(仗衛軍)으로 잡게 한다.

 

 

 

-[鐙杖] 등장

鐙杖之設國王受詔則有之上爲馬鐙其竿丹漆使者前驅千牛衛軍數十人執之王行則在前而鐙以塗金爲飾餘制悉以鐵爲之등장은 국왕이 조서를 받을 때마다 설치하는데, 위는 말등자를 만들고, [竿]에는 붉은 칠을 하였다. 사자가 앞으로 나갈 때 천우위군(千牛衛軍) 수십 인이 이를 잡고, 왕의 행차에는 앞에 있는데, 등자는 도금으로 장식하였으며, 나머지 제도는 모두 쇠로 만들었다.

 

 

 

-[儀戟 ] 의극

戟有二等會慶門中各列十二枝上下以金銅爲飾形制極大迎詔設燕則兵仗中所列者才及六尺許大抵略同中華而制作大小不等耳

의극(의장에 쓰는 창)은 두 가지 등급이 있다. 회경문(會慶門) 안에 각각 12개를 진열하고, 상하를 금동(金銅)으로 장식하였는데 형체가 매우 크다. 조서를 맞고 연회를 베풀 때 의장 행렬 안에 진열된 것은 크기가 겨우 6자쯤 되는데, 대체로 중국과 같으나 제작의 대소가 같지 않을 뿐이다.

 

 

 

-[胡笳] 호가

胡笳之制上銳下豐其形差短使者初至群山島巡尉將迎舟卒服青衣而吹之其聲嗚咽不成曲調唯覺群喿如蚊蝱之音迎詔則在前行每數十步輒稍却回面詔輿而吹聲止乃行然後擊鐃鼓爲節也

 

호가의 제도는 위가 날카롭고 아래는 굵으며, 그 모양이 약간 짧다. 사자가 군산도(群山島)에 처음 이르렀을 때 순위장(巡尉將 순시하며 위무하는 장수)이 주졸(舟卒 수병)을 맞아 푸른 옷을 입고 이를 부는데, 그 소리가 오열하는 듯 곡조를 이루지 않고 오직 무리로 시끄럽게 떠들썩함이 문맹(蚊虻모기와 등에)의 소리처럼 들렸을 뿐이다. 조서를 맞을 때는 앞에서 행진하며, 수십 보마다 문득 조금 물러나 조여(詔輿) 쪽으로 얼굴을 돌려 불고, 소리가 그쳐야 행진을 하는데, 그런 뒤에야 징과 북을 쳐서 박자를 맞춘다.

 

 

 

-[獸牌] 수패

獸牌之制木體革鞔繪狻猊狀上施五刃而以雉尾蔽之欲以自障且能刺人而不使之洞見其犀利也然徒似百戱小兒所執恐不足以禦矢石今高麗兵仗中二等皆有之特小大之異耳

 

수패(방패의 일종)의 제도는, 몸체는 나무이고 그 뒤에 가죽을 덮었으며 산예(?사자) 모양을 그렸다. 위에 다섯 개의 칼을 꽂고 꿩 꼬리로 가렸는데, 그것은 자신을 보호하고 또 능히 상대방을 찌를 수 있으나, 그 견고하고 예리함을 남에게 훤히 보이지 않게 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다만 여러 가지 유희하는 아이가 가지는 물건 같으니, 족히 시석(矢石)을 막아내지 못할 듯하다. 지금 고려의 병장기 가운데는 두 가지가 있는데 작고 큰 차가 있을 뿐이다.

 

 

 

-[佩劍 ] 패검

佩劍之飾形長而刃利白金烏犀間錯海沙魚皮以爲鞘旁爲環細001貫以采組或以革帶以象玉?琫珌之屬亦古之遺制也門衛校尉中檢郞騎皆佩之

 

[-001]:

패검의 장식은 모양이 길고 날이 예리한데, 백금(白金 )과 오서(烏犀 검은 무소뿔)에 사이사이 어긋나게 해사어피(海沙魚皮 바다상어 가죽)를 섞어 칼집을 만들었다. 곁에 환뉴(環紐 칼집 둘레에 고리를 달아 매는 것)를 만들어 색 끈으로 꿰거나, 혹은 혁대(革帶)상옥체(象玉璏)봉필(琫珌 칼의 장식, 즉 위의 장식은 봉, 아래 장식은 파이다) 등속으로 하니, 역시 옛날의 유제(遺制)이다. 문위 교위(門衛校尉)와 중검랑기(中檢郞騎)가 모두 찼다.

 

 

 

 

 

宣和奉使高麗圖經卷第十四

旗幟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14

기치

 

 

 

 

 

-[旗幟] 기치

臣聞高麗儀制每齋祭祀天則建大旗十面各隨其方之色錯繪神物號曰神旗其制極廣每旗當用帛數疋下以車軸逐車以緋衣仗軍十數人駕之隨王所在次第安立四面各施大繩以備風勢高十餘丈國人望神旗所植則不敢向唯詔書初入城以至受禮皆特用之蓋尊上命也餘有五方中旗自上群山島已見之唯紅旗有飾龍虎猛軍甲士所執又有小白旗大不盈掌繫於矛上略同兒戲今並列于圖云

 

고려의 의장제도(儀仗制度)는 매양 재제(齋祭 재는 도()(), 제는 유교에서 행하는 의식)와 사천(祀天)할 때는 10면에 큰 기를 세우며, 각각 그 방위의 빛깔에 따라 신물(神物)을 그리고 이를 신기(神旗)’라 하니, 그 제도가 매우 넓다. 기마다 비단 몇 필()을 쓰는데, 아래에는 바퀴를 달아 수레를 만들고, 수레마다 붉은 옷 입은 의장군(儀仗軍) 십수 인이 끌고 가다가 왕이 있는 곳을 따라 차례로 서 있게 마련이다. 사면에는 각각 큰 새끼줄을 달아 풍세(風勢)에 대비하는데, 높이가 10여 장()이다. 나라 사람들은 신기를 세운 것을 바라보면 감히 그곳을 향하지 못한다. 오직 조서가 처음 입성하여 예를 받을 때까지만 모두 특별히 사용하니 이는 송 나라 황제의 명령을 존중하는 것이다. 이밖에 오방(五方) 중기(中旗)가 있으니, 군산도(群山島)에 올랐을 때부터 이미 보았는데, 오직 홍기(紅旗)에만 용호(龍虎)를 장식하였고 맹군 갑사(甲士)가 잡고 있었다. 또 작은 백기(白旗)가 있는데, 크기가 손바닥에도 차지 않으며, 창에 매단 것이 아이들 장난과도 같다. 지금 아울러 나열하여 그린다.

 

 

 

-[象旗] 상기

象旗二其制身與旒皆黑法水數也中繪一象前一胡兒持一金戈復以大繩?其首有左顧之意行則擧其後轅隨地勢扶持而前至行禮之時則依方向建立001 旗之位以黑爲先考之禮經武車綏旌德車結旌則知建旗於車自古已然不特東夷也

[-001]:

상기(코끼리를 그린 기, 남방의 상징)는 둘이며, 그 제도는 몸체와 술[]이 모두 검으니 이는 수수(水數 즉 북방의 수)를 상징한 것이다. 가운데에는 한 마리의 코끼리를 그렸는데, 앞에 한 호아(胡兒 거란 사람)가 한 자루의 금과(金戈)를 들고, 다시 큰 새끼줄로 그 머리를 끌어 잡아당기니 왼쪽을 돌아보는 의미가 있다.

행진할 때는 그 뒷 멍에에 달고 지세(地勢)에 따라 붙들고 전진하며, 예를 행할 때가 되면 방향에 의하여 세우는데, 상기의 위치는 검은 것을 우선으로 한다. 예경(禮經 )을 살피건대, ‘무거(武車)는 깃발을 펴고, 덕거(德車)는 깃발을 맨다.’ 하였으니, 수레에 기를 세우는 것은 예로부터 이미 그러한 것이요, 특별히 동이(東夷)만 그런 것이 아님을 알겠다.

[D-001]무거(武車)……맨다 : 이는 예기곡례편(曲禮篇)에 보이는데, ()무거는 위무(威武)를 숭상하므로 꽃처럼 펴고, 덕의 아름다움은 속에 있는 것이므로 깃대에 잡아 매는 것이다.[武車尙威武 故舒散若花 德美在內 故纏旌於竿]” 하였다.

 

 

 

-[鷹隼旗] 응준기

鷹隼旗二其制身與旒皆赤法火數也中繪鷹隼騫騰而上有疾而速之意周官鳥隼爲旟今此赤旗用鷹亦偶合古制也其行在象旗之次

응준기는 둘이며, 그 제도는 몸체와 술[]이 모두 붉으니, 이는 화수(火數 즉 남방의 수)를 상징한 것이다. 가운데에는 매와 새매가 날아오르는 모양을 그리니, 빠르고 신속한 의미가 있다. 주관(周官 주례(周禮))새와 새매로 기를 만든다[鳥隼爲旗]’ 하였으니, 지금 이 붉은 기에 매를 쓴 것도 또한 우연히 옛 제도에 부합한다. 행렬시에는 상기의 다음에 위치한다.

[D-001]새와……만든다[?爲旗] : 주례춘관(春官) 사상(司常)에 보인다.

 

 

 

-[海馬旗] 해마기

馬旗二其制身與旒皆青法木數也中繪一馬前膊有鬣狀如火熾蓋馬火畜也繪於青旗以象木火相生位應青龍朱雀二神其行在鷹旗之次마기(馬旗)는 둘이며, 그 제도는 몸체와 술이 모두 푸르니, 목수(木數 즉 동방의 수)를 상징한 것이다. 기면 가운데 한 마리의 말을 그렸는데, 앞 어깨에 갈기가 있어 마치 불이 치솟는 것 같으니, 대개 말은 화축(火畜 불기운을 지닌 가축)이기 때문이다. 푸른 기에 그려서 나무와 불이 상생(相生)하는 것을 상징하고 위치는 청룡(靑龍 동방의 별자리 이름)과 주작(朱雀 남방의 별자리 이름) 두 신()을 응하였다. 행렬할 때는 응기(鷹旗)의 다음에 위치한다.

 

 

 

-[鳳旗] 봉기

鳳旗二其制身與旒皆黃法土數也中繪飛鳳鳳之爲物身被五綵位應中宮蓋五行非土不生故五方之色備於羽毛所宜取象其行在太白旗之次

봉기는 둘이며, 그 제도는 몸체와 술이 모두 누르니, 토수(土數 즉 중앙의 수)를 상징한 것이다. 가운데에 나는 봉()을 그리니, 봉의 모습은 몸에 오채(五彩)를 띠었고, 위치는 중궁(中宮)을 응하였다. 대개 오행(五行 금목수화토)은 흙[]이 아니면 나지 못하는데, 다섯 방위의 빛깔이 우모(羽毛 봉황새의 깃털)에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형상을 취한 것이다. 행렬시에는 태백기(太白旗) 다음에 위치한다.

 

 

 

-[太白旗] 태백기

太白旗二其制身與旒皆白法金水數也中繪一人金冠玉圭黃衣綠帔以象太白下乘一龜龜有蛇首取其合形蓋金爲水母水能生金位應白虎眞武二神禮經載國君之行前朱雀而後眞武左青龍而右白虎於二旗互見頗合古制其行在馬旗之次

태백기는 둘이며, 그 제도는 몸체와 술이 모두 희니 금수(金數 즉 서방의 수)를 상징한 것이다. 가운데에는 사람 하나를 그렸는데, 금관을 쓰고 옥규(玉圭)를 들었으며, 누런 옷에 초록 겉옷을 걸쳤는데, 이는 태백신(太白神)을 상징한 것이다. 한 마리의 거북을 탔는데, 거북에는 뱀의 머리가 있으니, 그 합한 모양을 취하였다. 대개 금()은 수()의 모체가 되고 수는 능히 금을 생()하는 것이니 위치는 백호(白虎 서방의 신)와 진무(眞武)의 두 신에 응한다. 예경(禮經)국군(國君)의 행차에는 앞에 주작(朱雀)이 있고 뒤에 진무(眞武)가 있으며, 왼쪽에 청룡, 오른쪽에 백호가 있다.’ 하였으니, 두 기에 서로 나타난 것이 자못 고제(古制)에 부합한다. 행렬시에는 마기(馬旗)의 다음에 위치한다.

[D-001]진무(眞武) : 즉 현무(玄武). () 대중상부(大中祥符 10081016) 연간에 왕실 선대(先代)의 이름을 휘하여 현무를 진무로 고친 것.

[D-002]예경(禮經)……있다 : 예기(禮記)곡례편(曲禮篇)에 보인다.

 

 

 

-[五方旗] 오방기

北方之旗黑色一旒其廣二幅無繪繡之文人使初至境以迄入城與諸旗爲前導其行無次其建無數以青衣軍執之初國信使副依舊例給錦繡間錯轉光旗四十面詔書初入城令舟人執而前導輝映郊野麗人駭觀頗自愧其陋焉

南方之旗赤色一旒中繪神人手執木檛差異他者五方之旗獨赤旗爲多耳

東方之旗青色一旒中無繪繡廣狹多少與諸旗相對

西方之旗白色一旒亦無繪繡比之諸旗數目差少

中央之旗黃色一旒亦無繪繡唯群山島紫燕島祗迓信使列於海岸則有之又有一等雜采間錯中有轉光四角繪雲氣諸州巡尉戰船邏兵執之

 

 

북방의 기는 흑색의 한 술[一旒]로 된 것이며 그 너비는 두 폭인데, 그림이나 수놓은 무늬가 없다. 사신이 처음 국경에 이르면서부터 입성할 때까지 여러 기와 더불어 전도(前導)가 되며, 행렬은 차례가 없고 세워 놓은 것도 무수한데 푸른 옷 입은 군사로 이를 잡게 한다. 처음에 국신 사부(國信使副 국신을 가지고 가는 사행(使行)의 정사와 부사)가 구례(舊例)에 의하여 금수(錦繡)로 된 사이사이에 번쩍이는 광택이 있는 기 40()을 주었다가, 조서가 처음 입성할 때 주인(舟人 뱃사람)을 시켜 들고 전도하게 하였는데, 들판이 휘황하게 비치니, 고려 사람들이 놀라 구경하면서 자못 스스로 그 비루한 것을 부끄러워 하였다.

남방의 기는 붉은 색 한 술로 된 것으로, 가운데에 신인(神人)을 그렸는데, 손에 나무 채찍을 들어 다른 것들과 차이가 있다. 오방의 기 가운데 홀로 붉은 기만이 많았다.

동방의 기는 푸른색 한 술로 된 것인데, 가운데에 그림과 수가 없다. 넓고 좁기와 많고 적기가 여러 기들과 비슷하다.

서방의 기는 흰색 한 술로 된 것으로 역시 그림과 수가 없으며, 여러 기에 비하여, 숫자가 약간 적었다.

중앙의 기는 황색 한 술로 된 것이며, 역시 그림과 수가 없다.

오직 군산도(群山島)와 자연도(紫燕島)에서 신사(信使)를 맞이하여 해안에 진열했을 때에만 있었다. 또 한 가지는 여러 채색이 섞인 가운데 번쩍이는 광택이 나는데, 네 모퉁이에 운기(雲氣)를 그린 것이 있는데, 이는 여러 고을의 순위(巡尉)와 전선(戰船)의 나병(邏兵)이 들고 있었다.

 

 

 

-[小旗] 소기

小旗之制紅旒白身上繪綠雲人使入城國王迎詔則龍虎軍數萬人被甲執之夾道而行

소기의 제도는 붉은 술에 흰 바탕으로 되고, 위에 초록색 구름을 그렸다.

사신이 입성하고 국왕이 조서를 맞이할 때 용호군(龍虎軍) 수만 인이 갑옷을 입고 기를 잡고 길 양편으로 행진하였다.

 

 

 

 

 

宣和奉使高麗圖經卷第十五

車馬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15

거마

 

 

 

 

-[車馬] 거마

臣聞有國必有兵而兵以車運車以馬行故古者制國必視車乘之數差其小大而詩頌稱魯衛之富率以馬爲言高麗雖海國而引重致遠不廢車馬然其土地湫隘道涂磽确非中華比故輈輪之制轡馭之法亦異云

나라가 있으면 반드시 군사가 있는데, 군사는 수레로 운송하며 수레는 말로 끌게 한다. 그러므로 옛적에 나라의 등급을 만들 때에 반드시 수레의 수를 보아 그 크고 작음의 차등을 두었으니, (모시(毛詩))의 송()에 노()와 위()의 부()를 칭송함도 모두 말[]로써 말한 것이다. 고려는 비록 해국(海國)이나, 무거운 짐을 끌고 먼 곳을 가는 데는 거마를 폐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토지가 낮고 좁으며 도로에는 모래와 자갈이 많아 중국과 비교되지 않으므로 수레의 제도와 말을 어거하는 방법도 다르다.

 

 

 

-[采輿] 채여

采輿三一以奉詔又其一以奉御書前一輿貯大金香毬其制用五色文羅間結錯以錦繡上爲飛鳳四角出蓮花行則動搖下承以丹漆座四竿各施龍首以控鶴軍四十人捧之前有二人執仗迎引喝起止甚肅王世子與國官迎詔望輿於當道拜之

채여는 셋인데, 하나는 조서를 봉안하고, 또 하나는 어서(御書)를 봉안하며, 앞의 한 채여에는 대금향구(大金香毬)를 담았다. 그 제도는 오색 무늬의 비단을 쓰고 사이사이 금수(錦繡)를 섞어 맺었으며, 위엔 나는 봉[飛鳳]을 만들고 네 모퉁이에는 연꽃이 보이는데 행진하면 흔들린다. 아래에는 붉게 칠한 좌석을 앉히고, 네 개의 대[竿]에는 용머리[龍首]를 만들어, 공학군(控鶴軍) 40인으로 이를 메게 한다. 앞에서는 두 사람이 의장을 잡고 맞이하여 인갈(引喝 관인이 행차할 때 앞에서 행인이 비키도록 소리치는 것)하니, 행동이 매우 엄숙하다. 왕세자(王世子)와 고려의 관리들이 조서를 맞아 길목에서 채여를 바라보고 절하였다.

[D-001]대금향구(大金香毬) : 도금한 향구로 혼천의(渾天儀)와 같다. 그 가운데 3층으로 된 빗장이 끊임없이 움직인다.

 

 

 

-[肩輿] 견여

肩輿之制略類胡床藤穿翔鸞花文丹漆間錯塗金爲飾上施錦茵四竿各施采絲結綬自群山島以迄入城每出館必以肩輿奉使副以其禮僭不敢乘唯於前仗中行以爲儀式耳

견여의 제도는 대략 호상(胡床)과 같은데, ()으로 상란(翔鸞 나는 난새)을 꿰고, 꽃무늬로 붉게 칠했으며, 사이사이 금을 칠하여 꾸몄다. 위에는 비단방석을 깔고, 네 개의 대에는 각각 채색 실을 싸매었다. 군산도로부터 입성할 때까지 매양 사관을 나서면 반드시 견여로 받드니, 사부(使副 정사와 부사)가 참람된 예라 하여 감히 타지 못하고, 오직 전장(前仗 앞 선 의장군) 가운데 행진하여 의식을 삼았을 뿐이었다.

 

 

 

-[牛車] 우거

牛車之設制作率略殊無法度下有二轅輪前轅以牛駕之每載物於其上必以草繩貫繫方免傾覆況其國率皆山路行則嵲屼動搖特爲禮具而已

우거의 시설은 제작이 간략하여 특별한 법도가 없다. 아래에 두 개의 수레바퀴가 있고, 앞의 멍에에 소를 매어 끌게 하는데, 매양 그 위에 물건을 싣고는 반드시 새끼줄로 꿰어매어야 비로소 기울어 엎어짐을 면할 수가 있다. 더구나 그 나라는 거개가 산길이어서, 행진하면 울퉁불퉁 흔들리니, 다만 예를 갖춘 도구일 뿐이다.

 

 

 

-[王馬] 왕마

王之所乘馬鞍韉甚華或金或玉皆朝廷所賜也常馭不施甲唯八關齋幷受詔大禮則於馬甲之上復加鞍轡蒙以繡帕革帶與繁纓皆有鸞聲相應亦甚華煥但比中國於鞍後復加繡茵亦猶侍從官之有狨坐也

 

왕이 타는 말은 안장이 매우 화려하여, 금으로 된 것도 있고 옥으로 된 것도 있으니, 모두 조정(朝廷 중국을 지칭)에서 내린 것이다. 평상시 탈 때에는 말에 갑옷을 입히지 않고, 오직 팔관재(八關齋)와 조서를 받는 큰 예식이 있을 때에만 마갑(馬甲) 위에 다시 안장과 고삐를 더하고, 수놓은 휘장[繡帕]을 씌우며, 혁대와 번영(繁纓 여러 가닥의 끈)에 모두 난성(鸞聲 방울소리)이 어울려 또한 매우 화려하다. 다만 중국에 비하여 안장 뒤에 다시 수놓은 방석을 더하였으니, 또한 시종관(侍從官)이 융좌(?융가죽으로 만든 방석. 융은 짐승이름)를 까는 것과 같다.

 

 

 

-[使節馬] 사절마

高麗去大金不遠故其國多駿馬然圉人不善控馭其步驟皆自天然不假人力也鞍韉之制唯王所乘以絳羅繡韉益以金玉飾國官大臣以紫羅繡韉以銀爲飾餘如契丹之俗亦無等差初使人旣到館卜日受詔而所奉鞍馬略如王制使者以其僭侈固辭再四乃易別馬如國官所乘者上節所乘降使副禮一等中節又隨等第而殺之

 

고려는 대금(大金 여진족이 세운 금을 높여 부르는 이름)과의 거리가 멀지 않으므로 그 나라에는 준마(駿馬)가 많다. 그러나 말 기르는 사람[圉人]이 길들이기를 잘못하여, 그 걸음이 빠른 것은 모두 천연적인 것이요, 사람의 힘을 빌려서 그런 것이 아니다. 안장의 제도는 오직 왕이 타는 것만이 붉은 비단에 수놓은 안장에다 금옥 장식을 더한 것이고, 대신들은 자주색 비단에 수놓은 안장에다 은으로 장식을 하였다. 나머지는 거란의 풍속과 같이 또한 등급이 없다. 처음 사신이 사관에 도착하면 날을 가려 조서를 받는데, 받드는 안마(鞍馬 안장 갖춘 말)가 대략 왕의 제도와 같았다. 그래서 사자가 참람되고 사치하다고 여러 차례 굳이 사양한 뒤에야 고려 관원이 타는 것과 같은 다른 말로 바꾸었다. 상절(上節)이 탄 것은 사부(使副)의 것보다 한 등급 내리고, 중절(中節)은 등급에 따라 강쇄하였다.

 

 

 

-[騎兵馬] 기마병

騎兵所乘鞍韉極精巧螺鈿爲鞍鞦轡以柏枝馬瑙石間錯黃金烏銀爲飾兩䪌畫鵝頸與身倍麗人謂之天鵝鞗革鳴鸞亦有古意

 

기병이 탄 안장은 매우 정교하다. 나전으로 안장을 만들고, 안장의 끈과 고삐는 백지(栢枝)와 마노석(馬瑙石 보석의 일종)으로 만들었는데, 사이사이 황금과 오은(烏銀)을 섞어 장식하였다. 양쪽 언치[? 안장 밑에 까는 깔개]에는 거위 목을 그렸는데 몸의 배나 되며, 고려 사람은 이를 천아(天鵝)’라 한다. 가죽 고삐와 방울 울리는 것도 옛 뜻이 있다.

 

 

 

-[雜載] 잡재

麗國多山道路坎壈車運不利又無橐駝可以引重而人所負載甚輕故雜載多用馬其制以二器夾裝橫跨於背應用之物悉置器中絡首鞅胷如乘騎之度前引後驅其行頗駚001

[-001]:

 

고려는 산이 많고 도로가 험하여 수레로 운반하기가 불리하다. 또 낙타(駱駝)로 무거운 것을 끄는 것도 없으며 사람은 매우 가벼운 것이나 지고 간다. 그래서 이것저것 싣는 데는 말을 많이 쓴다. 그 제도는 두 개의 용기(容器)를 좌우에 장치하고 말 등에 옆으로 걸쳐 놓은 다음 물건들을 모두 그 용기 속에 넣는다. 머리를 얽고 가슴을 매는 것은 승기(乘騎 타는 말)의 제도와 같으며, 앞에서 끌고 뒤에서 모는데 그 걸음이 자못 빠르다고 한다.

 

 

 

宣和奉使高麗圖經卷第十六

官府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16

관부

 

-[官府] 관부

臣聞唐虞建官惟百夏商官倍亦克用乂至周而詳天地四時仰觀俯察以道運之而政事擧矣豈復有文具而實不應之弊哉高麗之初建官十有二級襲夷語以爲之名不復馴雅自漸皇化設官置府依放稱謂而涖職治事尙沿夷風往往文具而實不應然而慕義之志亦可尙云

당우(唐虞 당은 요() 임금, 우는 순() 임금) 때에는 백 명의 관원을 두었고 하상(夏尙 상은 은()의 별칭) 때에는 관원이 늘어났으나 그것만으로도 잘 다스릴 수 있었다. () 나라에 이르러서는 상세하게 갖춰져, 천지(天地)와 사시(四時)를 위로 관찰하고 아래로 살피어 도()에 맞게 운영(運營)하여 정사가 잘 거행되었으니, 어찌 형식만 갖추어 실지와 맞지 않는 폐단이 있었겠는가?

고려는 초기에 12등급의 관원을 두고 오랑캐의 언어로 명칭을 붙이고서 다시 아름답게 다듬지 않다가, 황화(皇化 송 나라 황제의 교화)를 입게 되면서부터 관()을 설치하고 부()를 두어 중화를 모방하여 부르기는 하였으나, ()에 임하여 일을 처리할 적에는 오히려 오랑캐 풍습을 그대로 따르므로 이따금 형식만 갖추고 실지는 맞지 않는다. 그러나 의리를 사모하는 뜻은 역시 가상하다고 할 만하다.

 

 

 

-[臺省] 대성

官府之設大抵皆竊取朝廷美名至其任職授官則實不稱名徒爲文具觀美而已尙書省在承休門內前有大門兩廊十餘間中爲堂三間卽令官治事之所政事之所自出也自尙書省之西春宮之南前開一門中列三位中爲中書省左曰門下省右曰樞密院卽國相平章知院治事之所禮賓省在乾德殿前之側所以掌四隣之賓客八關司在昇平門之東所以掌齋祭之事御史臺在左同德門內所以張風憲之任翰林院在乾德殿之西所以處詞學之臣尙乘局以貯車馬軍器監以藏甲仗以至賓省之典禮儀閤門之職贊導大盈倉寔寶貨之帑右倉卽積粟之地凡此皆在王居內城也自廣化門外言之官道之北則尙書戶部又其東曰工部曰考功曰大樂局曰良醞局四門並北列而南向各有摽名道之南則兵吏三司其門南列而北向又東南數十步卽鑄錢監稍北卽將作監也監門千牛金吾三衛在北門內而金吾稍近東所以典兵衛之禁大市京市二司在南大街而東西相望所以平關市之政以至管絃有坊弓箭有司幞頭有所占天有臺凡此皆在外城之內也又有開成府拒城四十里凡民庶婚鬪訟之事悉摠之

 

관부(官府)의 설치는 대개 모두 조정(朝廷)의 아름다운 명칭을 모방하였으나 그 직()을 맡기고 벼슬을 제수함에 이르러서는 실지가 이름과 맞지 아니하여, 한갓 형식만 갖춘 것이고 보기에만 좋을 뿐이다.

상서성(尙書省)은 승휴문(承休門) 안에 있다. 앞에 대문이 있고 양쪽의 행랑은 10여 칸씩이며, 중앙에 당() 3칸을 만들었는데 곧 관원들이 일을 보도록 한 곳으로서, 정사가 여기에서 나온다.

상서성 서쪽과 춘궁(春宮) 남쪽 앞에 문 하나가 트였고 안에 세 채의 집이 나란히 서 있는데, 중앙의 것이 중서성(中書省)이고 왼편의 것이 문하성(門下省)이고 오른편의 것이 추밀원(樞密院)이니, 곧 국상(國相)평장사(平章事)지원사(知院事)가 정사를 처리하는 곳이다.

예빈성(禮賓省)은 건덕전(乾德殿) 앞쪽 옆에 있는데 사방 이웃 나라의 빈객(賓客)을 관장하는 곳이고, 팔관사(八關司)는 승평문(昇平門) 동쪽에 있는데 재제(齋祭)의 일을 맡은 곳이고, 어사대(御史臺)는 좌동덕문(左同德門) 안에 있는데 풍헌(風憲 풍교와 헌장)을 펴는 소임을 맡은 신하들이 거처하는 곳이고, 한림원(翰林院)은 건덕전 서쪽에 있는데 사학(詞學)을 맡은 신하들이 거처하는 곳이고, 상승국(尙乘局)은 거마(車馬)를 관리하는 곳이고, 군기감(軍器監)은 갑장(甲仗 무기와 의장)을 간수하는 곳이다.

빈성(賓省)은 예의(禮儀)를 맡고, 합문(閤門)은 찬도(贊導)를 맡아 보고, 대영창(大盈倉)은 보화(寶貨)를 저장하는 내탕(內帑)이고, 우창(右倉)은 곡식을 축적(蓄積)하는 곳인데, 이것들은 모두 왕이 거처하는 내성(內城)에 있다.

광화문(廣化門) 밖으로 말하면 관도(官道)의 북쪽에 있는 것은 상서호부(尙書戶部), 또 그 동쪽의 것은 공부(工部)고공(考功)대악국(大樂局)- 양온국(良醞局)이라고도 하는데 문이 네 개이다. - 이 모두 북으로 열지어 남쪽을 향하고 있는데, 각각 이름이 표시되어 있다.

관도의 남쪽에는 병()()() 삼사(三司)가 있는데, 그 문은 남쪽에 열지어 북쪽을 향하였고, 또 동남쪽으로 수십 보쯤에 있는 것은 주전감(鑄錢監)이고 조금 북쪽의 것은 장작감(將作監)이다.

감문(監門)천우(千牛)금오(金吾) 3위는 북문 안에 있는데, 금오가 조금 동쪽에 가까이 있는 것은 호위의 임무를 맡고 있기 때문이다.

대시(大市)경시(京市) 2()는 남쪽 큰 거리에 있는데 동서로 마주하고 있으니, 관시(關市)의 정사를 균형 있게 하기 위한 때문이다.

관현(管絃 악기) 같은 것에 있어서도 방()이 있고, 궁전(弓前)은 사()가 있으며, 복두(幞頭)는 소()가 있고 점천(占天 천문을 관측하는 것)은 대()가 있으니, 무릇 이들은 모두 외성(外城) 안에 있다.

또한 개성부(開成府)가 성()40리 거리에 있는데, 모든 백성들의 혼인전답투송(鬪訟)하는 일을 총괄한다.

 

 

 

-[國子監] 국자감

國子監舊在南會賓門內前有大門榜曰國子監中建宣聖殿兩廡闢齋舍以處諸生舊制極隘今移在禮賢坊以學徒滋多所以侈其制耳

국자감은 전에는 남쪽 회빈문(會賓門) 안에 있었는데, 앞에 대문이 있고 편액을 국자감이라고 했다. 중앙에 선성전(宣聖殿)을 세우고 양무(兩廡)에 재사(齋舍)를 설치하여 제생(諸生)들을 거처하게 했다. 전의 제도는 지극히 좁았는데 지금은 예현방(禮賢坊)으로 옮겼으니, 학도가 많이 불어났기 때문에 그 제도를 키운 것이다.

 

 

 

-[倉廩] 창름

倉廩之制不施關鑰外爲墻垣唯開一門以防盜竊內城之內舊有三倉今所見者特右倉耳宣義門之外有倉曰龍門洪州山中有倉曰富用俗傳曰芙蓉非也大義倉舊在西南門積米三百萬經回祿悉爲煨燼遂移於長霸門麗人以衆水所會之地可以厭火災耳又有海鹽常平二倉相去數百步唯富用與右倉不常發以儲兵革水旱之備其積之狀如圓屋正詩所謂亦有高廩也下築土基其高數尺織草爲苫中積米穀一石積而致之其高數丈出於墉外上復以草蓋之以蔽風雨蓋米氣不泄則陳腐今高麗倉廩中雖數歲而米亦新者以積苫之法略通其氣耳國相每歲給米四百二十苫致仕半之尙書侍郞而下二百五十苫郞官一百五十苫南班官四十五苫諸軍衛錄事一十九苫其武臣視此等而上之與文官相埒內外見任受祿官三千餘員散官同正無祿給田者又一萬四千餘員其田皆在外州佃軍耕蒔及時輸納而均給之

 

창름의 제도는 관약(關鑰 빗장이나 자물쇠)을 걸지 아니하고 밖에 담장[墻垣]을 쌓되 오직 문 하나를 내어 도적을 막는다. 내성(內城) 안에 3()이 있었는데, 지금 볼 수 있는 것은 우창(右倉)뿐이다.

선의문(宣義門) 밖에 있는 창고는 용문창(龍門倉)이요, 홍주(洪州) 산중(山中)에 있는 창고는 부용창(富用倉)이니, 세속에 전하기를 부용창(芙蓉倉)이라 함은 잘못이다.

대의창(大義倉)은 전에는 서남문(西南門)에 있었는데 쌀 3백만을 쌓았었다. 화재를 만나 모두 타 버리게 되자 드디어 장패문(長覇門)으로 옮겼는데, 고려 사람들이 여러 물이 모이는 곳이므로 화재를 예방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또한 해염(海鹽)상평(常平) 2()이 있는데, 서로 떨어진 거리가 수백 보쯤 된다. 오직 부용창과 우창은 평상시에는 풀지 아니하고 전쟁수재한재에 대비하여 저장하는데 그 쌓은 모양이 둥근 집과 같으니, 바로시경(詩經)에 이른바 또한 큰 창고가 있도다한 것이 이것이다. 바닥에다 흙으로 대를 쌓았는데 그 높이가 두 자[]쯤 되며 풀을 엮어 멱서리[]을 만들어 그 속에 미곡 한 섬씩을 담아 쌓아 올렸는데, 그 높이가 두어 길[]이나 되어 담장 밖으로 솟아 있다. 그리고 그 위를 다시 풀로 덮어 비바람을 막는다.

대개 쌀은 공기가 소통되지 아니하면 부패하게 되는데, 지금 고려의 창름에는 비록 두어 해가 된 쌀이라도 신곡(新穀) 같은 것은 멱서리[]로 쌓는 법을 써서 다소 공기가 소통하기 때문이다.

국상(國相)에게는 해마다 쌀 420섬을 주되, 치사(致仕 지금의 정년퇴임과 같다)하면 반으로 주고, 상서(尙書)시랑(侍郞) 이하는 250, ()()낭관(郞官)150, 남반관(南班官)45, 제군(諸軍)의 위()녹사(錄事)19섬인데, 그중 무신(武臣)은 이등급에 비교하여 문관(文官)과 서로 비등하게 올려준다.

외직(內外職)의 현임(現任)으로서 녹을 받는 관원이 3천여 명이고, 산관 동정(散官同正)으로서 녹은 없이 전토(田土)를 급여(給與)받은 사람이 또한 14천여 명인데, 그 전토는 모두 지방 고을[外州]에 있으며, 전군(佃軍)이 농사지어 시기에 맞추어 가져다 바치면 나누어 급여해 준다.

 

 

 

-[府庫] 부고

奉先庫在廣化門之東去順天館官道之北前門二間稍東開門左有一堂其制極高出於墻外右有一樓東面不施窻牖唯於其柱榜云貯水防火蓋其中所藏乃奉先王祭器牲牢及國忌給齋料於此以施諸寺焉

봉선고(奉先庫)는 광화문(廣化門)동쪽과 순천관(順天館)의 관도(官道) 북쪽에 있다. 앞문이 2칸인데 조금 동쪽으로 문을 냈고 왼쪽에 집 하나가 있는데 그 제도가 지극히 높아 담장 밖으로 솟아 있다.

오른쪽에 누각(樓閣) 하나가 있는데 동쪽면에는 창문을 내지 않았고 오직 그 기둥에 방시(榜示)하기를 저수 방화(貯水防火)’라고 하였다. 대개 그 안에 저장한 것은 바로 선왕(先王)을 받드는 제기(祭器)와 생뢰(牲牢 제수), 또한 국기(國忌 왕이나 왕후 등의 국장 및 제삿날)에는 재료(齋料)를 여기에서 지급하여 모든 절[]에 풀어 준다.

 

 

 

-[藥局] 약국

高麗舊俗民病不服藥唯知事鬼神呪咀厭勝爲事自王徽遣使入貢求醫之後人稍知習學而不精通其術宣和戊戌歲人使至上章乞降醫職以爲訓導上可其奏遂令藍茁等往其國越二年乃還自後通醫者衆乃於普濟寺之東起藥局建官三等一曰太醫二曰醫學三曰局生綠衣木笏日涖其職高麗他貨皆以物交易唯市藥則間以錢寶焉

고려의 옛 풍속은 사람이 아파도 약을 먹지 아니하고 오직 귀신을 섬길 줄만 알아, 저주(咀呪)하여 이겨내기를 일삼는다. 왕휘(王徽 문종) 때 사신을 보내어 입공(入貢)하고 의술(醫術)을 구해 간 뒤로부터 사람들이 점차로 배워 익혔으나, 그 방술에 정통(精通)하지는 못했다.

선화(宣化) 무술년(1118, 예종13)에 사신이 와서 글을 올려, 의직(醫職)을 내리어 가르쳐 주기를 청하므로, ()이 그 건의를 허락하여 드디어 남줄(藍茁) 등을 고려로 보냈는데, 그런 지 두 해 만에 돌아왔다.

그 뒤부터 의술을 통한 자가 많아져서, 보제사(普濟寺) 동쪽에 약국(藥局)을 세우고 3등급의 관원을 두니, 첫째는 태의(太醫), 둘째는 의학(醫學), 셋째는 국생(局生)이라 하여, 푸른 옷에 나무 홀(관인이 조정에 들어갈 때 조복에 갖추어 손에 쥐는 것) 차림으로 날마다 그 직에 임했다.

고려는 다른 물화는 모두 물건으로써 교역(交易)했으나, 오직 약을 사는 것은 간혹 전보(錢寶)로써 교역하였다.

 

 

 

-[囹圄] 영어

囹圄之設其墉高峻形如環堵中亦有屋蓋古圜土之意也今在官道之南與刑部相對輕罪則付刑部盜及重罪則付獄繫以縲紲無一人得逸者亦有枷杻之法然淹延不決有至閱時經歲唯贖金可免凡決杖以一大木橫縛二手於上使之著地而後鞭之笞杖極輕自百至十隨其輕重而加損唯大逆不孝乃斬次則反縛髀骨相摩至胷次皮膚拆裂乃已亦車裂之類也外郡不行刑殺悉械送王城每歲八月慮囚夷性本仁死辠多貸而流於山島累赦則以歲月久近量輕重原之

영어의 만듦새는 그 담장이 높아 모양이 환도(環堵 둥글게 담을 친 집)와 같고 중앙에 집이 있으니, 대개 옛날의 원토(圜土 감옥)와 같이 만든 것이다. 지금 관도(官道)의 남쪽에 있어 형부(刑部)와 마주하고 있다.

가벼운 죄인은 형부로 보내고 도둑 및 중죄인은 옥()으로 보내는데, 포승으로 잡아매어 한 사람도 도망갈 수 없고, 또한 가추(枷杻)를 채우는 법도 있다. 그러나 지체시키기만 하고 판결을 내리지 아니하여 철을 넘기고 해를 지나게 되기까지 하는데, 오직 금()으로 속바쳐야만 풀려나게 된다.

무릇 장형(杖刑)을 집행하는 법은, 하나의 큰 나무를 가로질러 놓고 두 손을 그 위에 묶어 땅에 엎드리게 한 다음에 치는데, 태장(笞杖)은 매우 가벼워 백 대에서 열 대까지 그 경중에 따라 가감(加減)한다.

오직 대역(大逆)과 불효(不孝) 죄는 참형(斬刑)하고, 다음은 뒤로 결박하여 비골(髀骨 넓적다리뼈)과 가슴이 서로 닿도록 하여 피부가 터지게 되어야 그만두니, 또한 거열(車裂)과 같은 유이다. 외방 고을에서는 형살(刑殺)을 시행하지 아니하고 모두 칼을 씌워 왕성(王城)으로 보내는데, 해마다 8월에 여수(慮囚 죄상을 참작하여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는 것)한다.

오랑캐들의 성격이 본디 인자하여, 죽을 죄라도 거의 용서하여 산골이나 섬으로 유배(流配)하고, 사면해 주는 것은 세월의 다소와 죄의 경중을 헤아려 용서하여 준다.

 

 

 

 

宣和奉使高麗圖經卷第十七

祠宇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17

사우

 

 

 

 

 

-[祠宇] 사우

臣聞高麗素畏信鬼神拘忌陰陽病不服藥雖父子至親不相視唯知呪咀厭勝而已前史以謂其俗淫暮夜輒男女群聚爲倡樂好祠鬼神社稷靈星以十月祭天大會名曰東盟其國東有穴號禭神亦以十月迎而祭之自王氏有國以來依山築城於國之南以建子月率官屬具儀物祠天後受契丹冊與其立世子亦於此行禮焉其十月東盟之會今則以其月望日具素饌謂之八關齋禮儀極盛其祖廟在國東門之外唯王初襲封與三歲一大祭則具車服冕圭親祠之其餘則分遣官屬歲旦月朔春秋重午皆享祖禰繪其象於府中率僧徒歌唄晝夜不絶又俗喜浮屠二月望日諸僧寺然燭極繁侈王與妃嬪皆往觀之國人喧闐道路其神祠在百里內者四時遣官祠以太牢又三歲一大祭徧其境內然及期以祠神爲名率斂民財聚白金千兩餘物稱是與其臣屬分之此爲可哂也自王居宮室之外唯祠宇制作頗華諸觀寺唯安和爲冠以尊奉宸翰故耳今取其人使道路所歷與夫齋祠游覽耳目所及者圖之其餘不見制度則略而不載

 

고려는 본래 귀신을 두려워하여 믿고 음양(陰陽)에 얽매여, 병이 들면 약은 먹지 않고 부자(父子) 사이 같은 아주 가까운 육친이라도 서로 보지 않고 오직 저주와 압승(厭勝)을 알 따름이다. 전대의 역사에 이르기를 그 풍속이 음란해서 저녁이 되면 으레 남녀가 떼지어 노래하고 즐기며 귀신사직영성(靈星)을 제사하고, 10월에 하늘을 제사하기 위해 큰 모임을 갖는데 그것을 동맹(東盟)이라 부른다. 그 나라 동쪽에 굴이 있는데 수신(襚神)이라 부르고, 역시 10월에 맞아다가 제사한다.’ 하였다. 왕씨(王氏)가 나라를 차지한 이후 산에 의지하여 나라 남쪽에 성을 쌓고 건자월(建子月 북두성의 자루 끝이 자()의 방향을 가리키는 달)에 관속들을 거느리고 의장물(儀仗物)을 갖추고 하늘에 제사한다. 후에 거란의 책명(冊命)을 받을 때와 그들이 세자(世子)를 세울 때에는 역시 거기서 예식을 거행하였다. 그들이 10월에 동맹하는 모임은, 지금은 그 달 보름날 소찬(素饌 육류나 생선이 들어 있지 않은 음식)을 차려놓고 그것을 팔관재(八關齋)라 하는데 의식이 극히 성대하다. 그 조상의 종묘는 나라의 동문 밖에 있는데, 왕이 처음 습봉(襲封 왕위의 계승을 말함)할 때와 3년에 한번씩 하는 큰 제사 때에만 거복(車服)과 면규(冕圭)를 갖추고 친히 제사하고 그 나머지는 관속들을 나누어 파견한다.

원단(元旦)과 매달 초하루와, 춘추와 단오에 다 조상의 신주에 제향을 드리는데, 부중(府中)에 그 화상을 그려 놓고 중들을 거느리고 범패(梵唄)를 하며 밤낮을 계속한다. 또 일반이 부처를 좋아하여 2월 보름에는 모든 불사(佛寺)에서 촛불을 켜는데 극히 번화하고 사치스럽다. 왕과 비빈이 다 가서 구경하고 나라 사람들은 도로를 시끄럽게 메운다. 그들이 신사(神祠)로 백리 안에 있는 것에는 사시에 관원을 보내어 태뢰(太牢 제물로 쓰는 소)로 제사하게 한다. 3년에 한 차례씩 있는 큰 제사는 그 경내에 두루 다 베풀어진다. 그러나 기일이 되어 신을 제사한다는 명목으로 분담시켜 백성의 재물을 거둬들여 백금(白金 은을 말함) 1천 냥을 모으고, 나머지 물건들도 이와 맞먹는데 그것들을 신하들과 함께 나누어 갖는다. 이것은 우스운 일이다. 왕이 거처하는 궁실 말고는 오직 사우(祠宇)의 만듦새만이 화려하다. 여러 사찰 중에서 안화사(安和寺)가 으뜸인데, 그것은 거기에 신한(宸翰 임금이 쓴 글을 말함)을 봉안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그곳에서의 일로 도로에서 지내온 것과 재사(齋祠)를 가 보고서 보고 들은 것들을 취해서 그림으로 그리고, 그 나머지 보지 못한 제도는 생략하고 싣지 않는다.

[D-001]압승(厭勝) : 사악한 기를 꺾어 힘을 못 쓰게 만든다는 방술의 일종.

[D-002]그 풍속이……제사한다 : 이상은 삼국지(三國志)위서(魏書) 동이전 고구려 조의 기사를 추린 것이다. 영성(靈星)은 천전성(天田星)이라고도 하는데 농사를 맡아 보는 것으로 되어 있다. 중국에서도 한초(漢初)에 영성을 제사한 기록이 사기(史記)봉선서(封禪書)에 보인다.

 

 

 

-[福源觀] 복원관

福源觀在王府之北大和門內建於政和間前榜曰敷錫之門次榜曰福源之觀嘗聞殿內繪三淸像而混元皇帝鬚髮皆紺色偶合聖朝圖繪眞聖㒵像之意亦可嘉也前此國俗未聞虛靜之敎今則人人咸知歸仰云

복원관(福源觀)은 왕부(王府 왕궁을 말함) 북쪽 태화문(太和門) 안에 있는데 정화(政和 11111117) 연간에 세워진 것이다. 앞 방은 부석지문(敷錫之門)’이라 하였고 다음 방은 복원지관(福源之觀)’이라 하였다. 들은 바에 따르면, 전내(殿內)에 삼청상(三淸像)을 그렸는데 혼원 황제(混元皇帝)의 수염과 머리털이 다 감색(紺色)이어서 우연히 성조(聖朝)께서 진성(眞聖)의 모습을 그린 뜻과 합치한다니 또한 가상하다. 예전에는 나라 사람들이 허정(虛靜)의 가르침(도교를 말함)을 듣지 못했었는데, 이제는 사람마다 다 귀의하여 신앙할 줄 안다고 한다.

[D-001]복원관(福源觀) : 고려에서는 복원궁(福源宮)으로 불렸다. 그 건립 연대는, 송사(宋史)487 고려전에는 대관(大觀) 연간(11071110)으로 되어 있고, 고려도경에서는 정화(政和) 연간(11111117)으로 되어 있으며, 고려사에는 현종(顯宗) 3(1012) 조 등에 초제(醮祭)를 지낸 기록이 나와, 지금으로서는 확정짓기 어렵다. 고려측의 복원궁에 관련된 참고할 만한 기록으로는 고려 중기의 문인 임춘(林椿)이 쓴 일재기(逸齋記)가 있다. 서하선생집(西河先生集)5, 동문선(東文選)64에 이중약(李仲若)의 건의에 따른 복원궁의 건립 경위가 비교적 소상하게 다루어져 있다.

[D-002]부석지문(敷錫之門) : 부석은 널리 펴내어 뭇사람에게 준다는 뜻. 尙書注疏 卷12 洪範敷錫厥庶民 疏

[D-003]삼청상(三淸像) : 도교에서 말하는 옥청(玉淸)상청(上淸)태청(太淸)의 삼청경(三淸境)의 그림. 삼청경은 도교의 최고 신인 원시천존(元始天尊)이 있는 대라천(大羅天) 바로 아래에 위치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거기에는 각각 중앙과 좌우의 세 궁전이 있고, 각 궁전에는 현세의 궁정 조직같이 선왕(仙王)선공(仙公)선경(仙卿)선백(仙伯)선대부(仙大夫)가 있으며, 또 이러한 선관(仙官)들과 별도로 독립해서 태상노군천사(太上老君天師)가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태상노군은 도교에서 노자(老子)를 교조(敎祖)로 받들어서 존칭한 것으로, 그의 존호(尊號)는 현현 황제(玄玄皇帝) 등 여러 가지 있는데 혼원 황제(混元皇帝)도 그 중의 하나다. 결국 상청경의 그림을 그렸는데 그 가운데에 노자의 화상을 부각시켜 그린 것이고 그 노자의 수염 빛깔이 감색이었다는 것이다. ?七籤 卷2 太上老君開天經, 同 卷3 ? 三洞宗元

[D-004]성조(聖朝)께서 진성(眞聖) : 성조는 당시의 북송 황제 즉 휘종(徽宗)을 말하며 그림을 잘 그렸다. 진성(眞聖)은 노자의 별칭이다.

 

 

 

-[靖國安和寺] 정국안화사

安安和寺由王府之東北山行三四里漸見林樾淸茂藪麓崎嶇自官道南玉輪寺過數十步曲徑縈紆脩松夾道森然如萬戟淸流湍激驚奔嗽石如鳴琴碎玉橫溪爲梁隔岸建二亭半蘸灘磧曰淸軒曰漣漪相去各數百步復入深谷中過山門閣傍溪行數里入安和之門次入靖國安和寺寺之額卽今太師蔡京書也門之西有亭榜曰冷泉又少北入紫翠門次入神護門門東廡有像曰帝釋西廡堂曰香積中建無量壽殿殿之側有二閣東曰陽和西曰重華自是之後列三門東曰神翰其後有殿曰能仁殿二額寔今上皇帝所賜御書也中門曰善法後有善法堂西門曰孝思院後有殿曰彌陁堂殿之間有兩廈其一以奉觀音又其一以奉藥師東廡繪祖師像西廡繪地藏王餘以爲僧徒居室其西有齋宮王至其寺則自尋芳門過其位前門曰凝祥北門曰嚮福中爲仁壽殿後爲齊雲閣有泉出山之半甘潔可愛建亭其上亦榜曰安和泉植花卉竹木怪石以爲游息之玩非特土木粉飾之功竊窺中國制度而景物淸麗如在屛障中麗人以奎章睿藻在焉奉之尤嚴也今使者至彼率三節官屬從吏拜于御書殿下飯僧祈福日莫001歸館實宣和五年七月二日癸丑也[-001]:

안화사는 왕부의 동쪽에서 산길을 34리 가면 점차로 수풀이 깨끗하고 우거진 산록이 험악한 것이 보인다. 관도(官道)의 남쪽에 있는 옥륜사(玉輪寺)에서 수십 보를 지나가면 작은 길이 구불구불 얽혀 있고 높은 소나무가 길을 끼고 있는데, 삼엄하기가 만 자루의 미늘창을 세워놓은 듯하다. 맑은 물이 여울져 튀어오르며 놀란 듯 달려가 돌을 씻어내는 것이, 쇠를 울리고 옥을 부수는 것 같다. 시내를 가로질러 다리를 놓았고 건너쪽 강언덕에 세운 두 개의 정자가 여울 돌무더기에 반쯤 잠겨 있는데, 청헌정(淸軒亭)연의정(漣漪亭)이 그것들로 서로간의 거리는 수백 보가 된다. 다시 깊은 골짜기 속으로 들어가서 산문각(山門閣)을 지나 시냇물을 끼고 몇 리를 가 안화문(安和門)으로 들어가고, 다음에 정국안화사로 들어간다. 절의 액자는 곧 지금의 태사(太師)채경(蔡京)의 글씨이다. 문의 서쪽에 정자가 있는데 방()냉천(冷泉)’으로 되어 있다. 또 좀 북쪽으로 가면 자취문(紫翠門)으로 들어가고, 다음에는 신호문(神護門)으로 들어간다. 문 동쪽 월랑에 상()이 있는데 그것은 제석(帝釋)이다. 서쪽 월랑의 대청을 향적(香積)’이라 하며, 가운데에는 무량수전(無量壽殿)이 세워져 있고, 그 곁에 두 누각이 있는데 동쪽의 것을 양화(陽和)’라 하고 서쪽의 것을 중화(重華)’라 한다. 여기서부터 뒤에는 세 문이 늘어서 있는데, 동쪽 것을 신한(神翰)’이라 하며, 그 뒤에 전각이 있는데 능인(能仁)’이라고 한다. 전각의 두 액자는 실로 금상 황제께서 내린 어서(御書)이다. 중문은 선법(善法)’이라 하는데 그 뒤에 선법당(善法堂)이 있고, 서문은 효사(孝思)’라 한다. 뜰 뒤에 전각이 있는데 그것을 미타당(彌陀堂)’이라고 한다. 전각 사이에 두 곁채가 있는데 그 중 하나에는 관음(觀音)을 봉안하였고 또 하나에는 약사(藥師)를 봉안하였다. 동쪽 월랑에는 조사상(祖師像)이 그려져 있고 서쪽 월랑에는 지장왕(地藏王)이 그려져 있다. 나머지는 승도(僧徒)의 거실이다.

그 서쪽에 재궁(齋宮)이 있는데, 왕이 그 절에 오면 심방문(尋芳門)으로 해서 그 자리[]로 간다. 앞문은 응상(凝祥)’, 북문은 향복(嚮福)’이며, 가운데는 인수전(仁壽殿)이고 뒤는 제운각(齊雲閣)이다. 샘이 산 중턱에서 나오는데 달고 깨끗하여 사랑스럽다. 그 위에 정자를 세웠는데 방()이 역시 안화천(安和泉)이다. 화훼(花卉)죽목(竹木)괴석(怪石)을 심어서 놀고 쉬는 놀이터로 만들었는데, 흙과 나무, 꾸민 모양이 은근히 중국 제도를 모방하였을 뿐 아니라 경치가 맑고 아름다워 병풍 속에 있는 듯하다. 고려인들은 규장(奎章 천자의 글을 말함)과 예조(睿藻 왕의 글을 말함)가 거기에 있기 때문에 더욱 엄숙하게 만드는 것이다. 지금 사자(使者)가 그 곳에 가서 삼절(三節)의 관속과 종리(從吏)를 거느리고 어서전(御書殿) 아래에서 배례하고서 불승들을 공양하여[飯僧] 복을 빌고 날이 저물어서 관사로 돌아가니, 실로 선화(宣和) 5(1123) 72일 계축이었다.

[D-001]산문각(山門閣) : 상층이 누각으로 된 산문. 산문은 사찰로 들어가는 최초의 문을 말한다

[D-002]채경(蔡京) : 10471126. 자는 원장(元長), 선유(仙遊) 사람으로 그 서실(書室)을 육학당(六鶴堂)이라 했다. 그는 왕안석(王安石)의 신법을 부활시키는 등 국정을 장악하고 태사(太師)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네 차례 파출되었다가 네 차례 국정을 장악한 인물로, 후에 정강(靖康)의 변란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宋史 姦臣傳

[D-003]제석(帝釋) : 불가의 설화에 나오는 도리천(?利天)의 주재자로, 수미산(須彌山) 정상의 선견성(善見城)에 살면서 불법을 옹호하고 아수라(阿修羅)를 몰아 내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 범명(梵名)은 석가제환인다라(釋迦提桓因陀羅 ?akra dev?n?m Indrah 샤크라).

[D-004]무량수전(無量壽殿) : 무량수불 즉 아미타불(阿彌陀佛 Amit?bha)을 봉안한 불전.

[D-005]능인(能仁) : 석존(釋尊)의 별칭. 석가모니(??kya-muni)를 의역(意譯)한 것으로 전해진다. 송 휘종의 글씨로 액자를 만들어서 걸었던 것이다.

[D-006]선법당(善法堂) : 본래 제석천(帝釋天)에 있는 궁전 이름. 제천(諸天)에서 그곳에 모여 사람의 선악을 논의한다는 것이다. Sudharman.

[D-007]관음(觀音) :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Avaloki-te?vara). 세상의 중생이 구원을 청하는 소리를 들으면 곧 구원해 준다는 것으로, 구원을 청하는 양상이 천태만상인 데 따르느라 관세음보살도 천변만화한다고 한다.

[D-008]약사(藥師) : 약사여래(藥師如來). 사람들의 병을 고쳐 주고 고뇌를 구제해 주는 부처로 알려진다. Bhaisajyaguru.

[D-009]조사상(祖師像) : 조사의 상. 조사는 선종(禪宗)에서는 달마대사(達磨大師)를 말함.

[D-010]지장왕(地藏王) :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말함. Ksitigarbha. 왼손에 보주(寶珠), 오른손에 석장(錫杖)을 들고 있다.

[D-011]재궁(齋宮) : 나라의 태묘제(太廟祭)에 재()를 드리는 곳.

 

 

 

-[廣通普濟寺] 광통보제사

廣通普濟寺在王府之南泰安門內直北百餘步寺額揭於官道南向中門榜曰神通之門正殿極雄壯過於王居榜曰羅漢寶殿中置金仙文殊普賢三像旁列羅漢五百軀儀相高古又圖其像於兩廡焉殿之西爲浮屠五級高逾二百尺後爲法堂旁爲僧居可容百人相對有巨鐘聲抑而不揚故事以禮物之餘馬及高麗所遺使副者凡二疋益以白金二斤爲香花果蔌之供以作佛事飯僧徒使副不躬往唯遣都轄提以下三節行禮焉

광통보제사는 왕부의 남쪽 태안문(泰安門) 안에서 곧장 북쪽으로 백여 보의 지점에 있다. 절의 액자는 관도(官道)’에 남향으로 걸려 있고, 중문의 방은 신통지문(神通之門)’이다. 정전(正殿)은 극히 웅장하여 왕의 거처를 능가하는데 그 방()나한보전(羅漢寶殿)’이다. 가운데에는 금선(金仙)문수(文殊)보현(普賢) 세 상이 놓여 있고, 곁에는 나한 5백 구를 늘어놓았는데 그 의상(儀相)이 고고(古高)하다. 양쪽 월랑에도 그 상이 그려져 있다. 정전 서쪽에는 5층 탑이 있는데 높이가 2백 척이 넘는다. 뒤는 법당이고 곁은 승방인데 1백 명을 수용할 만하다. 맞은편에 거대한 종이 있는데 소리는 가라앉아 시원하지 못하다. 전례에 따라 예물의 나머지 말과 고려에서 정사와 부사에게 준 것 도합 2필에 백금 2근을 더해 향화(香花)와 과속(果蔌 과일과 채소)의 비용으로 주고, 불사(佛事)를 하고 불승을 공양하였다. 정사와 부사는 몸소 가지 않고 다만 도할관(都轄官)과 제할관(提轄官) 이하 삼절을 보내어 의식을 거행하게 하였다.

[D-001]금선(金仙)……있고 : 금선은 불타(佛陀)의 별칭. 문수는 문수사리보살(文殊師利菩薩 Ma?junr?), 부처의 지혜를 나타내는 보살로 알려진다. 보현은 보현보살(普賢菩薩 Samantabhadra), 문수보살과 함께 석가모니 곁에 시립하여 부처의 이()()()의 덕을 맡아 보는 것으로 되어 있다.

 

 

 

-[興國寺] 흥국사

興國寺在廣化門之東南道旁前直一溪爲梁橫跨大門東面榜曰興國之寺後有堂殿亦甚雄壯庭中立銅鑄幡竿下徑二尺高十餘丈其形上銳逐節相承以黃金塗之上爲鳳首銜錦幡餘寺或有之唯安和者書云大宋皇帝聖壽萬年觀其傾頌之意出於誠心宜其被遇聖朝眷寵懷倈之厚也

흥국사는 광화문(廣化門) 동남쪽 길가에 있다. 그 앞에 시냇물 하나가 있는데, 다리를 놓아 가로질러 놓았다. 대문은 동쪽을 향하고 있는데 흥국지사(興國之寺)’라는 방이 있다. 뒤에 법당이 있는데 역시 매우 웅장하다. 뜰 가운데 동()으로 부어 만든 번간(幡竿 당간)이 세워져 있는데, 아래 지름이 2, 높이가 10여 장()이고, 그 형태는 위쪽이 뾰쭉하며 마디에 따라 이어져 있고 황금으로 칠을 했다. 위는 봉새 머리[鳳首]로 되어 있어 비단 표기[錦幡]를 물고 있다. 다른 절에도 혹 있으나, 다만 안화사의 것에는 대송황제성수만년(大宋皇帝聖壽萬年)’이라 씌어 있다. 그들이 마음을 기울여 송축하는 뜻이 성심에서 나왔음을 보니, 그들이 성조(聖朝)의 총애하심을 후히 받는 것도 마땅한 일이다.

 

 

 

-[國淸寺] 국청사

國淸寺在西郊亭之西相去三里許長廊廣廈喬松怪石互相映帶景物淸秀側有石觀音峭立崖下頃人使所過道經國淸寺門其褐衣僧徒百十輩群出觀之

국청사는 서교정(西郊亭) 서쪽 3리 가량 떨어진 곳에 있다. 긴 낭하와 넓은 곁채에 높은 소나무와 괴석이 서로서로 비치며 둘러 있어 경치가 맑고 수려하다. 곁에 석관음(石觀音)이 벼랑 밑에 높이 서 있다. 지난번 사절이 지날 때 국청사의 문을 통과하게 되자 그곳 갈의(褐衣) 차림의 승도(僧徒) 1백여 명이 떼지어 나와 구경을 하였다.

 

 

 

-[王城內外諸寺] 왕성내외제사

興王寺在國城之東南維出長霸門二里許前臨溪流規模極大其中有元豐間所賜夾紵佛像元符中所賜藏經兩壁有畫王顒嘗語崇寧使者劉逵等云此文王謂徽也 遣使告神宗皇帝模得相國寺本國人得以瞻仰上感皇恩故至今寶惜也稍西卽洪圓寺入長霸門溪北爲崇化寺南爲龍華寺後隔一小山有彌陁慈氏二寺然亦不甚完葺崇敎院在會賓門內普濟道日金善三寺在太安門內鼎足而峙隔官道之北由嵓山又有奉先彌勒二寺並列稍西卽大佛寺也王府之東北與春宮相距不遠有二寺一曰法王次曰印經由大和北門入則有龜山玉輪二寺乃適安和寺所由之途也廣眞寺在將作監之東普雲寺在長慶宮之南自崇仁門出正東卽洪護寺又東北出安定門則有歸法靈通二寺唯順天館之北有小屋數十間榜曰順天寺自人使至館一月僧徒晝夜歌唄不絶榜云以祈國信使副一行平善蓋由衷之信非一時矯僞也又紫燕島有濟物寺群山島有資福寺殿與門廡之外亦無堂室其徒三二人而止爾凡此者以其屋宇隘陋且多故略其圖而載其名焉

 

흥왕사(興王寺)는 국성(國城) 동남쪽 한구석에 있다. 장패문(長覇門)을 나가 2리 가량을 가면 앞으로 시냇물에 닿는데 그 규모가 극히 크다. 그 가운데에 원풍(元豐10781085) 연간에 내린 협저불상(夾紵佛像)과 원부(元符 10981100) 연간에 내린 장경(藏經 대장경)이 있고, 양쪽 벽에는 그림이 있는데, 왕옹(王顒고려 숙종)이 숭녕(崇寧 11021106) 때의 사자(使者) 유규(劉逵) 등에게, ‘이것은 문왕(文王)- 고려 문종을 말함 - 께서 사신을 보내어 신종 황제(神宗皇帝)께 고해 상국사(相國寺)를 모방해 만든 것으로, 본국인들이 우러러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러러 황은에 감사하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소중히 여기고 아끼는 것입니다.’ 하고 말한 적이 있었다. 조금 서쪽으로 가면 곧 홍원사(洪圓寺)이고, 장패문으로 들어가 시내의 북쪽은 숭화사(崇化寺)이며 남쪽은 용화사(龍華寺)이다. 뒤로 작은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미타(彌陀)자씨(慈氏) 두 절이 있다. 그러나 그리 완전하게 수리되어 있지는 않았다. 숭교원(崇敎院)은 회빈문(會賓門) 안에 있고, 보제(普濟)도일(道日)금선(金善) 세 절은 태안문(太安門) 안에 있는데 솥발처럼 솟아 있다.

관도(官道)의 북쪽 유암산(?)을 사이에 두고, 또 봉선(奉先)과 미륵(彌勒) 두 절이 나란히 늘어서 있고, 조금 서쪽으로 가면 곧 대불사(大佛寺)이다. 왕부(王府)의 동북쪽으로 가면 춘궁(春宮 태자가 거처하는 궁전)과 상거가 멀지 않은 곳에 두 절이 있는데 하나는 법왕(法王)이고 다음은 인경(印經)이다. 대화북문(大和北門)으로 해서 들어가면 구산(龜山)과 옥륜(玉輪) 두 절이 있는데, 그것은 안화사(安和寺)로 가는 길에 있는 절이다.광진사(廣眞寺)는 장작감(將作監) 동쪽에 있고, 보운사(普雲寺)는 장경궁(長慶宮) 남쪽에 있다. 숭인문(崇仁門)에서 동쪽으로 나가면 곧 홍호사(洪護寺)이고, 또 동북쪽으로 안정문(安定門)을 나가면 귀법(歸法)영통(靈通) 두 절이 있다. 순천관(順天館 송의 사절 일행이 묵는 관사) 북쪽에 작은 집 수십 칸이 있는데 순천사(順天寺)라는 방이 붙어 있다. 사절이 관사에 와서부터 한 달 동안은 승도들이 계속 범패를 불렀으며, 방에는 이기국신사부일행평선(以祈國信使副一行平善)’이라 하였다. 대체로 충심에서 우러난 진실이지 일시적인 거짓이 아니다.

또 자연도(紫燕島 인천 앞바다에 있는 섬)에는 제물사(濟物寺)가 있고 군산도(群山島)에는자복사(資福寺)가 있는데, 정전과 문과 월랑 이외에는 대청이나 방이 없고 그 승도는 23인뿐이다. 이상의 모든 절들은 그 건물이 좁고 누추한데다 또 수효가 많아 그 그림은 생략하고 이름만 적어 둔다.

[D-001]협저불상(夾紵佛像) : 겹으로 된 모시에 그린 불화.

[D-002]유규(劉逵) : 자는 공로(公路). 수현(隨縣) 사람으로, 숭녕(崇寧) 2(1103, 고려 숙종8) 6월에 호부 시랑(戶部侍郞)으로 국신사가 되어 부사 급사중 오식(吳拭)과 함께 고려에 다녀갔다. 이때 의관(醫官) 4인을 데리고 와 고려에서 중국 의술을 교습시켰다. 규는 채경(蔡京)에 아부하여 중서 시랑(中書侍郞)을 지내다 몇 차례의 부침 끝에 지항주(知杭州)자정전 학사(資政殿學士)까지 지냈다. 宋史 卷351

[D-003]상국사(相國寺) : 하남성 개봉현 동북에 있는 절로 동경몽화록(東京夢華錄)에 따르면 매월 5차례씩 시장으로 개방하였다.

[D-004]장작감(將作監) : 토목이나 영선 등의 일을 맡아 보는 관청. 후에 선공감(繕工監) 등으로 개칭되었다.

[D-005]이기국신사부일행평선(以祈國信使副一行平善) : ‘국신사의 정부사 일행이 무사하기를 빌기 위하여의 뜻.

 

 

 

-[崧山廟] 숭산묘

崧山神祠在王府之北自順天館出至兵部直北沿溪行過龜山寺福源觀出北昌門行五里許山路崎嶇喬木森蔭俯視城中如指諸掌其神本曰高山國人相傳祥符中契丹侵逼王城神乃夜化松數萬作人語虜疑有援卽引去後封其山爲崧以祠奉其神也民有?施衣獻良馬以禱之比者使至六月二十六日丁未遣官致祭祠宇尙遠唯至半山設酒饌望而拜之遵舊典也

숭산신사(崧山神祠)는 왕부의 북쪽에 있다. 순천관에서 나가 병부(兵部)까지 가서 곧장 북쪽으로 시내를 따라 가다가 구산사(龜山寺)와 복원관을 지나고, 북창문(北昌門)을 나가 5리 가량을 가면 산길이 험악하고 높은 소나무가 울창한데 성중을 굽어보면 손바닥을 가리키듯이 환하다. 그 신()은 본래 고산(高山)이라고 했었다. 나라 사람들이 전하기로는, 상부(祥符 곧 대중상부(大中祥符). 10081016) 연간에 거란[契丹 ()를 말함]이 왕성으로 침입해 다가오자, 그 신이 밤중에 소나무 수만 그루로 변화하여 사람 소리를 내매, 오랑캐들은 원군이 있는가 의심하고 곧 철퇴하였으므로, 후에 그 상을 봉해서 숭()이라 하고 그 신을 제사드려 받들었다고 한다. 백성들은 재난이나 질병이 생기면 옷을 시주하고 좋은 말을 바치며 기도를 한다. 근자에 사신이 와서 626일 정미에 관원을 보내어 제사를 드렸는데, 사당이 멀어서 산중턱까지만 가서 주찬을 진설하고 배례하였다. 이것은 구법[舊典]에 따른 것이다.

[D-001]거란[契丹]……다가오자 : 고려 현종(顯宗) 2(1011)에 거란이 침입하여 개경에 들어와서 태묘궁궐민가를 분탕하여 왕이 남도로 파천해 다니기까지 하였다. 高麗史 卷4

 

 

-[東神祠] 동신사

東神祠在宣仁門內地稍平廣殿宇卑陋廊廡三十間荒涼不葺正殿榜曰東神聖母之堂以帟幕蔽之不令人見神像蓋刻木作女人狀或云乃夫餘妻河神女也以其生朱蒙爲高麗始祖故祀之舊例使者至則遣官設奠其牲牢酌獻如禮崧山神式

동신사는 선인문(宣仁門) 안에 있다. 땅이 좀 편평하고 넓은데, 정전의 집이 낮고 누추하며 행랑과 월랑 30칸은 황량하게 수리하지 않은 채로 있다. 정전에는 동신성모지당(東神聖母之堂)’이란 방이 붙어 있고 장막으로 가려 사람들이 신상(神像)을 보지 못하게 만들었는데, 이는 나무를 깎아 여인의 형상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그것이 부여(夫餘)의 처인 하신(河神)의 딸이라고 한다. 그녀가 주몽(朱蒙)을 낳아 고려의 시조가 되었기 때문에 제사를 모시는 것이다. 전부터 사자(使者)가 이르면 관원을 보내어 전제(奠祭)를 마련하는데 그 생뢰(牲牢 제물로 바치는 희생)와 작헌(酌獻 잔을 드림)은 숭산신에 대한 법식과 같다.

 

 

 

-[蛤窟龍祠] 합굴룡사

蛤窟龍祠在急水門上隙小屋數間中有神像舟行水淺不可近唯舟師輩以小艇迎而祭之頃者使至彼設祭之明日有一小蛇青色咸謂神化亦猶彭蠡順濟之顯異也乃知神物無乎不在朝廷威靈所格雖蠻貊之邦行矣

 

합굴룡사는 급수문(急水門)의 위쪽 공지에 있다. 작은 집이 두어 칸 있는데 그 가운데에 신상(神像)이 있다. 물이 얕아 배로는 접근할 수 없고, 다만 뱃사공들이 작은 배로 맞아다가 제사할 뿐이다. 근자에 사자가 그곳에 가서 제물을 차려 제사하였더니 그 이튿날 작은 뱀 한 마리가 나왔는데 푸른 색이었다. 이를 보고 다들 신의 화신이라 하니, 역시 팽려(彭蠡)를 순풍으로 건너게 한 이적(異蹟)과 같았다. 그래서 신물(神物)이란 없는 데가 없어 조정의 영검한 위력이 가는 곳이면 만맥(蠻貊)의 나라라도 통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D-001]팽려(彭蠡) : 지금의 강서성(江西省)에 있는 파양호(?陽湖). 팽려택(彭蠡澤)이라고도 한다. 팽려호에 관련된 이적의 고사는 미상.

 

 

 

-[五龍廟] 오룡묘

五龍廟在群山島客館之西一峯上舊有小室在其後數步今新制獨有兩楹一室而止正面立壁繪五神像舟人祠之甚嚴又其西南大林中有小祠人謂崧山神別廟云

오룡묘는 군산도(群山島)의 객관(客館) 서쪽 한 봉우리 위에 있다. 전에는 작은 집이 있었다. 그 뒤 두어 걸음 되는 데에다 지금 홀로 두 기둥이 있는 한 채의 집만을 새로 지었을 뿐이다. 정면에 벽이 서 있고 거기에 오신상(五神像)이 그려져 있는데, 뱃사람들은 그것을 퍽 엄숙하게 제사한다. 또 서남쪽 큰 수풀 가운데 작은 사당이 있는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숭산신(崧山神)의 별묘(別廟)라 하였다.

 

 

 

 

宣和奉使高麗圖經卷第十八

道敎

釋氏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18

도교

석씨

 

 

 

 

 

-[道敎] 도교

臣聞高麗地濱東海當與道山仙島相距不遠其民非不知向慕長生久視之敎第中原前此多事征討無以淸淨無爲之道化之者唐祚之興尊事混元始祖故武德間高麗遣使丐請道士至彼講五千文開釋玄微高祖神堯奇之悉從其請自是之後始崇道敎踰於釋典矣大觀庚寅天子眷彼遐方願聞妙道因遣信使以羽流二人從行遴擇通達敎法者以訓導之王俁篤於信仰政和中始立福源觀以奉高眞道士十餘人然晝處齋宮夜歸私室後因言官論列稍加法禁或聞俁享國日常有意授道家之籙期以易胡敎其志未遂若有所待然

 

고려는 땅이 동해에 접해 있어서 틀림없이 도산(道山)선도(仙島)와는 거리가 멀지 않을 것이다. 그 백성들이 장생불사하는 가르침을 사모할 줄 몰랐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나, 다만 중원(中原)에서는 앞서 대부분 정토(征討)를 일삼고 청정무위(淸淨無爲)의 도로 교화시킨 자가 없었던 것이다. 당실[唐祚]이 일어나서는 혼원시조(混元始祖)를 섬겼다. 그래서 무덕(武德 618626) 연간에 고려(고구려를 말함)에서 사신을 보내어, 도사가 그곳에 가서 오천문(五千文 노자의 도덕경을 말함)을 강론하여 현미(玄微 심오한 이치)를 풀이해 주기를 간청하였던 것이다.고조(高祖당 고조를 말함)는 성군이었는지라 그것을 기특하게 여겨 그 청을 다 들어주었다. 그때부터 비로소 도교를 숭상함이 불전(佛典)을 능가하였다.

대관(大觀) 경인년(1110, 고려 예종5)에 천자께서 저 먼 변방에서 신묘한 도를 듣고자 함을 돌보시어 신사(信使)를 보내시고 우류(羽流 도사를 말함) 2인을 딸려 보내어 교법(敎法)에 통달한 자를 골라 훈도(訓導)하여 주게 하였다.왕우(王俁고려 예종(睿宗))는 신앙이 돈독하여 정화(政和 11111117) 연간에 비로소 복원관(福源觀)을 세워 도가 높은 참된 도사 10여 인을 받들었다. 그러나 그 도사들은 낮에는 재궁(齋宮)에 있다가 밤에는 집으로 돌아가고는 하였다. 그래서 후에 간관(諫官)이 지적, 비판하여 다소간 법으로 금하는 조치를 취하게 되었다. 간혹 듣기로는, ()가 나라를 다스렸을 때는 늘 도가의 도록(圖籙 도가의 서적)을 보급하는 데 뜻을 두어 기어코 도교로 호교(胡敎 곧 불교)를 바꿔 버릴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해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것이 있는 듯하였다.

[D-001]혼원시조(混元始祖) : 노자(老子). ()이 창업하자, 노자가 동성(同姓)인 이씨(李氏)이므로 노자를 시조로 받들었다. 당 고종(唐高宗)은 건봉(乾封) 원년(666)에 노자를 태상현원황제(太上玄元皇帝)라 추호(追號)하였고, 현종(玄宗)은 천보(天寶) 원년(742)에 현원묘(玄元廟)를 설치하여 규모를 갖추어 노자를 제사하였고, 그 이듬해에는 대성조(大聖祖)라 가호(加號)하였다. 8(749)에는 대도현원황제(大道玄元皇帝)라 칭하고, 13(754)에는 다시 대성조 고상대도금궐현원천황대제(大聖祖高上大道金闕玄元天皇大帝)라 칭했다. 북송 때에 와서진종(眞宗)은 대중상부(大中祥符) 6(1013)에 노자를 태상노군 혼원상덕황제(太上老君混元上德皇帝)라 칭했다. 各帝王本紀

[D-002]현미(玄微)……것이다 : 이 일은 고구려 영류왕(榮留王) 78 양년(624625)에 걸쳐 있었던 일로 전해진다. 三國遺事 3 寶藏奉老》《三國史記 高句麗本紀

[D-003]교법(敎法)……하였다 : 고려사10권 예종 56월 조에, 왕양(王襄)과 장방창(張邦昌)을 정부사로 한 북송의 사절이 왔다는 기록은 있으나, 도사 2인을 보내온 일은 적혀 있지 않다. 송사(宋史)휘종본기(徽宗本紀) 당해년 및 동 고려전에도 언급이 없다.

[D-004](?)……듯하였다 : 예종 자신이 도록(?)을 받고 불교 대신 도교를 국가의 종교로 올려놓겠다는 생각이 간절했었다는 말은, 예종의 도교에 대한 신심이 독실했던 것에 비추어 볼 때, 당시 고려 상하에 나돌고 있었을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한편 또 서긍의 이러한 말은 도교 황제인 송 휘종에 대한 일종의 아유적인 언사로 풀이될 수도 있다. 그런데 예종이 훙거하자 그의 장자인 인종이 이자겸(李資謙)의 힘으로 곧 즉위했는데, 그 해 12월에 예종의 도교 정책과 관련이 깊었던 한안인(韓安仁)과 이중약(李仲若)은 왕권을 둘러싼 갈등에 말려들어 피살되었다. 이러한 일로 미루어 볼 때 예종 생전의 도교로의 경도(傾到)가 심상한 것이 아니었으리라고 추정된다.

 

 

 

-[道士] 도사

道士之服不以羽衣用白布爲裘皁巾四帶比之民俗特其袖少褒裕而已

 

도사의 복장은 우의(羽衣 새털로 짜서 만든 도가의 옷)를 사용하지 않고, 백포(白布)로 만든 갖옷에 조건(皁巾 검정색 두건)과 사대(四帶 네 줄이 늘여뜨려진 의대)를 입는데 평민의 의복과 비교하면 다만 그 소매가 좀 넉넉할 따름이다.

 

 

 

-[釋氏] 석씨

浮圖之敎始出天竺遂傳四夷其法冞盛高麗雖在海東聞自淸涼法眼一枝東渡之後僧徒頗知性理嘗於普濟寺僧堂見其揭榜示衆大略云言不足以載道久矣大千經卷皆藥病之說正法眼藏無所付囑世尊於是擧花而示有微笑者至於子孫言辯相示謂之談禪無乃妄乎靈山之會唯一迦葉其可容易期於衆人昔人猶愛羊存而禮之意不忘又況言說之筌足以得其意哉抑聞之說詩者貴在以意逆志吾宗亦然蓋言以索意意之所隨不可以言傳則亦在乎默而識之尙何數數於文言之末乎觀此數百言深契宗旨佛像供具皆悉修潔幡華繒蓋行列有序大經則有華嚴般若小者不可悉數亦有本繙自中國能爲華言者嘗令誦之歷歷可聽至其梵唄則又鴃舌不復可辨矣其鐃鈸形制小而聲愁至其螺聲則洪大如號焉先是元豐間上節使臣宋密歿於紫燕島自後使至必於濟物寺飯僧致祭上節以次羅拜墓下比者銜命至彼亦襲前例雖存歿恩義理固宜爾然人心初到異邦遠懷鄕國遽覩客殯無不霑灑蓋出使絶域唯遼東爲難海洋阻隔危險萬態得獲全濟復命于朝豈不幸歟自非倚仗王靈則其不葬於蛟蜃之腹者幾希豈釋氏專能持護哉今圖其衣服制度以考同異云

부처의 가르침은 천축(天竺 인도의 옛이름)에서 처음 나와 드디어는 사방의 이족(夷族)들에 전파되어 그 법이 성하여졌다. 고려는 비록 바다 동쪽에 있기는 하나 듣기로는 청량법안(淸涼法眼)의 한 파가 동쪽으로 건너온 후에 승도들이 성리(性理)를 꽤 알게 되었다 한다. 한 번은 보제사(普濟寺)의 승당(僧堂)에서 방을 걸어[揭榜] 대중에게 보이는 글을 본 일이 있는데 그 대략은 이러하다.

[]이 도를 싣기에 부족한 지가 오래 되었다. 대천경권(大千經卷 무수한 불교경전을 말함)은 다 병을 고쳐 주는 설이기는 하나 정법안장(正法眼藏)을 부촉(付囑)할 데가 없는지라, 세존(世尊)이 이에 꽃을 들어 보여 주었더니, 미소하는 자가 있었다. 그런데 자손들에 내려와서는 언변으로 서로 나타내는 것을 담선(談禪 선을 이야기함)이라고들 부르니 망령되지 아니한가?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는 오직 가섭(迦葉) 하나뿐이었으니 그런 깨달음을 뭇사람들에게 쉽사리 기대할 수가 있겠는가? 옛사람조차도 양()을 남기기를 좋아하여서 예()의 큰 뜻을 잊지 않았거든, 하물며 말[言說]이라는 도구가 그 뜻을 충분히 나타낼 수 있겠는가. 듣건대, 시를 설명하는 데는 자기 생각으로 시의 뜻을 맞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는데 우리 교종(敎宗) 역시 그러하다. 대체로 말로써는 생각을 찾지마는 생각이 따르는 곳을 말로는 전달할 수 없는 것이 있으니, 또한 잠자코 있으면서도 그것은 아는 법이 있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글과 말 같은 말단적인 것에 급급할 것인가?”

이 수백 마디를 보니 깊이 종지(宗旨)를 터득하고 있다. 불상과 공구(供具 제물향화 따위를 괴어 놓는 제구)가 모두 다 깨끗하고 표기의 장식과 비단 천개(天蓋 불상 위 같은 데 설치하는 덮개)는 질서가 정연하다. 대경(大經)으로는 화엄(華嚴)과 반야(般若)가 있고 작은 것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또 본래 중국에서 연구하여 중국어를 할 수 있는 자도 있어서, 낭송시켜 보았더니 똑똑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들의 범패(梵唄)로 말하면 또 사투리여서 전연 분간할 수가 없다. 그들의 요발(鐃鈸 불가에서 쓰는 악기 이름)은 생김새가 작고 소리가 시름겹고, 그들의 소라 소리는 호통을 치듯 매우 크다.

앞서 원풍(元豐 1078~1085) 연간에 상절(上節)의 사신 송밀(宋密)이 자연도(紫燕島)에서 죽었는데, 그 후부터는 사신이 오면 반드시 제물사(濟物寺)에서 불승의 공양과 함께 제사를 드리고, 상절이 차례에 따라 무덤 아래에 둘러서서 배례하였다. 근자에 어명을 받들고 그곳에 가서도 역시 전례에 따랐다. 비록 생존자와 사망자 사이의 은의(恩義)는 물론 그럴 것이라고 하겠으나 사람의 마음이란 처음 이국에 가면 멀리 고향을 생각하게 되는지라, 느닷없이 객사한 무덤을 보고서는 눈물을 뿌리지 않는 사람이 없게 된다. 대체로 이역 땅에 사신으로 가는 데는 요동(遼東)이 가장 어려우니, 해양이 막혀 있어 위험이 오만 가지인데, 온전히 끝마치고 조정에 복명할 수 있게 됨이 어찌 다행하지 않겠는가? 본래 왕의 위령에 의지함이 아니라면 교룡과 조개의 뱃속에 장사지내지 않을 자가 극히 드물 것이니, 어찌 부처가 오로지 보호해 줄 수가 있겠는가? 이제 그 의복 제도를 그려서 이동(異同)을 고찰하여 보기로 하겠다.

[D-001]청량법안(淸涼法眼) : 중국 청량사(淸涼寺)의 법안 문익(法眼文益)에 의해 전해진 선종(禪宗)의 일파. 청량사는 지금의 남경시 남쪽에 있는 이른바 건업(建業) 청량사(淸涼寺)이다. 법안종은 화엄초지(華嚴初地) 중의 육상의(六相義)를 들어 삼계유심(三界唯心)과 만법유식(萬法唯識)을 종지(宗旨)로 삼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선가의 육대조(六代祖) 혜능대사(慧能大師)의 제자 행사(行思)에서 시작되어, 5전하여 설봉(雪峯)에 와 다시 현사(玄沙)와 나한(羅漢)을 거쳐 건업 청량사의 법안 문익에게 전해진 것으로 되어 있다. 서긍은 이 법안이 우리 땅에 전파되어 불교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 것으로 말하고 있다.

[D-002]정법안장(正法眼藏) : 선문(禪門)에서 바른 세계를 보는 방법. 즉 깨달음의 진실을 의미하는 말로 쓰이는데, 석존이 깨달은 무상의 정법(正法)을 가리킨다.

[D-003]꽃을……있었다 : 이것이 이른바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의 염화미소(拈華微笑)의 고사이다. 석가가 영취산(靈鷲山)에서 설법할 때 대범천왕(大梵天王)에게서 받은 금바라화를 따서 여러 사람들에게 보였더니 모두 그 뜻을 터득하지 못하였는데, 오직 가섭(迦葉)만이 깨닫고 미소를 지어 석가는 결국 가섭에게 불교의 진리를 전수했다는 것이다. 이른바 이심전심의 묘처를 설명한 것이다. 五燈會元 碧巖錄 序

[D-004]()……않았거든 : 자공(子貢)이 새 달을 고하는 데 바치는 희생용(犧牲用)의 양을 없애려 하자, 공자(孔子)가 그에게, ‘너는 그 양을 아끼지만 나는 그 예를 아낀다.’라고 말했다. 論語 八佾

[D-005]()……하는데 : 맹자(孟子)는 함구몽(咸丘蒙)의 질문에 대답한 말 가운데서, ‘글자로 말을 해치지 않고 말로 뜻을 해치지도 않는다. 읽는 사람의 마음으로 시의 뜻을 맞아 들인다면 그것이 바로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孟子 萬章上

[D-006]반야(般若) : 반야바라밀다심경(般若波羅密多心經 Parjn?-p?ramit?-hrdaya s?tra). ‘마하(摩訶)’ 두 자를 위에 붙이기도 하고 반야경으로 약칭하기도 한다. 초기 대승불교시대에 성립한 경전으로, 탁월한 지혜로 최고의 경지를 풀어낸 경문으로 전해지고 각 종파에서 널리 받들어진다.

[D-007]송밀(宋密)……죽었는데 : 원풍 연간에 북송에서 고려에 사절을 세 차례 보냈는데 송밀이 어느 때에 따라왔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國師] 국사

國師之稱蓋如中國之有僧職綱維也其上一等謂之王師王見則拜之皆服山水衲袈裟長袖偏衫金跋遮下有紫裳烏革鈐履人物衣服雖略與中華同但麗人大抵首無枕骨以僧祝髮乃見之頗可駭訝晉史謂三韓之人初生子便以石壓其頭令扁非也蓋由種類資稟而然未必因石而扁

국사의 칭호는 대체로 중국에 승직의 강유(綱維)가 있는 것과 같다. 그 위의 한 등급은 왕사(王師)라고 하는데 왕이 만나면 그에게 배례를 한다. 다 산수납가사(山水衲袈裟)와 긴 소매의 편삼(偏衫)과 금발차(金跋遮)를 착용하고, 아래에는 자상(紫裳)과 오혁검리(烏革鈐履)가 있다. 인물과 의복은 비록 대략은 중국과 같지마는 고려인은 대개 머리에 침골(枕骨 후두부에 돌출한 뼈)이 없으나 중이 되어 머리를 깎아 버리면 그것이 보이는데 퍽 놀랍고 이상하다. 진사(晉史)에는, ‘삼한(三韓) 사람들은 갓난아이를 곧 돌로 그 머리를 눌러 납작하게 만든다고 하였으나 옳지 않다. 대개 종류와 타고난 자품에 그렇게 되는 것이지 반드시 돌 때문에 납작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D-001]강유(綱維) : 절 안을 통찰하고 불사(佛事)를 유지하는 역할을 하는 자로, 사주(寺主)상좌(上座)도유나(都維那)3인이 있어 그것을 삼강(三綱)이라고도 한다. 고려의 국사는 이러한 중국의 강유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D-002]산수납가사(山水衲袈裟) : 송대(宋代) 선승(禪僧)의 옷. 능직(綾織) 비단으로 만들고, 여기에 꽃무늬를 수놓았다. 값이 비싼 것이라 한다. 行事?資特記 下 三之一

[D-003]편삼(偏衫) : 오른쪽 어깨에서 왼쪽 겨드랑이로 걸치는 옷과,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겨드랑이로 걸치는 옷을 합쳐 만든 법의(法衣).

[D-004]금발차(金跋遮) : 금색으로 만든 금강저(金剛杵). 불승이 번뇌 파쇄의 상징으로 손에 들고 있는 인도의 고대 무기. 범어 Vajra의 음역으로 발자라(?)’로 쓰기도 한다. 菩薩本緣經 卷3발차(跋遮)’로 쓰는 것은 중국 송대에 그런 물건을 손에 들고 춤을 추는 발차곡(跋遮曲)이 있는 데서 연유된다. 晁補之 鷄助集? 跋遮曲

[D-005]오혁검리(烏革鈐履) : 검은 색 가죽으로 만든 조이개가 달린 신발.

 

 

 

-[三重和尙大師] 삼중화상대사

三重和尙長老律師之類也服紫黃貼相福田袈裟長袖偏衫下亦紫裳位在國師之下講說經論傳習性宗擇聰惠辯博者爲之

삼중화상 장로(長老)는 율사(律師)의 종류이다. 자황첩상복전가사(紫黃貼相福田袈裟)와 긴 소매의 편삼을 입고, 아래는 역시 자상(紫裳)이다. 지위는 국사 아래에 있고 경론(經論)을 강설하며 성종(性宗)을 전습시킨다. 총명하고 지혜로우며 언변이 좋고 박식한 이를 택해서 그 일을 시킨다.

[D-001]율사(律師) : 지율사(持律師) 또는 율자(律者)라고도 하는데, 불교의 계율에 통달한 고승을 말한다. 摩訶僧祇律 8》《五分律 30중국에서는 또 도사 삼등 수행(修行)의 셋째를 율사라고도 했다.唐六典 尙書禮部 祠部郞中員外郞

[D-002]자황첩상복전가사(紫黃貼相福田袈裟) : 자황색으로 몸에 꼭맞게 만든 밭고랑 무늬가 있는 가사.

[D-003]성종(性宗) : 법성종(法性宗)의 약칭. 일체의 법상(法相)은 다 허망하다 하여 진성공적(眞性空寂)의 이치를 나타내 보이는 것을 주지(主旨)로 하는 종파. 삼중화상은 그 이법을 전습시킨다는 것이다.

 

 

 

-[阿闍梨大德] 아사리대덕

?梨大德位降三重和尙一等分隷敎門職事其服短袖偏衫壞色掛衣五條下有黃裳國師三重不過數人而阿?梨一等人數極衆未究厥旨

아사리(阿闍梨)대덕은 삼중화상보다 한 등 떨어진다. 교문(敎門)의 직무를 분담하는데, 그 옷은 짧은 소매의 편삼(偏衫)과 괴색(壞色 진한 고동색) 괘의(掛衣)에 오조(五條)이고, 아래는 황상(黃裳)이다. 국사와 삼중은 몇 사람에 불과하고 아사리 한 등급은 사람 수가 극히 많은데 그 뜻을 알아보지 못했다.

[D-001]아사리(阿闍梨) : 범어 ?c?rya의 음역. 곧 스승이라는 뜻으로, 궤범사(軌範師)라고도 하는데, 교단의 교사 역할을 하는 자로, 아사리대덕은 덕이 높은 중이라는 뜻. 승직의 하나다.

[D-002]괘의(掛衣) : 괘락(掛絡)괘락(掛洛)괘라(掛羅)괘자(掛子) 등의 별칭이 있는데, 선승(禪僧)이 평소에 사용하는 작은 약식 가사.

[D-003]오조(五條) : 오조가사(五條袈裟 antarv?sa). 가로로 다섯 줄무늬가 있는 천을 말라서 만든 가사. 본래는 내복이었으나 후에 옷 위에 걸쳐 입도록 되었다. 원내도행잡작의(院內道行雜作衣)라고도 한다.

 

 

 

-[沙彌比丘] 사미비구

沙彌比丘自初出家未經受具壞色布衣亦無貼相戒律旣高方易紫服次第遷升乃有衲衣蓋高麗僧衣唯以磨衲爲最重耳

사미비구(沙彌比丘)는 어려서부터 출가(出家)하여 수구(受具)를 거치지 않은 자이다. 괴색의 포의(布衣)로 역시 첩상(貼相 첩상가사를 말함)이 없다. 계율이 높아져야 비로소 자복(紫服)으로 바꾸고, 차례에 따라 옮겨지고 올라가고 한 뒤에야 납의(衲衣)를 갖게 된다. 대체로 고려의 승복은 마납(磨衲)만을 가장 존중한다.

[D-001]사미비구(沙彌比丘) : 어린 중을 말함. 사미(Sramonera)는 자비지(慈悲地)에 안식한다는 것이 그 본뜻이다.

[D-002]수구(受具) : 구족계(具足戒)를 받음을 말함. 구족계는 정식 비구 또는 비구니가 되기 위해 비구는 250, 비구니는 5백계를 받는데 그것을 받으면 정식으로 교단에 들어간 것을 의미하게 된다.

[D-003]마납(磨衲) : 고려 특산의 귀중한 직물로 만든 가사. 六祖壇經

 

 

 

-[在家和尙] 재가화상

在家和尙不服袈裟不持戒律白紵窄衣束腰皁帛徒跣以行間有穿履者自爲居室娶婦鞠子其於公上負載器用掃除道路開治溝洫修築城室悉以從事邊陲有警則團結而出雖不閑於馳逐然頗壯勇其趨軍旅之事則人自褁001故國用不費而能戰也聞中間契丹爲麗人所敗正賴此輩其實刑餘之役人夷人以其髡削鬚髮而名和尙耳

宣和奉使高麗圖經卷第十八

[-001]:

 

재가화상은 가사를 입지 않고 계율을 지키지 않으며, 흰 모시의 좁은 옷에 검정색 깁으로 허리를 묶고 맨발로 다니는데, 간혹 신발을 신은 자도 있다. 거처할 집을 자신이 만들며 아내를 얻고 자식을 기른다. 그들은 관청에서 기물을 져 나르고 도로를 쓸고 도랑을 치고 성과 집을 수축하는 일들에 다 종사한다. 변경에 경보(警報)가 있으면 단결해서 나가는데 비록 달리는 데 익숙하지 않기는 하나 자못 씩씩하고 용감하다. 군대에 가게 되면 각자가 양식을 마련해 가기 때문에 나라의 경비를 소모하지 않고서 전쟁할 수 있게 된다. 듣기로는 중간에 거란이 고려인에게 패전한 것도 바로 이 무리들의 힘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사실 형벌을 받은 복역자들인데, 동이(東夷)들은 그들이 수염과 머리를 깎아 버렸기 때문에 화상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宣和奉使高麗圖經卷第十九

民庶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19

민서

 

 

 

 

-[民庶] 민서

臣聞高麗地封未廣生齒已衆四民之業以儒爲貴故其國以不知書爲恥山林至多地鮮平曠故耕作之農不迨工技州郡土產悉歸公上商賈不遠行唯日中則赴都市各以其所有易其所無煕煕如也然其爲人寡恩好色泛愛重財男女婚娶輕合易離不法典禮良可哂也今繪其國民庶而以進士冠于篇

고려는 땅이 넓지 못하나, 백성이 매우 많다. 사민(四民)의 업() 중에 유(선비)를 귀히 여기므로, 그 나라에서는 글을 알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

산림이 지극히 많고 땅이 넓고 편평한 데가 적기 때문에, 농민이 장인[工技]에 미치지 못한다. ()나 군()의 토산(土産)은 다 관가의 공상(公上)에 들어가므로, 상인은 멀리 나들이하지 않는다. 다만 대낮에 도시에 가서 각각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필요한 것을 서로 바꾸는 것으로서 만족하는 듯하였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은혜를 베푸는 일이 적고 여색(女色)을 좋아하여, 분별 없이 사랑하고 재물을 중히 여기며, 남자와 여자의 혼인에도 경솔히 합치고 쉽게 헤어져, 전례(典禮)를 본받지 않으니 진실로 웃을 만한 일이다. 지금 그 나라의 백성을 그림으로 그리되 진사(進士)를 편()의 첫머리에 둔다.

[D-001]남자……헤어져 : 우리나라 여성사에서도 주목할 만한 구절이다. 조선조에 있어서의 여성의 지위는 송유(宋儒)의 처녀 숭배사상의 영향을 받아 여성의 처녀성(處女性)을 중요시했기 때문에, 여성은 중문 밖을 나가지 못하는 내외법(內外法)을 강요당하였다.

 

 

 

-[進士] 진사

進士之名不一王城之內曰土貢郡邑曰鄕貢萃于國子監合試幾四百人然後王親試之以詩賦論三題中格者官之自政和間遣學生金端等入朝蒙恩賜科第自是取士間以經術時務策較其程試優劣以爲高下故今業儒者尤多蓋有所向慕而然耳其服四帶文羅巾皁紬爲裘黑帶革履預貢則加帽登第則給靑蓋僕馬遨遊城中以爲榮觀也

진사의 이름도 하나가 아니어서 왕성(王城) 안에서는 토공(土貢)이라 하고, 군읍(郡邑)에서는 향공(鄕貢)이라 한다. 국자감(國子監)에 모여서 거의 4백 명을 합시(合試)한 뒤에 왕이 친시하여, ()()() 의 세 가지 제()를 시험보여 합격하는 이에게 벼슬을 준다. 정화(政和) 연간에 학생(學生) 김단(金端) 등을 입조(入朝)케 하여 은사과(恩賜科)에 합격하니, 이로부터 선비를 뽑을 때 경술(經術)과 시무책(時務策)으로 그 공부를 견주고 우열(優劣)을 시합하여 고하(高下)를 정하였으므로, 이제 유()를 업()으로 하는 자가 더욱 많아지니, 이는 중국을 향모(向慕)하는 바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진사의 복식은 사대문라건(四帶文羅巾)을 쓰고, 검은 명주[皁紬] 웃옷을 입고 검은 띠를 띠며 가죽신을 신고, ()에 들면 모자를 더 쓰고, 급제하면 청개(靑蓋)와 복마(僕馬)를 주어 성안에서 크게 놀아 영관(榮觀)을 삼는다 한다.

[D-001]모자를 더 쓰고 : 문라건 위에 모자(帽子)를 더 쓴다 하였으니, 이는 아마 복두(幘頭)를 더 쓴 것으로 볼 수 있다.

[D-002]영관(榮觀) : 이 전통은 조선조에도 3일간 거리를 돌아다니는[三日遊街] 풍습으로 남아 있었다.

 

 

 

-[農商] 농상

農商之民農無貧富商無遠近其服皆以白紵爲袍烏巾四帶唯以布之精粗爲別國官貴人退食私家則亦服之唯頭巾以兩帶爲辨間亦徒行通衢吏民見者避之

농상을 업으로 하는 백성은, 농민은 빈부의 차이 없이, 상인은 원근의 차이 없이 다 백저포(白紵袍)를 입고, 오건(烏巾)에 네 가닥 띠를 하는데, 다만 베의 곱고 거친 것으로 구별한다. 나라의 관인이나 귀인(貴人)도 물러가 사가(私家)에서 생활할 때면 역시 이를 입는다. 다만 두건(頭巾)의 띠를 두 가닥으로 하는 것으로 구별하고, 간혹 거리를 걸어갈 때에도 아전[]이나 백성이 이 두 가닥 띠를 보고는 피한다.

[D-001]백저포(白紵袍) : 이 백저포에 대하여는 현재 동경(銅鏡)에 그림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림을 보면 두루마기 비슷하고, 허리에 넓은 띠를 띠고 있다.

 

 

 

-[工技] 공기

高麗工技至巧其絶藝悉歸于公?頭所將作監乃其所也常服白紵袍皁巾唯執役趨事則官給紫袍亦聞契丹降虜數萬人其工伎十有一擇其精巧者留於王府比年器服益工第浮僞頗多不復前日純質耳

고려는 장인의 기술이 지극히 정교하여, 그 뛰어난 재주를 가진 이는 다 관아(官衙)에 귀속되는데, 이를테면 복두소(幘頭所)장작감(將作監)이 그곳이다. 이들의 상복(常服)은 흰 모시 도포를 입고 검은 건을 쓴다. 다만 시역을 맡아 일을 할 때에는 관에서 자주색 도포[紫袍]를 내린다. 또 듣자니, 거란[契丹]의 항복한 포로 수만 명 중에 공장(工匠)- 기술이 정교한 자로 10명 중 한 명을 고른다. - 왕부(王府)에 머무르게 하여, 요즈음 기명(器皿)과 복장이 더욱 공교하게 되었으나, 다만 부화하고 거짓된 것이 많아 전날의 순박하고 질박(質朴)한 것을 회복할 수 없다.

[D-001]복두소(?頭所) :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홍패(紅牌)를 받을 때 쓰는 관인 복두를 만드는 곳.

[D-002]장작감(將作監) : 제시(諸寺)의 하나로 선공시(繕工寺)라고도 하며, 토목과 영선(營繕)을 맡았다.

 

 

 

-[民長] 민장

民長之稱如鄕兵保伍之長也卽民中選富足者爲之其聚落大事則赴官府小事則屬之故隨所在細民頗尊事焉其服文羅爲巾皁紬爲裘黑角束帶烏革句履亦與未預貢進士服飾相似也

민장의 명칭은 중국의 향병(鄕兵)이나 보오(保伍)의 장과 같다. 즉 백성 가운데 부유한 자를 뽑아 시키는데, 마을의 큰 일이면 관부(官府)에 가되 작은 일이면 곧 민장에게 속하므로 거기 사는 세민(細民)들이 자못 존중하고 섬긴다. 그 복식은 문라(文羅)로 건()을 하고 검은 명주[]로 겉옷을 하고 흑각대를 띠고 검은 가죽의 구리(句履)를 신으니, 또한 아직 공()에 들지 않은 진사(進士)의 복식과 서로 닮았다.

[D-001]구리(句履) : 첨단에 장식이 있는 구형(矩形)의 신.

 

 

 

-[舟人] 주인

高麗頭巾唯是重文羅一巾之價准米一石細民無貲可得復恥露頭與罪囚無別故作竹冠以冠之或方或圓初無定制短褐被體下無袴襦每舟十餘人夜則鳴榔鼓枻謳歌互答嘵嘵如鵞鶩群鳴略無聲律情義蓋其俗然也

고려의 두건(頭巾)은 오직 문라(文羅)를 중히 여겨 두건 하나의 값이 쌀 한 섬[] 값이 되어 가난한 백성은 이를 장만할 만한 돈은 없고, 또 상투를 드러내고 다니면 죄수(罪囚)와 다름없으므로 이를 부끄럽게 생각하여, 죽관(竹冠)을 만들어 쓰는데, 모나기도 하고 둥글기도 하여 전혀 일정한 제도가 없다. 짧은 갈(거친 옷)을 입고, 아래에는 바지를 걸치지 않는다. 배마다 10여 인이 밤에는 갑판을 울리고 삿대를 두드리며 노래 부르며 서로 화답하여 거위와 따오기의 무리가 우는 것 같이 시끄럽기만 할 뿐 조금도 소리의 곡조나 감정이 없으니 대개 그 풍속이 그러하다.

[D-001]두건(頭巾) : 머리에 쓰는 건()으로, 녹태책(鹿胎責)이라 하는 것인데, 4개의 띠가 달린 두건이다.

[D-002]죽관(竹冠) : 삿갓을 말한다. 우량(雨量)이 많은 동남아일본에도 발달한 관모로서 그 제도가 일정치 않다.

 

 

 

 

宣和奉使高麗圖經卷第二十

婦人

선화본사고려도경 제 20

부인

 

 

 

 

-[婦人] 부인

臣聞三韓衣服之制不聞染色唯以花文爲禁故有御史稽察民服文羅花綾者斷罪罰物民庶遵守不敢慢令舊俗女子之服白紵黃裳上自公族貴家下及民庶妻妾一槩無辨頃歲貢使趨闕獲朝廷賜予十等冠服遂以從化今王府與國相家頗有華風更遲以歲月當如草偃矣今姑摭其異於中國者圖之

삼한(三韓)의 의복 제도는 염색(染色)한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고, 꽃무늬를 넣는 것을 금제(禁制)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어사(御史)를 두어 백성의 옷을 살펴 무늬 있는 비단과 꽃무늬를 수놓은 비단을 입고 있는 자가 있으면, 그 사람을 죄주고 물건을 압수하므로 백성이 잘 지키어 감히 어기는 자가 없다. 옛 풍속에, 여자의 옷은 흰 모시저고리에 노랑 치마인데, 위로 왕가의 친척과 귀한 집으로부터 아래로 백성의 처첩에 이르기까지 한 모양이어서 구별이 없다 한다. 얼마 전에 세공(歲貢) 사신이 중국 궁궐에 이르러 조정에서 내리는 십등관복(十等冠服)을 얻어와 드디어 이를 본받아, 지금은 왕부(王府)와 국상(國相)의 집에도 자못 중국풍이 있으니, 다시 세월이 지나가면 다 중국풍이 될 것 같다. 이제 잠깐 그 중국과 다른 것만 골라, 이를 그림으로 그린다.

[D-001]십등관복(十等冠服)……본받아 : 고려는 광종(光宗) 때 후주(後周)의 제도를 받아들여 중국 복식을 입었으나 그 뒤 거란에서 변복을 들여오고, 문종 326월에 송() 신종(神宗)이 어의(御衣) 2벌 등을 받았다.

 

 

 

-[貴婦] 귀부

婦人之飾不善塗澤施粉無朱柳眉半額皁羅蒙首製以三幅幅長八尺自頂垂下唯露面目餘悉委地白紵爲袍略如男子製文綾寬袴裏以生綃欲其褒裕不使著體橄欖勒巾加以采絛金鐸佩錦香囊以多爲貴富家藉以大席侍婢旁列各執巾甁雖盛暑不以爲苦也秋冬之裳間用黃絹或深或淺公卿大夫之妻士民游女其服無別或云王妃夫人以紅爲尙益加繪繡國官庶民不敢用也

부인의 화장은 향유(香油) 바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분을 바르되 연지는 칠하지 아니하고, 눈썹은 넓고, 검은 비단으로 된 너울을 쓰는데, 세 폭으로 만들었다. 폭의 길이는 8척이고, 정수리에서부터 내려뜨려 다만 얼굴과 눈만 내놓고 끝이 땅에 끌리게 한다. 흰 모시로 포()를 만들어 입는데 거의 남자의 포와 같으며, 무늬가 있는 비단으로 넓은 바지를 만들어 입었는데 안을 생명주로 받치니, 이는 넉넉하게 하여 옷이 몸에 붙지 않게 함이다. 감람(橄欖)빛 넓은 허리띠(革帶)를 띠고, 채색 끈에 금방울[金鐸]을 달고, 비단[]으로 만든 향낭(香囊)을 차는데, 이것이 많은 것을 귀하게 여긴다. 부잣집에서는 큰자리를 깔고서 시비(侍婢)가 곁에 늘어서서 각기 수건(手巾)과 정병(淨甁)을 들고 있는데 비록 더운 날이라도 괴롭게 여기지 않는다. 가을과 겨울의 치마는 간혹 황견(黃絹)을 쓰는데, 어떤 것은 진하고 어떤 것은 엷다. 공경대부(公卿大夫)의 처와 사민(士民)의 처와 유녀(遊女 기생)의 복색에 구별이 없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왕비(王妃)와 부인(夫人)은 홍색을 숭상하여 더욱 그림과 수를 더하되, 관리나 서민의 처는 감히 이를 쓰지 못한다.’고 한다.

[D-001]너울 : 너울은 멱라(冪羅)라고도 한다. 당대(唐代)에 중앙아시아에서 당에 들어온 것으로, 신라 때 이를 사용하였느냐는 의심스럽다. 신라에서는 영포(領布)라고 하여 숄 같은 것을 걸친 듯하며, 이것이 일본에 건너가 비례(比禮)가 되었다. 고려 시대는 한창 유행하여 여자는 너울을 쓰고, ()을 입고, 말을 탔던 것 같다. 이 글에는 여자도 포()를 입어 남자의 옷과 같다고 하였으니, 전주 포 조항을 참조하기 바란다. 다만 최근 청주(淸州) 채씨묘(蔡氏墓)에서 발견된 조선 초의 여복(女服)에서 첩리(帖裏)천익(天翼)이 보이니, 상의 하상(上衣下裳)의 제도이어서 이는 원대의 질손(質孫)의 영향이므로, 이 전통이 중도에 중단되었음을 알 수 있다.

 

 

 

-[婢妾] 비첩

宮府有媵國官有妾民庶之妻雜役之婢服飾相類以其執事服勤故蒙首不下垂疊於其頂摳衣而行手雖執扇羞見手爪多以絳囊蔽之

궁부(宮府)에는 잉첩(媵妾)이 있고, 관리에게는 첩()이 있는데, 백성의 처나, 잡역에 종사하는 비자(婢子)도 복식이 서로 비슷하다. 그들은 힘든 일을 많이 하기 때문에 너울을 아래로 내려뜨리지 아니하고, 머리 정수리에 접어올리며 옷을 걷고 다니며, 손에는 부채를 잡았으나 손톱 보이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많이들 붉은 한삼으로 손을 가린다.

[D-001]머리 정수리에 접어올리며 : 이 제도는 조선의 가리마(加里麽)로 혜원(蕙園) 풍속도에 나온다. 너울을 접어올려 머리 위에 책갑(冊匣)과 같이 올려 놓은 형태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고려 이래의 전통임을 알 수 있다. 아울러 너울은 조선 말까지 존속되었다.

 

 

 

-[賤使] 천사

婦人之髻貴賤一等垂於右肩餘髮被下束以絳羅貫以小簪細民之家特無蒙首之物蓋其直准白金一斤力所不及非有禁也亦服旋裙製以八幅揷腋高繫重疊無數以多爲尙其富貴家妻妾製裙有累至七八疋者尤可笑也崇寧間從臣劉逵吳拭等奉使至彼値七夕會館伴使柳伸顧作樂女倡謂使副曰本國梳得頭髮慢必是古來墜馬髻逵等答云墜馬髻乃東漢梁冀妻孫壽所爲似不足法伸等唯唯然至今仍貫不改豈自其舊俗椎結而然耶

부인의 머리는 귀천이 한가지로 오른쪽으로 드리우고, 그 나머지는 아래로 내려뜨리되 붉은 깁으로 묶고 작은 비녀를 꽂는다. 가난한 집에서는 다만 너울이 없으니, 대개 그 값이 은() 한 근과 맞먹어 살 힘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며, 금제(禁制)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또 두르는 치마를 입되 8폭으로 만들어 겨드랑이에 높이 치켜 입는데, 주름이 많은 것을 좋아한다. 그 부귀한 자 처첩들의 치마는 78필을 이은 것이 있으니, 더욱 우스운 일이다. 숭녕(崇寧) 연간에 종신(從臣) 유규(劉逵)와 오식(吳拭) 등이 사명을 받들고 고려에 갔을 적에 칠석(七夕)을 만났다. 마침 관반사(館伴使) 유신(柳伸)이 무악(舞樂)하는 기녀[女倡]를 돌아보며 정사부사에게 말하기를,

우리 나라는 머리를 빗어 늘어뜨리니, 필시 옛 추마계(墜馬?)인가 합니다.”

하매, 유규 등이 대답하기를,

추마계는 동한(東漢) 양기(梁冀)의 처 손수(孫壽)가 한 것이니, 본받을 만한 것이 못 되는 것 같소이다.”

하니, 유신 등이 그렇게 여겼다 한다. 그러나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를 고치지 못하니, 아마 이는 그 옛 풍속의 추계(椎結)로 말미암아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D-001]붉은……꽂는다 : 이는 조선 말의 사양머리 형식이다. 사양머리에는 도투락댕기를 달게 되어 있으나, 여기서는 그런 기사가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신라 이래 사양머리형으로 틀어올렸다가 그 나머지는 피발(被髮) 그대로 위에 내려뜨린 것 같다. 또 이 머리가 긴 것이 미인의 조건이기도 하였다.

[D-002]치마는……있으니 : 이는 당시의 유행으로 특기할 만한 것이지만, 실지로 치마를 포개어 입었다기보다는 조선 때에도 있었듯이, 페티코트와 같이 3(), 5, 7단으로 치마의 아래 폭을 벌어지게 하기 위하여 표상(表裳) 안에 그렇게 입은 것 같기도 하나 미상이다.

[D-003]추마계(墜馬髻) : 낭자가 한쪽으로 기울어진 머리. 후한서(後漢書)양기전(梁冀傳)수심에 잠긴 눈썹에 가는 허리, 흰 기운머리……라 하였다.

[D-004]추계(椎結) : 상투의 형태. 원의는 머리를 뒤에 내려뜨려 방망이 모양으로 맺는다는 것이며, 중국에서는 남월(南越)의 풍속으로 되어 있다. 고구려 벽화에서 동이(東夷)의 풍습을 보면, 머리 정수리에 상투를 하고 있다. 백제는 머리를 양도(兩道)로 가르는데, 일본의 미두랑(美豆良)이 그것이다.

 

 

 

-[貴女] 귀녀

蠻夷之服雖略相類亦無定制人使初入城夾道樓觀間時見凭欄有此一等女子纔十餘歲當是未嫁之人亦不被髮而黃衣又非暑服所宜嘗試詰之終不審諦或云是王府小兒之服耳

만이(蠻夷)의 옷이 비록 거의 같은 종류이나, 또한 정한 제도가 없는 것 같다. 사신이 처음에 성()에 들어갈 적에 길옆 누관 사이에 난간에 의지하고 있는 귀녀를 가끔 보았다. 이는 아직 시집가지 않은 겨우 열 살 남짓한 여자였는데도 머리를 풀지 않았고, 황의(黃衣)는 또한 여름 복식으로는 마땅한 것이 아니기에, 시험삼아 이를 힐문하였으나 끝내 이를 자세히 알지 못했다. 어떤 이가 왕부(王府) 소아의 옷이다.’ 하였다.

 

 

 

-[女子] 여자

民庶之家女子未嫁紅羅束髮其餘被下男子亦然特易紅爲黑繩耳

서민(庶民)들의 딸은 시집가기 전에는 붉은 깁[紅羅]으로 머리를 묶고 그 나머지를 아래로 늘어뜨리고, 남자도 같으나 붉은 깁을 검은 노[黑繩]로 대신할 뿐이다.

 

 

 

-[]

高麗法置官婢世代相承故自王府國官觀寺皆給之其於執役肩不勝任負於背上其行甚駛雖男子不如也

고려의 법이 관비(官婢)를 두어 대대로 물려오기 때문에 왕부(王府)로부터 관아나 도관(道觀)이나 사찰(寺刹)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들을 주어 역을 바치게 하였다. 그들이 일할 적에 어깨에 멜 힘이 없으면 등에 지는데, 그 행보가 빨라 남자라도 미치지 못할 정도이다.

 

 

 

-[]

負負戴之役其勞一等水米飮歠並貯銅罌不以肩舁加於頂上001 有二耳一手扶持摳衣而行背負其子考之於經班白者不負戴於道路以其用力良勞非筋骨有加蓋不能也其子附之所謂襁負其子而至歟

[-001]:

지고 이는 일이 그 노고는 한가지다. 물이나 쌀이나 밥이나 마시는 것이나 다 구리항아리에 담았으므로 어깨에 메지 않고 머리 위에 인다. 항아리에는 두 귀가 있어 한 손으로는 한 귀를 붙들고 한 손으로는 옷을 추스리고 가는데, 등에는 아이를 업었다.

경서(經書)를 상고하면 머리 희끗희끗한 자는 도로에 지고 이고 다니지 않는다.’ 함은, 그 힘을 쓰는 것이 진실로 괴로워서 근골에 고통을 주는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아이마저 등에 업었으니, 소위 그 아이를 포대기에 싸업고 살기 좋은 곳으로 찾아온다는 것인가?

 

宣和奉使高麗圖經卷第二十一

?隷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21 권

조례

 

 

 

-[皁隷] 조례

臣聞諸蠻之國。雕題,交趾,被髮,文身。豺狼與居。麋鹿與游。豈復知張官置吏之法哉。唯高麗則不然。衣冠禮儀。君臣上下。燦然有文法。以相接也。內置臺省院監。外置州府郡邑。設官分職。選吏任事。在上則擧其綱目。在下則任其繁劇。雖一國之事。簡而當理。追胥呼索。但片紙數字。民不敢失其期會也。故自中書給事中樞堂官。以至夫民長。無敢怠豫。其國官吏。遇諸途。必跪拜鞠恭。言事則膝行而前。上手抵面。以聽奉之。自非久陶聖化。能若是乎。今自吏職。以迄驅使。並列圖于左。

여러 만이(蠻夷)의 나라들은 이마에 무늬를 새기고 다리를 꼬아 앉고 머리를 풀고 몸에 문신을 하고, 승냥이와 이리와 같이 살고 사슴과 더불어 논다 하니, 어찌 또 관원과 서리를 두는 법을 알겠는가? 오직 고려는 그렇지 않아, 의관(衣冠)과 예의(禮儀)며 군신 상하에 찬연히 법도가 있어서 그렇게 서로 접(接)한다. 안으로 대(臺)ㆍ성(省)ㆍ원(院)ㆍ감(監)을 두고 밖으로 주(州)ㆍ부(府)ㆍ군(郡)ㆍ읍(邑)을 두어 직(職)을 나누고 관리를 뽑아 일을 맡기고, 위에서 그 강목(綱目)만을 들 뿐이고, 아래에 있는 자는 번다스럽고 어려운 일을 맡으니, 비록 나라의 일이라도 간략하고 이치에 닿아, 적을 치고 도적을 잡으려 백성을 부르면, 다만 편지(片紙) 몇 자면 백성이 모이는 기한을 어기지 않는다. 고로 중서 급사(中書給事)중추 당관(中樞堂官)으로부터 그 민장(民長)에 이르기까지 감히 태만할 수 없다. 그 나라의 관리(官吏)를 길에서 만나면 반드시 허리를 구부려 무릎 꿇고 절하고 공경을 한다. 언사(言事)가 있으면 무릎걸음으로 구부리고 나아가서 손을 위로 하고 얼굴을 낮추어 듣고 이를 받드니, 오랫동안의 중국의 영향이 없으면 능히 이렇게 될 수 있겠는가? 이제 이직(吏職)으로부터 구사(驅使)에 이르기까지 아울러 아래에 그림을 벌여 그린다.

 

 

 

-[吏職] 이직

吏職之服。與庶官服色不異。但綠衣時有深淺。舊傳高麗。放唐制衣碧。今詢之。非也。蓋其國。民貧俗儉。一袍之費。動準白金一斤。每經澣濯。再染色。深如碧。非是別一等服也。然省府補吏。不限流品。貴家之子弟。時亦爲之。今此靑服。當是吏之世襲者耳。

서리(胥吏)의 복색은 서관(庶官)의 복색과 다를 바가 없다. 다만 녹의(綠衣)에 때로 진하고 엷은 것이 있다. 예로부터 전하는 말에는, ‘고려는 당(唐)의 제도를 모방하여 푸른[碧] 옷을 입는다.’ 하나, 이제 물어 보니 틀린다.

그게 대개 그 나라는 백성이 가난하고 그 풍속이 검약하여 도포[袍] 하나의 값이 거의 은[白金] 한 근(斤)이나 되매, 항상 빨아서 다시 물들이니 색이 진하여 푸른 것 같을 뿐이요, 한 복색이 아니라 한다. 그러나 성부(省府)의 보리(補吏)는 유품(流品)에 한하지 않고 귀가(貴家)의 자제도 때로는 그렇게 한다. 지금 이 청복(靑服)은 곧 서리(胥吏)의 세습하는 자만이 입는다.

[주D-001]녹의(綠衣) : 송(宋) 나라의 포가 아니고, 고려의 백저포(白紵袍)가 아닌가 한다. 이 경우는 띠를 띠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녹백은 송에서 전래된 왕복(王服) 중에 이것이 보이니, 이는 중국제이고 백저포(白紵袍)의 띠는 고구려 이래 인습해 온 국속의 띠였을 것이다. 녹백의 경우는 앞이 넓고 뒤는 없는 장식용 띠로, 양 옆구리에서 3분의 1 정도의 끈을 달아 매게 되어 있으니, 이 유물이 일본 정창원(正倉院)에 남아 있다.

 

 

 

-[散員] 산원

散員之服。紫羅窄衣。幞頭革履。如中華班直,殿侍之類也。武臣子弟。兵衛出職。皆補之。每人使至。則捧,授爵,執衣,侍巾。皆用之。

산원의 복장은 자색 깁의 소매 좁은 옷[紫羅窄衣]을 입고 복두에 가죽신을 신는데, 중국의 반직(班直)이나 전시(殿侍) 따위와 같은 것이다. 무신(武臣)의 자제로서 병위(兵衛)의 역을 지고 있는 자로 이를 보한다. 중국 사신이 이를 때마다 소반을 받들고 술잔을 들이며 옷을 들고 수건을 받드는 데 다 이들을 쓴다.

[주D-001]자색……좁은 옷[紫羅窄衣] : 원래 자색(紫色)은 고귀한 색이라 하여 하급 관원은 입을 수 없게 되어 있으나, 《고려사》 여복지(輿服志)에 보면 시위하는 군사도 이 자색의 옷을 입는 경우가 있다.

 

 

 

-[人吏] 인리

人吏之稱。非比省府之職也。蓋倉庫司屬州縣。出納金穀布帛之流。皁衣幞頭。烏革句履。時於街市稠人中見之。或云趨官府。則間有易色衣者。

인리의 일컬음은 성부(省府)의 직에 비할 바 아니다. 대개 창고사(倉庫司)는 주현(州縣)에 속하여 금곡(金穀 돈과 곡식)이나 포백(布帛) 같은 것을 출납(出納)하는 자로서 검은 옷[皁衣]에 복두를 쓰고 검은 가죽으로 만든 구리(句履 길고 네모난 신)를 신는다. 때로는 시가(市街)의 많은 사람이 있는 데서 이를 볼 수 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관부(官府)에 들어갈 때는 간혹 색의(色衣)로 갈아입는 자가 있다고 한다.

 

 

 

-[丁吏] 정리

丁吏。蓋丁壯之人。初置吏者也。舊說轉爲頂禮。蓋是語音訛謬。自此升補爲吏。由吏而後授官。自令官而下。各給丁吏。以備使令。視官品。而爲多寡之差。其常執事。則文羅頭巾。人使至。則加幘。每貴臣。從者一二人。唯伴官屈使從者。與使副所給。一等服飾耳。

정리는 정장(丁壯)한 사람을 처음으로 서리(胥吏)에 둔 자들이다. 옛 설에 의하면 전(轉)하여 ‘정례(頂禮)’라 하였다는데, 대개 이것은 어음(語音)이 잘못된 것이다. 이로부터 뽑아 올려 서리로 삼고, 이 서리를 거친 뒤에 관직을 준다. 높은 관으로부터는 각각 정리(丁吏)를 주어 심부름을 시키는데, 관품(官品)에 따라 많고 적은 차이를 두었다. 그들이 보통 일을 볼 때는 문라(文羅)의 두건을 쓰되, 중국 사신이 오면 여기에 책(幘)을 보태어 쓴다. 높은 신하마다 따르는 자가 한두 명이니, 다만 반관(伴官)이나 굴사(屈使)에 시중드는 자나 정사(正使)나 부사(副使)에 내리는 자나 같은 복색을 하고 있다.

 

 

 

-[房子] 방자

房子。使館之給役者也。每房。自使副而下。以官品高下。而爲之多寡。其服。文羅頭巾。紫衣,角帶,皁屨。蓋擇善供應者爲之。觀其守法謹甚。又善筆札。高麗俸祿。至薄。唯給生米,蔬茹而已。常時。亦罕食肉。每人使至。正當大暑。飮食臭惡。必推其餘與之。飮啗自如。而又以其餘。歸遺于家。至禮畢出館。泣數行下。大抵麗人之於中國。其情加厚。故雖房子。亦懷惓惓焉。

방자는 사관(使館)에서 심부름을 하는 자들이다. 각방에 사신과 부사로부터 관의 높낮음에 따라 많고 적고의 차이가 있다. 그 복색은 문라(文羅)의 두건에 자색 옷[紫衣]에 각대(角帶)와 검정신[皁履]을 신는데, 응대를 잘하는 자만을 선택하여 방자를 삼는다. 그 몸가짐을 보니 매우 근신하게 법을 지키고 또 붓글씨를 잘 쓴다. 고려의 봉록(俸祿)이 지극히 박해서 다만 생쌀과 채소를 줄 뿐이며 또 평상시에 고기를 먹는 일이 드물어서, 중국 사신이 올 때는 바로 대서(大暑)의 계절이라 음식이 상해서 냄새가 지독한데, 먹다 남은 것을 주면 아무렇지 않게 먹어 버리고 반드시 그 나머지를 집으로 가져간다. 접대례를 마치고 관(館)을 물러날 때에는 몇 줄기 눈물이 흘러내리니, 대개 고려 사람은 중국에 대하여 그 정이 더욱 두텁기 때문에 방자라도 그렇게 떨어지기 섭섭해 한다.

[주D-001]각대(角帶) : 여기서 각대(角帶)라 하면, 수우각(水牛角)이나 우각(牛角) 등이 아니었을까 하거니와, 고증할 수는 없다.

 

 

 

-[小親侍] 소친시

小親侍。紫衣頭巾。復被其髮。蓋宮幃中所使小僮也。王之貴戚與從臣。時亦給之。麗人。大率未娶者。皆褁편001巾而被髮于後。旣娶而後。束髮。其爲小親侍。皆纔十餘歲。稍長。則出宮焉。

[편-001]褁 : 裹

 

소친시는 자색 옷[紫衣]에 두건을 쓰고, 또 머리를 아래로 내려뜨렸는데, 대개 궁중에서 부리는 아이들이다. 왕의 귀척(貴戚)이나 종신(從臣)에게도 때로 내려 준다. 고려 사람이 대개 아직 장가들지 않은 자는 다 건[巾]으로 머리를 싸고 뒤로 머리를 내려뜨리다가 장가든 뒤에 속발(束髮 머리를 묶고 한 가닥을 내려뜨리는 것)을 하는데, 소친시는 다 겨우 여남은 살이기 때문에, 조금 자라면 궁을 나간다 한다.

[주D-001]조금……나간다 : 조선에 있어서도, 왕자(王子)라도 10세가 되면 궁중을 나가 따로 궁을 마련한다. 궁을 나가기 전 왕자와 같이 노는 반동을 궁밖에서 들여오는 경우가 있었다.

 

 

 

-[驅使] 구사

驅使。與仙郞相類。大抵皆未娶之人。在貴家子弟。則稱仙郞。故其衣。或紗或羅。皆皁也。又有一等縿袖烏巾。卽庶官小吏之奴。名驅使者也。

구사란 선랑(仙郞)과 비슷한데, 대저 다 아직 장가들지 않은 자들이다. 귀한 집에 있는 자제들은 이를 ‘선랑(仙郞)’이라 한다. 그러므로 그 옷은 사(紗)나 나(羅)인데, 모두 검정색[皁]이다. 또 같은 것이 있는데 삼수(縿袖 소매의 중도막에서 다른 천을 대어 만든 넓은 소맷부리)가 달린 옷을 입고 검은 건을 썼으니, 곧 서관(庶官)이나 소리(小吏)의 노자(奴子)인데 이름하여 구사(驅使)라 한다.

 

 

 

宣和奉使高麗圖經卷第二十二

雜俗[一]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22 권

잡속 1

 

 

 

 

-[雜俗] 잡속

臣聞王制。曰廣谷大川異制。民生其閒異俗。夫所謂廣谷大川。固未必遐方絶域。蓋特其中國之地。川俗或殊。則習俗各異。有不可得而同者。又況蠻夷之限在海外。其習俗。豈一端哉。高麗於諸夷中。號爲文物禮義之邦。其飮食用俎豆。文字合楷隷。授受拜跪。恭肅謹愿。有足尙者。然其實汚僻。澆薄厖雜。夷風終未可革也。冠昏喪祭。鮮克由禮。若男子巾幘。雖稍放唐制。而婦人鬌髻下垂。尙宛然髽首辮髮之態。貴人仕族昏嫁。略用聘幣。至民庶。唯以酒米。通好而已。又富家。娶妻至三四人。小不相合。輒離去。產子居別室。其疾病。雖至親。不視藥。至死。殮不拊棺。雖王與貴胄。亦然。若貧人。無葬具。則露置中野。不封不植。委螻蟻烏鳶食之。衆不以爲非。淫祀諂祭。好浮圖。宗廟之祠。參以桑門歌唄。其閒。加以言語不通。貪饕行賂。行喜奔走。立則多拱手于背。婦人僧尼。皆作男子拜。此其大可駭者。至於瑣碎不經。又未易以一二數。今姑摠其耳目所見者圖之。倂以土產資養之物。附于後。

왕제(王制)에 넓은 들과 큰 내[大川]로도 제도(制度)를 달리하고, 백성이 그 사이에 생활하여 풍속을 달리한다 하였으니, 그 이른바 넓은 들과 큰 내는 애초부터 반드시 먼 지방이나 절원한 지역이 아닐 것이다. 특히 중국의 땅이라도, 내[川]의 풍속이 혹 다르면, 습속이 각기 달라서 다 같을 수는 없는 것인데, 하물며 만이(蠻夷)의 한계가 바다 밖에 있으니, 그 풍속이 한 가지일 수 있겠는가? 고려는 여러 이적(夷狄)의 나라 가운데서 문물(文物)과 예의(禮義)를 갖춘 나라라 일컫고 있다. 그 음식은 조두(俎豆)를 사용하고 문자는 해서(楷書)와 예서(隸書)에 맞춰 쓰고, 서로 주고받는 데 절하고 무릎을 꿇으니 공경하고 삼가는 것이 족히 숭상할 만한 것이 있다. 그러나 그 실제로는 궁벽한 곳이어서 풍속이 박잡하여 오랑캐 풍속을 끝내 다 고치지 못했다. 관혼상제(冠婚喪祭)는 예(禮)에 말미암은 것이 적고, 남자의 건책(巾幘)은 조금 당제(唐制)를 본받고 있으나 부인의 땋은 머리를 아래로 내려뜨리는 것은 아직 완연히 좌수(髽首) 변발(辮髮)의 모습이 있고, 귀인이나 선비 집안에서는 혼가(婚嫁)에 대략 빙폐(聘幣)를 쓰나 백성에 이르러서는 다만 술이나 쌀을 서로 보낼 뿐이다. 또 부가(富家)에서는 아내를 3~4인이나 맞이하되 조금만 맞지 않아도 바로 이혼하고, 아들을 낳으면 딴 방에 거처하고, 병을 앓을 때는 비록 가까운 가족이라도 약을 들이지 않으며, 죽어 염(殮)할 때 관에 넣지 않는다. 비록 왕이나 귀족에 있어서도 그러니, 만약 가난한 사람이 장사지내는 기구가 없으면 들 가운데 버려 두어 봉분도 만들지 않고 나무도 심지 않으며 개미나 까마귀나 솔개가 파먹는 대로 놓아두되, 다 이를 그르다고 하지 않는다. 제사 지내기를 좋아하고 부도(浮圖 부처)를 좋아하며, 종묘(宗廟)의 사당에도 중을 참여시켜 범패(梵唄)를 하나 그 말이 통하지 않는다. 욕심이 많고 회뢰(賄賂)가 성행하며, 길을 다닐제 달리기를 좋아하고 섰을 적에는 허리 뒤에 손을 얹는 자가 많으며, 부인이나 승니(僧尼)가 다 남자의 절을 하니, 이런 것들은 가히 해괴(駭怪)한 것들이다. 자질구레한 것의 도리에 맞지 않은 것을 들려면 한두 가지가 아니로되, 지금 잠깐 귀로 듣고 눈으로 본 바를 모아 그림으로 그리고 아울러 토산(土産)과 자양(資養)의 물건을 아래에 붙인다.

[주D-001]관혼상제(冠婚喪祭) : 관례와 혼례와 상례와 제례를 말한다. 이 제도가 완전히 시행된 것은 조선 태종 때,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의하여 신칙(申飭)함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주D-002]솔개가……놓아두되 : 이는 육체와 정신의 분리를 내세우는 불교의 영혼관에서 말미암은 일종의 장례법으로, 일본에서도 1세기 전에는 개천에 시신을 유기하고 신주만 모셔다가 절에 봉안하였다.

 

 

 

-[庭燎] 정료

麗俗尙夜飮。而祗待使人尤謹。每宴罷。常侵夜分。自山島州郡郊亭館舍。皆於庭中。以束芟明燎。以散員執之。使者歸館。則羅列在前。相比而行。

고려의 풍속이 밤에 술마시는 것을 좋아하며, 더욱이 사신 접대하기를 더욱 정성스럽게 한다. 항상 잔치가 파하면 한밤중을 넘어 산이나 섬, 그리고 주(州)ㆍ군(郡)의 교외(郊外)와 정(亭)ㆍ관(館)ㆍ사(舍)에는 모두 뜰 가운데 홰를 묶어 불을 밝히고, 산원(散員)들이 이 홰를 잡고 사신이 숙관(宿館)에 돌아갈 때면 앞에 벌여서서 서로 나란히 간다.

 

 

 

-[秉燭] 병촉

王府公會。舊不然燭。比稍稍能造。大者如椽。小者。亦長及二尺。然而終不甚明快。會慶乾德之燕。廷中設紅紗燭籠。用綠衣人搢笏執之。問之。云是新入仕之人。舊記。謂初登第者。今知未必皆一等流品也。

왕부(王府)의 공회(公會)에 옛날에는 촛불을 쓰지 못하였으나, 요즈음은 차차 잘 만들어 큰 것은 서까래와 같고 작은 것도 길이가 2척에 이르나 끝내 시원히 밝지는 못하다. 회경(會慶)이나 건덕(乾德)에서 잔치를 할 때는 뜰 가운데 홍사(紅紗)의 초롱[燭籠]을 마련하고 녹색(綠色)의 옷을 입은 이가 띠와 홀(笏)을 잡고 있다. 이를 물어보니 말하기를, ‘새로 입사(入仕)한 사람이라.’ 한다. 옛 기록에 이르기를, ‘새로 급제한 사람이라.’ 하였으나 이제야 다 같은 유품(流品)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주D-001]유품(流品) : 1~18자급 내에 드는 품관. 여기서는 같은 부류가 아니라는 뜻으로 쓰였다.

 

 

 

-[挈壺] 설호

挈壺之職。名實近古。逐刻以擊鼔爲節。中廷立表。以揭牌。每時正。則一紫衣吏。捧牌立于左。一綠衣人。致躬報曰。某時然後。搢笏詣表。易牌而退。

설호의 직은 그 명칭과 구실이 옛날과 비슷하다. 이들은 시각(時刻)을 따라 북을 치는 것으로 시각을 알리는데 중정(中廷)에 기둥을 세우고서 패를 건다. 매시 정각에 자색 옷[紫衣]을 입은 자가 시각 패를 받들고 왼편에 서고, 녹의(綠衣)를 입은 자가 몸을 구부려 ‘···시’라고 알린 뒤에 기둥으로 가서 패를 바꿔 놓고 물러간다.

 

 

 

-[鄕飮] 향음

麗俗。重酒醴。公會。唯王府與國官。有床卓盤饌。餘官吏士民。唯坐榻而已。東漢豫章太守陳蕃。特爲徐稚設一榻。則知前古。亦有此禮。今麗人。於榻上。復加小俎。器皿用銅。鱐腊魚菜。雖雜然前進。而不豐腆。酒行亦無節。以多爲勤。每榻只可容二人。若會賓客多。則隨數增榻。各相向而坐。國中少麥。皆賈人販自京東道來。故麵價頗貴。非盛禮不用。在食品中。亦有禁絶者。此尤可哂也。

고려의 풍속이 술과 단술을 중히 여긴다. 공회(公會) 때에는 다만 왕부(王府)와 국관(國官)에만 상탁(床卓)과 반찬(盤饌)이 있을 뿐, 그 나머지 관리와 사민은 다만 좌탑(坐榻)에 앉을 뿐이다. 동한(東漢)에서는 예장태수(豫章太守) 진번(陳蕃)이 서치(徐稚)를 위하여 한 탑(榻)을 마련하였을 뿐인즉 전고(前古)에도 이 예법(禮法)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 고려인은 탑 위에 또 소조(小俎 작은 소반)를 놓고, 그릇에는 구리[銅]를 쓰고 숙석(鱐腊)과 어채(魚菜)를 섞어서 내오되 풍성하지 않고, 또 주행(酒行 순배(巡杯))에도 절도가 없으며 많이 내오는 것을 힘쓸 뿐이다. 탑마다 다만 두 손[客]이 앉을 뿐이니, 만약 빈객이 많이 모이면 그 수에 따라 탑을 늘려 각기 서로 마주 앉는다. 나라 안에는 밀이 적어 다 상인들이 경동도(京東道)로부터 사오므로 면(麵)값이 대단히 비싸서 큰 잔치가 아니면 쓰지 않는다. 식품 가운데도 나라에서 금하는 것이 있으니, 이 또한 웃을 만한 일이다.

[주D-001]좌탑(坐榻) : 이는 평상으로 고구려의 벽화에도 이미 보이는 바다. 이 평상은 침상(寢床)도 되니, 온돌이 적던 때는 판방(板房)에 이 평상을 놓고 방장(房帳)이나 병풍을 치고 살았다. 고려 시대에는 주로 관청에서 이용하였는데, 직무 중 일이 없을 때에는 그 위에 돗자리를 깔고 잠시 쉬기도 하였다.

[주D-002]경동도(京東道) : 송대(宋代)의 변경(?京)으로부터 산동성(山東省)ㆍ하남성(河南省)까지의 전역을 가리킨 것이다.

 

 

 

-[治事] 치사

麗政尙簡。訟牒略而不文。官府治事。坐不據桉。但登榻指呼而已。吏捧桉牘。跪陳于前。上手聽奉。卽時批決。了無稽留。已事則棄之。不設架閣。唯國朝詔命,信使書。則王府有庫。寶藏以爲備檢之具。其饋食奉盥。則俯首膝行。高拱手而奉之。威儀甚恭。夫夷狄而能然。是可嘉也。

고려의 정사(政事)가 간편한 것을 숭상하므로 소송의 문서 같은 것은 간략하게 하여 글로 기록하지 않는다. 관부에서 일을 다스릴 적에도 앉아서 책상에 의지하지 않고, 다만 걸상에 앉아서 지휘할 따름이다. 아전이 안독(案牘)을 받들어 무릎꿇고 앞에서 아뢰면, 웃사람은 듣고 즉시 비결(批決)하되, 뒤에 상고하기 위하여 남겨 놓는 일이 없고 일이 끝나면 버리고 문서창고를 마련하지 않는다. 다만 중국의 조명(詔命)이나 신사(信使)의 글은 왕부의 창고에 잘 간수하여 비검(備檢 상고를 위한 검사) 거리로 삼는다. 음식을 공궤하고 세숫물을 받들 적에는 머리를 숙이고 무릎걸음으로 가며 높이 손을 받들어 이를 바치니, 그 위의가 매우 공손하다. 이적(夷狄)으로 능히 그러니 가상한 일이다.

[주D-001]안독(案牘) : 공문서. 한 건의 서류를 말한다.

[주D-002]비결(批決) : 관부의 판결문. 조선의 경우는 공문서 끝에 판결문을 쓰고, 해당관이 수결(手決)을 하게 되어 있으니, 고려도 이러한 절차를 밟았을 것이다. 《고려도경》은 견문기이므로 실정을 모르고 기록한 대목도 많을 것이다.

 

 

 

-[答禮] 답례

麗俗。官吏兵卒。分守雖嚴。而起居之禮。間有不事邊幅。凡國相從官。與其所轄往來相値。必肅容起立。餘官無統轄者。吏卒久不相見。雖通衢宮廷中。必拜之。而在官者。亦俛而後興。如答拜。蓋禮人不答。返其欽。禮失則求諸野。略可見矣。

고려의 풍속은 관리(官吏)나 병졸이 기율이 엄하기는 하나 평소에는 자질구레한 예를 일삼지 않는 것 같다. 무릇 국상(國相)이나 종관(從官)도 자기 소속이 왕래하다가 서로 만나면, 반드시 얼굴을 가다듬고 기립한다. 통할이 없는 나머지 관원이나 이졸(吏卒)들이 오래 서로 보지 못했으면 비록 네 거리나 궁정에서라도 반드시 배례를 하는데 관(官)에 있는 자도 역시 구부렸다가 펴서 답배(答拜)하는 시늉을 한다. 대저 남에게 예하되 답하지 않으면 공경했는가를 반성해 보라. 예를 잃으면 이를 야(野)에서 구하라 하였으니, 대략 여기에서 볼 수 있다.

 

 

 

-[給使] 급사

給使之賤。視官品而爲多寡之數。國相。丁吏四人。驅使三十人。令官倍之。前有靑蓋。持之在數十步外。乘馬。許二人控馭。自是而降。前不張蓋。控馬不許用二人。民庶乘馬。唯自執鞭馭而已。丁吏多前驅。給使。執巾甁。從物後隨。列卿而上。丁吏三人。驅使二十人。正郞。丁吏二人。驅使十五人。員郞以上。丁吏一人。驅使十人。初品。共給三人。皆官奴隷也。世代相承爲之。

급사(給使) 같은 천인도 관품에 따라 많고 적음의 숫자가 다르다. 국상(國相)에는 정리(丁吏)가 4인이요, 구사(驅使)가 30인이요, 영관(令官)은 이의 배이다. 앞에는 청개(靑蓋)가 있는데 이를 가지고 수십 보 밖에 있다. 승마(乘馬)에는 두 사람으로 고삐를 잡게 한다.

국상 이하는 그 수가 줄며, 앞에 청개를 베풀지 아니하고, 말을 타되 두 사람으로 고삐 잡히지 못한다.

백성은 말을 타되 오직 자기 스스로 고삐를 잡을 뿐이다.

정리는 대개 전구가 되고 급사는 수건이나 병에 딸린 물건을 가지고 뒤에 따른다. 열경(列卿) 이상은 정리가 3인, 구사가 20인이요, 정랑(正郞)은 정리가 2인, 구사가 15인이요, 원랑(員郞) 이상은 정리가 1인, 구사가 10인이요, 초품(初品)은 같이 3인을 내리되 다 관노예(官奴隸)이며 대대로 물려받는다.

[주D-001]열경(列卿) : 대개 정3품 이상의 벼슬을 말한다.

[주D-002]원랑(員郞) : 대개 정5품 벼슬인 낭중(郞中)과 정6품의 원외랑(員外郞)을 말한다.

 

 

 

-[女騎] 여기

婦人出入。亦給僕馬。蓋亦公卿貴人之妻也。從馭不過三數人。皁羅蒙首。餘被馬上。復加笠焉。王妃夫人。唯以紅爲飾。亦無車輿也。昔唐武德,正觀中。宮人騎馬。多著冪籬편001。而全身蔽障。今觀麗俗蒙首之制。豈冪籬편002之遺法歟。

[편-001]籬 : 䍦

[편-002]籬 : 䍦

 

부인의 출입에도 역시 말과 노복과 청개(靑蓋)를 공급하는데, 이는 공경(公卿)이나 귀인의 처이고 따르는 종자가 3인에 지나지 않는다. 검은 깁으로 너울을 만들어 쓰는데 끝이 말 위를 덮으며, 또 갓을 쓴다. 왕비(王妃)와 부인(夫人)은 다만 다홍으로 장식을 하되 거여(車輿)는 없다. 옛 당(唐) 나라 무덕(武德 618~626)ㆍ정관(正觀 ‘正觀’은 ‘貞觀’의 오기 627~649) 연간에 궁인이 대개 말을 타고 너울을 하고 전신을 가렸다고 하는데, 지금 고려의 풍속을 보니 너울의 제도가 아마 당 나라 때 멱리(冪籬)의 유법이 아니었겠는가?

 

 

 

宣和奉使高麗圖經卷第二十三

雜俗[二]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23 권

잡속 2

 

 

 

-[澣濯] 한탁

舊史。載高麗。其俗皆潔淨。至今猶然。每笑中國人多垢膩。故晨起。必先沐浴而後出戶。夏月日再浴。多在溪流中。男女無別。悉委衣冠於岸。而沿流褻露。不以爲怪。浣濯衣服。湅涗絲麻。皆婦女從事。雖晝夜服勤。不敢告勞。鑿井汲水。多近川爲之。上作鹿盧。輸水於槽。槽形。頗如舟云。

옛 사서에 고려를 실었는데 그 풍속이 다 깨끗하다 하더니, 지금도 그러하다. 그들은 매양 중국인의 때가 많은 것을 비웃는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목욕을 하고 문을 나서며, 여름에는 날마다 두 번씩 목욕을 하는데 시내 가운데서 많이 한다. 남자 여자 분별없이 의관을 언덕에 놓고 물구비 따라 몸을 벌거벗되, 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의복을 빨고 깁이나 베를 표백하는 것은 다 부녀자의 일이어서 밤낮으로 일해도 어렵다고 하지 않는다. 우물을 파고 물을 긷는 것도 대개 내에 가까운 데서 하니, 위에 두레박[鹿盧]을 걸어 함지박으로 물을 긷는데, 그 함지박의 모양이 배의 모양과 거의 같다.

 

 

 

-[種蓺] 종예

國封地瀕東海。多大山深谷。崎嶇崒。而少平地。故治田。多於山閒。因其高下。耕墾甚力。遠望如梯磴然。其俗。不敢有私田。略如丘井之制。隨官吏民兵秩序高下而授之。國母,王妃,世子,王女而下。皆有湯沐田。每一百五十步爲一結。民年八歲。投狀射田。結數有差。而國官以下。兵吏,驅使,進士,工技。無事則服田。唯戍邊。則給米。其地宜黃粱,黑黍,寒粟,胡麻,二麥。其米有秔而無稬。粒持편001大而味甘。牛工農具。大同小異。略而不載。

[편-001]持 : 特

나라의 강토가 동해에 닿아 있고 큰 산과 깊은 골이 많아 험준하고 평지가 적기 때문에 농토가 산간에 많이 있는데, 그 지형의 높고 낮음에 따랐으므로 갈고 일구기가 매우 힘들며 멀리서 바라다보면 사다리나 층층계와도 같다. 그 나라 풍속이 감히 사전(私田)을 가질 수 없고, 대략 구정(丘井)의 제도 같은 것이 있는데 관리(官吏)나 민병(民兵)에게 등급[秩序]의 높낮음에 따라 나라에서 내려 준다. 국모(國母)ㆍ왕비(王妃)ㆍ세자(世子)ㆍ왕녀(王女)에게는 다 탕목전(湯沐田)이 있는데, 1백 50보(步)를 1결(結)이라 한다. 백성이 8세가 되면 관에 문서를 내어 전(田)을 분배받되 결수에 차이가 있고 국관(國官) 이하 병리(兵吏)ㆍ구사(驅使)ㆍ진사(進士)ㆍ공기(工技)에 이르기까지 일이 없으면 밭[田]에 일하게 하고, 변방의 수자리에는 쌀을 대어준다. 그 땅에 황량(黃粱)ㆍ흑서(黑黍)ㆍ한속(寒粟)ㆍ참깨[胡麻]ㆍ보리ㆍ밀 등이 있고, 그 쌀은 멥쌀이 있으나 찹쌀은 없고, 쌀알이 특히 크고 맛이 달다. 소 쟁기나 농구는 중국과 대동소이하므로 생략하고 싣지 않는다.

[주D-001]사전(私田)을……없고 : 고려의 토지제도는 관념적으로 국유제(國有制)였고, 당(唐)의 균전제(均田制)를 본떠 과전(科田)을 근간으로 삼았다. 그러므로 개인은 국가로부터 토지를 나누어 받아 그 토지에 대하여 조용조(租庸調)를 부담했다. 과거에는 토지의 개인 소유를 인정하지 않는 토지국유제가 통설이었으나 지금은 고대부터 토지 사유제가 시행되었음을 인정하는 추세이다. 그 수조권이 국가ㆍ관청에 있느냐 개인에게 있느냐에 따라 공전(公田)과 사전(私田)으로 구별되었으며, 국가가 실제로 모든 토지의 소유권을 장악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수취를 위한 관념적 의제(擬制)였던 것으로 보고 있다.

[주D-002]탕목전(湯沐田) : 공해(公廨) 전시과(田柴科)에 내장전(內庄田)과 궁원전(宮院田)이 있었으니, 이 궁원전은 궁(宮)과 원(院), 즉 왕비ㆍ왕자ㆍ공주ㆍ옹주 등에게 목욕하고 재계하는데 쓰라는 명목으로 지급되는 전지(田地)이다. 《高麗史 卷29 忠烈王條》

 

 

 

-[漁] 어

國俗有羊豕。非王公貴人。不食。細民。多食海品。故有鰌,鰒,蚌,珠母,蝦王,文蛤,紫蟹,蠣房,龜脚。以至海藻,昆布。貴賤通嗜。多勝食氣。然而臭腥味鹹。久亦可猒也。海人。每至潮落。矴舟島嶼而捕魚。然不善結網。但以疏布漉之。用力多。而見功寡。唯蠣蛤之屬。潮落不能去。人掇拾盡力。取之不竭也。

고려 풍속에 양과 돼지가 있지만 왕공이나 귀인이 아니면 먹지 못하며, 가난한 백성은 해산물을 많이 먹는다. 미꾸라지[鰌]ㆍ전복[鰒]ㆍ조개[蚌]ㆍ진주조개[珠母]ㆍ왕새우[蝦王]ㆍ문합(文蛤)ㆍ붉은게[紫蟹]ㆍ굴[蠣房]ㆍ거북이다리[龜脚]ㆍ해조(海藻)ㆍ다시마[昆布]는 귀천 없이 잘 먹는데, 구미는 돋구어 주나 냄새가 나고 비리고 맛이 짜 오래 먹으면 싫어진다. 고기잡이는 썰물이 질 때에 배를 섬에 대고 고기를 잡되, 그물은 잘 만들지 못하여 다만 성긴 천으로 고기를 거르므로 힘을 쓰기는 하나 성과를 거두는 것은 적다. 다만 굴과 대합들은 조수가 빠져도 나가지 못하므로, 사람이 줍되 힘을 다하여 이를 주워도 없어지지 않는다.

 

 

 

-[樵] 초

樵人。初無專業。惟事隙。則隨少長之力。於城外山取之。蓋旁城之山。於陰陽有忌。不許采斫。故其中多巨木合抱。青蔭可愛。使者舍於館。以至登舟。皆有司供給。以備炊煮。不善用肩。惟以背負而行。

나무꾼은 원래 전담하는 업이 없고 다만 일의 틈이 있으면 소년이나 장년이 힘에 따라 성밖의 산에 나가 나무를 한다. 대개 성 부근의 산은 음양설에 의해 사위가 있다 하여 나무하는 것을 허용하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그 가운데에는 아름드리 큰 나무가 많아 푸른 그늘이 사랑할 만하다. 사신이 관에 머물러 있는 동안이나 배에 오르더라도 다 공급을 맡은 자가 있어 때고 끓이는 나무를 대어주는데, 어깨에 메는 것은 잘하지 못하고 등에 지고 다닌다.

[주D-001]성 부근의……아니한다 : 성 밑 10리에는 원래 나무를 베거나 묘지를 쓰지 못한다.

 

 

 

-[刻記] 각기

麗俗。無籌算。官吏出納金帛。計吏以片木。持刃而刻之。每記一物。則刻一痕。已事。則棄而不用。不復留以待稽考。其政甚簡。亦古結繩之遺意也。

고려의 풍속에 주산(籌算)이 없어 관리가 돈이나 천을 출납할 때, 회계리는 조각나무에 칼을 가지고 이를 그으니, 한 물건을 기록할 때마다 한 자국을 긋고 일이 끝나면 내버리고 쓰지 않으며, 다시 두었다가 계고(稽考)를 기다리지 아니한다. 그 정치가 매우 간단한 것은 또한 옛 결승(結縄)이 끼친 뜻인가 한다.

 

 

 

-[屠宰] 도재

夷政甚仁。好佛戒殺。故非國王相臣。不食羊豕。亦不善屠宰。唯使者至。則前期蓄之。及期將用。縛手足。投烈火中。候其命絶毛落。以水灌之。若復活。則以杖擊死。然後剖腹。腸胃盡斷。糞穢流注。雖作羹䏑。而臭惡不絶。其拙。有如此者。

고려는 정치가 심히 어질어 부처를 좋아하고 살생을 경계하기 때문에 국왕이나 상신(相臣)이 아니면, 양과 돼지의 고기를 먹지 못한다. 또한 도살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다만 사신이 이르면 미리 양과 돼지를 길렀다가 시기에 이르러 사용하는데, 이를 잡을 때는 네 발을 묶어 타는 불 속에 던져, 그 숨이 끊어지고 털이 없어지면 물로 씻는다. 만약 다시 살아나면, 몽둥이로 쳐서 죽인 뒤에 배를 갈라 내장을 베어내고, 똥과 더러운 것을 씻어낸다. 비록 국이나 구이를 만들더라도 고약한 냄새가 없어지지 아니하니, 그 서투름이 이와 같다.

 

 

 

-[施水] 시수

王城長廊。每十間。張帟幕設佛像。置大瓮。貯白米漿。復有杯杓之屬。恣往來之人飮之。無間貴賤。而以僧徒。主其事。

왕성(王城)의 장랑(長廊)에는 매 10칸[間]마다 장막을 치고 불상을 설치하고, 큰 독에 멀건 죽을 저장해 두고 다시 국자를 놓아 두어 왕래하는 사람이 마음대로 마시게 하되, 귀한 자나 천한 자를 가리지 않는다. 승도(僧徒)들이 이 일을 맡아 한다.

 

 

 

-[土產] 토산

高麗。依山瞰海。地瘠而磽。然而有稼穡之種。麻枲之利。牛羊蓄產之宜。海物惟錯之美。廣楊永三州。多大松。松有二種。惟五葉者。乃結實。羅州道。亦有之。不若三州之富。方其始生。謂之松房。狀如木瓜。靑潤緻密。至得霜乃拆。其實始成。而房乃作紫色。國俗。雖果肴羹胾。亦用之。不可多食。令人嘔吐不已。人參之榦。特生,在在有之。春州者。最良。亦有生孰二等。生者。色白而虛。入藥則味全。然而涉夏。則損蠹。不若經湯釜而孰者。可久留。舊傳形匾者。謂麗人。以石壓去汁作煎。今詢之。非也。乃參之孰者。積垜而致爾。其作煎當自有法也。館中。日供食菜。亦謂之沙參。形大而脆美。非藥中所宜用。又其地。宜松而有茯苓。山深而產流黃。羅州道。出白附子,黃漆。皆土貢也。其國。自種紵麻。人多衣布。絶品者。謂之絁。潔白如玉。而窘邊幅。王與貴臣。皆衣之。不善蠶桑。其絲綫織紝。皆仰賈人。自山東,閩浙來。頗善織文羅花綾,緊絲,錦,罽。邇來北虜降卒工技甚衆。故益奇巧。染色又勝於前日。地少金銀。而多銅。器用漆作。不甚工。而螺鈿之工。細密可貴。松煙墨。貴猛州者。然色昏而膠少。仍多沙石。黃毫筆。軟弱不可書。舊傳爲猩猩毛。未必然也。紙不全用楮。間以藤造。搥搗皆滑膩。高下數等。其果實。栗大如桃。甘美可愛。舊記謂夏月亦有之。嘗問其故。乃盛以陶器。埋土中。故經歲不損。六月。亦有含桃。味酸如酢。榛榧最多云。倭國者。亦有來禽,青李,瓜,桃,梨,棗。味薄而形小。至於蓮根花房。皆不敢擷。國人謂其爲佛足所乘云。

고려는 산을 의지하고 바다를 굽어보며 땅은 토박하고 돌이 많다. 그러나 곡식의 종류와 길삼의 이(利)와 우양(牛羊) 축산의 좋음과 여러 가지 해물의 아름다움이 있다. 광주(廣州)ㆍ양주(楊州)ㆍ영주(永州) 등 3주에는 큰 소나무가 많다. 소나무는 두 종류가 있는데, 다만 다섯 잎이 있는 것만이 열매를 맺는다. 나주도(羅州道지금의 전라도)에도 있으나, 삼주(三州)의 풍부함만 못하다. 열매가 처음 달리는 것을 솔방[松房]이라 하는데, 모양이 마치 모과[木瓜]와 같고 푸르고 윤기가 나고 단단하다가, 서리를 맞고서야 곧 갈라지고 그 열매가 비로소 여물며, 그 방(房)은 자주색을 이루게 된다. 고려의 풍속이 비록 과실과 안주와 국과 적에도 이것을 쓰지만 많이 먹어서는 안 되니, 사람으로 하여금 구토가 멎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인삼의 줄기는 한 줄기로 나는데 어느 지방이고 있으나 춘주(春州) 것이 가장 좋다. 또 생삼(生蔘)과 숙삼(熟蔘) 두 가지가 있는데 생삼은 빛이 희고 허(虛)하여 약에 넣으면 그 맛이 온전하나 여름을 지나면 좀이 먹으므로 쪄서 익혀 오래 둘 수 있는 것만 못하다. 예로부터 전하기를, 그 모양이 평평한 것은 고려 사람이 돌로 이를 눌러 즙을 짜내고 삶는 때문이라 하였지만, 이제 물으니 그것이 아니다. 찐 삼의 뿌리를 포개서 만들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고, 그 달이는 데에도 마땅한 법이 있다. 관에서 매일 내놓는 나물에 또한 더덕이 있으니, 그 모양이 크고 그 살이 부드럽고 맛이 있는데 약으로 쓰는 것이 아닌 것 같다.

또 그 땅에 솔이 잘 자라 복령(茯苓)이 나고, 산이 깊어서 유황(流黃)이 나며, 나주(羅州)에서는 백부자(白附子)ㆍ황칠(黃漆)이 나는데 모두 조공품[土貢]이다.

고려는 모시[紵]와 삼[麻]을 스스로 심어, 사람들이 베옷을 많이 입는다. 제일 좋은 것을 시(絁)라 하는데, 깨끗하고 희기가 옥과 같고 폭이 좁다. 그것은 왕과 귀신(貴臣)들이 다 입는다. 양잠(養蠶)에 서툴러 사선(絲綫)과 직임(織紝)은 다 상인을 통하여 산동(山東)이나 민절(閩浙) 지방으로부터 사들인다. 극히 좋은 문라화릉(文羅花綾)이나 긴사(緊絲 결이 곱고 얇은 비단)나 비단[錦]이나 모직물[罽]을 짜는데, 그동안 여진[北虜]의 항복한 졸개 중에 장인[工技]이 많았으므로 더욱 기교(奇巧)하고, 염색(染色)도 그 전보다 나아졌다.

땅에 금은(金銀)이 적고 구리가 많이 난다. 그릇에 옷[漆] 칠하는 일은 그리 잘하지 못하지만 나전(螺鈿)일은 세밀하여 귀하다고 할 만하다.

송연묵(松煙墨)은 맹주(猛州 평안북도 맹산(孟山)) 것을 귀히 여기나 색이 흐리고 아교가 적으며 모래가 많다.

황호필(黃毫筆 족제비의 털로 만든 붓)은 연약해서 쓸 수가 없다. 예부터 이르기를 성성(猩猩 원숭이의 일종)의 털이라고 하나 반드시 그렇지 않다.

종이는 전혀 닥나무만을 써서 만들지 않고 등나무를 간간히 섞어 만들되, 다듬이질을 하여 다 매끈하며, 좋고 낮은 것의 몇 등급이 있다.

그 과실 중에 크기가 복숭아만한 밤이 있으며 맛이 달고 좋다. 옛 기록에 이르기를 ‘여름에도 있다’는 것이다. 그 연고를 물으니 ‘질그릇에 담아서 흙 속에 묻으면 해를 넘겨도 상하지 않고 6월에 또 함도(含桃 앵두)가 있으나 맛이 시어 초와 같고, 개암[榛]과 비자(榧子)가 가장 많다’고 한다. 왜국(倭國)의 것도 있으며, 능금[來禽]ㆍ청리(靑李)ㆍ참외[瓜]ㆍ복숭아ㆍ배ㆍ대추 등은 맛이 적고 모양이 작으며, 연근(蓮根)과 화방(花房)은 다 감히 따지 않으니, 국인이 이르기를 ‘그것은 불족(佛足)이 탔던 것이기 때문’이라 한다.

[주D-001]솔방[松房] : 솔방울의 사음(寫音)인 듯하다.

[주D-002]민절(?浙) : 지금의 절강성(浙江省)과 복건성(福建省). 즉 중국의 남부 지방.

 

 

 

 

 

宣和奉使高麗圖經卷第二十四

節仗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24 권

절장

 

 

-[節仗] 절장

臣聞春秋之法。王人雖微。序在諸侯之上。蓋尊王命也。然當是時。周室紀綱圮壞。諸侯强大。有輕之之心。孔子託空言。以爲天下後世臣子法。尙諄諄如此。矧太平盛際。親遣王人。遠使外國。則彼之尊奉之禮。豈敢少懈哉。恭惟宋有天下。垂二百年。干戈浸偃。夷裔君長。不待詔告。而信順之誠。堅若金石。蓋自容成氏以來。未有太平如此之盛。宜乎。諸侯推尊王人。而禮文繁縟也。比年使命。每至麗國。聞其備竭儀物之華。兵衛之衆。以迓詔書。以導旄節。禮甚勤至。然是行也。適在王俁衣制未終。其鼔吹之類。皆執而不作。亦可謂知禮也已。

“《춘추(春秋)》의 법으로는 왕이 보낸 사람은 지위가 비록 보잘것없다 하더라도 그 서열은 제후(諸侯) 위에 있도록 되어 있다.” 하니 이것은 왕의 명령을 존중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그때에는 주실(周室)의 기강이 무너지고 제후가 강대해져서 왕을 경시하는 마음을 가져 공자(孔子)가 빈 말[空言]을 가지고 천하 후세의 신하로서 지켜야 할 법을 마련하였는데도 이토록 간곡하였다. 하물며 태평성세에 친히 왕의 사람을 파견하여 멀리 외국으로 사신을 보내시었다면, 그곳에서 받드는 예절을 어찌 감히 조금이라도 게을리하였겠는가? 생각건대, 송(宋)이 천하를 차지한 지는 2백 년이 되어 가고 전쟁은 점차로 그쳐, 이족(異族)의 군장(君長)들이 조서(詔書)로 일러줌을 기다리지 않고 믿고 순종하는 성의는 금석(金石)같이 굳으니, 대체로 용성씨(容成氏)의 시대 이래로 이토록 대단한 태평은 있어 본 적이 없었다. 제후들이 왕이 보낸 사람을 높이 추대하고 그 예문(禮文)이 번거로움은 당연한 일이다. 근년에 사신이 고려국에 갈 때마다 의장의 화려함과 호위하는 군사의 많음을 있는 대로 갖추어 조서를 맞이하고 모절(旄節)을 인도하고 하는 예의가 심히 근실하고 지성스러웠다고 한다. 그러나 이번의 행차는 마침 왕우(王俁)의 상기(喪期)가 끝나지 않아, 북과 피리 등속은 다 잡고만 있고 울리지 않았으니, 이 또한 예(禮)를 알고서 하는 일이라 말할 수 있겠다.

[주C-001]절장(節仗) : 사신 행차의 상ㆍ중ㆍ하 삼절(三節)의 계층에 따른 의장(儀仗). 여기서는 고려측의 각종 의장이 먼저 소상하게 다루어져 있다.

[주D-001]《춘추(春秋)》의……것이다 : 《춘추》는 공자가 편술한 것으로 전해지는 춘추 시대의 간략한 편년사(編年史)로, 대의명분을 밝힌 미언오지(微言奧旨)가 담기어 있다 하여 유가(儒家)에서는 중요한 경전의 하나로 받들었다. 여기서 왕이라고 한 것은 제후국에 대한 종주국으로서의 주(周) 나라 왕을 말한다.

[주D-002]송(宋)이……없었다 : 송 태조(宋太祖)가 제위(帝位)에 오른 것은 고려 광종(光宗) 11년(960)이므로 노윤적(路允迪) 일행이 고려에 사신으로 왔을 때까지는 송이 건국한 지 1백 60여 년밖에 안 되었다. ‘송이 천하를 차지하고’ 운운하였으나 송이 건국한 후 북에서는 요(遼)와 금(金)이 일어나 북방의 땅을 차지해 왔고, 서남에서는 서하(西夏)가 버티고 있어서 송은 중국 대륙 전체를 차지하지 못하고 이들 이족이 세운 국가의 압박을 받았다. 당시 송이 고려에 접근한 것은 북쪽의 금을 견제하려는 노력의 일단이었다. 용성씨(容成氏)는 전설상의 중국 제왕인 황제(黃帝)의 사관(史官)으로 알려져 있으나, 《장자》같은 도가서(道家書)에서는 한 시대를 태평하게 다스린 군왕으로 다루어지기도 한다.

 

 

 

-[初神旗隊] 첫째 신기대

神舟旣抵禮成港。下矴訖。麗人。具采舟。來迎使者。奉詔書登岸。三節步從。入碧瀾亭。奉安詔書訖。退休于所舍。明日質明。都轄提轄官。對捧詔書。入采輿。兵仗前導。諸仗之中。神旗爲先。自西郊亭。預建于館前。候詔書至。與餘仗相接。導衛入城。旗列十面。車載而行。每乘十餘人。自是之後。受詔拜表。則皆設於兵仗前也。青衣龍虎軍。鎧甲戈矛。幾及萬卒。分爲兩序。夾道而行。

신주(神舟)가 예성항(禮成港)에 도달하고 나서 닻을 내리는 일이 끝나면 고려인이 채색을 베푼 배를 가지고 와서 맞이한다. 사자(使者)가 조서를 받들고 상륙하면 삼절(三節)이 걸어서 따라가 벽란정(碧瀾亭)에 들어가서 조서를 봉안하는 일을 끝내고 물러가 묵는 곳에서 쉰다. 이튿날 새벽에 도할관(都轄官)과 제할관(提轄官)이 조서를 마주 받들고 채색 가마에 들어가면 군대의 의장이 앞에서 인도하는데 여러 의장 가운데서 신기가 먼저이고, 서교정(西郊亭)에서부터 미리 관전(館前)에 세웠다가 조서가 당도하는 것을 기다려서 나머지 의장들과 연접해 가지고 인도 호위하여 성으로 들어간다. 신기대의 기는 10면(面)이 늘어서서 수레에 실려서 가는데 수레마다 10여 인이 탄다. 이때부터는 조서를 받고 표문(表文)을 바치고 할 때는 다 신기대를 군대의 의장 앞에 설치한다. 청의용호군(靑衣龍虎軍)은 갑옷과 과모(戈矛)를 들었는데 거의 1만 군졸에 이르는 것이 두 갈래로 나누어서 길을 끼고 행진한다.

[주D-001]예성항(禮成港) : 예성강의 항구. 예성강은 개성 서부에 있는 강으로,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고려와 송의 왕래는 이 강을 이용하였다. 《東國輿地勝覽 卷4》

[주D-002]삼절(三節) : 정사ㆍ부사 이외의 관원들을 상ㆍ중ㆍ하 3절로 나눈다.

[주D-003]벽란정(碧瀾亭) : 벽란도(碧瀾渡예성강 위쪽에 있는 나루터)에 있는 정자. 여기서 40리를 가면 개경의 성안에 당도한다. 《東國輿地勝覽 卷4》

[주D-004]서교정(西郊亭) : 개성의 오정문(午正門) 밖에 있던 관사(館舍).

[주D-005]청의용호군(靑衣龍虎軍) : 청색 군복을 한 용호위(龍虎衛) 휘하의 군사를 말함. 용호위는 친위대 중의 한 부대.

 

 

 

-[次騎兵] 다음 기병

神旗之次。有錦衣龍虎親衛。旗頭一名。騎而前驅。執小紅旆。其次則領兵上將軍。其次則領軍郞將。皆騎兵也。持弓矢佩劍。飾馬之具。皆有鑾聲。馳驟甚亟。頗自矜耀。

신기 다음에는 금의용호친위(錦衣龍虎親衛)가 있다. 기두(旗頭) 한 명이 말을 타고 앞에서 달리는데 작은 붉은 기를 잡고 있다. 그 다음은 영병 상장군(領兵上將軍)이고, 그 다음은 영군 낭장(領軍郞將)인데 다 기병들이다. 활과 화살을 가졌고 칼을 찼으며, 말을 장식한 제구에서는 다 방울 소리가 나고 달려가는 것이 심히 빠르며 자못 보란 듯이 뽐낸다.

 

 

 

-[次鐃鼔] 다음 요고

騎兵之次。鳴笳之軍。次之。鐃鼔之軍。又次之。每百餘步。鳴笳軍。必却行。面詔輿而合吹。聲止。則擊鐃鼔。爲之節。

기병 다음에는 초금[笳] 부는 군사들이 오고, 징과 북을 치는 군사들이 또 그 다음에 온다. 1백여 보마다 초금 부는 군사들은 반드시 물러서서 조서 가마를 마주보면서 합주하는데 그 소리가 멎으면 징과 북을 쳐서 그 절주를 맞춘다.

 

 

 

-[次千牛衛] 다음 천우위

鼔角之次。卽有儀物。貫革鐙杖。千牛軍衛執之。相比而行。

북과 호각 다음에는 곧 의장물[儀物]이 있는데 관혁등장(貫革鐙杖)을 천우군위(千牛軍衛)가 잡고 같이 서서 행진한다.

[주C-001]천우위(千牛衛) : 친위대의 하나. ‘천우(千牛)’는 임금의 몸을 방위하는 검의 이름.

[주D-001]관혁등장(貫革鐙杖) : 의장의 한 가지. 금동으로 만든 등자를 긴 나무 자루에 자주색 끈으로 맨 것으로, ‘관혁’은 여기서는 나무자루를 가죽으로 쌌음을 말한다.

 

 

 

-[次金吾衛] 다음 금오위

千牛衛之後。金吾仗衛軍。次之。執黃幡,豹尾,儀戟,華蓋。差閒而行。

천우위 뒤에는 금오장위군(金吾仗衛軍)이 오는데, 황색 깃발과 표미(豹尾)ㆍ의극(儀戟) 및 화개(華蓋)를 잡고 약간씩 사이를 두고 행진한다.

[주D-001]금오장위군(金吾仗衛軍) : 친위대의 하나.

[주D-002]의극(儀戟) : 의장용의 날이 갈라진 창.

[주D-003]화개(華蓋) : 그림과 수를 놓아 꾸민 큰 일산을 장대 끝에 단 의장물.

 

 

 

-[次百戲] 다음 백희

金吾仗衛之後。百?小兒。次之。服飾之類。略同華風。

금오장위 뒤에는 백희 소아(百戲小兒)가 오는데 복식의 종류는 대략 중국 풍습과 같다.

[주D-001]백희 소아(百戲小兒) : 백희를 상연하는 소아대. 백희는 각종 곡예 놀이.

 

 

 

-[次樂部] 다음 악부

歌工樂色。亦有三等之服。而所持之器。閒有小異。其行。在小兒隊之後。比使者至彼。會俁衣制未除。故樂部。皆執其器而不作。特以奉詔命。不敢不設也。

가공(歌工)과 악색(樂色) 역시 세 등급의 복색이 있고, 가지고 있는 악기는 어쩌다 약간 다른 것들이 있다. 그 행렬은 소아대(小兒隊) 뒤에 있다. 근자에 사자(使者)가 그곳에 갔을 때는 마침 우(俁)의 상기가 끝나지 않아서, 악부에서 모두 그 악기를 잡고 있으면서도 연주는 하지 않았었다. 단지 조명(詔命)을 받들기 때문에 감히 마련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次禮物] 다음 예물

禮物之匣。大小不一。其面。摽題所賜之物名件。而皇帝信寶。封之。麗人。尊奉寵眷。乃盛以要舁。而罩以黃帕。每乘。用控鶴軍四人。服紫繡花袍。上折幞頭。其行。在樂部之次。

예물의 갑(匣)은 그 크기가 같지 않다. 그 표면은 하사한 물건의 이름을 표제로 쓰고 황제의 신보(信寶)로 봉하였다. 고려인은 총애를 높이 받들므로 들것에 올려놓고 황색 보를 덮는다. 그리고 들것마다 공학군(控鶴軍) 4인씩을 쓰는데, 자주색 수의 무늬가 든 웃옷을 입고 절각복두(折脚?頭)를 썼다. 그 행렬은 악부 다음에 섰다.

[주D-001]공학군(控鶴軍) : 왕실 숙위(宿衛)를 담당한 군사.

[주D-002]절각복두(折脚?頭) : 모두(帽頭)의 뿔을 꺽어 올려 오른쪽으로 조금 구부린 복두.

 

 

 

-[次詔輿] 다음 조서 가마

采輿之設。繢繡錦綺。五色間錯。制作華巧。前一輿。安大金爐。次奉詔書。幷祭王俁文。次奉御書。亦以控鶴軍捧之。拜表歸館。則不用其中一輿耳。

채색 가마의 시설은, 수놓아진 무늬 비단에 오색이 뒤섞여 있는데, 만듦새가 화려하고 정교하다. 앞의 한 가마에는 큰 쇠 향로를 놓았고, 다음 것에는 조서와 왕우(王俁)를 제사하는 글을 받들고, 그 다음 것에는 어서(御書)를 받들었는데 역시 공학군(控鶴軍)이 들고 간다. 표문(表文)을 배(拜)하고 관(館)으로 돌아가면 그 가운데의 한 가마는 쓰지 않는다.

 

 

 

-[次充代下節] 다음 충대하절

國朝故事。奉使高麗下節。皆卒伍。比歲稍許命官,士人,藝術工技。以代其選。今使者之行也。人人仰體。聖上懷徠之意。願爲執鞭。以觀異域之俗。又況陛辭之日。面奉聖語。丁寧宣諭。人皆感泣。而不以海洋之生死。爲憂也。故有若成忠郞周通。承信郞趙漑。登仕郞熊樗年,尹京。文學江大亨,李訓,唐浚。翰林醫學楊寅。進士。有若晁正之,徐亨,黃大本,葉彥資,石懌,陳興祖,陶挺,孟徽,高伯益,李銳,崔世美,顧大範,金安止,王居仁,劉緝煕。副尉。則有李暉,王澤,呂漸,徐珙,徐可言,施祐鍾,禹功。省府寺監胥吏。則有若董琪,牛敏年,郯恭,陳佐,楊大同,楊渙,劉宗武,孫洵,王祐,尹公立,孫琬,曹裕,王伯全,陳惟漑,王道深,楊革,張雩桂,林范。敏求,舒障,鄒琮志,張若朴,范寧之,朱彥康,劉楶,胡允升,周郁,郯伯成。其服。紫羅窄衫,烏紗帽,塗金雙鹿帶。分爲兩序。從詔輿而行。

국조(國朝 즉 송(宋)을 말함)의 구례(舊例)로는 고려의 사행 하절(下節)은 다 군졸들이었으나, 근년에는 벼슬을 가진 선비와 예술을 하는 기술자로 그 인원을 대체하도록 약간씩 허락하였다. 이번 사자의 행차에는 사람마다 성상(聖上)의 회유하시자는 뜻을 체득하여, 그 일을 담당해서 이역의 풍속을 살피기를 원하였었다. 하물며 또 어전을 하직하던 날 성상의 말씀으로 간곡하게 타일러 주심을 직접 받들었으므로, 사람들은 다 감읍하여 바다에서의 생사를 근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일행 중에는 성충랑(成忠郞) 주통(周通), 승신랑(承信郞)조개(趙漑), 등사랑(登仕郞)웅저년(熊樗年)ㆍ윤 경(尹京), 문학(文學)강대형(江大亨)ㆍ이훈(李訓)ㆍ당준(唐浚), 한림 의학(翰林醫學)양인(楊寅) 같은 사람들이 들어 있고, 진사(進士)로는 조정지(晁正之)ㆍ서형(徐亨)ㆍ황대본(黃大本)ㆍ섭언자(葉彦資)ㆍ석역(石懌)ㆍ진흥조(陳興祖)ㆍ도정(陶挺)ㆍ맹휘(孟徽)ㆍ고백익(高伯益)ㆍ이예(李銳)ㆍ최세미(崔世美)ㆍ고대범(顧大範)ㆍ김안지(金安止)ㆍ왕거인(王居仁)ㆍ유집희(劉緝煕) 같은 사람들이 들어 있고, 부위(副尉)로는 이휘(李暉)ㆍ왕택(王澤)ㆍ여점(呂漸)ㆍ서공(徐珙)ㆍ서가언(徐可言)ㆍ시우종(施祐鍾)ㆍ우공(禹功)이 있고, 성(省)ㆍ부(府)ㆍ시(寺)ㆍ감(監)의 서리(胥吏)로는 동기(董琪)ㆍ우민년(牛敏年)ㆍ담공(郯恭)ㆍ진좌(陳佐)ㆍ양대동(楊大同)ㆍ양환(楊渙)ㆍ유종무(劉宗武)ㆍ손순(孫洵)ㆍ왕우(王祐)ㆍ윤공립(尹公立)ㆍ손완(孫琬)ㆍ조유(曹裕)ㆍ왕백전(王伯全)ㆍ진유개(陳惟漑)ㆍ왕도심(王道深)ㆍ양혁(楊革)ㆍ장우계(張雩桂)ㆍ임범(林范)ㆍ민구(敏求)ㆍ서장(舒障)ㆍ추종지(鄒琮志)ㆍ장약박(張若朴)ㆍ범영지(范寧之)ㆍ주언강(朱彦康)ㆍ유절(劉楶)ㆍ호윤승(胡允升)ㆍ주욱(周郁)ㆍ담백성(郯伯成) 같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의 복색은 자주 깁의 좁은 옷에 오사모(烏紗帽)와 도금쌍록대(塗金雙鹿帶)를 하고 양쪽으로 갈라 서서 조서 가마[詔輿]를 따라 행진한다.

[주C-001]충대하절(充代下節) : ‘충대’는 대신 충임(充任)함을 말함. 본래 ‘하절(下節)’은 군졸들이었지만 그들 대신 고려 방문을 지원하는 인사들을 충용했다는 의미에서 충대하절이라는 말을 쓴 것이다.

[주D-001]성충랑(成忠郞) : 송의 무산신관(武散新官) 52계의 제48계. 《宋史 職官9》

[주D-002]승신랑(承信郞) : 송의 무산신관(武散新官) 52계의 제51계. 《宋史 職官9》

[주D-003]등사랑(登仕郞) : 송(宋)의 문산관(文散官) 15계 중의 제14계.

[주D-004]문학(文學) : 각 부(府)의 속관. 문학을 다루는 것이 그 직책이다.

[주D-005]한림 의학(翰林醫學) : 의관(醫官)인 의정(醫正)의 말계(末階).

[주D-006]진사(進士) : 중앙 고시에 합격한 자.

[주D-007]부위(副尉) : 송 무산관(武散官)의 하급 계위. 소무(昭武) 등 8종이 있다.

[주D-008]도금쌍록대(塗金雙鹿帶) : 금색 사슴 한 쌍이 그려진 각대(角帶).

 

 

 

-[次宣武下節] 다음 선무하절

宣武下軍。明州土兵。共五十人。服飾。與充代不異。但褰裳而行。使錦繡彰施耳。使者初出都門。降賜塗金器皿從物。每出。節卽供給之。人各執于前。▣采奪目。以示榮燿于外國焉。

선무하군(宣武下軍)은 명주(明州)의 토병(土兵)으로 도합 50인이다. 복식은 충대(充代)와 다르지 않으나, 다만 아래 옷을 처들고 가면서 수놓은 무늬 비단이 뚜렷이 나타나게 한다. 사자가 처음 도성 문을 나가면 도금기명(塗金器皿 금칠한 그릇)과 딸린 물건을 내려 주고, 또 계속 나갈 때마다 절(節)을 공급하는데, 사람마다 각각 앞에서 잡고 있어 찬란한 빛이 눈부신데 이것은 외국에 영광스러움을 보이기 위한 것이다.

[주C-001]선무하절 : 선무군(宣武軍)의 병졸로 충당된 하절 인원.

[주D-001]명주(明州) : 지금의 절강성(浙江省) 근현(鄞縣)의 땅.

[주D-002]절(節) : 여기서는 각 개인에게 교부한 신분증 구실을 하는 나무 조각.

 

 

 

-[次使副] 다음 사부

國信使副。從詔書入城。到▣公會。皆二馬齊驅。其服。紫衣御仙花金帶。仍佩金魚。高麗伴使。騎馬在副使之右數步。相比而行。屈使又次之。

국신사(國信使)와 부사가 조서(詔書)를 따라 성 안으로 들어가고, 공식 회견에 가고 하는 데는 다 두 필의 말이 함께 달린다. 그의 복색은 자주색 옷에 어선화금대(御仙花金帶)이고 또 금어대(金魚袋)를 패용한다. 고려의 반사(伴史 외국 사신을 접반하는 관원)는 말을 타고 부사 오른쪽에 몇 걸음 떨어진 거리에서 나란히 가고 굴사(屈使)가 또 그 다음에 온다.

[주D-001]어선화금대(御仙花金帶) : 부사(副使) 부묵경(傅墨卿)은 중서 사인(中書舍人)이었으므로 그 신분에 맞는 대(帶)를 착용한 것이다. 송대의 대제(帶制)는 복잡하고 여러 차례 개정되었다. 《宋史 輿服志》

[주D-002]굴사(屈使) : 미상. 이상옥(李相玉)의 주에는 ‘副使也’로 되어 있으나 취하지 않음. 제25권 ‘영조(迎詔)’의 동어(同語) 이주(李注)는 ‘屈’이 ‘䘿’과 통용됨을 말하고 짧은 소매 옷을 입은 사람으로 보았다.

 

 

 

-[次上節] 다음 상절

上節。都轄。武翼大夫忠州刺史,兼閤門宣贊舍人吳德休。其服。紫衣金帶。行馬在正使之後。提轄。朝奉大夫徐兢。緋衣佩魚。行馬在副使之後。法籙道官。太虛大夫,蘂珠殿校籍黃大中。碧虛郞,凝神殿校籍陳應常。紫衣青襈。佩金方符。書狀官。宣敎郞滕茂實,崔嗣道。如提轄官之服。隨船都巡檢吳敞。指使兼巡檢。路允升,路逵,傅叔承,許興文。管句舟船。王覺民,黃處仁,葛成仲,舒紹弼,賈垣。語錄指使。劉昭慶,武,楊明。醫官。李安仁,郝洙。書狀使臣。馬俊明,李公亮。其服。紫衣塗金。御仙花帶。引接荊珣,孫嗣興。服綠。各以官序。行馬從詔書入城。其侍使副行。則戴席帽而執鞭。專遣行禮。則亦張青蓋。彼國。自有伴官相陪。多以引進官。爲之。

상절은 다음과 같다. 도할관(都轄官)인 무익대부(武翼大夫) 충주자사 겸 합문선찬사인(忠州刺史兼閤門宣贊舍人)오덕휴(吳德休)는 그 복색이 자주색 옷에 금색 띠이고 정사(正使) 뒤에서 말을 타고 갔다. 제할관(提轄官)인 조봉대부(朝奉大夫) 서긍(徐兢)은 비색(緋色) 옷에 어대(魚帶)를 패용하고 부사(副使) 뒤에서 말을 타고 갔다. 법록도관(法籙道官)인 태허대부(太虛大夫) 예주전 교적(蘂珠殿校籍)황대중(黃大中)과 벽허랑(碧虛郞) 응신전 교적(凝神殿校籍)진응상(陳應常)은 자주색 옷에 푸른색 옷단으로 금방부(金方符)를 패용하였다. 서장관(書狀官)은 선교랑(宣敎郞)인 등무실(滕茂實)과 최사도(崔嗣道)로 제할관의 복색과 같았다. 수선도순검(隨船都巡檢)인 오창(吳敞)과, 지사 겸 순검(指使兼巡檢)인 노윤승(路允升)ㆍ노규(路逵)ㆍ부숙승(傅叔承)ㆍ허흥문(許興文), 관구주선(管勾舟船)인 왕각민(王覺民)ㆍ황처인(黃處仁)ㆍ갈성중(葛成仲)ㆍ서소필(舒紹弼)ㆍ가원(賈垣), 어록지사(語錄指使)인 유소경(劉昭慶)ㆍ무완(武)ㆍ양명(楊明), 의관(醫官)인 이안인(李安仁)ㆍ학수(郝洙), 서장사신(書狀使臣)인 마준명(馬俊明)ㆍ이공량(李公亮)은 그 복색이 자주색 옷에 도금어선화대(塗金御仙花帶)였다. 인접(引接)인 형순(荊珣)과 손사흥(孫嗣興)은 초록색 옷을 입었다. 이들은 각각 관직의 서열에 따라 말을 타고 조서를 따라 도성으로 들어갔다. 시사부행(侍使副行)은 석모(席帽 등나무 섬유로 짠 모자)를 쓰고 채찍을 잡았으며, 전견행례(專遣行禮) 역시 푸른 일산[青蓋]을 펴 들었다. 저 나라에서는 그 나름으로 반관(伴官)이 있어 배행(陪行)하는데, 대부분 인진관(引進官)으로 그 일을 시킨다.

[주D-001]도할관(都轄官)……합문선찬사인(閤門宣贊舍人) : 도할관은 인마와 물건을 관리하는 총책임을 맡은 관원. 무익대부(武翼大夫)는 송의 무산신관(武散新官)의 제42계. 충주(忠州)는 지금의 광동성(廣東省) 수록현(綏?縣). 자사는 지방장관. 합문선찬사인은 합문사(閤門使)의 속관으로 선지(宣旨)를 전달하고 알현(謁見)을 돕고 하는 근시직(近侍職).

[주D-002]법록도관(法籙道官)……예주전 교적(蘂珠殿校籍) : 법록도관은 도서(道書)를 관장하는 도교관원. 태허대부는 도사에게 주는 산관(散官). 예주전(蘂珠殿)은 도교의 천상궁전 이름. 교적은 관직명. 예주전 교적은 도사에게 주는 관리.

[주D-003]벽허랑(碧虛郞)……응신전 교적(凝神殿校籍) : 벽허랑은 도교의 산관. 응신전 교적도 도교의 궁관 이름.

[주D-004]금방부(金方符) : 사각형으로 된 금색 도부(道符). 도교의 원리를 상징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주D-005]선교랑(宣敎郞) : 문산신관(文散新官)의 제24계.

[주D-006]수선도순검(隨船都巡檢) : 도순검은 순검(巡檢)의 우두머리. 변경이나 연안 같은 경계가 필요한 지역 주현(州縣)의 경계를 맡아, 군사의 훈련과 순라ㆍ포도ㆍ관명의 시행 등을 맡은 관원.

[주D-007]관구주선(管勾舟船) : 배를 관리 점검하는 직책.

[주D-008]어록지사(語錄指使) : 필요한 대화 내용을 지적 기록시키는 직책.

[주D-009]서장사신(書狀使臣) : 서장관의 속관을 말함.

[주D-010]인접(引接) : 면회를 안내하는 직책.

[주D-011]시사부행(侍使副行) : 부사의 승마 행진을 시중드는 마부 같은 일을 맡은 사람.

[주D-012]반관(伴官) : 사신을 접반하는 고려의 관원을 말함.

[주D-013]인진관(引進官) : 중요 외국 사신에 관련된 제반 행사와 의식을 맡아 보는 관원. 인진관은 송에도 있었는데 객성(客省)에 속해 있었다. 《宋史 卷166 客省引進史》

 

 

 

-[終中節] 끝 중절

中節。管句禮物官。承直郞朱明發。承信郞婁澤,范。迪功郞崔嗣仁,劉璹。將仕郞吳 太上御名。 行遣迪功郞汪忱。進士王處仁。占候風雲官。承信郞董之邵,王元。書符禁呪。張洵仁。技術。郭範,司馬瓘。使副親隨。徐閎,張皓,李機,許興古。親從官。王瑾,魯蹲。宣武十將充代。趙祐。正名。程政。都轄親隨人吏。王嘉賓,王仔。其服。幞頭紫窄衣塗金寶甁帶。其行馬。在上節之次。

중절(中節)은 다음과 같다. 관구예물관(管勾禮物官)인 승직랑(承直郞)주명발(朱明發), 승신랑(承信郞) 누택(婁澤)ㆍ범민(范敀), 적공랑(迪功郞) 최사인(崔嗣仁)ㆍ유숙(劉璹), 장사랑(將仕郞)오구(吳構), 행견적공랑(行遣迪功郞) 왕침(汪忱)ㆍ진사 왕처인(王處仁)과, 점후풍운관(占候風雲官)인 승신랑 동지소(董之邵)ㆍ왕원(王元), 서부금주(書符禁呪)인 장순인(張洵仁), 기술(技術)인 곽범(郭範)ㆍ사마관(司馬瓘), 사부친수(使副親隨 친수는 개인 비서)인 서굉(徐閎)ㆍ장호(張皓)ㆍ이기(李機)ㆍ허흥고(許興古), 친종관(親從官)인 왕근(王瑾)ㆍ노준(魯蹲), 선무십장충대(宣武十將充代)인 조우(趙祐), 정명(正名)인 정정(程政), 도할친수인리(都轄親隨人吏)인 왕가빈(王嘉賓)ㆍ왕자(王仔)는 그 복색이 복두(幞頭)와 자주색 좁은 옷에 도금보병대(塗金寶甁帶)이고 이들이 말타고 가는 것은 상절 다음이었다.

[주D-001]승직랑(承直郞) : 송 문산신관(文散新官)의 제31계. 《宋史 卷169》

[주D-002]장사랑(將仕郞) : 송 문산관의 최종계인 제15계. 《宋史 卷169》

[주D-003]점후풍운관(占候風雲官) : 일기를 예점하는 관원.

[주D-004]서부금주(書符禁呪) : 부적ㆍ주문 등으로 질병이나 재액을 몰아내는 일을 맡아하는 사람.

[주D-005]도금보병대(塗金寶甁帶) : 도금대(塗金帶)의 일종으로 서각(犀角)으로 보병(寶甁 부처가 영수(靈水)를 담아 든 병의 형상)의 모양을 만든 장식을 붙인 것.

 

 

 

宣和奉使高麗圖經卷第二十五

受詔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25 권

수조

 

 

 

 

-[受詔] 수조

臣聞周使宰孔。賜齊侯胙。將下拜。孔曰且有後命。天子。以伯舅耋老。加勞賜一級。無下拜。對曰。天威不違顏咫尺。小白余。敢貪天子之命。恐隕越于下。以遺天子羞。敢不下拜。下拜登受。夫周室之衰。禮去其籍。僅有存者。齊侯雖霸。不敢廢禮。今天子威靈所被。震疊海表。而綏懷之意。情文腆縟。是宜麗人。恪恭明命。如瞻天表。不敢少怠。以虞隕越。今圖其趨事執禮之勤。以備觀考。

주(周) 나라에서 재공(宰孔)을 시켜 제후(齊侯)에게 제육(祭肉)을 내렸을 때에 제후가 하배(下拜 대청 아래로 내려서서 배례하는 극도로 공손한 예)하려 하니 공이 이르기를, ‘또 뒤따르는 어명이 있습니다. 천자께서는 백구(伯舅 주 나라 때 천자가 이성(異姓) 제후를 부를 때 쓴 말)가 연로하여서 위로하시어 한 급(級 층계의 한급을 말함)을 하사하셨으니 하배하지 마시오.’ 하였다. 이에 대답하기를, ‘천자의 위엄이 얼굴 앞에서 지척도 떨어지지 않았는데 나 소백(小白 제 환공(齊桓公)의 자칭)이 감히 천자의 총명(寵命)을 믿고 마구 굴겠습니까? 아래에서 예법을 실추시켜 천자께 수모를 끼칠까 두렵습니다. 감히 하배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하배한 다음 올라와 제육을 받았다. 주실(周室)이 쇠미해져서 예법은 본래의 법전에서 벗어나 버리고 간신히 남아 있었는데, 제후(齊侯)는 패자(覇者)였음에도 감히 예를 폐하지 않았다. 지금은 천자의 존엄하신 힘이 미쳐나가 해외에서까지 두려워하고 있는데 거기다 위무하시는 뜻이 내용과 형식에 걸쳐 후하고 번화하니, 고려인은 마땅히 밝으신 명령을 삼가 받듦을 하늘 끝을 바라보듯이 하고, 감히 조금이라도 게을리 할 수 없어 예법을 실추시킬까를 근심하고 있다. 이제 그들이 일을 다루고 예를 집행하는 근실함을 그려서 관찰하시는 데 대비하는 바이다.

[주D-001]재공(宰孔)을……내렸을 때 :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희공(僖公) 9년 조에 나오는 고사. 문장도 약간의 생략은 있으나, 거의 좌씨전의 그것과 같다. 이때의 제후(齊侯)는 당시 패권을 잡고 있던 환공(桓公)이다.

[주D-002]한 급을 하사하셨으니 : 당하에서 하배하지 않고 층계를 올라와 배례함을 허락하였다는 뜻. 《左傳僖公 9年 疏》

 

 

 

-[迎詔] 영조

使副奉詔。入順天館。十日內卜吉。王乃受詔。前期一日。先遣說儀官。與使副相見。次日遣屈使一員。至館。都轄提轄官。對捧詔入采輿內。儀仗兵甲。迎導前行。使副,館伴,屈使。同上馬。下節。在其前步行。上中節。騎馬後隨。國官。先於館門外排立。候詔書出館。當道再拜訖。乘馬前導。至王府。入廣化門。次入左同德門。至昇平門外。上中節。下馬。引接指使等。馬前步行。上節後從。入神鳳門。至閶闔門外。使副下馬。國王與國官。以次迎詔。再拜訖。采輿入。止會慶殿門外。

정사와 부사가 조서를 받들고 순천관(順天館)으로 들어가면 10일 이내에 길일(吉日)을 택해 국왕이 조서를 받는데, 기일 하루 전에 먼저 설의관(說儀官)을 보내어 정사와 부사를 만나게 한다. 다음날 굴사(屈使) 하나가 순천관에 당도하여 도할관과 제할관이 조서를 받들고 채색 가마 안으로 들어가면, 의장과 병갑이 맞이하여 인도하며 앞에서 가고, 정사ㆍ부사ㆍ관반 및 굴사가 동시에 말에 오르고, 하절(下節)이 그 앞에서 걸어서 가며, 상ㆍ중절은 말을 타고 뒤에서 따라간다. 고려국의 관원들이 먼저 순천관 문밖에서 줄지어 서서 조서가 순천관에서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길을 막고 재배(再拜)가 끝나면, 말을 타고 앞에서 인도하여 왕부(王府)에까지 간다. 광화문(廣化門)으로 들어간 다음 좌동덕문(左同德門)으로 들어가 승평문(昇平門) 밖에까지 가서는 상ㆍ중절이 말에서 내리고 인접(引接)ㆍ지사(指使) 등이 말 앞에서 걸어가는데 상절은 뒤에서 따라간다. 신봉문(神鳳門)으로 들어가 창합문(?闔門) 밖에 다다라 정사와 부사가 말에서 내리면, 국왕이 나라의 관원들과 차례로 조서를 맞이하여 재배가 끝나면 채색 가마가 들어가 회경전(會慶殿) 문밖에 멎는다.

[주D-001]순천관(順天館) : 오정문(午正門) 밖에 있던 영빈관(迎賓館)의 별칭. 《東國輿地勝覽 卷4 開城上 宮室》

[주D-002]설의관(說儀官) : 의식 절차를 상의 결정하는 관원. 여기서는 고려 국왕이 그 임무를 주어 보낸 관원.

 

 

 

-[導詔] 도조

采輿旣入。止會慶殿門外。都轄提轄官。自輿中捧詔出。奉安于幕位。使副少憩。國王。復降門下。西嚮立。使副與國王並行。導入中門。上節禮物等。分兩序。入會慶殿下。以俟國王受詔。

채색 차마가 들어가 회경전 문밖에 멈추면 도할관과 제할관이 가마 속에서 조서를 받들고 나와 막위(幕位 조서를 맞이하는 의식을 위한 장막 안의 조서를 놓도록 마련한 자리)에 봉안하고 정사와 부사가 잠시 쉰다. 국왕이 다시 문 아래로 내려와 서쪽을 향해 서면 정사와 부사는 국왕과 나란히 가면서 중문으로 인도해 들어가고, 상절(上節)ㆍ예물 등은 양편으로 나뉘어 회경전 아래로 들어가서 국왕이 조서를 받기를 기다린다.

 

 

 

-[拜詔] 배조

國王導詔。入會慶殿廷下。設香案。面西立。使副。位北上面南立。上節官。以次序。立於使副之後。國官。立班于王之後。王再拜。躬問聖體。乃復位。舞蹈再拜已。國官拜舞。如王之儀。國信使稱有勑。國王。再拜起。躬聽口宣。乃搢笏跪。副使以詔授使。使以詔授王。詔曰高麗國王王楷。逖聞嗣國。甫謹修方。諒惟善繼之初。克懋統承之望。遽經變故。深劇傷摧。肆遄命使之華。往諭象賢之寵。載蕃賚予。倂示哀榮。宜祗服於王靈。用永遵於侯度。今差通議大夫,守尙書禮部侍郞,元城縣開國男,食邑三百戶路允迪。太中大夫,中書舍人,淸河縣開國伯,食邑九百戶傅墨卿。充國信使副。賜卿國信禮物等具如別錄。至可領也。故玆詔示。想宜知悉。春暄。卿比平安好遣。書指不多及。王受詔。乃授國官。出笏舞蹈。如初之儀。國官亦如之。

국왕이 조서를 인도하여 회경전으로 들어가면 궁정 아래 향안(香案 향로나 향합을 올려 놓는 상)이 마련되어 있는데, 국왕은 서쪽을 향해 서고 정사와 부사는 북쪽 위에 자리잡고 남쪽을 향해 선다. 상절(上節)의 관원들은 차례에 따라 정사와 부사 뒤에 서고 나라의 관원들은 왕의 뒤에 선다. 왕이 재배하고 몸소 성체(聖體 북송의 휘종 황제를 두고 한 말)의 안부를 묻고서는 자리로 돌아가서 무도(舞蹈 손을 휘 젖고 말을 구르는 임금을 알현할 때의 예의)와 재배가 끝나면, 나라의 관원들이 무도, 재배를 왕이 한 의례와 같이 한다. 국신사(國信使)가 조칙이 있음을 말하면 국왕은 재배하고 일어나 입으로 이르는 말을 몸소 듣고서는 홀(笏)을 띠에 꽂고 꿇어 앉는다. 부사가 조서를 정사에게 주면 정사는 조서를 왕에게 주는데, 조서는 이러하다.

 

“고려 국왕 왕해(王楷)여, 멀리서 듣기로는 국왕의 자리를 이어받아 삼가 나라를 다스리기 시작하였다 하니, 진실로 즉위 초에 왕통을 잇는데 여망에 부응하도록 힘쓸 수 있었을 것입니다. 갑자기 변고를 겪으셔서 슬픔이 대단할 것입니다. 이제 서둘러 사자에게 명하여, 왕위를 계승한 분에게 가서 총애를 알리도록 하고, 풍성한 예물과 함께 슬퍼하고 축하하는 뜻을 표하니, 왕은 존엄한 힘(송 휘종 자신을 두고 한 말임)에 삼가 복종하여 제후로서의 절도를 영원히 지키도록 하오. 이제 통의대부(通議大夫) 수상서예부시랑(守尙書禮部侍郞) 원성현개국남 식읍삼백호(元城縣開國男食邑三百戶) 노윤적(路允迪)과 태중대부(太中大夫) 중서 사인(中書舍人) 청하현개국백 식읍구백호(淸河縣開國伯食邑九百戶) 부묵경(傅墨卿)을 정사와 부사로 보내어 경(卿)에게 나라의 신서(信書)와 예물 등을 별록(別錄)과 같이 갖추었으니 받아주도록 하오. 그래서 이에 조서로 일러 드리니 잘 알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봄날씨 따뜻한데 경은 요즈음 평안하겠지요. 이만 줄입니다.”

왕이 조서를 받아서 나라 관원에게 주고는 홀을 꺼내 들고 무도(舞蹈)함이 처음의 의례와 같았고, 나라의 관원들 역시 그렇게 하였다.

 

 

 

-[起居] 기거

使副旣導詔。至于廷。王再拜。興避席。躬問聖體。使亦避席躬答。曰近離闕下。皇帝聖躬萬福。各復位。拜舞如受詔之儀。先是。自全抵廣。凡三州牧。問聖體。如王之儀。至其接送館伴官相見。亦如之。

정사와 부사가 조서를 인도하여 궁정에 당도하고 나면 왕이 재배하고 일어나 자리에서 피해 서서 몸소 성체(聖體)의 안부를 묻는다. 정사 역시 자리에서 피해 서서 몸소 대답하기를, ‘근자에 대궐을 떠났는데 황제의 성궁(聖躬)은 만복을 누리고 계십니다.’하고는 각각 자리로 돌아가 재배, 무도함이 조서를 받을 때의 의례와 같다. 이에 앞서 전주(全州)에서 광주(廣州)에 이르는 3주(전주ㆍ청주 및 광주)의 수령들이 성체의 안부를 왕이 한 의례같이 하여 묻고, 영접 전송하는 관반관(館伴官)들이 만날 때에도 그렇게 한다.

[주C-001]기거(起居) : 당시의 송 나라 황제인 휘종의 안부를 묻는 일.

 

 

 

-[祭奠] 제전

壬寅春二月。使副被旨。以國信使事行。夏四月。聞俁薨。兼以祭奠弔慰。遵元豐制也。癸卯六月十三日甲午。使副到館。王旣受詔。越二日。王先遣人告辦。都轄吳德休。往啓建佛事。次日。提轄官徐兢。押所賜祭奠禮物。陳列于前。至日質明。使副與三節官吏。奉詔輿。至長慶宮。三節。休于次。使副。易帶以烏犀。仍去式。候時至。入祭室。王楷。素服立于東楹。使副再拜興。使。跪宣御製祭文。曰維宣和五年。歲次癸卯。三月甲寅朔。十四日丁卯。皇帝。遣使通議大夫,守尙書禮部侍郞,元城縣開國男,食邑三百戶路允迪。太中大夫,中書舍人,淸河縣開國伯,食邑九百戶傅墨卿。致祭于高麗國王之靈。惟王。躬有一德。嗣玆東土。孝友肅恭。惠迪神民。克紹于前文人。四國是式。而忠誠夙著。義篤勤王。旅貢在廷。服命惟謹。朕惟王。外介海隅。而能知役志于享。乃心。罔不在王室。嘉乃丕績。眷顧不忘。方將洊飭使人。往諭朕志。示鎭撫于爾邦。孰謂天不憖遺。遽聞大故。邦國殄瘁。震悼于懷。今錫爾恤典。用褒乃顯德。以輯寧爾邦。尙其來止。歆我寵靈。永垂佑于爾後人。服休無斁。尙饗。

임인년(1122, 고려 인종 즉위년) 봄 2월에 정사와 부사는 성지(聖旨 송 휘종의 명령을 두고 한 말)를 받고 국신사의 직무를 가지고 떠나가려 하였더니, 여름 4월에 우(俁 고려 예종의 휘)가 훙거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제전(祭奠)과 조위(弔慰)의 임무를 겸하게 되었다. 이는 원풍(元豐 1078∼1085)의 제도에 따른 것이다. 계묘년(1123, 고려 인종 1) 6월 13일 갑오에 정사와 부사가 순천관에 도달하고, 왕이 조서를 받고 나서 이틀이 지나자, 왕이 먼저 사람을 보내어 도할관 오덕휴(吳德休)에게 가서, 불사(佛事)를 바칠 차비가 되었음을 고하였다. 다음날 제할관(提轄官) 서긍(徐兢)이 하사할 제전(祭奠)의 예물을 가져다 앞에 진열하였다. 날이 밝자 정사ㆍ부사 및 삼절(三節)의 관리가 조서 가마를 받들고 장경궁(長慶宮)에 이르러 삼절은 자리에서 쉬고, 정사와 부사는 오서대(烏犀帶)로 띠를 바꿔 띠고 가서 때가 오기를 기다려 제실(祭室)로 들어 갔다. 왕해(王楷)는 소복으로 동쪽 기둥에 서고 정사와 부사는 재배하고 일어났다. 정사가 꿇어 앉아서 다음과 같이 어제 제문(御製祭文)을 읽었다.

“선화(宣和) 5년 세차(歲次) 계묘 3년 갑인삭 14일 정묘에 황제는 사신 통의대부(通議大夫) 수상서예부시랑(守尙書禮部侍郞) 원성현개국남(元城縣開國男) 식읍삼백호(食邑三百戶) 노윤적(路允迪)과 태중대부(太中大夫) 중서사인(中書舍人) 청하현개국백(淸河縣開國伯) 식읍구백호(食邑九百戶) 부묵경(傅墨卿)을 보내어 고려 국왕의 영(靈)에 제사를 드립니다. 생각하건대 왕(훙거한 고려 예종을 말함)은 몸소 한결같은 덕을 지녀, 이 동쪽 땅의 왕위를 이어 효성과 우애가 숙경 공손하였고, 신령(조상의 신령을 말함)과 백성을 은혜롭게 이끌며, 전대의 문덕(文德)이 있는 이의 뜻을 계승하여 사방의 나라들이 모범으로 받들었습니다. 그리고 충성이 일찍부터 드러나시며, 돈독한 의(義)로 왕(송의 황제를 말함)을 근실하게 섬겼고, 보낸 자제들이 조정에 있어 명령에 복종함이 근엄하였습니다. 짐(朕)이 생각하건대 왕은 바다 한모퉁이의 외지(外地)에 있으면서도, 헌상(獻上)하는 데 정성을 다하여 마음이 왕실에 있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대의 큰 공적을 가상히 여겨 잊지 않고 돌보며 바야흐로 차비를 차려 사람을 시켜 짐의 뜻을 가서 알려 그대 나라를 잘 진무(鎭撫)하려고 하였었습니다. 그런데 누가 생각하였겠습니까? 하늘이 어진이를 남겨두지 않아 급작스레 큰 변고가 나 나라가 고통 속에 빠졌음을 듣게 되어, 가슴속이 놀라고 슬퍼졌습니다. 이제 그대에게 휼전(恤典)을 내려 그것으로 뚜렷하신 덕을 찬미하여서 그대의 나라를 안녕하게 하는 터입니다. 바라건대 오시어 내가 신령을 총애함을 받아들여, 그대의 후대 사람들에게 영원히 복을 드리워 끝없이 아름다움을 누리게 하소서. 상향(尙饗).”

[주D-001]휼전(恤典) : 관원이 사망했을 때 주어지는 각종의 특전을 말함.

 

 

 

-[弔慰] 조위

是日。祭奠禮畢。少退。乃行弔慰禮。先於廷中。設香桉。西望天闕。王楷。素服面西立。使位南面西上。副使又次之。副使詔授使。使以詔授王。王。磬折鞠躬。再拜跪受之。詔曰高麗國王王楷。惟爾先王。祗 今上御名 明德。宜綏厥位。毗予一人。天命難諶。遽以訃諗。緬惟永慕。諒劇傷摧。纂嗣之初。踐修是屬。勉思抑割。用副眷懷。今差國信使通議大夫,守尙書禮部侍郞,元城縣開國男,食邑三百戶路允迪。副使太中大夫,中書舍人,淸河縣開國伯,食邑九百戶傅墨卿。兼祭奠弔慰。幷賜祭奠弔慰禮物等具如別錄。至可領也。故玆詔示。想宜知悉。春暄。卿比平安好遣。書指不多及。

이날 제전의 예가 끝나고 잠시 물러나 있다가 조위(弔慰)의 예를 거행하였다. 먼저 궁정 안에다 향안(香案)을 마련하고 서쪽으로 천자의 궁궐을 바라보았다. 왕해(王楷)는 소복으로 서쪽을 향해 서고, 정사는 남면하여 서쪽 윗자리에 자리잡고, 부사는 또 그 다음에 자리잡았다. 부사가 조서를 정사에게 주니 정사는 이를 왕에게 주었다. 왕은 허리를 깊이 굽혀 국궁하고 재배하고서 꿇어앉아 그것을 받았다. 조서는 이러하다.

 

“고려국왕 왕해여, 생각하건대 그대의 선왕(先王)께서는 밝은 덕을 성실하게 지켜 왕위를 보전하여 나 한 사람을 도왔는데, 천명(天命)이란 믿기 어려운지라 급작스레 부음(訃音)을 알려 왔습니다. 생각하건대 그지없이 사모하느라 진실로 슬픔이 대단할 것입니다. 즉위 초에 덕을 닦아 실천에 옮기기를 부탁하거니와 힘써 슬픔을 억눌러 돌보아 주는 나의 생각에 부응하도록 하오. 이제 국신사(國信使) 통의대부 수상서예부시랑 원성현개국남 식읍삼백호 노윤적과, 부사(副使) 태중대부 중서사인 청하현개국백 식읍구백호 부묵경을 보내어 제전과 조위의 임무를 겸임시키고, 아울러 제전ㆍ조위ㆍ예물 등을 별록과 같이 내리니 받으시오. 그래서 이에 조서로 일러 드리니 잘 아시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봄철 날씨 따뜻한데 경은 요즈음 평안하시겠지요. 이만 줄입니다.”

 

 

 

宣和奉使高麗圖經卷第二十六

燕禮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26 권

연례

 

 

 

-[燕禮] 연례

臣聞先王燕饗之禮。以其爵等。而爲隆殺之節。其酌獻有數。其酬酢有儀。本朝講之詳矣。師古便今。不失先王之意。而高麗之制。執爵酌醴。䣛行而前。所以薦賓客。乃有古人之遺風。諒其加厚於使華。以尊王人。施於其國者。未必槩如此也。具載于圖。以志其向慕中國之意。

선왕(先王 여기서는 고대의 명철했던 임금)의 연향(燕饗)하는 예는 거기에 참석한 자들의 작위의 등급에 따라 높이고 줄이고 하는 절도를 삼아, 술 부어 올리는 데는 횟수가 있고 받은 잔을 돌리는 데는 의례가 있다. 본조(本朝 송조(宋朝)를 말함)에서는 그것을 상세히 따져서 옛것을 스승으로 삼고 지금에 편리하게 하여 선왕의 의도를 떨어뜨리지 않았다. 그러나 고려의 제도는 잔을 잡고 술을 따라 무릎걸음으로 앞으로 나오는데, 이것은 빈객에게 술을 드리는 방법으로 옛사람의 유풍(遺風)이 있는 것이다. 이는 정녕 사신에게 더 후하게 하여서 왕자가 보낸 사람을 높이는 것일 것이고, 자기 나라에서 행하는 것은 반드시 다 이렇지는 않을 것이다. 모두 그림에 넣어서 그들이 중국을 사모하는 뜻을 기록하여 두기로 한다.

[주D-001]연향(燕饗) : 주연을 베풀어서 빈객을 향응함을 말함. 고대에는 그러한 연향을 베풀 때의 예법을 제정하여 상하의 정이 소통되기를 꾀하였다. 《詩經 小雅 鹿鳴》

 

 

 

-[私覿] 사적

王旣受詔已。王與使副。少休于次。王位東。使副位西。贊者。以使副起居狀。告于王。王遣介復命。引接官。分左右。引王與使副。出立于會慶廷中。對揖訖。升殿。王立于東楹。使副立于西楹。各設褥位。王與使。相向再拜訖。各致躬稍前。通問訖。復再拜。使少退。副使立于使位。與王對拜如初禮。各復位然後。分立于所占之席。立于其側。上節官。通榜子。參都轄提轄以下。不拜。止躬揖王。王亦躬答之。退立于東廊。次引中節。庭下參四拜。王稍躬還揖訖。退立于西廊。王與使副。就席坐。上中節。亦然。次引下節幷舟人。亦庭下六拜。坐于門之東西。分兩序。北面東上。然後酒行。其獻酬之禮。則見於別篇也。

왕이 조서를 받고 나면 왕과 정사ㆍ부사는 자리에서 잠시 쉰다. 왕은 동쪽, 정사와 부사는 서쪽에 자리잡는데, 찬자(贊者 의식의 절차 진행을 돕는 자)가 정사와 부사의 기거 상황을 왕에게 고하면 왕은 개(介 의식에서 주인과 빈객 사이를 연락하는 사람. 찬자(贊者)를 돕는 사람)를 보내어 복명한다. 그리고인접관(引接官)들은 좌우로 나뉘어 왕과 정사ㆍ부사를 인도하여 회경전(會慶殿)의 마당 가운데로 나가 서게 한다. 마주보고 읍(揖 두 손을 마주잡고 상반신을 약간 굽히는 인사)하는 일이 끝나면 왕은 동쪽 기둥에 서고 정사와 부사는 서쪽 기둥에 서는데, 각자 욕위(褥位 요를 깔아 앉을 수 있게 만든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왕과 정사가 서로 향해서 재배가 끝난 다음 각각 몸을 좀 앞으로 내어 문안의 교환을 끝내면 다시 재배하고 정사는 조금 물러선다. 부사는 정사의 자리에 서서 왕과 마주 배례하는 것을 처음의 예(禮)와 같이 하고 각각 자리로 돌아간다. 그렇게 한 뒤에 각각 잡았던 자리로 가서 그 곁에 선다. 상절관(上節官)들은 방자(榜子)를 내고 참례하는데 도할관(都轄官)과 제할관(提轄官) 이하는 배례하지 않고 다만 몸을 굽혀 왕에게 읍하고 왕 역시 몸을 굽혀 그것에 답하면 물러나 동쪽 행랑에 선다. 다음은 중절(中節)을 인도하여 뜰 아래에서 참례시키는데, 네 번 배례하면 왕은 몸을 조금 움직여 읍으로 답례하고 그것이 끝나면 물러나서 서쪽 행랑에 선다. 왕과 정사ㆍ부사는 좌석으로 가서 앉고 상절과 중절 역시 그렇게 한다. 다음은 하절(下節)을 뱃사람들과 함께 인도해오는데 역시 뜰 아래에서 여섯 번 배례하고 문의 동서 두편으로 나뉜 차례에 따라 북쪽을 면해 앉는데, 동쪽이 상석이다. 그렇게 한 후에 술이 돌아간다. 헌수(獻酬 술잔을 올림)의 예는 별편(別篇)에 나온다.(헌수조 참조)

[주C-001]사적(私覿) : 사적(私的)인 입장에서 면회하는 의식으로 여기서는 북송의 사신 일행을 국왕이 계급의 차례대로 접견하는 의식을 두고 한 말이다.

[주D-001]방자(榜子) : 송대에 백관(百官)이 면회할 때 사용한 수찰(手札)의 일종으로 거기에는 관직ㆍ성명 등이 씌어 있다. 상절관은 그런 방자를 왕에게 내어 그들의 신분과 성명을 밝히고 왕의 접견에 응한다.

 

 

 

-[燕儀] 연의

燕飮之禮。供張?幕之屬。悉皆光麗。堂上。施錦茵。兩廊藉以緣席。其酒味甘色重。不能醉人。果蔬豐腆。多去皮核。肴饌雖有羊豕。而海錯勝之。卓面。覆以紙。取其潔也。器皿。多以塗金。或以銀而以靑陶器爲貴。獻酬之儀。賓主百拜。不敢廢禮。自令官,國相,尙書以上。立于殿之東榮。在王之後。餘官。以文武。分東西兩序。立于廷中。中立一表。以著時刻。旁列綠衣人。搢笏。執絳燭籠。立於百官之前。復令衛軍。各執儀物。立於其後。麗人。奉王甚嚴。每燕樂行禮。所立官吏兵衛。雖烈日驟雨。山立不動。亦未嘗改容。其恭肅。亦可尙云。

연음(燕飮)의 예에 쓰이는 장식과 장막 등속은 다 광채가 나고 화려하다. 대청 위에 비단 보료를 펴 놓았고 양쪽 행랑에는 단을 두른 자리를 깔았다. 그 술은 맛이 달고 빛깔이 진한데, 사람을 취하게 하지는 못한다. 과일과 채소는 풍성하고 살졌는데 대부분 껍질과 씨를 제거하였고 안주에는 양육(羊肉)과 제육이 있기는 하지마는 해물이 더 많다. 탁자 표면에는 종이를 덮었는데, 이는 정결함을 취한 것이다. 기명(器皿)은 대부분 금칠한 것을 썼고 혹 은으로 된 것도 있으나, 푸른색 도기(陶器)를 값진 것으로 친다. 헌수의 의례는 빈객과 주인이 백번이고 배례하여 감히 예법을 버리지 않는다. 영관(令官 삼성(三省)의 장관)ㆍ국상(國相 재상들)ㆍ상서(尙書 6부의 장관) 이상은 궁전 동쪽 처마 끝 왕의 뒤에 서고 나머지 관원들은 문무가 동서 양편으로 나뉘어 뜰 가운데 서고 가운데에 푯말을 하나 세워서 시각을 나타낸다. 곁에는 초록색 옷을 입은 사람들이 띠에 홀(笏)을 꽂고 붉은 천으로 된 초롱을 잡고 백관(百官) 앞에 서고 또 위군(衛軍)을 시켜 각각 의장물들을 잡고 그 뒤에 서 있게 한다.

고려인들은 왕을 받드는 것이 매우 엄해서 연락(燕樂)으로 예를 행할 때마다 늘어선 관리와 병위(兵衛)는 비록 뜨거운 햇빛과 급작스런 비 속에서라 할지라도 산같이 서 있고 움직이지 않으며 결코 얼굴빛을 바꾸는 법이 없으니 그들의 엄숙 공손함이 가상하다.

 

 

 

-[獻酬] 헌수

王與使副。旣就席坐。王遣介。告使副曰。欲親起酌酒爲勤。使者固辭。至于再三。乃從之。各避席。起立對揖訖。執事者。以使爵至王前。王跪執尊。以酌使者。䣛行而前。使亦跪。授爵訖。復以爵。授執事者。各復位。坐旣定飮訖。起躬身對揖。略敍謝意。王又親酌副使酒。如使之禮。使副旣受王獻畢。復親酌酒。以酢王。如初禮。酒三行。乃如常儀。酒十五行。乃中休于次少頃。再就坐。自使副而下。送襲衣,金銀帶。各有差。酒再十餘行。夜分乃罷。王送使副出于殿門外。三節人。以序行馬歸館。

왕과 정사ㆍ부사가 자리에 가서 앉고 나면 왕이 개(介)를 보내어 정사와 부사에게 ‘몸소 일어나 술을 따라 권해 드리고자 합니다.’ 하고 고하게 하는데, 사자(使者)는 재삼 고사하고 나서야 그 말에 따른다. 각각 자리에서 물러나 일어서서 마주 읍하는 일이 끝나면 집사자(執事者)가 정사의 술잔을 가지고 왕 앞에까지 온다. 왕이 꿇어 앉아 술병을 잡고서 술을 따르게 하면 집사자가 무릎걸음으로 앞으로 가져오고 정사 역시 꿇어앉아 술잔을 받는다. 끝나면 다시 잔을 집사자에게 주고 각각 자리로 돌아간다. 자리잡고 앉고 나서 마시는 일이 끝나면 일어나 몸을 굽혀 마주 읍하고 간단히 사의(謝意)를 표한다. 왕이 또 친히 부사에게 술을 따라 주는데, 그 예는 정사의 경우와 같다. 정사와 부사가 왕의 잔을 받는 일을 끝내고 나서는 다시 친히 술을 따라서 왕에게 회례하기를 처음의 예와 같이 하는데, 술이 세 차례 돌고서야 통상의 의례와 같이 한다. 술이 15차례 돌고서는 차(次 임시로 머물게 마련해 놓은 자리)에서 중간 휴식을 취하고 잠시 후에 다시 자리에 나가 앉는다. 정사와 부사부터 그 아랫사람들에게까지 습의(襲衣)와 금은대(金銀帶)를 각각 차등을 두어 선사하고 술이 다시 10여 차례 돌고 밤중이 되어서야 파하는데, 왕은 정사와 부사가 문밖으로 나갈 때까지 전송한다. 삼절(三節)의 사람들은 차례에 따라 말을 타고 관사(館舍)로 돌아간다. [주D-001]습의(襲衣) : 겉에 입는 웃옷. 《예기(禮記)》 옥조(玉藻) 소(疏)에 “갖옷 위에 석의(裼衣)가 있고, 석의 위에 습의가 있고, 습의 위에 정복(正服)이 있다.” 하였다.

 

 

 

-[上節席] 상절석

上節之席。西面北上。器用塗金。禮如使副。差殺而王不親酌。唯遣尙書郞。或卿監代之。先以其禮告於王。王可其言。再拜而退。乃言於使人曰。王遣某官。勸上節酒。都轄提轄而下。躬身答之。初坐再勸。晩燕再就位。至于三勸。皆易巨觥。酒盡乃退。所遣官。復再拜王于殿庭而退。

상절의 좌석은 서쪽을 향해 앉는데 북쪽이 상석이다. 기물은 금색을 칠했고 예법은 정사와 부사에 대한 것과 같은데 좀 간략하다. 그리고 왕이 친히 술을 따르지 않고 단지 상서랑(尙書郞 각 부 낭관(郞官)의 통칭)이나 혹은 경감(卿監 각 시(寺)의 장)을 보내서 대신하게 한다. 먼저 그 예(禮)를 왕에게 고하고 왕이 그 말을 좋다고 하면 재배하고 물러나서는 부리는 사람에게 ‘임금께 모관(某官)을 보내어 상절에게 술을 권하게 하였습니다.’라고 말하게 하면 도할관과 제할관 이하가 몸을 굽혀 그것에 답한다. 처음 앉아서는 두 차례 권하고, 저녁 연음에 다시 자리에 나가 세 번째 권할 때는 다 거굉(巨觥 커다란 뿔모양의 술잔)으로 바꾸고 술이 다 없어지면 물러난다. 보내왔던 관원은 다시 궁전 뜰에서 왕에게 재배하고 물러간다.

 

 

 

-[中節席] 중절석

中節之席。東面北上。與上節相向。其果肴器皿。又降上節一等。其遣官勸酒。略如上節之儀。

중절의 좌석은 동쪽을 향하는데 북쪽이 상석으로 상절과 마주본다. 그 과일ㆍ안주ㆍ기명은 또 상절보다 한등이 떨어진다. 관원을 보내어 술을 권하는 것은 대략 상절에 대한 의례와 같다.

 

 

 

-[下節席] 하절석

下節之席。在殿門之內。北面東上。其席不施牀卓。唯以小俎。藉地而坐。器用白金。果肴簡略。而酒行之數。差疏。視中節。又降殺數倍耳。

하절의 좌석은 궁전 문 안에 있고 북쪽을 면하는데 동쪽이 상석이다. 그 좌석에는 상과 탁자는 마련하지 않고 단지 작은 도마 같은 것을 땅에 늘어놓는다. 기명은 백금(白金 은을 말함)을 쓰고 과일과 안주는 간략하며, 술 돌리는 수는 좀 드물어 중절보다 훨씬 떨어진다.

 

 

 

-[館會] 관회

使者旣入館。王遣官辦燕。謂之拂塵會。自是之後。五日一會。遇節序。稍加禮焉。使副居其中。自分左右位。國官伴筵。與館伴。分東西居客位。都轄提轄以下。分坐于東西序。中下節。以次坐于兩廊。酒止十五行。夜分而罷。庭中不施燭籠。唯設明燎而已。又有過位之禮。館伴以書。延使副于其位。如燕之禮。三節不偕往。唯從行引接指使之屬。以備使令。其後數日。使副延館伴官於所館之樂賓亭。用行庖之人。而果肴器皿。皆御府所給。四筵。列寶玩,古器,法書,名畫,異香,奇茗。瑰瑋萬狀。精采奪目。麗人莫不驚歎。酒闌。隨所好。恣其所欲。取而予之。

사자(使者)가 관사에 들어가고 나면 왕이 관원을 보내어 연회를 열게 하는데, 그것을 불진회(拂塵會)라고 한다. 이때부터는 5일에 한 번씩 연회를 차리는데, 절서(節序 15일에 한 차례씩 바뀌는 절후를 말함)를 만나면 예(禮)가 좀 더해진다. 정사와 부사가 그 가운데 있어 자리가 좌우로 나뉘고, 나라의 관원과 반연(伴筵) 및 관반(館伴)은 동서로 나뉘어 객위(客位)에 있고, 도할관과 제할관 이하는 동서협실에 나뉘어 앉고, 중ㆍ하절은 차례에 따라 양쪽 행랑에 앉는다. 술은 15차례 돌리고 그치며, 밤중에 파한다. 뜰 안에는 초롱은 마련하지 않고 단지 횃불을 마련할 따름이다.

또 과위(過位)의 예(禮)가 있는데 관반이 서신으로 정사와 부사를 그 위(位)로 초청하여 연음(燕飮)의 예와 같이 한다. 이때 삼절(三節)은 함께 가지 않고 단지 인접(引接)ㆍ지사(指使)ㆍ등속만을 데리고 가서 심부름에 대비한다. 며칠 후에 정사와 부사는 관반관(館伴官)을 그들이 묶고 있는 낙빈정(樂賓亭)으로 초청한다. 이때 숙수를 쓰는데, 과일ㆍ안주ㆍ기명은 다 어부(御府)에서 준 것들이다. 사방의 좌석에는 보완(寶玩 값나가는 노리개)ㆍ고기(古器)ㆍ법서(法書 글씨본)ㆍ명화(名畫)ㆍ이향(異香 보기 드문 좋은 향기)ㆍ기명(奇茗 진기한 좋은 차)을 늘어놓는데, 오만 가지로 진귀하고 정채로움이 눈길을 끌어 고려인들 치고 경탄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술이 한창일 때 좋아하는 것에 따라 원하는 대로 집어서 주었다.

 

 

 

-[拜表] 배표

使者宣命禮畢。乃以書告行。欲赴天寧節上壽之意。王遣介。致書懇留。使者固辭。王卜日持書。告以拜附表章。至日。使副率三節人。至王府。王迎揖。至會慶殿庭中。設案列褥位。如受詔之儀。王望闕再拜訖。搢笏跪。執事以表。授王。王捧表䣛行。奉于使。使跪授訖。以表授副使。置表於引接官。然後就席。至會罷。乃以表匣。置采輿中。兵仗迎導。前行歸館。

사자(使者)는 선명례(宣命禮 휘종의 조서를 전달하는 의식을 말함)가 끝나면 ‘천녕절(天寧節 휘종의 생일, 음력 10월 10일)에 대어 가서 상수(上壽 술을 올리고 축수함을 말함)하려 한다.’는 뜻을 서신으로 전한다. 왕은 개(介)를 보내어 서신을 전달하여 간곡히 만류하나 사자는 이를 굳이 사양한다. 왕은 날을 잡아 서신으로 표장(表章 휘종에게 보내는 글을 말함)을 바칠 것을 고한다. 그날이 되어 정사와 부사가 삼절을 거느리고 왕부(王府)에까지 들어가면 왕은 영접하여 읍을 하고 회경전(會慶殿)에까지 간다. 뜰 가운데는 안열(案列 상을 줄지어 늘어 놓은 것을 말함)과 욕위(褥位 요를 깔아 마련한 왕과 정ㆍ부사의 자리를 말함)를 마련한 것이 조서를 받을 때의 의례와 같다. 왕이 궁궐을 바라보고 재배가 끝나면 홀(笏)을 띠에 꽂고 꿇어앉는다. 집사관이 표(表)를 왕에게 주면 왕은 표를 받고서 무릎으로 가서 정사에게 바친다. 정사는 꿇어 앉아서 받고, 그것이 끝나면 표를 부사에게 준다. 부사는 표를 인접관(引接官)에게 준 뒤에 좌석으로 간다. 모임이 파할 때에 가서 표를 담은 갑(匣)을 채색 가마 속에 놓고, 의장병이 인도하여 앞에서 가는 것을 따라 관사로 돌아간다.

[주C-001]배표(拜表) : 사신을 통해 고려의 국왕이 송 휘종에게 표문(表文)을 전달하는 의식

 

 

 

-[門餞] 문전

拜表宴罷。乃於神鳳門。張?幕。設賓主之位。王與使副。酌別訖。立于席之側。先引上節。立于前。王親酌別酒一巨觥。致辭而退。次引中節。立于阼階。下節立于階下。勸酒如上節之禮。退出門外。候使副上馬。三節。以次從行歸館。

배표연(拜表宴 표문을 바치는 의식에 뒤따르는 잔치)이 파하면 신봉문(神鳳門)에 장막을 치고 빈객과 주인이 자리를 마련한다. 왕은 정사와 부사에게 술을 따라 주고 작별하는 일이 끝나면 좌석 곁에 선다. 먼저 상절(上節)을 인도하여 앞에 서게 하면 왕이 친히 거굉(巨觥)에 이별주를 따라 주고 상절은 하직 인사를 하고 물러난다. 다음에는 중절(中節)을 인도하여 층계에 세우고 하절은 층계 아래에 세우고 술을 권하는데 이때의 예는 상절과 같다. 물러나 문밖으로 나가 정사와 부사가 말에 오르기를 기다려 삼절(三節)이 차례로 따라서 관사로 돌아간다.

 

 

 

-[西郊送行] 서교송행

使副回程。是日。早發順天館。未閒。抵西郊亭。王遣國相。具酒饌于其中。上中節。位于東西廊。下節位于門外。酒十五行。乃罷。使副與館伴。立馬于門外。敍別。館伴就馬上。親酌以勸。使者飮畢。各分袂。先是。與接送伴官。到館卽相別。及回程。於此復與之相陪。以迄群山島放洋也。

정사와 부사가 귀로에 오를 때는 이날 일찍이 순천관을 떠나 얼마 안 가서 서교정(西郊亭)에 당도하는데, 이때 왕은 국상(國相)을 보내어 그 안에 술과 안주를 갖추어 놓게 한다. 상절(上節)과 중절(中節)은 동서(東西)의 행랑에 자리잡고 하절(下節)은 문밖에 자리잡으며 술이 15차례 돌고서 파한다. 정사와 부사는 관반(館伴)과 문밖에서 말을 세우고 작별 인사를 하고, 관반은 말 위에서 친히 술을 따라 사자(使者)에게 권한다. 마시는 것이 끝나면 각각 헤어진다. 이보다 앞서 접반관 및 송반관(送伴官)과는 관사에 도달하자 곧 헤어지는데, 귀로에 오르게 되면 이곳에서 다시 함께 가게 되어, 군산도(群山島)에서 바다로 나갈 때까지 같이 간다.

 

 

 

宣和奉使高麗圖經卷第二十七

館舍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27 권

관사

 

 

-[館舍] 관사

臣聞子產。相鄭伯如晉。晉以魯喪。未之見也。子產。使盡壞其館之垣。納車馬焉。晉人誚之。對曰。文公之爲盟主也。宮室卑庳。無觀臺榭。以崇大諸侯之館。館如公寑。庫廏繕修。車馬有取。賓僕有待。賓至如歸。晉有愧辭。謝不敏焉。然則諸侯之國。所以待四方賓客者。尙以授館爲先。況外夷蕃服之於王人乎。惟麗人。恭順有素。而朝廷綏撫有體。故其建立使館。制度華侈。有逾王居。臣嘉之。作館舍圖。

자산(子産)이 정백(鄭伯)의 재상으로 진(晉) 나라에 갔었는데, 진 나라에서는 노(魯)의 국군(國君)이 죽었다는 이유로 그를 만나 주지 않았다. 자산은 그가 든 관사의 담을 깡그리 허물고 거마(車馬)를 거기에다 들였다. 진 나라 사람이 그를 나무라자 이렇게 대답하였다.

 

“문공(文公)께서 맹주(盟主)가 되었을 적에는 궁실은 낮았고 바라볼 누대와 정자가 없었으나, 제후의 관사를 높여 국군의 노침(路寢 국군이 정사를 듣는 정전(正殿))같이 지었고, 창고와 마굿간을 수리하여 거마를 둘 데가 있었고, 빈객에게 대령시킨 하인들이 있었으니, 빈객이 오면 자기 집으로 돌아온 듯하였습니다.”

진 나라에서는 부끄러워져 불민함을 사과하였다. 그런즉 제후의 나라에서 사방에서 오는 빈객을 접대하는 방법조차도 관사를 두는 것을 먼저 할 일로 삼았었거든, 하물며 외이 번복(外夷藩服)이, 왕자가 보낸 사람에 대해서야 더할 나위가 있겠는가? 생각건대, 고려 사람은 본래부터 공손하였고 또 조정에서 위무함이 체모가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관사를 건립한 것에는 제도의 사치스러움이 왕의 거처를 능가하는 점이 있다. 나는 그것을 가상히 여겨 관사도(館舍圖)를 만든다.

[주C-001]관사(館舍) : 사전 일행을 유숙 또는 휴식시킨 각종 건물로, 여기서는 순천관에서의 정ㆍ부사 이하 여러 수행원의 유숙처 배치와 그 환경의 설명이 주요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주D-001]자산(子産)이……않았다. : 정자산(鄭子産)이 진 나라에 갔을 때의 일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양공(襄公) 31년 정월 계유 조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서긍의 이 말은 동서(同書)의 기록을 요약한 것이다.

[주D-002]문공(文公) : 진 문공(晉文公). 만년에 진후(晉侯)가 되어 국세를 일으켜 제 환공의 뒤를 이어 제후의 맹주가 되었다. 《史記 卷39》

 

 

 

-[順天館] 순천관

使副旣奉詔。入城之宣義門。直北行三里許。至京市司。又轉北行五里許。至廣化門。復轉西行二里。過一崗。甚峻稍。向北行一里。卽至順天館也。外門有榜。中門。靑繡衣龍虎軍。守之。惟作上中節上下馬之處。正廳九楹。規模壯偉。工制過於王居。外廊三十間。不置他物。唯館會。則列中下節飮席焉。庭中。有二小亭。當其中。作幕屋三間。昔爲作樂之地。今以王俁。衣制未除。不復見。廳之後。有過道。中建樂賓亭。左右翼兩位。以爲使副居室。內廊各十二位。上節分處之。西位之南。爲館伴官位。其北以奉詔書。兩序。以居道官。東位有堂。爲都轄提轄位。又東爲書狀官位。亦有廊屋甚廣。中下節以次。舟人居之。以北爲上。使副而下。各給房子。以備使令。東位之南。當其中爲淸風閣。西位之北。依山勢爲香林亭。皆開軒對山。淸流環遶。喬松名卉。丹碧交陰。供張器皿。無一不備。先是。王徽建此。以爲別宮。自元豐朝貢之後。無以待中朝人使。故改爲館。而以順天名之。

정사와 부사가 조서를 받들고 성(城)의 선의문(宣義門)으로 들어가서는, 곧장 북으로 3리 가량을 가서 경시사(京市司 본서 제40권 악률(樂律) 조 참조)에 이르고, 또 북으로 돌아 5리 가량을 가 광화문(廣化門)에 이르러 다시 서쪽으로 돌아 2리를 가서 매우 높은 산등성이 하나를 지나 좀 북쪽으로 향해 2리를 가면 곧 순천관(順天館)에 다다른다. 바깥 문에는 방(榜 글씨를 쓴 나무 판)이 있고, 중문은 청수의(靑繡衣) 용호군(龍虎軍)이 지키는데, 다만 상ㆍ중절이 말에 오르고 내리고 하는 곳으로 쓸 뿐이다. 정청(正廳 중앙의 본채)은 9영(楹)인데 규모가 장대하고 건축이 임금의 거처를 능가한다. 외랑(外廊)은 30칸인데 다른 물건은 두지 않고, 단지 관회(館會) 때에만 중ㆍ하절의 술마시는 자리를 거기에 늘어놓을 뿐이다. 뜰 가운데에는 작은 정자 둘이 있고, 그 중간에 막집[幕屋] 3칸을 만들었는데, 전에는 음악을 연주하는 곳이었으나 지금은 왕우(王俁)의 상기가 끝나지 않아 전연 볼 수 없었다.

정청 뒤에 지나 다니는 길이 있고 그 가운데에 낙빈정(樂賓亭)이 세워져 있는데 좌우 두 자리를 정사와 부사의 거실로 하였다. 내랑(內廊)은 각각 12자리인데 상절이 나누어 거처한다. 서쪽 자리의 남쪽이 관반관(館伴官)의 자리이고 그 북에다 조서를 봉안하였다. 양쪽 곁채에는 도관(道官)을 거처시킨다. 동쪽 자리에 당(堂)이 있는데 도할관과 제할관의 자리이고, 또 그 동쪽은 서장관(書狀官)의 자리이다. 역시 낭옥(廊屋)이 있는데 심히 넓어 중ㆍ하절이 차례에 따라 거처하고 뱃사공도 거기에 거처한다. 북쪽을 상석으로 하여, 정사와 부사 이하에 각각 방자를 주어 심부름에 대비시켰다. 동쪽 자리의 남쪽 복판에는 청풍각(淸風閣)을 지었고 서쪽 자리의 북쪽에는 산세(山勢)에 기대어 향림정(香林亭)을 지었는데, 다 창을 열면 산을 대하게 되고 맑은 물이 감돌며 높은 소나무와 이름 있는 화훼(花卉)가 울긋불긋 서로 그늘지우고 있다. 시설물과 기명은 하나도 갖추어지지 않은 게 없다. 앞서 왕휘(王徽고려 문종(文宗))가 이것을 세워서 별궁으로 썼는데 원풍(元豐1078∼1085) 연간에 조공을 바친 뒤부터는 중국의 사신을 접대할 곳이 없기 때문에 고쳐서 관사로 하고 ‘순천(順天)’이라 명명하였다.

 

 

 

-[館廳] 관청

正廳五間。兩廈各二間。不設?戶。通爲九楹。榜曰順天之館。東西兩堦。皆施欄楯。上張錦繡簾幕。其文。多爲翔鸞團花。四面。益張繡花圖障。左右置八角氷壺。惟與國官相見。館中飮會。則升廳焉。使副居其中。自爲賓主。國官分東西。侍坐而已。

정청은 5칸이고, 양쪽 곁방은 각각 2칸씩이고 창문이 마련되어 있지 않은데, 통틀어 9영(楹)이다. 방(榜)에는 ‘순천지관(順天之館)’이라 씌어 있다. 동서 양쪽 층계에는 다 난간이 만들어져 있고, 그 위에는 비단에 수를 놓은 장막이 쳐져 있는데, 그 무늬는 대부분 나는 난새[翔鸞]와 둥근 꽃이다. 사면에는 온통 꽃을 수놓은 그림 병풍을 쳤고, 좌우에는 팔각빙호(八角氷壺)가 놓여 있다. 오직 나라의 관원만 여기서 만나고, 관사 안에서 연회를 할 적에는 정청으로 올라간다. 정사와 부사가 그 가운데 있어 스스로 빈객과 주인이 되고 나라의 관원은 동서로 나뉘어 모시고 앉을 따름이다.

 

 

 

-[詔位] 조위

詔書位。在樂賓之西。館伴位之北。小殿五間。繪飾華煥。兩廊。昔爲押伴,醫官之室。今以爲二道官位。各以官序。分居之。使副入館。先奉安詔書于殿。俟王卜吉日受詔。其日。率三節官。拜于庭。都轄提轄。對捧。上節。前導出館。置采輿中。使副以次從行。

조위는 낙빈정(樂賓亭) 서쪽 관반 자리의 북쪽에 자리잡고 있다. 작은 전각(殿閣)은 5칸인데 그림과 장식이 화려하게 빛난다. 양쪽 행랑은 전에는 압반(押伴)과 의관(醫官)의 방이었는데, 지금은 두 도관(道官)이 각각 관직의 서열에 따라 나뉘어 거처한다. 정사와 부사가 관사에 들어가서는 먼저 전각에 조서를 봉안하고 왕이 길일(吉日)을 잡아 조서 받기를 기다린다. 그날에는 삼절(三節)의 관원을 거느리고 뜰에서 배례하고, 도할관과 제할관이 마주 받들고, 상절이 앞에서 인도하여 관사를 나가 채색가마 속에 놓고 차례대로 따라간다.

 

 

 

-[淸風閣] 청풍각

淸風閣。在館廳之東。都轄提轄位之南。其制五間。下不施柱。唯以栱斗。架疊而成。不張幄幕。然而刻鏤繪飾。丹?華侈。冠於他處。唯以貯所錫禮物。崇觀中。揭名涼風。今易此名耳。

청풍각은 관사의 정청 동쪽, 도할관과 제할관의 자리 남쪽에 있다. 그 건물 제도는 5칸이고, 아래에는 기둥을 쓰지 않고 단지 공두(栱斗)를 포개 쌓아 올려서 이루어졌고 휘장은 치지 않았다. 그러나 아로새기고 채색 단장한 것이 울긋불긋 화려하고 사치한 것이 다른 곳들에 비해 월등하다. 다만 하사하는 예물을 저장할 뿐이다. 숭녕ㆍ대관 연간에는 ‘양풍(?風)’이라는 이름을 내걸었으나, 지금은 이 이름으로 바뀌었다.

[주D-001]공두(栱斗) : 기둥 위에 지붕을 받치도록 둥그렇게 만들어 붙인 것, 그런 형상의 것을 포개 올려서 지주 대신으로 한 것이다.

 

 

 

-[香林亭] 향림정

香林亭。在詔書殿之北。自樂賓亭後。有路登山。去館可百步。當半山之脊。而 太上御名 之。其制四稜。上爲火珠之頂。八面施欄楯。可以據坐。偃松,怪石,女蘿,葛蔓。互相映帶。風至蕭然。不覺有暑氣。使副暇日。每與上節官屬。烹茶抨편001棊於其上。笑談終日。所以快心目。而却炎蒸也。

[편-001]抨: 枰

향림정은 조서전(詔書殿) 북쪽에 있다. 낙빈정 뒤에서부터 길이 나서 산으로 올라가, 관사에서 1백 보 가량 되는 산 중턱 위에 세워져 있다. 그 건물 제도는 사릉(四稜 네 모서리가 뚜렷하게 보이도록 만들어진 것)이고, 화주(火珠 유리로 된 둥근 구슬)의 정수리이고, 8면에 난간이 만들어져 있어 기대어 앉을 수 있다. 누운 소나무와 괴석에 여라(女蘿)와 칡덩굴이 서로 어울리고, 바람이 불면 서늘하여 더위를 느끼지 않게 된다. 정사와 부사는 여유가 있는 날에는 언제나 상절의 관속들과 차를 끓이고 그 위에서 바둑을 두며 종일토록 담소하니, 이는 마음과 눈을 유쾌하게 하고 무더위를 물리치는 방편이었다.

 

 

 

-[使副位] 사부위

使副位。在正廳之後。中建大亭。其制四稜。上出火珠。榜曰樂賓。使位在東。副使位在西。各占三間。中列塗金器皿。陳錦繡?幄。甚盛。庭中。廣植花卉。正北一門。可以登山。卽過香林亭路也。

정사와 부사의 자리는 정청(正廳) 뒤에 있는데, 가운데에 큰 정자가 세워져 있다. 그 건물 제도는 사릉(四稜)에 위는 화주(火珠)이고, 방(榜)에는 ‘낙빈(樂賓)’이라 씌어 있다. 정사의 자리는 동쪽에 있고 부사의 자리는 서쪽에 있는데 각각 3칸씩을 차지했고, 중간에는 금칠한 기명을 늘어놓고 비단 수를 펼쳐 놓았으며 방장[?幄]이 심히 성대하다. 뜰 가운데에는 화훼가 넓게 심어져 있다. 정북(正北)에 있는 한 문으로 해서 산에 오를 수 있는데 그것이 곧 향림정의 길이다.

 

 

 

-[都轄提轄位] 도할제할위

都轄提轄。共處一堂。其制三間。對闢二室。各以官序。分居之。當其中。以爲會食見客之所。前垂青幃。狀類酒帘。室中。各施文羅紅幕。舊不用帳。今亦有之。榻上。施錦茵。復加大席。以錦爲緣。室中器皿。如香奩,酒榼,唾盂,食匜。悉以白金。貯水之具。皆用銅。物物悉備。堂之後。甃石爲池。溪流自山而下。入于其池。滿乃引出于書狀官位。活活有聲。供給之人。下使副一等。餘物稱是。

도할관과 제할관은 한 당(堂)에 함께 거처한다. 그 건물 제도는 3칸으로 마주 틔운 두 방에서 각각 관직 서열에 따라 나뉘어 거처한다. 그 가운데는 회식하고 객을 만나고 하는 장소로 쓴다. 앞에는 푸른색 휘장이 드리워져 있는데, 그 모양이 술집의 방장과 유사하다. 방 안에는 각각 무늬 있는 깁의 붉은 장막이 베풀어져 있는데, 전에는 방장을 사용하지 않았었지만 지금은 역시 그것이 있다. 평상 위에는 비단 보료를 깔았고 다시 큰 자리를 올려 놓았는데 비단으로 단이 둘려져 있다. 방 안의 기명은, 향렴(香? 이 경우는 향을 넣어두는 그릇)ㆍ주합(酒? 술을 담는 그릇)ㆍ타구ㆍ식야(食? 음식을 담는 그릇) 같은 것들이 다 백금(白金 은을 말한다)으로 되어 있고, 물을 담는 제구는 다 동을 썼고, 물건들이 다 갖추어져 있다. 당(堂) 뒤에는 돌을 쌓아 못을 만들었는데, 시냇물이 산에서 내려와 그 못으로 들어간다. 가득차면 서장관의 숙소로 흘러나가는데, 콸콸 소리가 난다. 수행하는 사람은 정사나 부사보다 한등 낮고, 나머지 물건들도 거기에 맞춘다.

 

 

 

-[書狀官位] 서장관위

書狀官位。在都轄,提轄位之東。其堂三間。其制差殺。亦分官序居之。後有一池。與西相通。餘流自東。出于館外。與溪流相合。室中簾幕之屬。與都轄,提轄位。略同。特易銀以銅耳。

서장관의 자리는 도할관과 제할관 동쪽에 있는데, 그 당(堂)은 3칸이고 그 건물 제도는 약간 떨어진다. 역시 관직의 서열로 나누어 거처한다. 뒤에 못이 하나 있어 서쪽과 서로 통하고, 나머지 물은 동쪽으로부터 관사 밖으로 나가 시냇물과 합쳐진다. 방 안의 발ㆍ장막 등속은 도할관과 제할관의 그것들과 대략 같으나, 다만 은이 동(銅)으로 바뀔 뿐이다.

 

 

 

-[西郊亭] 서교정

西郊亭。在宣義門外五里許。庭?雖高。而營治草創。不設?室。唯具食頓而止。各有休憩之次。使者初到。以迄回程。而迎勞飮餞于此。下節舟人。不能盡容。對門起大幕。列坐而飮之。

서교정은 선의문(宣義門) 밖 5리 가량에 있다. 추녀끝이 높기는 하지마는 갓 지어져서 침실은 마련되어 있지 않았고, 오직 식사 도구가 갖추어져 있고, 사자가 처음 도착하고 귀로에 오르고 할 때 여기서 환영ㆍ위로하고 술로 전송하고 한다. 하절(下節)과 뱃사공은 다 들이지 못하므로, 문 맞은쪽에 큰 장막을 치고 죽 앉혀 놓고 술을 먹인다.

 

 

 

-[碧瀾亭] 벽란정

碧瀾亭。在禮成港岸次。距王城三十里。神舟旣抵岸。兵衛金鼔。迎導詔書。入于亭。亭有二位。西曰右碧瀾亭。以奉詔書。東曰左碧瀾亭。以待使副。兩序有室。以處二節人。往來各一宿而去。直東西有道。通王城之路。左右居民。十數家。蓋使節。旣入城。衆舟皆泊于港中。舟人。分番以守。視於此耳。

벽란정은 예성강(禮成江)의 강언덕에 있는데, 왕성(王城)에서 30리 떨어져 있다. 신주(神舟 조서를 실은 사신의 배)가 강언덕에 닿으면 수위병이 징과 북으로 환영하고 조서를 인도하여 벽란정으로 들어간다. 벽란정은 두 자리가 있으니 서쪽을 우벽란정(右碧瀾亭)이라 하여 조서를 봉안하고, 동쪽을 좌벽란정(左碧瀾亭)이라 하여 정사와 부사를 접대한다. 양편에 방이 있어 두 절(節)의 인원을 거처케 하는데, 갈 때와 올 때에 각각 하루씩 묵고 간다. 똑바로 동서로 도로가 있는데, 왕성으로 통하는 길이다. 그 좌우에 10여 호의 주민이 살고 있다. 사절이 성으로 들어가 버리면 뭇 배들은 다 항내에 정박하므로, 뱃사공이 순번을 정해 이곳에서 감시한다.

 

 

 

-[客館] 객관

客館之設。不一。順天之後。有小館十數間。以待遣使,報信之人。迎恩館。在南大街興國寺之南。仁恩館。與迎恩相並。昔曰仙賓。今易此名。皆前此所以待契丹使也。迎仙館。在順天寺北。靈隱館。在長慶宮之西。以待狄人,女眞。興威館。在奉先庫之北。昔嘗以待醫官之所。自南門之外。及兩廊。有館凡四。曰淸州。曰忠州。曰四店。曰利賓。皆所以待中國之商旅。然而卑陋草創。非比順天也。

객관의 시설은 일정하지 않다. 순천관 뒤에는 10여 칸 되는 작은 관사가 있어, 심부름 보내고 소식을 전달시키고 하는 사람들을 접대한다. 영은관(迎恩館)은 남대가(南大街)의 흥국사(興國寺) 남쪽에 있다. 인은관(仁恩館)은 영은관과 나란히 있는데 전에는 ‘선빈(仙賓)’이라고 하였으나, 지금은 이 이름으로 고쳤다. 이것들은 다 이전에 거란[契丹 요(遼)를 말한다]의 사신을 접대하던 곳이다. 영선관(迎仙館)은 순천사(順天寺) 북쪽에 있고, 영은관(靈隱館)은 장경궁(長慶宮) 서쪽에 있는데, 적인(狄人 북방의 오랑캐라는 말)인 여진(女眞 금(金)을 말한다)을 접대한다. 흥위관(興威館)은 봉선고(奉先庫) 북쪽에 있는데, 전에 의관(醫官)을 접대한 일이 있던 곳이다. 남문 밖에서부터 양랑(兩廊)까지에 관사가 도합 넷이 있으니, 청주(淸州)ㆍ충주(忠州)ㆍ사점(四店)ㆍ이빈(利賓)이 그것으로, 다 중국의 상인과 여행자를 접대하는 곳들이다. 그러나 누추하고 허술하여 순천관과는 비교가 안 된다.

[주D-001]의관을……곳이다 : 송 휘종이 고려에 의관(醫官)을 보내 준 일이 있었다. 《高麗史 睿宗十三年》

 

 

 

宣和奉使高麗圖經卷第二十八

供張[一]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28 권

공장 1

 

 

 

 

 

-[供張] 공장

臣聞周官掌次。掌王次之法。以待張事。諸侯朝覲,會同。則張大次小次。師田。則張幕設桉。夫王者之待諸侯。疑若其禮可簡。然當朝覲,會同,師田之時。尙且供張次舍。如此勤至。又況海外小侯。尊奉王人。則鋪張辦設。豈可苟哉。高麗自王氏以來。世爲本朝藩屛。而主上所以鎭撫之者。恩德厚甚。故每使節適彼。而供張之具。極華煥也。蓼蕭澤及四海之詩曰。鞗革沖沖。和鸞雝雝。蓋卽其儀物之中禮。可以見其享上之心。今謹敍麗人所以祗待使華者。作供張圖。

 

주관(周官 즉 《주례(周禮)》)의 장차(掌次)는 왕의 위차(位次 행사나 의례시 나가서 머무는 장소)의 법도를 관장하여서 장막을 치는 일에 대비한다. 제후의 조근(朝覲)과 회동(會同)에는 대차(大次)와 소차(小次)를 치고, 사전(師田 군대의 이동과 사냥)에는 막을 치고 상을 마련해 놓는다. 왕자(王者)가 제후를 접대하는 것은 그 예를 간략하게 하여도 좋을 게 아닌가 생각되기도 하지만, 그러나 조근ㆍ회동ㆍ사전을 거행할 때에 머물러 있을 곳을 이토록 철저하게 시설했는데, 하물며 해외의 작은 제후가 왕이 보낸 사람을 높이 받들 경우 시설하고 마련해 놓고 하는 일을 어찌 구차스럽게 할 수 있으랴! 고려(여기서는 한인의 고장을 일반적으로 가리켜서 한 말이다)는 왕씨(王氏) 이래로 대대로 본조(本朝)의 번병(藩屛)이 되어 왔고, 주상께서 진무(鎭撫)하신 은덕이 심히 후하였기 때문에 언제나 사절이 그곳에 가면 시설하는 제구가 극히 화려하고 찬란하였다. 은택이 사해에 미쳐감을 쓴 육소(蓼蕭 《시경》 소아(小雅)의 편명이다)의 시에, ‘고삐 끝 드리워져 있고, 방울 소리 절렁인다.’ 한 것은 곧 그 의물(儀物 의장으로 쓰인 물건들)이 예에 맞음을 말한 것으로 그들이 임금을 즐겁게 하려는 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삼가 고려인이 중국의 사절을 공경스럽게 접대한 것을 서술하여 공장도(供張圖)를 만든다.

[주D-001]장차(掌次)는……한다 : 장차는 《주례》의 천관(天官)에 속하는 관원으로, 국군이 궁외에 출어할 때 그 경우에 따라 머물러 쉬는 장소를 법도에 맞게 마련하여 장막 등 시설을 하도록 지휘 감독하는 관원이다. 이 대목은 주례의 해당 부분을 요약 인용한 것이다. 《周禮 卷6》

[주D-002]은택이……절렁인다 : ‘은택’ 운운은 육소(蓼蕭) 소서(小序)에 나오는 말이며, 인용한 구절은 동 제4장 제4∼5구.

 

 

 

-[纈幕] 힐막

 

 

纈幕。非古也。先儒謂繫繒染爲文者。謂之纈。麗俗。今治纈尤工。其質。本文羅。花色。卽黃白相閒。爛然可觀。其花上。爲火珠。四垂寶網。下有蓮臺花坐。如釋氏所謂浮屠狀。然猶非貴人所用。惟江亭客館。於屬官位。設之。

 

힐막은 옛 제도는 아니다. 선유(先儒)들의 말로는, 비단을 이어서 물들여 무늬를 만든 것을 ‘힐’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고려의 습속은, 지금 힐을 만드는 것이 더욱 정교하다. 그 바탕은 본래 무늬 깁이고 도안의 빛깔은 곧 황색과 백색이 서로 섞인 것이어서 찬란하여 볼만하다. 그 도안의 위는 화주(火珠)이고 사방 끝에 보망(寶網)을 드리웠고, 아래는 연대화좌(蓮臺花座)가 있는데 불가에서 말하는 부도(浮屠) 형상과 같다. 그것은 그래도 귀인이 쓰는 것은 아니고 강가의 정자나 객관(客館)의 속관(屬官) 자리에 설치한다.

 

 

-[繡幕] 수막

繡幕之飾。五采閒錯而成。不爲橫縫。逐幅自上垂下。亦有鷄䳵,翔鸞,花團等樣。而紅黃爲勝。其質。本文紅羅。唯順天館詔殿,正廳,使副位,會慶乾德殿公會。則設之。

수막의 장식은 오색이 뒤섞여서 이루어진 것으로, 가로로 꿰매지 않고 한 폭씩을 위에서 아래로 드리웠다. 여기에도 원앙새ㆍ나는 난새ㆍ꽃떨기 등의 문양(紋樣)이 있는데 홍색과 황색이 강하고, 그 바탕은 본래 무늬 있는 붉은 깁이다. 오직 순천관의 조전(詔殿)ㆍ정청ㆍ정사와 부사의 자리 및 회경전(會慶殿)과 건덕전(乾德殿)의 공회(公會)에만 설치한다.

 

 

 

-[繡圖] 수도

繡圖。紅身綠襈。五采閒錯。山花戲獸。工巧過於繡幕。亦有花竹,翎毛,果實之類。各有生意。國俗。張帟幕。每十餘幅。則挂一圖。閒之。不以皆當堂奧之中也。

 

수도는 붉은 바탕에 초록색 단을 둘렀고 오색이 뒤섞여 있으며, 산꽃과 노는 짐승의 정교함이 수막을 능가한다. 화죽ㆍ영모(翎毛 새나 짐승을 말한다)ㆍ과실 따위도 있는데 각기 다 생기가 있다. 이 나라의 습속으로는, 장막을 10여 폭 칠 때마다 그림 하나씩을 걸어서 사이를 띄우는데, 그것이 대청 속 복판을 차지하게는 하지 않는다.

 

 

 

-[坐榻] 좌탑

坐榻之制。四稜無飾。其上。鋪大席靑襈。而設於館中過道閒。蓋官屬從吏。憩息之具也。

좌탑의 제도는 네 모서리에 장식이 없고, 그 위에 푸른색 단을 두른 큰 자리를 깐다. 그리고 그것을 관사 안의 지나 다니는 길 사이에 설치하는데, 이는 관속과 수종 관리가 쉬는 제구이다.

 

 

 

-[燕臺] 연대

燕臺之狀。如中國之有几桉也。四角殺其銳。白藤穿花。面分四隔。而以丹漆爲飾。益以塗金裝釘。復增紅羅繡幃。四面垂帶。相比如羽。惟王楷。以俁未終制。易紅爲紫耳。坐牀之制。與中國同。而高大。多三分之一。

 

연대(좌석 앞에 놓는 상)의 모양은 중국의 궤안(几案)과 같다. 네 모서리는 예각을 없애고 백색의 등넝쿨이 꽃을 뚫고 나가 있다. 대면(臺面)은 네 군데로 나뉘어져 붉은 칠로 단장되었고 금칠한 장식못이 붙어 있다. 다시 붉은 비단 휘장[繡?]이 둘려 있는데, 사면에 띠가 드리워져 그것들이 서로 나란히 걸려 있는 것이 날개와 같다. 다만 왕해(王楷 고려 인종의 이름)가 우(俁 고려 예종(睿宗)의 이름)의 상기가 끝나지 않았다 해서 붉은색을 자주색으로 바꾸었을 뿐이다. 좌상(坐床)의 제도는 중국의 그것과 같으나 높이와 크기가 3분의 1이 더 하다.

 

 

 

-[光明臺] 광명대

光明臺。檠燈燭之具也。下有三足。中立一幹。形狀如竹。逐節相承。上有一盤。中置一甌。甌中有可以然燭。若然燈則易以銅釭。貯油立炬。鎭以小白石。而絳紗籠之。高四尺五寸。盤面。闊一尺五寸。罩高六寸。闊五寸。

광명대는 등불과 촛불을 받치는 제구이다. 아래에 세 발이 있고 가운데 한 줄기가 있는데, 형상이 대나무와 같아 마디 하나씩으로 이어진다. 위에는 쟁반이 하나 있고, 그 가운데 사발 하나가 놓여 있고, 그 사발에는 받침이 있어 촛불을 켤 수 있게 하였다. 등불을 켜려면 구리 항아리로 바꿔서 기름을 담고 심지를 세워 작은 흰 돌로 눌러 놓고서, 붉은 사포(紗布)로 덮어 씌운다. 높이는 4척 5촌이고 쟁반의 너비는 1척 5촌이고 삿갓은 높이가 6촌이고 너비가 5촌이다.

 

 

 

-[丹漆俎] 단칠조

丹漆俎。蓋王宮平日所用也。坐於榻上。而以器皿。登俎對食。故飮食。以俎數多寡。分尊卑。使副入館。日饋三食。食以五俎。其器皿。悉皆黃金塗之。凡俎。從廣三尺。橫二尺。高二尺五寸。

단칠조(붉은 칠을 한 적대)는 왕궁(王宮)에서 평일에 사용하는 것이다. 평상 위에 앉아서 기명을 적대에 올려놓고 그 앞에서 먹기 때문에, 음식은 적대의 수효와 다과로 존비가 나누어진다. 정사와 부사가 관사에 들면 매일 세 끼씩을 공급하는데, 한 끼는 다섯 적대씩이고, 그 기명은 다 황금이 칠해져 있다. 적대의 크기는 너비가 3척, 가로는 2척, 높이는 2척 5촌이다.

 

 

 

-[黑漆俎] 흑칠조

食俎之制。大小一等。特紅黑之異。都轄提轄。及上節。館中。日饋三食。食以三俎。中節二俎。下節。則以連床。每五人。並一席而食之。

 

식사용 적대의 제도는 크기가 같으나 단지 붉고 검은 차이가 있을 뿐이다. 도할관(都轄官)과 제할관(提轄官) 및 상절(上節)에게는 관사 안에서는 매일 세 끼씩을 공급하는데, 한 끼는 세 적대씩이고 중절은 두 적대씩이다. 하절은 상을 붙여 놓고 다섯 사람씩 한자리에서 식사를 한다.

 

 

 

-[臥榻] 와탑

臥榻之前。更施矮榻。三面立欄楯。各施錦綺茵褥。復加大席。莞簟之安。殊不覺有夷風。然此特國王貴臣之禮。兼以待使華也。若民庶。則多爲土榻。穴地爲火炕。臥之。蓋其國。冬月極寒。復少纊絮之屬爾。

 

와탑(침상) 앞에는 또 낮은 평상 세 틀이 놓여 있고 난간이 세워져 있는데, 각각 무늬비단 보료가 깔려 있다. 또 큰 자리가 놓여 있는데 돗자리의 편안함은 전연 이풍(夷風 오랑캐 풍속)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국왕과 귀한 신하에 대한 예(禮)이고 아울러 그것으로 중국의 사신을 접대하는 것일 뿐이다. 서민들은 대부분 흙 침상이며, 땅을 파서 아궁이를 만들고 그 위에 눕는다. 고려는 겨울철이 극히 춥고, 또 솜 등 속이 적기 때문이다.

 

 

 

-[文席] 문석

文席。精粗不等。精巧者。施於床榻。粗者。用以藉地。織草性柔。摺屈不損。黑白二色。閒錯成文。靑紫爲襈。初無定制。

문석은 곱고 거칠고 한 것이 일정하지 않다. 정교한 것은 침상과 평상에 깔고 거친 것은 땅에 까는 데 쓴다. 짠 풀은 부드러워서 접거나 굽혀도 망가지지 않는다. 흑ㆍ백 두 색이 서로 섞여서 무늬를 이루고, 청자색으로 단을 둘렀는데 본래 일정한 제도가 없다.

 

 

-[門帷] 문유

門帷之制。靑絹三幅。上有提襻。而橫木貫之。狀如酒旂。蓋宮室之中。婦人。用以映蔽之具也。

문유의 제도는 푸른 비단 세 폭인데, 위에 거는 고리가 있어 거기에 가로 나무를 꿴다. 모양은 술집의 깃발과 같다. 궁실 안에서 부인들이 가리는 데 쓰는 제구이다.

 

 

 

 

宣和奉使高麗圖經卷第二十九

供張[二]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29 권

공장 2

 

 

 

 

 

-[繡枕] 수침

繡枕之形。白紵爲囊。中實以香草。兩頭蹙金盤綫。花文極巧。復以絳羅裝飾。如蓮荷之狀。三節供給。其制一等。

수침의 형태는, 흰 모시로 자루를 만들어 그 속을 향초(香草)로 채우고, 양쪽 끝을 금색 마구리에 실로 수놓은 꽃이 있는 것으로 마무렸는데, 무늬가 극히 정교하다. 또 붉은 깁으로 장식한 것이 연잎 형상과 같다. 삼절(三節)에 공급되는데, 그 제도가 같다.

 

 

 

-[寑衣] 침의

寑衣之制。紅黃爲表。而以白紵裏之。裏大於表。四邊各餘一尺。

침의의 제도는, 홍황색으로 겉감을 하고 흰 모시로 안을 댔는데, 안이 겉감보다 크고 네 변두리가 각각 1척이 넘는다.

 

 

 

-[紵裳] 저상

紵裳之制。表裏六幅。要不用橫帛。而繫二帶。三節每位。各與紵衣同設。以待沐浴之用。

저상의 제도는, 겉감과 안이 6폭인데, 허리에는 가로 두른 깁을 쓰지 않고 두 개의 띠가 매어져 있다. 삼절의 자리마다 각각 저의(紵衣)와 함께 마련하여 놓게 해서 목욕할 때 쓰도록 한다.

 

 

 

-[紵衣] 저의

紵衣。卽中單也。夷俗不用純領。自王至于民庶。無男女悉服之。

저의는 곧 속에 입는 홑옷이다. 동이의 풍속은 준(純 가장자리에 두른 선)과 영(領 옷깃)을 쓰지 않고, 왕에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남녀 없이 다 저의를 입었다.

 

 

 

-[畫榻扇] 화탑선

畫榻扇。金銀塗飾。復繪其國山林,人馬,女子之形。麗人不能之。云是日本所作。觀其所繢衣物。信然。

화탑선은 금은을 칠해서 장식하고 거기다 그 나라의 산림(山林)ㆍ인마(人馬)ㆍ여자(女子)의 형태를 그렸다. 고려인들은 만들지 못하고 일본에서 만든 것이라고 하는데, 거기에 그린 의복을 보니 정말 그러했다.

 

 

 

-[杉扇] 삼선

杉扇。不甚工。惟以日本白杉木。劈削如紙。貫以采組。相比如羽。亦可招風。

삼선은 그리 잘 만들지 못한다. 단지 일본의 백삼목(白杉木)을 종이같이 쪼개어서 채색 실로 꿰어 깃과 같이 이어나간 것으로, 역시 바람을 낼 수 있다.

 

 

-[白摺扇] 백접선

白摺扇。編竹爲骨。而裁藤紙鞔之。間用銀銅釘飾。以竹數多者爲貴。供給趨事之人。藏於懷袖之間。其用甚便。

백접선은 대를 엮어서 뼈대를 만들고 등지(藤紙)를 말라서 덮어씌우는데, 간혹 은ㆍ동의 못으로 장식하기도 한다. 대의 수효가 많은 것을 좋은 것으로 친다. 심부름을 하거나 일이 바쁜 사람들이 가슴에 품거나 소매 속에 넣고 다니는데, 쓰기가 퍽 간편하다.

 

 

 

-[松扇] 송선

松扇。取松之柔條。細削成縷。搥壓成綫。而後織成。上有花文。不減穿藤之巧。唯王府所遺使者。最工。

송선(松扇)은 소나무의 부드러운 가지를 가져다가 가늘게 깎아서 줄을 만들고, 그것을 두드려 실로 만든 후에 짜낸 것이다. 위에는 꽃무늬가 있는데 꽃을 뚫고 간 등의 기교[穿藤之巧]에 못지 않다. 다만 왕부(王府)에서 사자(使者)에게 준 것이 가장 잘 만들어졌다.

[주D-001]송선(松扇) : 《패문운부(佩文韻府)》에 인용된 화계(畫繼)의 설명에 따르면, 이 서긍의 말과는 달리, 수류목(水柳木)의 껍질로 만든 것으로, 그 무늬가 소나무와 흡사해서 송선이라고 하였다.

[주D-002]꽃을 뚫고 간 등 : 이것은 ‘穿花’를 옮긴 것으로, 본서 제28권 연대(燕臺) 조의 ‘白藤穿花’와 같은 뜻으로 취했다.

 

 

-[草屨] 초구

草屨之形。前低後卬。形狀詭異。國中無男女少長。悉履之。

초구(짚신)의 형태는 앞쪽이 낮고 뒤쪽이 높아 그 모양이 괴이하나, 전국에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다 신는다.

 

 

 

 

宣和奉使高麗圖經卷第三十

器皿[一]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30 권

기명 1

 

-[器皿] 기명

臣聞前史。稱東夷器用俎。今高麗土俗猶然。觀其制作。古朴頗可愛尙。至於他飮食器。亦往往有尊彝簠簋之狀。而燕飮陳設。又多類於莞蕈几席。蓋染箕子美化而仿佛三代遺風也。謹掇其槩圖之。

전대의 역사에 이르기를, ‘동이(東夷)는 그릇에 적대를 쓴다.’고 하였는데, 이제 고려의 토속(土俗)도 여전히 그러하다. 만듦새를 보면 예사스럽게 소박함이 자못 사랑스럽고, 다른 식기들도 왕왕 준이(尊彝)와 보궤(簠簋)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연음(燕飮) 때의 시설에도 또 완담(莞蕈)과 궤석(几席)과 유사한 것들이 많다. 이는 대체로 기자(箕子)의 아름다운 교화에 물들어서 삼대(三代)의 유풍에 방불해진 것이다. 그 개략을 모아서 그림으로 보인다.

 

[주D-001]준이(尊彝) : 중국 고대의 예기(禮器)로 육준(六尊)과 육이(六彝)를 말함. 사준(犧尊)ㆍ상준(象尊)ㆍ착준(著尊)ㆍ호준(壺尊)ㆍ태준(太尊)ㆍ산준(山尊) 및 계이(雞彝)ㆍ조이(鳥彝)ㆍ황이(黃彝)ㆍ호이(虎彝)ㆍ유이(蜼彝)ㆍ가이(斝彝)가 그것이다.

[주D-002]보궤(簠簋) : 중국 고대의 예기(禮器). 보(簠)는 외방내원(外方內圓), 궤(簋)는 내원내방의 용기.

[주D-003]완점(莞簟) : 초석과 대자리. 역시 중국 고대의 예기(禮器). 《예기(禮記)》 권10 예기(禮器)에는 ‘완점(莞簟)’으로 나온다.

[주D-004]궤석(几席) : 팔받침과 자리로, 고대에 앉을 때 몸을 편하게 하기 위해 쓰이던 제구.

[주D-005]유사한 것들이 많다 : 고려의 기물에는 중국의 고풍을 지니고 있는 것들이 많다는 이야기다.

 

 

 

-[獸爐] 수로

子母獸爐。以銀爲之。刻鏤制度精巧。大獸。蹲踞。小獸。作搏攫之形。返視張口。用以出香。惟會慶,乾德公會。則置于兩楹之閒。迎詔。焚麝香。公會則爇篤耨,龍腦,旃檀,沈水之屬。皆御府所賜香也。每隻。用銀三十斤。獸形連坐高四尺。闊二尺二寸。

자모수로(子母獸爐 짐승 모자의 형상으로 된 향로)는 은으로 만드는데, 조각하고 아로새기고 하여 만듦새가 정교하다. 큰 짐승이 쭈그리고 앉아 있고 작은 짐승은 움켜 쥐는 형상으로 뒤돌아보며 입을 벌리고 있는데, 그 입으로 향기를 낸다. 오직 회경전(會慶殿)과 건덕전(乾德殿)의 공회(公會) 때에만 두 기둥 사이에 놓는 것으로 영조(迎詔) 때에는 사향을 피우고, 공회 때에는 독누(篤耨)ㆍ용뇌(龍腦)ㆍ전단(旃檀)ㆍ침수(沈水) 등속을 태우는데, 그것들은 다 어부(御府)에서 하사한 향이다. 하나에 은 30근을 썼고, 짐승의 형태가 받침에 연결되어 있는데, 높이가 4척이고 너비가 2척 2촌이다.

 

[주D-001]독누(篤耨) : 향목(香木)으로, 그 수지(樹脂)를 향으로 쓴다. 독누향.

[주D-002]용뇌(龍腦) : 용뇌향목의 수간(樹幹)에서 추출하는 향인데, 그 종류가 많다.

[주D-003]전단(旃檀) : 열대산 향나무로, 그 수간을 저며서 피우면 좋은 향기를 풍긴다.

[주D-004]침수(沈水) : 침수향. 침향(沈香)의 별칭임. 향목의 굳은 목심(木心) 부분으로 물에 가라앉는 것이 향기가 짙은 것으로 알려져 왔다.

 

 

 

-[水甁] 수병

水甁之形。略如中國之酒注也。其制。如銀三斤。使副與都轄,提轄官位設之。高一尺二寸。腹徑七寸。量容六升。

수병의 형태는 대략 중국의 주주(酒注 술 주전자)와 같다. 그것을 만드는 데는 은 3근을 쓰며, 정사ㆍ부사ㆍ도할관ㆍ제할관의 자리에 설치한다. 높이는 1척 2촌, 배의 지름은 7촌, 용량은 6승이다.

 

 

 

-[盤琖] 반잔

盤琖之制。皆似中國。惟?深而?斂。舟小而足高。以銀爲之。間以金塗。鏤花工巧。每至勸酒。則易別杯。第量容。差多耳。

 

반잔(술받침대가 있는 술잔)의 만듦새는 다 중국의 것과 같다. 다만 잔은 깊고 테두리가 오므라졌고, 주(舟 담기는 부분)는 작고 발이 높다. 은으로 만들고, 간혹 금으로 칠하기도 하고 꽃을 아로새긴 것이 재치가 있다. 권주(勸酒)할 때마다 다른 술잔으로 바꾸는데, 다만 용량이 약간 많을 뿐이다.

 

 

-[博山爐] 박산로

博山爐。本漢器也。海中有山。名博山。形如蓮花。故香爐取象。下有一盆。作山海波濤魚龍出沒之狀。以備貯湯薰衣之用。蓋欲其濕氣相著。煙不散耳。今麗人所作。其上頂。雖象形。而下爲三足。殊失元制。但工巧可取。

박산로는 본래 한대(漢代)의 기물이다. 바다 안에 박산이란 이름의 산이 있는데, 그 형상이 연꽃 같기 때문에 향로에 그 형상을 본따 쓴 것이다. 아래에 분(盆)이 있는데, 거기에 산과 바다에 파도치고 물고기와 용이 출몰하는 형상을 만들어서 끓는 물을 담아 옷에 향기를 쏘이는 용도에 쓴다. 그것은 습기와 향기가 서로 붙어서 연기가 흩어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고려 사람이 만든 것은 그 꼭대기는 비록 박산의 형상을 본떴다고는 하지만 그 아래는 세 발이어서 원래의 만듦새와는 아주 다르다. 다만 재치 있는 솜씨는 취할 만하다.

 

 

 

-[酒榼] 주합

酒榼。蓋提挈之器也。兩耳。有流連環提紐。以金間塗之。惟勸酒則特用。而酒色味皆勝。其制高一尺。闊八寸。提環長。一尺二寸。量容七升。

주합(술 그릇의 일종)은 들고 다니는 기물이다. 위는 뒤집어씌운 연잎으로 되고 양쪽 귀에는 고리사슬로 된 드는 끈이 있는데, 금으로 간혹 칠했다. 권주(勸酒)의 절차에만 쓰고 술은 빛깔과 맛이 다 좋다. 그 만듦새는 높이가 1척, 너비가 8촌, 드는 고리의 길이가 1척 2촌, 용량이 7승이다.

 

 

 

-[烏花洗] 오화세

銀花。不常用。唯使副私覿。有之。點藥鏤花。烏文白質。輕重不等。面闊一尺五寸。量容一斗二升。

 

은꽃무늬의 것은 늘 사용하지는 않고 단지 정사와 부사의 사적(私覿) 때에만 있다. 약을 찍어서 꽃을 아로새겼고 검정 무늬에 횐 바탕인데 무게는 같지 않다. 면의 너비는 1척 5촌이고 용량은 1두 2승이다.

[주C-001]오화세(烏花洗) : 검은꽃 무늬가 있는 세수대야.

[주D-001]사적(私覿) : 사적(私的)인 입장에서 면회하는 의식으로 여기서는 북송의 사신 일행을 국왕이 계급의 차례대로 접견하는 의식을 두고 한 말이다.

 

 

 

-[面藥壺] 면약호

面藥壺。唯使副都轄,提轄位。用銀。餘以銅爲之。圓腹脩頸。蓋形稍銳。高五寸。腹徑三寸五分。量容一升。

면약호는 오직 정사ㆍ부사ㆍ도할관ㆍ제할관의 자리에만 은제(銀製)를 사용하고 나머지는 동으로 만들었다. 둥근 배에 긴 목으로 되어 있는데, 뚜껑의 형태는 좀 뾰족하다. 높이는 5촌, 배의 지름은 3촌 5푼, 용량은 1승이다.

[주C-001]면약호(面藥壺) : 안면에 바르는 약물을 넣는 병. 면약을 바르면 추위와 더위를 막는다고 한다.

 

 

 

-[芙蓉尊] 부용준

酒尊之形。上有蓋。如芙蓉花之方苞也。閒金塗飾。長頸廣腹。高二尺。量容一斗二升。

부용준의 형상은 위에 뚜껑이 있는데, 부용꽃이 막 봉우리진 것 같다. 간혹 금으로 칠해 장식하였고, 긴 목에 넓은 배를 하고 있다. 높이는 2척이고 용량은 1두 2승이다.

 

 

 

-[提甁] 제병

提甁之狀。頭長而上銳。腹大而底平。其制八稜。閒用塗金。中貯米漿熟水。國官貴人。每令親侍。挈以自隨。大小不等。大者容二升。

제병(들고 다니는 물 그릇)의 형상은, 머리가 길고 위가 뾰족하고 배가 크고 바닥이 평평하다. 그 만듦새는 여덟 모서리로 간혹 도금한 것을 쓴다. 속에는 숭늉이나 끓인 물을 넣는다. 나라의 관원과 존귀한 사람은 언제나 가까이 시중하는 자를 시켜 그것을 들고 따라다니게 한다. 크기는 같지 않고, 큰 것은 2승이 들어간다.

 

 

 

 

 

 

宣和奉使高麗圖經卷第三十一

器皿[二]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31 권

기명 2

 

 

 

 

 

-[油盎] 유앙

油盎之狀。略如酒尊。白銅爲之。其上無蓋。恐其傾覆。而以木楔窒之。高八寸。腹徑三寸。量容一升五勺。

유앙(기름병)의 형상은 대략 술두루미와 같다. 백동(白銅)으로 만들었는데, 위에 뚜껑이 없다. 쓰러질까 염려하여 나무쐐기로 밑을 막는다. 높이는 8촌, 배의 지름은 3촌, 용량은 1승 5작이다.

 

 

 

-[淨甁] 정병

淨甁之狀。長頸脩腹。旁有一流。中爲兩節。仍有轆轤。蓋頸中閒。有隔。隔之上。復有小頸。象簪筆形。貴人,國官,觀寺,民舍。皆用之。惟可貯水。高一尺二寸。腹徑四寸。量容三升。

정병의 형상은 긴 목과 넓은 배의 옆에 부리가 하나 있고 중간은 두 마디로 되어 있으며 테가 있다. 뚜껑 목 중간에 턱이 있고 턱 위에 다시 작은 목이 있는데, 잠필(簪筆)의 형태를 본떴다. 존귀한 사람과 나라의 관원과 관사(觀寺 도관과 사찰), 민가에서 다 쓰는데 다만 물을 담을 수 있을 뿐이다. 높이는 1척 2촌, 배의 지름은 4촌, 용량은 3승이다.

 

 

 

-[花壺] 화호

花壺之制。上銳下圓。略如垂膽。仍有方坐。四時貯水簪花。舊年不甚作。邇來頗能之。通高八寸。腹徑三寸。量容一升。

화호의 만듦새는 위가 뾰족하고 아래가 둥글어, 대략 달아맨 쓸개와 같다. 역시 네모난 받침이 있고, 사시 물을 담아 꽃을 꽂는다. 전에는 잘 만들지 못했지만 근래에는 꽤 잘 만든다. 전체 높이가 8촌, 배 지름이 3촌, 용량이 1승이다.

 

 

 

-[水釜] 수부

水釜之形。狀如?鼎。以銅鑄成。有二獸環。貫木可以負荷。麗人方言。無大小。皆謂之㑃僕射。館中諸房。皆給之。高一尺五寸。闊三尺。量容一石二斗。

수부의 만듦새는, 형상이 격정(?鼎 세발솥을 총칭한 말) 같은데 동(銅)으로 주조하였다. 두 개의 짐승모양 고리가 있어 거기에 나무를 꿰면 짊어질 수가 있다. 고려인의 방언으로는 큰 것 작은 것을 막론하고 다 요복야(㑃僕射)라 하는데, 관사 안의 여러 방에 다 공급한다. 높이는 1척 5촌, 너비는 3척, 용량은 1석 2두이다.

[주D-001]요복야(㑃僕射) : 당시 고려에서 쓰이던 우리 말을 취음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지금으로서는 짐작이 가지 않는다.

 

 

 

-[水甖] 수앵

水甖。如水釜之形。而差小。仍有銅蓋。用以汲水。以象中國之水桶也。上有二耳。可以攀挈。麗俗。便於負戴。故此器最多。高一尺。腹徑一尺二寸。量容一斗二升。

수앵(물통)은 수부(水釜)의 형태와 같으나 약간 작고, 또 동제 뚜껑이 있다. 그것을 써서 물을 긷는 것으로 중국의 수통(水桶)을 본뜬 것이다. 위에 두 개의 귀가 있어서 쳐들 수 있다. 고려의 풍속은 지고 이고 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이 그릇이 가장 많다. 높이는 1척, 배의 지름은 1척2촌, 용량은 1두 2승이다.

 

 

 

-[湯壺] 탕호

湯壺之形。如花壺而差匾。上蓋下座。不使泄氣。亦古溫器之屬也。麗人烹茶。多設此壺。通高一尺八寸。腹徑一尺。量容二斗。

탕호(더운 물을 담는 그릇)의 형태는 화호(花壺)와 같으면서 약간 납작하다. 위에는 뚜껑을 하고 아래는 받침을 하여 더운 기운이 새나가지 않게 하였으니, 역시 옛 온기(溫器)의 부류이다. 고려인이 차를 끓일 때 많이들 이 호(壺)를 마련한다. 전체 높이는 1척 8촌, 배의 지름은 1척, 용량은 2두이다.

 

 

 

-[白銅洗] 백동세

白銅洗之形。與烏銀者相似。特無文采。而麗人。謂之氷盆。又有一等赤銅者。制作差劣。

백동세(백동으로 만든 대야)의 형태는 오화세(烏花洗)ㆍ은화세와 흡사하나 단지 문채가 없다. 고려인은 그것을 빙분(氷盆)이라 한다. 또 한등 낮은 적동(赤銅)으로 된 것이 있는데 만듦새가 약간 졸렬하다.

 

 

 

-[鼎爐] 정로

鼎爐之制。略如博山。上無花蓋。下有三足。惟觀寺神祠。用之。高一尺。頂闊六寸。下盤闊八寸。

정로의 만듦새는 대략 박산로와 같은데, 위에 꽃모양의 뚜껑이 없고 아래에는 세 발이 있다. 단지 관사(觀寺)와 신사(神祠)에서만 그것을 쓴다. 높이는 1척, 꼭대기의 너비는 6촌, 아래의 쟁반은 너비가 8촌이다.

 

 

 

-[溫爐] 온로

溫爐之形。如鼎而有偃唇。腹下三足。爲獸銜之狀。用以貯水。置之几桉。蓋冬月溫手之器也。面闊一尺二寸。高八寸。

온로의 형태는 정(鼎)과 같은데 전이 있고, 배 아래의 세 발은 짐승이 물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그것에 물을 담아서 궤안(?案)에 놓아 두는데, 이는 겨울철에 손을 데우는 기물이다. 면의 너비는 1척 2촌이고, 높이는 8촌이다.

 

 

 

-[巨鐘] 거종

大鐘。在普濟寺。形大而聲不揚。上有螭紐。中有雙飛仙。刻銘曰。甲戌年鑄。用白銅一萬五千斤。麗人云。昔者。置之重樓。聲聞契丹。單于惡之。今移於此。亮其誇大之言。未必然也。

큰 종은 보제사(普濟寺)에 있는데, 형체는 크나 소리는 시원하지 않다. 위에는 이뉴(螭紐 이무기를 새긴 종을 매다는 부분)가 있고, 중간에는 한쌍의 비선(飛仙)이 있다. 각명(刻銘)은, ‘갑술년주 용백동 1만 5천 근(甲戌年鑄用白銅一萬五千斤)’이라고 되어 있다. 고려인이 말하기를, ‘전에는 중루(重樓 이중의 높은 전각)에 설치했었는데, 소리가 거란[契丹]에까지 들리므로 선우(單于 본래는 흉노(匈奴)의 군장, 여기서는 물론 요(遼)의 군주를 말하는 것이다)가 싫어하여 지금은 이곳에 옮긴 것’이라고 한다. 틀림없이 과장한 말로 반드시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주D-001]보제사(普濟寺) : 개성부의 도성 중앙부에 있던 불사로, 후에는 연복사(演福寺)로 개칭하였다. 《東國輿地勝覽 卷4 開城府上》

[주D-002]갑술년주……있다 : 갑술년은 고려 선종(宣宗) 11년(1094), 이때에는 요(遼)의 세력이 퍽 강성했었다.

 

 

 

 

宣和奉使高麗圖經卷第三十二

器皿[三]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32 권

기명 3

 

 

 

 

 

-[茶俎] 다조

土產茶。味苦澁。不可入口。惟貴中國臘茶。幷龍鳳賜團。自錫賚之外。商賈亦通販。故邇來。頗喜飮茶。益治茶具。金花烏盞,翡色小甌,銀爐湯鼎。皆竊效中國制度。凡宴則烹於廷中。覆以銀荷。徐步而進。候贊者云。茶遍乃得飮。未嘗不飮冷茶矣。館中。以紅俎。布列茶具於其中。而以紅紗巾羃之。日嘗三供茶。而繼之以湯。麗人。謂湯爲藥。每見使人飮盡。必喜。或不能盡。以爲慢己。必怏怏而去。故常勉强。爲之啜也。

 

토산다(土産茶)는 쓰고 떫어 입에 넣을 수 없고, 오직 중국의 납다(臘茶)와 용봉사단(龍鳳賜團)을 귀하게 여긴다. 하사해 준 것 이외에 상인들 역시 가져다 팔기 때문에 근래에는 차 마시기를 자못 좋아하여 더욱 차의 제구를 만든다. 금화오잔(金花烏盞)ㆍ비색소구(翡色小甌)ㆍ은로탕정(銀爐湯鼎)은 다 중국 제도를 흉내낸 것들이다. 무릇 연회 때면 뜰 가운데서 차를 끓여서 은하(銀荷 은으로 만든 연잎 형상을 한 작은 쟁반)로 덮어가지고 천천히 걸어와서 내놓는다. 그런데 찬자(贊者)가 ‘차를 다 돌렸소’하고 말한 뒤에야 마실 수 있으므로 으레 냉차(冷茶)부터 마시게 마련이다. 관사 안에는 홍조(紅俎)를 놓고 그 위에다 차의 제구를 두루 진열한 다음 홍사건(紅紗巾 붉은 색의 사포로 만든 상보)으로 덮는다. 매일 세 차례씩 내는 차를 맛보게 되는데, 뒤어어 또 탕(湯 끓인 물)을 낸다. 고려인은 탕을 약(藥)이라고 하는데, 사신들이 그것을 다 마시는 것을 보면 반드시 기뻐하고, 혹 다 마셔내지 못하면 자기를 깔본다고 생각하면서 불쾌해져서 가버리기 때문에 늘 억지로 그것을 마셨다.

[주D-001]용봉사단(龍鳳賜團) : 북송 황제가 내린 용봉차(龍鳳茶). 차잎을 둥그런 떡덩어리같이 만들어 용과 봉황의 무늬를 새긴 틀에 넣어 그 무늬를 찍어낸 것으로, 송 인종(仁宗) 때부터 좋은 차의 질을 확보하기 위해 궁중의 북원(北苑)에서 제조시켰다. 당시에는 최상품의 차로 꼽혔다.

[주D-002]금화오잔(金花烏盞) : 금색 꽃무늬가 있는 검은 색의 찻잔.

[주D-003]비색소구(翡色小甌) : 비취색을 낸 자기로 만든 차 마시는 작은 그릇. 키가 낮은 사발 형태의 것으로, 고대에는 그런 그릇으로 차를 마셨다.

[주D-004]은로탕정(銀爐湯鼎) : 은으로 만든 화로와 찻물을 끓이는 세발솥.

 

 

-[瓦尊] 와준

國無稬米。而以秔。合麴而成。酒色重味烈。易醉而速醒。王之所飮曰良醞。左庫淸法酒。亦有二品。貯以瓦尊。而以黃絹封之。大抵麗人嗜酒。而難得佳釀。民庶之家所飮。味薄而色濃。飮歠自如。咸以爲美也。

 

고려에는 찹쌀은 없고 멥쌀에 누룩을 섞어서 술을 만드는데, 빛깔이 짙고 맛이 독해 쉽게 취하고 속히 깬다. 왕이 마시는 것을 양온(良醞)이라고 하는데 좌고(左庫)의 맑은 법주(法酒)이다. 거기에도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와준(瓦尊)에 담아서 황견(黃絹)으로 봉해 둔다. 대체로 고려인들은 술을 좋아하지만 좋은 술은 얻기가 어렵다. 서민의 집에서 마시는 것은 맛은 싱겁고 빛깔은 진한데,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마시고 다들 맛있게 여긴다.

[주C-001]와준(瓦尊) : 질그릇으로 만든 술병.

[주D-001]양온(良醞) : 본래 맛있는 술이라는 뜻인데, 또 술에 관한 일을 다루는 관서명으로도 쓰였다. 고려에도 양온서(良醞署)가 있었다. 왕이 마시는 술을 양온이라고 한 것은 양온서에서 감독 양조한 술이라는 뜻이 붙여진 것이라 짐작된다.

[주D-002]좌고(左庫) : 양온서에 좌고와 우고가 있었는데, 왕이 마시는 술은 좌고에서 맡았다.

[주D-003]법주(法酒) : 법칙에 맞춰서 빚은 술을 말함. 송대에는 법주고(法酒庫)라는 관서도 있었다.

 

 

 

-[藤尊] 등준

藤尊。乃山島州郡所饋也。中亦瓦尊。外以藤。周纏之。舟中嵲屼。相擊不損。上有封緘。各以州郡印文。記之。

등준은 산과 섬의 주군(州郡)에서 진상하는 것이다. 속은 역시 와준이고 바깥은 등(藤)으로 두루 감았다. 배[舟] 속이 울렁거려 서로 부딪혀도 깨지지 않으며 위에는 봉함이 있는데 각각 주군(州郡)의 인장 글씨가 찍혀져 있다.

 

 

-[陶尊] 도준

陶器色之青者。麗人謂之翡色。近年以來。制作工巧。色澤尤佳。酒尊之狀如瓜。上有小蓋。面爲荷花伏鴨之形。復能作盌,楪,桮,甌,花甁,湯琖。皆竊放定器制度。故略而不圖。以酒尊異於他器。特著之。

 

도기의 빛깔이 푸른 것을 고려인은 비색(翡色)이라고 하는데, 근년의 만듦새는 솜씨가 좋고 빛깔도 더욱 좋아졌다. 술그릇의 형상은 오이 같은데 위에 작은 뚜껑이 있는 것이 연꽃에 엎드린 오리의 형태를 하고 있다. 또 주발ㆍ접시ㆍ술잔ㆍ사발ㆍ꽃병ㆍ탕잔(湯琖)도 만들 수 있었으나 모두 정기제도(定器制度)를 모방한 것들이기 때문에 생략하여 그리지도 않고, 술그릇만은 다른 그릇과 다르기 때문에 특히 드러내었다.

[주D-001]정기제도(定器制度) : 중국의 일정한 형태의 기물을 만드는 법칙을 말한 것이다.

 

 

 

-[陶爐] 도로

狻猊出香。亦翡色也。上爲蹲獸。下有仰蓮。以承之。諸器。惟此物。最精絶。其餘。則越州古祕色。汝州新窯器。大槩相類。

 

산예출향(狻猊出香 사자 꼴을 한 도제 향로의 이름) 역시 비색(翡色)인데, 위에는 쭈그리고 있는 짐승이 있고 아래에는 앙련화(仰蓮花)가 있어서 그것을 받치고 있다. 여러 기물들 가운데 이 물건만이 가장 정절(精絶)하고, 그 나머지는 월주(越州)의 고비색(古秘色)이나 여주(汝州)의 신요기(新窯器)와 대체로 유사하다.

[주D-001]월주(越州) : 지금의 절강성 소흥현(浙江省紹興縣).

[주D-002]고비색(古秘色) : 글자 그대로의 뜻으로 전부터 전해진 자기의 신비한 빛깔. 청색 계통.

[주D-003]여주(汝州) : 지금의 중국 하남성 임여현(河南省臨汝縣).

[주D-004]신요기(新窯器) : 새로 개발된 도요에서 구워낸 기물이라는 뜻. 당시 중국에서도 고려자기와 비슷한 빛깔의 자기를 개발한 지가 오래되지 않았던 것이다.

[주D-005]대체로 유사하다. : 산예출향 같은 고려자기는 당시 중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특이한 것이었음을 뜻하는 말.

 

 

 

-[食罩] 식조

公會供饌。下承以盤。上施青罩。唯王與使副。加紅黃之飾。所以別精麤也。

공회(公會)에서 음식을 낼 때 아래는 쟁반으로 받치고 위에는 푸른 덮개를 놓는다. 왕과 정사ㆍ부사의 것에는 적황색의 장식을 가하는데 음식의 정갈하고 거친 것을 구별하는 방법이다.

[주C-001]식조(食罩) : 상덮개.

 

 

-[藤篚] 등비

古者幣帛。用箱篚。今麗俗。不廢其篚。白藤織成。上有錯文。爲花木鳥獸之狀。裏用紅黃文綾拓之。大小相合。謂之一副。其直편001。准白金一斤。惟王府所用。最佳。蓋郡邑土貢。餘官民庶者。制作草草。備禮適用而已。

 

[편-001]直 : 値

옛날의 폐백(幣帛)에는 상자와 광주리를 사용하였는데 지금 고려의 풍속에서 그것이 없어지지 않고 있다. 그 광주리는 백등(白藤 표피를 제거한 등을 말함)으로 짜서 만들며 위에는 뒤섞인 무늬가 있는데, 화목(花木)과 조수(鳥獸)의 형상을 하고 있다. 안은 적황색의 무늬 능직을 대며 큰 것과 작은 것을 합친 것을 한 벌이라고 한다. 그 값은 백금(白金 은을 말함) 1근과 맞먹는다. 왕부(王府)에서 사용하는 것이 가장 좋은데 그것들은 군읍(郡邑)의 진상품이다. 나머지 관원과 서민들이 사용하는 것들은 만듦새가 엉성하니 이는 예(禮)에 맞춰서 쓰는 것일 따름이다.

 

 

-[鬻釜] 죽부

鬻釜。蓋烹飪器也。以鐵爲之。其上有蓋。腹下三足。回旋之文。細如毛髮。高八寸。闊一尺二寸。量容二升五勺。

죽부는 삶는 기물인데 철로 만든다. 위에는 뚜껑이 있고 배 아래에는 세발이 있다. 소용돌이 모양의 무늬는 가늘기가 털오라기 같다. 높이는 8촌, 너비는 1척 2촌, 용량은 2승 5작이다.

 

 

-[水瓮] 수옹

水瓮。陶器也。廣腹斂頸。其口差敞。高六尺。闊四尺五寸。容三石二升。館中。用銅瓮。惟山島海道。以舟載水相遺。則用之。

수옹(물독)은 도기이다. 넓은 배에 오므라진 목을 했는데 그 입이 약간 넓다. 높이 6척, 너비는 4척 5촌인데, 3석 2승이 들어간다. 관사 안에서는 동옹(銅甕)을 쓰고, 산과 섬과 바닷길에서 배로 물을 실어 나를 때 이 수옹을 사용한다.

 

 

-[草苫] 초섬

草苫之用。猶中國之有布囊也。其形如絡。結草爲之。凡米麵薪炭之屬。悉用以盛。山行不利車。多以騾馬。裝載而行。

초섬의 용도는 중국에서 포대를 쓰는 것과 같다. 그 형태는 망태기 같은데 풀을 엮어 만든다. 무릇 쌀ㆍ밀가루ㆍ땔나무ㆍ숯 등 속은 다 그것을 가지고 담는다. 산길을 갈 때 수레가 불편하므로 흔히 그것에 담은 것을 마필에 싣고 간다.

 

 

 

-[刀筆] 도필

刀筆之鞘。刻木爲之。其制三隔。其一藏筆。其二藏刀。刀形犀利。一刀差短。散員而下官吏。祗應,房子,親侍。皆佩之。

칼과 붓의 집은 나무를 깎아서 만든다. 그 만듦새는 세 칸인데, 그 중의 하나는 붓을 꽂고 그 중의 둘은 칼을 꽂는다. 칼은 튼튼하고 잘 들게 생겼는데, 칼 하나는 약간 짧다. 산원(散員 일정한 임무가 없는 관원) 이하의 관리와 지응(祗應)ㆍ방자(房子)ㆍ친시(親侍)가 그것을 찬다.

[주D-001]지응(祗應) : 심부름으로 뛰어다니는 관원. 지후(祗候)라고도 한다.

 

 

 

 

 

宣和奉使高麗圖經卷第三十三

舟楫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33 권

주즙

 

-[舟楫] 주즙

臣聞風行水上。在卦爲渙。而舟楫之利。以濟不通。取象於此。後世聖知代作。百工加飾。故龍文鷁首。駕風截浪。一日千里。必使橫絶江河。如履平地。非特刳剡之簡而已也。乃若麗人。生長海外。動涉鯨波。固宜以舟楫爲先。今觀其制度。簡略不甚工緻。豈其素安於水。而狃狎之耶。抑因陋就簡。魯拙而莫之革耶。今謹卽所見。列于圖。

바람이 물위를 가는 것이 《주역(周易)》의 괘(卦)에 있어서는 환(渙)인데, 배를 이용하여 통하지 않는 것을 건네주는 것은 이 괘에서 그 법상을 취한 것이다. 그런데 후세에 성지(聖知)를 지은 이가 교대로 나오고 백공(百工)이 장식을 더했기 때문에, 용의 무늬와 익새 머리를 한 선박이 바람을 타고 물결을 헤치며 하루에 천리를 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반드시 장강과 황하를 가로질러 가는 것이 평지를 밟고 가듯 하게 하여, 비단 나무를 쪼개어 쓰는 간단함에 그치지 않게 되었다.

고려인으로 말하면 해외에서 생장하여 툭하면 고래 같은 파도를 타게 되니 본래 선박을 앞세우는 것은 의당한 일이다. 이제 그 제도를 살펴보니, 간략하고 그리 정교하지 않으니 그들이 본래부터 물을 편안하게 여기고 그것에 익숙해져서 그런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누추한 대로 간략하게 다루고 노둔 졸렬하면서도 고치지 않는 것일까? 이제 본 것을 가지고 그림에 늘어놓기로 하겠다.

[주D-001]바람이……것이다 : 이것은 《역경(易經)》 환괘(渙卦)의 괘사(卦辭). 선박의 이용은 그 이치를 환괘해서 취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巡船] 순선

高麗。地瀕東海。而舟楫之工。簡略特甚。中安一檣。上無棚屋。惟設艣柂而已。使者入群山。門有此等巡船十餘隻。皆揷旌旗。舟人邏卒。皆著青衣。鳴角擊鐃而來。各於檣之杪。建一小旆。書曰洪州都巡。曰永新都巡。曰公州巡檢。曰保寧。曰懷仁。曰安興。曰曁川。曰陽城。曰慶源。皆有尉司字。實捕盜官吏也。自入境。以迄回程。迎至餞行於群山島。望神舟入洋。乃還其國。

고려는 땅이 동해(東海 우리의 서해를 말하는 것이다)에 접해 있는데도, 선박 건조 기술이 간략하여 그렇게 정교하지 않다. 중간에 돛대 하나를 세워놓고 위에는 다락방이 없으며, 다만 노와 키를 마련하였을 따름이다. 사자(使者)가 군산(群山)으로 들어가면 문(門)에 이러한 순선이 10여 척이 있는데, 다 정기(旌旗)를 꽂았고, 뱃사공과 나졸(邏卒)은 다 청의(靑衣)를 착용하고 호각을 울리고 징을 치고 온다. 각각 돛대 끝에 작은 깃발 하나씩을 세우고 거기에, 홍주도순(洪州都巡)ㆍ영신도순(永新都巡)ㆍ공주순검(公州巡檢)ㆍ보령(保寧)ㆍ회인(懷仁)ㆍ안흥(安興)ㆍ기천(曁川)ㆍ양성(陽城)ㆍ경원(慶源) 등의 글씨를 썼다. 그리고 ‘위사(尉司)’라는 글자가 있으나 실은 포도관리(捕盜官吏)들이다. 입경(入境)해서부터 회정(回程)할 때까지 군산도에서 영접하고 전송하고 하는데, 신주(神舟 중국 사절의 배를 말한다)가 큰 바다로 들어가는 것을 바라보고서야 자기 나라로 돌아간다.

[주C-001]순선(巡船) : 해상을 순찰 경계하는 배. 순라선(巡邏船).

 

 

 

-[官船] 관선

 

官船之制。上爲茅蓋。下施戶牖。周圍欄檻。以橫木相貫。挑出爲棚。面闊於底。通身不用板簀。唯以矯揉全木使曲。相比釘之。前有矴輪。上施大檣。布帆二十餘幅垂下。五分之一。則散開而不合縫。恐與風勢相拒耳。使者入境。自東而來。曰接伴。曰先排。曰管句。曰公廚。凡十餘舟。大小相若。惟接伴船。有陳設幄幕焉。

 

관선의 만듦새는, 위는 띠로 이었고 아래는 문을 냈으며, 주위에는 난간을 둘렀고, 가로지른 나무를 꿰어 치켜올려서 다락을 만들었는데, 윗면이 배의 바닥보다 넓다. 전체가 판책(板簀)은 쓰지 않았고, 다만 통나무를 휘어서 굽혀 나란히 놓고 못을 박았을 뿐이다. 앞에 정륜(矴輪 닻줄을 감는 제구)이 있고, 위에는 큰 돛대를 세웠고, 포범(布帆 베로 만든 돛) 20여 폭이 드리워져 있는데, 그중 5분의 1은 꿰매지 않고 펼쳐진 채로 두었다. 이것은 풍세(風勢)에 거스를까 두려워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사자(使者)가 경내로 들어가면 동쪽에서부터 오는데, 접반(接伴)ㆍ선배(先排)ㆍ관구(管勾)ㆍ공주(公廚) 등 모두 10여 척의 배가 크기가 같고, 다만 접반의 배에만 시설과 장막이 있을 뿐이다.

 

[주D-001]접반(接伴)……등 : 접반 이하 네 명칭은 탑승한 관원의 기명. 선배(先排)는 앞에서 인도하는 직책. 공주(公廚)는 취사를 관장하는 직책.

 

 

 

-[松舫] 송방

松舫。群山島船也。首尾皆直。中爲舫屋五間。上以茅覆。前後設二小室。安榻垂簾。中敞二間。施錦茵褥。最爲華煥。唯使副與上節。乘之。

송방은 군산도의 배이다. 선수(船首)와 선미(船尾)가 다 곧고 가운데에 선실 5칸이 마련되어 있고 위는 띠로 덮었다. 앞뒤에 작은 방 둘이 마련되어 있는데, 평상이 놓이고 발이 드리워져 있다. 중간에 트여 있는 두 칸에는 비단 보료가 깔려 있는데 가장 찬란하다. 오직 정사ㆍ부사 및 상절(上節)만이 거기에 탄다.

 

 

 

-[幕船] 막선

幕船之設。三島皆有之。以待中下節使人也。上以青布爲屋。下以長竿代柱。四阿。各以采繩。係之。

막선의 설비는 세 섬에 다 되어 있어, 그것으로 중ㆍ하절(中下節)의 사절들을 태운다. 위는 푸른 천으로 방을 만들고 아래는 장대로 기둥을 대신하고 네 귀퉁이는 각각 채색 끈으로 매었다.

 

 

 

-[饋食] 궤식

使者入境。而群山島紫燕洲三州。皆遣人饋食。持書之吏。紫衣?頭。又其次則烏帽。食味十餘品。而麵食爲先。海錯尤爲珍異。器皿。多用金銀。而雜以青陶。盤櫝。皆木爲之而黑漆。神舟泊不近島。必遣介。乘舟饋獻於使者。故事。送三日。若過期。風阻未行。則饋食不復至也。

사자(使者)가 경내로 들어가면, 군산도의 자연주(紫燕洲) 세 주(州)에서 다 사람을 보내어 식사를 제공한다. 서찰을 가진 관리자는 자주옷에 복두(?頭) 차림이고, 그 다음 관리는 오모(烏帽 검정색 모자) 차림이다. 식품은 10여 종인데 국수가 먼저이고 해물은 더욱 진기하다. 기명은 금ㆍ은을 많이 쓰는데, 청색 도기도 섞여 있다. 쟁반과 소반은 다 나무로 만들었고 옷칠을 했다. 신주(神舟)가 정박하고 섬에 가까이 가지 않으면, 반드시 개(介)를 보내어 배를 타고 사자(使者)에게 음식을 드리게 한다. 구례(舊例)로는 3일 동안 보내며, 만약에 기간이 지나도 바람에 막혀 떠나지 못하게 되면, 식사의 공급이 더이상 오지 않는다.

[주D-001]자연주(紫燕洲) : 자연도. 인천 앞바다에 있다.

 

 

 

-[供水] 공수

海水。味劇鹹苦。不可口。凡舟船。將過洋。必設水櫃。廣蓄甘泉。以備食飮。蓋洋中。不甚憂風。而以水之有無。爲生死耳。華人自西絶洋而來。旣已累日。麗人。料其甘泉必盡。故以大瓮載水。鼓舟來迎。各以茶米。酢之。

바닷물은 맛이 심히 짜고 써서 입에 댈 수 없다. 무릇 선박이 큰 바다를 건너가려고 하면 반드시 물독을 마련하여 샘물을 비축해서 식음에 대비한다. 대체로 큰 바다 가운데서는 바람은 그리 심하지 않고 물의 유무로 생사가 판가름난다. 중국 사람들이 서쪽에서부터 큰 바다를 횡단하고 오느라 이미 여러 날이 되었으므로, 고려인은 중국인의 샘물이 반드시 다 없어졌으리라 짐작하고서, 큰 독에다 물을 싣고 배를 저어와 맞이하는데, 각각 차와 쌀로 갚아준다.

 

 

 

宣和奉使高麗圖經卷第三十四

海道[一]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34 권

해도 1

 

 

 

-[海道] 해도

臣聞海母衆水。而與天地。同爲無極。故其量。猶天地之不可測度。若潮汐往來。應期不爽。爲天地之至信。古人嘗論之。在山海經。以爲海鰌出入穴之度。浮屠書。以爲神龍寶之變化。竇叔蒙海嶠志。以謂水隨月之盈虧。盧肇海潮賦。以謂日出入于海。衝擊而成。王充論衡。以水者。地之血脉。隨氣之進退。率皆持臆說。執偏見。評料近似。而未之盡。大抵天包水。水承地。而一元之氣。升降於太空之中。地乘水力。以自持。且與元氣升降。互爲抑揚。而人不覺。亦猶坐於船中者。不知船之自運也。方其氣升而地沈。則海水溢上而爲潮。及其氣降而地浮。則海水縮下而爲汐。計日十二辰。由子至巳。其氣爲陽。而陽之氣。又自有升降。以運乎晝。由午至亥。其氣爲陰。而陰之氣。又自有升降。以運乎夜。一晝一夜。合陰陽之氣。凡再升再降。故一日之間。潮汐皆再焉。然晝夜之晷。繫乎日。升降之數。應乎月。月臨於子。則陽氣始升。月臨於午。則陰氣始升。故夜潮之期。月皆臨子。晝潮之期。月皆臨午焉。又日之行遲。月之行速。以速應遲。每二十九度過半。而月行及之。日月之會。謂之合朔。故月朔之夜潮。日亦臨子。月朔之晝潮。日亦臨午焉。且晝。卽天上而言之。天體西轉。日月東行。自朔而往。月速漸東。至午漸遲。而潮亦應之。以遲于晝。故晝潮。自朔後迭差。而入于夜。故所以一日午時。二日午末。三日未時。四日未末。五日申時。六日申末。七日酉時。八日酉末也。夜卽海下而言之。天體東轉。日月西行。自朔而往。月速漸西。至子漸遲。而潮亦應之。以遲於夜。故夜潮。自朔後迭差。而入于晝。此所以一日子時。二日子末。三日丑時。四日丑末。五日寅時。六日寅末。七日卯時。八日卯末也。加以時有交變。氣有盛衰。而潮之所至。亦因之爲大小。當卯酉之月。則陰陽之交也。氣以交而盛出。故潮之大也。獨異於餘月。當朔望之後。則天地之變也。氣以變而盛出。故潮之大也。獨異於餘日。今海中有魚獸。殺取皮而乾之。至潮時。則毛皆起。豈非氣感而類應。本於理之自然也。至若波流而漩伏。沙土之所凝。山石之所歭。則又各有其形勢。如海中之地。可以合聚落者。則曰洲。十洲之類是也。小於洲。而亦可居者。則曰島。三島之類是也。小於島則曰嶼。小於嶼而有草木則曰苫。如苫嶼而其質純石則曰焦。凡舫舶之行。旣出于海門。則天地相涵。上下一碧。旁無雲埃。遇天地晴霽時。皓日中天。游雲四斂。恍然如游六虛之表。旣不可以言喩。及風濤間發。雷雨晦冥。蛟螭出沒。神物變化。而心悸膽落。莫知所說。故其可紀錄者。特山形潮候而已。且高麗海道。古猶今也。考古之所傳。今或不覩。而今之所載。或昔人所未談。非固爲異也。蓋航舶之所通。每視風雨之向背。而爲之節。方其風之牽乎西。則洲島之在東者。不可得而見。惟南與北。亦然。今旣論潮候之大槩。詳于前。謹列夫神舟。所經島洲苫嶼。而爲之圖。

 

바다는 온갖 물의 모체로서 천지와 더불어 똑같이 극한이 없기 때문에, 그 양은 천지를 측량할 수 없는 것과도 같다. 밀물과 썰물의 왕래로 말하면 시기에 맞춰 어긋나지 않아 천지간의 지극한 미더움이다. 옛사람들이 일찍이 그것을 논하였다. 《산해경(山海經)》에서는 해추(海鰌)가 굴에 들고 나는 도수(度數)라 하였고, 부도서(浮屠書 불가의 책을 말함)에서는 신룡보(神龍寶)의 변화라고 하였다. 두숙몽(竇叔蒙)의 《해교지(海嶠志)》에서는 물이 달의 차고 기울고 하는 것을 따르는 것이라고 하였다. 노조(盧肇)의 해조부(海潮賦)에서는 해가 바다에 출입하여 충격을 주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하였다. 왕충(王充 후한 때 사람)의 《논형(論衡)》에서는, 물이란 땅의 혈맥으로 기운의 진퇴에 따라 그렇게 된다고 하였다. 모두가 다 억설을 내세우고 편견을 고집하는 것으로 생각은 근사하나 미진하다.

대체로 하늘은 물을 싸고 있고 물은 땅을 받들고 있는데, 큰 기원의 기운이 태공(太空) 안에서 오르내린다. 땅은 물의 힘을 받아서 스스로를 지탱하고 또 원기의 오르내림과 더불어 서로 내렸다올랐다 하지마는 사람들은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으로 그것은 또 배 안에 앉아 있는 자가 배가 스스로 움직이고 있는 것을 모르는 것과도 같다. 기운이 올라가고 땅이 가라앉을 때에는 바닷물이 넘쳐올라서 밀물이 되고, 기운이 내려가고 땅이 뜰 때에는 바닷물이 줄어 내려가서 썰물이 된다. 하루의 12시를 헤아려 보면, 자시(子時)에서 사시(巳時)까지는 그 기운이 양(陽)인데, 양의 기운은 또 그 나름으로 오르내림이 있어서 낮에 움직인다. 오시에서 해시(亥時)까지는 그 기운이 음(陰)인데, 또 그 나름으로 오르내림이 있어서 밤에 움직인다. 하루낮 하룻밤은 음양의 기운을 합치면 도합 두 번 오르고 두 번 내린다. 그래서 하루 사이에 밀물과 썰물이 다 두 차례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낮과 밤의 시간은 해의 오르내림의 수에 달려 있고 달에 호응한다. 달이 자(子)에 오면 양기가 비로소 오르고, 달이 오(午)에 오면 음기가 비로소 오르기 때문에 밤 밀물 때는 달은 다 자에 오르고 낮 밀물 때는 달은 다 오에 온다. 또 해의 운행은 느리고 달의 운행은 빠르다. 빠른 것을 가지고 느린 것에 응하자니까 29도와 반(半)도를 지날 때마다 달의 운행이 따라 간다. 해와 달의 만남을 합삭(合朔)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월삭(月朔 음력으로 매달 초하루를 말함)의 밤 밀물 때는 해 역시 자(子)에 오고, 월삭의 낮 밀물 때는 해 역시 오(午)에 온다. 또, 낮은 하늘 위에서 말하자면, 천체는 서쪽으로 돌아가고 해와 달은 동쪽으로 운행하므로 초하루부터 이후는 달이 빨리 가는 것이 동쪽으로 점점 기울어지며, 오시(午時)에 이르러서는 점점 느려지고 밀물 역시 그것에 호응한다. 낮에는 느리기 때문에 낮 밀물은 초하루 이후에는 차례로 차가 생겨 밤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초하루는 오시이고, 2일은 오시 말(末)이고, 3일은 미시(未時)이고, 4일은 미시 말이고, 5일은 신시이고, 6일은 신시 말이고, 7일은 유시이고, 8일은 유시 말이 되는 것이다. 밤은, 바다 아래서 말하자면, 천체는 동쪽으로 굴러가고 해와 달은 서쪽으로 운행한다. 초하루부터 이후는 달이 빨리 가는 것이 서쪽으로 점점 기울어지며, 자시(子時)에 이르러서는 점점 느려지고 밀물 역시 그것에 호응한다. 밤에 느리기 때문에 밤 밀물은 초하루 이후에는, 차례로 차가 생겨 낮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이 초하루는 자시이고, 2일은 자시 말이고, 3일은 축시이고, 4일은 축시 말이고, 5일은 인시이고, 6일은 인시 말이고, 7일은 묘시이고, 8일은 묘시 말이 되는 까닭이다.

거기다 더해서 철에는 차례에 따른 변화가 있고 기운에는 성쇠가 있어, 밀물이 밀려오는 것도 역시 그로 말미암아 크거나 작아진다. 묘(卯)ㆍ유(酉)의 달이 되면 음양이 교대하는데, 기운은 교대로 인해서 세차게 나온다. 그래서 밀물의 대단함이 유독 나머지 날들과는 달라지는 것이다. 이제 바다 속에는 물고기와 짐승이 있어, 그것들을 잡아서 가죽을 벗겨 말리면, 밀물이 들 때가 되면 털이 다 일어서니, 이것이 어찌 기운을 느껴 물류(物類)가 호응하는 이치에 따라 절로 그렇게 되는데 근본을 둔 현상이 아니겠는가?

물결이 흘러서 소용돌이치는 것, 모래와 흙이 엉기는 것, 산과 돌이 치솟는 것으로 말하면 또 각각 그 형세가 있다. 이를테면 바다 가운데 땅으로 촌락을 이룰 수 있는 것을 주(洲)라고 하는데 십주(十洲) 따위가 그것이다. 주보다 작으나 역시 살 수 있는 것은 도(島)라고 하는데 삼도(三島) 따위가 그것이다. 도보다 작으면 서(嶼)라고 하고 서보다 작으면서 초목이 있으면 섬(苫)이라고 하고 섬과 서 같으면서 그 바탕이 순전히 돌이면 초(焦 암초를 말함)라고 한다.

무릇 선박의 운행이란 해문(海門)을 나가 버리면 하늘과 땅이 잠겨 버려 위아래가 하나같이 푸르르고, 곁에는 구름이나 먼지가 없으며, 천지가 갤 때를 만나면 밝은 해가 하늘 복판에 뜨고, 움직이는 구름이 사방으로 들어가 버려, 황홀한 것이 육허(六虛 상하 사방의 극한을 포괄하는 우주의 공간)의 밖을 노니는 듯하여 이미 말로 설명할 수 없어진다. 바람과 파도가 간간이 일어나고 우레와 비로 캄캄해지고, 교룡과 이무기가 출몰하고, 신령한 물건이 변화를 일으키기에 이르면, 가슴이 뛰고 담기가 없어져 말할 바를 모르게 된다. 그러므로 그 중 기록할 수 있는 것이란 단지 산의 형태와 밀물의 징후일 뿐이다.

또 고려의 해도(海道)는 옛날도 지금과 같았다. 옛부터 전해지는 것을 알아보면 지금은 혹 보이지 않는 것도 있고, 지금 기재한 것은 혹 옛사람이 말하지 않은 것도 있으나 그것이 본래부터 달랐던 것은 아니다. 대체로 항해하는 선박이 통하는 곳은 언제나 비바람의 향배(向背)를 보고 조절하는 것으로, 바람이 서쪽에서 끌어당길 때에는 동쪽에 있는 주도(洲島)들은 볼 수 없고 남쪽과 북쪽의 경우 역시 그러하다. 이제 밀물 징후의 대개를 이미 앞에 상세하게 논하였으므로 삼가 신주(神舟)가 경과한 도주(島洲)와 섬서(苫嶼)를 늘어놓아 그림으로 그린다.

[주D-001]산해경(山海經)》에서는……하였고 : 《산해경》은 중국 고대의 지리서로, 내용은 허황 기괴하여 신화 내지는 소설의 성격을 띤 것이다. 지금 전해지는 것은 18권, 해추(海?)의 이야기는 지금 전해지는 《산해경》에는 보이지 않고 역도원(?道元)의 《수경주(水經注)》에 보인다. 그것에 따르면, 해추어(海?魚)는 길이가 수천 리나 되고 해저(海底)에서 혈거(穴居)하는데, 굴로 들어가면 바닷물이 밀물이 되고 굴에서 나오면 밀물이 물러가는데 그것이 굴을 드나드는데 일정한 절도가 있기 때문에 조수에 시간이 있게 되는 것이라 한다.

[주D-002]신룡보(神龍寶) : 신이(神異)한 용의 도력(道力)이라는 뜻. 불서의 어디에 이 고사가 있는지는 미상.

[주D-003]노조(盧肇) : 당대(唐代) 사람으로 자는 자발(子發), 회창(會昌 절강성 영가현) 사람. 그의 글은 《전당문(全唐文)》 제768권 참조.

[주D-004]합삭(合朔) : 해와 달이 만나는 합삭은 대략 매월 음력 초하루 전후에 일어난다. 《後漢書 律曆志》

[주D-005]섬(苫) : 서(嶼)보다 작으면서 초목이 있는 것을 섬이라고 한다는 어원의 근거는 미상.

 

 

-[神舟] 신주

臣側聞神宗皇帝。遣使高麗。嘗詔有司。造巨艦二。一曰凌虛致遠安濟神舟。二曰靈飛順濟神舟。規模甚雄。皇帝嗣服。羹墻孝思。其所以加惠麗人。實推廣煕豐之績。爰自崇寧。以迄于今。荐使綏撫。恩隆禮厚。仍詔有司。更造二舟。大其制而增其名。一曰鼎新利涉懷遠康濟神舟。二曰循流安逸通濟神舟。巍如山嶽。浮動波上。錦帆鷁首。屈服蛟螭。所以暉赫皇華。震懾夷狄。超冠今古。是宜麗人。迎詔之日。傾國聳觀。而歡呼嘉歎也。

신종 황제(神宗皇帝)께서 고려로 사신을 보내실 적에 유사(有司)에게 조명(詔命)을 내려 거대한 함정 두 척을 건조시킨 적이 있었다. 하나는 ‘능허치원안제신주(凌虛致遠安濟神舟)’이고 하나는 ‘영비순제신주(靈飛順濟神舟)’인데, 그 규모가 심히 웅장하였다. 황제께서 제위를 계승하신 뒤에는 부황 신종 황제를 앙모하시는 효심이 지극하였으니, 고려인들에게 은혜를 더 베푼 까닭은 실로 희풍(煕豐 희령(煕寧)과 원풍(元豐) 1068~1085)의 치적(治績)을 확대시켜 나간 것이다. 숭녕(崇寧)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자주 사신을 보내어 위무하는 은혜가 융숭하고 예가 후하거니와, 또 유사(有司)에게 조명을 내려 다시 배 두 척을 건조케 하였다.

이에 그 전체를 확대하고 명칭을 크게 하니, 하나는 ‘정신이섭회원강제신주(鼎新利涉懷遠康濟神舟)’이고 하나는 ‘순류안일통제신주(循流安逸通濟神舟)’이다. 높기가 산악 같은데 물결 위에 떠 움직이면 비단으로 만든 돛에 익새 선수는 교룡과 이무기를 굴복시키니, 이는 휘황한 사신이 이적(夷狄)에게 위엄을 보이는 것으로 고금에 으뜸이다. 따라서 고려인들이 조서를 맞이하던 날 나라 사람들이 몰려와 구경하고 환호 감탄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주D-001]능허치원안제신주(凌虛致遠安濟神舟) : 허공을 질러 먼 곳에까지 편안하게 건네주는 신령한 배라는 뜻.

[주D-002]영비순제신주(靈飛順濟神舟) : 영특하게 날아가 순조롭게 건네주는 신성한 배라는 뜻.

[주D-003]숭녕(崇寧) : 숭녕은 휘종(徽宗)의 연호이고 휘종은 신종의 제11자로 그의 형 철종(哲宗 신종의 제6자)의 뒤를 이어서 제위에 올랐다.

[주D-004]정신이섭회원강제신주(鼎新利涉懷遠康濟神舟) : 옛 제도를 혁신하여 항해에 편리하게 하여 먼 고장을 회유하도록 편안하게 건네주는 신령한 배라는 뜻.

[주D-005]순류안일통제신주(循流安逸通濟神舟) : 흐름에 따라 안일하게 두루 건네주는 신령한 배라는 뜻

 

 

 

-[客舟] 객주

舊例。每因朝廷遣使。先期委福建兩浙監司。顧募客舟。復令明州。裝飾略如神舟。具體而微。其長十餘丈。深三丈。闊二丈五尺。可載二千斛粟。其制。皆以全木巨枋。攙疊而成。上平如衡。下側如刃。貴其可以破浪而行也。其中。分爲三處。前一倉。不安艎板。唯於底。安竈與水櫃。正當兩檣之間也。其下。卽兵甲宿棚。其次一倉。裝作四室。又其後一倉。謂之㢗屋。高及丈餘。四壁施窻戶。如房屋之制。上施欄楯。采繪華煥。而用帟幕增飾。使者官屬。各以階序分居之。上有竹篷。平時積疊。遇雨則鋪蓋周密。然舟人。極畏㢗高。以其拒風。不若仍舊爲便也。船首兩頰柱中。有車輪。上綰藤索。其大如椽。長五百尺。下垂矴石。石兩傍。夾以二木鉤。船未入洋。近山拋泊。則放矴著水底。如維纜之屬。舟乃不行。若風濤緊急。則加游矴。其用如大矴。而在其兩旁。遇行則卷其輪。而收之。後有正柂。大小二等。隨水淺深更易。當㢗之後。從上揷下二棹。謂之三副柂。唯入洋則用之。又於舟腹兩旁。縛大竹爲橐。以拒浪。裝載之法。水不得過橐。以爲輕重之度。水棚。在竹橐之上。每舟十艣。開山入港。隨潮過門。皆鳴艣而行。篙師。跳躑號叫。用力甚至。而舟行。終不若駕風之快也。大檣高十丈。頭檣高八丈。風正則張布颿五十幅。稍偏則用利篷左右翼張。以便風勢。大檣之巓。更加小颿十幅。謂之野狐颿。風息則用之。然風有八面。唯當頭。不可行。其立竿以鳥羽。候風所向。謂之五兩。大抵難得正風。故布帆之用。不若利篷。翕張之能順人意也。海行。不畏深。惟懼淺。閣以舟底不平。若潮落則傾覆不可救。故常以繩垂鉛硾試之。每舟。篙師水手可六十人。惟恃首領。熟識海道。善料天時人事。而得衆情。故一有倉卒之虞。首尾相應。如一人則能濟矣。若夫神舟之長闊,高大,什物,器用,人數。皆三倍於客舟也。

구례로는 조정에서 사신을 파견하면 언제나 출발 기일에 앞서 복건(福建)과 양절(兩浙)의 감사에게 위촉하여 객주를 모집 고용하게 하고, 또 명주(明州)에서 장식(裝飾)을 하게 하는데 대략 신주와 같다. 형체는 갖췄으나 크기가 작아, 그 길이가 10여 장(丈)이고 깊이는 3장, 너비는 2장 5척이며, 2천 곡(斛)의 곡식을 실을 수 있다. 그 만듦새는 다 통나무와 박달나무를 섞어 포개서 이루어진 것으로, 위의 편평함은 저울대 같고 아래의 기울어짐은 칼날 같은데 그것이 물결을 헤치고 갈 수 있어서 가치가 있다. 그 가운데는 세 곳으로 나누어져 있다. 앞의 한 선창에는 황판(?板 배에 까는 나무 판자)을 놓지 않고 다만 바닥에 화덕과 물덕을 놓는데, 그곳은 바로 두 돛대의 사이에 해당된다. 그 아래에는 곧 무기를 넣어두는 헛간이다. 그 다음의 한 선창은 네 개의 방으로 꾸몄다. 그 뒤의 한 선창은 교옥(?屋 높은 집이라는 뜻)이라고 하는데 높이가 1장여나 되고 사면의 벽에 창문이 마련되어 있는 것이 가옥의 만듦새 같다. 위에 난간이 베풀어져 채색 그림이 화려 찬란한데 휘장을 써서 장식을 더하였다. 사자(使者)들의 관속들이 계급의 서열에 따라 나눠서 거처한다. 위에는 대나무 뜸이 있는데, 평상시에는 포개 쌓아두고, 비를 만나면 두루 촘촘하게 펼쳐 덮는다. 그러나 뱃사공들은 교옥이 높아지는 것을 극히 두려워하는데, 그것이 바람을 저항하여 전대로 있는 것의 편리함만 못하기 때문이다.

뱃머리의 양쪽 곁 기둥 가운데에 수레바퀴가 있고 그 위에 등으로 꼰 동아줄을 매었는데, 그 크기가 서까래 같고 길이는 5백 척이며, 아래는 닻돌을 달아 매었고 돌 양 곁은 두 개의 나무 갈고리가 끼고 있다. 배가 큰 바다로 들어가지 않고 산에 근접해서 정박하게 되면, 닻을 풀어놓아 물 바닥에 닿게 하고 뱃줄 등 속을 당겨 놓으면 배는 가지 않는다. 만약에 풍랑이 다급하면 유정(游? 보조로 쓰는 닻)을 보태는데 그 작용은 큰 닻과 같으며 그 양 곁에 있다. 갈 때가 되면 그 바퀴를 감아서 거둬 들인다. 뒤에는 정타(正? 주되는 키)가 크고 작은 두 등급의 것이 있어 물의 얕고 깊음에 따라 바꿔 쓴다. 교옥 뒤에 위에서부터 아래로 꽂은 두 개의 노를 삼부타(三副?)라고 하는데 이것은 오직 큰 바다에 들어가야만 쓴다.

또 주복(舟腹) 양쪽 곁에다 큰 대나무를 묶어 자루를 만들어서 물결을 막는데, 그것을 장치하는 법은, 물이 자루를 넘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경중(輕重)의 도수를 삼는다. 그리고 수붕(水棚 곁노들을 설치한 의지간(倚支間))이 대나무 자루 위에 있다. 배마다 열 개의 곁노가 있어 산을 헤치고 항구로 들어가고 밀물을 따라 문(門)을 지나가고 하는데는 다 곁노를 울려 저으며 가는데, 이때 뱃사공들이 올라뛰고 외치고 하며 힘쓰는 것이 대단하여도 배 가는 것은 결국 바람을 타고 가는 것만큼 빠르지 못하다. 대장(大檣)은 높이가 10장이고 두장(頭檣)은 높이가 8장이다. 바람이 빠르면 첫돛 50폭을 펼치고 좀 치우치면 움직이는 뜸을 써서 좌우에 날개같이 펼쳐서 풍세(風勢)를 잡아준다. 대장 꼭대기에 또 작은 돛 10폭을 다는데 그것은 야호범(野狐颿)이라고 하며, 바람이 멎으면 그것을 쓴다.

그러나 바람에는 8면이 있는데, 오직 정면에서 불어올 때만 갈 수가 없다. 장대를 세워 새깃으로 바람의 방향을 알아보는데 그것을 오량(五兩)이라고 한다. 대체로 바른 바람을 얻기가 어렵기 때문에, 포범(布帆)을 사용하는 것은 이봉(利? 움직이는 뜸)을 접었다 펼쳤다 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에 맞게 할 수 있는 경우만은 못하다. 바다에서의 항행은 깊은 것은 두렵지 않고 다만 얕은 곳에 박히는 것을 두려워한다. 배의 바닥이 편평하지 않기 때문에 만약에 밀물이 빠지면 기울어 쓰러지고 구제할 수 없다. 그래서 늘 노끈으로 납추를 드리워서 재어 본다. 배마다 뱃사공과 수부가 60인 가량이나 되는데, 다만 그 수령(首領)이 해도(海道)를 익히 알고 하늘의 때와 사람의 일을 잘 헤아려서 여러 사람의 마음을 잡는 것을 믿을 뿐이다. 그래서 창졸간의 어려움이 생겨도 수미가 한 사람같이 서로 호응하면 구제해 낼 수가 있는 것이다. 신주의 길이ㆍ너비ㆍ높이ㆍ크기와 집물기구, 인원수로 말하면 다 객주보다 3배나 된다.

[주D-001]양절(兩浙) : 송의 노명(路名)으로, 지금의 강소성(江蘇省)의 일부와 절강성(浙江省) 전역을 포괄하고 그 관서는 지금의 절강성 항주(杭州)에 있었다.

[주D-002]명주(明州) : 주명(州名)으로, 지금의 절강성 근현(?縣)의 땅.

[주D-003]문(門) : 항구 앞에 있는 산과 산 사이의 수로를 문이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주D-004]야호범(野狐颿) : 야호는 들여우. 기만과 농간이 심하므로, 풍향을 운행 방향에 유리하도록 조정하는 데 쓰인다 하여 그런 돛을 야호범이라고 불렀다.

[주D-005]오량(五兩) : 닭털을 장대 끝에 매어 풍향을 알아보는 제구로, 본래는 초(楚) 지방의 방언이었다.

 

 

-[招寶山] 초보산

宣和四年壬寅春三月。詔遣給事中路允迪,中書舍人傅墨卿。充國信使副。往高麗。秋九月。以國王俁薨。被旨。兼祭奠弔慰而行。遵元豐故事也。五年癸卯春二月十八日壬寅。促裝治舟。二十四日戊申。詔赴睿謨殿。宣示禮物。三月十一日甲子。赴同文館。聽誡諭。十三日丙寅。皇帝。御崇政殿臨軒。親遣傳旨宣諭。十四日丁卯。錫宴于永寧寺。是日。解舟出汴。夏五月三日乙卯。舟次四明。先是。得旨以二神舟,六客舟兼行。十三日乙丑。奉禮物入八舟。十四日丙寅。遣拱衛大夫,相州觀察使直睿思殿關弼。口宣詔旨。錫宴于明州之聽事。十六日戊辰。神舟發明州。十九日辛未。達定海縣。先期遣中使。武功大夫容彭年。建道場於摠持院。七晝夜。仍降御香。宣祝于顯仁助順淵聖廣德王祠。神物出現。狀如蜥蜴。實東海龍君也。廟前十餘步。當鄞江窮處。一山巍然。出於海中。上有小浮屠。舊傳海舶。望是山。則知其爲定海也。故以招寶名之。自此方謂之出海口。二十四日丙子。八舟。鳴金鼔。張旗幟。以次解發。中使關弼。登招寶山。焚御香。望洋再拜。是日。天氣晴快。巳刻。乘東南風。張篷鳴艣。水勢湍急,委蛇而行。過虎頭山,水浹港口,七里山,虎頭山。以其形似名之。度其地。已距定海二十里矣。水色。與鄞江不異。但味差鹹耳。蓋百川所會至此。尤未澄徹也。

선화(宣和) 4년 임인(1122, 고려 예종17) 봄 3월에 조명을 내려 급사중 노윤적(路允迪)과 중서 사인 부묵경(傅墨卿)을 국신사와 부사에 충임하여 고려로 가게 하였다. 가을 9월에 국왕인 왕우(王俁)가 훙거하였기 때문에 특지를 받고 제전과 조위의 임무를 겸임하고 갔으니, 원풍(元豐 송 신종의 연호) 연간의 고사를 따른 것이다. 5년 계묘 봄 2월 18일(임인)에 장비를 재촉하고 배를 꾸몄으며, 24일에는 조명을 내려 예모전(睿謨殿)에 가서 예물을 선시(宣示)하였고, 3월 11일(갑자)에는 동문관(同文館)에 가서 계유(誡諭)를 들었고, 13일(병인)에는 황제께서 숭정전(崇政殿)에 납시어 평대(平臺)에 자리잡고 친히 보내며 전지(傳旨)를 선유(宣諭)하시었고, 14일(정묘)에 영녕사(永寧寺)에서 석연(錫宴 황제의 명의로 전송하는 잔치)하시었다. 이날 배를 풀어변경(汴京 당시 북송의 수도, 지금의 하남성 개봉)을 나갔다. 여름 5월 3일(을묘)에 배가 사명(四明)에 머물렀다. 이에 앞서 특지를 얻어 두 척의 신주(神舟)와 6척의 객주(客舟)로 같이 가게 되어 13일(을축)에 예물을 받들어 8척의 배에 넣었다. 14일(병인)에 공위대부(拱衛大夫) 상주 관찰사 직예사전(相州觀察使直睿思殿)관필(關弼)을 보내 조명의 취지를 말하고, 명주(明州)의 청사(廳事)에서 연회를 베풀어주었고, 16일(무진)에 신주가 명주를 떠나 19일(신미)에 정해현(定海縣)에 도달하였다.

이 기일에 앞서 중사(中使)인 무공대부(武功大夫)용팽년(容彭年)을 보내어 총지원(摠持院)에서 7주야 동안 도량[道場]을 가졌고, 또 어향(御香)을 내려 현인조순연성광덕왕사(顯仁助順淵聖廣德王祠)에 선축(宣祝)하니 신물(神物)이 나타났는데 그 형상이 도마뱀 같았다. 이는 실로 동해의 용군(龍君)인 것이다. 그 사당 앞 10여 보 지점에 근강(鄞江)이 끝나는 곳에 산 하나가 높다랗게 바다 가운데 나와 있는데 그 위에 작은 탑이 있다. 전부터 전해지기로는 바다를 향하는 배가 이 산을 바라보면 그것이 정해(定海)임을 알았다고 한다. 그래서 초보(招寶)라고 명명한 것이다.

이곳에서부터 비로소 바다로 나가는 입구라고 하게 된다. 24일(병자)에 배에 들어가 징과 북을 울리고 기치를 펼치고서 차례에 따라 배를 풀고 떠났다. 중사 관필은 초보산에 올라가 어향을 피우고 큰 바다를 바라보며 재배(再拜)하였다. 이날은 날씨가 쾌청하였다. 사각(巳刻)에 동남풍을 타고 뜸을 펼치고 곁노를 저었는데, 수세(水勢)가 매우 급해서 꿈틀거리며 갔다. 호두산(虎頭山)을 지나가니 물이 항구의 입구에 있는 칠리산(七里山)에 가득하였다. 호두산은 그 형태가 유사하여서 그렇게 명명한 것이다. 그곳을 헤아려 보니 이미 정해에서 20리나 떨어져 있었다. 물의 색깔은 근강과 다르지 않았으나 다만 맛이 좀 짤 뿐이었다. 대체로 온갖 냇물이 모이는 곳이라 이곳까지 왔는데도 여전히 맑아지지 않았다.

 

[주C-001]초보산(招寶山) : 지금의 절강성 진해현(鎭海縣) 동북부에 있는데, 원래는 후도산(侯濤山)이라고 하였으나 외국 선박이 중국에 들어가는 경우 그곳에 정박하는 것이 항례가 되어 산명을 그렇게 고쳤다고 전해진다.

[주D-001]사명(四明) : 지금의 절강성의 근현(鄞縣) 서남 여요현(餘姚縣) 남부에 위치한 산.

[주D-002]공위대부(拱衛大夫)……직예사전(直睿思殿) : 공위대부는 송의 무산신관(武散新官) 제12계. 상주(相州)는 주명(州名)으로 지금의 하남성 안양현(安陽縣)의 땅. 내시성(內侍省)에 입내(入內)하여 예사전(睿思殿)의 수직관(守直官)으로 근무한 것이다. 《宋史 卷166 職官志 第一九九》

[주D-003]정해현(定海縣) : 송대의 정해현은 지금의 절강성 진해현(鎭海縣). 당시는 명주(明州)의 속현이었다.

[주D-004]중사(中使) : 황제가 사적으로 보내는 사자(使者).

[주D-005]무공대부(武功大夫) : 무산신관의 제26계. 구관(舊官)으로는 황성사(皇城使)였다. 《宋史 卷166》

[주D-006]총지원(摠持院) : 불교의 사원. 거기서 불교의 기축 제전인 도량을 개설한 것이다.

[주D-007]현인조순연성광덕왕사(顯仁助順淵聖廣德王祠) : 중국 동해(東海)의 해신 광덕왕(廣德王)을 제사하는 사당. ‘현인조순연성’은 광덕왕의 위력을 나타낸 가호(加號). 《通典 卷4》

 

 

-[虎頭山] 호두산

過虎頭山。行數十里。卽至蛟門。大抵海中。有山對歭。其間有水道。可以通舟者。皆謂之門。蛟門。云蛟蜃所宅。亦謂之三交門。其日申末刻。遠望大小二謝山。歷松柏灣。抵蘆浦拋矴。八舟同泊。

호두산을 지나 수십 리를 가면 곧 교문(蛟門)에 이른다. 대체로 바다 가운데 산이 대치하고 있고 그 사이에 물길이 있어, 배가 통할 수 있는 것이면 다 문이라고 한다. 교문은 교룡이 사는 곳이라고 하는데 삼교문(三交門)이라고도 한다. 그날 신각(申刻) 말에 멀리 크고 작은 두 사산(謝山)을 바라보며 송백만(松柏灣)을 지나 노포(蘆浦)에 당도하여 닻을 던지고 8척의 배가 같이 정박하였다.

 

[주D-001]사산(謝山) : 대소(大小) 두 곳이 있는데 절강성 정해현의 경내에 위치하고 있다.

 

 

 

-[沈家門] 심가문

二十五日丁丑辰刻。四山霧合。西風作。張蓬委蛇曲折。隨風之勢。其行甚遲。舟人。謂之摳風。巳刻霧散。出浮稀頭白峯,窄額門,石師顏而後。至沈家門拋泊。其門山。與蛟門相類。而四山環擁。對開兩門。其埶連亘。尙屬昌國縣。其上漁人樵客。叢居十數家。就其中以大姓名之。申刻。風雨晦冥。雷電雨雹。歘至。移時乃止。是夜。就山張幕。掃地而祭。舟人。謂之祠沙。實岳瀆主治之神。而配食之位甚多。每舟。各刻木爲小舟。載佛經糗粮。書所載人名氏。納於其中。而投諸海。蓋禳猒之術一端耳。

25일(정축) 진각(辰刻)에 사방의 산이 안개로 덮여 있는데, 서풍이 일어나 뜸을 펼치고 꿈틀꿈틀 굴곡을 지으며 바람의 세력을 따라가느라 그 진행이 심히 느렸다. 뱃사람은 그것을 ‘구풍(摳風)’이라 한다. 사각(巳刻)에 안개가 흩어져 희두백봉(稀頭白峯)의 착액문(窄額門)석사안(石師顔)으로 나가 뜬 후에 심가문에 이르러서 닻을 던졌다. 그 문산(門山)은 교문(蛟門)과 유사한데 사방의 산이 동그랗게 안고 있으며, 두 문을 마주 열고 있는데 산 셋이 연닿아 있어 아직도 창국현(昌國縣)에 속해 있다. 그 위에 어부와 나무꾼 10여 집이 모여 사는데, 그중에서 대성(大姓)을 가지고 그 해문을 명명한 것이다.

신각(申刻)에 비바람이 캄캄하게 닥쳐오고 우레와 번개가 급작스럽게 들이닥치니 얼마동안이 지나서야 멎었다. 이날 밤 산으로 가서 장막을 치고 땅을 쓸고서 제사를 지냈다. 뱃사람은 그것을 사사(祠沙 모래를 제사한다는 뜻)라고 하나 실은 악독(岳瀆 산악과 하해를 말함)을 맡아 다스리는 신(神)으로, 배식(配食)하는 위(位)가 심히 많다. 배마다 각각 나무를 깎아 작은 배를 만들어서 거기에 불경(佛經)과 말린 양식을 싣고, 싣고 가는 사람들의 성명을 써서 그 속에 넣어 그것을 바다에 던진다. 재앙을 떨어내고 압승(猒勝 자기의 해로운 것이 기운을 떨치지 못하게 하는 술법)하는 술법의 일단인 것이다.

 

[주D-001]희두백봉(稀頭白峯)……석사안(石師顔) : 희두백봉은 나무가 성긴 흰 봉우리. 착액문은 꼭대기가 좁은 해문. 석사안은 돌사자처럼 생긴 암면.

[주D-002]창국현(昌國縣) : 정해현(定海縣)의 고칭(古稱).

 

 

-[梅岑] 매잠

二十六日戊寅。西北風勁甚。使者率三節人。以小舟。登岸入梅岑。舊云梅子眞棲隱之地。故得此名。有履迹瓢痕。在石橋上。其深麓中。有蕭梁所建寶陁院。殿有靈感觀音。昔新羅賈人。往五臺。刻其像。欲載歸其國。曁出海遇焦。舟膠不進。乃還置像於焦上。院僧宗岳者。迎奉於殿。自後海舶往來。必詣祈福。無不感應。吳越錢氏。移其像於城中開元寺。今梅岑所尊奉。卽後來所作也。崇寧使者。聞于朝。賜寺新額。歲度緇衣而增飾之。舊制。使者於此請禱。是夜。僧徒。焚誦歌唄甚嚴。而三節官吏兵卒。莫不虔恪作禮。至中宵。星斗煥然。風幡搖動。人皆懽躍。云風已回正南矣。二十七日己卯。舟人。以風埶未定。尙候其孰。海上以風轉至次日。不改者。謂之孰。不爾。至洋中。卒爾風回。則茫然不知所向矣。自此。卽出洋。故審視風雲天時。而後進也。申刻。使副與三節人。俱還八舟。至是。水色稍澂。而波面微蕩。舟中。已覺臲卼矣。

26일(무인)에 서북풍이 심히 강해서 사자(使者)가 삼절(三節)의 인원을 거느리고 작은 배로 상륙하여 매잠으로 들어갔다. 전부터 이르기를, 매자진(梅子眞)이 은거하던 곳이기 때문에 이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신발 자국과 표주박 흔적이 돌다리 위에 있다. 그곳 깊은 산기슭 속에는 소량(蕭粱 남조 양양의 소도성)이 세운 보타원(寶?院)이 있고 그 절에는 영감관음(靈感觀音)이 있다. 옛날 신라(新羅)의 상인이 오대산(五臺山)에 가서 그곳 관음상을 파내어 자기 나라로 싣고 돌아가려고 바다로 나갔더니 암초를 만나 배가 달라붙고 전진하지 않았다. 이에 도로 암초 위에다 관음상을 놓으니, 보타원의 중인 종악(宗岳)이라는 자가 맞아다 그 절에 봉안하였다. 그 뒤부터 바다를 항해하는 선박이 왕래할 때는 반드시 가서 복을 빌었고 그렇게 하면 감응하지 않는 예가 없다. 오월(吳越)의 전씨(錢氏)가 그 관음상을 성 안의 개원사(開元寺)로 옮겼다. 지금 매잠에서 받드는 것은 후에 만든 것이다. 숭녕(崇寧 송 휘종의 연호) 때의 사자(使者)가 조정에 알려 절에 새 현판을 내리고 매년 불승의 허가를 내주어서 장식을 더하게 하였다.

구제(舊制)로는 사자는 여기서 기도를 드린다. 이날 밤 승도(僧徒)들은 분향 송경하고 범패를 하는 것이 심히 엄숙하였고, 삼절의 관리와 병졸도 다들 경건하게 예를 행하였다. 밤중에 이르러 별이 빛나고 깃발이 요동하여 사람들이 다 기뻐 뛰며 ‘바람이 이미 정남(正南)으로 돌았다’고 하였다. 27일(기묘)에 뱃사람은 풍세가 안정되지 않아서 그대로 그것이 익기를 기다렸다. 바다 위에서 바람의 방향이 돌아서 다음날까지 바뀌지 않는 것을 ‘익는다’고 한다. 그렇지 않으면 큰 바다 가운데에 이르러서 졸지에 바람의 방향이 돌아가면 망연해져 향할 바를 모르게 된다. 그때부터(바뀐 풍향이 익은 때) 곧 바다로 나가기 때문에 바람과 구름과 하늘의 때를 자세히 살펴보고 난 뒤에 전진하는 것이다. 신각(申刻)에 정사와 부사는 삼절의 인원과 함께 다 같이 돌아가 배로 들어갔다. 이때 와서 물빛은 조금 맑아졌으나 물결치는 수면이 약간 움직여 배안은 이미 울렁임을 느꼈다.

 

[주C-001]매잠(梅岑) : 정해현 동북부에 위치한 산 이름. 전한 말기의 학자로 은자가 된 매복(梅福) 자진(子眞)의 은거지로 알려진 곳. 고려, 일본 등지의 외항선이 이곳으로 길을 잡아 항해하였다.

[주D-001]오대산(五臺山) : 산서성(山西省) 오대현에 있는 중국 명산의 하나. 사원이 많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주D-002]오월(吳越) : 오대(五代)의 10국 중의 하나인 전유(錢?)가 세운 오월국으로 5세 84년 동안 지탱하다가 송에 귀속되었다.

 

 

-[海驢焦] 해려초

二十八日庚辰。天日淸晏。卯刻。八舟同發。使副具朝服。與二道官。望闕再拜。投御前所降神霄玉淸九陽總眞符籙。幷風師龍王牒。天曹直符。引五嶽眞形。與止風雨等十三符訖。張篷而行。出赤門。食頃。水色漸碧。四望山島稍稀。或如斷雲。或如偃月。已後。過海驢焦。狀如伏驢。崇寧間,舟人有見海獸出沒波間,狀如驢形。當別是一物。未必因焦石而有驢也。

28일(경진)에 하늘은 해가 돋고 깨끗이 갰다. 묘각(卯刻)에 8척의 배가 함께 떠났다. 정사와 부사는 조복(朝服)을 갖추어 입고 두 도관(道官)과 함께 궁궐을 바라보고 재배하고서 어전(御前)에서 내린 신소옥청구양총진부록(神霄玉淸九陽總眞符籙)ㆍ풍사용왕첩(風師龍王牒)ㆍ천조직부인오악진형(天曹直符引五嶽眞形) 및 지풍우(止風雨) 등 13부(符)를 바다에 던졌다. 그것이 끝나자 뜸을 펼치고 가 적문(赤門)을 나가니 한식경에 물빛이 점점 푸르러졌다. 사방을 바라보니 산과 섬은 좀 드물어져, 혹은 끊긴 구름 같고 혹은 초승달과 같았다. 그런 뒤에 해려초를 지났는데 그 형상이 엎디어 있는 나귀와 같았다. 숭녕(崇寧) 연간에 뱃사람들 중에 바다 짐승이 물결 사이에 출몰하는 것을 본 자가 있었는데, 그 형상이 나귀의 형체 같았다고 한다. 그것은 틀림없이 다른 한 가지 물건이었을 것이고, 반드시 암초에 의지해서 나귀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주D-001]부(符)를……던졌다 : 순조로운 항해를 희구하는 뜻으로 부적을 바다에 던지는 의식을 행한 것이다.

 

 

 

-[蓬萊山] 봉래산

蓬萊山。望之甚遠。前高後下。峭拔可愛。其島。尙屬昌國封境。其上極廣。可以種蒔。島人居之。仙家三山中。有蓬萊。越弱水三萬里。乃得到。今不應指顧間見。當是今人。指以爲名耳。過此則不復有山。惟見連波起伏。嘳豗淘涌。舟楫振撼。舟中之人。吐眩顚仆。不能自持。十八九矣。

 

봉래산은 바라보면 심히 먼데, 앞이 높고 뒤가 내려갔다. 뾰족하게 치솟아 있는 것이 사랑스럽다. 그 섬은 아직도 창국(昌國정해현을 말함)의 봉경(封境)에 속해 있다. 그 위는 극히 넓어 씨를 뿌릴 수 있어서 섬 사람들이 산다. 선가(仙家)의 삼신산(三神山) 가운데 봉래가 있는데, 그곳은 약수(弱水) 3만 리를 넘어가서야 도달할 수 있다. 지금은 바로 앞에서 ‘선가의 봉래’를 보게는 안 될 것이므로, 틀림없이 지금 사람이 이것을 가리켜 그렇게 이름지었을 것이다. 이곳을 지나면 다시는 산이 나오지 않는다. 오직 연이은 파도가 솟았다 내렸다 하며 내뿜어 두들기고 들끓어 오르고 하는 것만이 보일 뿐이다. 선박이 뒤흔들려 배안의 사람들이 토하고 현기증이 나서 쓰러지고 제몸을 가누지 못하는 자가 십중 팔구나 된다.

[주D-001]약수(弱水) : 신선이 살았다는 중국 서쪽의 전설적인 강. 중국의 장안에서 서남 3만리 또는 4만 리의 거리에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書經 禹貢》

 

 

 

-[半洋焦] 반양초

舟行過蓬萊山之後。水深碧。色如玻璃。浪勢益大。洋中有石。曰半洋焦。舟觸焦則覆溺。故篙師最畏之。是日午後。南風益急。加野狐颿。制颿之意。以浪來迎舟。恐不能勝其勢。故加小颿於大颿之上。使之提挈而行。是夜。洋中不可住。惟視星斗前邁。若晦冥。則用指南浮針。以揆南北。入夜擧火。八舟皆應。夜分。風轉西北。其勢甚亟。雖已落篷。而颭動颺搖。甁盎皆傾。一舟之人。震恐膽落。黎明稍緩。人心向寧。依前張颿而進。

배의 항행이 봉래산을 지난 후에는 물이 깊고 푸른색이 유리 같으며 물결의 기세가 더욱 터진다. 큰 바다 가운데 돌이 있는데 그것을 반양초라고 한다. 배가 암초에 부딪히면 뒤집혀 물에 빠지기 때문에 뱃사공들은 그것을 가장 두려워한다. 이날 오후에 남풍이 더욱 급해져 야호범(野狐颿)을 보탰는데, 그것은 돛의 힘을 제약하자는 뜻이었다. 물결이 몰려와서 배가 그 기세를 이겨내지 못할까 두려웠다. 그래서 작은 돛을 큰돛 위에다 보태서 그것들이 같이 어울려서 가게 하는 것이다. 이날 밤에는 큰 바다 가운데서 머물러 있을 수는 없어서 다만 별을 살피면서 앞으로 가다가, 캄캄해지게 되면 지남부침(指南浮針 나침반의 일종)을 써서 남북을 헤아렸다. 밤중에 접어들어 불을 치켜올리면 8척의 배가 다 그것에 호응하였다. 한밤중에 바람이 서북으로 돌았는데, 그 기세가 심히 급해서 이미 뜸을 내려버렸는데도 이리저리 뒤흘려서, 병이니 항아리니 하는 것이 다 쓰러지고 온 배의 사람들이 크게 두려워하며 담기가 없어져 버렸다. 여명이 되어서야 좀 가라앉아 사람들의 마음이 안정되어 가서 그대로 돛을 올리고 전진하였다.

 

 

 

-[白水洋] 백수양

二十九日辛巳。天色陰翳。風勢未定。辰刻。風微且順。復加野狐颿。舟行甚鈍。申後風轉。酉刻雲合雨作。入夜乃止。復作南風。入白水洋。其源。出靺鞨。故作白色。是夜。擧火三舟相應矣。

29일(신사)에 하늘 빛이 어둡고 풍세가 진정되지 않더니 진각(辰刻)에 바람이 적어지고 또 순해져, 다시 야호범(野狐颿)을 보탰으나, 배의 항행이 심히 둔하였다. 신시(申時) 후에 바람이 돌았고 유각(酉刻)에는 구름이 꽉 차서 비가 오다가 밤중에 접어들어서야 멎었다. 다시 남풍이 일어나 백수양으로 들어갔다. 그 근원이 말갈(靺鞨)에서 나왔기 때문에 흰색이 된 것이다. 이날 밤에 불을 치켜들었더니 세 척의 배가 호응하였다.

[주D-001]말갈(靺鞨) : 숙신(肅愼)의 후예로, 후에는 여진(女眞)으로 통칭되어 금 제국(金帝國)을 건설하여 대륙의 북반을 지배하였다. 그 근거는 지금의 소만국경과 만주와 한반도의 접경지대를 포괄하는 지역이었으나, 북송의 휘종 당시의 여진의 세력은 중국 본토를 깊이 파고 들어가 양자강에까지 육박하였다. 여기서 ‘말갈’이라 함은 중국 대륙의 동북방 지역을 막연히 가리킨 것으로 이해된다.

[주D-002]흰색이 된 것이다 : 백수양(白水洋)의 물이 담수여서 깨끗함을 말한 것이라 여겨진다.

 

 

 

-[黃水洋] 황수양

黃水洋。卽沙尾也。其水渾濁且淺。舟人云。其沙自西南而來。橫於洋中千餘里。卽黃河入海之處。舟行至此。則以雞黍祀沙。蓋前後行舟遇沙。多有被害者。故祭其溺死之魂云。自中國適句驪。唯明州道則經此。若自登州版橋以濟。則可以避之。比使者回程至此。第一舟幾遇淺。第二舟。午後。三柂倂折。賴宗社威靈。得以生還。故舟人。每以過沙尾。爲難。當數用鉛硾。時其深淺。不可不謹也。

황수양은 곧 모래톱이다. 그 물은 흐리고 또 얕다. 뱃사람이 말하기를 ‘그 모래는 서남쪽에서부터 와서 큰 바다 가운데 1천여 리에 가로놓인 것으로 곧 황하(黃河)가 바다로 들어가는 곳’이라 한다. 배의 항행이 이곳에 이르면 닭과 수수로 모래를 제사한다. 대체로 전후로 배를 몰고 모래를 지나가는 동안 해를 입은 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 익사한 혼을 제사하는 것이라고 한다. 중국에서 구려(句麗 우리의 땅을 말함)로 가는 데에는 오직 명주(明州)의 길만이 이곳을 지나가는데, 등주(登州)의 판교(版橋)에서부터 건너가면 이곳을 피할 수가 있다. 근자에 사자(使者)가 귀로에 이곳에 이르러 첫째 배는 거의 얕은 곳에 박힐 뻔하였고, 둘째 배는 오후에 세 키를 다 부러뜨렸는데, 종묘 사직의 위령(威靈) 덕분으로 살아 돌아올 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뱃사람들은 언제나 모래톱을 지나가는 것을 어렵게 여기는 것이다. 따라서 자주 납 추를 사용하여 때때로 그 깊이를 알아보는 것을 조심스럽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주D-001]등주(登州) : 주명(州名)으로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봉래현(蓬萊縣). 판교는 그 항구의 이름.

 

 

 

-[黑水洋] 흑수양

黑水洋。卽北海洋也。其色。黯湛淵淪。正黑如墨。猝然視之。心膽俱喪。怒濤噴薄。屹如萬山。遇夜。則波間熠熠。其明如火。方其舟之升在波上也。不覺有海。惟見天日明快。及降在窪中。仰望前後水勢。其高蔽空。腸胃騰倒。喘息僅存。顚仆吐嘔。粒食不下咽。其困臥于茵褥上者。必使四維隆起。當中如槽。不爾則傾側輥轉。傷敗形體。當是時。求脫身於萬死之中。可謂危矣。

흑수양은 곧 북해양(北海洋)이다. 그 물빛은 어둠이 깊이까지 파고들어 검은 색이 먹 같아, 졸지에 그것을 보면 정신과 담력을 다 잃게 된다. 성난 파도가 내뿜고 닥쳐오는 것이 만으로 헤아리는 산들같이 치솟아 오른다. 밤이 되면 파도 사이가 선명하게 빛나 그 밝기가 불과 같다. 배가 파도 위로 올라갈 때는 바다가 있음을 느끼지 않고, 오직 하늘의 해가 밝고 쾌할 뿐이다. 그러다가 우묵한 파도 밑으로 내려가게 되어 전후의 수세를 쳐다보면 그 높이 하늘을 가리워 위장이 뒤집히고 헐떡이는 숨길만 겨우 남아 있어, 쓰러져 토악질을 하며 낱알이 목구멍을 내려가지 않는다. 보료 위에서 지쳐 누워 있는 자는 반드시 사방을 높이 올려서, 가운데가 구유통같이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기울어져 굴러서 몸을 다치게 된다. 이러한 때에 몸을 만 번 죽는 가운데서 벗어나기를 바라니, 위험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宣和奉使高麗圖經卷第三十五

海道[二]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35 권

해도 2

 

 

 

 

-[夾界山] 협개산

六月一日壬午黎明。霧昏乘平南風。巳刻稍霽。風轉西南。益張野狐颿。午正風厲。第一舟大檣。砉然有聲。勢曲欲折。亟以大木附之。獲全。未後。東北望天際。隱隱如雲。人指以爲半托伽山。不甚可辨。入夜風微。舟行甚緩。二日癸未。早霧昏曀。西南風作。未後澂霽。正東望。一山如屛。卽夾界山也。華夷。以此爲界限。初望隱然。酉後逼近。前有二峯。謂之雙髻山。後有小焦數十。如奔馬狀。雪浪噴激。遇山濺瀑尤高。丙夜。風急雨作。落帆徹蓬。以緩其勢。

6월 1일(임오) 여명에 안개가 자욱한데 배는 동남풍을 탔다. 사각(巳刻)에 좀 갰고 바람이 서남으로 돌아 야호범을 더 보태었다. 오정에 바람이 사나워 첫째 배의 대장(大檣)이 와지끈 하고 소리가 나며 휘어서 부러지려고 해서 급히 큰 나무를 거기에 붙여 온전할 수가 있었다. 미시(未時) 후에 동북쪽 하늘 가를 바라보니 은은히 구름 같은 것이 보이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반탁가산(半托伽山)이라고 하였으나 그리 똑똑하게 가려낼 수는 없었다. 밤에는 바람이 약해 배의 항행이 매우 느렸다. 2일 계미에 아침 안개가 자욱하고 서남풍이 일어나더니 미시 후에 맑게 갰다. 정동(正東)으로 병풍 같은 산 하나가 바라보이는데 그것이 곧 협계산으로, 중국과 이족(夷族)이 이것으로 경계를 삼는다. 처음 바라볼 때는 잘 보이지는 않았으나, 유시(酉時) 후에 바싹 다가가니 앞에 두 개의 봉우리가 있는데 그것을 쌍계산(雙髻山)이라고 하였다. 그 뒤에 작은 암초 수십 개가 있는데 달리는 말의 형상과 같다. 눈 같은 물결이 세게 뿜는데 그것이 산을 만나서는 튀어 쏟아지는 것이 더욱 높아진다. 자정에 바람이 세고 비가 와서 돛을 내리고 뜸을 걷어 그 기세를 늦추었다.

 

 

 

-[五嶼] 오서

五嶼。在處有之。而以近夾界者。爲正。定海之東北蘇州洋內群山馬島。皆有五嶼。大抵篙工。指海山上小山爲嶼。所以數處五山相近。皆謂之五嶼矣。三日甲申。宿雨未霽。東南風作。午後。過是嶼。風濤噴激。久之崒巉巖。亦甚可愛。

오서는 곳곳마다 있으나 협계산 가까이에 있는 것이 올바른 것이다. 정해(定海)의 동북쪽 소주(蘇州)의 큰 바다 안의 군산(群山)과 마도(馬島)에도 오서가 있다. 대체로 사공들은 바다의 산 위의 작은 산을 가리켜서 ‘서(嶼)’라고 한다. 그래서 여러 군데에 다섯 산이 서로 다가 있으면 다 그런 것들을 ‘오서’라고 하는 것이다. 3일 갑신에 밤새 오던 비가 개지 않고 동남풍이 일어났다. 오시 후에 이 서(嶼)를 지나갔는데, 바람과 파도가 거세게 뿜어대어 오래 계속되는 데 따라 높고 험해지는 것 역시 퍽 사랑스러웠다.

 

 

 

-[排島] 배도

是日巳刻。雲散雨止。四顧澂霽。遠望。三山並列中一山如堵。舟人。指以爲排島。亦曰排垜山。以其如射垜之形耳。

이날 사각(巳刻)에 구름이 흩어지고 비가 멎어, 사방을 돌아보니 깨끗이 갰다. 멀리 바라보니 세 산이 나란히 늘어서 있고 그 가운데의 한 산이 담 같은데, 뱃사람은 그것을 가리켜 ‘배도’라고 한다. 또 배타산(排垜山)이라고도 하는데, 그것이 화살받이의 형태 같아서 그런 것이다.

 

 

 

-[白山] 백산

是日午後。東北望。一山極大。連亘如城。日色射處。其白如玉。未後風作。舟行甚快。

이날 오시 후에 동북쪽으로 한 산이 바라보였다. 극히 큰 것이 성같이 잇닿아 늘어서 있는데, 햇빛이 쬐는 곳은 희기가 옥과 같다. 미시 후에 바람이 일어 배의 항행이 매우 빨라졌다.

 

 

 

-[黑山] 흑산

黑山。在白山之東南。相望甚邇。初望極高峻。逼近。見山勢重複。前一小峯。中空如洞。兩間有澳。可以藏舟。昔海程。亦是使舟頓宿之地。館舍猶存。今取道。更不拋泊。上有民居聚落。國中大罪得貸死者。多流竄於此。每中朝人使舟至。遇夜於山顚。明火於熢燧。諸山次第相應。以迄王城。自此山始也。申後舟過。

흑산은 백산 동남쪽에 있어 바라보일 정도로 가깝다. 처음 바라보면 극히 높고 험준하고, 바싹 다가서면 산세가 중복되어 있는 것이 보인다. 앞의 한 작은 봉우리는 가운데가 굴같이 비어 있고 양쪽 사이가 만입(灣入)했는데, 배를 감출 만하다. 옛날에는 바닷길에서 이곳이 역시 사신의 배가 묵는 곳이었다. 관사가 아직 남아 있다. 그런데 이번 길을 잡음에는 여기서 더 이상 정박하지 않았다. 위에는 주민의 부락이 있다. 나라(고려를 말함) 안의 대죄인으로 죽음을 면한 자들이 흔히 이곳으로 유배되어 온다. 언제나 중국 사신의 배가 이르렀을 때 밤이 되면 산마루에서 봉화불을 밝히고 여러 산들이 차례로 서로 호응하여서 왕성(王城 개경을 말함)에까지 가는데, 그 일이 이 산에서부터 시작된다. 신시 후에 배가 이곳을 지나갔다.

 

 

 

-[月嶼] 월서

月嶼二。距黑山甚遠。前曰大月嶼。回抱如月。舊傳上有養源寺。後曰小月嶼。對峙如門。可以通小舟行。

월서는 둘인데 흑산에서는 심히 멀다. 앞의 것을 대월서(大月嶼)라고 하는데 달같이 둘러싸고 있다. 전부터 그 위에 양원사(養源寺)가 있다고 전해진다. 뒤의 것을 소월서(小月嶼)라고 한다. 문같이 대치하고 있어 작은 배가 통행할 수 있다.

 

 

 

-[闌山島] 난산도

闌山島。又曰天仙島。其山高峻。遠望壁立。前二小焦。如龜鱉之狀。

난산도는 또 천선도(天仙島)라고도 하는데 산이 높고 험하다. 멀리 바라보면 벽같이 서 있는데, 앞의 작은 두 암초는 거북과 자라의 형상 같다.

 

 

 

-[白衣島] 백의도

白衣島。三山相連。前有小焦附之。偃檜積蘇。蒼潤可愛。亦曰白甲苫。

백의도는 세 산이 잇닿아 있고 앞에는 작은 암초가 붙어 있는데, 기울어진 노송과 쌓여 있는 차조기는 푸르고 윤기가 있어 사랑스러웠다. 이곳을 또 백갑섬(白甲苫)이라고도 한다.

 

 

 

-[跪苫] 궤섬

跪苫。在白衣島之東北。其山特大於衆苫。數山相連。碎焦環遶。不可勝數。夜潮衝激。雪濤奔薄。月落夜昏而濺沫之明。如火熾也。

궤섬은 백의도의 동북쪽에 있는데 그 산은 여러 섬(苫)들보다 훨씬 크다. 여러 산이 잇닿아 있고 부서진 암초들이 둘러싸고 있는 것이 이루 헤아릴 수 없다. 밤에는 밀물이 세차게 쳐올라 눈 같은 파도가 부서지는데 달이 지고 어두운 속에 물거품의 밝기가 마치 불이 타오르는 것과 같다.

 

 

 

宣和奉使高麗圖經卷第三十六

海道[三]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36 권

해도 3

 

 

 

 

 

-[春草苫] 춘초섬

春草苫。又在跪苫之外。舟人。呼爲外嶼。其上。皆松檜之屬。望之鬱然。夜分風靜。舟行益鈍。

춘초섬은 또 궤섬 밖에 있는데 뱃사람들은 그것을 외서(外嶼)라고 부른다. 그 위는 다 소나무와 노송나무 등인데 바라보니 울창하다. 밤중에는 바람이 조용하여 배의 항행이 더욱 둔해졌다.

 

 

 

-[檳榔焦] 빈랑초

檳榔焦。以形似得名。大抵海中之焦。遠望多作此狀。唯春草苫相近者。舟人。謂之檳榔焦。夜深潮落。舟隨水退。幾復入洋。擧舟恐懼。亟鳴櫓。以助其勢。黎明。尙在春草苫。四日乙酉。天日晴霽。風靜浪平。俯視水色。澄碧如鑑。可以見底。復有海魚數百。其大數丈。隨舟往來。夷猶鼓鬣。洋洋自適。殊不顧有舟楫過也。

빈랑초는 형태가 유사하기 때문에 그 이름을 얻은 것이다. 대체로 바다 가운데의 암초는 멀리서 바라보면 대부분 이런 형상을 하고 있지만, 뱃사람들은 춘초섬과 가까운 것만을 빈랑초라고 한다. 밤이 깊어지자 밀물이 빠져서 배가 물을 따라 물러나 거의 다시 큰바다로 들어가려 해서 모든 배가 두려워하여 급히 노를 저어 그 기세를 도왔다. 여명까지도 여전히 춘초섬에 있었다. 4일 을유에 날씨가 맑게 푸른 것이 거울 같아 바닥을 볼 수 있었다. 또 바다 물고기 수백 마리가 있어 크기가 수장(數丈)이나 되는데, 배를 따라 왕래하며 즐거이 지느러미를 움직이며 유유자적하고, 선박이 지나가는 것은 전연 아랑곳도 하지 않는다.

 

 

 

-[菩薩苫] 보살섬

是日午後。過菩薩苫。麗人。謂其上。曾有顯異。因以名之。申後風靜。隨潮寸進。

이날 오시 후에 보살섬을 지나갔다. 고려인들이 말하기를, 그 위에서 기적이 나타난 적이 있어서 그렇게 명명한 것이라고 한다. 신시(申時) 후에는 바람이 조용해져서 밀물을 따라 전진하였다.

 

 

 

-[竹島] 죽도

是日酉後。舟至竹島拋泊。其山數重。林木翠茂。其上。亦有居民。民亦有長。山前。有白石焦數百塊。大小不等。宛如堆玉。使者回程至此。適値中秋月出。夜靜水平。明霞映帶。斜光千丈。山島林壑,舟楫器物。盡作金色。人人起舞。弄影。酌酒吹笛。心目欣快。不知前有海洋之隔也。

이날 유시(酉時) 후에 배가 죽도에 이르러 정박하였다. 그 산은 여러 겹이고 수풀의 나무들이 짙푸르게 무성하며, 그 위에는 역시 주민들이 있고 주민들에는 또한 장(長)이 있었다. 산 앞에 흰 돌로 된 암초가 수백 덩어리 있는데 크기가 같지 않고 흡사 쌓아 놓은 옥과 같았다. 사자(使者)가 귀로에 이곳에 이르렀을 때 마침 추석달이 돋아 올랐었다. 밤은 고요하고 물은 잔잔한데 밝은 놀이 서로 비치고 비낀 달빛이 천 장(千丈)이나 되어, 섬과 골짜기와 선박과 기물이 온통 금빛이 되었다. 사람마다 일어나 춤추어 그림자를 희롱하며, 술을 들고 저를 불고 하여 마음과 눈이 즐거워서 앞에 해양이 격해 있음을 잊었다.

 

 

 

-[苦苫苫] 고섬섬

五日丙戌。晴明。過苦苫苫。距竹島不遠。其山相類。亦有居人。麗俗。謂刺蝟毛爲苦苫苫。此山林木。茂盛而不大。正如蝟毛。故以名之。是日拋泊此苫。麗人拏舟載水來獻。以米謝之。東風大作。不能前進。遂宿焉。

5일 병술은 날씨가 청명하였는데 고섬섬을 지나갔다. 죽도에서 멀지 않고 그 산이 유사한데 역시 주민이 있었다. 고려의 습속으로는 자위모(刺蝟毛 고슴도치의 털)를 고섬섬이라고 한다. 이 산의 나무들은 무성하나 크지 않아 바로 고슴도치털 같기 때문에 그렇게 명명한 것이다. 이날 이 섬에 정박하니, 고려인들이 배로 물을 싣고 와 바쳐서 쌀로 사례하였다. 동풍이 크게 일어 전진할 수 없어서 결국 여기서 묵었다.

 

 

 

-[群山島] 군산도

六日丁亥。乘早潮行。辰刻。至群山島拋泊。其山十二峰相連。環遶如城。六舟來迓。載戈甲鳴鐃龡角。爲衛。別有小舟。載綠袍吏。端笏揖於舟中。不通姓字而退。云群山島注事也。繼有譯語官。閤門通事舍人。沈起來。參同接伴金富軾。知全州吳俊和。遣使來投遠迎狀。使副。以禮受之。揖而不拜。遣掌儀官。相接而已。繼遣答書。舟旣入島。沿岸。秉旗幟列植者。百餘人。同接伴。以書送使副及三節。早食。使副。牒接伴。送國王先狀。接伴。遣采舫。請使副上群山亭相見。其亭。瀕海。後倚兩峰。相並特高。壁立數百仞。門外有公廨十餘間。近西小山上。有五龍廟,資福寺。又西有崧山行宮。左右前後。居民十數家。午後。使副乘松舫至岸。三節導從入館。接伴郡守。趨廷設香案。拜舞。望闕拜舞。恭問聖體畢。分兩阼升堂。 使副居上 以次對再拜訖。少前敍致。復再拜就位。上中節。堂上序立。與接伴揖。 國俗皆雅揖 都轄前。致辭再拜。次揖郡守。如前禮。退就席。其位。使副俱南向。接伴郡守。東西相向。下節舟人。聲喏于庭。上節。分坐堂上。中節。分兩廊。下節。坐門之兩廂。舟人。坐于門外。供張極齊肅。飮食且豐腆。禮皃恭謹。地皆設席。蓋其俗如此。亦近古也。酒十行。中節下節。第降殺之。初坐。接伴。親斟以奉。使者。復醻之。酒半。遣人致勸。三節。皆易大觥。禮畢。上中節。趨揖如初禮。使副登松舫。歸所乘大舟。

6일 정해에 아침 밀물을 타고 항행하여 진각(辰刻)에 군산도에 이르러 정박하였다. 그 산은 열 두 봉우리가 잇닿아 둥그렇게 둘려 있는 것이 성과 같다. 여섯 척의 배가 와서 맞아 주는데, 무장병을 싣고 징을 울리고 호각을 불며 호위하였다. 따로 작은 배에 초록색 도포 차림의 관리가 타고 있는데 홀을 바로잡고 배 안에서 읍을 하였으나, 통성명은 하지 않고 물러갔다. 군산도의 주사(注事 아전을 말함)라고 한다. 이어 역어관(譯語官)인 합문 통사사인(閤門通事舍人)심기(沈起)가 와서 동접반(同接伴) 김부식(金富軾)과 합류하였다. 지전주(知全州) 오준화(吳俊和)가 사자를 보내와 원영장(遠迎狀)을 내놓자 정사와 부사가 예를 차려 그것을 받았다. 그러나 읍만 하고 배례하지는 않았고 장의관(掌儀官)을 보내 접촉시켰을 따름이다. 이어 답서(答書)를 보냈다.

배가 섬으로 들어가자 연안에서 깃발을 잡고 늘어서 있는 자가 1백여 인이나 되었다. 동접반이 서신과 함께 정사, 부사 및 삼절(三節)의 조반을 보내왔다. 정사와 부사가 접반에게 이첩(移牒)하여 국왕선장(國王先狀 국왕에게 그들의 도착을 만나기 전에 먼저 알리는 서장)을 보내니, 접반이 채색 배[采舫]를 보내어 정사와 부사에게 군산정(群山亭)으로 올라와 만나주기를 청했다. 그 정자는 바다에 다가서 있고 뒤는 두 봉우리가 의지하고 있는데, 그 두 봉우리는 나란히 우뚝 서 있어 절벽을 이루고 수백 길이나 치솟아 있다. 문 밖에는 공해(公廨 관가 소유의 건물) 10여 칸이 있고, 서쪽 가까운 작은 산 위에는 오룡묘(五龍廟)와 자복사(資福寺)가 있다. 또 서쪽에 숭산 행궁(崧山行宮)이 있고, 좌우 전후에는 주민 10여 가가 있다. 오시 후에 정사와 부사는 송방(松舫)을 타고 해안에 이르렀고, 삼절은 수종 인원을 이끌고 관사로 들어갔는데 접반과 군수가 달려와 맞이하였다. 뜰에는 향안(香案 향로를 놓은 상)이 마련되어 있는데, 궁궐을 바라보고 배례(拜禮)하며 무도(舞蹈)하고서는 공손하게 성체(聖體)의 안부를 물었다.

그 일이 끝나고서는 양쪽 층계로 나뉘어 대청으로 올라가 정사와 부사가 상좌에 있으면서 차례로 만나 재배하고, 끝나면 좀 앞으로 나가 인사를 하고 다시 재배하고 자리로 갔고, 상ㆍ중절(上中節)은 대청 위에서 차례로 서서 위과 읍을 하였다.

이 나라의 습속은 다 아읍(雅揖 한쪽 무릎을 꿇고 하는 읍을 말함)을 한다. 도할관이 앞으로 나가 인사말을 하고 재배하고는 다음에 군수에게 앞서 한 예와 같이 읍하고 물러나 자기 위치에 와서 앉는다. 정사와 부사는 다 남쪽을 향하고, 접반과 군수는 동서로 마주 향하고, 하절(下節)과 뱃사람은 뜰에서 묵례하고, 상절(上節)은 대청에 나누어 앉고, 중절(中節)은 양쪽 행랑에 나누어 앉고, 하절(下節)은 문의 양쪽 곁채에 앉고, 뱃사람은 문밖에 앉는다. 시설이 극히 정제 엄숙하고 음식은 또 풍성하고 예모는 공손 근엄하다. 바닥에는 다 자리를 깔았는데 대체로 그 습속이 그러한 것으로 역시 고풍에 가까운 것이다. 술이 열 차례 돌아가는데 중절과 하절은 다만 그 횟수가 줄어들 뿐이다.

처음 앉을 때에는 접반이 친히 따라서 바치고 사자(使者)는 다시 그것을 따라 준다. 주연이 반쯤 진행되었을 때 사람을 보내어 술을 권하게 하고, 삼절은 다 큰 술잔으로 바꾼다. 예가 끝나면 상ㆍ중절은 처음의 예와 같이 걸어나가 읍하고, 정사와 부사는 송방에 올라타고 타고 온 큰 배로 돌아간다.

[주D-001]합문통사사인(閤門通事舍人) : 합문(閤門) 즉 통례문(通禮門)의 관원으로 정7품.

[주D-002]김부식(金富軾) : 이때 동접반으로서 궁과 접촉이 밀접해져 본서 제8권 인물(人物) 중에 세 번째로 소개되었다.

 

 

-[橫嶼] 횡서

橫嶼。在群山島之南。一山特大。亦謂之案苫。前後。有小焦數十繞之。石脚一洞。深可數丈。高闊稱之。潮至拍水。聲如雷車。

횡서는 군산도의 남쪽에 있다. 한 산이 특히 크며, 또 안섬(案苫)이라고도 한다. 앞뒤에 작은 암초 수십 개가 둘려 있다. 돌 밑뿌리에 동굴이 하나 있는데 그 깊이가 두어 길[數丈]이나 되며 높고 넓은 것으로 유명하다. 밀물이 들어와 물을 치면 그 소리가 우레와 같다.

 

 

 

 

 

宣和奉使高麗圖經卷第三十七

海道[四]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37 권

해도 4

 

 

 

 

 

-[紫雲苫] 자운섬

七日戊子。天日晴快。早。全州守臣。致書備酒禮。曲留使者。使者。以書固辭乃已。惟受所饋蔬茹魚蛤等。因以方物酬之。午刻解舟。宿橫嶼。八日己丑。早發。南望一山。謂之紫雲苫。橫巘差疊。其後二山尤遠。宛如雙眉凝翠焉。

7일 무자에 날씨가 쾌청하였다. 아침에 전주 수신(全州守臣 전주 목사를 말함)이 서신을 보내와 술과 예를 갖춰 간곡하게 사자를 만류하였으나, 사자가 서신으로 고사(固辭)하여 중지되었다. 다만 그가 준 채소ㆍ어패 등만을 받고서는 방물(方物 여기서는 중국 물건을 말함)로 갚아 주었다. 오각(午刻)에 배를 풀어 횡서(橫嶼)에서 묵고, 8일 기축에 일찍 떠났다. 남쪽으로 하나의 산이 보이는데, 그 뒤의 두 산은 더욱 멀어, 흡사 한 쌍의 눈썹에 싱그러운 빛이 엉겨 있는 것 같다.

 

 

 

-[富用山] 부용산

是日午後。過富用倉山。卽舟人所謂芙蓉山也。其山。在洪州境內。上有倉廩。積穀且多。云以備邊鄙非常之用。故以富用名之。

이날 오시(午時) 후에 부용창산(富用倉山)을 지나갔다. 그것은 곧 뱃사람들이 말하는 부용산(芙蓉山)인데, 그 산은 홍주(洪州) 경내에 있다. 그 위에는 창고가 있고, 또 쌓아둔 곡식이 많다고 한다. 변경의 비상시 용도에 대비한 것이라 해서 부용(富用 풍부하게 씀)이라 명명한 것이다.

[주D-001]홍주(洪州) : 지금의 충청남도 홍성군.

 

 

 

-[洪州山] 홍주산

洪州山。又在紫雲苫之東南數百里。州建其下。又東一山。產金。盤踞如虎。謂之東源。小山數十。環拱如城。其山上。有一潭。淵澄可鑒。不可測。是日申刻。舟過。

홍주산은 또 자운섬(紫雲?)의 동남쪽 수백 리 지점에 있는데, 고을이 그 아래에 이뤄졌다. 또 동쪽에는 금(金)이 나는 산 하나가 범같이 도사리고 있는데, 그것을 동원(東源)이라고 한다. 작은 산 수십 개가 성같이 둘러싸 있고, 그 산 위에 못이 하나 있는데 맑기가 거울 같고 깊이는 헤아릴 수가 없다. 이날 신각(申刻)에 배가 이 산을 지나갔다.

 

 

 

-[鵶子苫]아자섬

鵶子苫。亦名軋子苫。麗人。謂笠爲軋。其山形似之。因以得名。是日酉刻。舟過。

아자섬은 또 알자섬(軋子苫)이라고도 한다. 고려인들은 삿갓[笠]을 ‘알(軋)’이라고 하는데, 그 산의 형태가 그것과 유사해서 그 이름을 얻은 것이다. 이날 유각(酉刻)에 배가 이 섬을 지나갔다.

 

 

 

-[馬島] 마도

 

是日酉後。風勢極大。舟行如飛。自軋子苫。一瞬之間。卽泊馬島。蓋淸州境也。泉甘草茂。國中官馬。無事則群牧於此。因以爲名。其主峰。渾厚。左臂環抱。前一石觜。入海激水。回波驚湍洶涌。千奇萬怪。不可名狀。故舟過其下。多不敢近。慮觸暗焦也。有客館。曰安興亭。知淸州洪若伊。遣介紹。與譯語官陳懿。同來如全州禮。岸次迓卒旗幟。與群山島不異。入夜。然大火炬。熒煌照空。時風政作惡。舟中搖蕩。幾不可坐。使者扶持。以小舟登岸。相見。如群山亭之禮。惟不受酒禮。夜分還使舟。

이날 유시 후에 풍세가 극히 커서 배의 항행이 나는 듯하였다. 알자섬으로부터 눈 한번 깜짝할 사이에 곧 마도에 정박하였다. 마도는 청주(淸州) 땅이다. 샘물은 달고 풀은 무성한데, 나라 안의 관마(官馬)는 일이 없으면 여기에 몰아다 먹인다. 그래서 그런 이름을 붙이게 된 것이다. 그 주봉(主峰)은 중후(重厚)해 보이는데, 왼쪽으로 둥그렇게 껴안고 있다. 앞의 돌부리 하나가 바다로 들어가 있어서 물과 부딪쳐 파도를 돌려보내는데, 놀란 여울물이 들끓어오르는 것이 천만 가지로 기괴하여 말로 형언할 수 없다. 그래서 배가 그 아래를 지나갈 때는 대부분 감히 근접하지 못하는데, 그것은 암초에 부딪칠까 염려되기 때문이다. 객관(客館)이 있는데, 안흥정(安興亭)이라 한다. 지청주(知淸州) 홍약이(洪若伊)가 개소(介紹)를 역어관(譯語官) 진의(陳懿)와 함께 보내와 전주(全州)에서와 같이 예우하였다. 해안에서의 환영과 군졸의 기치는 군산도의 경우와 다름이 없었다. 밤으로 접어들어서는 큰 횃불에 불을 붙여 휘황하게 하늘을 비췄다. 그때 막 바람이 사나워져 배 안이 뒤흔들려 거의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사자(使者)는 부축을 받아 작은 배로 상륙하였고, 상견례(相見禮)는 군산정에서의 예와 같았다. 그러나 주례(酒禮)만은 받지 않고 밤중에 사절의 배로 돌아왔다.

 

 

 

-[九頭山] 구두산

九日庚寅。天氣淸明。南風甚勁。辰發馬島。巳刻。過九頭山。其山云有九峯。遠望不甚詳。然而林木叢茂。淸潤可喜。

9일 경인은, 날씨는 청명하였으나 남풍이 몹시 강하였다. 진시에 마도를 출발하여 사각(巳刻)에 구두산을 지나갔다. 그 산에는 아홉 개의 봉우리가 있다고 하는데, 멀리서 바라보니 그리 분명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수풀이 무성하여 밝고 윤기가 도는 것이 좋았다.

 

 

 

 

宣和奉使高麗圖經卷第三十八

海道[五]

선화동사고려도경 제 38 권

해도 5

 

 

 

 

 

-[唐人島] 당인도

唐人島。未詳其名。山與九頭山相近。是日午刻。舟過島下。

당인도는 그 이름에 관해서는 잘 모르겠으나, 그 산은 구두산과 가깝다. 이날 오각(午刻)에 배가 이 섬 아래를 지나갔다.

 

 

 

-[雙女焦] 쌍녀초

雙女焦。其山甚大。不異島嶼。前一山。雖有草木。但不甚深密。後一山頗小。中斷爲門。下有暗焦。不可通舟。是日巳刻。舟自唐人島。繼過此焦。風埶愈亟。舟行益遠。

쌍녀초는 그 산이 심히 커서 도서(島嶼)와 다름없다. 앞의 한 산에는 초목이 있기는 하나 그리 빽빽하지 않다. 뒤의 한 산은 퍽 작고 중간이 끊어져 문이 되어 있으나, 아래에 암초가 있어 배가 지나가지는 못한다. 이날 사각(巳刻)에 배가 당인도에서부터 이어 이 초(焦)를 지나갔는데, 풍세가 매우 급해져서 배의 항행이 더욱 빨랐다.

 

 

 

-[大青嶼] 대청서

大青嶼。以其遠望鬱然。如凝黛故。麗人作此名。是日午刻舟過。

대청서는 멀리서 바라보면 울창한 것이 진한 눈썹먹 같다 해서 고려인이 이 이름을 붙인 것이다. 이날 오각에 배가 이곳을 지나갔다.

 

 

 

-[和尙島] 화상도

和尙島。山勢重疊。林壑深茂。山中多虎狼。昔嘗有學佛者。居之。獸不敢近。今葉老寺。乃其遺迹也。故麗人。謂之和尙島。是日未刻。舟過其下。

화상도는 산세가 중첩하고 숲이 우거졌으며 골이 깊고 무성하다. 산 속에는 호랑이가 많다. 옛날 불도를 배우는 자가 거기에 살았었는데, 짐승이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하며, 지금의 엽로사(葉老寺)가 그 유적이다. 그래서 고려인들은 그것을 화상도(화상은 중에 대한 경칭)라고 한 것이다. 이날 미각(未刻)에 배가 그 아래를 지나갔다.

 

 

 

-[牛心嶼] 우심서

牛心嶼。在小洋中。一峰特起。狀類覆盂。而中稍銳。麗人。謂之牛心。它處皆見之。形肖此山而差小者。亦謂之雞心嶼。是日未正。舟過此嶼。南風小雨。

우심서는 소양(小洋) 가운데 있다. 한 봉우리가 유독 솟아나 형상이 엎어 놓은 바리[盂]와 닮았는데, 가운데가 좀 날카롭다. 고려인들은 그것을 소의 염통이라고 하는데, 이런 것은 어디를 가나 흔히 보게 된다. 또 형체가 이 산과 닮고 약간 작은 것은 계심서(雞心嶼)라고 한다. 이날 미시 정각에 이 섬을 지나갔는데, 남풍에 가랑비가 내렸다.

 

 

 

-[聶公嶼] 섭공서

聶公嶼。以姓得名。遠視甚銳。逼近如堵。蓋其形匾。縱橫所見各異。是日未末。舟過其下。

섭공서는 성(姓)으로 이름을 얻은 것이다. 멀리서 보면 심히 날카로운데 바싹 가까이 가면 담 같다. 대체로 그 형체가 납작해서 가로 보는 것과 세로 보는 것이 각각 다르다. 이날 미시 말에 배가 그 아래를 지나갔다.

 

 

 

 

宣和奉使高麗圖經卷第三十九

海道[六]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39 권

해도 6

 

 

 

 

 

-[小青嶼] 소청서

小青嶼。如大青嶼之形。但其山。差小而周圍。多焦石。申初舟過。雨埶稍密。

소청서는 대청서의 모양과 같은데 다만 그 산이 약간 작고 주위에 초석이 많을 뿐이다. 신시(申時) 초에 배가 지났는데 비가 제법 세게 쏟아졌다.

 

 

 

-[紫燕島] 자연도

是日申正。舟次紫燕島。卽廣州也。倚山爲館。榜曰慶源亭。亭之側。爲幕屋數十間。居民草舍。亦衆。其山之東一嶼。多飛燕。故以名之。接伴尹彥植。知廣州陳淑。遣介紹。與譯官卓安。持書來迎。兵仗禮儀。加厚。申後雨止。使副與三節。登岸到館。其飮食相見。如全州禮。夜漏下二刻。歸舟。十日辛卯辰刻。西北風。八舟不動。都轄吳德休,提轄徐兢。同上節。復以采舟。詣館。過濟物寺。爲元豐使人故左班殿直宋密。飯僧畢歸舟。巳刻。隨潮而進。

이날 신시 정각에 배가 자연도에 머무르니, 이곳은 곧 광주(廣州)이다. 산에 의지하여 관사를 지었는데, 방(榜)에 ‘경원정(慶源亭)’이라고 하였다. 경원정 곁에는 막집[幕屋] 수십 칸을 지었다. 주민들의 초가집도 많다. 그 산의 동쪽 한 섬에 날아다니는 제비가 많기 때문에 그렇게 명명한 것이다. 접반 윤언식(尹彦植)과 지광주(知廣州) 진숙(陳淑)이 개소(介紹)와 역관 탁안(卓安)을 보내어 서신을 가지고 와서 영접하게 하였는데, 병장과 의례가 융숭하였다. 신시(申時) 후에 비가 멎어 정사와 부사가 삼절(三節)과 함께 상륙하여 관사에 당도하였고, 그 음식과 상견례는 전주에서의 예(禮)와 같았다. 밤의 누각(漏刻)이 2각으로 내려가자 배로 돌아갔다. 10일(신묘) 진각(辰刻)에 서북풍이 불어 8척의 배는 움직이지 않았다. 도할관 오덕휴(吳德休)와 제할관 서긍(徐兢)은 상절과 함께 다시 채색배로 관사에 갔다가 제물사(濟物寺)에 들러 원풍(元豐 송 신종의 연호) 때의 사신인 고 좌반전직(左班殿直) 송밀(宋密)을 위해 반승(飯僧) 의식을 행한 후에 배로 돌아갔다. 사각(巳刻)에 밀물을 따라서 전진하였다.

 

 

 

-[急水門] 급수문

是日未刻。到急水門。其門不類海島。宛如巫峽江路。山圍屈曲。前後交鎖。兩間。卽水道也。水埶。爲山峽所束。驚濤拍岸。轉石穿崖。喧豗如雷。雖千鈞之弩。追風之馬。不足喩其湍急也。至此。已不可張蓬。惟以櫓棹。隨潮而進。

이날 미각(未刻)에 급수문에 도달하였는데, 그 문은 바다섬과는 닮지 않고 흡사 무협(巫峽)의 강물길과 같았다. 산이 둘러싸고 굴곡을 이루면서 앞뒤로 서로 이어졌는데, 그 양쪽 사이가 물길이다. 수세(水勢)가 산협에 묶여 놀란 파도가 해안을 치고 구르는 돌이 벼랑을 뚫는데, 요란하기가 우레와 같아 천균(千鈞)의 쇠뇌와 바람을 쫓아가는 말이라 해도 그 물살의 급한 것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이곳에 이르러서는 이미 돛을 펼쳐서는 안 되고 다만 노를 써서 밀물을 따라 전진할 뿐이다.

 

 

 

-[蛤窟] 합굴

申後。抵蛤窟拋泊。其山。不甚高大。民居亦衆。山之脊。有龍祠。舟人往還。必祀之。海水至此。比之急水門。變黃白色矣。

신시 후에 합굴에 당도하여 정박하였다. 그 산은 그리 높거나 크지 않고 주민도 많았다. 산등성이에 용사(龍祠)가 있는데, 뱃사람들이 오고가고 할 때 반드시 제사를 드리는데, 바닷물이 이곳에까지 이른다. 급수문과 비교해 보면 물빛이 황백색으로 변한 것이다.

 

 

 

-[分水嶺] 분수령

分水嶺。卽二山相對。小海自此分流之地。水色復渾。如梅岑。時十一日壬辰。早雨作。午刻潮落。雨益甚。國王遣劉文志持先書。使者以禮受之。酉刻。前進至龍骨拋泊。

분수령은 곧 두 산이 마주보고 있는 것으로, 작은 바다가 여기서부터 나뉘어 흘러가는 곳인데 물빛이 다시 매잠(梅岑)같이 흐리다. 11일(임진) 아침에 비가 내리고 오각에 밀물이 빠지며 비가 더욱 심해졌다. 국왕이 유문지(劉文志)를 시켜 선서(先書)를 보내어 왔는데, 사자는 예를 갖추어 그것을 받았다. 유각(酉刻)에 전진하여 용골(龍骨)에 이르러서 정박하였다.

 

 

 

-[禮成港] 예성항

十二日癸巳。早雨止。隨潮至禮成港。使副遷入神舟。午刻。使副率都轄提轄官。奉詔書于采舟。麗人。以兵仗,甲馬,旂幟,儀物。共萬計。列於岸次。觀者如堵墻。采舟及岸。都轄,提轄。奉詔書入于采輿。下節。前導。使副後從。上中節。以次隨之。入于碧瀾亭。奉安詔書訖。分位少愒。次日。遵陸入于王城。臣竊惟海道之難。甚矣。以一葉之舟。泛重溟之險。惟恃宗社之福。當使波神。效順以濟。不然則豈人力所能至哉。方其在洋也。以風颿爲適從。若或暴橫。轉至他國。生死瞬息。又惡三種險。曰癡風。曰黑風。曰海動。癡風之作。連日怒號不已。四方莫辨。黑風則飄怒不時。天色晦冥。不分晝夜。海動則徹底沸騰。如烈火煮湯。洋中遇此。鮮有免者。且一浪送舟。輒數十餘里。而以數丈之舟。浮波濤間。不啻豪末之在馬體。故涉海者。不以舟之大小爲急。而以操心履行爲先。若遇危險。則發於至誠。虔祈哀懇。無不感應者。比者使事之行。第二舟。至黃水洋中。三柂倂折。而臣適在其中。與同舟之人。斷髮哀懇。祥光示現。然福州演嶼神。亦前期顯異。故是日。舟雖危。猶能易他柂。旣易。復傾搖如故。又五晝夜。方達明州定海。比至登岸。擧舟臞顇。幾無人色。其憂懼。可料而知也。若以謂海道非難。則還朝復命。不應受重賞。以爲必死。則自祖宗以來。累遣使命。未嘗有飄溺不還者。惟恃國威靈。仗忠信。可以必其無虞耳。今敍此。以爲後來者之勸。比者使人之行。去日以南風。歸日以北風。初發明州。以其年五月二十八日。放洋。得順風。至六月六日。卽達群山島。及回程。以七月十三日甲子。發順天館。十五日丙寅。復登大舟。十六日丁卯。至蛤窟。十七日戊辰。至紫燕島。二十二日癸酉。過小青嶼,和尙島,大青嶼,雙女焦,唐人島,九頭山。是日泊馬島。二十三日甲戌。發馬島。過軋子苫。望洪州山。二十四日乙亥。過橫嶼。入群山門。泊島下。至八月八日戊子。凡十四日。風阻不行。申後。東北風作。乘潮出洋。過苦苫苫。入夜不住。九日己丑。早過竹島。辰巳望見黑山。忽東南風暴。復遇海動。舟側欲傾。人大恐懼。卽鳴鼔招衆舟。復還。十日庚寅。風埶益猛。午刻。復還群山島。至十六日丙申。又六日矣。申後風正。卽發洋。夜泊竹島。又二日風阻不行。至十九日己亥午後。發竹島。夜過月嶼。二十日庚子。早過黑山。次過白山。次過五嶼夾界山。北風大作。低篷以殺其埶。二十一日辛丑。過沙尾。午間。第二舟三副柂折。夜漏下四刻。正柂亦折。而使舟與他舟。皆遇險不一。二十三日壬寅。望見中華秀州山。二十四日癸卯。過東西胥山。二十五日甲辰。入浪港山過潭頭。二十六日乙巳。早過蘇州洋。夜泊栗港。二十七日丙午。過蛟門望招寶山。午刻。到定海縣。自離高麗。到明州界。凡海道。四十二日云。

12일(계사) 아침에 비가 멎자 조수를 따라 예성항으로 들어가고, 정사와 부사는 신주(神舟)로 돌아 들어왔다. 오각에 정사와 부사가 도할관과 제할관을 거느리고 채색배에서 조서(詔書)를 받들고 갔다. 만으로 헤아리는 고려인들이 무기ㆍ갑마(甲馬)ㆍ기치ㆍ의장물[儀物]을 가지고 해안가에 늘어서 있고 구경꾼이 담장같이 둘러서 있었다. 채색배가 해안에 닿자 도할ㆍ제할이 조서를 받들고 채색 가마로 들어가고, 하절이 앞에서 인도하며 정사와 부사는 뒤에서 따라가고 상ㆍ중절이 차례로 따라가서 벽란정(碧瀾亭)으로 들어갔다. 조서를 봉안하는 일을 끝내고는 위차(位次)를 나누어 잠시 휴식을 취했다. 다음날 육로를 따라 왕성(王城)으로 들어갔다. 생각하건대, 바닷길은 어려움이 대단하였거니와, 일엽편주로 험난한 바다에 떠 있을 적에, 오직 종묘 사직의 복이 파신(波神)으로 하여금 순종하게 하였음을 힘입어 건너온 것이요, 그렇지 않았다면 어찌 사람의 힘으로 도달해 낼 수 있었겠는가? 큰 바다에 있을 때에 돛단배로 가는데, 풍랑을 만났다면 다른 나라로 흘러 들어갔으리니, 생사가 순식간에 달라졌을 것이다. 또 세 가지 위험을 싫어하니, 치풍(癡風 음력 7ㆍ8월에 부는 동북풍)과 흑풍(黑風 폭풍)과 해동(海動 바다의 지진으로 일어나는 물의 움직임)이 그것이다. 치풍이 일어나면 연일 성내어 외치며 그칠 줄 모르고 사방을 가려내지 못한다. 흑풍은 때없이 성내어 불어닥치고 하늘 빛이 어두워 낮과 밤을 분간하지 못한다. 해동이 일어나면 바닥에서부터 끓어오르는 것이 거센 불로 물을 끓이는 것과 같다. 큰 바다 가운데서 이것을 만나면 죽음을 면하는 자가 적다. 또, 한 물결이 배를 밀어내는 것이 툭하면 몇 리나 되니, 몇 길의 배로 파도 사이에 떠 있는 것은 터럭끝이 말의 몸에 있는 것 정도도 못 된다. 그래서 바다를 건너는 자는 배가 크냐 작으냐 하는 것을 급무로 삼을 것이 아니라 조심해서 이행하는 것이 제일이다. 만약에 위험을 만나면 지성에서 우러나 경건하게 기도하고 슬프게 간구하면 감응하지 않는 경우가 없다. 근자에 사신의 행차에 둘째 배가 황수양(黃水洋) 가운데에 이르러 세 개의 키가 다 부러졌을 때 내가 마침 그 가운데 있었는데, 같은 배의 사람들과 머리를 깎고 슬프게 간구하였더니 상서로운 빛이 나타났다. 그런데 복주(福州)의 연서신(演嶼神) 역시 기일에 앞서 이적(異蹟)을 나타냈었으므로 이날 배가 비록 위태로웠으나 다른 키로 바꿀 수 있었던 것이다. 뒤에 바꾸고 나서도 다시 전같이 기울며 흔들렸고 5주야를 지나서야 비로소 명주(明州)의 정해(定海)에 도달하였다. 상륙할 때에 가까워져서는 온 배의 사람들이 초췌해져 거의 산사람의 기색이 없었으니, 그들의 근심과 두려움을 헤아려 알 수 있을 것이다. 만약에 바닷길이 험난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조정에 돌아와 복명하고서 후한 상을 받아서는 안 될 것이다. 반드시 죽는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조종(祖宗) 이래로 누차 사절을 파견하였어도 표류, 익사하고 돌아오지 않은 자는 없었다. 다만 나라의 위령(威靈)을 믿고 충신(忠信)에 의지하면 틀림없이 근심이 없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이 점을 서술하여 뒤에 오는 이들에게 격려가 되게 하는 바이다. 근자에 사절의 행차는, 떠나가는 기간 중에는 남풍을 이용하고 돌아오는 기간 중에는 북풍을 이용한다. 처음 명주를 출발한 것은 그해 5월 28일이었는데, 큰 바다로 나가서는 순풍을 얻어 6월 6일에 가서 곧 군산도에 도달하였다. 귀로에 오르게 되어서는 7월 13일(갑자)에 순천관(順天館)을 떠났고, 15일(병인)에 다시 큰 배에 올랐다. 16일(정묘)에 합굴(蛤窟)에 이르렀고, 17일(무진)에 자연도(紫燕島)에 이르렀고, 22일(계유)에 소청서(小靑嶼)ㆍ화상도(和尙島)ㆍ대청서(大靑嶼)ㆍ쌍녀초(雙女焦)ㆍ당인도(唐人島)ㆍ구두산(九頭山)을 지났는데, 이날 마도(馬島)에 정박하였다. 23일(갑술)에 마도를 떠나 알자섬(軋子苫)을 지나 홍주산(洪州山)을 바라보았으며, 24일(을해)에 횡서(橫嶼)를 지나 군산문(群山門)을 들어가 군산도아래서 정박하였다. 8월 8일까지 도합 14일 동안 바람이 막혀 가지 못하다가, 신시(申時) 후에 동북풍이 일어나 밀물을 타고 큰 바다로 나가 고섬섬을 지났고 밤으로 접어들어서도 머물지 않았으며, 9일(기축)에는 아침에 죽도(竹島)를 지났다. 진시와 사시에 흑산(黑山)을 바라보았는데, 느닷없이 동남풍이 사나워지고 또 해동(海動)을 만나 배가 한쪽으로 쏠려 기울어지려고 해서 사람들이 대단히 두려워하여 곧 북을 울려 뭇사람을 불렀더니, 배가 다시 바로 돌아왔다. 10일(경인)에는 풍세가 더욱 맹렬해져 오각(午刻)에 다시 군산도로 돌아갔다. 16일(병신)까지 또 6일이 지났다. 그날 신시(申時) 후에 바람이 가라앉자 곧 큰 바다로 떠나 밤에 죽도에 정박하였다. 또 이틀 동안 바람에 막혀 가지 못하다가 19일(기해)에 이르러, 오시 후에 죽도를 떠나 밤에 월서(月嶼)를 지났다. 20일(경자)에는 아침에 흑산(黑山)을 지났고 다음에는 백산(白山)을 지났고 다음에는 오서(五嶼)와 협계산(夾界山)을 지났는데, 북풍이 대단하게 일어나 뜸을 낮춰 그 기세를 줄였다. 21일(신축)에 사미(沙尾)를 지났고 오시 사이에는 둘째 배의 세 개의 보조 키가 부러졌고, 밤의 누각(漏刻)이 4각으로 내려가자 정타(正柂) 역시 부러졌다. 사신의 배와 다른 배들도 다 위험을 당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23일(임인)에 중화(中華)의 수주산(秀州山)이 바라보였고 24일(계묘)에 동서서산(東西胥山)을 지나 25일(갑진)에 낭항산(浪港山)으로 들어가 담두(潭頭)를 지났다. 26일(을사)에는 아침에 소주양(蘇州洋)을 지나 밤에 율항(栗港)에 정박하였고 27일(병오)에 교문(蛟門)을 지나 초보산(招寶山)을 바라보았고 오각(午刻)에 정해현(定海縣)에 도착하였다. 고려를 떠나서부터 명주 땅까지 오는 데 무릇 바닷길로 42일이 걸렸다.

 

 

宣和奉使高麗圖經卷第四十

同文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40 권

동문

 

 

 

 

-[同文] 동문

臣聞正朔。所以統天下之治也。儒學。所以美天下之化也。樂律。所以導天下和也。度量權衡。所以示天下之公也。四者雖殊。然必參合乎天子之節然後。太平之應。備焉。聖人之興。必建歲正。定國是。新一代之樂。而同律度量衡。蓋以至一。而正群動。其道當如此。仰惟國家大一統。以臨萬邦。華夏蠻貉。罔不率俾。雖高句驪。域居海島。鯨波限之。不在九服之內。然稟受正朔。遵奉儒學。樂律同和。度量同制。雖虞舜之時日東協。伯禹之聲敎南曁。不足云也。古人所謂。書同文車同軌者。于今見之。且圖志之作。所以紀異國之殊制。若其制或同。則丹青之作。何事乎贅疣。謹條其正朔,儒學,樂律,度量之同乎中國者。作同文記。而省其繪畫云。

정삭(正朔)은 천하의 정치를 통솔하는 방법이고, 유학(儒學)은 천하의 교화를 아름답게 하는 방법이고, 악률(樂律)은 천하의 조화를 이끄는 방법이고, 도량권형(度量權衡)은 천하의 공용하는 기준을 보여주는 방법이다. 네 가지는 비록 다르기는 하나 반드시 천자의 절제와 서로 합치되어야 하고, 그렇게 된 후라야 태평의 표적(表迹)이 갖추어지게 된다. 성인(聖人)이 일어나면 반드시 세정(歲正)을 세우고, 국시(國是)를 정하고 한 조대(朝代)의 음악을 새롭게 하고, 율도(律度)와 양형(量衡)을 동일하게 만든다. 대체로 지극함 하나로 뭇 움직임을 바로잡는 데는 그 방법이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

우리 국가가 대일통(大一統)으로 만방에 임하니 화하(華夏)와 만맥(蠻貉)이 다 신복하였다. 비록 고구려(高句麗 우리나라의 범칭(汎稱))는 바다 섬에 자리잡고 있어 거대한 파도가 가로막고, 구복(九服 중국 역대의 복속 지역을 말함) 안에 들어 있지 않기는 하나, 정삭을 받고 유학을 준봉(遵奉)하며, 악률은 조화를 같이 하고 도량형은 제도를 같이하니, 우순(虞舜)의 크고 작은 달과 날짜를 같이 맞춘 것과 백우(伯禹)의 덕화(德化)가 남쪽에까지 미쳤다 하더라도 그런 것들은 거론할 게 못 될 정도이다. 옛사람이 말한, ‘글은 글자를 같이 하고 수레는 차폭을 같이 한다.’고 한 것을 지금에 보게 된 것이다. 또 도지(圖志 그림과 기록)의 작성은 이국(異國)의 다른 제도를 기록하기 위한 것인데, 만약에 그 제도가 혹 같을 경우라면 그림의 작성이야 군더더기 같으니 만들어 무엇하겠는가? 삼가 그곳의 정삭ㆍ악률ㆍ도량을 중국과 같은 것을 조목지어 기록해서 ‘동문기(同文記)’를 만들고, 그 그림은 생략하겠다.

[주C-001]동문(同文) : 북송과 고려가 같은 문자를 가지고 있음을 말한 것이다.

[주D-001]정삭(正朔) : 본래 정월(正月)과 삭일(朔日)을 의미하는 말이었으나 그것으로 책력을 뜻하게 되었고, 나아가 고대 중국에서는 제왕이 창업하면 어느 달을 정월로 하느냐를 결정하는 세수(歲首)의 개정이 있었고, 그것에 따라 신력(新曆)을 반포하여 국민은 그것을 지켜 제반사를 집행했다. 그래서 ‘봉정삭(奉正朔)’, 즉 ‘정삭을 받든다’고 하는 것은 곧 신복(臣服)함을 의미하게 되었다. 그리고 매년 원단에는 신력을 반포하고 복속 국가에서는 사신을 보내어 그것을 받아오는 것으로 신복함을 표시하였다. 고려는 당시 북송의 정삭을 받들지 않고 있었다.

[주D-002]성인(聖人) : 이 경우 중국에서 새로 국가를 세운 제왕을 의미하는 말로 쓴 것이다.

[주D-003]만맥(蠻貉)이 다 신복하였다 : 이것은 서긍이 송 휘종에게 아첨한 말이고, 실제로는 당시 북송은 중국 대륙의 일부를 점유하고 금(金)과 서하(西夏)에 의해 남북에서 큰 압력을 받았고, 그 후 결국 금에 의해 남쪽으로 밀려갔다.

[주D-004]우순(虞舜)의……정도이다 : 송 휘종치하의 중국의 위세가 고대의 대표적인 성군인 순(舜)ㆍ우(禹)치하의 그것보다 우월하다는 논조다.

[주D-005]글은……것이다 : 《중용(中庸)》 28장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천자가 아니면 예제를 의논하지 않고, 도량을 제정하지 않고, 문자를 시비하지 않는다. 지금 천하는 수레는 궤폭이 같고, 글은 문자가 같고, 예법은 순서가 같다.” ‘글은 글자를 같이하고’ 운운은 본래 진 시황제가 중국을 군현제로 통일한 후의 상황을 표현한 말이다.

 

 

 

-[正朔] 정삭

唐劉仁軌。爲方州刺史。乃請所頒曆。及宗廟諱。曰當削平遼海。班示本朝正朔。及戰勝。以兵經略高麗。帥其酋長。赴登封之會。卒如初言。史臣壯之。然仁軌。特服其力耳。未必其本心也。何以言之。臣觀麗人之事中國。其請降尊號。班正朔。勤勤懇懇。不絶于口。及爲强虜所迫。革面從之。而乃心朝廷。葵傾蟻慕。終不解於胷次。豈用兵之與用德。固自有次第哉。雖然。近則易服。遠則難懷。若麗境之望帝封。邈在大海之外。當其來也。泛巨航。駕便風。晝夜兼行十數日。始達四明。風或稍戾。驚濤山涌。竈釜傾蕩。涓滴之水不留。且不可爨。舟人。往往絶粒。甚則柁折檣摧。傾覆之變。生於瞬息。亦已危矣。然自建隆,開寶間。願效臣節。不敢少懈。以迄于今。至與北虜。則封境之相距。纔一水耳。虜人朝發。馬夕已飮水於鴨綠矣。嘗大敗衂。始臣事之。用其年號。終統和,開泰。凡二十一年。至王詢。大破北虜。復通中國。乃於眞宗皇帝。大中祥符七年。遣使請班正朔。朝廷從之。彼遂用大中祥符之號。易去北虜開泰之名。至天禧中。北虜復破高麗。殺戮其民幾盡。王詢。至棄國而逃於蛤堀。虜留城中八月。會西北山萬松。皆作人聲。始駭懼引去。仍强頒正朔於詢。詢以力屈。不得已而用之。自太平二年。終十七年。至重煕終二十二年。淸寧終十年。咸雍終十年。太康終十年。大安終十年。壽昌終六年。乾統終十年。天慶至八年。凡一百年。而耶律。爲大金所困。高麗遂去北虜之號。又以未請命于朝。不敢輒用正朔。故但以歲次紀年。而將有請焉耳。本朝之於高麗。如彼之遠。北虜之於高麗。如此其近。然而附北虜者。常以困於兵力。伺其稍弛。則輒拒之。至于尊事聖宋。則終始如一。拳拳傾戴。雖或時有牽制。不能如願。而誠意所向。堅如金石。有以見累聖。綏之以仁。懷之以德。內有以得其心。固異乎北虜之强暴。徒以力制其外也。書曰協時月正日。今北虜已滅。佇見高麗之使。以正朔爲請。而萬邦之時月日。可協而正矣。

당(唐) 유인궤(劉仁軌)가 방주 자사(方州刺史)가 되자, 반포할 역서(曆書) 및 종묘의 휘(諱)를 청하여 말하기를 ‘마땅히 요해(遼海)를 평정하여 우리 조정의 정삭을 나누어 주고, 전쟁에 이기게 되면 군사를 가지고 고려(高麗 고구려를 말함)를 공략하여 그 추장(酋長)을 거느리고 등봉(登封)의 모임에 가도록 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는데 마침내 처음에 한 말과 같이 해내니 사신(史臣)이 그 일을 장하게 여겼다. 그러나 유인궤는 단지 그 힘을 굴복시켰을 뿐이었지 반드시 그 본심을 굴복시킨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고려인들이 중국을 섬기는 것을 살펴보건대, 그들이 존호(尊號)를 내려주고 정삭을 나누어 주기를 청하는 것이 공손하고 간절하여 입에서 떠나지 않더니, 강한 오랑캐(契丹 즉 요(遼)를 말함)에게 핍박받게 되고부터는 표면으로만 복종하였지, 마음은 우리 조정에 두어 해바라기같이 기울고 개미같이 사모하는 정은 끝내 가슴속에서 떠나지 않았으니, 어찌 군사를 쓰는 것이 덕을 베푸는 것에 대하여 본디 비교가 되겠는가?

그러나 가까우면 복종시키기 쉽고 멀면 회유하기 어려운 것이다. 고려의 땅은 황제의 고장에서는 멀리 큰 바다 밖에 있으니, 거기서 올 때에는 거대한 배를 띄워 순한 바람을 만나고 밤낮을 도와 10여 일을 와야 비로소 사명(四明)에 도달한다. 바람이 혹시 거세어져서 놀란 파도가 산같이 솟아오르면 화덕의 가마솥이 뒤집혀 쏟아져서 한 방울의 물도 남지 않고, 또 취사를 할 수도 없어 뱃사람들은 왕왕 밥을 굶게 되고, 심할 때는 키가 부러지고 돛대가 꺾여 뒤집어 엎는 변고가 순식간에 생기니 또한 대단히 위험하다. 그러나 건륭(建隆)ㆍ개보(開寶 960~975) 연간부터 신하의 충절을 바치기를 원하여 감히 조금도 해이해지지 않고 지금에 이르렀다. 북쪽 오랑캐와의 관계로 말하면 국토의 거리가 겨우 한 줄기의 물뿐이어서, 오랑캐가 아침에 말을 타고 떠나면 저녁에는 이미 압록강에서 물을 먹이게 된다. 앞서 크게 패전하고서야 비로소 신하가 되어 그들을 섬기고 그들의 연호(年號)를 썼는데, 그 일은 통화(統和 983~1011)와 개태(開泰 1012~1021)에 걸친 도합 21년 동안 계속되었다.

왕순(王詢 고려 현종(顯宗)) 때 이르러 북쪽 오랑캐를 대파하여 다시 중국에 통하게 되어서 진종 황제(眞宗皇帝) 대중상부(大中祥符) 7년(1014 고려 현종5)에 사신을 보내어 정삭을 나눠 주기를 청하여, 조정에서는 그 청대로 따랐고, 그 후에는 마침내 ‘대중상부’라는 연호를 쓰고 북쪽 오랑캐의 개태(開泰)라는 연호를 갈아 버렸다. 천희(天禧 1017~1021) 연간에 이르러 북쪽 오랑캐가 다시 고려를 격파하고 그 백성들을 거의 다 살육하여, 왕순은 나라를 버리고서 합굴(蛤堀)로 도망가기에 이르렀고, 오랑캐는 성안에서 8개월 동안 머물러 있다가 마침 서북쪽 산의 온갖 소나무가 다 사람 소리를 내자 비로소 놀라고 두려워하여 철수해 가버렸다. 그러나 여전히 왕순에게 강제로 정삭을 나누어 주므로 왕순은 힘에 굴복하여 부득이 그것을 사용하였다. 그리하여 태평(太平) 2년부터 17년이 계속되었고, 중희(重煕 1032~1054)에 이르러서는 22년이 계속되었고, 청녕(淸寧 1055~1064)은 10년이 계속되었고, 함옹(咸雍 1065~1074)은 10년이 계속되었고, 태강(太康 1075~1084)은 10년이 계속되었고, 대안(大安 1085~1094)은 10년이 계속되었고, 수창(壽昌 1095~1100)은 6년이 계속되었고, 건통(乾統 1101~1110)은 10년이 계속되었고, 천경(天慶 1111~1120)은 8년(천경은 10년간 계속했으니 저자의 착각인듯)까지 갔으니 도합 1백 년이 된다.

그리고 야율(耶律 요 황제의 성씨, 요를 말함)이 대금(大金)에게 곤욕을 당하자 고려는 드디어 북쪽 오랑캐의 연호를 버려버렸으나, 또 우리 조정에 명을 청하지 않아 감히 그대로 정삭을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다만 세차(歲次 연수에 따른 간지를 말함)로 해를 기록하고 장차 정삭을 청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조정은 고려와는 저토록 멀고 북쪽 오랑캐는 고려와 이토록이나 가깝다. 그러나 북쪽 오랑캐에게 붙은 것은 언제나 병력에 곤욕을 당해서이었으며, 그것이 좀 이완해진 것을 틈타서는 곧 항거하였다. 성조(聖朝)를 높여 받드는 것으로 말하면 시종여일하게 간절히 추대하고, 비록 어쩌다 때때로 견제를 받아 소원대로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성의의 방향은 굳기가 금석과 같다. 그것은 누대의 성군께서 인자함으로 편안케 하여 주시고 은덕으로 위무하여 주셔서, 안으로 그들의 마음을 얻은 것이 북쪽 오랑캐가 강포하여 한갓 힘으로 그들의 외면을 제압한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철과 달을 맞추어 날을 바로잡는다.’ 하였거니와, 이제 북쪽 오랑캐가 이미 멸망하였으니 고려의 사신이 정삭을 청해옴을 곧 보게 될 것이고, 만방의 시(時)ㆍ월(月)ㆍ일(日)을 맞춰서 바로잡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주D-001]유인궤(劉仁軌) : 당 고종(唐高宗) 때 백제ㆍ고구려 공략에 전과를 올렸고, 그가 처음 말한 대로, 고종이 태산을 봉할 때 삼한과 일본의 대표자들을 이끌고 참여하였다. 후에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까지 올랐다. 《新唐書 卷100 劉仁軌傳》

[주D-002]등봉(登封) : 태산에 올라가 그 신을 봉함. 제왕의 위세를 선양하는 행사의 하나.

[주D-003]존호(尊號) : 중국 황제가 제후로 봉해 주는 관작의 칭호를 말함.

[주D-004]태평(太平) : 거란[契舟], 즉 요(遼)의 연호. 이하 중희ㆍ청녕ㆍ함옹ㆍ태강ㆍ태안ㆍ수창ㆍ건통ㆍ청경 등도 같다.

[주D-005]철과……바로잡는다 : 《서경》 순전(舜典)에 나오는 말. 이것은 순이 요 임금 아래에서 당시 중국의 역법ㆍ율도(律度)ㆍ도량형ㆍ예제(禮制) 등을 통일한 일을 말한 것.

 

 

 

-[儒學] 유학

東夷性仁。而其地。有君子不死之國。又箕子所封朝鮮之境。習俗。素稔八條之敎。其男子。出於禮義。婦人。由於正信。飮食以豆籩。行路者相遜。固異乎蠻貉雜類。押頭腁趾。辮髮橫幅。父子同寑。親族同槨。僻怪也。自漢武帝。列置四郡。臣妾內屬。而中華政化。所嘗漸被。雖更魏歷晉。視時汙隆。乍離乍合。然義理之根諸中者。未嘗泯也。唐正觀初。太宗。用魏鄭公之一言。以仁義爲治。恢廣學校。崇尙師儒。當是時。與議大臣。猶有疑而未知其爲益者。彼國。乃遽遣其英秀子弟。請敎京師。後長慶中。白居易。善作歌行。雞林之人。引領嘆慕。至以一金。易一篇。用爲規範。則其用心。可知矣。觀夫倭辰餘國。或橫書。或左畫。或結繩爲信。或鍥木爲誌。各不同制。而麗人。乃摹寫隷法。取正中華。至於貨泉之文。符印之刻。擧不敢妄有增損字體者。是宜文物之美。侔於上國焉。炎宋肇興。文化遠被。稽首扣關。請爲藩臣。其使者。每至來朝。觀國之光。歆艶晏粲。歸而相語。人益加勉。淳化二年。廷試天下士。彼亦賓貢其人。來獻文藝。太宗皇帝。嘉之。用擢其數內王彬,崔罕等進士及第。授將仕郞,守祕書省校書郞。津遣還國時。國王治上表致謝。詞甚感戢。神宗皇帝。憫俗學之弊。命訓釋三經。以發天下蔽蒙。特詔賜其書本。俾之獲見大道之純全。主上。丕承先志。推廣舍法。又賜其來學子弟。金端等科名以歸。於是。靡然風從。勃然雨化。誾誾秋秋。服膺儒學。雖居燕韓之左僻。而有齊魯之氣韻矣。比者。使人到彼。詢知臨川閣藏書。至數萬卷。又有淸燕閣。亦實以經史子集四部之書。立國子監而選擇儒官。甚備。新敞黌舍。頗遵太學。月書季考之制。以第諸生。上而朝列官吏。閑威儀而足辭采。下而閭閻陋巷。間經館書社。三兩相望。其民之子弟未昏者。則群居而從師授經。旣稍長。則擇友。各以其類。講習于寺觀。下逮卒伍童稺。亦從鄕先生學。於虖盛哉。且諸侯之就功。實假天子之威靈。諸侯之作德。實循天子之風化。麗人之於中國。海隅侯伯之邦爾。今也。文物之富。如此。蓋自漸摩所致。不亦偉乎。譬猶日月三辰。假元氣以成列。而其照燿著見。乃所以爲天之明。草木百寶。資元化以敷華。而其葳蕤藿靡。乃所以爲地之文也。若夫其國取士之制。雖規範本朝。而承聞循舊。不能無小異。其在學生。每歲。試于文宣王廟。合格者。視貢士。其擧進士。間歲一試于所屬。合格。偕貢者。合三百五十餘人。旣貢。又命學士。摠試于迎恩館。取三四十人。分甲乙丙丁戊五等。賜第。略如本朝省闈之制。至王親試官之。乃用詩賦論三題。而不策問時政。此其可嗤也。自外又有制科,宏辭之目。雖文具。而不常置。大抵以聲律爲尙。而於經學。未甚工。視其文章。髣髴唐之餘弊云。

동이(東夷)는 천성이 인자하여 그 땅에는 군자가 끊기지 않는다는 나라가 있다. 또 기자(箕子)가 봉해졌던 조선 땅에서는 본래부터 8조의 가르침을 잘 알아, 그 남자들은 예의로 행동하고, 부인들은 올바름과 신용을 지키고, 음식은 두변(豆籩 두와 변. 모두 법도에 맞게 쓰는 예기(禮器))을 쓰고, 길을 가는 자들은 서로 양보한다. 그리하여 만맥 잡류(蠻貉雜類)들이 이마에 자자(刺字)하고, 발에 굳은 살을 지우며 변발(辮髮)에 횡폭(橫幅 오랑캐의 복식 이름)을 두르고, 부자가 잠자리를 같이 하고 친족이 관곽을 같이 하는 따위의 편벽하고 괴이한 것과는 다른 것이다. 한 무제(漢武帝)가 사군(四郡)을 설치해서부터는 신첩(臣妾)으로 내속(內屬)하여 중화의 정치 교화가 점차로 미쳐갔던 것으로 비록 위(魏)를 거치고 진(晉)을 지나면서 시대의 기복에 따라 잠시 이탈했다 잠시 합쳤다 하기는 하였으나 의리가 마음속에 뿌리박은 것은 없어진 적이 없었다.

당(唐) 정관(正觀 ‘正觀’은 ‘貞觀’의 잘못.) 초년에 태종(626~649)이 위 정공(魏鄭公 위징(魏徵)의 봉호가 정국공(鄭國公)임)의 한 마디를 써서 인의(仁義)로 정치하고 학교를 넓히며 학자를 숭상하였는데, 이때에도 의론에 참여하였던 대신들은 오히려 의심을 품고 그것의 유익함을 몰랐었다. 그런데 저 나라에서는 서둘러 자기네들의 뛰어난 자제들을 보내어 경사(京師 당시 당의 수도였던 장안(長安)을 말함)에서 교육시키를 청했던 것이다. 그 후 장경(長慶 821~824) 연간에는 백거이(白居易 자는 낙천(樂天), 당대의 시인)가 가행(歌行)을 잘 지었는데, 계림(雞林 우리나라를 말함) 사람들은 옷깃을 여미고 감탄 흠모하여 일금(一金 황금 1금을 말함)으로 한 편을 바꿔서 그것으로 규범을 삼기까지 하였으니, 그들의 마음 쓰는 것을 알 수 있다. 왜(倭)ㆍ진(辰) 등 나머지 나라들을 살펴보면, 혹은 가로쓰고 혹은 왼쪽으로 획을 긋고 혹은 노끈을 매듭지어 신표로 하고, 혹은 나무를 파서 기록으로 삼고 하여 각각 방법을 달리 하고 있다. 그런데 고려인들은 예서법(隸書法)을 모사하여 중화의 것으로 바로잡으며, 화폐의 글자와 부절과 인장의 각자에 이르러서는 감히 망령되이 자체를 증손(增損)하지 않으니 문물의 아름다움이 상국(上國)과 맞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송(宋) 나라가 일어나 그 문화가 멀리에까지 미쳐 가자 머리를 조아리고 관문을 두드려 번신(藩臣)이 되기를 청해왔다. 그 사자(使者)가 와서 조정에 들 때마다 나라의 찬란한 문물을 보고서는 그 아름답고 찬란함을 부러워하고, 돌아가서는 서로 이야기하여 사람들이 더욱 힘쓰게 되었다. 순화(淳化) 2년(991, 고려 성종10)에 천하의 선비들에게 조정에서 시험을 베풀었는데, 그들 역시 자기네 사람들을 빈공(賓貢)으로 보내서 문예(文藝)를 바쳐왔다. 태종 황제(太宗皇帝)께서 이를 가상히 여기시어 그 수효 안에서 뽑아주시어 왕빈(王彬)ㆍ최한(崔罕) 등은 진사 급제(進士及第)로 장사랑 수비서성교서랑(將仕郞守秘書省校書郞)을 제수하고 배를 태워 귀국케 하였다. 그때의 국왕 치(治 고려 성종(成宗))가 표문을 바쳐 사의(謝意)를 표했는데, 그 언사가 심히 감격스러웠다.

신종 황제(神宗皇帝)께서 속학(俗學)의 폐단을 근심하시어 삼경(三經)을 훈석(訓釋)하여 천하의 암매함을 없애주도록 명하시고, 특히 조명(詔命)으로 그 책들을 내려 그들로 하여금 대도(大道)의 순전(純全)함을 볼 수 있게 하여 주도록 하시었다. 주상(主上 송 휘종을 말함)께서는 선왕의 뜻을 훌륭히 계승하시어 시사법(施舍法)을 확대시키셨고, 또 내학자제(來學子弟 당시 고려 유학생을 말함) 김단(金端) 등에게 과명(科名 과거 급제의 종류에 따른 명칭)을 내리어 귀국시키셨다. 이리하여 휩쓸리듯 따르고 세차게 교화되어 즐겁고 공경스럽게 유학을 지켜나가 비록 연(燕)ㆍ한(韓)의 변두리 편벽한 곳에 살기는 하지마는 제(齊)ㆍ노(魯)의 기풍과 운치를 지니게 된 것이다.

근자에 사신이 그곳에 가서 물어보고 알았지마는, 임천각(臨川閣)에는 장서가 수만 권에 이르고, 또 청연각(淸燕閣)이 있는데 역시 경(經)ㆍ사(史)ㆍ자(子)ㆍ집(集) 4부의 책으로 채워져 있다 한다. 국자감(國子監)을 세우고 유관(儒官)을 선택한 인원이 완벽하게 구비되어 있었으며, 횡사(黌舍 학교를 말함)를 새로 열어 태학(太學)의 월서계고(月書季考)하는 제도를 퍽 잘 지켜서 제생(諸生)의 등급을 매긴다. 위로는 조정의 관리들이 위의가 우아하고 문채가 넉넉하며, 아래로는 민간 마을에 경관(經館)과 서사(書社)가 두셋씩 늘어서 있다. 그리하여 그 백성들의 자제로 결혼하지 않은 자들이 무리지어 살면서 스승으로부터 경서를 배우고, 좀 장성하여서는 벗을 택해 각각 그 부류에 따라 절간에서 강습하고, 아래로 군졸과 어린아이들에 이르기까지도 향선생(鄕先生 자기 고장의 글 가르치는 선생)에게 글을 배운다. 아아, 훌륭하기도 하구나!

그런데 제후가 공을 이룩하는 것은 실은 천자의 위령(威靈)을 빌린 것이고, 제후가 덕을 드러내는 것은 실은 천자의 교화를 따른 것이다. 고려인은 중국에 대해서는 바다 한 구석의 후백(侯伯)의 나라일 뿐이다. 이제 그들의 문물이 풍성함이 이와 같음은 대체로 점진적인 감화의 소치이니 또한 위대하지 않은가? 이를테면 일월을 비롯한 삼진(三辰 일ㆍ월ㆍ성을 말함)은 원기(元氣)를 빌어서 열(列)을 이룩하나, 그것들이 빛으로 나타내는 것은 하늘의 밝음으로 되는 것이다. 그리고 초목을 비롯한 온갖 보물은 원화(元化 조화의 위대한 작용을 말함)를 받아서 꽃을 피워내나, 그들 꽃이 아름답게 피고 지고 하는 것은 땅의 문채로 되는 것이다.

그 나라의 선비를 뽑는 제도로 말하면, 비록 본조(本朝 송 나라를 말함)의 그것을 규범으로 삼기는 하지마는, 전승하여 듣고 구례를 따르고 하는 데 따라 약간의 차이가 없을 수 없다. 그들은 학생(學生)들에 대해서는 매년 문선왕묘(文宣王廟 공자묘 즉 문묘)에서 시험하는데 합격자는 중국의 공사(貢士 중앙고시에의 응시 자격을 추천받은 자)와 대등하다. 그들의 거진사(擧進士 진사시에 응시할 자격을 갖춘 자)는 한 해 건너 한 차례씩 그 소속지에서 시험을 실시하여 합격하면 공자(貢者 학생으로 합격한 자를 말함)와 대등해지는데, 도합 3백 50여 인이다. 추천 선발이 끝나면 또 학사(學士)들에게 명해 영은관(迎恩館)에서 전체 시험을 치르게 하여 30~40인을 뽑아, 갑ㆍ을ㆍ병ㆍ정ㆍ무 5등으로 나눠서 급제를 내리는 것이 대략 본조의 성위(省闈 예부에서 치르는 과거시험)의 제도와 같다. 왕이 친히 시험해서 벼슬을 주는 것으로 말하면 시ㆍ부ㆍ논(詩賦論) 3제를 쓰고 시정(時政)을 책문(策問)하지 않으니 이것은 우스운 일이다. 그 밖에 또 제과(制科)와 굉사(宏辭)의 명목이 있는데 조문은 갖추어져 있으나 늘 시행하지는 않는다. 대체로 성률(聲律)을 숭상하고 경학(經學)은 그리 잘하지 못한다. 그들의 문장을 보니 당의 여폐(餘弊)와 방불하다.

[주D-001]가행(歌行) : 성률이 덜 근엄한 고체시(古體詩)의 일종으로 악부시(樂府詩)의 계통을 이은 것.

[주D-002]삼경(三經) : 《시경》, 《서경》 및 《역경》을 말함.

[주D-003]시사법(施舍法) : 빈객으로 온 자들의 짐을 풀어주고 무료로 거처를 제공하는 법.

[주D-004]연(燕)ㆍ한(韓) : 중국 북방 지역을 포괄해서 말한 것임.

[주D-005]제(齊)ㆍ노(魯) : 지금의 산동지방으로 공자ㆍ맹자의 영향을 받아 유풍(儒風)을 대표하는 고장으로 여겨져 왔다.

[주D-006]임천각(臨川閣)에는……한다 : 임천각에 관해서는 권6 동조 참조. 청연각(淸燕閣)에 관해서는 김연(金緣 1487~1544)의 〈청연각기〉 및 본서 권6 영연전각 참조. 《東國輿地勝覽 卷6》《東文選 卷64》

[주D-007]월서계고(月書季考) : 매월 한 차례씩 배운 것을 써보게 하고 사계절에 한 차례씩 배운 내용이나 시문을 시험하는 것.

[주D-008]제과(制科) : 시(詩)ㆍ부(賦)ㆍ송(頌)ㆍ책(策)으로 인재를 선발하는 과거.

[주D-009]굉사(宏辭) : 곧 박학굉사(博學宏辭)로 관리를 뽑는 과명(科名). 문장 3편을 시험했다.《文獻通考 選擧考 賢良方正》

[주D-010]성률(聲律) : 여기서는 시율(詩律)을 두고 한 말.

[주D-011]당(唐)의……방불하다 : 당대에 시부로 취사(取士)해서 그 방면에만 치중한 데서 빚어진 폐단을 말한다.

 

 

 

-[樂律] 약률

大樂。與天地同和。而五聲之發。原於五行。八音之辨。生於八風。淸濁高下。皆出於一氣。而手舞足蹈。有不期然而然者。則蕢桴土鼓。皆足以寓其聲。而吐其和。故自葛天氏之時。牛尾之歌。已見於載籍。後世聖人。作樂崇德。而以金石土革匏木絲竹之物。制爲鐘,磬,鞉鼓,塤箎,笙竽,柷敔,琴瑟,管篴之器。以作以止。以詠以間。以合天地之和。而致神示편001 祖考之格。至於夷蠻戎狄之音。亦用合奏。有靺師。以掌其樂。有旄人。以陳其舞。有鞮屨편002氏。以合其歌龡。凡以與衆樂樂。而樂以天下。初無間於夷夏。則兼收博采。所以示吾德之廣運也。詩云以雅以南。以籥不憯。說者。謂雅爲夏樂。南爲夷樂。二者合奏。以成和而協天地之中聲。然後爲備樂。然四方異域。飮食異和。衣服異制。器用異宜。則樂亦不得而同。故東方曰靺。南方曰任。西方曰侏離。北方曰禁。各有其義。而不可以混淆。若麗人。則東夷之國。樂其本於靺乎。且三代之制。商曰大濩。周曰大武。箕子以商之裔。而受周封於朝鮮。則革其靺樂之陋者。當有濩,武之遺音。賡襲制作。經今千載。調聲應律。宜有可采者。煕寧中。王徽。嘗奏請樂工。詔往其國。數年乃還。後人使來。必齎貨。奉工技爲師。每遣就館敎之。比年入貢。又請賜大晟雅樂。及請賜燕樂。詔皆從之。故樂舞益盛。可以觀聽。今其樂。有兩部。左曰唐樂。中國之音。右曰鄕樂。蓋夷音也。其中國之音。樂器。皆中國之制。惟其鄕樂。有鼔,版,笙,竽,觱篥,空侯편003,五絃琴,琵琶,箏,笛。而形制差異。瑟柱。膠而不移。又有簫管。長二尺餘。謂之胡琴。俯身先吹之。以起衆聲。若女伎。則謂之下樂。凡三等。大樂司。二百六十人。王所常用。次管絃坊。一百七十人。次京市司。三百餘人。亦有柘枝拋毬之藝。其百戲。數百人。聞皆敏捷特甚。然以時王俁。衣制未終。工人執其器。而不作。聲律之度。不可得而考也。

[편-001]示 : 祇

[편-002]屨 : 鞻

[편-003]空侯 : 箜篌

훌륭한 음악은 천지와 함께 조화를 같이 하거니와 오성(五聲)의 발생은 오행(五行)에 근원을 두었으며, 팔음(八音)의 구별은 팔풍(八風)에서 생겨난다. 청탁(淸濁)과 고하(高下)는 다 한 기운에서 나오나, 손과 발이 흥겹게 움직이는 것은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는데도 그렇게 하게 되는 점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 궤부(蕢桴 흙덩이를 풀로 묶어 만든 북채)와 토고(土鼓 흙을 구워 틀을 만들고 가죽으로 면을 한 악기)로서도 그 소리를 다 깃들이고 조화를 토해내기에 족하다. 그래서 갈천씨(葛天氏) 때부터 쇠꼬리의 노래가 이미 문헌에 보이게 된 것이다. 후세에 성인(聖人)이 음악을 만들어 덕을 숭상하여 금(金)ㆍ석(石)ㆍ토(土)ㆍ혁(革)ㆍ포(匏)ㆍ목(木)ㆍ사(絲)ㆍ죽(竹) 등의 물건을 가지고 종(鐘)ㆍ경(磬)ㆍ도고(鞉鼓)ㆍ훈지(塤篪)ㆍ생우(笙竽)ㆍ축어(柷敔)ㆍ금슬(琴瑟)ㆍ관적(管篴) 등의 악기를 제작하여서 연주하고, 멈추고, 읊조리고, 쉬고 하여 천지의 조화에 맞춰 신기(神祇 하늘과 땅의 신령)와 조상의 영혼을 강림하게 하였다.

만이(蠻夷)와 융적(戎狄)의 음악에 있어서도 역시 합주(合奏)를 하는데, 말사(靺師)가 있어 그 음악을 관장하고 모인(旄人)이 있어 그 무(舞)를 늘어 놓고, 제루씨(鞮屨氏, ‘鞮鞻氏’를 말함)가 있어 그 가취(歌吹)를 맞춘다. 무릇 민중과 함께 음악을 즐겨서 천하를 즐기므로 처음부터 이하(夷夏 한족과 그 밖의 오랑캐)의 구별이 없다. 받아들이고 널리 채택함은 우리 덕이 널리 퍼져나감을 보여 주는 것이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아(雅)를 연주하고 남(南)을 연주하고, 약(籥)을 연주하여도 혼란을 일으키지 않는다.’ 하였는데, 설명자가 ‘아는 하악(夏樂 중국의 음악)이고, 남은 이악(夷樂)이라.’고 하였다. 즉 두 가지를 합주해서 조화를 이루어 천지의 중성(中聲 중화(中和)의 음성)에 맞춘 연후라야 음악을 갖춘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방의 이역(異域)에서는 음식이 조화를 달리하고, 의복이 제도를 달리하고, 기용(器用)이 방법을 달리하므로 음악 역시 같아질 수 없다. 그래서 동방의 것을 ‘말(靺)’이라 하고, 남방의 것을 ‘임(任)’이라 하고, 서방의 것을 ‘주리(侏離)’라 하고, 북방의 것을 ‘금(禁)’이라 하여, 각각 그 뜻을 지니고 있어 뒤섞을 수 없는 것이다.

고려인으로 말하면 동이(東夷)의 나라이므로 음악은 ‘말(靺)’에 근본을 두었다고나 할까? 또 삼대(三代)의 제도는 상(商)의 것을 대호(大濩), 주(周)의 것을 대무(大武)라 하는데, 기자(箕子)는 상(商)의 후예로 조선으로 주(周)의 봉(封)을 받았으니, 그곳의 말악(靺樂)의 비루함을 고쳐 틀림없이 호(濩)ㆍ무(武)의 유음(遺音)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제작(制作)을 차례로 이어받아 지금까지 천 년이 지났으나 성음이 조화되고 악률이 맞으니 취할 것이 있어 마땅하다. 희령(煕寧 송 신종의 연호) 연간에 왕휘(王徽 고려의 문종(文宗))가 악공(樂工)을 보내달라고 주청(奏請)하여 조명(詔命)을 내려 그 나라에 가게 하였는데 수년 후에야 돌아온 적이 있었다. 그 후 사람들이 사절로 오면 반드시 재물을 가지고 와서 공기(工技 악공을 말함)를 스승으로 삼아서, 번번이 관사에 가서 가르쳐 주게 하였다. 근년에 입공(入貢)하여서는 또 대성아악(大晟雅樂) 내리기를 청했고, 다시 연악(燕樂) 내리기를 청했을 때는 조명으로 그 청을 다 들어 주었다. 그래서 악무(樂舞)가 더욱 성대해져 보고 들을 만하게 되었다.

지금 그 음악에는 2부(部)가 있다. 좌부는 당악(唐樂)이니 중국의 음악이요, 우부는 향악(鄕樂)이니 이(夷)의 음악이다. 중국 음악은 악기가 다 중국 제도 그대로인데, 다만 향악에는 고(鼓)ㆍ판(版)ㆍ생(笙)ㆍ우(竽)ㆍ필률(觱篥 피리. 그 모양이 나라에 따라 약간씩 다름)ㆍ공후(空矦 ‘箜篌’의 오기인듯)ㆍ오현금(五絃琴)ㆍ비파(琵琶)ㆍ쟁(箏)ㆍ적(笛)이 있어 그 형제(形制)가 약간씩 다르다. 슬(瑟)의 기둥은 고정되어 있고 움직이지 않는다. 또 소(簫)가 있는데 그 관(管)의 길이가 2척여로 그것을 호금(胡琴)이라고 한다. 몸을 굽혀서 먼저 그것을 불어 가지고 여러 악기의 소리를 시작하게 한다. 여기(女伎)로 말하면 그것을 ‘하악(下樂)’이라고 하는데 도합 3등급이 있다. 대악사(大樂司)는 2백 60인으로 왕이 늘 사용하는 것이다. 다음 관현방(管絃坊)은 1백 70인이요, 그 다음 경시사(京市司)는 3백여 인이다. 또 석지(柘枝)와 포구(抛毬)의 기예(技藝)도 있다. 그들의 백희(百戲)는 수백인인데 듣기로는 다들 민첩하기가 대단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때 왕우(王俁)의 상기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악공들은 그 악기를 잡고 있고 연주하지 않아서 성률의 절도를 알아볼 수 없었다.

[주D-001]훌륭한……하거니와 : 이것은《예기(禮記)》 악기(樂記)에 나오는 말을 그대로 옮겨 쓴 것이다.

[주D-002]오성(五聲)의……두었으며 : 이 설은 《좌전(左傳)》 소공(昭公) 25년의 소(疏) 참조.

[주D-003]갈천씨(葛天氏)……것이다 : 갈천씨는 중국 상고의 전설상의 제왕으로, 그때 3인이 쇠꼬리를 잡고 발을 내차며 팔결(八闋)의 노래를 불렀다고 전해진다. 《呂氏春秋 古樂》

[주D-004]종(鐘)……관적(管篴) : 도(鞉)는 흔들어서 소리나게 만든 북. 훈(塤)은 흙을 구워 만든 소형 취악기, 지(篪)는 횡적(橫笛)의 일종, 생(笙)은 생황, 우(竽)는 저로 모두 관악기다. 축(柷)은 나무상자같이 만든 통에 자루를 넣고 두드려 소리를 내는 악기로, 합주를 시작시키는 신호로 사용한다. 어(敔)는 범 형상의 목제 악기로 등에 톱니 27개가 있어 나무막대로 그 톱니를 긁어서 소리를 내어 합주의 종지를 알리는 구실을 한다. 관(管)은 6공(孔)으로 된 작은 피리의 일종으로 두 개를 포개서 같이 분다. 적(篴)은 적(笛)의 이자(異字)로 피리.

[주D-005]신기(神祇)와……하였다 : 제사 때 악기를 합주하는 것을 두고 그렇게 말한다.

[주D-006]말사(靺師) : 말족(靺族)의 음악을 교습시키는 일을 관장하는 관원. 매사(韎師)라고도 한다. 《周禮 春官》

[주D-007]모인(旄人) : 산악(散樂)ㆍ이악(夷樂)에 맞춰 춤을 교습시키는 관원. 《周禮 春官》

[주D-008]제루씨(鞮屨氏) : 제루씨(鞮鞻氏)는 사이(四夷)의 음악과 그 노래를 관장하는 관원. 《周禮 春官》

[주D-009]아(雅)를……않는다 : 인용한 시구는 《시경》 소아의 고종편(鼓鐘篇) 제4장 말 2구. 이 부분의 모전(毛傳)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아(雅)를 연주하고 남(南)을 연주하는 것이다. 사이(四夷)의 음악에 맞춰서 춤추는 것은 위대한 덕이 널리 미쳐가게 하는 것이다. 동이의 음악을 매(韎)라 하고 남이의 음악을 남(南)이라 하고, 서이의 음악을 주리(侏離)라 하고, 북이의 음악을 금(禁)이라 하는데, 그런 것들에 맞춰 약무(籥舞)를 상연하여도 이토록 조화를 이루고 혼란을 일으키지 않는다.

[주D-010]대호(大濩) : 은 탕왕(殷湯王)의 음악으로, 그가 이윤(伊尹)에게 명해서 지었다고 전해진다. 대루(大鞻) 또는 대호(大頀)로도 쓴다. 《周禮 春官》

[주D-011]대무(大武) : 주 무왕(周武王)의 음악으로, 무왕이 은주(殷紂)를 토멸하고 덕이 무공을 이룩하게 하여 천하를 평정해 냈음을 나타낸 것으로 전해진다. 《周禮 春官 大司樂註》

[주D-012]대성아악(大晟雅樂)……주었다 : 대성아악은 고려 예종 11년(1116) 6월에 왕자지(王字之)가 북송 휘종의 조사(詔賜)로 그 악기와 무구(舞具) 악보 등 일체를 받아온 것인데, 문무무(文武舞)를 포괄하는 등가악기(登歌樂器)와 헌가악기(軒架樂器)로 구분되어 있고, 그 규모는 지금 보아도 거창한 편에 속한다. 예종은 그해 10월에 건덕전(乾德殿)에서 대성아악을 친열(親閱)하였다. 《高麗史 卷70 樂志》

[주D-013]당악(唐樂)이니……음악이요 : 《고려사》 악지에는 아악(雅樂)ㆍ당악(唐樂)ㆍ속악(俗樂) 3부로 나누어져 있다. 아악과 당악은 그 내용이나 성질이 판이한데, 서긍은 그것을 당악으로 합쳐서 말한 것이라 여겨진다.

[주D-014]고(鼓)……공후(空矦) : 판(版)은 박판(拍版)과 철판(鐵版) 2종이 있다. 박판은 소목판 수개의 끝을 끈으로 묶어 서로 부딪치게 하여 박자를 맞추는 타악기다. 철판은 결국 철판으로 만든 박판이 되겠다. 《당서(唐書)》 악지의 고려악의 악기 중에는 철판이 들어 있다. 공후(箜篌)는 현악기로 그 형체에 따라 와공후(臥箜篌)ㆍ수공후(豎箜篌)ㆍ봉수공후(鳳首箜篌) 등의 구별이 있다. 서양의 ‘하프’와 비슷하다.

[주D-015]석지(柘枝) : 대규모의 가무회로 고려에는 당악 대곡의 하나인 연화대(蓮花臺)로 남아 있다. 연화대는 중국의 석지무의 극소 부분에 불과하다. 조선 시대에 내려와 학연화대처용무합설(鶴蓮花臺處容舞合設)로 개편되었다.

[주D-016]포구(抛毬) : 포구락(抛毬樂). 공던지기의 운동을 가무회화한 것으로 《고려사》 악지에는 역시 당악 대곡의 하나로 보존되어 있다.

[주D-017]백희(百戲) : 줄타기, 재주넘기 등등을 포괄하는 각종 곡예를 하는 광대놀이. 《三國史記 卷32 崔致遠 鄕樂雜錄詠》

 

 

 

-[權量] 권량

戴記曰。制禮樂頒度量。而天下大服。魯語曰。謹權量。審法度。四方之政行焉。蓋王者之統御諸侯。雖本乎德化刑威。而所以一其政者。尤以權量爲先。三代盛時。必自王府。出嘉量等器。頒于邦國。掌之以其官。平之以其時。至於巡守。又協而同之。使無內外遠近之殊制。然後爲天子之政擧。苟四方諸侯。於此三者。一有小易。則黜削誅廢。在法無赦。孰謂其器用之末。而可忽耶。夫五度之制。別於分。忖於寸。蒦於尺。張於丈。信於伸。于以度庶物之短長。五量之制。躍於龠。合於合。登於升。聚於斗。角於斛。于以量庶物之多寡。五權之制。始於銖。兩於兩。明於斤。均於鈞。終於石。于以權庶物之重輕。然皆必以銅範之者。乃取其同而不異。所以同天下而齊風俗耳。惜乎。周道東轍。政失其柄。晉之協律者。作長尺考鐘。而失樂之中聲。齊之相國者。以大斗給民。而市己之私恩。唐之考曆者。失玉衡,璇璣之制。則無以參天道三辰之行。是其於耳目之近。猶不能審其同於法度之中。又況遠在海外之國。隔鯨波而涉蜃島。欲冀其一而同之。豈不猶推舟於陸耶。高麗爲國。去中華三千餘里。自帝王極治。亦在羈縻之域。未聞有頒度量權衡。而協其同者。我宋龍興。德符高厚。而際天所覆。極地所載。罔不臣妾。以故麗人。稽首面內。願爲藩屛。取正中國度量權衡。用爲標的。斯所謂仁恩橫流。能懷帝者之未懷。武誼遐騖。能制王者之不制也。乃者使人。銜命適彼。燕饗獲其賂遺之禮。舟人適市。售其貿易之貨。默識其長短之式。多寡之數。輕重之等。陰以較中國之法。無或少若毫髮之差者。益賞其誠至也。夫謹於耳目之所及者。或慢於耳目之所不及。畏於刑威之所制者。或侮於刑威之所不制。今高麗。道涂迂窵。國都跨遠。旣非耳目所可及。而主上。含洪光大。待夷狄以寬典。又非規規然尙刑威以制之。彼乃能遵用度量權衡。若此其謹。蓋其心悅誠服。非勉强而爲然。書不云乎。關石和鈞。王府則有。夫以關石和鈞。惟王府之有。則其在私。不敢改作。而惟我法度之同。亦宜矣。

대씨(戴氏)의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예악을 제정하고 도량형을 반포하면 천하가 철저하게 복종한다.’ 하였고, 《노어(魯語)》에 이르기를, ‘권량(權量 도량형을 말함)을 조심스럽게 다루고 법도를 자세히 살펴서 사방의 정사가 시행되게 되었다.’고 하였다. 대체로 왕자(王者)가 제후를 통솔하는 데는 비록 덕화(德化)와 형위(刑威 형벌을 가하는 위엄)에 근본을 두기는 하지마는 그 정사를 통솔시키는 방법은 더욱이 권량을 앞세운다. 삼대(三代 하ㆍ은ㆍ주)가 전성했을 때에는 반드시 왕부(王府)에서 가량(嘉量) 등의 기구를 내놓아 나라 안에 나누어 주어, 그것을 그 관원으로 관장하게 하였고, 그것을 제때에 평준하게 하였으며, 순수(巡狩 천자의 지방 시찰을 말함)할 때에 가서는 또 맞춰서 같게 하여 내외와 원근에 따라 다른 제도가 생기지 않게 하였다. 그렇게 한 후에 천자의 정치가 시행되었던 것이다. 만약에 사방의 제후로 이 세 가지에서 한 가지라도 제멋대로 고치는 것이 있으면 몰아내고 죽여 없애고 하여 법에 용서가 없었으니, 뉘라서 그것이 기용의 말단이라 하여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대저 오도(五度)의 제도는, 분(分)에서 분별하고 촌(寸)에서 촌탁[忖]하고 척(尺)에서 재고, 장(丈)에서 펼치고, 신(伸)에서 끌어내고, 그렇게 하여 온갖 물건의 길이를 재는 것이다. 오량(五量)의 제도는 약(龠 즉 작(勺))에서 나아가 홉(合)에서 합치고, 승(升)에서 올리고, 두(斗)에서 모으고, 곡(斛)에서 헤아려 보고, 그렇게 하여 온갖 물건의 용량을 되는 것이다. 오권(五權)의 제도는 수(銖)에서 시작하고, 양(兩)에서 짝채우고, 근(斤)에서 밝히고, 균(鈞)에서 고르고, 석(石)에서 끝내고, 그렇게 하여 온갖 물건의 무게를 단다. 그러나 다 동(銅)으로 부어서 찍어 내는데 이는 그것이 동일함을 취한 것으로, 천하의 도량형을 같게 하고 풍속을 일정하게 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주(周) 나라의 도(道)는 동쪽으로 옮긴 후 정치는 그 권병을 잃었다. 진(晉) 나라의 악률을 맞추던 자는 장척(長尺)을 만들어서 종을 쳐 음악의 중성(中聲)을 잃었고, 제(齊) 나라의 재상으로 있던 자는 큰 말로 백성들에게 양곡을 주어 자기의 개인적인 은혜를 샀고, 당(唐) 나라의 역법(曆法) 연구자는 옥형(玉衡)과 선기(璇璣)의 제도를 잃어 천도(天道)와 삼진(三辰 일ㆍ월ㆍ성)의 운행을 고루 할 길이 없어졌다. 이런 일들은 이목으로 접하게 되는 가까운 것조차도 그 법도 가운데서 같은 점을 살피지 못한 것이니, 하물며 멀리 바다 밖에 있는 나라에서 거대한 파도 사이를 뚫고 신기루의 섬을 건너가 도량형이 통일되어 같기를 바라려고 함은 어찌 배를 육지에서 몰고 감과 다르겠는가?

고려라는 나라는 중화에서 3천 리가 떨어져 있는데, 제왕이 지극하게 다스렸을 때부터 역시 지배를 받는 지역에 들어 있기는 하였으나, 도량권형을 나눠 주어서 그곳이 같아지기를 도와준 자가 있었다고는 듣지 못하였다. 우리 송(宋)이 나라를 세우자 덕이 천지와 같아, 하늘 끝까지 그리고 땅의 극한까지 신첩(臣妾)이 아닌 것이 없다. 그런 까닭으로 해서 고려인은 머리를 조아리고 안으로 향해 번병(藩屛)이 되어 중국에서 모범을 취하기를 원했고, 도량권형을 가지고 그 표적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것은 이른바 인자한 은덕이 옆으로 흘러가 제왕이 회유하지 못한 데를 회유해낸 것이고, 무력의 뜻[武誼]이 멀리에까지 미쳐 왕자(王者)가 제압하지 못한 데를 제압해낸 것이다. 앞서 사절의 인원들이 명을 받들고 그 속에 가서는 연향(燕饗) 때 그들의 선물을 주는 예를 받았었다. 뱃사람들이 시장에 가서 그들이 교역하는 물건을 거래하면서, 그들의 길이의 법식과 용량의 수와 중량의 등급을 잠자코 알아보고 그것들을 중국의 법과 비교해 보았더니, 조그마한 차이도 없어서 더욱 그들의 정성이 지극함을 찬양하게 되었다.

대저 이목이 미치는 데에만 삼가하는 자는 혹 이목이 미치지 않는 데를 게을리하는 경우가 있고, 형벌의 위엄이 제재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자는 혹 형벌의 위엄이 제재하지 않는 것을 얕보는 경우가 있다. 이제 고려는 길이 아주 멀고 국도(國都)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이미 이목이 미칠 수 있는 데가 아닌데도 주상께서 위대한 덕을 지니시어 관대한 은전으로 이적(夷狄)을 대우하셨고, 또 까다롭게 형벌의 위엄을 숭상하여서 제재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도량권형을 이토록 근엄하게 지켜 쓸 수 있었으니, 이는 그들이 마음으로부터 기뻐하여 성심으로 복종한 것이지 억지로 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서경(書經)》에 이렇게 말하지 아니하였는가? ‘저울과 말[斛]이 조화를 이루었으니, 왕의 부고에는 그것들이 있다.’ 대저 저울과 말의 조화를 이룬 것은 왕의 부고의 소유뿐인즉, 개인의 입장에서는 감히 고쳐 만들지 못하고 다만 우리 법도에만 같게 만듦이 또한 의당한 일이다.

[주D-001]‘예악을……복종한다’ : 이것은 소대(小戴) 《예기(禮記)》 명 당위(明堂位)의 처음 부분에 나오는 말을 인용한 것으로, 원문은 ‘制禮樂’이 ‘制禮作樂’으로 되어 있다.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을 대신해서 그 제6년에 그렇게 했다는 이야기로 나온다. 《禮記註疏 卷31》

[주D-002]노어(魯語)에……되었다 : 《노어(魯語)》는 《국어(國語)》의 ‘노어’가 아니라 《노논어(魯論語)》라는 뜻으로 쓴 말이다. 《논어》의 요왈편(堯曰篇) 1장에 “권량을 조심스럽게 다루고 법도를 자세히 살피고, 없앴던 관서(官署)를 일으켜서, 사방의 정사가 시행되게 되었다.”고 하였는데, ‘관서를 일으킨다’는 말은 빼어 버린 것이다.

[주D-003]가량(嘉量) : 주대(周代)의 양기명(量器名)인데, 한 그릇으로 곡(斛)ㆍ두(斗)ㆍ승(升)ㆍ홉[合]ㆍ약(龠)의 오량(五量)을 다 될 수 있게 되어 있다. 《周禮 考工記》

[주D-004]오량(五量)……단다 : 이상 오도ㆍ오량ㆍ오권에 관한 설명은 《한서(漢書)》 율력지(律曆志)에 따른 것이다. 《漢書 卷21 上》

[주D-005]그러나……잃었다 : 주 여왕(周厲王)이 견융(犬戎)에 몰려 서주(西周)는 망하고 도읍을 동으로 옮기고서는 실권을 잃은 채 그 명맥을 간신히 유지해 주공의 제도는 시행되지 못하게 되었다는 말.

[주D-006]제(齊) 나라의……샀고 : 춘추 시대에 전걸(田乞)이 제 경공(齊景公)의 대부(大夫)로 있으면서 부세를 거둬들이는 데 있어 작은 말로 곡식을 받고 백성들에게 줄 때는 큰 말을 써서 백성들에게 음덕을 행했는데 경공은 그것을 금하지 않았다. 그 일로 말미암아 전씨는 제 나라 민중의 환심을 사게 되었고 그 종족들은 더욱 강성하여졌고, 백성들은 전씨를 사모하게 되었다. 《史記 卷46 田敬仲完世家》

[주D-007]역법(曆法)……없어졌다 : 《신당서(新唐書)》 권13 천문지(天文志)의 이순풍(李淳風)의 설을 인용한 서설 부분에 이 일에 관한 설명이 있다. 옥형과 선기는 중국 고대에 천문을 측정하던 의기(儀器)이다.

 

 

 

 

 

宋故尙書刑部員外郞徐公行狀

行狀

송 고 상서형부 원외랑 서공 행장

행장

 

 

 

 

 

-宋故尙書刑部員外郞徐公行狀[張孝伯]

송 고 상서형부 원외랑 서공 행장

曾祖 爽 皇任祕書省校書郞贈金紫光祿大夫

曾祖母葉氏贈建安郡太夫人

祖 師回 皇任朝議大夫贈光祿大夫

祖母林氏贈咸寧郡太夫人

父 閎中 皇任朝請大夫直祕閣贈少保

母葛氏贈衛國夫人

公名兢。字明叔。姓徐氏。上世。建州甌寧縣人。自光祿。始徙居和州之歷陽。祕閣爲鄂州法曹。夜夢。與黃冠師。游大澤中。探懷出小削。以授祕閣而去。讀之。蓋丁令威華表所留語也。後五日。大水冒城郭。官府悉遷避。祕閣。寓家黃鶴樓上。是夜。實生公。公生數月。見字畫輒色喜踊躍。至十餘歲。穎異不群。作擧子業。詞原浩然。識者器之。年十八。入太學較埶。數占高等。試大比輒挫。政和甲午歲。以父任。補將仕郞。授通州司刑曹事。尙書郞徐禋。被旨。措置東南九路坑冶寶貨。辟公爲幹辦公事。靜江。有黃麟者。引大禮國入貢。朝廷疑之。詔禋覈實。麟。交通中貴人。權傾五嶺。靜江帥周穜。憂懼失措。禋以屬公。公曰是固易辨耳。呼其部曲來前。以立國歲月。山川風俗。雜詰之。皆喑不能對。詐狀遂白。雍丘闕宰。以朝命攝事。邑有兄弟交訟者。久繫不決。公至飭守者。設一席。俾偕坐臥。食必共器。閱旬日。乃感悟。相持以泣。曰令君。敎我至矣。願自新。安敢計曲直。其後更以友愛稱。里閭化之。獄訟衰止。京西部使者。以佞倖進。遣逃卒二百輩。築室邑中。肆爲暴盜。一邑大擾。公捕治之。使者。託上冢得旨。抵邑縱其徒。鼓喿入獄。盡解所縛以出。公曰。位無高卑。遵三尺法。奉天子均也。否則吾欺君矣。欺君媚人。吾不忍爲。於是。密掩其室。復得凶黨。聞所屬。寘之法。無一人得逸者。治譽著聞。移攝鄭州原武縣事。單車造官。時提擧炭事者。挾其弟貴埶。要功肆虐。建委沿流造舟。威震郡邑。械繫滿道。檄公。治後至者。與慢令者。公歎曰。令不賢。不能庇民。其忍至此極耶。乃疏其害。聞諸朝。願以身贖無辜。害因訖息。舊令。貪虐病民。公摩拊備至。邑人。詣闕。冀公卽眞。爭具車馬。迎公家屬。祕閣不欲。白相國。乃已。燕國鄭公。謂同列曰。使縣令。皆如徐兢。天下。其有不治者乎。調濟州司士。曹事未書考。丁內艱。服除。監元豐庫。宣和六年。高麗入貢。請于上。願得能書者。至國中。繼遣給事中路允迪。報聘。卽以公。爲國信所提轄人船禮物官。因譔高麗圖經四十卷。詔給札上之。其所自敍曰。漢張騫。使月氏。十有三年而後歸。僅能言其所歷之國。地形物產而已。臣在高麗月餘。館有兵衛。出才五六。至於馳驅車馬之間。獻酬尊俎之上。耳目所及。非若十三歲之久。而其建國立政之體。風俗事物之宜。繪畫紀次。殆無遺者。非敢矜博洽。飾浮剽。以塵上聽。蓋摭其實。庶幾報器使之萬一。徽宗皇帝。覽其書大說。召對便殿。賜同進士出身。擢知大宗正丞事。兼掌書學。遷尙書刑部員外郞。時相冊免。坐親嫌。謫監池州永豐監。丁外艱。服除。授沿江制置司參謀官。匃奉祠。主管南京鴻慶宮。自是。三領台州崇道觀。公資明銳。遇事立悟。撥煩濟劇。出於譚笑。機張鍵閉。人莫得而窺測。孝悌出天性。自虜犯淮甸。徙家信之弋陽。自以先隴隔絶。不勝悲思。而光祿嘗佐饒。祕閣又嘗漕江東。有祠在德興縣青雲佛宇。公。歲時造祠下。烝嘗不少怠。母兄今敷文閣直學士林。坐啎時宰。南遷莆陽。公不遠千里。走省之。久之不忍去曰。傷在手足。何暇顧妻孥哉。公。俶儻好施。視貨財。如糞土。周人之難。急於謀身。河南少尹許滂。偕公渡彭蠡。滂舟覆。公拯之。全其家二百指。且厚致饋。滂後遣謝公。一無所取。故人宋浦。以事下大理。當償錢四十六萬。行匃於市。公楮中。有茶券。適及其數。捐以與之。浦獲免。凡疏戚遠近。孤獨困窮。公脫之於憂患。助之以婚姻葬斂者。蓋不可以一二計也。公。鄙章句學。而漁獵古今。探賾提要。下至釋老孫吳盧扁之書。天經地誌。方言小說。靡不貫通。在貴人前。抵掌論事。常傾一坐。文詞雋敏。立就下筆。衮衮不能自休。尤長於歌詩。過西楚霸王廟。留二十八字。中書舍人韓駒見之曰。後人。殆不可措筆矣。畫入神品。山水人物。二俱冠絶。嘗戱爲平遠。題長句其側。以遺駒。駒每出以示人曰。明叔。詩爲畫耶。畫爲詩耶。雖濡豪嗽墨。成於須臾。而張絹素。或經歲不顧。世人所藏。多出他手。或公所指授云。公處事無大小。皆妙有思致。他人窮智慮。莫能及。洞曉音律。且善嘯。閒命倚笛和之。聲嘹然猶出其上。塵飛幕動。殆若鸞鳳群集。飮酒至二斗不亂。與客對。必引滿先釂。酒半。譚辯風生。或游戱翰墨。吹簫拊瑟。超然疑其爲神仙中人也。天下士。聞公名。率願納交。賤微小夫。及門遇之。亦必盡禮。有所求。無細大響應。人之有善。喜若己有。故所至。人翕然親愛之。雖蠻貉行焉。治圃數十畝。名洗硯池。幽勝聞江南。自號自信居士。奉祠者二十年。安於間退。若無足動其心者。唯眷戀墳墓不置。紹興辛未歲。還歷陽焚黃告歸。及吳門。被病卒。嗚呼。以公抱負如此。而自壯歲。去國。拓落無所施。雖公處之裕然。而有志之士。蓋爲時嗟惜者。或至於涕流也。公生以元祐六年五月八日。終以紹興二十三年五月二十日。享年六十有三。累官至朝散大夫。賜三品服。娶陳氏封宜人。後公五年卒。子男三人。曰集。早卒。曰葴。右承直郞江南西路轉運司幹辦公事。繼從兄朝奉郞喆之後。後公十三年卒。曰荿。右迪功郞監淮西江東總領所戶部大軍庫。女二人。長適右奉議郞知臨江軍新淦縣事馮師文。次適右宣敎郞知福州懷安縣事李栞。孫男六人。曰元老。右修職郞。曰同老。曰明老。曰洋老。曰籍。將仕郞。其一未名。孫女八人。長適左迪功郞鄂州州學敎授劉璧。次適進士朱縉卿。次適將仕郞兪■。餘未行。諸孤奉公之柩。以是年閏十二月初一日乙酉。葬于弋陽玉亭鄕龜峯之吉原。公家。舊多騎省遺物。世父贈光祿大夫時中。寶一硯。旁著鼎臣二字。嘗謂群兒曰。有能紹素業者。當以是與之。時公始結髮。能知憤激。刻意篆籀。世父擧以授公。而公之生。有千歲來歸之兆。故人謂公爲騎省後身。初。少保命公。題咸寧墓碑。不能成。禱於佛。取般若心經。習書之。至實字。偶見風幡飛動。因悟體埶。自此擅天下重名。徽宗。尤所愛賞。嘗召至禁中。書進德修業四字。袤丈許。至業字。公。特出奇變。行筆之敍。留中畫。最後落。脩勁端直。如圓石墜千仞。上。駭異稱善。左右皆失聲。其運筆精熟。周旋曲折。雖夜屛鐙燭。無豪釐差。眞行。遒麗超逸。楮薛顏柳。衆體兼備。晩好作草。尤逼懷素。天下言書者。以公爲宗。小學家之論。曰自李斯變小篆。而秦漢閒。無能繼者。碑碣所傳。非特筆法無取。而偏旁。亦復舛誤。由魏晉迄唐。唯李陽氷。號獨步。豈以此學中絶。故陽氷。得以冒此名耶。元次山之甥。李康叔靜。書浯溪,峿臺二銘。頗得秦法。其視陽氷。霄壤矣。而名不大顯。事固有幸不幸哉。騎省兄弟。祖述李斯。小學奧雅。克配叔重。而公又繼之。其原深矣。斯之遺迹。火於嶧山。自唐已不存。歐陽文忠公。集天下金石刻。甚備。而泰山之詔。僅有數十字。大觀閒。河閒劉跂。登山顚。周視刻石。始得其全。然距靖康之亂。才十餘歲。墨本之在人閒者。固無幾。學者謬謂法斯。果嘗多見也哉。公獲是刻。寶蓄而諦玩之。旣盡得斯法。而又考按三代鎛鍾,鼎彝之器。訓釋㱁識。悉有依據。至於大篆。筆力奇古。其沈著處。不異鑽刻。若非豪楮所能成。且復陶鎔醞釀。變入小篆。離析偏旁。脗合制字本意。縱橫馳騁。其用無窮。嗚呼。前古名筆。固屈指可數矣。九原不作。後來尙有繼之者耶。公歿迨今十五年。其葬也。遽未及銘。孝伯世家歷陽。且託姻公門。敢述公行事大略。以竢作者。紀而詩之。鑱石寘墓上。謹狀。

 

乾道三年四月初十日。左迪功郞,寧國府宣城縣主簿主管學事。張 孝伯狀。

증조부 상(爽)은 황임(皇任 황제가 임명한 것을 말함) 비서성 교서랑(秘書省校書郞) 증(贈)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이다. 증조모 섭씨(葉氏)는 증건안군태부인(贈建安郡太夫人)이다.

조부 사회(師回)는 황임(皇任) 조의대부(朝議大夫) 증 광록대부(光綠大夫)이다. 조모 임씨(林氏)는 증 함녕군태부인(咸寧郡太夫人)이다.

부 굉중(閎中)은 황임 조청대부(朝請大夫) 직비각(直秘閣) 증 소보(小保)이다. 모 갈씨(葛氏)는 증 위국부인(衛國夫人)이다.

공의 이름은 긍(兢), 자는 명숙(明叔), 성은 서씨(徐氏)다. 윗대는 건주(建州)의 구녕현(甌寧縣) 사람이었으나 광록(光祿 조부 사회를 말함) 때부터 비로소 화주(和州)의 역양(歷陽)으로 옮겨와 살았다.비각(秘閣 부친 굉중을 말한 것)이 악주(鄂州)의 법조(法曹)가 되어 밤에 이런 꿈을 꾸었다. 황관(黃冠 도사가 쓰는 관)의 도사(道士)와 함께 큰 못 가운데서 놀았는데 품 속을 뒤져 작은 대쪽을 꺼내서 비각에게 주고 가버렸는데, 그것을 읽어 보니 정령위(丁令威)가 화표(華表)에 남긴 말이었다. 그 후 5일째 되던 날 큰 물이 성곽을 넘어와 관청 사람은 다 다른 데로 피해갔다. 비각은 집안 식구를 황학루(黃鶴樓)위에 거처시켰었는데, 그날 밤에 바로 공을 낳았다. 공이 난 지 수개월 만에 글자를 보고는 기쁜 얼굴을 짓고 깡충이며 좋아하였다.

10여 세가 되어서는 유례가 없이 뛰어나게 슬기로웠고, 과거 공부를 할 때는 문사(文詞)의 근원이 넓어 식자들이 그에게 촉망을 걸었다. 나이 열 여덟 살 때 태학(太學)에 들어가 재예를 겨뤄 자주 높은 등급을 차지하였으나, 과거[大比]에 응시하여서는 번번이 좌절되었다. 정화(政和 송 휘종의 연호) 갑오년(1114, 고려 예종9)에 부임(父任)으로 장사랑(將仕郞)에 음보(陰補)되어 통주사(通州司)의 형조사(刑曹事)에 제수되었다. 상서랑(尙書郞)서인(徐禋)이 제명(帝命)을 받들고 동남구로(東南九路)에 있는 광산에서 보화(寶貨)의 제련을 조처하게 되자 공을 간판공사(幹辦公事)로 임명하였다.

정강(靜江)에 황인(黃麟)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대리국(大理國 징강본에는 대례국(大禮國))을 끌어들여 입공(入貢)시켰다. 조정에서는 이 일을 의심하여 서인에게 조명을 내려 사실을 규명케 하였다. 황인은 궁중의 귀인과 연통하여 권세가 오령(五嶺)을 휩쓸어 정강 수(靜江帥)주동(周穜)은 근심과 두려움으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서인은 그 일을 공에게 위촉하였는데 공은 ‘그 일은 정녕 처리하기 쉽습니다.’ 하고 그 부곡(部曲)들을 앞에다 불러놓고 나라를 세운 연월과 산천과 풍속 등을 잡다하게 물어보자 다 벙어리처럼 대답하지 못해 사기한 죄상이 마침내 드러났다. 옹구(雍丘)에 현령이 비어 조명(朝命)으로 공에게 그 직무를 대리하게 하였다. 이때 그 읍에 형제가 서로 소송을 일으키는 자들이 있었는데, 오래 계류되어 결정을 보지 못했었다. 공이 와서는 담당자에게 일러 자리 하나를 마련케 하고 그들로 하여금 같이 기거하며 식사는 반드시 그릇을 함께 쓰게 하였다. 10일이 지나자 감동하여 깨닫고 서로 잡고 울며 말하기를 ‘영군(令君 현령의 일을 대행하던 서긍을 가리켜서 한 말)께서 우리를 가르치신 것이 지극합니다. 스스로 새사람이 되기를 원하오니 어찌 감히 곡직을 따지겠습니까?’ 하였다. 그 후로부터는 다시 우애로 칭송되었고 민간에서는 그 감화를 받아 옥송(獄訟)이 줄어들어 멎었다. 경서부(京西部)의 사자(使者)가 영행(佞倖 말재간으로 아첨하여 총행을 받음을 말함)으로 추천되어 나왔는데, 그는 도망병 2백 명을 시켜 읍에다 집을 짓고 멋대로 포악한 도둑질을 하게 하여 온 고을이 크게 소란해졌다. 공이 그들을 체포하여 치죄하니, 사자는 상총(上冢)이 어명을 얻었다고 칭탁하고 고을에 당도해서 그 도당을 풀어놓아 북을 울리며 외치고 옥으로 들어가 포박된 자들을 깡그리 풀어 내놓았다. 공이 말하기를,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법률을 지키고 천자를 받듦은 동등하다. 그런 입장에서 일을 처리하지 않는다면, 나는 임금을 기만하는 것이다. 임금을 기만해서 남에게 아첨하는 일은 나는 차마 할 수 없다.”

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 집을 물샐틈없이 막고 다시 흉악한 도당을 잡아 소속을 알아보고 법을 적용시켜 한 사람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니, 잘 다스린다는 명성이 세상에 드러났다. 전임되어 정주(鄭州)의 원무 현사(原武縣事)를 대리하게 되어 단신 수레로 부임하였다. 그때 탄사(炭事)를 관리하던 자가 자기 아우의 높은 지위와 세력을 배경으로 하여 공(功)을 세운다고 멋대로 잔인하게 굴며 강가에 창고를 세우고 배를 건조하였는데, 그 위세가 군읍에 떨쳐 칼을 쓰고 포박을 당한 자들이 길에 가득찼다. 그리고 공에게 회장(回狀)을 보내어 늦게 온 자들과 영을 무시한 자를 치죄하라고 하였다. 공이 개탄하며, “현령이 못나서 백성을 보호하지 못하는구나. 이러한 극단적인 형벌에까지 이르는 것을 어찌 참겠는가?”라고 말하고는 그들의 해독 행위를 써서 조정에 알리고, 무고한 사람 대신 자신이 죄를 받기를 청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해독은 멎었다. 또 전임 현령이 탐욕 잔학하여 백성들을 괴롭힌 것을 공이 철저하게 위무하여 주자, 고을 사람들은 궁궐에 가서 공이 정식 현령에 취임하게 되기를 호소하고, 다투어 거마를 마련하여 공의 가족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비각(서긍의 부친을 말함)이 원치 않아 상국(相國)에게 간절하게 말하고서야 가라앉았다. 연국(燕國)의 정공(鄭公)이 동렬자(同列者)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현령들로 하여금 다 서긍같이 하게 한다면 천하에 어찌 다스려지지 않는 것이 있겠는가?” 제주 사사(濟州司士)에 조임(調任)되었으나 육조의 부서가 결정되기 전에 모친상을 당하게 되었다. 상기가 끝나자 원풍고 감(元豐庫監)이 되었다.

선화(宣和) 6년(1124, 고려 인종1)에 고려가 입공(入貢)하여 임금에게 청해 글씨 잘 쓰는 자를 얻어 그 나라로 데리고 가기를 원했다. 이어 급사중 노윤적(路允迪)을 보내어 보빙(報聘 다른 나라의 빙문(聘問)에 답례함)하게 하였는데, 곧 공을 국신소(國信所)의 제할인선예물관(提轄人船禮物官)으로 삼았다. 그 일로 해서 《고려도경》 40권을 저술하니 조명을 내려 어찰(御札)을 주고 그것을 바치게 하였다. 그는 자서(自序)에서 이렇게 적었다.

 

“한대(漢代)의 장건(張騫)이 월지(月氏)에 사신으로 나갔다가 13년 후에 돌아왔는데도 겨우 그가 경과했던 나라의 지형과 산물을 말할 수 있었을 따름이었다. 나는 고려에서 월여 동안 있었는데, 관사에는 파수병이 있었고 나간 것은 겨우 5∼6차례였다. 거마를 달리는 동안과 연석에서 수작하는 경우 이목이 미쳐간 것은 13년이라는 오랜 세월 같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그 건국과 입정(立政)의 근본과 풍속과 사물의 상황을 그리고 기록하여 거의 빠진 것이 없다. 감히 널리 앎을 자랑하고 경박함을 가다듬어서 황상의 총명을 흐리게 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 사실을 모아서 일을 시키신 은혜의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휘종 황제께서 그 책을 보고 대단히 기뻐하시어 편전에서 소대(召對)케 하시고 동진사출신(同進士出身)을 내리시어 지대종정승사(知大宗正丞事)로 발탁하시고, 장서학(掌書學)을 겸임케 하였다가 상서형부 원외랑(尙書刑部員外郞)으로 옮기시었다. 당시의 재상이 책면(冊免)되자 친혐(親嫌)으로 연좌되어 유배되어 지주(池州)의 영풍(永豐) 감옥에 감금되었다가 부친상을 당했다. 상기가 끝나자 연강 제치사(沿江制置司)의 참모관(參謀官)을 제수하였으나 봉사(奉祠)를 신청하여 남경(南京)의 홍경궁(鴻慶宮)을 주관하였다. 그때부터 태주(台州)의 숭도관(崇道觀)을 세 차례나 맡아보았다.

공은 천품이 명철 예리하여 일을 당하면 곧 깨달아 번잡을 없애고 극심한 것을 해결하는 지혜가 담소하는 사이에 나와, 강노(强弩)를 당기는 듯하고 자물쇠를 잠그는 듯하고 하는 것을 남이 헤아려 알 수가 없었다. 그의 효성과 우애는 천성에서 나온 것이었다. 적이 회전(淮甸회수(淮水) 지방을 말함)을 범하자 집을 신주(信州)의 익양(弋陽)으로 옮기고는 선영(先塋)이 멀리 떨어진 일로 해서 슬픈 마음을 가누지 못했다. 그런데 광록(光祿 조부 사회(師回)를 말함)은 요주(饒州)에서 보좌관을 지낸 일이 있고 비각(아버지를 말함)은 또 강동(江東 양자강 하류의 남안 지방)의 조운사(漕運使)를 지낸 일이 있어 그 분들의 사당이 덕흥현(德興縣)의 청운사(淸雲寺)에 있으므로, 공은 매년 사철마다 사당에 가서 제례를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동모형(同母兄)인 지금의 부문각 직학사(敷文閣直學士)임(林)이 당시의 재상을 거스르기에 이르러 남쪽으로 포양(莆陽)에 좌천되자 공은 천리를 멀다 하지 않고 달려가 찾아보고 오래도록 차마 떠나가지 못하며 ‘슬픔이 형제에게 있는데 어느 여가에 처자를 돌보겠는가?’ 말하였다.

공은 남다르게 뛰어나고 베풀어 주기를 좋아하여 재물 보기를 분토(糞土)같이 여기고 남의 어려움을 돌봐주기를 자신을 생각하는 것보다 서둘렀다. 하남 소윤(河南少尹)허방(許滂)이 공과 함께 팽려호(彭蠡湖강서성의 파양호(鄱陽湖))를 건널 제, 방의 배가 뒤집혀 공이 그를 건져 주고 그의 집안 식구 200인을 전부 살리고 또 물건을 후하게 주었다. 방이 후에 사례품을 보냈으나 공은 하나도 받지 않았다. 친지 송포(宋浦)가 사건으로 대리시(大理寺)에 회부되어 46만 전(錢)을 물어내게 되어 시장에서 구걸을 했다. 공의 지폐 가운데 다권(茶券)이 있어 마침 그 액수가 되므로 그것을 내주어서 송포는 형벌을 면할 수 있었다. 무릇 소원한 사람이거나 친척이거나 먼 사이건 가까운 사이건, 고독하고 곤궁하면 공은 그들을 우환에서 벗어나게 하여 주고, 그들을 혼인과 장례 때에도 도와 주었는데, 그렇게 한 일은 한두 가지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공은 장구(章句 경전의 주석을 중심으로 한 학문)의 학문은 하찮게 여기고 고금의 전적을 섭렵하여 그 내용을 탐색하고 요점을 정리하여서, 아래로 불가ㆍ노자ㆍ손무(孫武)ㆍ오기(吳起)ㆍ노편(盧扁노(盧) 땅의 명의편작(扁鵲))의 책들과, 천경(天經)ㆍ지지(地誌)ㆍ방언(方言)ㆍ소설(小說)에 이르기까지 관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귀인들 앞에서 손뼉을 치며 사물을 논하면 언제나 온 좌석의 주의를 모았다. 문장이 뛰어나고 민첩하여 당장에 붓을 대어 술술 써내어 그칠 줄을 몰랐다. 더욱이 시가를 잘했다. 서초(西楚)의 패왕묘(覇王廟)에 들렀다가 28자(칠언절구(七言絶句)를 말함)를 남겼는데 중서 사인(中書舍人)한구(韓駒)가 그것을 보고 ‘뒤에 오는 사람은 거의 붓을 댈 수 없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림은 신품(神品)의 경지에 들어갔는데 산수와 인물 두 가지가 다 뛰어났다. 한 번은 장난으로 평원도(平遠圖)를 그리고 그 곁에 장구(長句 칠언고체시(七言古體詩)를 말함)를 써서 한구에게 주었다. 한구는 언제나 그것을 꺼내서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명숙(明叔 서긍의 자)은 시로 그림을 그리는 것인가, 그림으로 시를 짓는 것인가?’라고 말하고는 하였다. 비록 붓을 적셔 먹을 뿌려 잠깐 사이에 그림을 완성하기는 하지마는 흰 비단을 펼쳐 놓고도 혹 한 해가 지나도록 돌아보지 않는 수도 있었다. 세상 사람이 소장하고 있는 것들은 대부분 다른 사람들의 손에서 나왔거나 혹은 공이 지시하여 가르쳐 주었거나 한 것들이라 한다.

공이 일에 대처하는 데는 일의 대소를 막론하고 다 묘하게 생각한 이치가 들어 있어, 다른 사람들은 지혜와 사려를 다해도 따라가지 못하였다. 음률을 잘 알고 또 휘파람을 잘 불었는데, 가끔 사람을 시켜 피리를 불게 하고 그것에 맞춰 휘파람을 불면 소리가 맑아 피리 소리를 누르고 울려났다. 그리하여 먼지가 날고 장막이 움직이고 하여 거의 난새와 봉새가 떼지어 모여 있는 것 같았다. 술을 마시면 두 말까지 가도 난잡해지지 않았다. 객과 대작하게 되면 반드시 가득 따라서 먼저 마셔버린다. 술이 한창 어울리면 담론이 신나게 벌어지고, 혹 시문과 서화로 즐기기도 하고, 퉁소를 불고 큰 거문고를 타기도 하여, 그 초연함은 그가 신선들 속의 사람인가 하고 의심하게 된다. 온 천하의 선비들이 공의 이름을 듣고는 다들 교분을 트기를 원했다. 미천한 사나이가 집으로 찾아와도 그를 맞는 데는 역시 꼭 예를 다하고, 요구하는 것이 있으면 작건 크건 그대로 응해 주었다. 그리고 남에게 선한 점이 있으면 자기가 지닌 듯이 기뻐하였다. 그래서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모여들어 그를 가까이하고 아끼고 하였는데, 만맥(蠻貉)의 사이라 하여도 그것이 잘 통하였다.

농지 수십 무(畝)를 가꾸고 그것을 세연지(洗硯池)라 명명하였는데, 그윽한 경치가 강남에 소문이 났다. 자신거사(自信居士)라 자호하였고, 봉사(奉祠)한 것이 20년이었는데, 한가히 물러나 있는 것을 편안하게 여겨 그의 마음을 동요시킬 만한 일이 없는 것 같았다. 다만 조상의 분묘를 그리워하여 마지않았다. 소흥(紹興) 신미년(1151, 고려 의종5)에 역양(歷陽)으로 돌아가 분황(焚黃)하여 돌아갈 것을 고하고 오주(吳州소주(蘇州)의 별칭)에 다다라 병이 나 졸(卒)하였다. 아, 공의 포부가 이러하였는데, 장년 때부터 나라를 떠나(조정에서 밀려나 지방에서 지낸 것을 말함) 낙백하여 그 재능을 써볼 데가 없었으니, 비록 공은 그런 처지를 여유있게 대처하였으나 뜻있는 인사로 시대를 위해 개탄하고 애석해 하는 이들은 눈물을 흘리기까지도 한다.

공은 원우(元祐) 6년(1091, 고려 선종8) 5월 8일에 출생하여 소흥 23년(1153, 의종7) 5월 20일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이 63세다. 관직을 역임하여 조산대부(朝散大夫문산신관(文散新官) 제18계)에 이르러 삼품복(三品服)을 하사받았다. 진씨(陳氏)와 결혼하였고 진씨는 의인(宜人)에 봉해졌고 공보다 5년 뒤져서 졸했다. 자녀는, 아들이 3인으로 집(集)은 일찍 졸했고, 침(葴 송본(宋本)에는 잠(箴))은 우승직랑(右承直郞 문산신관 제31계) 강남서로전운사 간판공사(江南西路轉運司幹辦公事)인데, 서긍의 종형 조봉랑(朝奉郞 문산신관 제22계)철(喆)의 뒤를 이었으며 공보다 13년 뒤져서 졸했고, 성(荿)은 우적공랑(右迪功郞 문산신관 제37계) 감회서강동총령소 호부대군고(監淮西江東總領所戶部大軍庫)이다. 딸 2인 중, 맏이는 우봉의랑(右奉議郞 문산신관 제24계) 지임강군 신감현사(知臨江郡新淦縣事) 풍사문(馮師文)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우선교랑(右宣敎郞 문산신관 제26계) 지복주회안현사(知福州懷安縣事) 이간(李栞)에게 출가하였다. 손자는 6인으로, 원로(元老)는 우수직랑(右修職郞 문산신관 제36계)이고, 동로(同老), 명로(明老), 양로(洋老), 적(籍)은 장사랑(將仕郞)이고 그 중의 하나는 이름을 짓지 않았다.

손녀는 8인으로, 맏이는 좌적공랑(左迪功郞) 악주주학 교수(鄂州州學敎授) 유벽(劉璧)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진사 주진경(朱縉卿)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장사랑(將仕郞) 유모(兪某)에게 출가하였고, 나머지는 출가하지 않았다. 여러 유자손들이 공의 영구를 받들고 와 이해 윤 12월 초1일(을유)에 익양 옥정향(玉亭鄕) 구봉(龜峰)의 좋은 자리에 장사지냈다.

공의 집안에는 전부터 기성(騎省 송초의 전ㆍ예(篆隸)의 대가 서현(徐鉉). 서긍의 조상)의 유물이 많았다. 세부 증 광록대부(光祿大夫) 시중(侍中)이 벼루 한 개를 진보(珍寶)로 여겼는데, 그 벼루 곁에 ‘정신(鼎臣 삼공 등 지위 높은 대신을 말함)’ 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한번은 여러 아이들에게 말하기를 ‘세업(世業 서법(書法)을 말한 것임)’을 계승하는 자가 나오면 이것을 주어야겠다’ 하였다. 공은 그때 갓 성년이 되었었으나 분별할 줄 알아서 전주에 전념하여 세부는 그 벼루를 들어 공에게 주었다. 공이 태어날 적에 ‘천세래귀(千歲來歸 주 정령위(丁令威) 고사 참조)’의 조짐이 있었기 때문에 친지들은 공을 기성(騎省)의 후신이라 말했던 것이다. 처음 소보(小保 서긍의 부친 굉종을 말함)가 공에게 명해 함녕(咸寧 서 긍의 조모 임씨를 말함)의 묘비를 쓰게 하였는데 써내지 못해 부처에게 기도를 드리고 《반야심경(般若心經)》을 가져다 쓰는 연습을 하였다. 그 뒤 실제로 비문의 글자를 쓸 때에 우연히 바람을 받은 깃발이 날려 움직이는 것을 보게 되어 그로 인해 체세(體勢)를 깨달아 그 때부터 천하의 명성을 독차지하였다.

휘종(徽宗)께서는 더욱 좋아하시어 한번은 금중에 불러들여 ‘진덕수업(進德修業)’ 네 글자를 쓰게 하였는데 그 너비가 1장(丈) 가량이나 되었다. ‘업(業)’ 자에 가서 공은 특히 기묘한 변화를 일으켰다. 운필이 가운데 획을 밋밋하게 그어 나가다가 마지막에 가서는 길고 세차며 단정하고 곧게 떨어지는 것이 둥근 돌이 천길 높이에서 떨어지는 것과 같았다. 임금께서는 놀라 기이해 하며 잘한다고 칭찬하셨고 좌우 사람들은 다 경탄하는 소리를 발하였다. 그의 운필이 정숙(精熟)하여 돌고 꺾고 하는 것은 밤중에 등이나 촛불을 가린다 하여도 호리의 차오도 없다. 진서(眞書 즉 해서)와 행서(行書)는 굳세며 아름다움이 뛰어나 저수량(褚遂良), 설직(薛稷), 안진경(顔眞卿), 유공권(柳公權) 등 여러 체를 겸비하였다. 만년에는 초서를 좋아하였고, 더욱 회소(懷素 당대 장사(長沙)의 초서에 능했던 불승)에 육박했다.

천하에서 글씨를 말하는 자는 공을 종주로 삼는데, 소학가(小學家 문자학자를 말함)들은 이렇게 말하였다.

 

“이사(李斯 진시황 때의 승상)가 소전(小篆)으로 변개시킨 뒤부터는 진(秦)ㆍ한(漢) 사이에는 계승할 수 있는 자가 없어, 비갈(碑碣)에 전해지는 것은 필법으로 취할 것이 없을 뿐 아니라 편방(偏旁) 역시 또 어긋나고 잘못되어 있다. 위(魏)ㆍ진(晉)에서부터 당(唐)까지는 오직 이양빙(李陽氷)이 독보로 불린다. 하지만, 근래 이 학문이 중간에 끊어졌기 때문에 이양빙이 이 명성을 빼앗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원차산(元次山 이름은 결(結), 당대의 시인)의 생질 이강(李康)이 오계(浯溪)와 어대(御臺)의 두 비명(碑銘)을 썼는데 제법 진(秦)의 서법을 터득하여 이양빙에 비하면 천양지판이었다. 그러나 이름이 그리 나타나지 않았으니 일에는 본래 행운과 불행이 있는 것인가? 기성의 형제(서현(徐鉉)과 서개(徐鍇))는 이사를 조술하였고 소학(小學 문자학을 말함)의 심오함은 숙중(叔重 후한의 허신(許愼))과 맞먹을 수 있다. 그리고 공이 또 계승하였으니 그 연원이 심원하다.

이사(李斯)의 유적은 역산(嶧山산동성 추현(鄒縣) 동남에 있음)에서 타버려 당대(唐代)에는 이미 남아 있지 않았다. 구양 문충공(歐陽文忠公구양수(歐陽脩))이 천하의 금석 각명(金石刻銘)은 퍽 철저하게 모았으나 태산(泰山)의 조문(詔文)은 겨우 수십 자가 있을 뿐이었다. 대관(大觀 송 휘종의 연호) 연간에 하간(河間하북성 한간현) 사람 유기(劉跂)가 산마루에 올라가 각석(刻石 명문에 새긴 돌)을 두루 살펴서 비로소 그 전체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정강(靖康)의 난을 겪은 지 겨우 10여 년이라, 그 탁본이 세상에 남아 있는 것이 얼마 되지 않았다. 배우는 사람들이 이사를 본받는다고 그릇되게 말하지만 과연 그것들이 많이 보이기야 하였겠는가? 공은 그 각명(刻銘)을 얻어 보물로 간직하고 깊이 완미하여 이사의 법을 깡그리 터득한데다가 또 삼대(三代)의 박종정이(鎛鐘鼎彝) 등의 기물을 고찰하여 관지(款識 금석에 새긴 글자)를 풀이하는 데 모두 근거를 갖게 되었다.

그의 대전(大篆)으로 말하면 필력이 기고(奇古)하여 그 침착한 곳은 고대에 새긴 진적(眞蹟)과 다름이 없어 붓과 종이로 이루어 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닌 것 같다. 뿐만 아니라 대전에 조정을 가해서 변개하여 소전(小篆)으로 들어가 편방(偏旁)을 갈라내어 문자를 만든 본의와 부합하여 종횡으로 치닫게 되어 그 활용이 무궁하여졌다. 아마 옛날의 명필은 진실로 손가락 꼽아 셀 수 있다. 저승에서 되살아나지 않으니 후에 또 그들을 계승할 자가 나올 것인가? 공이 작고한 지는 지금 15년이 되었다. 장사 때 급해서 묘지명을 만들지 못했다. 나는 대대로 역양(歷陽)에 살았고 또 공의 가문과는 인척 관계가 있어, 공의 행적의 대략을 두서없이 적어서 진정한 작자가 정리해 써서 돌에 새겨 무덤 위에 놓게 되기를 기다린다. 삼가 행장을 쓴다.

건도(乾道) 3년 4월 초10일

좌적공랑(左迪功郞) 영국부선성현주부주관학사(寧國府宣城縣主簿主管學事)

장효백(張孝伯)이 행장을 씀

[주D-001]비서성 교서랑(秘書省校書郞) : 비서성의 5종 속관 중의 제4가 교서랑으로, 전적의 교감, 와오의 판정 등의 임무를 맡는다. 《宋史 卷164 職官4》

[주D-002]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 원풍신제(元豐新制) 24문계(文階)의 제3계. 《宋史 卷169 職官9》

[주D-003]조의대부(朝議大夫) 증 광록대부(光祿大夫) : 조의대부는 원풍신제(元豐新制) 24문계(文階)의 제9계, 광록대부는 원풍신제(元豐新制) 24문계(文階)의 제4계.

[주D-004]조청대부(朝請大夫)……증 소보(小保)이다 : 조청대부는 원풍신제(元豐新制) 24문계(文階)의 제10계. 직비각은 비각의 실무책임자. 《宋史 卷164 職官4》 소보는 태자소보, 문신경관(文臣京官) 제12위. 《宋史 卷169 職官9》

[주D-005]건주(建州)의……살았다 : 건주의 구녕현은 지금의 복건성 건구현(福建省建甌縣). 화주의 역양은 지금의 안휘성 화현(安徽省和縣).

[주D-006]악주(鄂州)의 법조(法曹) : 악주는 지금의 호북성 무창현(湖北省武昌縣). 법조는 주(州)의 사리참군(司理參軍)으로 옥송ㆍ심문 등을 관장하였다.

[주D-007]정령위(丁令威)……말이었다 : 정령위는 한대(漢代)의 요동(遼東) 사람으로 영허산(靈虛山)에서 신선술을 배워 신선이 되어 갔다. 후에 학이 되어 요로 돌아와 성문의 화표주(華表柱)에 앉았는데, 한 소년이 활로 쏘려 하자 날아올라 공중을 배회하며 이런 노래를 하고 높이 하늘로 치솟아 올라가 버렸다 한다. “새가 날아왔으니 이는 정령위라, 집을 떠난 지 천년 만에 지금에야 돌아왔다. 성곽은 전과 같으나 사람들은 예전 사람이 아니구나. 왜 신선을 배우지 않고서 무덤만 늘여 있는가?[有鳥有鳥丁令威 古家千年今始歸 城郭如故人民非 何不學仙冢纍纍]” 《搜神後記》

[주D-008]황학루(黃鶴樓) : 호북성 무한 서쪽의 한양문(漢陽門) 안에 있는 황학산위에 있던 누각. 촉(蜀)의 비문위(費文褘)가 등선(登仙)하여 황학을 타고 이곳에서 쉰 일이 있었다고 하며 또 술집 주인 신씨(辛氏)의 고사로도 유명하다. 《黃鶴樓詩》《太平寰宇記》《報應錄》

[주D-009]장사랑(將仕郞) : 원풍신제(元豐新制) 24문계(文階) 중 마지막의 것으로 과거 급제가 아닌 자를 주보(奏補)한다. 《宋史 卷169 職官9》

[주D-010]통주사(通州司) : 통주는 지금의 강소성 남통현(江蘇省南通縣), 통주사는 통주의 주 관아.

[주D-011]상서랑(尙書郞) : 상서 시랑, 곧 6부의 차관이다. 《宋史 卷169 職官9》

[주D-012]동남구로(東南九路) : 북송 때에는 그 영토를 26로(路)로 구분했다. 동남구로는 그 26로 중에서 동남쪽에 있는 9로를 말한 것이다. 《宋史 卷85 地理1》

[주D-013]간판공사(幹辦公事) : 공사(公事)를 처리하는 직책이라는 뜻으로 그것으로 직명을 삼은 것이다.

[주D-014]정강(靜江) : 송대의 부명(府名), 처음에는 주(州). 지금의 광서성(廣西省) 계림현(桂林縣)의 땅.

[주D-015]대리국(大理國) : 지금의 운남성(雲南省) 대리현(大理縣) 지역을 차지하고 오대(五代) 후진(後晉 937∼946) 때 단사평(段思平)이 내세운 국호로, 그 후 국주(國主)와 국명은 바뀌었으나 남송 말기까지도 계속 독립을 유지했다. 《讀史方輿紀要 雲南1》

[주D-016]오령(五嶺) : 광주(廣州) 경내 해안에까지 뻗어 있는 오령인데, 여기서는 거기로 들어가는 5로를 말함. 거기에는 정강으로 들어가는 1로도 들어 있다. 《讀史方輿紀要 廣東》

[주D-017]정강 수(靜江帥) : 정강을 진수하는 도지휘사(都指揮使)를 말함. 《宋史 卷165 職官5》

[주D-018]주동(周穜) : 자는 인숙(仁熟), 태주(泰州) 사람으로 왕안석(王安石)에게 인정된 흉도(凶圖)가 있던 것으로 알려진다. 희령(煕寧 1068∼1077) 연간에 등제(登第), 저작좌랑 겸 숭정전설서(著作佐郞兼崇正殿說書) 등을 지냈다. 《北宋經撫年表》

[주D-019]옹구(雍丘) : 현명. 지금의 하남성 기현(河南省杞縣).

[주D-020]경서부(京西部)의 사자(使者) : 경서부는 경서로(京西路)를 통괄하는 관서. 사자는 그 책임자. 경서로는 지금의 하남성 낙양(洛陽)이서와 황하 이남의 전역.

[주D-021]상총(上冢) : 여기서는 총재(冢宰), 후세의 이부 상서(吏部尙書)의 뜻으로 쓴 것이라 여겨진다.

[주D-022]원무 현사(原武 縣事) : 정주(鄭州). 지금의 하남성 범수현(氾水縣) 서북의 땅. 원무현은 그 속현(屬縣)으로 지금의 박랑현(博浪縣). 《讀史方輿紀要 河南開封府》

[주D-023]제주 사사(濟州司士) : 제주는 지금의 산동성 거야현(鉅野縣)제주 사사는 제주의 속관.

[주D-024]원풍고 감(元豐庫監) : 원풍고는 송 태부시(太府寺)에 예속된 25관사(官司)의 하나로, 제로(諸路)의 비축잉여물 및 상평전물(商平錢物)로 잘 포장된 것을 다 입고시킨다. ‘감’은 그 관속. 《宋史 卷165 職官5》

[주D-025]동진사출신(同進士出身) : 진사시의 제4~5등급 제자의 호칭. 서긍은 진사에 급제하지 못했으나 《고려도경》을 저술한 공을 기려 동진사출신의 자격을 준 것이다. 《宋史 卷155 選擧1》

[주D-026]지대종정승사(知大宗正丞事) : 대종정사(大宗正司)는 황제 종족의 제반 사건을 체결하는 관서로, 종실의 단련사(團練使), 관찰사 이상의 덕망이 있는 자 2인을 그 승(丞)으로 충용하는데, 지대종정승사는 그 승의 실무를 관장 처결하는 관직. 《宋史 卷164 職官4》

[주D-027]장서학(掌書學) : 서학은 서법에 관한 일을 관장하는 관서, 장서학은 그 관서의 실무를 관리하는 관원

[주D-028]상서형부 원외랑(尙書刑部員外郞) : 상서성 소속의 형부에 예속된 원외랑. 원외랑에는 후행ㆍ중행ㆍ전행의 차등이 있다. 《宋史 卷169 職官9》

[주D-029]지주(池州)의 영풍(永豐) : 안휘성 추포현(秋浦縣) 남부 요수(饒水) 상류에 있는 진(鎭). 《讀史方輿紀要 江南 池州府 建德縣》

[주D-030]연강 제치사(沿江制置司) : 장강 연안의 군대를 조정하는 관서. 제치사는 장은 제치사(制置使), 또는 제치대사(制置大使). 그 속관 중의 첫째가 참모관이다. 《宋史 卷167 職官7》

[주D-031]봉사(奉祠) : 사록(祠祿)에 편입됨을 말한다. 송대에는 사록이라는 관위를 설치해서 관직을 그만둘 노령자들에게 도교궁관(道敎宮觀)을 관리시키되, 실제의 사무는 맡기지 않고 이름만을 빌려 관료의 봉록을 받게 했다. 왕안석이 신법에 반대하는 노관료를 현직에서 물러나게 하기 위해 사록의 정원을 거의 무제한으로 확대시켰다. 연로자나 관직에 뜻이 없는 자는 자진해서 사록을 맡기를 신청하기도 했다. 《宋史 卷170 職官10》

[주D-032]홍경궁(鴻慶宮) : 북송 때의 남경은 응천부(應天府 지금의 하남성 상구현(商丘縣)임)인데, 홍경궁은 곧 응천부에 있던 도관. 《宋史 卷85 地理1》

[주D-033]숭도관(崇道觀) : 지금의 절강성 임해현(浙江省臨海縣)에 있다.

[주D-034]익양(弋陽) : 지금의 강서성 신강(信江)이 지나가는 지역인 익양현.

[주D-035]요주(饒州) : 지금의 강서성 파양현(鄱陽縣).

[주D-036]조운사(漕運使) : 선박으로 물자를 운송하는 일을 관장하는 관직. 송대에는 전운사(轉運使). 《宋史 卷167 職官7》

[주D-037]덕흥현(德興縣) : 지금의 강서성 낙평현(樂平縣).

[주D-038]부문각 직학사(敷文閣直學士) : 부문각은 휘종(徽宗)의 어제를 수장한 곳으로 그곳의 차석이 직학사다. 《宋史 卷162 職官2》

[주D-039]임(林) : 서긍의 친형으로 자는 치산(稚山), 호는 연산거사(硯山居士), 또는 연산거사(硏山居士), 연성거사(硏城居士). 선화(宣和) 연간(1119∼1125)의 진사로 용도각 학사(龍圖閣學士)까지 지냈다. 《尙友錄2》

[주D-040]포양(莆陽) : 포판(蒲坂)의 별칭으로 현명, 지금의 산서성 영제현(永濟縣).

[주D-041]하남 소윤(河南少尹) : 하남부의 차석(次席). 하남부는 지금의 하남성 낙양현으로 그 관할 지역과 소관 업무는 광범했다. 《宋史 卷86 地理1》

[주D-042]대리시(大理寺) : 옥송사건을 처리하는 중앙관서. 《宋史 卷165 職官5》

[주D-043]다권(茶券) : 송대에 차를 경외(境外)에 반출하는 관의 증명서로, 그 값이 수백만 전에 이를 경우도 있었다. 《宋史 卷357 梅執禮傳》

[주D-044]패왕묘(覇王廟) : 팽성(彭城)에 있는 항우(項羽)의 사당. 팽성은 지금의 강소성 동산현(江蘇省銅山縣)에 있다. 《讀史方輿紀要 江南》

[주D-045]중서 사인(中書舍人) : 중서성 11관 중의 제4관. 《宋史 卷161 職官1》

[주D-046]한구(韓駒) : 자는 자창(子蒼), 호는 능양(陵陽). 선정감(仙井監 지금의 사천성 능수현(四川省陵壽縣)) 사람. 정화(政和) 연간에 소시(召試)되어 사진사출신(賜進士出身)으로 중서 사인 등을 거쳐 지강주(知江州)까지 지냈다. 문장에 뛰어나고 시에 대한 이해도 깊었다. 《능양집(陵陽集)》이 있다. 《宋史 卷446 文苑7》

[주D-047]평원도(平遠圖) : 땅이 평탄하여 멀리까지 바라보이는 경치의 그림. 소식(蘇軾)도 곽희(郭煕)의 추산평원도(秋山平遠圖)를 노래한 시가 있다.

[주D-048]분황(焚黃) : 증직(贈職)이 된 때에 관고(官誥)의 부본(副本)을 쓴 누런 종이를 무덤 앞에서 불사르는 일.

[주D-049]이양빙(李陽氷) : 당 나라 때의 명필로 특히 전자를 잘 썼다. 자는 소온(蘇溫), 조군(趙郡 지금의 하북성 난성현(河北省欒城縣)) 사람으로 건원(乾元 758∼759) 연간에 진운령(縉雲令)을 지냈고 장작감(將作監)까지 지냈다. 《全唐文 卷437》

[주D-050]오계(浯溪) : 호남성 기양현(祁陽縣) 서남 5리에 있는 물. 원결(元結)이 그곳의 경치를 좋아하여 거기서 살았다.

[주D-051]구양 문충공(歐陽文忠公)……뿐이었다 : 구양수(歐陽脩)는 금석 각명을 모아 《집고록(集古錄)》을 저술하였다. 《구양수전집》에 수록되어 있다. 문충공은 그의 시호.

[주D-052]유기(劉跂) : 자는 사립(斯立), 호는 학역노인(學易老人). 원풍(元豐) 연간의 진사로 조봉랑(朝奉郞)이 되었다. 《학역집(學易集)》이 있다. 《宋史 卷340 劉摯傳》

[주D-053]박종정이(鎛鐘鼎彝) : 박종은 종, 정이는 기물. 다 청동으로 주조한 것으로, 거기에 새겨 넣은 글씨가 이른바 금문(金文)이다.

 

 

 

 

 

宣和奉使高麗圖經跋

선화봉사고려도경 발

 

 

 

 

 

-宣和奉使高麗圖經跋[徐蕆]

선화봉사고려도경 발 서천

仲父。旣以書上御府。其副藏家。靖康丁未春。里人徐周賓。乞觀未歸。而寇至。失書所在。後十秊。家君。漕江西。弭節于洪。仲父來省。或謂郡有北醫上官生。實獲此書。亟訪之。其無恙者。特海道二卷耳。仲父。嘗爲蕆言。世傳余書。往往圖亡而經存。余追畫之。無難也。然不果就。嘻。蓋棺事乃已矣。姑刻是。留徵江郡齋。來者尙有考焉。乾道三秊夏至日。左朝奉郞權發遣江陰軍主管學事。徐 蕆 書。

중부(仲父)는 책을 어부(御府)에 바치고 그 부본(副本)을 집에 보관하고 있었다. 정강(靖康) 정미년(1127, 고려 인종5) 봄에 동네 사람 서주빈(徐周賓)이 그것을 빌려다 보았는데 반환되지 않은 채 적이 들어와 책의 소재를 모르게 되었다. 그 후 10년이 되어 아버님께서 강서(江西)의 조운사(漕運使)로 홍주(洪州강서성 남창현(江西省南昌縣))에 주재하고 계셨는데 중부가 와서 찾아뵈었다. 그때 어떤 이가 말하기를 ‘군아(郡衙)에 북방의 의원[北醫] 상관생(上官生)이 있는데 그가 확실히 이 책을 얻었다.’ 하기에 급히 찾아가 보았더니, 그 중에 성한 것은 단지 해도(海道) 2권뿐이었다. 중부가 한번은 나에게, ‘세상에 전해지는 내 책은 왕왕 그림은 없어지고 경문이 남아 있는데, 내가 후에 그리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나는 그 일을 해내지 못했다.’고 한 적이 있었다.

아아, 관 뚜껑을 덮으면 일은 끝나버리는 것이다. 우선 이것을 판각하여 징강(徵江운남성 징강현(雲南省徵江縣))의 군재(郡齋)에 남겨 두거니와 뒤에 오는 사람들은 그래도 참고할 데가 있게 될 것이다.

건도(乾道) 3년(1167) 하지일(夏至日)

좌조봉랑(左朝奉郞)권발견강음군주관학사(權發遣江陰軍主管學事)서천(徐蕆)이 씀

[주D-001]적이……되었다 : 이해에 금군(金軍)이 북송의 수도 변경(汴京 지금의 하남성 개봉(河南省開封))을 함락시키고 흠종(欽宗)과 휘종(徽宗) 부자를 포로로 하여 북방으로 압송해 갔다.

[주D-002]해도(海道) 2권 : 본서 제34∼39권이다.

[주D-003]좌조봉랑(左朝奉郞) : 조봉랑은 송대 문산관(文散官)의 제22계, 좌와 우가 있었다.

[주D-004]권발견강음군주관학사(權發遣江陰軍主管學事) : 강음(江陰)은 강소성(江蘇省) 무석현(無錫縣) 북부에 있던 군(郡). 송대에는 행정 구획의 단위로 군(軍)을 쓰기도 했다. 권발견(權發遣)은 임시 파송의 뜻. 강음군에 임시 파송된 학사 책임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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