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안김 뿌리찾기

안산에 조선 건국의 공신이 있었다

by 연송 김환수 2011. 7. 4.

내고장 안산/안산의 역사와 상징 2010/04/08 10:04

10-04-08 09:24

 

안산에 조선건국의 공신이 있었다

[안산 역사이야기] <15>

연성군(蓮城君) 김정경(金定卿)

 

 

조선 건국 벽두.  나라는 건국되었지만 그 기틀이 다져지기까지 혼란

한 세월이 이어진다.

 

고려의 풍속 역시 그대로 남아있었으며, 여러 차례 궁중의 암투도

벌어진다.

 

이런 혼란과 변혁의 시기에 나라의 초석을 다지는 데 큰 역할을

한 안산의 인물로 김정경(金定卿)이 있다.

 

우리는 그의 일생을 통하여 건국 초, 생생한 역사 개벽의 현장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살펴볼 수 있다.

 

 

김정경은 안산 김씨로, 현재의 수암동에서 나고 자랐다. 김정경은

려 말에 군부사총랑(軍簿司摠郞)을 역임했는데 이는 병부의 4품

벼슬이다.

 

그는 고려 말에서 조선 건국으로 이어지는 혼란기에 이성계를 도와

대업을 이루게 되는데, 무장이었던 그가 자연스럽게 이성계의 측근

에서 지지 세력이 되었을 것임을 짐작키는 어렵지 않다.

 

그리하여 조선건국에 일조(一助) 함으로 왕조 개창 후 원종공신(原從

功臣)에 책봉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원종공신이란 누구를 이름인가? 조선시대에 공신 책봉에

서 제외된 무수한 유공자들을 포상하는 것이 이른바 원종공신제도 인데, 이는 보다 직접적으로 큰 공훈을 세워 임명된 ‘정공신’ 다음

급에 해당하는, 이른바 ‘부공신’에 해당되는 모든 유공자들을 대상

으로 포상한 제도로, 수백 명에서 많게는 수천 명씩 책봉하곤 하였다.

 

 

조선 개국 공신을 책봉하였을 때의 원종공신은 1천 6백 명이 넘었

으며, 임진왜란 후 책봉된 원종공신인 선무공신의 경우에는 9천여

명이 양산되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원종공신은 모두 얼마나 될까?

 

조선시대 원종공신의 수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모두 합해 몇 만 명이

넘을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이처럼 수많은 원종공신이 생겨난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은 국가적 위기 상황이나 불안 정국에서 국가와 왕실에 조금의

공이라도 있는 모든 유공자들을 포상함으로써 국가와 왕실을 안정

시키고 위상을 드높이고자 하는 의도에서였다고 할 수 있다.

 

1400년(정종 2년)에 방간의 난(일명 ‘박포의 난’ 또는 ‘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 한성부윤이었던 김정경은 난을 진압하고 좌명공신

(佐命功臣)에 책봉된다.

 

좌명공신(佐命功臣)은 형제들의 왕권 쟁탈 싸움에서 방원이 형 방간

을 몰아내고 사실상 왕으로 등극하는 마지막 과정에서 그를 도운

신하들에게 내린 공훈이다.

 

또한 김정경은 1410년(태종 10년), 성절사(聖節使) ― 명나라 황제나

황후 생일에 파견하는 축하 사절 ― 로 명나라에 직접 다녀오기도

하였다.

 

그 후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한 김정경은 고향인 안산에서 여생을

마치게 된다. 현재 그의 묘는 하남시 감북동에 있다.

 

안산에 거처하면서 그가 지었다는 정자가 있는데, ‘망해정(望海停)’

이라 불린다.

 

옛날에는 해수가 내륙 쪽으로 들어오는 지형이었으므로 현재의 수암

동 일대에서도 바다를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김정경은 그 바다를 바라보며 유유자적하며 말년을 보내지 않았을

까. 그 당시에 심었다는 은행나무 세 그루 중 한 그루가 지금까지

남아 있다.

 

그는 세종 즉위 1년인 1419년에 75세의 긴 삶을 마감하는데 당시로

서는 상당히 장수한 셈이다.

 

그는 왕조가 바뀌는 역사의 현장 한복판에서 함께하였고, 공신으로

책봉되어 ‘연성군(蓮城君)’에 봉해졌으며, 관직에서 물러난 후에는

안산 수리산(修理山) 자락에서 여생을 보내었다.

 

장구(長久)한 역사 속 급변하는 왕조 교체기에서 자신의 삶을 고뇌

하고, 사랑하며, 치열하게 살다간 인간 김정경의 길고도 짧은 생을

통해 굽이굽이 흘러 온 안산 역사의 한 자락을 조용히 되짚어 본다.

 

신대광 원일중학교 교사·안산향토사연구소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