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안김 뿌리찾기

김명국의 '죽음의 자화상'

by 연송 김환수 2010. 12. 17.

[유홍준의 국보순례] [89]

김명국의 '죽음의 자화상'

유홍준 명지대 교수·미술사

 

 

화가에게 있어서 술은 간혹 창작의 촉매제였다. 취옹(醉翁)이라는 호를 즐겨 사용한 17세기 인조 연간의 연담(蓮潭) 김명국(金命國)은 정말로 취필(醉筆)을 많이 남겼다.

 

사람들은 그를 주광(酒狂)이라고 불렀고 실제로 그는 술을 마시지 않고는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고 한다.

영남의 한 스님이 지옥도를 그려달라고 할 때 그는 술부터 사 오라고 했다. 그리고 번번이 술에 취하지 않아 그릴 수 없다며 술을 요구하였다.

 

그러다 마침내 그림이 완성되었다고 하여 스님이 찾아가 보니 염라대왕 아래서 벌 받는 사람들을 모두 중으로 그려놓은 것이었다.

 

스님이 화를 내며 비단 폭을 물어내라고 하자 연담은 껄껄 웃으며 술을 더 받아오면 고쳐 주겠노라고 했다.

 

스님이 술을 사 오자 연담은 이를 들이켜고는 중 머리마다 머리카락을 그려 넣고 옷에 채색을 입혀 순식간에 일반 백성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남태응의 증언에 의하면 연담은 술을 마시지 않고는 그림을 그리지 않았지만 술에 취하면 또 취해서 그릴 수 없어 다만 욕취미취지간(慾醉未醉之間), 즉 취하고는 싶으나 아직 취하지 않은 상태에서만 명작이 나올 수 있었다고 했다.

연담의 명작으로는 취필이 분명한 '달마도'가 있다. 그러나 내가 가장 연담다운 작품으로 생각하는 것은 '죽음의 자화상'<사진>이다.

 

상복(喪服)을 입은 채 지팡이 비껴 잡고 어디론가 떠나가는 자의 뒷모습을 그린 것인데 그림 위쪽에 마구 흘려 쓴 화제를 보면 저승으로 가는 자신의 모습을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없는 것에서 있는 것을 만드는데/

그림으로 모습을 그렸으면 그만이지 무슨 말을 덧붙이랴/

세상엔 시인이 많고도 많다지만/

그 누가 흩어진 나의 영혼을 불러주리오

(將無能作有 畵貌己傳言 世上多騷客 誰招已散魂)."

동서고금에 자화상은 많고도 많지만 죽음의 자화상은 달리 찾아볼 수 없다. 연담에게 술은 창작의 촉매제이자 삶과 죽음을 초탈한 경지로 들어가게 한 묘약이었나 보다.   조선일보 2010.12.16

 

 

은사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전문가들도 그가 그린 노엽달마도(蘆葉達磨圖)나 기려도(騎驢圖)는 알아도

은사도(隱士圖)는 잘 모르고 있다.

 

은사도의 화제(畵題)에 대해서는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將無能作有 (장무능작유)

畵貌豈傳言 (화모개전언)

世上多騷客 (세상다소객)

唯招己散魂 (유초기산혼)

 

없는 것을 가지고 무엇을 있게 만드니

그것을 말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세상엔 시끄러운 사람들이 많으니

누가 이미 흩어진 혼을 다시 불러 일으키겠는가

==============================================================================================

 

김명국 [金明國, 1600(선조 33)∼1663이후]

 

조선 중기의 화가. 인물·수석(水石)에 독창적인 화법을 구사했는데, 굳세고 거친 필치와 흑백대비가 심한 묵법(墨法), 분방하게 가해진 준찰, 날카롭게 각이 진 윤곽선 등이 특징이다.

 

본관 안산(安山)

호 연담(蓮潭)·국담(菊潭)·취옹(醉翁)

별칭 자 천여(天汝)

활동분야 미술

주요작품 《설중귀려도(雪中歸驢圖)》 《심산행려도(深山行旅圖)》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노엽달마도 

 

김명국 (선종화로 유명한 화가) 자세하게 보실려면 아래 주소 클릭

 http://blog.daum.net/yescheers/8597630

 

========================================================

연담 김명국의 생애와 작품

 (蓮潭 金明國의 生涯와 作品世界)

 

김명국(1600-1663년 이후)은 조선중기 화가들 중 가장 독창적인 화법을 구사한 천재적인 화가이자 기인으로 알려져 있다.

 

畵佛로 불리는 김명국은 특히 禪宗畵와 狂態邪學派 계열의  산수인물화에 뛰어났다. 본관은 安山, 자는 天汝, 호는 蓮潭 또는 醉翁이며 命國, 鳴國이라는 이름도 사용했으나 생몰연대 등 자세한 인적사항은 알 수 없다.


김명국이 활동했던 인조(1623~1649), 효종(1650~1659) 연간은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잇따라 겪어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불안정한 시기였다.

 

그러나 명종이 실시한 僧科와 임란때 西山大師, 四溟堂 등 승려들의 구국활동으로 인해 한국 禪宗이 중흥, 이전보다 佛敎文化가 활발해지며 儒, 佛, 道 3敎의 다양한 문화가 전개됐던 시대였다.

 

그 영향으로 禪僧, 文人畵家, 畵員 등 다양한 계층에서 禪宗畵가 그려졌으며, 통신사로 갔던 일본에서도 선종화가 성행했던 까닭에 김명국도 水墨의 선종화를 즐겨 그렸다.


재빠르고 간결하며 힘찬 減筆法의 선종화풍으로 그린 達摩圖는 자신의 개성과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기에 적절한 畵材였으며 김명국 예술세계의 정수로 평가받는다.

 

당시 화단은 安堅派의 화풍이 주류였으나 김명국은 狂態邪學派(吳偉, 張路)양식을 수용, 자신만의 독자적인 화풍을 이뤄냈다.

 

규장각 소장 儀軌에 따르면 김명국은 圖畵署 畵圓으로 활약하면서 국가적인 궁중행사에 30여회, 의식에서 소용되는 실용물 제작에 17회 선발돼 기록화와 치장용 병풍, 장엄용 문양 등을 그렸으며, 1648년에는 창덕궁 저승전의 중수공사시 화원과 화승을 데리고 단청작업을 지휘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통신사 수행화원으로 1637년과 1643년 日本에 다녀왔으며, 두 번째 일본행은 일본측의 특별요청에 의한 것임이 공문서에 남아 있어 그의 작품이 일본에서 인기가 높았음을 짐작케 한다.

 

도화서 화원으로는 최고위직에 속하는 종6품 교수를 거쳐 기술직 관인으로서의 한계품직을 넘어 정6품 司果까지 올랐다.

 

김명국은 우리나라보다 일본에서, 동시대보다 후대에 그 神筆을 인정받았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達摩圖, 雪中歸驢圖, 노승도, 죽음의 자화상과 이병직 구장의 深山行旅圖, 남궁련 소장의 나귀를 탄 사람, 간송미술관 소장의 秘 展觀圖, 수노인 등이 남아있다.


공재 윤두서는 김명국의 작품세계에 대해 "필력이 강건하고 묵법이 진하다. 배움을 쌓아 터득한 바 무상의 상을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었으니 특출한 명가를 이루었다.

 

기질이 분방하여 마침내 환쟁이의 나쁜 습관을 떨쳐버렸으니 이야말로 화단의 이단이었다"고 하였다.


남태응은 청죽화사에 "김명국은 성격이 호방하고 술을 좋아하여 그림을 구하는 사람이 있으면 술부터 찾았다. 술에 취하지 않으면 그 재주가 다 나오지 않았고 또 술에 취하면 취해서 제대로 그릴 수가 없었다.

 

오직 술에 취하고 싶으나 아직은 덜 취한 상태에서만 잘 그릴 수 있었으니 그와 같이 잘된 그림은 아주 드물고 세상에 전하는 그림중에는 술에 덜 취하거나 아주 취해버린 상태에서 그린 것이 많아 마치 용과 지렁이가 서로 섞여 있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또한 남태응은 이징, 윤두서, 김명국을 비교하며 "김명국은 신품에 가깝고 이징은 법품, 윤두서는 묘품에 가깝다.

 

학문에 비유하자면 연담은 태어나면서 아는 자, 공재는 배워서 아는 자, 허주는 노력해서 아는 자이다.

 

연담의 폐단은 거칠음에 있고, 허주의 폐단은 속됨에 있으며, 공재의 폐단은 작음에 있다.

 

작은 것은 크게 할 수 있고 거친 것은 정밀하게 할 수 있으나 속된 것은 고칠 수가 없다"며 김명국을 높이 평가했다.


관련논문
연담 김명국의 생애와 회화세계 / 안재옥 / 홍익대 1982 / 61p
연담 김명국(기인이 되고만 한 천재의 이야기) / 유홍준 / 역사비평 1990
연담 김명국의 선화 연구/ 임덕수/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 1999 / 127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