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담
모든 그림은 화가 자신의 경험이나 마음을 반영한다고 했을 때
그렇다면 연담
일본 입장에서 선진 문화를 접하는 유일한 공식적인 통로는 바로 조선통신사 사절단이었습니다. 선진 문화의 대한 갈증을 조선통신사를 통해 해소하고 그것을 배우고 익혀 자신들의 생활에 적용하는 것이 일본과 조선의 오래된 문화 관행이었습니다. 하지만 임진왜란 이후 통신사 파견은 중단되었고 그 후 일본은 지속적으로 통신사 파견을 요구하였지만 조선은 쉽사리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이 끝난 지 40 여 년이 지난 1609년에 조선통신사의 파견은 재개되었는데 이는 조선의 문화를 과시하는 한편 일본과의 외교복원을 통해 다시 전쟁을 만들지 않으려는 생각이었습니다.
조선 조정에서는 통신사 일행을 선발하는데 있어 문화적 우월성을 보여주기 위하여 매우 기량이 뛰어난 인물로 선발했는데 특히 그림을 과시하기 위한 화원, 글씨와 문장을 과시하는 사자관, 마상무예를 선보여야 하는 군관은 그 기량이 가장 뛰어난 인물로 선발하곤 했습니다.
따라서 조선통신사의 일행으로 선발되었다는 것은 이미 그 기량이 나라에서 인정 받았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글씨와 문장은 한문을 아는 일본인들에게만 인기가 있었으나 화가와 마상무예를 담당하는 무관은 모든 사람에게 인기가 있었기에 화원의 비중은 통신사에서도 매우 중요했습니다.
아무튼 연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시달렸는지 통신사 부사 김세렴의 [해사록]
그렇게 많은 그림을 그려야 했으니 정교하게 공을 들여 그려야 하는 채색화나 산수화는 가급적 피하고 일필휘지 할 수 있는 선화도를 중심으로 그릴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습득도> 시모노세키 초후박물관 소장
당나라 때 천태산 국청사의 풍간선사가 숲 속을 거닐다가 강보에 싸여 울던 아이를 데려다 길렀는데 주워 왔다고 하여 아이 이름을 습득이라 하였다. 습득이 빗자루로 마당을 쓰는데 주지스님이 다가와서 “네 성은 무엇이며 어디에서 왔느냐?” 하고 묻자 두 손을 맞잡고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여기서 차수이립(叉手而立)이라는 화두가 생겼다. -조선의 르네상스 중인(
속필로 그린 선화도라 해서 그림의 격이 떨어진다고 생각하실 분은 없겠지만 부연하자면 원래 선화도란 빨리 그리면서도 한 획에 참선의 깊이를 담아내야 하기에 붓질을 덧붙인다거나 수정하는 것이 용납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빨리 그리면서도 잘 그린다는 것은 결코 쉬운일이 아니며 오랜 운필의 숙달과 마음의 깊이가 없이는 잘 그릴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일본은 소묘풍의 얌전한 선화도가 대세였던 까닭에 힘찬 필치로 호방하게 그리는
이러한 강렬하면서도 호탕한 선화도는 술을 좋아하고 호방한
따라서 그의 선화도의 대부분은 일본에서 일본인들의 요청에 그려진 것이며 당시 조선 화단은 보수적인 화풍이 대세여서 은일, 소요유의 고사인물도가 주종을 이룬 것과 대별되는 점입니다.
전편에 실린 <달마도>도 일본 통신사 시절에 그린 그림으로 일본에 계속 남아있다가 조선말기 일본에서 다시 구입하여 우리나라에 돌아오게 된 그림입니다.
<박쥐를 날리는 신선> 종이에 수묵, 25.0 X 34.0 Cm, 평양 조선미술박물관
저는 유명한 달마도 뿐 아니라 시모노세키 박물관 소장의 <습득도>와 평양미술관 소장의 <박쥐를 날리는 신선>등의 그림을 보면서 그의 의습선(衣褶線)과 표정, 작품에 퍼져있는 선기 등이 결코 조선 최고의 화가인
조선에서 일본을 다녀간다는 것은 지금이야 비행기를 타면 오전에 갔다가 오후에 돌아올 수 있는 거리지만 당신에는 매우 엄청난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부산까지 가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지만 부산에서 규슈 섬 까지만 바다를 4번이나 넘어야 했고 규슈에서 시모노세키 바다를 한번 더 거쳐 혼슈에 도착해서도 장장 1600여 리를 걸어야만 에도에 도착하는 엄청난 거리입니다.
또한 조선통신사 파견은 국가적으로 매우 중요한 행사이지만 그 경비가 상당히 많이 소요되는 행사이기에 정식 외교관인 정, 부사들의 필수적인 경비를 제외하고는 다른 수행원들의 경비가 따로 지급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통신사를 수행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비용을 자체로 조달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통신사 일행들에게는 일본에서 가장 값 비싸게 거래되는 인삼 밀거래가 암묵적으로 허용되었고 타국과 개인적인 상거래가 불법이었던 시절임에도 인삼을 판 돈으로 조선에서 필요한 물건을 몰래 들여오는 것을 대부분 눈감아 주었습니다.
제4차 조선통신사 일행은
화원
하지만
이런 밀거래의 관행은 비단
문제를 일으켰음에도 다시
결국
또한 화원의 입장에서 볼 때 아무리 그림을 잘 그려도 결국 천한 환쟁이라는 사회적 위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고 빈궁한 생활을 면하기 어려웠기에 자신의 그림을 환호하고 크게 대우해주는 환경에 적극적으로 적응 했음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그림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앞에서도 이야기 했듯이 <설경별리도>는 누가 뭐라 해도 그 화의가 이별로 인한 진한 그리움입니다. 그래서 저는
왜 특별히 1637년 2월이라 생각하는 이유는 처음
남한산성을 포위당했다가 결국 임금이 항복했다는 사실은 한양은 이미 적국의 손에 떨어져 약탈과 방화로 불바다가 되었다는 것이고 이런 비보가 통신사일행에게 전해진 시기는 아마도 2월쯤 조선으로 돌아오던 도중 일 것입니다.
비록 깨끗하게 번 돈은 아니지만 조선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가난한 아내와 자식들의 고생을 덜어줄 수 있다는 희망으로 귀국하던
잠자리에 들어도 자신의 먼 길 떠나던 날 집 앞에 나와 몸 건강히 다녀오라며 옷고름으로 눈물을 닦던 아내의 모습이 아른거려 잠을 이룰 수 없었을 것이고 그때 조용히 잠자리에서 빠져 나와 집과 아내에 대한 그리움으로 붓을 들지 않을 수 없었겠지요.
한 겨울 밤. 그림은 집을 떠나는 순간을 그렸지만 내 반듯이 돌아가리라 그때까지만 나를 배웅해주던 그 모습으로 그대로 있어주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그림을 그립니다. 떠난 그리움이 남겨진 그리움에게 보내는 편지. <설경별리도>는 이렇게 태어났지 않았을까요?
물론 이런 추측은 양식적인 추론이나 문헌적 근거에 의거한 것은 아닙니다. 오직 그림에서 풍겨 나오는 간절한 그리움으로 추측해 본 것입니다.
<설경별리도>는 인물 묘사가
바로 이런 점이 <설경별리도>가 한마디로 누구의 요청도, 돈 때문도 아닌 마음으로부터 일어난 화의를 제대로 그려낸 명작이라 생각하게 만드는 부분입니다.
더구나 일반 종이도 아니고 비단도 아닌 붓이 잘 나가지 않은 모시에 이렇게 빠른 붓 놀림으로 정확한 묘사를 했다는 점은 그의 기량의 탁월함을 다시 한번 확인해 줍니다.
새벽에 길을 떠나본 적이 있습니까?
새벽에 대문까지 나와 먼 길 떠나는 남편을 배웅하는 아내의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까?
밥벌이를 위해 이른 새벽에 길을 떠나본 사람은 알 것입니다.
멀리서 배웅 하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순간부터 가슴 한 켠에 그리움이 슬금슬금 올라와 몸은 점점 더 멀어지지만 마음에는 가족들 이름을 하나하나 새겨 넣습니다.
그런 새벽에 눈이라도 살며시 내려앉아 있다면 남겨진 발자국에 더욱 그리움이 묻어납니다.
떠난 그리움이 남겨진 그리움에게 보내는 간절한 마음.
이별을 통해 그리움을 보여주는 그림 <설경별리도>
이 그림에 제시를 붙인다면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
어느 날 당신과 내가
날과 씨로 만나서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우리들의 꿈이 만나
한 폭의 비단이 된다면
나는 기다리리, 추운 길목에서
오랜 침묵과 외로움 끝에
한 슬픔이 다른 슬픔에게 손을 주고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의
그윽한 눈을 들여다볼 때
어느 겨울인들
우리들의 사랑을 춥게 하리
외롭고 긴 기다림 끝에
어느 날 당신과 내가 만나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2009 . 8 . 4
금강안金剛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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