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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김씨 족보

신라삼성연원보, 계보연구 (안산김씨)

by 연송 김환수 2008. 12. 19.

 

신라김씨 선원세계표.hwp

 안산김씨 상계기록을 발췌하여 등재하였습니다.

 사단법인 경주김씨 계보연구회 방문 일시 : 2008.12.16 17:30 - 19:00

 도움을 주신 계보연구회 김용석 연구실장(이사)님 감사합니다.

   

 

 

 

 

 

 

 

 

 

 

 

 

 

 

 

 

 

 

 

 

 

 김용석 연구실장께서 손수 만들어 주신 안산김씨 상계기록 책자 : 감사드립니다.

 

 

 

 

 

 

 

 

 

 

 

 

 

참고사항

국립 중앙 도서관에는 2종류의 신라삼성연원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삼성연원보 책의 간지 표식이 김씨부분부터는 <계림김씨연원보>라 되어 있다.

경주김씨 계보연구회본에는 신라삼성연원보라 되어 있다.

내용과 활자 등은 모두 동일한 것으로 보이며, 다만 김씨 부분으로 넘어 가면서

약간 상이한 편집을 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부천족보전문도서관 소장  http://www.jokbo.re.kr/ 

 

순번

책 명

발행인

출판지역

출판년도

분류번호

333

新羅三姓淵源譜

신라삼성연원보

金澤俊

未詳

1931

576-1931-001

334

新羅三姓淵源譜

신라삼성연원보

金景大

평안남도

의주

1934

282-1934-001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http://www.nl.go.kr/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책자

 

 

 

 

안산김씨 상계 시조이전 뿌리찾기

 

태종무열왕 계보도

김알지 - - - 16세 태종무열왕 - 17세 문왕 - 18세 대충 - 19세 사인 - 20세 유정 - 21세 내흥

22세 경징 - 23세 영 - 24세 종유 - 25세 궁일 - 26세 은의- 27세 女 壻 李翰(全州李氏)

(25세부터 다시 시작) 25세 숭일 - 26세 강의 - 27세 경영 - 28세 욱성 -

29세 승흥 - 30세 헌 - 31세 지주 - 32세 긍필(兢弼) 안산김씨 시조


 

실전기록 찾기 도표

 

경주김씨

30세

경주김씨

31세

32세

33세

34세

35세

36세

37세

38세

39세

40세

41세

三性

淵源譜

 

헌 (獻)

三性

淵源譜

 

지주(支柱)

(日旦)

(陟)

직휘

(直輝)

용도

(用度)

충림

(忠霖)

(渥)

순손,우손

(舜孫,禹孫)

 

 

 

 

 

 

원황

(元晃)

경용

(景庸)

인규

(仁揆)

헌 (獻)

(벼슬사도)

효종

慶州金氏

지주(支柱)

경순왕

(日旦)

은열

(陟)

정구

직휘

(直輝)

계삼

용도

(用度)

한공

충림

(忠霖)

(渥)

순손,우손

(舜孫,禹孫)

섬한

(暹漢)

 

 

경용

(景庸)

인규

(仁揆)

경주김씨 장군공후

계보도

1세

2세

3세

4세

5세

6세

7세

8세

9세

효종

경순왕

(太子 鎰)

순웅

(順雄)

인위

(因謂)

원정

지열

(之說)

순부

(舜符)

영유

(英裕)

의공

(義公)

광준

(光俊)

남미

(南美)

인천이씨

시조

2세

3세

4세

5세

6세

7세

8세

9세

10세

이허기 10세손

허겸

허겸

자연

자겸

지언

-

-

-

 

(사위)

김은부

妻家

경주김

父 인규

인규 子

지효

안산김씨 김지우

묘지명 (1152년)

시조

2세

3세

4세

5세

6세

7세

8세

9세

10세

원성왕

김예

(金禮)

인윤

(仁允)

신웅

(信雄)

인위

(因謂)

원황

(元晃)

경용

(景庸)

인규 (仁揆)

지효(절손)

지우(之祐)

 

 

 

안산김씨 경덕국사

묘지명 (1072년)

시조

2세

3세

4세

5세

6세

7세

8세

9세

10세

 

 

긍필

(兢弼)

은부

(殷傅)

충찬

(忠贊)

 

 

 

 

 

 

 

안산김씨 족보

(1989년)

시조

2세

3세

4세

5세

6세

7세

8세

9세

10세

경순왕

은열

(殷說)

긍필

(兢弼)

은부

(殷傅)

충찬

(忠贊)

원황

(元晃)

경용

(景庸)

인규

(仁揆)

지효(절손)

지우(之祐)

충언

(忠彦)

김위

(金渭)

원상

(元祥)


 

  28대    29대    30대    31대    32대    33대   34대   35대   36대   37대                  

 경순왕  은열     일      순웅    인위    경용   인규   지우   경주김씨 김지우 묘지명

 경순왕  은열    태화     정구    계삼    한공   경용   인규                      경주김씨 

태종무열왕 - 문주- - - 내흥 - - - -

  욱성    승홍     헌       지주      -         -       -     원황   경용   인규   삼성연원보

                       30대    31대   1세     2세    3세     4세     5세     6세                   

 원성왕 - - -   경순왕   은열   긍필    은부   충찬   원황    경용   인규   안산김씨 

 

 

실전기록 찾기 도표 설명

 

가승계보는 김알지 - - 지증왕 - - 원성왕 - - 경순왕 - 은열 - 긍필(시조)입니다.

현재까지 밝혀진 문헌상 계보는 김알지 - - 지증왕 - - 태종무열왕 - - - 긍필(시조)입니다.

 

문헌상의 기록이 우선할 수 있지만 안산김씨 대종회 차원의 선대에 대한 상계 결정시 그 결정에 따르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합니다.

 

가승계보상 경순왕 후손이지만 그보다 상위 근거는 김지우(金之祐 : 1108~1151) 묘지명 (연대 1152년, 의종6년)으로 원성왕 - 김예 - 인윤 - 신웅(순웅) - 인위 - 경용 - 인규 - 지우 - 충언으로 이 기록만으로 본다면 경순왕 - 은열에 대한 언급도 없으며, 인위라는 분은 은열의 직계후손이 아닙니다. 이때 경순왕의 직계였다면 직계기록에서 경순왕이나 은열공이 누락될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 경순왕 계보 : 일(태자)-순웅-인위-원정 * 은열-태화-정구-계삼-한공)

 

그리고 안산김씨가 경순왕의 후손이라면 경순왕 후손의 각종기록과 신라김씨 후손의 기록에 안산김씨 분파내용이 있어야 하는데 그 어느 곳에도 분파기록이 전무합니다. 이는 경순왕(?-978,경종3년)시대에 시조 긍필이 살았으며 이후 아들 은부(?-1017)가 그 계대를 유지하였슴에도 경순왕의 직계후손이라는 기록이 없는 것은 계대가 서로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김지우 묘지명을 보면 안김 윗대 경용이전 기록이 경주김씨 장군공파의 상계기록입니다.

즉 우리 안김시조인 긍필 - 은부 - 충찬 - 원황 선조기록이 없고 상계 기록은 인위계 이며 이후 세대로 경용 - 인규 - 지우 - 충언 세계는 기록이 명확합니다.

 

지우의 묘지명(1152년)에는 고조부 되는 충찬의 동생 경덕국사 난원의 묘지명(1052년)에 나타난 선조 기록이 하나도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인위라는 분과 은부 조상님은 고려 현종의 장인(국구)에 해당되는데 지우 선조가 돌아가신 후 후손들이 어려서 선조기록을 묘지명에 잘못 기재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1072년 기록을 1152년 기록에서 바꿀 수도 없으며 1072년 기록은 고려문종의 왕사로 경덕국사로 추증된 기록과 조부 긍필, 아버지 은부, 형님 충찬에 대한 내용은 고려사 현종실록에도 그 내용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안산김씨 블로그 안산김씨이야기 -- 고려사(현종-문종) 내용을 보시면 됩니다.

 

안산김씨의 상계가 무열왕의 후손이라는 근거는 신라삼성연원보, 경주김씨 족보, 인천이씨 족보, 안산김씨 족보를 종합한 도표를 볼 때 상계기록과 후손들의 세계 기록이 일치함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내용을 종합하여 볼 때 문헌상의 기록을 인정해야 하지만 안산김씨 대종회 차원의 선대에 대한 입장 표명을 존중해야 하기 때문에 대종회의 선대 상계에 대한 결정을 존중해야 할 것입니다.

 

경덕국사(景德國師) 난원(충찬 동생)의 묘지명 (연대 1072년, 문종20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국사의 이름은 난원(爛圓)이고, 속성은 김씨(金氏)이며, 선조는 안산군(安山郡)

사람이다. (1066년, 문종20년 돌아가시다)

돌아가신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긍필(兢弼)이 조부이고, 돌아가신 검교태사

상주국(檢校太師 上柱國)으로 시호가 안평공(安平公)인 은부(殷傅)가 아버지이며, 돌아가신안효국대부인 이씨(安孝國大夫人 李氏)가 어머니이다.

돌아가신 중추사 병부상서(中樞使 兵部尙書)인 충찬(忠贊)이 형이고, 돌아가신

수좌(首座) 홍주(弘疇)가 은사이다.

                         경덕국사 묘지                       김지우 묘지

   

김지우(金之祐 : 1108~1151) 묘지명 (연대 1152년, 의종6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선조는 신라국(新羅國) 원성대왕(元聖大王)의 후손이다.

대왕은 대광(大匡) 김예(金禮)를 낳고,

예는 삼한공신 삼중대광(三韓功臣 三重大匡) 인윤(仁允)을 낳고,

윤은 대자대보 좌복야(大子大保 左僕射) 신웅(信雄)을 낳고,

웅은 사도 내사시랑평장사(司徒 內史侍郞平章事) 인위(因謂)를 낳고,

위는병부상서 중추사(兵部尙書 中樞使) 원황(元晃)을 낳고,

황은 중서령(中書令) 낙랑공(樂浪公) 경용(景庸)을 낳고,

용은 중서시랑평장사 판상서공부사(中書侍郞平章事 判尙書工部事) 인규(仁揆)를 낳고, 규가 지우(之祐)를 낳았다

큰아들은 위위승 동정(衛尉丞同正) 충언(忠彦)이고,

다음 아들은 가장 어리다. 딸은 세 명이 있는데,

큰딸은 예빈주부(禮賓主夫) 황문부(黃文富)에게 시집갔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임신년(의종 6, 1152) 10월 19일에 송림현 백고포(松林縣 白古浦)에 장례 지냈다.

 

왕후 본관 및 가계

왕후ㆍ부인의

시호와 성씨

왕후ㆍ부인의

본관과 가계

자 녀

비 고

원성[용의공혜영목량덕신절순성자성광선]태후 김씨

元城[容懿恭惠英穆良德信節順聖慈聖廣宣]太后 金氏

안산安山. 부 : 시중

侍中 김은부金殷傳

 

덕종德宗ㆍ정종靖宗ㆍ인평왕후仁平王后ㆍ경숙공주景肅公主

延慶院主

延慶宮主

덕종이 왕태후로 높임.

원성태후

원혜[평경]태후 김씨

元惠[平敬]太后 金氏

안산安山. 부 : 시중

侍中 김은부金殷傳

문종文宗ㆍ평양공平壤公 기基ㆍ효사왕후孝思王后

처음 안복궁주安福宮主라 부르다가 연덕궁주延德宮主로 고침. 문종 때 태후로 높임.

원혜태후

원평왕후 김씨

元平王后 金氏

 

안산安山. 부 : 시중

侍中 김은부金殷傳

 

 

효경공주

 

 

원평왕후

 

원순숙비 김씨

元順淑妃 金氏

부 : 평장사平章事

김인위 金因渭

경성왕후敬成王后

 

처음 경흥원주景興院主로 불림


※ 김긍필 식읍 1,500호, 김은부 식읍 1,000호, 경주김씨 김인위 식읍 300호

 

 

김지우 묘지명 해설

 

남당유고 기록을 보면 안산김씨 충찬이후 절손으로 원황이 계대를 이었다고(系子) 볼 수 있는데 김지우 묘지명은 친부(인위)계보로 상계를 기록한 것으로 보이며 인위 윗대 여러대수가 누락되어 있다.


22page

 

? - 억렴 [경순왕의 큰 아버지] -

                    신성[태조의 5비인 신성왕후?] - 안종대왕

? - - 태기 - 긍필 - 은부

                            [김은부는 ? -1017. 현종의 장인]

                      ② 태부 [925년생]

                      ③ 태교 [928년생]

 

? - 유렴 - 태기(경진 920) - 긍필(무신 946) - 은부(?-1017) -

                                충찬(?1036) - 약운(계묘 1003) (원황)[임인 1002

                                ∼1062] - 준국(계해 1023) -

                                경용(10411125) - 인규(?~1142)



시조

1

시조

계대

 

시조(始祖) 긍필 (肯弼,兢)

상서좌복야, 안산현개국후

2

1대손

은부 (殷傅) 호부상서, 상호군, 안산군개국후

3

2대손

충찬 (忠贊) 병부상서, 지중추원사

4

3대손

系子

원황 (元晄) 공부상서, 병부상서


※ 남당 박창화 선생의 안산계 계보가 맞다면 충찬이후 절손으로 원황이 계대를 이었다고

    (系子) 볼수 있겠다.

 

참고로 남당선생은 재야 사학자로 1962년에 세상을 떠나신  분으로 우리 집안과 아무 연고도 없고 고려사 현종의 내용을 필사하면서 현종의 국부(장인 김은부)인 안산계 계보를

허위로 작성할 이유는 없다.

 

남당 선생이본 궁내성 왕실도서관(서릉부)에 근무할 당시에 안산계 자료를 필사하신 것이 확실하다면 신뢰도는 아주 높은 것이다. 


남당유고 - 安山系 - 안산김씨의 초기 가계도

 



 

安山系

 

金台父(乙酉)(黃山(辛巳))[을유는 925년, 신사는 921년] - 黃稻(乙卯)(安宗)[을묘는 955년] - 一宮(辛巳)(因渭)[신사는 981년] - 元冲(甲午[994년])(雪娘) - 延興宮(丁卯)[연흥궁은 정종의 비인 容節德妃다. 정묘년은 1027년. 연흥궁주는 1102년 沒]

 

... 元冲(甲午)(雪娘) - 崇化宮(己巳)[기사는 1029년. 숭화궁주는 1094년 沒]

 

...黃稻(을묘)(安宗) - 二宮(甲申)(殷同)[갑신은 984년] - 元晃(壬寅)[임인은 1002년]

 

...黃稻(을묘)(安宗) - 三宮(己丑)(玄龍)[기축은 989년]- 元弘(戊申)(俊金)[무신은 1008년]

                           - 三宮(己丑)(可道) - 元質(乙巳) [을사는 1005년]

 

黃歸(戊午)(林復) - 林肅(丙子)(梁皐) - 林福

 

黃歸(戊午)(林復) - 波蘭(辛巳)(殷同) - ① 若蓮(丁酉)(玄甲) ② 若松(庚子)(玄世) ③ 若雲(癸卯) (元晃)

 

若雲(癸卯) (元晃) - 俊極(癸亥)

 

可道 - 仙愛(己丑)(玄涉) - 俊今(丁未)

 

? - ㉠ 億廉 [경순왕의 큰 아버지] - 神成[태조의 5비인 신성왕후?] - 安宗大王

 

?- ㉡ 裕(?)廉 - ① 台夔(?)- 肯弼 - 殷傅 [김은부는 ? -1017년. 현종의 장인]

                      ② 台父 [925년생]

                      ③ 台交 [928년생]

 

※ 1975년 세상에 알려진 福興寺景德國師墓誌銘(1072년?)에 의하면,

경덕국사 김난원(金爛圓. 999 - 1066.10.8)의 조부는 兢弼, 아버지는 殷, 어머니는 李氏다.

따라서 위의 기존에 알려진 肯弼은 兢弼의 잘못이다

 

金台交(戊子)(黃山)[무자는 928년] - 殷同(辛酉)(奇璧) [신유는 961년] - ①玄涉(壬午)(柳潤)[임오는 982년]

        ②玄濟(甲辰)(俊仙) [갑진은 1004년]

 

玄濟(甲辰)(俊仙) [갑진은 1004년] - 漢忠

 

玄濟(甲辰)(俊仙) [갑진은 1004년] - ㉠ 俊達(丁巳) [1017년] ㉡ 俊京(庚申) [1020년] ㉢ 俊仙(癸亥)(玄濟) [1023년]

 

俊仙(癸亥)(玄濟) [1023년] - 漢忠

 

金台交(戊子)(黃山)[무자는 928년] - 殷况(甲子)(丁緊(?))[갑자는 964년] - 玄器 (甲 申)(仙甜) [갑신은 984년]- 俊合

 

金台交(戊子)(黃山)[무자는 928년] - 殷平(丁卯)(辛召)[정묘는 967년] - 玄世(庚寅)(若 松)[990년] - 俊興

 

金台交(戊子)(黃山)[무자는 928년] - 黃甜(己巳)(含順)[기사는 969년] - 王錫(乙酉)(紫 羅) [을유는 985년]- 巨福(丁巳) [정사는 1017년]

 

金台交(秦裙) - ①殷錫(壬戌)(羅紬)[임술은 962년] - 玄甲(乙酉)(若蓮) [을유는 985년]

 

②殷吉(乙丑)(白祥)[을축은 965년] - 玄龍(己丑) [기축은 989년]

 

③秦甛(己巳)(可道) [기사는 969년]- 仙甜(戊子)[무자는 988년]

 

金台交(秦仙) -殷京(奇璧) - 玄禮(乙酉)(梁珍)[을유는 985년] - 元述(辛酉) [신유는 1021년]

 

玄禮(乙酉)(柳潤) - 俊德(丁卯) [정묘는 1027년]

 

■■(庚辰= 920년)(■■)(甲申 = 924년) - 金肯弼(戊申)(秦仙)[무신은 946년] - ① 殷悅(黃塞) ②殷傅(李山)

 

①殷悅(黃塞) - 玄同(丁酉)(若雲)[정유는 997년] - 俊福(庚申 = 1020년)

 

②殷傅(李山) - ⒜ 安山(李杉) - 公叶

 

元成(顯) - 德宗, 靖宗, 仁平, 景肅

 

元惠(顯) - 文宗, 平壤, 孝思

 

元平(顯) - 孝敬

 

■■(庚辰)(■■)(甲申) - 常夫人(文保能) - 因渭, 尙琴, 尙融

 

※ 위의 가계도를 기초로, 고려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연대표를 정리하면,

金元冲(994년 출생)

容節德妃(1027년 출생)

崇化宮主(1029년 출생)

金肯弼(946년 출생)...

 

이어서 24쪽 좌측부터 33쪽까지 고려의 관제에 대한 정리글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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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산김씨 세계도

 

시조

2세

(1대손)

3세

(2대손)

4세

(3대손)

5세

(4대손)

6세

(5대손)

7세

(6대손)

8세

(7대손)

9세

(8대손)

김긍필

은부

충찬

원황

경용

인규

지우

충언

안산현

개국후

안산군

개국후

병부상서

공부상서

평장사

좌승선

예빈주부

위위승

동정

문하시중

안종사돈

세딸현종

중추원사

중추원사

판형부사

이부상서

선경부사인

이후 벼슬

실전 

판리부사

상서좌복야

호부상서

우산기상시

병부상서

문하시중

문하성지사

합문지후

 

낙랑군

식읍1500

상호군

식읍1000

지중추원사

 

낙랑공

식읍1000

참지정사

안서도호부 판관

 

충익공

 

 

 

 

 

 

 

 

 

10세

(9대손)

11세

(10대손)

12세

(11대손)

13세

(12대손)

14세

(13대손)

15세

(14대손)

16세

(15대손)

17세

(16대손)

18세

(17대손)

원상

성경

정경

(별장)

(상호군)

 

 

 

 

대제학

진주목사

좌명공신

(상호군)

을신(사직)

맹강(학생)

 

 

 

 

상호군

삼사우사

안산군

(연성군)

(별장)

(대제학)

 

 

 

 

정당문학

의정부사

이조전서

(부정)

 

 

 

 

판삼사사

자헌대부

숭정대부

중추원사

맹전

(사재정)

 

 

 

 

 

 

위정공

중추부사

맹종

(첨정)

 

 

 

 

 

 

 

좌참찬

맹균

(참봉)

 

 

 

 

 

 

 

판중추부사

맹일

(직장)

 

 

 

 

 

 

 

 

맹강

원회

수온

계남

 

 

 

 

승문원

교감

문과장원

수의부위

동지중추

부사

종2품

군관,주부

 

 

 

 

진주강씨

전적

문화유씨

3형제

장남

조헌문하학문

 

 

 

 

맹유

(첨중추)

홍문관교리

 

남원양씨

율곡,성혼강론

 

 

 

(대호군)

맹철

(판서)

부제학

 

 

조헌금산전투참가

 

 

 

 

맹혁

(참판)

4형제

넷째

 

 

이조정랑

한유행장

 

주경

(판서)

이용

(별장)

(판결사)

맹현

(첨지중추

부사)

전주이씨

 

 

청주한씨

 

 

 

 

 

 

 

 

 


 

분파현황

1520년 전후로 14세(13대손)에서 분파되었습니다.

 

 

        o 상호군파    휘 암      (의주,용천) ** 휘(諱) :왕이나 제후 등이 생전에 쓰던 이름

        o 사직공파    휘 을신   (강진)         

        o 학생공파    휘 맹감   (강진,황주)  

        o 대제학공파 휘 지      (합천)         

        o 부정공파    휘 맹린   (포천1동)      

 

        o 사재정공파 휘 맹전   (안산)         

        o 첨정공파    휘 맹추   (한산)         

        o 참봉공파    휘 맹균   (황해)         

        o 직장공파    휘 맹일   (포천)          

        o 교감공파    휘 맹강   (천안)         

        o 첨중추공파 휘 맹유      ?             

        o 판서공파    휘 맹철   (괴산)          

        o 참판공파    휘 맹혁   (포천, 청산) 

 

 

8731

 

 

참고자료

일부 동일한 내용이 문맥흐름상 중복되어 있음

 

김씨 세보

 

 

 신라김씨 시조 정강도 (계림),

 경주김씨 세계,

1세 시조 김알지

17세 태종무열왕

 

 

 

 

 

 

안산김씨 시조는 김긍필(金兢弼)이며, 고려 현종 때 사람으로 대보공 김알지의 32세손이며, 신라 태종무열왕의 17세 직계 후손으로 안산개국후에 봉작되고 벼슬은 상서좌복야이다.

 

 

 

안산김씨 상계의 근거로는 신라삼성연원보, 경주김씨 족보, 인천이씨 족보, 안산김씨 족보를 종합하여 볼 때 상계기록과 후손들의 세계 기록이 일치함을 볼 수 있다.

 

태종무열왕과 경순왕은 김알지의 10대손인 지증왕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므로 즉 같은 조상의 후손이지만 중간 세계에 해당되는 조상을 확실히 알고자 하는 바램으로 조상 찾기에 나선 것으로 판단되며 바람직한 일로서 타의 귀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 위 도표 정정 : 내물왕8세, 복호9세(눌지왕 동생), 습보10세, 지증왕11세

 

 # 아래 오타정정 : 11세 지증왕 22대왕

     


                              원성왕 후손    - - -   신무왕 -  문성왕 - - - - - - 경순왕

 

 

※ 안김 상계 참고자료는

http://blog.daum.net/yescheers 카테고리 신라삼성연원보, 계보연구 (안산김씨) 또는 동 블러그 안산김씨 세계 안산김씨 상조 벼슬소개를 참조바랍니다.

※ 계보연구 경주김씨 계보연구회(2002년) 234페이지 계림김씨 분관연원계보도

 

 

 

 

 

  

간략하게 계보를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16대 태종무열왕 - 17대 문왕 - 18대 대충 - 19대 사인 - 20대 유정 - 21대 내흥

22대 경징 - 23대 영 -2 4대 종유 - 25대 궁일 - 26대 은의 - 27 女 壻 李翰(全州李氏) --- (26대이후 손이 없어 25대부터 다시 시작)

25대 숭일 - 26대 강의 - 27대 경영 - 28대 욱성 - 29대 승흥 - 30대 헌 -

31대 지주 -32대 안산김씨 시조 긍필(兢弼) - 33대 은부(殷傅) - 34대 충찬(忠贊) - 35대 원황(元晃) -36대 경용(景庸) - 37대 인규(仁揆) - 38대 지효(之孝)

 

-32대 백 - 33대 척 -34대 직휘 - 35대 용도 - 36대 충림 - 37대 악. - 38대 순손,우손

-39대 섬한 * 32대에서 34대까지 빈칸* (-35대 원황-36대 경용 - 37대 인규-이지언)

 

안산김씨 족보 : 시조 긍필 -은부(안산후)-충찬-원황-경용-인규-지효, 인규壻 이지언

 

※ 安山金氏家乘世譜(全) 安山金氏 6世 仁揆.~(仁川李氏譜 6面)

 

慶州金氏 仁揆-7世-金之孝 ) 李之彦

 

安山 金仁揆의 壻 李之彦은 仁川李氏로 妻家를 安山이라 하지

않고 慶州金氏로 族譜에 올라있다. (인천이씨 족보)

 

新羅三姓淵源譜48面

支柱 - 日旦(단) -陟-直輝-用度(評理)-忠霖(左僕射判事副事)-渥-舜孫 ,

禹孫(女 仁川李之彦)의 아랫대는 없음

※ 32世를 耳百으로 誤記했다 (新羅三姓淵源譜의 日旦字(단자))

 

慶州金奈興-慶徵-榮-宗儒- 宮一 - 殷義女李翰 官司空本完山人

24世崇一 - 康義-26世景暎-27世頊成-28世承興-29世獻-30世支柱

-肯,兢弼(安山金氏)-殷傅-忠贊-元晃-景庸-仁揆 安山金氏)- 女李之彦)~新羅三姓淵源譜와  仁川李氏族譜 一致.

 

경주김씨

31대

32대

33대

34대

35대

36대

37대

38대

39대

40대

근거

지주

(支柱)

(日旦)

(陟)

직휘

(直輝)

용도

(用度)

충림

(忠霖)

(渥)

순손,우손

(舜孫,禹孫)

기록

없음

 

三性

淵源譜

빈칸

빈칸

빈칸

원황

(元晃)

경용

(景庸)

인규

(仁揆)

지주

(支柱)

경순왕

(日旦)

은열

(陟)

정구

직휘

(直輝)

계삼

용도

(用度)

한공

충림

(忠霖)

(渥)

순손,우손

(舜孫,禹孫)

섬한

(暹漢)

기록

없음

慶州

金氏

경용

(景庸)

인규

 (仁揆)

인천이씨

시조

2대

3대

4대

5대

6대

7대

8대

9대

근거

이허기

10세손

허겸

허겸

자연

자겸

지언

-

-

-

仁川

李氏

(사위)

김은부

妻家

 경주김

父 인규

인규 子

지효

안산김씨

시조

2대

3대

4대

5대

6대

7대

8대

9대

10대

경순왕

아들

殷說

후손

긍필

(兢弼)

은부

(殷傅)

충찬

(忠贊)

원황

(元晃)

경용

(景庸)

인규 (仁揆)

지효(절손)

지우(之祐)

충언

(忠彦)

김위

(金渭)

원상

(元祥)


 

이러한 기록을 인정하게 되면 안산김씨는 경순왕의 후손이 아닌 태종무열왕의 후손이 되며, 안산김씨 문중에서도 여러 가지로 그 근거를 확인하고 조사 중에 있는 것이다.

 

  28대    29대    30대    31대    32대    33대   34대   35대   36대   37대                  

 경순왕  은열     일      순웅    인위    경용   인규   지우   경주김씨 김지우 묘지명

 경순왕  은열    태화     정구    계삼    한공   경용   인규                      경주김씨 

태종무열왕 - 문주- - - 내흥 - - - -

  욱성    승홍     헌       지주      -         -       -     원황   경용   인규   삼성연원보

                       30대    31대   1세     2세    3세     4세     5세     6세                   

 원성왕 - - -   경순왕   은열   긍필    은부   충찬   원황    경용   인규   안산김씨 

 

경덕국사(景德國師) 난원(충찬 동생)의 묘지명 (연대 1072년, 문종20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국사의 이름은 난원(爛圓)이고, 속성은 김씨(金氏)이며, 선조는 안산군(安山郡)

사람이다. (1066년, 문종20년 돌아가시다)


돌아가신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긍필(兢弼)이 조부이고, 돌아가신 검교태사

상주국 (檢校太師 上柱國)으로 시호가 안평공(安平公)인 은부(殷傅)가 아버지이며, 돌아가신 안효국대부인 이씨(安孝國大夫人 李氏)가 어머니이다.


돌아가신 중추사 병부상서(中樞使 兵部尙書)인 충찬(忠贊)이 형이고, 돌아가신

수좌(首座) 홍주(弘疇)가 은사이다.



김지우(金之祐 : 1108~1151) 묘지명 (연대 1152년, 의종6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선조는 신라국(新羅國) 원성대왕(元聖大王)의 후손이다.

대왕은 대광(大匡) 김예(金禮)를 낳고,

예는 삼한공신 삼중대광(三韓功臣 三重大匡) 인윤(仁允)을 낳고,

윤은 대자대보 좌복야(大子大保 左僕射) 신웅(信雄)을 낳고,

웅은 사도 내사시랑평장사(司徒 內史侍郞平章事) 인위(因謂)를 낳고,

위는 병부상서 중추사(兵部尙書 中樞使) 원황(元晃)을 낳고,

황은 중서령(中書令) 낙랑공(樂浪公) 경용(景庸)을 낳고,

용은 중서시랑평장사 판상서공부사(中書侍郞平章事 判尙書工部事) 인규(仁揆)를 낳고, 규가 지우(之祐)를 낳았다

큰아들은 위위승 동정(衛尉丞同正) 충언(忠彦)이고,

다음 아들은 가장 어리다. 딸은 세 명이 있는데,

큰딸은 예빈주부(禮賓主夫) 황문부(黃文富)에게 시집갔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임신년(의종 6, 1152) 10월 19일에 송림현 백고포(松林縣 白古浦)에 장례 지냈다.


현종의 왕후 본관 및 가계

왕후ㆍ부인의

시호와 성씨

왕후ㆍ부인의

본관과 가계

자   녀

비    고

원성[용의공혜영목량덕신절순성자성광선]태후 김씨

元城[容懿恭惠英穆良德信節順聖慈聖廣宣]太后 金氏

안산安山. 부 : 시중

侍中 김은부金殷傳

 

덕종德宗ㆍ정종靖宗ㆍ인평왕후仁平王后ㆍ경숙공주景肅公主

덕종이 왕태후로 높임.

 

 

원혜[평경]태후 김씨

元惠[平敬]太后 金氏

안산安山. 부 : 시중

侍中 김은부金殷傳

문종文宗ㆍ평양공平壤公 기基ㆍ효사왕후孝思王后

처음 안복궁주安福宮主라 부르다가 연덕궁주延德宮主로 고침. 문종 때 태후로 높임.

원평왕후 김씨

元平王后 金氏

 

 

안산安山. 부 : 시중

侍中 김은부金殷傳

 

 

 

 

 

 

 

 

원순숙비 김씨

元順淑妃 金氏

부 : 평장사平章事

김인위 金因渭

경성왕후敬成王后

 

처음 경흥원주景興院主로 불림


 


해설

김지우 묘지명(1152년)의 붉은 글은 후손들이 상계 조상을 착각

하여 기록된 것이다.

4대조인 고조부 충찬(병부상서)의 여동생 3명이 현종의 부인

(왕후)인 것을 같은 시대 현종의 원순숙비 김씨의 아버지 김인위

로 착각하여 묘지명에 잘못 기록한 것이다.

참고로 지우의 4대조인 경덕국사(충찬 弟) 묘지명(1072년)을

참고하면 간단하게 해결된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신라삼성연원보 

신라삼성연원보 1642년 자료를 1934년 김경대 재발행

연도 등 진위(진실)성 논란으로 족보장사를 하기위해 만든 것이라는 평이  있긴 하였지만 현재 그

기록은 대부분 인정되고 있으며 사실로 나타나고 있음. 일부 성씨에서 기록를 인정하고 있지 않음 

 

이 기록을 인정하지 않는 근거자료 내용은 이글 맨 뒤에 수록합니다. 제가 볼때는  이기록이 1642년자료를 1934년대 재 간행물이냐가 논쟁의 쟁점이 아닌 기록의 진실성에 촛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봅니다.

주장하고 있는 일부기록의 위조가 있다해도 논란이 되는 부분을 제외한 다른 기록과 일치되는 기록은 인정해야 한다고 본다면 자료의 가치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라는 판단입니다. 

 

참고로 여기에 나타난 우리 선조들의 휘(이름)는 1959년  우리 족보에는 없는 원황, 경용, 인규, 인규의 사위 인천이씨 이지언의 기록이 있어 관심있게 보아야 할 부분임. 

이기록의 인정여부에 태종무열왕 후손이냐 아니면 가승대로 경순왕 후손이냐의 판가름이 됩니다. 계속 연구를 해보아야 할 부분입니다.

 

지금도 삼성연원보를 놓고 진본이니 위보니 말들이 많은데 이부분은 경주 김씨네 문제가 아니라 우리역사에 뜻이있는 모든 학자들이 연구하고 검토해야 할 부분이다.

 

위보임을 주장하는 여러 정황을 보면 일부 연호나 지명의 근대표기로 의심되는 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위보라 해서 그 내용 100%가 거짓일 수는 없고 재 간행하는 과정에 수정될 여지는 있는 것이고 아니면 1642년 자료를 재간행한 것이 아닌 1934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여기에 담긴 내용중에는 金나라의 역사를 밝힐 수 있을 뿐만 아니라 淸나라의 역사와도 관계되는 부분이기 때문에 반드시 고증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제 남은 일은 三姓淵源譜에 대하여 진위여부와 담고 있는 내용의 진실성을 고증하고 연구 검토해야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정사에 묻힌 패자의 억울한(날조) 역사는 과연 회복이 가능한 것인가 ? 하는 의문이 생긴다.

 

# 삼성연원보의 진실성 검증 여부에 대한 이야기는 본 블로그 신라김씨 분파현황에 등재되어 있음

김경대 간편

 

 

가운데 왼쪽 아래쪽에 원황, 경용 기록이 보임 

가운데 오른쪽 상단에 경용, 인규, 여 인천 이지언 기록이 보임 

 

 

1997년판 경주김씨 계보연구회 편 (동일한 내용임)

 

2002년 발간김령김씨 이전 족보에 없던 무열왕계 지주 이후 계대 발견 

 

 

 

 

 

  

16대 태종무열왕-17대 문왕-18대대충-19대사인-20대유정-21대奈興

金奈興-22대慶徵-23대榮-24대宗儒-25대宮一 -26대殷義- 27 女 壻 李翰(全州李氏) ---

 (26대이후 손이 없어 25대부터 다시 시작)

 25 崇一  -  26대康義 - 27대景暎 - 28대頊成 - 29대承興 - 30대獻 - 31대支柱

-32대肯弼-33대殷傅-34대忠贊-35대元晃-36대景庸-37대仁揆-38대之孝

-32대 백 -33대 陟 -34대直輝-35대用度-36대忠霖-37대 渥. -38대舜孫,禹孫-39대暹漢

* 32대에서 34대까지 빈칸* (-35대元晃-36대景庸-37대 仁揆-李之彦)

 

 

*安山金氏家乘世譜(全) 安山金氏6世仁揆.~(仁川李氏譜 6面

  慶州金氏 仁揆-7世-金之孝 ) 李之彦


# 安山金仁揆의 壻 李之彦은 仁川李氏로 妻家를 安山이라 하지 않고 慶州金氏로 族譜에 올라있다.


新羅三姓淵源譜48面

支柱 - 日旦 -陟-直輝-用度(評理)-忠霖(左僕射判事副事)-渥-舜孫 ,

禹孫(女 仁川李之彦)의 아랫대는 없음

여기에 32世를 耳百으로 誤記했다 (新羅三姓淵源譜의 日旦字)


慶州金奈興-慶徵-榮-宗儒- 宮一 - 殷義女李翰 官司空本完山人

24世崇一 - 康義-26世景暎-27世頊成-28世承興-29世獻-30世支柱

-肯,兢弼(安山金氏)-殷傅-忠贊-元晃-景庸-仁揆 安山金氏)- 女李之彦 )~新羅三姓淵源譜와

仁川李氏族譜 一致.


 

 광주김씨 지주 분파 발견 광주김씨 족보 (2006년)

 지주 진천김씨 분파 (* 진천김씨는 무열왕계인 주원공의후손으로 사혁이 시조로 되어 있다) 

 

아래자료의 진위여부를 빨리 찾아야 할텐데 걱정만 앞서는 하루입니다. 

 

참고로 오해의 소지가 있을까 하여 적어봅니다.

가승계보는 김알지 - - 지증왕  - - 원성왕 - - 경순왕 - 은열 - 긍필(시조)입니다.
현재까지 밝혀진 문헌상 계보는 김알지 - - 지증왕 - - 태종무열왕 - - - 긍필(시조)입니다.

결론을 말씀드리자면 문헌상의 기록을 인정해야 하겠지만 아직까지는 확실한

근거가 부족하다고 판단하여

명확한 근거자료 확보시 까지 그리고 우리 안산김씨 대종회 차원의 선대에 대한

 공식 입장 표명이 있을때까지는 가승계보대로 경순왕 후손인 것 입니다.

 

○ 안산김씨 세계도

시조

2세

(1대손)

3세

(2대손)

4세

(3대손)

5세

(4대손)

6세

(5대손)

7세

(6대손)

8세

(7대손)

9세

(8대손)

김긍필

은부

충찬

원황

경용

인규

지우

충언

안산개국후

안산개국후

병부상서

공부상서

평장사

좌승선

예빈주부

위위승

동정

문하시중

현종사돈

세딸현종

중추원사

중추원사

판형부사

이부상서

선경부사인

이후 벼슬

실전 

판리부사

상서좌복야

호부상서

우산기상시

병부상서

문하시중

문하성지사

합문지후

 

낙랑군

식읍1500

상호군

지중추원사

 

낙랑공

식읍700

참지정사

안서도호부 판관

 

충익공

 

 

 

 

 

 

 

 

 

10세

(9대손)

11세

(10대손)

12세

(11대손)

13세

(12대손)

14세

(13대손)

15세

(14대손)

16세

(15대손)

17세

(16대손)

18세

(17대손)

원상

성경

정경

 

 

 

 

대제학

진주목사

좌명공신

을신,맹강

 

 

 

 

상호군

삼사우사

안산군

(연성군)

 

 

 

 

정당문학

의정부사

이조전서

맹린

 

 

 

 

판삼사사

자헌대부

숭정대부

중추원사

맹전

 

 

 

 

 

 

위정공

중추부사

맹종

 

 

 

 

 

 

 

좌참찬

맹균

 

 

 

 

 

 

 

판중추부사

맹일

 

 

 

 

 

 

 

 

맹강

원회

수온

계남

 

 

 

 

승문원교감

문과장원

수의부위

동지중추

부사

종2품

군관,주부

 

 

 

 

진주강씨

전적

문화유씨

3형제

장남

조헌문하학문

 

 

 

 

맹유

홍문관교리

 

남원양씨

율곡,성혼강론

 

 

 

맹철

부제학

 

 

조헌금산전투참가

 

 

 

 

맹혁

4형제

넷째

 

 

이조정랑

한유행장

 

주경

이용

맹현

전주이씨

 

 

청주한씨

 

 

 

 

 

 

 

 

 


안산김씨 김긍필의 14세손(13대)에서 분파되었습니다.

(참고자료 안산김씨족보 1776년, 1989년)

        o 상호군파    휘 암      (의주,용천)   ** 휘(諱) :왕이나 제후 등이 생전에 쓰던 이름

        o 사직공파    휘 을신   (강진)         

        o 대제학공파 휘 지      (합천)         

        o 부정공파    휘 맹린   (포천1동)      

 

        o 사재정공파 휘 맹전   (안산)         

        o 첨정공파    휘 맹추   (한산)         

        o 참봉공파    휘 맹균   (황해)         

        o 직장공파    휘 맹일   (포천)          

        o 교감공파    휘 맹강   (천안)         

        o 첨중추공파 휘 맹유                     

 

       o 판서공파    휘 맹철   (괴산)          

 

안산김씨 보책간행 1766년에 이어 1776년 2회째 간행하였습니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안산김씨(安山金氏)항렬표

 ■ 1세부터 24세 안산김씨 항렬 (족보기록)

 ※ 시조 긍필(兢弼)의 25세손부터 족보에 항렬 기록있음

1세 (시조) - ○필(弼) = 시조 안산개국후 상서좌복야 긍필

                                  동생 선필 (연성김씨 시조)

2세(1대손) - ○ ○ = 안산개국후 호부상서, 상호군 은부

3세(2대손) - ○ ○ = 병부상서 충찬, 동생 난원 (경덕국사)

4세(3대손) - ○ ○ = 공부상서, 병부상서, 중추원사 원황

5세(4대손) - 경(景)○ = 문하시중 낙랑공 경용

6세(5대손) - ○ ○ = 이부상서, 문하성지사 인규

7세(6대손) - 지(之)○ = 지효, 동생 합문지후, 판관 지우

8세(7대손) - ○ ○ = 위위승동정 충언

9세(8대손) - ○ ○ = 문하시중, 낙랑군 개국후

10세(9대손) - ○ ○ = 정당문학,판삼사사(삼사최고벼슬 종1품) 원상

11세(10대손) - ○경(慶) = 판서 주경, 진주목사,대제학 성경

12세(11대손) - ○ ○ = 이조판서 연성군(안산군) 정경

13세(12대손) - ○ ○ = 지, 관, 조, 좌참찬, 판중추원사 개, 한, 정

14세(13대손) - 맹(孟)○ = 암, 을신, 맹전, 맹종, 맹균, 맹일, 충의랑,교감 맹강

15세(14대손) - ○ ○ = 문과장원 전적, 부제학

16세(15대손) - ○ ○ = 수의부위 원회

17세(16대손) - ○ ○ = 동지중추부사 수온

18세(17대손) - ○ ○ = 군관, 주부 계남

19세(18대손) - 종(從)○ = 종용, 종호, 종웅, 종서

20세(19대손) - 하(夏)○ = 하주, 하구, 하삼, 하이, 하일

21세(20대손) - ○기(基) = 언기, 수기, 형기, 원기

                       필(必)○ = 필채, 필견, 필명, 필성,

22세(21대손) - 명(命)○ = 명직, 명익, 명윤, 명조

23세(22대손) - 처(處)○ = 처욱, 처간, 처수, 처은

24세(23대손) - ○종(鍾) = 기종, 익종 록종, 응종, 원종, 운종

 

 ■ 1776년 (병신보) 안산김씨 족보 항렬

25세(24대손) - ○원(源)

26세(25대손) - 락(樂)○

27세(26대손) - ○섭(燮)

28세(27대손) - 기(基)○

29세(28대손) - ○진(鎭)

 

■ 1958년 안산김씨 족보 항렬

30세(29대손) - 제(濟)○

31세(30대손) - ○채(采)

32세(31대손) - 응(應)○

33세(32대손) - ○재(在)

34세(33대손) - 종(鐘)○, 의(義)○

35세(34대손) - ○순(淳), ○태(泰)

36세(35대손) - 상(相)○, 재(栽)○

37세(36대손) - ○환(煥), ○걸(杰)

38세(37대손) - 효(孝)○, 규(圭)○

39세(38대손) - ○현(鉉), ○용(鎔)

40세(39대손) - 영(永)○

41세(40대손) - ○식(植)

42세(41대손) - 희(熙)○

43세(42대손) - ○균(均)

44세(43대손) - 련(鍊)○

45세(44대손) - ○수(洙)

46세(45대손) - 동(東)○

47세(46대손) - ○형(炯)

48세(47대손) - 원(遠)○

 

■ 1989년 안산김씨 족보 항렬

49세(48대손) - ○호(鎬)

50세(49대손) - 하(河)○

51세(50대손) - ○주(柱)

52세(51대손) - 성(成)○

53세(52대손) - ○준(埈)

 

 안산김씨

안산김씨 시조는 김긍필(金兢弼)이며, 고려 현종 때 사람으로 대보공 김알지의 32세손이며, 신라 태종무열왕의 17세 직계 후손으로 안산개국후에 봉작

되고 벼슬은 상서좌복야이다.

 

 

그의 아들 김은부는 호부상서, 상호군이며 딸 3명이 고려 현종의 태후 및

왕후가 되어 국구(왕의 장인)로서 안산개국후에 봉작되었고,

 

외손인 덕종, 정종, 문종이 왕에 오르면서 4대 50여년동안 고려시대의

최고 문벌귀족이 되었으며. 김태후 집안(안산김씨)은 대대로 왕실과 혼인

하도록 정해져 고려시대 문벌귀족 가문의 지위를 계속 누리게 되었다.

 

 

안산김씨 김은부의 부인은 인주(인천)이씨 이허겸의 딸로서 인주이씨가

귀족반열에 오르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자연은 이허겸 손자다.

 

 

김은부의 큰아들 충찬은 병부상서 작은아들 난원은 문종의 왕사를 거쳐

경덕국사가 되었으며, 대각국사 의천(문종의 아들)의 스승이 되었다.

 

 

손자 원황은 공부상서, 병부상서 증손 경용은 평장사, 문하시중, 경용의

아들 인규는 이부상서, 후손 위는 문하시중, 그 후손들인 원상과 성경은

대제학 등 대대로 큰벼슬을 지냈으며,

 

 

김은부의 11대 후손 김정경이 이조판서와, 좌명공신으로 안산군(연성군)

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안산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인구수 1만 4975(2000년).

                                   태종무열왕 표준영정 사진

 

 

 

始祖 金閼智(김알지)

 

追尊始祖大王(추존시조대왕) 三國史記(삼국사기)에 따르면 新羅第四代(신라제4대) 昔脫解王(석탈해왕) 九年(9년) 西紀 六五年(서기 65년) 乙丑(을축) 三月四日(3월 4일) 三國遺事(삼국유사)에는 八月四日(8월4일) 밤에 脫解王(탈해왕)이 들으니 慶州(경주)의 雞林(계림)에서 닭의 우는 소리가 들리는지라 왕께서는 사람이 살지 않는 숲속에서 닭이 우는 것을 以上(이상)하게 여기시고 匏公을 보내어 알아보게 하였다.

 

포공이 왕의 命令(명령)을 받고 始林(시림)에 가보니 한 나뭇가지에 조그마한 금빛갈의 櫃(궤)가 걸려있는데 그 아래에는 흰 닭 한 마리가 울고 있었다. 匏公(포공)이 돌아와 王(왕)이 事實(사실)을 아뢰니 王(왕)께서는 곧 사람을 보내어 그 金櫃(금궤)를 가져오게 하고 뚜껑을 열어보니 櫃(궤)속에는 조그마한 사내아이가 들어있었는데 그 모습이 奇異(기이)하였다. 왕께서는 크게 기뻐하시며 臣下(신하)들에게 이르시기를⎡이 어찌 하늘이 나에게 福(복)으로 아들을 내려 주신 것이 아니냐하시고 그 아이를 키우시니 그는 자라면서 聰明(총명)하고 智略(지략)이 뛰어 났다.

 

그래서 王(왕)께서는 그의 이름을 閼智(알지)라고 부르고 金櫃(금궤)에서 나셨다하여 金(김)이라는 姓(성)을 정해주셨다. 이로 말미암아 始林(시림)을 雞林(계림)이라고 고치시고 國號(국호)도 雞林(계림)으로 고쳤다고 傳(전)해온다. 昔脫解王(석탈해왕)의 太子(태자)로서 섭정에 該當(해당)하는 大輔(대보)벼슬에 계셨으나 昔婆娑王(석파사왕)에게 讓步(양보)하시고 王(왕)위에 오르지 않으셨다. 뒤에 始祖大王(시조대왕)이라고 追尊(추존)되셨다. 新羅(신라) 文武王碑(문무왕 비)와 眞澈大師碑(진철대사비)에는 雞林金氏(계림김씨) 始祖星漢王(시조성한왕)이며 文武大王(문무대왕)의 一五代祖(15대조)라고 記載(기재)되어있다.

 

妃 : 麻貞夫人(마정부인)이시니 昔脫解王(석탈해왕)의 王子(왕자) 角干康造(각간강조)의 따님이시다.

 

 

二世

 

子 勢漢(세한)

一名(일명) 勢漢(세한) 舊譜(구보)에는 벼슬이 伊飡(이손)이라 한다. 新羅文武大王碑(신라문무대왕 비)에는 公(공)을 星漢王(성한왕)으로 記載(기재) 하였으니 大王(대왕)으로 追尊(추존)되었음을 알 수 있다. 陵(능)과 妃(비)(비)는 失傳(실전)

 

 

三世

 

子 阿道(아도)

一名(일명) 阿道(아도) 新羅婆娑王(신라파사왕) 三二年辛亥(32년 신해) 西紀一一一年(서기111년)에 벼슬이 波珍飡(파진손) 卽(즉) 波彌干(파미간)에 이르렀다. 逸聖王(일성왕) 十五年(15년) 丙寅年(병인년)에 葛文王(갈문왕)으로 追尊(추존)되셨다 한다. 三國史記(삼국사기)의 朴阿道(박아도)는 金阿道(김아도)의 誤記(오기)인 듯하다.

 

陵(능)과 碑(비)는 失傳(실전)

 

四世

 

子 首留(수류)

一名(일명) 壽留(수류) 祗摩王(지마왕) 十五年丙寅(15년 병인) 西紀一二六年(서기126년)에 首相格(수상 격)인 角干(각간)이 되셨다가 曾孫(증손) 味鄒王(미추왕)때 이르러 大王(대왕)이 되셨다.

 

妃(비) : 失傳(실전)

 

 

五世

 

子 郁甫(욱보)

一名(일명) 郁部(욱부) 逸聖王(일성왕) 戊子(무자) 西紀一二六年(서기126년)에 首相格(수상격)인 角干(각간)이 되셨다가 曾孫(증손) 味鄒王(미추왕) 때 이르러 大王(대왕)으로 追封(추봉) 되셨다.

 

妃(비) : 失傳(실전)

 

 

六世

 

子 仇道(구도)

一名(일명) 仇道(구도) 新羅(신라) 阿達羅王(아달라왕) 一九年(19년) 西紀 一七二年(서기172년) 一月(1월)에 벼슬이 波珍飡(파진손)이셨고 伐休王(벌휴왕) 二年(이년) 西紀一八五年(서기185년) 二月(이월)에는 郁元師(욱원사)인 左軍主(좌준주)가 되시어 召文國(소문국) 지금의 義城(의성)에 있던 나라를 치시었다. 亦是(역시) 伐休王(벌휴왕) 五年(오년) 西紀一八八年(서기188년) 三月(3월)에 百濟軍(백제군)이 母山城(모산성) 지금의 鎭川(진천)을 侵犯(침범)하자 이를 물리치셨으며 또 西紀一八九年(서기189년) 七月(7월)에 百濟軍(백제군)이 新羅(신라)땅 狥壤(순양)에 侵犯(침범) 하였을 때에는 百濟軍(백제군) 五○○如名(500여명)을 殺獲(살획) 하였다. 그러나 西紀一九○年(서기190년) 八月(8월)에 百濟(백제)가 다시 圓山鄕(원산향) 지금의 醴泉(예천)을 襲擊(습격)하고 또 缶谷城(부곡성)을 侵犯(침범)하였을 때에는 報恩(보은)에서 복병에 패하여 缶谷城主(부곡성주)로 좌천 되셨다. 味鄒王(미추왕) 二年(2년) 西紀二六三年(서기263년) 二月(2월)에 葛文王(갈문왕)으로 追尊(추존)되셨고 한다.

 

妃(비) : 述禮夫人朴氏(술례 부인 박씨) 葛文王(갈문왕) 伊漆(이칠)의 따님이시며 祗摩王(지마왕)의 孫女(손녀)이시다. 陵(능) 양위 모두 失傳(실전)

 

 

七世

 

子 末仇(말구)

一諱(일휘) 末屈(말굴) 삼국사기에 따르면 西紀二九一年(서기291년) 儒禮王(유례왕) 八年 一月(8년 1월)에 가장 높은 伊伐飡(이벌손)이 되셨는데 人品(인품)이 곧으며 忠誠(충성)스럽고 또 智略(지략)이 있어 儒禮王(유례왕)께서 자주 찾아오시어 要緊(요긴)한 政事(정사)는 모두 상의 하였다. 奈勿王(내물왕)이 卽位(즉위)에 追尊忠貞大王(추존충정대왕)으로 되심

 

妃(비) : 休禮夫人金氏(휴례부인김씨)

 

 

八世

 

子 奈勿王(내물왕)

一名(일명) 那密(나밀) 新羅(신라) 第 十七代王(제17대 왕)으로 王號(왕호)는 麻立干(마입간)이니 訖解王(흘해왕)께서 아들이 없이 돌아가시자 西紀(서기) 三五六年(356년) 四月(4월)에 王位(왕위)에 오르신 後(후) 많은 善政(선정)을 베푸셨다. 大王二年(대왕2년) 봄에 使者(사자)를 各地方(각지방)에 보내시어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이 없는 늙은이들을 慰問(위문)하게 하시고 그들에게 곡식 석섬씩을 하사 하셨으며 특히 孝道(효도)에 뛰어난 사람들에게는 官職一級(관직일급) 주셨다.

 

王(왕)께서는 친히 始祖廟(시조묘)에 祭祀(제사)를 드리셨다. 九年(9년) 四月(사월)에는 倭兵(왜병)이 크게 侵入(침입)하므로 王(왕)은 풀로 허수아비 數千個(수천개)를 만들게 하시고 옷을 입혀 사람이 兵器(병기)를 들고 있는 것 같이 僞裝(위장)을 吐含山(토함산) 밑에 세우고 勇士(용사) 一千名(1천명)을 솥 고개 지금의 釜峴(부현) 동쪽 벌판에 잠복시켜 두었다가 敵(적)을 全滅(전멸)시켰다.

 

大王(대왕)十一年(11년) 西紀三六六年(서기366년)에는 百濟(백제)와 修交(수교) 하셨고 十七年(17년)에는 使者(사자)를 各地方(각 지방)에 보내시어 곡식을 풀어 가뭄으로 허덕이는 백성을 구제 하셨다. 十八年(18년)에는 百濟(백제)의 禿山城主(독산성주)(永平(영평))가 男女(남녀) 三○○名(삼백명)을 이끌고 降服(항복)했다. 또 二一六年(216년)에는 衛頭(위두)를 前奈(전내)의 符堅(부견)에게 보내어 親善(친선)을 꾀 하셨다. 또 王(왕) 三七年(37년)에는 强盛(강성)한 高句麗(고구려)에 仲父伊湌大西知(중부이찬대서지)의 아들인 四寸實聖(사촌실성)(뒷날 實聖王(실성왕))을 인질로 보내셨다.

 

三○八年(38년) 五月(5월)에 또 倭敵(왜적)이 侵犯(침범)하여 五日(오일)동안이나 金城(금성)을 攻擊(공격)하였으나 城門(성문)을 굳게 담은채 지키고 있자 敵(적)은 退走(퇴주)함에 날샌 騎兵(기병) 二○○名(200명)을 시켜 禿山(독산)(영일지방) 까지 追擊(추격)하여 敵(적)을 全滅(전멸)시켰다. 또 四○年(40년)八月(8월)에는 靺鞨族(말갈족) 以北方(이북방)을侵犯(침범)하였으므로 三陟地方(삼척지방)에서 擊破(격파)시켰으며 四二年(42년)에는 江陵地方(강릉지방)에 旱魃(한발)이 심하므로 大赦令(대사령)을 내리시는 한편 一年(1년)동안 稅金(세금)을 免除(면제)하셨다. 四六年(46년) 西紀四○一年(서기 401년) 七月(7월)에 高句麗(고구려)에 人質(인질)로 가 있던 四寸實聖(사촌실성)이 돌아 왔다.

 

王은 四七年(47년) 西紀四○二年(서기402년) 二月(2월)에 逝去(서거)하셨으나 在位(재위) 四七年(47년)동안 여러 차례의 畏鍼(외침)을 물리치시고 자비로써 百姓(백성)들을 다스리신 聖君(성군)이시었다. 陵(릉)은 三國史記(삼국사기)에 瞻星臺(첨성대)서 남쪽 지금의 慶州(경주)시 교동 14-1번지임

 

妃(비) : 保反夫人金氏(보반부인씨)이니 味鄒王(미추왕)의 공주이시다.

 

 

九世

 

子 卜好(복호)

一名(일명) 寶露實聖王(보로실성왕) 十一年(11년) 西紀 四一二年(서기412년)에 高句麗(고구려)에 人質(인질)로 가셨다가 訥祗王(눌지왕) 二年(2년) 西紀四一八年(서기418년)에 朴堤上(박제상)의 忠誠心(충성심) 지혜로 高句麗(고구려)땅을 무사히 脫出(탈출)하여 還國(환국)하시었다. 訥祗王(눌지왕) 卽位(즉위)한 후 葛文王(갈문왕)으로 追尊(추존)되셨다.

 

妃(비) : 天命夫人(천명부인) 朴氏(박씨) 父角干仁保墓(부각간 인보) 兩位失傳(양위실전)

 

 

十世

 

子 習寶(습보)

一名(일명) 斯寶(사보) 伊湌(이찬)慈悲王(자비왕) 二年(2년) 西紀四五九年(서기459년)에 角干(각간)이 되셨다.

 

妃(비) : 烏生夫人金氏(오생부인) 訥祗王(눌지왕)의 公主(공주) 陵(릉) 兩位(양위)모두 失傳(실전)

 

 

十一世

 

子 智證王(지증왕

諱(휘) 智大路(지대로) 또 位號智哲路(위호지철로) 西紀四三七年生(서기437년생) 王(왕)은 체격이 長大(장대)하시고 膽力(담력)이 남달리 뛰어나셨다. 西紀(서기) 五百年(500년)에 新羅(신라) 第三一代(제 31대) 王(왕)인 炤智王(소지왕)이 아들이 없이 돌아가시자 再從弟(재종 제) (육촌아우)로서 第二二代(제 22대) 王位(왕위)에 오르셨다.

 

왕은 재래의 原始的(원시적)인 文物制度(문물제도)를 一新(일신)하여 새 時代(시대)를 이루셨고 麻立干(마입간)으로 써오던 王號(왕호)를 처음으로 王(왕)이라 부르기 시작하였다. 大王(대왕) 三年(3년)에는 殉葬(순장)을 禁(금)하시고 農事(농사)를 장려하여 소로 밭갈이를 하는 法(법)을 가르쳤으며 四年(4년)에는 國號(국호)를 다시 新羅(신라)로 定(정)하셨습니다. 五年(5년)에는 喪服(상복)입는 법을 定(정)하시고 波里城(파리성) 彌實成(미실성) 珍德城(진덕성) 骨火城(골화성)等(등)을 쌓으셨다. 六年(6년)에는 州郡縣制度(주군현제도)를 定(정)하시고 悉直州郡主(실직주군주)에 異斯夫(이사부)를 任命(임명)하시고 어름을 저장하게 하시고 船舶(선박)의 便(편)을 도모하셨다.

 

七年(7년)에는 饑饉(기근)이 심하므로 倉庫(창고)의 곡식을 풀어 百姓(백성)을 救濟(구제)하시고 서울에 東市(동시)를 設置(설치)하시고 陷穽(함정)을 파서 猛獸(맹수)의 피해를 막도록 하셨다. 十三年(13년) 六月(6월)에는 異斯夫(이사부)를 시켜 智路(지로)로써 干山國간산국(鬱陵鳥(울릉조)을 항복 받아 병합하셨다. 十五年(15년) 西紀五一四年(서기514년)에 逝去(서거)하시니 在任(재임) 十四年(14년)이요 亨壽(형수)가 七十八歲(78세)이시며 諡號(시호)는 智證大王(지증대왕)으로서 新羅(신라)에서 처음이로 諡號法(시호 법)이 始作(시작)되었다.

 

妃(비) : 廷帝王后(정제왕후) 朴氏(박씨) 伊湌登欣(이찬등흔)의 따님 三國史記(삼국사기)에는 牟梁部相公(모양부상공)의 따님으로 記錄(기록)되었다.

 

 

十二世

 

子 眞宗(진종)

벼슬은 角干(각간)

 

妃(비) : 禹貞夫人(우정부인) 朴氏(씨)

 

 

十三世

 

子 欽運(흠운)

벼슬은 舊譜(구보)에는 角干(각간)으로 記錄(기록) 되었으나 三國史記(삼국사기)에는 一吉飡(일길손)이라 記錄(기록)되어있다.

 

妃(비) : 朗元夫人(낭원부인) 朴氏(박씨)

 

 

十四世

 

子 摩次(마차)

一名(일명) 摩叱次(마질차)

벼슬은 匝干(잡간)

 

妃(비) : 河次副因(하차부인) 朴氏(박씨)

 

 

十五世

 

子 法宣(법선)

벼슬은 大阿飡元聖王二年(대아손 원성왕 2년) 西紀(서기) 七八六年(786년)에 玄聖王(왕)으로 追尊(추존)되었다.

 

 

十六世

 

子 義寬(의관)

벼슬은 伊飡(이손) 元聖大王(원성대왕) 二年(2년)에

神英王(신영왕)으로 追尊(추존)되셨다.

 

妃(비) : 英懿王后(영의왕후) 金氏(김씨)이시다.

 

 

十七世

 

子 魏文(위문)

一名(일명) 訓人(훈인) 벼슬은 伊飡(이손)에서 侍中(시중)에 이르셨다. 元聖王(원성왕)이 卽位(즉위) 하자 興平王(흥평왕)으로 追尊(추존)되시었다.

 

妃(비) : 興吉王后(흥길왕후) 金氏(김씨)

 

 

十八世

 

子 孝讓(효양)

벼슬은 角干(각간) 一說(일설)에는 一吉飡(일길손) 元聖王(원성왕) 二年(2년)에 明德王(명덕왕)으로 追尊(추존)되셨다.

 

妃(비) : 繼烏夫人(계오 부인) 朴氏(朴씨) 三國史記(삼국사기)에 依(의)하면 昌近伊己(창근이기)의 따님이라 하였다. 昭文太后(소문태후)로 追尊(추존)되셨다.

 

 

十九世

 

子 元聖王(원성왕)

諱(휘)는 敬信統一新羅(경신통일신라)의 國運(국운)이 기울기 시작하여 태종무열왕계의 왕통이 끊어지고 모반과 弑害(시해)가 연이어 貞元元年(정원원년) 西紀七八五年(서기785년)에 元聖大王(원성대왕)께서 王位(왕위)에 卽位(즉위)하시자 그 뒤는 모두 우리 敬順王大王(경순왕대왕)系(계)가 계승하게 되었다. 第(제)二二代王(22대 왕)인 智證王(지증왕)이 昇退(승퇴)하신뒤 八代(팔대) 二七一年(271년)만에 다시 왕위에 오르신 분은 昭聖王(소성왕) 哀莊王(애장왕) 憲德王(헌덕왕) 興德王(흥덕왕) 僖康王(희강왕) 閔哀王(민애왕) 神武王(신무왕)文聖王(문성왕) 憲安王(헌안왕) 憲康王(헌강왕) 定康王(정강왕) 眞聖女王(진성여왕) 孝恭王(효공왕) 敬順王(경순왕)의 十四(14)王(왕)이요 그 在任年數(재임 년수)는 一三五年(135년)에 이른다.

 

大王(대왕)은 奈勿王(내물왕)의 十二世(12세)孫(손)이시며 太宗武烈王(태종무열왕)系(계)의 마지막 王(왕)이신 惠恭王(혜공왕) 十六年(16년) 西紀七八○年(서기780년) 二月(이월)에 伊飡(이손)金志貞이 叛亂(반란)하였을 때 伊飡(이손) 벼슬에 있었는데 惠恭王(왕)의 命(명)을 받아 上大等(상대등)金良相(김량상)과 合勢(합세)하여 金志貞(김지정)을 목을 베고 亂(난)을 平定(평정)하는데 공을 세우셨다.

 

이 亂離(난리)로 惠恭王(혜공왕)과 王妃(왕비)가 弑害(시해)되었으므로 上大等(상대등) 金良相(김량상)이 王位(왕위)에 卽位(즉위)하시니 이가 곧 三七大(37대) 大王(대왕) 宣德王(선덕왕)이시다. 西紀七八○年(서기780년) 宣德王(선덕왕)이 왕위에 오르시자 元聖王(원성왕)께서는 首相(수상)인 上大等(상대등)이 되셨다.

 

어느날 幞頭(복두)를 벗고 素笠(소립)을 쓰고 十二絃琴(십이현금)을 안고 天官寺(천관사) 우물에 들어가신 꿈을 꾸셨다. 餘三(여삼)이란 사람의 解夢(해몽)에 祈禱(기도)하고 時期(시기)오르기를 기다리셨다. 드디어 西紀七八四年(서기784년) 一月(일월)에 宣德王(선덕왕)이 돌아가셨으나 아들이 없자 群臣(군신)들이 議論(의논)하여 周元(주원)을 다음 王(왕)으로 추대하기호 하였다.

 

그러나 周元(주원)의 집은 閼川(알천)건너 京北(경북) 二十里(20리)에 있었고 때마침 밤중에 많은 비가 내려 閼川(알천) 강물이 넘쳐 周元(주원)이 강물을 건너오지 못하였다. ???????????????���������群臣(군신)들은 오늘의 暴雨(폭우)는 하늘이 주원이 王(왕)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이니 平素(평소) 德望(덕망)이 높고 君王(군왕)의 體貌(체모)를 갖추신 上大等敬信(상대등 경신)을 다음 王(왕)으로 모시자???????????????���������는 與論(여론)이 있어서 다시 群臣會議(군신회의)를 열어 大王(대왕)을 王(왕)으로 推戴(추대)하여 新羅(신라) 제 三八代(38대) 王(왕)이 되셨다.

 

王(왕)께서는 王位(왕위)에 오르시자 始祖(시조)大王(대왕) 文武王祖父(문무왕조부)이신 興平王父親(여평왕 부친) 明德王(명덕왕)을 五廟(오묘)에 모시고 文武百官(문무백관)의 爵位(작위)를 일급씩 높이셨다. 二月(이월)에는 金元全(김원전)을 唐(당)나라에 보내시니 唐(당)나라의 德宗(덕종)은 羅錦綾彩(라금릉채) 三四(34)과 衣服銀盒(의복은합)等(등)의 禮物(예물)을 보내 왔었다. 이해에 가뭄이 들자 六六二三○(66230석의 곡식을 풀어 百姓(백성)들을 救濟(구제)하셨다. 三年(3년)에는 罪人(죄인)을 大赦(대면)하셨고 四年(4년) 봄에는 종전에 활 쏘기로 人材(인재)를 登用(등용)하던 制度(제도)를 고치시어 讀書三品制(독서3품제)로써 人材(인재)를 뽑으니 春秋左氏傳禮記文選(춘추좌씨전예기문선)을 읽어 能通(능통)하고 論語孝經(논어효경)에 밝은 사람을 上品(상품)으로 하고 曲藝論語孝經(곡예논어효경)을 읽은 사람을 하품으로 하였다.

 

이것이 東方科擧制度(동방과거제도)의 始初였다. 詩傳書傳春秋禮記周易史記漢書後漢書(시전서전춘추예기주역사기한서후한서)와 諸子百家書(저자백가서)에 能通(능통)한 사람은 特別(특별)히 拔擢(발탁)하였고 이해에 가뭄이 심하였으므로 全國(전국)에 사람을 보내시어 按撫(안무)하셨다. 五年(5년)에 가뭄이 심하여 國庫(국고)를 풀어 救恤(구휼) 하셨고 六年(6년)에는 碧骨堤(벽골제)를 增築(증축)하여 농사를 장려 하셨다. 또 같은 해 五月(5월)에는 곡식을 풀어 廣州(광주)와 公州(공주)에 굶주린 百姓(백성)을 救濟(구제)하셨다. 七月(칠월)에는 太子(태자) 仁謙(인겸)을 잃은 慘慽(참척)을 당하시고 太子(태자)에게 惠忠(해충)이란 詩號(시호)를 내리셨다. 또 前侍中伊飡悌恭(전시중이손제공)이 謀叛(모반) 하므로 잡아 죽이셨다.

 

惠忠太子(혜충태자)의 아드님 大河飡俊邕(대하손준옹)을 侍中(시중)으로 삼으시고 八年(8년) 五月(오월)에는 王子(왕자) 義英(의영)을 太子(태자)에 奉(봉)하셨으나 十年(10년) 또 太子(태자)를 잃으셨다. 또 同年(동년) 七月(7월)에는 奉恩寺(봉은사)를 세우셨고 十一年(11년) 一月(1월)에는 惠忠太子(혜충태자)의 아드님 俊邕(준옹)을 태자로 奉(봉)하셨다.

 

또 이해 四月(4월)에 旱魃(한발)이 심하여 王(왕)께서 친히 죄수를 다스리시니 六月(6월)에 비가 내렸다. 十二年(12년) 봄에는 饑饉(기근)이 들고 疾病(질병)이 流行(유행)하여 倉庫(창고)를 풀어 救濟(구제)하시었다. 十四年(14년) 西紀(서기) 七九八年(798년) 三月(3월)에 望德寺(망덕사)의 두 塔(탑) 서로 마주쳤는데 이해 十二月(12월) 二十九日(29일)에 王(왕)께서 돌아가셨으므로 元聖(원성)이라는 諡號(시호)하고 遺命(유명)에 따라 奉德寺(봉덕사) 南(남)쪽에서 火葬(화장)하였다. 在位(재위)十四年(14년)이시다. 王(왕)께서는 이 처럼 文治(문치)에 뛰어나신 英主(영주)이셨는데 窮達之辯(궁달지변)으로 친 히 身空訶腦歌(신공가뇌가)를 지으셨다.

 

妃(비) : 蓮達花夫人(연달화 부인) 淑貞王后金氏(숙정왕후 김씨) 角干(각간) 金神述(김신술)의 따님이시다.

 

 

二十世

 

子 禮英(예영)

一名(일명) 벼슬은 角干(각간)에 이르셨고 孫子(손자)이신 神武王(신무왕)이 王位(왕위)에 卽位(즉위)하시어 惠康王(혜강왕)으로 追尊(추존)하셨다.

 

妃(비) : 順成太后(순성태후) 金氏(김씨) 大河干(대하간) 金神述(김신술)의 따님이시다.

 

 

二十一世

 

子 均貞(균정)

追尊(추존) 成德王(성덕왕) 西紀八一八年(서기818년)(憲德王(헌덕왕) 十年(10년) 봄에 侍中(시중)이 되셨다. 憲德王(헌덕왕) 十四年(14년) 三月(3월)에 侍中(시중) 金憲昌은 西紀七八五年(서기785년)에 자기 아버지 周元(주원)이 王位(왕위)에 卽位(즉위)하지 못하니 대신 元聖王(원성왕)이 王位(왕위)에 卽位(즉위)하시니 怨恨(원한)을 품고 있었다.

 

그는 菁州都督(청주도독)을 거쳐 態津州都督(태진주도독) 지금의 公州(공주)이 되었을 때 公州(공주)에서 叛亂(반란)을 일으켜 國號(국호)를 長安國(장안국)이라하고 年號(년호)를 慶雲元年(경운 원년)으로 定(정)한 뒤 光州(광주) 全州(전주) 晋州(진주) 尙州(상주) 都督(도독)을 하니 忠州(충주) 淸州(청주) 金海(김해)等(등)의 벼슬아치와 各(각) 고을 守令(수령)들이 服屬(복속)하였다. 晋州都督(진주도독) 向英(향영)은 몸을 빼서 密陽(밀양)으로 逃亡(도망)하고 慶州(경주) 春川(춘천) 梁山(양산) 平壤(평양) 原州(원주) 等地(등지)에서는 먼저 憲昌(헌창)의 叛亂(반란)을 알고 軍士(군사)를 단속하여 守備(수비)하였다.

 

十八日(18일)에 全州將士(전주장사) 崔雄(최웅)이 서울로 逃亡(도망)하여 이 事實(사실)을 報告(보고) 하였다. 이에 憲德王(헌덕왕)은 將軍(장군) 八名(8명)을 내어 王都八方(왕도팔방)을 守備(수비)한 後(후)에 一吉飡張雄(일길손장웅)을 先發(선발)하고 뒤이어 衛恭(위공)과 悌邕(제옹)을 보내고 伊飡均貞公(이손균정공)과 그 아드님 祐徵(우징)과 匝干(잡간) 雄元(웅원)에게 三軍(삼군)을 掌握(장악)하게하여 이를 막아 치도록 하였다.

 

伊飡均貞公(이손균정공)께서는 이 憲昌亂(헌청난)의 官軍總司令官(관군총사령관)이 되시어 이를 征伐(정벌) 하셨다. 伊飡均貞公(이손균정공)께서는 敵軍(적군)을 屋山(옥산)에서 맞아 이를 擊滅(격멸)시키시고 諸將(제장)과 더불어 全軍(전군)을 指揮(지휘)하여 公州(공주) 고마나루(態津(태진))에 이르러 敵(적)과 싸워 많은 敵(적)을 斬獲(참획)하고 大勝利(대승리)를 거두었다. 憲昌(헌창)은 겨우 몸을 피하여 公州城(공주성) 안으로 들어가 굳게 지키므로 官軍(관군)은 城(성)을 包圍(포위)하고 十日(10일)동안 城(성)을 攻擊(공격)하여 城(성)이 陷落(함락)하게 되자 憲昌(헌창)은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을 알고 自殺(자살)하니 드디어 城(성)은 陷落(함락)되고 叛亂(반란)은 平定(평정)되었고 敵(적) 二三九명(239명)을 誅殺(주살)하였다.

 

흥덕대왕(興德大王) 十年(십년) 西紀八三五年(서기835년) 河飡(하손)으로서 上大等(상대등)에 오르셨다. 興德大王(흥덕대왕)이 돌아가심에 아드님 祐徵(우징)(神武王(신무왕))조카 禮徵(예징) 및 金陽(김양)의 도움으로 王位(왕위)에 오르시려 하였으나 조카 金悌隆(김제륭)(僖康王(희강왕))이 侍中(시중) 金明(김명)(閔哀王(민애왕))等(등)의 도움을 받아 王(왕)이 되려하였으므로 宮中(궁중)에 들어가 서로 싸우다가 (패하여 戰死(전사)하셨다. 이 싸움에 金陽(김양)은 화살에 맞았다. 後日(후일) 아드님 祐徵(우징)(神武王(신무왕))께서 反正(반정)하여 王位(왕위)에 오르시자 成德王(성덕)으로 追尊(추존) 되셨다.

 

妃(비) : 眞嬌夫人(진교부인) 憲穆太后(헌목태우) 朴氏(박씨)

 

女:貴勝夫人(귀승부인)

 

憲德王妃(헌덕왕비)

 

 

二十二世

 

子 神武王(신무왕)

諱(휘) 祐徵(우징) 八二二年(822년) 四月(사월) (憲德王十四年(헌덕왕 14년))에 金憲昌(김헌창)이 亂(난)을 일으켰을 때 大河飡(대하손)으로 아버님均貞公(균정공)과 함께 三軍(삼군)을 指揮(지휘)하여 공주 금강고마나루(公州錦江態津)에서 크게 싸워 敵(적)을 무찌르고 大勝利(대 승리)를 거두어 亂離(난리)를 平定(평정)한 功勞(공로)가 있었다. 西紀八二八年(서기828년) 一月(일월)에는 大河飡(대하손)으로서 侍中(시중)이 되셨다가 西紀八三一年(서기831년)(興德大王六年(흥덕대왕6년)) 一月(일월)에는 侍中(시중)을 免(면)하셨다.

 

西紀八三四年(서기834년)(興德大王九年(흥덕대왕9년)) 一月(일월)에 다시 侍中(시중)이 되셨으나 다음해 西紀八三五年(서기835년) 二月(이월)에 아버님 均貞公(균정공)(追尊成德王(추존성덕왕))께서 上大等(상대등)이 되시어 入相(입상)하시므로 侍中(시중) 벼슬을 辭任(사임)하셨다가 西紀八三六年 (서기836년) 十二月(12월)에 興德王(흥덕왕)이 돌아가시자 아버님 均貞公(균정공)께서 王位(왕위)에 오르시려 하므로 金陽(김양)과 더불어 아버님을 도왔으나 亦是(역시) 王位(왕위)를 노리는 悌隆(제륭)(僖康王(희강왕)과 宮中(궁중)에서 對決(대결)하여 싸운 結果(결과) 敗(패)여 아버님은 戰死(전사) 하셨으므로 神武王(신무왕)께서는 敗走(패주)하셨다.

 

이에 競爭者(경쟁자)인 (僖康王(희강왕)이 新羅(신라) 第四十三代(제43대) 王位(왕위)에 올랐다. 西紀八三七年(서기837년)(僖康王二年(희강왕2년)) 四月(사월)에 아버님 均貞公(균정공)께서 失敗(실패)하여 怨望(원망)했다는 理由(이유)로 僖康王(희강왕)편인 金明(김명), 利弘(리홍)等(등)이 謀害(모해)한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惑禍(혹화)가 미칠까 두려워 五月(오월)에 家族(가족)을 거느리고 黃山津口(황산진구)로 避(피)하셨다. 그곳에서 배를 타시고 淸海鎭(청해진)으로 가시어 淸海鎭(청해진) 大使弓福(대사궁복)에게 依託(의탁)하셨다. 六月(6월)에는 姑從妹夫(고종매부)인 禮徵(예징)과 河飡良順(하손량순)이 亦是(역시) 敗(패)하여 淸海鎭(청해진)으로 王(왕)을 찾아 依持(의지)하였다.

 

마침내 僖康王(희강왕) 三年(3년) 西紀八三八年(서기838년) 에는 僖康王(희강왕)편에서 僖康(희강)을 세우고 均貞(균정)을 敗死(패사)케한 金陽(김양), 利弘(리홍)等(등)이 反亂(반란)을 일으켜 僖康王(희강왕)은 自決(자결)하고 金明(김명)이 스스로 王位(왕위)에 오르니 四十四代(44대)閔哀王(민애왕)이다. 閔哀王(민애왕) 二年(2년)西紀八三八年(서기838년)二月(이월)에는 먼저 均貞公(균정공)을 도와 僖康王(희강왕)과 싸우다가 화살을 맞고 失敗(실패)하였던 金陽(김양)이 兵士(병사)를 募集(모집)하여 淸海津(청해진)으로 王(왕)을 찾아 뵈었다. 이에 神武王(신무왕)께서는 閔哀王(민애왕)이 簒位(찬위)하였다는 말을 듣고 淸海鎭大使弓福(청해진대사궁복)에게 이르시기를 ???????????????���������金明(김명)이 임금을 殺害(살해)하고 스스로 王(왕)이되어 利弘(리홍)이 軍部(군부)를 枉殺(왕살)하였으니 같은 하늘아래서 살 수 없다.

 

원하건데 將軍(장군)의 軍士(군사)를 빌려서 君父(군부)의 怨讐(원수)를 갚을까한다???????????????���������하니 弓福(궁복)이 이를 快(쾌)히 承諾(승낙)하고 軍士(군사) 五千名(5000명)을 주면서 그의 親知鄭年(친지정년)을 시켜 軍隊(군대)를 統率(통솔)하여 反亂(반란)을 平定(평정)하도록 하였다. 이에 그해 十二月(12월)에 大王(대왕)께서는 金陽(김양)을 平東將軍(평동장군)으로 삼으시고 閻長張弁鄭年(염장장변정년), 駱金(낙금), 張建英(장건영), 李順行(이순행) 等(등)과 더불어 軍士(군사)를 거느리시고 武州鐵冶縣(무주철야현)에 이르러셨다. 閔哀王(민애왕)은 大監金敏周(대독김민주)를 시켜 맞아 싸우게 하였다.

 

大王(대왕)께서는 駱金(낙금)과 李順行(이순행)을 보내시어 騎兵(기병) 三千名(3000명)으로 突擊(돌격)하니 殺傷(살상)이 太半(태반)이었다. 다음해 一月(일월)에 밤낮으로 行軍(행군)하여 大邱(대구)벌에 이르니 閔哀王(민애왕)은 이소식을 전해듣고 伊飡大昕(이손대흔)等(등) 將兵(장병)으로 하여금 막게하였다. 그러나 大王(대왕)의 軍(군)이 싸워서 크게 이기고 閔哀王(민애왕)편의 軍士(군사)는 過半數(과반수)를 잃었다.

 

閔哀王(민애왕)은 서쪽 郊外(교외)의 큰 나무아래에 있었는데 左右(좌우)에 있던 閔哀王(민애왕)의 殘黨(잔당)을 깨끗이 掃蕩(소탕)하였다. 이리하여 西紀八三九年(년)(서기839년) 四月(4월) 二十六日(26일) 禮徵(예징)等(등)의 推戴(추대)를 받아 王位(왕위)에 오르시니 新羅(신라) 第四十五代(신라 제 45대) 王(왕)께서는 卽位(즉위)하시자 先祖(선조)이신 伊飡禮英公(이손예영공)을 追尊(추존)하여 惠康王(혜강왕)으로 封(봉)하시고 先考(선고)이신 均貞公(균정공)을 成德大王(성덕대왕)으로 追尊(추존)하고 모후를 憲穆太后(헌목태후)로 높혔다. 王子慶膺(왕자경응)을 太子(태자)로 冊封(책봉)하시고 淸海津大使弓福(청해진대사궁복)을 感義軍使(감의군사)에 封(봉)하시고 食邑二千戶(식읍2000호)를 내리셨다.

 

한편 利弘(리홍)은 두려운 나머지 妻子(처자)를 버리고 산속에 숨었으나 騎士(기사)를 보내어 斬殺(참살)하였다. 神武王(신무왕)께서는 전에 淸海鎭大使弓福(청해진대사궁복)에게 依託(의탁)하고 또 弓福(궁복)의 軍士(군사)를 빌릴 때 장차 王位(왕위)에 오르면 弓福(궁복)의 딸을 王妃(왕비)로 삼겠다고 約束(약속)을 한바있어 王位(왕위)에 오르신뒤 弓福(궁복)의 딸로서 王妃(왕비)를 삼겠다고 하였으나 여러 臣下(신하)들이 諫(간)하기를 ???????????????���������弓福(궁복)은 出身(출신)이 徵賤(징천)하니 그 딸로서 王妃(왕비)를 삼는 것은 옳지못하다 ???????????????���������고 挽留(만류)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해 七月(7월)에 王(왕)께서는 不幸(불행)하게도 逆徒(역도)인 利弘(리홍)의 화살에 등을 맞으신 꿈을 꾸시고 등창이 생겨서 苦生(고생)하시다 가 十一月(11월) 二十一日(21일)에 돌아가셨다.

 

陵(능) 경주 제형산 북쪽 동방리

 

妃(비) : 貞從太后(정종태후) 朴氏(박씨)의 따님이시다.

 

 

二十三世

 

子 文聖王(문성왕)

諱(휘) 慶膺(경응) 西紀(서기)八三九年(서기839년) 七月(칠월) 神武王(신무왕)의 뒤를 이어 제사십육대 왕위에 오르셨다. 왕위에 오르시자 罪人(죄인)을 大赦(대사)하시고 禮徵(예징)을 上大等(상대등)으로 하시고 淸海鎭大使弓福張保皐(청해진대사궁복장보고)는 일찍이 ???????????????���������神考(신고)를 도와 先祖(선조)의 巨賊(거적)을 討伐(토벌)하였으니 어찌 그 功勞(공로)를 잊으랴???????????????���������하시고 鎭海(진해)將軍(장군)으로 삼고 兼(겸)하여 衣服(의복)을 下賜(하사)하셨다.

 

父王(부왕)이신 神武王(신무왕)께서 張弓福(장궁복)의 약속에 따라 七年(칠년) 三月(삼월)에 弓福(궁복)의 딸을 次妃(차비)로 맞으려하니 廷臣(정신)들이 諫(간)하기를 ???????????????���������夫婦(부부)의 道(도)는 사람의 論理(논리)인 故(고)로 夏禹(하우)는 塗山(도산)을 아내로 맞아 興(흥)하였고 殷湯(은탕)은 㜪(신)을 맞아 昌盛(창성)하였고 周幽王(주유왕)은 褒姒(포사)로 인하여 國難(국난)이 일어났으니 國家(국가)의 興亡(흥망)이 이와 같아 삼가지 않을 수 없나이다. 張弓福(장궁복)은 섬사람이온데 어찌 그의 딸이 王妃(왕비)가 되오리까하므로 그 計劃(계획)은 그만 두시었다. 弓福(궁복)은 자기 딸이 王妃(왕비)가 되지 못한데 크게 怨恨(원한)을 품고 王(왕)八年(년) 西紀八四六年 (서기846년) 봄에 逆賊(역적)을 謀議(모의)하니 朝廷(조정)에서는 이를 平定(평정)하려 하였으나 後患(후환)이 있을까 두려워하였다.

 

그렇다고 그대로 둘 수도 없어서 어찌 할 바를 몰랐다. 武州(무주)사람 閻長(염장)이란 勇士(용사)가 이 말을 듣고 아뢰기를 ???????????????���������朝廷(조정)에서 許諾(허락)하여 주시다면 小臣(소신)이 張弓福(장궁복)을 除去(제거) 하겠나이다???????????????���������하니 王(왕)께서는 이를 許諾(허락)하시었다. 閻長(염장)은 淸海鎭(청해진)의 張弓福(장궁복)에게로 가서 智略(지략)을 써서???????????????���������나라를 背反(배반)하여 張弓福(장궁복)에게 依託(의탁)하는 것처럼 꾸며 그를 歡迎(환영)하는 宴會席上(연회석상)에서 술 취한 張弓福(장궁복)을 찔러 죽였다.

 

王(왕)九年(9년) 二月(이월)에는 平議殿(평의전)과 臨海殿(림해전)을 修理(수리)하셨고 十一月 九日(11월 9일)에는 伊飡金式(이손김식) 等(등)의 謀叛(모반)을 平定(평정)하시고 十二年(12년)에는 死刑囚(사형수)의 赦免令(사면령)을 내리시고 十三年(십삼년) 二月(이월)에는 淸海鎭(청해진)을 없애고 그곳의 百姓(백성)들을 碧骨郡(벽골군)으로 移住(이주)하게 하셨으며 阿飡元弘(아손원홍)이 佛經(불경)을 가지고 왔으므로 王(왕)께서는 郊外(교외)까지 나가시어 이를 맞으셨다.

 

十四年(14년) 七月(칠월)에는 鳴鶴樓(명학루)를 修理(수리)하시고 十七年(17년) 一月(1월) 봄에는 使臣(사신)을 보내시어 西南州郡(서남주군)의 百姓(백성)들을 慰問(위문)하시었다. 王(왕)께서는 이와 같이 百姓(백성)들을 사랑하시고 文化財(문화재)를 아끼시는 賢君(현군)이었으나 三年(3년) 봄에는 一吉飡元弼(일길손원필)이 謀反(모반)하다가 逃亡(도망)했고 八年(8년)에는 張弓福(장궁복)이 謀反(모반)하려 했고 九年(9년) 五月(오월)에는 良順(량순)等(등)이 謀反(모반)하다가 伏誅(복주)되었고 伏誅(복주)되었고 十年(십년) 九月(구월)에는 伊飡金式(이찬김식)等(등)이 謀反事件(모반 사건)을 다 平定(평정)하시었다. 王(왕)十九年(19년) 丁丑(정축) 西紀八五七年(서기857년) 九月(구월)에 王(왕)께서는 病患(병환)이 드시어 ???????????????���������과인은 不敏(불민)한 사람으로 높은位(위)에 있어 위로는 하늘에 죄를 얻을까 두렵고 아래로는 民心(민심)을 잃을까 근심된다.

 

조석으로 조심조심하여 마치 살얼음을 밟은 것 같았는데 여러 臣下(신하)들이 左右(좌우)에서 補佐(보좌)하여 社稷(사직)에 辱(욕)된 일은 없었으나 不幸(불행)하게도 病(병)든지 十餘日(10여일)이 되어도 病勢(병세)는 더하고 精神(정신)이 昏迷(혼미)하여 아침이슬과 같이 쓰러질까 두렵도다. 나라의 大業(대업)은 임금이 없어서는 아니 되며 모든 政事(정사)는 잠시라도 없앨 수가 없는 것이다.

 

舒弗邯誼靖(서불감의정)은 先王(선왕)의 孫子(손자)이시고 寡人(과인)의 叔父(숙부)로서 孝友明敏(효우명민)하고 寬厚仁慈(관후인자)하여 오래도록 輔政(보정)하였으니 이분을 모시면 위로 祖宗(조종)을 받들고 아래로는 蒼生(창생)을 鎭撫(진무)할만 하여 무거운 짐을 풀어 賢德(현덕)에게 맡기고자하니 어찌 恨歎(한탄)하리오. 항차 生死始終(생사시종)은 萬物(만물)의 大期(대기)요 壽命長短(수명장단)은 人命(인명)의 常分(상분)이니 죽는 사람은 常理(상리)에 이른 것이므로 죽는 사람을 과히 슬프 하지 말 것이요 모든 臣下(신하)들은 힘과 忠誠(충성)을 다하여 죽어가는 사람을 보내고 살아 있는 사람을 섬김에 어그러짐이 없도록 하라. 이 뜻을 국내에 밝혀 알게 하라???????????????���������하시고 西紀八五七年(서기857년) 九月(구월) 七日(칠일)에 돌아가시니 在任(재임)十九年(19년)이었다. 諡號(시호)는 崇德興文之文(숭덕흥문지문)이요 行花知天之聖(행화지천지성)이라하여 文聖大王(문성대왕)으로 정하셨다.

 

陵(능) : 慶州孔崔趾(경주 공최지)에 있다.

 

妃(비) : 昭明王后(소명왕후) 朴氏(박씨) 伊飡魏昕(이손위흔)의 따님이시다.

 

 

二十四世

 

子 安(안)

三國史記(삼국사기)에는 父王(부왕)이신 文聖王(문성왕) 九年(9년) 西紀八四七年(서기847년) 王子(왕자)를 太子(태자)로 冊封(책봉)하였다고 하고 十四年(14년) 十一月(11월)에는 王太子(왕태자)께서 돌아가셨다고 記錄(기록)되어 있으나 太子(태자)인 王子(왕자)는 이 어른이 아닌 듯하다. 憲安王(헌안왕)이 王位(왕위) 오르자 伊飡(이손)에서 首相(수상)인 上大等(상대등)이 되시었다.

 

妃(비) : 元人夫人(원인부인) 朴氏(박씨)

 

陵(능) : 失傳(실전)

 

 

二十五世

 

子 敏恭(민공)

憲康王(헌강왕) 六年(6년) 西紀八八○年(서기880년) 二月(이월)에 이손(이손)으로서 乂謙(예겸)의 뒤를 이어 侍中(시중)이 되셨다. 시중으로 계실 때는 太平聖代(태평성대)를 누리고 있을 때인데 西紀八八○年(서기880년) 九月(구월)에 王(왕)께서는 左右群臣(좌우군신)들과 함께 月上樓(월상루)에 오르시어 四方(사방)을 觀望(관망)하셨는데 서울 지금의 慶州(경주)의 民家(민가)가 줄지어 늘어섰고 音樂(음악) 소리가 끊이지 않으므로 王(왕)께서 敏恭(민공)께 이르시기를 내가 들은 건데 지금 百姓(백성)의집 들은 모두 기와로 덮었고 짚으로는 덮지 않는다고 하며 밥을 짓는 데는 숯을 쓰고 나무를 때지 않는다고 하니 사실이냐?고 묻자

 

敏恭公(민공공)께서 대답하여 아뢰기를 小臣(소신)도 그와 같은 말을 들었사온데 그것은 陛下(폐하)께서 卽位(즉위)하신 以來(이래)로 天地陰陽(천지음양)이 잘 調和(조화)가되고 風雨順調(풍우순조)로와 해마다 豊年(풍년)이 들어 백성들은 衣食(의식) 걱정이 豊足(풍족)하고 國境(국경)은 別(별)일이 없으므로 市井(시정)에서는 모두들 기뻐하오니 이는 聖德(성덕)의 所致(소치)이옵니다라고 하시니 王(왕)은 매우 기뻐하시면서 이는 실로 卿(경)들의 힘이지 어찌 朕(짐)의 德(덕)이리오라 하셨다고 한다.

 

 

二十六世

 

子 實虹(실홍)

諱(휘) 仁慶(인경) 벼슬은 角干(각간) 또는 舒弗翰(서불한)이시다. 三國史記(삼국사기)孝女知恩(효녀지은)篇(편)에 따르면 孝宗(효종)의 아버님 諱字(휘자)가 仁慶(인경)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實虹(실홍)과 仁慶(인경)은 同一人異名(동일인이명)이다. 敬順王(경순왕) 本紀(본기) 및 신도비명(神道碑銘)에 보면 後唐天成(후당천성) 二年(2년) 西紀九二七年(서기927년)에 卽位(즉위)하시어 祖考實虹(조고실홍)은 懿興王(의흥왕)으로 考孝宗(고효종)은 神興王(신흥왕)으로 追尊(추존)하셨다고 記錄(기록)되어 있다.

 

 

二十七世

 

子 孝宗(효종)

三國史記(삼국사기)孝女知恩(효녀지은)篇(편)에 依(의)하면 公(공)께서는 少年時節(소년시절)에 花郞(화랑)으로 계실 때 그 무리가 千餘名 (1000여명)에 이르렀고 孝女知恩(효녀지은)을 종으로 샀던 주인에게 그 몸값 십여섬을 변상해주고 지은이로 하여금 奴隸(노예)를 免(면)하게 하여주고 또한 粗(조)백섬과 衣服(의복)을 내리셨다. 이 말을 들은 眞聖女王(진성여왕)께서 그 오빠인 憲康王(헌강왕)의 公主(공주)를 公(공)에게 중매하시었다고 한다. 大阿飡(대아손)으로서 侍中(시중)이 되셨고 뒤에 伊飡(이손)으로 昇進(승진)하셨다.

 

妃(비) : 桂娥(계아)夫人(부인) 金氏(김씨)이니 憲康王(헌강왕)의 따님이시다.

 

 

二十八世

 

子敬順王(경순왕)

 

諱(휘) 傳(전) 西紀八九七年(서기897년) 七月(칠월)에 誕生(탄생)하셨고 西紀九二七年(서기927년) 十一月(11월)에 姨從(이종)이신 景哀王(경애왕)의 뒤를 이어 新羅(신라) 第五十六代(제56대) 王位(왕위)에 오르셨다. 第五十一代(제51대) 王(왕)인 眞聖女王(진성여왕)의 失政(실정)으로 盜賊(도적)이 일어나고 나라안이 群雄割據(군웅할거)로 어지럽게 되자 眞聖女王(진성여왕)은 十一年(11년)에 引責(인책)하여 그 庶姪(서질)인 孝恭大王(효공대왕)에게 讓位(양위)하였다.

 

그러나 孝恭大王(효공대왕)의 代(대)에도 弓裔(궁예)와 甄萱(견훤)의 勢力(세력)이 漸漸(점점)커지기만하고 孝恭大王(효공대왕)은 아드님이 없이 돌아가셨으므로 사람들이 孝恭大王(효공대왕)의 妹夫(매부)이고 新羅(신라) 第八代(제8대)大王(대왕) 阿達羅尼師令(아달라니사령)의 먼 後孫(후손)인 朴景暉(박경휘)를 세워 王(왕)을 삼으니 이가 곧 新羅第五十三代(신라 제53대) 王(왕) 神德王(신덕왕)이요 朴氏(박씨)로서는 七二八年(728년)만에 비로소 王位(왕위)에 오른 셈이다. 이 神德王(신덕왕)이 돌아가시자 큰아드님 景明王(경명왕)이 王位(왕위)에 오르시고 그 뒤를 이어 景明王(경명왕)의 아우 景哀王(경애왕)이 王位(왕위)에 오르시었다.

 

景哀王(경애왕) 四年(4년) 西紀九二七年(927년) 十一月(11월)에 後百濟(후백제)의 甄萱(견훤)이 新羅王都(신라왕도)를 侵犯(침범) 하였는데 景哀王(경애왕)은 妃(비)嬪族戚(빈족척)을 거느리고 飽石亭(포석정)에서 놀이를 하던 중 이어서 甄萱(견훤)에게 잡히고 말았다. 甄萱(견훤)은 宮中(궁중)을 掠奪(약탈)하고 景哀王(경애왕)을 脅迫(협박)하여 自殺(자살)케 한뒤에 王(왕)의 姨從弟(이종제)인 敬順王(경순왕)을 權知國事(권지국사)를 삼고 退去(퇴거)하였다.

 

이에 敬順大王(경순대왕)은께서 王位(왕위)에 오르신 것이다 西紀九二九年(서기929년) 七月(칠월)에는 甄萱(견훤)이 지금 경북 의성을 攻擊(공격) 하였고 十月(십월)에는 聞慶(문경)을 攻擊(공격) 하였으나 擊退(격퇴)되었다. 西紀九三一年(서기931년)敬順王(경순왕) 五年(5년) 二月(이월)에는 高麗太祖(고려태조)가 五十餘騎(50여기)를 거느리고 慶州(경주) 大王(대왕)을 拜謁(배알)할 것을 원함으로 大王(대왕)께서는 百官(백관)을 거느리시고 迎接(영접)하여 臨海殿(림해전)에서 잔치를 베푸셨다. 이때 大王(대왕)께서는 나는 하늘의 도움을 받지 못하여 患難(환난)이 일어났고 甄萱(견훤)이 不義(불의)를 姿行(자행)하며 마침내 나라를 侵害(침해)하니 憤痛(분통)함을 말할 수 없다하시면서 눈물을 흘리시니 周圍(주위)에서 흐느끼지 아니한 사람이 없었다. 高麗太祖(고려태조)도 눈물을 흘리면서 慰勞(위로) 하였다.

 

高麗太祖(고려태조)가 數十日(수십일) 머무른 뒤 돌아갈 때 王(왕)께서는 從弟裕廉(종제유렴)으로 하여금 陪行(배행) 하도록 하셨다. 八月(8월)에는 高麗太祖王建(고려 태조 왕건)이 使臣(사신)을 보내어 錦衫鞍馬(금삼안마)를 바치셨다. 大王六年(대왕 육년) 西紀九三二 年(서기932년) 四月(4월)에 唐(당)나라에 使臣(사신)을 보내셨다. 九年(9년) 西紀九三五年(서기935년) 十月(10월)에 이르러 疆土(강토)는 거의 다 남에게 빼앗기어 國勢(국세)는 심히 衰弱(쇠약)하여져서 스스로 나라를 穩全(온전)하게 支撑(지탱)할 수가 없게 되었다. 大王(대왕)께서는 天命(천명)을 깨달으시고 群臣會議(군신회의)를 召集(소집)하여 國策(국책)을 議論(의논)하시었다. 大王(대왕)께서는 나라를 高麗太祖(고려태조)에게 讓渡(양도)할 것을 提議(제의)하자 어떤 이는 옳다하고 어떤 이는 옳지 않다고 하여 贊反(찬반)이 紛紛(분분)하였다.

 

특히 太子(태자)이신 諱(휘) 鎰(일)(麻衣太子(마의태자))께서는 나라의 存亡(존망)은 天命(천명)에 따르는 것이니 마땅이 忠臣義士(충신의사)들과 더불어 民心(민심)을 收拾(수습)하고 스스로 나라를 굳게 지키다가 힘이 다한 然後(연후)에 이를 議論(의논)함이 옳은 일이옵는데 어찌 千年(천년)社稷(사직)을 하루아침에 다른 사람에게 넘겨 주겠나이까하고 아뢰었다.

 

그러나 大王(대왕)께서는 외롭고 危險(위험)함이 이와 같아 形勢(형세)는 나라를 穩全(온전)하게 保全(보전)할 수가 없는데 無辜(무고)한 百姓(백성)들에게 이 이상 피를 흘리게 함은 나로서는 차마할 수 없는 일이다라고하신 뒤에 백성을 생각하시는 至極(지극)한 생각에서 侍郞(시랑) 金封休使(김봉휴사)로 國書(국서)를 高麗太祖(고려태조)에게 讓渡(양도)할 뜻을 전하시었다. 이에 太子(태자)는 痛哭(통곡)하면서 王(왕)을 拜別(배별)하고 皆骨山(개골산)現在(현재) 金剛山(금강산)으로 들어가서 바위틈을 집을 삼고 베옷을 입고 草食(초식)으로서 애닮은 一生(일생)을 마치셨다고하여 世上(세상)사람들은 太子(태자)를 麻衣太子(마의태자)라고 불러온다.

 

그해 十一月(11월)에 高麗太子(고려태자)가 大王(대왕)의 國書(국서)를 받고 大相王鐵 (대상왕철)等(등)을 보내어 이를 迎接(영접)토록 하였다. 大王(대왕)께서는 新羅國都(신라국도)를 떠나 高麗太祖(고려태조)에게 歸附(귀부)하는데 香車寶馬(향차보마)가 三十里(삼십리)를 연이었고 길가의 國民(국민)들은 목메어 痛哭(통곡)하였다고한다.

 

高麗太祖(고려태조)는 郊外(교외)까지 나가서 大王一行(대왕일행)을 맞이하여 慰勞(위로)하면서 宮(궁)동쪽 甲第(갑제) 훌륭한 邸宅(저택)으로 침소를 정하여 드리고 高麗太祖(고려태조)의 長女(장녀) 柳花夫人(유화부인)인 樂浪公主(낙랑공주)를 大王(대왕)의 後妃(후비)로 삼으셨다. 또 그해 十二月(12월)에는 大王(대왕)께서 高麗太祖(고려태조)에 天德殿(천덕전)에서 臣下(신하)가 되는 儀式(의식)인 庭見禮(정견례)를 드리니 新羅國(신라국)의 建國(건국)한지 九九二年(992년)의 오랜 歷史(역사)는 그 幕(막)을 내리고 千年(천년)社稷(사직)은 끝났다. 高麗太祖(고려태조)는 駙馬(부마)가 되신 敬順大王(경순대왕)에게 政丞公(정승공)을 삼으니 그 位(위)가 太子(태자)보다 윗자리이며 國祿(국록)으로 해마다 쌀 千石(1000석)을 支拂(지불)하고 侍從(시종)하는 사람들을 보내주고 新羅(신라)를 慶州(경주)라 고쳐 부르고 大王(대왕)의 食邑(식읍)으로 定(정)하였다.

 

처음 大王(대왕)께서 高麗太祖(고려태조)에게로 歸附(귀부)하실 때에 高麗太祖(고려태조)는 크게 기뻐하면서 大王(대왕)에게 두터운 禮(예)로서 待接(대접)하며 使者(사자)를 시켜 大王(대왕)에게 말씀하시기를 ???????????????���������지금 나라를 寡人(과인)에게 넘겨주시니 그 은혜가 크옵니다. 원하옵건데 우리의 宗室(종실)과 婚姻(혼인)을 맺어 영원히 舅甥(구생)의 誼(의)를 맺고자 하옵니다.라고 하니 大王(대왕)께서 대답하시기를 우리 伯父億廉(백부억염)께서는 知大耶郡事(지대야군사)로 계셨는데 그 따님이 婦德(부덕)이 있고 容貌(용모)가 아름다우니 그로서 內庭(내정)을 갖추심이 좋을까하옵니다고 하시어 高麗太祖(고려태조)는 그를 아내로 맞으니 이가 곧 神聖王后(신성왕후) 金氏(김씨)요 神聖王后(신성왕후)의 所生(소생)이 바로 顯宗(현종)임금의 아버지로서 安宗(안종)으로 追尊(추존)되신 분이다.

 

高麗景宗(고려경종)임금은 大王(대왕)의 公主(공주)를 맞이하여 왕비로 삼으니 이가 곧 憲成王后(헌성왕후)이시다. 景宗(경종)은 西紀九七五年 (서기975년) 十月(십월)에 大王(대왕)을 상보(尙父상부) 로 모셨다. 尙父(상부)로 冊封(책봉)하는 景宗(경종)의 誥命(고명)에 이르기를 勅(칙)하노니 周(주)나라가 처음 나라를 세웠(啓聖(계성))을 때 먼저 (宮望(궁망))(姜太公(강태공)의 이름은 呂尙(여상)) 을 封(봉)하고 漢(한)나라가 일어났을 때에는 먼저 蕭荷(소하)를 冊封(책봉)하였다.

 

이로부터온 天下(천하)가 크게 平定(평정)되고 龍圖(용도)(王(왕)의 系譜(계보)임)는 二十七代(27대)를 세우고 麟趾(인지)(子孫(자손)임)四百年(400년)을 밟아 日月(일월)이 거듭 밝고 天下(천하)가 길이 交泰(교태)하여 비록 無爲(무위)하여 主(주)로부터 始作(시작)하여 理致(이치)에 通達(통달)한 臣下(신하)에 이르기 까지 그 빛에 모두 順化(순화)되었다. 이제 觀光順化衛國功臣上柱國樂浪國王政丞食邑八千戶金傳(관광순화위국공신상주국락량국왕정승식읍팔천호김전)은 대대로 鷄林(계림)에 살게 하고 벼슬은 王爵(왕작)을 나누어 주거니와 그 英烈(영열)한 氣像은 구름을 누를 만하고 文章(문장)의 才藝(재예)는 땅을 박차고 뛰어 오를만하다. 富(부)는 春秋(춘추)에 넉넉하고 封土(토)에 貴(귀)히 居(거)하니 가슴속에 六蹈三略(육도삼약)(兵書(병서)임)이 들어있고 七縱五甲(칠종오갑)(兵術(병술)임)의 要點(요점)은 손바닥을 가리키듯하다.

 

우리 太祖(태조)가 처음 陸隣(육린)의 友好(우호)를 닦으며 일찍 餘風(여풍)을 알아 바로 駙馬(부마)(왕의사위임)의 姻諠(인훤)를 베푸시어 안으로 大節(대절)을 갚아주었다. 이로서 집과 나라가 마침내 하나로 돌아가 群臣(군신)이 宛然(완연)히 三韓(삼한)에서 모이고 아름다운 이름이 뚜렷이 퍼지고 懿範(의범)(아름다운 규모의 뜻임)은 높이 빛났다.

 

그러므로 尙父都省令(상부도성령)의 號(호)를 더하여 주고 아울러 推忠愼義崇德守節功臣(추충신의숭덕수절공신)의 號(호)를 준다. 勳封(훈봉)은 禮(예)와 같으나 앞서의 八千戶(8,000호)를 通算(통산)하여 一萬戶(10,0000호)를 食邑(식읍)으로 삼게한다라고 하였다. 西紀九七八年(서기978년) 四月(사월)에 敬順大王(경순대왕)께서 애닮고 恨(한)많은 一生(일생)을 마치시니 享壽(향수)가 八十二歲(82세)이시고 諡號(시호)를 應天撫運之敬(應天撫運之敬)이요 應時率德之順(응시율덕지순)이라하여 [敬順(경순)]이라하였다.

 

陵(릉) : 京畿道(경기도) 漣川郡(연천군) 百鶴面(백학면) 高浪浦里(고랑포리)에 있다.

 

妃(비) : 竹房王后(죽방왕후) 朴氏(박씨)

二男(2남)

 

妃(비) : 孝穆王氏(효목왕씨) 樂浪公主(낙랑공주) 뒤에 新鸞公主(신난공주)라 改號(개호)

五男(5남)

女(여) 高麗太祖(고려태조)의 第一(제1 첫째) 公主(공주)

 

別妃(별비) : 順興安氏(순흥안씨)

一男(1남)

 

** 子女(자녀) 九男(9남) 三女(3여)를 두셨다.

 

 

二十九世

 

子 殷說(은열)

고려태조의 맏 따님이신 낙랑공주께서 낳으신 첫째 아드님으로서 대안군의 봉군을 받으셨고 벼슬이 태자소전을 역임하신 후 內史侍郞平章事(내사시랑평장사)에 이르셨고 顯宗(현종) 戊辰(무진) 西紀一○二八年(1028년) 三月(삼월) 四日(사일)에 돌아가시었다. 墓(묘)는 나라에서 葬地(장지)를 下賜(하사)하여 開城郡 嶺南面(영남면) 龍興里(용흥리) 花谷五龍山南麓壬坐(화곡오용산남록임좌)에 모셨다. 李朝正祖八年(이조정조 8년) 西紀一七八四年(서기1784년)에 公(공)의 誌石(지석)이 發見(발견)되어 公(공)의 親族關係(친족관계)가 分明(분명)하여졌다.

 

配(배) : 全州李氏(전주이씨) 工部侍郞義興君瞻(공부시랑의흥군첨)의 따님 後裔(후예)들은 慶州(경주) 安東(안동) 金寧(김녕) 安山(안산) 江陵(강릉) 平海(평해) 水原(수원) 漢南(한남) 遂安(수안) 淸風(청풍) 公主(공주) 龍潭(용담) 上洛(상낙)等(등)을 비롯한 많은 本(본)의 金氏(김씨)로 分派(분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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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 三性 淵源譜" 왜곡변조

 

 

 

사진下:삼성연원보 서문(국립중앙도서관소장 1934년판 원본)
별첨사진:책자발간기록(국립중앙도서관 1934년판 원본)

*국립중앙도서관에 변조된 또다른 신라삼성연원보가 있다.
1.신라삼성연원보 1934년 김경대 편저판
               1934년 간행시 1차 씨족역사변조
2.신라삼성연원보 1997년 경주김씨 계보연구회 간행
               1997년 간행시 2차 씨족역사 변조완성

신라삼성연원보는 1934년 일제시 평안도에서 저자 김경대란
사람이 발간한 70년된 虛錄의 문서이다. 우리나라 박석김 왕성
최고 족보로 둔갑시켜 자신들의 씨족역사 왜곡 변조를 위한
고문서로 이용하고 있다.
1.본글을 찬한 "경순왕의 44세손 택준"이란 인물을 "경순왕의 "24세손 택준"으로
변조하고
2.편저작자 김경대란 사람을 자신들의 족보에 있는 사람 萬鋌으로   개명했다는
식으로 날조된
3.또 다른 "신라 박석김 삼성연원보"가 "경주김씨 계보연구회"에서 1997년 발간되어
다량이 자신들의 종인들과 일반에게 판매 보급하고  마의태자를 자신들의 시조로
둔갑시켜 계보연구지, 계림지등을 경순왕릉등에서 까지 다량으로  유포되고 있다.
4.또한 변조된 자료는 국립중앙박물관등에 까지 소장자료로 비치하고 있다.    
5.신라김씨등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참으로 안타가운 일로 이들의 의도를
주시하며  씨족역사 왜곡를 경계하는바이다.
6.그렇다면 신라삼성연원보는 언제 누가 왜 발간되었나?
*新羅朴昔金淵源譜緣起 ----辛未孟秋上澣慶順王44世孫澤俊謹稿
신미(서기1931년)가을의 첫 상순 경순왕의 44세손 택준 삼가쓰다.
44세손은 25년/세 으로 계산시 오차감안 경순왕서기882년(헌강왕8년탄생) 1931년으로
명확히 판독됨.

*三姓淵源譜序----新羅建國後1699年壬申陽月旣望兎山李承學謹序
신라건국후1699년(서기1642년 인조20년은  壬午임)  實 임신년과는10년 차이로 년대가
맞지 않음에 의도적 곡필..
찬술자 이승학이 사용한  신라건국후 몇년식 年號보다는 干支연호가 더욱 신뢰성있음.
신라건국후 1699년 임신년은 서기1932년 임신년.

*은열공의 후 1자,2자 내용중 "全羅南道 長興郡 府西面 譜 準記載" "平安北道 龍川郡  龍川面  栢山洞 습敦係 全羅南道 長興群府南南松岩里  金英贊家譜準記載" 중에서 행정구역을 全羅南道,平安北道 표기는 갑오경장잏 일제시대  행정표시방법이다'

*책자 출판사(光文社印刷所) 著作兼 發行者 金景大 昭和9年5月30日 책자발간
책자 발간은 김경대가 소화9년(1934년)에 평안북도 신의주에 있던 劉能進이 경영하는
광문사 인쇄소이다.

*발행후 조선총독부도서관 검인  소화9년 6,25 확인인

                *운영자의 종합의견
본삼성연원보는 일제 시대말에 족보가 필요로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평안도 함경도
전라도등 전국각지를 돌아 다니며서 씨족족보를 만들어주는 일을 전문업으로 하는자
들이 있었다.
돈을 주고 받고 적당히 자신들의 계대를 맞추어 위조족보를 만들은 사람들이  
족보책자를 만들때 신뢰성을 가하기 위하여 글을 하는 선비를 또한 매수하여 서문을
좋게 쓰게 하고 택준,이승학이 찬글을 보여주고 많은 족보희망 동업자를 구하여
자신들의 족보 제작키 위한  영업 수단으로 본 책자를 제작하게된 동기로 사료된다.
그래서 일제시대에 일반 서민도 앞다투어 위보를 만들게된 원인을 제공한
신라 삼성연원보는 많은 씨족변조의 모델책자로 만들어진것이  해방과 더불어
사라졌다가 1995년경 새로 등장하여 일부 사이비학자들이 인용하고 있는것으로 사료된다.  
고로 각종 족보등 문헌을 거론시  신라 삼성 연원보를 말하거나 인용하는자는 99% 사이비
얼간이 학자로 분류된다.
자료제공: 울산김씨 홈 www.ulsankim.org)
                   *신라삼성연원보 정리
서기 1931년(신미년)에 택준이란 후손이쓰고,
서기 1932년(임신년) 토산 이승학이 서문을 찬하여
서기 1934년(소화9년) 김경대가 책자를 간행한것으로 사료됨.
.
2003-10-23
신라삼성연원보 최초 분석해설
울산김씨 김덕지왕자연구소
수석연구원   송암 김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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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생각을 적어본다면

삼성연원보는 연도 등 진위(진실)성 논란으로 족보장사를 하기위해 만든 것이라는 평이 있긴 하지만 성씨별로 논란이 되는 기록때문에 핵심에 접근을 못하고 있는것으로 보입니다. 

 

제가 볼때는  이기록이 1642년 간행자료를 1934년대 재 간행한 자료냐가 논쟁의 쟁점이 아닌 담고 있는 기록의 진실성에 촛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봅니다.

 

하지만 80년전 기록을 위보로 판단하기에는 근거가 부족할 수도 있기에 논란이 되는 부분은 무엇이고 정사기록을 비롯한 고문서나 각 문중에 전해지는 기록과 대조하여 맞는 기록, 다른 기록, 없던(위조) 기록으로 분류하여 평가하는 방향으로 선회해야 합니다.

 

위조된 기록이라면 이번 기회에 자세하게 밝혀 다시는 이러한 기록들이 발 붙이지 못하게도 해야 하며, 족보기록 진위여부의 기준 잣대를 제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위조된 책이라는 선입관 부터 갖고 연구대상에서 제외하기보다는 비교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전혀 가치가 없는 책은 아니라는 판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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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삼성연원보의 저자와 저작년대

 

 

출처 : http://blog.daum.net/wprkffid7/8360848

 

여러 검토를 거친 결과 신라삼성연원보의 저자는 김종거가 분명해 보인다.

김종거를 삼성연원보의 저자로 보는 이유는 삼성연원보에 기록된 두 개의 서문에서 모두 저자의 이름 김종거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1. 토산(兎山) 이승학(李承學) 서문에서-

 <경주인 유생  김종거삼성의 연원이 가보, 국사 및 야사에서 잘못 유출되어 다시 고찰하여 바로 잡는 일이 매우 어렵게 된 것이 안타까워 있는 힘을 다하여 지방 여러 전적을 널리 수집하고 그 가운데 요점을 간추려서 이 연원보를 편찬하였다.  

이 연원보를 인쇄 출판하여 세상에 내놓으며 본인(승학)에게 서(序)를 부탁하니 외람되지만 상식 밖의 일이 세상에 퍼지는 이때, 내나라의 옛일에서 내 집의 선적(先跡)을 찿아 남겨둠으로서 후세에 잊지 않게 하는 것이 본받을 일이라 생각하고 이에 서문으로 대신한다>

 

 2. 경순왕 44세손 김택준(金澤俊) 간행 서문에서-

 <벽동 종장(宗丈) 종거(김종거)께서는 인심은 옛날과 같지 않고 세도는 위기에 처해 있으니 양약을 구하는방법을 찾으려면 양의(良醫)의 지도에 의거해야 한다고 초려에 왕립하여 일일이 말씀하셨다. 삼성연원보를 새로 만들면 그 깊은 이치가 우리의 잘못된 생각을 고치기에 족할 것이다.  연원보를 편찬할 때 심사와 교정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내용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읽기 편리하기 때문에 많은 이에게 널리 전할만한 것이며, 이세상을 밝게 비추어줄 만한 문헌이라고 생각한다>

이와같이 삼성연원보 두 개의 서문에서 저자의 이름-김종거를  언급하고 있다.

바로 이것은 연원보의 저자가 누구인가를 명백하게 밝혀주는 하나의 근거가 된다. 

것외에 더 결정적인 근거가 있다.

 

3.  경주김씨족보(영분공파 후손록)에서-

 김종거는 경주김씨 족보 어딘엔가 기록되어 있는 실존인물임에 틀림없는데 경주김씨족보에 의하면 그는 바로 경순왕의 아들 명종(영분공파조)의 후손이라는 기록이 나온다.

신라삼성연원보 두개의 서문(이승학-김택준)에서 말하는 종거(김종거)의 이름이 나타나 있다.

 

 

초휘(初諱)는 경대(景大), 개명은 만정(萬錠 ) 자(字)는 수옥(水玉) 호는 제암(濟庵)

 바로 이 족보에는 종거의 이름 뒤에 그가 여러 고장을 돌아다니며 고문적을 베끼고 또 6대조 대우공이갖고 있던 것과 중조 적선공의 필사본을  참고하여 계대계보(系代系譜)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덧붙어 있다.

 여기서 주목해 볼 점은 종거의 초휘(初諱)는 경대(景大)라는 기록이다.

삼성연원보 맨 뒷장에 붙어 있는 저작발행자(著作發行者) 김경대(金景大)와  삼성연원보 첫 서문(이승학, 김택준)에서 언급되는 종거(김종거)와 같은 사람으로 보인다.

서문에는 족보의 이름에 올려진 이름 종거로, 뒷면 인쇄판 편저자엔 초휘의 이름 경대로 기록되어 있는 차이만 보인다.

이런 근거로  "삼성연원보의 저자 김종거=김경대"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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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삼성연원보(新羅三姓淵源譜)의 서문(序文)과 저자(著者)에

대하여      출처 : http://blog.daum.net/wprkffid7/8360847

  

신라삼성연원보는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소화(昭和)9년(1934년 인쇄) 김경대 편저가 원본이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신라삼성연원보(1934)>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신라삼성연원보(1934)>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신라삼성연원보(1934)>

 

 

계보연구회도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신라삼성연원보(김경대  편저,소화9년 5월 30일 인쇄, 1997년 1월 27일 고서 등록(75648))를 가지고 영인본을 만든 것이다.

간행서문에서 원본은 '경순왕 44세손 택준'으로 되어 있으나, 영인본에는 24세손 택준으로 바뀌어 있다.

아마도 계보연구회에서는 '44세손 택준'이 뭔가 맞지 않는 오기로 보았던 것 같다.

어쨌거나 어떤 족보든 예전에 만들어진 것은 그것대로 보학의 사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토씨한자라도 손을 대서는 안되는 건데 이 점이 좀 아쉽다.

        o 첨지중추부사공파   휘 맹현 (장단)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삼성연원보의 가치가 손상을 입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신라삼성연원보는 무엇을 담고 있는가, 저자는 누가인가, 저작년대는 언제인가, 소하 9년(1934)에 인쇄된 삼성연원보의 편저 김경대는 원저자와 같은 사람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인가에 대하여 진지한 논의가 있어야 할 것이다.

우선 논의에 앞서 한문으로 빽빽하게 기록된 신라삼성연원보의 두 개의 서문(이승학, 김택준)을 중국 연변대 역사교육학과 우영문 교수의 국역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삼성 연원보 서문(이승학)

(국역: 중국 연변대 역사교육학과 우영문 교수)

 

많은 씨족 중에 선대에 영화가 있고 후예가 번성한 씨족은 그리 흔치 않다. 영화가 한 세대에서 그치지 않고  지속되었으며, 번성함이 몇 대에 그치지 않고 백세에까지 이어졌다는 것은 지극히 드문 일이다. 우리나라의 박,석,김 삼성(三姓)의 영화와 번성은 쉽지 않은 일이라 할 수 있다.

이 삼성(三姓)은 신라건국이래 서로 양위하면서 국가의 권력을 분점하였으며 수차례 이와 같은 일이 있었기에 박씨는 10왕 석씨는 8왕 김씨는 38왕이 나오게 되었다. 박씨, 김씨의 자손은 천여년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가 되었으며 관과 파가 백여개 또는 수십개에 이르게 되었다.

석씨 후손은 이 정도까지 이르지 못했지만 역시 관이 셋 있었으니 어찌 다른 이들과 비길 수 있으리오. 이는 쉽지 않은 일이다.

공적을 쌓을 때 후한 보답이 있으며 공적을 쌓지 아니하고 후한 보답을 받을 수 없다는 이치에 따라 삼성(三姓)을 말한다면 그 고귀함, 번성함이 예로부터 윗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리라. 선인(先人)들은 정치에 참여하여 은덕을 베풀었고 이로써 민심을 단합시켜 국가의  맥을 이었고 후손들은 충효를 다하고 학문에 근면하였으며 이로써 왕정을 돕고 세상을 가르침에 힘썼기에 그 영예로움이 이와 같이 드높은 경지에 이르게 된 것이다.

삼성(三姓)으로 하여금 선인들의 뜻을 계승하고 업적을 이어받게 하며 시종일관 태만함이 없다면 앞으로 더욱 번영할 것이라는 것은 당연하다.

경주인 유생  김종거는 삼성의 연원이 가보, 국사 및 야사에서 잘못 유출되어 다시 고찰하여 바로 잡는 일이 매우 어렵게 된 것이 안타까워 있는 힘을 다하여 지방 여러 전적을 널리 수집하고 그 가운데 요점을 간추려서 이 연원보를 편찬하였다.

앞에는 단기삼국세계대기, 그 다음에는 신라 궁정과 고도의  유적, 그 다음은 신라 군왕의 연보(年譜 ) 및 삼성(三姓)의 분파상황 끝으로 명성과 칭송을 받은 김씨에 대하여 기재하고 있다.

이 연원보를 인쇄 출판하여 세상에 내놓으며 본인에게 서(序)를 부탁하니 외람되지만 상식 밖의 일이 세상에 퍼지는 이때, 내나라의 옛일에서 내 집의 선적(先跡)을 찿아 남겨둠으로서 후세에 잊지 않게 하는 것이 본받을 일이라 생각하고 이에 서문으로 대신한다.

 

신라 건국후 1699년 임신(壬申)년  여름 토산 이승학 삼가 서함 

 

 

신라 박석김 연원보를 간행하며(김택준)

 (국역: 중국 연변대 역사교육학과 우영문 교수)

 

옛날 공자는 책을 만들어 태평성대를 이룬 요나라를 역사에 기록하였고, 사마천은 사기를 써서 시황제(始皇帝)를 기록해 놓았다. 이들은 모두 고적을 고찰한 후 그것을 기준으로 삼았니 지극히 잘된 일이라 할 수 있다. 

단사 5천년 간  영역은 삼천리에 이르고 경주는 신라의 도읍이었으며 박-석-김 삼성은 서로 양위하면서 나라를 다스렸으며 윤리, 기강, 예의, 법도 등 교화에 큰 업적을 이룩하였다.

우리 문화는 동방의 큰 빛이 되었다. 이로 인하여 이웃나라로부터 예의지국이라 불리었다. 그것은 온땅을 적셔주고 있으며 대지의 정신 속에 흠뻑 스며들어가 옛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우러름을 받으며 쇄퇴하지 않고 있다.

벽동 종장(宗丈) 종거(김종거)께서는 인심은 옛날과 같지 않고 세도는 위기에 처해 있으니 양약을 구하는방법을 찾으려면 양의(良醫)의 지도에 의거해야 한다고 초려에 왕립하여 일일이 말씀하셨다.

삼성연원보를 새로 만들면 그 깊은 이치가 우리의 잘못된 생각을 고치기에 족할 것이다.

나는 재배하고 일어나 소리친다. 지금의 시기는 세상을 구할 기능을 가진 사람을 필요로 한다.

진가는 매몰 되고 은패되어 있어 이와 같거늘 이 큰일을 이루려는 마음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연원보를 편찬할 때 심사와 교정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내용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읽기 편리하기 때문에 많은 이에게 널리 전할만한 것이며, 이세상을 밝게 비추어줄 만한 문헌이라고 생각한다.

엎드려 사해를 바라보며, 모든 사람들이 동심으로 예의를 갖추어 연원보를 만들어 모시며 도리를 이어나가고 융성시켜 종가의 전통을 계승해 나가는 법도로 삼아, 풍속을 이에 따르게 하기 바란다. 오랜 세월 보존되어 사람들에게 많이 읽혀서 옛것을 이어받아 계승발전시키고 후세인을 깨우치는 귀중한 땟목(나무로 역어만든 평평한 배)이 되기를 바라며 이에 당부의 말을 대신한다.

 

신미(辛未) 가을의 첫달  경순왕의 44세손 택준(澤俊) 삼가 씀

 

요약하자면,

 토산(兎山) 이승학(李承學) 서문에서

 1. 경주인 유생  김종거는 삼성의 연원이 가보, 국사 및 야사에서 잘못 유출되어 다시 고찰하여 바로 잡는 일이 매우 어렵게 된 것이 안타까워 있는 힘을 다하여 지방 여러 전적을 널리 수집하고 그 가운데 요점을 간추려서 이 연원보를 편찬하였다.

 

2. 앞에는 단기삼국세계대기, 그 다음에는 신라 궁정과 고도의  유적, 그 다음은 신라 군왕의 연보(年譜 ) 및 삼성(三姓)의 분파상황 끝으로 명성과 칭송을 받은 김씨에 대하여 기재하고 있다.

 

3. 이 연원보를 인쇄 출판하여 세상에 내놓으며 본인(승학)에게 서(序)를 부탁하니 외람되지만 상식 밖의 일이 세상에 퍼지는 이때, 내나라의 옛일에서 내 집의 선적(先跡)을 찿아 남겨둠으로서 후세에 잊지 않게 하는 것이 본받을 일이라 생각하고 이에 서문으로 대신한다.

 

 김택준(金澤俊) 간행 서문에서

 1.벽동 종장(宗丈) 종거(김종거)께서는 인심은 옛날과 같지 않고 세도는 위기에 처해 있으니 양약을 구하는방법을 찾으려면 양의(良醫)의 지도에 의거해야 한다고 초려에 왕립하여 일일이 말씀하셨다. 삼성연원보를 새로 만들면 그 깊은 이치가 우리의 잘못된 생각을 고치기에 족할 것이다.

 

2. 연원보를 편찬할 때 심사와 교정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내용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읽기 편리하기 때문에 많은 이에게 널리 전할만한 것이며, 이세상을 밝게 비추어줄 만한 문헌이라고 생각한다.

 

3. 모든 사람들이 동심으로 예의를 갖추어 연원보를 만들어 모시며 도리를 이어나가고 융성시켜 종가의 전통을 계승해 나가는 법도로 삼아, 풍속을 이에 따르게 하기 바란다. 오랜 세월 보존되어 사람들에게 많이 읽혀서 옛것을 이어받아 계승발전시키고 후세인을 깨우치는 귀중한 땟목(통나무로 엮어 만든 평평한 배)이 되기를 바라며 이에 당부의 말을 대신한다.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신라삼성연원보의 저자는 김종거라는 것이다.

이런 기본적인 결론을 바탕으로 신라삼성연원보를 봐야 할 것이다.

 

 

2010년 2월 17일

 

제갈량과 사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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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삼성연원보의 저작년대에 대하여

 

 

출처 : http://blog.daum.net/wprkffid7/8360850

 

1. 1642년(인조20년) 저작설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단한다.

 

삼성연원보에 기록된 내용에는 저작년대를 추론해 볼 수 있는 근거가 몇 가지 있다.

 

 신라삼성연원보 26쪽

고종정해(高宗丁亥 八月三十日(1887년, 8월 30일)

 

  신라삼성연원보 28 쪽

 大德先生碑文(대덕선생비문)

 康熙 四十八年 一月 十日(강희48년 1월 10일, 1709년) (청나라 강희 48년, 1709년)

 

 이는 삼성연원보의 저작년대가 1642년(인조20년) 이후라고 볼 수밖에 없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그러므로 신라삼성연원보 1642년 저작설은 근거가 없는 오류라고 본다.

 

서문을 썼던 토산(兎山) 이승학(李承學), 경순왕 44세손 김택준(金澤俊)은 저작자 김종거와 동시대 사람으로 판단되며, 승학이 서문을 썼던 임신(壬申)년은 1932년, 택준이 서문을 썼던 신미(辛未 )년은 1931년으로 본다.

경주김씨족보 영분공파후손록에는 김종거(김경대)는 경진(庚辰)년 9월 1일 생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말하는 경진년 1880년으로 보인다.

그리고 종거는 을묘(乙卯) 1915년 秋(가을)에 족보를 만들었는데 7-8년 간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며 전해져 내려오는 고적을 모으며, 6대조 대우공이 가지고 있던 것을 참고로 족보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뒤따라 등장한다.

 

<참고>

                                          60갑자표

 

甲子(갑자)
1864, 1924, 1984
甲申(갑신)
1824, 1884, 1944
甲辰(갑신)
1844, 1904, 1964
乙丑(을축)
1865, 1925, 1985
乙酉(을유)
1825, 1885, 1945
乙巳(을사)
1845, 1905, 1965
丙寅(병인)
1866, 1926, 1986
丙戌(병술)
1826, 1886, 1946
丙午(병오)
1846, 1906, 1966
丁卯(정묘)
1867, 1927, 1987
丁亥(정해)
1827, 1887, 1947
丁未(정미)
1847, 1907, 1967
戊辰(무진)
1868, 1928, 1988
戊子(무자)
1828, 1888, 1948
戊申(무신)
1848, 1908, 1968
己巳(기사)
1869, 1929, 1989
己丑(기축)
1829, 1889, 1949
己酉(기유)
1849, 1909, 1969
庚午(경오)
1870, 1930, 1990
庚寅(경인)
1830, 1890, 1950
庚戌(경술)
1850, 1910, 1970
辛未(신미)
1871, 1931, 1991
辛卯(신묘)
1831, 1891, 1951
辛亥(신해)
1851, 1911, 1971
壬申(임신)
1872, 1932, 1992
壬辰(임진)
1832, 1892, 1952
壬子(임자)
1852, 1912, 1972
癸酉(계유)
1873, 1933, 1993
癸巳(계사)
1833, 1893, 1953
癸丑(계축)
1853, 1913, 1973
甲戌(갑술)
1874, 1934, 1994
甲午(갑오)
1834, 1894, 1954
甲寅(갑인)
1854, 1914, 1974
乙亥(을해)
1875, 1935, 1995
乙未(을미)
1835, 1895, 1955
乙卯(을묘)
1855, 1915, 1975
丙子(병자)
1876, 1936, 1996
丙申(병신)
1836, 1896, 1956
丙辰(병진)
1856, 1916, 1976
丁丑(정축)
1877, 1937, 1997
丁酉(정유)
1837, 1897, 1957
丁巳(정사)
1857, 1917, 1977
戊寅(무인)
1878, 1938, 1998
戊戌(무술)
1838, 1898, 1958
戊午(무오)
1858, 1918, 1978
己卯(기묘)
1879, 1939, 1999
己亥(기해)
1839, 1899, 1959
己未(기미)
1859, 1919, 1979
庚辰(경진)
1880, 1940, 2000
庚子(경자)
1840, 1900, 1960
庚申(경신)
1860, 1920, 1980
辛巳(신사)
1881, 1941, 2001
辛丑(신축)
1841, 1901, 1961
辛酉(신유)
1861, 1921, 1981
壬午(임오)
1882, 1942, 2002
壬寅(임인)
1842, 1902, 1962
壬戌(임술)
1862, 1922, 1982
癸未(계미)
1883, 1943, 2003
癸卯(계묘)
1843, 1903, 1963
癸亥(계해)
1863, 1923, 1983


 

 

이 족보를 보면 김종거(김경대, 1880년생)의 배위에는 두 명의 숙부인이 나오는데 첫째 부인은  丙子(병자, 1876년)생이고, 둘째 부인은 申辰(갑신,1904년)생으로 나와 있다.

 

김경대(김종거)는 평생 선대의 계보를 만드는데 많은 시간과 정성을 쏟은 어른이었다. 

그가 <신라삼성연원보 1934년> 보다 먼저 만든 족보(경주김씨족보)가 하나  있다.

 

 

 대정(大正)13년 10월 2일, 1924년 10월 2일에 출판한  <경주김씨족보 1924년, 김경대 편저>가 그것이다(부천족보도서관 소장).

<신라삼성연원보1934년>는 <경주김씨족보1924년>을 편찬하고 나서 10년이 지난 후에 만든 것이다.

이와같이 종합적으로 검토해보면, 신라삼성연원보는 김종거(김경대)가 20년이상 선대의 자료를 참고로 심혈을 기울여 정리하여 1934년에 출판한 족보라는 것이다.

 

 

2010년 2월 20일       

                                                                                                                                                         

제갈량과 사마의   

 

경주김씨족보와 마의태자의 후손 그리고 고려사
 
 
신라삼성연원보는 1642(인조20년)에 만들어진 족보가 아니라 1880년에 태어난 경주김씨 영분공파 후손 김종거(김경대)가  선대의 여러 가첩과 사적을 모으고 주의깊게 정리하고 편집하여 소화9년(1934년)에 간행한 족보라는 결론을 내린 바 있다.
 
참고 김종거(영분공파, 응창의 아들)

 

 

우리가 <신라삼성연원보>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김순웅대장군의 윗계보를 밝혀주는 중요한 족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미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신라삼성연원보는 경주김씨 대장군파조 김순웅대장군의 아버지를 경순왕과 죽방부인 박씨 사이의 첫째아들 마의태자 일(鎰)이라고 기록하였다.

 

                                      <신라삼성연원보1934>

 

                                    <신라삼성연원보 1934>                              

 
신라삼성연원보는 소화 9년(昭和 9년,1934년) 5월 30일에 평안북도 의주에서 발행된 족보다.
이와 비슷한 시기인 소화(昭和)9년(1934년) 10월 30일에 평안북도 용천에서 김태훈 편저로 <경주김씨족보(1934)>가 발행되었는데, 바로 이 족보에도 삼성연원보와 마찬가지로 휘  일(鎰) 바로 밑에 두 아들 선웅과 순웅의 계보를 기록해 놓았다.
 

 

                           <경주김씨족보 김태훈 편저 1934>

 
김경대 편저의 <삼성연원보,1934년 평북 의주>뿐만 아니라 김태훈 편저 <경주김씨족보, 1934, 평북 용천>에도 마의태자의 두 아들 선웅과 순웅에 관한 계보기록이 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삼성연원보의 편저자 김경대와 경주김씨족보의 편저자 김태훈은 대장군공파의 후손이 아니다.
김경대는 영분공(명종)의 후손이고, 김태훈은 대안군(은열)의 후순이다.
이와같이 그들은 대장군공(순웅)의 후손이 아니기 때문에 누군가 말하는대로 대장군공파의 후손이 자기들의 선대계보를 마의태자로 올려놓고 경순왕의 장손문중을 만들기 위해 족보를 날조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이들 편저자는 대장군공파(김순웅)의 후손이 아니라는 점에서 나름의 객관성을 가지고 있다고 봐야 한다.
김경대와 김태훈은 분명히 어떤 고증자료를 가지고 마의태자의 두 아들(선웅과 순웅)의 계보를 옮겨놓았을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김태훈 편저 경주김씨족보(1934년)에는 태자(마의태자)의 묘가 개골산 곧 금강산에 있다는 기록이 보인다는 점이다.

 

                                  <경주김씨족보 김태훈 편저 1934>

 
마의태자의 둘째아들 김순웅대장군에 관한 기록은 모든 경주김씨 족보에는 등장하지만 고려사에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경주김씨족보에 따르면 김순웅은 "응양용호이군좌우신호흥위금오천우감문육각치상장군"(應揚龍虎二軍左右神虎興威金吾千牛監門六衛各置上將軍)의 관직을 거쳤던 대장군이었다.

모든 경주김씨족보에 휘 김순웅 대장군의 계보를 순웅-인위-원정-지예로 기록하고 있는데, 동원김씨분관록에 순웅의 차자(次子)로 나오는 김인위와 그의 아들 김원정에 관한 기록이 고려사에 나타난다.

 
고려사절요/제3권/현종원문대왕/계해십사년(1024)에 이런 기록이 나온다.
 

 

 

 

 

顯宗元文大王甲子十五年冊景興院主金氏爲德妃

현종원문대왕갑자십오년책경흥원주김씨위덕비

 

현종원문대왕갑자15년(1024년) 정월에 경흥원주 김씨를 책봉하여 <덕비>로 삼았다는 기록이다. 경흥원주 김씨란 김인위의 딸을 가리킨다.

흔히 원순숙비라고도 하는데 현종 즉위 이후 귀비로 간택되어 경흥원주로 불리고 있다가 현종15년(1024)년 정월에 왕비에 책봉되었다.

이어서 고려사절요에는 현종원문대왕갑자15년(1024년) 9월에 "김인위를 상서좌복야참지정사로 삼고 치사하게 하였다(以金因渭爲尙書左僕射參知政事仍令致仕)는 기록이 등장한다.

고려사에는 덕비(원순숙비)의 아버지 김인위에게 상서좌복야참지정사주국경조현개국남(尙書左僕射參知政事柱國京兆懸開國男)으로 삼고 식읍삼백호(食邑三百戶)를 주고  치사(致仕)하게 하였다 기록이 나온다.

 

여기서 치사(致仕)하게 했다는 것은 나이 70세가 되어 스스로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청하고 이를 왕이 윤허하는 것을 뜻한다. 

현종(992-1031)은 재위기간이 1009년 2월-1031년 5월로 22년 3개월이다.

인위의 딸 원순숙비가 왕궁으로 들어온 것은 아마도 현종 즉위년인 1009년 이후가 될 것이다. 

1024년에 김인위의 나이가 70세였다면, 그의 생년은 955년이 된다.

그후 그는 얼마나 더 오래살았는지 아직 발견된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김인위에게는 두 딸이 있었는데, 큰 딸은 현종의 왕비인 원순숙비가 되고 작은 딸은 이자연의 처(계림국대부인)가 된다.

 

고려사절요의 기록을 보면 현종원문대왕갑자15년(1024년) 3월에 이자연 등 9명과 명경 10명에게 급제를 주었다고 나온다(賜李子淵等九人 明經十人及第).

 

"이허겸의 아들은 한(翰)이고  한의 아들에는 자연(子淵)과 자상(子祥) 두 사람이 있었는데  자연의 처인 계림국대부인은 경주김씨 김인위(金因渭)의 딸로 현종의 원순숙비의 동생이 된다"(한민족의 역사 고려시대(1983년) p.23)

 

경주김씨 족보 가운데 김인위의 딸 가운데 하나는 현종과 혼인하여 원순숙비가 되고 다른 하나는 이자연과 혼인했다는 기록이 나와 있는 것을 더러 볼 수 있다.  

김인위의 사위 이자연(1003-1061)은 문종의 오른팔로 가문과 능력이 아주 특출한 인물이다.
흔히 역사에서 고려 문종은 조선 세종대왕과 비견되는 왕으로 평가되는데 최충과 이자연의 공이 컸다.
1003년에 태어난 그는 현종의 장인 김은부의 처조카였으며 1024년에 과거에 장원급제하고 1031년 우보궐이 되었다.
그후 이부낭중,어사잡단,우승선을 거쳐 지중추원사,중추부사 등을 지내다가 문종대에 들어와서 1047년에 이부상서 참지정사가 되고, 1050년 마침내 평장사에 올라 정계의 핵심인물로 부상하였다.
게다가 입궁한 큰 딸이 1052년 정식으로 왕비(인예왕후)에 책봉되면서 그는 다시 문하시랑 평장사를 거쳐 1055년에는 최충의 뒤를 이어 시중에 오른다.
그의 세 딸이 모두 문종의 왕비(인예왕후,인경현비,인절현비)가 되었고 여덟명의 아들 중에 여섯이 모두 고관이 되었다.
이자연의 맏아들 이정은 호부상서, 문하시중이 되고 그의 딸은 성종의 원신궁주가 되었고 이정의 세째 동생인 석은 공부상서가 되고 그의 딸 역시 선종의 비인 사숙태후가 되어 헌종을 낳았다.
<이정의 묘지명>에는 그의 어머니 계림국대부인 김씨가 내사시랑평장사 인위(因謂)의 딸이었다는 기록이 세겨져 있다.
 
참고: 이정의 묘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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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계림국대부인(雞林國大夫人) 김씨는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 인위(因謂)의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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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연의 첫째 아들 이정이 1025년에 태어나 1077년에 작고하였다는 묘지명의 기록으로 보면, 평장사 김인위의 딸(원순숙비의 동생)과 이자연의 혼인은 아마도 이자연이 과거에 장원급제했던 1024년이 아닌가 한다.
 
인위의 큰 딸 원순숙비가 현종에게서 낳은 딸이 하나 있는데, 1034년 2월에 덕종의 왕비에 책봉된다(김인위의 외손녀는 경성왕후는 덕종이 승하한 후 52년을 더 살다가 1086년에 죽었다).
인위의 둘째딸 계림국대부인이 낳은 세딸이 모두 왕비가 되었으며 큰 딸 인예왕후 이씨가 문종(제11대)에게서 낳은 세명의 아들이 고려의 제 12대왕  순종, 제 13대 왕 선종, 제 15대 왕 숙종이 된다.
고려 12대 왕 순종부터 마지막 왕 33대 청왕에 이르기까지 김인위의 딸 계림국대부인이 낳은 인예왕후의 혈통이 계속 이어져 내려왔으며, 이는 곧 김인위의 외손의 혈통인 것이고, 고려왕조 제 12대(순종)의 혈통을 거슬러 올라가면 인예왕후(11대 문종 비)-계림국대부인-김인위-김순웅-마의태자-경순왕으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참고: 고려왕조 12대-33대 계보
12대 순종(11대 문종의 아들)-13대 선종(11대 문종의 아들)-14대 헌종(13대 선종의 아들)-14대 숙종(11대 문종의 아들)-16대 예종(15대 숙종 아들)-17대 인종(17대 예종의 아들)-18대 의종(17대 인종의 아들)-19대 명종(17대 인종의 아들)-20대 신종(17대 인종의 아들)-21대 희종(20대 신종의 아들)-22대 강종(19대 명종의 아들)-23대 고종(22대 강종의 아들)-24대 원종(23대 고종의 아들)-25대 충열왕(24대 원종의 아들)-26대 충선왕(25대 충렬왕의 아들)-27대 충숙왕(26대 충선왕의 아들)-28대 충혜왕(27대 충숙왕의 아들)-29대 충목왕(28대 충혜왕의 아들)-30대 충정왕(28대 충혜왕의 아들)-31대 공민왕(27대 충숙왕의 아들)-32대 우왕(31대 공민왕의 아들)-33대 청왕(32대 우왕의 아들)
 
 
김인위의 아들 김원정과 이자연은 처남매부지간이다.
말하자면, 이자연의 처남이 김원정이고 김원정의 매부가 이자연이다.
 

김원정

 

고려사절요/권지사/문종인효대왕/임진 6년(1052)

壬辰六年 宋皇祐四年 契丹重煕二十一年 三月以金元鼎爲御史大去

(임진륙년 송황우사년거란중희이십일년삼월이금원정위어사대거) :

 

임진 6년(1052),  송 황우 4년, 거란 중희 21년 3월에 김원정(金元鼎)을

 

어사대부로 삼았다.

 

以崔冲爲內史令仍令致仕李子淵爲門下侍中判尙書吏部事

(이최충위내사령잉령치사이자연위문하시중판상서리부사)

최충을 내사령으로 삼아 그대로 치사하게 하고, 이자연을

 

문하시중 판상서 이부사로 삼았다.

 

  

乙未九年(을미구년) : 문종 을미 9년(1055)

   

 

金元鼎爲尙書左僕射參知政事兼太子少保:

 

(금원정위상서좌복사참지정사겸태자소보) :

 

김원정(金元鼎)을 상서좌복야 참지정사 겸 태자소보로 삼았다

 

 
고려사절요 문종 을미 9년(1055년)에 기록이 보인다.
 최충 70세의 나이로 은퇴할 것을 요청하니 왕은 내사시랑평장사 김원정과 동지중추원사 왕우숭을 최충의 사택으로 보내어 내사령으로 삼아 치사(致仕)하는 조서를 내리고 말, 의복,채색비단, 은제그릇 등을 보냈다.
 
최충을  내사령으로삼아 그대로 치사하게 하고 이자연을 문하시중 판상서이부사로 김정준을 내시랑평장사로 박성걸을 내시랑평장사 상주국으로 김원정(金元鼎)을 상서좌복야참지정사 겸 태자소보로 삼았다.
 

1057년 병부가 동서양계에 군사를 보내어 수비하기를 청하므로 김원정은 문종대왕에게 “근래 군사와 백성이 책봉사(册封使)를 송영하느라 시달렸고, 또 흥왕사(興王寺)의 역사로 쉬지 못했으며, 자량도 거의 떨어져가니 봉책군(封册軍)의 예에 의하여 물품을 주어 보내소서.”라고 청하여 이를 윤허받았다.

 

   

고려사절요/권지사/문종인효대왕/무술 12년(1058)

   

五月制工部尙書庾逵子仲卿降等授蔭職門下侍中李子淵等駁曰仲卿母是平章事李龔

오월제공부상서유규자중경강등수음직문하시중이자연등박왈중경모시평장사리공

奸兄女所生仲卿平章事李龔不宜齒於朝列班列平章事金元鼎等議 此乃李龔之罪非仲

간형녀소생중경평장사이공불의치어조렬반열평장사금원정등의차내리공지죄비중

卿父子所犯且功臣黔弼之裔不宜防塞仕塗請依前制降授蔭職王從元鼎等議

경부자소범차공신검필지예불의방새사도청의전제강수음직왕종원정등의

 

5월에 제하기를, 공부상서 유규(庾逵)의 아들 중경(仲卿)을 강등하여 음직에 제수하라." 하자, 문하시중 이자연(李子淵)이 논박하기를 중경의 어미는 이형의 딸을 간음하여 낳은 소생이니, 중경을 조정의 반열에 둠은 마땅치 않습니다." 하였는데,

 

평장사 김원정 등이 의론하기를, “이것은 이공의 허물이고 중경 부자가 범한 것이 아니며 또 공신 금필(黔弼=유금필)의 후손이니, 벼슬길을 막음은 마땅치 않습니다. 앞서 내린 명대로 강등시켜서 음직에 제수하소서." 하니, 왕이 원정 등의 논의를 따랐다.

 

 

이처럼 평장사 김원정은 문종대왕 앞에서 문하시중 이자연과 설전을 벌었던 것을 볼 수 있다.

김원정은 비록 이자연과는 처남매부지간이라 할지라도 국사를 논할 때는 아주 냉정하게 자신의 의견을 개진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사절요/권지사/문종인효대왕/신축 15년(1061)

   

 

辛丑十五年(신축십오년) : 신축 15년(1061)

 

 

 

十二月(십이월) : 12월에

 

契丹遣檢校太傅蕭述來賀生辰

거란견검교태부소술래하생진

거란이 검교 태부 소술(蕭述)을 보내와 생신을 축하하였다.

 

 

以王寵之爲門下侍中判尙書吏部事金元鼎爲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

이왕총지위문하시중판상서리부사금원정위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 

왕총지(王寵之)를 문하시중 판상서이부사로, 김원정(金元鼎)을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로 삼았다

 

   

김원정은 덕종 때 감찰어사(監察御史)· 정종때 우사낭중(右司郞中)을 거쳐 문종 때 어사대부(御史大夫)·중추원사(中樞院使)·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참지정사(參知政事)내사시랑(內史侍郞), 동내사문하평장사(同內史門下平章事),문하시랑(門下侍郞)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 문종15년(1063년)에는 수태위문하시중(守太尉門下侍中)에 이르렀다.

 

경주김씨 족보에 의하면 김원정은 문종 15년(1063년) 7월에 세상을 떠났다.

김원정이 이르렀던 수태위문하시중은 임금 바로 다음으로 높은 자리다.

고려시대 삼공(태위, 사도, 사공)과 삼사(태사,태부,태보)는 정1품의 벼슬이었으며 국정고문으로 왕에게  조언을 할 수 있는 최고의 위치였다.

 

경주김씨 족보에는 김원정의 아들 김지예만 기록되어 있지만 서균(1060-1132)의 묘지명에는 서균의 어머니가 평장사를 지낸 김원정의 딸이라는 기록이 나타난다.

서균(상서좌복야, 평장사)의 아버지는 서정인데 판삼사, 거란사신, 병부상서 종 1품의 관직을 거친 인물이다.
이천 서씨 서정의 부인이 바로 경주김씨 김원정의 딸이다.
김원정의 딸 김씨와 혼인한 서정은 세치혀로 거란의 80만 대군을 물리친 그 유명한 서희(徐熙 942-998)의 손자다. (서필-서희-서유걸-서정-서균)
 
<서균의 묘지명> 뒷면. 할아버지 서유걸은 좌복야를 지냈으며, 아버지 서 정(靖)은 평장사를 지냈고, 어머니 김씨는 평장사 김원정(金元鼎)의 딸이다. 공은 이씨를 아내로 맞았는데 급사 중담감의 딸이었다. 아들 여섯과 딸 여섯을 낳았는데 그 이름과 지위를 차례로 써서 세긴다.  -천회(天會) 10년 임자 겨울 11월에(천회는 금나라의 연호로 10년 임자는 1132년을 가리킨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서균의 묘지명은 1132년에 제작된 것으로 사료적 가치가 높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같이 고려사-고려사절요-서균의 묘지명은 경주김씨 족보(김태훈 편저1934년)와 신라삼성연원보(김경대편저1934)에 기록된 마의태자 일-김순웅-김인위-김원정의 계보를 파악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료다.
 역사속에서 살았던 실제의 인물을 기록한 것이 족보라면, 그 족보는 연대기적으로 역사의 기록과 일치하는 것이 순리다.
 순웅-인위-원정-지예 계보는 모든 경주김씨족보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계보지만, 김순웅의 윗계보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세가지 종류의 족보가 있다.
 
1. 원조(源祖) 김순웅
2. 대안군 은열의 후손(수서 또는 영고 밑에)
3. 마의태자 일(鎰)의 아들
 
김순웅-김인위-김원정의 계보를 대안군 은열의 6세손 수서(金壽西)나 영고(金永固)밑에 기록된 족보는 역사의 기록 및 연대와 맞지 않다.
 
경순왕과 태조왕건의 딸 낙랑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대안군 은열은 937년 생년이다.
 
은열-태화-정구-계령-한공-수서-영고-순웅-인위-원정-지예
은열-태화-정구-계령-한공-수서-순웅-인위-원정-지예
 
이렇게 기록된 족보는 계보도, 계대도, 역사연대도 모두 맞지 않는 엉터리 기록의 엉터리 족보다.
경주김씨 가운데 이런 엉터리 족보가 맞다고 우기는 것은 역사도 족보도 모르는 무식한 사람이다.
 
순웅의 윗 계보를 모르니 원조(源祖) 순웅으로 기록해놓은 <1772년경주김씨족보>도 보학의 상식에서는 문제가 된다.
김순웅대장군은 어디서 주워온 자식인가?
윗 계대를 모르면서 경순왕이 후손으로 기록되어 그 자손이 경주김씨가 된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족보는 왜 이렇게 기록해야만 했을까?
그 해답은 고려사와 마의태자 일(鎰)의 아들 순웅으로 기록해 놓은 족보에서 찾아야 한다.  
 
 

2010년 3월 1일 제갈량과 사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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