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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정보방/부자분석, 상업

유일한 박사님의 유언장 (noblesse oblige)

by 연송 김환수 2011. 4. 15.

유일한 박사의 유언장

 

고 유일한 박사는 우리나라 기업가 중에서 가장 존경받는 분으로

꼽힙니다.

 

깨끗한 부’의 대명사로 불리는 유한양행 설립자 유일한 박사. 타계한 지 40년 가까이 됐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기업인으로 회자되고 있다.

 

1971년 봄, 76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시면서 가족들에게 짧은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그는 유언을 통해 모든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다고 밝혀 큰 감동을 주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 noblesse oblige : 사회 고위층 인사에게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

 

 

 

유언장에 기록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유일선의 딸, 즉 손녀인 유일림에게는 대학 졸업 시까지

        학자금 1만 달러를 준다.

 

둘째, 딸 유재라에게는 유한공고 안에 있는 묘지와 주변 땅

        5천 평을 물려준다.

 

유한동산으로 꾸미고 결코 울타리를 치지 말고 유한중.공업고교 학생들이 마음대로 드나들게 하며 그 학생들의 티없이 맑은 정신에 깃든 젊은 의지를 지하에서나마 더불어 느끼게 해달라.

 

셋째, 소유 주식은 전부 ‘한국사회 및 교육 원조 신탁기금’에

        기증한다.

 

넷째, 아내 호미리는 딸 재라가 그 노후를 잘 돌보아 주기

        바란다.

 

다섯째, 아들 유일선은 대학까지 졸업시켰으니 앞으로는 자립

        해서 살아가거라.

 

정경유착의 유혹을 뿌리치고 정직하고 투명하게 기업을 운영해 칭송받았던 그는, 막대한 부를 사회에 환원한다는 유언장을 통해 부자에 대한 인식을 재정립했다.

 

유일한 박사는 생전에도 여러 사회사업과 투명한 경영으로 존경받아 왔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유언을 통해 본인의 경영 철학을 가족과 회사가 이어가도록 했습니다.

 

실제로 유일한 박사의 딸은 20년 뒤 세상을 떠나면서

아버지가 남겨주신 마지막 재산마저 사회에 환원하였습니다.

 

나눔이 당연시 되고, 나눔의 가치가 교육의 큰틀로 자리 잡을 때,

우리 사회가 좀 더 아름다워지지 않을까요?

 

유일한 박사의 유언이 우리 삶에 적용되고,

훗날 우리의 유언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미국의 문물을 배워, 조국 동포를 구하라!

유일한은 1895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났습니다. 자수성가한 아버지, 유기연이 "미국 문물을 배워, 조국 동포를 구하라!"라며 9살의 어린 유일한을 미국으로 유학 보냅니다. 

 

유기연은 장남인 유일한 말고도 자녀들을 러시아, 일본, 중국에 유학을 보내서 공부하게 합니다.

 

이렇게 곳곳에 보낸 것은, 그 당시 우리나라에 영향을 주고 있던 나라들에 가서 열심히 공부한 뒤, 돌아와 겨레를 위해 봉사하라고 그랬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준 여비를 몽땅 잃어버린 유일한은 미국에서 고학하며 공부했다고 하네요. 대학에서 미식축구 선수로 활약해서 장학금을 받기도 했다는군요.

 

그러면서 독립운동가 박용만, 서재필 등과 교우하며 항일운동을 하기도 합니다. 특히 서재필이 유일한을 매우 아껴서, 유한양행의 버드나무 CI를 만들어 선물했다고 하네요.

   

 

 


식품회사에서, 제품회사로

유일한은 미국에서 라초이 식품회사를 만들어 크게 성공하지만, 그 모든 성공을 뒤로 하고 귀국하여, 유한양행을 설립합니다. 그가 사업을 시작한 이유는 라초이 식품회사 경영때 필요한 녹두를 구입하기 위해 중국에 갔다가, 북간도에 거주하던 부모와 동생들을 만난 사건때문이었다.

 

부모는 큰 아들이 보내준 100달러로 땅을 사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대다수의 조선사람들은 병과 굶주림으로 죽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그는 병든 동포들을 구해야한다며 의약품업을 했고, 벌어들인 돈은 교육과 공익 사업에 투자했습니다. 이승만이 그런 유일한을 눈여겨 보고, 상공부장관 자리를 제안하지만 거부하고, 이후 부당한 정치자금을 달라는 요구도 거절합니다.

 


윤리경영을 실천하다!

유일한은 유한양행을 경영할 때 항상 윤리경영을 실천했습니다. 그 이유는 라초이사를 경영을 하던 시절, 거래하던 녹두회사 사장이 탈세를 통해 사리사욕을 채우는 모습에 실망해서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유일한은 탈세를 하지 않았습니다. 너무 세금을 정확하게 많이 내서, 오히려 당국의 조사를 받았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도 있습니다.

 

해방 후 회사의 한 간부가 모르핀을 팔면 돈을 벌 수 있다고 건의하자 불같이 화를 내며 '당장 회사에서 나가시오'라고 소리쳤다는 이야기도 유명하고요.

또, 유일한은 1969년에 부사장으로 근무하던 외아들과 조카에게 회사를 그만두게 합니다. 특별한 잘못이 없었음에도 “내가 죽고 나면 그들로 인해 파벌이 조성되고, 그렇게 되면 공정하게 회사가 운영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고 하는군요. 

재산의 사회환원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유일한은 자신의 재산에 대해 자신의 소유가 아닌, 하느님이 맡기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생전에 유일한은 "삶에 있어서 무엇이 더 중요한 것인가를 인식할 수 있고,

 

오늘날 저희들에게 주어진 좋은 것들을 충분히 즐기며, 명랑하고 참을성 있고, 친절하고 우애할 수 있는 능력을 주소서"라고 기도했다고 하네요.

그래서 1970년, 한국에도 좋은 공업학교를 만들어야 한다는 신념 아래, 유한재단을 설립하여 직업교육기관인 유한공업고등학교와 유한공업전문대학를 세웠습니다.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현재 유한공업고등학교와 경기도 부천시 괴안동 사이에 길의 이름을 '유일한로'라고 이름지었지요.

 


아래는 유일한의 유언장 내용입니다.

 

 
- 손녀에게는 대학 졸업시까지 학자금으로 1만불을 준다.

- 딸에게는 유한공고 안에 있는 묘소와 주변 땅 5천평을 물려

   준다.

  그 땅을 유한동산으로 꾸미고, 그 동산에는 학생들이 마음대로

  드나들도록 하라.

- 내 명의의 주식은 전부 한국사회 및 교육 기금에 기증한다.

- 아내는 딸이 잘 돌보아주기 바란다.

- 아들에게는 대학까지 졸업시켰으니 앞으로는 자립하여 살아

   가거라.

유일한 유언장


대재벌이었던 그가 남긴 것이라고는 구두 두 켤레와 양복 세 벌

그리고 손때 묻은 가방ㆍ안경ㆍ만년필ㆍ지팡이가 전부였습니다.

유일한 박사 유품. 검소한 박사의 평소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유일한 박사가 죽은 뒤 20 년이 흐른 1991년 어느 날, 딸 유재라 여사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아낌없이 사회에 내놓았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땅을 비롯하여 전 재산 205억원을 공익재단에 기부하고 빈 몸, 빈 마음으로 떠났습니다.

 


부천시 공덕인물

유일한은 부천 출신은 아니지만, 1936년에 소사구 심곡본동 일대에 국내 최초의 근대적 제약공장을 준공하였고, 그가 설립한 유한공업고등학교와 유한공업전문대학도 부천시와 맞닿아 있습니다.

 

부천시는 유일한 박사를 부천시를 사랑하고 빛낸, 공덕인물로 지정하였고, 중앙공원에 그의 동상을 세워 그 뜻을 기리고 있습니다.

 

 

 

 

 

 

유일한 묘. 죽어서도 학생들이 뛰노는 소리를 듣고 싶다며 묻힐 장소로 유한동산을 지정해 놓았다. 이 동산에는 딸 유재라 여사도 함께 묻혔다.

 

 

 

:::: 연보 :::::

 

1895년 평양에서 장남으로 태어남 
1904년 아버지의 권유로 10 세 때 홀로 미국으로 건너감 
1919년 고교 시절 미식축구 선수로 활약 
1916년 미시간 주립 대학에 입학 
1922년 라초이 주식 회사 세움 
1925년 21 년 만에 가족을 만남 
1926년 호미리와 결혼 후 귀국해 유한양행 설립 
1953년 미국 스탠포드 대학원에서 국제법을 공부하고 돌아옴 
1964년 학교 법인 유한학원을 창설 
1969년 전문 경영인에게 사장직을 물려줌 
1971년 유한동산에 묻힘

 

조금 더 자세한 연보

 

1895년 - 1월 15일, 아버지 유기연과 어머니 김기복 사이에 6남 3녀 중 장남으로 평양에서 태어남.

 

1904년 - 국민학교 입학, 대한제국 수화공사 박장현을 따라 미국 유학길에 오름.

 

1919년 - 필라델피아 한인자유대회에서 독립운동결의문 기초작성위원 선임. 대회장에서 직접 낭독. 이곳에서 이승만,서재필과 만나 활동. 미시건 대학 상과 졸업.

 

1922년 - 미시건 대학 동창 친구 스미스와 동업으로 숙주나물 통조림을 생산하는 '라초이식품회사'(La Choy Food Product Inc.)설립.

 

1925년 - 호미리(胡美利) 여사와 결혼. 숙주나물 원료인 녹두 구매차 중국 상하이를 거쳐, 고국을 떠난 지 21년만에 북간도에서 가족들과 상봉.

 

1926년 - 세브란스 의전 에비슨 학장으로부터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부인 호미리 여사는 세브란스 의전 소아과장으로 초청받음. 라초이식품 등 미국재산 정리. 귀국. 12월 10일 유한양행 창립하고 초대사장으로 취임.

 

1941년 - 미국 하와이에서 열린 해외 한족대회 집행위원으로 활동.

 

1942년 - 미육군 전략처 OSS 한국 담당 고문으로 활약, 이때 노벨문학상 작가인 필벅 여사와 교유. 8월 29일 미국 LA에서 재미 한국인들로 무장한 '맹호군' 창설의 주역으로 활동. 본사를 소사공장으로 이전.

 

1945년 - 국내수복작전인 '냅코작전'(NAPKO Project)에 1조 조장으로 활동.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 OSS작전과 양면전을 전개하려 했으나 8월 15일 광복으로 불발. 8.15 광복을 맞아 중화민국(중국)과 만주 및 38선 이북의 모든 기반과 자산을 상실.

 

1946년 - 8월, 미국에서 8년만에 귀국. 그 해 대한 상공회의소 초대회장 피선. 이승만으로부터 협력제의받았으나, 재차 거절하고 12월 도미(度美).

 

1948년 - 스탠퍼드 대학원에서 국제법 수학.

 

1962년 - 제약업계 최초로 주식을 상장(上場). 유한치약 생산 개시. 재단법인 유한학원 설립.

 

1963년 - 개인소유주식 1만 7천주를 장학기금으로 연세대와 보건 장학회에 기증.

 

1964년 - 12월, 학교법인 '유한재단'을 설립하고 서울 영등포구 항동에 '유한공업고등학교' 건립.

 

1965년 - 개인주식 5만 6천주를 희사하여 교육 및 장학사업 확대. 연세대로부터 명예법학박사 학위 받음

 

1970년 - 3월, 미국 킴벌리 클라크(쭈)와 합작으로 '유한킴벌리주식회사' 설립. 그 해 국민훈장 모란장 수여받음.

 

1971년 - 3월 11일 사망. 대한민국 정부에서 국민훈장 무궁화장 추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