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일으킨 것은 아버지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었다.
삼성가(家)의 딸로 태어나 뭇사람들의 시선 밖에서 자란 이부진(40) 호텔신라 사장.
그의 손을 잡고 언론 앞에 나타난 사람은 이건희 회장이었다.
지난해 초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가전전시회인 ‘CES(Consumer Electronics Show)’. 이건희 회장은 이 사장의 손을 꼭 잡고 카메라 앞에 섰다.
“딸 자랑 좀 해야겠다”는 말과 함께 이 회장은 이 사장과 함께 전시회장을 꼼꼼히 돌아봤다.
승부욕, 외모…‘리틀 이건희’ 별명
이 사장은 아버지를 쏙 빼닮은 것으로 유명했다. 동그란 눈에 야무진 일처리 솜씨. 틈나는 대로 책을 읽는 습관과 지기 싫어하는 습성까지. 아들인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보다 아버지를 더 닮아 ‘리틀 이건희’란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그가 본격적으로 경영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것은 2005년부터였다. 대원외국어고와 연세대 아동학과를 졸업하고 1995년 삼성복지재단 보육사업팀에서 근무할 때만 해도 여느 평범한 가정의 딸과 다름없었다. 삼성 일본 본사와 삼성전자를 거쳐 호텔신라로 옮겨간 것이 2001년. 기획팀 부장으로 근무하면서 이 사장은 경영자로서의 꿈을 키워갔다.
세계 유명 호텔 체인을 돌면서 벤치마킹 대상을 물색하고 명품 사업 등 면세점 사업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2005년엔 수년간 검토해 온 자신만의 전략을 풀어냈다. 호텔신라를 업그레이드하면서 그가 타깃으로 내건 것은 ‘럭셔리 라이프스타일 호텔’. 호텔에서 제공하는 서비스와 음식 메뉴까지 일일이 챙길 정도로 그의 손이 닿지 않은 것이 없었다.
사업의 무게중심도 바꾸어 나갔는데 면세점 사업을 확장하면서 샤넬과 같은 명품 브랜드 매장을 확대했다. 호텔신라의 매출도 급변했다. 2002년 4157억 원이던 매출은 연평균 15%씩 성장하며 2009년 1조 원을 넘어섰다.
경영자의 삶에 매료된 그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2009년이었다. 당시 전무였던 그는 아버지인 이건희 회장에게 찾아가 “삼성에버랜드 경영을 해보고 싶다”고 말하며 외연을 넓히기 시작했다.
에버랜드는 삼성그룹의 지주회사나 다름없는 회사로 당시 이 사장의 이 같은 발언은 삼성의 승계구도와 관련, 업계에 큰 파장을 던지기도 했다. 에버랜드 지분 8.37%를 보유하고 있는 그는 오빠인 이재용 사장(25.1%)에 이은 2대 주주다. 에버랜드는 에버랜드-삼성생명-삼성전자-삼성카드-에버랜드로 이어지는 순환출자 구조의 정점에 있는 회사다.
에버랜드 내에 사무실을 만들어 회사 현황을 면밀히 파악해오던 그는 직접 에버랜드 경영전략회의를 주재하기 시작했다. 삼성경제연구소, 삼성생명, 삼성물산, 삼성전자 등 각 계열사 핵심 임직원들로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 호텔신라와 에버랜드 간의 시너지 제고방안을 모색할 정도로 경영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세계 유수 테마파크와 리조트를 들여다보고 에버랜드 전략수립을 지휘하기 시작했다. 지난해엔 사업구조를 재정비했다. 빌딩관리, 환경개발, 에너지 사업을 담당하는 E&A사업부, 급식사업 등을 하는 푸드컬쳐사업부, 테마파크와 골프사업을 하는 레저사업부로 나눴다.
에버랜드 실적은 이후 급상승했다. 2010년엔 매출이 전년보다 25% 늘어난 2조2186억 원을 기록했고 순이익도 2009년 1497억 원에서 2010년 1688억 원으로 불었다. 이 사장은 2020년까지 매출 20조 원을 달성하겠다는 비전을 발표하면서 에버랜드의 성장을 주도하고 있다.
올 초에는 사장으로 승진하면서 삼성 첫 여성 최고경영자(CEO)란 역사도 만들었다. 이뿐만 아니다. 호텔신라, 에버랜드에 이어 삼성물산 상사부문의 고문직도 맡게 됐다. 그의 발 빠른 행보에 세간의 관심이 몰리는 이유다.
한복과 리스크매니지먼트
이 사장은 ‘독한 경영자’로도 소문이 나 있다. 호텔신라에 근무하던 시절 아이를 출산한 지 3일 만에 회사에 나타나 직원들이 혀를 내두르게 했다.
해외 유학파가 아님에도 영어, 일본어는 물론 프랑스어까지 완벽하게 구사할 정도로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그런 ‘완벽한’ 그가 최근 경영자로서의 위기관리 능력을 보여준 사건이 하나 있었다. 일명 ‘한복사건’이다.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호텔신라는 종종 한복을 입고 뷔페식당에 출입하는 손님들 간의 ‘사고’가 잦았다. 한복 자락에 걸려 넘어진다든가, 소매에 음식물이 닿는다든가 하는 일들이었다. 그럴 때마다 손님들은 호텔신라에 항의를 했고, 호텔직원들은 한복을 입고 출입하는 손님들에게 ‘주의해 달라’는 당부를 하게 됐다.
그런 와중 지난 4월 한복디자이너 이혜순 씨가 호텔신라 뷔페식당을 찾았다. 직원이 그에게 “한복 차림의 출입은 금지돼 있다”며 출입을 제지했고 해당 내용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인 트위터를 통해 일파만파로 전해졌다.
논란은 순식간에 번져 뷔페식당에 한복 차림의 출입이 안 된다는 내용은 한복을 입고선 신라호텔에 못 들어간다로 커졌다. 기모노 차림의 출입은 된다라는 이야기가 덧붙으면서 관련 내용은 정치인들의 입방아에 오르기 시작했다.
예상치 못한 파장이 일자 이 사장은 사건 다음날 아침 강남구 청담동에 있는 이혜순 씨의 한복점을 찾아갔다. 그리고는 “민망해서 얼굴을 못 들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하며 직접 용서를 구했다.
트위터에서 한복 출입금지 이야기가 기모노 이야기로까지 번지는 상황에서 언론에 사정을 설명하기보다 직접 대면사과라는 해법을 찾은 것이었다.
이후 이 사장의 사과가 인터넷을 통해 전해지면서 일부 네티즌들은 “발 빠른 사과였다”는 평을 내놓기도 했다.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방송인 홍석천 씨가 “레스토랑에서 고객을 대하는 직원들의 실수에 항상 마음 졸이는 나로서는 사과와 사후조치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한다. 직접 사과는 적절한 행동이었다”라는 트윗을 올리기도 했다.
호텔신라는 이후 트위터에 공식계정을 만들고(@TheShillain) 외부와의 소통에 들어갔다. 이 사장이 직접 트위터를 하고 있진 않지만 그간 사회와의 소통에서 떨어져 있던 호텔신라로서는 큰 변화를 맞이한 셈이다.
재계 관계자는 이 사장이 한복사건을 통해 보여준 모습에 대해 “삼성가의 딸로서 대중에게 인식돼온 그가 경영자로서 사회의 평가에 귀를 기울이게 한 사건”이라며 “부적절한 행동을 직접 사과하는 모습을 통해 경영자로서의 면모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경영자로 평가받고 싶다”
이 사장은 언론을 통해 비춰지는 자신의 모습에 대해 상당히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영자로서 평가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불필요한 사생활이 부각된다’는 뜻에서다.
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나 자신만의 경영수완으로 성공하고 싶다는 의지는 최근 에버랜드의 신사업 진출에서도 드러난다. 에버랜드는 올 초 삼성전자와 미국 퀸스타일과 합작해 바이오제약회사를 세우는 데 참여했다.
에버랜드의 지분은 40%로 삼성전자와 동일했다. 삼성 관계자는 “신사업 진출에 대한 에버랜드의 열망이 컸다는 증거”라며 바이오 사업에 대한 이 사장의 열정을 설명했다.
이처럼 경영자로서 외부에 드러나는 점과 달리 대중은 이 사장의 일거수일투족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지난해 다음커뮤니케이션이 조사한 ‘미디어를 통해 본 한국인의 관심사와 라이프스타일’ 보고서에 따르면 ‘이부진’이 대기업 관련 키워드 1위로 나타났다.
이 사장이 공식석상에 입고 나온 옷과 가방에 세간의 관심이 쏠리는 것도 당연지사. 하지만 삼성가의 딸이라는 수식어에 맞지 않게 그는 특정 명품 브랜드를 선호하기보다는 수수한 옷들을 선호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심플한 블랙 원피스에 부츠를 즐겨 착용한다. 직원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기도 한다. 삼겹살에 소주, 노래방 회식을 열기도 한다.
그에게 따라붙는 또 하나의 이야기는 ‘사랑’이다. 1999년 당시 삼성 직원이었던 임우재 씨와 결혼한 것. 두 사람은 자원봉사 활동 중에 만나 사랑을 키운 지 4년 만에 결혼에 골인했다.
결혼 후 임우재 씨는 MIT에서 경영학 석사 학위를 따고 한국으로 돌아와 현재는 삼성전기 전무로 근무 중이다. 이 사장에게 세간의 호기심과 관심이 쏟아진 이유도 바로 이처럼 여느 재벌가 자녀들과는 다른 러브스토리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김현예 기자 yeah@hankyung.com
<본 기사는 한국경제매거진 MONEY 6월호 제공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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