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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시민의 종 재현품

by 연송 김환수 2011. 3. 20.

부산시민의 종 재현품

타종을 해보니 종소리가 제법 아름답습니다.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과 비슷하게 생겼습니다. 

 

크기비교 사진

 

허남식 부산광역시장과 면담하는 김창준 前 美 연방하원 의원 2011.2.23

 

 김창준 前 미 연방하원 의원에게 "부산 시민의 종" 증정 (허남식 부산광역시장 2011.2.23)

 

부산 용두산공원 종각 모습

 

여러 각도에서 찍은 사진들

 

 

 

 

표면에 검은색이 칠해져 있지만 속살은 구리색이 드러난다.

 

고대종()의 화학성분을 분석해보면, 대개 구리 80 %에 주석이 13 % 정도의 조성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실제로 종의 강도와 경도()의 최적 상태는 주석이 15 % 내외로 함유되었을 때이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해 본다면

 

통일신라시대인 771년(혜공왕 7)에 만든 신라의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鍾)은 형태의 아름다움이나 크기로 볼 때 누구나 우리나라 최고의 범종으로 꼽는다.

 

국보 제29호로 지정되어 그 위상에 걸맞는 대우를 받고 있기도 하다. 이 범종은 기능적으로 보더라도 만들어진 지 1,300년 가까이 되었지만 아직도 제야나 특별한 날에는 타종되어 그 그윽한 울림을 우리에게 들려주는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으니 옛날 사람들의 대단한 기술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겉면에 새겨진 비천상 등의 화려한 조각을 연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금속학적 성분 분석을 시도하는 것도 이 범종의 의미를 제대로 아는데 매우 요긴하다.

 

이 범종을 일명 ‘에밀레종’이라 하여 종을 만드는 쇳물에 살아 있는 어린아이를 넣어 비로소 완성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는 지금까지 우리나라에 널리 퍼져있는 전설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아무런 설화적 근거도 없는 오로지 지어낸 말에 불과하다. 아무리 중요한 범종을 만든다고 해서 어떻게 살아있는 사람을 종의 재료의 일부로 사용했겠는가?

   

이 터무니없는 말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우리의 자의식을 망가뜨리고 자기비하를 유도하기 위해 날조한 것일 뿐이다.

 

그 이전에는 어떠한 기록이나 구전에도 이러한 말이 있지를 않았었다. 그러나 한번 유포된 이야기는 묘하게도 마치 사실인 양 널리 퍼져 근래에 이르기까지 이런 말을 무의식중에 그럴 듯한 이야기로 믿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그래서 이 종에 사람 뼈의 성분인 인(燐, phosphorous)이 다량 함유되어 있을 거라는 말까지 나왔었다.

 

사실 이 말의 이면에는 불교를 낮추어보는 감정이 밑바탕에 깔려있음이 물론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엉터리라면 그것을 증명해야 하지 않을까?

 

1990년대 중반 우리나라의 범종 기술학자들이 이 범종의 성분을 조사한 일이 있었다. 단순한 작업이 아니라 당시로서의 최첨단 장비를 동원해서 할 수 있는 모든 공학적·화학적, 그리고 금속학적 연구 등 한번 제대로 마음먹고 실시한 대대적 조사였다.

 

그 결과 여러 가지 새롭고도 중요한 내용을 알 수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이 범종에는 인 성분이 전혀 들어있지 않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앞서의 이야기가 얼토당토않은 말이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鍾) 경주부 관아로 옮기는 광경 1915년

 

이 에밀레종은 최초 봉덕사에 있어 한 때는 봉덕사종이라고도 했지만 언젠가 봉덕사는 없어졌다.

 

봉덕사는 지금까지도 그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다. 다만 경주의 북쪽을 가로 흐르는 북천(北川) 근처에 있었다가 언젠가 북천이 호우로 범람하면서 없어지고 이 종만 남아 영묘사(靈廟寺)로 옮겨졌다.

 

조선시대 들어와 경주읍성의 남쪽 문루에 걸려 있었다고 하나 확인할 수 없고, 일제 강점기 때는 경주읍성 남문 밖 지금의 봉황대(鳳凰臺) 서편 기슭의 종각에 있었다.

 

일제가 1910년 조선을 강제로 침탈하고 병합조처를 한 후 1915년 이 종을 경주부(현 경주시) 관아로 옮겼다.

 

현재 경주시 동부동에 있는 경주문화원 건물이 바로 그 건물이다. 1926년 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이 개관되면서 경주부 관아 건물이 박물관 건물이 되었다. 
 

 

광복 후 경주분관은 국립경주박물관으로 거듭나게 되었고 1970년대 경주고도관광개발 10개년 계획이 청와대에서 마련되면서 그 일환으로 지금의 국립경주박물관이 1976년 경주 인왕동에 새롭게 개관되었다.

 

개관에 앞서 1975년 이 종을 위해 박물관 경내에 마련한 콘크리트 종각에 옮겨 보존해 오면서 해마다 제야(除夜)에 경주시민을 위한 타종식이 열린다.


 

 

 경주박물관 성덕대왕신종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가장 큰 종으로 높이 3.75m, 입지름 2.27m, 두께 11∼25㎝이며, 무게는 1997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정밀측정한 결과 18.9톤으로 확인되었다.


신라 경덕왕이 아버지인 성덕왕의 공덕을 널리 알리기 위해 종을 만들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뒤를 이어 혜공왕이 771년에 완성하여 성덕대왕신종이라고 불렀다.

 

이 종은 처음에 봉덕사에 달았다고 해서 봉덕사종이라고도 하며, 아기를 시주하여 넣었다는 전설로 아기의 울음소리를 본따 에밀레종이라고도 한다.


종의 맨 위에는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음통(音筒)이 있는데, 이것은 우리나라 동종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한 구조이다. 종을 매다는 고리 역할을 하는 용뉴는 용머리 모양으로 조각되어 있다.

 

종 몸체에는 상하에 넓은 띠를 둘러 그 안에 꽃무늬를 새겨 넣었고, 종의 어깨 밑으로는 4곳에 연꽃 모양으로 돌출된 9개의 유두를 사각형의 유곽이 둘러싸고 있다.

 

유곽 아래로 2쌍의 비천상이 있고, 그 사이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가 연꽃 모양으로 마련되어 있으며, 몸체 2곳에는 종에 대한 내력이 새겨져 있다. 특히 종 입구 부분이 마름모의 모서리처럼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어 이 종의 특징이 되고있다.

 

통일신라 예술이 각 분야에 걸쳐 전성기를 이룰 때 만들어진 종으로 화려한 문양과 조각수법은 시대를 대표할 만하다. 또한, 몸통에 남아있는 1,000여자의 명문은 문장뿐 아니라 새긴 수법도 뛰어나, 1천 3백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손상되지 않고 전해오고 있다.

 


  

 

부산 용두산 공원의 종각 (부산 시민의 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