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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수집방/기타 미술품 등

가장 귀한 보석 이야기

by 연송 김환수 2009. 10. 4.

세상에서 가장귀한 보석은 ?

 

한니발전쟁(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한니발을 이긴 로마의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둘째딸 코르넬리아는 훌륭한 교양을 갖춘 현부인으로 이름이 자자했으며 고귀한 성품으로 고대 로마 여성의 완벽한 표상으로 여겨진다.


기원전 154년 남편인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죽었을 때 코르넬리아는 아직 어린 나이였고 현숙했기 때문에 많은 구혼자가 나타났는데 그중에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왕도 있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의 구혼을 거절하는 코르넬리아

그러나 코르넬리아는 아이들을 잘 양육하기 위해 모든 구혼을 뿌리치고 지내며 자녀 교육에 헌신했는데, 그녀의 아이들이 어렸을 때의 일입니다.

어느날 코르넬리아의 집에서 명사 부인들의 정기 모임이 있었는데 여기에 모이신 부인들은 코르넬리아가 애써 준비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지요. 


이런 저런 이야기가 오가는 중에 한 부인이 자신의 손을 내보이며 끼고 있던 반지를 자랑하기 시작했습니다.
커다란 보석이 박힌 그 반지는 언뜻 보기에도 값비싸 보였습니다.
물론 아래 이미지 정도였는지도 모르지요

 그시절 반지는 아니지만 최근 10억원 호가하는 반지

다른 부인들도 모두 반지에 관심을 보이며 아름답다고 칭찬하더니 곧 제각기 자신들의 몸에 지니고 있던 반지, 목걸이, 귀고리, 팔찌 등을 하나씩 내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부인들이 자랑하는 보석들은 하나같이 번쩍거리는 최상품 고급

물건들 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집주인 코르넬리아만은 남의 보석들을 구경할 뿐
자신의 보석을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다른 부인들이 가만히 앉아 있는 코르넬리아에게 말했다.
˝부인, 어서 부인의 보석도 보여 주세요. 구경 좀 합시다.˝
부인들은 자꾸만 그녀를 재촉했지요.

처음엔 이를 사양하던 코르넬리아도 결국 성화에 못 이겨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나 방 안으로 들어갔다.
다른 부인들은 코르넬리아가 가지고 나올 멋진 보석에 대해

잔뜩 기대하고 있었지요.

과연 어떻게 진행되었을까요 ? 


잠시 후 코르넬리아는 양손에 두 아들의 손목을 꼭 잡고 방에서 나왔다. 그리고는 부인들을 둘러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이 아이들이 나의 가장 귀한 보석입니다.˝
 
명사 부인들 과연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았는지 궁금합니다.

  

첨부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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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비싼 반지 모습입니다


보석 경매 사상 최고가의 반지가 탄생했습니다.
낙찰가는 약 35억원(2,658,500달러)으로 지금까지 경매에
등장했던 반지 중 가장 비싼 가격을 기록했습니다.


최고가 반지는 뉴욕에서 열린 '소더비 보석 경매' 행사에 처음으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37캐럿에 이르는 옐로우 다이아몬드가 가운데 박혀있고,
그 양쪽은 3캐럿의 화이트 다이아몬드로 장식됐습니다.


당초 이 반지는 20억에서 30억 사이에서 낙찰될 것으로 예상됐습니다.
하지만 참가 인원 사이에 경쟁이 치열해 지면서 예상보다 높은 가격에 팔릴 수 있었습니다. 이에 소더비 측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는 후문입니다.

이전까지 경매 최고가를 기록했던 반지는 25억원으로 개인이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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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 설명
 
코르넬리아 아프리카나 (이글의 주인공)

코르넬리아 스키피오니스 아프리카나(Cornelia Scipionis Africana, 기원전 190년경 - 기원전 100년)는 로마 공화정의 인물로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영웅인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둘째 딸이다. 고귀한 성품으로 고대 로마 여성의 완벽한 표상으로 여겨진다.

 

코르넬리아는 아버지 스키피오를 도와준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와 결혼했다. 두사람은 나이 차가 많이 나지만 서로 사랑했고 12명의 아이를 가지게 되지만 성인으로 자란 것은 두 아들, 티베리우스가이우스, 그리고 그들의 누나인 셈프로니아 뿐이었다.

 

기원전 154년 남편인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죽었을 때 코르넬리아는 아직 어린 나이였고 현숙했기 때문에 많은 구혼자가 나타났는데 그중에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왕도 있었다. 그러나 코르넬리아는 아이들을 잘 양육하기 위해 모든 구혼을 뿌리치고 과부로 남았다.

 

그녀는 큰 딸 셈프로니아를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 아프리카누스에게 시집보냈고 두 아들을 아주 훌륭하게 양육했으며 두 아들이 개혁문제로 보수적인 원로원의 귀족가문과 마찰을 일으킬때도 자신이 귀족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아들들의 훌륭한 지지자로 행동했다.

 

두 아들의 비극적인 죽음이후 그녀는 로마를 떠나 미세눔의 빌라로 은퇴했지만 거기서도 항상 손님을 맞이했다. 그녀가 죽자 로마는 그녀를 명예롭게 여겼고 동상을 세워 기념했다.

 
 
가장귀한 보석인 구라쿠스 형제에 대하여
 

그라쿠스 형제(Gracchi)는 기원전 2세기 공화정 시대 고대 로마에서 활동한 정치가인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이우스 그라쿠스를 말한다. (아래 별도 설명)

 

이들의 아버지는 집정관을 지낸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대 그라쿠스)였고 어머니는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영웅인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딸, 코르넬리아 아프리카나였다.

이들 형제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훌륭한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두형제는 모두 호민관이 되어 로마 공화정 내에서 자작농을 육성하는 토지개혁을 비롯하여 빈민, 무산자를 돕는 여러 가지 개혁을 시행하려고 했으나 로마 원로원과 보수적인 귀족 반대파에 밀려 끝내 죽임을 당하고 개혁은 실패했다.

 

티베리우스는 약 30세 가이우스는 33세에 죽었고 시체는 모두 티베르 강에 버려졌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무덤이나 남겨진 동상, 흉상이 전혀없다.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

[Tiberius Sempronius Gracchus, BC 169~BC 133.6]

(코르넬리아 큰아들) * 아버지와 이름이 같다

로마 공화정 말기의 정치가. 제3회 포에니 전쟁과 누만티아 전쟁에 종군한 뒤 호민관으로서 개혁운동을 했다. 대토지 소유자의 토지 확장과 국방력의 재건을 꾀하기 위하여 대토지소유의 제한, 토지의 재분배를 정한 토지법안을 통과시키고 자작농의 창설을 기도했다.

 

가이우스 샘프로니우스 그라쿠스의 형으로, 귀족집안에서 태어나 여러 유력한 집안과 정치적 유대를 맺었다. 제3회 포에니 전쟁과 누만티아 전쟁에 종군한 뒤, BC 133년에 호민관()으로서 개혁운동을 하였다.

 

대토지 소유자의 토지 확장과 중소토지 소유자의 몰락을 막아서 국방력의 재건을 꾀하기 위하여 대토지소유의 제한, 토지의 재분배를 정한 토지법안을 통과시키고 자작농의 창설을 기도하였다.

그러나 토지문제로 원로원()과 대립하고 또 위법으로 호민관의 재선을 노렸기 때문에 원로원 보수파의 불만과 반대가 폭발하여 시가전 끝에 암살되었다.

 

 

가이우스 그라쿠스 ((코르넬리아 둘째아들) * 티베리우스 동생

가이우스 그라쿠스(Gaius Gracchus, 기원전 154년 ~ 기원전 121년)는 기원전 2세기에 활동한 로마 공화정의 정치가이다. 그는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동생으로 형과 같이 민중을 위한 개혁을 추구

하다가 끝내는 죽임을 당하였다.

 

가이우스는는 기원전 154년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집정관을 지낸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였고 어머니는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영웅인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딸, 코르넬리아 아프리카나였다. 그가 태어나자 마자 아버지가 죽었고 가이우스는 형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와 누나 셈프로니아는

훌륭한 어머니의 지도를 받으며 자라났다.

 

형 티베리우스가 로마에서 보수파에게 죽임을 당하던 기원전 133년 가이우스는 매형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 아프리카누스의 밑에서 히스파니아 누만티아에서 군복부를 하고 있었다. 이후 10년간 가이우스는 당시 로마 공화정의 지도자들이 거치는 평범한 경력을 쌓았다. 기원전 126년부터 3년간은 사르데냐에서 군단의 회계감사관으로 복무했다.

 

첫 번째 호민관 시기

기원전 123년 가이우스는 첫 번째 호민관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호민관에 당선되자 그는 여러 가지 개혁적인 법안을 들고 나왔다. 주요한 개혁 법안들은 아래와 같다.

  • 농지개혁법 : 형 티베리우스가 추구하던 자작농 육성법
  • 곡물법 : 국가가 일정량의 밀을 사들여 시가보다 싼 값으로 빈민에게 제공하는 것
  • 병역법 : 17세 미만인 시민의 징병을 금함
  • 공공사업법 : 가도, 교량, 항만등 공공사업을 진흥함
  • 식민법 : 새로 생긴 식민지에 식민도시를 세우고 많은 시민을 이주시켜 경제적 부흥을 꾀함
  • 사법배심원법 : 새로이 대두된 계급인 에퀴테스(기사) 계급이 배심원을 독점하게 함
  • 시민권 개혁법 : 로마 시민권의 확대를 추구함

이러한 법안이 차례로 제출됨에 따라 가이우스는 정력적으로 활동했고 로마 민중의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전통적인 보수파들에게 법안의 일부는 매우 불쾌한 것으로 특히 시민권의 확대는 모든 원로원 의원이 가이우스에게 등을 돌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두 번째 호민관 시기

기원전 122년 두 번째로 호민관에 당선된 가이우스는 더욱 정력적으로 개혁을 실현하려 했고 반대파의 반대도 점점 노골적으로 되어갔다. 가이우스는 카르타고를 재건하여 식민도시를 건설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는데 이를 위해 카르타고에 나가 있는 동안 원로원은 리비우스 드루수스라는 다른 호민관을 이용해 더 급진적인 법안을 제출하게 함으로 가이우스의 인기를 떨어뜨렸다.

 

이에 가이우스는 초조해 졌다. 더욱이 다음해의 집정관으로 선출된 두사람중의 한사람은 루키우스 오피무스로 매우 강력한 그라쿠스의 반대자였기 때문에 그동안 쌓아왔던 개혁이 물거품이 될 우려가 있었다.

 

이어 벌어진 호민관 선거에서 가이우스는 결국 세번째 연임에 실패하였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카르타고 식민 도시 건설마저 반대파가 무효법안을 제출한 상태였다. 가이우스 세력과 보수적인 원로원세력은 이제 카르타고 식민시를 둘러싸고 긴장이 고조되어갔다.

 

죽음과 그 이후

카르타고 식민시의 운명을 결정할 투표가 실시되는 날, 사소한 다툼끝에 하급관리 한명이 그라쿠스파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로마 원로원은 즉각 집정관 루피우스 오피무스의 선동으로 그라쿠스파를 "공화국의 적"으로 규정하고 일종의 계엄령을 선포하고 무력으로 그라쿠스파를 진압했다.

 

그라쿠스파는 전통적으로 평민의 아성이던 아벤티노 언덕에서 저항했으나 모두 학살당했고 가이우스도 혼란중에 도망치다가 결국 자살했다. 오피무스는 가이우스와 그의 동료 플라쿠스는 참수되어 포로 로마로에 효수되었고 몸뚱이는 티베리스 강에 던져졌다.

 

이후 원로원은 카르타고 식민도시 건설, 로마 시민권의 확대법안 비롯한 가이우스의 개혁의 대부분을 무효로 만들고 토지개혁도 무산시켰다. 나중에야 시민권 확대를 비롯한 가이우스의 개혁이 옳았음이 증명되고 대부분 실행되게 된다.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

(코르넬리아 남편)   * 큰아들과 이름이 같다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 또는 대(大) 그라쿠스(Tiberius Sempronius Gracchus, 기원전 217년경 - 기원전 154년)는 기원전 2세기에 활동한 로마 공화정의 정치가이다.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으로 유명한 그라쿠스 형제(티베리우스가이우스)의 아버지이다.

 

그의 초기 생애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기원전 190년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명령으로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에게 파견되어 로마군의 후방지원을 요청한 것이 첫 공식 업무로 기록된다. 기원전 187년에는 호민관으로 선출되고 카토 (대)등이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실각을 노리고 벌어진 '스키피오 재판'사건에서 용기있게 스키피오의 변호를 맡았다. 이때 스키피오는 그의 딸 코르넬리아 아프리카나를 그라쿠스에게 주기로 약속했다.

 

그 이후 그라쿠스는 로마 공화정의 공직에서 차근차근 길을 밟아 가는데 기원전 182년에는 안찰관, 2년후에는 법무관에 선출되었고 기원전 179년에는 전직법무관 자격으로 군단을 이끌고 히스파니아에서 벌어진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했다. 이 때의 공으로 그는 기원전 177년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집정관을 지낸후 그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약속대로 스키피오의 딸인 18세의 코르넬리아와 결혼했는데 무척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결혼이었다. 이 결혼에서 유명한 그라쿠스 형제가 태어났다.

 

그는 공직에 있으면서 몇가지 중요한 법안들을 통과시켰는데 정부가 발주하는 건설사업을 일부 업자가 독점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안, 일정조건을 가진 해방노예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취득할 권리를 주는 법안등을 통과시켰다.

 

기원전 163년 그는 두번째로 집정관에 선출되어 시리아를 방문하여 그곳의 셀레우코스 왕조를 지원했다. 그는 유창한 그리스어를 구사했다고 하며 품위있고 단정한 품성으로 존경을 받았다. 기원전 154년경 사망했는데 아들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10살이었고 동생 가이우스는 아직 한살정도의 아기였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Publius Cornelius Scipio Africanus,기원전 235년 ~ 기원전 183년),

 

 

약칭 대 스키피오(大 Scipio)는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싸운 로마측의 장군이다. 한니발의 군대를 아프리카자마 전투에서 격파한 것으로 유명하며, '아프리카누스'라는 칭호은 이것을 기념하여 붙은 것이다.

 

그는 한니발을 격파하기 전에 아버지 스키피오와 함께 17세때 티키누스 전투트레비아 전투에 나섰고 그 뒤 기원전 211년 24세의 나이로 라일리우스와 더붙어 에스파냐 방면 지휘관으로 2만 5천명과 함께 파견되어 도망병을 수습해서 바이쿨라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여러 차례 에스파냐의 한니발 군을 물리치고 일리파 전투에서 에스파냐 총독인 마고휘화 7만 4천 대군을 겨우 5만 8천으로 격파하고 기원전 206년 귀국해서 이듬해 겨우 30세라는 이례적인 나이로 집정관에 올라 기원전 204년 3만 8천의 군대를 거느리고 아프리카로 진군해서 자마 전투에서 가장 큰 승리를 거두면서 카르타고의 항복 조약을 이끌어냈다.

 

귀국한 스키피오는 기원전 199년 감찰관으로 선출되어 기원전 195년까지 감찰관을 지냈다. 기원전 194년기원전 190년 실질적인 집정관이 되어서 안티오코스군을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그들을 물리쳤다. 그후 기원전 184년 대 카토 에게 탄핵당하여 물러났으며 이듬해 52세로 죽었다.

 

 

한니발 [Hannibal, BC 247~BC 183]

 

카르타고의 정치가·장군. 제2차 포에니 전쟁(한니발전쟁)을 일으켜 육로로 피레네산맥과 알프스를 넘어서 이탈리아로 침입, 각지에서 로마군을 격파했다. 그러나 대()스키피오가 카르타고를 공격하자 고국에 소환되어 자마 전투에서 대패했다.

 

하밀카르 바르카스의 아들. 제1차 포에니전쟁에 패전한 후 아버지를 따라 카르타고(아프리카 북부)에서 에스파냐로 갔으며, 아버지와 매형 하스드루발의 뒤를 이어 BC 221년 26세의 젊은 나이로 에스파냐 주둔군의 총지휘관이 되었다.

 

어려서부터 로마에 대한 복수심에 불탔으며, BC 219년 로마군 점령하의 에스파냐 도시 사군툼을 함락시키고, 이듬해 에브로강을 건너자, 로마로부터 선전포고를 받아 제2차 포에니전쟁(한니발전쟁)의 전단()이 열렸다. 그는 육로로 이탈리아 진공계획을 세우고 피레네산맥을 넘어 남프랑스를 석권하고, 다시 눈덮인 알프스를 넘어서 이탈리아로 침입, BC 217년 트라시메누스 호반()의 전투를 비롯하여 각지에서 로마군을 격파하였다.

 

특히 BC 216년 칸나에전투에서는 교묘한 용병술()을 발휘하여 로마군을 철저하게 격파하였으나 전선은 점차 교착상태에 빠졌다. 점차 전세를 회복하기 시작한 로마군에 의하여 에스파냐로부터의 원군()도 격멸당하였으며, 로마의 장군 대()스키피오가 에스파냐를 정복하고 카르타고로 육박하였다. 한니발은 고국에 소환되었으며, BC 202년 자마전투에서 스키피오에게 대패함으로써 결국 제2차 포에니전쟁도 카르타고의 패배로 끝났다.


[제2차 포에니전쟁]

그후 카르타고의 집정관()이 되어 로마에 대한 보복기회를 노렸으나, 정적()에 의해 시리아와의 통모()를 획책하고 있다는 통고가 로마로 보내졌기 때문에, BC 196년 그는 시리아로 피신하였다.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3세와 함께 로마군과 싸웠으나, BC 190년 안티오코스군이 마그네시아에서 로마군에 패배하자, 그는 다시 소아시아비티니아로 피신하였으며, 로마가 그의 신병인도를 요구함에 이르자 자살하였다. 그는 알렉산드로스대왕, 피로스와 비견되는 고대사상 굴지의 전술가였다.

 

 

일주일 내내 보고 싶은 사람

 

월요일은

월계수잎을 따서 한올한올 엮어서
월계관을 씌워주고 싶어 보고 싶습니다

 

화요일은

화사하게 웃는 하얀얼굴이
하늘 가득 보고  싶습니다

 

수요일은

수도없이 내마음에 들어있는
내마음에 수호천사가 보고 싶습니다

 

목요일은

목숨걸고 사랑하고 싶어서
보고 싶어집니다

 

금요일은

금빛날개 휘날리며 날아서
태양같이 환하게 보고 싶습니다

 

토요일은

토라지는 모습까지 사랑스러워
너무 많이 보고 싶습니다


일요일은

일주일 내내 보고싶은 마음
극에 달해 일일이 보고픈마음 점검하여
보고 싶습니다

 

첨부이미지

일주일 내내 보고싶은 사람..

바로..

바로당신!."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호민관 [, tribunus plebis]

 

고대 로마에서 평민의 권리를 지키기 위하여 평민 중에서 선출한 관직.

 

공화정 초기인 BC 494년 평민과 귀족과의 신분투쟁 결과 생긴 것이라 한다. 정원은 BC 449년 이후 10명이었고 임기는 1년이며, 평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것이 임무였다. 그 신분은 신성불가침이며, 정무관과 원로원의 결정에 대하여 거부권을 발동할 수 있었다. 평민회의 의장으로서 본래 명령권과 권한이 없었기 때문에 점차 국가의 다른 관료와 구별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평민회의 의결이 국법과 동등한 구속력을 가지게 된 뒤(BC 287년 호르텐시우스법)로는 호민관의 권한이 증대되었다. 공화정 말기에는 평민회 의장으로서 또는 거부권 발동에 따라 정치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정쟁()의 도구가 되었다. 이 직위를 발판으로 삼아 사회개혁을 기도한 것이 그라쿠스 형제이다. 술라는 호민관이 국가의 정무관()임을 부인하였으나 곧 복구되었다. 제정()시대에도 관직으로서는 존속하였지만, 그 본래의 기능은 상실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