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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 1978년 신년휘호 天下雖安 忘戰必危

by 연송 김환수 2012. 1. 13.

 

박정희 대통령 1978년 신년휘호

 

 

天下雖安 忘戰必危

 

천하수안 망전필위(天下雖安 忘戰必危)

비록 세상이 평화로워도 전쟁을 대비하지 않으면 반드시 위기가 온다.

규격 : 세로 52cm × 가로 38cm  

 

궁금한 것은 국내 OO사이트 경매에 나왔던 1978년 박정희 전대통령님의 신년휘호 입니다.

 

싼 입찰가격(십여만원)에 마음이 동하여 참가 하려다가 결국 포기한 휘호입니다. 잘 한것인지 아니면 큰 실수를 한것인지...ㅠㅠ 하지만 미련이 남는 것은 어쩔수 없네요...

 

진위여부를 떠나 담고 있는 뜻이 좋아서 낙찰받아 표구하여 곁에 두려고 몇번을 망설였는데 마지막 10분을 두고 입찰을 포기했습니다.

   

경매 참가를 위해 찾아 보았던 당시의 자료들 입니다.

   

당시의 신문('78.1.1자와 '78.10.16자)을 보면 서체가 약간 다른 2종류의 신년휘호가 실려 있음을 볼때 몇 종류의 휘호가 존재 했다고 보여집니다. 여러장의 신년휘호를 써서 언론기관이나 주위 실세에게 나누어 주신 것으로 보여집니다.

  

임진전란사(1974.11.5발행) 서두에 쓰여진 동일한 내용의 휘호도 신년휘호와는 서체가 확연하게 다릅니다.

 

따라서 박정희 전대통령의 신년휘호는 다양한 서체가 나올수 있다고 봅니다.

 

같은 시기에 쓴 서체를 찾아 보았습니다.

위 신년휘호의 진위여부는 모릅니다. 다만, 낙찰받으신 분이 전문

감정을 의뢰하면 답이 나오겠지요.

 

 

경향신문 (1978년 1월 1일) 신년휘호

경향신문 (1978년 1월 1일)

 

경향신문 (1978년 10월 16일) 동년 1월1일자 서체와 약간 다릅니다.

첫글자인 天(하늘천)자 부터 다른 것을 보면 몇종의 휘호가 있을 것

같다는 느낌입니다.

 

 

 

 경향신문 (1978년 10월 16일)

 

 경매에 나왔던 진위 여부 미확인 휘호

 경향신문(1978.10.16) 휘호와 진위 여부 미확인 휘호 비교

 

 임진전란사(1974.11.5발행) 서두에 쓰여진 동일한 내용의 휘호

 서체가 신년휘호와 많이 다름

 

 

 경향신문(1978.10.16) 휘호, 진위 미확인 휘호, 임진전란사 휘호 비교

 

경향신문(1978.10.16), 진위 미확인, 임진전란사, 경향신문(1978.1.1) 휘호 비교 

 

 박 전대통령 친필휘호 뉴욕 소더비 경매장 출품 (동아일보1995. 3.23)

 

박정희 대통령은 1978년 자주총화와 국리민복, 그리고 천하수안(天下雖安) 망전필위(忘戰必危) 두 가지의 신년휘호를 국민들에게 제시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국민들의 단결을 촉구하고, 이러한 단결은 결국 국가의 이익이 되고 국민들에게 복이 돌아 올 것이라는 것을 강조 전달하였다.

 

또 천하수안 망전필위는 천하가 비록 안위하고 평화스럽더라도 국민들이 전쟁을 망각하면 필연적으로 위험이 기다리고 있다는 위협을 강조하였다.

 

이말은 전국시대 제나라의 대부(명장) 사마양저가 썼다는 사마법(司馬法)에 나오는 천하수안 망전필위(天下雖安 忘戰必危)에서 어원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나라가 비록 평안하다 하더라도 전쟁을 잊으면 필히 위기가 닥친다"는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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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매참가자 질의와 답변 내용 하나를 적어봅니다. 

어떻게 소장하게 되셨는지 간단히라도 말씀해 주시면 입찰에 참고하겠습니다 꾸벅 2012/01/05

 

판매자 [답변] 안녕하세요^^

관심 감사드립니다. 2004~5년 경에 제가 가지고 있던 싯가 500만원 짜리 그림과 바꿨습니다. 다른 거 사면서 돈이 없어 이 작품은 그림과 바꾼 작품입니다. 그분이 어떻게 소장했는지는 모르겟습니다.다만 듣기로 3공의 실세집에서 나왔다고 하는 말은 들었습니다만 ..그러나 그런 건 믿으면 안됩니다. 참고사항일 뿐입니다. 작품을 수집할 때는 가장 먼저 자신의 안목을 믿고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안에서 구매하시면 됩니다. 도움이 되었길 바랍니다. 제가이 작품을 취미란에 올리 거는 객관적인 감정을 받은 게 없어 그런 것이지 볼품없는 작품이란 것은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2012/01/05

 

 

사마양저(司馬穰苴)는 중국 춘추시대 제나라의 장군이다.

 

성은 규(嬀), 씨는 전(田), 이름은 양저(穰苴)이다. 재상 안영(晏嬰)의 추천으로 등용되고, 제 경공이 제나라의 번영에 공적을 올리자 그를 대사마로 임명되었고, 사마씨(司馬氏)로 칭하여 사마양저로 불리었다. 그리고 대사마가 이전에 불렸던 전양저로 불리도 한다. 병법서 사마법(사마병법)의 저자이자, 전완의 후예이다.

 

생애당시 제나라는 긴 내란이 끝나고 경공(景公)이 즉위 하였고, 유명한 신하 안영이 경공을 보좌를 하고 있었다. 또 진나라(陳)의 망명 귀족인 전씨의 세력이 급격하게 확대되어, 전씨의 대두에 기존의 귀족으로부터 질시와 경계가 심해지고 있었다. 그러한중에 제나라는 진나라(晉)와 연나라(燕)에 의해 공격받고 영토를 빼앗기고 경공은 빼앗긴 영토를 되찾고 싶었다. 안영이 경공에게 추천한 인물이 있었다. 그가 바로 사마양저이였다.

 

안영은 "양저는 전씨집안의 서자이지만, 그의 문덕(文德)은 병사를 일으키고, 그의 무덕(武德)은 적을 위압합니다. 주공께서 사마양저를 시험을 해보게 하시옵소서."라고 하였고, 제 경공은 사마양저와 병법에 대해 말하였고, 드디어 사마양저가 믿어도 될것 같다고 하였고, 장군에 임명하려고 했다. 그러나 사마양저는 "저는 원래 천한 신분으로서, 장군으로 임명해 주셔도 아래사람들은 저를 경시합시다. 그리고, 주공의 총애하는 신하로 부관으로서 삼아주십시오"라고 하였고, 경공은 그 청을 허락하여 장가(莊賈)를 임명하게 되었다.

 

사마양저와 장가는 "내일, 정오에서 군문에 모이시오"라고 약속하고 헤어졌다. 그러나 장가는 "고귀한 군대를 통솔하는 것이 자신이다"고 믿고, 친척이나 고관과 송별의 연회를 마련하여 다음날 정오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사마양저는 장가가 오지 않는 동안에 군을 정돈하여 군율을 전군에 보여졌다. 날도 저물어 겨우 장가가 왔다. 사마양저는 어째서 늦었는지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장가는 "친척과 고관들이 송별회를 열어 주었기 때문에 늦어졌다"라고 했다.

 

이것을 들은 사마양저는 "장군은, 일단 출격을 명령받으면 가족을 잊고 군중에 있어도 친척을 잊고 전장에 있어서 스스로의 안전을 잊는다 라고 말하였다. 지금 적군은 조용히 우리 나라에 침범하여, 국내에는 시끄럽게 하고, 군사는 몸에 바람과 비에 노출하여 싸우고, 자신도 걱정하여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밤에도 잘 수 없는 만큼인데, 송별회 때문에 출진이 늦는 것이 무슨 일인가!!"라고 격노하여, 군법에 따라서 장가를 처형하려고 했다. 무서워한 장가는 경공에 사자를 보내 살려달라고 했지만, 그 사자가 돌아오기 전에 사마양저는 장가를 처형했다. 이 사건으로 병사들은 긴장되어, 군대의 규율은 엄숙하게 되었다.

 

그 후, 사자가 돌아와서 경공이 장가를 용서해라고 말했지만, "장군이 군중에 있을 때는 비록 주공의 명령이든지 받지 않는 것이다."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사자를 쫓아버렸다.

 

사마양저는, 군중에 있고, 항상 병사와 행동하고, 식사도 같이 하였고 약한 자에게도 상냥하게 대했다. 그 결과, 사마양저는 병사에게 신뢰 받아 부상병도 출진하고 싶으면 신청했다. 이 사건을 들은 진,연나라 연합군은 퇴각하였고 사마양저는 추격하여, 잃어버린 영토를 모두 회복하였다. 제 경공은 사마양저를 대사마에 임명했다.

 

그 후, 전씨의 세력은 더욱 더 확대되었고, 귀족의 경계와 멸시도 더욱 심해지고, 사마양저는 귀족 포씨(鮑氏), 고씨(高氏), 국씨(國氏)등 귀족들에 중상 모략을 받는다. 그리고 귀족을 믿은 경공은 사마양저를 싫어하였고 관직에 해임되어 그 후 병이 들어 사망했다.

 

그 후도 전씨 세력이 축소되지 않고, 결국 강씨(姜氏)로부터 공위를 찬탈하였다. 그리고 제 위왕(威王) 때에 왕을 칭하기에 이르렸지만, 제 위왕은 사마양저의 병법을 존경하고 그의 병법을 흠모하였다. 위왕은 학자에 명하여 사마양저의 병법을 연구하여 사마양저병법 이라고 병법서를 편찬하였다. 이것이 후에 사마법이라는 병법서이다.

 

사마법사마양저의 병법을 모은 사마법은 전 55편 있었다고 여겨지지만, 현존하는 것은 「인본」·「천자지의」·「정작」·「엄위」·「용중」의 5편 뿐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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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의 연도별 신년휘호 알아보기

 

구경서<정치학박사/강남대학교>교수님 글 발췌인용

(원문을 수정없이 그대로 올립니다. 본 블러그 매니저의 의도와 다를 수 있습니다.)

 

박정희는 매년 정초에 1년을 설계하는 상징적인 내용을 담는 신년휘호를 국민들에게 전달하였다.

 

신년휘호는 박정희 자신이 직접 붓을 들고 써서 일간지에 발표되는 형식으로 국민들에게 전달되었다. 국가최고지도자가 국민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인 것이다.

 

박정희는 이를 통해서 당시의 정치적 상황이나 국가적 목표를 제시하는 계기로 삼았다. 또 국민들은 정치지도자의 신년휘호를 통해 의식을 결집하는 상징성을 갖기 때문에 박정희 집권기간동안에는 신년휘호가 무엇인가가 연초의 관심사였다.

 

그만큼 신년휘호는 국민들의 의식에 미치는 영향력이 컸고, 박정희도 18년5개월을 집권하면서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신년휘호를 발표하였다.

 

박정희가 1962년 이후 매년 신년휘호를 발표한 것은 첫째, 한국국민들에게는 의미가 깊은 정월 초하루에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전달함으로써 선전의 효과를 극대화시킬 수 있고 둘째, 국민들의 의식일체화를 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며 셋째, 한국적인 정서가 담긴 붓글씨로 발표함으로써 국민들과 좀더 가까이 하는 정치지도자라는 이미지를 심어 줄 수 있으며 넷째, 향후 1년간 있을 국가목표 또는 정치목표 등을 간단한 메시지를 통해 전달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박정희는 신년휘호를 중요한 선전수단으로 활용하였고, 선전으로써 그 효과도 상당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는 박정희가 연례적으로 발표한 신년휘호를 선전의 측면에서 연도별로 살펴보고 그 의미를 고찰하고자 한다.

 

(1) 혁명완수(革命完遂)

 

1962년 1월 1일에 발표된 신년휘호 혁명완수는 글자 그대로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자신의 정치적 목표를 표현한 것이다. 박정희는 1961년 5월 16일 군사쿠데타를 일으켰고, 이를 통해 권력을 장악하였다. 그해 7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으로 취임한 박정희에게 있어서 가장 큰 정치적 목표는 혁명(박정희의 표현대로)을 완수하는 것이었다. 박정희는 혁명을 완수함으로써 쿠데타를 정당화시키고 국민들에게 쿠데타의 당위성을 제공하기 위한 의미였다고 볼 수 있다. 혁명완수는 군사정부의 국정방향이었고 박정희가 국민들에게서 구해야 하는 정치적 과제였던 것이다. 박정희가 몇 번이나 약속하였던 민정이양도 혁명완수 이후에 가능하다고 말했던 것을 보면 쿠데타의 정당화를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2) 정청인화(政淸人和)

 

1963년 1월 1일에 발표된 정청인화는 ‘정치를 맑고 깨끗하게 하며, 국민들의 화합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신년휘호였다. 박정희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으로 재임하면서 기존의 구정치인들의 정치규제를 하였다가, 규제를 해제하면서 민주공화당, 민정당, 국민당, 민주당, 자유당 등이 창당되어 구정치인들이 정치참여가 줄을 잇자 박정희는 깨끗한 정치를 강조하고 국민들이 화합을 해달라는 내용의 신년휘호를 발표하였던 것이다. 이 해에 대통령 및 국회의원선거가 실시되었고 박정희가 당선됨으로써 제3공화국이 발족되었다. 박정희는 정청인화를 통해 기존의 정치가 부패하였고, 깨끗하고 새로운 정치풍토를 조성하자는 의미에서 이러한 휘호를 발표하였다.

 

(3) 관청민자안(官淸民自安)

 

박정희는 1964년 신년휘호로 ‘공직자가 깨끗하고 청렴하면 국민들은 스스로 편안해진다’는 내용의 관청민자안을 발표하였다. 대통령으로서 최초로 발표된 관청민자안은 공직자를 통하여 국가 기강을 바로잡고 국민들을 편안하게 하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박정희는 1964년 1월 1일 발표된 신년 메시지에서

 

“국정에 임한 새 정부의 자세는 한마디로 성실한 일꾼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국민과 더불어 호흡하고 솔선하여 실천하는 믿을 수 있는 정부가 될 것을 국민 앞에 약속해 드립니다. 새 공화국의 앞날에 부정과 부패는 철저히 발본색원될 것이며, 공무원의 기강은 내실적으로 재확립될 것입니다.”

 

라고 말하였다.1) 박정희는 제3공화국의 출범과 함께 새로운 정부는 이전의 정부와 달리 부정과 부패를 허용하지 않고 공직사회의 기강을 바로잡아 새로운 정부의 이미지를 심으려했던 것이다.

 

(4) 근면검소(勤勉儉素)

 

1965년 1월 1일 발표된 근면검소는 경제개발과 관련된다. 박정희 정권에서 긍정적인 측면에서 상징성을 갖는 경제개발은 국민들이 허리띠를 졸라 메고 땀흘리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는 것이었다. 박정희는 1962년부터 실시된 경제개발의 성공을 위해 국민들의 적극적 참여를 독려하였고, 이러한 의지의 표현이 바로 근면검소였다. 박정희는 또한 1965년을 ‘일 하는 해’로 정하는 등 국민들이 국가정책과 국가목표에 적극 참여하도록 유도하였다.

 

(5) 자립(自立)

 

1966년에 발표된 자립은 국민들에게 당시 한국의 정치적․경제적 상황을 전파하는 동시에 국민의식을 일체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미국과 일본 등의 경제적 원조로 경제발전이 이루어지고 있었고, 정치적으로는 미국 등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하였다. 이러한 측면에서 박정희는 국민들에게 자립이라는 휘호를 전파함으로써 경제적 자립과 정치적 자립을 동시에 추구하고자 하였다.

 

(6) 도약(跳躍)

 

1967년에 발표된 도약은 제2차경제개발계획이 시작되는 해였다. 박정희는 제1차경제개발계획의 성공적 목표달성을 계기로 그 동안의 경제적 업적을 강조하고 새로운 경제개발계획으로 국가발전을 도모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박정희는 국민들에게 더욱 분발하고 노력할 할 것을 강조하여 국민들의 의식을 일체화시킬 수 있는 기회를 맞은 것이다. 도약은 좀더 높은 지향점을 향하는 것이며 희망을 불러일으키는 구호였다.

 

(7) 정론불멸(正論不滅)

 

1968년의 신년휘호는 정론불멸이었다. ‘바른 말은 변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올바른 생각과 행동에서 나오는 여론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1968년이면 정치적으로 북한 무장공비의 청와대 기습사건과 울진․삼척지역에 간첩이 남파되는 등 남북간에 긴장이 조성되고 있었고, 또한 제3공화국 말기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사회적 혼란이 야기되고 있었다. 박정희는 국민들의 여론이 체제 내에서 이루어지도록 하고 체제 밖의 것들은 인정하지 않았다. 이러한 의미에서 정론불멸은 정치․사회의 정론을 주장하기보다는 국민들의 사상적 통제를 강화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8) 중단하는 자는 승리하지 못한다

 

1969년부터 박정희에 대한 국민들의 저항이 거세지기 시작하였다. 일부 지식인들의 반체제적 운동과 노동계급의 저항이 시작되고 있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박정희는 3선을 금지한 헌법을 개정하여 권력연장을 획책한다. 박정희는 이러한 측면에서 자신이 계속하여 권력을 장악하고 체제의 연속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중단하는 자는 승리하지 못한다’와 같은 신년휘호를 만들어 낸 것이다.

 

(9) 착실한 전진

 

1970년은 제2차경제개발계획이 한창 진행되고 있는 시기였다. 박정희는 70년대에 1인당 국민소득 500달러, 수출 50억 달러라는 목표를 국민들에게 제시하였다. 이러한 경제목표는 정치적으로 분산된 국민의식을 결집시키는 것이 되었고 박정희는 정치적 억압을 가리고 경제목표 달성을 앞세워 국민들에 대한 정치적 동원을 용이하게 하였다.

 

(10) 중단 없는 전진

 

1971년은 박정희에게는 정치적으로 중요한 해였다. 제7대 대통령선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점차 거세지는 시민사회의 저항으로 박정희는 정치적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고, 야당의 기세도 만만치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박정희는 자신이 아니면 안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박정희는 자신이 계속해서 집권해야 한다는 의식을 심어주는 휘호였다.

 

(11) 유비무환(有備無患)

 

착실한 준비가 되어 있으면 어려움이 없다는 내용의 신년휘호를 발표한 것은 1972년이었다. 김대중과의 대통령선거전에서 가까스로 승리한 박정희는 국민들에게 위기감을 심어줄 필요가 있었다. 그것은 권력의 공고화와 지배의 용이함을 위해서였다. 특히, 남북 분단이라는 한국적인 정치상황은 이러한 위기를 심어주는데 더 없이 좋은 것이었다. 박정희는 유비무환을 통하여 국민들에게 불안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한편 권력의 공고화를 노렸다고 볼 수 있다.

 

(12) 국력배양(國力培養)

 

1973년 박정희는 국민들에게 다시 한번 북한의 존재를 간접적으로 암시하는 신년휘호를 발표하였다. 국력배양은 국가의 힘을 키우는 것으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사회 각분야에 걸쳐 긍정적인 측면이 있는 것이지만 그 이면에는 북한이라는 존재가 주는 위협을 강조함으로써 국민의식을 일체화하고, 내부적 결속을 다지는 계기를 마련하려고 하였다.

 

(13) 근검협동(勤儉協同)․총화유신(總和維新)

 

박정희는 1974년 신년휘호를 국민들이 열심히 일하고 검소하게 생활하며 협동정신으로 모두가 유신의 대열에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근검협동․총화유신을 발표하였다. 국민들에게 근면성과 검소한 생활을 강조함으로써 심리적 위축을 심어주고, 국민 모두가 일심동체가 되는 협동정신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선전의 암시는 결국 총화유신으로 귀결된다. 박정희의 정치적 목표라고 할 수 있는 유신의 성공적 수행을 위해서 국민들이 총화단결할 것을 강조함으로써 국민들에게 심리적 압박감을 불러 넣었다.

 

(14) 근검절약(勤儉節約)․국론통일(國論統一)

 

박정희는 1975년 신년휘호로 근검절약․국론통일을 강조하였다. 박정희는 74년에 이어 75년에도 여전히 국민들이 절약하고 검소한 생활을 해줄 것을 당부하면서, 국민의식을 일체화시킬 수 있는 국론통일을 전파하였다. 국론통일은 사실상 국민둘의 의식이 유신체제에 편입되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박정희는 이를 통해서 체제를 부정하거나 저항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15) 증산절약(增産節約)․자조자립(自助自立)

 

박정희는 1976년 농업생산성을 증대하고 서로 돕고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는 증산절약과 자조자립을 신년휘호로 삼았다. 이른바 업적주의적 또는 성과주의적인 박정희의 경제에 대한 성향이 드러나는 것이었다. 또한 국민들의 의식의 일탈을 허용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자조자립을 강조하였다.

 

(16) 총화약진(總和躍進)․균형발전(均衡發展)

 

1977년 신년휘호는 총화약진과 균형발전이었다. 총화약진은 국민 모두가 하나로 단결하여 전진하자는 의미이며, 균형발전은 수출100억 달러의 목표를 달성하고 국토의 종합적 개발과 균형적인 발전을 시키겠다는 의지를 표명하였다. 박정희는 이를 통하여 국민들이 자신이 설정한 목표에 따라오도록 강조하였다.

 

(17) 자주총화(自主總和)․국리민복(國利民福), 천하수안(天下雖安)․망전필위(忘戰必危)

 

박정희는 1978년 자주총화와 국리민복, 그리고 천하수안과 망전필위 두 가지의 신년휘호를 국민들에게 제시하였다. 박정희는 국민들의 단결을 촉구하고, 이러한 단결은 결국 국가의 이익이 되고 국민들에게 복이 돌아 올 것이라는 것을 강조․전달하였다. 또 천하수안․망전필위는 천하가 비록 안위하고 평화스럽더라도 국민들이 전쟁을 망각하면 필연적으로 위험이 기다리고 있다는 위협을 강조하였다. 이는 국민들에게 위기감을 조성함으로써 의식일체화를 꾀한 것이라 하겠다.

 

(18) 총화전진(總和前進)

 

1979년 박정희는 신년휘호를 총화전진으로 정하였다. 총화전진은 국민들의 단결을 도모하고 계속하여 앞으로 전진할 것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유신체제 막바지에 달한 박정희는 국민들의 저항이 계속되고, 체제에 대한 불신이 깊어지면서 국민들의 의식단결을 강조함으로써 체제방어를 강조하였다.

 

지금까지 박정희가 집권기간동안 발표한 신년휘호를 살펴보았다. 박정희가 발표한 신년휘호의 특징은 첫째, 국민의식의 단결을 요구하고 결집시키려는 의식일체화를 담는 내용이 주종을 이루며 둘째, 자신의 정치이념이나 지도이념 또는 국가목표를 신년휘호를 통해 국민들에게 전달하였으며 셋째, 당시의 경제적 상황이나 정치적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내용을 주로 국민들에게 전달하였으며 넷째, 신년휘호의 내용을 수행하는 사람은 박정희 자신이기보다는 국민들이 수행해야 할 것을 강조함으로써 국민들의 의식일탈을 허용하지 않는 한편 자신이 설정한 목표에 국민들이 추종할 것을 강조하였으며 다섯째, 국민들에게 앞으로의 전진만을 강조하여 업적주의적 경향을 볼 수 있으며 여섯째, 북한의 존재를 구민들에게 위협존재로 상정하고 국내정치의 안정과 국민들의 단결을 촉구한 것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