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안김 뿌리찾기/뿌리찾기

우리는 처음부터 한 민족이었나? (下)

by 연송 김환수 2010. 12. 26.

한민족의 북방이주

 


한민족은 신라의 통일 이후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그리고 일제시대에 걸쳐 평안도와 함경도 그리고 만주와 연해주로 꾸준히 이주하였다. 이러한 이주는 주로 국가가 정책적으로 주민들을 이주시키는 사민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왕씨고려는 건국 초기부터 북진정책을 표방하였는데 이러한 북진정책에는 사민정책이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고려의 수도였던 평양은 신라에 속해있지 않다가 궁예 왕 때인 905년 평양성주 금용이 투항해 오면서 태봉에 속하게 되었다. 이후 태봉을 이은 왕건은 다른 지역의 주민들을 이곳으로 이주시켜 황폐화된 평양을 되살리기 위해 애썼다.


993년 요나라의 소손녕이 왕씨고려에 쳐들어 왔는데 서희가 그들과 협상한 끝에 왕씨고려가 요나라의 신하가 된다는 조건으로 지금의 평안북도에 해당하는 압록강 동쪽 여진의 거주 지역 280 리를 왕씨고려가 점유하기로 한다.

 

그 뒤 왕씨고려는 이곳의 여진부락을 소탕하고 요나라의 두 차례에 걸친 침략마저 물리치며 이곳을 지켜냈다.


1107년 윤관은 17만 대군을 이끌고 지금의 함경남도 지역에 살고 있던 여진족들을 몰아내고 9성을 쌓았다.

 

그리고 남도지방의 이주민들로 하여금 이곳을 개척하여 살게 하였는데 함주에 이주민 1,948가구, 영주에 이주민 1,238가구, 웅주에 이주민 1,436가구, 복주에 이주민 680가구, 길주에 이주민 680가구, 공험진에 이주민 532가구를 이주시켰다.

 

그러나 1109년 여진으로부터 조공을 받는다는 조건으로 그들에게 모두 돌려주고 철수하게 된다.


1258년 몽골의 별장 산길과 보지 등이 이끈 군대가 천리장성을 넘어 화주에 이르자 조휘와 탁정이 동북면병마사 신집평을 죽이고 철령 이북의 땅을 그들에게 바쳤다.

 

몽골은 이 지역에 쌍성총관부를 두고 100여 년간 함경남도 일대를 통치하였다. 1356년 동북면병마사 유인우가 이성계의 아버지 천호 이자춘의 도움으로 이곳을 차지하고 화주목을 설치함으로써 이 지역은 다시 왕씨고려의 영역이 되었다.
고려시대에 사민정책에 의해 북방으로 이주한 사람들은 이 지역에 배치된 주진군을 구성하는 주요 구성원이었다.


왕씨고려의 말기에 이르러서는 새로 개척된 북방영토로 사민에 의하지 않은 자발적 이주도 많았다.


왕씨고려의 영토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이씨조선은 영토를 북쪽으로 더욱 확장하여 지금의 국경선인 압록강과 두만강에 이르게 된다.


이씨조선은 먼저 지금의 자강도 북단에 해당하는 지역에 1416년부터 1443년까지 차례로 4군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야인들의 출몰이 빈번하고 방비가 어려워지자 1455년에는 3군을 그리고 1458년에는 남은 한 개의 군마저 철폐하고 이곳에 살던 주민들을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게 하였다. 또 1434년부터 1449년에 걸쳐서는 함경북도 북단의 야인들을 몰아내고 6진을 설치하였다.


이렇게 확장된 영토에는 세종대부터 성종대에 걸쳐 경상도, 전라도 그리고 충청도의 주민들을 대거 이주시켰다. 세종대에는 경상도와 전라도의 주민들을 대거 이주시켰는데 그 규모가 몇 개의 군현을 일시에 옮긴 것과 같은 규모였다고 한다.

 

세조대에는 경상도에서 2,500호, 전라도에서 1,500호 그리고 충청도에서 500호를 뽑아 평안도, 황해도 그리고 강원도로 이주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사민은 성종대까지 이어졌다. 이렇게 국가가 정책적으로 주민들을 이주시킨 이유는 새로 개척된 영토에 인구가 희박하고 이민족이 잔류하는 경우도 있어 우리의 영토임을 보다 공고히 하기 위해서였다.

 

또 떠돌아다니는 유민들을 정착시키거나 남부지방의 발달된 농업기술을 북부지방에 보급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이러한 사민은 스스로 지원해서 하는 경우도 있었고 강제적으로 시키는 경우도 있었으며 심지어는 죄수들을 이주시키는 경우도 있었다.

 

또 조세감면이나 신분상승같은 유인책을 쓰기도 하고 지방의 향리나 양반과 같이 어려운 처지가 아닌 사람들을 이주시키기도 했다.


이조말기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이주의 양상이 다르게 변한다. 기존의 남부지방에서 북부지방으로의 이주가 아니라 반도에서 대륙으로의 이주가 시작된 것이다. 원래 백두산과 두만강 이북은 만주족의 영역이었다.

 

그것은 만주족의 건국신화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백두산을 중국에서는 장백산이라고 부르는데 이 장백산 주위가 바로 청나라 건국신화의 무대가 된다. 만주원류고에 실려 있는 청나라의 건국신화는 다음과 같다.


‘장백산 동쪽에 포고리산이 있었는데 그 포고리산 아래에 포르호리라는 연못이 있었다. 그 연못에는 하늘에 사는 세 선녀가 내려와 목욕을 하곤 했었는데 하루는 신령스러운 까치 한 마리가 붉은 열매를 물어 와서 셋째 선녀의 옷에 놓아두었다.

 

목욕을 마친 셋째 선녀가 이 열매를 보고 입에 넣자 그 열매는 갑자기 뱃속으로 들어가더니 그 선녀를 임신시켰다. 그리고는 이내 한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는 매우 특이한 몸매를 하고 있었고 낳자마자 말도 할 수 있었다.

 

선녀는 그 아이에게 애신각라(愛新覺羅)라는 성과 포고리옹순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포고리옹순이 자라자 선녀는 작은 거룻배를 주면서 하늘이 너를 낳았으니 세상에 나가 난국을 평정하고 그들을 다스리라 하고는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포고리옹순은 거룻배를 타고 내려가다 어느 물가에 닿았는데 거기서 그는 버들가지와 쑥을 꺾어 자리를 만들고는 단좌하고 앉아 있었다. 그 당시 장백산의 동남쪽에서는 세 성씨를 쓰는 사람들이 서로 전쟁을 일삼고 있었다.

 

그들 중 한 사람이 물가에서 물을 긷다가 포고리옹순을 보고는 돌아가서 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자 세 성씨의 사람들이 포고리옹순에게 몰려와 누구인지 물어보므로 포고리옹순은 그들의 난을 평정하기 위해 하늘이 내린 사람이라고 답했다.

 

그 얘기를 들은 세 성씨의 사람들은 포고리옹순을 손가마에 태워 마을로 데려가더니 자신들의 왕으로 삼았다. 그리고 여자아이 하나를 그에게 시집보내고 나라의 이름을 만주라 하였다. 만주란 “우리의 아침햇살이 동녘 땅을 연다.”는 뜻이다.’


1616년 누르하치가 세운 후금은 1636년 국호를 청이라 고치고 중국을 정복하였다. 그리고 여진족들은 대거 중원으로 옮겨가 중국대륙을 다스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발상지인 백두산 일대를 잊지 않고 그곳을 신성시하며 보호하였다. 1677년 청나라는 압록강과 백두산 그리고 두만강 이북을 봉금지로 설정하여 한족이나 조선인의 유입을 엄격히 금지하였다.

 

1712년에는 백두산정계비를 세워 이씨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국경선을 분명히 하기도 했다. 이씨조선에서도 봉쇄령을 내려 강을 넘어가는 것을 막았다. 그러나 19세기 후반기에 들어오면서부터는 한반도에서 살기가 어려워진 조선인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가 땅을 개간하며 살기 시작하였는데 청나라나 이씨조선이나 이를 막기가 매우 힘들었다.

 

또 연해주를 개척한 러시아가 만주로 세력을 뻗쳐오자 이를 견제하기 위해 청나라는 1881년 봉금령을 해제하였고 조선인의 간도이주도 묵인하는 자세를 취하게 되었다.

 

1910년에서 1920년 사이에는 이씨조선이 일제의 식민지가 되자 정치적인 이유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생기게 되었고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으로 토지를 잃은 농민들이 이주하는 경우도 많았다. 또 1937년부터는 일제가 대량으로 한반도 남부지역의 농민들을 만주로 이주시키기 시작했는데 이로 인해 이 지역의 조선인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게 되었다.


한편 연해주는 간도의 일부로 인식되어왔었으나 1860년 청나라와 러시아가 베이징조약을 맺은 후부터는 러시아의 영토가 되었다. 연해주로 이주했던 조선인들은 1937년 소련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를 당하였는데 이들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고려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다.

 

한편 만주로 이주한 사람들은 오늘날 우리들이 조선족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러한 조선족이나 고려인은 몇 대만 따져 올라가 보면 바로 경상도나 전라도와 같은 한반도 출신 조상들을 만나게 된다.


요약하면, 왕씨고려와 이씨조선에 걸쳐 확장된 영토인 평안도와 함경도에 사는 사람들, 그리고 현재 만주에 사는 조선족이나 중앙아시아에 살고 있는 고려인, 이 모두가 그 뿌리를 따져 올라가 보면 결국 신라인에 이르게 된다.


신라의 통일을 두고 사람들은 우리 민족의 강역이었던 만주를 상실한 불완전한 통일이었다는 비난을 자주 한다. 이에 대해 노르웨이 오슬로 국립대의 박노자 교수는 '애당초 만주를 차지했던 적이 없었기 때문에 만주를 상실했을 리는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 말은 이제까지 살펴본 내용과 그 의미가 서로 통한다.

 

 

성씨로 가늠해 보는 한민족의 정체성


통계청의 2000년 인구통계조사에 의하면 100만 명 이상의 인구를 가진 성씨가 5개 있는데 그것은 아래와 같다.

 

김해 김씨 412만
밀양 박씨 303만
전주 이씨 261만
경주 김씨 174만
경주 이씨 142만

 

위의 자료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성씨가 대부분 신라/가야계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같은 조사에서 100만 명 이상의 인구를 가진 본관이 6개 있는데 그것은 아래와 같다.

 

경북 경주 482만
경남 김해 449만
경남 밀양 340만
전북 전주 321만
경남 진주 137만
경북 안동 126만

 

위의 자료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성씨가 대부분 경상도 지역에서 비롯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 시조로 따져보게 되면 우리나라에는 신라의 김알지와 박혁거세의 후손이 압도적으로 많다. 아래 자료는 ‘뿌리를 찾아서’에 게재되어 있는 정보를 바탕으로 집계한 것이다.

 

김알지의 후손:


가평김씨, 감천김씨, 강릉김씨, 강서김씨, 광산김씨, 강화김씨, 개성김씨, 결성김씨, 경주김씨, 계림김씨, 고령김씨, 고양김씨, 공주김씨, 광양김씨, 광주김씨, 괴산김씨, 교하김씨, 구례김씨, 금산김씨, 김녕김씨, 김제김씨, 김천김씨, 김화김씨, 나주김씨, 낙안김씨, 대구김씨, 도강김씨, 문화김씨, 밀양김씨, 배천김씨, 부안김씨, 삼척김씨, 상산김씨, 서흥김씨, 선산김씨, 설성김씨, 수안김씨, 수원김씨, 순천김씨, 신천김씨, 안로김씨, 안동김씨, 안산김씨, 안성김씨, 안악김씨, 야성김씨, 양근김씨, 양주김씨, 언양김씨, 연안김씨, 연주김씨, 영광김씨, 영동김씨, 영산김씨, 영월김씨, 영천김씨, 영해김씨, 오천김씨, 용담김씨, 용안김씨, 우봉김씨, 울산김씨, 원주김씨, 월성김씨, 의성김씨, 장연김씨, 전주김씨, 진잠김씨, 진주김씨, 진천김씨, 창원김씨, 청도김씨, 청풍김씨, 통천김씨, 풍산김씨, 하음김씨, 희천김씨, 감천 문씨, 광산 이씨, 수성 최씨.

 

박혁거세의 후손:


강릉박씨, 고령박씨, 고성박씨, 군위박씨, 면천박씨, 무안박씨, 문의박씨, 밀양박씨, 반남박씨, 사천박씨, 삼척박씨, 상산박씨, 상주박씨, 선산박씨, 순천박씨, 여주박씨, 영암박씨, 영해박씨, 운봉박씨, 울산박씨, 월성박씨, 은풍박씨, 인제박씨, 전주박씨, 죽산박씨, 진원박씨, 창원박씨, 춘천박씨, 충주박씨, 태안박씨, 평주박씨, 평택박씨, 함양박씨.

 

이러한 자료들을 해석하기 전에 먼저 우리나라 성씨의 역사를 잠깐 살펴보자.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까지만 해도 왕족과 몇몇 귀족가문만 성을 가지고 있었다.

 

백제의 왕족은 여, 부여 등의 성을 사용하였고 귀족들은 8족을 비롯하여 흑치, 사마 등 20여 가지 성을 사용하였다. 고려의 왕족은 고씨성을 사용하였고 귀족들은 연, 을지 등 20여종의 성을 사용한 것이 역사기록에서 확인된다. 신라는 왕족이 박/석/김 3성을 사용하였고 귀족들은 이, 최, 정, 손, 배, 설 등 10여 가지 성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신라의 통일 이후에는 백제와 고려의 성은 거의 사라지고 신라의 성만 9주5소경을 중심으로 퍼져 나가게 된다. 그러다 신라말기에 이르러 지방 호족들의 세력이 커지면서 이들도 스스로 성씨를 가지기 시작하였다.

 
왕씨고려에서는 개국공신들의 공로를 치하하거나 유력한 지방호족들을 포용하기 위해서 이들에게 성씨를 나누어 주었다. 또 향촌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해 백성들이 거주지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거주지의 명칭을 본관으로 사용하게 하였는데 이때부터 양인들도 성씨를 가지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확산되어 간 성씨는 이씨조선의 후기에 이르러 일부 천민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게 되었다.


아래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판 한국사론에 실려 있는 조선후기 대구지방의 신분별 인구변동 자료이다.

 

1690년 숙종 16년 양반  9.2%, 상민 53.7%, 천민 37.1%
1729년 영조  5년 양반 18.7%, 상민 54.7%, 천민 26.6%
1783년 정조  7년 양반 37.5%, 상민 57.5%, 천민  5.0%
1858년 철종  9년 양반 70.3%, 상민 28.2%, 천민  1.5%

 

 

이 자료를 보면 조선후기에 들어와 천민들의 비율이 급격히 감소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러한 경향은 유독 대구뿐만의 현상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다 그러했을 것이다. 이렇게 천민들의 수가 감소한다는 것은 곧 성씨가 없던 사람들이 성씨를 많이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과정에서 새로 성씨를 만들어 쓰는 사람도 있었겠지만 기존의 명문가문의 성씨를 가져다 쓴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현재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성씨는 대부분 오랜 역사를 지닌 명문가문의 성씨인데 그 많던 천민들이 대부분 자손을 낳지 못하고 사라진 것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이조말기까지도 남아있던 소수의 성씨 없는 사람들은 1894년 갑오경장으로 신분제가 폐지되고 1909년 민적법의 시행으로 모든 사람들이 성과 본관을 가지게 되면서부터 모두 사라지게 된다.

 

이때 새로 성씨를 가지게 된 사람들은 행정기관의 서기나 경찰이 지어준 성씨를 쓰기도 하고 노비의 경우는 상전의 성씨를 따르기도 했으며 아무런 연관이 없는 유명한 가문의 성씨를 가져다 쓰는 사람들도 있었다. 

 

일제시대에는 한민족 고유의 성명제를 폐지하고 일본식 씨명제를 쓰는 창씨개명을 실시하였다.

 

이 창씨개명은 1940년 2월에서 8월 사이에 신청을 받았는데 창씨개명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유무형의 불이익이 주어졌기 때문에 조선인 가구의 약 80%가 참여하였다. 그러나 1946년 미군정은 조선성명복구령으로 창씨개명한 이름을 모두 원래의 성씨로 복귀하게 하였다. 

 

이러한 성씨의 역사를 살펴볼 때 오늘날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성씨는 생물학적인 부계혈통과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을 것이라는 것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왜냐하면 다른 가문의 성씨를 가져다 쓰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위의 통계청 자료가 보여주는 우리나라 성씨의 경향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첫째, 남의 성씨를 빌려 쓴 게 아니라 원래부터 그 성씨를 썼던 사람들도 상당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고 둘째, 다른 가문의 성씨를 가져다 썼더라도 여러 세대를 이어오며 그 성씨를 사용하고 소속감을 느껴왔다면 그 성씨의 사람이라고 인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두 번째 이유에 대해 좀 더 살펴보자.

 

흑인과 백인이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는 흑인과 백인의 유전자를 반반씩 가지게 된다. 그러나 그 아이는 흑인의 외모를 하고 있기 때문에 남들이 모두 흑인으로 여길 것이고 스스로도 흑인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처럼 정체성이란 사람의 마음속에 생기는 것으로 생물학적인 유전자와는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한국사를 살펴보면 한족이나 북방계 유목민 그리고 왜인이 한반도로 흘러들어온 기록이 많다.

 

그러나 지금 자신을 한민족이 아닌 한족이나 거란족 또는 일본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대를 이어 한민족공동체에 섞여 살면서 정체성이 동화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씨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한국사람 누구도 자신을 어디 성씨의 제 몇 대 손이라고 생각하지 노비의 후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따라서 그 사람의 정체성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성씨와 대체로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성씨가 모이고 모여 통계청 자료에서 볼 수 있듯이 전체적으로 어떤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다른 가문의 성씨를 빌려 쓴 경우가 많았다는 사실이 우리나라 성씨의 통계가 보여주는 경향을 생물학적인 측면에서 의미를 축소시킬 수 있을지 모르나 정체성의 측면에서는 그 의미를 부정하지 못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대부분 신라/가야계 성씨와 경상도 지역의 본관을 가지고 있는 것은 한민족의 정체성이 어디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는지 가늠해 볼 수 있는 하나의 단서가 될 수 있다.

 

 

여기서 잠깐 성씨를 화제로 삼은데 대해 불편한 감정이 생기는 것을 해소하고자 한다.

우리 조상들은 가문을 중시해 왔다. 그러나 그것은 봉건시대의 가치관에 의한 것이므로 오늘날의 가치관으로 그것을 비난할 수는 없다.

 

오늘날에는 한 사람을 평가할 때 그의 가문보다는 그의 인간성과 사회적 역할을 가지고 평가한다. 인간(人間)이라 함은 사람들 틈에 사는 사람을 말한다. 사람들 틈에 사는 사람으로서 개인은 마땅히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과 건설적인 협력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이것을 보통 인간성이라고 한다.

 

또 사람들은 누구나 살아가기 위해 물질을 필요로 하는데 사회의 구성원이라면 마땅히 이러한 물질의 생산에 참여하고 기여해야 한다. 이것을 보통 사회적 역할이라고 한다.

 

노비라고 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특별히 피해를 준 것도 아니고 물질과 용역을 생산하는데 있어서 양반들보다 더 생산성이 떨어졌던 것도 아닐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가치관에 의한다면 가문은 자긍심이나 수치심과 전혀 별개의 문제임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가문의 성씨를 가져다 쓴 행위도 당시의 사회상을 고려한다면 못마땅한 일이 될 수 없다. 전근대 사회에서는 좋은 가문의 성씨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여러 가지 불이익이 돌아왔다.

 

당연히 그런 부당한 차별을 받지 않기 위해서 기회가 닿는 대로 유력가문의 성씨를 가져다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일제시대에 조선인의 80%가 창씨개명을 한 이유와도 동일하다. 오늘날 유력가문이라고 자부하는 성씨도 일제시대에는 대부분 창씨개명을 했었다.

 

또 다른 가문의 성씨를 가져다 쓰는 행위는 일반 민중들뿐만 아니라 왕족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민중들이 사회적 불이익을 피하기 위해 유력가문의 성씨를 가져다 쓴데 비해 그들은 정치적 이익을 위해 주로 중국 3황5제의 후손을 자처했다.

 

왕씨고려같은 경우는 당나라 숙종의 후손이라고 자처하다 원나라에서 왕이 수모를 당하는 일도 있었다. 오늘날을 사는 우리가 다른 가문의 성씨를 가져다 쓴 이러한 행위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기 쉬운데 그것은 옳지 않다.

 

것은 화석연료 덕분에 난방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우리가 조선시대 사람들이 왜 귀중한 자연을 훼손하며 산에 있는 나무를 잘라 땔감으로 썼느냐고 못마땅해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여기서 성씨문제를 고찰한 것은 성씨를 통하여 한민족의 정체성을 파악해 보고자 하는 것일 뿐이다.



종족에서 민족으로

 

신라통일 이후 한반도의 주민들은 단일정치공동체에 담기게 되면서 내부적으로는 동질화가 진행되고 대외적으로는 이질화가 진행되어 점차 주변의 여진이나 왜와는 뚜렷이 구별되는 하나의 집단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렇게 형성된 집단은 근대 이후의 한민족과 다소 차이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인류사회를 민족 간의 대립과 투쟁으로 보고 민족의 이익을 최대화하는 것을 공동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민족주의가 아직 생겨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래서 근대 이전의 한반도 주민들을 '종족'이라고 표현하여 근대 이후의 한민족과 구별하기도 한다. 그러나 보통 ‘민족’이라는 단어가 종족을 가리킬 때도 널리 사용되고 있으므로 여기서는 그러한 일반적인 용법을 그대로 쓰기로 한다.

 

다만 신라통일 이후의 한반도 거주민을 가리키는 말인 ‘한민족’이 근대 이전과 근대 이후에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만 구별해 보기로 한다.

 

봉건시대에는 한 나라의 사람이라 하더라도 다 똑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오늘날에야 사회적 지위를 막론하고 누구나 한 표의 투표권을 가지고 공동체의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똑같은 대한민국 국민이지만 봉건시대, 예를 들어 이조시대에만 해도 양반과 천민은 평등하지 않았다.

 

그래서 외적이 쳐들어 왔을 때 같은 조선인이라 하더라도 양반이 느끼는 조선에 대한 소속감과 천민이 느끼는 그것과는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그 몇 가지 예를 들어 본다.

 

선조수정실록 25년 4월 14일,

 

‘도성의 궁성에 불이 났다. 거가(선조일행의 피란행렬)가 떠나려 할 즈음 도성 안의 간악한 백성이 먼저 내탕고에 들어가 보물을 다투어 가졌는데, 이윽고 거가가 떠나자 난민이 크게 일어나 먼저 장례원과 형조를 불태웠으니 이는 두 곳의 관서에 공사 노비의 문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는 마침내 궁성의 창고를 크게 노략하고 인하여 불을 질러 흔적을 없앴다. 경복궁·창덕궁·창경궁의 세 궁궐이 일시에 모두 타버렸는데...(중략) 임해군의 집과 병조 판서 홍여순의 집도 불에 탔는데, 이 두 집은 평상시 많은 재물을 모았다고 소문이 났기 때문이었다.

 

유도 대장이 몇 사람의 목을 베어 군중을 경계시켰으나 난민이 떼로 일어나서 금지할 수가 없었다.’

 

이 기록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왜군의 한양진입이 코앞에 다가오자 선조가 황급히 피란을 떠나던 때의 기록이다.

 

체제질서에 공백이 생기자 백성들은 먼저 노비문서가 보관되어 있는 관청부터 불사르고 궁궐과 권력자들의 집을 털어 재물을 가져가고 불을 질렀다는 기록이다. 이 기록에 대해서는 진위의 논란이 있기도 한 부분이라 다른 예를 하나 더 들어본다.

 

국경인이란 사람은 원래 전주에 살다가 죄를 지어 함경도 회령으로 유배되었던 사람인데 나중에는 그곳에서 아전으로 들어가 지내고 있었다. 1592년 왜장 가토가 함경도로 진입하자 그는 주민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병력을 모집하러 그곳에 와 있던 선조의 두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을 잡아 왜군에 넘겼다. 그는 그 대가로 왜장으로부터 회령을 통치하는 권한을 얻어 횡포를 일삼다가 이내 유생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 국경인의 반란은 비단 국경인 한 사람만의 배신이 아니었다. 회령의 백성들이 동조하지 않았다면 그의 반란은 일시적으로도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외적이 침입해 와서 조국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오히려 일부 백성들은 조국의 지도층과 국가질서에 대해 공격을 가했는데 이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조선인과 왜인과의 대립구도 외에도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대립구도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대립구도는 신분제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이씨조선의 신분제는 사람들을 귀족, 양인 그리고 천인으로 나누었는데 그 중에서 천인은 가혹한 억압을 받았다.

 

그 천인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사람들이 노비였는데 그들은 매매, 증여, 상속의 대상이었고 상전이 직접 그들에게 형벌을 가할 수도 있었다.

 

노비는 신라가 통일하기 훨씬 이전부터 존재해 왔었는데 주로 전쟁포로나 죄인 그리고 파산한 사람들이 노비가 되었다.

 

신라촌락문서에 의하면 신라의 4개 촌락의 인구가 442명이었는데 이중 5.6%에 달하는 25명이 노비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으로 보아 이때까지만 해도 노비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후 후삼국과 왕씨고려에 걸쳐 호족들의 세력이 커지면서 호족들이 양인들을 자신들의 노비로 삼는 일이 많아 노비의 수는 크게 증가하였다.

 

이후에도 부모의 어느 한 쪽이 노비이면 그 자식도 노비가 된다는 규정 때문에 노비의 수는 계속 증가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00여 년 전인 성종 대에 이르러서는 전국의 호구가 100만호에 340만 명이었는데 노비는 150만 명에 달해 전체인구의 약 1/3이 노비였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100여년이 지난 후인 1690년 대구지방의 호구조사를 보면 천민인구는 전체인구의 37%에 달했다.

 

임진왜란은 이 두 기록의 사이에 일어났으므로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당시의 노비구성비율도 이 두 기록으로부터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왕조의 지배층에게는 당연히 왜군이 적이겠지만 노비들에게는 자신들을 억압하는 상전 또한 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것이다.

 

또 노비 외에도 사회적 차별을 받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바로 백정이었다. 백정은 아예 조선인이라는 소속감조차도 적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백정의 뿌리는 왕씨고려에 끝까지 저항했던 견씨백제 사람들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대체로 고려시대에 한반도로 귀화해온 여진, 몽골, 거란 등의 북방 유목민이었던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박옥걸 아주대 교수의 통계에 의하면 왕씨고려로 귀화해 온 외부사람들이 발해유민은 12만여 명, 여진족은 10만여 명 그리고 몽골인은 1만여 명 되는 것으로 나와 있다.

 

들 중 일부는 귀화한 후에도 유목민 기질이 남아있어서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면서 사냥을 하거나 민가의 가축을 잡아주거나 또는 재주를 부리며 살았다.

 

그들은 사회적으로 천대를 받았고 그래서인지 강도, 방화, 살인 등으로 민가에 피해를 주기도 했다. 거란족이 침입해 왔을 때에는 그들의 앞잡이가 되기도 했고 사회가 혼란한 틈을 타 왜구로 위장하여 민가를 약탈하기도 하는 등 한반도의 정착민들과는 오래도록 동일한 소속감을 가지지 못했다.

 

이렇게 같은 조선인이면서도 서로 간에 이질감이 생기게 했던 신분제와 사회적 차별은 1894년 갑오경장 이후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한반도에는 주민들 모두가 같은 조선인이라는 완전한 동질감을 가질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된 것이다.

 

그런 환경 속에서 자연히 인류사회의 구조를 민족 단위의 대립과 투쟁의 관계로 인식하는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근대적 의미의 민족이 형성된 것이다.



반만년 단일민족사의 의미

 

일본의 식민지배로부터 갓 해방된 대한민국은 일제가 식민통치를 합리화하기 위해서 조선인들에게 심어놓은 식민사관을 극복하고 새로운 민족국가에 대한 신념을 국민들에게 심어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민족주의 이념을 절대화하고 민족개념을 신성화하게 되었다.

 

그런데 민족의 기원에 대해 '서로 다른 종족으로 살아가던 사람들을 하나로 통합하면서 비로소 한민족이 형성되었다'고 한다면 그 신성함이 뚝 떨어지게 된다. 이렇게 되어서는 민족주의가 대중들에게 큰 힘을 발휘할 수 없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통합되기 전의 여러 종족들도 원래는 하나였었는데 갈라져 나오는 바람에 여러 종족이 되었다는 설명이 필요했다.

 

마침 그런 조건을 완벽하게 충족시켜 줄 수 있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단군신화였다. 단군을 시조의 자리에 끼워 넣고 이후의 역사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단일민족을 유지하며 반만년을 이어왔다고 하면 완벽한 설명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역사를 정치의 도구로 이용하는 것인데 이러한 역사정치를 최근까지도 완벽하게 실천하고 있는 곳이 바로 김씨조선이다.

 

김씨조선은 단군릉을 발굴하여 단군의 존재에 대한 물증까지 제시하며 ‘한민족은 각기 다른 뿌리를 가진 사람들의 혼혈로 이루어진 집단이 아니라 단군을 민족의 원시조로 하여 반만년의 역사기간 동안 한 핏줄을 가지고 하나의 언어를 쓰면서 살아온 단일민족’이라는 주장을 대중들에게 주입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 시대가 변했다. 우리 민족이 식민지배에서 벗어나 민족국가를 건설한 지는 벌써 60여년이나 되었다. 그리고 한국은 세계무대에서도 선도적인 역할을 하는 단단한 나라가 되었다.

 

해방 직후의 상황에서 필요했던 절대적 민족주의와 신성한 민족개념은 이제 더 이상 한국 사람들에게 필요하지 않다. 오히려 민족구성원들의 자유롭고 이성적인 정신세계에 방해가 될 뿐이다. 

 

또 요즘은 많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우리와 함께 일을 하고 또 많은 외국인 여성들도 한국으로 시집와서 우리의 아들딸을 낳고 사는 시대가 되었다.

 

이러한 시대에 단일민족 어쩌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외국인들과 함께 어울려 일을 하기도 힘들 것이고 외국인 아내가 낳은 자식들은 또래로부터 소외되어 올바르게 성장하지도 못할 것이다.

 

우리 민족이 처음부터 단일민족으로 시작해서 지금까지 순수한 혈통을 유지하며 살아왔다는 생각은 역사적으로도 사실이 아닐 뿐만 아니라 민족주의의 배타성을 희석시켜야 하는 시대적 요구와도 맞지 않는다.

 

출처 : http://kallery.net/index.php?g_clss=forum&g_prcss=thrd&g_tmplt=&g_brd=20&g_pg=1&g_thrd=17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