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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김 뿌리찾기/뿌리찾기

전통사찰 수리사 원형복원사업의 방향

by 연송 김환수 2010. 12. 6.

전통사찰 수리사 원형복원사업의 방향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원 기획취재 - ⑧
[2010-09-27 오후 4:00:00]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원 기획취재 -

[ 글 싣는 순서 ]

군포의 천년고찰, 수리사

효의 본산, 화성 용주사

백제의 유산, 익산 미륵사지

사례로 본 수리사 복원 방향

곽재우 의병장과 수리사의 인연

호국정신이 깃든 수리산

수리산 도립공원과 대야특화사업

수리사 원형복원의 방향세미나 지상중계

 

 


본지가 문화체육관광부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지난 7월부터 진행해 온 전통사찰 수리사 원형복원사업의 방향의 일환으로 준비한 세미나가 913일 군포문화예술회관 국제회의장에서 개최됐다.

 

이번 세미나에서는 수리사의 원형복원에 대한 전문가 의견과 수리사와 곽재우 장군의 인연, 6.25전쟁 전사자 유해발굴, 경기도의 수리산 도립공원 조성계획 등이 소개돼 참석한 300여명의 시민들의 큰 관심을 끌었다.

 

본지는 기획취재 마지막 순서로 세미나 주요 내용을 지상 중계하며 세미나 전 과정은 군포방송(www.gunponews.com)을 통해 녹화중계된다. <편집자주>

 

 

 

/ 세미나 지상중계 /

수리사 원형복원사업의 올바른 방향

 

전철우 문화 원형 찾아 스토리텔링 개발해야

김기룡 지역 주민의 공감대 형성이 시급

이용석 1%의 가능성만으로도 유해 발굴 나설 것

김상철 의령과 군포, 곽재우 인연으로 함께 발전하길

이용섭 최소한의 시설로 최대한 자연환경 보존할 계획

 

 

발제1. 천년고찰 수리사

- 전철우 수리사 사무장

수리사는 경기도 군포시 속달동 329번지에 자리하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 용주사의 말사다. 전통사찰 86호로서 신라 진흥왕 시대에 왕손인 운산대사가 창건해 고려시대에는 관오스님이 주지로 계시다가 입적했으며, 36개동의 건물과 12개의 암자를 지닐 정도의 대찰의 위용을 자랑하기도 했으나 임진왜란 당시에 거의 파괴됐다.

 

의병장 곽재우(1552-1617)장군이 수리사를 중창하고 수도생활을 했다고 전해 온다. 조선후기를 거쳐 일제강점기에도 사찰의 면모를 갖추고 서울에 포교당을 운영하기도 했으나 6.25전쟁으로 인해 19511월말에 본전을 비롯한 모든 건물이 소실되었다가 1955년 이후에 꾸준히 복원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수리사의 사세가 가장 융성했던 시기는 고려시대일 것으로 추정된다. 관련 기록이 남아 있는 문헌은 관오스님의 묘비명과 서문, 고려사 129권의 최충헌 반역열전 등이 있다. 또한 수리사 주변에서 발견되는 기와 파편이 주로 고려시대 기와인 것으로 판명되고 있다.

 

수리사의 북서쪽으로 난 길을 따라 수리사 능선을 넘으면 원당골과 수암동에 이르게 된다. 원당골에 원당사의 절터가 남아 있다. 이는 가까운 지역의 안산 김씨의 유가종(瑜伽宗)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본다.

수리사는 광주 안산에 있었으므로 안산김씨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고 믿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안산김씨와 왕실과 밀착 되면서 유가종의 유력한 사찰이 되었다.

 

고려시대에 국가를 혼란에 빠뜨린 최충헌을 죽이려고 1217년 개성의 흥원사, 경기의 수리사, 안양사와 홍원사, 경복사, 왕륜사 등의 승()으로 종군(從軍)한 자들이 최충헌 군과 가병들에게 협격을 당해 300여명이 모두 죽임을 당했다.

 

수리사는 친 왕권이면서 호국사찰이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신라 진흥왕의 왕손 운산대사가 건립, 신라의 중요 지형인 서해안에서 왕권확립에 기여했고 고려시대에는 유가종의 사찰로서 사세를 유지하다가 무인, 최충헌 등이 반역하자 종군해 국가와 왕실을 구하려 했다.

 

또한 곽재우 의병장이 수리사 중창시기와 머무른 시기는 16053, 한성부우윤이라는 관직을 제수받고 상경하지만 약 1개월 만에 지병으로 관직을 사직한 후인 16054월부터 16068(14개월)까지 거처했다고 추측된다.

 

곽재우는 관직을 사직한 후에도 담당했던 한성과 가까운 수리사에 머물면서 임금께 충성했다. 또한 곽재우는 불교에 관심이 많았다. 곽재우가 남긴 글에서 이나 속세등 불교와 관련 깊은 내용이 많다.

 

21세기는 문화 브랜드시대라고 한다. 문화 소재를 발굴함에는 원칙이 없다. 그리고 문화 소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의 신분도 중요하지 않다.

 

단지 문화 소재의 타당한 연관성을 찾아서 문화 산업화하는 문화적 담론이 중요하다. 그리고 문화 관련자와 담당공무원의 역사에 대한 자질과 식견이 요구되고 있다.

수리사는 6.25전쟁 후에 60년간 여러 스님과 신도, 화성군과 군포시의 관심, 지원으로 천년고찰의 위용을 갖추어 가고 있다.

 

문화원형(뿌리)을 찾아 수리산과 수리사 문화복원을 위한 공감하는 스토리텔링을 해야 한다.

 

수리산의 브랜드(Brand)는 무엇인가?’, ‘수리산에 산재된 문화원형과 테마는 관련 있는가?’를 살펴봐야 한다.

 

스토리텔링은 단순한 이야기의 차원을 넘어 이익을 창출하게 하고 더 나아가 그 이익을 많은 사람이 향유할 수 있기 때문에 지방자치 단체와 사회기관을 비롯한 다양한 사람들이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스토리텔링의 요소가 되는 문화원형의 발굴이 필요하다. 성공적인 문화산업에는 성공적인 스토리텔링이 있다.

 

수리산, 수리사에 대한 적합한 소재 고르기는 필요하나 소재 발굴에는 원칙이 없다. 그러나 수리산과 수리사의 의미를 획득하고 언어적 담론의 공감대가 형성되도록 하면서 구체화된 문화현상 조형으로 적합한 문화산업화 할 수 있는 소재 발굴이 필요하다.

 

수리사는 왕손인 운산대사가 창건해 왕즉불사상을 펼치고 삼국통일과 왕권강화를 기원했으며, 고려시대에는 왕실의 안녕과 평안을 기원했다. 또 임진왜란 후에 곽재우 의병장이 한성부우윤에 짧은 기간 재직했지만 관장하던 수리사를 중창하고 임금께 충성한 마음 등은 호국사찰로서 부족함이 없다.

 

 

발제2. 수리사의 문화원형과 미래비전

- 김기룡 한양대 문화재연구소조사팀장

 

수리사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아주 소략한 기사들만이 남아있으며, 이 기사들로는 수리사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위치 정도다. 수리사의 문화원형을 찾는 것이 무엇보다 힘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다행히 수리사의 경우 문화재적 가치가 있는 원형들이 남아있으며, 우선 이를 통해 이것이 가지는 가치를 살펴보고자 한다.

 

지난 527일 육군 제51사단이 625전사자 유해를 발굴하던 과정에서 약 7의 금동으로 만들어진 불상을 발견했다. 이 불상은 현재 경기도박물관에서 임시보관 중이며, 예비소견 평가결과 통일신라시대로 추정되고 있다.

 

금동불상의 경우 그 자체가 가지는 불교미술사적 가치가 높고 이 불상은 현재 건립연대가 명확하지 않은 수리사의 시기를 짐작케하는 중요한 가치가 있다.

 

경내 대웅전과 나한전 사이의 평탄지 한켠에는 석재들이 쌓여있다. 이 석조물들은 탑재들과 건축물의 부재들로 판단된다. 이 중 탑의 부속재 중 탑신으로 하층기단의 부속품으로 각형이 조각된 석재도 있어 탑의 부속품임은 명확하다. 또 산신각 옆으로 현재 석조불상이 위치한 곳에 상석으로 쓰이고 있는 석판 역시 석탑의 기단부 부수재로 탱주가 조각되어 있다.

 

석탑의 경우 현재의 확인되는 부재들로 명확하게 연대와 원형을 복원하기는 힘들지만 부재들에 대한 명확한 연구가 진행된다면 우리나라 석탑연구가 잘 되어 있기 때문에 원형 복원이 가능할 것이다.

 

수리사 주변 산록으로 비교적 평탄한 곳에는 석축들이 확인된다. 수리사에는 36개동의 건물과 12개소의 암자가 있다고 기록돼 있는데 이 석축들은 이러한 것을 증명한다.

 

건물지에서는 초석들도 확인되고 있다. 이러한 양상으로 보아 건물지의 기초시설들은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이 가능할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건물지의 조사는 무엇보다 건립연대와 사찰의 범위를 알 수 있는 가장 명확한 자료가 될 수 있다.

 

현재 확인되는 기와와 토기편 그리고 석축 및 기타석물들로 보아 대략적인 범위는 현재 사역 범위에 6~7배에 이르렀을 것으로 판단되며, 남편으로 일주문의 위치와 주변의 12암자들 존재하였다는 기록을 감안한다면 더욱 넓은 범위에 이르렀을 것으로 판단된다.

 

현재 수리사 주변 및 건물지에서 확인되는 기와들은 모두 무수히 많으며, 이러한 기와들의 수량으로 보아 이곳이 장기간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기와들에 대한 연구를 통해 건립연대를 추정할 수 있게 된다.

 

현재까지 수집된 기와 중에서 특징적인 것은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어골문 기와들이 대량으로 확인되고 있어 이 사찰이 고려시대 번성한 사찰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자명 명문기와가 확인되고 있는데 조사와 연구를 더 진행하면 다른 명문기와가 확인될 가능성이 있다. 이는 현재 사료가 부족한 수리사의 문화원형 복원에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

 

수리사의 경우 건물지에 대한 조사를 우선 실시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그런 이후 명확한 고증이 가능한 것을 우선적으로 복원해야 한다. 시점을 선정하는 것이 중요한데 하나의 사찰을 복원함에 있어서 각기 다른 시대의 건물을 복원할 수는 없다. 그것은 전체적인 경관에도 문제가 될 뿐만 아니라 후대에 역사적 자료의 해석에 있어서도 문제가 될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고증이 불가능한 자료로 무조건 복원하는 것도 안 될 것이지만, 수리사가 어느 시대의 어떤 가람배치를 하고 있었느냐 그리고 거기서 가지는 역사적, 종교적 의미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것이 우선적으로 검토돼야 할 것이다.

 

신라시대 초기의 모습을 재현하는 것도 중요할 것이고, 고려시대 번창한 사찰의 모습을 재현하는 것도 중요할 것이며, 조선시대 곽재우가 중창한 모습을 재현하는 것 또한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으며, 이야기 구성이 가능한 주제들이다.

 

현재 수리사의 경우는 활용이라는 측면에서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단계이며, 지금은 문화원형의 복원이라는 방향을 찾아가는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수리사에는 많은 이야기들과 문화유산들이 확인되고 있으며 이러한 것들에 대한 고증이 시급하다.

 

수리사는 운산대사의 창건과 관련해 호국불교로서의 역사적지리적 관점, 고려시대 관오스님의 묘지명에서 보이는 수리사 주지로서 당시 종교적 역할과 수리사의 역사적 위치, 고려시대 초조대장경과의 연관성, 의병장 곽재우와의 관계, 625당시의 격전지로서 다양한 이야기를 구성하는 콘텐츠가 있지만, 아직 명확한 역사적 사실로 인정받기는 어려운 점이 있다. 따라서 이러한 부분에 대한 명확한 해답을 찾아나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문화원형의 가치 발굴은 많은 시간과 경비가 소요되는 것으로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 문화원형의 가치 발굴에 적극적인 투자가 이루어져야 하며, 이러한 문화원형을 찾아가는 것은 가시적인 효과가 빠르게 나타나지는 않는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수리사의 문화원형 복원에 있어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군포시를 비롯한 주변지역 민들의 인식 그리고 학계에서의 인식변화가 중요한 과제 중에 하나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문화원형을 가지고 쉽게 축제나 대규모의 행사를 진행한다는 것은 무리가 있으며, 원형의 복원이라는 측면에서 시기가 이르다고 판단된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부터 아무런 시도도 하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이다.

 

문화원형의 가치를 발굴을 통해 많은 자료들이 축적되면 그러한 자료를 지역민들에게 전달해 줄 수 있는 장을 만듦으로서 인식의 변환의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 또한 학술조사에 있어서 지역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장을 제공하는 것 또한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현재 수리산 도립공원 조성사업이 진행 중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러한 부분에서 교육적 자료로 활용하는 작은 노력이 군포의 중요한 전통사찰로서 수리사로 거듭날 수 있게 하는 방법이 될 것이다.

 

지금의 수리산이라는 명칭도 수리사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정작 수리사에 대한 인식은 부족한 편이다. 이러한 인식변화는 한 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홍보와 수리사의 문화원형 복원과 관련된 모든 사람들의 노력이 필요한 부분이라고 하겠다.

 

지금 시점에서는 수리사의 문화원형 복원이라는 지역민들의 공감대 형성이 무엇보다 필요하고 자신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시급하다. 그러나 이러한 방안을 준비하는 데에는 두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첫째는 시간에 너무 구애되지 말 것으로 현재 사용을 위한 기간 설정이나 가시적인 효과를 위한 시간 설정 등은 금해야 할 사항이다.

둘째는 현재의 최선책을 강구하는 것으로 전문가집단과 사용자집단 그리고 행정적인 실무집단의 공동의 노력이 효율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행정체계의 구축이 필요하다.

 

수리사가 가지는 역사적인 가치에 대해서는 앞으로 많은 연구가 진행되어야 하겠지만, 오늘의 사회경제적 관점에서 단순히 바라보기보다는 보다 역사문화적 관점에서 바라 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된다. 그리고 이러한 접근들을 통하여 수리사의 많은 원형들을 발굴함으로써 이곳이 종교적 의미의 중요성과 역사교육의 장으로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토론1. 수리산 지역 6.25전사자유해발굴

- 이용석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발굴과장

 

국방부에서는 수리산과 인근의 모락산, 광교산 등의 지역에서 유해발굴 작업을 진행했다.

 

19511월 말 서울 수복작전 기간 중에 터키여단과 미군이 수리산 방향으로 진격하고 모락산 방향으로는 한국의 1사단이 진격하는 형태로 작전이 전개됐다.

 

전쟁사에는 모락산 전투가 가장 큰 전투였다고 기록돼 있으나 실제로는 수리산 전투가 규모가 훨씬 컸다. 모락산 전투는 1개 연대가 전투를 치렀고 수리산 전투에서는 터키군 1개 여단과 미군 1개 사단이 전투를 치렀다.

 

아마도 수리산 전투가 한국군이 아닌 UN군의 전투였기 때문에 모락산 전투가 규모가 큰 것으로 묘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까지 수리산 지역에서는 총 4구의 유해가 발굴됐다. 수리산 바람고개 일대에서 2007년에 3구의 유해를 발견했고 2009년에는 수리산 정상 인근에서 1구의 유해를 발견했다.

 

정상 인근에서 발견된 유해가 안고 있던 유품들은 한국군이나 중공군, 인민군의 소지품이 아니었다. 터키군이나 미군, 또는 전투 근무 지원에 나선 한국인의 유해일 것으로 추정된다.

 

전쟁 당시 강제 동원된 전투 종사자들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발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6.25전사자 유해발굴 사업은 2000년도에 전쟁에 참전한 분들의 아픔을 늦게나마 달래주고자 전쟁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시작됐다. 육군의 한시적 사업으로 시작했으나 2003년에 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기로 결정됐으며 2005년에는 국가영구사업으로 추진하기로 결정됐다.

 

2007년에는 유해발굴감식단이 창설되고 2008년에는 ‘6.25전사자 유해의 발굴 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돼 법적인 뒷받침을 받는 사업이 됐다. 처음 시작할 땐 8명의 병사로 시작했으나 현재는 150여명이 유해 발굴작전에 나서고 있다.

 

유해 발굴에 있어서는 우리나라의 기술이 미국보다 뛰어나다. 그러나 기록이 많이 남아 있지 않아 유해를 찾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다. 때문에 DNA감식을 통해 유해의 신원을 확인하고 있으나 사회적 편견 등으로 인해 유가족들이 혈액 샘플 채취 참여도가 낮은 편이다.

 

현재까지 총 52백여구의 유해를 발굴했으며 이 중 150여구만이 신원확인이 완료돼 있다. 신원확인이 안된 유해들은 유해발굴감식단에 안치돼 있다.

 

관련 자료가 부족해 지역주민과 참전용사의 증언에 의지해 발굴에 나설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더구나 전쟁을 겪은 세대들이 고령화되면서 기억이 혼미해지고 사망하는 추세이기 때문에 발굴을 더욱 서둘러야 한다.

 

한반도에 매장된 전사자들의 유해는 약 13만구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국방부에서는 단 1%의 가능성만 있어도 발굴작업을 지속할 방침이다. 유해가 매장된 지역을 알고 있거나 전쟁에서 잃어버린 가족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제보해 주기 바란다.

 

 

 

토론2. 곽재우 장군과 수리사의 인연

- 김상철 경남 의령박물관 학예연구사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해 관군이 연일 대패하자, 망우당 곽재우 장군은 전란발생 9일 만인 422일 전국에서 최초로 의병을 일으켜 크게 공을 세운 조선의 의병장이다.

 

지금까지 곽재우 장군에 대한 연구는 주로 전기류나 의병활동에 관한 학술논문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최근에 들어서는 사상이나 학문, 문학에 이르기까지 비교적 많은 연구가 이뤄지고 있다.

 

그리하여 이제는 역사적 인물로 뚜렷이 자리 잡아 일반 대중에게 비교적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이러한 곽재우 장군에 대한 연구서 중, 세미나 주제인 수리사와 관련한 연구서나 내용은 전무하며 이번 발표의 주제 선정도 아주 예상치 못한 우연한 동기에서 시작됐다.

 

기록의 절대사료가 전무한 현재로서는 장군의 외손인 신시망(辛時望)이 기록한 장군의 연표를 더듬어 봄으로써 그 단서를 찾을 수밖에 없다.

 

장군의 활동상이 기록된 문집이나 조선왕조실록, 장군과 함께 활동 했거나 후대 후손들이 기록한 장군의 기록에도 수리사 관련 자료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장군의 연표에서 장군의 행적을 더듬어 볼 수 있는데 연표에 의하면, 16053월에 장군은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이라는 관직을 제수 받고 상경해 약 1개월 만인 4월에 질병을 이유로 사직한다.

 

주목할 만한 내용은 16053월에 한성부우윤으로 제수돼 1개월 남짓 부임하고 질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남향한 것으로 되어있는데, 이 시기에 수리사와 인연을 맺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장군의 연보에는 16054월에 사직하고 남쪽으로 향했다고 적고 있으며, 1606년에는 망우정에 기거하면서 이완평에게 보낸 편지 답신을 8월에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8월 이전에는 망우정에 기거한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장군이 4월에 사직을 하고 남향을 해서 바로 망우정으로 향했는지 아니면 부임 초 중건에 관여한 수리사에 들려 일정기간 머물면서 수도하다가 망우정으로 돌아 왔는가 하는 문제다.

 

장군의 불교에 대한 인연과 도교사상 심취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수리사 중건에 관여하면서 수리사 주변 암자 등에서 수학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부임 한 달 남짓한 기간에 수리사 중건에 관여했다고 보긴 다소 무리가 따르며, 곽재우 장군이 수리사를 중건하고 말년에 수도했다는 기록을 볼 때 어느 정도 머물렀을 가능성에 더 무게가 있다 하겠다.

 

곽재우 장군의 수리사와의 인연은 1605년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수리사와의 직접적인 인연으로서 장군이 불교에 대해 각별한 애정이 있었으며, 이에 부임 초기 관할지 업무파악 등에서 임진왜란의 전란으로 소실된 수리사를 접하고 안타까이 여겨 직접 중건에 관여했을 가능성이다.

 

두 번째로는 간접적인 인연으로서 장군이 직접 수리사 중건에 관여하지는 않았지만 수리사의 중건이 장군의 부임시절에 이루어졌고 또 관의 지원을 받았다면 사찰 입장에서는 통상 그 관할지 수장의 이름을 사찰 중건의 대표성 확보 차원에서 올렸을 가능성이 높다.

 

수리사는 신라진흥왕 혹은 통일신라 창건 이래 전성기 때는 대웅전을 비롯한 36개동의 건물과 12개의 암자를 거느린 경기도 지역의 거찰(巨刹)로 임란 때에 승려 의병의 거점 지역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왜군에게 큰 위협이 되었을 것이며, 전방의 안정을 위해 승병의 본거지였던 수리사가 왜군의 집중공격을 받아 소실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관군을 대신해 봉기한 곽재우 장군으로서는 수리사 승려 의병의 소식을 당연히 접했을 것이며, 전란이후 이곳 한성부우윤으로 부임한 장군의 각별한 관심 속에 왜군에 의해 소실된 수리사의 중건이 시작되고 장군이 그 일에 직간접 관여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장군이 수리사 중건에 직접 관여한 전자의 가능성이 더 현실적이라 하겠다.

 

당시 유교를 국가이념으로 삼고 불교를 배척하던 억불숭유의 기득권층인 조선왕조와 사대부의 이념에 장군의 불사 중건이라고 하는 사실은 어떻게 보면 국가이념에 반하는 중대한 사항으로 의도적으로 기록에서 누락시켰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끝으로 수리사와 곽재우 장군의 인연을 계기로 우리 군과 군포시가 뜻 깊은 인연으로 거듭나길 기대하며, 향후 지속적인 교류로 이어가길 바란다. 최근 유행하는 문화콘텐츠 사업은 역사적 인물과 연계될 때 그 사업의 효용성이 부각될 수 있다는 점을 상기하면서 양 시군이 과거 400여 년 전 장군이 이어준 인연을 되새겨 공동발전과 화합의 장으로 삼았으면 한다.

 

 

토론3. 수리산 도립공원 조성계획

- 이용섭 경기도청 환경정책과장

 

그 동안 도립공원을 지정하기 위해 많은 평가를 진행해왔다. 경기도내 20여개 산을 대상으로 2006년도에 타당성 조사를 실시하고 5개 지역으로 압축했다. 한강 이북의 청계산, 소요산 등 유명한 산들과 겨뤄 최종적으로 수리산이 경기도의 제3도립공원으로 지정된 것이다.

 

다른 지역의 주민들은 수리산의 경관적 가치를 따지며 이의제기한 부분도 많다. 자원성과 자연적 경관가치, 자연 생태 등급, 한국 특산종 분포도 등을 평가했는데 수리산의 경우 토지 이용계획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

 

수리산 지역의 80%정도가 국공유지로써 도립공원 조성이 용이하다. 또 수리산은 접근성 측면에서도 높은 점수를 얻었다. 수리산이 인접한 3개시의 인구만 해도 160만명이 넘는다. 또 수원과 화성 등의 지역에서도 수리산을 찾는 등산객이 많기 때문에 높은 평가를 받았다. 지난해 11월 기본 및 실시설계에 착수해 올해 11월경에 설계가 마무리될 예정이다.

 

수리산 도립공원의 전체 면적은 약 7백만이며 이 중 약 46십만가 공원자연보존지구로써 자연경관과 생태적 가치가 높아 현재의 모습을 보존하기로 결정됐다. 24십만의 지역은 공원자연환경지구로써 도립공원과 마을간의 완충지역으로 활용된다.

 

수리산 도립공원은 도시계획위원회 등의 심의를 거쳐 공원시설계획이 많이 축소됐다. 전문가들이 경관이 좋고 생태보존이 잘된 수리산에 많은 시설을 건립할 이유가 없다는 의견을 제시해 방문객센터, 주차장 등 최소한의 시설만 건립하고 자연환경을 보존할 계획이다.

 

현재 수리산 등산로가 거의 방치된 상태다. 앞으로 도에서 도립공원을 관리하게 되면 기존의 등산로를 연계해 정비하고 그 외 불필요한 등산로는 폐쇄할 예정이다. 이용행태를 고려해 왕복형, 종주형, 연결형, 순환형 등으로 등산 코스를 구성하고 개개인의 특성에 맞게 등산로를 선택할 수 있도록 정비할 계획이다.

 

안양과 안산지역에서는 공간 상의 이유로 도립공원 관련 시설이 들어서지 않으며 군포지역에 300억원 가량을 투자해 기본 시설들을 건립할 계획이다.

 

최대한 자연환경을 살리기 위해 최소한의 시설만이 들어선다. 납덕골 지역은 등산객 등 가족단위의 이용객들을 위한 공간으로 조성하고 매쟁이골 지역은 학생들의 자연체험학습장 개념으로 조성될 계획이다.

 

내년 이후부터 4개년 계획으로 추정될 도립공원 조성에 있어서 좋은 의견이 있다면 언제든지 건의해주길 바란다.

 

기획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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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포신문 제5332010916(발행)~2010922>

 

임창희팀장,이승우기자(gunponews@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