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허비(遺墟碑)
선현의 자취가 있는 곳을 길이 후세에 알리거나, 이를 계기로 그를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비를 말한다.
유허란 유지(遺址)·유적(遺蹟)·구기(舊基)와 같이 ‘남긴 터(자취)’· ‘옛터’의 뜻으로 여기에서는 선현들이 태어났거나 살았거나 임시 머물렀던 곳, 또는 순절(殉節)하거나 귀양살이하였던 곳을 가리킨다.
고려시대까지는 유허비라는 명칭의 비는 보이지 않으나, 조선시대에는 유허비를 비롯하여 유지비(遺址碑)·구기비(舊基碑)라는 명칭의비가 적지 않게 조성된다.
경기도 개성에 ‘高麗忠臣鄭夢周之閭(고려충신정몽주지려)’라는 문구와 입비연대(1530년, 중종 25)만을 간단히 새긴 비는 유허비의 성격을 띤 초기의 예라고 하겠다. * 포은 정몽주 묘소 본문 하단부 소개함
충청남도 홍성군·논산시의 성삼문유허비, 경상북도 경주시의 김유신
유허비, 최치원 독서당(讀書堂)유허비, 신라효자 손순(孫順)유허비,
제주시의 송시열 적려(謫廬)유허비와 남제주군의 정온(鄭蘊)유허비
등은 선현들의 출생지·성장지·적거지와 관계하여 세운 비들이다.
성삼문 유허비(문화재자료 제164호) / 성삼문 묘소(문화재자료 제81호) 충남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 소재
- 충남 논산시 가야곡면 양촌리 소재
유명조선 단계하위지선생 유허비(有名朝鮮 丹溪河緯地先生 遺墟碑)
신라 석탈해왕 탄강 유허비
한편, 구기비의 예도 적지 않은데, 황해도 해주의 조선인조탄강구기비, 평양의 기자궁구기비, 함경남도 영흥군의 조선태조탄생구기비,
함흥군의 양성(兩聖)탄강구기비와 조선태조독서당구기비, 안변군의 신의왕후(神懿王后)탄강구기비, 황해도 곡산군의 신덕왕후사제구기비(神德王后私第舊基碑) 등은 왕이나 왕후의 탄생지 등에 관련하여
세운 비이다.
특히, 구기비라는 용어는 왕족들에게만 한정되어 사용되었던 점이
주목된다. 이와 같이, 유허비·유지비·구기비는 입비 장소가 중시된다는 점에서 지연적 성격이 강하지만, 이를 통하여 선현의 뜻을 기린다는 점에서 송덕의 성격도 강하다. * 철종 용흥궁 본문하단부 소개
[哲宗朝暫邸舊基碑閣(철종조잠저구기비각]
경내에 철종이 머물던 옛 집터임을 표시하는 비석과 비각이 있다.
이곳에서 철종이 19세까지 살았다 한다.
[哲宗朝暫邸舊基碑(철종조잠저구기비]
따라서, 공덕비(功德碑)·의열비(義烈碑)·정려비(旌閭碑) 등과 내용상 크게 구별되지 않으며, 넓은 의미에서는 사실의 내력을 적어 길이
후세에 남긴다는 뜻에서 기적비(紀績碑·紀蹟碑) 또는 사적비(事蹟碑)의 범주에 포함된다고 하겠다.
≪참고문헌≫ 朝鮮金石總覽 下
≪참고문헌≫ 韓國金石文大系 1∼5
안산김씨 시조 안산현 개국후 김긍필 유허비 (위 사진은 실물이 아닌 모형임)
안산의 유래
신라 경덕왕이 장구군으로 고쳤고, 고려 초에 지금 이름 안산현으로 고쳤으며,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다.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충렬왕(忠烈王) 34년에 문종(文宗)이 탄생한 곳이라 하여 군으로 승격시켰는데 조선에서 그대로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후 1914년 3월,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으로 안산군이 시흥·과천과 함께
시흥군에 편입될 때까지 이 지역은 ‘안산’이란 지명으로 일관해 왔다.
그러던 중 유천형(柳天馨)·이승언(李承彦) 등의 ‘안산지명찾기’ 노력의 결과로 반월출장소에서 1986년 ‘안산시’(법률 제3798호)로 결정되었다.
안산은 고려조 덕종·정종·문종 등 왕세자가 탄생한 고장으로, 일제가 안산의 정기와 맥을 끊기 위하여 1914년 안산 지명을 의도적으로 말살하였다고 해석하였다.
이러한 새로운 의식과 해석을 인정한 정부는 극일 측면에서 왜곡된 1천 년 역사의 안산 지명을 다시 되돌려 놓았다.
고려시대에는 현종에게 딸을 셋이나 왕비로 보낸 김은부(金殷傅)가 있다. 고려사
열전에 보면 김은부는 안산현 사람으로 여러 높은 벼슬을 지내고 안산군개국후
(安山郡開國候)라는 작위를 받았다.
안산이 현에서 군으로 승격된 것은 그의 작위를 받은 것이라 한다. 그의 아버지도 안산현개국후라는 높은 작위를 하사받았는데, 그를 안산김씨의 문중 조상이라고 받들고 있다.
안산군 개국후 김은부 유허비 (위 사진은 실물이 아닌 모형임)
안산이 지군사(知郡事)로 승격된 것은 1308년(충렬왕 34)의 일이었다. 문종 임금이 외가인 이곳에서 탄생한 때문이었다. 문종의 외조부는 안산김씨(安山金氏) 시조의 아들인 김은부(金殷傅 ; 945∼1017)인데, 그는 성종, 목종, 현종 3대를 섬긴 중신(重臣)이었다.
안산이 지군사로 승격됨과 동시에 김은부는 안산군개국후(安山郡開國候)로 추증되었다.
연성군 김정경(金定卿)을 모신 위정사
연성군 김정경 신도비 (위정사 소재)
안산김씨 족보에 전하는 시조 김긍필은 대보공 김알지의 후손이며, 선조로는 신라국 원성대왕의 후예로서 경순왕의 넷째아들인 대보공 은열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그의 아들 은부가 고려 성종의 장인으로
호부상서, 상호군이며 딸 3명이 고려 현종의 태후 및 왕후가 되어 국구(왕의 장인)로서
추충수절창국공신·개부의동삼사 수사공 상주국에 이르러 안산군개국후에 봉해졌다.(식읍 1000호)
김은부의 외손인 덕종, 정종, 문종이 왕에 오르면서 4대 50여년동안 고려시대의 최고 문벌귀족이 되었으며. 김태후 집안(안산김씨)은 대대로 왕실과 혼인하도록 정해져 고려시대 문벌귀족(재상지종) 가문의 지위를 계속 누리게 되었다.
유허비(遺墟碑)
옛 현철(賢哲)들의 자취가 있는 곳을 후세에 길이 남기고, 이를 계기로 하여 그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비를 말한다.
비의 종류로는 묘비(墓碑)를 비롯하여 능비(陵碑) · 신도비(神道碑) · 기적비(紀蹟碑) · 기념비 · 순수비 · 정려비(旌閭碑) · 송덕비(頌德碑) · 애민비(愛民碑) ·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등이 있으며, 그 밖에도 유허를 비롯하여 성곽(城廓) · 대단(臺壇) · 서원(書院) · 묘정(廟庭) · 빙고(氷庫) · 교량 · 제지(堤池) 등에 세우는 비가 있다.
이 가운데 유허란 '옛터' 또는 '남긴 터(자취)'의 뜻으로, 여기에서 현철들이 태어났거나 살았고, 또는 임시로 머물렀거나 순절하였던 곳을 가리킨다.
개성에 있는 '고려충신정몽주지려(高麗忠臣正夢周之閭)'는 유허비로 세워진 초기의 예로 보이며, 유허비의 성격을 띤 비로는 유지비(遺址碑)· 구기비(舊基碑) 등이 있는데, 구기비라는 말은 왕족들에게만 한정되어 사용된 것이다.
현재 우리 나라에 남아 전하는 유허비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경상남도 울산시 두서면 구량리에 있는 두서면 은행나무 옆의 죽은
이공(竹隱李公) 유허비,
경상남도 고성군 고성읍에 있는 이정 · 이문열(李幀李文烈) 유허비,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에 있는 육선생(六先生) 유허비,
경상북도 구미시 고아면에 있는 김종무 유허비(金宗武遺墟碑),
경상북도 김천시 구성면에 있는 여대로(呂大老) 유허비,
경상북도 봉화군 법전면에 있는 강흡(姜洽) 유허비,
경상북도 봉화군 봉성면에 있는 충효당(忠孝堂) 및 이장발(李長發) 유허비,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에 있는 이곡 · 이색(李穀李穡) 유허비,
경상북도 영양군 청기면에 있는 김도현(金道鉉) 유허비,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에 있는 신돌석(申乭石) 유허비,
경상북도 경주시 견곡면에 있는 손순(孫順) 유허비
충청남도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龍頭里) 및 탑원리(塔院里)에 유의사의 생가터에 있는 유관순(柳寬順) 유허비
충청남도 논산시 부적면에 있는 성삼문(成三問) 유허비(지방 문화재 자료81),
충청남도 금산군 제원면에 있는 권종 순절(權悰殉節) 유허비,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에 있는 태조 대왕 영전(太祖大王影殿) 유허비,
충청북도 보은군 삼승면에 있는 송시열(宋時烈) 유허비,
충청북도 영동군 양산면에 있는 이거경(李居敬) 유허비,
충청북도 옥천군 이원면에 있는 옥천 송우암(宋尤庵) 유허비(지방유형문화재 54)와 충의공 김문기(忠毅公金文起) 유허비(지방유형문화재 53),
대구광역시 중구 달성동 달성 공원에 있는 달성 서씨 유허비,
전라북도 고창군 대산면에 있는 김성진(金聲振) 유허비, 대전광역시에 있는 박팽년(朴彭年) 유허비,
전라남도 장성군의 서삼면에 있는 변이중(邊以中) 유허비,
전라남도 광양시 다압면에 있는 정옥천(鄭玉川) 유허비,
강원시 양양군 양양읍에 있는 동명 서원(東溟書院) 유허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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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천비(世阡碑)
세천비는 선산입구 등 선산 근처에 세워 그 문중의 선산임을 나타내며 문중이나
문중 선조들의 치적을 기록하여 후세에 기록을 남기는 비석을 말합니다.
세천비에는 선산의 내력과 가문의 내력 그리고 비를 세우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상세내용을 기록합니다.
세천이란 세대(30년)를 천개나 지난다는 뜻이 숨겨져 있으며 여러대를 내려오며
선산에 조상의 산소를 모신다는 뜻으로 해석하시면 됩니다.
한자 해석으로만 본다면 여러대(세世)의 무덤길(천阡)이며, 선산(선영)의 묘소 안내
표지로 세장지지(世葬之地 : 대대로 묘를 쓰고 있는 땅)를 가르키는 용어입니다.
안산김씨 세천비 (실물이 아닌 모형사진임)
일부에서는 '세촌비'라고도 하는데 사용하는 예가 없는 것 같으며 "세천비" 표현이
올바른 것 같습니다.
신도비나 공덕비는 개인을 위한 비석이고 세천비는 문중(종중)을 위한 비석입니다.
안동 김씨 고가 터 안동 김씨 세천비 / 경기도 포천시
김해김씨 세천비
전주이씨 세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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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석 관련 용어 설명
용 어 |
설 명 |
묘비 (墓碑) |
무덤 앞에 세우는 비석으로 대체로 직사각형이다. |
신도비 (神道碑) |
종2품 이상 벼슬아치의 무덤 앞이나 무덤으로 가는 길목에 세워놓는데 죽은이의 생애에 관한 사항들을 새긴 비. 밑부분은 거북받침을 하여 그 위에 직사각형의 비석을 세우고 다시 그 위에 비갓을 올려 놓았으며 무덤 남동쪽 지점에 남쪽을 향하여 세운다. |
비음기 (碑陰記) |
비석의 뒷면에 새긴 글로써 비석의 앞쪽(비양碑陽)에 새기지 못한 글을 새긴다. |
행장 (行狀) |
한문학 문체의 한 종류. 죽은 사람의 생전 이력과 업적을 적은 글로, 보통 죽은 이의 제자나 친구·동료·아들 등이 죽은 이의 세계(世系)·성명·자호·관작·관향(貫鄕)·생몰연월·자손·언행 등을 기록하여 명문(銘文)·만장(輓章)·전기 등을 만들거나 역사 편찬의 자료로 쓴다. 장(狀)은 행실을 뜻하는 말로서, 죽은 이의 행동 하나하나를 곁에서 보는 듯이 자세하게 서술한다. |
묘지 (墓誌) |
죽은 사람의 성명·관계(官階)·경력·사적·생몰연월일, 자손의 성명, 묘지(墓地)의 주소 등을 새겨서 무덤 옆에 파묻는 돌이나 도판(陶板), 또는 거기에 새긴 글.광지(壙誌)라고도 한다. 파묻는 이유는 오랜 풍우나 인위에 의한 변화를 막고 영원히 기념하기 위해서이며, 무덤 앞에 세워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한 것은 묘비 ·묘표(墓表) ·신도비(神道碑)라고 한다. 묘지의 재료는 금속판 ·돌 ·벽돌 ·도판 등을 사용하는데, 널이나 유골함에 직접 새긴 것도 있다. |
묘표 (墓表) |
중국 전기(傳記) 문체의 하나. 114년(후한 안제)에 <일자경군묘표(謁者景君墓表)>를 세운 데서 비롯된다. 문체는 비갈(碑碣)과 비슷하지만 비갈처럼 신분이나 계급에 따른 아무런 제한을 받지 않고 신분에 관계 없이 누구나 세울 수가 있었다. 이와 비슷한 종류의 것으로 천표(阡表)·빈표(殯表)·영표(靈表) 등이 있는데, 천이란 무덤의 길을 뜻하고, 빈은 아직 장사 지내지 않은 죽은 이를 가리키며, 영은 바로 죽은 이를 가리키는 말로서 모두 뜻이 다르다. 명(明)나라 이후로 이름을 모두 합쳐 묘표라 부르게 되었다. 또 신도표(神道表)라 부르는 것도 있는데 성격은 같다. |
묘갈(墓碣) |
정3품 이하의 벼슬을 지낸 관원의 묘 앞에 세우는 것으로, 머리 부분이 둥그스름한 작은 비석. 죽은 사람의 성명이나 출생·사망·행적 등을 돌에 새겨 무덤의 표지(標識)로 만들며, 또한 죽은 사람의 사업을 후세에 전하는 것이 목적이다. 내용은 신도비와 비슷하나 규모는 대체로 신도비 보다 작다. 그리고 묘갈에 새겨 넣는 글을 묘갈명(墓碣銘)이라고 말한다. |
비갈 (碑碣) |
묘비와 묘갈. |
유허비 (遺墟碑) |
선현들의 자취를 후세에 알리거나 추모하기 위하여 그들의 출생지, 성장지 등에 세운 비. 개성(開城)에 있는 "고려충신정몽주지려(高麗忠臣鄭夢周之閭)"가 유허비로 세워진 초기의 예로 보이며, 유허비의 성격을 띤 것으로 유지비(遺址碑), 구기비(舊基碑) 등도 세워졌는데, 구기비라는 용어는 왕족들에게만 한정되어 사용되었었다. |
상설분류
1. 호석 : 12지신상이나 모란 등을 양각하여 분묘를 보호하는 수호석.
2. 석양, 석호 : 주인의 명복을 빌고 귀신이나 잡귀를 물리치는 벽사의 역할.
3. 망주석 : 영혼이 자기의 유택(능)을 찾아오게 하는 안내와 자손발복을 상징.
4. 장명등 : 유택의 사방팔방에 불을 밝혀 잡귀의 법접을 막으려는 수호기능.
5. 석인(문·무인석) : 주인을 섬기는 신하를 묘역에 배치한 저승관적 상징석.
6. 예감 : 제향 후 축문을 태워 묻는 네모난 형태의 석함.
7. 곡장 : 비바람을 막아주는 역할과 오행(오봉)을 상징함.
8. 석마 : 사후세계 문·무인석의 교통수단을 상징.
9. 혼유석 : 영혼이 찾아와 머물도록 배려한 돌판.
10. 비석 : 조상 혼백을 표시한 북방색 돌기둥.
11. 상석 : 이승 자손들의 치성봉사를 위한 돌 단상.
12. 홍살문 : 조상유택의 진입로를 지키는 잡귀 검문대.
13. 금천교 : 조상유택을 넘나드는 수귀를 물리치기 위한 상징교.
14. 산신석 : 묘역 산신께 경배드리기 위한 돌 단상.
15. 경계석 : 분과 묘지를(이승과 저승/제1계와 2.3계)) 구분짓기 위한 표시석.
묘지분류
1. 일반묘지 : 일반적인 묘형
2. 성역묘지 : 상설질서에 따라 조성된 묘형
3. 다실형묘지 : 여러기의 유골함을 매장하는 묘형
4. 모태형묘지 : 여러기의 개장유골을 매장하는 묘형
5. 매장형 봉안묘지 : 유골함을 매장하는 일반적인 묘형
6. 안치형 봉안묘지 : 지상 시설물에 유골함을 안치하는 묘형
7. 매장형 수목묘지 : 수목아래 유골함을 매장하는 묘형
8. 산골형 수목묘지 : 수목아래 화장유골을 산골하는 묘형
9. 매장형 화초묘지 : 유골함을 매장하고 그 위에 화초를 심는 묘형
10. 매장형 잔디묘지 : 화장한 유골을 매장하고 잔디를 심는 묘형
11. 산골형 잔디묘지 : 화장한 유골을 산골하고 잔디를 심는 묘형
12. 매장형 평장묘지 : 유골함이나 시신을 매장하고 분을 만들지 않은 묘형
장법분류
1. 관장법 : 관까지 함께 매장하는 장법.
2. 탈장법 : 관은 버리고 시신만 매장하는 장법.
3. 함장법 : 유골함을 매장하는 장법.
석실분류
1. 토벌광실 : 광중을 평평하게 만드는 경우.
2. 토벌속광실 : 광중속에 또하나의 광정을 짓는 경우.
3. 석관실 : 광중에 돌관을 설치하는 경우.
4. 목관실 : 광중에 목관을 설치하고 회격을 다지는 경우.
5. 목곽실 : 광중에 목곽을 설치하고 회격을 다지는 경우.
현궁분류
1. 일봉일실 : 하나의 봉분에 하나의 현궁
- 북좌남향의 펴묻기
2. 일봉이실 : 하나의 봉분에 두개의 현궁
- 북좌남향의 이서위상 펴묻기
3. 일봉삼실 : 하나의 봉분에 세개의 현궁
- 북좌남향의 소목지서 펴묻기
4. 이봉이실 : 두개의 봉분에 각각 한개씩의 현궁
- 북좌남향의 펴묻기
5. 삼봉삼실 : 세개의 봉분에 각각 한개씩의 현궁
- 북좌남향의 펴묻기
6. 일봉다실 : 한 개의 봉분에 여러기의 현궁
- 북좌남향의 웅크려묻기
현실분류
1. 일봉일실구조 : 북좌남향의 일실정침
2. 일봉이실구조 : 남좌여우(제주기준 남자는 좌측 여자는 우측) 이실정침
3. 일봉삼실구조 : 남동여서
(신위기준 남자를 중궁에 놓고 정비동.계비서)정침
- 남좌여우
(제주기준 남좌 정비.계비1.계비2.순 여우의 삼실)정침
4. 일봉다실구조 : 북좌남향의 다실정침
문구분류
1. 입비석전면 : 남동여서 북남 세로쓰기법.
2. 와비석전면 : 북남남녀 동서 가로쓰기법.
3. 비석후면 : 추모글, 가계도(세.대/후손표기)
4. 비석옆면(右) : 생사년월일시/설립년월일시
5. 비석옆면(左) : 비석설립자/설립경위
위치분류
1. 비석위치 : 북좌남향의 이승제향공간
2. 상석위치 : 북좌남향의 이승제향공간
3. 혼유석위치 : 북좌남향의 저승정침공간
4. 산신석위치 : 묘역북방의 선룡맥지공간
5. 경계석위치 : 북좌남향의 분과 지의 경계공간
6. 망주석위치 : 북좌남향의 저승 묘주정침공간
7. 석인석위치 : 북좌남향의 저승1.2계공간
묘지 관련 용어설명
용 어 |
설 명 |
분묘 (墳墓) |
분묘란 무덤의 총칭인데 배위가 한데 매장된 곳을 합장, 합묘 또는 합폄(合폄)이라 하며, 각각 매장된 것을 각장 또는 각폄이라 하고 이를 다시 좌우 쌍분 또는 상하 쌍분으로 구분하여 이르기도 한다. 묘를 조(兆)라고도 한다. |
영역 (塋域) |
무덤을 쓰기 위하여 마련된 그 지역을 일컫는 말인데, 이를 묘역이라고도 한다. |
봉분 (封墳) |
시체를 매장할 때에 무덤을 나타내기 위하여 큰 함지박을 엎어놓은 듯이 봉토를 쌓아올린 것을 일컫는 말이며, 분상이란 말은 봉분의 높임말이다. |
용미 (龍尾) |
봉분을 보호하기 위하여 빗물이 봉분의 좌우로 흐르도록 무덤의 꼬리처럼 쌓아 올린 것을 일컫는 말이다. |
사성 (莎城) |
무덤의 뒤와 좌우를 병풍처럼 나지막이 흙으로 둘러쌓은 성루를 일컫는 말인데, 속칭으로 토성이라 한다. |
계절 (階節) |
무덤 주의의 평평한 곳을 일컫는 말인데, 흔히 이를 계절이라고 한다. |
배계절 (拜階節) |
계절보다 한층 얕은 곳으로서 자손들이 절을 할 수 있도록 평평하게 만들어 놓은 곳을 말한다. |
순전 (脣前) |
무덤의 배계절 앞의 내리바지 언덕을 일컫는 말이다. |
권조 (權兆) |
권장에 의하여 마련된 무덤을 권조라 하는데, 이를 권폄 또는 중폄이라고도 한다. |
완폄 (完폄) |
나중에 개장할 필요가 없어 완장된 무덤을 일컫는 말인데, 이를 영구한 무덤이란 뜻에서 영폄이라고도 한다. |
호석 (護石) |
능원이나 공신묘의 봉토를 둘러쌓은 돌을 일컫는 말인데, 능원에는 상석과 병풍석으로 쌓여져 있다. 이를 통속적으로는 "도래석"이라 일컬으며, 예장이 아닌 봉분에는 단지 봉토를 보호하기 위하여 막도를 둘러쌓은 경우가 있는데, 이를 사대석이라 일컫는다. |
곡장 (曲墻) |
예장으로 치른 무덤 뒤에 나지막하게 둘러쌓은 토담을 일컫는 말인데, 이를 "곡담"이라 일컫는다. |
묘계 (墓界) |
묘계(墓界)는 무덤의 구역으로 품계에 따라 무덤을 중심으로 하여 1품은 사방 1백보, 2품은 90보,3품은 80보, 4품은 70보, 5품은 50보, 생원과 진사는 40보, 그리고 서민은 10보로 제한하였다. |
예장 (禮葬) |
예식을 갖추어 치르는 장례를 일컫는 말인데, 국장이나 나라에 큰 공이 있는 사람이 죽었을 때 나라에서 국비로 예를 갖추어 치르는 장례를 일컫는 말이다. |
면례 (緬禮) |
무덤을 옮겨서 다시 장사지낸다는 말인데, 이를 천장(천장) 또는 이장이라고도 하며, 높임말로는 면봉(緬封)이라고 한다. |
계장 (繼葬) |
조상의 무덤 아래에 자손의 무덤을 잇대어 장사지내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
벌초 (伐草) |
조상님의 묘지에 잔디를 베어주고 잡초를 뽑아주는 것을 말하며 요즘 현대사회에서는 한식 전후, 한가위 전후 벌초를 많이 합니다. |
금초 (禁草) |
금화벌초(禁火伐草)의 준말로서, 무덤에 불조심하고 때맞추어 풀을 베어 잔디를 잘 가꾼다는 뜻을 나타내는 말. |
사초 (莎草) |
세월이 가면서 비,바람 등에 묘지의 봉분이 작아지고, 또한 잔디 관리를 하지 못해 잡초로 묘지의 잔디가 고사된 경우 묘지의 봉분을 다시 높이거나 잔디를 다시 입히는 것을 말합니다. |
도장 (도葬) |
계장과는 반대로 자손의 시체를 조상의 무덤 윗자리에 장사지내는 것을 일컫는다. 이러한 경우 대부분 풍수의 결함을 보하기 위하여 행한다. |
투장 (偸葬) |
남의 묘역에다 몰래 도둑장사 지내는 것을 일컫는 말인데, 이를 도장 또는 암장이라고도 한다. |
설단(設壇)을 하는 경우는?
설단(設壇)은 묘제(墓祭:시제)를 지낼때 사용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입니다. 당초 중국의 당송 이전의 유학에는 묘제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자와 정호 정이에 의해 묘제가 시작되면서 선세를 제사지내는데 설단의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당초 설단은 묘소를 실전한 경우에만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퇴계선생문집에 의하면 사당에서 4대를 봉사하고 5대 이상은 묘제를 모시는데 지방을 써서 제사(祭舍:제실 제각)에서 모시고 제사(祭舍:제실 제각)가 없을 경우에는 설단하여 모신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우암 송시열도 같은 입장이었습니다.
유학의 입장에서 위폐를 봉안하지 못하는 것은 대단히 미안한 일인 까닭에 전쟁통에 전사한 수 많은 이들을 제사 지내기 위해서는 설단한 경우는 위의 경우와는 사뭇 다르지만 설단이 편리한 방법 가운데 하나였다고 인식하였던것 같습니다.
송시열의 문인이고 송강 정철의 후손인 정호가 쓴 부사윤공묘갈명에 의하면 하곡 윤부사는 선대의 묘소를 일부 실전하였는데 자취를 추적하여 그 묘소가 있었던 곳을 알게 되었는데 그곳은 이미 지역의 부유한 吉氏가 차지하고 있어 소송을 함과 아울러 설단을 쌓다가 길씨의 집단적인 저지로 실패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묘소 근처에 세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정조때의 학자인 창년조씨 조채신은 그의 문집에서 시조묘소를 추적하여 두기의 묘소가운데 하나인 것으로 보고 설단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 후기로 가면서 설단은 실전한 시조를 제사 지내기 위해 사용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체로 설단은 묘역-그 가운데에서도 그곳에 있기는 하지만 정확히 모르는 경우-에 하는 것이 정상적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는 점점 강화되어 오늘날에는 저 멀리 시조부터 모두를 설단하는 가문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한 시비를 할 능력이 제게는 없을 뿐만 아니라 각각의 가문이 예법이 흡사하면서도 각기 그 특징이 있으므로 누군들 논할 수 있겠습니까?
설단의 유래와 변천을 아는 정도만을 알려 드렸으므로 참고하여 가문의 예법에 따라 결정하시기 바랍니다.
합제단 설단식 고유제 모습 : 선산(일선)김씨
선산김씨 시조 순충공 김선궁 유허비
장소 : 구미시 해평면 금호산리 28번지 시조 순충공묘원
김선궁계의 선산(일선)김씨는 대장군파(大將軍派)·간의공파(諫議公派)·우윤공파(右尹公派)·정조공파(正朝公派)·화의군파(和義君派)·낭장공파(郞將公派)·백암파(白巖派)·농암파(籠巖派)·강호파(江湖派)·취수공파(醉睡公派)·양양공파(良襄公派)·과당공파(苽堂公派)·점필재파(佔畢齋派)·문대공파(文戴公派)·성암파(省庵派)·소암파(素庵派)·곤육재파(困六齋派)·송천공파(松川公派) 등 18개 분파가 있다. 고려 말의 절신(節臣) 제(濟)·주(澍), 조선시대의 좌의정 응기(應箕), 동인(東人)의 영수 효원(孝元), 판서 이원(履元)·세렴(世廉), 거유(巨儒) 숙자(淑滋), 판서·학자 종직(宗直) 등을 배출하였다.
김추계의 시조 김추는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여덟째 아들이자 고려 태조의 외손자이다. 고려 때 명문사족(名門士族)으로 번성하여 후손들이 개경을 중심으로 세거하였다. 고려 말에 검교중랑장(檢校中郞將)을 지낸 문(文)의 네 아들 성원(成元)·성부(成富)·성룡(成龍)·성여(成呂)로부터 각각 중서령공파(中書令公派)·판서공파(判書公派)·좌의정공파(左議政公派)·별장공파(別將公派)의 4대 계파를 이루게 되었다. 고려 때 문하시중 숭(崧), 집현전 태학사 인선(印宣), 광주목사 기(起), 조선 때 절충장군 중곤(仲坤), 대사간·강원도관찰사 취문(就文), 유학자 취성(就成)·종유(宗儒), 일제강점기에 중국으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한 독립운동가 정묵(正默) 등을 배출하였다.
1985년 국세조사에서 김선궁계와 김추계를 합하여 12만 214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나타났고, 2000년 조사에서는 3만 4422가구에 10만 968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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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건(王建)이 후백제를 정벌하기 위해 일선(一善, 선산 옛 지명)에 이르러 모병할 때 종군할 것을 희망하자 왕건이 기뻐하며 친히 활을 하사하고 선궁(宣弓)이라 사명(賜名)하였다. 그 후 왕건을 도와 후삼국 통일에 공을 세워 정난보국공신(靖難輔國功臣) 삼중대광(三重大匡)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으며, 선주백(善州伯, 善山)에 봉해졌다.
〈순충공신도비명(順忠公神道碑銘)〉에는 그는 처음으로 일선군에 적을 두어 일선김씨(一善金氏)의 시조가 되었는데, 처음에는 숭선부사(崇善府使)가 되어 명문이 높았다고 한다.
그는 김봉문(金奉文), 김봉술(金奉述) 두 아들을 두었는데, 김봉문은 삼사우윤(三司右尹)과 안일호장(安逸戶長)을 지냈으며, 김봉술은 아버지에 문하시중이 되었다. 그러나 이후 6대까지 실전이 되어 알 수 없지만 그 후손 중 한 부류는 중앙관직으로 다른 한 부류는 지방 사족으로 나뉘어졌다.
이 후 후손들은 그를 시조로 삼고 시조 발상지인 일선(一善)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일선이 조선 태종(太宗) 때 선산으로 개칭(改稱)됨에 따라 본관도 선산으로 고쳐 부르고 있다. 이 후 선산김씨는 김봉문 후손에서 5개파, 김봉술 후손에서 12개파로 나뉘어졌다.
분적종 및 분파
선산김씨는 두 개의 본관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김선궁(金宣弓)의 일선김씨이고, 다른 하나는 김추(金錘)계의 선산김씨로 확실한 구분이 필요하다.파명(派名)을 살펴보면, 백암파(白巖派), 농암파(籠巖派), 병암파(屛庵派), 간의공파(諫議公派), 화의군파(和義君派), 낭장공파(郞將公派), 취수공파(醉睡公派), 송천공파(松川公派), 성암파(省庵派), 소암파(素庵派), 곤육재파(困六齋派), 대장군파(大將軍派), 우윤공파(右尹公派), 양양공파(良襄公派), 정조공파(正朝公派), 강호파(江湖派), 과당공파(苽堂公派), 점필재파(佔畢齋派)로 나뉘어졌다.
주요 세거지
경기도 이천시 일원강원도 춘천시 일원
경상남도 거창군 일원
경상남도 합천군 일원
경상남도 함안군 함양읍 심산리
경상남도 창녕군 유어면 대대리
경상북도 구미시 일원
경상북도 칠곡군 일원
경상북도 고령군 일원
전라북도 김제군 일원
충청남도 공주시 일원
함경남도 단천군 이중면 일원
함경북도 성진시 욱동
황해도 개풍군 일원
인구분포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선산김씨는 34,422가구 총 109,682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
1. 비의 정의
돌에 새겨서 세운 돌, 이것을 비석(碑石)이라고 한다. 이렇게 비석에 새긴 글자는 금석문의 하나로, 또는 역사적인 자료로 대단히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한나라 이전에는 자연형의 돌에 새긴 각석(刻石)이 있었으나 정방형으로 돌을 다듬어 새긴 정식의 비는 한나라 시대 묘비에서 발달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비는 글자를 돌에 그대로 새긴 갈(碣)이 있고, 일정한 형태로 돌을 다듬어 글자를 새긴 비(碑)가 있다. 비의 모양은 몸체인 사각기둥 모양의 비신(碑身)이 있고, 머리 갓 부분인 뿔 없는 용을 조각한 이수(螭首)가 있고, 비석을 기반으로 받치는 거북모양의 귀부(龜趺)가 있다. 비신의 앞, 겉면을 비양(碑陽), 뒷면을 비음(碑陰)이라고 하고, 새겨진 글을 명(銘), 비음부분에 새겨진 글을 음기(陰記) 또는 비음이라고 한다.
비의 종류에는 능에 세우는 능비, 묘에 세우는 묘비, 공덕을 기리는 송덕비, 그 외로 순수비, 기념비 등이 있고, 최근에는 시비, 노래비 등이 있다. 이러한 비에 쓰인 문장들은 대체로 한자를 많이 썼으나 최근에는 한글을 많이 쓰게 되었다.
2. 비문의 격식과 내용
비문의 문체는 산문으로 된 서(書)와 운문으로 된 명(銘)으로 대별된다. 서와 명으로 된 비문을 대개 비명병서(碑銘幷序) 또는 비명이라 부른다. 서가 없이 명으로만 된 비문이나, 명이 없이 서로만 된 비문도 있기는 하나, 이런 것은 비송(碑頌) 또는 비기(碑記)라 하여 따로 구별하기도 한다.
서(序)는 비문을 쓰는 경위를 설명하는 부분으로 본문에 의의를 부여하는 곳이다. 비명은 4언·5언·7언 등의 운문으로 이루어진다.
명(銘)에서는 짧고 화려한 수식을 동원하여 공덕을 찬양하고자 <시경 詩經>의 송(頌)이나 아(雅)와 같은 전아한 시가에 그 근원을 둔다.
명이 없는 비기는 원래 한문 문체의 기(記)에서 온 것으로 기사(記事)를 뜻하는데, 사적비 따위의 사실을 기록하는 비문의 많은 부분이 이런 비기의 형식을 취한다.
비문을 서술하는 형식과 그 순서는 내용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일반적으로는 내용에 따라 순수비문·기공비문·능묘비문·신도비문· 탑비문·사적비문·사묘비문·정려비문·송덕비문 등으로 나누어진다.
순수비문의 예로는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를 들 수 있는데, 여기에는 신라시대 영토 확장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다.
기공비문은 군장(軍將)의 전공을 기리고, 그 사건의 전말을 기록한 것으로 관구검기공비·유인원기공비 등이 있다.
능묘비는 통일신라시대부터 그 실물이 현전하는데 대개 주인공의 생몰 연대 및 그의 행적을 적는다.
신도비문은 조선시대에 당상관 이상의 고관을 지낸 사람에게만 세워주던 비인데, 뒤에 문중의 건비가 성행하면서 이런 제약이 흐려졌다. 신도비문은 비명, 주인공의 가계(家系)·행적 외에 글을 지은이와 글씨를 쓴 이, 그리고 건립 연월일 등을 기록한다.
탑비문은 통일신라시대부터 그 예가 보이고 있으나, 특히 고려시대에 크게 유행하였으며, 조선 시대에는 탑비가 줄고 신도비가 성행하였다.
사적비는 삼국시대에 경주 남산의 신성비에서 비롯되어 전시기에 걸쳐 건립되었다. 사적비문의 내용은 공사의 동기·진행과정·동원인력 등 일반적 사항과 때로는 관직명이 적히기도 하여 중요한 사료가 되고 있다.
사묘비는 사당·묘정·서원 등에 건립되는 비인데, 그 비문에는 사묘의 설치된 유래와 관련된 인물의 공훈이나 사적을 적는다.
정려비는 효자비·효부비·열녀비로 나누어 대개 문중에서 건립하는데 조선 시대에서는 유교사상 아래서 크게 유행하였다. 정려비문은 사적과 찬송이 그 주요 내용이 된다.
송덕비문은 대개 선정비문과 시혜비문으로 갈라지는데, 운문으로 그 공적을 미화해서 표현하고, 글 지은이는 밝히지 않고 세운 사람이나 동기를 밝힌다.
비문의 서체에는 예서·해서·행서 등이 있는데, 전서는 조선 숙종 때 허목(許穆)이 쓴 척주동해비 (涉州東海碑)가 유명하다.
서체도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어, 점제현신사비는 고예(古隸), 관구검기공비·광개토왕릉비는 한예(漢隸)의 분서(分書)에 속하며, 해서가 가장 많고 다음이 행서이다.
비의 제액은 대부분 전서로 썼으므로 전액이라고도 한다. 문체는 운문·고문이 있으나, 당대 (唐代)부터 별도로 사륙변려체(四六騈儷體)가 유행하여 우리나라에서도 신라 이후의 금석문은 대부분 이 문체를 정식(定式)으로 삼았다.
3. 가례집람 1권(페이지 19 번역문)
당 아래에서 문에 이르기까지를 정(庭)이라한다. 정을 셋으로 나누어 그 북쪽 삼분의 일에 해당하는 곳에 碑를 세운다.
[의례] 빙례편의 주석에 말하기를 “宮에는 반드시 비가 있다. 이는 해 그림자를 표시하여 陰陽을 알아보려고 설치한 것이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비를 설치할 때는 堂의 길이와 같게 한다.” 하였다. 堂의 길이란 당의 廉으로부터 북쪽으로 방실(房室)의 벽에 이르는 길이이다. 정을 셋으로 나누어 북쪽으로 삼분의 일에 해당하는 곳에 비를 설치하되 비는 당의 길이와 같이한다.
그러므로 정은 대개 당의 길이의 세 배가 된다. 또 살펴보니 <향사례>에서 후(侯 : 과녁)는 당에서 삼십장이 떨어진 거리이며, <대사례>의 侯는 당에서 오십사장이 떨어진 거리이다. 그러므로 정의 길이를 이로써 알 수 있는데 그 늘이고 줄이고 하는 제도도 이로써 미루어 알 수 있다.
[보충] 손하씨는 말하기를 "옛적의 이른바 碑라는 것은 곧 장례를 지내거나 제사를 지내거나 손님 접대를 할 때 세운 나무였을 뿐이었는데 그러나 그 글자를 돌석(石)변에 쓴 것은 그 굳고 오래가는 뜻을 취한 것이다. 하였다.
4. 가례집람 (번역본 p 82)
<주> 봉분과 비석은 각각 품수가 있다[註 墳碑各有品數]
[사림광기]에 ‘분봉을 함에 있어서
왕의 경우는 이수의 높이가 3자 2치이고 비의 몸통은 높이 9자 에 넓이는 3자 6치이며, 귀부는 높이 3자 8치를 쓴다.
1품의 경우는 이수의 높이가 3자이고 비의 몸통은 높이가 8자 5치이며, 넓이는 3자 4치이고 귀부는 높이 3자 6치이다.
2품은 대개 기린과 봉황을 쓰는데 높이는 2자 8치이고 비의 몸통은 높이 8자이며, 넓이가 3자 2치이고 귀부는 높이 3자 4치이다.
3품은 대개 천록과 벽사를 쓰는데 높이가 2자 6치이고 비의 몸통은 높이 7자 5치이며, 넓이는 3자이고 귀부는 높이가 3자 2치이다.
4품은 원수(圓首 : 비의 머리를 둥글게 하는 것)를 쓰는데 높이는 2자 4치이고 몸통은 높이가 7자이며, 넓이는 2자 8치이고 방부를 쓰는데 높이는 3자이다.
5품은 원수의 높이가 2자 2치이고 몸통은 높이가 6자 5치이며, 넓이는 2자 6치이고 방부는 높이가 2자 8치이다.
6품은 원수의 높이가 2자이고, 몸통의 높이는 6자이며, 넓이는 2자 4치이고 방부의 높이는 2자 6치이다.
7품은 원수의 높이가 1자 8치이고, 몸통의 높이는 5자 5치이며, 넓이는 2자 2치이고 방부는 높이 2자 4치다.
용어설명
이수(螭首) : 碑石의 머리로서 뿔 없는 용이 서린 모양을 새긴 형상.
귀부(龜趺) : 석각(石刻)한 거북 모양의 빗돌 받침.
천록(天祿) : 天鹿(천록)이락도 하며, 상상속의 동물을 말함.
벽사(辟邪) : 전설상의 신령한 짐승으로 두개의 뿔이 있으며, 사악함을 물리치는 힘이 있다함. 한나라 시대에 널리 쓰여짐.
원수(圓首) : 비석의 머리를 둥글게 한 모습
방부(方趺) : 네모난 모양의 빗돌 받침.
석수(石獸) : 석양(石羊), 석마(石馬), 석호(石虎) 등을 일컬음
5. 봉분의 크기
분영(墳塋)은 왕의 무덤 자리를 쌓을 때에는 주위가 110보(百步)이고 매 면(面)은 25보(二十五步)이며 봉분은 높이가 2장(二丈)이고 봉분 사방의 담의 높이는 1장이다. 석인(石人)은 넷을 두고 -문관 모형 둘, 무관모형 둘- 돌사자(石虎)는 둘이고 돌 말(石馬)도 둘이며 망주석(望柱石)도 둘이다.
일품(一品)의 무덤 자리는 주위가 90보(九十步)이고 매 면은 22보 반이며, 봉분의 높이는 1장 8자이고 봉분 사방의 담의 높이는 9자 이다. 석인(石人)은 둘이고 -망자가 문관일 경우에는 문관 모형을 쓰고, 무관일 경우에는 문관 모형 하나와 무관 모형 하나를 쓴다. - 석호(石虎)도 둘이고, 석양(石羊)도 둘이며 석마(石馬)도 둘이고 망주석(望柱石)도 둘이다.
이품(二品)은 무덤 자리 주위가 80보이고 매 면은 20보이며 봉분의 높이는 1장 6자이고, 봉분 사방의 담의 높이는 8자이며 석인(石人)은 둘이고 - 망자가 문관일 경우에는 문관 모형을 쓰고, 무관일 경우에는 문관 모형 하나와 무관 모형 하나를 쓴다.- 석호(石虎)도 둘이고 석양(石羊)도 둘이며 석마(石馬)도 둘이고 망주석(望柱石)도 둘이다.
삼품(三品)은 무덤자리 주위가 70보이고 매 면은 70보 반이며, 봉분의 높이는 1장 4자이고 봉분 사방 담장의 높이는 7장이며 석호(石虎)는 둘이고 석양(石羊)도 둘이며 석마(石馬)도 둘이고 망주석(望柱石)도 둘이다.
사품(四品)은 무덤자리 주위가 60보이고 매 면은 15보이며, 봉분의 높이는 1장 2자이고 봉분 사방의 담장은 높이가 6자이며 석호(石虎)는 둘이고 석마(石馬)도 둘이며 망주석(望柱石)도 둘이다.
오품(五品)은 무덤 자리 주위가 50보이고 매 면은 12보 반이며, 봉분의 높이는 1장이고 봉분 사방 담장은 높이가 4장이고 석양(石羊)이 둘이며 석마(石馬)도 둘이고 망주석(望柱石)도 둘이다.
육품(六品)의 무덤 자리는 주위가 40보이고 매 면은 10보이며, 봉분의 높이는 8자 이다.
칠품(七品)의 무덤 자리는 주위가 40보이고 매 면은 7보 반이며, 봉분의 높이는 6자이다. 서인(庶人)의 무덤 자리는 9보이니 중심을 뚫으면 계가 18보이다.
『구씨의절』에 살펴보니 “『국조계고(國朝稽古)』에는 무덤 자리를 일정하게 제정 하였는데 일품(一品)은 90보인데 매 품계마다 10보씩을 줄였고 칠품(七品) 이하는 30보를 넘지 않았으며 서민(庶民)은 9보에 그쳤다.
봉분은 일품(一品)의 경우에는 높이가1장 8자(一丈八尺)이고 매 품계마다 2장(二丈)씩을 줄여가고 칠품(七品) 이하는 6장을 넘지 않는다. 그 석비(石碑)는 일품(一品)의 경우에는 이수(螭首)를 사용하고, 이품(二品)의 경우에는 기린(麒麟)을 사용하고, 삼품(三品)은 천록(天祿) ․ 벽사(辟邪)를 사용하며, 모두 귀부(龜趺)를 쓴다.
사품(四品)에서 칠품(七品)까지는 모두 원수(圓首)에 방부(方趺)를 사용한다. 그 석인(石人), 석수(石獸)의 길이와 넓이는 품계의 차례대로 줄여 내려가니 그 석인(石人)과 석수(石獸)와 망주석(望柱石)은 모두 순서가 있어서 영갑(令甲)에 나타나 있으니 살펴볼 만하다.
신분이 귀한 자는 천한 자와 같이 할 수 있으나 천한 자는 비록 부유하더라도 귀한 자와 같이 할 수 없다. 그러나 멀리 보는 자는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바에 남김없이 다 해버리지 않으니 약간 더하고 줄여 나가더라도 괜찮다.” 하였다.
『한묵대전(翰墨大全)』에 “서인(庶人)의 묘 자리의 네 방향은 중심으로부터의 거리가 각각 9보이니 이는 사방이 서로 18보 떨어진 것이다.”하였다. 식(式)을 살펴보니 땅 넓이 5장을 보(步)라 하니 이것은 관척(官尺)으로 매 한 방향이 합쳐 4장 5자(四丈五尺)이고 지금 시속(時俗)의 영조척(營造尺)으로 말한다면 5장 4자(五丈四尺)이다.
비석 머리를 각지게 한다(圭首)
『서경(書經)』주에 “규수(圭首)는 비껴 날카로움(斜銳)이다.” 하였다.
〔부주〕 풍비(附註豐碑)
『예기』「단궁」편에 “공실(公室)은 풍비(豐碑)에 준하는 것을 사용한다.”하였다. 그 주에 “풍비는 천자(天子)의 제도이다.” 하였고 그 소에 “대체로 시(視)라 말한 것은 견준다는 말이고 풍(豐)은 크다는 것이니 큰 나무를 사용하여 비(碑)를 만들되 비목(碑木) 가운데를 뚫어 공간이 비도록 하고 녹로(鹿盧)의 양 끝을 비목(碑木)에 넣는다. 그렇게 하여 밧줄을 써서 한 쪽 끝은 관에 묶고 다른 끝은 녹로에 묶는다.
이 작업이 끝나면 사람들은 각각 비(碑)를 등지고 밧줄 끝을 메고서 북소리에 맞추어 점점 뒤로 가면서 관을 내린다.“하였다. 『운회』를 살펴보니 ”놀로(鹿盧)를 보통 녹로(轆轤)라 하며 우물 위에 물을 길어 올리는 회전하는 둥근 나무이다.“ 하였다.
『구씨의절』에 “풍비(豐碑)는 나무로 만들어 외고나 앞뒤에 세우고 풍비의 구덩이 속에 녹로(鹿盧)를 만들고 줄로 매달아 관을 내리는 데에 Tm는 것일 뿐이니 그 위에 글자를 새기지는 않는다. 진(秦) ․ 한(漢) 이래로 점차 돌을 써서 풍비를 만들고 그 위에 글자를 세기며 그것을 비(碑)라 하였다.
진(晉) ․ 송(宋) 사이에 죽은 자는 모두 신도비(神道碑)가 있었으니 지리가(地理家)들이 동남(東南) 방향을 신도(神道)라 여겨 그 곳에 비(碑)를 세웠기 때문에 묘갈(墓碣)이라 이름 하게 되었다.
요즘에는 오품(五品) 이하는 사용하는 문(文)과 비(碑)가 같고, 묘표(墓表)는 관직이 있건 없건 모두 표(表)를 써서 묘의 왼쪽에 세우고 지명(誌銘)은 땅 속에 묻는다. 사마온공이 말하기를 ‘옛 사람은 공훈(功勳)과 덕(德)이 있으면 이름을 종(鍾 )과 정(鼎)에 새겨 다만 스스로 그 어짊과 어리석음을 알 따름이다.’ 하였으니 예경(禮經)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남송(南宋) 원가(元嘉:424-453) 연간에 안연지(顔延之)가 왕주(王珠)를 위하여 묘지(墓誌)를 지었는데 그가 평민이라 명뢰(銘誄)가 없었다. 그리하여 행적을 적었으니 이로부터 마침내 이것이 습속이 되었다.
대저 비표(碑表)는 학생(學生)과 이력(履歷), 훈업(勳業)을 서술하고, 지명(誌銘은 가계와 관작(官爵) 그리고 주소지 생졸(生卒)연대를 기술한다. 비록 그 뜻이 좋은 것은 칭송하여 드러내고 나쁜 것은 드러내지 않았으나
옛 사람이 ‘좋은 점이 없는데 칭송하는 것을 속이는 것이라 하였고, 좋은 점이 있는데 칭하지 않는 것은 가리는 것이다.’ 하였는데 속이는 것과 가리는 것을 군자가 하지 않는 것이다.” 하였다.
6. 분묘도 및 비석도(가례집람 1권 300쪽)
비석 받침대의 높이는 1자 가량으로 한다.
석비는 오른쪽 앞에 세우기도한다.
세계(世系)와 이름자를 비석의 왼쪽에 새기되 돌아가면서 새겨서
비석 뒷면과 오른쪽에 이르기까지 두루 새긴다.
비석의 높이는 4자이다.
비석받침의 높이는 1자 가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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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1337∼1392) 묘(墓)
소재지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능원리산 3번지
지방문화재 제1호
고려말 충신인 동방이학지조(東方理學之祖)로 추앙받는 포은 정몽주(1337~1392)선생
의 본관은 영일(迎日). 초명은 몽란(夢蘭)·몽룡(夢龍).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
(圃隱). 인종 때 지주사(知奏事)를 지낸 습명(襲明)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성균관 복
응재생(服膺齋生) 정운관(鄭云瓘)이다.
▲ 정몽주선생 묘(입구이정표)
▲ 정몽주선생 묘(입구표지석)
▲ 정몽주선생 묘(안내도)
1389년(공양왕1년) 정몽주 선생은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옹립하였다.
그러나 그는 공양왕 옹립에는 정도전(鄭道傳), 이성계(李成桂) 같은 역성혁명파와뜻을 같이했지만, 고려왕조를 부정하고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는 데는 반대했다.
그리하여 기회를 보아 역성혁명파(易姓革命派)를 제거하고자 했다.
※ 역성혁명(易姓革命)- 王氏 고려를 무너뜨리고 李氏 조선을 세우는 것이
이른바 역성혁명(易姓革命)이다. ▲ 정몽주선생 신도비(神道碑)
▲ 묘소 입구의 홍살문
▲ 경모사(敬慕舍)
▲ 영모제(永慕齊)
▲ 포은 정몽주(안내문)
▲ 백로가(포은 정몽주선생 어머니 지음)
공양왕(恭讓王) 4년 마침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 석(奭)을 배웅하러 나갔던 이성계가 시간적 공백을 이용하여 사냥을 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병석에 눕게 되는
일이 생겼다.
이야기 한국사(교양국사연구회 엮음)에서 요약한 내용임.
이성계가 낙상(落傷)하여 병환 중에 있으니 문병을 아니 할 수 없어, 이성계의 사저
로 문병을 가게 되었다.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李芳遠)은 문객 조영규(趙英珪)를 데리고 이성계 옆을 떠나지
않고 지키고 있었다.
「정몽주 대감의 병문안은 겉으로의 명분이지, 그 속셈은 다른 데 있을 것입니다.
조심하셔야합니다.」조영규가 이성계에게 들으라고 하는 말이다.
중략 ∼
정몽주가 문병을 마치고 이방원과 대좌하게 되자.
「포은 선생 술이나 한잔 드시며 여러 가지 좋은 말씀을 해주시오.」 이방원이 하
는 말이다.
「내가 무슨 대학자라고 좋은 말이 있겠소」
「대감께서는 당대의 대학자이신데 성리학에 대해 좋은 말씀을 좀 해 주시오.」
중략 ∼
▲ 단심가(丹心歌)
화제는 바뀌어 고려조의 정치에 대하여 이야기가 진전되고 있었다.
이방원은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정몽주의 속마음을 떠보기 위해, 시조 한 수를
유려하게 뽑아내려갔다.
何如歌(하여가)
如此亦何如 如彼亦何如(여차역하여 여피역하여) 이런들 어떠하리 전런들 어떠하리,
城隍堂後苑 頹落亦何如(성황당후원 퇴락역하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我輩若此爲 不死亦何如(아배약차위 불사역하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년까지 누리리라.
후세에 널리 회자(膾炙)되었던 이방원의 만수산(萬壽山) 노래였다.
다 썩어져가는 고려 왕실만 붙들기 위해 고집을 부리지 말고, 칡 넝쿨처럼 얽혀서
사이좋게 사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는 내용이다.
정몽주는 노래를 다 듣고 나서 좋은 시라고 칭찬한 다음 화답(和答)하는 것이 인사
이니 내 노래도 들어보게 하였다.
단심가(丹心歌)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다시 죽어
此身死了死了 一百番更死了(차신사료사료 일백번갱사료)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白骨爲塵土 魂魄有也無 (백골위진토 혼백유야무)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줄이 있으랴.
向主一片丹心 寧有改理也歟(향주일편단심 영유개리야여)
시조도 시조였지만 방원에게는 호령처럼 들렸다. 이로써 두 사람은 서로의 뜻을
알고 헤어졌다.
중략 ∼
▲ 정몽주선생 묘소(左)와 저헌 이석형묘소(右) - (이석형은 정몽주 증손녀 사위)
말이 선죽교(善竹橋)에 다다르자, 「멈추어라!」저녁노을이 지기 시작한 선죽교 돌다리 위에서는 판위위시사(判衛尉侍事)조영규(趙英珪)가 가로막아 서며 외쳤다.
중략∼
조영규의 철편(철퇴)를 맞고 만고의 충신 정몽주가 선죽교 돌다리 위에서 털썩 쓰러진다.
날짜는 공양왕 4년 4월 4일이었다.
원래 이 다리의 이름은 선지교(善地橋)였으나 정몽주가 살해된 뒤 그의 피가 얼룩진
자리에 대나무가 솟아나서 선죽교(善竹橋)라고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내가 어렸을 때 선죽교 사진을 보고 궁금했던 점은 저런 다리로 어떻게 사람이 다녔
을까? 였다. 도저히 사람이 다닐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이런 사연이 있다.
1780년(정조4년) 정몽주의 후손인 정호인(鄭好仁)이 개성(開城) 유수로 있을 때 자신의
선조가 죽은 다리를 많은 사람들이 밟고 다니는 것이 안타까워 주위에 난간을 설치하여
보호하고, 옆에 다리를 따로 만들어 건너다니게 하였다한다.
▲ 정몽주선생 묘(墓) ▲ 다리건너에 정몽주선생과 이석형의 묘가 있다.
▲ 연지 연못과 묘소의 원경
약속을 헌신짝 버리듯하는 현대인들에게 죽음도 불사하는 고려 충신의 기개를 느낄
수있는 정몽주선생의 묘소가 개성이 아닌 용인시 모현면 능원리에 있다.
출처 : http://blog.joins.com/ds2hc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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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 류 유적건조물 / 인물사건/ 인물기념/ 생활유적
수량/면적 1동
지 정 일 1995.03.01
소 재 지 인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441
시 대 조선시대
소 유 자 강화군
87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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