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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정보방/오늘의 소사

[스크랩] 오늘의 소사 (09/27)

by 연송 김환수 2010. 9.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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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람] “헌혈증 100장, 제 인생의 자랑이죠”

[한겨레] 늦깎이 대학생 ‘헌혈왕’ 김상준씨

두 팔에는 헌혈 주삿바늘 자국이 뚜렷했다. 왼팔의 자국은 ‘혈소판 헌혈’을 한 흔적이고 오른팔의 자국은 헌혈을 위해 백혈구 수치를 잰 흔적이다.

지난 17일 오후 한양대 안산캠퍼스에서 만난 김상준(28·전자정보시스템4·사진)씨는 일주일 전 받은 100번째 헌혈증을 들어보였다. 100번의 헌혈 대부분은 ‘혈소판 헌혈’이었다. ‘전혈’로 부르는 보통 헌혈은 혈액 전체를 채혈하지만 혈장 헌혈이나 혈소판 헌헐은 특정 성분만 뽑는다. 혈소판 헌혈은 백혈병 환자에게 꼭 필요하다. 김씨는 “자기 얘기를 하려니까 좀 민망스럽지만, 제게는 헌혈증 100장이 토익 900점보다 더 큰 자랑”이라고 말했다.

고3 때부터 헌혈을 시작한 김씨는 2000년 대학 1학년 때 ‘헌혈의 집’에서 우연히 혈소판 헌혈이 필요한 환자 얘기를 들었다. 당시는 ‘헌혈의 집’에서도 혈소판 채혈장비가 없을 때였다. 그는 여의도 성모병원에 찾아가 소아백혈병 환자에게 혈소판을 나눠줬다. 이틀 뒤 수술을 해야 하는 환자였다. 환자 어머니가 그의 손을 꼭 잡고 “정말 고맙다”는 말을 연발했다. “아, 이거구나! 태어나서 그렇게 뿌듯한 적이 없었어요.”

시간 걸리는 ‘혈소판’ 헌혈

보람 느껴 골수기증 약속도


혈소판 헌혈은 시간과 품이 적잖이 든다. 학교 근처에서 자취하는 김씨는 서울 신도림역과 구로디지털단지역 앞에 있는 헌혈의 집까지 1시간 넘게 이동해야 했다. 보통 헌혈이 10분 정도 걸리는데 비해 혈소판 헌혈은 1시간30분~2시간이 필요하다. 혈소판 헌혈은 2주일에 한 번씩 할 수 있지만 1년에 24번까지만 허용된다. 김씨는 주기적으로 헌혈을 하겠다고 적십자사에 등록한 헌혈회원이기도 하다. 적십자사 쪽에서 A형 피가 부족할 때 그에게 전화를 걸면 가끔은 일반 헌혈도 한다.

백혈병의 위급함을 잘 아는 그는 2005년에 골수기증 의사도 밝혔다. 골수은행에 저장된 정보를 보고 기증 요청이 오면 골수를 나눠주게 된다. “저는 오히려 제 골수와 맞는 분이 나타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는 말을 이었다. “그때는 이미 아픈 분이 생긴 거니까요. 제가 기증을 못 하게 되더라도 아픈 분들이 적은 게 더 좋지요.”

그는 직장에 다니다 지난해 편입한 늦깎이 대학생이다. 모두 토익점수와 어학연수 등 ‘스펙 쌓기’에 골몰하는 세태에 대해서도 한마디 했다. “제가 사무기기 만드는 회사에서 일할 때 느꼈는데요, 기업에서 원하는 인재는 창의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예요. 그러려면 여러 분야를 다양하게 경험해 봐야 할 것 같아요.” 그는 한때 구로시민센터에서 수화를 배워 나중에는 수화 보조강사를 하기도 했다. 인천 보라매교육원에서 주말봉사도 했다. 그런 게 직장생활에 큰 도움이 됐다고 했다.

그는 이런 보람 말고도 헌혈의 좋은 점이 또 있다며 우스개 소리를 덧붙였다. “우리 가족이 쓰는 우산은 다 제가 책임집니다.” 우산, 화장품, 상품권 등 다양한 헌혈 기념품 받는 재미가 쏠쏠하다는 이야기다. “상품권으로는 주로 책을 사보는데요,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가 제일 기억에 남네요.” 그는 마치 ‘현혈 유전자’를 타고난 듯했다.

안산/글·사진 손준현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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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4년  화폐속의 인물 흘링카 (슬로바키아1000코루나) 출생



흘링카(Andrej Hlinka)1864. 9. 27 ~ 1938. 8. 16.

슬로바키아의 로마 가톨릭 사제이며 애국지사. 슬로바키아 2002년 발행

1920, 1930년대 체코슬로바키아 정부에 대항해 슬로바키아의 자치주의 운동을 이끌었다.


1906년 11월 슬로바키아인을 선동해 헝가리에 대항하도록 한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어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그 다음해 5월 교구민들에게 선동적 성격의 고별사를 한 죄로 1년 6개월의 형이 추가되었다. 1918년 5월 24일 슬로바키아 국민당이 헝가리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자, 성직자로 구성된 슬로바키아 국민당의 지도자가 되어 체크와 통합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그러나 다음해 통합에 대해 의혹을 품고 슬로바키아의 국민투표를 요구하는 외교 문서를 만들어 파리 평화회의에 보냈다. 1922년 8월 당을 지휘해 프라하 정부에 대한 반대운동을 펼치는 한편, 질리나 문서에서 그의 입장을 피력했다. 또한 전하는 바에 따르면 체크인들이 토마스 마사리크가 피츠버그 조약(보통 피츠버그 협정이라고 함)에서 약속했던 슬로바키아 자치권을 이행하지 않는다고 비난했다고 한다. 마사리크는 1918년 5월 이 조약 문서에 서명했는데, 그는 이것을 하나의 정책 성명서로 보고 미국에 있는 체크인과 슬로바키아인들이 이를 지지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후 행정적 개혁으로 체크와의 관계가 개선되자, 흘링카는 1927년 1월 당 부서기 요제프 티소가 체코슬로바키아 정부 내 직위를 받아들이는 것을 허용했다. 그러나 1929년 그의 당은 다시 체크에 반대하는 입장으로 돌아섰다. 당시 흘링카는 또다른 당 부서기 벨라 투카가 헝가리 첩보원으로 활동하여 반역죄로 기소되었을 때 그를 해임시키기를 거절했다. 그 자신은 진정한 슬로바키아의 애국자였으나, 티소와 투카 같이 동기가 순수하지 않은 사람들의 영향을 받았다. 또한 당시 체크에 대한 그의 적대감은 거의 광적이었는데, 그는 그러한 적대감이 체코슬로바키아를 파괴하려 하고 슬로바키아의 대의명분에 대해 전혀 호의적이지 않은 독일인과 마자르인들에게 이용당하고 있음을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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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1년  멕시코가 후에 스스로 어거스틴 1세라 자칭한 이뚜르비데에 의해 독립을 성취하다.


19세기초 독립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던 멕시코의 끄리오요 계층은 부왕군 대령출신인 아구스틴 데 이뚜르비데(Agustin de Iturbide)와 협력하게 된다.


그는 게레로(Guerrero)와 협정을 맺고 쁠란 데 이괄라(Plan de Iguala)를 공포했다. 그 내용은 가톨릭 종교의 유일성 인정, 모든 사회구성원들의 단합, 멕시코의 정치 체제를 입헌군주제로 하되 군주는 반드시 유럽의 왕가 중 어느 하나에서 선출된 자를 옹립한다라고 되어있다. 이뚜르비데는 다른 지역의 전투에 참가했던 반군의 우두머리들과 협력하였고, 많은 수비대들은 자발적으로 이뚜르비데 군대에 합류했다.

스페인인들은 이뚜르비데의 승승장구에 대한 책임을 물어 아뽀다까 부왕을 제거하고 그 후임에 노베야(Novella)원수를 앉혔다.그러나 며칠 후, 스페인으로부터 임명받은 후안 오도노후(Juan O'Donoju)가 멕시코에 도착해서 이뚜르비데와 협상을 벌인다. 그리고 1821년 8월 24일자로 쁠란 데 이괄라의 골자를 인정한 꼬르도바조약을 체결한다. 9월 27일 이뚜르비데가 이끌던 군대는 멕시코로 개선을 하게 되고 이뚜르비데는 최초의 자치적 총독으로 임명받는다.

그러나 이러한 멕시코의 독립은 부왕군 출신인 이뚜르비데와 많은 권력을 누린 끄리오요 등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식민지 시절의 많은 모순을 해결하지 못하고 독립후에도 정치.경제.사회 체제는 식민지시대 그대로의 모습이었고 오랫동안 거의 무정부시대라고 할 만큼 많은 혼란속에 멕시코는 놓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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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황태성 간첩사건 발표

 

황태성(黃泰成) 간첩사건을 이해하려면 황태성과 박정희에 대한 사전이해가 필수적이다.

황태성은 광복후 조선공산당 경북도당 조직부장으로 10ㆍ1 대구폭동을 주도한 뒤 월북해 북한에서 무역부부상(차관)까지 지낸 사람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형인 박상희의 결혼을 중매할 만큼 박상희와는 막역한 친구사이였고, 때문에 박정희와도 친분이 깊었다. 박정희는 한때 남로당에 가입했던 것이 문제가 돼 1948년 11월에 조사를 받았으나 그때 이른바 ‘박정희 리스트’를 작성, 군부대안의 남로당원들을 일망타진하는데 큰 공을 세웠었다. 5ㆍ16으로 정권을 잡았어도 미국이 그에게서 의혹의 눈초리를 떼지 않자 혁명공약 제1조로 ‘반공’을 내걸어 자신의 과거를 불식시키려 했다.

박정희가 또 다시 난처하게 된 것은 2년 뒤였다. 1963년, 국민의당 대통령후보 허정이 대통령선거 유세 과정에서 황태성 사건의 진상을 밝히라고 요구한 것이다. 자칫하면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것을 우려한 박정희는 부랴부랴 사건의 내막을 밝히도록 중정에 지시한다.

1963년 9월27일의 중정 발표에 따르면 황태성은 5ㆍ16 후인 9월1일에 서울에 잠입, 박정희와 김종필 중정 부장과의 만남을 시도하다 10월20일에 체포됐다는 것이다. 중정은 간첩사건이라고 발표했지만 당시의 사건 관련자들은 ‘밀사’였다고 주장한다. 박정희와 통일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휴전선을 넘었다는 이유에서였다. 결국 황태성은 박정희를 만나지도 못한 채 1963년 12월, 처형돼 사건의 진실도 함께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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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프랑스 시인 구르몽 사망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이 한 글귀로 우리에게 너무나 유명한 프랑스 시인이자 소설가였던 구르몽이 1915년 9월 27일 세상을 떠났다. 프랑스 상징주의 운동기의 매우 지성적인 비평가이기도 했던 그는 이제 영어로 된 수많은 번역본으로 우리네 독자들을 만나고 있다. 그는 수많은 작품을 통해 우리에게 상징주의 미학의 원리를 깨우쳐줬다.

프랑스 북서부 바스노르망디주(州)의 캉에서 법률을 공부한 뒤 1884년에 국립도서관의 사서가 되었으나 1891년 ‘메르퀴르 드 프랑스(Mercure de France)’라는 잡지에 비애국적인 기사를 발표했다는 이유로 해고당했다. 그가 남긴 50권의 저서는 주로 수필집인데 그 내용은 18세기의 회의주의 철학자들과 비교될 만큼 광범위하고 논조도 비슷하다. 그의 저서로는 에필로그(1903~13)ㆍ문학산책(1904~27)ㆍ철학산책(1905~09) 등이 있는데, 우리에게는 문두에서 언급한 그의 대표적인 상징시 ‘낙엽(落葉)’이 친숙함은 사실이다.

구르몽은 모든 진실은 상대성을 갖는다고 생각했다. 그의 평론가로서의 장점은 순전히 미학적인 기준에 따라 문학평론을 썼다는 점이었다. 이러한 접근방식은 20세기 영미시에 끼친 지대한 영향때문에 ‘시인의 시인’으로 불리우는 에즈라 파운드와 세계적인 뮤지컬 ‘캣츠(CATS)’ 의 원작시집인 ‘노련한 고양이에 관한 늙은 주머니쥐의 책’의 저자 T.S. 엘리엇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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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9년  (예종 1)경국대전 편찬 

1484년  (성종15)창경궁 준공되다 

1575년  이이, 성학집요 저술

1722년  미국 독립 지도자 사무엘 아담스(Samuel Adams)  출생

1792년  영국 풍자만화가 조오지 크루윅생크(George Cruikshank) 출생

1821년  스위스 문학자 앙리 프레데리크 아미엘 탄생

1825년  스티븐슨, 세계최초의 증기기관차 로코모션호 운전


1826년  영국에서 스톡턴 앤드 달링턴 레일웨이(The Stockton and Darlington Railway)가 시속 10마일의 증기기관차의 운행을 시작하다.


1854년  대서양횡단여객선 아크릭호 침몰. 300여명 사망

1862년  남아프리카 정치가 루이스 보타(Louis Botha) 출생


1891년  러시아 소설가 이반 알렉산드로비치 곤차로프(Ivan Alexandrovich Goncharov)  세상떠남


1898년  미국 작곡가 빈센트 요우맨스(Vincent Youmans) 출생

1901년  시인 파인 김동환 출생

1915년  프랑스 시인 구르몽 사망 

1917년  프랑스 화가 에드가 드가(Edgar Degas) 세상떠남

1921년  독일 작곡가 엥겔베르트 훔페르딩크(Engelbert Humperdinck) 세상떠남

1922년  그리스 왕 콘스탄틴 1세(Constantine I)가 터키에게 패함에 따라 퇴위하다.


1938년  '애국적 미국인', 보브 호프 데뷔

1938년  8만톤의 여객선 퀸 엘리자베스(Queen Elizabeth)호가 진수되다.


1939년  독일-소련 9.28 우호조약 조인

1939년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가 독일군에게 포위되다. 


1940년  독일-이태리-일본, 3국 반공협정 체결.

1940년  일본-독일-이탈리아 3국동맹 베를린에서 조인


1942년  미국 락 가수 앨빈 스타더스트(Alvin Stardust) 출생

1944년  프랑스 화가 겸 조각가 아리스티드 마이욜(Aristide Maillol) 세상떠남

1945년  히로히토 일왕, 미국 대사관의 맥아더 방문

1946년  제1회 IMF(국제통화기금)총회 워싱턴에서 개막

1948년  영국 배우 미셀 도트리시(Michele Dotrice) 출생


1949년  정부, 서울주재 소련영사관원 니콜라이 추방

1950년  美 합동참모본부, 유엔군사령부에 북진에 대한 훈령

1952년  크라크 유엔군총사령관, 한국 전해안 봉쇄 발표

1954년  한·미 군사회담 개최(한국군 증강 등 협의)

1957년  일본. 북한, 민간기관간에 무역협정 체결.


1958년  서울운동장 야구장이 개장되다 

1958년  예멘에 군부쿠데타. 바드르왕을 시해하고 자유공화국 선포


1961년  한국, 국제과학연맹이사회 가입

1962년  예멘, 군부쿠데타

1963년  황태성 간첩사건 발표 


1964년  주간한국 창간

1964년  케네디 대통령 암살사건규명 워렌보고서 공개. 오스왈드를 단독범으로 단정


1965년  경북 영양·안동에 무장간첩 출현, 일가족 2명 살해

1965년  미국 영화배우 클라라 보우(Clara Bow) 세상떠남


1968년  누드 장면을 포함하여 모든 무대 검열을 끝낸 뮤지컬 <헤어 Hair> 가 런던에서 첫 공연을 하다.


1978년  제42회 세계사격대회 서울서 개최

1979년  영국 가수 겸 코메디언 그라시아 필드(Gracie Fields) 세상떠남

1980년  정부, 기업체질강화대책 발표


1981년  중공, 대만에 교역제의

1981년  트뤼도 캐나다수상 내한

1981년  프랑스 고속열차 TGV 첫 운행 


1982년  미국 경찰, 여인추행혐의로 유엔주재 북한외교관 수사

1983년  한국 가톨릭순교자 성인103명 탄생

1986년  전교협(전국교사협의회) 창립 


1988년  서울올림픽 100m 금메달리스트 벤 존슨의 약물복용 조선일보 특종 

1988년  UN 평화유지군 노벨상 수상.


1989년  일본 소니사, 미국 영화사 콜롬비아 인수 발표


1990년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설립 

1990년  한국-말리 국교 수립


1993년  미국 비행기 개척자 제임스 두리틀(James Doolittle) 세상떠남

1993년  북한 평양방송, "단군(檀君) 유골을 최근에 발굴"했다고 보도.

1993년  한·영 방산/군수지원양해각서 체결


1994년  소대장 무장탈영.


1995년  3차 남북 북경회담 우성호 선원송환 싸고 대립. 남측: 우선송환, 북측: 쌀논의 우선.


1996년  미국 국립 암 연구소가 전염으로부터 면역성을 제공하는 보기 드문 케이스와 에이즈가 서서히 진행되고 있는 코카서스인등에게서 유전자 변형을 발견했다고 The journal Science지가 보도하다. 

1996년  회교 근본주의 탈레반(Taliban)이 이틀간의 수백명이 죽은 전투를 한 후 아프카니스탄 카불을 장악하다. 


1998년  독일 총선에서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사민당 총리후보가 헬무트 콜 총리를 누르고 승리


2000년  음성인식 반도체 칩 세계 3번째로 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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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세요! 

출처 : 화폐수집-여행과 자유 (화여자)
글쓴이 : 노가다귀족/평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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