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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정보방/오늘의 소사

[스크랩] 오늘의 소사 (09/29)

by 연송 김환수 2010. 9.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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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휴대폰 팔아 조손가정에 '푸른꿈' 준다

서울장학재단, 조손가정 청소년 위한 '푸른꿈 희망장학기금' 신설
해당자에게 올해 3·4분기 30만~40만원씩 지원

[아시아경제 정선은 기자]서울장학재단이 서울시가 폐휴대폰 매각을 통해 모은 5479만4000원으로 저소득층 조손가정 청소년을 위한 '푸른꿈 희망장학기금'을 신설해 서울 소재 중·고등학생에게 교육 관련 경비를 지원한다.

지원대상은 만 60세 이상의 조부모가 부양의무자인 서울 거주 중?고등학생이라면 누구나 지원가능하다. 장학생에게는 올해 3·4분기동안 중학생은 30만원, 고등학생은 40만원씩 지원받는다. 이 장학금은 수업료, 학교운영비, 급식비, 교재비 등 교육 관련 경비로 활용해야 한다.

신청기간은 9월 27일부터 10월 8일까지며, 해당학생의 소속 학교 교사가 신청서를 작성해 학교 별로 서울장학재단에 접수하면 된다.

이와 함께 서울장학재단은 9월 6일부터 모집하고 있는 ‘우리아이 희망장학금’의 신청기한을 연장해서 10월 8일까지 접수한다. 

정선은 기자 dmsdlun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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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화폐속의 인물 152마차도 데 아시스(브라질) 세상떠남

 



마차도 데 아시스(Joaquim Maria Machado de Assis)

1839. 6. 21 ∼ 1908. 9. 29.

브라질의 시인·소설가.


브라질 고전문학의 대가로 그의 저술활동은 유럽 문화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어 브라질 문학 유파들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흑인과 포르투갈인의 혼혈인 도장공(塗裝工)의 아들로 태어나,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역시 혼혈계인 계모에게 양육되었다. 병약하고 호감을 주지 못하는 외모에 간질병과 말더듬 증세까지 지닌 그는 17세에 인쇄공의 도제로 일하기 시작하면서 틈틈이 글을 써 낭만주의 전통의 단편소설·시·장편소설 등을 출판했다.


1869년 무렵 브라질에서 문인으로 성공한 대표적인 인물이 되었으며, 정부가 마련해준 좋은 직책에 있으면서 교양있는 여인 카롤리나 아우구스타 사비에르 데 노바이스와 행복한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바로 그해에 병으로 작품활동을 중단해야 했지만, 그뒤 곧 당시의 문학관습을 깨뜨리는 매우 파격적이고 독창적인 문체로 새로운 소설을 써 다시 인기를 끌었다. 이것이 〈브라스 쿠바스의 사후 회고록 Memorias Postumas de Bras Cubas〉(1881)인데, 자유로운 연상과 다양한 여담을 담았고 괴팍한 1인칭 화자의 목소리로 이야기를 진행시키고 있다. 줄거리가 종종 이어지지 않는 160개의 짧은 장(章)으로 된 이 작품에서 '작은 승리자'라고 불리는 브라스 쿠바스는 자신의 생을 냉소적으로 회고하면서, 선과 악을 비교한 뒤 자신은 인류의 불행한 유산을 영속화하는 아이를 갖지 않았기 때문에 조금이나마 앞선 사람이라고 결론짓고 있다. 이 작품을 비롯해 그에게 명성을 안겨준 작품들로는 여러 편의 단편소설과 〈철학자냐 개냐 Quincas Borba〉(1891)· 〈돔 카스무로 Dom Casmurro〉(1899) 등 2편의 후기 장편소설이 있다. 특히 〈돔 카스무로〉는 그의 걸작으로 꼽히는 소설로서 질투로 뒤틀린 마음을 탐구한 무섭고 끔찍한 작품이다. 단편소설 번역본으로는 〈악마의 교회 외(外) The Devil's Church and Other Stories〉(1977)·〈정신과 의사 외(外) The Psychiatrist and Other Stories〉(1963) 등이 있다.


세련되고 귀족적인데다 초연하고 냉소적이며 세계주의자인 마차도는 브라질의 독립이나 노예제도폐지 같은 사회적 문제를 간과했으며, 지방색과 민족주체의식이 강한 브라질인의 열정을 공유하지 못했다. 소설의 배경은 주로 리우였고 그 외의 다른 곳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의 작품 속에는 자연세계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경쾌한 어구와 재치가 아니었더라면 참기 어려운 것이 되었을 성싶은, 뿌리깊은 염세관과 환멸감이 깔린 글을 썼다. 1896년부터 브라질 학술원의 초대 원장으로 일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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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0년 화폐속의 인물 구스타프 1세 바사 (스웨덴) 세상떠남


구스타프 1세 바사(GustavⅠ Vasa)

본명은 Gustaf Eriksson Vasa. 1496(?). 5. 12 ∼ 1560. 9. 29 스웨덴 왕(1523 ∼1560 재위).


바사 왕조의 시조로 덴마크로부터 독립해 스웨덴 주권을 확립시켰다.


스웨덴의 귀족가문 출신으로 아버지는 원로원 의원이었다.

그의 가문은 15세기 스칸디나비아 파벌귀족정치의 세도가였고 스웨덴 섭정 3명을 배출한 스투레 가문과 사돈지간이었다.


그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스웨덴을 강력한 군주국으로 만든 것이었다. 대부분 교회재산을 몰수해서 얻은 왕실과 바사 가문의 막대한 토지를 권력기반으로 삼았기 때문에 다른 귀족가문은 그와 도저히 경쟁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는 자기 토지를 개발하고 관리하는 데 관심을 쏟았으며 재정정책의 세세한 부분까지 일일이 참견했다. 스웨덴인 전문가가 부족해지자 1540년대에는 독일 행정가를 초빙했다.

근무기간은 짧았지만 이들은 스웨덴에 큰 업적을 이루어놓고 갔으며 덕분에 그는 토지를 효율적으로 직접 관리할 수 있었다.


파벌싸움 속에서 커온 정치가답게 구스타프는 교회의 토지를 미끼로 귀족들을 끌어들였고, 스투레 때에 시도로 그쳤던 많은 정책들을 실현시켰다.

예를 들어 1544년 의회를 매수해 선거제 왕위계승을 세습제로 바꾸었다.

또 나중에는 뜸해졌지만 집권 초기에는 각 신분 대표 모임을 불규칙하게 자주 소집해서 자기 정책을 지지하도록 했다.

뒤에 이러한 각 신분 모임은 효율적인 의회기구로 발전했고, 반면 15세기 입헌투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귀족회의의 중요성은 상대적으로 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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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속의 인물 82(라오스-100킵:판 보이 차우)


본명: Phan Van San. 1867 ∼1940. 9. 29 라오스 100킵(1957년)발행

 판 보이 차우(Phan Boi Chau) 초기 베트남 해방운동 지도자.

정열적인 저작활동과 독립을 위한 지칠 줄 모르는 노력으로 베트남에서 가장 위대한 애국자 중 한 사람으로 칭송받고 있다.

가난한 학자인 그의 아버지는 판 보이 차우에게 열심히 공부해 과거시험에 응시하도록 강조했다.

베트남의 전통적인 관료정치체제에서 과거시험은 출세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1900년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그때쯤 판 보이 차우는 이미 확고한 민족주의자가 되어 있었다.

1903년에는 〈류큐[琉球]의 고루(苦淚) Luu cau huyet le tan thu〉를 썼다.

이 책은 베트남이 독립을 빼앗긴 고통을 일본이 류큐 제도를 잃게 될 때 받을 고통에 빗대어 쓴 것이었다.

1904년 혁명 동지들과 함께 개혁세력의 조직인 두이 탄 호이(Duy Tan Hoi:개혁회)을 조직했고, 쿠옹 드 공의 적극적인 지지를 얻어내어 베트남 해방운동세력과 왕실 사이에 동맹관계가 이루어지게 했다.


1905년 판 보이 차우는 저항운동의 무대를 일본으로 옮겼고, 1906년 그곳에서 중국의 혁명가인 쑨원[孫文]을 만났다. 쿠옹 드 공을 베트남 국왕으로 옹립하려 했으며, 이에 따라 1906년 쿠옹 드 공, 개혁운동가 판 차우 친과 회담을 가졌다.

프랑스와 일본 간의 화해가 이루어짐에 따라 1908~09년에 판 보이 차우와 그가 데려온 베트남 학생들, 쿠옹 드 공을 비롯한 사람들은 일본을 떠나야만 했다.

1912년에 이르러 그는 마지못해 자신의 군주제 계획을 포기했으며, 중국 광둥[廣東]에 베트남 광복회라는 이름으로 저항운동세력을 재조직했다.

이 조직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총독을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웠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판 보이 차우는 1914~17년 광둥의 감옥에 갇혔으며, 이때 자전적 성격을 띤 〈옥중일기 Nguc trung thu〉를 썼다. 감옥에서 풀려나온 뒤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공부하고 프랑스에 대한 저항운동을 다시 시작했다.

1925년 6월 체포되어 하노이로 압송되었다. 그러나 수많은 베트남인들이 그의 체殆?대해 강하게 반발해 프랑스는 그를 석방할 수밖에 없었고, 공직을 주어 회유하려고 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는 위에에서 프랑스인의 감시를 받으면서 조용하게 말년을 보냈다.

2번째 자서전을 쓰면서 미래의 혁명 노선을 다루었으며 시집도 여러 권 출판했다.

주요저작으로 베트남 최초의 혁명사로 유명한 〈베트남 망국사 Viet Nam vong quoc su〉(1906)와 정치성을 띤 역사소설 〈후진기담(後陳奇談) Hau Tran dat su〉이 손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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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뮌헨회담, 주데텐란트 獨양도 합의

1938년 3월에 오스트리아를 침공·합병한 히틀러가 다시 발톱을 세워 9월 초 체코령 주데텐란트를 요구하자 체코는 동맹국인 영국과 프랑스에 안전보장을 호소했다. 9월 15일 영국 총리 체임벌린이 독일로 날아가 히틀러와 마주앉았으나 향후 1주일간 무력 침공을 자제하겠다는 언질만 받아냈다. 독일과의 충돌을 피하고 싶었던 체임벌린은 프랑스 총리 달라디에와 이 문제를 협의한 끝에 체코를 독일에 넘기자는 결론을 내렸다. 체코는 “자신들의 평화를 위해 우리를 희생시킨다”고 볼멘소리만 했을 뿐 영·불의 합의를 따라야 했다. 힘 없는 국가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22일의 두 번째 회동에서 히틀러가 주데텐란트를 ‘즉시’ 넘기라는, 전보다 더 강경한 조건을 제시했을 때 체코와 영·불은 더 이상 밀릴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총동원령을 내리고 함대까지 동원하는 등 법석을 떨었다. 하지만 히틀러가 최후 통첩을 보내자 언제 그랬느냐는 듯 영·불은 꼬리를 내리며 타협으로 방향을 틀었다.

9월 29일 당사국인 체코를 제외시킨 채 뮌헨에 모인 체임벌린·달라디에·히틀러·무솔리니는 밤샘 협상 끝에 주데텐란트를 독일로 양도한다는 ‘뮌헨협정’에 서명했다. 체코에는 비극의 시작이었지만 체임벌린에게는 전쟁을 예방한 영웅이라는 영국인들의 찬사가 쏟아졌다. 그러나 이듬해 3월 히틀러가 체코의 나머지 영토까지 점령함으로써 체임벌린은 평화의 사도에서 굴욕외교의 대명사로 전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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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후보 후보단일화 담판 결렬



1987년 노태우 주도의 6.29 선언으로 5년 단임의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개헌안이 합의되었고, 10월 27일 국민투표에서 93.1%의 압도적인 지지로 통과되었다.


개헌 협상이 타결되자 정국은 곧 본격적인 대통령 선거에 돌입하였다. 그러나 민주 세력의 후보 단일화는 달성되지 못한 채, 민주화 진영은 분열과 대립을 거듭하였다. 결정적인 대립은 김대중과 김영삼의 대립과 이에 따른 재야의 분열이었다.


통일민주당 내에서 파당적 우세를 지키고 있던 김영삼은 당내 경선을 통한 후보단일화를 주장했고, 김대중은 전국적 지지 유세를 벌여 그 과정에서 표출되는 지지도를 가지고 누가 양보할 것인지를 결정하자고 주장했다.


몇 차례 진행되었던 김대중과 김영삼간의 후보단일화 담판은 1987년 9월 29일 최종적으로 결렬되었다. 이후 10월 10일 김영삼은 공식적으로 대통령 출마 선언을 하였으며, 그후 11월 9일에 통일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추대되었다. 그러자 김대중은 통일민주당을 탈당하여 10월 28일 평화민주당 창당 선언을 하였고, 11월 12일 평화민주당은 김대중을 대통령 후보에 추대함으로써 양 김씨의 출마는 공식적으로 확정되었다.


1987년 12월 16일 제 13대 대통령을 뽑는 선거가 실시되었다. 투표율은 89.2%로 제3공화국의 5,6,7대 때보다 훨씬 높았다. 후보자별 득표율은 민정당의 노태우 후보가 36.7%, 민주당의 김영삼 후보가 28.0%, 평민당의 김대중 후보가 27.0%, 공화당의 김종필 후보가 8.1%를 획득하였다. 이로써 역대 대통령 선거에서 가장 낮은 득표율로 노태우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결국 6월의 민주화 항쟁은 선거를 통한 5공 세력의 재집권으로 결말을 내렸다. 이러한 결과는 야권의 후보단일화 실패가 가장 결정적인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에서 가정은 별 의미가 없지만 당시 야권이 분열하지 않았다면 정권교체가 앞당겨졌을 것이고 우리 나라의 민주화도 앞당겨졌을 것이다. 또 양 김씨의 분열로 국민들도 지역적으로 분열되었다. 영남은 김영삼을, 호남은 김대중을 지지하게 되었고, 양 김씨의 분열과 대립이 심화됨에 따라 영호남간의 감정적 대립도 심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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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4년  (장수왕2)광개토왕비 세우다 


1399년  잉글랜드 군주 리차드 2세가 퇴위하고 볼링브로크(Bolingbroke)가 헨리 4세로서 왕위를 계승하다.


1504년  (연산군10)갑자사화 발생 

1547년  스페인 소설가 미구엘 데 세르반테스(Miguel de Cervantes) 출생

1758년  영국 제독 넬슨자작(Horatio Nelson)  출생

1829년  영국 런던에서 처음으로 공식적인 경찰이 취임하다. 

1868년  스페인혁명으로 여왕 이사벨라, 프랑스로 망명


1890년  성공회 선교(조선 고종 27년)

1900년  전신-우편업무 관청 '통신원' 창설

1901년  미국 물리학자 엔리코 페르미(Enrico Fermi) 출생

1902년  프랑스 작가 에밀 졸라 사망

1910년  미국 화가 윈슬로 호머(Winslow Homer) 세상떠남


1911년  이탈리아가 터키의 리비아 트리폴리 점령에 대응하여 전쟁을 선포하다. 

1912년  발칸동맹 성립

1913년  독일 기술가 루돌프 디젤(Rudolf Diesel) 세상떠남

1913년  디젤엔진 발명가 루돌프 디젤 사망


1916년  록펠러(John D Rockefeller)가 미국의 주식시장 중흥기 동안 세계 처음으로 억만장자가 되다.


1925년  프랑스의 정치가 부르주아 사망 - 국제연맹 결성 추진으로 1920년 노벨 평화상 수상


1927년  네덜란드 생리학자 윌리엄 에인소번(Willem Einthoven) 세상떠남 - 심장의 전기적 성질을 발견한 공로로 1924년  노벨 의학상 수상


1935년  미국 가수겸 피아니스트 제리 리 루이스(Jerry Lee Lewis) 출생

1935년  영국 소설가 윈프레드 홀트비(Winifred Holtby) 세상떠남

1935년  조선육상경기협회, 제1회 전국육상경기선수권대회 개최


1938년  독일,프랑스,이탈리아,영국 사이에 뮌헨조약이 체결되고 주데텐란트 獨양도 합의 

1943년  폴란드 지도자 레흐 바웬사(Lech Walesa) 출생

1944년  2차대전 중 소련군대가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하다. 

1948년  미국-영국-프랑스 3국, 베를린문제를 유엔에 정식 제의


1950년  미국 벨 전화회사(US Bell Telephone Company)가 처음으로 자동 전화 응답기를 실험하다. 

1950년  서울 탈환식 거행.

1950년  시인 김영랑 세상떠남


1954년  영화인 윤백남씨 사망 


1956년  영국 육상선수 세바스챤 코(Sebastian Coe) 출생

1956년  한국참전 16개국 휴전감시위원단 철수결정


1959년  영국 풍자만화가 브루스 베이런스파더(Bruce Bairnsfather)  세상떠남

1961년  프랑스-튜니지아, 프랑스군의 철수에 조인

1962년  정부, 인도네시아와 통상협정 조인

1963년  제5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서 한국 우승(한국,일본,중국,필리핀 참가)

1965년  소련이 베트남에게 무기 공급을 인정하다.


1967년  미국 작가 칼슨 맥캘러스(Carson McCullers) 세상떠남

1969년  경남지구 지하당 간첩 검거.

1970년  문공부, '사상계' 폐간 

1970년  신민당 대통령 후보에 김대중 지명 


1972년  일본-중국 국교정상화 

1972년  일-중 국교수립 공동선언.


1980년  제8차 개헌안(제5공화국 헌법) 공고

1981년  농수산부, 5차5개년 농수산부문계획 발표

1982년  제일은행 민영화

1983년  서울,인천 등에 하수도료 첫 부과하기로 발표 


1984년  북한이 남한에 수재구호물자 제공.

1984년  올림픽 주경기장(서울 잠실) 개장


1987년  국내전화 1천만회선 돌파

1987년  김대중-김영삼 후보단일화 담판결렬되다 


1990년  육군본부 직제개정(대통령령 제13110호)

1990년  해군본부 직제개정(대통령령 제13111호)

1990년  공군본부 직제개정(대통령령 제13112호)

1990년  해병대사령부 직제개정(대통령령 제13113호)

1990년  지역의료보험에 의료비 지원제 도입


1991년  아이티의 자유선거로 뽑힌 아리스티드(Jean-Bertrand Aristide) 대통령이 군대에 의해 축출당하다. 


1996년  KEDO, 북한과의 경수로 협상 무기연기. "북한의 해명과 성의 있는 조치 있어야"


1997년  미국 예술가 로이 리히텐슈타인(Roy Lichtenstein) 세상떠남

1997년  중국 전외교부장(錢外交部長), "북한의 개혁거부 좋은방향 아니다" 북.중 갈등보여

1997년  IAEA 총회 개막. "사용후 핵연료 및 방사성 폐기물 관리 안전협약" 서명(署名) 개시. 대만 핵폐기물 북한이전 철회요구 법적 근거 마련.


1999년  세계육상선수권대회 여자마라톤에서 북한 정성옥선수 금메달

2000년  신문 시사만화 '고바우영감' 국내 최장기 연재기록(1만4139회) 세우고 연재 중단 

2002년  제14회 부산아시안게임 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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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세요!

 

출처 : 화폐수집-여행과 자유 (화여자)
글쓴이 : 노가다귀족/평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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