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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정보방/부자분석, 상업

거상 김만덕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CEO)

by 연송 김환수 2010. 3. 28.

 

2010년 3월 현재 KBS1에서 토요일, 일요일 오후 9시 40분부터

방송중인 거상 김만덕에 대하여 알아봅니다.

 

       

 

김만덕은 여성으로 조선 정조임금 시대 전국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유명인사 였습니다.

 

 

 

유교 사회에서 여성이 이름을 알린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었을텐데 그녀를 위해 정조임금은 금강산 구경을 시켜주었고,

 

형조판서 이가환은 시를 지어 헌정하고, 영의정 채제공은 만덕전이라는 전기까지 썼을 정도이니 그 지위와 명성이 얼마나 높았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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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덕은 김해 김씨로 영조 15년(1739년) 김응열의 삼남매 중 외딸로 태어났다. 만덕이 13세 되는 해에 전염병으로 부모를 잃게 되니, 오라비 만석과 만재는 친척집에 목동으로 가고 만덕은 기방에 의탁하게 되었다.

 

김만덕의 본관이 김해김씨경주김씨냐 의 이견(異見)이 있다.

김만덕 사후에 세워져 지금도 남아 있는 묘비문에는 김해김씨로 되어 있다. 당시에는 수로왕 후손과 경순왕후손의 일부는 다같이 본관을 김해김씨로 썼고, 그를 구분하기 위하여 선김(先金)과 후김(後金)으로 부르다가 1846년(헌종12)에 국왕의 윤허를 받아 후김은 경주김씨로 썼다는 것이다.

 

그녀는 아름다웠을 뿐만 아니라 대단히 총명하였으므로 자라면서 타의로 기적에 오르게 되었다.

 

 

몇 해를 지나다가 만덕이 나이 20여 세가 되었을 때 본의 아니게 기생된 사연을 들어 양녀로 복귀시켜 줄 것을 제주목사 신광익(申光翼)을 찾아가 양녀 환원을 호소하였다.

 

관에서는 전후의 사정을 인정하여 기적에서 삭제하였으므로 양녀로 복귀되었다.

 

만덕은 집안 형편이 가난하였으나 지체있는 사람으로부터 청혼도 있었지만 이를 뿌리치고 식산에만 전념하였으며 축재하는 데 소질이 있었다.

 

유통망이 상업발전의 골간이란 사실을 누구보다 빨리 인식했다. 그녀가 살던 18세기 중엽 내륙에서는 각지에서 5일장인 장시(場市)가 섰고, 해안과 강가의 포구(浦口)도 흥청거렸다.

 

장시와 장시, 장시와 포구, 포구와 포구가 서로 연계되면서 전국이 하나의 상권으로 편제되어갔다. 내륙에서는 마필(馬匹)에 의한 육운(陸運)이, 연해안 또는 수로에서는 선박에 의한 수운(水運)이 상품을 유통시켰다.

 

만덕은 제주의 포구가 지닌 이런 가치에 주목해 포구에 객주(客主)를 차렸다. 객주는 여관 구실도 했지만 외지 상인들의 물건을 위탁받아 팔거나 거간하는 중간상 역할도 했다.

 

         

기생 출신이었던 그녀의 객주는 곧 번성했다. 그녀는 객주를 중심으로 기녀 시절의 경험을 살려 제주의 양반층 부녀자에게 육지의 옷감이나 장신구, 화장품 등을 팔고, 제주 특산물인 녹용과 귤 등은 육지에 팔아 많은 시세 차익을 남길 수 있었다. 

      

그녀는 관가의 물품도 조달하게 되었고, 포구의 상품 유통을 독점적으로 담당하는 포구주인권(浦口主人權)을 획득한 것으로 추측된다. 만덕은 자신의 포구에 적극적으로 선상을 유치했고 그 자신의 선박까지 소유하게 되었다.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에 앞장서 이룩한 빛나는 성취였다. 물자의 귀천을 팔아 때로는 헐값으로 사두었다가 철을 맞추어 비싸게 방출하기도 하니 수십년 사이에 부자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정조 18년(1794년) 8월 27일과 28일에 태풍이 불어닥쳤는데 당시 제주에 왔던 심낙수 어사가 보고하기를 '온 섬을 비로 쓸어버릴 것 같아서 어디가 어디인지 구별할 수 없습니다.

 

그 중에도 본주 78리 중에서 32리가 가장 심하고, 정의 대정도 다 같이 심합니다.'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조 19년(1795년) 봄에 큰 기근이 일어나게 되자 동년 윤 2월에 이우현 목사는 치계하여 진곡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진곡 수송선 5척이 침몰하였으므로 재차 1만 1천석의 진곡을 긴급히 요청하였다.

 

이 때 김만덕은 천금을 내어 육지에서 쌀을 사들이게 하였다. 선원들도 때에 늦지 않게 운곡하였으며 이렇게 사온 곡물이 모두 500여 석, 만덕은 이중 1/10을 친족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머지 450여 석을 모두 진휼미로 관에 보내어 기민을 구하게 하였다.

 

제주목사 이우현(李禹鉉)은 만덕의 이 기부에 크게 놀랐다. 당시 제주도인 중에 전 현감 고한록(高漢祿)이 300석, 장교(將校) 홍삼필(洪三弼)과 유학(幼學) 양성범(梁聖範)이 각각 1백석을 낸 것이 고액기부의 전부였다. 고한록의 기부에 대해 목사 이우현이 ‘무려 300석을 냈다’고 보고할 정도였으니 만덕의 기부에 놀란 것은 당연했다.

 

정조는 고한록을 특별히 대정 현감(大靜縣監)으로 임명했다가 군수(郡守)로 승진시키기로 하고, 홍삼필과 양성범을 순장(巡將)으로 승진시켰다. 이때 정조가 ‘이들이 1백 석을 자원 납부한 것은 육지의 1천 포(包)와 맞먹는다’고 말한 것은 이들의 기부가 얼마나 큰 액수인지 알 수 있다.

 

관에서는 완급을 가리어 나누어 주니 구호를 입은 백성들이 거리에 나와 만덕의 은혜를 칭송하였다.

 

구휼이 끝나자 목사는 이 사실을 조정에 아뢰었다. 임금이 회유하기를 '만덕의 소원을 들어 난이를 불문하고 특별히 시행하라' 하였다.

 

목사가 만덕을 불러서 소원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다른 소원은 없으나 오직 한가지 서울에 가서 임금님 계신 궁궐을 우러러 보는 것과 천하의 명산 금강산을 구경할 수 있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 하였다.

 

 

이 때 제주의 여자는 국법으로 육지에 나가는 것을 금하고 있는 때이었으나 목사가 이 사실을 아뢰니 임금이 이를 허락했고, 상경하는 데 필요한 역마와 식사는 관에서 특별히 제공하도록 하였다.

 

김만덕이 상경한 것은 정조 20년(1796년) 가을이었다. 상경하여 두어 차례 영의정 채제공을 뵈었고 임금에게 아뢰어 선혜청에서 숙식을 돌보아 주도록 하였다.

 

수일 후에 김만덕에게 내의원 의녀반수의 벼슬을 내렸고 내합문으로 들어가 임금을 배알하였다. 이 때 임금이 전교하기를 '너는 한낱 여자의 몸으로 의기를 내어 기아자 천 백여명을 구하였으니 기특한 일이로다' 하시고 상을 후하게 내리셨다.

 

 

만덕은 그 해 겨울을 서울에서 체류하고 다음 해 3월에 금강산에 들어가 만폭이 있는 곳과 기향 명승지를 두루 탐방했고 처음으로 금불상을 보고 배례 공양하였다.

 

이 때 제주에는 불사가 없었으므로 만덕이 나이 58세에 처음으로 사찰과 불상을 대하게 된 것이다.

 

그는 안문령을 넘고 유정을 거쳐 고성으로 내려가 삼일포에서 선유하고, 다시 통천의 총석정에 오르니 천하의 괴관을 두루 본 것이다.

 

서울에 돌아와서 며칠후에 내원에 들어가서 귀향의 뜻을 아뢰자 임금은 전일과 같이 상을 내렸다. 이 때 김만덕의 이름이 온 장안에 퍼져 공경대부와 선비들이 모두 만덕의 얼굴을 한번 보기를 원하는 자가 많았다.

 

지체높은 사람들이 그녀를 만나러 찾아들었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이 실학자 규장각 검서관 박제가(朴齊家)입니다.

박제가는 당시 그 이름이 중국에까지 알려진 석학이었습니다. 만덕이 금강산을 구경하고 고향 제주로 돌아간다는 소식을 듣고 박제가는 숙소로 직접 찾아와서 시를 넉 수 써주었습니다.

   넓은 천지 바다밖에는 못나가니
   넓다한들 뉘라서 시집장가 끝내랴
   제주라 섬나라 이웃은 일본
   사또는 천년세월에 귤만 바쳐왔네

   귤밭 깊은 숲속에 태어난 여자의 몸
   의기는 드높아 주린 백성 없었네
   벼슬은 줄 수 없어 소원을 물으니
   만이천봉 금강산 보고 싶다네

   의젓이 다듬은 몸매에 돛대도 높이
   남쪽별은 빛나 임금님도 기쁨을
   바삐 말에 올라 금강산으로 향하니
   햇빛도 바람결도 노리개에 찬란타

   정녕 깨달았으리 신라와 마음은 하나
   생김도 달라 여자몸 눈동자가 겹이라
   이제사 알겠노라 바다 건너온 뜻은
   잣다란 세상일에 있지 아니했음을.

김만덕의 선행을 보고 느낀 대석학의 감회가 잘 우러나는 시문입니다. 
 

만덕은 출발에 앞서 영의정 채제공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이 몸이 다시는 상공의 얼굴을 우러러 볼 수가 없겠습니다.' 하며 울먹였다.

 

채제공이 타이르기를 '진시황과 한무제가 모두 해외에 삼신산이 있다고 하였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나라의 한라산을 영주산, 금강산을 봉래산이라고 한다.

 

너는 탐라에서 성장하여 백록담의 물을 떠 마시고, 이제 금강산도 편답하였으니 이는 천하에 수많은 남자들도 다 못하는 일이다.

 

이제 작별이 임하여 어린애처럼 척척거리니 그 몸가짐이 마땅하지 못하구나' 하시면서 영의정 채제공이 웃으면서 김만덕의 일을 적은 만덕전 서책을 꺼내 손에 안겨주었습니다.

   

 때는 정조 21년 하지일이었고 채제공의 나이 78세였다. 이책이 정비석이 감탄해 마지않은 채제공이 쓴 <만덕전>(萬德傳)입니다. 
 

이 때 형조판서 이가환도 만덕을 보내는 시를 지어 주었다.

 

   만덕은 제주의 기특한 여인일세

   예순 얼굴이 마흔쯤으로 보이는구려

 

   천금 내어 쌀 사들이고 백성을 구제하였으니

   한번 바다 건너 궁궐을 찾아 뵈었구려

 

   다만 원하는 건 금강산을 한 번 유람하는 건데

   산은 동북에 안개와 연기로 사이에 있도다

 

   임금께서는 날랜 역마를 내도록 허락하시니

   천리에 뻗힌 광휘는 관동을 떠들썩하게 했네

 

   높이 올라 멀리 굽어보며 마음의 눈을 크게 뜨고는

   표현히 손을 저으며 바다굽이로 돌아가려나

 

   탐라는 저 멀리 고량부 신인 때부터인데

   여인네가 이제야 나라 임금 뵐 수 있었다네

 

   칭찬 소리 우뢰 같으며 고니 노닐 듯 빼어나니

   높은 기풍 오래 머물러 세상을 맑게 하겠구려

 

   사람이 나서 이름을 세움에 이 같음이 더러 있겠지만

   여회청대로 기림은 어찌 족히 몇이나 되리요

 

김만덕은 순조 12년(1812년) 10월 12일에 74세로 죽었는데 그의 유언에 따라 제주 성안이 한 눈에 보이는 '가운이마루' 길가에 안장하였다.

 

그로부터 30년 후에 추사 김정희가 옥사에 연루되어 헌종 6년(1840년) 대정현에 유배되었습니다. 만덕의 덕행이 그 때까지 사람들의 입을 떠나지 않은 것을 보고 추사는 감탄해서 만덕의 양아들에게 현판을 써 주었습니다.    恩光衍世 (은광연세)

 

은광연세 (우에서 좌로)

 

김만덕 사후에 추사 김정희 선생이 만덕의

공에 감탄하여  "은광 연세"의 친필의 석각이다

 

은혜로운 빛이 온 세상에 번진다 라는 뜻인가요. 지금도 그 글씨가 남아 있습니다.

 

      ▲ 1840년 추사 김정희가 김만덕의 선행을 기려 그의 가문 3대손에게 써눈 '은광연세'

         편액 원본이 후손들에 의해 가보로 보관돼 오다 김만덕기념사업회에 기증됬다.

 

 

     ▲ 왼쪽부터 김만덕기념사업회 고두심 상임대표와 '은광연세' 편액 기증자 김만덕 6대손 김균씨

김만덕 기념사업회는 2010.5.1일 추사 김정희 친필 '은광연세(恩光衍世)' 편액 기증식을 제주시 모충사 김만덕 묘탑에서 가졌다

 

 

 

 

▲ 왼쪽 양의숙 KBS 'TV 진품명품' 감정전문위원   ▲ 오른쪽 김영복 KBS 'TV 진품명품' 전문감정원

 
‘은광연세’ 편액은 31cm, 길이 98cm로 제주 자생 벚나무로 만들어 진 것으로 추정되며, 제작연도는 추사의 글씨체로 봐서 약 1840년에서 1844년으로 추정된다고 자리를 함께한 전문가들은 말한다.

 

여러 선비들이 모두 전기를 써주고 시로 읊었으니 이는 고금에 드문 일이다.  

- 제주도에 만덕을 기념하여 세워진 만덕관 -

 

1960년경부터 제주 시가지가 팽창하여 김만덕 묘소 있는 곳에 공장시설이 들어서므로 1977. 1. 3  도민의 이름으로 모충사로 이묘하고 제주도에서는 그의 은덕을 기리기 위하여 만덕상을 제정, 해마다 한라문화제 때 모범 여인에게 수여하고 있습니다.

 

김만덕의 무덤 묘비는 사라봉 모충사 경내에 있다. 고으니모루(건입동 710

번지)에 있었던 원묘가 도로확장에 들자 1977. 1. 3일 유해를 수습하여 현재의 묘탑에 안치하였으며,

 

묘탑 송덕의 글에 서기 1977년 1월 11일로 기록되어 있어 이묘일이 1977년

1월 3일 또는 1977년 1월 11로 각각 기록되고 있으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묘탑의 기록인 1977년 1월 11일로 정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왜냐

하면 모충사의 건립(1977. 1.11)과 연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 모충사 건립 : 1977. 1.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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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도민들의 성금으로 사라봉 공원 내에 세워진 모충사는 조국독립을 위해 싸우다가

순직한 열사와 의녀 김만덕의 은덕을 기리기 위해 기념관을 세웠으며 모충사 입구에 건립문비가 세워져 있다.

 

모충사 건립문 1977년 1월 11일

모충사는 내외도민 17만여명의 성금을 모아 사라봉 기슭에 세운 사당이다.

 

 

 모충사

 

만덕관 가는 길 

만덕관

 

  

 

 

 

 

▲ 김만덕 등의 기념탑이 서있는 모충사 내부

 

 김만덕 묘탑 (의녀반수 김만덕 의인 묘)

 醫女班首 金萬德 義人墓라고 동판으로 붙여 놓았고 기념탑아래는 묘이다.

 

 

 

김만덕의 무덤은 사라봉 모충사 경내에 있다. 고으니모루(건입동 710번지)에 있었던 원묘가 도로확장에 들자 유해를 수습하여 유골은 현재의 묘탑에 안치하였다.

 

원묘에 있었던 묘비와 상석, 동자석, 망주석 등은 모충사의 만덕관 입구에 놓여 있다. 2008년, 제주특별자치도는 김만덕의 원묘에 세워져 있던 비를 유형문화재로 지정하였다.

 

 

 김만덕(金萬德)의 묘는 고으니모르에 있었으나 도시화의 영향으로 묘들을 모두 이장하게 될 즈음 그녀의

 행적을 칭송하는 사업의 일환으로 모충사를 건립하면서 이곳으로 묘를 이장하였다. 이 기념탑 아래가 묘이다. 탑에는 醫女班首金萬德義人墓라고 동판으로 붙여 놓았다.

 

 

 제주 모충사 만덕관 입구에 있는 김만덕 묘비

(고으니모르에 있었던 옛무덤의 석물들. 비석, 동자석, 망주석)

유해는 김만덕 묘탑에 안치

 

 

 

  제주여성의 표본! 김만덕 기념사업회 입니다.   http://www.manduk.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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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위키백과 사전 내용임

 

김만덕(金萬德, 본관은 김해김씨 1739년 영조 15년~1812년 순조 13년)은 조선 시대의 여자 상인이다. 제주도에 대기근이 닥치자 전 재산을 풀어 육지에서 사온 쌀을 모두 진휼미로 기부하여 빈사상태의 제주도 백성들을 구제하였다. 이 때문에 제주에서는 ‘의녀’(義女)로 불린다.

 

유년시절과 상업 활동

 

김만덕은 중개상인 김응열의 딸로 태어났으며 어려서 부모를 잃고 12세 고아가 되었다. 친척 집에서 겨우 목숨을 이어가던 만덕은 나이든 기녀의 집에 의탁하였다. 어른이 된 후, 만덕은 기녀가 천시받는 직업임을 알게 되어, 제주목사 신광익에게 탄원하여 양인(良人)으로 환원되었다.

 

양인이 된 만덕은 객주(客主)를 차려 제주 특산물인 귤, 미역, 말총, 양태(갓의 재료)를 육지의 옷감, 장신구, 화장품과 교환하여 판매하는 상업에 종사하여 돈을 많이 벌었다. 이앙법(모내기)의 등장으로 농업기술이 발전하면서, 상업도 같이 발전한 18세기 조선의 시대 변화를 읽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내가 편안하게 사는 것은 하늘의 은덕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검소하게 살았다.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실천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란 사회의 리더와 부자들이 앞장서서 사회를 위해서 봉사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1793년 제주도에서는 세 고을에서만 6백여 명이나 아사할 정도로 심각한 흉년이 계속되었다. “흉년이 들어 농작물을 재배할 수 없게 되었 습니다. 2만여 섬의 구호식량이 없으면 장차 제주 백성들이 다 굶어 죽을 것입니다.”라는 장계를 받자, 2만 섬의 구호식량을 보내지만, 그마저도 1795년 수송 선박 다섯 척이 침몰하면서 구호정책은 실패했다.

 

이때 만덕은 전 재산을 풀어 5백여 석의 쌀을 사왔는데, 이중 450여 석을 모두 구호식량으로 기부하여 굶주림으로 죽어가던 제주도 민중들을 구원하였다.

 

전 재산을 풀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의녀(義女) 만덕의 알현을 받은 정조가 “너는 한낱 여자의 몸으로 의기(義氣)를 내어 기아자 천백여 명을 구하였으니 기특하다.”라고 칭찬한 것을 보면 당시 만덕의 선행이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지 알수 있다.

 

이듬해인 1796년 만덕의 선행이 알려지자, 정조는 제주목사 이우현을 통해 만덕의 소원을 물어보는데, 만덕은 한양에서 궁궐을 보고, 금강산을 보고 싶다고 하였다. 대답을 들은 정조는 “관의 허락없이 제주도민은 섬밖으로 나가지 못한다.”라는 규칙을 깨고 만덕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또한 내의원 의녀반수 벼슬을 제수하여 그녀의 선행에 대한 보답을 하였다.

 

사후

1812년 73세를 일기로 별세한 만덕의 묘는 가운이마루 길가에 조성되었으며, 1977년 정월 제주시 건입동의 모충사로 이묘되었다. 현재 제주도에서는 만덕상을 제정, 한라문화제 때마다 모범여인에게 수상함으로써 그녀의 선행을 기념하고 있다.

 

 

 

 참고 자료

《여인열전》, 전재산을 사회사업에 바친 의녀(義女) 김만덕/이덕일 저/김영사

 한국방송 한국사전-조선의 여성CEO, 김만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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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라라 - SG 워너비

그대는 참 아름다워요
밤 하늘의 별빛보다 빛나요
지친 나의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줄
그대 품이 나의 집이죠

세찬 바람 앞에서 꺼질듯한 내 사랑도
잘 참고서 이겨내줬어요
정말 눈물나도록 고마운 맘 아나요
그대 내곁에 살아줘서

사랑해요 사랑해요 내가 그대에게 부족한걸 알지만
세월에 걷다보면 지칠때도 있지만
그대의 쉴곳이 되리라
사랑해요 고마운 내 사랑
평생 그대만을 위해 부를 이 노래
사랑 노래 함께 불러요 둘이서 라라라

그대 쳐진 어깨가 내맘을 아프게 해요
잘 해준것도 없는 나라서
그대의 고운 손이 세월에 변했어요
못지켜줘서 미안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내가 그대에게 부족한걸 알지만
세월을 걷다보면 지칠때도 있지만
그대의 쉴곳이 되리라
사랑해요 고마운 내 사랑
평생 그대만을 위해 부를 이 노래
사랑노래 함께 불러요 둘이서 라라라

고마워요 고마워요 그대 자신보다 나를 아껴준 사랑
세상이 등 돌려도 누가 뭐라고 해도
내가 그대 지켜줄게요
사랑해요 소중한 내 사랑
평생 그대만을 위해 부를 이 노래
사랑노래 함께 불러요 둘이서 라라라
그대 품이 나의 집이죠 영원히 라라라



가사 출처 : Daum뮤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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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뉴시스】강재남 기자 = 2010-02-25일 오전 제주시 모충사 김만덕 묘탑에서 다음달 6일부터

  30부작으로 KBS 1TV를 통해 방영되는 '거상 김만덕' 성공 기원제가 열린 가운데, 초헌관 김태환 지사,

  아헌관 이웅진 KBS 드라마국장, 종헌관 오성화 마을회장이 제관으로 나서 제를 올리고 있다.

 

 

 

 

 (제주=연합뉴스) 김승범 기자 = 2007.7.28일 조선시대 사재를 털어 기아에 허덕이는 백성을 구했던

         의녀(義女) 김만덕(金萬德.1739-1812년)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는 '나눔 쌀 천섬 쌓기' 행사가 제주시

         일대에서 다채롭게 열렸다. 사진은 김만덕이 운영했던 제주시 산지천변 객주 터에서 올려진 제례.

 

만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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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여인 김만덕의 백성 규휼 이야기

 

만덕전 萬德傳

 

- 조선, 체제공 (蔡濟恭) (1720~1799) -

 

(원문과 풀이)

 

萬德者。姓金。耽羅良家女也。 만덕자。성김。탐라양가녀야。

幼失母無所歸依。托妓女爲生。 유실모무소귀의。탁기녀위생。

 

만덕(萬德)은 성이 김(金)이고 탐라(제주)의 양갓집 딸이었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돌아가 의지할 곳이 없어서

기생(妓女)에게 의탁하여 살아가게 되었다.

 

稍長。官府籍萬德名妓案。 초장。관부적만덕명기안。

萬德雖屈首妓於役。其自待不以妓也。 만덕수굴수기어역。기자대불이기야。

 

점점 자라자, 관부(官府)에서 만덕의 이름을 기생의 명부(妓案)에 올렸다.

만덕은 비록 머리를 숙여 기생으로 일하였지만,

스스로를 기생으로 여기지 않았다.

 

 

年二十餘。以其情泣訴於官。官矜之除妓案。復歸之良。

년이십여。이기정읍소어관。관긍지제기안。복귀지량。

 

나이 스무 살이 넘어서, 그의 사정(私情)을 관부에 읍소(泣訴)하니

관부에서 이를 불쌍히 여겨 기생 명부에서 삭제하고

다시 양민(良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萬德雖家居乎庸奴。耽羅丈夫不迎夫。 만덕수가거호용노。탐라장부불영부。

其才長於殖貨。能時物之貴賤。以廢以居。 기재장어식화。능시물지귀천。이폐이거。

至數十年。頗以積著名。 지수십년。파이적저명。

 

만덕은 비록 집에 탐라 남자를 하인(庸奴)으로 두었지만,

남편(夫)을 맞지는 않았다.

그녀의 재능은 재화를 늘리는 일(殖貨)을 잘해서,

물가 등락(貴賤)하는 때를 맞추어 사고팔기를 잘하여,

수십 년에 이르니 자못 부자로 이름이 났다.

 

* 폐거(廢居): 물건을 쌓아 두고 값 오르기를 기다림. 폐거(廢擧). 폐저(廢著).

 

聖上十九年乙卯。耽羅大饑。民相枕死。上命船粟往哺。

성상십구년을묘。탐라대기。민상침사。상명선속왕포。

鯨海八百里。風檣來往如梭。猶有未及時者。 경해팔백리。풍장래왕여사。유유미급시자。

 

성상 19년 을묘년, 탐라에 큰 기근(饑饉)이 들어,

많은 백성들이 서로를 베고 누워 죽었다.

임금께서 배에 곡식을 싣고 가서 그들을 구제하라고 명했다.

거친 바닷길 팔백리를 범선(帆船: 風檣)이 베틀의 북처럼 왕래했지만,

때에 맞게 이르지 못했다.

 

* 경해(鯨海): 고래 같은 파도가 이는 바다.

* 풍장(風檣): 돛단배, 범선. 檣-돛.

  

於是萬德捐千金貿米。陸地諸郡縣棹夫以時至。 어시만덕연천금무미。육지제군현도부이시지。

萬德取十之一。以活親族。其餘盡輸之官。 만덕취십지일。이활친족。기여진수지관。

浮黃者聞之。集官庭如雲。 부황자문지。집관정여운。

官劑其緩急。分與之有差。 관제기완급。분여지유차。

男若女出而頌萬德之恩。咸以爲活我者萬德。 남약녀출이송만덕지은。함이위활아자만덕。

 

이에 만덕은 천금을 내어 육지에서 쌀을 사서,

여러 군현의 뱃사공(棹夫)들이 때에 맞게 이르렀다.

만덕은 십분의 일을 취하여 친족(親族)을 살리고,

그 나머지는 모두 관청에 실어 보냈다.

부황(浮黃)난 자들이 이 소식을 듣고

관청의 뜰(官庭)에 구름같이 모여 들었다.

관청에서는 그 상태의 완급을 조절하여 차등 있게 이를 나누어 주었다.

남자와 여자들이 나와서 만덕의 은혜를 칭송하며,

모두가 ‘우리를 살린 자는 만덕이다’라고 했다.

  

賑訖。牧臣上其事于朝。上大奇之。 진흘。목신상기사우조。상대기지。

回諭曰。萬德如有願。無問難與易。特施之。 회유왈。만덕여유원。무문난여이。특시지。

 

진휼(賑恤)이 끝나고, 목사(牧使)가 그 일을 조정에 상주(上奏)했다.

임금께서 이를 매우 기특하게 여기시고

회답하시기를,

‘만덕이 만일 소원이 있다면 어렵거나 쉽거나를 묻지 말고

특별히 베풀어 주어라’고 하시었다.

 

* 목신(牧臣): 지방 수령.(여기서는 제주의 목사)

 

牧臣招萬德以上諭諭之曰。若有何願。 목신초만덕이상유유지왈。약유하원。

萬德對曰。無所願。願一入京都。 만덕대왈。무소원。원일입경도。

瞻望聖人在處。仍入金剛山。觀萬二千峯。死無恨矣。 첨망성인재처。잉입금강산。관만이천봉。사무한의。

 

목사가 만덕을 불러 임금의 유시(諭示)로써 분부하여(諭之) 말하기를,

‘너(若)는 어떤 소원이 있는가?’하니

만덕이 대답하여 말하였다.

‘바라는 바는 없습니다만, 한 가지를 바란다면,

서울에 올라가 임금(聖人)이 계신 곳을 멀리서 우러러보고(瞻望),

인하여 금강산에 들어가 일만 이천 봉우리를 본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하였다.  

 

盖耽羅女人之禁不得越海而陸。國法也。 개탐라녀인지금불득월해이륙。국법야。

牧臣又以其願上。上命如其願。官給舖馬遞供饋。 목신우이기원상。상명여기원。관급포마체공궤。

 

대개 탐라의 여인은 바다를 건너 육지에 오르지 못하도록 금하였으니,

이것이 나라의 법이었다.

목사가 다시 그녀의 소원을 상주(上奏)하니,

임금께서 그 소원을 따라

관(官)에서 역마(驛馬: 舖馬)를 대주고

번갈아 음식을 제공하도록(供饋) 명하셨다.

 

* 포마(舖馬, 鋪馬): 驛站中所備的馬匹, 역참에 구비된 말.

 

萬德一帆雲海萬頃。以丙辰秋入京師。 만덕일범운해만경。이병신추입경사。

一再見蔡相國。相國以其狀白。上命宣惠廳月給粮。 일재견채상국。상국이기상백。상명선혜청월급량。

居數日。命爲內醫院醫女。俾居諸醫女班首。 거수일。명위내의원의녀。비거제의녀반수。

萬德依例詣內閤門。問安殿宮。各以女侍。 만덕의례예내합문。문안전궁。각이녀시。

 

만덕은 한 척의 범선을 타고 너른 구름 바다를 건너서,

병진년 가을에 서울에 들어왔다.

여러 차례에 걸쳐 채 상국을 뵈었고,

채상국은 그 일을 임금께 아뢰었다.

임금께서 선혜청에 명하여 달마다 식량을 대주도록 하셨다.

며칠이 지나서, 명하여 내의원 의녀로 삼고,

의녀들의 반수(班首)로 대궐에 머물게 하셨다.

만덕은 전례에 의거하여 대궐(閤門) 안으로 나아가

전궁(殿宮)(왕과 왕비)께 문안하였다.

각각 궁녀가 시중들었다.

 

* 상국(相國):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통틀어 이르는 말.

  

傳敎曰。爾以一女子。出義氣救饑餓千百名。奇哉。 전교왈。이이일녀자。출의기구기아천백명。기재。

賞賜甚厚。 상사심후。

 

전교하여 말씀하시기를,

‘너는 일개 여자로서 의기(義氣)를 내어

굶주린 사람 천백 명을 구제하였으니, 기특하구나.’ 하시고

상을 내리심이 매우 두터웠다.

 

居半載。用丁巳暮春。入金剛山。 거반재。용정사모춘。입금강산。

歷探萬瀑,衆香奇勝。 력탐만폭,중향기승。

遇金佛輒頂禮。供養盡其誠。 우금불첩정례。공양진기성。

盖佛法不入耽羅國。 개불법불입탐라국。

萬德時年五十八。始見有梵宇佛像也。 만덕시년오십팔。시견유범우불상야。

卒乃踰鴈門嶺。由楡岾下高城。 졸내유안문령。유유점하고성。

泛舟三日浦。登通川之叢石亭。以盡天下瑰觀。범주삼일포。등통천지총석정。이진천하괴관。

 

반년이 지나서 정사(丁巳)년 늦은 봄에 금강산에 들어가

만폭동(萬瀑洞) 중향봉(衆香峰)의 기이한 경치를 두루 구경하고,

금불(절의 불상)을 마주하여 정례(頂禮)하고 공양을 드림에

그 정성을 다하였다.

대개 불교가 탐라국에는 들어가지 않아서

만덕의 이때 나이가 오십 팔세였지만

처음으로 절(梵宇)과 불상을 보았다.

 

마침내 곧 안문령을 넘고 유점사(楡岾寺)를 경유하여 고성으로 내려가

삼일포에서 배를 띄우고 통천의 포석정에 오르니,

천하의 아름다운 경관(瑰觀: 괴관)을 다 본 것이다.

   

然後還入京。留若干日。 연후환입경。류약간일。

將歸故國。詣內院告以歸。殿宮皆賞賜如前。장귀고국。예내원고이귀。전궁개상사여전。

當是時。萬德名滿王城。 당시시。만덕명만왕성。

公卿大夫士無不願一見萬德面。공경대부사무불원일견만덕면。

 

그런 후에 다시 서울로 들어가 며칠을 머무르고

장차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내원(內院: 궁궐)에 나아가 돌아갈 것을 고하니,

전궁(왕과 왕비)께서 모두 전과 같이 상을 내리셨다.

이때에 만덕의 이름이 서울에 가득하여

공경 대부와 선비들이

만덕의 얼굴을 한 번 보기를 바라지 않음이 없었다.

 

萬德臨行。辭蔡相國哽咽曰。 만덕림행。사채상국경인왈。

此生不可復瞻相公顔貌。仍潸然泣下。 차생불가부첨상공안모。잉산연읍하。

 

만덕은 떠날 때가 되어서 채상국에게 사직 인사를 올리며 목이 메어 말하기를,

‘이번 생에는 상공(相公)의 얼굴을 다시 뵙지 못하겠습니다.’ 하고는

인하여 눈물을 줄줄 흘렸다.

 

相國曰。秦皇漢武皆稱海外有三神山。상국왈。진황한무개칭해외유삼신산。

世言我國之漢挐。卽所謂瀛洲。金剛卽所謂蓬萊。 세언아국지한나。즉소위영주。금강즉소위봉래。

若生長耽羅登漢挐。㪺白鹿潭水。 약생장탐라등한나。구백록담수。

今又踏遍金剛。三神之中。其二皆爲若所包攬。금우답편금강。삼신지중。기이개위약소포람。

天下之億兆男子。有能是者否。 천하지억조남자。유능시자부。

今臨別。乃反有兒女子刺刺態何也。 금임별。내반유아녀자자자태하야。

 

채상국이 말하기를,

‘진시황(秦始皇)과 한무제(漢武帝)는

모두 바다 건너 삼신산(三神山)이 있다고 말했고,

세상 사람들이 말하기를 우리나라의 한라산이 곧 소위 영주(瀛洲)이고,

금강산이 곧 소위 봉래(蓬萊)라고 하는데,

너는 탐라에서 나고 자라 한라산에 올라 백록담 물을 떠먹었고,

지금 또 금강산을 두루 구경했으니,

삼신산 중에 그 둘을 모두 네가 두루 알고 본 것이다.

천하의 많은 남자들 중에 이것을 할 수 있는 자가 있겠는가?

이제 이별할 때가 되어

도리어 아녀자의 자자(刺刺: 수다스러움)한 모습이 있으니

어찌 된 것인가?’라고 하였다.

  

於是敍其事。爲萬德傳。어시서기사。위만덕전。

笑而與之。 소이여지。

聖上二十一年丁巳夏至日。樊巖蔡相國七十八。 성상이십일년정사하지일。번암채상국칠십팔。

書于忠肝義膽軒。 서우충간의담헌。

 

여기에 그 일을 서술하여 만덕전이라 하고,

웃으며 그녀에게 주었다.

성상 이십일년 정사년 하지일,

번암 채상국이 칠십 팔세에

충간의담헌(忠肝義膽軒)에서 쓰다.

 

- 樊巖先生集 卷之 五十五에서 -

 

(감상)

 

현철(賢哲)하시고 따뜻한 노재상과 나눔의 베품을 마음껏 펼친 만덕의

다사로운 정이 이 글을 읽는 우리에게도 전해온다.

 

마지막 만덕과의 이별 장면을 보면 우리까지도 가슴이 찡해온다.

 

채제공 어르신은 현명하신 재상이시라 이 글을 이리 집필하신 것이 아니리오.

이런 글을 읽을 때마다 참으로 우리의 조상님들의 인정이 다사로우셨음을 절감하게 된다.

 

번암 채제공 옹은 우리나라 역대 명재상의 한 분이시다.

워낙 도량이 크고 넓어 많은 야담집에도 공(公)의 일화가 다수 전해 온다.

 

나는 중학생 때에 야담집에서 채제공 선생의 평양감사 시절의 야담 이야기를 보고

그 때부터 공을 흠모했다. 역시 우리나라는 역사가 오래된만큼 훌륭한 분이 많이 계셨다.

 

 

채제공 [蔡濟恭, 1720~1799]

 

본관 평강(平康).

자 백규(伯規).

호 번암(樊巖)·번옹(樊翁).

시호 문숙(文肅).

 

중추부지사 응일(膺一)의 아들이다.

오광운(吳光運)과 강박(姜樸)에게 배웠다.

1735년(영조 11) 15세에 향시에 급제한 후

1743년에 문과정시를 통해 승문원에 들어갔다.

1748년 영조의 특명에 의해 탕평책의 제도적 장치인 한림회권(翰林會圈)에 뽑혀

예문관 사관이 됨으로써 정통 관료로 성장하였다.

 

1751년에는 중인(中人)의 묘소를 빼앗았다 하여 삼척에 유배되기도 하였으나,

1753년에 균역법 운영상황을 조사하는 충청도 암행어사,

1755년에 나주괘서사건을 조사하는 문사랑(問査郞)으로 활동하였고

부승지 · 이천부사· 대사간을 역임하였다.

 

1758년 39세에 도승지가 되었는데,

사도세자를 미워한 영조가 세자를 폐위하는 명령을 내리자

죽음을 무릅쓰고 건의하여 철회시켰다.

 

그 후 대사헌· 예문관과 홍문관의 제학 등 언론과 학문의 관직,

경기감사· 개성유수· 안악군수· 함경감사· 한성판윤 등의 지역 행정직,

비변사당상과 병조· 예조· 호조의 판서 등

중앙 정치·행정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771년에는 동지사로 중국에도 다녀온 후,

1772년부터는 세손우빈객으로 세손의 교육에 참여하고,

공시당상(貢市堂上)으로 경제활동을 관할하였다.

이후 호조판서· 좌참찬을 지냈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

형조판서 겸 의금부판사로서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여한 자들을 처단하는 일을 처리한 후,

공노비의 폐단을 바로잡는 절목을 마련하는 등

국왕의 정책을 보필하였다.

 

규장각제학· 예문관제학· 한성판윤· 강화유수를 역임하였으나

1780년(정조 4) 홍국영(洪國榮)이 실각할 때

그와 친하고 사도세자의 신원을 주장하여 선왕의 정책을 부정했다는 등의 공격을 받아

이후 서울 근교 명덕산에서

8년간 은거생활을 하였다.

 

1788년 69세의 노년에 정조의 특명에 의해 우의정이 되었으며

2년 후 좌의정으로 승진하면서

3년간 혼자 정승을 맡아 국정을 운영하였다.

 

1793년에 74세로

영의정에 임명되었으나

그 후로는 주로 수원 화성 축성을 담당하였다.

 

죽은 뒤 1801년(순조 1)에

노론 벽파(僻派)에 의해 추탈관작되었다가

1823년에 영남인들의 요청이 받아들여져 신원되었다.

 

영조대에 활동한 스승 오광운을 이은 남인, 특히 청남(淸南) 계열의 지도자로서

사도세자를 신원하여야 한다는 등

자기 정파의 주장을 충실히 지키면서

정조의 탕평책을 추진한 핵심적인 인물이었다.

 

그것은 목숨을 걸고 사도세자를 보호한 일이 계기가 되어,

영조가 사도세자의 죽음을 후회하여 기록한 〈금등〉을

정조와 함께 보관할 유일한 신하로 채택될 만큼

두 국왕의 깊은 신임을 받았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노론 출신으로 정조의 탕평책을 지지한

김종수(金鍾秀) ·윤시동(尹蓍東)의 상대역이라 할 수 있다.

 

사도세자 문제에 대한 입장을 기준으로 정파를 나누면

시파(時派)로 분류된다.

 

전반적인 사상이 성리학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음은 물론이지만,

당시의 주도세력인 서인·노론과는 여러 면에서 대비되는 주장을 하였다.

 

정치체제는 노론들이 남송(南宋)을 내세웠던 것에 비해

강력한 왕권에 의한 통일국가를 유지한 전한(前漢)을 모범으로 하였다.

 

천주교 ·불교 등을 이단으로 배격하였으나

정조와 마찬가지로 그것을 믿는 사람들을 제거하기보다는 교화의 대상으로 삼았다.

 

정조 중반 이후 여러 차례 처벌받고, 죽은 뒤 관작을 뺏긴 데는

천주교를 두둔했다는 것이 큰 구실이 되었다.

 

당시의 사회 모순들을 깊이 인식했으나

제도의 개혁보다는 운영을 통해 해결하려 하였다.

 

상업보다 농업을 강조하였으며

1791년에 대상인의 특권을 폐지하고 소상인의 활동 자유를 늘리는 조치인

신해통공(辛亥通共)을 주도하였다.

 

한편, 사족 우위 및 적서(嫡庶) 구별을 엄히 함으로써

사회 안정을 꾀하려는 보수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정치적 입장은 이가환(李家煥) ·정약용(丁若鏞) 등으로 이어졌으며,

사후에도 남인들 사이에 확고한 권위가 유지되어

 

19세기 순조 연간 세도정치 아래에서 남인들의 정치적 발언은

그를 신원해야 한다는 내용을 중심으로 하였다.

문집으로 《번암집》이 있다.

 

인품이 너그러워 금도(襟度)가 컸으며

정책의 결정에 과단성이 있어

일찍부터 능히 재상감이라 칭송을 받았다.

 

 

김만덕 (1739∼1812)

 

김만덕은 조선 영조 15년(1739년)에 태어나

순조12년(1812년) 74세까지 살다간 제주여성이시다.

 

만덕은 어린 시절 전염병으로 부모님을 여의고,

평소 어여삐 여기던 퇴기 월중선에게 의탁하여 살게 된다.

 

잠시 관기로 생활하나,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기적에 올랐던 것이라

그 생활을 청산하고 장사를 시작한다.

 

만덕은 장사에 소질이 있어, 큰 돈을 모으게 된다.

 

정조임금 때 제주에는 심한 기근이 들어

많은 백성들이 굶어 죽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관에서는 조정에 도움을 청하나,

곡식을 수송하던 배가 오다가 침몰하는 등 제때 도착하지 못해 굶주리는 자가 많았다.

 

이를 보다 못한 김만덕은 자신의 재산을 가지고 육지의 양곡을 사들였다.

10분의 1은 친족과 친지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머지는 관청에 가져가 백성들에게 나눠주도록 하자

제주 백성들의 칭송이 자자했다.

 

당시 제주목사는 김만덕의 자선사업을 조정에 보고하였는데,

그 결과 소원을 들어주라는 어명이 내린다.

 

만덕이 말하길

"임금님 계신 대궐과 영산 금강산을 한 번 구경하고 싶을 뿐입니다." 하여

당시 제주여성은 섬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법에도 불구하고

만덕은 서울로 향하게 된다.

 

김만덕은 궁에 들기 전 의녀반수를 제수 받고 임금님을 알현한다.

정조는 친히 만덕의 손을 잡아주며 칭찬하고, 후한 상을 내렸다.

 

만덕은 서울에 머물며 궁을 구경하고,

금강산 유람을 마친 후 다시 제주도로 돌아오게 된다.

 

이때, 형조판서 이가환은 만덕에게 시를 적어 주고,

영의정 채제공은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이란 글을 지어 주었으며

옥지환과 김만덕의 사적을 엮은 책「만덕전」을 선사했다.

 

사후에는 대정현에 귀양왔던 김정희가

김만덕의 진휼 행장에 감동하여

 

손수 은광연세(恩光衍世: 은혜로운 빛이 여러 세대로 이어진다)라는 큰 글씨를 써 주었다.

 

 

김만덕의 묘는 현재「구휼의녀 김만덕 기념탑」과 함께

사라봉 모충사에 있으며,

제주특별자치도는 매년 제주여성 중 모범이 되는 여성 1명을 선정,

탐라문화(구 한라문화제) 만덕제 때 '만덕봉사상'을 시상하고 있다.

 

병조판서 이가환(李家煥)의 만덕 여사를 기리는 시

 

만덕은 제주의 기특한 여인인데

육십의 얼굴이지만 사십쯤으로 보이네.

 

천금으로 쌀을 사들여 백성을 구제하였으니

한번 바다 건너 궁궐을 찾아 뵈었구려.

 

다만 한번 금강산을 유람하는 게 소원이었는데

산은 동북녘에 연기와 안개로 싸여있네.

 

임금님이 끄덕이며 날쌘 역마를 내리셨으니

천리의 광휘가 강관을 떠들썩하게 하네.

 

높이 올라 멀리 바라보는 마음과 눈은 장한데

표연히 손을 흔들면서 바다 구비 돌아가네.

 

탐라는 먼 예로부터 고량부가 살던 곳인데

여자로서 이제 비로소 임금 계신 서울 구경하였네.

 

돌아오니 찬양하는 소리가 따옥새 떠나갈 듯하고

높은 기풍은 오래 머물러 세상을 맑게 하겠지.

 

사람으로 태어나서 이름을 세움이 이와 같으니

여회청대(女懷淸臺)로 이름은 어찌 족히 몇이나 있으리. 

 

萬德 瀛洲 之奇女。 六十 顔如 四十許。 만덕 영주 지기녀。 육십 안여 사십허。

千金 糴米 救黔首。 一帆 浮海 朝紫禦。 천금 적미 구검수。 일범 부해 조자어。

 

但願 一見 金剛山。 山在 東北 烟霧間。 단원 일견 금강산。 산재 동북 연무간。

至尊 啣肯 賜飛驛。 千里 光輝 動江關。 지존 함긍 사비역。 천리 광휘 동강관。

 

登高 望遠 壯心目。 飄然 揮手 還海曲。 등고 망원 장심목。 표연 휘수 환해곡。

耽羅 遠自 高夫良。 女子 今始 觀上國。 탐라 원자 고부량。 여자 금시 관상국

 

來如 雷喧 逝鵠擧。 長留 高風 灑寰宇。 래여 뢰훤 서곡거。 장류 고풍 쇄환우。

 

人生 立名 有如此。 女懷 淸臺 安足數。인생 입명 유여차。 여회 청대 안족수。

 

<제주도『구원의 여성 김만덕』중에서>

 

[출처] 만덕전 萬德傳 - 조선, 체제공 (蔡濟恭) (1720~17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