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생활정보방/부자분석, 상업

3대 부자와 삼성가 (금섬복지)

by 연송 김환수 2009. 12. 14.

3대 부자와 삼성가

 

해방 이전에 삼남지방에는 3대 부자가 있었다. 충청도에는 공주 갑부 김갑순(金甲淳:1872-1961), 호남은 인촌 집안, 영남에서는 경주 최 부잣집을 꼽았다. 일제시대 김갑순은 조선 제일의 땅 부자였다.

 

공주에 있던 도청을 대전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부동산 투기로 엄청난 떼돈을 벌었다. 땅 투기의 원조였던 것이다. 공주에서 대전에 이르는 땅의 대부분은 그의 부동산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남긴 재산은 아무 것도 전해지지 않는다. 그야말로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였다. 그렇다고 사회에 기여한 것이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오로지 남긴 것은 ‘민나 도로보데스’(모두 도둑놈이다)라는 한 마디뿐이다.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부자는 모두 도둑놈’이라는 의미를 깔고 있는 멘트이다.

 

공주갑부 김갑순 옛집 터

 

호남의 인촌 집안은 10만석을 하던 집안이다. 인촌은 대학을 설립하고, 기업을 일으키고, 신문사를 세우는 데다 돈을 썼다. 명분이 있는 데다가 돈을 쓸 줄 알았던 집안이다.

 

필자는 지난 10년 동안 인촌 집안과 접촉한 경험이 있는 호남의 모모 집안들 후손들을 많이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보았지만 인촌 욕하는 사람을 별로 보지 못하였다. 보이지 않게 음덕(陰德)도 많이 쌓았던 집안이다.

 

최 부잣집은 어떤가. 자그마치 12대 300년 동안 만석꾼을 유지했던 집안이다. 300년 장수 기록은 세계적인 기록이다. 중세 이태리에서 르네상스를 일으켰던 메디치 집안의 300년 기록에 비견될 수 있는 집이 최 부잣집이다. ‘만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한다’, ‘흉년에 땅 사지 마라’, ‘주변 100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철학을 실천한 집안이다.

 

         ▲  경주 최부자댁의 건물이 세워져있는 곳은 기운이 뭉쳐있는 와혈의 중심부(양택지) 이다.

                     소 재 지  : 경북 경주시  교동 69 

와혈(窩穴)
형기론에서 혈장의 모양을 부르는 말로, 일명 '소쿠리 명당'으로 불린다. 외형이 소쿠리나 쟁반처럼 오목(凹)하게 되어 있으며, 혈장의 한쪽부분이 다른 한 쪽보다 길게 혈장을 감싸고 있다.

 

영남을 대표하던 어른 집안이었던 최 부잣집은 삼성가와도 인연이 깊다. 5·16 직후에 최 부잣집 사랑채에서 마지막 최 부자였던 최준(崔浚:1884-1970)과 당시 영남의 신흥부자로 부상하던 이병철이 서로 만나 대구대학(영남대학의 전신)의 운영권을 인수인계하였던 것이다. 바통 터치였다.

 

오늘날 삼성은 100억달러 순이익을 달성하는 세계적인 기업으로 부상하였다. 삼남의 3대부자를 합친 것보다 더 큰 부자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삼성에 달려 있다.                                              조용헌 goat1356@hanmail.net  입력 : 2005.02.23 17:56 57'

 

 *  노블레스 오블리주 [noblesse oblige] : 사회 고위층 인사에게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

-------------------------------------------------------------------------------------------------

인촌 김성수(金性洙)에 대하여

1891∼1955. 교육가·언론인·정치가. 본관은 울산. 호는 인촌(仁村). 전라북도 고창출신.
호남의 거부였던 경중(暻中)의 넷째아들로, 3세에 큰아버지인 기중(棋中)의 양자가 되었으며, 13세에 고광석(高光錫)과 혼인하였다.
1906년 전라남도 창평에서 송진우(宋鎭禹)와 함께 영어공부를 하였고, 1908년(18세)에 군산의 금호학교(錦湖學校)에 다녔다.


그해 10월 새 학문을 배우겠다고 송진우와 함께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세이소쿠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와 긴조중학교(錦城中學校)를 거쳐, 1910년에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에 입학, 1914년에 정경학부를 졸업하였다.
‘내 나라의 독립을 되찾기 위해서는 먼저 민족의 교육이 앞서야 한다. ’고 생각하고, 1915년 4월 중앙학교(中央學校)를 인수하여 1917년 3월에 교장이 되었으며, 같은해에 경성직뉴주식회사(京城織紐株式會社)를 맡아 경영하였다.


1919년 1월부터 송진우·현상윤(玄相允) 등과 함께 중앙학교 숙직실을 근거지로 독립운동을 펼 방책을 꾸며서, 그 뜻이 3·1독립운동으로 결실되었다.
그해 10월, 민족의 산업을 일으키는 바탕으로 경성방직주식회사(京城紡織株式會社)를 세웠으며, 1920년 4월 동아일보사를 창립하였다.


《동아일보》를 통해 1922년에는 물산장려운동(物産奬勵運動)을 폈으며, 1923년에 민립대학설립운동(民立大學設立運動)을 펴서 민족의식을 불러일으키고자 힘을 썼다.
1929년 2월 재단법인 중앙학원(中央學院)을 설립했다. 유럽과 미국을 비롯한 세계 여러나라의 문물과 교육실태를 두루 살피고 돌아와, 이듬해인 1932년 3월에는 어려운 형편에 있던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를 맡아 경영하여 교장이 되었다.

1945년 10월 미군정청 고문회의 의장에 취임하였고, 1946년 1월에는 복간된 《동아일보》의 사장을 다시 맡았으며, 같은달에 송진우의 뒤를 이어 한국민주당의 수석총무(당수)가 되었다.
또, 그해 8월에는 보성전문학교를 기초로 고려대학교를 창립하였다.


1947년에는 반탁독립투쟁위원회(反託獨立鬪爭委員會)의 부위원장으로 신탁통치반대운동을 지도하였고, 1949년 2월에 한국민주당과 대한국민당이 통합하여 민주국민당(民主國民黨)이 창당되자 그 최고위원이 되었다.
1951년 5월 대한민국의 제2대부통령이 되었으나, 정부의 국회탄압사건에 항거하여 이듬해 5월 그자리에서 물러났다.


1953년 10월 피난지인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온 뒤에는 병석에서 호헌세력(護憲勢力)의 단결을 호소하다가 1955년 2월 18일 죽었다.
1955년 2월 24일 국민장으로 고려대학교 경내에 안장되었으나 지금은 경기도 남양주군으로 이장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複章)을 받았다.

 

       인촌김성수선생동상                                                          서울대공원 인촌 동상

    서울 종로구 계동 중앙고등학교

------------------------------------------------------------------------------------------------- 

경주 최부잣집
 
400년 동안 9대 진사와 12대 만석꾼을 배출한 집안으로 보통 경주 최부자집 또는 경주 최진사집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현재 가옥이 위치한 곳은 신라시대 요석공주가 살았던 요석궁 터라고 전해진다. 경주최씨 최언경( 1743~1804)이 이곳에 터를 잡아 정착하여 약 200년을 이어져 내려왔다.
 
이전까지는 최부자집의 파시조()인 최진립()부터 약 200년 동안 경주시 내남면 게무덤이라는 곳에서 살다가 교동으로 이전한 것이다. 경주 내남면 게무덤에서 7대를 내려오면서 살았고 교동에서 5대를 만석꾼으로 유지하며 살았다.

최부자집에서 전해오는 전통은 진사 이상의 벼슬을 금지했고, 만석 이상의 재산을 모으지 말라고 했다. 또한 찾아오는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고, 흉년에 남의 논밭을 사들이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며느리는 3년동안 무명옷을 입고 사방 100리안에 굶어서 죽는 사람이 없게하라고 했다.
 
최부자집의 1년 쌀 생산량은 약 3천 석이었는데 1천 석은 사용하고, 1천 석은 과객에게 베풀고 나머지 1천 석은 주변에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구한말에는 신돌석 장군이 이 집으로 피신하였고 최익현 선생이 여러날을 머물러 갔다는 일화가 전해지며 의친왕 이강()이 사랑채에서 엿새동안 머물면서 최준( 1884~1970)에게 문파()라는 호를 지어주었다.
 
최준은 집안의 마지막 부자였는데 백산 안희제()와 함께 백산상회()를 설립하여 막대한 독립자금을 제공하였고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였다. 백산상회는 결국 부도를 맞게되었고 3만 석에 해당하는 빚을 지게되었다.
 
이로 인해 일제 식산은행()과 경상합동은행에게 모든 재산이 압류되었는데 식산은행 아리가() 총재가 최준과의 개인적인 친분으로 빚의 절반을 탕감하여 주었다고 전해진다. 해방후 최준은 김구를 만난 자리에서 안희제에게 전달한 자금이 한푼도 빠지지 않고 전달된 사실을 확인하고 백산의 무덤에서 그를 기리며 통곡하였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이후 전 재산은 교육사업에 뜻을 둔 최준의 뜻에 따라 대구대학교(영남대학교 전신) 재단에 기부하였다.
현재의 가옥은 170여 년 전의 건축으로, 그 평면구조가 경상도 지방의 전형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다. 건물재목들도 일반가옥에서는 보기 어려운 좋은 재목을 썼을 뿐 아니라, 건축물 자체의 조형적인 아름다움도 뛰어나다. 부지는 약 2천여 평이고 후원이 약 1만 평이었으며 집은 99칸의 대저택이었다.
 
이집에 살았던 하인이 약 100여 명이나 되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1969년의 화재로 사랑채 ·행랑 ·새사랑채와 그 남쪽에 달린 바깥 변소 등이 소실되었고, 문간채 ·고방 ·안채 ·사당 ·뒤주가 남아있다. 특히 뒤주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는데 쌀 800석을 보관할 수 있었다. 이런 뒤주(쌀창고)가 여러 채 있었지만 현재는 1채만 남아있다. 1971년 5월 26일 중요민속자료 제27호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존하고 있다.
 
 

 

 

  

 

 

 

 

  

 

 

최부자집과 교동법주 입구 

 

   

  

------------------------------------------------------------------------------------------------

경주의 한정식집 요석궁

요석궁 건물은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경주의 마지막 최부자 "최 준"의 동생

 "최 윤"의 집입니다.

경주 최부자 99칸 집의 일부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경주 최부자집 한정식으로 유명한 요석궁은

실제 최부자집은 아니고 최부자 최준의 동생 집을 식당으로 사용 중이고,

실제 최부자 집은 관광을 할 수 있도록 개방되어 있습니다.

 

 

 

 

 

 

 

 

 

 

 

==================================================================================================

 

'조상땅 대박'은 김갑순 후손


친일파로 알려져… 손녀가 수십억대 횡재

충남도의 조상땅 찾아주기 사업을 통해 수십억원대의 횡재를 한 사람이 친일파로 널리 알려진 ‘공주 갑부’ 김갑순(金甲淳·1872~1961·창씨명 金井甲淳)의 후손으로 드러났다.
 

충남도는 14일 지난 7월 조상땅 찾아주기 사업을 통해 행정중심복합도시 예정지 주변인 공주·연기·부여 등에 흩어져 있던 할아버지·아버지 명의의 땅 99필지 2만701㎡(6273평)를 되찾은 사람이 김갑순의 손녀 김모(59)씨라고 밝혔다.

 


▲ 연대미상의 김갑순의 모습. 복장으로 봐서는 그가 군수자리에 있던 1910년대 전후쯤으로 보인다.
   출처 : ‘동우수집’

  세월이 변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공주!’ 하면 ‘공주갑부 김갑순’을 기억하는 사람이 더러 있다.

  서울 갈 때 절반은 남의 땅을, 그리고 절반은 자기 땅을 밟고 다녔다고 할 만큼 그는 한때 ‘조선

  제일의 땅부자’였다.

 

 

김갑순은 1902년 부여군수를 시작으로 10여년간 충남 6곳의 군수를, 1921년부터 9년간 중추원(조선총독부 자문기구) 참의를 3차례 맡으며 부를 축적한 충남의 대표적 친일 인사. 단군을 섬기던 종교단체 ‘금강도교’의 사원을 압수해 일본인 총독들의 사진을 모아둔 ‘역대 총독 열전각’을 지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공주·대전지역에 1011만평의 땅을 갖고 있었으며, 대전 시가지 전체 57만8000평 중 38%(22만평·1938년 기준)가 그의 땅이었다고 한다. ‘공주 갑부’ 김갑순의 이야기는 1980년대초 TV드라마 ‘거부실록’에 소개된 뒤 당시 희대의 어음사기였던 ‘이철·장영자 사건’과 연결돼 “민나 도로보데스(모두 도둑놈)!”라는 유행어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한편 김갑순의 손자도 1999년 김갑순 명의로 등록돼 있던 공주 금학동 등의 156필지 11만3883㎡(3만4449평)를 되찾았으며, 이 땅도 당시 공시지가로 100억대를 넘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도 관계자는 “상속 과정에서 자손간 합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면 이번에 찾은 땅과 99년에 찾은 땅은 일부 중복돼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대전=이태훈기자 libra@chosun.com  입력 : 2005.09.14 18:36 59'
  

김갑순 묘

 

------------------------------------------------------------------------------------------------

 

 김갑순 부친묘

 

 

-------------------------------------------------------------------------------------------------

 

김갑순 모친 묘

 

=====================================================================================================

  
충남도청 이전과 김갑순
우리나라 땅 투기의 원조
박지순 기자
(시사오늘=박지순 기자)  대전에 있는 충남도청이 충남 홍성군 홍북면과 예산군 삽교읍 일대로 이전된다. 충남도청 이전부지는 지난 2006년 2월 확정돼 올 6월 15일 기공식을 열고 공사에 착수했다. 충남도청의 이전이 확정되기까지는 무려 17년의 시간이 걸렸다.

대전이 1989년 광역시로 승격되면서 충청남도에서 지역분리 된 후 도청이 더 이상 대전에 있을 이유가 없다는 문제제기가 이뤄졌다. 도청이전부지 선정작업이 한창일 때 노무현 전 대통령이 행정수도 이전 공약을 내걸고 당선돼 선정작업은 행정수도 이전 문제가 일단락된 후로 미뤄지다 2006년에야 홍성군과 예산군으로 최종 확정된 것이다.

두 개의 군으로 나뉘어 선정된 것에 대해 서울시의회 의장을 지낸 한 정치권 인사는 “시군 간의 과다 경쟁과 지역 이기주의를 어떻게든 잠재우려는 충남도의 고육책”이라고 말했다. 도청이전으로 인한 부동산 가격 상승과 지역 개발 이익을 특정 시군이 독점할 경우 타 시군의 반발을 살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도’라는 지역 단위를 놓고 봤을 때 도청이 한 개 시군의 흥망을 좌우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듯하다. 충남도청의 대전 시대는 오는 2012년 말 예정대로 신청사가 준공되면 막을 내리겠지만 지금으로부터 77년 전 공주에서 대전으로 충남도청이 이전된 사건과 그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한 인물 ‘김갑순(金甲淳, 1872~1961)을 떠올리게 된다.
 
김갑순은 우리나라 땅 투기꾼 1호로 불리는 인물로 대전에 있는 충남도청 자리를 기증한 장본인이다. 
 
대전 충남도청 부지 기증해 주변 땅값 폭등시켜
 

▲ 공주에 있던 충남도청 청사.     © 시사오늘

대전 이전의 충남도청소재지가 공주였다는 사실은 아는 이가 드물다. 정확히 1932년 10월 11일자로 공주에서 대전으로 도청이전이 완료됐다. 그 이전에는 1924년 경남도청이 진주에서 부산으로, 1921년 평북도청이 의주에서 신의주로 옮겨졌다. 도청이전은 일제에 의해 계획된 것으로 모두 철도 교통의 요지로 이전됐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경부선과 호남선이 만나는 곳으로 이미 1910년대부터 도청이전설이 돌던 대전은 ‘공주는 몰락하는 황성옛터’라고 주장하며 도청이전을 앞당기려 했고 이에 공주는 ‘전통 있는 조선의 도시’로 맞섰다.

충남도청 이전은 일제 치하에서 시대의 흐름이기도 해 공주가 반대한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김갑순에 의해 도청 이전이 시기적으로 앞당겨졌던 것도 사실인 것 같다. 그는 공주에서 서울에 갈 때 자기 땅 반, 남의 땅 반을 밟고 간다던 땅부자였다.

김갑순은 땅투기로 번 돈으로 고위 관료과 친분을 쌓고 그들로부터 개발 정보를 입수해 대전 지역 땅을 집중적으로 매입했다. ‘일제 하 대지주 명부’에 따르면 김갑순이 공주와 대전 지역에 소유하고 있던 땅은 1,011만여 평 규모다. 이 중 대전에 있던 소유지는 22만 평인데 1938년 기준으로 대전 시가지의 약 40%가 김갑순 한 사람 차지였던 셈이다.

조선시대까지 대전은 공주부(公州府)의 작은 마을에 불과해 1904년 호남선이 개통될 당시 수십 가구에 100명 안팎이 거주하고 있었다. 일찍이 재리에 밝았던 김갑순은 대전에 도시개발이 시작됨과 동시에 집중적으로 헐값에 땅을 매입했다.

그는 대전의 유지들을 총 동원해 대전에 충남도청 이전을 성공시켰고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토지를 도청 부지로 기부해 주변 땅값을 폭등시켜 기부한 땅의 수십 배 차익을 얻었다. 
 

 

▲ 충남도청 신청사 기공식 장면. 홍성, 예산 일대에 부동산 투기 바람 조짐이 보인다.     © 시사오늘


 김갑순의 재산이 순식간에 증식된 것도 대전 토지 가격이 급상승한 덕이 큰데 1~2전에 산 땅이 도청 이전 후 1백 원 이상으로 뛰었다고 한다. 평당 15전 내외에서 수백 원으로 폭등했다는 말도 있어 정확하지는 않다.
 
관노에서 벼락 출세, 군수로 재직하며 재산 축적

김갑순은 어려서 아버지와 형을 잃어 13세에 호주가 된 것으로 전하며 어머니는 장터에서 국밥 장사를 했다. 어려서부터 공주 감영에서 관노(官奴)로 잔심부름을 하다 투전판 노름꾼을 잡으러 갔다가 묘령의 여인을 알게 돼 그녀를 충청감사의 소첩으로 소개하면서 출세길이 열렸다는 말이 있다.

또 하나 그의 벼락 출세가 열리게 된 계기는 충청감사의 어릴 적 친구가 과년한 딸을 시집보낼 비용이 없어 충청감사에게 도움을 구하러 왔다가 문전박대를 당하는 모습을 보고 김갑순이 피륙과 엽전을 줘 보냈던 일이다. 후에 호조판서가 된 충청감사의 친구는 김갑순이 관원이 되는데 적극 후원했다고 한다.
 
‘구한말 관원이력서’에 의하면 김갑순은 1900년 충북 관찰부 주사로 관직 생활을 시작한 것으로 나온다. 이듬해 중추원 의관과 내장원 봉쇄관을 거쳐 1902년 부여군수에 오른다. 내장원 봉쇄관으로 있으면서 착복한 돈으로 군수 자리를 산 것이다. 그 무렵 매관매직은 특별할  것이 없는 일상화된 일이었다.

이후 약 10년 동안 충남지역 6개 군수로 자리를 옮기면서 세금을 횡령해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특히 1910년 경술국치 당시 김갑순은 아산군수로 있었는데 군수에게는 상납금(上納金)징수 권한이 있었고 3년 이상 된 모든 국세를 탕감해 줄 수 있는 권한까지 부여돼 있었다. 체납된 세금을 공짜로 탕감해 줄 군수가 어디 있겠는가.
 
자기 땅 자기 돈으로 최고가 매입 위장해 땅값 올려

1911년 아산군수를 끝으로 공직에서 물러난 김갑순은 고향 공주로 돌아와 그동안 긁어모은 재산으로 공주시 반죽동에 명문거족이 살던 집을 샀다. 이때부터 이재술을 발휘해 머슴들에게 장터에 나가 김갑순의 재산과 위세를 떠벌리게 시켰고, 늘려서 돌려달라며 김갑순에게 돈을 맡기는 사람이 생겨났다.
 
김갑순은 이 돈으로 개발정보를 입수한 대전과 그 주변 땅을 사들였다. 이 뿐만 아니라 자기 돈으로 자기 사람을 시켜 제 땅을 최고가로 사들이게 해 주변 땅값을 올리는 술책도 부렸다.

자식들을 정략결혼 시켜 축재에 활용하기도 했다. 그는 호적상 7남 4녀를 두었는데 모두 지역유지나 세도가와 결혼시켰다. 대표적인 예가 7남 종소를 매국노 이완용의 손자인 이병길의 딸과 결혼시킨 것이다.

김갑순은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자신의 재산을 보전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친일 행각에 나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조선임전보국단, 흥아보국단 등의 간부를 맡았다.
 
그러다 해방을 맞이하자 공주 출신 초대 국회의원 김명동 반민특위 조사위원 일행에게 체포돼 수모를 겪었고 한국전쟁 와중에는 인민군에게 죽임의 위험에 처했지만 그가 데리고 있던 마름의 자식이 마침 인민군 장교로 있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김갑순은 소작인에게는 가혹하게 소작료를 거뒀지만 마름에게는 덕을 베풀었다고 한다.
 
당대에 흥해 당대에 망한 보기 드문 인물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반민특위에 겪은 수모를 갚을 생각으로 두 아들과 장손을 출마시켰지만 모두 낙선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후 그 많던 재산은 온데 간데 없어지고 그가 살던 집도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다. 부자는 망해도 삼대를 간다고 하는데 김갑순처럼 당대에 흥해서 당대에 망한 예도 드문 듯하다.

그러나 최근 김갑순의 손녀 김모씨(59)가 ‘조상땅 찾기’로 공주, 연기, 부여 일대의 땅 6,273평을 되찾았고 손자 김모씨(70)도 공주 일대 3,700평을 되찾은 것으로 보도돼 화제를 모았다. 시가로는 각각 수십억 대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공주에서 부동산 중개업을 하는 한 시민은 본지와의 전화통화에서 “김갑순의 자손들이 기증된 대전의 충남도청 부지도 반환하라는 요청을 했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그 시민은 “내가 올해 62세인데 내 나이 8~9살 때 김갑순이 죽은 것으로 기억한다”며 “충남도청이 대전으로 이전되는 조건으로 금강다리를 공주에 놔준 것도 김갑순”이라고 말했다.

그 시민은 김갑순이 공주에서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느냐는 질문에 “공주시 반죽동에 김갑순이 살던 집이 그대로 있지만 주인이 바뀌었다. 부동산 투기로 큰 돈을 벌었어도 공주 사람들을 위해 한 일은 없다”고 답했다.
 
새 충남도청 부지 인근에도 부동산 투기 조짐

기자는 충남도청 이전과 김갑순의 이야기를 취재하면서 홍성의 한 부동산 업자가 낸 광고를 접할 수 있었다. ‘도청 이전부지를 정확히 예측해 여러 고객님께 시세 차익을 드렸다. 앞으로도 믿고 의뢰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예정대로 충남도청이 오는 2012년 이전된다면 꼭 80년 만에 대전에서 홍성과 예산으로 도청이 옮겨 가는 것이다.
80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부동산 투기가 도청을 따라다니는 것은 변함이 없나보다.

기사입력: 2009/10/15 [17:37]  최종편집: ⓒ 시사오늘

 

==================================================================================================

 

‘금섬복지’(金蟾伏地)

 

삼성은 반도체를 생산하는 세계적인 기업이면서도 동시에 한국의 토속적인 이야깃거리를 많이 간직한 기업이다. 우리 기업 중에서도 삼성만큼 다양한 풍수설화(風水說話)를 지닌 기업도 드물 것이다. 삼성과 관련되는 대표적인 풍수설화가 ‘금섬복지’(金蟾伏地) 이야기다.

‘금섬복지’는 창업자인 이병철씨 선대의 묏자리에 관한 이야기이다. ‘섬’(蟾)은 두꺼비를 뜻한다. ‘금섬복지’는 풍수에서 말하는 명당자리이다. ‘금 두꺼비가 엎드려 있는 형상을 한 묏자리’에다가 이병철의 증조부 묘를 쓰면서 이 집안이 발복했다는 이야기가 풍수가에서 회자된다. 사연은 이렇다. 그 시대의 한국 사람들 대부분이 그랬던 것처럼 이병철의 조부도 명당 신봉자였다.

 

조부는 자기 아버지, 즉 이병철의 증조부 유골을 궤짝에다 짊어지고 전국을 돌아다녔다고 한다. 좋은 묏자리를 찾으면 그 자리에 쓰기 위해서였다. 10년을 돌아다녔지만 끝내 명당자리를 찾지 못하고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집이란 경남 의령군 정곡면이다.

그러다가 우연히 동네 뒷산의 절에 놀러갔는데 스님을 만나서 선친 묏자리를 찾기 위해 10년을 돌아다녔다는 이야기를 하게 됐다. 그 정성에 감복한 스님이 자리를 하나 알려줬다. 그 자리가 바로 동네 뒷산에 있던 ‘금섬복지’였다.

 

‘십년구산(十年求山)에 가후장(家後葬)’이었던 것이다. 10년 동안 산을 보러 다녔지만 결국 자기 집 뒤에 묘를 썼다는 말이다. 이 자리에 묘를 쓰면 후손 가운데 국부(國富)가 나온다는 예언이 있었는데,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이병철과 이건희가 나왔다.

풍수가에서는 이 집안이 선대에 쌓은 적선과 명당의 결합으로 이처럼 국부가 나왔다고 믿는다. 

 

 

 

 

 

말이 나왔으니 國富 삼성그룹 발복의 근원인 이병철 증조부, 증조모 산소를 살펴 보자.

 

아래 사진은 경남 의령군 유곡면 마두리  대밭골에 있는 삼성그룹

창업주 故 이병철회장의 증조부모(이건희회장의 고조부모) 묘입니다.

 

경사가 심한 곳에 위치해 있어 속사들의 눈에는 비혈지로 볼 것이나

보기드물게 맺은 속발 富貴地로 國富之地의 면모를 갖추고 있습니다.

 

특히 당판 밑 좌선익 쪽으로 붙은 바위로 된 첩신귀(요성)이 압권이며, 진응수로 샘물이 솟고 있어 재물이 넘치는 대혈임을 증명해 주고 있습

니다.

* 요성(曜星) : 산형(山形)을 오행에 짝 짓거나 九星, 九曜에 짝지을 때에 붙이는

                     木形 木體를 이룬 것을 말한다.

* 오성(五星) : 산의 모양을 성(星)이나 요(曜)로 부르는 경우가 있다.

                  금성 : 종(鐘)을 엎어 놓은 것 같이 생긴 산

                  목성 : 나무가 곧게 선것 같이 솟은 산

                  수성 : 꾸불 꾸불 물결처럼 뻗은 산

                  화성 : 불길처럼 뽀족이 솟은 산

                  토성 : 평평하고 벽돌 처럼 생긴 산

 

貼身鬼(첩신귀) : 혈상 어느 곳이라도 붙어서 생긴다. 생김새는 유방과 같다.

                        때로는 크게 생겨서 결혈하는 수도 있다. 귀성으로서 결혈돤 것은

                        전순(氈脣)이 분명해야 결혈이다.

귀성의 종류 : 三台鬼(삼태귀), 후장귀, 첩신귀, 일변귀, 양변귀로 귀한 오성의 귀가

                    있고 險(험)한 암석의 귀가 있다.

 

 

이병철 증조부 묘

청룡작국의 좌수도우, 우선룡이며, 卯입수 甲坐庚向입니다.

입향은 조안산이 아닌 가까운 앞쪽에 있는 옥인사를 바라보고 점혈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시신의 배꼽에 해당하는 지점을 택하는 것을 점혈(명당에서 혈이 뭉친 한 지점을 찾는 것)이라 부른다.

 

풍수학의 고도의 테크닉이 구사되어야 하지만 초보자도 알 수 있는

간단한 방법을 소개한다. 

1) 산등성에서 보아 우측 계곡이 넓고 깊으면 산등성의 왼쪽에 치우쳐 점혈하고, 좌측 계곡이 넓고

    깊으면 오른쪽에 치우쳐 점혈한다. 산등성에는 점혈하지 않는다. 
2) 산기슭이나 비탈에서는 되도록 그 중심부에 점혈한다. 양쪽 가로 치우치면 바람을 심하게 받는다. 

3) 공원묘지에서는 계곡을 메워 편편하게 고른 지역은 피한다. 생기를 받지 못하며 폭우시에는 휩쓸려

    버릴 위험이 크다. 
4) 주위에 다른 묘가 있다면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지기가 쇠약해져 있다. 
5) 땅을 넓게 파보아 잡돌이 없고 고운 흙이 비치는 곳을 점혈한다. 
6) 밭에서는 앞쪽에 흘러가는 시냇물을 보아 물길이 둥글게 감싸안고 흐르는 지점과 뒷산에서 밭으로

    뻗어 내린 용맥을 찾아 그 일직선의 중심에 점혈한다. 
7) 바닷가나 큰 저수지가 앞에 있는 경우는 되도록 바다나 물이 적게 보이는 지점으로 점혈한다. 
8) 혈에서 보아 앞쪽에 흐르는 물이 되도록 굽어 흐르는 곳을 택한다. 앞쪽에서 보아 일직선으로 빠지

    는 곳과 물이 혈장으로 곧게 쳐들어오는 곳은 흉지이다. 
9) 주변의 산세가 혈장을 감싸안아 예를 표하는 곳이 좋고, 등을 돌리거나 배반한 형세이면 점혈하지

    못한다. 
 

묘는 오래된 돌을 다듬은 상석이 지킬 뿐 어떤 비석도 갖추지 않았다. 잘 뻗어온 용(龍)은 손사(巽巳 : 남동쪽) 방향에서 45도 각도로 60m 가량을 힘차게 내려오며 가파른 곳에서 갑묘(甲卯 : 동쪽에서 북동쪽으로 약간 치우친 곳)로 휘어진 후 서쪽을 향해 치달아 묘좌유향(卯坐酉向)의 탱글탱글한 정혈(正穴)을 맺고 있다.


직선 거리로 5백m도 안되는 곳에 서있는 안산은 둥그런 삼태(三台)를 연상케 하는 노적단이요, 좌청룡(左靑龍)이 힘차게 뻗은 반면에 우백호(右白狐)는 약간 허전하여 눈에 띄는 결함을 안고 있다.

 

묘 앞의 여기(餘氣)는 좁은 듯하지만 하늘을 향하여 선 바위들이 절벽을 이루며 단단하게 받쳐주고 있다.


물은 지척의 사병(巳丙 : 남쪽에서 남동쪽으로 약간 치우친 곳)에서 발원하여 구곡간장(九曲肝腸)처럼 돌고 돌아 신술(辛戌 : 북서) 방향으로 유곡천을 이루고 마침내 성산리에서 낙동강으로 빨려들어간다.

 

이것은 당나라 때 풍수지리학의 대가였던 양균송(楊筠松)의 길한 수법에 합치되어 대부(大富)를 이룰 자리였다.

 

 

 

 

 

 

 8~9부능선의 힘찬 기세로 쏟아져 내린 일맥이 급하게 그치며 결혈한

자리 혈장을 충분히 살펴보면 높은 곳에 결혈하기 위해 형성된 엄청난

암반으로 둘러쳐진 전순에 놀라게 된다.

 

진응수로 보이는 샘물

진응수란 땅속에서 샘솟는 물이 혈의 앞으로 물이 흐르는 것인데 이러한 경우에는 진짜의 의 혈을 맺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대개 좋은 용은 기가 왕성하여 이미 결혈된 후에도 빼어난 기가 넘쳐 흘러 땅속에서 샘솟듯이 흘러나오는 경우가 있는데 크고 작은 것을 불문하고 그 물맛이 맑고 감미로와야 한다.

 

봄, 여름에도 넘치지 않고, 가을 겨울에도 마르지 않고 웅덩이에 모여 흘러가지 아니하며 고요하며 물소리가 없어야 한다. 이것을 역시 신령스러운 땅속에서 샘솟는 물이라 한다. 이러한 곳은 “대귀(大貴)의 땅으로 삼공의 벼슬이 나온다”라고 한다. 진응수의 예로는 삼척의 준경묘, 인촌생가지, 한란묘 등에서 대표적으로 보여지고 있다.

좌선익쪽 당판에 붙은 귀성과 그 위에 놓인 옥인사

좌측 선익이 강하게 발달이 되어 있고, 그 끝이 거대한 바위로 뭉쳐있는데 이는 귀성(또는 요성)으로 이 혈의 역량을 말해주는 것으로 혈을 맺고도 남는 여기가 대단함을 말해주고 있으며, 거기에다 어보에 버금가는 玉印을  바쳐들고 있으니 국부가 나올만한 자리

조안산 전경

조안산

이병철 증조모님 묘는 증조부 우측 50여 미터 위쪽 

  증조부 묘와 같이 경사지에 결혈한 자리

  입수처에 묵묘를 그대로 두고 용,사하였다.

  * 사(捨) : 취하여 쓰거나 내버림의 뜻보다는

     풍수지리설의 지상법(地相法) 기본용어로 용(龍)은 땅의 기복을 뜻하며 산맥의

     기복이 용과 같다는 뜻이며,

     사(砂)는 혈지(穴地) 부근의 산이나 언덕, 요지를 말하는 것으로 사지(砂地)의 뜻

      은 아니고 용혈이 지키고 있는 철지(凸地)를 가르킨다.

 

증조모 묘의 조안산 전경

안대는 이자리가 좋아 보임  * 안대(案對) : 직접(直接) 만남

* 안산(案山) : 혈(穴) 앞에 사(砂)의 일종으로 조금 낮고 작은 산

* 혈(穴) : 지룡(地龍)이 머물고 있는 생기(生氣)가 담긴 곳이며,

              흔히 용혈(龍穴)이라고 한다.

측면모습 : 증조부 묘와 같이 산진처(용진처) 급경사지에 결혈한 자리

 

고 이병철 회장의 증조부는 틀림 없이 남 모르는 덕(德)을 쌓았기 때문에 좋은 자리에 안장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묘는 후손들로 하여금 대한민국에서 최고의 그룹을 형성토록 한 것만 해도 대단한 위력을 발휘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삼성가(三星家)가 적수공권(赤手空拳)이나 다른 없었던 해방후의 이 사회에서 '독점 재벌'이라는 일부 비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일터를 제공하고 이 나라의 경제 성장에 기여한 점은 불후의 업적이라 하겠다.

  

* 적수공권(赤手空拳) : 맨손과 맨주먹이라는 뜻으로,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음을 이르는 말. ≒ 척수공권(拳) 

 

금섬(삼족 두꺼비)에 대하여 자세하게 알고싶으신 분은 본 블로그 아래주소 클릭하세요.  

 

내 엽전(葉錢)의 가치는?  복(福) 금섬(金蟾)이란 ?      http://blog.daum.net/yescheers/85976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