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장문구(張汶邱 )씨가 임종전 증언내용
" 1963년4월에 우리 고적발굴팀 36명은 당국으로부터, 진시황의 다른무덤으로 추정되는 유적을 조사해야하니 대기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출발전, 조사단장은 우리발굴단원들에게 이번 유적은 매우 중요하여 조사,발굴 내용을 외부에게 일체 누설하면 안되니 이점을 각별히 유념하기 바란다고 말하였고, 우리일행은 기차와 버스,트럭을 나누어타고 이틀만에 목적지인 넓은 평원지대에 도착하였는데 창밖으로 이집트 피라밋처럼 거대한 피라미드들이 많이있었고, 도착한 우리발굴단원들은 하나같이 모두 탄성을 질렀어요.
우리 중국에도 이런 피라밋이 있었구나! 하는 기쁨과 경이로움이 뒤섞여서 말이죠, 우리는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의 또다른 이 엄청난 유적을 발굴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조사단은 4팀으로 나뉘어져 이후 3일동안 피라미드의 가장 큰 순서대로 먼저 가운데 3개 피라미드를 지정하여 발굴하기 시작했습니다. 3곳다 거의 한 형태의 것이었는데 이중 양옆의 두곳보다는 가운데것이 대단했어요.거대 한 벽돌 피라밋 지하입구로 들어가자 약 3~5층으로 석실이 나뉘어져 있었고, 상층부 공간으로 들어갈수록 말과 마차를 그림으로 화려하게 조성된 벽화,그림,여러 문자(중국글 한국글등)들, 조각류 약 6200여점, 맷돌,절구,솥,그릇등 생활도구 1500여점, 배추김치(원래김치인 백김치) 동물의 뼈등 음식물 400여점, 청동검 활 금관(신라형) 칼,창등 장신구류등 부장품 7800여점, 상투머리를 한 정 중앙시신(진시황의 모습과 흡사했슴)등 14구과 호위상 3000여점등이 대량발견 되었습니다.우리는 난생처음보는 이러한 너무나도 엄청난 유물,유적에 대해 모두 하나같이 무엇에 홀린듯하였으며, 마치 외계인의 세계,외계인의 무덤을 발굴하고있는듯한 느낌들이었습니다.
저는 그 유물들을 확인하면서 목록을 작성하는 일을 했었는데, 작업 3일째되던날 대충 7할정도 파악,작성된 상황이었고 이날 오후쯤에 이를 당시 발굴 단장이던 모 교수에게 중간 보고하자 그분은 큰 한숨을 내쉬면서 이런말을 했어요, 이 유적은 우리 황하족유물이 아니라 조선인들의 유적이다...중화역사 이전의 조선문명이야! 라고 말하면서 큰일이다!..일단 당국에 보고 한 후에 다시 지시를 받아야 하니 지금까지 발굴을 모두 중단하고 유물들은 모두 그자리에 두고 일단,오늘은 그만 나가세!" 라고 말하여 모두 발굴을 중단한채 나와 숙소에 있게 되었는데, 그날 밤 발굴중단과 동시에 철수명령이 내려졌습니다. 우리 발굴단원들은 모두 의아하게 생각했으나 곧 그 유적이 우리의 유적이 아니기때문이라고 이해하였고 일행은 그곳에서 떠나기에 앞서 숙소에서 현지공안에게 이곳에서의 비밀을 지키겠다는 서약서를 작성 제출였고, 그렇게 돌아온 이후, 그 피리미드들에 관해 더이상 들은적은 없습니다. 그게 그 피라미드에 대한 저로써의 마지막이었고 제가 아는 다 입니다"
- 당시 발굴요원이었던 故 장문구(張汶邱 )씨의 임종전 증언 내용-
===
서안 피라미드 발굴요원의 임종전 진술내용
(The_khan님이 올려주신글 본문)
안녕하세요.
중국에서 발견된 피라미드에 대해서 더욱 궁금합니다.
故 장문구(張汶邱 )씨가 임종전에 남겼던 이야기를 들어보면 명백한 우리문화임에 틀림없는데.아직도 공개되지 않은 것들이 많을 것으로 사료되는데요.
운영자님 좀더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내용을 알고 싶은데요. 답변좀 부탁드립니다.
<< 故 장문구(張汶邱 )씨가 임종전 증언내용 >>--- 저희는사실이기를 확인할 예정입니다.
" 1963년4월에 우리 고적발굴팀 36명은 당국으로부터, 진시황의 다른무덤으로 추정되는 유적을 조사해야하니 대기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출발전,
조사단장은 우리발굴단원들에게 이번 유적은 매우 중요하여 조사,발굴 내용을 외부에게 일체 누설하면 안되니 이점을 각별히 유념하기 바란다고 말하였고,
우리일행은 기차와 버스,트럭을 나누어타고 이틀만에 목적지인 넓은 평원지대에 도착하였는데
창밖으로 이집트 피라밋처럼 거대한 피라미드들이 많이있었고, 도착한 우리발굴단원들은 하나같이 모두 탄성을 질렀어요.
우리 중국에도 이런 피라밋이 있었구나! 하는 기쁨과 경이로움이 뒤섞여서 말이죠,
우리는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의 또다른 이 엄청난 유적을 발굴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조사단은 4팀으로 나뉘어져 이후 3일동안 피라미드의 가장 큰 순서대로 먼저 가운데 3개 피라미드를 지정하여 발굴하기 시작했습니다.
3곳다 거의 한 형태의 것이었는데 이중 양옆의 두곳보다는 가운데 것이 대단했어요.
거대한 벽돌 피라밋 지하입구로 들어가자 약 3~5층으로 석실이 나뉘어져 있었고,
상층부 공간으로 들어갈수록 말과 마차를 그림으로 화려하게 조성된,
벽화, 그림, 여러 문자(중국글 한국글등)들, 조각류 약 6200여점,
맷돌, 절구, 솥, 그릇등 생활도구 1500여점,
배추김치(원래김치인 백김치) 동물의 뼈등 음식물 400여점,
청동검 활 금관(신라형) 칼,창등 장신구류등 부장품 7800여점,
상투머리를 한 정 중앙시신(진시황의 모습과 흡사했슴)등 14구과 호위상 3000여점
등이 대량발견되었습니다.
우리는 난생 처음보는 이러한 너무나도 엄청난 유물, 유적에 대해 모두 하나같이 무엇에 홀린듯하였으며, 마치 외계인의 세계,외계인의 무덤을 발굴하고 있는 듯한 느낌들이었습니다.
저는 그 유물들을 확인하면서 목록을 작성하는 일을 했었는데,
작업 3일째되던날 대충 7할정도 파악, 작성된 상황이었고,이날 오후쯤에 이를 당시 발굴단장이던 모 교수에게 중간 보고하자, 그분은 큰 한숨을 내쉬면서 이런 말을 했어요,
“이 유적은 우리 화하족유물이 아니라 조선인들의 유적이다...
중화역사 이전의 조선문명이야! 라고 말하면서
큰일이다!.. 일단 당국에 보고한 후에 다시 지시를 받아야 하니
지금까지 발굴을 모두 중단하고 유물들은 모두 그자리에 두고 일단,오늘은 그만 나가세!"
라고 말하여 모두 발굴을 중단한 채 나와 숙소에 있게 되었는데, 그날 밤 발굴중단과 동시에 철수명령이 내려졌습니다.
우리 발굴단원들은 모두 의아하게 생각했으나 곧 그 유적이 우리의 유적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이해하였고, 일행은 그곳에서 떠나기에 앞서 숙소에서 현지공안에게 이곳에서의 비밀을 지키겠다는 서약서를 작성 제출였고,
그렇게 돌아온 이후, 그 피리미드들에 관해 더이상 들은 적은 없습니다.
그게 그 피라미드에 대한 저로써의 마지막이었고 제가 아는 다 입니다"
출처근거 www.coo2.net
[펌]☞ http://cafe206.daum.net/_c21_/bbs_search_read?
===
중국 서안지역의 피라미드에 관하여
중국 서안지역의 피라미드는 서방세계에서 먼저 확인하여 그 내용을 공동으로 조사하고자 요구 하였지만 중국측은 거부하였습니다. 자국내의 유적을 공개하지 않는 것은 자국의 자유이므로 어쩔 수 없습니다.
중국측에서 유적의 공개를 거부하고 조사 내용을 공개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서안지역의 유적은 화하족이나 진시황의 진나라 유적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문제를 이렇게만 바라 볼 경우 우리는 서안지역의 피라미드를 그다지 주목할 이유가 없습니다. 서안지역은 한민족과 너무나 먼 거리이기 때문에 구태여 우리 문명과 관련도 없고 중국이 공개하기를 거부하고 있는 마당에 굳이 알고자 할 필요성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약간의 상상이 발동합니다.
중국 화하족과 진시황의 진나라 유적이 아닌 것은 확실한데, 도대체 그들을 제외 하고 서안지역 유적의 주인은 누가 될 수 있는지, 그 실체는 전혀 파악할 길이 없습니다.
물론, 환상적인 고조선설을 믿을 경우, 고조선의 문명이라고 말 할 수도 있겠지만,환상적인 고조선 설은 일부의 한국인을 제외하면 여전히 소설과 같은 이야기로 치부합니다.
내가 이 문제를 주목하고 고민하는 이유는 환상적인 고조선설을 믿어서라기보다는 자신의 유적이 아니라고 하여 나무를 심어버린 저 상황을 보고 화가 좀 났기 때문입니다.
피라미드의 주인은 고대왕국의 왕의 무덤일 가능성이 높은 유적입니다. 중원문명을 일이킨 족속은 동이족인데, 동이족의 원류문명이 홍산문화에서 태동하였을 가능성이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습니다. 또한 고조선문명은 홍산문화의 후예일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과연 홍산문화의 후예들이 서안지역의 피라미드를 유적의 주인이었을까?
여전히 확답할 길은 전혀 없습니다. 단지, 전혀 아니다라고 할 수는 없지 않겠냐는 의문을 가질뿐입니다.
서안지역의 피라미드 유적의 주인이 화하족과 진나라의 유적이 아닌 것이 확실한데, 그들을 제외하면 주변지역에서 주목할 문명은 홍산문화 뿐인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입니다.
혹시나 서안지역의 피라미드유적이 고조선의 문명이 맞다면 저 나무 따위는 우리손으로 뽑아내야 합니다.
중국의 한~~~>>족들은 저 문명의 주인이 누구인 줄 확실히 알고있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발굴한 결과가 자신들의 역사와 일치하지 않는다고 하여 무조건 감추기만 하는 것은 대국의 처사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일부 한국인들은 서안지역의 유적을 발굴한 장문구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장문구가 실존인물인지, 누군가가 조작하고자 가공으로 내세운 인물인지 알 수 없습니다.
일부 한국인이 알고 있는 자료를 올려봅니다.
중국것은 최대 300미터 / 연대는 10,500년전 건설 추정
이집트 것은 최대 150미터 / 연대는 4,600년전 건설 추정
→ 그림을 클릭하시면 큰 그림으로 보실수 있습니다
- 서안 유역에는 위성사진에 점들로 보이듯이 수백기의 피라미드가 있는데 일부는 파괴되었다는 소식...(아~)
- 아직 확인해야될 사항이 많지만 무조건 부정하는 것도 경계해야...21세기는 과학시대...
운영자가 치우천자의 역사를 최초 공개하였을때 '미친O'이라 수많은 공격을 받은적 있지요.
지금은 입장이 꺼꾸로 되었지만(그놈들 입을 재봉틀로 박아버려야^.^)
서안 아래 피라미드도 상당한 이슈가 될 것입니다.
우리역사를 조금이라도 안다면 필연적인 결론에 도달할 것이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
감추는 것도 곧 한계에 다다를 것입니다
(위치도)
故 장문구(張汶邱 )씨가 임종전 증언내용
" 1963년4월에 우리 고적발굴팀 36명은 당국으로부터, 진시황의 다른무덤으로 추정되는 유적을 조사해야하니 대기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출발전,
조사단장은 우리발굴단원들에게 이번 유적은 매우 중요하여 조사,발굴 내용을 외부에게 일체 누설하면 안되니 이점을 각별히 유념하기 바란다고 말하였고,
우리일행은 기차와 버스,트럭을 나누어타고 이틀만에 목적지인 넓은 평원지대에 도착하였는데
창밖으로 이집트 피라밋처럼 거대한 피라미드들이 많이있었고, 도착한 우리발굴단원들은 하나같이 모두 탄성을 질렀어요.
우리 중국에도 이런 피라밋이 있었구나! 하는 기쁨과 경이로움이 뒤섞여서 말이죠,
우리는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의 또다른 이 엄청난 유적을 발굴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조사단은 4팀으로 나뉘어져 이후 3일동안 피라미드의 가장 큰 순서대로 먼저 가운데 3개 피라미드를 지정하여 발굴하기 시작했습니다.
3곳다 거의 한 형태의 것이었는데 이중 양옆의 두곳보다는 가운데것이 대단했어요.
거대 한 벽돌 피라밋 지하입구로 들어가자 약 3~5층으로 석실이 나뉘어져 있었고,
상층부 공간으로 들어갈수록 말과 마차를 그림으로 화려하게 조성된,
벽화, 그림, 여러 문자(중국글 한국글등)들, 조각류 약 6200여점,
맷돌, 절구, 솥, 그릇등 생활도구 1500여점,
배추김치(원래김치인 백김치) 동물의 뼈등 음식물 400여점,
청동검 활 금관(신라형) 칼,창등 장신구류등 부장품 7800여점,
상투머리를 한 정 중앙시신(진시황의 모습과 흡사했슴)등 14구과 호위상 3000여점,
등이 대량발견 되었습니다.
우리는 난생 처음보는 이러한 너무나도 엄청난 유물, 유적에 대해 모두 하나같이 무엇에 홀린듯하였으며, 마치 외계인의 세계,외계인의 무덤을 발굴하고 있는 듯한 느낌들이었습니다.
저는 그 유물들을 확인하면서 목록을 작성하는 일을 했었는데, 작업 3일째 되던 날 대충 7할정도 파악, 작성된 상황이었고, 이날 오후쯤에 이를 당시 발굴 단장이던 모 교수에게 중간 보고하자, 그분은 큰 한숨을 내쉬면서 이런말을 했어요,
“이 유적은 우리 화하*족유물이 아니라 조선인들의 유적이다...중화역사 이전의 조선문명이야! 라고 말하면서, 큰일이다!.. 일단 당국에 보고 한 후에 다시 지시를 받아야 하니, 지금까지 발굴을 모두 중단하고 유물들은 모두 그자리에 두고 일단,오 늘은 그만 나가세!" 라고 말하여 모두 발굴을 중단한 채 나와 숙소에 있게 되었는데, 그날 밤 발굴중단과 동시에 철수명령이 내려졌습니다.
우리 발굴단원들은 모두 의아하게 생각했으나, 곧 그 유적이 우리의 유적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이해하였고, 일행은 그곳에서 떠나기에 앞서 숙소에서 현지공안에게 이곳에서의 비밀을 지키겠다는 서약서를 작성 제출였고,
그렇게 돌아온 이후, 그 피리미드들에 관해 더이상 들은 적은 없습니다. 그게 그 피라미드에 대한 저로써의 마지막이었고 제가 아는 다 입니다"
- 당시 발굴요원이었던 故 장문구(張汶邱 )씨의 임종 전 증언 내용-
(요청자료) 중국 서안피라미드 / 이집트 피라미드 항공사진비교
중국것은 최대 300미터 / 연대는 10,500년전 건설 추정
이집트 것은 최대 150미터 / 연대는 4,600년전 건설 추정
(중국당국은 1960년대,1970년대에 이미 위 피라미드들을 발굴 하다가 동이(東夷)족, 즉 <배달민족>의 유물들이 쏟아져 나오므로 발굴 중단함. 황하문명보다 배달문명이빨랐다는 것이 드러나므로... 그후 중국 당국은 위 피라미드들에 접근금지를 시키고 고조선 고구려를 중국역사라 우기는 작업을 시작하였음. ) 10년전부터 고구려의 역사를 중국역사에 편입시켜 자국학생에게가르치고 세계에 고구려 역사가 중국역사라고 홍보 하고 있는 중이다. 중국 피라미드들은 위로갈수록 낮아지고 계단식 형태의 모양을 띄는 만주와 한반도에 널려있는 고구려의 무덤과 너무나도 똑같은 모양과 형태를 가지고 있다. 학계에서는 이러한 건축공법을 [들여쌓기 공법]이라고 부르며, 중국과 일본에는 찾아볼 수 없는 고구려 고유의 건축공법이라는데 이의를 다는 학자는 아무도 없다.
퍼온글임
[펌]☞ 중국 서안지역의 피라미드에 관하여
===
한국인의 옛조상 무덤들 | ||
피라미드, 고구려와 단군조선
===============================================================================================
=============================================================================================== ==============================================================================================
한민족참역사에 대한 검토
한민족참역사 메인의 장문구씨 증언내용의 허구성
안녕하세요. 비사인(greenyds)입니다. 많은 분들이 이번 릴레이에 관심을 가져주시고 쪽지를 보내 주시는 등 반응이 좋아서 기분이 좋습니다. 다만 조금 어려워서 쉽게 참여가 어렵지 않나란 의문도 드네요. 그래도 진정 역사가 무엇인지 밝히려면 철저하게 따져야하기 때문에 그 점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지요. 정작 한사카페에서는 난리치다가 금방 수그러드니... 그래도 계속 대응이 없다면 결국 자기 스스로 자신들의 모순점을 해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지요. 이번엔 예전에도 다룬 바가 있는, 메인의 장문구씨 증언내용의 허구성에 대해서 말씀드릴까 합니다. 고고학을 전공하거나 중국 고고학을 배운 사람이라면 쉽게 그 허구성을 지적 할 수 있지요. 그래도 좀 더 세세히 지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피라미드에 대해서는 앞서 brsmc11님께서 설명하신 바가 있으니 재언급은 피하겠습니다. 서안의 피라미드라고 하는 것은 우리민족과 아무 연관이 없으며 되려 전한시대의 왕릉과 신하들의 무덤이라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안이지요. 은폐중인 북중국의 거대한피라미드 군 인류최고,세계최대의 주 신문화유적 주신의 서울(평양)이었던 시안(장안) 메인에 있는 글이지요. 은폐중인 북중국의 거대한 피라미드군이라는데... 글쎄요... 시안이 북중국에 있나라는 의문부터 듭니다. 시안은 중국으로서 보면 중앙에 있지 따로 떨어져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중국에서도 여러 번 황도로 사용된 곳이기에 그 역사도 깊지요. 한민족참역사는 그곳이 주신의 수도라고 말하나, 글쎄요... 그 가장 중요한 근거로서 피라미드를 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피라미드를 입증하는 중요한 자료로서 장문구씨의 증언내용을 들고 있는데... 자, 그럼 이제 이에 대해서 차례차례 반박해보도록 하겠습니다. " 1963년4월에 우리 고적발굴팀 36명은 당국으로부터, 진시황의 다른무덤으로 추정되는 유적을 조사해야하니 대기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출발전, 조사단장은 우리발굴 단원들에게 이번 유적은 매우 중요하여 조사,발굴 내용을 외부에게 일체 누설하면 안되니 이점을 각별히 유념하기 바란다고 말하였고, 우리일행은 기차와 버스,트럭을 나누어타고 이틀만에 목적지인 넓은 평원지대에 도착하였는데 창밖으로 이집트 피라밋처럼 거대한 피라미드들이 많이있었고, 도착한 우리발굴단원들은 하나같이 모두 탄성을 질렀어요. 고적발굴팀... 이러한 제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는 분도 있겠지만, 우선 고적발굴팀이라는 용어 자체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중국에서는 고적발굴팀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발굴대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그리고 중국에서도 굳이 한자로 표기할 수 있는 것을 구태여 외래어인 Team이라는 단어 를 쓰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의역을 하였다고 그쪽에서 해명한다고 하더라도, 단어의 경우엔 크게 다를 바도 없고 그 의미가 그대로 전해지는 상황에서 굳이 다른 단어로 바꿀 이유도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구태여 고적발굴팀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에 대해서 의아한 생각이 드는군요. 이와 마찬가지로 중국에선 발굴단원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고고대원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는 점 등이 걸립니다. 그러나 이는 번역상의 문제일 수도 있으니 우선 그렇다는 정도로 넘어가지요. 그리고 글 내용에서 상식적으로 쉽게 이해되지 않은 점이 2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36명이라는 인원을 굳이 기차와 버스, 트럭을 통해 시안으로 데려갔다는 점입니다. 시안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성 박물관이나 대학의 교수 및 학생들, 혹은 고고연구소에서 가는 것이 훨씬 수월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이틀이나 걸리는 먼 거리에서 갔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납득이 잘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렇다면 버스나 트럭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됩니다만, 기차를 통해서 갔다고 한다는 게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기차라고 하더라도 그 피라미드가 있는 곳까지 직행으로 갈 수 있지는 않을 테니 말이지요. 평원지대에 군데군데 수많은 피라미드가 있었다면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가 없는 게 바로 도굴의 흔적입니다. 도굴의 위험은 기원전부터 존재하던 것이며, 진시황릉의 경우 이 도굴을 경계하여 야복경과를 한 것으로 유명하지요. 그 과정에서 그렇게도 쉽게 눈에 띄는 피라미드가 도굴의 위험에서 안전하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너무 안이하지 않았을까요? 실제로 이후의 장문구씨의 증언내용을 들어보면 발굴된 피라미드는 처녀분으로 나옵니다. 그리고 중요한 발굴이라면 단순히 고고대원으로만 하기는 어렵지요. 이때 동원되는데 민공들입니다. 우리나라에서의 인부와 비슷한 개념인데, 중국에선 그러한 민공들이 동원되면서 대규모 발굴을 할 수 있지요. 그리고 이런 발굴의 경우 도적들의 표적이 되기가 매우 쉽습니다. 60년대의 중국 치안이라면 알아주지요. 이 상황에서 쉽게 발굴을 하기 위해서는 2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그 지역의 공안을 동원하는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민병대를 조직하여 유적을 지킬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시안과 그나마 가까운(?)거리였던 삼성퇴의 발굴에선 그러한 민병대나 공안이 동원되곤 하였습니다. 물론 그 속에서는 고고대원들을 감시하는 이들도 있었겠지요. 그런데 위의 글에서는 그런 사안들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이 없습니다. 애초에 공안에 의해서 고생도 꽤나 할 것이며 도적들에 대한 위험도 심할텐데 말이지요. 우리 중국에도 이런 피라밋이 있었구나!하는 기쁨과 경이로움이 뒤섞여서 말이죠, 우리는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의 또다른 이 엄청난 유적을 발굴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조사단은 4팀으로 나뉘어져 이후 3일동안 피라미드의 가장 큰 순서대로 먼저 가운데 3개 피라미드를 지정하여 발굴하기 시작했습니다. 3곳다 거의 한 형태의 것이었는데 이중 양옆의 두곳보다는 가운데것이 대단했어요. 거대 한 벽돌 피라밋 지하입구로 들어가자 약 3~5층으로 석실이 나뉘어져 있었고, 상층부 공간으로 들어갈수록 말과 마차를 그림으로 화려하게 조성된 벽화,그림,여러 문자(중국글 한국글등)들, 조각류 약 6200여점, 맷돌,절구,솥,그릇등 생활도구 1500여점, 배추김치(원래김치인 백김치) 동물의 뼈등 음식물 400여점, 청동검 활 금관(신라형) 칼,창등 장신구류등 부장품 7800여점, 상투머리를 한 정 중앙 시신(진시황의 모습과 흡사했슴)등 14구과 호위상 3000여점등이 대량발견 되었습니다. 우리는 난생처음보는 이러한 너무나도 엄청난 유물,유적에 대해 모두 하나같이 무엇에 홀린듯하였으며, 마치 외계인의 세계,외계인의 무덤을 발굴하고있는듯한 느낌들이었습니다. 우선 이 사람들은 이 피라미드를 진시황과 관련된 유적이라고 생각하여 발굴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근데 여기에서 우리는 쉽게 넘어갈 수 없는 사항을 하나 발견하게 되지요. 진시황릉이 적어도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74년입니다. 정식적인 발굴 및 보도는 1975년에 일어났고 말이지요. 그런데 장문구씨 의 증언내용에서는 피라미드 발굴이 1963년에 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진시황릉과 비교하는 내용이 많이 나오지요. 너무나도 이상한 사안입니다. 무려 10년 후의 일을 훤히 알듯이 말하고 있는 것이 말이지요. 그리고 4팀으로 나뉘어 3일 동안 가장 큰 피라미드 순서로 가운데 3 피라미드를 발굴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4팀으로 나눈 것은 아래가 방형(方形), 즉 네모꼴이기 때문에 그런 것으로 보이는데, 그 거대한 피라미드를 발굴하는데 겨우 3일밖에 안걸렸다는 것이 이상합니다. 36명의 인원이 발굴에 참여했다면 적어도 팀당 9명이 되고, 이 인원수가 하루에 하나 꼴로 피라미드를 발굴하였다면 그 자체가 졸속발굴입니다. 게다가 정작 중요한 것은 이게 발굴이라면 그 전에 지표조사가 되었다거나 시굴조사가 되었다는 등의 언급이 없습니다. 지표조사야 미리 되었기 때문에 발굴결정이 떨어졌으니 그렇다고 쳐도, 첫 삽을 뜬 것이라면 이는 발굴조사가 아닌 시굴조사입니다. 그리고 그 당시 포크레인 등이 널리 보급되지 않았던 것을 상기해 본다면 과연 일반적인 삽이나 곡괭이로 효율적인 발굴을 하였다고 단정 하기엔 아직 무리가 있습니다. 시굴조사의 경우엔 구체적인 조사를 하지는 않고 대강 유물이 나올 곳을 트렌치를 파서 추측해보고 이를 통하여 후에 발굴조사 때 적극적으로 방영하기 마련입니다. 짧은 시일에 조사를 끝내는 것이 특징인데, 유물들에 대한 구체적인 파악을 하진 않지요. 글을 읽어보면 처음 발굴하는 것으로선 시굴 같은데, 내용은 발굴입니다. 그런데 발굴로 치기엔 너무나도 빨리 끝내는 게 의아합니다. 이러는 건 졸속 발굴 중의 졸속 발굴이고, 너무 지나친 감이 없잖아 있습니다. 그리고 발굴조사라면 유구실측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물론 들어가고 난 이후에 해도 되지만 기존의 방식대로 살펴본다면 미리 유구를 실측하고 이를 도면에 작성한 후에 들어가도 늦지 않습니다. 게다가 구제발굴이 아닌 학술발굴의 경우엔 시간을 넉넉하게 잡아서 최대한 학술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더욱 더 현명한 선택입니다. 입구를 열고 들어가서 3~5층의 석실을 파악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구체적인 수치가 아니니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한자와 한글이 있었다고 하는데 사실상 근거가 없지요. 가림토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말씀드리는 것인데, 정작 가장 해석하기엔 수월 할 수도 있는 표음문자인 가림토가 있다고 말말하고 정작 이를 해석하려는 노력을 보이지 않는 것은 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조각류 6200여점이라고 하는데... 발굴 할 때 조각류를 세던가요? 필요에 따라서 수집하는 것은 당연하나 그 구체적인 수를 모두 세기엔 한계가 있으며 세어 봤자 별로 의미도 없습니다. 단순히 많다는 정도이지요. 제가 발굴한 곳 중에서 가마터가 있는데 그곳에선 지면에 조각들이 굴러다니다보니 거치적 거리고 실수로 부서지기도 할 정도였지요. 실질적으로 그 수를 세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게다가 6200점이면 너무나도 적은 수치입니다. 그 정도 대규모라면 몇 만 점은 당연히 넘는 게 보통이지요. 그리고 조각류가 있다면 애초에 처녀분이라고 하기에 힘듭니다. 토기파편이 생기는 것은 외부의 침입자가 있어야 가능한 게 아닐까요? 그리고 고분의 주위에 두른 도랑, 즉 주구에서 발굴된 것이라고 친다면 애초에 그걸 조사했다는 언급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배추김치가 발굴되었다는 것은 애초에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음식물의 경우는 당연히 썩기 마련이며, 옛날의 음식물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경우는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있다고 한다면 동물의 뼈나 탄화곡물 등이지요. 가공된 식품은 절대로 남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김치에 대해서는 말이 많은데 중국에서 기원하였다는 말도 있지요. 게다가 애초에 고분에서 발굴되는 토기나 자기는 그 속에 음식물이 있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그게 다 썩기 때문에 결국엔 그 물건만 발굴되는 것이라고 봅니다. 상투머리는 진시황릉에서도 보이며, 이를 무조건적으로 우리민족의 특징이라고 말하는 견해는 사실 상 사라지다시피 하였습니다. 조선시대의 유습일 뿐이지, 그 전에도 무조건적으로 머리를 그렇게 하였다고 보기는 힘들기 때문이지요. 호위상 3000구도 도대체 그 짧은 시간에 어떻게 발굴하고 조사하였는지 원... 저는 그 유물들을 확인하면서 목록을 작성하는 일을 했었는데, 작업 3일째되던날 대충 7할정도 파악, 작성된 상황이었고 이날 오후쯤에 이를 당시 발굴 단장이던 모 교수에게 중간 보고하자 그분은 큰 한숨을 내쉬면서 이런말을 했어요, 이 유적은 우리 화하족유물이 아니라 조선인들의 유적이다...중화역사 이전의 조선문명이야! 라고 말하면서 큰일이다!..일단 당국에 보고 한 후에 다시 지시를 받아야 하니 지금까지 발굴을 모두 중단 하고 유물들은 모두 그자리에 두고 일단,오늘은 그만 나가세!"라고 말하여 모두 발굴을 중단한채 나와 숙소에 있게 되었는데, 그날 밤 발굴중단과 동시에 철수명령이 내려졌습니다. 우리 발굴단원들은 모두 의아하게 생각했으나 곧 그 유적이 우리의 유적이 아니기때문이라고 이해 하였고 일행은 그곳에서 떠나기에 앞서 숙소에서 현지공안에게 이곳에서의 비밀을 지키겠다는 서약서를 작성 제출였고, 그렇게 돌아온 이후, 그 피리미드들에 관해 더이상 들은적은 없습니다. 그게 그 피라미드에 대한 저로써의 마지막이었고 제가 아는 다 입니다" - 당시 발굴요원이었던 故 장문구(張汶邱 가명)씨의 임종 전 증언내용- 목록을 작성하는 것은 그 이후에 고고연구소 등으로 옮겨서 해도 늦지 않습니다. 되려 현장에서 모든 것을 파악하려는 것 자체가 힘들지 않을까요? 그리고 3일째 되는 날 7할 정도나 파악하였다고 하는 게 너무나도 빠르며, 이는 실질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7할을 파악했다면서 구체적인 유물의 수를 대강 말하는 것 자체가 모순 아닐까요? 아니, 유구실측도 안한 상태에서 유물들을 모두 제자리에 두는 게 가능할까요? 그리고 그렇게 큰 유적의 경우엔 차라리 모두 유물을 빼내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 아닐까라는 상식적인 의문이 듭니다. 더 이상 따지기 싫을 정도로 엉터리 투성이입니다. 장문구씨라는 이름 자체도 중국식으로 말하면 장웬취인데, 이를 간체자로 옮기면张汶邱입니다. 굳이 이를 번체자로 표기한 것도 약간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지요. 물론 너무 지나친 지적이라고 생각 할 수도 있지만 말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한민족참역사에서 말하는 이 증언은 너무나도 꾸며진 부분이 많으며 고고학의 상식과 어긋나는 부분이 많습니다. 그들은 이게 자신들의 논지의 중요한 근거라고 생각하겠지만 정작 전공자들에게는 엉망으로 보이는 이유가 뭘까요? 그들이 스스로 이에 대해서 깊이 깨닫기 바랄 뿐입니다. ※ 참고문헌 국립문화재연구소, 『韓國考古學事典』, 학연문화사, 2001 정한덕, 『中國 考古學 硏究』, 학연문화사, 2000 웨난, 『삼성퇴의 청동문명 01』, 일빛, 2006 웨난, 『진시황릉』, 일빛, 2005
|
'역 사 방 > 고구려,백제,신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1500년 전 '16살 가야시녀의 삶' (0) | 2009.11.06 |
---|---|
문무왕릉 비 상단부를 보며 하늘을 바로 볼 수 없었다. (0) | 2009.09.05 |
高天原故地(고천원고지) : 일본황실출발지 (0) | 2009.01.03 |
신라해적 왜 대마도를 침공하였나 (0) | 2008.12.29 |
문무왕 비문의 비밀 (0) | 2008.12.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