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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김씨 연원(淵源)/안산의 유래, 市史

안산의 선사시대(구석기,신석기, 청동기) 역사

by 연송 김환수 2009. 5. 9.

제1장 역사

 

제1절 선사시대

 

 

 신석기 시대 움집

 지배계층의 무덤 고인돌

 

 

 

 

안산 지역은 한반도의 중부 서해안에 해당되는 지역이자 한강 하류에 인접해 있는 지역으로, 이른 선사 시대부터 인간의 거주가 이루어져 왔으며 그 흔적들이 다수 발견되었다.
선사 시대란 역사 기록이 있기 전의 시간을 말하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흔히 기원전 300년경 초기 철기 시대가 시작되기 직전의 시기를 포함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구석기 시대의 시작에서부터 신석기 시대를 거쳐 청동기 시대에 이르는 수만 년 내지 수십만 년 동안의 시기를 가리킨다.


안산 지역에서 인간의 서식이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아직도 명확한 증거가 없다. 그런데 신석기 시대에 들어서서는 분명한 선사 시대인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 이후 줄곧 사람의 흔적이 발견되었으나 구석기 시대의 유적은 아직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주변 지역의 예를 볼 때, 분명 이 지역에서도 구석기 시대의 인간 거주 흔적이 발견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아무튼 안산 지역은 한반도에서 선사인의 거주가 시작될 무렵부터 인간의 서식이 이루어졌던 지역으로 보이는 곳이며, 그 이후 해안이라는 자연환경상의 특성이 선사 시대 사람들의 삶의 모습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1. 선사 시대의 환경 변화

 

선사 시대 동안 기후는 지속적으로 변화하였다. 특히 홍적세 기간 동안, 즉 지금으로부터 약 12,000년 전까지의 소위 빙하 시대 동안은 추운 시기와 더운 시기가 교대로 찾아왔다. 빙하가 물러난 이후의 시기에도 전반적으로는 오늘날과 같은 기후라고 볼 수 있겠지만, 약간 덥거나 건조하거나 비교적 추운 기후들이 교대로 나타났다.


이러한 기후 변화는 인간의 거주 양식에 많은 변화를 주게 되었는데,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이 해수면의 변화로 인한 서식 방식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해안 지역이라는 특성과 서해안이 낮은 바다라는 특성을 지닌 안산 지역은, 이러한 기후 변화로 인한 인간 서식의 변화를 가장 많이 받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빙하 시기 중 가장 추운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약 18,000년~15,000년 전인데, 이 시기에는 전세계적으로 해수면이 약 130m 정도까지 하강하고 있어서 안산과 면해 있는 황해는 거의 전부가 육지 상태였다.1) 그리고 이러한 해수면의 하강 상태는 B.C. 5000년경에 이르러서야 현재의 상태에 근접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 이전에는 안산 앞바다의 많은 부분이 육지였으므로 인간의 분포에 있어서 현재의 양상과는 많은 차이를 보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안산 지역의 환경 중 대단히 오래 된 중기 홍적세 이전의 시기에 대해서는 전세계나 동아시아 지역의 환경 변화에 대한 자료로써 추론하는 수밖에 없으며, 앞으로 지역적인 자료의 보완을 기다려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선사 시대 사람들은 당시의 낮은 구릉지를 그들의 중요 식량 공급지로 활용했을 것이다. 즉 오늘날은 바다로 덮인 해저의 평야 지대를 그들의 중요한 생활 근거지로 삼았을 가능성이 많다. 특히 후기 구석기 시대 대부분은 오늘날의 해저면이 중요한 생활 터전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서해안 지역에서 후기 구석기 시대의 유물이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안산 지역에는 대규모의 하천이 없기 때문에 대규모의 인구 수용 능력이 없었을 것이고, 이러한 대규모의 하천이 없음은 유적이 형성될 수 있는 퇴적 환경의 결여를 의미한다.


그러나 안산 지역으로 흘러드는 소규모의 하천들은 지금은 해저가 된 지역의 어느 지점으로 흘러들어 여기서 비교적 큰 흐름을 형성했을 것이므로, 이러한 하천 유역에는 비교적 많은 유적들이 분포했을 것이다. 이러한 지점들로부터 인간의 집중적인 서식이 이루어져, 안산 지역이 그들의 중요한 식량 채집 지역이었을 것이다. 안산 지역은 대규모의 하천은 없지만 평야와 낮은 구릉이 분포하고 있어서 다양한 식량 자원이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2. 안산 지역 선사 문화의 특성

 

안산 지역은 결국 경기 서남부 지역의 선사 문화의 일단을 반영하고 있다. 경기 서남부 지역은 한강 하류 유역 선사 문화의 한 지역적 양상으로 나타나게 되는데, 한강 하류 유역 선사 문화의 가장 큰 특징은 한반도 각 지역에서 나타나는 선사 문화의 복합상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 한반도의 동북 지역의 선사 문화와 서북 지역의 선사 문화가 이 지역에서 복합적으로 형성되었고, 또한 이 지역에서 새롭게 형성된 문화는 한반도 남부 지역으로 흘러갔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문화의 복합적인 양상은 역사 시대에 들어와서도 마찬가지였다. 고구려 문화, 백제 문화, 그리고 신라 문화의 복합상이 이 지역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으로 나타났다. 이 지역은 한반도 주민의 이동과 문화의 전파 경로에 있어서 전 시대를 통해서 공통된 측면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주민의 흐름과 문화의 전파는 한반도의 동서남북에서 X자 모양으로 관통하고 있는 한강이 그 교통로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한강은 결국 선사 시대 주민에게 있어 생활의 기반일 뿐만 아니라 이동과 확산의 교통로 구실을 했던 것이다. 한반도 동북 지역, 즉 함경도 두만강 유역의 주민과 문화가 추가령 지구대나 태백 준령을 넘어 중부 내륙 지방을 거쳐서 한강 하류로 들어오게 되고, 이것은 한강 유역의 다른 인접 지역으로 퍼져 나갔다.


한편 서북 지역, 즉 평안도의 압록강과 대동강 유역의 주민과 문화는 평야 지대를 세로로 가로질러 남하하는 과정을 거쳤는데, 이러한 문화는 다시 한강의 지류를 타고 또한 서해안의 평야 지대를 거쳐 남하했으며, 남부 지방의 선사 문화 형성에 영향을 끼쳐 왔다. 결국 서북과 동북 지방으로부터 기원된 계통이 다른 문화를 수용하여 남한 지방의 선사 문화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기반을 제공했던 것이다.


안산은 한강 하류의 낮은 구릉 지대와 평야 지대의 서쪽 끝에 위치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지역은 시흥시와 광명시를 매개로 하여 결국 김포 반도와 연결되며, 선사 시대의 문화적 공통성이 대단히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특히 한강의 흐름을 따라 선사 문화가 서해 도서까지 퍼져 나갔음을 잘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안산의 선사 문화는 한강 하류 지역의 선사 문화와 맥을 같이하는 문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 구석기 시대

 

구석기 시대란 지금으로부터 12,000년 전 이전의 석기 시대를 말한다. 이 시기 동안 사람들은 돌을 깨뜨려 생활도구를 만들어 썼다. 이 시기는 현재와는 다른 지질 시대인 빙하 시대(pleistocene)라고 불리기도 하는 시기이며, 한반도에서도 전국에 걸쳐서 그 흔적이 발견되고 있다.
안산 지역에서는 아직도 구석기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구석기 유물의 부존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인접한 화성군 지역에서 구석기 유물의 발견이 보고되고 있기 때문이다.2)

 

서해안고속도로 공사 중에 조사된, 안산의 남쪽에 해당되는 화성군 지역에서 석영암제 석기들이 보고된 것이다. 이 석영암제의 석기들은 그 연대가 분명하지는 않지만 분명 구석기 시대의 유물이다. 이 지역은 안산과 그 지형상의 특징이 거의 같기 때문에 안산 지역에도 소규모의 하천을 무대로 간헐적으로 출몰하였던 구석기 시대 사람들이 남긴 도구들이 포함되어 있는 유물층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앞으로 주목해야 할 것은, 홍적세 후반에 살았던 사람들의 유적이 안산 지역의 개펄을 비롯해 바다 속에 남아 있을 가능성이 많다.


 

4. 신석기 시대

 

신석기 시대는 원래 식량 생산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시기로서 금속기가 발명되기 이전의 문화 단계로 보고 있지만, 우리 나라에서의 신석기 시대는 이러한 경제생활의 변화보다도 도구의 종류나 기법이 변화한 시기, 다시 말해서 토기가 출현하고 석기를 제작함에 있어서 타제가 아니라 갈아서 만드는 마제의 기법이 출현하는 시기로 정의한다. 이러한 시기는 대략 10,000년 전에 시작되어 B.C. 1000년 전에 끝났는데, 인접한 만주 지역에서는 이보다 이른 시기에 끝난 것으로 보고 있다.


한반도의 신석기 문화는 나타나는 토기의 특성에 따라 몇 개 지역으로 나누어지는데, 한강 유역을 포함한 중부 지역도 그 중의 하나이다. 한강 유역은 한반도의 서북 지역과 많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바닥이 뾰족하거나 둥그스름한 모양을 지닌 빗살무늬토기의 존재이다. 한강 중하류 유역에 있는 서울의 암사동 유적이나 미사리 유적이 그 좋은 예이다. 이 유적들의 빗살무늬토기는 가장 대표적인 형태로 나타날 뿐 아니라 가장 오래 된 것들 중의 하나이다.


빗살무늬토기는 중부 지역에서 기법상의 진화를 거듭했을 뿐아니라, 한편으로는 한반도 남부로 전래되어 기존의 토기들과 혼합 또는 대체해 나갔다. 빗살무늬토기는 애초에는 토기의 몸통의 전면을 세 개의 시문구역으로 나누어 전면에 기하문을 시문하게 되지만, 이러한 시문 영역은 점차로 시간이 흐르면서 퇴화되어 문양이 성글어지고 규칙성이 줄어들었으며, 시문 영역 또한 몸통의 상부나 구연부 가까운 곳에 한정되었다. 이러한 토기 문화를 지닌 신석기 문화가 한강 입구뿐만 아니라 서해안 전역에 걸쳐 나타났다.


안산에서도 서해안 지역에서 나타나는 신석기 시대 토기 문화들이 나타났는데, 가장 대표적인 유적이 별망패총 유적이다.3) 별망패총 유적은 바로 인접한 오이도 패총 유적이나 강화도의 삼거리·동막동 유적, 영종도의 신석기 유적, 용유도·영흥도 등지의 신석기 토기 반출 유적들과 그 토기 형식적인 면에서 유사한 문화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신석기 유적들은 토기의 형식으로 볼 때 신석기 시대의 중·후반에 속하는 유적들인데, 아마도 신석기 전반에 속하는 해안의 유적들은 현재 확인이 불가능한 해저에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다. 별망패총 이외에도 현재 안산으로 편입된 대부도에서도 신석기 패총들이 발견된 예가 있으며4), 이러한 패총에서 나타난 생활문화의 양상은 별망패총의 것과 비슷하다.


별망패총이나 다른 지점의 패총이 형성되는 동안 이 지역 주민들이 살아온 방식을 이러한 패총에서 드러난 증거를 중심으로 복원한다면, 기본적으로 이 시기의 사람들은 어로를 생활기반으로 하여 사냥과 채집을 하면서 살아왔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원시 농경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 원시 농경의 존재는 서해안 지역에서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서북 지역 대동강 연안의 유적에서 나타나는데, 추측컨대 그 가능성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또한 서해안을 따라 넓게 분포하는 개펄에서 굴 등의 조개와 함께 다양한 해양생물들을 채집하면서 생활을 영위했을 것으로 판단되며, 이들 중 일부는 내륙과 관계를 맺고 계절적 이동으로 이 지역을 방문하면서 살았을 가능성도 있다. 채집한 해양생물들을 보면 패총에서는 조개들이 많이 나타나는데, 별망패총의 경우에는 굴이 압도적으로 많다. 이것들은 조간대에서 간조시에 노출되었을 때 채집이 가능하지만, 토굴(Ostrea denselame llosa)·비단가리비(Chalamys farreri)·새꼬막(Scapharca subcrenta) 등은 잠수하지 않고는 채집이 불가능한 것들로서, 당시의 경제행위의 단면을 알 수 있다.


한편 별망패총에서는 석기의 양이 그다지 많이 발견되고 있지 않은데, 이는 복합적인 행위가 그다지 많이 일어나지 않았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니면 채집과 직접 관련된 행위들만이 집중적으로 관련된 유적일 가능성이 있어서, 주거지 등의 유적은 다른 지점에서 발견될 가능성도 있다. 별망패총의 경우에는 토기의 형식이 서해안 빗살무늬의 전통을 잘 보여 주고 있는데, 단사선문·어골문·점열문·손톱무늬 등이 시문되어 있다.


여기에서 시문 구역에 따라 토기를 구분할 수 있는데, 구연부와 몸통부를 다르게 시문한 것이 있고, 또한 몸통 전체를 한가지로 시문한 것들이 있다. 제1유형은 구연부에 점열문이나 손톱무늬를 시문하고 몸통에는 어골문을 시문한 것인데, 어골문은 가로어골문과 세로어골문 두 종류가 있다. 제2유형은 시문구를 가지고 어골문을 시문하거나 병행단사선문을 시문한 것이다. 전면에 가로어골문을 시문하는 것은 서해안 지역에 많이 나타나는 것으로, 대동강 유역 혹은 황해도 지역의 신석기 시대 토기들이나 경기만 일대의 서해 도서에서 흔히 나타나는 토기 문양이다.

 

그런데 서해 중부 지역의 도서에서는 한강 유역의 빗살무늬토기 문화의 영향을 받아서 단사선문(短斜線文)을 구연부에 시문한 것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것은 별망 유적에서도 나타나며, 이와 유사한 토기의 양상은 시도나 오이도의 빗살무늬토기 유적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안산의 신석기 시대 사람들과 문화는 바닷가 환경에 적응하여 살았던 수렵·채집·어로를 주로 했던 주민과 문화로서, 이들은 한강 유역의 사람들과 문화적으로 연결되어 있었으며, 이러한 양상은 경기만 지역의 서해안 신석기 유적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양상이다. 그런데 신석기 초기의 유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나타나지 않는다. 이것은 당시의 해수면이 낮아서 해안 환경에 적응한 선사 시대인들은 아마도 지금보다는 훨씬 낮은 곳, 즉 현재의 해저에 살았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된다.

 

5. 청동기 시대

 

청동기 시대는 일반적으로 청동으로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한 때부터 철기가 나타나기 이전의 시기를 말한다. 금속기를 사용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사회·경제적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던 시기이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서는 청동기의 출현이 지역에 따라 상당히 차이가 있어서 청동기의 사용을 기준으로 한 청동기 시대의 설정이 어려운 점이 있다. 그리하여 흔히 청동기 시대를 정의함에 있어서 새로운 형식의 토기 출현, 즉 소위 무문토기(無文土器;민무늬토기)의 출현 및 새로운 묘제의 출현을 중요한 근거로 삼는 것이 보통이다. 새로운 묘제로는 지석묘(支石墓)의 출현과 석관묘(石棺墓)의 출현이다. 물론 옹관묘(甕棺墓)도 간혹 보이지만 이 두 가지 묘제가 가장 보편적인 묘제이다.


이 시기에는 청동기가 출현하기는 했지만 생산 도구들은 아직도 석기를 주로 사용하였고 농경이 보편화되기 시작했으며, 묘제에서 보듯이 사회가 복잡해지고 국가 단계로 이행하기 시작하는 시기였음을 알 수 있다.

 

한반도의 여러 곳에서 이 시기에 이미 대규모의 취락들이 나타나고 있는데, 한강변에서는 여주 흔암리나 미사리 등지에서 이 시기의 취락지가 확인된 바 있다.5) 최근에 부천의 고강동에서도 청동기 시대의 취락 유적으로 보이는 것이 발견되었는데6), 유적의 구조가 흔암리의 경우와 흡사하여 경기 해안지역에도 한강변의 청동기 문화가 널리 퍼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안산 지역에서의 청동기 시대 유적·유물로 대표적인 것은 지석묘라 할 수 있다. 이 지석묘들은 대부분이 남방식으로 월피동·양상리·선부동 등지에서 발견되는데, 지하에 토광을 파서 시체를 묻거나 간혹 돌을 깔았던 흔적이 있었다. 한강변에서의 지석묘는 남방식과 북방식이 혼재하고 있는데, 매장 시설이 지상부에 올라와 있는 북방식은 강화도에서 춘천을 잇는 선을 그 남방한계선으로 하고 있으며, 간혹 그 이남에서도 발견되기도 한다. 안산 선부동7), 그리고 인접한 광명시의 가학동에서도 북방식의 탁자식(卓子式) 지석묘가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서8), 그 영향이 경기도 서부 일원까지 미쳤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것은 안산 지역이 청동기 시대의 문화적 경계지역이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된다.


이 지석묘 유적들에서는 그다지 많은 유물이 보이지 않았으나 마제석검, 반월형석도, 무문토기편들과 숫돌, 그리고 석부 등의 유물을 수습한 바 있다. 물론 이러한 유물들로써는 당시 안산 지역의 청동기 시대의 문화상을 복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러한 지석묘들은 분명 안산 지역에 청동기 시대 주민들이 거주하였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따라서 아직도 이 지역에서 청동기 시대 주민의 생활을 보여 주는 보다 다양한 증거들은 나타나지 않았지만 안산 지역의 고고학 자료와 함께 부근 지역의 청동기 문화의 양상을 토대로 그 시대를 복원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이러한 증거들 중에서는 광명시 가학동의 지석묘 유적에서 나타난 청동기 문화상이나 부천 고강동의 주거지 유적들은 매우 중요하다.


가학동이나 고강동 유적의 구조와 유물들로 안산의 청동기 시대 주민의 생활을 추론한다면, 이들은 한강 중·하류 유역의 청동기 문화의 주체들과 크게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장방형의 반수혈주거지(半竪穴住居地;반움집)를 짓고 살았을 것이며, 이러한 주거지는 대개 나지막한 구릉지에 여러 채의 집이 모여 작은 마을을 이루었을 것이다. 이러한 것은 여주의 흔암리 유적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으며, 고강동이나 파주의 청동기 시대 주거 유적들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마을의 부근 평지는 농경지로 이용되었을 것이며, 또한 이 시기에는 여러 종류의 밭작물뿐 아니라 수전(水田) 경작도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흔암리에서도 쌀이 발견되었고, 충남 부여의 송국리 유적에서도 쌀이 발견된 바 있다. 그 밖에 김포 지역과 일산 지역에서도 이 시기에 해당되는 이탄층에서 쌀이 발견되었다.9) 이처럼 청동기 시대에는 쌀농사가 상당히 보편화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한강 중·하류의 청동기 유적에서는 반월형 석도가 상당수 발견되었다. 부천의 고강동 유적에서는 반월형 석도가 한 유적에서 4개가 발견된 바가 있는데, 날이 상당히 날카롭게 다듬어져 있었다. 또한 가학동 유적에서도 지석묘 부근에서 반월형 석도가 채집되었다. 수확 도구인 반월형석도의 보편화는 논농사가 아니라 하더라도 적어도 농업이 주요한 생산수단이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농업생산력을 바탕으로 한 사회체제는 점차로 커지고 복잡해졌으며, 어느 정도 인원의 동원이 필요한 분묘 형식인 지석묘의 영조가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조직적인 인력 동원은 결국 사회의 분화를 가속화시켜 새로운 사회질서, 즉 복합사회 출현의 동인이 되었을 것이다. 안산에서도 지석묘들이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은, 이러한 사회 변화가 이 지역에서도 일어났었음을 추론케 하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사진 1-1 선부동 지석묘.
안산시 향토유적 제2호로 지정되었으며, 선부동 산27번지에 있다.

 

안산을 포함한 한강 하류역의 청동기 문화는 토기의 양상으로 볼 때 기본적으로 서북 지방의 각형토기문화(角形土器文化)와 동북 지방의 공렬토기문화(孔列土器文化)가 섞인 것으로 판단된다. 선부동 지석묘의 출토 유물에서도 이러한 증거가 보이며, 고강동 유적이나 파주의 다율리·옥석리 등의 유적들에서도 공렬토기와 각형토기들이 혼재하고 있거니와 공렬토기에서도 구순각목(口脣刻目)이 남아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같은 양상은 흔암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동북 지방 문화 계열로 분류되는 홍도(紅陶)도 발견되었다.


그런데 한강 하류 지역에 초기 청동기 문화가 널리 퍼져 있었고 안산을 포함한 강화도 등의 서해 도서에서도 그 문화의 일단을 볼 수 있지만, 본격적인 청동기 문화인 요녕식동검(遼寧式銅劍)이나 초기 철기 시대의 한국식 동검을 가진 집단은 출현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일부 학자들은 초기 철기 시대나 원삼국 시대에 있어서 이 지역에 힘의 공백 상태가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견해를 제시하기도 한다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