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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수집방/채권,승차권

채권 견양

by 연송 김환수 2009. 4. 29.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해인 1948년 발행된 제1회 대한민국 건국채권입니다. (단기 4287년)

액면은 500원입니다.

 

 

1954년 발행된 제6회 대한민국 채권 50환권 입니다.

한국전쟁 복구를 위해 발행된 채권으로 보입니다.

 

 

       오분리건국국채증서 단기4287(1954년)         북한이 서울을 점령한 후 발행했던 채권

 

 

 

 

 

 

 

 

 

 

 

 

 

 

 

 

 

 

 

옛날돈

 

 

 조선은행권 10원

 

조선은행권 100원

도안은 무병장수함을 상징하는 일본의 칠복신중에 하나인 수노인상[운양(雲養) 김윤식(金允植,

1835년~1922년) 초상]과  전후면에는 우리나라의 무궁화꽃과 일본왕실을 상징하는 벚꽃문양을

넣었습니다


 

조선은행 금권
수집가들에게 인기가 많은 금권 시리즈. 한국은행이 조선은행으로 명칭이 변경되고 일본의 금본위제를
따라 은행에서 언제든지 지폐를 같은 가치의 금으로 바꿔 준다는 영문표시가

지폐 하단에 있어 금권이라고 불린다. 이를 태환이라고 한다.


인쇄처는 조선총독부와 일본내각인쇄국인데 일본에서 인쇄한 것은 하단 번호를 둘러싸고 있는 괄호가
{}이다. 도안은 칠복신중의 한분인 수노인인데 김윤식의 초상화를 보고 그렸다고 하기에 논란의 소지를 갖고는 있지만 수노인을 그리기 위한 도안이므로 수노인으로 인정 해야 합니다.

참고로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한국인을 지폐도안에 넣어서 통용시켰다고 생각되지는

않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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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조선은행권= 조선은행권은 1914년 100원권을 시작으로 해방전까지 총 18종이 발행됐다. 100원권 도안은 재복을 상징하는 신인 대흑천(大黑天)을 사용했고

 10,5,1원권에는 긴 수염에 관을 쓴 노인이 사용됐는데 이 노인에 대해서는 조선말기 문장가인 운양 김윤식의 초상이라는 설과 사람의 수명을 관장하는 남극성의 화신인 수(壽)노인이라는 설로 양분돼 있다.

해방 뒤 미 군정에 의해 발행된 조선은행권은 총 13종으로 대부분의 권종에는 긴 수염에 관을 쓴 노인상이 사용됐고 1949년 발행된 10,5원권에는 독립문이 새로운 도안으로 채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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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사진에서 보듯이 조선은행권에 노인 한분이 나오시는데 ‘주인공이 누구냐’하는데는

두가지 의견이 있습니다.

김윤식이라고 하시는 분들도 있고 도교에서 칠복신중 하나인 수노인이라고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결론을 먼저 말하자면 “조선은행권의 인물은 수노인이다”인데 그 근거는 이렇습니다.

 

화폐의 도안에 대해 정확히 알아 보자면 그 당시의 총독부의 고시 사항을 찾아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1914 (대정3) 조선총독부 관보에 게재된 총독부 고시 제569호 ‘조선은행1원권의 발행

고시’를 보면 수노인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어째서 김윤식이라는 얘기가 퍼지게 되었을까요?

전에 인명사전에서 김윤식의 사진을 본 적이 있는데 금권에 나와 있는 노인과 정말 흡사

하더군요.

그렇다면 보기에 유사하는 이유만으로 김윤식이라고 주장하는 걸까요?

일본인 오오교우요시하루(大橋義春)의 ‘일본지폐 대계도감’에 조선은행권의 수노인상은

김윤식의 초상을 모델로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결국 조선은행권의 인물은 수노인인데 그 수노인의 도안을 김윤식의 초상화를 보고 그렸다는 겁니다.

                                         출처 :  http://blog.naver.com/kschan82/500037140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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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윤식 [, 1835~1922]

 

본관 청풍(). 자 순경(). 호 운양(). 1874년(고종 11) 문과에 급제하여 1881년 영선사(使)로 청()나라 톈진[]에 파견되었다가 이듬해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청군을 데리고 돌아왔다. 이 군란이 평정된 뒤에 신설된 군국사무아문()과 통상교섭사무아문()의 협판()이 되고 강화부유수()를 겸하여 강화에 진무영()을 설치, 신식 군대 800여 명을 양성했다.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위안스카이[]의 원군으로 김옥균() 일파를 제거, 병조판서가 되고 조로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자 1885년 거문도사건()을 처리하였다.

1887년
명성황후의 친러정책에 반대, 민영익()과 함께 대원군의 집권을 모의하다가 명성황후의 미움을 사서 면천()에 유배되었다.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나고, 갑오개혁이 시작된 이듬해 명성황후가 시해된 뒤 김홍집() 내각이 들어서자 외무대신이 되었다.

1896년 아관파천()으로 친러파 내각이 들어서자 명성황후 시해의 음모를 미리 알고도 방관했다는 탄핵받고, 이듬해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10년 후인 1907년 특사로 풀려났다. 1910년 대제학에 발탁되고 한일병합 조인에 가담하여 일본으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았으나, 흥사단() ·대동학회() ·기호학회()를 조직하고 대종교() 창시자 나철()을 원조, 그 교도가 되어 민족운동에 참여하였다.

3·1운동 때에는 이용직()과 함께 한국 독립의 청원서를 일본정부와 조선총독에 제출하여 작위를 삭탈당하고 3년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한말의 이름높은 석학()이자 문장가로 일본 학사원의 회원이었으며, 많은 저서를 남겼는데, 문집에 《운양집()》, 저서에 《천진담초()》 《음청사()》 등이 있다.

 

김윤식(金允植, 1835년~1922년)

        

1874년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로 합격하여 황해도 암행어사, 순천부사를 역임했다.

1881년(고종 18년) 영선사로 청나라에 파견됐다.

 

1882년 임오군란 때는 청나라에 원조를 요청하는 역할을 맡았으며, 흥선대원군의 집정을 배척하는 민씨 일파와 결탁하여 흥선대원군을 톈진으로 압송시키게 하였다. 1884년(고종 21년) 전권대사 자격으로 러시아와 통상조약을 체결했다. 1894년 갑오개혁 후 김홍집 내각의 외부대신이 되어 개혁 정치에 힘썼다.

 

1908년 중추원 의장을 역임했고, 한일 병합 조약 체결 후인 1910년 10월 16일 일본 정부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았으나,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한 혐의로 박탈당하였다. 한일 병합 당시 “불가불가”(不可不可)라는 모호한 표현으로 소극적인 반대를 표명했다. 당시 이용직과 함께 독립청원서를 작성해 보냈다가 작위를 박탈당하고 2개월 간 투옥되었다.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으나 85세의 고령임을 이유로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그 뒤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임하고 은거 생활에 들어갔다. 1916년 박제순의 뒤를 이어 경학원 대제학을 지낸 것 외에는 거의 외부 활동을 하지 않았다.

김윤식 사망 후에 사회장 문제를 둘러싸고 민족운동 진영이 분열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결코 그가 의도했던 바는 아니라는 견해가 있다.
 

 조선은행권 10원

 

 

 

  
낙엽따라 가버린사랑/섹스폰연주곡~

 
 찬바람이 싸늘하게 얼굴을 스치면
따스하던 너의 두 뺨이 몹시도 그립구나
푸르던 잎 단풍으로 곱게 곱게 물들어
그 잎새에 사랑의 꿈 고이 간직 하렸더니

아아아아 그 옛날이 너무도 그리워라
낙엽이 지면 꿈도 따라 가는 줄 왜 몰랐던가
사랑하는 이 마음을 어찌하오 어찌하오
너와 나의 사랑의 꿈 낙엽따라 가버렸으니

아아아아 그 옛날이 너무도 그리워라
낙엽이 지면 꿈도 따라 가는 줄 왜 몰랐던가
사랑하는 이 마음을 어찌하오 어찌하오

너와 나의 사랑의 꿈 낙엽따라 가버렸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