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회] |
▣방송 : 2008. 12. 13(토) 20:10~21:00 (KBS 1TV)
▣진행 : 한상권 아나운서
▣연출 : 손현철 PD
“신라 적선(賊船) 마흔다섯척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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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세기 신라해적에 관한 기록이 담겨 있는 부상략기> |
894년 대마도를 침공한 45척의 배! 그들의 정체는? |
894년 9월 5일. 정체불명의 배 45척이 대마도를 습격한다. 12일 후, 이들의 습격은 대규모 전투로 번지고 일본군의 포로가 된 신라인 현춘은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 |
“신라가 기근이 들고 창고가 텅 비어 왕성이 불안하니, 왕이 곡물과 천을 빼앗아 가져오라고 했다. 우리에게는 크고 작은 배가 100척이고 배에 탄 사람이 2500명이 있다” <부상략기 中> 한국의 역사서에는 한 번도 언급된 적 없었던 이름. 그들의 정체는 신라해적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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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해적이 노리는 대마도의 보물은 무엇이었나? |
포로로 잡힌 현춘의 증언에 의하면 그들은 기근으로 인해 곡식을 얻고자 대마도를 습격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대마도는 산세가 험난해 곡식 재배가 어려운 지역. 그렇다면 신라해적은 무엇 때문에 대마도를 침공했을까? 대마도는 농경에 불리한 지형이지만 고대에는 은과 진주가 많이 나는 지역이었다. 또한 삼림이 우거진 대마도는 삼나무와 같은 목재가 풍부하게 자라는 섬으로 이는 주요한 조선용 자재로 쓰였다. 이러한 점들로 인해 일본 조정에서는 일찍이 대마도 방위에 신경을 집중해왔었다. | |
<대마도 산출 은(銀)> |
<삼나무 등의 목재가 풍부한 대마도의 산> |
신라해적은 왜 퇴각했을까? |
적들은 모두 화살을 피해 도망쳐 돌아갔다” <부상략기 中> 45척이라는 거대한 규모로 대마도를 침공한 신라해적. 하지만 그들은 왜 그렇게 쉽게 퇴각해야했을까? 어떻게 일본조정에서는 대마도에 대한 방비를 철저하게 준비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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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해적들의 일본침공은 894년 처음 있었던 일이 아니었다. 869년 큐슈섬. 신라해적이 조공물을 약탈 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게다가 신라해적은 일본 통 치부의 외항에 대담하게 잠입. 조공으로 바쳐진 비 단을 탈취한다. 이후 일본 조정에서는 신라인에 대 한 경계를 강화하고, 은의 산출지인 대마도 역시 예 외는 아니었다. | ||
<활보다 살상력이 강한 장거리 공격용 무기 석궁(쇠뇌) 신라해적은 석궁의 공격을 받고 물러갔다> |
대규모 신라해적단, 그 배후는 누구인가? |
손에 넣은 물건 중에 대장군 깃발도 있었다” <부상략기 中> 해적단이 단순한 백성이나 민초들로 구성 됐다면 대장군과 부장군 같은 계급을 조직하기는 어려웠을 것. 그렇다면 해적단의 배후가 당시 신라호족으로 있던 장군이나 성주가 아닐까? 아니면 현춘의 증언대로 신라 본 조정에서 직접 파견한 군대일 가능성은 없는 것일까? 수천명의 조직을 가지고 있는 신라해적단, 배후에 관한 진실을 <역사추적>이 찾아 나선다. |
신라해적의 소멸-또 다른 시대를 열다! |
9세기 일본열도를 뒤흔들었던 신라해적. 하지만 이와 같은 해적들의 소행이 부정적 측면만을 갖는 것은 아니다. 장보고 사후, 신라와의 공적 교류를 중단했던 일본. 신라해적은 비정상적인 교역형태이지만 일본과 또 다른 교역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해상무역과 약탈을 통해 얻은 이익을 가지고 새로운 해상세력권으로 성장한다. 그리고 이들은 후삼국 시대를 여는 견훤이나 왕건 같은 세력에게 흡수된다. 신라해적은 한 시대의 종말과 새 시대의 개명을 여는 역사의 부산물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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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남해안과 당 일본과의 해상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해상호족 박영규의 근거지 마로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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