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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사 방/고구려,백제,신라

중국서 백제 의자왕 증손녀 부부 묘지명 발굴

by 연송 김환수 2008. 11. 14.


백제학회, 정기발표회서 사실 공개  '백제왕족, 당에서 왕비족으로' 기록 확보

  중국 당나라의 옛 도읍인 시안에서 발견된

                                                                                 백제  의자왕 증손녀의 묘지명


당 고 괵 왕비 부여 지 명  (*괵 : 남편이 왕으로 분봉된 지명) 

                    (오른쪽부터 아래로 읽으세요)

 

 당으로 끌려간 백제 의자왕의 증손녀의 묘지명이 당나라 옛 도읍 장안(長安)인 시안(西安)의 당 고조 이연(李淵.566-635)의 무덤인 헌릉(獻陵) 주변 도굴된 무덤에서 그의 남편 이옹(李邕) 묘지명과 함께 발견됐다. 이 묘지명은 2004년 조사에서 출토된 것으로 부여태비의 가계와 생애, 인품 등을 기록했다.

당으로 끌려간 백제 의자왕의 증손녀 묘지명과 함께 당나라 옛 도읍 장안(長安)인 시안(西安)의 당 고조 이연(李淵.566-635)의 무덤인 헌릉(獻陵) 주변 도굴된 무덤에서 같이 발견된 그의 남편 이옹(李邕) 묘지명. 이 묘지명은 2004년 조사에서 출토됐다 

 

 

 

당으로 끌려간 백제 의자왕의 증손녀 부부 묘지명이 중국 당나라 수도 시안(西安)에서 발견됐다.


백제학회(회장 양기석)가 15일 오후 충북대 인문대학 시청각실에서 '백제의 신출토 문자자료'를 주제로 개최하는 제1회 정기발표회를 통해 이 사실이 공개된다.


이 자리에서 백제 부흥운동사 전공인 김영관 청계천문화관장은 2004년 중국 산시(陝西)고고연구소가 시안 북쪽에 있는 당 고조 이연(李淵·566~635)의 무덤인 헌릉(獻陵) 주변의 도굴된 무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의자왕 증손녀인 부여태비(扶餘太妃)와 그의 남편인 이옹(李邕) 부부의 묘지명을 찾아냈다는 사실을 공개한다. 김 관장은 이 묘지(墓誌)에는 덮개돌이 별도로 있다고 말했다.


덮개돌은 가로 74cm, 세로 70cm, 두께 13cm로, '唐故괵王妃墓扶餘誌銘'(당고괵왕비묘부여지명)이라는 글자를 음각했다. '괵'이란 그의 남편 이옹이 왕으로 분봉을 받은 지명이다.


본문격인 묘지는 가로 74cm, 세로 70cm이며, 두께는 9cm로 표면을 연마해 광택을 냈다. 여기엔 총 831자에 이르는 문장을 해서로 음각해 새겼다.


김 관장은 이 묘지명에 기록된 내용을 통해 부여태비는 증조부가 의자왕이고 조부는 부여융이며, 아버지는 부여덕장이라는 사실과 함께 그가 당 황실 자제인 이옹과 혼인해 아들 다섯을 두었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부여태비는 이름은 알 수 없으나 이옹의 아들이 '괵왕'이라는 봉작을 이어받음에 따라 '괵왕태비(괵王太妃)가 되었음을 이 묘지명은 알려준다. 부여태비는 부여씨 성을 가진 왕의 어머니라는 뜻이다.


이로써 백제 왕족이 당에서 왕비족이 됐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직접적인 기록을 확보한 셈이라고 김 관장은 덧붙였다.


더불어 묘지명과 문헌기록을 분석한 결과 부여태비는 690년 의자왕의 손자인 부여덕장의 차녀로 태어나 711년 당의 황족인 이옹의 두 번째 부인으로 혼인해 괵왕비에 책봉되었으며, 727년 이옹이 먼저 세상을 뜨자 731년 태비로 책봉됐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연합뉴스

 / 입력시간: 2008. 11.14. 10:47

 

 

<의자왕 증손녀 남편은 "나쁜 남자야">

 

첫부인 효용상실하자 '헌신짝' 처분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중국에서 백제 의자왕의 증손녀인 부여태비(扶餘太妃) 묘지명이 남편 이옹(李邕)의 묘지명과 함께 같은 무덤에서 발굴되고 공개됨으로써 이 남편 또한 어떤 사람인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이옹은 당나라를 건국한 고조(高祖) 이연(李淵)의 증손자로서 당 황실 일원이며, 제후왕에까지 책봉된 적이 있는 까닭에 이번 묘지명 외에도 그의 족적은 다행하게도 문헌에서 제법 찾을 수 있다.

   이를 종합하면 이옹은 "나쁜 남자"라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는 출세와 위기 탈출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냉혈한이었다.

   먼저 출세를 위해서는 권력은 있으나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된 여인을 첫부인으로 맞아들이더니, 정국의 변화에 따라 이 여인이 효용 가치를 갑자기 상실하게 되자 가차없이 자기 손으로 부인의 목을 벤 인물로 기록됐기 때문이다.

   구당서(舊唐書) 중 고조 이연의 아들 22명과 그 후손의 행적을 정리한 항목에 의하면 이옹의 할아버지는 이연의 15번째 아들이자 '괵왕'에 책봉된 이봉(李鳳)이며, 아버지는 측천무후 집권 초반기에 조주자사(曺州刺史)를 역임한 이굉(李宏)이다.

   당시 당나라는 황제의 아들을 비롯한 황족들을 각 지역 제후왕(諸侯王)으로 책봉하는 소위 분봉제(分封制)를 가미해 지방을 다스렸으므로, 이렇게 분봉된 제후왕은 맏아들을 통해 계속 이어지는 것이 상례였다.

   이런 시스템 때문에 이옹의 직계 조상은 이미 셋째 아들인 아버지 때부터 '괵왕'이 될 수는 없었다.

   나아가 정국에서도 일대 변혁이 일어났다. 측천무후가 당 왕조를 단절시키고 주(周)라는 새로운 왕조를 만든 일이 발생한 것이다. 이를 통해 측천무후는 중국사에서는 전무후무한 여성 황제로 등극한 것이다.

   이렇게 되자 종래의 당 황실 친족들에게 대대적인 '과거사 청산' 바람이 몰아쳤다. 이 와중에 이옹의 사촌형으로서 괵왕이라는 제후왕으로 있던 이우(李寓)라는 사람 또한 688년에는 제후왕의 지위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이 기간에 이옹이 어떤 처지에 내몰렸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는 나날을 보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이씨 집안에 다시 서광이 찾아온다. 측천무후가 죽고 중종(中宗)이 황제에 복위하면서 당 황실이 부활한 것이다.

   이에 편승해 이옹 또한 큰집으로 넘어갔던 '괵왕'이란 제후왕 타이틀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데 성공한다.

   구당서에 수록된 그의 짧은 열전에서는 "이옹이 위서인(韋庶人)의 누이동생을 아내로 맞아들이니 이때부터 중종 시대에 남다른 총애를 입어 비서감(秘書監)이 되더니 갑자기 또 '괵광'으로 고쳐 책봉되어서는 (중앙정부와는 다른 별도의) 지방정부를 열고 관리까지 두었다"고 했다.

   위서인이라는 여자의 배경을 이용해 벼락출세했다는 뜻이다. 위서인은 글자 그대로는 위씨(韋氏) 성을 지닌 서인(평민여자)라는 의미지만 중종의 정비로서 권력을 한 손에 쥐고 휘둘렀던 위황후(韋皇后)를 말한다.

   이옹이 어떤 방식으로 위황후에게 접근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용케도 황후의 여동생과 인연이 닿아 그를 아내로까지 맞아들이는 데 성공했던 것이며 이를 발판으로 벼락출세의 가도를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행보에서 또 하나 주목되는 사실은 이 위황후의 여동생이 한 번 결혼한 적이 있는 '과부' 출신이라는 점이다.

   같은 구당서 중 외척(外戚) 일원인 위온(韋溫)이란 사람의 행적을 기록한 열전에 의하면 위황후의 여동생은 남편이 태상소경(太常少卿)이라는 벼슬까지 지낸 풍태화(馮太和)라는 사람이지만 남편이 죽자 이내 이옹에게 개가했다고 한다.

   이로 본다면 이옹은 출세를 위해 최고 권력자의 여동생으로서 과부가 된 위씨를 아내로 삼는 전략을 구사했던 것이다.

   이 위씨부인은 남편 풍태화의 생전에는 숭국부인(崇國夫人)이라고 불리면서 언니를 등에 업고 역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하지만 이옹에게 다시금 시련이 닥친다. 위황후가 얼마 뒤 실각하고 평민으로 쫓겨나 '위서인'(韋庶人)이 된 것이다. 이옹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사건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위황후 주변 인물들이 대거 숙청되는 마당에 그 일원인 그 자신은 자칫 생명까지 위태로울 수 있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내몰린 것이다.

   하지만 이옹은 이 위기를 실로 드라마틱한 기법으로 탈출하고자 한다.

   구당서 그의 열전에는 "(이옹이 괵왕에 책봉된 지) 한달 남짓만에 위씨(韋氏.위황후)가 실각하자 이옹은 칼을 빼어들고는 그 처(위씨부인)의 목을 베어서는 조종에다 바쳤다"고 했다.

   자신의 출세 도구였던 부인을 그냥 내친 것이 아니라, 아예 자기가 직접 죽이고, 그 목을 베어 조정에 받쳤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행태가 "당시 세상인심이 비루한 행동이라고 여긴 까닭에 (그는) 심주자사(沁州刺史)로 강등됐고 그 주(州)의 사무를 몰라 봉읍(封邑. 분봉받은 땅) 또한 삭감당했다"(구당서 이옹 열전)고 한다.

   그렇지만 이옹은 이번에도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선다.

   구당서 그의 열전에는 이옹이 "경운(景雲) 2년(711)에 다시 괵왕에 책봉되어 200호(戶)를 봉읍으로 하사받았으며 누차 승진하여 위위경(衛尉卿)이 되고 개원(開元) 15년(727)에 죽었다"고 했다.

   이로써 보면 의자왕의 증손녀인 부여태비는 이옹이 첫 부인인 위씨를 자기 손으로 죽여버린 뒤에 맞아들인 두번째 부인이 된다.

   그렇다면 이런 이옹의 행각이 부여태비 묘지명에는 어떻게 기록됐을까?
김영관 관장은 "뜻밖에도 묘지명에는 그런 내용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심지어 부여태비가 두번째 부인이라는 사실도 빠져 있다"고 전했다.

   다만, 그의 묘지명과 함께 발견된 이옹 자신의 묘지명에는 이에 대해 언급한 대목이 발견된다고 김 관장은 덧붙였다.




 

당나라 제1대. 고조태무황제高祖太武皇帝

                    566~635(618~626 재위)
 1. 휘 : 이연(李淵)
 2. 별칭 : 당국공(唐國公) → 황제(皇帝) → 태상황(太上皇)
 3. 연호 : 무덕(武德)
 4. 시호 : 신요대성대광황제(神堯大聖大光皇帝)
 5. 능호 : 헌릉(獻陵)

 

15남 괵왕 봉(虢王 鳳) : 미인 양씨 生

 1. 자 : 계성(季成)

 2. 별칭 : 빈왕(豳王) → 괵왕(虢王)

 3. 시호 : 괵장왕(虢莊王)

 4. 자녀(7남)

  * 평양군왕 익(平陽郡王 翼)

  * 3남 정양군공 굉(定襄郡工 宏)

  * 5남 동완군공 융(東莞郡公 融)

                                                                                                  

이연(당나라 1대황제) - 2. 이봉(곽장왕 15남) - 3. 이무융(조주자사 이굉 3남)   -  4. 이옹(괵왕 장남)

                                                                                                                                                  

의자왕 묘 (가묘)

백제의 마지막왕인 의자왕은 나라가 망한 후 당나라에 끌려가
7개월만에 죽었고 1930년이 넘어서야 중국에 있는 묘지의 흙을
가져다 능산리에 묘를 썼다고 한다.
망한 나라의 왕이라서 묘도 크지 않고...

 

 

 

 

백제 패망과 함께 당나라에 끌려가 비참한 최후를 마친 의자왕(義慈王.在位 641~660년)이 죽은 지 1천3백여년만에 영적(靈的) 보금자리를 갖게 됐다.

충남도와 부여군은 '백제 역사찾기' 사업의 하나로 9월 중 사적 14호인 부여 능산리고분군에 전문가 고증을 거쳐 의자왕과 그의 아들 부여융(扶餘隆)의 가묘(假墓)및 제단을 각각 설치하는 안장식을 갖는다.
부여군은 이를 위해 지난 10일 문화재청으로부터 능산리 고분군에 대한 '문화재 현상 변경' 허가를 얻었다.

이와 함께 오는 10월 부여에서 개최할 '제46회 백제문화제' 기간에는 의자왕 추모제를 연다. 의자왕에 대한 공식적인 첫 제사의식인 셈이다.

의자왕 묘에는 유병돈(兪炳敦)부여군수가 의자왕이 묻힌 것으로 추정되는 중국 허난(河南)성 뤄양(洛陽)시 베이망산(北邙山)에서 지난 4월 가져와 현재 고란사에 임시로 안치중인 영토(靈土)가 묻힌다.

또 부여융 묘에는 그의 묘지석(墓地石.가로 56.8㎝ⅹ세로 57.8㎝) 복제품이 매장된다. 묘지석은 지난 1920년 베이망산에서 출토돼 현재 진품이 허난성 카이펑(開封)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이번에 안치되는 복제품은 뤄양시가 지난해 5월 부여군에 기증한 것이다.

한편 충남도는 지난 95년 2월부터 의자왕 무덤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뤄양시 베이망산 일대에서 조사를 벌였으나 무덤을 찾지는 못했다.

의자왕은 백제가 신라.당나라 연합군과의 싸움에서 져 멸망(서기 660년)하자 당나라로 끌려가 숨진 뒤 뤄양시 베이망산 부근에 묻힌 것으로 '삼국사기' 등 각종 역사서에 기록돼 있다. 
 

 

 

 부여융 묘지석

 

 

[역사현장 탐사] 洛陽에 묻힌 고구려·백제 遺民들
 
洛陽市 동쪽 회맹진 뇌하촌 일대가 고구려·백제 遺民들의 집단 墓域인 듯
 
연개소문의 아들·손자·고손자, 부여융, 흑치상지 父子 등의 墓誌石 발견

申瀅植 상명大 초빙교수
1939년 충북 충주 출생. 서울大 사범대 역사학과 졸업. 단국大 문학박사. 성신女大 부교수, 이화女大 교수, 국사편찬위원, 한국고대사학회장, 백산학회장 역임. 저서 「신라사」, 「백제사」, 「고구려사」, 「신라통사」 등.

백제 의자왕의 묘를 찾아서

 연개소문 자손 무덤


  지난해 여름 필자는 趙富英(조부영·백제문화개발연구원 원장)·尹亨燮(윤형섭·前 교육부 장관)·金起燮(김기섭·역사박물관장)·徐程?(서정석·공주大 교수)·朴大在(박대재·국사편찬위원회)씨 등과 함께 洛陽市 회맹진 뇌하촌 일대를 찾았다. 10년 전 충남大 박물관 조사팀이 의자왕의 묘지로 생각했던 청선리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옛날 역대 帝王들이 묻혔던 명당 북망산 일대는 중국 홍위병의 亂과 개혁·개방 이후의 경제발전 과정에서 크게 훼손되어 옛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東西로 뻗어나간 고속도로를 남쪽에 두고 북망산(본래 이름은 邙山)은 무참히 찢기고 있었다. 농지로 바뀐 들판에는 무성한 잡초가 우거졌고, 여기저기 세워진 전자·식품공장은 변화된 중국의 단면을 보여 주고 있었다.
 
  드문드문 흩어져 있는 옛 무덤들이나, 석양을 받으며 기계 같은 몸짓으로 무술수련을 하는 소림사의 어린 스님들이 우리가 지금 서 있는 곳이 千年古都(천년고도) 洛陽임을 상기시켜 줄 뿐이었다. 우리는 백제 의자왕의 묘소를 찾지 못한 채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2005년 10월 「중국 洛陽(낙양·뤄양)에서 淵蓋蘇文(연개소문)과 그의 直系 후손들의 무덤이 발견됐다」는 보도가 있었다. 지난 여름 중국 길림성 사회과학원에서 발간한 「東北史地(동북사지)」에 『연개소문과 그 직계 후손들의 무덤이 洛陽에서 발견됐다』는 내용의 논문이 실렸다는 것이다.
 
  이들의 무덤이 발견됐다고 알려진 洛陽은 「洛陽의 紙價(지가)를 올린다」거나, 「낙양성 십리허에…」로 시작되는 옛 노래, 사람이 죽었을 때 「북망산 간다」고 하는 표현에서 보듯, 우리에게는 상당히 귀에 익은 이름이다.
 
  洛陽은 黃河(황하) 중류의 북위 35도 선상의 古都로 우리나라의 광주·부산, 일본의 교토(京都)·오사카(大阪)와 같은 위도上에 있다.
 
  洛陽은 洛水(낙수: 黃河의 支流)를 남쪽의 垓字(해자)로 하고, 북쪽의 邙山(망산)을 방어벽으로 한 천혜의 요지다. 西安(서안·시안) 다음으로 여러 왕조의 수도였던 중국문명의 요람지였다.
 
  洛陽은 BC 21세기경 夏왕조가 도읍을 정한 이후 商·西周·東周·後漢·曹魏·西晉·北魏·隋·唐·後粱·後唐·後晉까지 13개 왕조 1300여 년간 正都(정도) 혹은 副都(부도)로 중국의 정치·문화의 중심지였다.
 
 
  『살아서는 蘇州·杭州, 죽어서는 北邙』
 
연개소문.

  洛陽은 中原의 首府로서 방어에 유리하고, 빼어난 풍치, 교통의 요충지로서 산세가 좋기 때문에 역대 제왕의 묘장지가 되었다. 여기서 「살아서는 蘇州(소주)·杭州(항주)요, 죽어서는 北邙(북망)」이라는 속담이 나왔다.
 
  흔히 사람이 죽는 것을 「북망산 간다」고 하는데, 北邙山은 洛陽 북쪽에 있는 邙山을 가리킨다.
 
  唐나라의 수도 혹은 副都였던 洛陽에서는 고구려나 백제 遺民(유민)들의 무덤이나 墓誌(묘지)도 다수 발견되었다. 현재까지 이곳에 묻혀 있었음이 墓誌銘(묘지명)을 통해 확인된 인물은 백제 의자왕의 아들 隆(융), 고구려 연개소문의 장남인 泉男生(천남생: 중국 史書에서는 唐高祖 李淵의 이름자를 피해 「泉」으로 표기), 남생의 아들 獻誠(헌성), 헌성의 손자 泉毖(천비), 남생의 동생 男産(남산), 黑齒常之(흑치상지)- 黑齒俊(흑치준) 父子 등을 비롯해 보장왕의 손자 高震(고진), 고구려 귀족 高慈(고자) 등이다.
 
  隆(615~682)은 660년 백제가 멸망하자 父王과 함께 唐으로 끌려갔다. 이때 唐으로 끌려간 백제인들은 고위층 인사 88명 등 1만2000명이었다. 이후 그는 唐의 벼슬을 받고 귀국해 백제부흥운동軍을 이끌던 동생 豊(풍)과 대결했다.
 
  663년 倭(왜)의 지원을 받는 부흥軍이 패퇴한 후, 항복한 흑치상지와 함께 入唐했다. 665년에 唐의 웅진도독·백제국왕으로 다시 입국해 文武王과 會盟(회맹)을 가졌다. 신라가 백제 古土에 所夫里州(소부리주)를 설치해 백제 古土의 지배권이 신라에게 돌아가자 唐으로 돌아가 명목상의 백제도독으로 生을 마감했다.
 
 
  연개소문 후손들의 墓誌石
 
부여융 묘지석.

  현재 하남성 박물원에 보존된 「부여융 墓誌」는 「천남생 墓誌」와 나란히 양지바른 복도에 남아 있다. 가로·세로 58cm의 검은색 돌에 새긴 669字(26行×27字)의 내용은 그의 家系(가계)와 관직, 성품·생애·업적, 그리고 그의 일생을 칭송한 내용으로 되어 있다.
 
  墓誌는 그를 「河伯의 자손」이라고 칭하면서, 「어질고 후덕함이 풍속을 이루어 중국 역사에서도 빛을 발했고, 충성과 효성으로 이름을 날려 밝게 빛이 났다. 신중함으로 몸을 닦았고, 선한 것을 택해서 행했으며, 의로운 것이 있으면 능히 이를 본받았다」고 찬양하고 있다.
 
  연개소문의 장남 泉男生(634~679)의 墓誌도 확인됐다. 그는 665년(보장왕 24)에 연개소문 死後 大莫離支(대막리지)가 되었다가 동생들에 의해 권좌에서 밀려나자 唐나라에 붙어 고구려 정벌에 협력했다.
 
  679년(의봉 4)에 만들어진 泉男生의 묘지석은 북망산에서 출토되었다. 묘지석은 90cm(가로·세로)로 2162字(46行×47字)의 내용은 관작·생애·가문의 성격·그의 官曆(관력)·투항동기(고구려 내분)·고구려의 멸망 과정 및 장례 등에 대한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 묘지석은 그가 唐軍의 고구려 침략에 협력한 부분에 대해 「바람처럼 달리며 번개같이 내쳐 평양성을 공격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연개소문의 셋째 아들인 男産, 泉男生의 아들 천헌성, 천헌성의 손자인 천비의 묘지명도 발견되었다. 22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한 천비의 묘지석은 그의 아버지 泉隱(천은)이 지은 것이다. 625字(25行×25字)의 정서체로 쓰인 이 묘지석에는 자식을 잃은 아비의 비통함이 잘 나타나 있다.
 
  <하늘의 푸르고 푸르름이여 그 색깔 바르구나./인간의 무한함과 능력의 무궁함을 누가 알리요./움직이는 생명체여 태어나면 늙는 법이고,/병들면 죽는다는 것은 운명의 장난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요./이제 끝이 났구나. 육체는 허공으로 돌아가니/타고난 운명 누가 알리요>
 

 
  흑치상지 父子의 墓誌石
 
  흑치상지의 묘지석은 1929년 邙山에서 아들 흑치준의 것과 함께 발견됐다. 현재 남경박물원에 소장되어 있는 묘지는 가로 71cm, 세로 72cm의 크기로 1604字(41行×41字)의 楷書(해서·구양순체)로 되어 있다.
 
  백제의 遺將(유장) 흑치상지는 任存城(임존성: 현재 예산군 대흥면 봉수산)을 중심으로 백제부흥軍을 이끌다가 唐軍에 투항했다. 入唐한 후 突闕(돌궐) 정벌에 큰 功을 세웠으나, 趙懷節(조회절)의 모함으로 처형되었다.
 
  흑치상지의 묘지석은 「어려서부터 품성이 고상하고 기질과 정기가 민첩하고 뛰어났으니 가벼이 여기는 것은 욕심과 욕망이었고, 중하게 여기는 것은 명예와 배움이었다」고 적고 있다.
 
  이 묘지석에는 「(흑치상지는) 부여씨에서 나와 흑치국에 봉해졌다」는 記述이 있어 눈길을 끈다.
 
  흑치국의 위치에 대해서는 서해안 지역(백제 서부, 「唐書」)이라는 주장에서부터 필리핀 일대, 통킹灣(베트남, 북동부해안) 연안으로부터 종국의 廣西 서남방 지역(해남도 포함)이라는 주장까지 다양하다. 蘇鎭轍(소진철) 원광大 교수는 중국 廣西壯族自治區(광서장족자치구)의 百濟鄕(백제향)을 흑치국이라고 보면서, 이를 백제의 侯國(후국) 또는 附庸國(부용국)으로 해석한다. 학계에서는 흑치국의 존재를 거점지역에 왕족을 파견해 통치하게 하는 擔魯制(담로제)와 연결시켜 해석하기도 한다.
 
  흑치상지의 아들 흑치준의 묘지명에는 그가 살고 있던 곳(洛陽縣 徒善坊)이 명기되어 있으며, 「반드시 지정된 장소에 매장하는 것이 禮(예)이다」라고 적혀 있다. 이는 唐으로 들어간 고구려나 백제의 왕족·귀족들이 특정한 묘역에 집중적으로 매장되어 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會盟津 雷河村 일대가 고구려·백제 遺民 묘역으로 추정
 
  지금까지 발견된 묘지명에서 밝혀진 고구려·백제人들의 매장처를 정리하면 표와 같다.
 
  표에서 알 수 있듯이 唐으로 끌려간 고구려·백제 귀족들은 洛陽의 일정한 장소에 거주했고, 또 죽으면 지정된 장소에 묻혔던 것이다. 오래 전에 충남大(박물관)의 현지조사를 토대로 볼 때 洛陽市 동쪽지역인 會盟津(회맹진) 雷河村(뇌하촌) 일대가 고구려·백제人 묘역일 가능성이 크다.
 
  대개의 묘지명에 濱海之東(빈해지동), 海東(해동) 등의 표현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洛陽市의 동쪽인 회맹진과 언사市 일대가 이들 고구려·백제人에게는 적절한 지역이 될 것이다. 의자왕이 묻힌 곳도 이 일대라고 추정된다. ●


[제5회]
1300년 만에 밝혀진
의자왕 항복의 비밀


▣방송 : 2008. 12. 20 (토) 20:10~21:00 (KBS 1TV)
▣진행 : 한상권 아나운서
▣연출.글 : 류지열 PD

의자왕,

그는 역사에서 삼천궁녀로 유명하다.
그러나 1300년 만에 발견된 예식진 묘지명.
의자왕 항복의 비밀을 말하는데.

▲ 예식진 묘지명


백제 멸망에 관한 비밀을 간직한 예식진 묘지명.
그‘진실’은 무엇인가?


KBS 역사추적팀이 최초로 발굴한 예식진 묘지명.
중국 낙양의 고 미술가에서 백제와 관련된 주요 유물 한 점이 발견된다. 비의 주인공은 예식진. 그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백제 웅진 출신의 최고 직위인 좌평을 지낸 백제의 유력가문 출신이다. 또한 백제 금석문의 경우, ‘숫자’가 귀한데 그 정보가 대단히 구체적이라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금석문의 발견인 것이다. 묘비에 새겨진 대당좌위위대장군, 백제웅천인, 좌평 집안이라는 예식진에 대해 알려주는 몇 가지 글자. KBS 취재진은 직접 중국에 가서 예식진 묘지명을 수소문 끝에 취재하고 이 탁본을 국내 최초로 입수했다.
▲ 예식진 묘지명의 탁본


예식진은 누구인가?
백제는 부여, 사, 진, 해, 협, 목, 국, 백씨 등 백제 8대성이 백제의 최고 지배층이라고 역사서에 적혀있다. 그러나 대대로 좌평을 지냈다는 예씨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비는 예씨가 대당좌위위대장군이란 정삼품의 고위직을 지낸 백제의 유력 가문임을 말해주고 있다. 이 말은 즉 이 비가 백제 지배층을 연구하는데 큰 가치가 있는 유물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역사서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 예식진이라는 이름. 그러나 우리는 ‘예식’에 관한 유일한 역사적 기록을 볼 수 있다.
▲ 신당서

“웅진성에서 그 장군 예식이 의자와 함께 항복하였다.”-<신당서 소정방전>
 
예식진과 예식. 이 둘은 가문 출신지 직위 활동기간 등이 동일인이라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너무나 일치한다. 약간씩 다른 이름은 단지 표기상의 문제일 뿐이라는 사실이 사료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즉, 예식진은 백제의 마지막 왕 의자왕과 함께 있었던 웅진의 예식 장군임을 알 수 있다.


예식진. 그의 공적은?
▲예식진 묘지명의 뚜껑 탁본

최고귀족층이면서 역사서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 예씨 가문의 비밀! 이것은 뭘 의미하는 것일까? 흑치상지. 백제 패망 후 당에 들어와 예식진과 비슷한 좌위위대장군을 지낸 당나라 명장이다. 그의 묘지명에도 증조부부터 집안 내력이 적혀있다. 그런데 예식진 묘지명의 경우 그의 조부부터 시작했다. 왜 그런 것일까? 그것은 예씨 집안이 조부 예다 때부터 중앙관직에 진출했기 때문이다. 예식진은 백제에서 웅진성의 예씨 집안 고위 장군 출신이었지만, 당나라의 무장으로 출세하게 된다. 그 비결은 과연 무엇인가?


예식진 출세의 비결은 하극상?
▲백제오천결사대출정상(황산벌 전투)

其大將?植 又
義慈來降(기대장예식 우의자래항)-구당서

: 그 대장 예식이 의자왕을 거느리고 항복하게 하였다.

-
(장):데리고 가다. 체포해 가다.

즉, 부하인 예식이 왕을 잡아서 투항했다는 의미이다. 부하의 쿠데타, 즉 하극상인 것이다.

예식진 묘지명에 나타나 있는 내용은, 백제 멸망과 관련해 격동의 시대 민첩하게 주군을 바꾸는 예식진의 모습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점풍이역 취일장안

위에 있는 모든 사료는 바로 의자왕의 충복, ‘예식진’이 출세한 내력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의 당나라에서의 출세는 백제의 멸망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쿠데타를 통해 주군을 배신하고 당을 등에 업은 예식진의 행적이 묘지명에 암호처럼 새겨져 있다. 1300년 만에 발굴된 묘지명은 그래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망국 유민의 비극..백제 고관 예식진 묘지석>
[연합뉴스 2007-05-31 15:40]


고구려 유민집단 위무임무 수행하다 객사한 듯

서기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한 후 당나라에 포로로 끌려간 후, 적이었던 당나라 조정의 최고위급 경비부대장으로 활동하다 객사한 백제인 예식진(예<示변에 爾>寔進)의 묘지석 발굴은 다시 한번 망국민의 비극을 되씹어 보게 하고 있다.

 

예식진의 묘지석은 백제 마지막왕인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夫餘隆), 백제 부흥운동을 이끌던 장군 흑치상지(黑齒常之), 그의 아들 흑치준(黑齒俊), 난원경(難元慶), 노정빈(盧庭賓)으로도 알려진 낙사계(諾思計)에 이어 백제 유민의 것으로서는 여섯 번째로 발굴된 백제 유민의 묘지석이다.

 

백제 멸망 8년 후인 668년 역시 나당연합군의 공세로 멸망한 고구려 유민들의 묘지석으로는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아들인 남생(南生)과 남산(南産), 남생의 아들 헌성(獻誠), 헌성의 손자 비(琵) 등의 것이 발굴된 바 있다

뤄양(洛陽)대학 둥옌서우(董延壽) 교수와 뤄양고대예술관 자오전화(趙振華) 부연구원은 지린(吉林)성에서 발간되는 격월간 역사잡지 동북사지(東北史地) 2007년 3-4월호에 실린 '뤄양, 루산(魯山), 시안(西安)에서 출토된 당대(唐代) 백제인 묘지 탐색'이라는 논문을 통해 예식진의 묘지석을 처음 소개했다.

 

◇ 묘지명의 제원

푸른 색깔을 띤 응회암으로 만들어진 정사각형의 묘지석 두껑은 한 변의 길이가 57㎝, 두께가 15㎝ 크기로 그 위에 전서(篆書體)로 '대당고좌위위대장군예식진묘지지명(大唐故左威衛大長軍예<示변에 爾>寔進墓誌之銘)'이라는 16자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역시 정사각형에 한 변의 길이 58.5㎝, 두께 13㎝인 묘지석에는 한 줄에 18자씩, 18줄에 걸쳐 모두 288자의 해서체(諧書體) 글씨가 새겨져 있고, 4개 측면에는 12간지를 상징하는 동물들이 음각돼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동북사지에 실린 예식진의 묘지석 두껑과 묘지석 탁본 사진은 이와 함께 게재된 부여융, 흑치상지, 흑치준, 난원경, 낙사계의 그것에 비해 훨씬 글씨가 선명해 사진만으로도 그 내용을 쉽게 알아 볼 수 있을 정도다.

 

◇ 예식진은 누구

묘지 전문(全文) 내용과 두 저자의 분석 등을 종합해 보면, 백제 웅천(熊川. 현재의 공주) 사람인 예식진은 백제의 고위무관으로 있으면서 조정 안팎에서 이름을 떨친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대를 이어 백제 조정의 장관급 고위관리인 좌평(佐平)을 지냈고, 그도 고위관직에 올랐으나 46세 때인 660년 백제가 멸망하면서 포로가 돼 당시 당나라 수도였던 장안(長安)으로 끌려 간다. 의자왕과 그의 아들 부여융을 비롯한 58명의 백제 왕족.고관.장수 등이 당나라에 포로로 끌려가 황제에게 항복의 예를 갖추었고 그들중 '예식(예<示변에 爾>植)'이라는 인물이 포함돼 있었다는 '구당서(舊唐書)', '책부원구(冊府元龜)' 등의 기록으로 보아 예식진이 바로 예식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묘지에 나타나는 그에 대한 평가로 보아 당나라 조정은 고위관직을 지낸 다른 백제 유민들이나 고구려 유민들의 예처럼 포로로 끌려온 그를 귀순시켜 조정 경비임무를 맡긴 후 그의 능력과 자질을 높이 평가, 최고위급 경비부대장으로 승진시켰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당나라로 끌려간지 12년 만인 672년, 예식진은 현재의 산둥(山東)성 옌타이(煙臺)시 산하 룽커우(龍口)시인 래주(來州) 황현(黃縣)에서 58세를 일기로 사망했다고 묘지에 기록돼 있으나 왜 그가 거주지인 시안이 아니라 황현에서 사망했는 지에는 언급이 없다.

 

이에 대해 두 저자는 4년 전(668년)의 고구려 멸망 후 "이 지역에 안치된 고구려 유민집단을 위무하기 위해 그들과 언어가 통하는 그를 임시차사로 파견한 것은 아닐까"라는 견해를 표시하고 사망 원인은 추측에 맡길 수 밖에 없다고 밝혔다. 당나라 조정은 예식진의 사망보고를 받은 후 조서를 내려 유해를 시안으로 운구토록해 관청에서 주관하는 장례절차를 치른 다음 당나라 고관대작들이 밀집해 있는 고양원(高陽原)에 장사함으로써 극진한 예우를 했다는 것이 두 저자의 평가다.

 

◇ 국내 전문가 평가

경북대 역사교육학과 이문기 교수는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이 자료가 아직 국내에 알려진 바 없는, 새로 출토된 당나라 백제유민 관련 묘지"라고 확인하고 "바로 이 점만으로도 그 가치가 있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이어 "예식진의 묘지를 통해 백제시대 최고의 유력 귀족가문으로 좌평을 역임해 온 예씨가 존재했음을 알게 됐다"면서 "(지금까지 널리 알려진) 흑치상지의 선대는 대대로 좌평보다 한 단계 아래인 달솔(達率)을 역임했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자료 빈곤으로 백제사 연구의 많은 부분이 공백으로 남아 있는 터에 예식진 묘지는 앞으로 연구에 따라 백제사의 해명과 백제 멸망 후 그 유민들의 동향 등 여러 문제를 밝힐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중국 문물당국이 분명한 출토 지점과 시기, 발굴자 등 고고학적 기초자료를 공개하는 동시에 학계가 실물을 확인하고 정밀한 묘지 내용을 판독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망국 백제 고위관리 묘지석 1천300여년 만에 찾았다
[연합뉴스 2007-05-31 15:40]
 
중국 시안서..唐조정 최고위급 경비부대장 '예식진' ,
의자왕.부여융처럼 포로로 끌려간 후 고위직에 올라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하면서 포로로 당나라에 끌려간 후 전향해 높은 벼슬을 지낸 한 백제 고관의 묘지석(墓誌石)이 타계 1천300여년 만에 당나라의 수도였던 산시(陝西)성 시안(西安)에서 출토됐다.

지난해 출토된 것으로 보이는 이 묘지석의 주인공은 백제 고위무관 출신인 '예식진(예<示변에 爾>寔進)'이라는 인물로 당나라 조정에서 최고위급 경비부대장을 지냈고,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백제의 정1품 관직인 좌평(佐平.장관급)이었다. 당나라로 끌려간 백제 왕족 및 고관.장수들로서 그 묘지석이 중국에서 발견된 인물은 백제 마지막왕인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夫餘隆), 흑치상지(黑齒常之), 흑치준(黑齒俊), 난원경(難元慶), 낙사계(諾思計)에 이어 예식진이 여섯 번째다.

 

중국 지린(吉林)성에서 발간되는 격월간 역사잡지 동북사지(東北史地) 최근호는 이 같은 내용이 포함된 '뤄양(洛陽), 루산(魯山), 시안에서 출토된 당대 백제인 묘지 탐색'이라는 뤄양대학 둥옌서우(董延壽) 교수와 뤄양고대예술관 자오전화(趙振華) 부연구원의 공동집필 논문을 게재했다. 이 논문에 전문이 인용된 묘지의 내용에 따르면, 예식진은 원래 백제 웅천(熊川.현재의 충남 공주) 사람으로서 관직이 당나라 조정의 최고위급 경비부대장인 '좌위위대장군(左威衛大將軍)'에 올랐고, 할아버지는 좌평 예다(藝多), 아버지는 좌평 사선(思善)이었다. 그는 백제와 고구려를 잇달아 멸망케 한 당 고종 통치시기인 서기 672년(咸亨 3년) 5월25일 현재의 산둥성 옌타이(煙臺)시 룽커우(龍口)인 내주(來州) 황현(黃縣)에서 58세를 일기로 사망했으며, 황제의 명령에 따라 그해 11월21일 유해가 시안으로 운구돼 고관들이 묻히는 고양원(高陽原)에 안장됐다.

 

앞서 언급한 논문의 저자들은 묘지에 기재된 내용과 기존의 역사서 등을 토대로 예식진이 서기 660년 백제 멸망 후 의자왕, 부여융 및 기타 왕족.대신.장수 등과 함께 포로가 돼 당나라에 끌려간 후 전향해 관직을 수여받은 것으로 추정했다. 이들은 백제 멸망 연도, 예식진의 향년 등으로 미루어 그가 46세 때 당나라에 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그의 사망 장소가 현재의 산둥성인 이유에 대해서는 "조정이 서기 668년 고구려 멸망 후 끌려온 유민들을 안무하기 위해 그를 파견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묘지의 전문을 검토한 경북대 역사교육학과 이문기 교수는 "새로운 백제 유민 관련 자료가 발견됐다는 점에서 상당한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면서 "앞으로의 연구에 따라 백제사의 해명과 백제 멸망 후 그 유민들의 동향 등 여러 문제를 밝힐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논문 저자들은 서두에서 "2006년 뤄양의 한 시장에, 시안에서 출토된 예식진의 묘지석이 나타났다...묘지석이 출토된 지역은 (시안시 창안<長安>구의) 궈두전(郭杜鎭)일 가능성이 크다"는 식으로모호하게 언급, 정확한 출토 시기와 지점, 발굴자는 물론 보관처조차 밝히지 않았다.

 

한 저자는 연합뉴스와의 전화통화에서 "우리도 다른 곳에 나와 있는 것을 보고 논문을 썼다. 아마도 작년에 출토됐을 것이다. 보관처는 모른다"는 말로 일관해 중국 문물당국이 아직은 이 묘지명의 공식적인 대외공개를 꺼려하고 있지 않나 하는 의혹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망국 유민의 비극..백제 고관 예식진 묘지석>
[연합뉴스 2007-05-31 15:40]


백제유민 묘지석,
고구려 유민집단 위무임무 수행하다 객사한 듯

 

서기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한 후 당나라에 포로로 끌려간 후, 적이었던 당나라 조정의 최고위급 경비부대장으로 활동하다 객사한 백제인 예식진(예<示변에 爾>寔進)의 묘지석 발굴은 다시 한번 망국민의 비극을 되씹어 보게 하고 있다. 예식진의 묘지석은 백제 마지막왕인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夫餘隆), 백제 부흥운동을 이끌던 장군 흑치상지(黑齒常之), 그의 아들 흑치준(黑齒俊), 난원경(難元慶), 노정빈(盧庭賓)으로도 알려진 낙사계(諾思計)에 이어 백제 유민의 것으로서는 여섯 번째로 발굴된 백제 유민의 묘지석이다. 백제 멸망 8년 후인 668년 역시 나당연합군의 공세로 멸망한 고구려 유민들의 묘지석으로는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아들인 남생(南生)과 남산(南産), 남생의 아들 헌성(獻誠), 헌성의 손자 비(琵) 등의 것이 발굴된 바 있다. 

뤄양(洛陽)대학 둥옌서우(董延壽) 교수와 뤄양고대예술관 자오전화(趙振華) 부연구원은 지린(吉林)성에서 발간되는 격월간 역사잡지 동북사지(東北史地) 2007년 3-4월호에 실린 '뤄양, 루산(魯山), 시안(西安)에서 출토된 당대(唐代) 백제인 묘지 탐색'이라는 논문을 통해 예식진의 묘지석을 처음 소개했다.

 

 

 

◇ 묘지명의 제원

푸른 색깔을 띤 응회암으로 만들어진 정사각형의 묘지석 두껑은 한 변의 길이가 57㎝, 두께가 15㎝ 크기로 그 위에 전서(篆書體)로 '대당고좌위위대장군예식진묘지지명(大唐故左威衛大長軍예<示변에 爾>寔進墓誌之銘)'이라는 16자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역시 정사각형에 한 변의 길이 58.5㎝, 두께 13㎝인 묘지석에는 한 줄에 18자씩, 18줄에 걸쳐 모두 288자의 해서체(諧書體) 글씨가 새겨져 있고, 4개 측면에는 12간지를 상징하는 동물들이 음각돼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동북사지에 실린 예식진의 묘지석 두껑과 묘지석 탁본 사진은 이와 함께 게재된 부여융, 흑치상지, 흑치준, 난원경, 낙사계의 그것에 비해 훨씬 글씨가 선명해 사진만으로도 그 내용을 쉽게 알아 볼 수 있을 정도다.

 

◇ 예식진은 누구

묘지 전문(全文) 내용과 두 저자의 분석 등을 종합해 보면, 백제 웅천(熊川. 현재의 공주) 사람인 예식진은 백제의 고위무관으로 있으면서 조정 안팎에서 이름을 떨친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대를 이어 백제 조정의 장관급 고위관리인 좌평(佐平)을 지냈고, 그도 고위관직에 올랐으나 46세 때인 660년 백제가 멸망하면서 포로가 돼 당시 당나라 수도였던 장안(長安)으로 끌려 간다.  의자왕과 그의 아들 부여융을 비롯한 58명의 백제 왕족.고관.장수 등이 당나라에 포로로 끌려가 황제에게 항복의 예를 갖추었고 그들중 '예식(예<示변에 爾>植)'이라는 인물이 포함돼 있었다는 '구당서(舊唐書)', '책부원구(冊府元龜)' 등의 기록으로 보아 예식진이 바로 예식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묘지에 나타나는 그에 대한 평가로 보아 당나라 조정은 고위관직을 지낸 다른 백제 유민들이나 고구려 유민들의 예처럼 포로로 끌려온 그를 귀순시켜 조정 경비임무를 맡긴 후 그의 능력과 자질을 높이 평가, 최고위급 경비부대장으로 승진시켰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당나라로 끌려간지 12년 만인 672년, 예식진은 현재의 산둥(山東)성 옌타이(煙臺)시 산하 룽커우(龍口)시인 래주(來州) 황현(黃縣)에서 58세를 일기로 사망했다고 묘지에 기록돼 있으나 왜 그가 거주지인 시안이 아니라 황현에서 사망했는 지에는 언급이 없다.

이에 대해 두 저자는 4년 전(668년)의 고구려 멸망 후 "이 지역에 안치된 고구려 유민집단을 위무하기 위해 그들과 언어가 통하는 그를 임시차사로 파견한 것은 아닐까"라는 견해를 표시하고 사망 원인은 추측에 맡길 수 밖에 없다고 밝혔다. 당나라 조정은 예식진의 사망보고를 받은 후 조서를 내려 유해를 시안으로 운구토록해 관청에서 주관하는 장례절차를 치른 다음 당나라 고관대작들이 밀집해 있는 고양원(高陽原)에 장사함으로써 극진한 예우를 했다는 것이 두 저자의 평가다.

 

◇ 국내 전문가 평가

경북대 역사교육학과 이문기 교수는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이 자료가 아직 국내에 알려진 바 없는, 새로 출토된 당나라 백제유민 관련 묘지"라고 확인하고 "바로 이 점만으로도 그 가치가 있다"고 밝혔다.


백제유민 묘지석

이 교수는 이어 "예식진의 묘지를 통해 백제시대 최고의 유력 귀족가문으로 좌평을 역임해 온 예씨가 존재했음을 알게 됐다"면서 "(지금까지 널리 알려진) 흑치상지의 선대는 대대로 좌평보다 한 단계 아래인 달솔(達率)을 역임했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자료 빈곤으로 백제사 연구의 많은 부분이 공백으로 남아 있는 터에 예식진 묘지는 앞으로 연구에 따라 백제사의 해명과 백제 멸망 후 그 유민들의 동향 등 여러 문제를 밝힐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중국 문물당국이 분명한 출토 지점과 시기, 발굴자 등 고고학적 기초자료를 공개하는 동시에 학계가 실물을 확인하고 정밀한 묘지 내용을 판독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망국 백제 고위관리 묘지석 1천300여년 만에 찾았다
[연합뉴스 2007-05-31 15:40]

 

백제유민 묘지석, 중국 시안서..唐조정 최고위급 경비부대장 '예식진' , 의자왕.부여융처럼 포로로 끌려간 후 고위직에 올라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하면서 포로로 당나라에 끌려간 후 전향해 높은 벼슬을 지낸 한 백제 고관의 묘지석(墓誌石)이 타계 1천300여년 만에 당나라의 수도였던 산시(陝西)성 시안(西安)에서 출토됐다. 지난해 출토된 것으로 보이는 이 묘지석의 주인공은 백제 고위무관 출신인 '예식진(예<示변에 爾>寔進)'이라는 인물로 당나라 조정에서 최고위급 경비부대장을 지냈고,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백제의 정1품 관직인 좌평(佐平.장관급)이었다.

 

당나라로 끌려간 백제 왕족 및 고관.장수들로서 그 묘지석이 중국에서 발견된 인물은 백제 마지막왕인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夫餘隆), 흑치상지(黑齒常之), 흑치준(黑齒俊), 난원경(難元慶), 낙사계(諾思計)에 이어 예식진이 여섯 번째다.

 

중국 지린(吉林)성에서 발간되는 격월간 역사잡지 동북사지(東北史地) 최근호는 이 같은 내용이 포함된 '뤄양(洛陽), 루산(魯山), 시안에서 출토된 당대 백제인 묘지 탐색'이라는 뤄양대학 둥옌서우(董延壽) 교수와 뤄양고대예술관 자오전화(趙振華) 부연구원의 공동집필 논문을 게재했다.

 

이 논문에 전문이 인용된 묘지의 내용에 따르면, 예식진은 원래 백제 웅천(熊川.현재의 충남 공주) 사람으로서 관직이 당나라 조정의 최고위급 경비부대장인 '좌위위대장군(左威衛大將軍)'에 올랐고, 할아버지는 좌평 예다(藝多), 아버지는 좌평 사선(思善)이었다. 그는 백제와 고구려를 잇달아 멸망케 한 당 고종 통치시기인 서기 672년(咸亨 3년) 5월25일 현재의 산둥성 옌타이(煙臺)시 룽커우(龍口)인 내주(來州) 황현(黃縣)에서 58세를 일기로 사망했으며, 황제의 명령에 따라 그해 11월21일 유해가 시안으로 운구돼 고관들이 묻히는 고양원(高陽原)에 안장됐다.

앞서 언급한 논문의 저자들은 묘지에 기재된 내용과 기존의 역사서 등을 토대로 예식진이 서기 660년 백제 멸망 후 의자왕, 부여융 및 기타 왕족.대신.장수 등과 함께 포로가 돼 당나라에 끌려간 후 전향해 관직을 수여받은 것으로 추정했다. 이들은 백제 멸망 연도, 예식진의 향년 등으로 미루어 그가 46세 때 당나라에 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그의 사망 장소가 현재의 산둥성인 이유에 대해서는 "조정이 서기 668년 고구려 멸망 후 끌려온 유민들을 안무하기 위해 그를 파견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묘지의 전문을 검토한 경북대 역사교육학과 이문기 교수는 "새로운 백제 유민 관련 자료가 발견됐다는 점에서 상당한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면서 "앞으로의 연구에 따라 백제사의 해명과 백제 멸망 후 그 유민들의 동향 등 여러 문제를 밝힐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논문 저자들은 서두에서 "2006년 뤄양의 한 시장에, 시안에서 출토된 예식진의 묘지석이 나타났다...묘지석이 출토된 지역은 (시안시 창안<長安>구의) 궈두전(郭杜鎭)일 가능성이 크다"는 식으로모호하게 언급, 정확한 출토 시기와 지점, 발굴자는 물론 보관처조차 밝히지 않았다. 한 저자는 연합뉴스와의 전화통화에서 "우리도 다른 곳에 나와 있는 것을 보고 논문을 썼다. 아마도 작년에 출토됐을 것이다. 보관처는 모른다"는 말로 일관해 중국 문물당국이 아직은 이 묘지명의 공식적인 대외공개를 꺼려하고 있지 않나 하는 의혹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백제유민 묘지석
[연합뉴스 2007-05-31 16:35]

 

지난해 중국 시안(西安)에서 출토된 것으로 알려진 백제 고관 예식진의 묘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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