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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사 방/고구려,백제,신라

삼족오

by 연송 김환수 2008. 4. 20.
태양의 새 三足烏
 

 1999년 김대중 정부시절에 만든 ‘3호 봉황국새’에 금이 갔다는 감사원의 발표 이후 한때  국새손잡이에 이 ‘삼족오’를 새기자는 집중적으로 제기되었다. 또 최근 각종 고구려 관련 드라마가 나오면서 삼족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이런 추세에 비춰 ‘삼족오’가 고구려 인들에게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우선 알아보고, 오늘날에 반영될 수 있는 가치를 재평가 하고자 한다 .


‘삼족오’는 고구려 고분벽화를 비롯해 동이족의 문화권에서만 볼 수 있는 문화상징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해설과는 달리 삼족오가 세발달린 까마귀라는 근거는 그 어디에도 없다.  고대 문헌을 찾아보아도  ‘삼족오’라고만 기술했지, ‘세 발 달린 까마귀’라고 한 적이 없다. 물론 烏는 까마귀를 뜻하기도 하지만  ‘검다’라는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예로 들자면 검은 닭을‘오골계(烏骨鷄)’,검은 대나무를 ‘오죽(烏竹)’, 검은 수정을 ‘오수정(烏水晶)’, 이라고 하듯이, 검다라는 뜻으로 오히려 더 많이 쓰인다.

‘삼족오(三足烏)’의 ‘오(烏)’도 마찬가지다.
가장 확실한 근거로『삼국사기(三國史記)』 권14 「고구려본기 2 太武神王條」 에 보면 ‘烏者黑也’라는 문구가 나오는데, 즉 오라는 것은 검다라는 뜻이다.
 특히 삼족오는 태양의 흑점과 깊은 연관이 있다.
 옛 사람들은 흑점이 태양의 광채가 응어리진 것으로 보고 양(陽)을 상징한다고 했다.

 고대인들은 태양의 흑점 중 그 중앙에 가장 검은 본영(本影)이 세 발 달린 검은 새의 생김새와 같다고 해서 ‘삼족오(三足烏)’라고 이름을 붙였던 것이다.‘
 삼족오’의 ‘오’가 ‘검은 새’를 지칭하는 것으로 봐야 하는 근거다.마치 달(月)에 두꺼비와 옥토끼가 산다고 믿은 것과 같은 이치다. 

대동강변에 있는 진파리 7호분에서 출토 된 고구려의 金具(금구)

이중의 원안에 삼족오가 있다.
이 장식에 있는 삼족오는 그 조형의 아름다움과 예술적 수준등을 고려 할때
고구려의 삼족오를 대표할만하도 할 수 있다.




 
 중앙 삼족오를 비롯하여 좌우 하단의 용과 윗부분의 봉황이 삼족오를 수호하고 있다. 그리고 구름과 바람모양의 금제 장식이 얽히고 �혀 있어, 전체적으로 대단히 역동적이면서도 신비롭다.
  삼족오는 모든 상서로운 신비의  동물들 중에서도 으뜸으로 취급한 것인데, 이러한 의식은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도 반영되었다.
 즉 사신도는 고분무덤을 수호하는 방위신인데 비해, 삼족오는 태양안에 사는 새로써 그들의 극락을 인도하려는 듯 무덤 최상의 바로 아랫부분에 위치해 있다.

 고구려가 이토록 삼족오를 중요하게 여긴것은, 그들이 갖고 있는 선민사상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우선 삼족오가 세발달린 상서로운 검은 새로 해석함은 합당하나, 그 기본적인 모델은 까마귀였음을 인지해야 한다.
 즉 고대 동이족 계열을 비롯한 북방민족은 까마귀를 聖鳥로 여기고 있고, 이러한 풍습은 몽골의 몇몇 부족에서도 확인된다.
 그리고 태양은 고구려 시조 주몽의 탄생설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 주몽뿐 아니라 부여의 시조설화에서도 확인된다. 부여의 시조 설화나 동명설화 모두 알에서 햇빛을 받고 태어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백으로 대표되는 큰 강이 고구려의 母體라면, 빛은 父體와도 같은 것이다. 따라서 천신의 후예라는 자부심으로 가득찬 고구려인으로썬, 일월숭배사상으로 이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즉 삼족오 숭배사상은 고구려의 선민사상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고구려 고분 시대가 열리면서, 삼족오는 막연한 숭배의 대상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역활도 수행하게 되었다. 현재까지 삼족오가 확인된 고분만 30여기가 넘고 있다. 그 예로 쌍영총, 각저총, 덕흥리 1·2호 고분, 개마총, 강서중묘, 천왕지신총, 장천 1호분, 무용총, 약수리 벽화고분, 그리고 다섯무덤(오회분) 4·5호묘등 벽화가 남아있는 각 무덤마다에 빠짐없이 등장한다.
 그리고 삼족오가 그려진 위치를 보면, 무덤 최상부의 바로 아래에 위치해 있으며 그 어떠한 상징물보다 높은 위치에 그려져 있다.

 이것은 하늘아래 태양이 있고 그 아래 태양을 섬기는 고구려 인이 있다는 고대의 세계관을 구현한 것인데, 삼족오는 죽은자의 영혼을 천상의 세계로 인도해 주는 역활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일부의 역사학자들은 ‘삼족오’가 고구려의 문화상징이 아니라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가장 대표적인 근거로 호남성 장사시(長沙市) ‘마왕퇴(馬王堆) 1호 한묘(漢墓)’를 든다. 그런데 무덤 주인의 승천을 기원하는 주제인 이 그림에는 신화와 전설을 삽입하여 내용이 풍부하고 구도가 정교하지만, ‘두 발 달린 까마귀’만 등장하고 있을 뿐 ‘삼족오’는 그려져 있지 않다. 

.‘마왕퇴 1호 한묘’의 그림이 삼족오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현실 속에 실재하는 두 발 달린 까마귀기가 모델이 되었다. 물론 한나라시대까지만 해도 까마귀는죽음을 알려주는 영험한 새로 받아들여 졌을 것이다.
 그러나 마왕티 1호는 단 한기일 뿐, 그 시대 중국의 세계관이나 가치관을 반영한다고 볼 수 없다. 차라리 고구려의 문화적 영향으로 인해 조성된 무덤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만큼 고구려 문화는 우수하였으며, 그 주변 민족과 국가들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일본 고분에서 소수나마 발견되는 삼족오에서도 확인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역시 극히 소수에 불과한 것이고, 삼족오의 벼슬이 없는 등 본적인 색체를 다소 띄고는 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고구려의 무덤 양식에 상당한 영향을 받아 조성한 것이 분명하다. 더구나 진파리 고분에서 출토된 금제장식과 같은 완성형의 삼족오는 찾아 볼 수조차 없다.
  그리고 일본 축구대표 팀의 문장(紋章)으로 사용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본 고분 벽화를 참조하여 제작된 도안일 뿐이다.

 우리나라 국기인 태극기 역시, 중국의 태극과 8괘를 참조하여 도안된 것이 아닌가?  따라서 지나치게 독자적인 것만을 찾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본다. 문화라는 것은 서로가 주고 받으면서 발전하고 또 변행되며 고유의 것이 되기도 하고 모두의 것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고유의 완성형 삼족오가 있으니, 그것을 기본으로 삼아 오늘날의 실정에 맞는 삼족오를 도안하면 될 것이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등장하는 삼족오의 머리에는 볏이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봉황이나 주작의 이미지를 따온 것으로 보여진다. 즉 동이족 고유의 삼족오에, 신화적 요소가 덧붙여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탄생한 삼족오는  왼쪽에는 용을, 오른쪽에는 봉황을 거느리고 있다. 태양의 상징인 삼족오에 영생불사의 상징인 봉황의 이미지가 덧붙여져, 모든 신화적 상징중 으뜸으로 여겨졌음이 분명하다.

  이것은 단지 영험한 새로 여겨 극히 일부분에만 차용한 중국이나, 동이족의  일반적인 삼족오 형상만을 따른 일본과는 분명히 다르다.
 고구려의 상징은 모든 것을 비추는 태양의 상징이며, 영원한 제국을 꿈꾸었던 고구려인의 정신과 기상을 담은 것이다.
 삼족오의 발이 세개인 것은  天, 地, 人을 모두 거머쥐고, 끝없이 비상하려는 웅대한 기상이 깃들여  있는 것이다.
 이것은  중, 러, 일의 3강국이 둘러싼 중앙에 있는 한반도를 발판으로 삼아 세계로 비상하고 있는, 오늘날 우리가 가져야 할 기상과 일맥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