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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김 內系外系

경주이씨 청호공 따님(김맹전 숙인)

by 연송 김환수 2008. 9. 20.

 원래 있던 조선시대 공주편은 "조선 정종 딸 고성옹주 안산김씨 김한 출가" 에 통합  '09.3.22

 

경주이씨 청호공 이희 사위 김맹전 묘

 

 통훈대부(정3품) 사재감정 김맹전 지묘 (사재정공 휘 맹전 지묘)  * 묘소 : 안산시 선부동 석수골

  * 숙인 경주이씨 묘소 : 광주(廣州) 현천리(玄川里) = 하남시 감북동(위정공 묘소 우측 안장) 

  * 숙인 선산김씨 묘소 사재정공 맹전 합장

 

 아래사진은 숙인 경주이씨 묘 :  경주이씨 청호공대종회 명우 회장님 

 

  중앙 오른쪽 숙인 경주이씨 묘


 

 겅기도 하남시 감북면 위정각

 

위정각 추충문 

 

안산김씨 1776년 족보에 나타난 맹전 선조기록 

 

 

18대조 고모할머님의 산소를 찾아가다


글쓴이: hyunhee  조회수 : 19   2009.03.20 20:18

 

오늘 2009.3.19(음2.23)일 경기 하남시 감북동에 있는 18대조 고모할머님 산소를 찾아 재배하였다.

 

어제 명우 대부님의 제안을 받고  오늘 새벽까지 잠 못 이루는 밤을 지샜다. 전날 많은 수면을 취한 탓이기도 하지만 500년이 다된 산소를 찾아 가자는 대부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부터, 나는 인생을 잘 못 살았구나 하는 자책감이 있어서이다. 어떠한 운명의 장난이 아닌가도 생각해 본다.

 

청호공 선조의 막내 따님이신데, 청호공 할아버님의 묘역 성역화를 위해 위 아래 선조들의 행적을 탐색하다 보니 쓸쓸히 먼곳에 따로 모셔져 있는 고모 할머님의 산소까지 찾게 되었다는 대부님의 말씀이다.

 

다행히 아침에 조금 자고 나서 고아 아닌 고아(?)답게  아침 겸 점심을 챙겨 먹고, 군자역에서 대부님의 승용차를 탑승해 하남시로 직행하였다. 전날 대부님께서 할머님의 시할아버지 문중인 안산김씨 대종회에 문의 한바 있어,  오늘 쉽게 찾아와 마치 논에서 일을 하고 있는 어르신의 조언으로 산소를 찾은 것이다.

 

 할머님의 시가인 안산김씨 재실 출입문. 500년동안 고모할머님의 산소까지 관리해 줌에 감사

 

 

 안산김씨 대종회 사무실

 

 

 안산김씨 족보에 숙인 경주이씨가 표시되어 있다

 

 

 500년이 다된 표지석과 상석. 표시석에는 " 天通六年  壬午五月   日 卒  正德四年 己卯二月 立石

 通政大夫司宰鑑正 金孟銓 妻 淑人慶州李氏之墓 " 라고 희미하게 글자 흔적이 남아 있다 

 

 

 명우 청호공대종회회장님이 표지석에 서 계신다

 

 

 함께 한 영광을 

 

 

 묘소 뒤에서 바라 봄

 

 

 산소에서 내려 와 마을 끝 주소 표시

 

 

 

하남에서 다시 서울 암사동 청호공선조의 장남 문형공 선조의 산소에 들렸다. 1년전 4.4-5일간 명우대부님이 찾아 낸 산소이다. 두 내외분이 나란히 쌍분을 이루고 있고, 표지석, 상석이 남아 있다. 망주석 하나는 넘어져 있고, 또 하나는 온데간데 없다. 그 당시 왕족도 아닌 분의 산소를 한강 너머도 아닌 한강 줄기 옆 명당에 모셨으니 익제공 이후 청호공 선조의 은덕이 아닌가 싶다.

 

우리 청호공 후손 종친들은 청호공대종회의 묘역 성역화 프로젝트에 적극 참여 하여야 한다.

현 대종중 임원진들은 물론 전국에 흩어져 있는 대소문중에 널리 알려 모두가 참여하도록 독려 하여야 할 것이다. 세상 모든것들이 날마다 빠르게 변화하고 있지만 뿌리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우리 후손들에게 윤리 도덕과 효의 가르침을 물려 주기 위해 어른들이 솔선수범하여 뿌리를 더 튼튼히 하여야 될 것이다.

 

" --- --- 문형지묘" 라고 희미하게 보인다

 

 

 상석은 ?

 

 

 할머니 양천허씨 표지석

 

 

 명우 대부님이 뭔가 또 다른 흔적을 찾을수 없을가 하고 유심히 살피신다

 

 

 

 

 

 '---이문형지묘' 가 뚜렷이 보인다

 

 

 500년 동안 온갓 풍상을 다 겪고 서 있는 선조의 표지석을 만져보자

 

 

 

1. 세종 83, 20(1438 무오 / 명 정통(正統) 3) 10 10(신유) 1번째기사
이희
·김유·조욱생 등을 논핵하게 하고 춥고 얼고 한 사람들을 구제하게 하다

임진(臨津) 통제원(通濟院) 서평(西平)에 머물렀다. 이날에 큰 바람이 불고 비와 눈이 오는데 건널목이 좁아서 짐[輜重]을 건너지 못하였고, 인마(人馬)가 섞여 서로 밀고 밟고 하면서 해가 저문데도 아직 다 건너지 못하였다. 장막이 모두 풍우에 찢어지고 날려서 인마가 편히 쉬지 못하였고, 혹은 종자(從者)와 서로 잃고서 서서 날을 새운 자도 있었다. 의금부에 명령하여 사재 판사(司宰判事) 이희(李暿) 와 수참 판관(水站判官) 김유(金攸) · 조욱생(趙旭生) 등을 논핵하게 하였으니, 군사들을 보호하여 건너게 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에 땔나무를 많이 쌓아 놓고 불을 놓아 비에 젖어서 춥고 얼고 한 사람들을 구제하게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6 83 3 B

【영인본】 4 167

【분류】 *왕실-행행(行幸) / *과학-천기(天氣) / *사법(司法)

 

2. 세종 90, 22(1440 경신 / 명 정통(正統) 5) 7 20(경신) 2번째기사
오도리 오랑캐를 위로케 하다

판예빈시사(判禮賓寺事) 이희(李暿) 에게 교서(敎書) 10[], 선온(宣醞) 60, 청·홍목면(靑紅木綿) 1백 필을 주어, 함길도 에 가서 오도리(吾都里) 오랑개(吾郞介) 를 위로하도록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9 90 14 B

【영인본】 4 305

【분류】 *외교-() / *왕실-사급(賜給) / *왕실-의식(儀式)

 

3. 세종 90, 22(1440 경신 / 명 정통(正統) 5) 8 6(을해) 3번째기사
김종서·이희 등이 교서에 골간 종족의 누락 사실을 승정원에 보고하다

함길도 도절제사 김종서판예빈시사(判禮賓寺事) 이희(李暿) 등이 승정원에 글을 보내기를,

“지금 교서(敎書)와 사목(事目)을 보니, 아울러 골간(骨看) 의 종족이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골간 이 비록 오도리(吾都里) 와 이웃하지는 아니하였으나, 여러 대로 경흥(慶興) 에 거주하여 그 무리가 매우 많으며, 전후(前後)에 난을 일으키지 않았는데, 지금 잔치를 베풀어 주고 물품을 하사하며, 또 교서를 반사(頒賜)하여 특별한 은덕을 베풀었으나, 오도리 를 위해서 골간 을 들었을 뿐이니, 어찌 그 까닭을 알겠습니까. 저들이 ‘오직 우리만을 박대한다. ’고 하여, 반드시 원망하는 마음이 생기고 흔단(釁端)이 일어날까 염려됩니다. 오직 오랑개(吾郞介) 에게 반사한 교서 안에 오도리 와 이웃하였다는 등의 말만으로는 골간 에게는 통하지 않을 듯하며, 또 내전(內傳)과 사목(事目)에도 모두 언급하지 않았으니, 신 등이 감히 함부로 시행하지 못합니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9 90 24 B

【영인본】 4 310

【분류】 *외교-() / *왕실-의식(儀式)

 

4. 세종 90, 22(1440 경신 / 명 정통(正統) 5) 9 10(기유) 2번째기사
원창명·이사검·박연 등에게 말을 하사하다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원창명(元昌命) ·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이사검(李思儉) ·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박연(朴堧) · 판군자감사(判軍資監事) 이양직(李良直) · 판제용감사(判濟用監事) 권순(權循) · 상호군(上護軍) 안종렴(安從廉) · 판예빈시사(判禮賓寺事) 이희(李暿) 에게 말 한 필씩을 하사하였으니, 기도하여서 비가 내렸기 때문이었다.

【태백산사고본】 29 90 37 A

【영인본】 4 316

【분류】 *왕실-사급(賜給)

 

5. 세종 99, 25(1443 계해 / 명 정통(正統) 8) 2 6(임진) 1번째기사
김익생·이희·우계번·권극화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익생(金益生) 으로써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 , 이희(李暿) 로 형조 참의(刑曹參議) , 우계번(禹繼蕃) 으로 사간원 우정언(司諫院右正言) , 권극화(權克和) 로 경주 부윤(慶州府尹) 을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32 99 12 B

【영인본】 4 460

【분류】 *인사-임면(任免)

 

 

6. 세종 99, 25(1443 계해 / 명 정통(正統) 8) 2 21(정미) 3번째기사
조극관·조수량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조극관(趙克寬) 으로써 공조 참판 을, 조수량(趙遂良) 으로 형조 참의 를, 이희(李暿) 로 공조 참의 , 김조(金銚) 로 우승지 를, 강석덕(姜碩德) 으로 좌부승지 를, 성봉조(成奉祖) 로 우부승지 를, 유의손(柳義孫) 으로 동부승지 를 이사철(李思哲) 로 지중추원사 겸 종학 박사 를, 장아(張莪) 로 우헌납 겸 종학 박사 를, 김윤수(金允壽) 로 경원 절제사 를, 이인화(李仁和) 로 회령 절제사 를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32 99 19 A

【영인본】 4 463

【분류】 *인사-임면(任免)

 

7. 세종 100, 25(1443 계해 / 명 정통(正統) 8) 6 22(을사) 1번째기사
성염조와 이희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성염조(成念祖) 를 경창부 윤(慶昌府尹) 으로, 이희(李暿) 를 경상도 관찰사 로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32 100 35 A

【영인본】 4 485

【분류】 *인사-임면(任免)

8. 세종 102, 25(1443 계해 / 명 정통(正統) 8) 11 3(갑인) 4번째기사
양전을 고치는 일·전품을 나누는 방식을 유시하려 하삼도 관찰사를 부르다

처음에 임금이 양전(量田)을 고치는 일과 전품(田品)을 나누는 방식을 면접하여 유시(諭示)하려 하여, 전라도 도관찰사 이맹진(李孟畛) · 경상도 관찰사 이희(李暿) · 충청도 관찰사 김조(金銚) 를 역마(驛馬)로 불렀는데, 이때에 이르러 왔다.

【태백산사고본】 33 102 18 A

【영인본】 4 521

【분류】 *농업-전제(田制) / *농업-양전(量田)

 

9. 세종 102, 25(1443 계해 / 명 정통(正統) 8) 12 29(기유) 1번째기사
경상도 관찰사 이희에게 절물(節物) 외에는 진상하지 말 것을 이르다

경상도 관찰사 이희(李暿) 에게 이르기를,

“전자에 하지(下旨)하기를, ‘보름 전 보름 후에 새로 나는 물건 외에는 아울러 진상(進上)하지 말라.’ 하였는데, 지금 연속하여 진상하니 실로 불가하다. 이미 온 물건은 도로 보내는 것이 폐단이 있으니, 모두 예빈시(禮賓寺)에 붙일 것이나, 이제부터는 절물(節物) 외에는 아울러 진상하지 말라.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33 102 42 A

【영인본】 4 533

【분류】 *재정-진상(進上)

 

10. 세종 103, 26(1444 갑자 / 명 정통(正統) 9) 2 22(임인) 1번째기사
최숙손·한전·이희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최숙손(崔淑孫) 으로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 한전() 으로 형조 참의(刑曹參議) , 이희(李暿) 첨지중추원사 , 조변(趙抃) 으로 사헌 지평(司憲持平) , 성봉조(成奉祖) 로 경상도 관찰사 를, 김유양(金有讓) 으로 전라도 안무 처치사(按撫處置使) 를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33 103 23 A

【영인본】 4 544

【분류】 *인사-임면(任免)

 

죽산 안등(安騰, ?-1417) 사위 이희(李暿) 묘갈명

태종 17년 정유(1417, 영락 15) 10월 3일(을유)

전 형조 판서 안등의 졸기

전 형조 판서(刑曹判書) 안등(安謄)이 졸(卒)하였다. 안등은 죽산(竹山) 사람인데, 정당(政堂) 안극인(安克仁)의 손자이었다. 마음가짐이 질실하고 곧고 일에 임하여 의(義)를 좋아하고 이재(吏才)가 있었다. 지신사(知申事)를 거치어 두 번 경상도 도관찰사(慶尙道都觀察使)가 되었는데, 모두 성적(聲績)이 있었다. 졸(卒)하자, 3일 동안 철조(輟朝)하고, 시호를 정경(貞景)이라 하였으며, 아들이 없었다.

【원전】 2 집 188 면
【분류】 *인물(人物)

[주D-001]철조(輟朝) : 국상(國喪)을 당하거나 대신(大臣)이 죽었을 때 임시로 조회(朝會)를 정지하는 일. 정조(停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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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등(安騰)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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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조선 전기
본관 죽산(竹山)
성 안(安)
시호 정경(貞景)
성별 남
활동분야 문신/관료 / 문신-조선전기 / 문신

[상세내용]
안등(安騰)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죽산(竹山).
1400년(정종 2) 사헌부시사(司憲府侍史: 정4품직, 뒤의 掌令), 1404년(태종 4)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가 되었다.
이때 사헌부감찰들간의 싸움에 상관으로서 그의 시비를 가리지 않고 화해하도록 종용한 대사헌 김희선(金希善)과 집의 김자지(金自知)의 처벌을 상소하였다.

1407년에는 판예빈시사(判禮賓寺事)로서 해안방어의 성실유무를 감찰하기 위하여 전라도에 파견되었고, 1410년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를 거쳐 이듬해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이어서 대사헌을 거쳐 1415년에 충청도관찰사가 되었으나, 그의 노모가 상주에 있고 또한 경상도관찰사 이지강(李之剛)의 처부모가 평택에 있었으므로 양자의 관직을 맞바꿔 다시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이듬해 한성부윤으로 전근되어 돌아와, 경상도 김해근처의 산록에 말을 방목하기 적합한 곳이 있으므로, 주위 7, 8리(里)에 담을 쌓고 양마(良馬)를 기른다면 1만여필을 방축할 수 있음을 건의하여 실시하였다.

1416년 형조판서가 되었다. 시호는 정경(貞景)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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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daum.net/009448/6054048

경주이씨 익재공파(益齋公派)청호공(淸湖公)이희(李暿)할아버지의 묘(墓).익재공의 현손. 벼슬은 이조참의,...

이희

 慶尙道觀察使贈吏曹判書淸湖公墓碣銘

 경상도관찰사증이조판서청호공묘갈명

 府君(부군)의 諱(휘)는 희요, 字는 明仲(명중)이요, 호는 淸湖(청호)요, 성은 李氏요, 경주가 本貫(본관)이니, 新羅 佐命功臣(신라 좌명공신) 휘 謁平(알평)은 시조이다.

 高麗(고려)말에 휘 齊賢(제현)이 있으니, 호는 益齋(익재)요 鷄林府院君(계림부원군)으로 시호는 文忠(문충)이니, 公에게 高祖(고조)이다. 당조의 휘는 達尊(달존)이요 호는 雲窩(운와)니, 臨海君(임해군)에 追封(추봉)되었다.

할아버지의 휘는 學林(학림)이니,小府尹, 아버지의 휘는 擔(담)이니 密直司代言(밀직사대언)이요, 어머니는 英陽南氏(영양남씨)니 典書 若生(전서 약생)의 따님인데,太宗 甲申(태종 갑신) (1404년)에 公이 出生했다.

 公이 본래學文을 좋아하고 예문을 익히며 誠孝(성효)에 극진했다. 성품이 또 강직하여壹閣(司憲府 弘文館)의 풍토가 있었다. 公이 일찍이 生員(생원),進士(진사) 두 試驗(시험)에 合格(합격)하여 南壹(남일)에 추천되어 吏曹慘議 弘文館 副提學(이조참의 홍문관 부제학)을 지내고, 외직으로 慶尙道 觀察使兼黜陟使(경상도 관찰사 겸출척사)로 安東(안동)에 순찰 왔다가 客館(객관)에서 돌아 가셨으며, 遺命(유명)으로 安東府(안동부)남족 駝駱山 魯林村(타락산 로림촌)뒤 乙坐(을좌)에 장사 지냈으며, 뒤에 吏曹判書(이조판서) 知經筵義禁府事兼 弘文館 大提學 藝文館 大提學(지경연의금부사겸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에 증직 되었다.

배위는 貞夫人(정부인) 竹山安氏(죽산안씨)니 判書(판서) 貞景公(정경공) 騰의 따님이다.

묘소는 高陽 元堂里(고양 원당리)에 있다. 나머지는 궐한다.

 아 !  府君이 五百年前에 出生하여, 文章과 節行(절행)이 족히 世上에 전할 만한  보물이 있었을 것이나 文獻이 고증이 없으니 子孫의 개탄이 끝이 있겠는가? 銘(명)에 이르기를 益齋(익재)로 할아버지를 삼고 訥軒(눌헌)으로 孫子(손자)를 삼았네, 이어감이 있고 걱정은 없으니,淵源(연원)을 떨어뜨리지 않았네!

臺省(대성)에 出入하면서 곧은 말이 분분하였고, 召車(周나라 召公의 수례라는 뜻)가 남으로 내려감에 백성들이 노래 부르고 읊조리었네,  왕께서 吏曹에게 명하시어 吏曹判書(이조판서)를 증직 하였다.

문장도 능숙하고 搏識(박식)도 있으니, 좋은 벼슬을 역임하여 先祖(선조)를 빛내고 後孫(후손)을 감싸 주었으니, 문호가 밝게 빛이 났네. 저기 花山(화산)을 바라보니 芳草(방초)가 자리같이 깔리었고  땅을 살펴봄이 징험 있으니, 이 이치가 하늘에 관계되었지. 좋은 비석에 새기어 千萬年(천만년)에 드리우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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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의 딸, 안등 외손녀 정부인 이씨 묘갈명

정부인(貞夫人) 이씨(李氏) 묘갈명(墓碣銘)



계림 이씨(鷄林李氏)는 고려 제현(齊賢)으로부터 현달하기 시작하였으니, 삼중대광(三重大匡)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이었다. 그의 아들 달존(達尊)은 보문각 제학(寶文閣提學)이었고, 이분이 소부윤(少府尹) 휘 학림(學林)을 낳았다. 소부윤은 승정원 우부대언(承政院右副代言) 휘 담(擔)을 낳았고, 우부대언은 경상도 관찰출척사(慶尙道觀察黜陟使) 휘 희(暿)를 낳았다. 관찰출척사는 모현(某縣) 안씨(安氏)를 아내로 맞았으니 형조 판서 안등(安騰)의 따님으로, 이분이 부인을 낳아 이공(李公)에게 출가시켰다.
철성 이씨(鐵城李氏)는 고려 존비(尊庇)로부터 현달하기 시작하였으니, 판밀직사사 세자원빈(判密直司事世子元賓)이었다. 그의 아들 우(瑀)는 철성군(鐵城君)이고, 철성군이 문하시중(門下侍中) 휘 아무개를 낳았고, 문하시중은 집현전 제학 휘 강(岡)을 낳았고, 제학은 의정부 우의정 휘 원(原)을 낳았다. 우의정은 모현(某縣) 최씨(崔氏)를 아내로 맞았으니 군부총랑(軍簿摠郞) 최정지(崔丁智)의 따님으로, 이분이 이공을 낳아 부인의 배필이 되게 하였다. 이러고 보면 대대로 명망이 있는 두 큰 집안끼리 서로 혼인한 것이니, 나라에서 망족(望族)을 일컫는 자들은 반드시 이 두 집안을 꼽는다.
부인은 아기 적부터 유순하고 단아(端雅)하였으며 자라서는 예의가 발랐다. 어릴 때 조모 남씨(南氏)의 손에 길러졌는데 조모의 뜻을 받들어 색양(色養)하는 것이 지극하지 않음이 없었으므로, 부친인 관찰사 부군이 기뻐서 “내가 일 때문에 혼정신성(昏定晨省)을 어기면 무릇 맛있는 음식을 장만해 바치는 일을 내 딸이 든든히 맡아서 한다.” 하였다. 관찰사 부군이 세상을 떠나자 부인은 조모를 더욱 지성껏 봉양하여 조모 남씨가 부인을 좋은 아들처럼 의지하였고, 종족과 향당(鄕黨) 사람들이 그 효성을 칭찬하였다.
집안을 다스리는 것은 더욱 정숙하고 종들을 부림에 법도가 있었으며, 의방(義方)에 따라 움직여 터럭만 한 어긋남도 없었다. 공이 일찍이 진해(鎭海)와 영산(靈山) 두 고을의 현감으로 간 적이 있었는데, 부인은 늘 “대저 관직에 있으면서 더러운 이름을 얻는 것은 모두 부인(婦人) 때문이었다. 내 어찌 나의 지아비께 누를 끼치리요.” 하고, 이로써 더욱 스스로 삼가고 조심하였다. 그리하여 집안의 말은 집 밖으로 나가지 않고 집 밖의 말은 집안으로 들이지 않았으니, 두 고을의 백성들이 공의 청렴하고 공평함에 탄복하고 아울러 부인의 덕을 칭찬해 마지않았다.
공이 병으로 사직하고 안동(安東)의 별서(別墅)에 살면서 날마다 향리 사람들과 술잔을 기울이는 것으로 낙(樂)을 삼고 집안 형편을 돌보지 않았다. 그러나 부인은 남편의 뜻을 미리 알아서 잘 받들고 힘써 손님상을 잘 차려내어 집안에 자주 양식이 궁핍했어도 공이 알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공은 늘 마음이 편안하고 부인은 남편의 뜻을 어김이 없었으니, 향리에서 그 덕을 칭찬하였다.
공이 불행히도 세상을 떠나자 부인은 남은 자식들을 잘 교육시켜 선대의 유업을 실추하지 않도록 하여, 자손들이 명성과 지위가 현달하였고 이씨(李氏)의 가문이 이로써 더욱 커졌다.
공의 휘는 아무개인데 조정이 공의 차자(次子) 아무개의 작위(爵位)가 이품(二品)이라 하여 공을 이조 참판에 추증하였다. 지금 상국(相國)인 진천(晉川) 강공 혼(姜公渾)이 공의 묘갈명을 썼다. 부인은 과부로 30년을 살다가 정덕(正德) 기사년 2월 모일에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88세이다. 이해 12월 정해(丁亥)에 남편인 참판공의 묘소 우측 묘좌 경향(卯坐庚向)의 기슭에 안장하였다. 이 고을은 임하현(臨河縣)이고 산은 수다산(水多山)이다.
부인은 4남 2녀를 낳았고, 내외손(內外孫)은 모두 약간 명이니, 이러한 사실들은 모두 상국의 글에 실려 있다. 장남 여(膂)는 경오년의 과거에 장원으로 뽑혀 지금 홍문관 수찬으로 있으니, 사람들이 이로써 이씨(李氏) 집안의 여경(餘慶)이 끝없이 뻗어갈 것임을 안다. 명은 다음과 같다.

어느 집안이 덕문인고 / 孰爲德門
이씨의 선조로다 / 李氏之先
그 향기를 퍼뜨려서 / 載播厥芬
더욱 드러나서 이어졌어라 / 益顯以延
어찌 그 뿌리가 두터우면서 / 孰厚其根
열매가 많이 맺지 않으리요 / 而實不蕃
이 부인으로 말하자면 / 至于夫人
여덕이 더욱 새로웠나니 / 女德彌新
좋은 배필을 얻으매 / 配得其良
마치 한 쌍의 봉황이 우는 듯 / 鳳凰鏘鏘
혁혁히 높은 벼슬이 / 象笏朱軒
자손들에까지 미치었으니 / 曁子若孫
가도가 융성하매 / 家道之肥
문벌이 이로써 빛났도다 / 門閥以煇
장수하고 강녕하시어 / 壽考康寧
그 영화를 다 누리셨어라 / 以盡其榮
내 글로써 명을 지어 / 我文以銘
이 비석에 새기노니 / 維石之貞
이 글에 부끄러움 없기에 / 不愧于辭
이로써 보여 무너뜨리지 않게 하노라 / 用示無隳


[주D-001]색양(色養) : 온화한 얼굴빛으로 부모를 섬기는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부모의 얼굴빛을 보고 그 뜻을 잘 받드는 것이라고 한다. 자하(子夏)가 효(孝)를 묻자, 공자가 “얼굴빛을 온화하게 가짐이 어렵다.[色難]” 하였다. 《論語 爲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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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여(李膂)

[문과] 중종(中宗) 5년 (1510) 경오(庚午) 식년시(式年試) 갑과(甲科) 1[장원(壯元)]위

[인적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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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강재(强哉)
생년 갑진(甲辰)1484
합격연령 27
본관 고성(固城)

[이력사항]
전력 : 생원(生員)
관직 : 호당(湖堂)
관직 : 수찬(修撰)
타과 : 연산군(燕山君) 7년(1501) 신유(辛酉) 생원시(生員試)

[가족사항]
[부]
성명 : 이평(李泙)
[조부]
성명 : 이증(李增)
[증조부]
성명 : 이원(李原)
[외조부]
성명 : 허추(許樞)
[처부]
성명 : 이사겸(李思謙)
[형] 이주(李胄)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김맹전 따님 기록 

시험관련 사항]

왕/년도 : 세조(世祖) 5년

과거시험연도 : 1459 기묘

시험명 : 식년시(式年試)

등위 : 정과21(丁科21)

 

[인적 사항]

성명(姓名) : 김순성(金順誠)

자 : 경순(景純)

본관(本貫) : 광주(光州)

거주지(居住地) : 미상(未詳)

 

 

공의 휘(諱)는 순성(順誠) 자(字)는 경순(景純)이다. 본관은 전라도 광주이다.

고의 휘(諱)는 췌(萃)인데 통훈대부(通訓大夫) 성주목사(星州牧使)를 지냈고 모(母)는 영인(令人)으로서 비인김씨(庇仁金氏)이다.

공은 선덕(善德) 기유년(1429) 12월 을해(乙亥)에 한양(漢陽)에서 탄생하여 경태(景泰) 경오년 생원(生員)이 되셨고 임신년 부친상을 당했다. 천순(天順) 기묘년 문과 출신으로 곧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에 보직되고 임오년 봄 저작(著作)에 제배 되었다가 그 해 가을 봉상시(奉常寺) 녹사(綠事)로 옮겼고 계미년 가을 승문원(承文院) 박사(博士)로 다시 옮겼고 그 해 겨울 통례원(通禮院) 봉례(奉禮)에 제수 되었으며 갑신년 봄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에 제배되고 그 해 겨울 서장관(書狀官)으로 중국에 갔다가 곧 돌아와서 봉상시(奉常寺) 주부(主簿)에 제수 되었더니 얼마 안 가서 모친상을 당해 관직을 해면(解免)하였다.

복을 벗었을 때에 마침 경국대전(經國大典)을 고쳐 찬(撰)하라는 왕명이 있었으므로 공은 또한 공선(公選)되어서 그 일에 참여하였고 이내 훈련원(訓練院) 판관(判官)에 제수 되었으며 기축년 호조(戶曹) 정랑(正郞)으로 옮겼다가 경인년 병조(兵曹) 정랑(正郞)으로 옮기고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 참여했다. 그리고 임진년 한성부(漢城府) 서윤(庶尹)에 제배 되더니 한 달이 지나서 외직(外職)으로 나가 평창군수(平昌郡守)가 되셨고 계사년 평양(平壤) 서윤(庶尹)으로 옮기더니 신축년(1481) 3월 기해(己亥)일에 신병으로 집에서 졸(卒)하였다. 9월 정유(丁酉)일에 경기도 광주군 중도면 음촌리 영장산록에 장사하였다.

공은 성품이 근직(謹直)하는 한편 온하 하면서도 엄하고 간이(簡易) 하면서도 세밀하였으며 화식(華飾)을 싫어하고 성색(聲色)을 미워하였다. 그리고 어버이를 공경하는 데에 독실하여 살아있을 적에 효성을 다하고 돌아가신 뒤 제사 지낼 적에는 정성을 다하니 사람들은 모두 탄복하였다. 그런데 향년(享年)이 길지 못하여 벼슬이 이 정도에 그치고 말았으니 애석하다.

공은 성균관(成均館) 사예(司藝)인 한즙(韓緝)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넷을 낳았는데 하(?)는 제용감(濟用監) 부정(副正)인 김맹전(金孟銓)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둘을 낳았고 거(?)는 우후(虞侯)인 남초(南?)의 딸에게 장가들어 딸 하나를 낳고 셋째아들 석(?)은 울산군수(蔚山郡守)인 박복경(朴馥卿)의 딸에게 장가들어 딸 하나를 낳았다. 딸은 어리고 넷째아들은 굉(?)인데 역시 어리다.

 

 

선부2동의 유래

 

조선시대에는 안산군 대월면 선부리와 달산리였다가, 1914년 3월 1일 총독부령 제111호에 따라 시흥군 군자면 선부리로 개칭되었고, 이어 1986년 1월 1일 법률 제3798호에 따라 안산시 선부동으로 되었다.

 

선부동은 선녀골에서 유래되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안산군 관내에서 최초로 장시가 섰을 만큼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곳이었다. 또한, 안산 김씨가 후손 김맹전(사재감정(정3품) 역임)의 묘를 석수골에 쓴 후 그의 후손들이 뿌리를 내렸으며, 안산의 인맥 중 가장 번성했던 파평 윤씨 소정공파 후손들의 주세거지이기도 했다.

 

시승격 이전 자연취락 마을로는 모골, 거미울, 석수골, 정지막골, 억골(뗏골) 등이 있었으며,

 

석수골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조선조 태종때 좌명공신으로 연성군에 봉해진 김정경(1345~1419)의 손자인 김맹전의 묘를 쓸 때 묘 앞에 설치할 비석을 배에 싣고 와서 석공이 돌을 깎아 석물을 세웠다 하여 석수골이라 하였다고 한다.

 

 

사제감

고려·조선시대 어량(魚梁)·산택(山澤)에 관한 일을 관장하기 위해 설치되었던 관서. 고려 문종 때 사재감으로 관제를 정해 판사(判事, 정3품)·경(卿, 종3품) 1인, 소경(少卿, 종4품) 1인, 승(丞, 종6품) 2인, 주부(注簿, 종7품) 2인을 두었다. 1298년(충렬왕 24)에 사진감(司津監)으로 고쳐 판사를 없애고 경을 감(監)으로, 소경을 소감(少監)으로 고쳤다가 다시 사재시(司宰寺)로 개칭하였다.

 

1308년(충렬왕 34) 다시 도진사(都津司)로 개정해 영(令, 정3품) 3인, 장(長, 정4품) 3인, 승(정5품) 2인, 주부(정7품) 2인을 두었다. 뒤에 사재시로 고쳐 판사(정3품)·영(종3품)·부령(종4품)·승(종6품)·주부(종7품)를 두었다. 1356년(공민왕 5)에 사재감으로, 1362년에 사재시로, 1369년에 사재감으로, 1372년에 사재시로 이름이 여러 번 바뀌었다.

 

조선 건국 뒤 1392년(태조 즉위년) 7월에 고려의 제도를 본받아 사재감을 설치, 어량·산택에 관한 일을 맡게 하였다. 직제로 판사(判事, 정3품) 2인, 감(監, 종3품) 2인, 소감(少監, 종4품) 2인, 승(丞, 종5품) 1인, 겸승(兼丞, 종5품) 1인, 주부(主簿, 종6품) 2인, 겸주부(兼主簿, 종6품) 1인, 직장(直長, 종7품) 1인을 두었다.

 

1414년(태종 14) 1월 감을 정(正)으로, 소감을 부정(副正)으로 개칭하고, 이듬해 1월에는 부정 1인을 감원하였다. 1419년 12월에 다시 1인을 늘이고, 1423년(세종 1) 주부 1인을 감원하였다. 1460년(세조 6) 다시 부정 1인, 직장 1인을 감원하고, 1466년에 참봉(參奉, 종9품) 1인을 감원해 이것이 ≪경국대전≫에 성문화되었다.

 

≪참고문헌≫ 高麗史

≪참고문헌≫ 太祖實錄

≪참고문헌≫ 太宗實錄

≪참고문헌≫ 世宗實錄

≪참고문헌≫ 世祖實錄

≪참고문헌≫ 經國大典

≪참고문헌≫ 大典會通

≪참고문헌≫ 增補文獻備考

 

고려의 사재시를 그대로 이어받아, 1392년(태조 1) 호조의 정3품 속아문(正三品屬衙門)으로 설치하였다. 관원으로 경국대전에는 제조(提調:종1품·종2품) 1명, 정(正:정3품) 1명, 부정(副正:종3품) 1명, 첨정(僉正:종4품) 1명, 주부(종6품) 1명, 직장(종7품) 1명, 참봉(종9품) 1명 등을 두었다.

 

 

김개 [金漑] : 김맹전 부(父)

 

1405(태종 5)∼1484(성종 15).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안산(安山). 자는 선택(宣澤). 아버지는 연성군(蓮城君) 정경(定卿)이다. 1422년(세종 4) 음직(蔭職)으로 남부녹사(南部錄事)에 제수되었다.

 

이후 세자우시직(世子右侍直)·전농시주부(典農寺主簿)·대호군 겸 판통례문사(大護軍兼判通禮門事)·상서원소윤(尙瑞院少尹) 등을 역임하였다. 1455년(세조 1) 첨지중추부사로 원종이등공신(原從二等功臣)에 책록되면서 동지중추부사에 승진하였다.

 

1457년 중추부사가 되고 다음해 사은사 김세민(金世敏)의 부사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59년 열무(閱武) 때에 보인 무재(武才)로 가정대부(嘉靖大夫)가 되었다. 1461년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오르면서 행상호군(行上護軍), 이어 행첨지중추부사·지중추원사 등을 역임하였다.

 

1465년 원각사제조(圓覺寺提調)로서 원각사의 조성을 지휘하였다. 1467년 행의정부좌참찬(行議政府左參贊)에 임명되었으나, 대사헌 양성지(梁誠之) 등이 반대하였으나 취임하였다. 1468년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승진되었으나, 남이(南怡)의 옥사에 연루된 사위 조경치(曺敬治)로 인하여 파직되었다.

 

1470년(성종 1) 서용되었고, 이후 행상호군·의묘조성제조(懿廟造成提調)·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를 역임하였다. 또 공혜왕후(恭惠王后)의 산릉도감(山陵都監)과 선공감(繕工監)의 제조를 겸하였다. 성품이 민첩하고 해서(楷書)에 능하였으며, 영선(營繕)에 공이 있었다. 시호는 평호(平胡)이다.

 

≪참고문헌≫ 世祖實錄

≪참고문헌≫ 成宗實錄

≪참고문헌≫ 訥齋集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1. 고려 시대에 둔, 중추원의 으뜸 벼슬. 종이품 벼슬로 뒤에 판추밀원사, 판밀직사사로 고쳤다. ≒판원사, 판중추.

2. 조선 전기에 둔, 중추원의 으뜸 벼슬. 원래 정이품 벼슬로 세조 12년에 판중추부사로 고치고 종일품으로 올렸다. ≒판원사, 판중추

 

 

 

【성 명】 김개(金漑)

【생몰년】 1405(태종 5)∼1484(성종 15)

【본 관】 안산(安山) 김(金)

【자·호】 선택(宣澤)

【시 호】 평호(平胡)

【시 대】 조선 전기

【성 격】 문신

 

1405(태종 5)∼1484(성종 15). 본관은 안산(安山), 자는 선택(宣澤)으로 아버지는 연성군(蓮城君) 김정경(金定卿)이다.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세종 4년(1422) 음직(蔭職)으로 남부 녹사(南部錄事)가 되고 이어 세자 우시직(世子右侍直) · 주부(主簿) · 대호군(大護軍) · 상서원 소윤(尙瑞院少尹)을 역임하였다. 1455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원종 공신(原從功臣) 2등에 책록되고 1458년 사은부사(謝恩副使)로 명(溟8나라에 다녀왔다. 1461년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라 행 상호군(行上護軍)으로 경복궁 수리 도감 제조(景福宮修理都監提調)가 되었으며 이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등을 역임하고 1465년 원각사 제조(圓覺寺提調)가 되어 원각사의 조성을 지휘하였다.

1468년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올랐으나 사위 조경치(曺敬治)가 남이(南怡)의 옥사에 연루되어 파직되었으며 성종이 즉위한 후 다시 서용되어 행 상호군(行上護軍) · 의묘조성 제조(懿廟造成提調) ·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를 역임하고 공혜왕후(恭惠王后)의 산릉도감(山陵都監)과 선공감(繕工監)의 제조를 겸하였다. 시호는 평호(平胡)이다.

 

【참고문헌】 世祖實錄, 成宗實錄, 서울特別六百年史 文化史蹟篇(1987)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1. 고려 시대에 둔, 중추원의 으뜸 벼슬. 종이품 벼슬로 뒤에 판추밀원사, 판밀직사사로 고쳤다. ≒판원사, 판중추.

2. 조선 전기에 둔, 중추원의 으뜸 벼슬. 원래 정이품 벼슬로 세조 12년에 판중추부사로 고치고 종일품으로 올렸다. ≒판원사, 판중추

 

 

통훈대부(정3품) 사재감정 김맹전의 생년은 현재 족보상으로는 忌 3월20일 기록만 보여 김맹전 선조의 묘비명을 확인하여야 하는데 시간이 걸릴것 같아서 먼저 실록에 나와있는 벼슬기록(1457-1484.10.5이후)만 소개하겠습니다.

질문하신 의도가 청호공 돌아가신 연대 확인으로 생각됩니다.
김맹전 숙부인 별세 천통6년(발해연호×) 천순6년 1462○,  임오(1462○, 1522가정원년××)  
입석 정덕4년(기사) 1509년○○× 기묘(1519○, 1579가정38년××)

청호공 휘 희 1404년 출생 1443년 공조참의, 경상도관찰사, 1444년 첨지중추부사
청호공딸 정부인 이씨 별세 정덕4년(기사) 1509년  

조선왕조실록 세조 3년 정축(1457, 천순 1) 8월 22일(계축)  
사간원이 남의 자급을 대신 받은 자와 남에게 준 사람들의 추국을 청하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아뢰기를,
김맹전(金孟詮)·이창윤(李昌胤)·최함(崔涵) 등은 자기들에게 필요하지 않다고 이르고 은명(恩命)을 사사로이 스스로 남에게 주었으니, 오직 관작(官爵)이 외람(猥濫)할 뿐만 아니라 선비의 기풍이 아름답지 못하니, 청컨대 함부로 받은 자급(資級)을 빼앗고, 모두 추국(推鞫)하소서.” 하였으나, 명하여 논죄하지 말게 하였다. 【원전】 7 집 216 면
분류】 *왕실-종사(宗社) / *왕실-행행(行幸) / *사법-탄핵(彈劾) / *군사-중앙군(中央軍) / *인사-관리(管理)

세조11년 ~ 14 (1465~1468) 김맹전(金孟詮) 안음현감

#경남 함양군 안의면은 조선 시대만 해도 안음현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현이 면으로 강등된 데는 안음에 거주하던 정희량이 영조 4년(1728)에 소론 일파의 지지를 업고 군사를 일으켜 역모를 꾀하다가 제압당한 직후였다. 영조는 안음현을 둘로 쪼개 거창과 함양에 귀속시켰고 그 지역 사람들은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다가 10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1815년에야 복권되었다

성종2년 신묘(1471, 성화 7) 6월22일(계해)
장흥고령(長興庫令) 김맹전(金孟銓) 원전】 8 집 585 면

성종 3년 임진(1472, 성화 8)  9월 11일(갑진)
문천 군수(文川郡守)가 되었으니, 청컨대 체직(遞職)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원전】 8 집 685 면

성종 3년 임진(1472, 성화 8)  9월 16일(기유)  
영사(領事) 홍윤성(洪允成)이 아뢰기를, .......
김맹전(金孟銓)은 개정(改正)하라고 명령하셨다가 또 바꾸지 말라고 명령하시니, 모두가 옳지 못합니다. 청컨대 모두 개정하게 하소서.” 하니, 듣지 아니하였다.
원전】 8 집 686

성종 12년 신축(1481, 성화 17) 1월 19일(갑오)  
김맹전(金孟銓)은 풍저창 수(豊儲倉守)로서 승진되어 제용감 부정(濟用監副正)이 되었으며,
【원전】 10 집 188 면

김순성(金順誠) 묘비내용 (기유 1429 - 신축 1481)
자 : 경순(景純), 본관(本貫) : 광주(光州), 세조(世祖) 5년, 과거시험연도 : 1459 기묘
시험명 : 식년시(式年試), 등위 : 정과21(丁科21)
공은 성균관(成均館) 사예(司藝)인 한즙(韓緝)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넷을 낳았는데 하(?)는 제용감(濟用監) 부정(副正)인 김맹전(金孟銓)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둘을 낳았고

성종 15년 갑진(1484, 성화 20)  10월 5일(기미)
이조(吏曹)에 전지(傳旨)하여 사재감정(司宰監正) 김맹전(金孟銓)다시 서용(敍用)하게 하다【원전】 10 집 629면【분류 *왕실-종사(宗社)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울산시 울주군 웅촌면 금단리 암곡마을 운강사향사안내

열헌공, 동암공, 익재공선조 제향을 아래와 같이 안내하오니 
전 종인 참예 바랍니다.
    

 울산시 울주군 웅촌면 금단리 암곡마을 운강사향사안내

    전통의 명문 경주이씨 종친회 운영자 " <minheui-2000@hanmail.net>

 
           -   아     래  -
  -. 일 시 ; 2009. 4. 23(목) 오전 11시
  -. 장 소 ; 울산시 울주군 웅촌면 금단리 암곡마을 운강사
  -. 전 화 ; 사무처장( 재화) 010-4590-5800
                울산시화수회장( 종오) 011-881-8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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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雲岡祠記(운강사기)                      

    

     蔚州之西四十里울주지서사십리雲巖山下운암산하有雲岡祠유운강사迺吾祖悅軒東菴益齋三先生尸祝之所也내오선조열헌동암익재삼선생시축지소야盖其建設개기건설自辛酉春始而予嘗一造자신유춘시이여상일조預聞其施措矣예문기시조의翌年夏四月功才익년하사월공재告訖고흘族君瀚榮圭泰鍾絅甫족군한영규태종경보與一省人士京鄕諸族여일성인사경향제족旣行舍菜기행사채走書告予曰주서고여왈此不可以無記차불가이무기願得大人一言원득대인일언以爲祠이위사중故事고사予聞而歎賞여문이탄상窃以爲절이위今距三先生之世금거삼선생지세至爲五百餘年之久而지위오백여년지구이在在建院者재재건원자皆益齋之獨享也개익재지독향야悅東二先生無與焉열동이선생무여언盖개以益齋所稱先集未刊이익재소칭선집미간矧余小子之意推之신여소자지의추지實非神理人情之所愜也실비신리인정지소협야始於是祠시어시사有祖子孫合享之擧유조자손향지거吾知其益齋之靈오지기익재지령自此安矣乎자차안의호遂乃復之曰수내부지왈昔朱子之配嫠源縣學也석주자지배리원현학야先敍以非其鄕非其官非其寓之嫌而終乃援之以寓慕之意선서이비기향비기관비기우지혐이종내원지이우모지의是於祀禮시어사례可曰義起也가왈의기야今夫蔚州有三先生祠者금부주유삼선생사자亦無有鄕官寓之據역무유향관우지거而獨出於寓慕之誠矣則독출어우모지성의칙實與嫠學실여리학今古一轍也금고일철야不復可論而불부론이予將敍寓慕之實여장서우모지실爲諸生勸可乎위제생권가호春秋行禮之暇退以聯衿於講舍춘추행례지가퇴이연금어강사爭誦悅軒之德業東菴之文章益齋之道術쟁송열헌지덕업동암지문장익재지도술以互相勉戒이호상면계曰왈之人고지인何如是卓卓而하여시탁탁이今之人何如是淺淺也금지인하여시천야夫德業文章道術三者固無防限於世之汚隆부덕업문장도술삼자고무방한어세지오륭인而惟在人之造詣如何이유재인지조예여하盍各諒諸합각량제當汲汲於反省修飭飭矣당급급어반성수칙칙의若其不然약기불연諸生之升降揖讓却未免虛文具爾제생지승항읍양각미면허문구이諸君제군其以不肖之說기이불초지설爲道於諸生而以聽可否也 위도어제생이이청가부야


                                      壬戌 夏 四月下浣 後孫 前參判 鍾弼 謹記

                                      임술 하 사월하완 후손 전참판 종필 근기

 

                                                                『해』

   울주군의 서쪽 사십리 운암산 아래에 운강사가 있으니 바로 우리 선조이신 열헌, 동암, 익재, 삼 선생을 배향하여 모신 곳이다.

   대저 그 사우의 건립이 신유년 봄부터 시작되었고 나도 한번 그곳에 가서  계획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 이듬해 여름 사월에서야 겨우 완성하여 족인 한영 규태 종경이 경향의 제족들과 더불어 낙성봉안하고 서신을 나에게 보내기를, 운강사에 기문이 을 수 없으니 영감의 한 말씀을 얻어 운강사의 고사로 삼기를 원합니다, 라고 하였다.

  내, 이 말을 듣고 감상이 많아 깊이 생각해보니 지금으로부터 삼 선생의 세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오백 여년이란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여러 곳의 서원이 다 익재선생만 봉안 되었을 뿐,  열헌 동암 두 선생은 배향된 곳이 니 대개 익재선생께서 선대문집을 간행하지 못함을 한탄하셨는데 하물며 나의 뜻으로 마음을 미루어 보더라도 실로 이치로나 인정에 편안하지 않은 일이다.

  이 운강사에서 비로서 조자손 즉, 열헌 동암 익재 세 어른이 다함께 배향되쾌거가 있으니 나는 익재할아버지의 영혼이 이제부터 편안하심을 알 것 같다.

  이에 그 기문소청에 답하기를 옛날에 주자가 이원현 학궁에 배향될 때에 먼저 고향도, 부임했던 곳도, 살던 곳도 아닌 문제점을 서술하고 끝으로 숭모하는 뜻을 붙이니 사우를 짓고 제사를 받드는 것은 추모하는 의리에서 기인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울주에 삼 선생의 사우가 있는 것이 또한 고향도, 부임지도, 사시던 곳 이라는 근거도 없고 오직 숭모하는 성의에서 나온 것이라면 사실상 이원현 학궁의 일과 더불어 고금이 똑 같은 방법이다.

  다시 논할 필요도 없이 내가 숭모하는 실체를 서술하여 제생들을 권면하는 계기로 삼는 것이 옳겠도다.

  봄가을로 제례를 받드는 여가에 물러와 강당에 모여앉아 열헌의 덕업과 동암의 문장과 익재의 도덕학술을 서로 권면하고 경계하기를 옛날 어른들은 이와 같이 모두 훌륭하신데 지금 사람은 어찌 이와 같이 모두 부족한가.

  대저 덕업과 문장과 도학의 세 가지는 진실로 세상의 흥망성쇠와 상관없이 오직 스스로 어떻게 노력하느냐에 달려 있으니 어찌 각자 헤아려 반성하고 힘쓰지 않으리요.

  만약 그렇지 않으면 제생들의 오르내리고 읍양하는 절차가 모두 헛된 도구임을 면치 못할 것이네.

  제군들은 이 불초의 말이 제생들에게 한 말로 여겨 옳고 그름을 알아듣게 해야 할 것이다.


             임술년 여름 4월 하순에 후손인 전 참판 종필은 삼가 기문을 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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雲岡祠奉安祝文(운강사봉안축문)              


                                                                                                   代 李圭桓 補遺  대 이규환 보유


     粤麗連休월려연휴先生于朝선생우조評理之秩평리지질豈其下僚개기하료被于民공피우민德萃于躳덕췌우궁三子五孫자오손或卿或公혹경혹공以悅名軒이열명헌其義可商기의가상法當祭社법당제사胡本之遑호본지황後五百載후오백재物議咨傷물의자상迺奉尸내봉시于虞之坊우우지방惟慕之寓유모지우奚論非鄕해론비향竹裏古社죽리고사翼翼新宮익익신궁侯誰在列후수재열文定文忠문정문충揆諸神규제신리庶幾洋洋서기양양玆蠲吉日자견길일薦此蕉黃천차초황

                                                                                             右(上)告 李悅軒 우(상)고 이열헌


    磊落之姿뇌락지자寬弘之量관홍지량博通百子박통백자早闡天庭조천천정 仍賜紅鞓잉사홍정寵遇授例총우수례晩踐台閣만천태각德乃普施덕내보시惟急於休유급어휴逍遙詩酒소요시주宜席先蔭의석선음宜生文忠의생문충文忠有言 문충유언先集未刻선집미각矧余小子신여소자推此論之추차론지旣祠文忠기사문충 不及先德불급선덕豈文忠志개문충지後生之尢후생지왕因循至今인순지금洽五百載 흡오백재迺收物議내수물의創建一祠창건일사如水之神여수지신奚擇遐土해택하토 惟廟三架유묘삼가誰與之幷수여지병能子賢爺능자현야上下其卓상하기탁同堂合食  동당합식神理則然신리칙연吉日良辰길일양진迺奉迺妥내봉내타永永無斁영영무두於萬千秋어만천추

                                                                                            右(上)告 李東菴 우(상)고 이동암


     爲國奉使위국봉사筆舌判事필설판사勳烈之光훈열지광授倂儷流수병려류獨唱韓歐독창한구文章之方문장지방四秉國勻사병국균澤流生民택류생민德業之彰덕업지창撮三行治촬삼행치爲百世師위백세사於乎不忘어호불망在在疊享 재재첩향追慕之廣추모지광奚擇其鄕해택기향遷奉尸祝천봉시축于雲之谷우운지곡 數仞宮墻수인궁장陪誰而食배수이식父祖先德부조선덕神理洋洋신리양양惟吉之日 유길지일禮亦有秩례역유질以永烝嘗이영증상

                                                                                          右(上)告 李益齋 우(상)고 이익재

 

                                                   

                                                                   

해설,,,,,

  옛날 고려운세 좋을 때에 선생께서 조정에 서셨네.

  평리의 품계와 직급이 어찌 낮은 관료이시랴 ?

  공은 백성에게 미치고 덕은 내 몸에 쌓이셨네,

  세 아들과 다섯 손자들 경 혹은 공의 반열에 올랐네.

  열자로 호를 지으시니 그 의의 참으로 깊으네.

  예법은 사당으로 받들음이 마땅한데 어찌 경황없어 못 하였나.

  오백년 후에야 그럴 수 없다는 공론이 일어나 비로써 사우지어 제사 올리니 바로 울주 지방일세,

  오로지 경모의 정성이 있으면 고향을 어찌 논할 손가.

  죽림의 옛 사우가 날아갈 듯 새 궁실 되었네,

  누구누구를 모셨는고, 문정공과 문충공을 모셨네, 신도를 헤아려 보면 아마도 마음 흐뭇하시겠지.

  이 좋은 날을 가려 이 제향을 올리나이다.

                                                       우(위)는 열헌선조께 고 하는 글


  특출하신 자품과 너그럽고 크신 도량으로 널리 모든 글 통달하여 일찍이 중국에 이름을 떨쳤네,

  천자가 붉은 혁대 하사하니 대우가 보통보다 뛰어났네.

  만년에 대각에 오르니 공덕 널리 베푸셨네.

  오직 물러나 쉬는데 급하여 시주로 여생 보내셨네.

  선대음덕 깊으니 마땅히 문충공 태어나셨네.

  익재 문충공께서는 선집을 간행 못함을 말씀하셨는데, 하물며 나 같은 적은 사람이 이 마음 미루어 의론하건데, 이미 문충공 사우는 있으나 선덕에 미치지 못하였으니 어찌 문충공의 뜻 이리요, 후생들의 잘못이지.

  어언간 오늘에 이르니 벌서 오백년이 넘었네.

  이제야 공론을 수합하여 사우를 창건하니 조상의 정신을 받드는데 어찌 지역을 가리랴.

  오직 삼간의 사당채에 누구와 배향하였든가.

  훌륭한 아드님과 현철하신 아버지 모두가 탁월하여라.

  한 사우에 세 분이 함께 계시니 신도에 당연하네.

  좋은 날 좋은 때에 편안히 제사 받들어 모시니 길이길이 어김없이 천년  만년 이어가리라.

                                                       우(위)는 동암선생께 고 하는 글

 

  나라 위해 사신길 떠나 필설로 모든 일 판결하셨네.

  훈업과 공렬이 빛났으니 동료 중에 빼어났으니, 한퇴지와 구양수를 홀로 이었으니 문장의 방법일세.

  네 번이나 국가의 중책에 오르니 혜택이 만민에 미쳤네.

  덕업이 크게 드러남이 세 가지 치적을 꼽았네.

  백세후까지 사표가 되어, 아 ! 아름다워라 잊지 못하도다.

  여러 곳에 배향되시어 추모하는 이 많기도 하지.

  어찌 고향을 가리랴, 추모하고 제사 받들면 그만이지.

  울주 고을에 몇 길의 궁실과 담장이 높기도 하구나.

  누구를 모시고 계시던 고, 아버지 할아버지 덕이 높으시네.

  신도가 기뻐하시니 오직 길한 날일세.

  예가 있고 또한 질서 있으니 길이길이 춘추로 제향 올리나이다.

                                                         우(위)는 익재선조께 고 하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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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강사(雲岡祠).
열헌공(悅軒公) 휘 핵, 동암공(東庵公) 휘 진, 익재공(益齋公) 휘 제현(齊賢)의 3대조(三代祖)를 모셨다.
신유년(辛酉年- 1861년. 철종12)에 건립하고 기문(記文)은 종필(鍾弼)이 지었다.
*소재지: 울산시 울주군 웅상면 검단리 암곡.

 

경주이씨 족보

1841년 경주이씨세보(慶州李氏世譜) 

 

 

 

 

 

 

1875년(木活字)에 간행된 경주이씨세보(慶州李氏世譜) 

 

 

 

 

 

 

 1910년간행 경주이씨파보

 

 

 

 

 


경주이씨 익재공후 청호공파 세거지 고백당, 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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