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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릉 - 공주시

by 연송 김환수 2023. 7. 2.

무령왕릉(武寧王陵)은 백제 25대 무령왕(武寧王, 재위 501~523)과 그 왕비의 무덤으로 왕릉은 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 송산리 고분군에 자리하고 있다.  삼국시대 고분 중 무덤의 주인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왕릉이다.

 

1971년 5호분과 6호분의 배수시설 공사 중 우연히 발견되어 1,500여년 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묘지석으로 인하여 무덤의 주인공이 백제 25대왕 무령왕임을 알 수 있었다.

묘지석외에도 금제관식, 도자기, 유리구슬 등 124건 5200여점의 유물이 출토되어 백제문화의 우수성이 증명되었다.

 

무령왕릉 외에도 벽화가 그려진 벽돌무덤 6호분을 비롯하여 백제의 대표적인 무덤형식인 돌로만든 굴식돌방무덤(1~5호분)도 자리하고 있다.

석수(진묘수)는 출토 당시에 오른쪽 뒷다리는 파손되어 있었다. 이 석수는 중국 한대(漢代)이래 악귀를 물리치는 벽사의 뜻으로 무덤내부 앞에 세우는 진묘수(鎭墓獸)의 일종이다. 위에 진묘수(석수) 모형은 원형의 3배 크기로 제작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무덤을 지키게 하기 위해서 석수를 만들고 나서 다리를 일부러 부러뜨렸다고 한다.

묘지석 (왕)

무령왕 지석 해석 (묘지석)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 62세 되는 계묘년(523년) 5월 7일 임진날에 돌아가셔서, 을사년(525년) 8월 12일 갑신날에 이르러 대묘(大墓)에 예를 갖추어 안장하고 이와 같이 기록한다."

 

寧東大將軍 百濟斯麻王 年六十二歲 癸卯年五月 丙戌朔 七日壬辰 崩到

乙巳年八月 癸酉朔 十二日甲申 安登冠大墓 立志如左

(영동대장군 백제사마왕 연육십이세 계묘년오월 병술삭 칠일임진 붕도

을사년팔월 계유삭 십이일갑신 안등관대묘 입지여좌)

 

<무령왕 지석 뒷면>

未=================亥

丁=================壬

午=================子

丙=================癸

巳=================丑

==戌=============己==

==辰==乙==卯==甲==寅==

무령왕 지석은 앞면에 왕의 사망 및 장례를 치른 일자를 요약한 묘지, 뒷면에 묘 위치의 방위를 나타내는 간지도로 구성되었는데 간지도는 도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도교적 색채는 매지권 말미의 '부종율령(不從律令)'이라는 구절 등 이외에도 몇몇 부분이 있다. 추측이 분분했으나 중국 남조의 무덤에서 유사례가 발견되어 도교의 주문으로 밝혀졌다.

천신으로부터 (무덤에 쓸) 땅을 매입하였으므로 속세의 율령(법)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영동대장군인 백제 사마왕은 무령왕이 살아있을 때 불리던 이름으로 ‘사마’는 일본어로 ‘섬(시마)’이라는 뜻으로 무령왕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왕의 명을 받고 일본으로 가던 중 일본 규슈 북쪽의 한 섬에서 무령왕을 낳았기 때문에 붙여진 거라고 한다.

무령왕비 묘지 앞면 / 뒷면(매지권)

묘지석 - 왕비묘지(앞면)

 

<무령왕비 지석 앞면>

丙午年十二月 百濟國王大妃壽 / 終 居喪在酉地 己酉年二月癸 / 未朔十二日甲午 改葬 / 還大墓立 / 志如左

병오년 12월 백제국 왕대비가 천명대로 살다가 돌아가셨다. 정서방에서 삼년상을 마치고 기유년 2월 갑오일인 12일에 다시 대묘로 옮겨서 정식 장례를 지내며 기록하기를 이와 같이 한다.

<무령왕비 지석 뒷면>

錢一万文右一件 乙巳年八月十二日 寧東大將軍 / 百濟斯麻王 以前件錢 詢土王 / 土伯土父母上下衆官二千石 / 買申地爲墓 故立券爲明 / 不從律令

돈 1만 매 이상 1건. 을사년 8월 12일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은 상기의 금액으로 토왕, 토백, 토부모, 천상천하의 이천석질의 여러 관리들에게 문의하여 남서방향의 토지를 매입해서 능묘를 만들었기에 문서를 작성하여 명증을 삼으며 모든 율령에 구애받지 않는다.

묘지석 - 매지권(무령왕비 묘지석 뒷면)

무령왕비 지석은 앞면에 왕비의 사망 및 장례를 치른 일자를 요약한 묘지, 뒷면에 토지신에게 묘자리로 정한 땅을 구입했음을 증명하는 매지권이다.

무덤은 중국 양나라 지배층 무덤양식의 영향을 받아 벽돌을 정교하게 쌓아 올려 만들었다. 연꽃무늬 벽돌을 주로 사용하였으며, 뉘어쌓기와 세워 쌓기를 반복하였다.

 

무덤의 입구에서 방까지 길게 길을 만들고 그 끝에 위치한 방에 무령왕과 왕비의 관이 놓였다. 무덤방의 평면은 남북으로 긴 사각형이며 천장은 터널형이다.

 

널길은 무덤방의 남벽 가운데 위치하며, 입구 부분을 제외한 3벽면에는 등잔을 두기 위하여 북벽에 1개, 동·서벽 에 2개씩 모두 5개의 벽감(壁龕. 벽면을 움푹 파서 만든 공간)을 두었다. 그 아래에는 벽돌 9개를 길게 배열하여 가창(假窓)을 만들었다.

2009년 12월 8일에는 무령왕릉에서 1971년에 출토되었던 뼛조각 5개가 무려 38년 만에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서 발견되었다.

발굴현장이 워낙 어수선해서 바닥에 있는 유물들을 자루로 봉투에 쓸어담아 가져가다 보니 정말 뒤늦게 발견된 것이다.

오죽하면 이 뼛조각을 발견한 국립중앙박물관원들이 비난을 받자 '억울하다.'고 하소연을 했을까. 무령왕릉 발굴이 당시에 얼마나 혼란스러웠고 답이 없었는지 다시 한 번 보여준 사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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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1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