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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 탁상 정려각 - 익산시

by 연송 김환수 2023. 6. 15.

익산 탁상(卓祥)·탁율(卓嵂) 정려각

익산 지역에서 탁(卓)씨 성은 다른 지역에 비해 생소함이 덜 하다. 익산은 전국적으로 탁씨 성을 가진 집성촌 가운데 몇 안 되는 지역 중 하나로, 현재 익산시 신동(서영마을)에 자리하고 있으며 17세 탁상(卓祥)과 그의 아들 탁율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충신 조봉대부 호조좌랑 탁공상지려(卓公祥之閭)

익산시 무왕로3길 55(신동 89-1 서영마을)

 

부모의 효자이자 나라의 충신 탁상卓祥·탁율卓嵂 정려각

 

탁상은 조선중기 활동한 의병으로서 자는 지서之瑞, 본관은 광산光山, 익산군 북일면北一面 출신이며, 탁율의 아버지이다. 탁씨 성을 가진 사람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익산시 신동 서영마을에는 탁씨들이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다. 특히 탁상과 탁율은 충과 효의 표상으로서 탁씨 가문에서 자랑스럽게 여기는 인물이다.

탁상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인근 지역의 뜻있는 동지들과 의병을 모집하여 도원수 권율 장군을 도와 왜적에 대항하였다. 정유재란 때에도 참전하였는데, 안타깝게도 전북 부안 호벌치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이에 인조 때 탁상의 충절을 기리며 조봉대부 호조좌랑을 증직하고, 순조 때 충신으로 정려를 명했다.

 

탁상의 아들 탁율은 전쟁에서 죽은 부친의 시신을 수습하려고 역시 적과 싸우다가 순절하여 조정에서 효자 정려를 내렸다. 탁율의 정려기에는 “사람으로서 모든 행실의 근원이 되는 효도를 잘하는 사람이 드물도다. 아비를 지키려는 간절한 정성이 죽음도 꺼리지 않네. 죽음에 들어가면서도 살려내니 그 자랑스러운 아들이여 높고 높도다. 그 행실이여! 예나 지금이나 둘도 없도다.”라고 하며 효행을 높이 기렸다.

 

이렇게 나라에 대한 충으로 시작한 광산 탁씨 가문은 효행으로 아름다운 마무리를 하였다. 이에 탁씨 익산문중에서 이를 기념하여 충효문을 세웠다. 정려각은 보수공사를 진행하였다.

 

『순조실록』 16권에는 “전주의 고故 사인士人 탁상卓祥에게 증직하는 은전恩典을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 탁상은 임진년에 창의(倡義 : 국난을 당했을 때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의병을 일으킴)하여 정유년에 순절한 자이다.”1) 고 했고,『 순조실록』 19권에서는 “전주 고故 사인士人 탁상의 충절에 대해 모두 정문(旌門)을 세워 줄 충절에 대해 모두 정문(旌門)을 세워 줄 것과 증직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2) 는 내용이 전한다.

 

『승정원일기』에서는 “고故 학생 탁상은 호조좌랑을 증직 받았고, 충절이 빼어나 직사職事를 증직 받았으니, 승전(承傳 : 임금의 뜻을 전함)을 받든 것이다.”3) 라고 기록하였다.

 

비문碑文에 따르면, ‘탁상의 충성이 후세에 전해졌는데, 그 후 50여 년이 지난 1640년(인조18)에 이 같은 업적을 알게 된 조정에서도 조봉대부와 호조좌랑이란 벼슬을 내리게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공은 임진년(1592)의 일본 섬 오랑캐의 변란을 당하여 여러 고을에 붙은 군대를 모집한다는 격문을 보고 뜻을 같이하기로 한 92명과 고창, 흥덕, 남당에 함께 모여서 죽고 살기를 같이 하기로 맹세한 이른바 삽혈지맹(歃血之盟: 피를 나누어 마시며 맹세하는 일)을 마친 후 여기저기 전쟁터를 옮겨가면서 전남 순천에까지 이르렀다. 먼 곳에서나 가까운 곳에서 그 열렬한 충성의 메아리 소리는 감격으로 복 바쳐 하늘로 솟아올랐다.

 

도원수 권율공이 장순허를 시켜 이들을 위로하고 먼 곳에 있는 적성강까지 공격하기를 청하였다.

공은 시詩를 지어 간직한 뜻을 맹세하기를 “오랑캐를 베어 물리치니, 만곤에 이름소리 드높네, 흐르는 강물소리 언제나 다함이 없으니, 어느 때에 피 묻은 칼을 씻고 평화의 기쁨을 맛볼 것인가?”

정유년(1597)에 왜구가 미친개가 되어 다시 침범하니 공이 말하기를 “나라 형편이 몇 배나 위급하니 우리들 마음을 같이 하고 죽도록 힘을 다하여 나라 위해 몸을 바치자.”라고 하며 무기를 마련하여 백성된 도리를 타일러 주장하면서 의병을 모집하니 겨레들의 씩씩한 뜻은 더욱 기세 높이 가다듬어졌다. 흥원에서 크게 이기고 장등에 이르렀을 때 일본 중을 잡아서 적의 사정을 자세하게 추궁하여 살피는데, 또 하나 어떤 사람이 원숭이를 끌고 왔다. 공이 말하기를 이자는 필시 왜놈이라하고는 잡아서 닦달하여 몰아세우며 추궁하니 과연 그러하기에 단칼에 목을 베고는 부안 호벌치까지 진군하여 적과 싸우는데 우리보다 월등하게 많은 상대인지라, 중과부적(衆寡不敵: 적은 수로는 많은 적을 대할 수 없음)으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아아! 장하도다! 공의 열렬한 충성심은 햇빛과 더불어 그 찬란함을 다투도다! 빛나는 업적은 『호남지』에 소상히 실려 있으며 또한 『동맹록』에도 자세히 나와 있다. 계유 봄에 장계를 올려 나라로부터 증조봉대부호조좌랑을 받고, 병자 가을에 장계를 올려 나라로부터 정려를 세우는 은전을 받았다.

경신(1920) 2월, 12대손 문장 정석, 12대손 유사 만석, 12대손 유사 운석, 14대 증손 광식, 13대손 홍록, 13대손 한성이 비를 세움. 남대지평 권봉규 씀.

忠孝展 (충효전)

광산 탁씨 익산 충신공파는 상과 율의 묘역을 지난 2001년 대대적으로 중수한데 이어, 올해(2017년)는 위패를 모신 사당 충효전(忠孝展)을 2억8천여만 원을 들여 건립, 숭모사업에 정성을 다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서하징음사기(西河徵音史記)에 후한의 현령으로 백성에게 선정을 베푼 탁무(卓茂)가 광무제(AD 25~56)로부터 포덕후에 제수된 기록이 있어, 광산 탁씨는 이를 선계(先系)로 보고 있다.

 

고려사에는 탁사정(卓思政 AD1010)이 헌종 1년 동북계도순사라는 직책으로 거란의 한기군사 3천명을 괴멸시킨 공으로 어사증승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사의 기록을 볼 때 탁 씨는 1100년이 넘는 유구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전국적으로 하나의 본관을 쓰고 있는 광산(光山) 탁씨는 고려 선종(1084~1094) 시 탁지엽(卓之葉)을 시조로 모시고 있다. 탁지엽(호 學圃 시호 文成)은 학행으로 널리 알려져 종유(宗儒)로 추대되어 한림학사를 거쳐 벼슬이 태사(太師)에 이른다.

 

탁지엽은 문성(文成)이라는 시호를 받고 광산군(光山君)에 봉해지면서 후손들은 그를 시조로 하고 광산(光山)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광산 탁씨 종중은 지금도 지금의 광주광역시(구 광산군)에서 종중 대제를 실시하고 있다.

시조 광산군 이후 그의 아들 도민(道民)은 대제학 부원군, 원광(元光)은 참정 부마, 사정(思正)은 판도판서, 종성(終成)은 대제학, 영(英)은 평장사, 문위(文位)는 대제학의 벼슬에 오른다.

 

이후 고려 말에는 평장사 탁영(卓英)의 손자이며, 대제학(提學)을 지낸 탁문신(卓文信)의 아들이자 경렴정집으로 문명을 떨친 8세 광무(光茂)(1330~1410)가 예의판서에 오른다. 광무의 아들 신(愼)은 세종 재위 시 의정부 참찬에 이르면서 가문의 광휘(光輝)는 절정을 맞아 명문거족의 자리를 굳건히 한다. 신(愼)은 학문적으로 높이 추앙받아 경북 안동 길안면 世德祠에 사향되었으며, 그에 대한 기록은 세종실록에 있다.